소설리스트

에필로그 1. 꽃 피는 5월 (16/17)

에필로그 1. 꽃 피는 5월

- 두 시간 전에 식사하셨고요, 지금은 주무시고 계십니다.

“어디서?”

- 지하에서 잠이 드셨길래 1층 안쪽 침실로 옮겼습니다.

똑 부러지는 주 실장의 대답을 들으며 서수혁이 열린 차창 밖으로 손을 뻗었다. 손가락 사이에 끼워 둔 담배 몸통을 탁 두드리자 담뱃재가 부스스 떨어졌다.

“재활은.”

- 어, 그게…….

좀처럼 막히는 법이 없던 주 실장이 갑자기 방지턱을 만난 것처럼 버벅거린다.

서수혁은 맵싸한 담배 내음을 혀로 훑으며 차분히 기다려 주었다. 그 인내에 보답하듯 주 실장이 얼추 정신을 차린 음성으로 고해 왔다.

- 재활 치료사가 방문하기는 했는데, 희우 님께서 오늘은 하고 싶지 않으시다고 해서요. 지난번 주치의 말로는 원치 않는데 억지로 권하는 것도 부담이 될 수 있다고 하셔서 굳이 강권하지는 않았습니다.

뜸을 들인 만큼 긴 대답이 돌아왔으나 적어도 서수혁이 바라는 방향은 아니었다.

입가로 다시 담배를 가져오다가 멈칫한 그는 필터를 한 번 물었다가 놓았다. 후, 연기를 뿜어 내쉬는 호흡에 의문을 실었다.

“왜?”

- 네?

“왜 하기 싫다니.”

- 아……. 특별히 여쭤 보지는 않았는데요.

“…….”

- 지금이라도 여쭤 볼까요?

서수혁의 침묵에 바짝 긴장한 것처럼 주 실장이 서둘러 의견을 구했다.

“자는 애 깨우겠다고?”

- 아뇨, 그건…….

주 실장이 오늘따라 드물게 말문이 막히는 경우가 잦았다. 서수혁은 싱거운 웃음을 터뜨리고는 “됐어.” 했다.

“한 시간 뒤쯤 퇴근할 거니까 주 실장도 시간 맞춰서 정리하고 들어가.”

- 네, 알겠습니다. 대표님.

서수혁은 통화가 끊긴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어김없이 지하에서 잠이 들었다는 말과 하기 싫어하여 억지로 시키지 않았다는 보고가 교차로 귓전을 맴돌았다.

그는 담배를 입에 물고서 귓바퀴를 더듬거렸다.

‘원래 우울증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대표님. 말로만 들을 때는 칙칙하고 어두운 분위기를 상상하실지 몰라도 딱히 슬퍼하지 않는 우울증도 있어요. 울지도 않고 화를 내지도 않고. 내면이 텅 비고 껍데기만 남은 것처럼 멍한 상태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 입장에서는 그게 더 위험하다고 봅니다. 1미리의 감정을 쥐어짤 힘도 남아 있지 않다는 거거든요. 그야말로 바닥이라는 거죠. 외상이 아닌 내상이라 타인이 보기에는 티가 나지 않아 모를 뿐, 당사자의 속은 새까맣게 문드러져 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마음의 병이 그래서 위험하다는 거예요. 본인밖에 알 수가 없거든요.’

희우가 불나방처럼 죽음만 보면 달려들기를 반복하던 짓을 멈추었을 때 서수혁이 가장 먼저 한 건 정신과 의사를 붙이는 거였다.

일단 급한 불은 껐으니, 이제 그 주변에 잔불로 남아 재차 크게 번질 충동과 번민 요소를 진화 작업할 차례임을 직감한 거다.

이 바닥 사람이 죄 그렇지만, 멘탈 한 가닥 한 가닥이 쇠심줄처럼 질겨서 어지간한 일에도 흔들리는 법이 없는 그는 정신학 분야와는 퍽 연이 없었다.

그리하여 쓸 만한 놈 하나 붙여 주겠노라 제가 가진 인맥을 동원하고 거기에 터무니없는 액수의 촌지까지 얹어서 불러들인 의사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실력이었다.

‘하기 싫다고 하시면 더 권하지 마세요. 그럴 때는 정말 숨을 쉬는 것도 벅차게 느껴져서 그러는 걸 수가 있거든요. 거기서 좋은 마음이랍시고 권유해 봤자 그건 지켜보는 사람이 답답해서 하는 채근에 불과하고요. 환자 본인에게는 마음의 짐이고 불편한 닦달일 뿐입니다.’

의사가 보기에 희우는 우울증과 무기력증이 함께 찾아온 유형 같다고 설명했다. 별장에서 함께 지내는 요즈음의 생활 패턴은 의사의 설명에 아주 적절히 부합했다.

희우는 식사를 하고, 잠을 자고, 세수도 하며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보내는 것 같다가도 한 번씩 모든 걸 다 뒤로 던져 버리고 지하에 처박혀 두문불출하는 경우가 있었다.

함께 지낼 목적으로 그녀가 입원해 있는 동안 손을 본 별장 내부는 싹 리모델링을 마친 후였다. 그중 계단을 밟아 나오는 지하의 화실은 굳이 건드리지 않고 놔두었다.

깔끔히 청소만 해 둔 그곳에서 희우는 흰 면천에 의미 없이 붓질을 하기도 하고, 엄마의 그림을 앞에 둔 채 멀뚱멀뚱 보고만 있기도 하다가 가끔은 그림 여러 장을 주변에 깔아 두고서 그대로 잠이 들기도 했다.

자신이 자리를 비우는 사이에 또 목이라도 매달겠답시고 엄한 짓을 할까 봐 감시 차원에서 주 실장을 붙여 놓기는 했으나 다행히 여태껏 그런 위험천만한 행위가 발각된 적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서수혁도 한발 물러난 위치에서 일단은 두말 않고 지켜보고 있는 거였다.

생각해 보면 희우는 원래도 그렇게 종종 무기력해졌다. 하지만 이는 상기의 시발점부터가 오류였다. 희우의 그런 모습은 모두 납치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보이기 시작한 형용 아닌가.

그러므로 서수혁은 희우의 ‘일상’에서의 모습이 어떤지 알지 못했다. 아무런 걱정도, 고민도, 불안도 없을 때의 그녀를 말이다.

“대표님. 장갑 준비할까요?”

매일같이 하는 보고 전화가 끝난 걸 확인한 앞 좌석의 고혁주가 기다렸다는 듯이 물어 왔다.

본래 이런 자리에 대동하던 도끼가 좌천으로 사라지고, 김상필조차 희우의 곁을 지키게 되며 본의 아니게 승진 아닌 승진을 하게 된 고혁주의 눈이 의욕으로 반짝반짝 빛을 냈다.

“응?”

핸드폰을 재킷 안에 넣으며 서수혁이 고개를 들었다.

“그제 다 뽑지 않았나?”

“옙, 맞습니다.”

“그럼 뭣 하러. 이제 뽑을 이도 없는데.”

달칵. 차 문을 열자 내리는 보슬비가 안쪽까지 튀어 올랐다. 그럼에도 날씨는 확실히 풀어져 온몸에 마찰해 오는 밤공기는 부드러웠다.

“그보다 서원이는 어디쯤이라니.”

“지금 바로 연락해 보겠습니다!”

잽싸게 답한 고혁주가 얼른 튀어나와 우산을 펴 대표의 머리 위를 가려 주었다.

서수혁은 잔잔한 어둠이 선율처럼 깔린 바닥을 밟으며 폐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군데군데의 유리가 깨진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스산하고 살풍경한 기류가 칼바람처럼 들러붙어 왔다.

지금까지 때에 따라 용도를 달리한 공간은 꽤나 지저분했다. 곳곳에 걸린 비닐에는 튀어 마른 핏자국이 여실했으며 때가 타고 녹이 슨 연장들이 구석 곳곳에 쓰다 버린 장난감처럼 버려져 있었다.

서수혁은 그 음침한 흔적들 사이를 가로질러 안쪽으로 진입했다.

가림막처럼 쳐 둔 불투명한 천을 걷어 내자 목욕탕에 어울릴 법한 타일로 사방이 감싸진 작은 골방이 나왔다. 특유의 폐쇄성과 소슬한 느낌은 타일 사이사이에 묻어나는 피의 자취로 말미암아 더욱 짙어졌다.

낄낄대며 골방 안을 지키던 이들이 서수혁을 발견하고서 잽싸게 일어나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개중 의자에 앉아 인질을 감시하던 어깨의 목 뒤를 탁탁 두드리자 어깨가 얼른 비켜나며 그가 앉을 자리를 내주었다.

뚜벅거리는 구둣발 소리를 고스란히 들려주며 서수혁이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끼이익. 강인하고도 육중한 체격을 감당하기 버거운지 의자 다리가 서글프게도 울었다. 그 기척에 맞은편 의자에 앉은 피투성이의 남자가 슬금슬금 고개를 들었다.

또 까불다가 몇 대 얻어맞았는지 안 본 사이에 멍이 좀 늘어났다. 서수혁은 한쪽 다리를 꼬며 물끄러미 시선을 보냈다. 얼굴 중에서도 아랫부분, 입가를 향해.

“혁주야.”

“옙, 대표님.”

“저거, 입에 박힌 천 좀 빼 봐.”

대표를 쫓아 골방 입구를 가리는 천을 걷어 내고 그 자리에 대기하고 있던 고혁주가 착실히 지시를 따랐다.

남자의 입 안에 숨이 막힐 정도로 박혀 있던 천을 줄줄이 끄집어냈다. 본래는 하얀색이었으나 지금 고혁주의 손끝에 딸려 나오는 천은 붉은 염료에 푹 담갔다 빼낸 듯한 적색이었다.

이윽고 천이 다 빠져나오고 맨입이 드러나는 순간 서수혁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약 세 달 전부터 시작해 듬성듬성 간격을 둔 채로 발치를 당하여 끝내 치아가 텅 비어 버리고 잇몸만 남은 이의 입은 말라붙은 피로 썩은 동굴 같았다.

“커헉…….”

의식이 희미한지 작게 씨근덕거리던 이가 잠시 후 서수혁을 발견하고는 제 분에 이기지 못해 달려들듯이 몸을 앞뒤로 마구 흔들었다.

그러나 어깨부터 발목까지 의자에 딱 붙어 있도록 밧줄로 칭칭 감아 놓은 탓에 무용한 짓이었다. 짐작대로 의자만 요란스럽게 흔들거리다가 꼴사나운 모습으로 나자빠졌다.

쿠웅! 의자와 몸이 나란히 바닥에 마찰하는 소리가 각진 내부를 쩌렁하게 울렸다.

고혁주가 얼른 의자를 일으키려고 다가왔다가 고개를 젓는 서수혁의 몸짓에 물러났다. 서수혁이 시큰둥이 턱을 괴며 제 발치를 향해, 정확히는 그렇게 고꾸라져 저를 올려다보는 이를 향해 차게 식은 눈길을 보냈다.

“이렇게 보는 게 더 잘 어울리네, 우리 백 이사는.”

서수혁의 입에서 다 져 버린 영광 같은 직함이 흘러나왔을 때 백주경은 주변에 멍이 들고 터진 눈을 부리부리하게 치켜뜨며 그를 향해 핏발 선 눈길을 쏘아 보냈다.

주차장에서 대면했을 때처럼 욕지거리를 걸쭉하게 쏟아부을 기세로 입을 버끔대기는 하고 있으나, 안타깝게도 치아가 다 빠져 버린 까닭에 으어, 어으으…… 하는 짐승의 가냘픈 울부짖음처럼만 들렸다.

이런 와중에까지 손과 발을 동원하여 발버둥을 치는 그 모습을 보던 서수혁이 눈알을 한 번 빙글 굴리고는 숙이고 있던 상체를 바로 세웠다.

“어째 배움이 없니, 이 양반은…….”

하도 입만 열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별소리를 씨불이는 까닭에 시끄러워서 치아를 다 뽑아 버린 건데, 하는 꼴을 보니 아직도 왜 그런 짓을 당했는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혀를 찬 서수혁이 뒤를 지키는 고혁주를 일별했다.

“다시 막아.”

“옙, 대표님.”

고혁주가 따까리들로부터 진작 받아 둔 마른 천을 간절히 버끔대는 백주경의 입에 다시 꾸깃꾸깃 욱여넣었다.

이제 백주경이 제 울분과 적개를 표출하는 방법은 서수혁을 향해 눈을 부라리는 방식밖에 없었다. 피가 끓고 심장 끝이 썩어 들어가는 분통에 몸이 다 부들부들 떨릴 지경이었다.

“서원이한테 연락 왔니?”

“옙. 지금 거의 도착하셨답니다.”

시킨 일이 잘 끝난 모양이었다. 서수혁은 간만에 기분 좋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외로 꼰 발끝을 느긋하게 까딱거렸다. 그물에 걸려 끌려 나온 물고기처럼 팔딱팔딱 뛰는 백주경을 건조하게 내려다보다가 미온한 어조로 속삭였다.

“그간 널 어떻게 할까, 내가 진짜 머리에 쥐가 나도록 고민을 해 봤어.”

차끈한 인상의 타일과 부딪히는 목소리가 마치 메아리처럼 울려 대어 백주경의 고막을 난타했다.

출혈량이 적지 않은 관계로 머리가 핑글핑글 돌고 있었다. 그럼에도 서수혁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라도 더 읽기 위해서 백주경은 온갖 기를 쓰고 있었다. 그 모습을, 개미의 하찮은 버둥질을 목도하는 양 건조하게 내려다보며 서수혁이 읊조렸다.

“그냥 목을 따 버리자니 한 짓이 괘씸하고, 약에 절여 버리자니 시간 대비 너무 비효율적이고…… 그렇다고 정신 병원에 가둬 버리자니 너만 좋을 일이고.”

무릎 위에 올려 둔 손가락으로 무릎을 톡톡 두드리며 가정을 하나씩 열거하던 서수혁이 다음 순간 미끈히 웃었다.

“그러다가 아주 괜찮은 생각이 났지.”

저 바깥에서부터 걸음 소리가 들렸다.

시종일관 건들거리는 도끼의 것보다 묵직하고, 대표의 앞에서는 빠릿빠릿하나 뒤로 가면 뺀질거리기 바쁜 고혁주의 것보다 진중하며, 매사 너무 둔탁하여 사람을 질려 버리게 만드는 김상필의 그것과도 달랐다.

“엇, 윤 비서님.”

고혁주가 얼른 물러나는 동시에 서수혁이 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보았다.

대표가 시킨 일을 처리하러 잠시 자리를 비운 윤서원이 곱상한 얼굴을 디밀었다.

그는 바닥에 자빠진 형편없는 꼴을 수습하지 못하고 있는 백주경을 쓱 훑었다. 언젠가의 만남에서 저를 개 운운하며 큰소리 떵떵 치던 이와 같은 인간이라고는 생각할 수조차 없이 참혹한 몰골이었다.

“고래 연락됐니?”

서수혁이 그런 윤서원을 향해 물었다.

“예, 지금 인천항 통해서 들어온 거 확인했습니다.”

“업자는?”

“데려왔습니다. 작업 슬슬 시작하면 될 거 같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에 서수혁의 웃음이 짙어졌다.

반면 바닥에 깔리듯이 누운 백주경은 땡땡 부어터진 눈꺼풀을 허망히 깜박거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발악할 의지가 남아 있던 영혼이 한순간 쭉 꺼져 버린 듯한 반응을 보며 서수혁이 비릿하게 웃었다.

“고래가 누구인지는 설명해 줄 필요 없지?”

그가 손을 까딱거리자 고혁주가 다가와 넘어진 의자를 바로 세웠다.

정면으로 돌아온 백주경의 낯은 믿을 수 없는 일을 맞닥뜨린 것처럼 아연실색 그 자체였다. 왜 저런 반응인지는 고래를 직접 이 땅에 불러들인 서수혁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고래, 그는 상하이 쪽 루트를 통해 서대륙까지 드넓게 오가며 장기 매매를 알선하는 브로커였다.

경악으로 벌어진 백주경이 서서히 고개를 저었다. 아주 약하게 내젓는 식으로 표출되기 시작한 질겁은 이내 머리카락이 휘청일 정도로, 끝내 머리통이 떨어져 나갈 정도의 발광으로 변했다. 으으으웁! 으으웁! 뭉툭하게 내지르는 비명은 덤이었다.

“통나무 장사는 내 취향이 아니거든.”

서수혁은 어느새 제 뒤로 다가온 윤서원이 건네는 서류를 받아 눈으로 훑으며 심상히 덧붙였다.

“근데 네가 한 짓으로 따지자면 이 정도는 돼야 급이 맞지 않을까 싶더라고. 너 잡아 둔 애들이 복부 쪽은 피해서 때렸지? 그게 다 쓸데가 있으니까 그런 거야. 너 예뻐서 봐준 게 아니라.”

“으…… 으읍. 으으음……!”

“그렇다고 딱히 예쁜 구석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아기는 완전히 외탁인가 봐. 어째 닮은 구석이 없어.”

“으으음! 으음! 으으음!!!”

천으로 틀어막힌 입으로도 부지런히 난장을 친다. 끝이 보이지 않는 무저갱을 앞에 둔 듯한 이의 절규를, 자장가라도 되는 양 평온하게 귀담던 서수혁이 쥐고 있던 종이를 백주경 쪽으로 쓱 돌렸다.

“참, 그리고 너 진짜 내 장인 됐어.”

“…….”

“아기 이제 내 와이프거든.”

이거, 혼인 신고서. 작게 속삭인 그가 손에 든 종이를 팔랑팔랑 흔들었다.

“그러니까 너무 억울하게 생각하진 마. 네 오장육부 판 돈으로 내가 네 딸 뒷바라지 잘해 줄게.”

응당 당연한 일처럼 예사로이 뇌까린 서수혁은 그것을 곱게 접어 윤서원에게 넘긴 뒤 의자에서 일어났다.

“살면서 해 준 것 하나 없으니 가는 길에 이 정도는 해 줘. 아기가 그 정도는 바라도 될 거 같거든.”

나직한 저음으로 독선적인 사형 선고를 마친 서수혁이 매정히 등을 돌렸다.

“작업 시작해.”

그가 손을 흔들자 골방 바깥에서 대기하던 업자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주사기나 메스 등 일반 병원 수술실에서 볼 법한 기구부터 시작해서 눈이 다 의심되는 망치와 톱까지, 연장은 실로 다양했다. 잠시 후 아까보다 더 원통한 비명과 함께 가른 살집에서 튀어 오른 핏물이 타일 벽에 후드득 묻어났다.

붉은 장미가 화려하게 피어난 듯한 그림이었다.

“재산 건도 잘 마무리됐습니다.”

뒤에 서서 우산을 받쳐 주던 윤서원이 차로 다가가는 서수혁에게 미처 다 하지 못한 보고를 올렸다.

서수혁이 윤서원까지 파견하며 희우와 법적 부부를 맺는 사안을 급하게 처리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는 부디 백주경이 죽기 직전에 알려 그를 보다 더 아뜩한 절망과 비참에 빠지게 만들기 위함이었고, 둘째로는 이 재산 분할 때문이었다.

희우가 서수혁의 아내로 신고됨과 동시에 그의 개인 재산 일부가 그녀의 소유로 옮겨졌다.

지주사 일강의 주주 지분 2%와 서울 도심에 자리한 고층 빌딩 두 채, 공식적으로 등록된 것과 아직 미등록된 채 오픈 준비 중인 갤러리 세 관, 외제 차 다섯 대, 그 밖에 타국 경매를 통하여 들여온 갖가지 예술품 등이 해당되었다.

이는 금액으로 환산하면 자그마치 기백억, 여기서 투자 전문가나 감정 평가사가 따로 붙어 코칭을 해 주면 최대 몇 배까지도 불릴 수 있는 가치였다.

정작 희우는 지금 제 이름과 신분 앞으로 그렇게나 막대한 보화가 쌓여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그녀가 한 일이라고는 잠이 들어 있는 사이 손가락에 인주가 발라져 순순히 인감을 내어 준 것뿐이었다.

물론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해도, 혹은 앞으로 살아가는 나날 중 알게 된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으리라.

서수혁이 이런 식의 재산 분할을 지시한 이유는 하나였다. 추적의 용이를 위해서였다.

이마만큼의 재산 이동에는 기록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기록이 있으면 추적이 쉬워진다. 더하여 재산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추적의 속도 역시 빨라지는 건 당연지사.

그러니 이 모든 건 희우가 또다시 감쪽같이 사라졌을 시를 위한 꽤나 거만하면서도 무모한 대비책에 해당했다.

“수고했다.”

“아닙니다.”

서수혁이 올라탄 뒷좌석 문을 닫아 준 윤서원이 운전석으로 이동했다. 고혁주가 위치를 살짝 바꾼 룸미러를 제 눈높이에 맞게 조정한 윤서원이 거울 너머의 서수혁을 응시하며 말했다.

“별장으로 출발하겠습니다.”

* * *

이파리가 무수히 깔린 바닥이 까슬거렸다.

간질거리다 못해 피부가 긁히는 것만 같은 따가움에 희우는 당장이라도 벌떡 일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손과 발을 움직여도 몸이 꼼짝하지 않았다.

무언가가 목부터 발끝까지를 칭칭 감싸고 있었다. 밧줄 같으나 끈적하고, 돌덩이 같으나 유연했다. 그것은 조금씩 몸을 감아 들며 희우의 숨통을 조이려 들었다. 희우는 어느새 호흡도 버거워져 숨을 뚝뚝 나누어 쉬며 실눈을 떴다.

쉬이익. 쉬이익. 눈앞에서 뭔가가 흔들렸다.

길쭉하고 끝이 갈라진 무언가…….

서서히 초점이 잡히며 제대로 마주한 그것은 뱀의 혀였다.

희우는 기겁하는 숨소리를 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시야를 닫았음에도 끈적하고 질척한 뭔가가 얼굴을 마구잡이로 핥는 게 느껴졌다. 그 끝에서 찝찔한 액체가 흘렀다. 침이라기에는 양이 너무 많았다.

희우는 용기를 내어 더듬더듬 눈꺼풀을 떴다.

헉.

목이 졸리는 소리가 짧고 굵게 터져 나왔다.

뱀의 혀를 가진 이의 머리통을 확인하는 순간, 심장이 저 바닥 끝까지 추락했다.

오빠였다. 오빠의 얼굴이었다.

부릅뜨인 두 눈에서 피가 철철 흘러내리고 한쪽 뺨은 살갗이 파여 안쪽으로 징그럽게 뼈가 보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혈관을 타고 피가 돌지 않는 시체처럼 피부는 시퍼렇게 질린 상태였다.

희우는 어느새 꺽꺽대는 중이었다. 오빠의 머리통을 한 뱀의 혀는 여전히 침이라고 볼 수 없는 많은 양의 물을 흘려 대며 희우의 얼굴 전체를 핥고 있었다. 침수라고 볼 만큼 푹 젖은 얼굴 위를 배회하던 혓바닥은 이내 내장까지 딸려 나올 정도로 길어져서는 서서히, 서서히 희우의 목을 감쌌다.

반대로 몸을 휘감고 있던 힘은 약해진다. 목에 밧줄처럼 매어진 혓바닥이 하늘로 상승했다. 끝을 모르고 상승하니 희우의 몸 역시도 공중으로 딸려 갔다.

그러던 차, 무언가 발목을 콱 잡는다. 까슬까슬한 이파리를 헤집고 나온 나무줄기였다.

위아래가 반대 방향으로 잡혀 몸 가운데가 찢길 것만 같았다. 동그랗게 만든 밧줄 고리에 목이 매달린 기분이었다.

“……흐!”

악몽에서 깨어난 건 순식간이었다.

희우는 가슴팍을 움켜쥔 채 한참을 숨만 헐떡거렸다.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악몽이 유발한 아비규환이 시끄러운 여운처럼 남아 속을 들썽들썽 뒤집어 댔다.

“후으…….”

단지 잠이 들었다가 깨어났을 뿐인데 막노동을 한 것처럼 전신이 지끈거렸다.

희미하게 앓는 소리를 낸 희우는 가까스로 몸을 움직였다. 혹시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상체가 의도대로 돌아갔다.

땀이 선명하게 맺힌 얼굴을 이불에 묻고서 비비 문지르다가 손만 쭉 뻗었다.

사납게 솟아올라 고막을 갉아 먹기 시작한 이명에 전자 제습기를 열고 안에 담긴 보청기를 가져와 귀에 더듬더듬 끼웠다.

한 가지의 일을 힘겹게 마치고, 길게 호흡했다. 날숨 한 번 들숨 한 번 공평하게 행한 뒤 또다시 손을 뻗었다. 퇴원 후에도 지속되는 악몽에 늘 탁자 위에 마련되어 있는 물병을 잡기 위해서였다.

거머쥐는 무게가 생각보다 가벼울 때부터 불안했는데, 짐작대로 물병에는 물이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거라도 마셔 보았으나 갈증을 해결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모자랐다.

겨우 두세 번 꿀렁이고 멎은 목 안쪽이 건조하게 말라붙었다. 희우는 색채감 옅은 눈으로 텅 빈 물병 바닥을 바라보았다.

물이야 다시 채우면 되는 일인데 왜 이 상황이 못 견디게 서럽고 암담하게 와닿는지 알 수가 없었다.

기분의 저조는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나, 물병을 쥐고, 방 밖으로 나가, 부엌에 도달하여, 냉장고 문을 열고…… 그런 과정 하나하나를 헤아릴수록 심해져만 갔다.

어느 순간부터 한 번씩, 일상에서 벌어지는 아무렇지 않은 일에도 숨이 턱 막히며 심장이 뒤틀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별것도 아닌 일인데 절대 넘을 수 없는 산을 만난 것처럼 숨부터 벅차고 절망이 단숨에 정수리까지 차올랐다.

이것도 못 할 거면 왜 살지.

그냥 죽어 버리는 게 낫지 않나?

물 하나 마시는 것조차 어려워하는 스스로의 상태를 헤아리다 보면 생각은 끝내 그런 극단적인 방향으로 치우쳤다.

하지만…….

‘너 살리겠다고 황천길 건넌 걸 알면 너라도 똑바로 살아야 할 거 아니야.’

‘그게 희본이를 위한 길이라는 걸 정말 몰라?’

번번이 발목을 잡는 올무 같은 말이 있었다.

악몽은 때로 현실에 빗대어 일어난다. 오빠의 형상을 띤 뱀의 혀에 목이 매달려 질질 끌려가는 와중에도, 완전히 허공으로 뜨지 않도록 발을 감싸던 줄기가 떠올랐다.

서수혁이 피가 철철 흐르는 제 목을 부여잡으며 부정의 여지를 가질 수도 없게끔 단호히 쏟아 낸 직언이 그처럼 두껍고 튼실한 나무줄기가 되어 주었다.

그 말을 곱씹다 보니 숨도 못 쉬게 버겁던 일의 무게감이 차차로 덜어졌다.

희우는 일단 침대에서 일어나 보았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쉽고 홀가분했다. 이렇게 또 하루, 그늘처럼 드리운 한 꺼풀의 무기력을 탈피했다.

물병을 쥔 희우가 문가로 다가갔다.

본래 엄마, 오빠와 함께 살 적에는 침실이 별장 2층에 있었다. 그러나 서수혁이 이곳에 거주할 목적으로 리모델링 겸 대대적인 공사를 지시할 때 침실 위치를 1층으로 옮겼다.

희우의 발목 때문이었다.

평지를 걸을 때에도 절뚝거릴 만큼 위태로운 걸음은 당연히 계단 위에서는 더 위험했다. 자칫 헛디뎌 고꾸라지는 사고를 방지하기 위하여 내린 결정이었다.

슬쩍 돌아본 창밖은 어느새 비가 그쳐 있었다.

부엌 쪽으로 가려던 희우는 거실 소파를 장악하듯이 차지한 태산 같은 뒤태를 발견했다. 그 즉시 멈추어 서서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가만히 있기만 했는데, 남자는 뒤통수에 눈이 달린 것처럼 유유히 고개를 틀었다.

희우를 발견한 서수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조금 늦은 타이밍에 발견한 손안의 술잔이 느긋하게 회전했다. 얼음을 품은 호박빛 액체가 흔들거렸다.

그는 희우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더 이상 감금을 당하는 입장도 아니고, 이제는 엄연한 동거인으로 두 달이 넘도록 부대끼며 사는데도 여전히 남자는 아주 먼 존재처럼 느껴졌다.

특히나 이렇게 한 번씩, 저를 뚫을 듯한 직선적인 눈길을 던질 때.

다시 서류가 있는 테이블로 돌아갈 것처럼 무감하던 눈이었는데, 서수혁은 예상 밖의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희우는 물병을 쥔 채 그가 있는 방향으로 절름절름 걸어 나갔다. 전다리에 눈길을 꽂고 있던 서수혁은 희우가 제게로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마침내 손을 뻗으면 닿을 위치까지 가까워졌을 때 그 꼴을 보고 있기가 싫은 것처럼 그녀를 당겨 다리 위에 앉혔다.

술잔을 든 손으로 희우의 허리 뒤편을 받친 그가 곧바로 희우의 턱과 목덜미 사이에 고개를 박았다.

깊이 들이마시는 숨에 옅은 체향이 묻어났다. 자다 깨서 그런지 평소보다 조금 더 진하다. 그는 꼭 술에 걸맞은 적절한 안주를 찾은 양 그 위에 한바탕 입술을 부대꼈다. 간혹 입술을 오므려 쪽, 소리가 나게 살결을 흡입하기도 했다.

어느 순간부터 마주치면 이렇게 찰싹 달라붙어 어딘가를 빠는 게 당연해졌다. 서수혁은 희우가 보이면 더 이상 거리를 벌리고 앉지 않았다. 늘 제 몸 어딘가에 앉혀 두거나 얹어 둔 채로 시간을 보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토록 간질간질거리는 접촉에는 익숙해지지가 않아 희우가 움찔거리자 서수혁은 자국이 연하게 남은 부위를 핥아 올리고는 고개를 바로 했다.

등받이에 상체를 기댄 서수혁이 술잔을 옮겨 쥐어 한 모금 삼키고는 희우를 가만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직전까지 물리고 빨린 목덜미를 긁적이던 희우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물었다.

“재활 왜 안 했니.”

희우의 하얀 손가락이 오므라들었다. 직후 눈치를 살핀다. 함께 산 시간이 무색해지게 바로 거리감이 느껴졌다. 그녀는 여전히 그를 무서워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냥…….”

코앞에서 꽂히는 눈길의 채근을 도외시할 수가 없었는지 희우가 주절거리듯이 답했다.

“그냥?”

단지 제 말의 반복인데 심한 꾸지람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희우가 눈을 피했다. 서수혁이 그런 희우의 턱을 붙잡아 시선을 억지로 고정시키며 차게 응고시킨 목소리를 냈다.

“혼내려는 거 아니니까 제대로 말해.”

“진짜, 진짜 그냥인데…… 그냥 하기 싫어서.”

“왜?”

희우가 입을 조개처럼 딱 다물었다.

입술이 힘주어 닫히자 볼살이 살짝 뭉그러진다. 서수혁이 그 위로 손가락을 올려 꾹 눌렀다.

정말 혼낼 생각은 없었는지 바라는 답이 들려오지 않아도 그는 이 이상 채근하지 않으며 희우의 볼살만 가지고 놀았다. 꼬집어 당기기도 하고 꾹 누르기도 했으나 딱히 힘이 실리지 않아서 아프진 않았다.

이곳에서 같이 살게 된 후로, 그는 유독 희우의 얼굴을 자주 만지작거렸다.

가끔은 단정한 눈썹과 눈동자 사이, 깊이 들어간 아이홀이 되기도 했고 가끔은 두드러지지 않게 튀어나온 관골이 되기도 했다.

그래도 가장 빈번한 건 역시 눈벌처럼 하얀 뺨이었다.

말랑말랑한 살집을 무슨 장난감 가지고 놀듯 하도 지분거리는 탓에 그의 손이 떨어져 나갈 즈음에는 약하게 홍조가 들어 있을 정도였다.

그래도 이런 식의 스킨십 덕분에 희우는 더 이상 그의 손이 얼굴께로 올라와도 크게 놀라지 않았다. 물론 여전히 확 치켜들면 어깨가 다 말릴 정도로 반응이 있기는 했으나 전에 비하면 예민도가 양반이 된 수준임을 부정하진 못했다.

얌전히 얼굴을 내어 주던 희우가 쓱 고개를 돌리다가 그의 반대편 손안에 들린 술잔을 발견했다. 그제야 목이 타서 침실 밖으로 나왔음을 상기했다. 남자가 끼치는 긴장감 때문일까, 가끔 그의 앞에서는 강렬하게 들었던 욕구마저 사라질 때가 있었다. 그렇게 내리눌렀던 갈증이 술잔을 보자 살아났다.

“마셔 볼래?”

그런 희우의 눈빛을 무슨 의미로 이해한 건지 서수혁이 얼음이 쩔그럭거리는 소리가 나게끔 잔을 흔들며 물었다.

대학교를 다니며 소주나 맥주는 마셔 본 적이 있지만 취향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마시고 있던 부드럽고 농농한 빛깔의 액체는 꿀 같은 음료수처럼 달콤하게만 보였다.

딱히 마시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나 불현듯 치민 충동과 목구멍 안쪽을 간지럽게 만드는 당장의 갈증에 고개를 끄덕였다.

서수혁이 희우의 손안에 들린 물병을 채 가고는 대신에 술잔을 쥐여 주었다. 희우는 그것을 순순히 입에 가져다 댔다. 원한 대로 한 모금 크게 삼키자마자 그 어떤 저항감 없이 콜록, 하고 기침이 터졌다.

당혹스레 눈을 뜬 희우는 고개를 돌리고 계속 콜록, 콜록 기침했다.

“으…….”

고작 한입인데 점막이 후끈해지고 목 안쪽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불쏘시개 하나가 기도를 타고 넘어간 느낌이었다. 가끔 드라마에서 본 사약의 맛이 어떨까 궁금했었는데 이런 맛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끔찍했다. 이런 걸 가벼운 음료수처럼 즐겨 마시는 이 남자는 대체 뭘까 하는 근본적인 의문까지 치밀었다.

혀가 다 얼얼한 느낌에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사이에 코앞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연이은 기침으로 벌게진 얼굴을 들자 서수혁은 무척 재밌는 일을 보는 듯 눈과 입을 동시에 휘어 웃고 있었다. 언제나 비소의 느낌으로 웃는 것만 보아 온 그에게서는 목도하기 힘든, 제법 산뜻하고 투명한 느낌의 웃음에 희우는 저도 모르게 넋을 놓았다.

서수혁의 손이 다가와 그런 희우의 입술에 남은 술을 쓱 닦아 냈다. 그 손가락을 혀로 할짝이며 “맛없어?” 하고 묻는다.

“써, 써요. 너무.”

“아기 입맛엔 뭔들 안 쓰겠니.”

“진짜 쓴데…… 무슨 약 같아요.”

생긴 건 부드러운데 맛은 그야말로 독약이었다. 고작 한 입인데도 파괴력이 상당했다. 오히려 이걸 마시니 더 갈증이 났다. 희우는 쥐고 있던 크리스털 잔을 아무 데나 내려놓고 제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그 몸짓의 의미를 금세 알아챈 서수혁이 술병 옆에 놓인 얼음통으로 손을 뻗었다. 가정용 아이스 버킷에 들어갔다가 나온 손이 동그란 얼음 하나를 쥐어 희우의 입으로 다가왔다.

이제 그가 입에 뭘 넣어 주는 게 습관처럼 배서 희우는 입술을 벌렸다. 시원한 얼음이 입 안으로 굴러들어 와 진정 작용을 시켜 주었다. 얼음을 혀로 굴려 먹으며 서서히 녹아내리는 물을 목 뒤로 삼켰다.

희우가 양 뺨이 볼록해지도록 얼음을 이리저리 굴리는 걸 지켜보던 서수혁이 얼음을 하나 더 쥐어 제 입에 쏙 넣었다. 그리고 곧장 희우의 턱을 붙잡고 입을 맞췄다. 포개어진 입술 사이로 뒹군 얼음이 쩡, 부딪혔다.

“으웁.”

서수혁이 제 입에서 굴리던 얼음 조각을 희우 입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희우의 입에서 조금씩 축나던 얼음을 사탕 뺏어 먹듯 가로채 왔다. 희우는 반사적으로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가 그런 희우의 등을 손바닥으로 받쳐 제 쪽으로 당기며 키스를 깊게 발전시켰다. 서로 부딪히고 긁히고 충돌하며 얼음들이 서서히 갈려 나갔다.

뜨거운 점막의 온도에 녹기 시작한 얼음들이 질척한 물을 뱉어 냈다. 거기에 미처 삼키지 못한 타액까지 겹쳐져 두 사람의 입술이 축축하게 젖다 못해 사이로 물줄기가 야릇하게 새어 나왔다.

“응…….”

희우가 벅찬 숨을 충당하기 위해 쌕쌕대며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눈을 살짝 내리깐 서수혁은 그런 희우의 입술을 더 포개어 물며 혀를 한바탕 뒹굴렸다.

얼음이 사이에 끼어져 함께 비벼지다 보니 그의 혓바닥 온도가 덩달아 서늘해졌다. 그것으로 볼 안쪽 연한 살을 문지르고 천장을 톡톡 건드리니 입 안 전체로 오싹함이 전율처럼 번졌다. 서서히 마모되고 또 마모되던 얼음은 어느새 종적을 감추었다.

부딪히던 것들이 사라져도 똬리를 틀듯이 뒤얽힌 혓바닥은 여전히 질척한 마찰질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이 한기가 사라지기만을 바라 온 것처럼 더 열성적으로 뒤섞이며 침을 나누어 먹었다.

서수혁이 흡, 하고 숨을 삼키는 희우의 혀 밑을 긁어 주며 손을 뻗어 얼음 하나를 더 주워 들었다. 그것을 살짝 벌어진 잇새로 쏙 밀고서 또 완전히 닳아 녹을 정도로 궁굴리고 핥아 먹는다.

희우는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어렵지 않게 따라왔다. 그녀로서는 키스에 응한다기보다는 얼음이 녹으며 배어 나오는 물을 받아 마시기 위해 급급했다는 게 적합했으나 서수혁에게 그 사실은 크게 상관이 없었다.

그는 희우의 혀를 이리저리 가지고 놀며 입고 있던 셔츠 단추를 하나둘씩 풀어 헤쳤다. 이내 앞섶이 벌어진 그것을 어깻짓으로 먼저 흘러내리게 한 다음 상당히 갈급한 몸짓으로 벗어 던졌다.

단전 깊은 곳에서부터 열이 들솟는다 싶었는데 슬금 내려다본 국부는 이미 장엄하게 텐트를 친 후였다. 이제 희우의 혀만 빨아도 좆이 고개를 치켜드는 수준이 된 지 오래라 재미없는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그 대신 조급함이 앞서 들었다.

“읏, 응.”

아랫도리가 발끈거리며 달아오른 저와 달리 희우는 오로지 혀에 난탕질을 당하는 입 안의 감각에만 집중하며 끙끙대고 있었다.

서수혁의 큰 손이 헝클어진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주고는 이내 머리채를 잡듯이 쥐어 올려 한층 더 숨 가삐 혀를 빨았다.

아예 제 입에 물고 전체적으로 주물러 주듯이 자극을 주자 솜털이 보송보송 돋아난 뺨이 놀라 굳는다. 그사이 머리채를 다소 사납게 그러쥐고 있던 서수혁의 손은 실타래처럼 엉키는 그것들을 곤히 놓아준 뒤 등줄기를 타고 내려가 엉덩이에 안착했다.

살집을 성의 없이 몇 번 주무른 뒤 아예 옷 안으로 기어들어 가 보조개가 이는 부분을 손톱으로 찌르자 희우가 저도 모르게 입 안을 오므리며 마침 그 안에 들어가 있던 혀를 꾸욱 조였다.

서수혁이 곤란한 것처럼 인상을 찡그린 것은 거의 동시였다. 끼치는 자극의 농도가 단숨에 수직 상승하는 까닭에 더는 버티기가 어려워졌다.

“흣, 으……!”

한참이나 포개어지고 문대지던 입술을 뗀 그가 희우의 허리를 잡고 그대로 소파 위로 눕혔다. 처음부터 목적은 분명하다는 듯 엎드린 식이었다. 그가 놀라 버둥이는 희우의 등을 꾹 누르며 나머지 손으로 바지춤을 잡아 아래로 쭉 내렸다.

고무줄로 이루어진 데다가 입원 이후 여전히 살이 많이 붙지 않아서 바지는 뭔가에 걸리는 일도 없이 그대로 쭉 벗겨졌다. 팬티까지 한꺼번에 내려온 그것을 제 셔츠 던지듯이 집어 던진 서수혁은 바로 자세를 낮춰 희우의 엉덩이에 얼굴을 박았다.

민망한 부위로 돌진하듯이 부딪쳐 온 저돌적인 기세에 놀랐는지 희우가 몸을 퍼드득 떨며 가죽 소파 시트를 붙잡았다.

서수혁은 제 손바닥 안에 포근히 틀어 잡힌 엉덩이를 쥐고 느긋하게 주무르다가 일찌감치 비비 문지르던 입술 사이로 혀를 내밀어 궁굴리듯이 핥아 주었다.

“아…….”

위에서 난처함과 성감이 약하게 긁힌 듯한 신음이 뭉쳐 흘렀다. 그는 붉은 혀를 내어 힘이 들어갈 때마다 보조개를 피우는 부분을 문질러 파듯이 긁어 올렸다.

“읏……!”

일찌감치 성감대로 변한 부분을 집요히 핥아 주자 시트에 이마를 묻고 있던 희우가 허리를 떨며 옅게 신음했다.

서수혁은 어디로 도망가고 싶은 것처럼 흔들리는 몸을 꽉 잡아 고정하고는 혓바닥을 뽀얀 살집 위로 종횡무진 움직였다. 어느 순간부터 보조개가 슬금슬금 선명한 길을 내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남자의 혀는 기다리던 바라는 듯 주저 없이 그 흔적 안쪽으로 타액을 발라 댔다.

“흐…… 아아.”

소파 위에 엎드린 채로 있던 희우의 몸이 점점 안쪽으로 말렸다. 엉덩이 보조개의 모양 그대로 울혈 자국이 남을 만큼 혀로 핥아 대고 이로 깨물어 대던 서수혁은 고개를 들다가 구멍 입구가 살짝 습하게 젖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이제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그에 고개를 들이박고는 혀를 굴려 입구의 주름살을 핥아 주었다.

“읏! 응…… 핫…….”

희우가 발가락을 안쪽으로 곱으며 도리질을 했다. 배 속이 비틀리고 내장 사이사이로 발열이 스미는 감각이 여전히도 낯선지 그녀는 자꾸만 몸을 둥글게 모았다.

힘줄 선 좆을 실컷 꽂을 생각으로 혀가 뻐근히 저릴 만큼 살살 훑고 풀어 주려고 해도, 자꾸만 회피를 꾀하는 몸짓 때문에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자세로 눕혀 놓았다면 가랑이를 잡아 벌리고 좋을 대로 빨아 먹고 깨물어 댈 수 있었겠지만 엎드린 자세라서 약간 무리가 있었다.

희우의 몸을 돌릴 수도 있는 일이지만 서수혁은 굳이 그러지 않았다. 대신에 자신이 몸을 빙글 돌렸다. 희우의 가랑이를 뒤에서 앞의 방향으로 처박던 고개가 이제는 밑으로 하강했다.

서수혁의 양손이 둥그렇게 올라붙은 볼기짝을 쥐어 그 아래 놓인 제 얼굴, 특히 하관에 아예 접붙어 뭉그러지도록 내리눌렀다.

“헉……!”

희우가 방심하는 사이에 이미 질구가 그의 입에 교합하듯이 딱 달라붙었다. 놀라 아랫배에 힘을 주고 얼른 하반신을 떼어 내려고 했으나 그 전에 이미 마중을 나온 그의 혓바닥이 날개살을 가르고는 부드럽게 풀어진 입구 속살을 더듬거리며 간지럼을 태웠다.

“아, 아…… 흣……!”

희우의 허리가 내떨렸으나 적어도 그건 그녀가 원하던 반응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부산스레 엉덩이를 달망이면 당연히 그 아래에 놓인 서수혁의 입에 보지가 알아서 빨아 잡수라는 듯이 문질러지기 때문이었다.

서수혁은 바라온 그림이었던 것처럼 아무런 거부감 없이 입술을 벌려 음순살을 차지게 빨았다.

양쪽으로 젖혀진 보드라운 살을 번갈아 가며 힘이 풀릴 만큼 희롱해 준 다음 진작부터 혼탁한 액을 뱉고 있는 구멍에 키스하듯이 입술을 맞추며 저 안에 고인 물까지 빨아 먹을 기세로 흡음했다.

“으응, 저, 아, 저기……!”

허리를 허공에 어중간하게 띄운 희우는 외설스러워도 너무 외설스러운 자세에 어쩔 줄 몰라 하다가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손바닥으로 소파를 짚어 더듬더듬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나 이마저도 악수였다.

오히려 상반신이 곧게 서자, 서수혁은 아예 희우의 볼기를 틀어쥐고서 유려하게 굴곡진 얼굴 위에 여성기가 는실난실 비벼지듯이 눌러 압박했기 때문이었다.

“하……! 아, 아……!”

어쩌다 보니 페이스시팅과 다를 바가 없는 자세였다. 희우는 수직으로 세운 상체를 휘청이다가 반사적으로 소파 등받이를 붙잡았다. 서수혁은 본격적으로 아가리를 벌리고 축축지근한 분사를 시작한 보지를 전심으로 맞이하듯 혀를 깊숙이 꽂아 넣어 주었다.

사내의 심지만큼이나 단단한 면이 있는 혓바닥이 제 몸 묻을 길을 알아서 찾듯이 진입하여 내벽 여기저기에 달큰한 압각을 전달했다.

졸지에 사내의 잘생긴 면상을 가랑이 사이에 두고 앉은 희우가 기겁하는 숨소리를 내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벗어날 수 없었다. 오히려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몸부림의 반향처럼 서수혁의 혓몸은 더 정도를 모르고 파고들어 와 내부 살 점막을 짓궂게 파헤쳐 댔다. 강직도가 선명한 성기와 달리 유연하고 부드러운 움직임은 희우의 점막에 딱 녹아들 것처럼 휘저어졌다.

그 증거로 이미 숨 가쁘게 타액을 발라 댄 질구 겉면은 말랑말랑하게 풀어지고 안쪽은 혀를 살짝만 돌려도 찌걱이는 소리가 울릴 만큼 푹 젖어 들었다. 얼마 안 가서는 까끌한 혓바닥 돌기로 양껏 들문지를 때마다 푹쩍이는 소리가 날 정도였다.

그는 그 소리를 감미로운 클래식처럼 귀담으며 진작에 흉흉한 모양새로 솟구쳐 오른 바지춤을 풀어 헤쳤다. 브리프를 잡아 내리자 수풀 사이로 용맹히 모습을 드러낸 자지를 위아래로 쑥쑥 쳐 대며 보지를 기갈 난 개처럼 빨아 먹었다.

그렇게 손바닥 힘줄이 불거질 만큼 격한 용두질에 임하며 혀끝이 닿을 수 있는 구간까지 질 안 고루고루 침칠을 마친 서수혁이 희우의 팔을 잡아 다시 엎드리게끔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질척하게 농익은 구멍 겉주름과 좌우로 느직이 벌어진 소음순을 길게 핥아 준 그가 희우의 아래에서 빠져나와 개처럼 흘레붙는 후배위 자세를 취했다.

벌써부터 쿠퍼액을 군침 흘리듯이 몽글몽글 쏟아 내는 귀두가 음순의 말랑한 사잇길에 애교를 부리듯이 머리를 마구 치댔다. 서수혁의 오럴로 진작에 이완된 구멍이 움쭉 풀어지며 거근을 꿀떡꿀떡 받아들였다.

“아아으……! 흑…….”

뒤에서 치고 들어오는 삽입의 중압감을 이겨 내지 못하고 희우가 엉덩이에 잔뜩 힘을 주었다.

그래 봐야 쓱 맺히는 엉덩이 보조개만 진해져 하나의 시각적 자극으로 돌아올 뿐이지만. 그에 힘입어 박혀 드는 서수혁의 샅기둥은 몸통째로 요동을 쳤다.

그는 질척하게 흘려 대는 선액이 질 점막 곳곳에 차지게 묻을 수 있도록 허리를 나른히 돌리며 만족을 모르고 계속해서 짓쑤셔 박았다.

“응, 아……! 흣, 읏, 으…….”

한 뼘 한 뼘 그렇게 밀어 넣다가 반쯤 먹어 치웠다 싶었을 때는 희우의 어깨 주변을 팔로 짚고서 단숨에 아래를 꿰뚫었다. 아흑! 날 선 교성이 허공중에 아찔하게 퍼졌다.

서수혁이 부들부들 떠는 희우의 어깨와 날갯죽지 사이에 고개를 박고서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기둥에 촘촘히 달라붙어 사내의 양기 자체를 게걸스레 들이켤 것처럼 쪽쪽 빠는 힘이 장난이 아니었다. 혀를 받아들일 때만 해도 좋다고 발씬거리던 구멍은 팔뚝만 한 굵기로 부푼 거근 앞에서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백기를 들었다.

그런데 그 통로 전체의 움직임이 지나치게 쫄깃하여 벌써 허리 뒤쪽이 빠근하게 조이며 아랫도리로 넘칠 듯한 발열감이 확 몰렸다. 이럴 때마다 서수혁은 보빨의 중요성을 새삼스럽게 실감했다.

“하아…….”

“으응, 흑…… 아, 아…… 아!”

희우의 얇은 머리칼을 입에 물고 질겅질겅 씹어 대던 그가 불시에 허리를 퍽 쳐올렸다. 손가락 한 마디만 남겨 두고 모조리 질 내부에 몸을 담그고 있던 페니스가 저 안쪽까지 또렷한 요철을 남길 듯 진입하며 속살을 확장했다.

아예 끊어 먹을 듯이 가지고 놀던 희우의 모발을 놓고 상체를 바로 세운 서수혁이 한쪽 다리를 소파 밑으로 내리며 제대로 자세를 취했다. 그 상태에서 희우의 엉덩이를 쥐고서 무지막지한 식으로 처박아 댔다.

“아! 아, 아, 읏, 응……! 앙, 아, 하아!”

희우의 몸이 앞뒤로 흔들리는 게 심해졌다. 만판 벌어진 구멍이 쭈우욱 밀려 들어오는 살기둥에 강제적으로 열리며 팽팽해진 상태에서 사이로 물기를 왈칵 흘려보냈다. 서수혁은 엉덩이를 좌우로 잡아 벌려 연결된 부분에 지긋한 눈길을 꽂으며 박자감 있게 허리를 털었다.

“읏, 흐, 아, 아읏, 읍…… 으응……!”

뒷치기의 자세로 있다 보니 큰 공을 들이지 않아도 좆이 알아서 저 안쪽 길목까지 쾅 처박혀 들었다.

이미 구멍 겉면을 핥아 줄 때부터 슬그머니 이완되기 시작한 안쪽은 미끈하게 벌어진 채로 더 쉽게 이 내부까지 마찰하여 찧을 수 있도록 축축한 애액을 마음껏 흘려보냈다.

서수혁은 뒤에서 앞으로 쉼 없는 부딪쳐 오는 역동적인 말뚝질을 행하며 애매하게 흘러내린 바지를 완전히 벗어 던졌다. 그리고 희우 역시도 엎드린 자세인지라 말려 내려간 상의를 끄집어 당겨 머리로 통과해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완전히 나체가 된 두 알몸은 조금 더 격정적으로 얽히기 시작했다. 서수혁이 교합한 하반신을 한 몸처럼 완전히 찰싹 붙인 채로 허리를 원 그리듯이 놀렸다.

내부에 박힌 미끈하고 실한 살덩이가 돌아가며 피부에 하나의 방어막처럼 튀어나온 핏대가 내부 벽을 느긋하게 갉작거렸다. 뜸을 들이듯 여유를 두는 좆질은, 최근에 발견하게 된 희우의 약점이었다.

“하으읍…… 으응……!”

예상대로 끈질끈질하게 젖어 든 귀두가 안에서 점막 여기저기와 저속한 키스를 행하며 오목하게 들어간 아기집 부근을 턱턱 쳐 주자 희우는 살집 없는 아랫배를 더 안쪽으로 수축시키며 온몸에 힘을 꾹꾹 주었다.

서수혁의 눈길이 희게 마른 등줄기에 꽂혀 들었다.

희우는 꼭 이렇게 배꼽을 관통할 만큼 노골적으로 꽂히는 전율 앞에서 그걸 숨겨야 하는 무언가처럼 사지 말단을 안쪽으로 오므리며 어떻게든지 내색하지 않으려 들었다.

볼 때마다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다.

단순히 익숙하지 않아서? 아님 쾌락에 젖어 떠는 모습이 이지 없고 상스러운 짐승처럼 보이기라도 할까 봐?

그게 사실이라면 저보다 나이는 한참 어리면서, 성교 관념은 앞뒤 꽉 틀어막힌 조선 시대가 따로 없었다.

일반적인 때라면 짓궂은 마음이 솟아올라 저 안쪽 깊숙이 박아 둔 성기를 쭉 빼낸 후 입술을 대신 처박고서 더 진하게 커닐링구스를 해 줬을지 몰라도 오늘은 성기 쪽 사정이 조금 더 급했다.

굵직하게 성이 난 음경이 제 자신을 요람처럼 감아 물고서 부드럽게 마사지하는 속살점 안에서 도무지 빠져나올 수 없다며 음욕 충만한 자기주장을 해 왔다.

“읏, 흐…… 아, 아아! 응, 아읏!”

충분히 속이 뜨끈하고 말랑하게 달궈졌다 싶을 즈음 그가 핀치를 공격적으로 올렸다. 아래로 처진 희우의 뽀얀 젖가슴이 무게감을 이기지 못하고 덜렁덜렁 흔들거렸다.

신경을 이루는 세포 한 톨 한 톨을 원초적으로 비트는 감각의 점멸이 거세게 일어나고 있었다. 힘껏 짓쑤셔 박는 제게도 이렇게 좋으니 아귀처럼 자지를 잡아 물며 요동질하는 보짓살 내부는 더 말할 것도 없으리라. 방증처럼 희우가 간간이 목이 조이는 소리를 내며 허리를 비틀었다.

그렇게 발버둥 치는 흔적에도 더 압제하려는 것처럼 바투 거머쥐며 퍽, 퍽, 퍽!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아랫살을 흠씬 찍어 눌렀다.

“아흐으……!”

발가락을 오므리고, 소파 팔걸이에 묻은 얼굴로 힘겹게 도리질을 하던 희우가 다음 순간 밑구멍을 완전히 틀어막을 것처럼 꽉 힘주며 전신을 딱딱하게 굳혔다.

한 계단 한 계단 올라 이른 절정으로의 귀결, 그리고 동시에 벼랑 밖으로 떨어지는 듯 아찔하게 무르익은 낙하감으로 전신이 벅차올랐다는 건, 자궁이 닿을 만치 깊게 들이박고 점막을 이리저리 쓰다듬어 주던 서수혁의 자지가 가장 먼저 깨달았다.

그는 그 순간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힘으로 안을 퍼억 내리쳐 박은 뒤, 성기 뿌리를 쥐어 열탕처럼 뜨끈한 보짓살 안에서 지체 없이 끄집어냈다.

“흐으으……! 으읍…….”

치골이 퍽 떠민 한순간의 볼기 타작을 이겨 내지 못하고 희우가 고꾸라지듯이 앞으로 풀썩 무너졌다.

와중에 하체는 간신히 버티고 있었기에 근육이 헤벌레 풀어진 음부 바깥으로 불투명한 애액이 주르륵, 주룩 흐르는 남사스러운 사정이 훤하게 드러났다.

진작부터 띠 같은 형태의 포말이 피막 주름 사이사이에 끼어 있을 정도로 게저분하던 음부살이 완전히 물을 끼얹은 것처럼 흥건해졌다. 와중에 오르가슴의 여운으로 그렇게 질척질척하게 녹아내린 구멍의 둘레가 펄떡펄떡 맥동하고 있었다.

서수혁은 그때를 놓치지 않고 희우의 몸을 빙글 돌렸다. 방탕하기 그지없이 머리를 농락하는 여운에 바들바들 경련하는 가랑이를 붙잡고 아직 사정에 이르지 못한 성기를 다시금 쭈욱 밀어 넣었다. 그러며 자세를 낮추자 희우가 달달 떠는 중에 양팔을 들어 그의 목을 감쌌다.

허억, 흐…… 기도 안에 고인 숨을 터뜨리면서도 그녀는 목을 감아올린 팔에 힘을 풀지 않았다.

두 달간의 잠자리에서 반복적으로 가르친 행동이 효과적으로 드러났다.

서수혁은 오직 이 행동 하나 보겠답시고 희우를 잔혹하고도 화려한 절정 위로 머리채를 잡고 끌고 가듯이 성희를 이끄는 경향이 있었다.

“흐응, 읏…….”

희우는 제 목덜미와 뺨을 마구잡이로 핥는 그를 끌어안은 채 초점이 뭉개진 눈으로 천장을 보았다.

열락이 화살촉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관통하는 느낌은 이제 익숙해질 만도 한데 늘 겪을 때마다 새로웠다.

영혼까지 다 죽어 시들어 있던 자신이 한순간 격렬한 심폐 소생술을 당한 것처럼 확 깨어나는 느낌이 그런 감상을 떠안겼다. 그러나 그 강렬한 인상의 반동처럼 후미에 몰아치는 탈력이 일반적인 행위를 했을 때보다 배는 심했다.

성기를 질 안에 한가히 문지르며 희우의 뺨에 제 뺨을 포개고 있던 서수혁은 쓱 돌아가는 고갯짓을 인지하고 얼굴을 들었다.

희우가 힘 풀린 이목구비로 허공을 응시하며 굽힌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의미는 빤히 읽혔다. 아직 갈증이 해결이 되지 않아 물을 마시고 싶어 하는 제스처였다.

부엌으로 가서 물을 가져올 수도 있는 일이지만, 한 몸 가득 묻어 둔 희우의 뜨끈뜨끈한 안에서 어쩐지 나오고 싶지가 않았다.

서수혁은 긴 팔을 아이스 버킷 안으로 밀어 넣어 얼음 하나를 끄집어냈다. 그것을 입에 문 채로 희우의 입술을 두드리자 그녀가 별 주저 없이 입술을 벌렸다. 얼음을 전달해 주며 제 혀도 함께 밀어 넣어 안을 헤집어 주자 희우가 신음하며 얼음을 빨았다.

그녀의 입에 자그마한 크기의 얼음 두 개를 더 미끄러뜨려 준 그가 자신은 희우의 도드라진 젖꼭지를 대신 물며 허리 운동을 재개했다.

“우응, 흡…… 응…….”

알이 굵어진 유두를 감싸 빨자 희우가 고개를 비틀며 뺨을 가죽 시트에 문질렀다. 다 삼키지 못한 액체가 신음을 뱉느라 슬그머니 벌어진 잇새로 흘러내렸다.

젖꼭지를 좋을 대로 맛보며 게걸스레 희롱하던 남자는 또 그걸 어느새 본 건지 위로 올라와 아랫입술을 쯉 머금었다가 놓는다. 이왕 맛본 김에 안으로 혀를 다시 밀어 넣던 서수혁이 대뜸 픽 웃었다. 의미 모를 실소에 희우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윗입은 차가운데 여긴 엄청 뜨겁네.”

그는 자신이 말하는 여기가 어디인지를 노골적인 허리 짓으로 알렸다. 안에 박혀 있던 살기둥이 야릇한 추삽질을 따라 질벽을 뒤흔들었다.

“여기도 열 좀 식혀 줄까?”

새초롬히 잡힌 음핵 구슬 아래로 부드럽게 나누어지는 소대를 손가락으로 벌린 서수혁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며 물었다. 희우는 얼른 고개를 저었으나 서수혁은 사양하지 않아도 된다는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고는 얼음을 하나 더 꺼내 들었다.

“흐……!”

곧 그것이 동그랗게 부푼 음핵 표면에 닿았을 때 등줄기가 다 얼어붙듯이 서늘해서 희우는 반사적으로 허리를 뒤틀었다. 그가 오므리려는 희우의 가랑이를 거방진 몸체로 가로막고는 공알 위로 얼음을 살살살 궁굴렸다.

손가락으로 눌러 비비기만 해도 배 속이 찌르르 달아오르는 예민한 부위였다. 하물며 일부 갈려 나가 가장자리가 뾰족한 데다가, 성질까지 차가워 솜털을 삐죽 서게 하는 얼음 앞에서 클리토리스는 급소를 찔린 것처럼 얇은 껍질을 통으로 발발 떨었다.

“으응, 아, 싫어. 이건…… 아!”

“싫어?”

“흑, 네. 응, 이상해요. 흐, 으…….”

“이상해?”

놀리는 것도 아니고, 말 한마디 한마디 꼬투리 잡듯이 따라 뇌까린 서수혁이 얼음으로 음핵을 골리듯이 희롱해 주며 방기처럼 처박아 두고 도통 쓰질 않던 살기둥을 힘 있게 밀어 박았다.

“아으읏……!”

희우가 턱선이 도드라질 만큼 고개를 뒤로 젖히며 신음했다. 서수혁은 콩알 위로 집요하게 얼음 조각을 굴리며 쉬지근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그러기엔 잘만 조이는데?”

“아응, 흑……!”

신열이 후끈하게 이는 살점에 대고 비벼서 그런지 얼음은 탁한 물기를 배어 내며 어느새 손톱보다 작은 크기로 마모되어 있었다. 그 얼음을 입에 넣고 아작 씹은 서수혁이 새 얼음 하나를 꺼내 들었다.

“아예 안에 넣고 박아 줄까? 응?”

“흑, 흐으……!”

“넣고 씹질 하면, 하아, 아래도 더 매끈히 잘 받아 물 거 같은데.”

눈앞의 남자라면 충분히 행하고도 남을 기행인지라 희우는 급히 도리질했다. 다행히 서수혁은 실제로 그 짓을 하지 않았으나 단단하게 뭉친 클리 돌기에 얼음 서너 개를 더 녹이고 나서야 상체를 바로 세우며 제대로 피스톤질에 임해 왔다.

이상야릇한 감각이 외음부에 악착스레 들러붙어 좀체 떨어지지가 않았다. 부푼 음핵은 건들면 오므라들 정도로 차게 식어 있는데 그로부터 이어지는 살점과 구멍 주변은 마찰열로 인하여 후끈후끈했다.

온탕과 냉탕이 섞이는 지점처럼 미묘한 감각이 하반신을 쥐락펴락할 듯이 장악했다. 이렇다 보니 발갛게 충혈된 클리토리스의 과열이 지나치게 두드러졌다.

“아, 아! 응, 흐, 잠…… 아으흣!”

서수혁이 못질하듯이 좆기둥을 쑥쑥 처박아 올리며 손가락으로 서늘한 기운을 발산하는 음핵을 빙글빙글 굴리기 시작했을 때는 불가항력으로 눈앞이 이지러졌다.

조금 전의 절정보다 한층 더 강렬한 여운을 선사할 것만 같은 격양이 팔다리를 마구잡이로 주물러 댔다. 단숨에 응축된 열기가 뇌와 척수까지 쑤셔 버리는 것처럼 가차 없기 그지없는 쾌락의 폭격이었다.

그의 손가락에 긁히는 음핵알이 미친 듯이 찌릿거리며 수축하자 덩달아 거근을 한입 가득 머금은 아랫입까지 쫀쫀한 개폐를 선보였다.

“흐응! 으읏, 흑, 아응……!”

희우의 신음이 조금 더 달큰하고 풀어진 식으로 흘러내렸다. 아무리 박아 대도 가뭄인 양 메마르기만 하던 과거를 비웃듯이 구멍이 푹쩍푹쩍 쑤셔 박는 대로 물기를 자아내며 추근추근한 비말을 튀겼다.

연결된 제 부자지와 자지 털이 모조리 젖는 걸 느끼면서도 껄끄러움 하나 없이 기껍기만 하여 서수혁은 기특하다는 칭찬처럼 안을 힘껏 내쳐 박아 주었다.

철퍽철퍽, 치골과 회음이 빠르게 마찰하는 소리가 떡 치는 소리와 유사하게 들릴 즈음에는 이미 서로를 빨아 삼켜야만 한다는 일념에 사로잡힌 것처럼 아래가 들러붙어 저속한 난탕을 벌이지 못해 안달이었다.

“하윽, 허으, 응, 아아……!”

그가 상체를 겹치자 희우의 젖가슴이 단단한 가슴팍에 짓뭉개졌다. 어쩌다 보니 위치가 겹쳐진 젖꼭지가 한껏 부대껴 애무를 일삼는 아랫도리처럼 서로 키스하듯이 문란하게 마찰했다.

여자의 것보다 판판하나 확실하게 두드러진 유두 위로 희우의 발기한 젖알이 짓눌리며 가슴 전체로 알싸한 희열이 번져 나갔다.

“하으응……!”

위아래가 모두 남자에게 장악을 당하며 희우는 어떤 저항 하나 못 하고 그대로 밀려오는 극치감을 맞이했다.

성기를 매끈히 조여 안쪽으로 이끌던 내부 막이 경련을 일으키듯이 발발 떨자 서수혁은 기다렸다는 것처럼 귀두관을 아늑한 지점에 주입구 삼듯이 꽂아 넣고는 저 고환 주머니에서부터 진하게 펌핑되어 터져 나오는 정액을 핏핏 쏘아 올렸다.

아래에 깔린 희우가 쌕쌕,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한 호흡을 터뜨렸다. 서수혁은 희우의 허리에 팔을 두른 뒤 그대로 자세를 빙글 전복시켰다.

어느새 서수혁이 밑에 깔리고 희우가 위로 올라간 자세가 되었다.

포개어진 두 몸 사이에 열기가 선연했다. 어느새 5월, 제법 온화해진 날씨에 맞춰 땀도 조금 배어났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인지라 그 질척한 접촉이 오감으로 낱낱이 넘어왔다.

일어나고 싶은 것처럼 꼼지락거리다가도 희우는 금세 포기한 양 사지를 축 늘어뜨렸다. 곧 땀이 식으며 오한이 스며들기 시작했는지 작게 몸을 떨었다.

그녀를 위에 얹어 놓고서 나른한 파정의 여유를 즐기던 서수혁이 바닥에 허물처럼 늘어진 제 셔츠를 끌어다가 희우의 몸 위에 덮어 주었다.

그의 너른 가슴팍에 뺨을 댄 희우가 가는 숨소리를 냈다. 서수혁은 얇은 머리카락을 걷어 내고서 희우의 귀에 매달린 보청기를 빼냈다. 그것을 테이블에 올려 둔 뒤 다시 등을 감싸 안고서 토닥, 토닥 일정한 박자로 두드렸다.

희우가 자던 중 깨어나 얼결에 몸을 섞고 난 후에는 으레 있는 그림이었다. 그냥 가만히 누워 있으면 잠이 잘 오지 않는지 한참을 뒤척이는 희우는, 꼭 이렇게 토닥여 주면 얼마 안 가 잠이 들고는 했다.

오늘은 섹스의 날연함까지 더해져서인지 평소보다 이르게 곯아떨어졌다. 그 사실을 아는데도 서수혁은 무료함에 유치한 손장난을 이어 가듯이 계속해서 등을 토닥거렸다. 다른 손으로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서류를 거머쥐어 얼굴께로 가져왔다.

토닥, 토닥.

늦은 밤,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어 가는 그림이 거실 한편에 고요히 자리 잡고 있었다.

* * *

구석구석으로 파고드는 햇살을 피하듯이 희우는 이불 안으로 더 몸을 움츠렸다.

분명 어젯밤, 거실에서 잠이 든 걸로 기억하는데 어느새 침대 위로 돌아와 있었다. 보나 마나 남자가 옮겨 둔 것일 터였다.

내리쬐는 햇살이 쨍쨍한 걸로 보아 이미 태양이 중천에 걸려 있는 모양이지만, 희우는 이불에 둘둘 말린 채로 침대 위를 뒹굴거리기만 했다.

이것도 남자가 출근을 하고서야 부릴 수 있는 늦장이었다.

행여나 깨어나 있다가는 바로 그에게 붙잡혀 아침을 먹으러 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어쩌다가 깨어나 일어나기 싫어 자는 척을 해도 서수혁은 진작에 간파한 것처럼 희우의 볼을 조금 아플 정도로 세게 누르고는 침실을 나갔다.

희우는 이불을 목 끝까지 두른 애벌레 모양으로 침대 옆에 난 창밖을 바라보았다. 햇빛이 별의 조각처럼 부서져 내리는 광경이 현재의 자신을 다섯 살의 시절로 돌아가게 만드는 것만 같았다.

이불 바깥으로 슬그머니 빼낸 손을 빛줄기가 가장 선명하게 들어오는 시트 위로 뻗었다.

손바닥을 관통할 듯 비춰 오는 빛보라가 유순해진 계절을 알리듯 따사로웠다.

어느새 봄이구나.

눈 덮인 채로 말랐던 지면과 앙상해졌던 나뭇가지 등 설경으로 차게 식어 있던 풍광이 눈에 보일 정도로 풀렸다. 시각적인 대비가 확연해서일까, 죽겠다고 난리를 쳤던 겨울이 아주 먼 일처럼 느껴졌다. 실제로는 고작 이 개월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내리깔린 눈동자 아래로 노란 무언가가 스쳤다. 이제 막 피어난 것처럼 올망졸망하게 수놓아진 개나리였다.

분명 며칠 전만 해도 없던 거였다. 희우는 저도 모르게 팔을 세워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가 그걸로 모자라 아예 침대에서 내려왔다.

“으앗.”

아직 적응이 되지 않아 왼쪽 발부터 내려 바닥을 디디다가 그만 크게 비틀거렸다. 다행히 침대를 짚어 넘어지는 걸 면한 희우는 침실 안쪽으로 자리한 욕실로 들어가 몸을 깨끗이 씻었다.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으며 보청기도 착용했다. 닫힌 문을 열고 나오자 타닥타닥, 도마를 일정하게 두드리는 소리와 치이익- 밥솥의 김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매일 일정한 시간에 출근해 식사 준비를 하는 주 실장이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일어나셨어요?”

“네.”

“식사하셔야죠.”

“딱히 생각 없는데…….”

“그럼 조금 있다가 드시겠어요?”

“네, 저 바깥에 좀 앉아 있을게요.”

“바깥이요?”

“꽃이 폈길래요.”

주 실장이 희우를 잠시 빤히 쳐다보았다. 곧 이런 태도에서 뭔가를 느낀 것처럼 그러라며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문을 열고 정원으로 나온 희우는 푹신한 잔디에 놓여 있는 라탄 선베드로 다가갔다.

어느 날의 퇴근길, 희우가 나무 그네에 기대 멍하니 앉아 있는 걸 목격한 서수혁이 주 실장에게 지시를 내려 마련한 가구였다.

희우는 챙겨 온 스케치북을 열고 노란 색연필 하나를 꺼내 들었다.

자신을 향해 환히 미소를 짓고 있는 것만 같은 개나리꽃 덤불을 쓱쓱쓱, 하얀 면 위로 열심히 옮겨 담았다. 그림을 좋아해도 실력은 별로인지라 완성된 그림은 유치원 학예회에서나 볼 법하게 유치하고 엉성했다.

스케치북을 내려놓은 희우가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숨을 깊이 들이켰다. 푸르른 산세의 정기가 폐부 안으로 가득 차올랐다. 언젠가, 숨도 스스로 내쉬지 못하여 기계의 힘을 빌렸던 때를 까맣게 지워 버리는 상쾌함이었다.

숨을 들이마시느라 등을 뒤로 젖힌 희우는 그대로 선베드에 드러누웠다.

‘사주는 비과학적이에요. 지극히요. 생일과 일시만 가지고 그 사람의 인생을 처음부터 끝까지 결정짓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럼 생일과 태어난 시각이 같은 이들은 모두 공장에서 찍어 낸 것처럼 같은 삶을 사나요? 아니죠. 개개인에게는 그 사람만의 삶이 있는 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쪽 의학계에서는 사주나 팔자 이런 건 다 미신으로 치부하며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일을 하면서, 환자분처럼 그 사주라는 것에 지나치게 얽매여 힘들어하는 분도 많이 보았습니다. 아무리 미신이라 할지라도 토속 신앙이라고 봐도 될 만큼 긴 맹신의 역사가 있으니까요. 저는 이걸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봅니다. 한마디로, 환자분의 마음가짐에 달린 거지요.’

희본 오빠는 분명히 저 때문에 죽었다. 하지만 그건 외갓집에서 세뇌 걸듯이 뇌까린 사주 탓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 가운데 각자의 이익을 위하여 움직이다 보니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사고라고, 의사는 확고히 단정 지었다.

‘그만큼 동생을 아끼고 사랑했으니 그런 결정을 했겠죠. 아닌가요?’

희우의 마음속에 응어리처럼 틀어박힌 죄책감을 의사는 그런 식으로 바꿔 인식하게 하려고 애썼다.

오빠의 사랑이라…….

서수혁이 지켜 준 오빠의 유골을 잔잔히 흐르는 바닷물 위로 흘려보내던 순간이 살아났다.

이성과 논리로는 그게 옳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지만 마음 끄트머리에 진흙처럼 묻어난 죄책감까지 말끔히 닦아 낼 수는 없었다. 두 달, 계절이 하나 바뀐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오빠만 생각하면 속이 뜯겨져 나간 것처럼 쓰리고 아팠다.

희우는 느리게 눈을 가물거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예쁘고 귀엽게만 보이던 개나리의 색이 이제는 너무 밝아 무정하게까지 다가왔다. 그걸 조금쯤 원망스레 보던 차였다.

“……?”

희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노릇노릇한 꽃 덤불의 사이로 하얀 솜뭉치가 보였다. 낀 것처럼 그 자리에서 요지부동이던 솜뭉치는 잠시 후 그게 착각임을 보여 주듯이 정원을 가로지르며 뽀르르 이동했다.

오돌토돌한 자갈길 위를 밟는 몸체가 얼마나 작고 아담한지 이동하는 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다. 만약 희우가 그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면 그녀 역시 저런 게 정원에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을 만큼.

홀린 듯이 선베드에서 일어났다. 그와 같은 타이밍에 솜뭉치는 별장 뒤편으로 감쪽같이 사라졌다. 저도 모르게 그 뒤를 쫓았다.

‘어디 갔지……?’

푸르른 녹음으로 깔린 이 환경에서는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없는 흰색이 도통 보이지가 않았다. 그 작은 몸집으로 이렇게나 짧은 사이에 먼 거리까지 이동했을 리는 없었다. 그 생각에 돌아보던 중 희우는 끼이이…… 하고 작게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숨까지 죽이며 집중하여 듣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을 만큼 멀고 희미한 소리였다.

간신히 잡아채어 따라가 본 끝에 희우는 출처를 발견했다.

커다란 별장 부지의 뒤쪽, 절벽처럼 내리막길로 이루어진 비탈길에 강아지 한 마리가 낑낑대며 매달려 있었다.

“어…….”

명백히 도로가 아닌지라 정리되어 있지 않은 길목은 함부로 발을 내디딜 수가 없었다. 그 자리에서 몸을 낮춰 아래를 살펴보던 희우는 혹시나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팔을 쭉 뻗었다.

그러나 동물인지라 경계심이 먼저 들었는지 강아지는 다가온 손바닥에 의지하기는커녕 더 몸을 말며 낑낑댔다.

여차하면 닿을 거리라서 희우는 자세를 땅에 가까워지게 더 바짝 수그리며 팔을 열심히 뻗었다. 보드랍고 연한 털에 스칠 듯이 가까워져 얼른 붙잡으려는 순간, 다른 팔로 짚고 있던 땅이 무너졌다.

“앗……!”

버틸 새도 없이 몸이 아래로 굴렀다. 시야가 흔들리며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희우는 드디어 손에 닿은 강아지를 안으며 뒹굴 굴렀다.

어제 내린 비로 지면이 푹신푹신한 데다가 가랑잎과 풀 같은 것들이 폭 넓게 깔려 있어서 크게 다치는 건 면할 수 있었다.

비스듬한 경사면에 주저앉듯이 기댄 희우가 반사적으로 품 안을 먼저 살폈다. 끼이잉. 손바닥으로 품으면 몸이 다 가려질 정도로 자그마한 강아지가 온기에 의지하듯이 희우의 손바닥에 고개를 대고서 킹킹거렸다.

대체 어쩌다가 여기까지 오게 된 건지.

희우가 알기로 이 주변에는 가정집이 없었다. 지금 서수혁과 함께 머무는 별장도 도로를 타고 한참을 들어와야 발견할 수 있는 안쪽인지라 근방에 따로 주인이 있기보다는, 어미를 잃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여기까지 이르렀을 가능성이 더 크게 다가왔다.

희우가 강아지를 품 가까이로 끌어당겼다.

며칠 동안 제대로 섭취한 게 없는지 손바닥 위로 피골이 상접한 게 전해져 왔다. 따땃한 5월인데도 추운지 몸을 떠는 행동이 안쓰러웠다.

두 손바닥으로 감싸면 쏙 가려질 법한 작은 몸집을 한 손으로 단단히 고쳐 안은 희우가 비탈진 길을 오르기 위해 비스듬한 각도의 땅을 짚었다.

“읏! 아야.”

한쪽 다리가 고장이 났을지라도 다른 쪽이 있기에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아래로 굴러떨어지며 멀쩡한 쪽도 접질러 버린 모양이었다. 힘을 주어 지면을 차듯이 디딜 때마다 발목 안쪽으로 날카로운 통증이 퍼졌다.

희우는 잠시간 당황하여 눈만 깜박거렸다.

“시, 실장님…….”

“…….”

“실장님! 실장님!!”

성대에 힘을 빳빳이 주고 몇 번 더 외쳤으나 산세 특유의 고요함만이 되돌아왔다. 그 적막이 피부 위로 오싹하게 내려앉았다.

이대로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강아지를 품에 안은 채로 한차례 끙끙댔지만, 가뜩이나 경사진 지반은 어제 내린 비로 젖어 짚고 올라갈 만큼 단단한 받침대가 되어 주지 못했다. 거기에 더하여 발목도 성하지가 않아 일이 좀처럼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괜찮아. 식사 준비가 끝나면 불러 준다고 했으니까…….’

문제는 이쪽이 어지간하면 올 일이 없는 별장 뒤편이라는 거다. 더구나 그냥 뒤편도 아니었다. 우거진 나무를 젖히고서야 드러나는 구석진 자리.

걱정스럽게 위를 살피던 희우는 고개를 숙였다. 보얗고 짧은 털을 바짝 세운 채로 떠는 강아지가 까만 바둑알 같은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어?”

희우가 둥그런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몸에 힘을 풀었다. 힘을 줄수록 삔 발목이 아파 와서 힘들었다.

차후 자신이 사라진 걸 알게 되면 주 실장이 이곳저곳을 돌아볼 거다. 소리를 쳐도 주변에 아무도 없는 지금보다야 그때가 낫지 않겠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걱정이 되는 거라면 자신이 아닌 품속에 안긴 강아지였다. 새끼인 걸 감안하고라도 크기가 많이 작았다. 저를 이리로 이끈 울음소리마저 너무 가냘프고 연약해서 금방이라도 뚝 끊어질 것만 같지 않았나.

너라도 나가 보라고 도움닫기를 할 수 있도록 손을 쭉 뻗어 주었으나 저를 포근히 감싼 희우의 체온이 마음에 들었는지 강아지는 낑낑대며 손바닥에 얼굴을 묻기만 했다. 하는 수 없이 희우는 다시 강아지를 품에 안고서 슬슬 어루만졌다.

햇빛이 차마 침범하지 못해 그늘이 지는 이 안쪽조차 따듯한 날씨였다. 무료히 주저앉아 있기만 하니 관성처럼 졸음이 몰려들었다. 강아지를 쓰다듬는 손이 위로 올라와 하품하는 입을 가리거나, 눈가를 매만지는 횟수가 점차 늘어 갔다.

이런 상황임에도 제법 태평하게 굴 수 있었던 건 코앞이 별장이라는 걸 알아서였다.

그 사실을 잊지 않으니 마음에 여유가 남게 되었다. 아마도 자신이 사라졌다는 걸 알면 주 실장부터 시작해서 서수혁의 수하들이 뿔뿔이 흩어져 저를 찾을 테니까.

길게 하품을 하다 말고 희우는 작게 웃었다.

살다 보니 그 사실이 위안이 되어 주는 때가 오기도 하는구나. 서수혁이 나를 찾기 위해 사람을 푼다는 사실이, 말이다.

‘음……. 그래도 좀 무섭긴 하다.’

혼은 나겠네.

벌써부터 뻔히 예상이 가는 상황에 희우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살을 부대끼며 살아가게 되었음에도 여전히 사내가 아무 말도 안 하고 저를 쳐다만 볼 때면 공연히 오금이 저려 왔다.

희우가 고개를 아래로 툭 떨구었다.

일단 저보다는 이 꼬물대는 강아지를 위해서라도 얼른 올라가야만 했다.

혹시 몰라 발목 상태를 한 번 더 체크했지만, 생각보다 제대로 접질린 모양인지 여지없이 시큰거렸다. 여차하면 다시 위로 올라갈 시도를 해 보려고 했으나 그걸 보고 포기했다.

‘기다리고 있다 보면 누구라도 오겠지.’

그래, 누구라도…….

‘왜 아무도 안 오는 거지?’

아무리 봄이라고 할지라도 산속이라 그런지 하늘이 금방 어두워졌다.

예상보다 길어지는 사태에 희우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아래로 추락한 지 얼마 안 돼서는, 저 멀리서 쥐톨만 한 기척만 느껴지면 힘껏 소리를 치고 땅을 두드렸으나 어째 이리로 다가드는 기척이 없었다. 그 뒤로 이어지는 자동차의 배기음 소리로 보건대 자신이 아예 별장 바깥으로 나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근방을 다 뒤지는 것 같은데 왜 별장 뒤편은 들여다보지를 않는 걸까.

기다리다 기다리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서 어떻게든 올라가 보려고 이리저리 바둥거려도 보았으나, 땅이 촉촉이 젖은 데다가 푹신한 쿠션 역할을 해 준 가랑잎이 미끄러워서 한 뼘 한 뼘 올라가도 다시 주르륵 미끄러져 제자리로 돌아왔다.

몇 번 시도해도 도통 되지를 않으니 심신을 둔하게 만드는 무기력이 버릇처럼 몰려들었다.

“어두워지니까 좀 춥기는 하다. 그렇지?”

몸에 힘을 뺀 희우가 카디건 속으로 강아지를 소중히 품으며 소곤거렸다. 털이 하얀 백구가 끼이잉, 끼잉 하고 울었다.

그때였다.

저벅.

인기척이 제법 지척에서 들려왔다. 귀를 쫑긋 세운 희우가 까슬한 흙벽을 더듬더듬 짚으며 고개를 들었다.

“저, 저기요!”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이 기회를 놓치면 끝장이겠다 싶어 서둘러 입을 열었다. 아까부터 내내 목소리를 높이느라 깊게 잠긴 육성 끝이 갈라진 상태였다.

아주 잠깐 멈칫했다가 조금 더 성마르게 땅을 울리는 걸음 소리와 함께 희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플래시 불빛으로 보이는 직사광선이 얼굴을 향해 정면으로 내리꽂혀서였다. 품 안의 강아지가 태양을 코앞에서 맞닥뜨린 것처럼 희우의 옷자락 안으로 쏙 숨어들었다.

“……하.”

곧 버석하게 마른 실소가 공기를 울렸다.

“너 거기서 뭐 하니.”

거의 밤처럼 어두워진 하늘을 떠받치듯이 배경으로 삼은 남자가 쭈그려 앉아 있었다.

서수혁의 얼굴을 확인한 희우 역시 저도 모르게 안도의 탄식을 흘렸다. 그가 어딘가를 향해 손짓하자 잠시 후 윤서원도 나타났다. 그의 낯은 서수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기껏 여기까지 나타나 줬으면서, 서수혁은 희우를 구해 줄 생각을 하지 않고 가만 내려다보기만 했다. 먹물처럼 새까만 눈동자는 미묘하게 서늘하고 날이 서 있었다.

“뭐 하고 있었냐고, 거기서.”

그러더니 잇따라 묻는다.

자신이 질문해 놓고 무슨 생각을 떠올린 건지 미간에 설핏 힘을 준다. 그걸 보고서야 희우는 그가 자신의 이런 행동을 오해했음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그는 또 자신이 위험한 행동을 시도했다고 여기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그가 아닌 타인이라면 지금 이 상황이 단순한 사고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겠지만, 병원에서 벌인 선례 때문인지 서수혁의 상념은 안 좋은 쪽으로 먼저 치달은 듯했다.

“그, 그게.”

희우는 얼른 카디건을 내리고서 솜뭉치처럼 자그마한 강아지를 두 손으로 안았다. 그 상태에서 고개를 들자 서수혁의 눈길이 그녀의 품으로 미끄러졌다.

꼬물거리던 강아지가 끼이이, 끼잉…… 들릴 듯 말 듯 한 울음소리를 냈다.

그를 멀거니 주시하던 서수혁은 여전히 건조한 느낌으로 입을 열었다.

“자빠지기라도 했어? 그거 구하겠답시고?”

“네. 근데 떨어지면서 다리를 뼜는지 발목이 좀 아파서…….”

서수혁은 기도 안 찬다는 낯으로 희우와 백견을 번갈아 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희우는 얼른 강아지부터 건네었다. 서수혁은 조심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손길로 강아지의 목덜미를 낚아채서는 윤서원에게 넘겼다.

이번에는 아예 두 팔이 뻗어졌다. 희우는 얼른 깨금발을 들었다. 잘 기능하지 않는 발목은 물론이거니와 아직 접질린 통증이 가시지 않은 발목으로 바로 서는 건 무리였으나 서수혁은 길게 뻗은 손이 닿자마자 어렵지 않게 그녀를 끌어 올렸다.

몸이 허공에 뜬 희우가 반사적으로 그를 꽉 붙잡아 왔다.

그 찰나에 멈칫한 서수혁은 언제 그랬냐는 듯 희우를 번쩍 안아 올렸다.

“어느 쪽.”

“네?”

“어느 쪽 다쳤니.”

“아, 오른쪽이요.”

아래로 축 내리뜨린 희우의 다리를 살펴보던 서수혁은 그 말을 듣고서야 걸음을 옮겼다. 바로 내려 주지 않을까 했으나 그는 여전히 그녀를 안아 든 상태에서 정원 쪽으로 돌아갔다.

“찾았으니 다들 퇴근하라고 하고. 바로 안 박사 좀 호출해.”

“예, 알겠습니다. 대표님.”

희우와 떨어진 게 서러웠는지 끼잉끼잉 소리 높여 우는 강아지를 쓰다듬던 윤서원이 얼른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별장으로 들어오자마자 희우는 서수혁에게 이끌려 욕실로 향했다. 바닥을 구른 옷과 몸에 칙칙한 풀과 흙먼지가 잔뜩 묻어서였다.

아닌 척 속이 복잡스러웠던 걸까, 희우의 귀에서 조심스럽게 빠진 보청기가 그의 손안에서 무력하게 박살이 났다. 위협용 행동이라기보다는 순간적으로 힘 조절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벌어진 탈이었다.

이후로 샤워를 하는 게 아니라 거의 그의 손에 당하는 식으로 씻겨진 후 욕실을 나왔을 때는 벌써 안 박사가 도착한 후였다.

“가벼운 염좌네요.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얇은 발목 여기저기를 만지며 상태를 체크한 안 박사가 서수혁에게 보고했다. 두 사람이 보청기 문제로 대화를 나누는 동안, 희우의 눈길은 어느 한 곳에 콕 박혀 있었다.

안 박사를 돌려보낸 뒤 밖에서 대기하던 윤서원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리고 돌아온 서수혁은, 거실장 앞에서 바닥과 물아일체가 될 수준으로 자세를 바짝 낮춘 희우를 발견하고 멈춰 섰다.

자신이 들어오는 소리를 뻔히 들었을 텐데도 대체 뭘 그리 보는 데에 넋이 팔린 건지 도통 머리를 들 생각을 하지 않는다.

“뭐 하니, 너.”

어둑한 거실장 아래를 주의 깊게 살피던 희우가 그제야 퍼뜩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서수혁보다 이 아래 깊숙한 곳이 더 신경이 쓰이는지 눈치를 보며 다시 상체를 바짝 수그렸다.

“이 안에서 안 나와요.”

“뭐?”

“강아지…….”

그제야 서수혁은 윤서원이 강아지를 집 안에 데려다 놓았다는 걸 알았다.

분명 희우 못지않게 꼬질꼬질했는데. 그런 게 실내를 뽈뽈 활보하고 다닐 생각을 하니 골이 무지근히 당겨 왔다. 그러나 일단 희우가 제 가시거리 내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이끄는 탈력이 조금 더 크다는 건 부정 못 했다.

“적당히 보고 이리 와.”

손목시계를 확인한 서수혁이 부엌 쪽으로 향하며 말했다. 난데없는 소요로 밥을 걸렀을 게 분명하니 저녁이라도 제대로 먹일 생각이었다.

부엌으로 향하니 주 실장이 열심히 마련하던 끼니가 그대로 차려져 있었다. 데울 만한 것을 데워 상을 제법 그럴싸하게 만든 후에도 희우는 여전히 거실장 앞에서 요지부동이었다.

넓게 벌린 두 팔로 아일랜드 식탁을 짚고서 그 꼴을 주시하던 서수혁이 입을 열었다.

“정희우.”

낮게 불린 이름 한 번에 희우가 꾸물꾸물 상체를 일으켰다.

언젠가부터 그가 이름을 부르는 게 이른바 인내의 마지노선처럼 작용했다.

저건 분명 제 이름이지만, 서수혁은 저것보다 아기라고 더 잘 불렀기에 때로 그의 입을 빌려 나오는 호명은 ‘정말 내 이름이 맞나?’ 싶은 의문이 들게끔 만들었다. 그런 거리감만큼 안에 실린 기백도 팽팽해서 희우는 후다닥 식탁으로 향했다.

하지만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희우의 관심은 내내 그쪽에 꽂혀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어두침침한 구석에 있는 듯 없는 듯 박혀서는 오만 눈치를 다 보며 벌벌 떠는 게 꼭 언젠가 자신의 모습 같아서였다. 저렇게, 숨조차 들리지 않게 내쉴 만큼 마음이 편치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

정갈한 젓가락질로 식사를 하던 서수혁 역시 그런 희우의 기색을 진작 눈치챘다.

그는 물을 마시며 거실 쪽에 고정된 희우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내가 널 왜 아기한테 붙여 둔 건지 몰라?’

‘…….’

‘그러고도 월급 꼬박꼬박 받으면 양심이 안 찔리나 모르겠네.’

싸늘한 일갈에 대역죄인처럼 위축된 주 실장이 어깨를 크게 움찔거렸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다 제 불찰입니다.’

‘그럼 다 네 불찰이지, 누구 잘못이니. 입발린 사과나 찍찍 뱉을 시간에 일을 똑바로 하지 그랬어.’

‘그게, 그러니까, 식사 다 차리기 직전에 확인한 바로는 분명히 정원에 계셨습니다. 그런데 잠깐 사이에 사라지셔서…….’

‘정원으로 나가는 걸 두 손 두 발 놓고 보고만 있었던 건 확실하네.’

곱게 모인 주 실장의 손이 떨렸다. 맹수 앞에 놓인 소동물처럼 희게 질린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게, 정원에 핀 꽃을…….’

‘뭐?’

‘꽃을 보고 싶다고 하셔서요.’

‘…….’

‘전보다 많이 편안해지신 얼굴이라…… 도저히 말릴 수가 없었습니다.’

주 실장이 세상 하직하기 직전의 안색으로 보고를 해 올 때만 해도 그게 당최 무슨 개소리인지 알 수가 없는 심경이었거늘. 지금, 구석빼기에 숨은 강아지를 염려하는 희우의 낯을 보니 무슨 말을 전하고 싶어 했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무채색이 아니었다.

무슨 색인지 정확히 정의할 수 없었으나 그 얼굴에는 분명, 색이 스며들어 있었다.

“내일 상필이 불러 줄까.”

작게 끄집어낸 한마디에야 희우의 얼굴이 이쪽으로 돌아왔다. 아주 상전만큼 얼굴 보기 한번 힘들다고 생각하며, 서수혁은 미리 젓가락으로 쥐고 있던 감자조림을 희우의 입에 쏙 넣어 주었다.

희우는 그것을 오물오물 씹은 뒤 꿀꺽 삼키고서야 반문했다.

“갑자기 왜요?”

“검사도 해 봐야 되고, 이래저래 살 것도 많을 테니까.”

“……?”

“자주 갈 수는 없으니 사료도 포대로 가져와야지. 상필이가 힘이 세거든.”

의문으로 차 있던 희우의 눈이 차차 큼지막하게 뜨였다.

“키워도 돼요?”

“그럼 갖다 버릴래?”

“아니요…… 아니요. 안 돼요…….”

얼른 도리질을 한 희우의 고개는 애써 이쪽을 보게 한 보람도 없이 다시 거실 쪽으로 돌아갔다.

아까와 조금도 다를 게 없는 모습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변화는 명확히 존재했다. 의자 아래, 허공에 뜨인 한쪽 다리가 신이 난 아이의 것처럼 작게 흔들거렸다.

뻔히 티가 나는 태도에 피식거린 서수혁이 거실 쪽으로 난 창을 내다보았다.

여기서도 샛노랗게 만발한 꽃이 보인다. 이제 시작이라는 것처럼 기세가 훌륭하기 그지없었다. 부는 바람에 살짝씩 몸을 흔드는 생화들의 웃음소리가 언뜻 들리는 것도 같은 밤.

바야흐로 봄이 한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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