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장. 6과 0206 (1) (14/17)

13장. 6과 0206 (1)

바로 혈관으로 주입되어 몸을 휘도는 약 기운 때문인지 온몸이 나른했다. 액체처럼 흐물흐물해진 상태로 희우는 몇 시간 내내 서수혁에게 깔려 침대를 뒹굴었다.

기실 몇 시간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기진맥진 늘어진 채로 눈을 감았다가 뜨면 어떤 식으로든 제 사타구니를 헤쳐 들어오는 그를 맞이했으니. 서수혁은 희우의 안에 제 몸 일부를 담가 놓지 않으면 곧 죽을 사람처럼 굴었다.

입술이 열리고 안으로 줄줄 흘러 들어오는 물이 깜박 든 잠을 깨웠다.

기승위였던 자세가 어느새 침대에 눕혀진 자세로 변해 있었고, 서수혁이 턱을 거머쥔 채 제 입에 머금고 있던 물을 희우의 입에 흘려보내 주는 식으로 수분을 충당시켰다.

그것을 다 받아 마신 후에는 입술을 툭툭 찧는 것들이 느껴졌다.

불가항력으로 입을 벌릴 때마다 청포도와 잘린 복숭아, 오렌지, 꼭지를 딴 딸기 같은 것들이 계속해서 들어왔다. 그제야 그가 전화를 걸어 요깃거리 어쩌고 했던 게 얼핏 기억을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먹는 것도, 자는 것도 모조리 그의 품 안에서 해결하는 사이에 며칠이 꼼짝없이 흐른 듯싶었다.

“…….”

기도에서 폐로 이어지는 구간을 통해 호흡을 하면서도 지금 자신이 제대로 감각하며 살아 있는 건지 의문이 드는 얼굴을 하고 있던 희우가 햇살이 길게 내려앉는 자리를 돌아보았다.

누가 미간을 꼬집은 것처럼 눈살이 작게 찌푸려졌다.

언제부터 햇살이 이렇게나 눈이 부시게 다가오기 시작한 건지.

이런 자신의 불만에도 굴하지 않고 시종일관 반짝이는 그것은 너무나 찬란하여 꼭 저를 약 올리는 것만 같았다. 이처럼 따스하고 온화해도 너는 결코 다시 이걸 체감할 수 없을 거라고.

그 말대로다.

며칠간 노도처럼 몰아친 섹스가 끝나고, 질기게 달라붙던 성감의 여운도 차차로 가라앉으니 이제야 현실이 똑바로 보였다.

더 이상의 회피는 무용한 짓이었다.

있는 힘껏 발버둥을 치며 세상의 반대편까지 도망가도 결국은 따라잡히게 될 쓸모없는 술래잡기. 주어진 현실을 마주한다는 건 그렇게나 잔인한 일이었다.

“아…….”

작게 흘리는 소리가 웬일로 거리감이 얼추 맞게 들렸다. 귀가 트인 느낌이 들었다. 그게 어색해서 희우는 오른쪽 귀를 만지작거렸다.

아무것도 없으리라는 기대를 깨고 귓바퀴에 무언가가 둘러져 있었다.

몇 번의 더듬거리는 손짓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보청기였다. 다음 순간 이명이 들려 괴로움을 토로하자마자 이 귀를 꽉 틀어막던 단단한 손길이 떠올랐다.

그게 여기가 어딘지를 한 번 더 확고히 알려 주었다.

서수혁의 집으로 돌아왔다는 걸 깨달은 순간부터 눈물이 주체할 수 없게끔 흘러내렸다. 지금도 역시 그랬다. 그 기저에 깔린 감정이 안도인지, 좌절인지 또렷이 분간할 수 없었다. 이 사람에게 돌아오게 된 게 내게는 잘된 일인 걸까, 아닌 걸까.

뭐가 됐든 상관없었다.

이제는 정말, 다 상관이 없었다.

희우는 힘겹게 뜨고 있던 눈을 감았다.

그저…… 엄마가 보고 싶었다. 엄마가 살아 있는, 오빠와 함께하는 과거로, 셋이 오순도순 모여 살던 별장에서의 시절로 돌아가고 싶었다.

받아들이는 것조차 고역이 되어 버린 햇살이 선하게 흩뿌려지는 마당과 그 위로 깔린 녹빛의 푹신푹신한 잔디, 어린 저를 위해 제작된 나무 그네와 그를 지탱하는 튼튼한 느티나무.

엄마의 그림 속에 가장 많이 남겨진 그 평화롭고도 아늑한 풍경 속으로.

오빠와 자신이 유산이라고 받게 된 건 그 별장 하나가 전부였다. 역겨운 외가가 품게 될 엄마의 재산은 바란 적도 없었다.

추악한 외가의 인간들에겐 바랄 수도 없을 만큼 순수하고도 투명한 색채감으로 칠된 별장에서의 추억, 그것만이 제일 애틋하고 소중했다.

‘그래도 우리는 잊지 말자.’

‘엄마도, 별장도…… 우린 잊지 말자. 희우야.’

그렇기 때문에 오빠도 그렇게 말했을 거다.

별장, 그 별장만이…….

“…….”

시트에 놓여져 있던 희우의 손이 안으로 말렸다.

“별장…….”

힘없이 벌어진 입술 사이로 제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것처럼 들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다 쉬고 갈라져 볼품이 없었다. 섹스 도중 몇 번이고 속을 게워 내는 바람에 가시가 박힌 것처럼 따갑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에 조금도 신경이 미치지 못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까.

희우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시트를 짚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강원도 방면 6번 국도에서 사고 발생한 걸로 추정됩니다.’

별장의 위치는 강원도 산속이었다.

‘희본이가 죽은 지금, 그게 어디 있는지는 아무도 몰라.’

설마.

설마…….

한번 치켜든 추측은 반드시 확인해 봐야 한다는 걸 알리듯 머릿속에 선명한 적신호를 울렸다.

침대 아래로 내린 두 발에 힘을 주어 일어났다. 희우는 분명히 일어났다고 생각했으나 바로 서자마자 사지 근육이 쥐어짜이는 탈력과 함께 쿵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으…….”

몸부림에 주삿바늘이 빠졌는지 손등을 타고 시큰한 통증이 번졌다. 마음이 비할 데 없이 급한데 몸이 따라 주지 않는 조급함에 이를 악무는 차였다.

벌컥, 문이 열렸다.

누군가가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는 제 쪽으로 다가왔다.

침대 위에 있던 이불을 끌어당겨 몸을 가려 주고서야 희우는 자신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라는 걸 깨달았다.

손길이 서수혁 같지는 않다고 생각했는데, 간신히 목 뒤에 힘을 줘 올려다본 끝에는 오래간만에 마주하는 윤서원이 있었다.

“너 지금…….”

“저 가, 가 봐야 돼요.”

차라리 그라서 나았다. 서수혁이었으면 무서워서 말도 제대로 못 했을 테니까. 그만큼 제게 일말의 아량 정도는 베풀어 줄 것을 기대할 수 있는 윤서원에게 희우는 간곡히 호소했다.

“지금, 지금 제가 가 봐야 하는데.”

윤서원은 자세를 추스르지도 못하는 희우의 몸 위로 이불을 더욱 둘러 주며 당혹스러운 눈빛을 내비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심지를 단단히 굳히며 고개를 젓는다.

“대표님 급한 일정으로 잠깐 자리 비우셨어. 곧 돌아오실 테니까 그때까지…….”

희우는 윤서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병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녜요. 안 돼요. 지금, 저는 지금 가 봐야 해요.”

“대표님이 허락 안 하실 거야.”

다정한 식으로도 물러나 주질 않는 윤서원의 태도에 희우는 터져 나오는 울분을 참지 못했다.

희우가 그의 팔목을 꽉 붙잡았다.

안 돼요, 지금 가 봐야 해요. 놔주세요. 이것 좀 놓아주세요.

고장 난 로봇처럼 그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말만 반복하는 희우를 내려다보던 윤서원이 착잡한 한숨을 내쉬었다. 희우를 붙들고 있던 손이 재킷 안쪽으로 들어갔다가 나왔을 때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

“대표님, 윤서원입니다. 지금…….”

뒤늦게야 휑한 나신을 가리기 위해 주섬주섬 이불을 끌어모으면서도 희우는 그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곧 윤서원이 희우에게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희우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받아 귀에 가져다 댔다.

- 일주일로는 모자랐니? 한 달은 박아 줘야 침대에서 일어날 생각을 안 하겠어?

귀를 찌르는 까슬한 경고성 저음에 사지 육신이 저릿거렸다.

몇 시간이 아니라 며칠이었구나.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라 일주일이나.

새삼스럽게 깨달은 시간의 경과를 모래알처럼 흘려보내며 희우가 급히 뇌까렸다.

“저, 제, 제가 드릴 말씀이…….”

- 나중에.

“장부에 관해서예요!”

잘만 들려오던 건너편의 대답이 멎었다. 희우는 괜히 마음이 졸아붙어 서둘러 덧붙였다.

“장부 지금…… 어딨는지 알 거 같아요, 제가.”

피부를 따갑게 긁는 침묵이 이어졌다.

반응은 한참을 기다린 끝에 나왔다.

- 서원이 바꿔.

희우는 그 잠깐의 전화에도 입 안에 고인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윤서원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묵묵히 귀를 기울이던 윤서원이 “예, 알겠습니다.” 대답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희우를 돌아보았다.

“일어나자. 혼자 준비할 수 있겠어?”

그제야 희우는 허락이 떨어졌음을 깨달았다.

윤서원의 도움을 받아 손목에 연결된 주삿바늘을 제대로 제거한 후 옷을 입고 나온 희우는 윤서원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어딘가로 향했다.

차에 몸을 싣고 있는 동안 머리가 계속 둔했다. 누가 칙칙한 먹구름을 뇌 사이사이에 불어 넣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일강 본사였다.

처음 이곳에 걸음했던 건 밤이었고 지금은 낮이었다. 그래서인지 사뭇 인상이 다른 건물 안으로 희우는 쭈뼛쭈뼛 발을 옮겼다. 

당시 전신이 뭉개지는 것만 같았던 공포심이 여태 남아 있는 건지 심장이 자꾸만 졸아들어서 희우는 윤서원의 등만 보고 걸었다.

그러다 보니 서수혁이 있는 장소까지 금세 도착했다.

회의실처럼 널찍한 공간의 상석에 앉아 담배를 태우던 남자가 삐딱한 시선을 보내다가 이리 오라는 듯이 고개를 까닥거렸다.

희우가 다가가자마자 그가 얼굴 가까이로 손을 올렸다. 희우는 반사적으로 흠칫했다. 그에게 맞은 경험이 있는지라 어찌할 수 없는 반응이었다.

덩달아 멈칫한 서수혁이 질깃한 필터를 끊어 낼 것처럼 씹으며 희우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예상과 다르게 살포시 얹히는 쪽에 가까워서 희우가 꾹 감은 눈꺼풀을 슬금 들었다.

“얘 열 떨어졌다니?”

“네. 안 박사 말로 체온은 정상으로 돌아왔답니다.”

대답은 희우 본인이 아니라 그녀의 뒤편에 선 윤서원이 했다.

“귀는 뭐래.”

“난청에 의한 신경통 맞는 것 같다고 합니다.”

이마를 더듬던 그의 손은 어느새 미끄러져 보청기가 착용된 귓바퀴를 집요하게 더듬었다. 희우의 몸을 마치 제 몸 돌보듯 알뜰히 상태를 체크한 서수혁이 이내 손을 물리며 고개를 느슨히 젖혔다.

“누구 좀 찾겠다고 내가 최근에 급한 일정을 다 미뤄 버렸거든.”

“…….”

“그래서 지금 바빠 뒤지겠는데 너까지 귀찮게 할래?”

그가 반으로 줄어든 연초를 재떨이에 지져 끄며 치뜬 눈으로 희우를 찌르듯이 겨냥했다.

“설마 백주경이 장부를 가지고 있다는 시시한 얘기나 하려고 여기까지 온 거면 실망이야.”

“…….”

“그건 이미 나도 알고 있는 거거든.”

텅 비어 적막만이 흐르던 병실 밖의 복도가 떠올랐다. 그 썰렁함을 틈타 도망치자마자 서수혁을 마주친 시점에서 희우는 얼추 직감했다.

어떤 식으로든지 서수혁이 제 부친을 찍어 누른 것이 아닐까, 하고.

당시 병원에 도주하는 저를 잡을 인력 하나 남겨 두지 않은 건 그만큼 백주경에게 큰일이 벌어져야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싶어서였다. 서수혁이 지체 없이 바로 그 병원을 찾아와 저를 맞닥뜨린 사실 또한 앞선 의견에 힘을 보탰다.

아무래도 그 직감이 사실이 되어 버린 모양이다.

서수혁의 입에서 나온 ‘안다’는 말은 저 액면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리라. 이미 백주경의 신병을 확보하고 그가 오빠를 이용하여 자신에게서 훔쳐 간 장부를…… 되찾아 왔다는 뜻이겠지.

희우는 옷자락을 꾸깃 말아 쥐었다.

“누락된…… 페이지는요?”

“…….”

“그것도, 알고 계세요?”

힘겹게 물꼬를 튼 실토 한마디에 서수혁의 동공을 아우르는 온도가 달라졌다.

처음 직면했던 날, 오빠의 위치를 물으며 제 무릎을 구둣발로 사정없이 짓밟던 그때 그 눈빛이다.

희우는 피부가 차게 식는 긴장감을 어떻게든 감당하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장부가 백주경에게 있던 건 맞아요. 근데 그 안에 중요한 열 장이 누락되어 있다고 했어요. 오빠가, 어딘가에 숨긴 것 같다고.”

“…….”

“그래서, 그래서 백주경이 저를 데려간 거예요. 사라진 그 열 장…… 찾으려고요.”

서수혁이 턱을 당겨 올렸다. 어디 한번 계속 말해 보라는 의도 같았다. 그 태도에 응답하듯, 내내 제대로 그를 쳐다보지 못하던 희우가 처음으로 고개를 똑바로 들며 눈을 맞췄다.

“만약 제가.”

바닥에서부터 긁어모은 용기로 깔깔하게 마른 입술을 열었다.

“제가…… 그 누락된 열 장을 찾아오면…….”

하지만 용기를 품은 보람도 없이 희우의 말은 거기서 멈췄다.

머릿속이 창백하게 질렸다.

찾아오면…….

내가 그걸 찾아와 서수혁에게 건네주면 뭔가 달라질까? 지금 이따위 상황에서, 이 사람에게 장부를 조건으로 바랄 수 있는 게 있느냐는 말이다.

금세 갈피를 잃고 헤매던 의지가 다시 차오르기 시작한 건 눈앞의 남자가 가진 존재감을 온몸으로 인지한 순간이었다.

오늘 역시도 슈트 차림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까만 남자. 지금은 착용하지 않았으나 저를 쫓아오던 병원에서 역시 까만 장갑을 끼고 있었다.

희우의 인생에서 이만큼이나 흑칠을 한 사람도, 또 그게 잘 어울리는 사람도 없었다.

그건 비단 색채감만을 뜻하는 게 아니었다. 그가 지니고 있는 태생적인 분위기와 두 발을 담고 속해 있는 세상 전체를 말하는 거였다.

그런데 그토록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명멸하는 빛을 보았다.

적어도 이 사람은 내가 행할 수 없는 일을 해낼 수 있단 걸 알기에 발할 수밖에 없는 까만 희망.

그에게는 그걸 이룰 수 있는 힘이 있고 지위가 있고 능력이 있다. 마침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이나 다름없는 백주경을 확보해 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그러니…….

“그럼…… 백주경을 죽여 주실래요?”

의지보다 본능이 먼저 뱉어 낸 소리였다.

서수혁의 눈썹이 꿈틀, 요동쳤다. 한쪽으로 빠져 상황을 지켜보던 윤서원 역시 이쪽을 당혹스럽게 바라보는 게 피부로 낱낱이 전해져 왔다.

이들이 왜 하나같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모르지 않았다.

“아기야.”

서수혁이 희우의 손목을 잡아 제 다리 사이로 확 끌어당겼다. 그가 제 품 안으로 쏙 들어온 희우를 첨예하게 응시했다.

“너 제정신이니?”

“…….”

“네가 지금 무슨 소리 하는지 몰라?”

어투만 보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유치원생을 달래는 듯하나 그 안에 내포된 뜻은 그리 유치하지가 않았다. 오히려 살벌했다. 자칫하다가는 싹둑 베일 듯 무진 살벌해서 희우는 도리어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서수혁이 그런 희우의 손목을 아플 정도로 세게 움켜쥐며 의문에 쐐기를 박았다.

“백주경 네 애비라며.”

“…….”

“가족 죽여 달라는 거야, 너.”

가족.

그가 입술을 오므려 만들어 낸 소리가 가슴속에 사무칠 것처럼 박혀 들었다.

희우는 저를 주시하던 서수혁이 제 뺨을 손가락으로 누르듯이 닦는 걸 느끼고서야 또다시 습관처럼 눈물이 고여 올랐음을 알았다.

이제는 수분기가 조금만 새어 나와도 눈가가 아팠다. 물기로 젖고 또 젖다 못해 짓무른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역시 마음이 가장 아프다. 이미 문드러지고 헐어서 다 터져 버린 저 안쪽이…….

“그 사람은, 제 가족 아니에요.”

물기 찬 음성으로 항변하자 뺨에 흐른 눈물을 훔쳐 내던 서수혁이 멈칫했다. 희우가 그에게 잡힌 손목을 빼내 눈가를 박박 문질렀다. 눈알이 빠질 것처럼 아프고 후끈거렸다.

“저한테 가족은 엄마랑 오빠밖에 없어요.”

“…….”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은…….”

소매가 끝없이 젖어 들었다.

나쁘고 그릇된 선택임을 알아도 슬픔에 먹힌 이 마음으로는 도무지 다른 길이 떠오르지 않았다. 굳센 원망이 속에서 검붉은색으로 파도를 쳤다.

그에 꼼짝없이 수몰되어 가던 차, 강한 완력이 다시금 팔뚝을 그러쥐어 왔다.

화들짝 정신을 차렸을 때는 서수혁의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그는 희우의 동공 속에 고인 심경을 샅샅이 파헤쳐 볼 요량처럼 집요스러운 눈발을 보냈다.

“좋아.”

잠시 후 그 기저에 저를 기만하려는 속셈은 깔리지 않았다고 판단했는지 나직이, 그러며 요요히 속삭인다.

“백주경 데리고 회사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네가 직접 장부 가지고 와.”

“…….”

“누락된 그 부분만 찾아오면 네가 보는 눈앞에서 백주경 목 따 줄게.”

파도가 그쳤다.

그럼에도 여전히 속은 새빨간 광증으로 범벅이었다.

* * *

“여기 맞습니까?”

운전석의 김상필이 뒷자리를 돌아보며 물었다.

희우가 어렵게 살려 낸 기억으로 더듬더듬 부른 주소가 내비게이션에 찍혀 있었다. 희우는 멀거니 보내는 시선으로 위치를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내비게이션에는 등록이 되어 있지 않아서 그 주변에 갔을 즈음 말로 다시 설명해야 했다. 별장은 그렇게나 눈에 띄지 않는 안쪽에 위치해 있었다.

마지막으로 가 본 게 언제인지 기억이 희미했으나 가는 길까지 잊지는 않았다. 오빠가 바쁜 와중에 틈틈이 운전 연수를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시간이 나면 별장으로 가는 도로를 자주 달려 본 까닭이었다.

그러니만큼 그건 머리보다 몸이 더 잘 기억하고 있으리라. 반드시 그래 주기만을 바랐다.

‘백주경 데리고 회사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네가 직접 장부 가지고 와.’

‘누락된 그 부분만 찾아오면 네가 보는 눈앞에서 백주경 목 따 줄게.’

잠시나마 갖추었던 도덕성을, 원래 잘 알던 식으로 내버리며 빈틈 하나 없이 귀를 뚫던 남자의 음성이 떠오른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몇 년 만에 제대로 별장을 간다.

엄마가 잠이 들듯이 죽은 집, 그리고 오빠가 마지막으로 향했을지 모를 장소…….

김상필이 모는 차는 빠르게 달려 나갔다.

빌딩이 울창한 소나무처럼 뻗어진 도심을 벗어나 외곽으로 진입하자 점점 건물의 규모가 작아지다가 끝내는 듬성듬성 보일 지경에 이르렀다.

눈에 익는 길목이 저 아래까지 꾹 눌러 둔 기억과 추억을 어제 일처럼 소생시켰다.

많이 늘었음에도 운전대만 잡으면 떠는 저와 그런 제 옆에 앉아 웃으며 긴장을 풀어 주던 오빠의 목소리.

그보다 조금 더 앞선 시점, 이게 앞으로 우리 집으로 가는 길이라며 무릎에 앉은 제 귀에 작게 소곤거리던 엄마의 음성조차 또렷하다.

바깥 경치가 아닌 저를 담는 창밖만 쳐다보며 부서진 채 쌓인 기억 위를 내달렸다.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던 도착지에 이르고 김상필이 짐작대로 룸미러로 희우를 살폈다.

희우는 전방을 응시하며 어디로 진입해야 하는지 방향을 몇 번 알려 주었다.

그렇게 구불구불한 숲길로 들어가 이리 꺾고 저리 꺾기를 한참, 바퀴가 자갈길을 밟는 특유의 소리와 함께 눈앞에 커다란 별장 하나가 나타났다.

김상필이 열어 주기도 전에 희우가 먼저 문을 열고 내렸다. 차 안에서는 맡을 수 없던 자연의 내음이 무해하면서도 짙게 몰아쳐 와 오감을 간지럽혔다.

부는 바람에 한들거리는 푸른 나뭇잎과 연둣빛 잔디, 온통 녹음과 결을 맞춘 듯한 색채감이 현실을 잊게 하는 안정감을 꽂는다.

기다리고 있겠다는 김상필을 뒤로하고 별장 입구로 발을 뻗던 희우가 멈칫했다.

작게 부는 바람에 앞뒤로 흔들리는 나무 그네를 발견한 순간이었다.

‘저기, 나무 아래에 우리 희우가 좋아하는 그네도 하나 만들까?’

엄마의 사랑은 저렇게 선명했다.

오빠나 자신이나 저것을, 저 사랑을 너무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기에 백주경을 믿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반쪽짜리 사랑이라고 해도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넘쳤던 게 기억이 나서, 온전한 사랑을 받으면 과연 어떨까 하는 기대심에.

오빠는 몰라도 희우는 그랬다.

운전 연습 차원에서 여기까지 왔지만, 죽은 엄마 생각에 올 때마다 들어가 보지는 못하고 번번이 발을 돌렸던 게 기억이 난다. 아직은 준비가 되지 않은 마음이라서였다.

그 저어한 기억을 딛고 희우는 현관 도어록을 해체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모든 게 그대로였다.

희우가 어릴 적에 가지고 놀던 색칠 공부 책과 색연필, 심심할 때마다 엄마 옆에서 두드리던 실로폰과 때가 탄 인형, 엄마가 뜨개질로 만들어 준 손가방 같은 것. 그리고 희본이 사용한 수학 교과서와 색색별의 태권도 띠, 구겨진 도복이 있었다.

약간의 변화라면 그 생활감 넘치는 현장 속에 얹어진 먼지와 허공을 부유하는 공허함 정도.

손길을 느껴 볼 수가 없게끔 식은 공기가 울적함을 부추겼다. 잊지 말자고 해 놓고 어떻게 여길 잊고 있었던 건지 모르겠다.

코를 쓱 비비는 걸로 부산스러운 감정을 털어 낸 희우가 그리운 풍경을 뒤로하고 안쪽으로 향했다. 부엌으로 빠지기 전에 나무 틀로 이루어져 지하로 내려갈 수 있는 계단이 나왔다. 연식이 오래된 나무는 한 발을 디디자마자 끼이익, 애처로운 울음소리를 냈다.

그렇게 밟아 밟아 지하실 문 앞에 다다랐다.

02060802…….

희본과 희우의 생일로 이루어진 여덟 자리 비밀번호를 누르자 띠리릭, 단조로운 알림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엄마의 화실은 위층보다 더 눈에 선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여기서 데굴거리며 엄마의 그림을 구경하고, 같이 물감을 콕 찍어 캔버스에 바르던 기억이 또렷하게 남아 있으니까.

무의식적으로 한쪽 벽을 덮고 있는 흰 천을 끄집어당겼다. 먼지가 부옇게 일며 절로 콜록, 하는 기침이 나왔다.

그 아래로 덧대이거나 겹쳐 세워 둔 캔버스가 빼곡하게 등장했다.

모두 다 살아 있던 엄마의 흔적이었다.

오래간만에 마주하는 그림을 보자 절로 눈시울이 붉어졌다. 희우는 감정이 이보다 더 울컥 치고 올라오기 전에 서둘러 화실 곳곳을 둘러보았다.

오빠가 혹시 누락된 장부를 이곳 별장에 숨겼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이 화실부터 떠올렸다. 무어라 딱 잘라 설명할 수 없는 직감이었다.

‘분명 여기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얼마 후, 희우는 분주히 움직이던 몸을 바로 세우고는 짙은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기대와 다르게 화실의 소파나 의자 아래, 벽에 걸린 액자나 창고까지 샅샅이 뒤져 보아도 별다른 게 나오지 않았다.

여기가 아니었던 걸까?

희망이 얇게 스러지며 덩달아 기력이 상실됐다.

미아가 된 사람처럼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던 희우는 산더미같이 쌓인 그림 쪽으로 터덜터덜 다가갔다. 그 중앙에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이곳 별장 위로 지는 노을이 그려진 수채화가 시선을 끌어서였다.

천을 덮어 놓은 덕분인지 그림은 먼지 하나 일지 않은 채로 보존되어 있었다. 그리움을 더듬듯이 그 위를 가만 들여다보던 희우가 일순 멈칫했다.

급히 캔버스를 쥐어 화실 위쪽으로 난 창가를 향해 비춰 보았다. 얇은 천을 타고 투명하게 통과되어야 할 빛이 뭔가에 가로막힌 것처럼 댕강 잘려 나갔다.

“……!”

희우의 눈이 커졌다.

얼른 아래로 내려 왁구에 박힌 타카심을 확인했다. 시간이 오래된 것치고는 녹슨 흔적 하나 없이 깨끗했다.

마치 최근에 다시 갈아 끼운 것처럼.

생각이 그에 미쳤을 때 희우는 캔버스를 내려놓고 서둘러 창고로 달려갔다. 왁구에 박힌 타카를 제거하는 방법은 이미 엄마한테 배워서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희본도 마찬가지였다.

심장이 폭주하듯이 쿵쾅거렸다. 희우는 서둘러 제침기로 타카심을 제거했다. 본래 하나로만 이루어져야 할 캔버스 면천이 두 장으로 겹쳐져 있었다. 그리고 덧대어진 면천 사이에서 한 장의 종이가 나왔다.

희우가 고개를 들었을 때 코앞에는 빼곡히 쌓인 그림이 있었다.

그녀는 황급히 나머지 캔버스들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땀을 뻘뻘 흘려 가며 틀에 박힌 모든 캔버스의 면천을 뜯어냈다.

그리하여 모인 건 열한 장의 종이였다.

열 장의 종이는 어디서 뜯어낸 듯한 흔적과 함께 숫자와 항목 같은 걸로 나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한 장은 편지처럼 반으로 접힌 채 끼워져 있었다.

장부로 추정되는 종이들을 한곳에 모아 둔 희우는 떨리는 손으로 접힌 것을 펼쳤다. 맨 첫 줄이 희우야, 로 시작하는 걸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이건 오빠가 남겨 둔 편지였다.

[희우야

니가 이걸 발견했을 때는 글쎄... 아마 내가 생각한 최악의 상황이 된 게 아닐까 싶다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백주경을 만난 건 세 달 전이었어

대표님 따라서 일 때문에 갔던 자리였고 순전히 우연이었어

이상하게 낯이 익더라

그리고 그 사람한테서 며칠 후에 개인적으로 연락이 왔어 조용히 좀 만나자고 말이야

그때쯤엔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어 그 사람이 우리 아버지라는 거

아기였던 너와 달리 나는 그나마 머리가 컸을 때라 기억이 조금은 남아 있었으니까

내가 뭘 기대하고 그 자리에 나갔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우리에게는 늘 아버지라는 존재가 없었잖아. 그래서 조금 흔들렸나 봐

그랬으면 안 됐는데

내가 생각을 잘못한 것 같아

나보고 일강이 가진 장부를 빼돌려 오라더라 그렇게만 하면 앞으로 너와 내 삶을 책임져 주겠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내가 그런 짓을 하면 나는 물론이고 너까지 위험해질 수가 있는데 말이야

그랬더니 그 사람은 자기가 너를 보살펴 주고 있겠다고 했어

내가 차마 이걸 거절하지 못한 건 이미 내가 그 사람의 눈에 띄었기 때문이야

어떤 식으로든 나를 이용하려고 혈안이 된 눈이었거든

대표님이 그 수작질에 연연하지 않고 나를 계속 믿어 주실지도 의문이었고 정말로 그런 상황이 와서 혹시나 내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지, 계속 생각했어

또 어쩌면, 니가 잘못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이 바닥은 그래

잠깐만 한눈을 팔아도 시체가 되는 세상이야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그랬잖아 오빠니까 내가 널 챙겨야 한다고, 죽기 전까지는 그래야 한다고

그 사람은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너까지 이용할 계획처럼 보였어. 그걸 뻔히 알면서도 도저히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잠깐은 기대도 해 봤어

그 사람에게도 혹시 일말의 양심은 있지 않을까 하고. 이용해 먹으려는 심산인 거 알면서도, 그래도... 같은 피가 흐른다는 사실 정도는 믿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그게 내 실수였어

옛적에 우리랑 엄마를 버린 사람인데 무슨 기대를 가진 걸까

병신 같은 거 아는데 자꾸 후회가 든다

차라리 처음부터 대표님께 솔직히 말씀을 드려 볼걸

그랬으면 지금쯤...

나는 여기서 나가면 바로 서 대표님께 찾아갈 거야 그리고 네가 대표님과 있는 게 확인되면 바로 장부 돌려 드리고 빌 거야

만약 이 계획이 틀어지면 네가 이걸 찾아야만 해

기억하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 두 사람은 절대 여길 잊지 말자고 했잖아

내가 여기 숨겨 둔 장부를 찾으면 대표님께 드려

그리고 넌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고 해

내가 다 꾸민 일이라고, 그래서 넌 하나도 아는 게 없었다고

여기 숨겨 둔 게 노출되지 않았다는 거 아시면 대표님도 너만큼은 용서해 주실 거야

그러기를 기도한다

희우야

나는 네가 알지 않아도 되는 건 모르고 살기를 바랐어

미안하다 희우야

내가 진짜 미안해]

편지 속 글자가 흐려지고 끝내 물기로 축축이 젖어 간다. 한 줄 한 줄 힘겹게 읽어 내려갈수록 그랬다. 그리고 마침내 무게를 잴 수 없는 사과로 마쳐진 하단을 보는 순간, 희우는 편지가 놓인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몸을 웅크렸다.

내내 의문이었다.

백주경이 제게 말한 속사정이 거짓일 가능성은 이미 충분했다. 그 지점에서 오빠가 장부를 가지고 딜을 한 게 아니라 그 반대일지 모른다는 추측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러니까, 백주경이 먼저 오빠에게 장부를 가져오라고 거래를 건 게 아닐까 싶은…….

의문은 거기서 발발했다.

오빠는 대체 이 거래에 왜 응한 걸까?

오빠를 천하의 도둑놈으로 전락시키는, 그러다가 끝내 이런 불명예스러운 죽음에 처하도록 만들 게 뻔한 거래였다. 그건 이쪽 사정을 잘 알지 못하는 희우가 겉핥기식으로만 봐도 자명한 일이었다.

그 이유를, 이 편지를 읽고서야 알았다.

‘나를 이용한 거야.’

오빠가 이 거래에 임할 수밖에 없던 이유는 희우, 자신이었던 거다.

제게 오빠를 들먹였듯이 반대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단지 거래였을까?

아니. 자신을 강제적으로 납치해 끌고 온 것처럼, 그리고 사무실에 가둬 둔 것처럼 오빠에게도 무시 못 할 협박을 했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게 사실이라면.

이제야 모든 게 확실해졌다.

‘오빠는 나 때문에 죽었구나.’

나를 이용한 저열한 협박을 이기지 못해서 끝내 이 거래에 응했고, 그게 결국은…….

편지 위로 물방울이 끝없이 쏟아져 내렸다. 오빠의 글씨 일부가 알아볼 수도 없게 번졌다.

끝이 번져 가는 글자를 볼 때마다 더욱이 속이 곯아 들어간다. 희우는 평소 오빠의 글씨체를 알고 있었다. 성격처럼 단정하고 바른 글씨체였다.

하지만 편지에 적혀 있는 글자는 그렇지 못했다.

목숨줄이 간당간당한 걸 표하듯이 아무렇게나 휘날려 쓴 게 보였다. 이걸 쓰고서, 장부와 함께 급하게 숨겨 놓으며 돌아서던 오빠의 심정은 어땠을까.

자신이 감히 헤아릴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생각만 들었다. 지금 제가 안고 있는 이 감정의 노도보다 백 배, 아니 천 배는 더 무거웠을 테니까.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그런 것도 알지 못하고…….

이제껏 흘린 눈물은 개미의 손톱 수준에 불과했다. 오빠가 무슨 마음으로 이곳에 와 장부를 숨겼는지 알게 되는 순간 희우는 온몸의 수분이 다 빠져나갈 만큼 오열했다. 추억 어린 공간이 울분으로 가득 찬 눈물 앞에서 축축하게 수몰됐다.

기억들이 두서없이 뒤섞이고, 사고들이 지리멸렬하게 떠다녔다. 가장 바라지 않았을 진실로 인해 세상이 뒤집힌 결과였다. 나중에 가서는 숨조차 쉬기 힘들어져 가슴을 퍽퍽 두드려야만 했다.

‘이렇게 말하기 미안하지만, 희본이는 이걸 우리 쪽으로 넘기려고 애를 쓰다가 죽은 셈이야.’

‘나는 희본이가 어딘가에 숨겨 둔 그 페이지도 전부 회수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래야 이렇게 떠나 버린 희본이의 죽음이 헛되이 되지 않을 테니까.’

구멍이라는 구멍으로 기운이 죄다 빠져나가 텅 비어 버린 머릿속으로, 백주경의 목소리가 아우성을 쳤다.

피가 날 정도로 아랫입술을 세게 짓씹은 희우가 더듬더듬 상체를 일으켰다. 오빠의 유언과 다를 바가 없는 편지를 잘 접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한쪽에 모아 둔, 누락된 장부를 쥐고서 화실을 빠져나왔다.

마당에 정차한 차에 기대서서 기다리던 김상필이 별장을 나서는 희우를 발견하고 몸을 바로 세웠다.

그가 품에 들린 종이를 보고 손을 뻗었다. 희우는 종이를 더 꾹 끌어안으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

“제가, 제 손으로 드릴래요. 대표님께…….”

닦아도 닦아도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물기로 불어 터진 희우의 얼굴을 잠시 살펴본 김상필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뒷좌석 문을 열어 주었다.

서수혁이 있을 회사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희우는 헛헛하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바깥을 내다보았다.

빠르게 스쳐 가는 풍경에도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양 아무런 감흥이 일지 않았다.

이게 대체 현실인지, 뭔지.

‘백주경 데리고 회사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네가 직접 장부 가지고 와.’

‘누락된 그 부분만 찾아오면 네가 보는 눈앞에서 백주경 목 따 줄게.’

서수혁의 약속만을 반복적으로 되새기며 품속의 장부를 꾹 그러쥐었다.

이걸 가지고 돌아가면.

그럼 백주경은 죽는 건가…….

고작 이 종이 몇 장을 이유로 오빠를 시체로 만들었던 그 사람이. 엄마가 평생을 의연히 흘려보내지 못한 감정을 유발했던 그 사람이.

그렇게 되면.

백주경이 죽으면.

그럼 모든 게 원래의 자리로…….

의미 없는 나열처럼 길어지던 생각 끝에서 한순간 눈앞이 꺼멓게 먹칠됐다. 다음 순간 아찔한 깨달음이 싸라기눈처럼 쏟아져 내렸다.

모든 게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

돌아올까?

아니,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신이 이 장부를 가지고 서수혁에게 돌아가서, 그가 제 부친의 목을 딴다고 해도 오빠는 살아 돌아올 수 없다. 그렇다고 제게 일어난 일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모든 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뿐.

[네가 알지 않아도 되는 건 모르고 살기를 바랐어]

내내 두루뭉술하게만 느껴지던 오빠의 바람이 이제야 또렷하게 닿았다.

혹시 이런 걸 염두에 둔 게 아닐까.

오빠의 죽음 하나만 곱씹으며 또 다른 누군가를 희생시키고자 하는 마음. 타인을 미워하고, 싫어하고, 증오하고, 진심으로 죽여 버리고 싶어 하는 마음.

오빠는 어쩌면, 자신이 이런 걸 모르고 살길 바란 걸지도 모른다. 지나치게 원색적이라서 한번 저지르고 나면 결코 돌이키지 못하고 평생을 멍에처럼 달고 살아가야만 할 이 감정의 무게를.

“……하.”

그러고 나니 헛웃음만 나왔다.

이 종이가 뭐라고.

대체 이 열 장의 종이가 뭐라고 누군가를 죽이고 살리며 이렇게 사람 하나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가는 걸까.

오감을 에워싼 세상이 무채색으로 돌변했다. 색소가 죄다 빠지며 칠흑에 가까운 색으로 퇴색한다. 모든 게 의미를 상실한다. 지금껏 밟아 온 시간과 앞으로 걸어갈 시간, 그 양단이 전부.

오 선생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자신은 결국 그런 운명이고, 그런 팔자였던 거다.

여기까지 와서 하는 부정에 무슨 의미가 있나. 처한 현실과 처지를 더 우습게 만드는 비겁한 도피일 뿐이었다.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결국은 다 죽게 되는 거다.

지금껏 그래 온 과거처럼 미래 역시도 그렇게 되겠지. 비명횡사한 주변인들의 시체를 지르밟으며 건너온 서글픈 과거처럼, 앞으로 살아갈 나날도…… 햇살조차 버겁고 따갑게 느껴지는 그런 시간들이 되겠지.

일찍이 기대 따위 버린 삶이지만, 이 이상의 절망으로 얼룩지는 것조차 원치 않았다.

다행히 희우는 이토록 지독한 운수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가장 극단적인 회피일지 몰라도, 지금의 자신을 가장 편안하게 만들어 줄 유일한 지름길이었다.

희우는 버튼을 눌러 유리창을 지이잉 내렸다.

나부끼는 바람이 솟구쳐 들어와 그녀의 머리칼에 간지럼을 태웠다. 흔들리는 머리칼이 시야를 가렸을 때 희우는 목숨줄처럼 소중히 쥐고 있던 종이를 날려 보냈다.

팔랑팔랑.

잘 포개어져 있던 종이 열 장이 제멋대로 허공을 가르다가 열린 차창 밖으로 홀홀히 빠져나갔다. 그 자취를 열없이 뒤쫓던 눈길을 들자마자 룸미러로 김상필과 시선이 마주쳤다.

“지금, 뭘…….”

희우의 얼굴에 꽂혀 있던 김상필의 시선이 아래로 쭉 미끄러졌다.

텅 비어 아무것도 없는 그녀의 팔을 확인하자마자 끼이익! 소리와 함께 차가 급정거했다.

김상필이 급히 운전석에서 내려 사방팔방으로 떨어진 장부를 주우러 달려갔다. 그사이, 뒷좌석에서 내린 희우는 그가 열어 둔 운전석에 올라탔다. 그대로 문을 닫고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며 핸들을 확 꺾었다.

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려 추락한 장부를 줍기 바쁘던 김상필이 전면 유리창으로 보였다. 그가 막을 새도 없게끔 발을 내리눌러 속도를 높였다.

쾅!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간 김상필이 주먹으로 보닛을 내려쳤다. 그를 뒤로하고 희우는 지금 막 내려온 도로를 다시 타고 올라갔다.

마지막으로 백미러를 통해 확인한 김상필은 전화를 걸고 있는지 핸드폰을 귀에 대고 있었다.

서수혁에게 연락을 하는 걸까. 저래 봤자 아무런 소용도 없을 텐데.

정확히는 늦었다. 서울 본사에 있을 그들이 아무리 빨리 달려도 여기까지 도착하려거든 적어도 한 시간은 걸릴 터. 그러니 그 틈을 타 최대한 빠르게 실행해야 했다.

정면으로 돌아온 시야가 자꾸만 묽어졌다.

어느새 또다시 터진 눈물이 온 감각을 멍멍하게 만들었다. 이명을 유발하는 난청을 해결하기 위해 착용해 둔 보청기를 거칠게 벗겨 내 조수석으로 던졌다.

운전은 오랜만이었다. 기실 갑작스레 벌어진 상황에 액셀과 브레이크를 제대로 분간해 밟고 있는지도 모르겠는 형국이었다. 그럼에도 역시 몸으로 직접 체득한 게 효과가 있는지 차는 알아서 앞으로 나갔다.

사실, 운전을 잘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희우는 계속해서 속력을 높여 별장으로 향하는 도로를 내달렸다.

이제 더 이상은 싫었다.

장부고 뭐고, 그깟 종이 몇 장에 이런 식으로 시달리고 싶지 않았다.

오빠는 장부가 아니라 자신 때문에 죽은 거다. 장부는 빌미였을 뿐, 그 이면에 숨겨진 건 저를 향한 위협이었으니까.

그게 희우의 결심을 탑처럼 드높게 세웠다.

‘강원도 방면 6번 국도에서 사고 발생한 걸로 추정…….’

정확한 위치를 모르는데도 직감이 들었다.

오빠가 싸늘한 시체가 되어 버려진 장소와 가까워지고 있다는 걸.

높이 올라갈수록 좋았다.

차가 가드레일을 박고 절벽 아래로 추락했을 때 한없이 구르고 또 굴러서 저를 처참히 뭉개 줬으면 하니까.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고통을 겪을 새도 없이…….

산 중턱까지 올라갔을 때 희우는 망설이지 않고 가드레일이 있는 방향으로 핸들을 확 꺾어 버렸다.

콰아앙-!

곡예하듯이 도로 위에서 한바탕 춤을 추던 차가 휙 비틀렸으나 원하는 대로 가드레일을 들이박고 추락하는 일은 없었다. 그 전에 대뜸 맞은편에서 나타난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망막을 찌르고 들어온 게 먼저였으니.

끼이이익, 끼이익- 쿵!

거센 충돌과 함께 절제력을 잃은 차체의 바퀴들이 두서없이 바닥을 긁으며 날카로운 스키드마크를 그려 냈다.

“으…… 헉!”

차체가 흔들리며 여기저기 부딪히는 바람에 덩달아 의식마저 으깨졌다. 차끼리 먼저 충돌하며 1차 충격이, 그다음 빙그르르 돈 차가 도로 안쪽을 장악하는 산의 가파른 절벽과 쿵 부딪히며 2차 충격이 몰아쳤다.

버겁게 터뜨리는 숨결에 비린 피 맛이 넘어왔다. 완전히 넝마가 되어 연기가 피어오르는 차 안에서, 전신을 타고 번지는 산란한 아픔에 허망히 눈만 깜박이던 차였다. 다 깨지고 금이 간 전면 유리로 차 한 대가 어렴풋이 보였다.

희우는 그제야 웬 차가 끼어들어 제 자살을 방해했다는 걸 깨달았다.

잠시 후 그 자동차 운전석에서 누가 내렸다. 언제나 번듯하게 올라가 있는 머리칼이 흐트러져 있었고, 대리석처럼 매끄러운 이마에서는 핏물 한 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도심의 본사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어야 할 서수혁이었다.

그게 쥐톨만큼 남아 있는 현실성을 기꺼이 뭉그러뜨렸다. 꿈을 꾸는 건가……. 그렇다기에는 지나치게 선명한 그가 이마를 문질러 피를 닦아 내며 희우가 타 있는 차로 다가왔다.

운전석 문이 벌컥 열렸다. 바깥에서부터 창처럼 뻗어진 손이 희우의 멱살을 숨도 못 쉬게 움켜쥐었다.

“너 내가 도망가지 말라고 했지.”

울음과 고통으로 힘이 다 풀린 희우의 얼굴에 제 얼굴을 바짝 디민 서수혁이 음산하게 읊조렸다.

맹렬히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고요하면서도 사납게 타오르는 불 같았다.

“희본이가 그러더라고. 너 끈기라고는 쥐뿔도 없다고.”

“흐, 으…….”

“혹시 몰라서 주변에서 대기 타고 있었는데 그러길 잘했네. 안 그래?”

희우의 뺨을 내려칠 것처럼 흉흉한 기류를 내비치던 서수혁은 제 말도 알아듣지 못할 만큼 의식이 희미해진 그녀의 상태를 알아차렸는지 멱살을 놓고는 허리를 감아 끌어 올렸다.

쉽게 딸려 와야 할 몸이 뭔가에 걸린 것처럼 고집을 부린다. 인상을 찌푸리고 아래를 내려다보자 보닛이 처참히 우그러지며 그 아래에 희우의 다리 한쪽이 끼어 있었다.

서수혁이 운전석 문을 지지대 삼듯이 잡고서 발로 그 부분을 쾅쾅 내려쳤다.

몇 번의 험악한 발길질 끝에 희우의 다리를 물고 있던 보닛이 우지끈 펴지며 끈질기게 움켜쥐고 있던 것을 놓아주었다. 겨우 탈출한 그녀의 한쪽 다리는 기이한 각도로 꺾여 있었다.

몸이 허공으로 뜬 희우는 관절 전체를 들쑤시는 격통에 맥을 추지 못했다. 그러면서, 신은 역시나 제 편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아픈 와중에도 멀쩡히 숨을 쉬며 살아 있다는 사실이 그랬다.

‘넌 너보다 더 큰 불한테 잡아먹혀야 해. 그래야 그 사나운 게 멎을 팔자야.’

‘세간에서는 큰 화를 입는다고 표현하지?’

‘넌 그걸 당해야 살아.’

왜 지금 이 순간 그 말이 떠오른 건지.

방울 소리를 밑바닥에 깐 누군가의 스산한 목소리가 고막을 환청처럼 훑다가 이내 페이드 아웃.

온 세상의 빛이 꺼졌다.

* * *

삐, 삐, 삐.

삐이, 삐이.

박자를 타고 울리는 전자음과 이명이 뒤섞인 소리가 의식을 노크하듯이 두드렸다.

생각이 작은 기포처럼 터져 올렸다.

살아 있구나.

멀쩡히 감각하고 작용하는 의식의 발현으로 싫어도 알 수밖에 없었다.

왜지?

왜 살아 있는 거지.

의문이 시커먼 그림자처럼 그 뒤로 따라붙었다. 그도 그럴 게 옅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을 때마다 폐에 깨진 유리 조각 하나가 들어온 것처럼 꺼끌거리고 아릿거렸다.

본능적으로 호흡을 이어 가는데 아주 작게 숨을 들이켜도 알아서 공기가 돌아 폐를 채우는 느낌이 들었다. 의식이 희미한 가운데에도 제 코와 입을 덮는 뭔가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아무래도 산소마스크인 것 같았다.

저 삐빅대는 기계 소리와 산소마스크의 존재가 이곳이 병원임을 소상히 알려 주었다.

왜지.

왜지.

왜…….

서수혁의 차부터 이 산소마스크까지 모든 게 제 마지막을 방해하려 하고 있었다.

척 보아도 이 마스크가 없으면 호흡이 버거워지는 셈이었다. 그럼 별 노력 없이 죽음에 이를 수 있으리라. 그러므로 손을 들어 벗겨 내 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의지와 다르게 손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손목은 물론이거니와 손가락 하나 마음대로 들 수가 없었다. 꿈틀거리며 하얀 이불을 긁는 게 전부였다. 이미 제 머릿속 상상으로는 백 번도 넘게 벗겼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인공적인 마스크를 통하여 호흡은 계속해서 이루어졌다.

그 사실이 못내 서글펐다.

그냥 죽게 좀 내버려 두지.

왜 죽는 것도 맘대로 못 하게 하는 거야.

손을 들기는커녕 눈꺼풀 하나 제대로 들지 못할 만큼 힘에 부친 상태라는 걸 알면서도 울컥했다. 이미 다 메말라 가뭄이 든 줄 알았던 속에서 또다시 눈물이 괴어 나왔다.

차마 뜨지 못하는 눈꺼풀 아래로 비관 어린 흔적이 빗줄기가 되어 흘렀다.

* * *

“대표님.”

윤서원이 휴게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도 서수혁은 아무런 반응 없이 손에 쥐고 있는 종이만을 내려다보았다.

병원으로 이동하자마자 급히 수술에 들어갔던 희우의 옷가지에서 나온 꾸깃꾸깃한 종이, 바로 희본이 동생에게 남긴 편지이자 유서였다.

내내 겉도는 것처럼 답답함을 양상해 내던 의문이 이 편지에 쓰인 내용으로 어렴풋이 가닥이 잡혔다.

누락된 장부를 찾으러 간 희우가 왜 갑자기 마음을 바꿔 백주경이 아닌 스스로를 죽이려 한 건지, 더불어 영리하다고만 생각한 희본이 왜 상황을 이 지경까지 끌고 오게 만든 어리석은 판단을 내린 건지.

남매의 행동 하나만큼은 똑똑히 꿰뚫을 수가 있었다.

“깨어났답니다.”

곳곳이 눈물로 번진 종이를 쥐고 있던 서수혁의 손가락이 살짝 말렸다. 그는 본래 모양대로 접은 종이를 재킷 안으로 집어넣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어깨를 쓰자 근육 안쪽에서부터 뻑뻑한 통증이 잇따라 인상이 작게 찌푸려졌다. 그를 기민하게 알아차린 윤서원은 문가로 향하는 서수혁의 뒤를 쫓으며 성마르게 덧붙였다.

“대표님. 역시 대표님께서도 한동안은 쉬셔야…….”

차와 차가 정면으로 맞부딪혔다. 희우 못지않게 서수혁 역시 몸에 적잖은 부담이 갔을 사고였다.

늑골의 전위로 인한 혈흉이 발생하여 희우가 급히 수술실에 들어간 사이 검사를 받아 보았을 때 서수혁 역시 갈비뼈에 약간 금이 가고 어깨 회전 근개가 파열된 상태였다.

그런 상태인지라 서수혁도 입원을 하기는 했으나 그는 약 사흘 만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지금 굉장히 멀쩡해 보이는 슈트 안쪽으로는 붕대와 복대가 치열한 사투의 흔적처럼 칭칭 감겨 있었다.

오늘로써 열 번을 채웠을 윤서원의 잔소리를 가볍게 무시한 서수혁은 희우의 병실로 향했다. 발 빠른 간호사가 벌써 의료진을 호출했는지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가 침대 앞에 서 있었다.

그들의 틈새로 침대에 눕듯이 기대앉은 여자가 보였다.

희우는 멍하니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목부터 시작해서 상체의 반을 뒤덮은 붕대와 제일 작은 사이즈를 입혔는데도 아빠 옷을 입은 것처럼 커다란 환자복 위로 둘러진 복대, 바지가 흐트러져 올라간 다리 쪽의 깁스와 그 외 곳곳에 붙은 거즈가 그녀의 처참한 상태를 시각적으로 알렸다.

경추 4번과 늑골 세 대 골절, 왼쪽 발목의 완전 파열, 그 외 온몸을 휘감은 수두룩한 타박상과 열상으로 전치 15주에 버금가는 부상을 입은 희우는 약 삼 주 만에 깨어났다.

막 입원을 했을 무렵에는 흉강 내에 고인 피 때문에 호흡도 자가로 하지 못하던 상태였다. 이 주가 넘도록 산소마스크를 달고 있다가 며칠 전에서야 간신히 자가 호흡이 가능할 정도로 회복이 되어 겨우 그걸 제거한 참이었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마쳐졌다는 의사의 말을 똑똑히 기억한다. 그러나 지금 침대에 있는 희우를 보면 그 말 자체가 의심스러워질 지경이었다.

눈을 뜨고, 제대로 호흡하며,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음에도 이미 죽은 사람처럼 보였다.

주위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든지 간에 허공만 응시하며 금방이라도 그 자리에 꺼질 듯이 잔재하는 음울한 기류가 그 요인이었다.

그날 희우는 의사나 간호사가 건네는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단지 창문만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을 뿐. 병원의 가장 높은 층인지라 구경할 만한 나무나 잎새 하나 없는 고리타분한 전경이 뭐 그리 재밌다고, 거기서 도통 눈을 떼지 못했다.

“기본적인 검사가 필요하기는 합니다. 그, 저희가 한참 수술을 진행하던 중에 왼쪽 다리의 신경이 반응하지 않는 정황을 발견했습니다. 신경 문제는 환자분이 깨어나셨을 때 확실히 진단할 수 있는 부분이라서 제대로 확인을 하진 못했습니다만…….”

“큰 문제입니까?”

“신경 감각에 문제가 발생한 거면, 예, 아무래도 그렇죠. 장애가 생기신 걸 수도 있습니다.”

쩔쩔매며 고하는 의사를 앞에 두고서 서수혁은 과거의 잔상을 되짚었다.

희우를 차에서 빼낼 때 한쪽 다리가 끼어 빠지지가 않았다. 보닛이 통으로 우그러지며 그쪽 전체를 압박하고 있었던 탓이었다. 짚이는 거라고는 그것밖에 없었다. 문제는 바로 그 지점에서 발생한 거였다.

“조금만 이따가 확인해 봅시다.”

의사의 시급한 맘을 알지만 지금으로써는 그런 답밖에 줄 수가 없었다. 깨어나기 전보다 깨어난 후의 상태가 더 심각해 보이는 희우의 모습 때문이었다.

실제로 희우는 그 이후로도 아무런 반응을 하고 있지 않았다. 전신이 엉망으로 짓이겨진 꼴을 해서는 아프다는 소리조차 하나 하지 않았다. 그저 이미 죽고 이 사태를 관망하는 망령처럼 병실에 존재하기만 했다.

“저, 그리고 대표님께서도 정밀 검사를 다시 한번 받아 보시는 게 어떠신지요. 그때 부상이 가볍지 않으셨는데 너무 일찍 퇴원을 하셔서…….”

의사는 이것조차 제 할 일임을 어필하듯 조심스럽게, 그러나 끈질긴 기색으로 물어 왔다.

서수혁이 눈가를 희미하게 찌푸렸다. 희우나 살리라고 꽂아 둔 작자가 자꾸 제 상태를 들먹이며 진작에 자른 얘기의 꼬리를 왜 물고 늘어지는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라서였다.

“나는 됐습니다.”

“그래도…….”

환자가 됐다는데도 의사가 포기를 모르는 것처럼 나직이 고하려는 차였다.

바깥 복도에서 황망한 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문이 큰 소리를 내며 열렸다.

“선생님! 지금 정희우 환자가……!”

사색이 된 간호사의 얼굴에 서수혁의 낯이 일그러졌다. 그는 의사보다 더 빠르게 일어나 병실로 향했다.

아연실색하던 간호사의 반응처럼 병실 내부는 엉망이었다. 아마도 이 난리를 벌였을 주범은 창문 아래에 맥없이 주저앉아 있었다. 그 옆으로 간호사 둘이 팔목을 붙잡고 있었다. 지탱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만류처럼 보이기도 하는 몸짓이었다.

“뭐야.”

잔뜩 꼬인 실타래를 삼킨 것처럼 가시지 않는 답답함에 묻자마자 그를 따라 헐레벌떡 쫓아온 간호사가 아연한 기색이 사라지지 않은 어조로 설명했다.

“가, 갑자기 창문으로 뛰어내리려고 하셔서…….”

그 말을 듣자마자 깨어난 이래 집요하게 창밖만 응시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이가 으득 갈렸다. 그런 생각이나 하느라고 주변에 일절 반응도 안 하고 넋을 빼고 있었던 건가.

서수혁이 창가 쪽으로 저벅저벅 다가갔다. 그가 뿜어내는 위압감을 이겨 내지 못한 간호사들이 서둘러 물러났다. 저를 말리는 손길이 사라지자 희우는 다시 바닥을 짚으며 더듬더듬 일어났다.

서수혁은 갓 태어난 아기 사슴처럼 한쪽 다리에 힘을 제대로 주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뻣뻣한 나무 토막을 갖다 붙여둔 양 깁스를 둘둘 두른 쪽의 다리가 말썽인 게 한눈에 보였다. 장애 어쩌고 하던 의사의 말이 귓전을 메아리처럼 사납게 쳐 댔다.

안간힘을 써서 벽을 짚고 일어나려는 희우를 지척에서 응시하다가 그녀의 손이 창문틀을 짚었을 즈음 허리를 홱 낚아챘다.

침대까지 향하는 동안 희우는 반항도 한 번 하지 않았다. 그게 진정 혀를 차게 만들었다. 발버둥을 칠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다는 게 한 가지의 뜻으로밖에 와닿지 않아서.

그 하잘것없는 기력까지 긁어모아 이 세상을 하직하는 데에만 온 힘을 쏟아붓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그야말로 죽기 위해 사는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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