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가족과 타인 (2)
북악산이 보이는 호텔 스카이라운지.
먼저 도착하여 앉은 백주경은 휘황찬란하다 못해 아득하게까지 느껴지는 창밖의 운치를 감상하고 있었다.
습관처럼 들이켜는 커피를 따라 안에 담긴 얼음 하나가 넘어왔다. 그것을 혀로 굴리다가 아그작, 소리가 나게 씹는 순간 저 멀리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백주경이 느긋하게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여유는 곧바로 사라졌다. 그의 이마에 심기가 불편해진 듯한 힘줄 하나가 곤두섰다. 백주경의 그런 낯빛을 유발한 이는 탐탁지 않은 표정 변화를 몸소 실감했으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백 이사님.”
거리가 가까워진 윤서원이 허리를 숙여 정중한 인사를 건넨 후 맞은편으로 향했다.
윤서원의 어깨 너머로 등장한 일강의 덩치들이 그런 그를 보호하듯이 따라붙었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운 채 눈알만 굴려 상황을 지켜보던 백주경은 이게 찾아온 손님의 전부라는 걸 깨닫자마자 실소를 터뜨렸다.
“나는 분명히 서 대표를 불렀는데…… 오라는 양반은 안 오고 서 대표 개가 왔네?”
“윤서원이라고 합니다.”
“개한테 이름까지 지어 줬어? 몰랐는데 서 대표, 제법 섬세한 양반이구만.”
충분히 모욕적일 언사에도 윤서원은 번지르르 잘만 웃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을 무기처럼 사용하듯 말이다. 그 예쁜 얼굴을 띠껍게 응시하며 이마를 문지르던 백주경은 한순간 표정을 차갑게 굳혔다.
“거기 주인 따로 있어. 장난 그만 치고 이만 일어나지.”
“서 대표님께서는 오늘 오지 않으십니다.”
부드러운 듯 단단한 음성을 귀담으며 백주경의 눈이 가늘어졌다. 담는 인물을 가로로 쭉 찢을 듯 매서운 눈초리에도 윤서원은 움츠러드는 기색이 없었다. 지나치게 싹바가지 없기로 소문난 서 대표 아래에 있는 놈다웠다.
백주경은 어이가 없는 심경에 이마를 감싸 쥐며 큭큭 웃었다.
“아랫놈을 보내?”
“…….”
“지금 이 자리가 무슨 자리인 줄 알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어디 시건방지게…….”
“그야 당연한 일 아닙니까. 또 소화기를 터뜨리고는 그 틈을 타 칼질이라도 하려 달려드실지 어떻게 알고요.”
윤서원은 기다리던 화제였다는 것처럼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받아쳤다. 서글서글 웃으면서 비수를 꽂는 솜씨가 제법이었다.
일강 측에서 진작에 꼬리를 잡았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이토록 선명한 적대감이라니.
백주경이 쩝, 하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서 대표를 대신해서 온 거면 오늘 네가 당할 수도 있는 일이라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그래도 대표님은 오지 않으십니다.”
뇌를 흔드는 도발에도 꿈쩍할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곱고 예쁘장한 외피 속에 아주 독한 게 들어앉은 모양이었다.
백주경과 윤서원의 눈길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먼저 고개를 돌린 건 백주경이었다. 쯧, 하고 혀를 찬 그가 “재미없기는.” 하며 한 발 유보를 택했다.
본인 말마따나 윤서원은 설령 제 목구멍에 칼이 짓쳐들어와도 지금 앉은 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을 만큼 굳건해 보였다. 그러니 더 물고 늘어져 봤자 제 입만 아파질 일이었다.
“뭐, 그 발칙한 놈이 정말 수족만 보냈을 리는 없고.”
턱을 매만지며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백주경이 윤서원 뒤로 도열한 일강의 어깨들 면면을 훑어보았다.
“분명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겠지.”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는 식으로 단정을 지어 오는 말에 윤서원은 차분히 눈을 내리깔았다.
백주경이 지금 애타게 찾는 제 상사와 나누었던 대화가 조용히 떠올랐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장례식장 주차장에서 그들을 습격하고 희우를 납치해 데려간 범인이 이미 JK 홀딩스임이 밝혀진 바였다. 그런 상황에서 그쪽의 이사인 백주경으로부터 독대를 청하는 요구가 들어왔다.
서수혁은 약속에 응하고는 비서인 윤서원을 그 자리에 대신 보내는 결정을 내렸다.
그가 당최 어떤 생각인지 알 수가 없어서 의중을 알아보기 위해 윤서원은 넌짓 질문을 건넸다. 혹 서 대표에게 생각이 다 있는데 자신이 그를 짐작하지 못하고 중간에서 헛발질을 해 일이 꼬이면 골치가 아파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예의 차려. 그래도 너보단 어른이잖니.’
그러나 막상 서수혁은 특별한 계획따위 조금도 없는 것처럼 시큰둥하고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오히려 감정은 그가 휘두르는 스윙에서 흘러나왔다.
이미 곤죽이 되도록 후려 팬 이의 복부에 골프채 헤드를 어퍼컷처럼 꽂아 넣는 태도에서 분노가 뜨거운 얼룩처럼 묻어났다.
커억!
숨이 넘어갈 법한 비명이 집무실을 흔들었다. 팔을 크게 휘두르느라 흐트러진 베스트를 어깻짓으로 정리한 서수혁이 핏물 젖은 골프채 헤드로 바닥을 짚으며 턱을 젖혔다.
‘근데 꼴사납게 눌리지는 말고.’
‘…….’
‘알아낼 건 알아내야지, 우리도.’
제 쪽으로 찬찬히 돌아오는 대표의 얼굴에 섬뜩한 핏자국이 듬성듬성 묻어났다.
기실 목소리만 침착하게 꾸몄을 뿐, 그는 머리끝까지 분기탱천한 상태였다. 살짝 내리깔린 눈동자 속에서 감돌고 있는 그것은 살풍경한 살기에 가까웠다. 희우를 납치한 장본인이 백주경임을 알기에 내비치는 형형한 적의였다.
그리고 그건 주차장에서의 소요가 사그라든 후부터 꾸준히 이어지고 있는 살기였다.
당일 장례식장에서 뒤처리를 맡았던 윤서원은 긴급 연락을 받고 뒤늦게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가 도착했을 때 상황은 이미 일단락된 후였다.
간만에 몸을 험하게 썼는지 옷자락이 구겨지고 소매가 엉성히 걷어 올라간 차림의 서수혁이 연해진 연기를 헤치며 저벅저벅 걸어 나갔다. 윤서원은 그 뒤로 얼른 따라붙었다.
이내 뒷좌석 문이 벌컥 열리고, 그 안에 있어야 할 사람이 감쪽같이 증발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끼쳐 온 몇 초간의 적막이란…… 다시 생각하기도 싫어지는 수준이었다.
그 적막의 주인공이던 서수혁의 반응으로 얼추 짐작했으나 이렇듯, 백주경과 정면으로 닥뜨리는 걸 마다하지 않을 만큼 꼭지가 돈 줄은 몰랐다.
‘대표님, 혹시 장부 때문이시라면…….’
무얼 확인하고 싶어서 그런 주저 섞인 의문을 표한 건지 윤서원은 지금도 알 수 없었다.
주변의 반응과 제게까지 뻗쳐 올 뻔한 난폭한 기류를 통해, 대표가 인질로 데려다 놓은 희본의 동생에게 딴맘을 먹은 듯하다는 건 충분히 어림짐작했음에도.
‘장부? 아니.’
장부를 들먹이는 겉핥기식 질문을 서수혁은 태연히 부정했다. 마찬가지로 가볍게 스윙을 하며 골프채를 휘둘렀다. 퍼억- 뼈와 살이 분리될 법한 잔혹한 타격음과 함께 그가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잠이 안 와서 그래.’
‘예?’
‘아기 없으니까 잠이 안 온다고, 내가.’
그러니까 데려와야지.
굳이 육성으로 덧붙이지 않았으나 뻔히 예상이 가는 속엣말이 낫처럼 곤두서서 가슴을 써걱 베어 갔다. 지금까지 보필해 온 기간 동안 서수혁이 이렇게나 감정을 드러내는 건 처음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절로 깃들어서.
“저희 서 대표님께서 이 자리를 이렇게나마 수락하신 이유는 하나입니다.”
대표의 그런 상태를 알기에 윤서원은 거두절미하고 바로 본론으로 직행했다.
대표의 분노로 현재, 피비린내가 역겹게 풍기는 것만 같은 일강의 분위기를 풀기 위해서라면 하루속히 희우를 찾는 게 중요했다.
“희우 님, 지금 어디 계십니까?”
“경칭을 쓰네?”
“…….”
“그건 서 대표 지시인가?”
윤서원이 잘만 열던 입을 다물었다.
굳이 부정하지 않는다는 건 맞다는 소리다. 그리고 그 사실이 백주경에게는 꽤 만족스러운 결과로 와닿았다. 서 대표가 생각보다 희우에게 진심일지도 모른다는 가정에 힘을 싣는 격이었으니.
백주경이 잔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액체에 쓸려 굴러 들어온 얼음을 까득, 씹었다. 너희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내가 가지고 있다는 걸 보여 주듯이 실로 여유롭고 나른한 오만이 묻어나는 태도였다.
“굳이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서 대표와 개인적으로 자리를 한번 가져야 하지 않나, 고민하던 차였어. 그 계기가 이런 식이 되어 아쉽다만.”
“저희 대표님이 이사님을 따로 만나 뵐 만한 일이 있으십니까?”
“그럼, 있지. 그래도 한동안 내 자식들을 번갈아 가며 보살펴 준 은인인데.”
자식? 은인?
엉뚱하게 튀어나온 듯한 단어들을 듣자마자 윤서원이 의아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 얼빠진 모습은 충분히 짐작한 반응이었음에도 마치 짜여진 극을 보는 듯 우습게 다가왔다. 백주경은 얼음을 녹여 먹은 잇새로 실소를 흘려보냈다.
“정희본, 정희우.”
호명을 마친 그가 아, 하고 과장스럽게 탄성을 터뜨리고는 고개를 느릿하게 저었다.
“아니지.”
“…….”
“백희본, 백희우가 맞겠군.”
이어지는 백주경의 고백에 윤서원의 이목구비는 점점 힘이 들어가다가 끝내는 완전히 얼어붙어 버렸다. 그처럼 대뜸 접하게 된 출생의 비밀은 전혀 예상 밖인 데다 의외로운 구석까지 있었다.
백주경 역시도 누군가 앞에서 밝혀 보기는 처음이었다.
아까부터 생글생글 웃는 게 거슬렸는데 저렇게 망부석처럼 굳어 버리니 훨씬 볼만했다. 그 흡족한 상판을 앞에 두고서 백주경이 품을 뒤져 담배 하나를 꺼내 물었다. 뒤에 선 비서가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여 주었다.
저 안쪽에 고인 숨까지 훅 뱉어 내자 주변 공기가 비밀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하듯이 탁해졌다.
“내가 소싯적에 호정 그룹 외동딸이랑 불장난 좀 치다가 생긴 애들이거든, 걔네가.”
윤서원은 다분히도 혼란스러운 눈치였다.
어떠한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설마 이런 결일 줄은 조금도 머리를 굴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오히려 그래서 백주경은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윤서원의 생각 정리를 도와줄 겸 한동안 담배만 피워 댔다. 이쯤이면 됐겠지, 싶을 만큼 뜸을 들여 준 뒤 반도 닳지 않은 담배 토막을 재떨이에 꾸욱 눌러 껐다.
“그런 내 딸을 데리고 서 대표가 재미를 본 모양이던데.”
이기죽대는 식으로 뇌까린 백주경이 유유히 고개를 들어 윤서원과 눈을 맞추었다.
“이거야 원, 애비 심정도 고려는 해 줘야지.”
“…….”
“몇 년 만에 해후를 하게 된 딸이 덜컥 애를 배 왔는데 기분이 어떻겠어? 응?”
담배를 재떨이에 수직으로 꽂아 놓은 손이 머잖아 관자놀이로 이동했다. 백주경은 골치가 아프다는 식으로 관자놀이 부근을 지그시 눌러 비볐다.
그러다가 기습 공격처럼, 사위가 고요해진 틈을 타 찔러 넣는다.
“희우 배 속에 그거, 서 대표 애새끼 맞지?”
윤서원은 이번에야말로 할 말을 잃은 표정이 되었다. 연속으로 폭탄을 투하당한 심경이었다.
희본과 희우가 백주경의 자식이라는 사실에 이어 희우가 지금 아기까지 뱄다고?
윤서원은 무심결에 뒤편을 힐끔거렸다.
지금 자신의 뒤를 지키는 어깨 중 한 명의 셔츠 단추에 도청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백주경의 짐작대로 서수혁은 오늘 등장만 하지 않았을 뿐, 이 자리에 함께하고 있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코앞에서 희우를 뺏겨 버린 뒤로 서 대표가 벌인 며칠간의 살 떨리는 분풀이가 떠오르자 두개골 안쪽이 지끈거렸다. 적어도 서수혁에게 있어서는 먼저 밝혀진 사실보다 후에 밝혀진 사실이 더 크게 작용할지도 모르겠다.
단숨에 심각해진 윤서원의 모습을 보며 백주경이 비릿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커다란 손이 테이블을 탕탕 두드렸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압도되었다. 이 바닥에서 오래 굴러먹어 잔뼈 하나는 굵다는 걸 자세로 보여 주는 양 그는 간단한 손짓과 목소리만으로 잘도 상황을 쥐락펴락했다.
백주경이 포복하는 짐승처럼 상체를 바짝 낮추었다. 일직선으로 마주쳐 오는 눈초리가 예사롭지 않게 발광했다.
“오늘 자리에는 서 대표 본인이 나왔어야지.”
“…….”
“뭐, 이렇게 쏜살같이 꼬리 잡은 거 보면 딴엔 애지중지하기라도 한 모양인데.”
상대방을 위압적으로 짓누르는 자세를 그리던 백주경이 느린 몸놀림으로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가 가지런히 놓여 있던 커피잔을 들고서 윤서원 쪽으로 다가갔다.
“그런 패를 내가 갖고 있다는 걸 잘 알면.”
허공을 가로지르며 뻗어 나가던 커피잔이 한 구간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서서히 기울며 내용물을 질척하게 쏟아 냈다. 윤서원의 준수한 얼굴이 바로 그 아래에 놓여 있었다.
“바짝 숙여야지 않겠어?”
시꺼먼 물로 세수를 한 윤서원 앞에 커피잔을 부서뜨릴 기세로 쾅 내려놓은 백주경이 음산하게 뇌까렸다.
“서 대표보고 직접 찾아오라고 하렴.”
너 같은 조무래기가 낄 만한 자리가 아니야.
짧게 경고한 백주경이 그대로 뒤를 돌아 한들한들 대리석 바닥을 걸어 나갔다.
주차장으로 내려가기 위해 엘리베이터 앞에 선 그는 은색으로 도금된 승강기 문을 바라보았다.
판판한 면 위로 언뜻 점잖으면서도 근엄하던 희본의 면색이 스쳐 지나갔다.
그건 정여래보다는 저와 닮았다고 봐야 할 인상이었다. 아무리 정여래 판박이라고 해도 흐르는 피를 속일 수는 없는지, 자신을 닮은 면모 역시 옅게나마 존재하기는 했다.
이 낯짝을 내가 어디서 봤더라.
‘왔구나.’
아, 그래.
몰래 불러낸 자리,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오는 희본의 표정이 이와 비슷했다. 아니, 이보다 조금 더 형편없었던가. 도살장에 끌려온 소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으니까.
‘무슨 일로 부르신 겁니까.’
‘이게 얼마 만에 보는 거지? 나에 대한 기억은 남아 있으려나? 하도 어릴 적에 헤어져서 말이지.’
미끈한 정종을 쥔 백주경이 손을 움직였다. 빈 잔에 액체를 넘치게 채워 희본의 앞에 내려놓았다.
탁, 하는 소리가 삭막한 공기를 갈랐다.
‘한 잔 들지.’
‘자리 오래 못 비웁니다. 용건만 말씀하시죠.’
‘뭘 그리 긴장을 하고 그래. 어차피 여기까지 오면서 흔적 남지 않게 잘 지웠을 거면서.’
‘…….’
‘그 눈빛은 뭐지?’
‘제 뒷조사하셨습니까?’
‘뒷조사까지 갈 것이 있나. 원래 이 바닥에서 일 잘하는 놈들은 알아서 말이 돌아. 일강 전담 청소꾼이 기가 막히게 유능하다고 하던데. 어지간한 현장에서도 머리털 한 올 나오지 않게 깔끔히 처리한다고.’
‘…….’
‘귀한 능력이지. 서 대표가 아낄 만해.’
차분한 색을 두르던 희본의 눈빛이 곤두섰다.
상대를 가늠하지 않고 날부터 세우고 드는 그 모습은 꼭 새끼 고양이가 발톱을 치켜드는 것만 같아서 그저 웃겼다.
‘많이 놀랐다. 설마 내 아들이 일강에 있을 거라고는 조금도 짐작 못 했으니까.’
‘의미를 부여해야 할 일입니까?’
‘내가 그 바닥에 함께 몸을 담그고 있는 입장이라면, 당연히 의미가 있지.’
희본은 이번엔 의연히 감정을 누르지 못했다. 비교적 에둘러 말하는 식일 뿐, 그 안에 담긴 의미를 똑똑히 알아챈 거다. 지금 저 말은 ‘너에게 이용 가치가 있다’는 뜻에 지나지 않았다.
‘속 보인다는 생각, 안 드십니까?’
‘속 좀 보이면 어떠니. 피 섞인 가족끼리.’
희본이 피가 날 정도로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무언가를 꾹 참고 있는 듯한 그 낯을 한 겹 한 겹 포 뜨듯이 지켜보던 백주경이 쥐고 있던 술잔을 내려놨다.
‘희본아. 너에게 제안을 하나 하고 싶구나.’
‘…….’
‘일강에 장부가 있는 걸로 안다. 정계, 재계 할 것 없이 거미줄처럼 엮여 있는 장부, 그걸 내게로 가지고 오면 지금 이 자리, 네게 물려주마.’
희본의 입에서 긴 탄식이 흘러나왔다.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진작부터 예견했던 일이 끝내 사실이 되어 버렸다는 것처럼 무겁도록 짙은 숨결이었다.
그러한 표정이면서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꼭 어디까지 하나 들어 보자는 식인 것 같아서 백주경도 선선히 첨언했다.
‘한낱 누군가의 시다바리로 여생을 살아가느니 회사 대표직에 앉는 게 훨씬 이득이지. 고민하는 거 자체가 우스운 일이야.’
‘그런 자리에 앉아 계신 분이 왜 이렇게 합리적이지 못하십니까.’
희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둔탁하고 묵직했다. 삐죽빼죽 가시 돋친 감정을 꾹 내리누르기 위하여 어금니를 사리물기라도 한 것처럼.
‘장부를 빼 오라고요? 그래서 서 대표님을 배신하라고요?’
‘…….’
‘그럼 서 대표님이 누굴 가장 먼저 타깃으로 삼으실 것 같습니까?’
‘네 여동생이 걱정인가 보구나.’
마냥 남 대하듯 구는 태도에 끝내 희본은 참지 못하고 이를 아득 갈았다.
‘……이사님 딸이기도 합니다.’
두 사람의 우애가 좋다는 건 그 대목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희본은 똑똑한 듯 멍청했다. 그렇게나 남매 사이가 좋다면 제 앞에서는 드러내면 안 될 일이었다. 이 바닥에서 취약점이란 반드시 감춰야 할 종류 중 하나였다.
‘내가 설마 거기까지 생각을 못 했을까.’
‘…….’
‘네가 정말 나를 위해 움직일 마음이 있다면 나 역시 전심으로 백업해 줄 거다. 네 동생, 그러니까 내 딸의 처우까지 그 거래에 포함이 되어 있는 거야. 네가 그 장부를 내게 안전하게 가져오는 동안 내가 그 아이를 봐주면 되는 거 아니겠니.’
지금 희본의 얼굴은 꼭 앞도 뒤도 벽으로 둘러싸인 곳에 갇힌 어린아이 같았다. 응하고 싶지 않지만 그게 뜻대로 되지 않으리라는 걸 이미 간파한 표정.
‘……제가 하지 않겠다면요.’
그래도 이대로 질질 끌려가고 싶지만은 않은지 소심히 반항의 불씨를 지펴 본다.
하나 안타깝게도 그 불씨는 백주경의 몸에 흠집 하나 낼 수 없을 만큼 약하디약한 세기였다.
‘글쎄…….’
백주경이 그새 온기가 날아가 식은 정종의 겉면을 만지작거리며 음산히 읊조렸다.
‘네가 내 아들이라는 사실을 일강에 알려도 좋고, 아니면 나도 이제부터 내 딸 얼굴 좀 제대로 보고 살아도 좋고…….’
비열한 협박이다.
그걸 숨길 생각조차 않는 뻔뻔한 태도에 희본의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희본아. 왜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는지 모르겠구나. 배신이라도 하는 느낌이 들어서? 그게 맞다면 그리 여길 것 없어. 피가 물보다 진하다는 건 세상이 인정한 이치다. 네가 내 아들이니 내 영역으로 돌아오는 것 역시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일이라는 거야.’
그런 희본을 마주하며 백주경은 우는 아이에게 달콤한 사탕을 건네 달래는 식으로 첨언했다. 그럼에도 희본의 안면에 새겨진 구김살은 펴질 여지가 보이지 않았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지금 이건 거래라는 그럴싸한 겉껍질로 포장한 협박에 불과했으니.
희본이 백주경의 혈육이라는 사실과 그에게 지켜야만 하는 여동생이 있다는 사실은 모두, 꼼짝없이 굴복당해야 할 약점으로 전락할 수 있는 일이었다.
‘희우…… 만난 적 있으십니까?’
‘공식적으로는 없지.’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희본은 핏줄이 불거질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공식적으로.
그래, 그 말대로다.
희본을 조우하게 된 순간 바로 뒷조사를 시켰고 그가 제 삶을 갈아서까지 물심양면 돌보는 여동생마저 샅샅이 털어 본 바였다. 희본에게는 이 대답마저도 협박의 요소가 됐을 터다. 그걸 굳이 부정할 마음은 없었다.
‘서 대표님, 제가 모시는 분이라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 정말로 호락호락하지 않으신 분입니다.’
‘내 앞에서 형님 자랑이라도 하는 건가?’
‘……생각할 시간을 달라는 말입니다.’
그때, 희본은 꼭 덫에 빠지기라도 한 것만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쪽 발이 콱 물려 제 신체 일부를 뜯어내든지, 아니면 그대로 목숨을 던지든지 하는 딜레마를 겪게 하는 덫.
생부랍시고 나타난 백주경이 바로 그 덫이었다.
희본은 결코 무식하지 않았다.
거래에 쉽사리 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 셈이었다. 그 방법이야 벌써 두 개나 확보한 상태였다.
핏줄을 근거로 일강 안의 내부 첩자로 몰아 내부로부터 파멸하게 만드는 법, 그리고 희우를 인질로 들먹이며 무언의 압력을 불어넣는 법.
이 바닥은 삶과 죽음을 숨 가쁘게 넘나드는 경계였다. 까딱 방심을 했다가는 모가지가 날아가 숨이 끊기는 세상. 그러니 이런 식으로 조우하게 되어 버린 이상 정희본은 직감했을 터.
이 거래로 하여금 제 목이 날아가거나 희우가 희생을 당하거나,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일어나게 될 일이라는 걸.
저급한 걸 알지만 백주경도 별다른 수가 없었다.
사내에서 총력을 기울이던 사업이 무산되기 바로 직전에 놓이며 제 자리마저 위태해지고 있는 형국이었다.
가지고 있는 모든 패를 까서라도 어떻게든 기회를 마련하고 그걸 잡아야만 했다. 그때에 마주친 희본은 안타깝지만 제게 있어서는 천운이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정여래가 아득바득 데리고 간다고 할 때는 적잖이 짜증이 났었는데 뒤늦게 생각해 보면 다행이었다. 둘을 세트로 가져가 준 덕택에 이런 행운이 발치로 굴러들어 온 거 아니겠는가.
그리고 잠깐의 시간이 흐른 뒤, 희본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 전 이사님 안 믿습니다. 그러니까 거래 조건을 바꾸죠. 저는 그쪽 회사 대표직 욕심 없습니다.
그럼 원하는 게 뭐냐고 묻자 희본은 기다렸다는 것처럼 말했다.
- 저랑 희우, 두 사람이 해외로 나가 정착할 수 있는 신분과 비용입니다.
이왕 잡은 김에 더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을 것만 같던 패가 저 나름대로 머리를 굴렸다.
이대로 포기하기는 조금 아까웠으나 지금은 장부를 얻는 게 어떤 일과도 바꿀 수 없는 우선순위였으므로 백주경은 선선히 따라 주었다. 현재로서는 그가 최대한 장부를 빼 오는 쪽으로 마음을 먹게 하는 게 중요했다.
원하는 것들을 발 빠르게 준비해 주자 정희본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리고 며칠 후.
- 오늘 정오가 지나면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장부 빼내고 눈 돌리는 데 최대 세 시간입니다. 그 이상은 저도 못 버팁니다. 그러니까 반드시 그 시간 안에 희우 픽업해서 보호해 주시죠.
이런 계기로 만나게 되기는 했다지만, 백주경은 충분히 거래에 응해 줄 마음이 있었다.
희본을 협박하는 악수를 두는 건 그가 이 거래에 응하지 않는다는 전제 조건에서 뻗어진 가지였으니, 그가 거래에 응하기만 한다면 저 역시 얼마든지 희우를 보호해 줄 의향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그 지점에서 발생했다.
서수혁은 희본이 예상했던 시간보다 훨씬 더 이르게 장부가 사라진 걸 눈치챘다. 그리고 한발 빠르게 움직였다.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라는 희본의 경고처럼 일 처리 하나에도 머뭇거리는 법이 없었다.
일이 발생한 바로 그날, 백주경이 보낸 차는 그들이 머물던 단칸방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희우는 수업을 마치고 그 차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오는 중에 도끼에게 납치를 당한 거였다. 단 한 발만 앞섰어도 희우가 서 대표의 손아귀로 들어갔을 일은 없었을 거다.
‘이런, 씨팔.’
한발 늦게 희우의 납치 소식을 전해 들은 백주경은 일이 꼬였다는 걸 짐작하고 이마를 거머쥐었다.
이미 일강에 잡혔다면 빼내 오는 건 무리였다. 처음부터 조건으로 내걸었던 희우의 안전이 실패로 돌아가 버렸으니 이제 이 거래를 성사시킬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희우가 제 곁에 있다고 속여 정희본을 안심시키기. 그리하여 정희본이 빼돌린 장부를 무사히 이쪽으로 인계하게 만들기.
정희본의 의심은 쇠심줄처럼 질겼다.
비슷한 목소리와의 통화 연결로도 만족하지 못했다. 썩 번거로운 과정이었으나 장부를 가진 희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라면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장부 하나를 사이에 둔 채로 치열한 공방전이 지속됐다.
하지만 진실은 결국 가릴 수 없는 법.
희본은 끝내 동생이 제 아버지의 품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불과 몇 달 전의 일임에도 까마득한 옛일처럼 느껴지는 과거를 복기하던 백주경이 지잉, 울리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서재에 설치된 시큐리티 시스템 알림이 화면에 떠 있었다. 누군가 멋대로 2층에 있는 자신의 서재에 들어가 본 거다.
현재로서 이런 짓을 벌일 만한 사람이 달리 누가 있겠는가.
이맛살이 팍 찌푸려졌다.
어쩜 이렇게 오빠랑 닮았을까. 남매가 사람을 진절머리 나도록 귀찮게 구는 구석이 있었다.
“바로 집으로 가지.”
주차장으로 내려온 백주경이 차에 올라타며 싸늘히 지시했다.
* * *
정오가 되었을 무렵 기상한 희우는 여느 날처럼 욕실로 가 세수부터 했다. 물기가 남은 얼굴을 꼼꼼히 닦은 뒤에 옆을 힐끔 돌아보았다.
반짝이는 대리석으로 마감된 세면대 위에 실핀 몇 개가 놓여 있었다.
거울 위로 비치는 희우의 눈동자가 욕실 특유의 조도 약한 불빛 아래에서 심오하게 번들거렸다.
며칠간 이곳에서 지내며, 희우는 곳곳에서 피어나는 의구심을 도통 버릴 수가 없었다.
그간 백주경과 적지 않은 식사 자리를 가졌다.
대체로 식사를 하는 건 희우 혼자였고 백주경은 커피를 마시거나 열없는 손길로 음식을 헤집다가 마는 게 전부였다.
이전까지는 이유가 있어서 고기를 잘 먹지 못한다는 제 뜻에 따라서, 본인이 육류 취향이라 그런 식으로 배려를 해 주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그럼 희본이가 네게 그 장부에 대해서는 조금도 얘기를 하지 않은 건가?’
‘그전까지는 전혀 들은 바가 없다는 거지. 일이 터지고 알게 됐으니 많이 놀랐겠구나.’
이런 식으로 그는 그 식사 자리를 이용하여 장부에 관한 화제를 툭툭 꺼냈다. 희본이라는 존재와 염려라는 감정으로 얼핏 포장을 한 듯 보여도 그 화제의 핵심은 분명 장부였다.
꼭 장부에 대해 정말로 아는 게 없는지 은연하게 캐묻는 것처럼…….
찝찝한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묘하게 갇혀 있는 느낌이 들었다.
희본의 일로 지치기도 지쳤거니와 생각지도 못했던 아기 문제까지 생겼다. 그런 점들과 더불어 본래 머물던 집을 서수혁에게 빼앗기며 정말 갈 데가 없어진 관계로, 하는 수 없이 이곳에서 신세를 지는 동안 떠안게 된 위화감이 적잖았다.
제때제때 식사가 마련되고, 필요한 것은 말만 하면 구비가 되는 환경은 부정할 수 없이 편하지만 그만큼 폐쇄적이었다. 자신의 입에서 먼저 나가고 싶다는 얘기가 나오지 않게끔 미리 틀어막는 느낌이랄까.
혹시나 자신이 나가려고 하면 서수혁의 곁에서 당한 짓처럼 큰일이 벌어질까 봐 무서워 잠자코 있지만, 어쨌든 이쪽도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알아봐야만 하는 것 역시 있었다.
희우는 사흘 전에 전화로 실핀 몇 개를 요구했다. 목욕을 할 때 머리카락이 자꾸 흘러내려 필요하다고, 물어보지도 않은 용도까지 설명하면서 마련해 온 그것들이 지금 눈앞에 있었다.
얼굴을 닦은 수건을 내려놓은 희우가 위아래로 맞물린 실핀을 잡아 벌렸다. 살짝 힘을 주자 맞물린 이음새가 새의 부리처럼 쩍 벌어지다가 이윽고 곧은 직선의 형태가 되었다.
희우는 첨예한 끝을 몇 번 만지작거리다가 욕실을 나왔다.
백주경의 전언은 일견 타당한 듯 보이나 자세히 헤아려 보면 듬성듬성 빈 공간이 있었다.
‘제 아비가 멀쩡히 살아 있는 걸로 모자라 이렇게 몸집 큰 기업체를 가지고 있다면 탐이 날 만도 하지.’
자리가 탐이 나서 이런 짓을 저질렀다?
맹세컨대 오빠는 물욕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당장 내일 입에 풀칠할 것도 없어 걱정에 근심을 더하던 때가 그리 멀지 않은 과거였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오기를 부리듯이 외가에서 재산 한 푼 받지 않고 나온 뒤로 그랬다.
그러니만큼 오빠는 그래도 적당한 직업을 가지고, 그 일을 하며 번 돈으로 먹고사는 현재의 삶에 만족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오빠가, 우연히 알게 된 아버지의 자리에 눈독을 들이며 이런 일을 꾸몄다고?
애초에 그런 걸 작정했다면 제 안전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 리가 없다.
혹시나, 오빠가 저를 버린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백주경의 설명에 따르자면 오빠는 장부를 빼내 오는 조건으로 제 안위 역시 걸었다고 했다.
그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오빠는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저는 일강에 납치를 당해 겪지 않아도 될 산전수전을 겪었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았다. 넓은 퍼즐 판에 어긋난 조각이 연달아 끼워져 빈 공백이 생긴 기분. 그 지점 역시 설명되지 않는 하나의 오류였다.
무엇 하나 똑바로 진실을 알려 주는 게 없는 현실이 미치도록 어렵기만 했다.
그 틈새에서 삐죽 돋아난 감은 분명히 말하고 있었다.
오빠의 죽음에 이유가 있다면, 필시 백주경이 연관되어 있으리라고.
한때는 품자마자 소름이 돋아난 가정이었다. 하지만 그 의심은 이곳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옅어지기는커녕 진해져만 갔다.
그게 백주경이 피 섞인 아버지임에도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이유이고, 맹목적인 믿음에 여지를 두는 근거였다. 그렇기 때문에 오빠 문제도, 임신 문제도 그 무엇 하나 속 시원히 맡기거나 털어놓을 수 없었다.
방 밖으로 나오자 사위가 고요했다.
희우는 2층으로 연결되는 계단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이상하게 저쪽에 관심을 가질 때마다 귀신같이 테이블 위 전화가 울리거나 백주경이 나타났다.
어디선가 자신이 무얼 하는지 지켜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래서 더욱 수상했다.
만약 자신이 저 위로 올라가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았다면, 희우 역시 2층에 이 이상으로 관심을 두는 일은 없었을 거다.
‘집이 굉장히 넓네요. 복층 구조라서 그런지…… 저 2층에는 뭐가 있는지 여쭤 봐도 되나요?’
언젠가의 식사 자리에서 아닌 척 철면피를 깔며 물었었다. 그러자 커피잔을 기울이던 백주경이 ‘응?’ 하고는 덤덤하게 대꾸했다.
‘서재가 있지.’
백주경은 간혹 밤에 집을 비울 때가 있었다. 의심이 짙어질 무렵 그런 밤이 찾아왔을 때에 희우는 불 하나 켜지 않고 캄캄한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조용히 2층으로 진입했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 보이는 방 손잡이를 돌려 보았다.
덜컥.
열리지 않았다.
2층의 모든 방문은 잠겨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이 되기를 기다렸다.
잠긴 문을 여는 데에 쓰일 실핀과 백주경의 외출. 그가 잠깐의 통화로 일정을 되짚던 사흘 후가 바로 오늘이었다.
희우는 걸음 소리를 죽여 2층으로 올라갔다.
손잡이를 조용히 돌렸으나 여전히 무언가 턱, 턱 걸리는 느낌만 났다. 희우는 다리를 굽혀 앉아 실핀을 정면으로 바로 세웠다. 그리고 열쇠가 들어갈 법한 구멍 속으로 밀어 넣었다.
바늘처럼 가느다란 것이 안에서 덜컥덜컥, 잠금을 보조하는 장치를 건드렸다. 어떻게 굴려도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애가 탔다.
이러는 사이에 누군가 나타나면 꼼짝없이 변명을 해야 할 모양새였다. 그 상상에 어느덧 진땀까지 송골송골 맺혔다.
초조함에 뭉개지기 시작한 의식을 추스르며 집중하던 차였다. 노력이 빛을 발하듯 드르륵, 안에서 뭔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잠시 움찔했다가 서둘러 그 기척에 집중하여 손가락을 더 섬세히 굴려 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덜걱, 하고 고막이 긁혔다.
명쾌하고도 후련한 소리였다.
구멍 안쪽을 가만 바라보던 희우가 실핀을 빼고서 몸을 일으켰다. 천천히, 천천히 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어떻게 해도 내부를 보여 주지 않을 것처럼 버티던 좀 전과 달리 손잡이가 부드럽게 내려가며 틈새가 벌어진다. 희우의 동공이 그 틈새로 기어 나오는 빛을 머금으며 활짝 열렸다.
드러난 풍경은 부정할 여지 없이 서재였다.
잔뜩 차오른 긴장은 크게 특별한 점을 찾을 수 없는 내부를 확인하며 시시각각으로 잦아들었다.
벽면 한쪽을 꽉 채우는 책장과 그 안에 배열된 책들, 기역 자 모양으로 자리한 책상과 그 위에 놓인 컴퓨터, 그 밖의 서류들.
함부로 건드렸다가 행여나 흔적을 남기는 실수를 저지르면 안 되었기에 희우는 최대한 조심조심 움직였다. 가까이서 본다고 한들 특색을 발견할 수 없는 책장을 지나 서류 수십 장이 겹쳐져 있는 파일을 훑어보다가 그 아래로 펼쳐지는 책상 서랍에 눈길을 주었다.
첫 번째 서랍을 열었다.
도장과 만년필, 그 밖의 용도를 알 수 없는 잡동사니가 나름의 질서를 갖춘 채로 나열되어 있었다.
다음으로 두 번째 서랍.
여기에는 책상 위와 마찬가지로 정리된 서류들이 담겨 있었다. 파일철로 정리가 되어 있어서 혹시 아래에 뭐가 있나 들춰 보았으나 특별한 건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서랍.
큰 기대를 내려놓으면서도 성마르게 연 안에는 웬 비닐봉지가 담겨 있었다. 단정하고 정갈한 서재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조잡한 물건이었다.
희우의 심장이 반사적으로 빠르게 뛰었다. 그것을 의자 위로 꺼내어 갈무리된 입구를 헤집었다. 비닐봉지가 구겨지는 특유의 소리가 흡사 뇌를 꾸깃꾸깃 뭉개는 소리처럼 울렸다.
마음이 급해져 손부터 확 넣었다. 뭉툭한 뭔가가 만져지기에 바로 움켜쥐어 끄집어냈다.
“꺄악!”
그것을 눈으로 확인하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집어 던질 수밖에 없었다.
그건 잘린 사람의 손이었다.
제 손에 닿았던 찬 감각이 다른 이의 몸에서 절단된 신체라는 걸 깨닫자마자 오금에 힘이 풀렸다. 주르륵 주저앉은 희우는 벽에 기대어 앉아 씨근덕거렸다.
가빠 오는 호흡을 달래던 차, 그녀는 제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어…….”
멍청하게 소리를 내는 목구멍이 따가워졌다. 입 안에 침이 가득 고이는 게 느껴졌으나 차마 삼킬 수가 없었다.
믿을 수 없는 걸 본 이처럼 아연실색한 희우는 무릎걸음으로 의자 아래에 나동그라진 손 쪽으로 더듬더듬 기어갔다.
한 뼘, 한 뼘 다가갈 때마다 심장의 진폭이 정도를 모르고 널뛰었다. 이러다가 입 밖으로 터져 나와 버리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강렬하게 쿵쾅거렸다.
“이, 이거…….”
이미 잘린 지 오래되어 본래 사람이 가져야 할 혈색 없이 퍼렇게 질려 있기만 한 손.
기력을 잃고 구부러진 손가락 안쪽으로 무언가가 보였다. 문신이라기에는 연하고, 점이라기에는 너무 컸다. 뚝 잘려 버린 손이 가까워질수록 희우는 오감 일부가 트럭에 깔리는 것처럼 으깨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착각이 아닐지도 모른다.
흔적을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맞물린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를 벌리는 순간, 희우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지그재그 모양의 흉터.
희우가 기억하기로, 제 주위에 이런 흉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미안해. 맛없지?’
제게 요리를 해 준답시고 나섰던 오빠가 첫 요리의 실패와 함께 얻은 화상 자국이었다.
“이, 이게.”
이게 왜 여기에 있어.
이게 왜…….
‘강원도 방면 6번 국도에서 사고 발생한 걸로 추정됩니다.’
‘현재 시체 부위 중에 왼쪽 손목이 실종된 상태라…….’
본능이 너는 이미 답을 알고 있노라 속삭여 주듯 윤서원에게 전해 들었던 얘기가 숨 가쁘게 귓전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후에 장례식을 준비하면서도 거푸 접했으나, 크게 주목하지 않았던 부분이다. 오빠가 죽었다는 현실이 모든 사고를 틀어막고 오감을 먹먹한 슬픔에 잠기게 만드는 바람에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을 쓸 여력이 한 줌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데, 그렇게 실종되어 버렸다는 오빠의 손목이 이 집에서 나왔다.
이 집, 이 서재, 백주경의 서재, 백주경의 책상과 그 서랍에서…….
맥없이 주저앉아 있던 희우는 다음 순간 정신 나간 사람처럼 손을 뻗었다. 의자 위에 올려 둔 비닐봉지를 끌고 와 안을 마구잡이로 헤집었다.
안에서는 한 가지 물건이 더 딸려 나왔다.
핸드폰이었다.
전원 버튼을 길게 누르자 액정에 반짝 빛이 들어오며 켜졌다. 큼지막하게 시간을 알려 주는 숫자와 함께 배경으로 설정해 둔 사진이 희우의 동공을 쩍 쪼갤 듯이 떠올랐다.
‘오빠, 여기?’
‘조금만 더 오른쪽으로.’
‘으, 빨리 찍어! 민망해.’
‘뭐가 민망해. 꽃다발 더 들어 봐, 희우야.’
만개한 동백꽃 나무 아래, 고등학교 졸업식 때 오빠가 핸드폰으로 찍은 자신의 사진이었다.
그걸 보자마자 어떻게 참을 겨를도 없이 눈물이 터져 나왔다. 소리도 없이 흘러나와서는 꼼짝없이 희우의 얼굴을 먹어 치웠다. 핸드폰을 쥔 손이 덜덜 떨렸다. 폐부가 무례하게 주물러지는 것처럼 호흡이 조절되지가 않았다.
잘린 오빠의 손에 이어 오빠의 핸드폰까지 나왔다.
그 두 개를 보자 금방 답이 나왔다. 지문 인식으로 되어 있는 핸드폰 잠금을 해제하기 위해 죽은 사체에서 손만 잘라 내어 가져온 거다.
어째서?
핸드폰을 뒤져서까지 찾으려고 하는 게 있는 거다.
그게 뭘까.
그건…….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장부는 중요한 몇 페이지가 누락된 상태야. 아무래도 희본이가 그 몇 장을 뜯어내서 다른 곳에 숨겨 놓은 것 같다.’
‘희본이가 죽은 지금, 그게 어디 있는지는 아무도 몰라.’
‘나는 희본이가 어딘가에 숨겨 둔 그 페이지도 전부 회수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거다.
장부인 거다.
누락됐다는 몇 페이지, 그걸 찾기 위해서.
이게 사실이라면, 백주경이 제게 고했던 모든 가정이 뒤집힐 수도 있는 문제였다.
어쩌면 오빠가 그 몇 페이지를 뜯어내 아무도 모를 장소에 숨긴 건, 일강 때문이 아니라…….
‘백주경에게…… 뺏기지 않으려고?’
더는 여지가 없었다.
악인인가 선인인가, 내내 품고 있던 백주경을 향한 의심이 지금 이 순간 확고히 판가름이 섰다.
그는 악인이었다.
혈관을 돌며 흐르는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질렸다가 시퍼렇게 흐려졌다가 빨갛게 익었다가 난리였다. 그 어떤 식으로도 부정할 수 없이 주어진 증거에 말문이 더러 막히고 생각이 툭툭 잘렸다.
급격하게 찾아온 혼돈 때문인지 이제 거의 다 가신 이명이 순식간에 재생되어 오른쪽 귀를 찔러 왔다. 삐이이, 삐이이- 경고음처럼 작게 울리는 귀울음 속에서 희우는 엉엉 울지도, 아아악 소리를 지르지도 못했다.
그저…….
“내 서재에 볼일이라도 있었나?”
난데없이 던져진 타인의 목소리가 의식 속에 발자국처럼 찍혔다.
희우가 화들짝 고개를 치들었다. 그새 새롭게 맺힌 눈물이 뺨을 타고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그럼에도 다 흘러내리지 못한 물기가 남아 시야를 파도치게 했다.
쥐고 있는 핸드폰과 잘린 손목을 얼른 보이지 않게 등 뒤로 숨기려던 희우는 울컥하고 치미는 마음에 관두었다.
왜?
어째서 내가 숨겨야 하지.
나쁜 짓을 저지른 건 저 사람인데, 왜 내가 이렇게 전전긍긍해야 하는 거야?
희우는 팔을 들어 눈가를 박박 문질렀다. 의연함을 갖기 위해서 한 행동이지만 한번 와르르 무너진 마음은 도통 본래의 형태로 돌아오지 못했다.
희본 그는, 오빠는 희우의 세상을 이루던 사람이었다.
저를 감싸던 많은 의문과 부정, 그 안에서 허우적대며 혼란스러워하는 것만으로 목이 메이고 힘이 부치던 나날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발가벗겨진 오빠의 죽음 앞에 놓였다.
그러니 의연할 수가 있을까.
절대로, 죽어도 불가할 일이었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단지 뼈가 곪도록 사무치는 마음만 들었다. 오빠와 함께 지닌 많은 기억들이 엉망으로 뒤엉켜 머릿속을 울려 대서. 그게 마음속까지 마구잡이로 헤집어 대는 까닭에 이성이 바로 설 자리도 없었다.
“오빠한테, 뭐라고 했어요?”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면서도 울음을 참기 위해 희우는 손톱으로 손바닥을 찔렀다.
“아니…… 오빠한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눈가를 가리던 손을 치웠다. 그제야 백주경이 똑바로 보였다. 이전 날 제게 보여 준 살가운 태도가 지금은 조각으로도 찾아볼 수가 없이 지워져 있었다.
지금 희우에게 그는 아주 시커멓고 어두운 흑색 덩어리로만 보였다.
“오빠를 위해서 날 찾았다는 말…… 사실이 아니죠?”
“…….”
“실은 장부 때문인 거죠? 장부, 몇 장 누락됐다는 그거. 그거 어딨는지 알아내려고.”
끅, 끅. 간신히 말을 이어 가는 틈새로 자꾸만 울음이 참을성 없이 터져 나왔다. 더는 버티기가 힘든 기분이 몰아쳤다. 희우가 고개를 마구 젓다가 백주경을 노려보았다.
“어떻게 이래요? 어떻게…….”
“…….”
“아빠잖아요. 우리 두 사람 아빠잖아!”
맘속에서 뭔가가 뜯겨져 나간 것처럼 너덜거렸다. 그래서 갈라진 목소리로 고작 한 번 소리를 지른 것뿐임에도 너무나 큰 상실감과 탈력이 몰려왔다.
있는지도 모르고 살아온 부친의 존재가 마음에 이렇게나 큰 피멍을 맺히게 할 줄은 몰랐다. 희우는 기어이 열어 버린 판도라의 상자 속에 들어 있던 오빠의 흔적들을 소중히 거머쥐었다. 그리고 백주경이 서 있는 문가로 다가갔다.
“저는, 저는…… 더 이상 여기 못 있어요.”
서재를 나가려고 하는데 어깨가 붙잡혔다.
“희우야, 어렵게 갈 것 없다.”
“…….”
“희본이가 못 받으면 네가 받으면 되는 일이야.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는 문제 아니니?”
감정이 산산이 조각나 잘 추슬러지지도 않는 저와 다르게 실로 태연자약한 백주경을 보자 진정 소름이 돋았다.
이런 식이었을까.
오빠에게도 이런 식으로 굴며 뻔뻔히 죽음의 낭떠러지로 밀어 버린 건가.
희우는 진저리치듯이 진율하며 저를 붙잡는 손을 온 힘을 다해 뿌리쳤다.
“오빠가 죽었어요! 근데 어떻게 어렵지 않은 문제가 되죠?”
“…….”
“저한텐 버거워요. 아직도 믿기지 않아요. 받아들이고 싶지도 않은 일이라고요. 저한테 아빠가 있는지도 몰랐을 시절에 아빠 역할, 가장 역할 다 해 주면서 저 키워 주고 지켜 준 게 희본 오빠인데…….”
속에서 파도가 쳤다.
끝도 없이 밀려와서 표정으로, 호흡으로, 모든 이목구비로 감정을 꿀럭꿀럭 토해 내게 만들었다.
희우는 백지장처럼 하얘진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게 원하시는 게 장부인가요? 그럼 안타깝게 됐어요. 전 누락된 페이지가 어디 있는지 정말 몰라요. 오빠에게서 들은 적도 없고 서 대표님한테 전해 들은 것도 없어요.”
제 할 말만 고한 뒤 그를 스쳐 지나갔다. 다행히 백주경은 자신을 붙잡지 않았다.
서재 밖으로 나서자마자 희우는 크게 비틀거렸다. 하지만 난간을 붙잡아 얼른 기우는 몸을 지지했다.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었다.
오빠를 그렇게 만든 주범의 곁에서는, 그가 지켜보는 앞에서는 무너질 수 없었다.
무너져서는 안 된다.
그러며 동시에 억울하고도 비참한 심통이 봇물처럼 괴어올랐다.
“……엄마한테, 죽었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어서…….”
새파랗게 식은 마음 한구석, 그나마 잔재하던 반가움이 성긴 호흡에 딸려 나왔다.
“혹시라도 살아 있을까 생각해 본 적은 있어요. 그리고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나중에 기회가 됐을 때 한 번쯤은 만나 보고 싶다는 생각도…….”
결국은 다 헛된 꿈이었다. 이명이 가신 자리에 외삼촌의 고함이 떠올랐다.
다 네 재수 없는 팔자 탓이야.
다 네 탓이야. 다.
귀를 틀어막고 싶은데 죽은 오빠의 흔적들을 껴안고 있는 것만으로 벅찼다. 이미 고장 난 오감, 하나 더 맛이 간대도 수선 떨 이유가 없게끔 다가왔다. 뭐든 희본 오빠가 겪어야만 했을 고충보다는 약할 테니까.
“이런 식이 아니라면, 더 좋았겠지만요.”
간신히 넘어지지 않은 희우가 계단을 밟아 아래로 내려왔다. 이만 밖으로 나가기 위해 곧장 현관으로 직행해 문을 붙잡는 순간이었다.
그걸 감싸 쥐고서야 깨달았다.
언제든지 나갈 수 있는 이 문을 두고서도 망설였던 이유는 어쩌면, 손톱만큼은 기대감을 품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고.
처음 제대로 마주하게 된 부친이었다. 엄마와 오빠가 다 떠나 버린 이 세상 속에서, 이제 정말 하나 남은 혈연.
그래서 조금쯤은 기대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고…….
깃든 의심과 별개로, 그건 제 의지로는 어찌할 수 없는 본능적 발현이었다.
희우는 속내를 더 애달프게 조이는 깨달음을 단호히 제쳐 두고서 현관문을 밀어젖혔다. 그러자마자 드리운 건 햇살이 아닌 짙은 그림자였다. 퍼뜩 고개를 들었다가 문 앞에 진을 치고 선 까만 남자들을 발견하고 움칠했다.
아연실색한 희우가 더듬더듬 뒷걸음질을 쳤다.
“정여래가 나한테서 너희 둘을 데려갈 때 뭐라고 했는지 알아?”
주춤거리며 물러서다가 둔기처럼 다가오는 음성에 화들짝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희우를 뒤쫓아 내려온 백주경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조금씩 포위망이 좁혀지는 사이에 낀 채 희우는 갈피를 잃고서 머뭇거렸다.
“네 자식 없다고 생각하고 살아.”
“…….”
“나도 그렇게 가르칠 테니까.”
멀쩡한 왼쪽 귀로 받아 내는, 누군가를 흉내 내듯이 평소보다 높은 음조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우스꽝스러우면서도 가시 같은 오한이 들게 만들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백주경의 낯짝은 어떤 감흥도 느껴 볼 수가 없는 것처럼 무감했다. 그게 정말 그를 사람 아닌 무언가로 인식하게끔 만들어서 희우는 끔찍함에 몸서리가 쳐졌다.
“네 엄마가 바란 일이야. 내가 너희를 자식으로 취급하지 않았으면 한 건.”
백주경이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커다란 손이 코와 눈가를 지나 이마에 닿았을 때, 그 아래로 은연히 숨겨졌던 눈동자가 드러났다. 지금까지는 친절한 느낌으로 둔갑시키는 렌즈를 한 겹 두르고 있었던 것처럼, 이제야 적나라하게 내비치는 기세는 한겨울 설산만큼이나 무정하고 시렸다.
“그래서…… 결국 장부가 어딨는지 모른다?”
희우가 말을 잃고 물러나다가 벽에 부딪혔다.
더 이상 후퇴할 구석이 사라졌다는 걸 깨닫자마자 오금이 저려 왔다. 그런 희우를 주시하며 백주경이 차갑게 웃었다.
“그럼 이제 방법이라고는 하나뿐이군.”
“…….”
“널 서 대표에게 파는 수밖에 없겠어.”
* * *
꺾인 손목이 아팠다.
꺾인 고개는 더 아팠다.
희우는 앓는 소리를 속으로 삼켜 내며 침을 꼴깍 삼켰다. 단지 마른침을 목 뒤로 넘긴 것뿐임에도 부단히 고역스러운 일을 행한 것처럼 힘에 겨웠다.
아까부터 내려다보는 무릎이 희게 질려 있었다. 안색이라고 크게 다를까 싶다. 저것보다 더 파르라니한 색깔로 아주 형편없이 무너진 꼴일 거다.
밝혀진 진실 앞에서 더 이상은 평정을 찾을 수가 없었다.
가장 궁금해하던 부분이 밝혀졌지만 내심 제일 바라지 않았던 방향이었다. 그러니만큼 곱씹을 때마다 속이 피멍 든 부위를 누르는 것처럼 지끈거렸다.
참 이상하지.
단지 갇혀만 있는 지금, 크게 문제가 될 법한 외상을 입지는 않았다.
그런데 외상을 입었던 때보다 더 고통스러웠다. 자꾸만 조절할 수 없는 울음이 튀어나오려고 하고, 마음이 혼곤하게 헤집어지는 것만 같았다. 도끼에게 맞았던 그때보다 지금이 더 아팠다.
이유를 모르지 않았다. 외상은 치료를 하고 시간을 들이면 낫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내상은 불가능했다. 오빠의 죽음은, 그로 인해 맘속에 박혀 버린 상처는 아마 평생 지워지지 않을 상처가 될 테니까.
희우는 힘없이 꺾어 둔 고개를 찬찬히 들어 올렸다.
복도를 내다볼 수 있도록 사방이 유리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희우는 바깥을 확인할 수 없었다. 불투명한 용지를 덧대어 내부와 외부가 차단된 까닭이었다.
폐건물의 한 층처럼 앙상궂은 공간.
작업을 하다 만 듯한 페인트칠과 덩그러니 놓인 책상 하나. 당장 빗자루를 들게 만들 것처럼 이면지와 볼펜 뚜껑 같은 잡물로 번잡한 내부. 책 한 권 꽂혀 있지 않은 책장 역시도 옮기던 도중 작업을 중단한 것처럼 어중간한 위치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여긴 아무리 봐도 빈 사무실 같았다.
아마 이 건물의 가장 꼭대기 층이 백주경의 집이고, 그 바로 아래가 그를 처음 대면했던 집무실일 거다. 즉 희우는 백주경의 감시하에 이곳 사무실에 감금을 당하고 있었다.
“아야…….”
길게 한숨을 내쉬며 팔을 움직거렸다가 혀끝에 신음이 맺혔다.
사무용 의자 뒤로 묶인 손이 아팠다. 미간을 살짝 구기던 희우는 눈알만 굴려도 뻔히 파악할 수 있는 자신의 처지를 새삼스럽게 실감하며 허탈한 실소를 흘려보냈다.
진짜 가면이었구나.
내게 보여 주었던 웃음, 딸이라 부르던 목소리, 엄마를 잠깐이나마 추억하게 만들던 대화.
그 모든 게 다 철저히 계산된…… 가면이었구나.
그걸 여기에 갇히고서야 깨달았다.
가증스러운 연기를 간파해 내지 못할 정도로 피붙이의 정에 목이 말라 있었나. 혹은 희본마저도 사라져 버려 홀로가 된 처지를 어떻게든 위로받고 싶었던 걸까.
건조한 웃음이 자꾸만 새어 나왔다. 메마른 공기가 퍼져 나갔으나 그보다 더 삭막한 공간이 희우를 잡아먹을 것처럼 에워싸고 있었다.
희우는 끊어질 것처럼 아픈 목을 이리저리 굴리는 식으로라도 달래며 멍하니 생각했다.
‘널 서 대표한테 파는 수밖에 없겠어.’
그건 무슨 의미일까.
팔겠다고? 나를?
서수혁 그 사람에게?
자신을 아무렇게나 써도 될 물건처럼 대하는 태도에 마음이 시려지는 건 둘째치고, 지금은 그 말에 담긴 함의를 헤아려 보는 게 먼저였다.
통상적으로 판다는 건 돈과 물건의 거래다.
만약 자신이 그 둘 중 하나의 개념에 속한다고 가정한다면…… 백주경이 서수혁에게서 자신을 대가로 돈이 될 만한 뭔가를 받아 내고자 한다는 거겠지.
혹시 오빠를 시켜 장부를 가져오게 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인가.
희우는 서둘러 고개를 가로저었다. 희본을 생각하니 눈가가 멋대로 홧홧해져서였다.
혀끝을 피가 날 정도로 씹으며, 한순간 방심하면 와르르 쏟아져 나올 것처럼 아슬아슬한 감정을 꾹꾹 내리눌렀다.
지금은 울고 있을 때가 아니야.
오빠의 죽음에는 더 이상 이견이 없었다. 이제 그 사실을 온전한 형태로 마주할 수가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아직은 아니었다. 지금은, 그 죽음을 곱씹으며 흘리게 될 눈물을 닦아 낼 힘도 없었다.
정확히는 거기에 힘을 쏟을 때가 아니었다.
희우는 요동치는 마음을 다잡듯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저를 패로 쓰기 전에 그 위험하고 비밀스러운 장부부터 패로 삼고 빼돌리려는 시도를 한 거라면, 서수혁에게서 받아 내려 한 게 상당히 중대하거나 값진 것일 테다.
“…….”
서수혁이 그런 걸, 과연 나와 바꾸려고 할까?
인질로 데리고 있던 나를 꼬리 잘라 내듯이 끊어 내면 끝나는 일 아닌가?
그 사람이…… 나를 위해 그렇게까지 큰 희생을 감수할까?
아니, 애초에 내가 그 사람에게 그만큼의 값어치가 있는 존재이기는 할까?
선뜻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 입술이 말려들었다. 자신감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었다. 평소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는 남자였다. 그러니 이토록 간이 떨리고 위급함이 앞서는 상황에서는 더더욱이 단정을 짓기가 요원했다.
희망 없이 잿빛으로만 보이는 상황에 눈을 가물거리던 희우가 아까처럼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는 툭, 하고 기력 없이 꺾이는 게 아니라 목표를 향해 서서히, 서서히 내려간 것과 같았다. 그 끝에 닿은 건 여전히 변화를 찾아보기가 힘든 밋밋한 배였다.
‘너 정말 엄마 잘못 만났다.’
그런 생각에 또다시 맥 빠진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얼마 가지 않고 그 흔적조차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사라진다.
울고 싶은 기분이 더 심해지는 건, 아주 찰나에 깃든 생각 때문이었다.
‘혹시 네가 있다는 걸 알면 그 사람이 나를 도와줄까?’
문득 그런 생각을 해 버린 거다.
아직 제대로 자리를 잡지도 못했을 아기를 볼모 삼아 구원을 바라다니, 이렇게나 최악인 엄마가 있을까 싶다.
“……엄마.”
희우는 그 어색하기 짝이 없는 호칭을 입 안에서 굴려 보았다. 엄마, 엄마. 몇 번 신경 써서 반복해 보았지만 여전히 저 아득한 경계 너머에 있는 듯한 거리감만 느껴졌다.
잠시 후에는 허탈함이 깃들었다.
바랄 사람에게 바라야지.
그 남자가 자기 애를 가졌다고 해서 어디 눈 하나 깜짝할 인물인가.
애초에 백주경과 다를 바 없이 저를 납치하여 가둬 둔 남자에게 도움을 바라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희우는 자신이 뼈 아픈 좌절에 미쳐 애먼 데에 희망의 끈을 던지려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역시 몇 번을 생각해도, 직접 움직이는 게 나을 성싶었다.
마른 목의 갈증을 침으로 달랜 희우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돌아볼 때마다 번번이 막막함만 끼치는 내부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뭐가 있어야 시도라도 해 보지.’
이 안에 있는 거라고는 책상과 책장, 자신을 묶어 둔 사무용 의자가 전부였다.
바닥에 닿는 발로 지면을 밀어 책상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드르르륵.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가 크게 나지 않도록 조심조심 움직였다.
불행히도 책상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직 유리가 깔리지 않아 허술한 느낌이 드는 윗면은 물론이거니와 하나하나 닫힌 서랍 역시. 뒤로 묶인 손으로 서랍을 열어 보느라 한참을 낑낑거린 탓에 그 현실이 조금 더 암담하게 다가왔다.
책도 없는 책장에는 더더욱 기대할 게 없어 보이고…….
희우가 실망에 찬 눈길을 돌리며 의자를 이동하는 차였다.
“아……!”
따끔한 통증이 팔뚝을 타고 번졌다.
황급히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가며 확인해 보니 피부 위로 기다란 생채기가 나 있었다. 원인은 조금 전 희우가 무신경하게 쓸고 지나간 책상의 모서리였다.
마감 칠이 벗겨진 그 부분은 성의 없이 옮기다가 손상이 간 건지 제법 뾰족하게 날이 서 있었다.
이거, 잘하면…….
희우는 사무실 전방을 둘러싼 유리를 힐끗 일별했다. 불투명한 용지를 대었기 때문에 안에서는 바깥이 보이지 않았다. 그건 반대로 말하자면 바깥에서 역시 안을 볼 수 없다는 뜻이다.
이곳은 주택가가 아닌 빌딩 안.
그러므로 복도를 벗어나 로비까지만 가도, 탈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다.
* * *
“흐…….”
동그랗게 맺힌 땀이 바닥으로 똑, 추락했다.
“하아.”
짙은 숨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어중간한 각도로 숙여져 있던 상체를 바로 세웠다. 돌고래의 지느러미처럼 등 뒤로 한껏 치켜세우고 있던 팔이 아래로 내려가며 드디어 잘린 밧줄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어깨부터 팔꿈치 아래까지 뻐근하지 않은 구간이 없었다. 희우는 드디어 제자리를 찾은 어깨를 이리저리 돌리고 팔뚝을 주물러 댔다. 이제야 제대로 피가 통하는 팔은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저릿저릿했다.
이 찌르르한 감각을 벗겨 내려 애를 쓰는 와중에도 바깥의 동태를 눈치로나마 살피는 걸 잊지 않았다.
자신을 여기에 가둔 이들은, 허튼짓은 시도할 생각조차 말라며 단단히 엄포를 한 뒤로 희우를 방치했다.
그러나 그게 희우로서는 천운이었다. 책상 모서리 부근이 얼마나 뾰족한지 몰라도 밧줄처럼 두꺼운 걸 자르는 데에는 고도의 집중력과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실제로 희우는 약 이틀에 걸친 노력과 공을 들이고서야 간신히 밧줄을 끊어 냈다.
물론 그들은 점검 차원에서 간혹가다 벌컥벌컥 사무실 문을 열어 보기는 했다.
그럼 희우는 얼른 자세를 가다듬고는 억울함에 찬 눈으로 문가를 노려보기만 했다. 어차피 손은 등 뒤로 묶여 있었기에 그 자세를 이상하게 여기는 이는 없었다.
마지막에 가서는 밧줄의 각도 탓에 양팔을 천장으로 번쩍 치들어야 해서 심장이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모른다. 그래도 다행히 각고의 노력 끝에 밧줄을 절단하는 데에 성공했다.
“으…….”
자유를 찾은 손으로 양 발목을 의자 중추 기둥에 묶어 둔 밧줄까지 풀어냈다. 팔에 했던 것처럼 발목도 몇 번 주무른 뒤에 의자에서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하루 꼬박 숨을 죽인 채 바깥의 기척에만 촉각을 곤두세워 살펴보기로 이 층은 한 명, 많아야 두 명 정도만 지키고 있는 듯했다. 문을 열어 안을 살펴보는 인물의 얼굴도 한결같았다.
하긴, 아무것도 없는 장소에 손발이 묶여 있는 여자가 무슨 수로 벗어날 수 있겠냐 싶었겠지.
한 명이면 따돌리는 것 정도는 가능할지 모른다. 하지만 두 명이라면……. 막상 시도를 하려니 마음이 졸아붙었다. 쿵쾅거리는 심장 박동에 결을 맞춘 공포심이 손과 발끝을 차갑게 굳혔다. 벌써부터 지레 겁을 먹고 떠는 가슴을 느릿느릿 문질러 내렸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만약 이번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최악은 이곳에 다시 갇히는 게 전부이리라.
이들이 저를 대가로 서수혁과 거래를 할 생각이라면 자신은 즉, 하나의 상품이었다. 상품에 하자가 있으면 당연히 거래도 불발된다.
그러므로 이들은 자신이 그런 일을 벌인다고 한들 함부로 해코지를 하지는 못할 거다.
‘……그래야만 하는데.’
억누르려고 해도 억눌러지지 않는 불안과 두려움이 가슴 안쪽에 서슬 퍼런 칼질을 해 대는 것만 같았다. 심장이 썰릴 듯한 공포심의 맥동이 그치지를 않는다. 증폭되는 불안 앞에서 당장이라도 굴복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이렇게 주저하고 있을 시간도 없었다.
만약 서수혁과의 거래가 무슨 이유에서든지 불발이 된다면 제 안전은 어떤 식으로도 보장받지 못할 수 있다. 그 전에 이 감옥에서 빠져나가야만 한다. 오빠가 사라진 이상 저를 지켜 줄 보호막은 하나도 없어진 셈이었다.
희우는 심기일전하듯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림자보다 더 조용할 듯한 움직임으로 발을 이동했다.
밧줄을 끊기 위해 버티고 또 버티던 이틀간 어떤 방식으로 도주를 시도할지는 이미 계획을 그려 놓은 바다.
한쪽에 놓인 책장 옆으로 간 희우가 작게 심호흡을 했다.
“후우…….”
가늘게 내쉰 숨을 크게 들이마신 찰나 책장 틀을 잡고서 있는 힘껏 밀었다. 책이 꽂히지 않은 책장은 버티지 못하고 바로 휘청거렸다. 조금씩 기울기 시작한 책장이 잠시 후 쾅! 굉음 같은 비명을 지르며 완전히 쓰러졌다.
희우는 얼른 엎어진 책장을 돌아 문가 뒤로 다가갔다.
“뭐야?!”
바깥에서 거친 욕설이 날아왔다. 이어 쿵쿵쿵, 귀찮기 그지없다는 식의 걸음 소리가 고막을 찍었다. 희우는 콩알만 하게 졸아든 간을 달래며 문 뒤쪽의 벽으로 찰싹 달라붙었다.
문이 확 열렸다.
슈트 차림의 남자는 인질이 감쪽같이 사라진 내부를 둘러보고서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 순간 문 뒤에 숨어 있던 희우는 있는 힘껏 문을 밀었다.
문 바로 앞에 서 있던 남자는 어찌할 새도 없이 안면을 강타한 고통에 “아악!”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졌다.
목 끝까지 차오른 긴장에 손바닥이 저릿 끓었다. 순간의 거센 타격이 먹혀들었는지 쿵 소리와 함께 쓰러진 남자는 축 늘어진 채로 미동이 없었다.
문 뒤에 숨은 채로 동태를 살펴보던 희우가 그를 알아채고 얼른 남자의 몸을 뛰어넘어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복도로 나와 주변을 둘러보았다.
남자의 우악스러운 비명에도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행히 오늘은 이 사람 한 명이 자리를 지키고 있던 모양이었다. 희우는 숨을 가다듬을 새도 없이 미로처럼 이리저리 꺾인 복도를 분주히 내달렸다.
여기저기 닥치는 대로 뛰어다니다가 엘리베이터가 있는 통로를 발견했다. 도주로로 엘리베이터는 적합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있다면 분명히 계단도 있으리라. 근방에 설치된 문을 이것저것 열어 보다가 찬 공기가 서린 비상계단을 발견했다.
서둘러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성마른 마음에 몇 번 헛발질로 넘어질 뻔했으나 난간을 잡으며 버텼다.
출구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에 눈앞이 뭉그러졌다. 발을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벽에 쓰인 숫자가 바뀌는 걸 보면서 그 현상은 더욱 심해졌다.
아래가, 바깥이, 야외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이었다.
쾅!
머리 위쪽에서 무시할 수 없는 소음이 일었다. 본능적으로 고개가 치들렸다.
제가 서 있는 자리의 바로 한 층 위, 백주경의 곁을 지키던 수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헉헉, 거친 숨을 내쉬는 희우를 발견하고서 바로 인상을 쓰며 따라붙었다.
들켰다는 생각에 잠시 잠깐 흔들린 정신줄을 가다듬은 희우는 힘이 풀릴 것만 같은 다리를 억지로 세우며 계단을 두세 개씩 한 번에 밟아 내려갔다.
아슬아슬한 추격전 가운데서도 층수는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윽!”
하지만 끝내 벽면에 쓰인 숫자가 1이 되기 전에 어깨가 붙잡혔다. 난간 쪽으로 밀쳐 발을 붙잡으려는 힘에 희우는 몸부림을 쳤다.
여기서 잡히면 정말 끝이다. 이번엔 그 어떤 기대도 품을 수가 없는 공간에 덩그러니 놓이게 될 거다. 그처럼 치명적인 상상이 뇌리를 둘러싸는 순간, 사지를 있는 대로 비틀며 저항했다.
생각보다 격렬한 발버둥에 놀랐는지 순간 남자의 손아귀에 힘이 풀렸다.
희우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얼른 틈에서 빠져나와 도주를 재개하려고 했다. 하지만 남자 역시도 절박하기는 매한가지라는 것처럼 희우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것마저 떨쳐 내기 위해 몸을 비틀던 차 발목이 예상보다 더 많이 돌아갔다. 하필이면 계단 위인지라 바로 중심을 잡지 못했다.
“……!”
빙그르르 돌아간 발목이 지면을 제대로 짚지 못하며 몸을 뒤로 넘어뜨렸다. 크게 뜨인 희우의 눈동자 위로 놀란 남자의 표정이 스쳤다.
그러고서야 제 몸이 계단 아래로 추락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쿠당탕탕!
작은 몸이 계단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한참 온몸이 돌팔매질 당하는 통증이 몰아치다가 튀어나온 난간에 머리를 쾅 소리가 나도록 세게 부딪혔다.
“헉……!”
희우는 성대가 분질러진 것만 같은 호흡을 내뱉었다. 눈앞이 빙빙 돌았다. 피부가 쓰릴 정도로 지독한 냉기의 바닥 위에서 아픔에 허덕이는 몸을 옹송그렸다.
“으, 흐…….”
세상이 몇 번이고 빙글빙글 뒤집힌 까닭인지 초점이 잘 잡히지 않았다. 자꾸만 시야가 두 개가 됐다가, 세 개가 됐다가 했다. 공기를 뱀의 혀처럼 가르는 이명이 그 작용을 부추겼다.
누가 복부를 세게 걷어찬 것처럼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상체가 자꾸만 안쪽으로 말려들었다. 배꼽 아래 부근에서 뻐근히 이는 통증 때문이었다. 내부의 신경 하나하나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갈라지는 것처럼 잔 소름이 우둘투둘 돋아나는 아픔이었다.
희우는 어떻게든 일어서기 위해 팔로 바닥을 짚었다. 그러자마자 아래로 무언가가 툭, 투둑 추락했다.
시뻘건 액체가 대리석 바닥을 비리게 적셨다.
요 며칠 잊고 살았던 암울의 향이 비강을 강하게 스쳐 지나가자 현기증이 한층 더 심해졌다.
희우가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려 정수리와 관자놀이 부근을 더듬거렸다. 손바닥이 축축해졌다. 잠깐의 접촉만으로 피가 찐득하게 묻어났다.
그런데 양이 심상치가 않았다.
자꾸만, 끝을 모르고 자꾸만 어디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계단 위를 구르던 몸은 이미 멈췄는데 세상이 자꾸만 뒤집혔다. 속도 같이 뒤집어진 것처럼 내장이 비비 꼬이는 토악질이 일었다. 버티고 또 버티던 오감이 끝내 허물어진 모양이었다.
바닥을 짚고 선 팔에 힘이 빠지며 자세가 꺾였다.
그대로 풀썩 늘어진 몸으로 허공만 바라보았다. 마지막 발악처럼 꿈틀대며 바닥을 긁어 대던 손끝이 얼마 지나지 않아 빨간 자국만을 남기며 멎었다.
겨울 공기 같은 찬 바닥 위로 역겨운 피 냄새가 머리 아플 정도로 진하게 풍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