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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장. 6과 0206 (2) (15/17)

14장. 6과 0206 (2)

창문에서 뛰어내리려다가 실패한 그날, 희우는 손목이 침대 가드와 연결된 끈에 칭칭 묶였다.

다음 날 서수혁이 의료진을 끌고 와 다리 상태를 강제적으로 확인하게끔 만들었다. 팔목이 침대에 묶인 상태에서 끈만 늘여 일어난 희우는 의사가 시키는 바를 로봇처럼 따라 하며 여전히 망연하게 있기만 했다.

서수혁의 서슬 퍼런 감시하에서 몇 가지 검사를 빠르게 마친 의사가 말했다.

“짐작대로 신경 반사가 일어나질 않습니다. 운동 기능을 담당하는 신경근에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허벅지까지는 그래도 반응이 있는데, 무릎 바로 아래쪽부터 운동신경이 따라오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아마 그 지점에 신경계 손상이 생긴 걸로 추정이 됩니다.”

희우의 앞에서는 덤덤한 척 표정을 갈무리하던 의사는 서수혁을 대면하고서야 그 거짓된 가면의 꺼풀을 벗겨 내고는 안타까워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검사가 진행되는 동안 한쪽으로 빠져 앉아 있던 서수혁이 침대를 향해 눈길을 주었다.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 침대에 걸터앉은 희우는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모르는 것처럼, 아니, 정확히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 상관없는 사람처럼 무정히 등을 보이고 있었다. 의사의 소견이 조금도 궁금하지 않은 눈치였다.

그게 배알을 손으로 쥐어짜는 양 거슬리게 만들었다.

“일단은 조금 더 두고 보는 게 어떨까 합니다. 신경이라는 게 보기보다 예민해서 큰 타격을 입고 일시적으로 마비가 온 걸 수도 있어서요. 간혹 저렇게 당장은 반응이 없어도 환자의 상태가 회복되면서 같이 살아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의사는 그렇게 말했으나 안타깝게도 그런 결과는 오지 않았다. 전제부터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은 까닭이었다.

모쪼록 회복을 하기 위해서는 매시간 마련되는 양질의 식사를 꼬박꼬박 해야 할 텐데 희우는 음식물 섭취를 죄 거부했다. 거부라기보다는 이걸 먹어 삶을 이어 나가야 할 의욕을 찾아볼 수가 없는 이처럼 제 앞에 차려지는 음식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런 윤서원의 보고를 듣고 병실로 온 서수혁은 몇 번이고 주먹을 쥐었다가 펴야만 했다.

하는 꼴을 보고 있노라면 당장 턱을 그러쥐고 아무렇게나 숟가락을 입에 쑤셔 박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제 억센 힘조차도 지난한 위협이 될 게 뻔할 만큼 희우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끝을 모르고 살이 내리는 몸과 빛을 찾아볼 수가 없는 퀭한 안색, 이미 어두움에 먹혀 든 듯 땅거미가 진 눈동자 등등…… 그 모든 정황들이 이전처럼 좆대로 성질머리를 부릴 수가 없게끔 말리고 있었다.

자칫 힘을 잘못 줬다가는 똑 부러질 것만 같은 얇은 검불을 손에 쥔 사람의 심경이 이런 걸까. 그런 마음으로 서수혁은 매 순간 초인적인 인내를 발휘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끼니를 하루 통으로 날리는 걸 계속 보고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는 수 없이 의사와의 상의를 통해 몸속에 고농도 영양 수액을 주입하는 정맥 주사를 맞추는 방법을 택했다.

그 결과 희우의 한쪽 팔목은 어두운 색의 물감을 짠 팔레트처럼 다채로운 피멍으로 얼룩덜룩해졌다. 그나마 곱던 살결이 너덜너덜한 넝마가 되기까지는 순식간이었다.

밤이라고 해서 편한 시간이 오는 것도 아니었다.

하늘이 먹색으로 물들고 달이 뜨는 새벽에도 희우는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지나치게 고요하여 잠이 들었나 싶을 즈음 한 번씩 뒤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어쩌다가 가끔 눈을 감고 있을 때는 악몽을 꾸는 것처럼 이목구비를 땀으로 적시며 끙끙거렸다. 그러다가 깨어나면 또다시 넋을 잃는 인형이 되기를 반복했다.

환자 못지않게 오랜 시간 병실을 지키며 서수혁은 그런 희우의 상태를 매 순간 눈으로 접했다.

오늘의 새벽 역시도 그러했다.

잘못 디디면 그대로 깨질 듯한 얼음장 같은 새벽, 그가 보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서 침대로 다가갔다.

역시나 자는 줄로만 알았던 희우는 깨어 있었다.

이렇게 밤중에 그가 불쑥불쑥 다가드는 게 익숙해졌는지 이제는 인기척이 들리는 쪽으로 시선 한 줌 돌리는 법이 없다.

서수혁은 희우의 팔목을 묶고 있는 끈을 풀어 주었다. 하루 내도록 묶여 있어 피가 통하지 않아 창백하게 질린 꼴을 본 간호사가 한 번씩은 풀어 주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전언을 조심스럽게 건네었기 때문이다.

끈이 풀리는 동시에 서수혁은 희우의 팔을 붙잡아 주물렀다.

희우의 무서운 점은 이런 거였다.

반항하지 않는 것.

지금, 어찌 보면 충분히 쳐 낼 수 있는 손길도 묵묵히 받아들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눈으로 측면만 응시한다.

저를 이 세상에 묶어 두려는 힘에 아무런 반응이 없으니 잡고 있는 사람조차 제대로 행하고 있다는 자각이 없었다.

그게 척박하게 갈라진 서수혁의 속내에 이따금 거슬리는 곡괭이질을 해 대는 거였다. 날카로운 날을 땅 깊숙이 파묻어 들어 올릴 때마다 뼛골이 통째로 들썩인다.

쿵, 쿵, 흡사 불안처럼 전신을 뛰게 만드는 내적 변화였다.

서수혁은 다시 묶어 두기 위한 끈을 든 채 침대를 응시하다가 그것을 내려놓고 희우 위로 올라탔다.

“너 자꾸 어디 보니.”

코앞에 사람이 있는데도, 자신이 있는데도 저 여린 눈동자는 한 폭조차 내어 줄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게 심기를 기분 나쁠 정도로 강하게 건드려 와서, 서수혁은 희우의 코앞에 제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희우가 눈을 느리게 깜박거렸다. 젖었다가 말랐다가를 반복해서 금방이라도 파스스 부서질 것만 같은 속눈썹이 상처를 입은 나비의 날개처럼 하늘거렸다.

서수혁은 그것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포개어졌다.

텅 빈 뭔가와 그걸 거울처럼 닮은 뭔가가 맞부딪힌 양 메마르고 차가운 느낌의 키스였다.

하지만 그건 접촉한 순간에 인 착각인 것처럼 서수혁은 금세 희우의 입술을 가르고 혀를 밀어 넣었다.

축축한 살덩이가 서로를 적실 심산처럼 만나 비벼지는 즉시 아득한 열병이 온몸을 타고 번졌다. 금세 가슴팍을 훑고 내려가서는 아랫도리를 뻐근하고 알알하게 조이려 든다.

이런 마음에 더욱이 불을 지르는 것은 얽어 빨려는 제 시도에도 굴하지 않고 주인을 닮아 꼼짝도 하지 않는 희우의 혀가 내보이는 태만이었다.

제 지시 때문이라고는 해도 이 살덩이가 나름의 열의를 보인 채로 움직이던 순간을 기억하고 있어서인지 더 몹쓸 부아가 치밀었다.

서수혁은 아예 그녀의 목구멍을 틀어막을 기세로 혀를 난폭하게 들이박으며 손을 아래로 내렸다.

허리 부분이 고무줄로 이루어져 탄력성이 있으나 그럼에도 손쉽게 침입을 허용하는 바지 안쪽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손에 착 감겨 와 주무르는 맛을 선사하기에는 영 빈약해진 엉덩이를 무람없이 지분거리다가 바지를 아래로 쭉 끌어 내렸다.

이제 그녀가 어디를 건드리면 곧장 반응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아무리 핥아 올리고 쓸어내려도 열의를 보일 생각을 하지 않는 혓바닥을 뒤로하고 입술을 뗐다.

얼마나 난장을 친 건지 희우의 입가는 이미 제 타액으로 번드르르 젖어 있었다. 거스러미를 달고도 붉은 기운이 여실한 입술을 쪼옥, 소리가 나게끔 위아래 번갈아 가며 빨아 준 뒤 그는 서서히 아래로 내려갔다.

바지를 끌어 내릴 때 이미 속옷도 함께 벗겼기에 그를 기다린 건 뽀얀 음부였다.

예전에도 이런 색이었으나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그때는 혈색 좋게 물들어 있는 쪽이었다면 지금은 그저 해쓱하게 질려 있기만 해 보였다.

그가 동그란 음핵을 감싸는 포피를 손가락으로 열듯이 당기며 혀를 쓱 가져다 댔다.

구멍 안쪽으로 향할수록 조금 더 짙은 산호색으로 물들어 가는 살점은 혀로 핥아 올릴 때마다 미뢰 끝에서 부드럽게 뭉개졌다.

그는 아예 이 밀부에 코를 박고 살 사람처럼 고개를 흠씬 처박은 채로 혀끝이 얼얼할 만큼 가열하게 돌려 댔다. 오목하게 주름이 진 질구는 물론이거니와 그 주위를 포근히 여물듯이 감싼 소음순도 번갈아 가며 진하게 맛을 봤다.

하지만 위에서도 저 혼자 놀듯이 군 버릇을 아래에서 버릴 수 있을 리가.

희우는 불티가 피부에 튄 것처럼 작게 움찔대기만 할 뿐, 큰 반응을 바라기 힘든 몸짓만 선보이고 있었다.

여름과 겨울처럼, 대비가 이렇게 적나라하게 와닿을 수가 없었다. 지금 제 안을 휘도는 이 용암 같은 불길을 아무리 쏟아 내 부어도 그녀는 쩡쩡 얼어붙어 있는 빙하처럼만 구니.

흐……. 하고 작게 터지는 호흡마저도 귓바퀴를 얼릴 듯이 건조하고 서늘하기만 했다. 그건 굳이 희우의 반응까지 갈 것도 없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직접 혀를 쑤셔 박고 돌려 대는 질구부터가 그랬다.

이 정도 문대 주고 점막을 비벼 올려 주면 적당히 달구어져서는 물을 조금씩 흘려보내기 시작하는 수로가 지금은 고장이 나 버벅이는 수도꼭지처럼 한 방울, 두 방울 간신히 맺히는 수준이었다.

애액에 푹 저는 수준까지는 바라지도 않았으나 이건 해도 해도 심했다. 혀가 빠져라 쑤석대는 사람 생각은 일절 안 하는 그 작태가 서수혁의 신경줄을 거칠게 잡고 늘어졌다.

서수혁은 가랑이 사이에 숨은 구멍을 제 타액까지 펴 발라 샅샅이 핥아 올리며 가만히 놓여 있는 희우의 발목을 거머쥐었다.

순간 그는 멈칫했다.

손바닥을 긁는 감촉이 이상했다. 사람의 피부가 아니었다. 꺼끌거리고 기분 나쁜 무언가…….

서수혁은 한 박자 후에야 자신이 쥔 게 희우의 맨살이 아니라 그녀의 발을 칭칭 감싼 깁스라는 걸 깨달았다. 의사의 설명에 의하자면 이상이 생겨도 단단히 생겼다는 그 부위를 가로막는 보호막. 그것을 쥐고 애무나 해보겠답시고 긁고 있는 이 상황이 그의 머릿속을 둔중히 경직시켰다.

그녀가 유난히 느껴하던 복숭아뼈 위치를 지레짐작하고 손톱으로 긁던 움직임이 서서히 멎었다.

작동이 꺼진 기계처럼 잠시 가만히 있던 서수혁은 이성 끄트머리에서부터 번지는 이 복잡미묘한 기분을 정의하지 못했다. 아주 씹스럽고 개 같은데 당최 칭할 말이 없는, 그런 감정이었다.

그는 그것을 모른체하듯 외면하며, 거머쥔 발을 바꾸었다.

그나마 멀쩡한 오른쪽을 붙잡고서 복사뼈 부근을 원하던 대로 만질거렸다. 동시에 속살점을 죄다 헤쳐 댈 기세로 비집어 벌리던 질 안에서 혀를 빼내고서 음핵을 아예 입 안에 넣고 강하게 흡음했다.

“……아…….”

그래도 여기저기 약한 구석만 건드린 게 효과는 있었다. 마른 시체처럼 굴던 희우가 아까보다 더 확실히 고막을 긁는 신음을 짧게 토해 내며 허리를 살짝 비틀었다.

예전처럼 제 머리카락을 쥐고서는 뽑아낼 심산처럼 이리저리 당겨도 괜찮을 것 같았으나 거기까지 바라는 건 스스로가 보기에도 무리였다. 그러며 동시에 자조스러운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나마 활기를 갖추던 정사 때의 반응 하나 보겠다고 부지런히 봉사하는 제 자신의 모습이 그리도 등신 같을 수가 없었으니까.

그래도 물기를 찾아볼 수가 없어 삭막하기만 하던 구멍이 좆을 쭐깃하게 삼킬 정도로 젖어 들고 있다는 걸 인지하는 순간 모든 불만과 번민이 발화하듯이 사라져 버렸다.

상념이 욕정에 잡아먹히는 감각이 부단히 낯설던 시기가 있었다. 모든 사사로운 순간은 과거를 지르밟으며 탄생한다. 그렇기에 서수혁 역시 이제 성기 대가리가 알알이 당겨 오며, 당장 좁고 축축한 어딘가에 이 중심을 짓쳐 박지 않으면 돌아 버릴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탐욕이 그리 이상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는 희우의 도톰한 클리토리스를 혀로 싹싹 치댐질을 해 주며 급히 바지춤을 헤집어뜨렸다.

적당히 풀어졌다 싶을 즈음 쥐고 있던 얄팍한 발목을 어깨에 얹으며 이미 잔뜩 성이 나 배꼽 부근을 툭툭 쳐 대는 성기를 쥐고서 그대로 안으로 진입했다. 혀를 품어 본 것만으로는 아직 무리임을 알리듯이 내부에서부터 음경을 잡아 뜯으며 버거움을 피력하려 애썼다.

“흐윽…….”

희우가 맥 끊긴 숨을 내쉬며 베개에 한쪽 얼굴을 묻었다. 당장 머리채를 잡아 고개를 들게 해 저 안에 숨겨진 표정을 보고 싶다가도, 지금은 불뚝 선 자지를 끝까지 짓쳐 박는 것이 우선이라는 사특한 욕망이 불꽃처럼 정수리로 치달았다.

애매하게 벌어진 다리를 제대로 고쳐 쥐고서 서수혁은 이제 그만 들어오라 사정하듯이 성기를 미는 점막을 더 얄궂게 긁어 올렸다.

유난히 꽉 조여드는 입구 부근을 지나, 그나마 뚫을 만해지는 중간 지점을 거쳐, 드디어 온 힘을 다해 감싸면서도 부드럽게 풀어지는 타이밍으로 씹질의 맛을 알게 하는 자궁 질부 부근에 도달했다.

역시나 예상대로 성기 기둥에 흡착하듯이 달라붙은 질막이 안쪽에 고인 씨물을 어서 빨리 흩뿌려 달라고 성토하듯이 뜨끈하게도 조여 물어 왔다.

눈을 나른하게 내리뜬 그가 희우의 다리를 제 어깨에 매달듯이 붙인 채로 허리를 쳐올렸다.

“……흣.”

박자마자 갈 것 같은 이 안을 원 없이 짓빠대고 쑤셔 올려 엉망으로 만든 뒤 되직한 정액을 한가득 지리고 싶은 음충한 마음이 꺼멓게 가라앉은 눈동자게 서리처럼 어렸다.

그러나 지금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본능이 직감하고 있었다.

지금 길목 끝자락까지 쑤셔 박힌 성기의 정점이 닿는 곳이 희우가 이번 사고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부위였다. 이 안에서 발생한 출혈 때문에 희우는 한동안 숨도 뜻대로 쉬지 못했다.

자칫 꼴리는 대로 굴었다가 탈이 나기라도 한다면 이번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부상이 될 수도 있다. 희우라면 그런 결과를 바랄지 몰라도 서수혁은 결코 용납할 맘이 없었다.

감히 누구 좋으라고.

죽음에 뛰어들기 위해 애를 쓰는 그녀의 행위를 거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흐…… 으, 하…….”

일정한 기계음과 간간이 서류 넘어가는 소리만이 들리던 병실에 열띤 남녀의 성희 소리가 넘나들기 시작했다.

서수혁은 희우를 꿰뚫을 것만 같은 시선을 꽂은 채로 바지런히 허리를 움직거렸다.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움직여야 하다 보니 여성기를 드나드는 추삽질은 평소 부리던 좆질의 반의반도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이쪽이 탁월한 효과가 있었다. 희우는 격렬하게 몰아쳐 저를 분쇄시킬 듯한 섹스보다는 이렇게 느릿느릿, 성감의 맥동 하나하나를 절감할 수 있는 식의 섹스에 더 느껴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었다.

“읍, 흐…….”

짐작대로 반송장처럼 굴기만 하던 몸이 서서히 안쪽으로 말리고 비틀려 댔다. 그게 미치도록 꼴릿한 기분을 선사했다. 정작 희우의 손은 침대만을 붙잡고 있는데도 아찔한 애무를 당하는 기분이었다.

등허리를 조금 더 곧게 세운 뒤 엉덩이 보조개가 늘씬히 파이도록 턱턱턱, 박자감 있게 말뚝질을 하자 희우의 몸이 띠는 생기 역시 조금씩 살아났다.

사특하게 가라앉은 서수혁의 동공 위로 그 모습이 하나의 열렬한 환희처럼 다가왔다.

무얼 바라고 환자인 기집애의 바지를 잡아 내려 혀가 뻐근해지도록 질 구멍을 난도질해 주었는지에 대한 허탈함이 단번에 사그라들고 그 자리에 일말의 뿌듯함마저 깃들 만큼.

조금씩 벌어지던 희우의 잇새가 순간 콱, 안을 헤집어 대는 힘에 못 이겨 제법 크게 열렸다. 서수혁은 그 안쪽에서 머뭇대며 몸을 말고 있는 혓바닥을 보았다.

빨고 싶다는 욕구가 온 생각을 잡아먹었을 때는 이미 상반신을 바짝 숙인 뒤였다. 하지만 입을 맞출 정도로 자세를 낮추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체격 차이가 워낙 나다 보니 이대로 희우를 짓누르면 뼈가 어긋나고 파열된 그녀의 내부는 분명히 부차적인 손상을 입게 될 거였다.

“씨발.”

좀처럼 뜻대로 이루어지지가 않는 상황이 씹스러웠다. 그 심경 그대로의 욕지거리를 터뜨린 서수혁이 질 안 깊숙이 묻어 둔 음경을 빼고는 희우의 팔을 붙잡았다.

반송장처럼 누워 있기만 하던 몸이 외압을 이기지 못하고 움직였다. 잠깐 엎치락뒤치락하는 동안 침대가 두 명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격렬하게 끽끽거렸다.

조금 전 희우가 누워 있던 자리에 대신 누우며 그녀의 가늘한 몸을 제 위로 올린 서수혁이 엉덩이 골 사이에 자지를 끼웠다. 그 상태에서 버끔대는 요도구를 타고 흐르는 선액을 회음에 펴 바르다가, 적당히 뜸을 들였다 싶을 즈음 기둥을 잡아 구멍에 조준해 진득이 밀어 넣었다.

“읏…… 흡…….”

졸지에 사내의 위에 올라타 받게 된 좆이 수직으로 내쳐 박혀서는 곧장 민감한 배꼽 위쪽을 긁었다. 희우가 가장 예민하게 구는 구간답게 무딘 귀두갓으로 긁죽이듯이 들비벼 올리자 허벅지 안쪽에 바짝 힘을 주며 등줄기를 둥글게 만다.

서수혁은 그런 희우의 얼굴이 보이게 들어 올리며 아랫도리를 퍽, 퍽 재게 터는 추삽질을 재개했다.

“읏. 응…… 흣.”

병실 바닥 위로 진 가늘고 낭창한 그림자가 위태로이 흔들렸다. 그 음영의 주인인 희우가 그렇게 휘청대고 있는 이유에서였다.

무너질 듯하여도 끝내 무너지지 않고 버티는 건 서수혁의 양손이 그녀의 엉덩이를 터뜨릴 기세로 쥐고 있어서였다. 기실 허리를 잡고 싶었으나 제 것과 다르게 얇고 가는 뼈가 또 톡, 하고 무력하게 부러질까 차마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대신에 그는 살짝 흐트러진 희우의 환자복 앞섶을 벌렸다. 윗단추를 풀어 주다가 지금은 그럴 인내를 보일 새도 없다는 걸 증명하듯이 나머지 단추는 그냥 뜯어 버리는 식이었다.

그렇게 해서 젖혀진 얇은 환자복 아래 젖가슴이 치받는 대로 출렁이며 야릇한 파도를 치고 있었다.

“아, 아…… 읏! 흐……!”

회음부를 철퍽철퍽 치는 볼기 타작이 계속될수록 희우의 배꼽 아래쪽이 볼록하게 도드라졌다가 평평히 꺼지기를 반복했다. 그걸 볼 때마다 기가 차 머리가 띵할 지경이었다. 뼈에 지방 없이 살가죽만 붙어 있을 정도여야 가능한 그림 아닌가.

야위고 또 야윈 그녀의 상태를 곱씹을수록 비위가 상하고 심기가 뒤틀리는 현상만 심해졌다.

서수혁은 희우의 엉덩이를 쥐어 제 쪽으로 끌어당기며 허공에서 들썽이는 젖무덤을 한입에 물었다.

“하으…….”

머리 위에서 듣기 좋은 신음이 작게 터졌다.

아래를 갈라 꽂는 자극 덕분인지 별 접촉 없이도 심지가 선 젖꼭지를 이 사이에 끼워 깨물고, 입술 전체로 물어 살갗이 부어터지게끔 들이빨자 희우의 비명과 호흡이 한층 더 고조됐다.

“흑…… 윽.”

팔을 아무렇게나 내려 둔 희우가 버티기 힘들어졌는지 몸을 앞으로 숙이며 서수혁의 복부를 짚어 왔다.

근골이 선명한 복근으로 짜여 빈틈이 없는 복부는 지면처럼 단단히 여물어 그녀의 손을 받쳐 주었다. 서수혁은 저를 의지하는 그 작고 가는 손에서 도통 눈을 떼지 못하며 침대가 다 서럽게 울어 대는 피스톤질을 이어 나갔다.

그래, 적어도 이런 모습인 게 나았다.

생리적인 감각을 들쑤시는 쾌감 때문이라고 하여도 이렇게, 산 사람답게 구는 모습이.

그 방식이 혼자 딸딸이를 치는 것보다 미흡하고 껄끄러운 감정을 떠안기는 섹스일지라 하여도 괜찮았다. 전에는 저 혼자만 이 짓에 감개를 느끼고 매진하는 게 보기 좋게 이용을 당하는 듯하여 기분이 더러웠으나 지금은 반갑기만 했다.

요 근래 희우가 이만큼이나 생기 있고 활동적인 모습을 보여 준 적이 있기는 했나.

아무리 난폭하고 조악한 세상에 산다고 해도 시체를 쑤시는 취미는 없었다. 서수혁은 제 뜻 모를 간절함을 그런 성향 본위 따위로만 정의했다.

“그래, 차라리 이거라도 반응해.”

“읏, 아, 아…… 하으……!”

“이 짓에라도 매달리라고.”

뭔들, 그녀가 반응하는 게 전무하진 않다는 사실이 서수혁의 흥분감을 수직의 방향으로 상승시켰다.

무거운 납덩이가 얹어진 것처럼 답답하던 내부가 일시적으로 확 트이는 듯한 해갈이 그런 식의 도취감으로 갈음된 셈이었다.

서수혁은 유연한 조절도 잊고서 희우의 질 안을 마구잡이로 궤찌르고 뚫어 댔다. 둥글게 열린 구멍 바깥으로 이미 체액이 뒤엉켜 만들어진 물거품이 보얗게 일어 서로의 생식기를 눅진히 에워싸고 있었다.

그는 이목구비를 찡그리며 헐떡이는 희우의 얼굴을 목전에서 구경하며 허리를 더 빠르게, 재게, 숨 가쁘게 털어 댔다.

자칫 남이 보면 이 섹스에 매달리는 게 누구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만큼.

이윽고 그녀의 단정한 눈썹이 살짝 일그러지며 구멍이 전에 없던 압착력을 발휘하여 살덩이를 질기게 빠는 순간, 저 끝 간 데 없는 곳까지 짓쑤셔 박힌 성기가 덩이진 우유처럼 푸지고 외설스러운 정액을 쏘아 올렸다.

사정에 이만큼의 쾌락이 딸려 오는 건 처음이었다. 그런데 딱 그만큼의 언짢음도 공기 중의 먼지처럼 부유하고 있었다.

아픈 애가 정신줄 좀 잡는 모습을 보겠다고 발정 난 금수처럼 들이박듯이 달려든 데에서 오는 찝찔한 뒷맛이었다.

심경 한 가닥 한 가닥에 거스러미가 이는 듯한 불편함이 달라붙는 가운데, 위에서 부들부들 떨던 희우가 별안간 풀썩 쓰러져 왔다.

서수혁은 저도 모르게 황급히 시트를 짚으며 상체를 엉거주춤 들어 올렸다.

엉덩이를 붙잡고 있던 손이 성마르게 움직여 커튼처럼 가려진 희우의 머리칼을 걷어 내고 낯을 확인했다. 겨울에 내리는 눈을 덕지덕지 바른 것처럼 창백하게 질린 안색에 곧장 팔을 뻗어 너스 콜을 누르려던 차였다.

색, 새액.

아주 가늘고 약한 숨소리가 그의 가슴팍을 솜털처럼 건드렸다. 서수혁은 그제야 희우가 기진함을 이기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단순히 수면에 빠진 걸 알자마자 애매한 각도로 든 상체가 뒤로 푹 꺼지며 서수혁이 다시 머리를 대고 누웠다.

“별…….”

이마를 팔목으로 덮은 그가 돌아 버리겠다는 눈으로 천장을 응시했다.

희우가 쓰러지듯이 기대 온 순간, 가슴에 뭔가 쿵 내려앉은 것만 같은 충격은 다시 곱씹어도 얼떨떨했다. 그것은 흡사 여진처럼 남아서 거푸 속을 울리고 있었다.

사라질 듯 사라지지 않는 이상한 현상.

서수혁은 주먹을 쥐락펴락했다.

그리 낯설지는 않았다. 영혼 빠진 인형처럼 구는 희우를 볼 때마다 엄습하던 거였으니.

지금 이 순간이 되기 전까지는 단순히 그 꼴을 보는 게 엿 같아서 그런 거라고만 여겼다. 하지만 머릿속에 불쑥 깃들어 버린 하나의 단어가 일말의 여지를 두고 있던 현상에 기어이 이름을 붙여 버렸다.

불안이라는 이름을.

혹시라도 희우가 잘못될까 봐 불안해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는 된통 믿기지가 않았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펌프질이 진행되고 있는 내부의 박동이 그 부정을 잡아 매섭게 꺾고 있었다.

이건, 불안이 아니라면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이거야말로 진정 어이가 없어서 공연히 이마만 부여잡고 있던 차였다. 상반신을 겹친 채로 잠들어 있던 희우가 움칠거렸다. 자세가 불편해서 선잠이 들었다가 희미하게 깬 듯싶었다.

편히 눕혀 줄까 하다가 자신이 움직이면 덩달아 깰 가능성이 높아서 서수혁은 그냥 드러누워 버렸다.

그러고 나니 희우의 머리카락을 쥐고 있던 손의 위치가 애매해졌다. 이걸 어쩌나 싶은 마음에 가만있다가 손가락 사이사이로 파고든 머리카락을 쓸듯이 갈라 내리고는 희우의 등과 허리 부근에 얹었다.

불식간 하나의 행동이 떠올랐다.

잠이 오지 않는다는 제 투정에 그나마 생기가 있을 적의 희우가 보였던 반응…….

서수혁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가 내렸다. 재차 올렸다가 내리고, 또다시 반복.

수 번 반복하는 손짓 아래에서 토닥거리는 소리가 작게 피어났다.

그러자 미약한 뒤척임을 동반하며 꿈틀거리던 몸짓이 멎는다. 허공에 먹히듯 사그라들었던 숨소리가 다시 곱게 들려온다. 자세가 불편할 텐데, 예정에도 없던 섹스의 여파 때문인지 희우는 꿈쩍도 않고 잠을 이어 갔다.

서수혁은 그 밤 내내 희우를 토닥거리다가 한 번씩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날이 밝아 올 때까지 지루함도 잊고 반복된 행동이었다.

* * *

서수혁은 그날부로 희우가 창문 쪽을 응시하기만 하면 바로 옷을 벗기며 달려들었다. 어쩌다가 병실에 남아 희우를 돌보던 의료진들이 당황하여 급히 밖으로 나가는 것도 부지기수가 되었다.

때로는 낮에, 또 때로는 밤에 일어난 일이었다.

오늘 역시도 저녁놀이 지는 하늘을 배경 삼아 시작된 섹스가 어느새 캄캄한 밤이 내려앉을 무렵에 끝이 났다.

땀으로 젖은 몸에 비부가 축축하게 젖어 들었으나 닦을 힘도 없어서 희우는 그저 그의 가슴팍에 기대어 얄따란 호흡만 내쉬었다. 그런 희우의 귓불을 입에 물고서 빨던 서수혁은 지잉, 울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캄캄해진 병실 속, 불빛이라고는 그가 켠 핸드폰 액정에서 뿜어져 나오는 게 다였다.

그랬기에 어렴풋이 깨어 있는 의식이 본능적으로 그리 이끌렸다. 희붐하게 피어오르는 불빛 아래에서 희우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처음에는 본능이었다면 다음에는 의지가 그 뒤를 따랐다.

“응.”

서수혁의 저음이 귓전에서 울렸다. 걸려 온 전화를 받는 동안에도 그가 희우의 귓바퀴를 핥고 있어서였다. 희우의 피부가 부르틀 정도로 타액을 고루고루 바르기를 한참, 그가 쪽 소리가 나게 귓불을 머금었다가 놓고는 핸드폰 너머에 집중했다.

“그냥 뽑아 버리지 그러니.”

뭔지 모르겠으나 지시를 내리는 것 같았다. 어째 섬칫하게 들리는 어조와 다르게 희우의 머리카락을 간지럽히고, 야윈 등줄기를 길게 쓸어내리는 손끝의 움직임은 요요하고 부드러웠다.

건너오는 문장에 간간이 대답을 하던 서수혁이 알겠다는 답으로 통화를 끊고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러고서야 그는 밤하늘보다 더 어둑하게 가라앉은 희우의 동공이 핸드폰에 닿아 있음을 확인했다.

“뭘 그렇게 보니.”

“…….”

“쓸데라도 있어?”

목소리가 어찌나 나긋나긋한지 정말 쓸데가 있다고 한다면 선뜻 허락해 줄 분위기였다. 그러나 희우가 핸드폰에 눈길을 준 건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희우는 작게 울리는 이명 속을 헤매다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오늘…….”

“…….”

“오늘이 며칠이죠……?”

까만 글자가 새겨진 손가락으로 핸드폰을 굴리던 서수혁의 손이 멈칫했다.

대답을 바라고 건넨 질문이 아니었다. 이제는 길이 들 만도 한 짓이었다. 무슨 말을 해도 희우는 아무 반응을 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오늘은 대답이 나왔다.

족히 몇 주간 걸어 잠겨 있던 입이 아주 오래간만에 열린다는 걸 보여 주듯이 희우의 목소리는 완전히 쉬어 있었다. 그뿐일까, 사포로 마구 문지른 것처럼 거칠고 까슬했다.

그럼에도 서수혁에게는 마냥 고막을 감는 보드라운 비단결처럼 들렸다. 그토록 바라 왔던 반응, 가볍게 던진 질문에서 얻을 줄은 몰랐던 뜻밖의 결과라서였다.

서수혁은 제 품속의 희우를 지긋하게 내려다보다가 핸드폰 액정을 두드렸다.

화면에 다시 불이 들어왔다. 그 위로 뜬 숫자를 서수혁이 그대로 읊었다.

“2월 6일.”

2월 6일…….

버석하게 마른 희우의 입술이 그 월일을 무미건조하게 되씹었다. 그리고 반응을 보인 게 감쪽같을 정도로 무심히 눈을 감았다. 해골처럼 수척해진 안색에서 서수혁은 한참 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까무룩 잠이 들었던 희우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날이 밝았고, 침대 위에는 그녀 혼자였다.

새벽녘 접한 시일은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오늘 하루를 보내며 그 판단이 뇌리를 에워쌌다.

적막을 깨기 위해 틀어 놓은 병실 속의 TV에서 송출되는 뉴스 앵커가 습관처럼 날짜를 알릴 때, 회진차 들른 의사가 뒤를 따른 간호사에게 일정 조율 겸 날짜를 물었을 때, 정맥 주사를 위해 의료 기구를 챙겨 온 간호사가 침대 옆 협탁에 내려놓는 일지 같은 것에 써 둔 날짜를 발견했을 때.

흔적은 끝도 없이 몰아쳐 희우의 앞에 거대한 장벽 하나를 세웠다.

뒤로는 이미 낭떠러지밖에 없는데, 장벽은 계속해서 숨통을 조일 듯이 다가와 한 발 한 발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헉.”

주사를 잘만 놓던 간호사가 대뜸 놀라 물러났다. 이제 이 반응도 익숙해졌다. 잠시 자리를 비웠던 서수혁이 병실로 돌아올 때 보이는 반응이었으니까.

희우가 밥 대신 주사를 맞는 시간에 적응이 된 건지 그는 무심하게 침대를 훑고는 소파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의료진들은 서수혁이 무슨 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만 나타났다 하면 정신을 못 차렸다. 눈앞의 간호사도 마찬가지였다.

주사를 위해 가드에 묶어 둔 팔을 잠시 풀어 주고, 용액 주입을 마친 주사기를 희우의 앞에 뻔히 내보인 채로 소파 쪽만 힐끔힐끔 곁눈질하고 있었다.

희우는 반짝이는 주사기의 끝을 물끄러미 보았다. 중천에 걸린 해를 절대 눈 돌리지 않고 보는 것처럼 저 끄트머리에서 반짝 피어나는 빛이 오늘따라 아득하고 눈부셨다.

충동은 고요한 발작처럼 일어났다.

희우는 자신이 손을 뻗어 그것을 쥐는지도 몰랐다. 소리도 없이 행했기에 간호사가 고개를 바로 하여 희우를 제대로 마주했을 때, 그 뾰족한 기구는 이미 희우의 목 끝에 다다라 있었다.

“꺄악!”

간호사의 눈이 커지며 이가 보일 정도로 벌어진 입에서 갈급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녀가 물러나는 바닥 위로 진한 핏방울이 툭, 툭 터져 나오는 게 보였다. 주사기를 짧은 새에 수 번 찔러 넣은 목덜미에서부터 번지는 색감이었다.

그 모든 장면이 슬로모션처럼 느리게, 느리게 펼쳐졌다.

삽시간에 엉망이 된 병실 속에서 무언가가 급히 제 목덜미를 감싸 쥐는 게 느껴졌다.

단단한 손바닥. 언젠가 체감해 본 적이 있는 거다.

아, 그래. 귀가 너무 아파서 제 손으로 퍽퍽 때릴 때 그러지 말라고 만류하듯이 귓가를 꽉 틀어막아 준 그 손이다.

그때와 다름이 없는 서수혁의 손이 주사기를 찔러 피가 터져 나오는 희우의 목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힘으로 억눌렀다.

희우는 기우는 몸을 제대로 세우지도 않고 그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 떼어 내려고 한차례 끙끙거렸다.

베스트 안에 걸친 그의 하얀 와이셔츠에 핏자국이 번진다. 그게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강렬했다. 예전 같았으면 원색적인 색채감에 벌벌 떨었을지언정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두려움을 느낄 단계를 지나갔거나, 그럴 이유를 찾지 못하거나…….

“적당히 안 해?”

아주 깊은 물속에 빠진 것처럼 먹먹하던 오감이 불시에 돌아왔다.

소리가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오며 그 사이를 가르는 사나운 저음이 고막 정 가운데에 내리꽂혔다.

“아양도 정도껏 부려야 먹히는 거야.”

그건 또다시 제 죽음을 방해하는 서수혁의 음성이었다.

속에서부터 견딜 수 없는 울분이 치밀어 올랐다. 자꾸만, 자꾸만 저를 죽음으로 도망가지 못하게 만드는 그를 상대로 희우는 힘겨운 울음을 터뜨렸다.

“저 좀, 좀 그냥, 내버려 두시면 안 돼요?”

머리꼭지는 뜨거운데 몸은 차게 식었다.

얼음과 불을 함께 삼킨 것처럼 속이 마구 뒤엉키다가 끝내 썩기 직전의 쓰레기처럼 부패했다.

“이제, 으, 이제 그만하고 싶어요…….”

수 번 뒤적여 보았으나 의지를 발견할 수 없는 맘속은 이미 쓰레기장이 되었다. 그 어디를 들춰 보아도 희망 따위는 없다. 모두 다 먹색으로 곪아 버렸다.

“오빠, 저, 저 때문에 죽었어요.”

“…….”

“그거 안고, 헉, 살아갈 자신이 없어요.”

다 쉬고 갈라진 음성이 탁하게 주장을 해 왔다. 오래간만에 말을 너무 많이 하니 머리가 핑 돌았다. 아니, 말을 해서인지 피가 한꺼번에 많이 쏟아진 탓인지 구분이 어려웠다.

그러나 희우는 그 혼돈을 놓치지 않았다. 이건 제게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였다.

“그니까 좀, 좀…….”

좀 제발.

제발 죽게 좀 내버려 둬.

팔자. 자신이 태생적으로 가지고 태어났다는 그 소용돌이에 할아버지가 휩쓸렸을 때는 부정했고, 엄마가 휩쓸렸을 때는 의심했다. 태 속의 아기가 죽었을 때는 여지가 한 폭도 되지 않게 줄어들었고 오빠가 죽었을 때는 끝내 확신이 되었다.

다 내가 죽인 거야.

허황하게만 여기던 팔자가 아니고서야 설명할 길이 없었다. 쌓이고 쌓인, 그러고도 모자라 또 쌓인 누군가의 죽음과 말로가 희우의 속에 흙탕물처럼 고여 넘칠 듯이 출렁거렸다.

“그래. 희본이 너 때문에 죽었어.”

귀를 칼처럼 찌르며 들어오는 음성에 희우는 급히 숨을 삼켰다.

여전히 손에서 힘을 빼지 않으며 오로지 아귀힘으로 지혈을 하고 있는 서수혁의 소슬한 동공이 코앞에서 번들거렸다.

“그니까 더 이 지랄 하면 안 되지.”

“…….”

“네가 이따위로 난리 치면 너 위한답시고 뒤져 버린 희본이는 어떡하니. 응?”

희우의 동공에 고인 빛점이 흔들렸다. 선명한 파동을 따라 결연함이 요동친다.

그 기색을 똑똑히 잡아챈 것처럼 서수혁이 얼굴을 조금 더 바짝 디밀며 머릿속에 못질을 하듯이 육성을 매섭게 꽂아 넣었다.

“너 살리겠다고 황천길 건넌 걸 알면 너라도 똑바로 살아야 할 거 아니야.”

“…….”

“그게 희본이를 위한 길이라는 걸 정말 몰라?”

확인 사살이 가슴속에 비수처럼 박혔다. 그 끝에서 꽃처럼 피어난 성에가 심장을 쩡 얼어붙였다.

헛소리.

그저 죽으려고 안달이 난 저를 막기 위해 아무렇게나 내뱉는 개소리.

그걸 아는데도 마냥 틀리다고 단정할 수가 없었다.

자신은 지금, 오빠의 희생으로 이 순간 이 시간 속에 살아 있는 거니까.

많이 다치고, 수도 없이 슬퍼하고, 땅을 치며 비참해하고, 몸을 옹송그리며 외로움에 허덕이지만 그건 어쨌든지 간에 살아 있기에 느낄 수 있는 감정의 타래들이 아니던가.

내가 여기서 다 포기하고 체념한 채 죽으면, 그럼 오빠의 죽음은?

오빠가 제 소중한 목숨까지 바치며 지키려고 했던 게, 살아 있어야만 느낄 수 있는 이런 감정들이었다면…….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번뜩이는 빛처럼 쏟아진 그 말들이 희우의 목과 사지 말단에 새로운 족쇄를 걸었다.

힘들어도, 괴로워도 살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고.

그래야만 하는 거라고.

내가 여기서 죽으면, 오빠의 희생 역시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는 거라고…….

한쪽 손에 쥐고서 고집스레 버티던 주사기가 아래로 툭 추락했다. 죽겠다는 비관적인 의지로 부릅떠져 있던 눈꺼풀이 서서히 아래로 감기며 눈물이 뺨을 타고 흥건히 흘러내렸다.

서수혁이 제 품으로 쓰러져 오는 희우를 급히 안으며 옆으로 손을 뻗었다. 별안간 벌어진 아수라장에 한 발 떨어져 있던 간호사가 서둘러 깨끗한 천을 건넸다.

희우는 목 끝을 세게 지혈하는 힘을 느끼며 눈을 가물거렸다. 자신에게서 튀어 오른 핏방울이 번진 종이가 보인다.

그 위에 써진 날짜.

2월 6일.

오늘은 희본의 생일이었다.

* * *

희우의 퇴원이 예정된 날은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폭우는 아니었다. 가랑비처럼 풀잎이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가 들어 올리는 수준의 비였다.

꼭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듯이 세상이 음울하고 축축한 기운으로 가득 차올랐다. 흐릿한 먹구름이 겹겹이 낀 하늘이 눈물 세례를 멈춘 건 어두컴컴한 밤이 되고서였다.

세 달을 채울 만큼 장구했던 입원이 끝나고 희우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공사다망한 서수혁을 대신하여 한 시간 일찍 병실로 찾아와 짐 정리를 도와준 윤서원이 그런 희우를 부축했다.

의사의 얄팍한 희망은 결국 어긋났다. 희우의 왼쪽 발목 신경은 돌아오지 않았다. 남은 입원 기간 동안 어쩌다가 침대에서 일어나는 경우가 있어도 번번이 비틀대다가 힘없이 넘어지는 일이 반복됐다.

이후 몇 차례의 정밀 검사를 토대로 재활이 필수적인 영구 장애 판단이 내려졌다. 그래도 한쪽만 그런지라 다른 쪽 다리로 지탱하면 되기에 걷지 못할 일은 없지만, 절뚝이는 행색을 면하진 못했다.

“이제 됐어? 갈까?”

희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병실 바깥으로 나서자 사람 하나 없이 조명등만 불이 들어오는 복도가 그녀를 반겼다.

본래라면 늦어도 저녁 안으로 퇴원을 해야 했으나 서수혁에게 급한 일정이 생겨 결국 남들 다 잘 시간에 병원을 나서게 되었다. 밤보다는 아침이라고 보는 게 더 가까울 만큼 깊은 새벽이었다.

본인이 바쁘면 아랫사람을 시켜도 될 일인데, 서수혁은 본인이 직접 희우를 데려가겠다는 것처럼 꿋꿋이 자리를 지키려 했다. 희우가 죽으려는 일념 하나로 난동을 부렸던 순간순간의 기억이 맘속에 남아 가능한 제 가시거리 안에 두고 지켜보려는 것처럼.

새벽의 병원은 고요했다.

입원 끝물, 상담과 재활을 하러 갈 때에 몇 번 거닐었던 복도를 보다가 그와 이어지는 창가로 눈길을 주었다. 빛줄기 하나 발견할 수 없는 먹색의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사실, 희우는 아직도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다만 많은 순간들이 포개어지고 또 포개어져 그녀를 지탱할 뿐.

살기를 포기한 낮과 죽기를 포기한 밤.

역병 같은 죄책감과 사치스러운 그리움, 그리고 실낱같은 책임감이 엉망으로 뒤엉킨 하루.

사사로운 듯 변곡점과도 같은 그 순간들이 덧대어져 자신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거였다.

누군가 일컫기를, 산다는 건 다른 말로 버티는 거라고도 했다. 가지각색의 삶에는 그 색에 걸맞은 무게가 있어서, 그걸 책임감 있게 짊어지고 가는 여정이라고.

그 말의 의미를 희우는 이제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이렇게 버티고 또 버티다 보면 그게 결국은 살아가는 거니까. 그리고 어쩌면, 이렇게 견디는 것만으로도 오빠의 죽음을 잊지 않으며 그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는 길이 될 수 있는 거니까.

까마득한 풍경에 눈길을 주던 희우는 이만 고개를 돌리고 윤서원이 잡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병원 정문으로 나가니 이미 차 한 대가 정차되어 있었다. 윤서원이 뒷좌석 문을 열어 주었다.

서수혁은 그 안에 있었다.

그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한쪽 다리를 보조하기 위해 문을 꾹 붙잡는 희우의 모습을 보다가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감았다. 그리고 안쪽으로 훅 끌어당겼다.

그녀와 윤서원을 태운 차는 주저 없이 출발했다.

어디로 가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빛 한 점 찾아볼 수 없이 어둑한 차창에 눈길을 주었다.

차 내부는 노래 하나 틀지 않아 고요했다. 부우웅. 인적 드문 오전의 도로를 달리는 차 소리만 들렸다. 희우는 어색하게 귀를 만지작거렸다. 이제부터 길이 들어야 할 보청기가 누군가의 숨소리마저 잡아챌 것처럼 순조로이 기능했다.

자정을 넘어설 무렵까지 업무를 보던 강행군을 증명하듯 차에 탄 채로도 서류를 살펴보던 서수혁은 별안간 콩, 콩 하고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제 옆에 얌전히 기대앉아 창밖에 멀거니 눈길을 주던 희우가 어느새 고개를 꾸벅이며 졸고 있었다. 소리는 그녀가 창에 머리를 박으며 나는 소리였다.

그간 약이 자주 들어간 탓인지 희우는 저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앉아 있다가 조는 경우가 잦아졌다.

서수혁은 익숙하게 팔을 뻗어 희우의 머리를 감싸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잠결에 버티려는 듯이 힘을 주는 몸을 가볍게 누르자 금세 반항기를 빼고는 얌전히 기대 온다.

그는 서류를 치우며 드러난 허벅지에 희우의 머리를 눕혔다.

“좀 돌아서 가도 되니까 조용히 가.”

“네, 대표님.”

손가락 끝에서 길게 늘어지는 머리칼을 지분거리며 서류를 읽는데, 자세가 불편한지 희우가 꼼지락거렸다.

며칠간의 병실에서 그러했듯 서수혁은 노련하게 손을 움직여 그런 희우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그러자 잠시나마 의식이 든 것처럼 바르작대던 몸짓이 안정을 머금듯 차차로 잦아들었다.

그렇게 새벽어둠을 지붕 위에 얹은 차가 도로를 가로지르며 달려 나갔다.

도심에서 외곽으로, 외곽에서 더 한적한 가장자리로, 언젠가의 강렬한 충돌로 스키드 마크가 남은 도로를 지나, 마침내 우뚝우뚝 솟은 나무가 에워싼 어느 터에 도착해서도 희우는 곤히 잠이 들어 있었다.

조수석의 윤서원이 뒤를 돌아보았다가 그걸 발견하고 서수혁과 눈을 맞췄다.

“깨울까요?”

“됐어.”

윤서원은 더 말을 붙이지 않고 고개를 정면으로 바로 했다. 그렇게 희우가 알아서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며 차 내부는 정적으로 차올랐다.

희우가 정신을 차린 건 서수혁의 손이 보청기가 둘러진 귓바퀴를 만지작거릴 즈음이었다.

동승자들이 만들어 낸 인조적인 적막 속에서 꽤나 깊은 아늑함을 맛본 희우는 손가락을 움찔 떨며 깨어났다.

여전히 잠기운이 빠지지 않은 이목구비를 선보이다가 슬그머니 상체를 든다.

“도착했어요?”

서수혁이 서류를 내리며 희우를 가만 응시했다.

“응.”

나지막이 답한 그가 손을 뻗었다.

희우의 관자놀이에 먼저 닿았다가 귓바퀴로, 귓바퀴에서 턱으로 떨어진 손이 아직도 거즈를 떼지 못한 목덜미 상처에 닿았다가 이내 멀어졌다.

다 왔다는 말에 주변을 둘러보던 희우는 정면으로 보이는 풍경에 멈칫했다.

자신이 알고 있던, 도심 속의 주차장이 아니었다. 그녀의 입술이 무슨 말을 할 것처럼 한참 달싹거렸다. 그러나 소리는 나올 틈이 없었다. 그러기도 전에, 희우는 차에서 내리는 방법을 택했다.

“여긴…….”

입이 절로 벌어졌다.

눈에 익는 풍경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다. 희우는 홀린 듯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차창을 통해 그녀의 절뚝이는 모양새를 보고 서수혁이 뒤따라 차에서 내렸다.

다행히 희우는 넘어지지 않고 무사히 목적하던 곳에 도착했다.

지난날의 그 자리였다.

느티나무에 설치된 그네가 보이던 자리.

그네는 여전히 존재했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상태로.

아늑한 그 경치를 응시하던 희우가 멈춰 세운 다리를 다시 움직였다. 이내 별장 문 앞에 다다랐을 때 번호 키로 이루어진 도어록이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대신에 문이 열려 있었다.

조심스럽게 문을 밀었다.

“…….”

내부는 비슷하나 달랐다.

지난번 여러 집기와 잡동사니로 번잡스럽게 어질러져 있던 환경이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그뿐일까.

낡고 빛이 바래서 쿰쿰한 냄새도 나고 까슬거리던 나무 바닥이 깔끔한 재질의 폴리싱 타일로 바뀌어 있었다.

구조도 살짝 바뀌었다. 본래 문이 나란히 두 개 있어야 할 벽면이 하나의 문으로 트여 있거나 창문이 있던 자리가 막혀 있기도 했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대공사를 마친 것처럼 별장은 완전히 새 공간으로 탈바꿈되어 있었다.

“여기 이제 내 집이야.”

희우가 고개를 돌렸다.

조용히 제 뒤를 쫓아온 서수혁이 복도를 구분 짓는 중문에 기대서 있었다.

“여기서 살고 싶어?”

희우는 멍하니 그를 마주했다.

“그럼 나랑 살아야지, 어쩌겠니.”

전혀 당연하지 않은 일을 지극히 당연한 것처럼 읊는 목소리에서는 어떠한 의문도 품을 수 없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희우는 저도 모르게 손을 올려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그래.

딱, 이 안에서 뿜어져 나오던 출혈을 막기 위해 있는 힘껏 거머쥐었던 그때의 힘처럼.

반기를 들 생각조차 못 하게 꺾어 버리는 위력 앞에서 희우는 고개를 쓱 돌렸다. 아직 못다 돌아본 내부를 보기 위해서였으나 그녀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달리 있었다.

시선이 한 구간에서 삐걱이듯이 멈추었다.

곧 희우는 믿을 수 없는 걸 본 이처럼 더듬더듬 걸어 나갔다. 몇 번을 비틀거렸으나 끝내 넘어지지 않고 당도한 앞에서 그녀는 천천히 자세를 낮추었다.

어느새 떨기 시작한 손끝이 차가운 앞면에 닿아 느리게 움직였다.

[故 정 희 본]

그건 바로 희본의 유골함이었다.

이미 다 흘려보내어 오빠의 어떤 것도 가질 수가 없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던 희우에게 그것은 깜짝 선물처럼, 반가움의 단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희우는 덜덜 떨리는 팔로 그것을 끌어안았다가 다시 놓으며 위에 새겨진 오빠의 이름만을 계속해서 더듬었다.

한참 그러기를 반복하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서수혁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저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럴 걸 예상했다는 듯이 표정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아니, 어쩌면 이러기를 바라며 준비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가슴 안쪽이 뻐근하게 내려앉았다.

유일한…….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오빠의 흔적을 지켜 준 사람.

무시당하고 이용당하기만 했던, 그리고 잔혹하게 느껴질지언정 이젠 숨이 다했기 때문에 간직할 이유도, 가치도 찾아볼 수 없는 오빠의 마지막을 지켜 준 단 한 사람.

“바다에…….”

유골함에 손을 댄 채로 희우가 입을 열었다.

“바다에 뿌려 줘도 돼요?”

엄마는 늘 사주와 운명을 운운하는 집 안에 묶여 있어야만 했고, 그게 싫어서 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바다에 뿌려 달라고 하였다.

그리고 희본은, 오빠는 일평생을 제게 묶여 있어야만 했다.

남매라는 이유로, 가족이라는 이유로 저를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에 숨이 막히도록 사로잡혀 있어야만 했다. 그러니 마무리만큼은 멍에처럼 두른 모든 책임감에서부터 해방시켜 주고 싶었다.

서수혁은 원하는 대로 하라는 듯이 고개를 비스듬히 까닥거렸다. 용인을 거듭하는 그 태도에서 희우는 오빠를 대신하여 살아남은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정했다.

그러며 그가 어떤 의미로든지 지켜 준 유골함을 재차 돌아보았다.

그보다 한발 앞서, 유골함 뒤쪽 창문으로부터 펼쳐지는 하늘의 빛이 눈동자를 찌르며 파고들었다.

저 멀리서부터 여명이 밝아 온다.

어두움이 물러나고 있었다.

<광시증>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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