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장. 가족과 타인 (3) (13/17)

12장. 가족과 타인 (3)

“뭐?”

백주경의 음성이 자칫 삐끗할 기세로 크고 갈급히 터져 나왔다.

“도망을 치다가 쓰러져?”

몇 달에 걸쳐 공을 들인 회견을 통해 중국 무역 회사와 무사히 MOU 체결을 마치고 나오는 길이었다. 안 풀리는 일이 천지인 와중에 그나마 이 사안은 원만하게 마무리가 되어 그럭저럭 기분이 좋던 차였다.

하지만 그 컨디션의 고조는 오래가지 못했다.

호텔에서 가진 자리인 데다가 대외적 이미지를 생각하여 인원을 최대한 적게 데려온 까닭에 간만에 홀로 주차장으로 향하던 도중, 수하로부터 걸려 온 보고 전화 때문이었다.

“가둬 놓고 지켜보라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상황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음산한 주차장 내부에 백주경의 타박이 웅웅,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옆에 수하가 있었다면 정강이를 한 대 걷어차고도 남았을 기세였다. 고공을 휘젓다가 금세 추락한 기분이 그의 얼굴 위로 험악하게 드러났다.

“바로 병원 보내야지, 그럼. 그대로 뒤지게 놔둘까? 얼른 이 닥터 라인으로 연락해서 입원시켜!”

쯧, 어떻게 된 게 작금 들어 제대로 되는 일이 없는 기분이었다.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최근 들어서 제 입맛대로 움직이며 제대로 일을 처리하는 새끼가 없었다.

간신히 손에 넣은 장부는 중요 부분이 다 잘려 나간 상태고, 유일한 희망이 되어 줄 거라고 여긴 자식은 쓸모라고는 쥐뿔도 없고.

‘착각이었나.’

특히나 후자에 실리는 실망이 적잖았다.

백주경은 지난날 호텔 라운지에서 가졌던 만남을 복기했다.

윤서원을 통해 자신이 보낸 경고는 서 대표에게 똑똑히 전해졌으리라. 그러나 일강 측에서는 현재까지 어떠한 액션도 취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태에 씨물을 뿌려 아기를 품게 한 데다가, 납치까지 감행하며 데려오는 데에 쓰인 꼬리를 순식간에 알아내고, 아랫것들에게 꼬박꼬박 경칭도 쓰게 하고…….

그 모든 단서들은 아무리 봐도 보통 이상의 감정을 품은 것 같았는데.

하기야, 서수혁과 순정을 하나로 묶으면서도 동시에 그걸 비웃어 대지 않았던가. 그만큼 우습고, 어이가 없고, 허황되게 다가온 가정이었다.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가정에 너무 맹목적인 믿음을 쏟고 있었나 보다.

이제 나도 늙어 빠진 퇴물 다 됐군.

스스로의 직감을 그런 식으로 힐난하며 백주경은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

기억 속의 차가 정차되어 있던 위치로 가던 중, 백주경은 돌연히 멈춰 섰다. 지금 막 꾸짖기 바쁘던 그 직감이 매서운 형태로 피부를 할퀴어서였다.

그는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다가 슬금 뒤를 돌아보았다.

분명 누군가 제 뒤를 따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고개를 돌린 끝에 보이는 이라고는 아무도 없었다. 주변에 깔린 건 일렬로 나열된 무채색의 자동차 행렬뿐이었다.

백주경은 맹금류처럼 가늘게 뜬 눈으로 이곳저곳에 신경을 흘려보냈다. 그럼에도 역시 달라지는 건 없었다.

“뭐야?”

착각이려니, 치부하고 싶었으나 한번 고개를 든 위화감이 강렬했다. 맘 한구석에 닦이지 않은 진흙이 묻어 있는 것처럼 찜찜했다.

실력만큼이나 눈치와 운이 강하게 작용하는 게 바로 이 바닥이었다. 때로 거스를 수 없는 직감의 울림을 통하여 목숨을 구하기도 하는 법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촉이 깃든 그 순간의 오싹함을 간과하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그렇다고 한들 기다려도 기다려도 아무런 변화가 없는 장면을 앞에 두고서까지 긴장에 잠길 필요는 없었다. 한참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도 바뀌는 건 전무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예민해진 기분이 괜히 심술이라도 부린 건가. 백주경은 머쓱히 뒷머리를 쓱쓱 매만지고는 다시 앞을 보며 걸어 나갔다.

왠지 모르게 감이 좋지 않아 걸음에 속도를 높였다. 오늘, 하필이면 자리가 자리인지라 일반적으로 데리고 다니는 수족의 반 이상을 떼어 놓고 왔다는 게 결점이라면 결점이었다.

그 불안은 기억하던 자리에 얌전히 놓여 있는 자차를 발견하고서 조금 사그라들었다.

뒷좌석의 문을 열고 들어와 앉은 그는 본인이 직접 이 닥터에게 연락을 넣으려고 했다. 아랫놈들이 또 어느 지점에서 실수를 유발할지 모르니 이 닥터에게라도 단단히 주의를 줄 작정이었다.

이 닥터에게 연락을 넣어 통화를 하던 도중, 백주경은 차가 아직도 출발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출발 안 하고 뭐…….”

룸미러를 통해 운전석에 앉은 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형언할 수 없는 아찔함이 벼락처럼 정수리를 찍었다.

“……이 씨발!”

직감적으로 제 수족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급히 전화를 끊고 차에서 내리기 위해 손잡이를 그러쥐는 순간이었다.

제대로 당기기도 전에 문이 바깥에서 먼저 벌컥 열렸다. 고개가 성급히 돌아갔다. 달도 뜨지 않은 밤처럼 시커먼 동공이 시선의 끄트머리에서부터 치고 올라와 중앙을 장악했다. 이어 허공을 휙 가른 칼이 백주경의 가슴팍에 꽂혔다.

“아악!”

날붙이에 써걱 썰린 살점이 상하좌우로 찢어지며 진홍색 핏물을 뿜어냈다. 순식간에 뚫린 안쪽에서부터 눈앞이 명멸하는 통증이 빗발쳤다.

차체가 다 흔들릴 법한 외침을 내지른 백주경이 핏발 선 눈으로 제 가슴팍에 칼을 쑤셔 박은 서수혁의 팔을 거머쥐었다.

무슨, 힘이……!

서둘러 떨쳐 내려고 했으나 아무리 온 힘을 다해 밀어 내도 꿈쩍하지 않는다. 정신을 삼킬 것처럼 범람하는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백주경을 앞에 둔 채 서수혁이 태연하게 인사했다.

“안녕, 장인.”

남의 갈비뼈 사이에 칼빵을 선사한 그가 벌겋게 익은 백주경과는 퍽 다른 건조한 얼굴로 뇌까렸다.

“표정이 왜 이래.”

“이, 씨펄, 니미, 랄 새끼가……!”

“이걸 원해서 나보고 직접 얼굴 비치라고 한 거 아니었어?”

백주경은 허여멀건 정도를 넘어가 시푸르게 질려 가는 낯짝으로 부들부들 떨었다. 저를 어떻게든 밀어 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그를 보며 서수혁이 픽 웃었다.

그러더니 보란 듯이 가슴팍에 쑤셔 박은 칼 손잡이를 빙글빙글 굴려 대며 연약한 살점을 헤집어뜨렸다.

“아악! 악! 아아악……!”

어린아이가 자그마한 벌레를 순진한 악으로 가지고 노는 것처럼 무력 차이는 실로 압도적이었다.

뭐든지 우위를 선점하는 자가 이긴다. 그게 무력만큼이나 정론처럼 통하는 세상이 바로 이 바닥이었다.

멀쩡한 상태였다면 몰라도 흉부에 나이프가 꽂힌 상태에서 백주경은 이미 그에게 한쪽 무릎이 꿇린 거나 진배없었다. 이제 남은 건 나머지 한쪽이 마저 꿇리느냐, 온갖 기를 쓰고 버티느냐였다. 그게 곧 생과 사를 결정짓게 되는 일이었다.

단단한 뼈와 그 주위를 띠의 형태로 두르는 근섬유, 그리고 마지막 옹벽처럼 뭉친 살점이 무자비하게 뒤틀리고 벌어지는 극통에 식은땀을 줄줄 흘리던 백주경의 몸이 차차 옆으로 기울었다.

비좁은 차 뒷좌석에서 불편하게 옥신각신하던 서수혁이 그런 백주경의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겨 차 밖으로 끌어냈다.

움키고 있던 손을 아무렇게나 내팽개치자 백주경은 제대로 몸을 세우지도 못하고 휘청거렸다.

“헉, 헉…….”

가슴팍이 너덜너덜 찢겨져 피가 홍수처럼 터져 나오는 상황에서도, 서수혁에게서 멀어져야 한다는 자각은 있는지 그가 절뚝거리는 위태로운 모양새로 도망을 갔다.

서수혁은 양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산보라도 하는 느낌으로 그 뒤를 여유롭게 쫓아갔다.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음에도 거리를 벌리고 쫓아오는 태도는 다분히 악질적이었다.

백주경이 지나가는 길목마다 핏방울이 뚝뚝 떨어져 새로운 이정표를 만들어 냈다.

자신이 몸소 흘리는 선지피로 남겨지는 흔적을 보며 백주경은 전해 듣기만 했던 서 대표의 괴담이 떠올랐다. 그가 자아낸 핏줄기가 일강 본사 내에 길을 만들어 냈다는…….

“씨발, 헉, 다 어디, 헉, 어디 갔…… 어, 제기랄……!”

“누굴 그렇게 찾아. 네 똘마니들?”

뒤에서 대답처럼 돌아오는 말이 저승사자가 든 낫처럼 귀를 써걱 썰어 갔다. 백주경은 차마 뒤를 돌아보지 못했다. 어느새 피와 땀으로 흠뻑 전 몸뚱어리를 끌고 조금이라도 서 대표와 거리를 벌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미 다 저승 갔지, 뭘 묻고 있어.”

그 행동이 옳은 선택이라는 건 서수혁이 심상하게 덧붙이는 전언이 몸소 가르쳐 주었다.

징조가 좋지 않았다.

정말로, 좋지 않았다.

대체 언제부터 지켜보고 있었던 걸까.

언제부터 뒤를 쫓고 있었던 걸까.

이사인 자신의 스케줄은 가장 가까운 최측근이 아니고서야 아무도 알지 못하는 대외비였다. 오늘같이 대동하는 이들이 적은 일정은 더더욱이 그랬다. 대관절 어느 틈새에서 누수처럼 정보가 샜는지 알 턱이 없었다.

이 자리에 앉은 뒤로는 쉽사리 느껴 본 적이 없던 공포심이 척추뼈 사이사이로 파고들어 신경을 긁었다. 그건 움직임에 동반되는 고통이 심해질수록 진해져만 갔다.

전혀 머뭇거림 없이 신체에 칼을 꽂아 넣고는,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그것을 굴리며 저를 구경하던 순수한 악의를 헤아리자 목구멍이 아프게 조여들었다.

“윽, 허억……. 헉.”

앞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채 되는대로 도망을 가던 백주경은 머지않아 주차장 기둥에 행로가 가로막혀 멈춰 섰다. 그사이 포식자처럼 그의 바로 뒤까지 바짝 쫓아온 서수혁이 힘 풀린 오금을 퍽 걷어찼다.

“커억!”

돼지 멱 따는 듯한 비명 소리를 낸 백주경이 기둥 앞에 고꾸라지듯이 주저앉았다. 서수혁이 살짝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 넘기고서 그 앞에 다리를 굽혀 앉았다.

“내가 왜 약속 장소에 서원이를 대신 보낸 건지 진짜 몰랐어?”

그건 이런 습격을 벌인 장본인이라기에는 믿기 힘든 어조였다. 마치 네가 모르는 바를 선심 써서 말해 주겠다는 듯 부드럽고 유한 어조였으니.

“너 이렇게 될까 봐 그런 거야.”

서수혁이 구부린 무릎 위에 팔을 길게 걸쳤다. 까만 가죽 장갑의 끝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여전히 생생한 피의 흔적을 만들어내고 있는 그가 비스듬히 기울인 고개로 백주경을 빤히 직시했다.

“이, 싸가지 없는, 쿨럭, 새끼가…… 헉…….”

단지 꽂아 놓기만 했다면 모른다. 그럼 출혈량이라도 막을 수 있었을 거다. 그러나 서수혁은 행동에 일말의 자비도 두지 않았다. 그 칼날 손잡이를 가지고서 내부를 찢어발길 기세로 이리저리 궁굴려 대지 않았는가.

그 결과로 백주경의 깔끔한 슈트 앞섶은 이미 시뻘건 피로 흥건히 젖어 들었다. 뭍으로 끌려 나온 물고기처럼 퍼덕거리기 바쁜 그 몰골을 무심하게 바라보던 서수혁이 픽 웃었다.

“남의 애를 개 취급하던 것치곤 본인 꼬락서니가 영 시원찮으시네.”

지금 이 모욕이 어디에서부터 기인이 된 건지 모르지 않았다.

‘나는 분명히 서 대표를 불렀는데…… 오라는 양반은 안 오고 서 대표 개가 왔네?’

따지자면 자신이 먼저 그의 비서에게 건넨 모욕이 도화선이 된 격이었다.

백주경은 실핏줄이 터져 동공에도 피가 걸쭉히 고인 것만 같은 눈으로 서수혁을 바라보았다. 본인이 일컬은 꼬락서니를 느긋하게 훑어본 서수혁 역시 그를 똑바로 마주해 왔다.

그 순간 백주경은 한 가지 단어를 떠올렸다.

교란종.

멀쩡히 살아가던 개체를 남김없이 잡아먹으며 순식간에 먹이 사슬의 피라미드 꼭대기를 장악하는…….

“그래서.”

고작 그것만이 아니었다.

어느새 혼미해진 의식을 따라 일그러지는 시야 속에서도 흐려지지 않은 서수혁의 동공은 악마의 것처럼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저 꺼먼 망막 위로 둥글게 고인 건 안광이나 윤기 같은 게 아니었다.

“내 애 뱄다는 네 딸은 어딨니?”

회까닥 돌아 버린 광기라 봄이 옳았다.

* * *

병원 특유의 냄새가 났다.

소독약처럼 한없는 백색이면서 코끝을 탁하게 만드는 냄새.

희우는 이 냄새를 알고 있었다.

엄마가 잠이 든 것처럼 죽었던 중학생 무렵, 장례를 치른 후로도 두 달 가까이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다가 끝내 영양 부족으로 쓰러져 입원했을 때였다.

그때 희본은 처음으로 희우에게 화를 냈다. 희우는 그런 오빠를 앞에 두고 엉엉 울었다.

‘엄마가 나 때문에 죽은 것 같아.’

생이 저문 사람은 이만 보내 주고, 이제는 일상으로 돌아와야 함을 알지만 그게 쉽사리 되지 않은 건 마음을 돌덩이처럼 짓누르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따지고 보면 엄마는 호상이었다. 병치레로 오랜 시간을 골골거리며 앓았다기보다는 갑작스러운 증상 발현으로 세상을 떠났으니. 한밤중 발생한 원인 불명의 지주막하 출혈이 요인이었다.

그 과정에서 희우가 이런 죄책감을 떠안을 만큼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 건 결단코 아니었다.

그럼에도 죄책감이 옅어지지 않는 건 다, 외가로부터 수없이 노출되어 온 폭언 때문이었다.

‘우리 집안 말아먹을 거란 팔자가 어디 가겠어. 할아버지에 이어 지 애미까지 끌어들인 거지, 뭐. 오 선생이 그랬잖아. 쟤 주변에 있으면 다 죽을 거라고. 남 잡아먹는 팔자가 별건가, 저런 거 아니겠어?’

엄마의 장례식에서 몇 년 만에 만난 외삼촌이 저를 향해 눈을 부라리며 꽂은 석얼음 같은 비수가 가시지 않았다.

자신이 함께 살기 시작할 무렵부터 병색이 짙어진 외할아버지는, 단지 시기상의 우연이라고 여기며 넘길 수 있었다. 그땐 그게 결코 말도 안 되는 일임을 매 순간 주지시켜 주는 엄마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엄마마저 그렇게 떠나 버리니 더는 헛소리로 여기며 넘길 수가 없었다. 그렇게 혼곤해진 마음이 번번이 식욕을 꺼트리는 바람에 끼니를 거르는 게 습관처럼 되었고, 그러다 입원까지 가게 된 거였다.

‘아니라고 했잖아. 너 때문에 죽은 거 아니라고.’

나긋나긋한 엄마의 성정을 닮은 오빠에게서 그렇게 큰 소리가 난 건 드문 일이었다.

희본의 표정은 손에 넣고 마구 구긴 종잇장 같았다. 그렇게나 험궂은데 희우는 그 위에 밴 게 분노가 아닌 슬픔임을 알았다.

‘너, 그 팔자 얘기 하는 거 누구보다 싫어한 게 엄마야.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엄마 일로 네가 이러고 있으면 어떡해.’

분개심 같기도 하고 울분 같기도 한 감정이 실린 면박에 희우는 울음을 그치고 흥건해진 얼굴을 박박 문질렀다. 그리고 병원 밥으로 나온 식사를 꾸역꾸역 입에 밀어 넣었다. 밥알에서 눈물로부터 밴 짠맛이 났었다.

그 당시 맡았던 병원 냄새가 지금도 나고 있었다.

희우는 희미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의식이 하나둘씩 깨어나자마자 입이 저절로 열렸다.

“저기요…….”

아른거리는 시야에 누군가가 보였다.

희우가 반사적으로 그를 붙잡았다. 손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아서 붙잡았다기보다는 스쳤다는 표현이 옳았다.

개미만 한 목소리로 불편함을 호소했다.

“저 배, 배가 너무 아픈데…….”

“환자분, 정신 드세요?”

“배, 으, 배 아파…….”

누군가의 얼굴이 제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간호사 같았다. 미끈한 곡선을 그리는 입술이 붕어의 그것처럼 뻐금뻐금, 벌어졌다가 말았다가 했다.

희우는 감각이 완전히 상실된 것처럼 잘 들리지 않는 청각에 온 힘을 기울였다.

“지금…… 유산으로 소파술…… 때문에 통증 있을 수…… 너무 힘드시면 진통제…….”

뭉쳐져 한 단어로 이루어졌다가 다시 형태소로 흩어지기 반복하는 음조 속에서 희우는 한 단어만큼은 분명히 잡아챘다.

유산.

“유, 산?”

쩍쩍 마른 입술로 그 단어만 내뱉자 간호사가 무어라 더 말을 했지만 제대로 들리지가 않았다.

아니, 아까보다는 조금 더 소리가 선명했으나 뇌에 담기지 않고 그대로 통과해 버렸다.

“아기 그럼 없, 없어요……?”

물을 다 짠 걸레 조각처럼 형편없이 갈라진 숨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간호사가 뭐라고 더 말했다. 여전히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몸만 여기에 놓여 있고 정신은 바닥을 향해 꺼지고 또 꺼져 가는 것만 같았다.

이제 아기 없어요?

이번엔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물음을 혀끝으로만 머금으며 희우는 버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깨어났을 때는 모든 게 끝난 후였다.

제대로 실감을 하고 받아들이기도 전에, 이미 그 존재가 사라져 버렸다는 현실이 외면할 수 없는 과제처럼 주어졌다.

이번에도 똑같았다.

나는 아직 여기 있는데, 현실은 잔인할 만큼 저 멀리 앞서가서 바짝 약을 올리는 것만 같았다.

손등에 꽂힌 링거 줄을 타고 용액이 뚝뚝 흘러내렸다. 저 안에 담긴 게 진통제일지 수액일지 모르겠지만 하등 쓸모가 없었다. 이렇게나 아픈데 이런 거추장스러운 게 다 무슨 의미가 있나.

유산을 접하며 희우가 떠올린 건 하나였다.

‘너, 남 잡아먹는 팔자라고 들어 봤니? 그게 딱 너 같은 애를 두고 하는 말인데.’

팔자.

그놈의 팔자.

지긋지긋하다 못해 진절머리가 났지만 이런 상황에 처하니 가장 먼저 그 얘기가 떠오르는 건 불가항력이었다.

어쩌면 이 안에 품어져 있던 아기도 그런가.

끝내 이렇게 되어 버린 것도 나의 거지 같은 팔자 탓일까.

내 주변은 왜 이러지?

정말로 내가 불인 걸까? 마른 들판에서 피어나 눈에 보이는 생명이라면 족족 잡아 삼키는, 그런 불인 건가.

혼자 놓인 병실 속, 희우는 손을 들어 배를 문지르며 허공을 응시했다. 몇 분간을 그러다가 한순간 이목구비를 일그러뜨렸다.

마음 안쪽이 형편없이 무너지며 영혼이 잘게 갈라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바란 적 없는 존재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허무하게 떠나가기를 원한 것도 아니었다. 원하기는커녕 희우에게 있어서는 가장 최악의 결말이었다. 스스로의 의지나 결단 하나 없이, 그저 제 배 속에 품어져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건…….

팔자가 그냥 사나운 정도가 아니야.

무슨 팔자가 이렇게 사나워?

저게 미래에 이 집안을 아주…….

너, 남 잡아먹는 팔자라고 들어 봤니?

오 선생과 어떤 무당이 입을 모아 제게 건넨 말이 속에서 살 떨리는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별안간 몰아치는 추위가 너무 참담해서 가지고 있는 온기로라도 살고 싶은 것처럼 몸을 옆으로 웅크렸다.

“윽, 흐으…….”

어느새 찬 울음으로 씨근대듯이 달아오른 숨을 흘리던 중이었다.

손이 움찔, 말려들었다. 아기의 또 다른 보호자가 뇌리에서 돌연히 떠오른 탓이었다. 이렇게나 지치고 무기력해진 상태에서도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크게 뜨인 눈에 두려움이 함빡 고여 올랐다. 저를 꿰뚫던 묵색 동공을 생각하니 저절로 등 뒤가 오싹해졌다.

조금쯤 맑아진 머리가 그녀에게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지금, 이렇게 슬퍼할 여유가 있기는 한 상황이냐고.

자신을 병원으로 데리고 온 건 백주경의 사람일 거다. 즉, 자신은 아직 백주경의 손바닥 안에 있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그걸 인지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백주경이 자신을 서수혁에게 판다는 건 분명 태에 품은 ‘아기’가 전제 조건이었을 거다. 희우는 그 거래가 과연 이루어질지 확신하지 못했지만, 백주경은 당연히 그렇게 될 결과를 염두에 두고서 저를 잡아 가둔 것일 터.

이런 와중에 아기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이렇게 되면 백주경이 저를 단순히 가둬 두기만 해야 할 이유도 없었고, 서수혁이 그래도 제 애를 뱄다는 동정심으로 구해 줄 일말의 가능성도 사라진다.

불확실한 미래를 인지하자마자 턱이 딱딱 부딪힐 정도로 몸이 떨려 왔다. 어느 쪽이든 납치 감금과 다를 바가 없던 생활을 떠올리자 속을 꽉 메우는 답답함과 우울함이 악몽처럼 복기됐다.

여기, 여기 있으면 안 된다.

희우는 급히 몸을 일으키며 손등에 꽂힌 주삿바늘을 뽑아냈다. 한쪽에 놓인 티슈를 뜯어내 피가 흐르는 손등을 지혈하며 문가로 다가갔다.

닫힌 문 바깥에 촉각을 곤두세우다가 조심스럽게 열어 보았다. 혹 백주경의 사람이 앞을 지키고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무색하게도 바깥 전경은 썰렁했다.

완전히 고개를 빼내어 둘러본 복도도 마찬가지였다.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가실 듯 가시지 않는 현기증에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숨을 고른 희우는 비틀대는 걸음으로 병실을 빠져나왔다.

온몸이 멍든 것처럼 욱신욱신거렸다. 뒤늦게야 어루만져 본 머리에 붕대가 둘둘 말려 있었다. 계단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눈앞이 회전하기 바쁘던 어지럼증이 살아났다.

이제 정말 몸에 성한 구석이 있기는 한 건가.

희우는 머리에서 내린 손으로 벽을 짚으며 한 뼘 한 뼘 앞을 향해 걸어 나갔다.

“…….”

뭐지?

불현듯 심장을 얼리는 위화감이 엄습하여 발목을 잡아챘다.

주변이 기괴할 정도로 조용했다.

그녀가 막 눈을 떴을 때 목격했던 의료진은 물론이거니와 백주경 측 사람 역시도 보이지가 않았다. 거센 파도가 저 끝까지 밀려들어 왔다가 모든 걸 그대로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정도가 지나치게 차분했다.

뭐가 뭔지 몰라도 지금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백주경 측 사람이 없다는 건 적어도 희우에게 있어서는 희소식이었다. 이상하게 여기고 있을 틈도 없다는 생각에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한참 복도를 헤매다가 벽에 부착된 병원 안내도를 발견했다.

현재 희우가 위치한 장소는 VIP 전용 특실 병동이었다. 바깥으로 나가는 길은 지하로 연결되는 주차장과 일반 병동 쪽으로 이동하여 로비를 통과하는 길 두 가지가 있었다.

희우는 일반 병동 쪽으로 가는 길을 택했다. 사람을 숨기려거든 인파 속에 숨기라는 말이 있다. 도망치려는 저를 보호막처럼 가려 줄 것이 필요했다. 또 주위에 보는 눈이 많다면 백주경의 수하가 자신을 발견한다고 한들 대놓고 어쩌지는 못하리라.

자세하게 훑은 안내도만을 곱씹고 또 곱씹으며 바지런히 바닥을 디뎠다.

그러자 조금씩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와 같은 환자복을 입은 채 링거 폴대를 직직 끌고 가는 이들을 보니 일반 병동으로 넘어온 모양이었다.

평일 낮인지라 꽤 붐비는 인산 사이를 곡예하듯이 피해 지나가던 희우가 이내 모퉁이를 돌았다.

길게 펼쳐지는 2층 난간과 그 아래로 웅장한 규모의 로비가 보였다. 그리고 그 가장자리에 외부로 나갈 수 있는 정문이 있었다.

유리문을 투과하여 바닥에 그려지는 햇살이 그녀를 반기듯이 병원 로비로 반짝반짝 쏟아져 내렸다. 당장이라도 몸을 내맡기고 싶은 안온한 색감이었다.

빨리.

빨리 저리로 가자.

안달이 난 마음을 따라 성마르게 걸음을 옮겼다.

왠지 모르게 수상쩍고 선득한 기척을 체감한 건, 널찍한 1층 로비로 향할 수 있도록 마련된 나선형의 계단 앞에 도착하고서였다.

계단을 밟기 전 난간대를 꽉 움켜쥔 순간이었다.

“…….”

웅성웅성.

데스크를 지키는 병원 직원이나 환자, 혹은 그의 보호자들 모두 하나같이 두루미처럼 고개를 쭉 빼고서 이쪽 계단을 힐끗힐끗 살피고 있었다. 대놓고 쳐다보지 못한 채로 수군거리기만 하는 행색이 웅성대는 기척의 원인이었다.

의아함에 그쪽을 살피던 희우의 고개가 천천히, 정면으로 돌아왔다.

아래로 내려가려던 희우의 반대 방향에서 누군가 올라오고 있었다.

찰나간 파도치는 검은 덩어리처럼 보였다. 그러나 각기 움직이는 그들은 분명 사람이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선두에 선 남자.

단지 계단을 오르는 일상적인 행동임에도 절제되고 우아한 기류가 도처에 흘렀다. 하지만 그 발아래 짓밟히는 계단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어딘지 모르게 조악하고 지독한 위압감이 그림자처럼 엉겨 붙어 있었다.

남자는 새빨간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가죽 장갑을 느긋하게 벗었다. 꼭 어느 컴컴한 창고에서 잔혹한 고문이라도 하고 온 행색이었다.

오른쪽을 먼저, 그다음으로 왼쪽 장갑을.

그러는 와중에도 걸음을 늦추는 법이 없어 희우와 남자의 거리는 착실하게 좁혀지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곧장 두 가지의 변화가 일었다.

남자는 지금껏 그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을 것처럼 성큼성큼 내디디던 걸음을 멈춰 세웠고, 희우는 호흡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째깍이던 시곗바늘이 멈추고 공기가 알알이 굳은 것만 같은 경직을 알아챈 건 오직 눈길이 포개어진 두 사람뿐이었다.

얼음 상태에서 깨어난 희우가 가장 먼저 취한 액션은 애써 여기까지 온 보람도 없이 발을 뒤로 직, 물리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죽일…….’

거야.

날 죽일 거야, 분명히.

그런 눈이었다.

무심하다가, 조금씩 침잠하다가, 어느새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서수혁의 시선 변화는 그런 식으로밖에 해석할 수가 없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이마와 등에도 진땀이 구슬구슬 맺혔다. 그 노고를 당사자로서 누구보다 잘 알지만 희우는 뒤로 돌 수밖에 없었다.

당장 이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저 남자의 시야에서 탈출하는 게 급선무였다.

“꺅!”

“뭐, 뭐야?”

“아!”

희우가 간신히 피해 지나간 사람들에게서 뒤늦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남자가 제 뒤를 쫓고 있다는 게 이토록 투명히 느껴질 수가 없었다.

복부 안쪽이 당기고 허파가 펑 터질 것만 같았으나 멈출 수가 없었다. 살짝만 힘을 빼면 당장이라도 꺾일 것만 같은 무릎을 어떻게든 세워서 뛰어나갔다.

뒤에서 들려오는 비명의 거리가 점차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 무엇보다 현실적인 공포심을 꽂아 넣었다.

서수혁이 다가오고 있었다.

“헉, 헉…….”

목 끝까지 찬 호흡을 터뜨리던 희우는 막 닫히려는 엘리베이터를 발견했다.

다른 어떤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얼른 올라탔다. 그리고 닫힘 버튼을 부서질 기세로 눌렀다. 손끝이 저려 왔으나 상관없었다. 오한이 가시지가 않게 하는 이 현실을 가릴 수만 있다면.

다행히 서수혁이 도착하기 전에 엘리베이터는 닫혔다.

그런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사람 하나도 통과할 수 없을 만큼 좁아진 틈새로 쾅, 하고 끼어든 마디 굵은 손. 그 위에 새겨진 까만 기호가 시야를 암담하게 뒤흔들었다.

방해물처럼 튀어나온 손이 닫히려는 문을 되레 벌렸다. 손등에 힘줄이 두둑 불거지며 곧 붙잡혀 있던 철제문이 우지끈 찌그러졌다. 순수한 악력에 의해서만 벌어진 일이었다.

그 광경을 두 눈으로 목도하며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더듬더듬 물러나기를 택하던 희우는 엘리베이터 구석에 등이 부딪히며 스르륵 주저앉았다.

“이게 감히 눈앞에서 도망을 가?”

서서히 열리는 문 앞에 우뚝 선 남자는 꿈이라고 믿고 싶을 만큼 비현실적이었다.

까만 구둣발이 승강기 안으로 저벅 걸어 들어온 순간, 희우는 피가 식는 두려움에 눈물을 왈칵 터뜨렸다.

순식간에 젖어 들어가는 그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서수혁이 안으로 진입했다. 그가 가까이 다가와 다리를 굽혀 앉았다. 조금 전 엘리베이터 문을 무슨 신문지 구기듯이 구겨 버린 손이 희우의 가는 머리채를 휘어잡아 저를 쳐다보게 만들었다.

“흑……!”

예사롭지 않게 열린 흑색 동공이 희우의 얼굴 위를 한참 동안 떠돌아다녔다.

“잡으면 이걸 진짜 어쩔까 고민했어.”

“…….”

“너 뭔데 사람 머릿속을 이렇게 뒤집어 대니.”

잔뜩 겁에 질려 안으로 말린 희우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에 도통 눈길을 떼지 못하던 서수혁이 이내 혀를 차고는 날붙이처럼 서슬 퍼런 기색을 실은 질문을 던졌다.

“내가 도망가면 어떻게 한다고 했지?”

“도망간 거 아니잖아요!”

희우가 당장이라도 제 두피 가죽을 벗겨 낼 것처럼 머리채를 붙잡은 서수혁의 팔을 거머쥐며 외쳤다. 푸르게 질린 안색으로 외치는 소리라서 그런지 형편없이 갈라지고 꺾이고, 엉망이었다.

“저, 저도 끌려간 거잖아요. 제가 원해서 간 거 아니잖아요.”

차마 서수혁을 쳐다보지도 못하고서 희우는 변명하듯이 주절거렸다.

“그게 어떻게 도망이야. 납치당한 거란 말이에요. 난 그냥 차에 있었단 말이야. 그냥, 그냥 앉아만 있었는데…….”

엉엉 오열을 하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살겠다고 할 말은 하는 모습에 서수혁은 기가 찼다.

그런데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주변에 소화기 연기가 낭자한 차 속에 놔둔 걸 홀라당 뺏긴 그 순간부터 뜨거운 열불만 치솟아 오르던 속이 순식간에 가라앉는 심경의 변화는 더욱 기가 막혔다.

금방이라도 죄다 때려 부술 듯이 흉포하게 날뛰던 노기가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놀라운 속도로 사그라들고 있었다.

희우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서수혁은 입수한 주차장 CCTV를 통하여, 연기를 틈타 뒷좌석으로 접근하던 이들의 동태를 확인했다. 희우가 난리통을 이용하여 먼저 문을 열고 도망친 게 아니라 그들이 가만히 앉아 있던 애를 끌어 내린 쪽에 가까웠다.

뿌연 연기 속에서 발버둥 치며 흔들리던 자그마한 손이 잠시 후 변을 당한 것처럼 축 처지던 장면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도망이 아니라는 말은 지금 역시도 통하고 있었다.

좀 전에 눈앞에서 보인 도주는 단지 당혹과 기겁의 발현이었음을 증명하려는 것처럼, 지금은 제 팔뚝을 꾹 쥐고서 놓지 않는다. 본래의 피부보다 더 창백하게 질려 바들거리는 와중에 간절하게도 붙잡아 온다.

그게 퍽 흡족하게 다가오는 걸 보면 제 대가리가 확실히 맛이 가기는 간 모양이었다.

마음이 누그러지자 당장이라도 내뺄지 몰라 머리카락을 세게 쥐고 있던 손아귀 힘이 풀렸다. 그제야 아까부터 은근하게 신경을 건드리던 머리통의 붕대나 목과 팔뚝 등 피부 여기저기에 붙인 거즈들이 눈에 들어왔다.

“상태는 왜 이러니. 누가 이따위로 조져 놨어.”

저를 찢어 죽일 것만 같던 그의 기세가 약간 잦아든 걸 알아챈 희우는 덩달아 긴장이 좀 풀렸는지 히끅대며 뭐라 뭐라 말했다. 근데 울며 먹혀 들어가는 소리가 반이라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뭐라는 건지.”

고개를 저은 서수혁은 구석에 콕 박혀 나오지 않으려고 하는 희우를 번쩍 안아 들었다. 갈피를 잃고 방황하는 희우의 두 팔을 서수혁이 제 목에 두르게 만들었다.

닿으면 안 될 곳에 닿은 이처럼 크게 흠칫한 희우는 다음 순간 체념한 듯 몸에 힘을 풀었다.

그제야 더 푹 안겨 오는 체구에 이제야 통감하는 현실감이 담겨 있었다.

희우의 몸을 단단히 받쳐 든 서수혁이 쓱 뒤로 돌아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 그의 품 안에서 희우는 엘리베이터 거울 위로 비치는 제 얼굴에 멀거니 시선을 두다가 서서히 눈을 감았다.

* * *

“……아!”

잠에서 깨어난 건 아래에서부터 확 몰아쳐 와 질 내부를 장악하는 성기의 압박감 때문이었다. 희우는 반사적으로 팔을 들었다가 온몸을 주물럭거리는 알알한 통증에 신음부터 흘렸다.

혼미해진 의식 사이로 누군가가 보였다.

커다란 손이 다가와 희우의 얼굴을 마른세수하듯이 쭉 쓸어내렸다. 턱 끝에 닿은 손은 백지 같은 뺨으로 향해 그 위를 둥글게 문질렀다.

그에 조금 정신이 드는 것 같다가도 다시 의식이 허물어졌다. 몸이 위아래로 정신 사납게 흔들리고 있어서였다.

“아, 읏, 으……! 흐……!”

갈라진 여성기를 둔중하게 내려쳐 저 안쪽 깊은 곳까지 찌르고 들어오는 피스톤질이 흐물흐물 늘어진 신경을 일제히 깨우고 있었다.

깨어나자마자 섹스를 하고 있는 상황은 부단히 낯설었다.

누구야? 누가…….

“목 안아.”

열기에 찬 저음이 얼굴께로 떨어졌다. 생각을 하는 것보다 더 빠르게 몸을 움직이게 하는 목소리.

아, 희우는 엘리베이터 문이 무슨 과자 조각처럼 바스러지는 장면을 상기하며 반사적으로 팔을 들었다. 그 끝으로 뭔가가 길쭉하게 늘어져 낭창거렸다.

시야가 희미해 잘 보이지가 않아서 눈살을 찌푸리자 뺨을 굴리던 손이 다가와 그 위를 판판히 펼 요량처럼 문질렀다.

“으읏, 흐…… 아…… 아읍……!”

발딱 선 성기가 핏줄로 우둘투둘해진 몸을 도구처럼 사용해 축축하게 젖은 내벽 살을 여유로이 탐방했다.

마냥 둔하던 감각들은 그 음란하고 뇌쇄적인 자맥질하에서 서서히 본래의 색을 갖추기 시작했다. 희우는 뭐가 뭔지 모르는 와중에도 반사적으로 허리를 비틀며 제 위로 올라탄 남자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러고서야 손목에 연결된 게 무언지 똑바로 보였다. 링거 줄이었다.

손등 위에 부착된 테이프를 뜯고 완전히 빼 버려 기어이 피가 비쳤던 의료 기구가 그 소란 자체를 없었던 일로 돌리듯이 다시 연결되어 있었다. 조금씩 넓어지는 시야에는 낭창낭창 흔들리는 링거 줄을 걸쳐 둔 은빛 폴대가 보였다.

“흣, 응…… 아, 아……!”

목을 끌어안자 허벅지가 붙잡혀 가랑이 사이가 더 활짝 벌어졌다. 외압에 의하여 갈라진 사잇길로 튼실한 거근이 쑥쑥 처박혀 들어올 때마다 분비물이 작게 튀어 올랐다.

그럼에도 발씬거리는 귀두는 좋다고 질 구멍을 헤집어 대며 진득히 고인 물속에서 한바탕 세수를 해 댔다. 대가리를 적시는 걸로 모자라서 온몸을 애액으로 칠갑하고 싶은 것처럼 굵직한 기둥이 잇따라 퍽 소리가 나게 꽂혀 들어왔다.

“흐읏……!”

배 속이 빠듯하게 차는 팽만감에 희우는 울멍거리는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주 잠깐 헷갈렸다. 잠시 머물렀던 백주경의 자택 천장이 아니었다. 무늬가 달랐다.

하지만 처음 보는 광경은 아니었다.

그래도 몇 달은 머무르게 되었다고 알게 모르게 길이 들었던 이곳은…….

“정신 든 거니, 뭐니.”

서수혁의 집이다.

그제야 희우는 자신을 체중으로 내리누르며 페니스를 쑥쑥 내처 박아 대는 인물의 정체를 정확히 헤아렸다.

그랬지, 병원에서 그를 마주쳤었다.

그 후로 품에 안겨 승강기에서 빠져나오자마자 그대로 정신줄을 놓았던 것 같다.

“하윽, 하, 아…….”

그가 가늘한 허리 뒤쪽으로 손을 밀어 넣어 위로 훅 들어 올렸다. 그러자 곡선의 형태로 구부러지는 허리 라인을 타고 질 입구가 페니스를 한층 더 포근히 품어 머금을 수 있게끔 느직이 벌어졌다.

뭉툭한 모양의 귀두관이 그 틈새를 놓치지 않고 안으로 구불구불 기어들어 갔다.

“너 열흘 만에 깬 거야. 알아?”

“흐으…… 아, 아, 아……!”

“자는 애 쑤시는 거 취향 아니래도 견디질 못하게 만드니.”

그러니 혼자라도 허리 흔들어야지, 안 그래?

의미 모를 부연 설명을 던진 서수혁이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처럼 미끄러지길 반복하는 희우의 팔을 제 목에 단단히 감으며 샅을 유연하게 부딪쳐 왔다.

철퍽철퍽, 떨어져 있는 기간 동안 아무런 침습도 없어 새침히 다물려 있던 아랫입이 만판 벌어져 살기둥을 야금야금 물어뜯었다.

내부를 짓이기듯이 벌리며 찍어 누르는 행태가 반복될수록 아랫배를 타고 번지는 으슬으슬한 전류가 비대해져만 간다. 하지만 그것뿐만은 아니었다. 아까부터 범상치 않은 오한이 들고, 속에서 무언가 역류할 것만 같은 오심이 올라왔다.

“으, 우…… 욱, 우윽……!”

가뜩이나 상태가 그런데 몸조차도 정신없이 흔들리는 바람에 희우는 고개를 비틀며 침대 아래에 대고 구역질을 했다. 며칠간 제대로 먹은 게 없는 몸은 역시나 위벽을 긁어낼 것처럼 따가운 위액만을 게워 냈다.

콜록, 쓰게 터뜨리는 헛기침과 함께 세상이 핑글핑글 돌았다. 코와 입을 통해 똑바로 호흡하고 있는데도 제정신이 아닌 것만 같았다. 천장, 그리고 그를 가리는 남자의 형상이 오버랩처럼 두 개, 세 개로 늘어났다가 합쳐지기를 반복했다.

“으…… 흐, 아읏!”

텅 비어 버려 헤매던 뇌리는 점차 배 속을 쥐어짜며 내장을 간지럽히는 쾌락에 몰두했다.

이미 한 번 도피구로 삼고서 모든 현실을 뒤로한 채 매진했던 경험이 있는 행위였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매몰되어 머리가 깨질 듯이 몰아쳤던 상념의 늪에서 도망칠 수가 있었다.

지금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전신 여기저기를 아우르고 주무르는 혼돈과 통증을 잊기 위해서는 신경 위로 불똥처럼 튀기는 아찔한 성감에 주목해야만 했다.

이게 아니라면 버거운 현실에서 도망칠 방법이 없었다.

서수혁은 먹잇감을 뜯어먹기 전에 실컷 재미를 보는 육식 짐승의 유흥 거리처럼 희우를 억누르며 거세게 허리를 놀렸다. 허공에서 큰 원을 그리는 뭉근하고도 야릇한 추삽질에 동그랗게 벌어진 질 입구가 더 받아먹고 싶은 것처럼 소심히 요동을 쳤다.

“응, 읏, 아, 아아, 핫……!”

힘 꺾인 교성으로 혀를 굴리며 희우는 그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서수혁은 제 품 안으로 안겨 드는 희우의 흰 목덜미와 빗장뼈 등을 샅샅이 핥아 올리며 육감적인 방아질에 열을 올렸다.

침실에는 이미 후끈한 기색이 만연했다. 그 위로 작게 울리는 킹사이즈 침대의 소음과 희우의 팔이 흔들리며 링거 줄이 허공을 휙휙 가르는 파공음이 불협화음을 이루었다.

“아! 읏, 으…… 흐, 잠, 아, 잠!”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몰라도 이미 아래가 질퍽질퍽하게 젖어 든 건 그가 충분히 좆질에 열의를 들였다는 증거였다.

열성적인 추삽질로 꾸준히 안을 들쑤셨다면, 이제 남은 건 당연히도 불알에 가득 찬 물을 방출하는 거였다.

사정의 때가 다가오는지 서수혁이 한층 더 세고 예리하게 안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자궁길이 무력으로 뚫리며 민감한 아래가 턱턱 주먹질을 당하는 느낌에 희우가 골반을 뒤틀며 발버둥을 했다.

저도 모르게 배를 감싸 안았다.

“아기…….”

이 안에 담긴 것이 저 포악한 추삽질에 어떤 식으로 해를 입을지 몰라 무심코 한 행동이었다. 그러자마자 하늘을 가린 채로 날렵하게 허리를 놀리던 남자가 우뚝 멎었다.

희우는 혼몽히 가라앉은 눈동자를 들어 올렸다.

어느 정도 선명해진 시야 속에 서수혁의 낯이 들어왔다. 그의 표정은 이상했다. 차가운 것 같은데 건조하고, 그렇다기에는 밴 감정이 너무 짙었다.

단박에 정의를 내릴 수 없는 이목구비의 변화에 관심을 두고 있자니 잠시 후 희우는 이것이 섬망 같은 짓이나 다를 바가 없음을 깨달았다. 그야말로 헛소리, 눈 뜨고 하는 잠꼬대에 불과했다.

그도 그럴 게…….

“아, 아기 없…….”

이제 아기는 없으니까.

커다란 병실 침대 위에서 어딘가에 숨고 싶은 것처럼 몸을 만 채로 울음을 꾹꾹 삼켰던 그때의 심정에 들솟아 올랐다.

위쪽에서 쯧, 하고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불편한 심기를 여지없이 드러내는 태도가 희우의 머리칼을 삐죽 곤두서게 했다.

“알아.”

그가 본인의 배를 감싸 쥔 희우의 팔을 들어 다시 목을 끌어안게 만들었다. 그리고 지진이 난 희우의 동공을 뚫을 기세로 들여다보며 물었다.

“누가 그랬니. 백주경?”

희우의 초점이 흐리게 뭉개졌다.

어디 한 군데를 쳐다보지 못하고 허공을 향해서만 이리저리 흔들리는 게 머릿속 저변이 섬약하게 일그러지고 있다는 걸 투과시켰다.

곧 고갯짓도 그를 따라간다. 희우가 마구 도리질을 했다.

“몰라요. 흑, 모르, 아, 아……!”

뭐가 이렇게 시큰거리는지 모르겠는데 어쨌든 서러웠다. 모든 걸 다 뒤로하고 무릎에 얼굴을 박은 채 사흘 밤낮을 엉엉 울고 싶은 기분만 들었다.

그리고 그 바닥에는, 아주 야트막한 안도가 깔려 있었다.

서수혁에게 있어서 희우의 임신 소식은 이득이 될 게 없는 일이었다. 백주경이 그걸 이용해 서수혁에게서 뭔가를 뜯어내려 한 것만 봐도 그건 이용당할 빌미 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로 서수혁이 그 거래에 응할 마음이 있었든지, 없었든지 간에 객관적으로 놓고 보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가 지금 얼핏 면색으로 보이는 착잡함은 희우가 끊어질 듯한 간호사의 말로 간신히 잡아채었던 ‘유산’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물론 그녀가 겪은 감정의 진폭과 비교해 보자면 무진 얕고 미미한 수준이지만, 어쨌든 결로만 따진다면 크게 상이한 건 아니었다.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그 손톱만 한 생명을 제 입맛대로 써먹으려던 백주경과 다르게, 적어도 생명을 만든 반쪽으로의 책임감은 지니고 있던 것처럼.

연이은 핏줄의 죽음으로 모든 걸 감당하기가 어려워진 희우에게는 그것마저 굉장히 큰 안도이자 위안의 요소로 다가왔다.

“읏, 흑! 아으……!”

그가 대뜸 상반신을 일으키며 동시에 희우의 허리를 팔뚝으로 끌어안아 제 몸짓에 딸려 오게 만들었다. 튼실하게 발기한 성기를 사이에 낀 채 좌우로 갈라진 엉덩이 살이 어딘가에 안착했다. 벽돌 같은 남자의 허벅지 위였다.

기승위 자세를 취하자 핏줄마저도 예쁘게 불거진 자지가 한층 저 감때사나운 둔기가 되어 아랫살을 찔러 올렸다. 배 안쪽이 다 오싹해질 만큼 후미진 길목에 대가리를 물씬 비벼 오는 행태에 희우가 사지를 퍼드득 떨었다.

“됐어. 또 넘치도록 싸지르면 생기는 게 애니까.”

탁한 저음에 음충한 의도가 안개처럼 깔려 있었다. 지금 저 말은 다시 자궁에 정액을 가득 주입해 태아를 배게 하겠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흐응, 아…… 아…….”

희우는 신경 끄트머리가 구부러지는 것처럼 저리는 몸을 비틀거렸다. 계단을 굴러 여기저기에 입은 타박상의 통증과 그의 성기 몸통이 차지게 비벼 오는 부분으로부터 번지는 성감이 뒤엉켜 엉망이었다.

이게 좋은 건지 아픈 건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걸 모르겠으나 반사적으로 허리를 어설프게 흔들고, 엉덩이를 분망히 상하 운동했다.

“흣, 앗, 아……! 아! 읍!”

약에 취한 뽕쟁이들보다 더 심한 탁기를 머금은 얼굴로 희우는 제 몸을 일직선으로 관통하는 자극에만 집중했다.

그러던 차, 삐이- 하고 귀를 울리는 소리가 엄습했다.

희우는 주삿바늘이 거추장스럽게 꽂힌 팔을 들어 고장 난 쪽의 귀를 퍽퍽 때렸다.

“뭐 하는 거야.”

서투른 요분질로 섹스에 동조하던 희우가 갑작스럽게 벌이는 짓에 서수혁이 인상을 쓰며 팔목을 콱 붙잡았다.

낮게 깔린 저음이 성에처럼 박혀 들어와 움찔한 희우가 발발 떨리는 입술로 고했다.

“아, 시, 시끄러워서…….”

“뭐가.”

“귀…….”

진이 다 빠진 어조로 속삭인 희우는 여전히 이명이 맴도는 귀를 다시 붙잡으려고 했다.

서수혁이 그보다 한발 빠르게 움직여 제 손바닥으로 희우의 오른쪽 귀를 꽉 틀어막았다. 귓바퀴에 이어 고막으로 통하는 구멍 길까지 벽처럼 막아서자 와류 치듯이 엄습했던 통증이 조금은 사그라든다.

희우가 무의식적으로 그 손등 위에 제 손바닥을 겹치는 순간 서수혁이 턱을 비틀며 성마르게 입을 겹쳐 왔다.

으읍, 작게 신음을 토해 내는 혀를 서수혁이 숨도 못 쉬게 감아올려 쪽쪽 핥아 댔다. 원 없이 흡입한 후에야 입술을 놓아준 그가 희우를 제 품 안에 기대게 만들고서 아랫도리를 위로 쳐올렸다.

아직 그의 손이 귓가를 지그시 틀어막고 있었으므로 희우는 합일될 것처럼 서수혁의 품에 안긴 채로 뭉그러진 신음만 줄줄 흘렸다.

직립한 페니스가 깊숙이 꽂혀 들어와 의료 기구로 마구 파헤쳐진 곳을 턱턱 두드릴 때마다 뇌가 다 울렁거렸다. 깊은 지점 한 구간만 가격을 당할수록 불수의적인 눈물이 솟아올라 뺨을 험하게 갈랐다.

제 어깨에 이마를 묻고 할딱이기 바쁜 희우를 끌어안은 채로 서수혁은 그나마 놀고 있는 손을 아래로 내렸다.

엉덩이를 꽉 쥐자마자 기분이 삽시에 더러워졌다. 손바닥이 천천히 상승하여 미끈하게 들어가는 허리선을 더듬거리고, 이내 희우의 배꼽이 있는 앞쪽으로까지 이동했다.

푸욱, 성기를 깊숙이 밀어 넣자 그 위로 언뜻 윤곽이 드러나는 것만 같았다. 믿을 수 없는 것처럼 그 위를 몇 번이고 더듬거리던 서수혁은 찰싹 맞붙여 둔 여체까지 떼어 내며 육안으로 확인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착각이 아니었다.

핼쑥하게 질린 골반을 양쪽으로 바투 움키고서 반쯤 빠진 페니스를 꾸욱 밀어 넣자 배꼽 아래 부근이 살짝 들리며 귀두 특유의 뭉툭한 실루엣이 겉으로 은연하게 드러났다.

겨울 산맥처럼 온도가 떨어진 그의 눈길이 희우의 몸 상반을 집요히 배회했다.

이렇게 옷을 홀딱 벗겨 놓고 제대로 살펴보니 체중이 그새 더 감소한 것이 부정할 수 없게끔 드러났다.

그나마 살집이 남은 젖가슴 아래, 좌우로 여문 늑골이 있는 부근을 손으로 짓누르자 갈비뼈마저 언뜻언뜻 살갗을 뚫고 나올 것처럼 두드러졌다. 서수혁의 입에서 메마른 실소가 새지 않을 수가 없는 광경이었다.

“네 애비는 그간 뭘 했길래 살이 이따위로 빠졌니. 밥도 안 먹였어?”

“흐으읏, 응……! 아……!”

그가 여유롭게 휘두르던 아랫도리를 조금 더 세게 올려 치자 중앙이 연한 분홍빛으로 여문 유륜이 출렁거렸다. 그 위로 도드라진 젖꼭지를 감쳐물고는 떼어 낼 기세로 빨아올리며 그가 어딘가로 손을 뻗었다.

느리면서도 끈질긴 허리 짓을 하는 와중에 서수혁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희우는 아득히 멀어지는 의식 사이로 그의 입매가 미미하게 움직이는 것만 보았다.

끊길 듯 말 듯 한 의식 사이로 간지러움보다는 강하고, 불똥보다는 약한 세기의 희열이 무해한 색으로 튀었다.

모든 것이 제게 치켜세운 짐승의 발톱 같은 위협이 되는 가운데 이것만큼은, 적어도 이 짓만큼은 그런 의도가 없다는 걸 알고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래서 더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희우는 순진히 눈만 깜박거렸다.

애초에 그걸 안다고 해서 이 남자를 벗어날 도리가 있기는 한가. 무기력한 상념이 독처럼 번져 전신을 잡아먹는다.

손등에 꽂혀 저 위까지 연결된 링거 줄이 잿빛 연기처럼 너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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