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 10장. 가족과 타인 (1) (11/17)

10장. 가족과 타인 (1)

‘우와아!’

어린 희우가 비명 같은 환호성을 질렀다. 아이 특유의 발랄하고 명쾌한 음성이 울창한 산으로 덮인 하늘을 찔렀다. 그런 희우의 뒤에 서 있던 엄마가 희우를 품으로 잡아당기며 물었다.

‘희우야. 여기 좋아?’

‘응!’

‘왜 좋아?’

‘잔디 있어! 나무도 많아.’

순수한 요소로만 가득 찬 대답에 엄마가 웃었다. 그 웃음소리를 살랑살랑 퍼뜨리는 바람결 역시 너무나 따사롭고 부드러웠다.

‘그래? 다 좋아?’

‘으응. 여기는 누구 집이야?’

‘엄마 집이야.’

‘진짜?’

‘응. 엄마가 외할아버지한테 뺏어 온 거야.’

‘뺏어?’

희우를 껴안은 채로 아이의 관자놀이에 뺨을 기댄 엄마가 은밀한 이야기를 전하듯이 속삭였다.

‘그 영감 면상 형편없이 구겨지던 걸 우리 희우가 봤어야 하는데.’

‘영감?’

‘네 외할아버지 말이야.’

일컬은 무렵을 머릿속으로 덧그린 엄마가 풋, 하고 싱둥한 웃음을 터뜨렸다.

‘엄마만 보면 그렇게 의대 의대 노래를 부르길래 가면 뭐 해 줄 거냐고 물어봤더니 글쎄, 이 별장을 주겠다는 거야. 그래서 엄마가 어떻게 했게?’

‘했게에?’

‘의대 합격하고 약속대로 이 별장 받자마자 바로 자퇴해 버렸지.’

마치 악역에게 한 방 먹인 주인공처럼 엄마가 굉장히 해사하게 웃었다. 그 어여쁜 미소에 햇살이 덧대어져 반짝반짝 빛을 냈다. 주절주절 읊조린 엄마의 말을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으면서, 희우는 엄마가 웃으니 마냥 좋다고 따라 웃었다.

엄마가 그런 희우의 통통한 뺨에 입을 맞췄다.

‘여기가 좋으면 앞으로 엄마랑 오빠랑 여기서 살까?’

‘진짜?’

‘희우가 원하면 그러자.’

‘좋아!’

‘저기, 나무 아래에 우리 희우가 좋아하는 그네도 하나 만들까?’

‘응, 응.’

엄마가 희우를 품에 안은 채로 정원 여기저기를 돌아보며 다채로운 계획들을 늘어놓았다. 희우는 천진하게 웃으며 좋다는 말만 반복했다.

정말 좋았기 때문이다.

이 아름답고 화사한 운치를 배경 삼아 엄마와 오빠,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과 오순도순 살 것을 생각하니 웃음만이 넘쳤다.

인생사 속, 유일하게 온전한 행복을 모방한 추억이고 기억이었다.

눈이 먼저 번쩍 뜨이고 나서야 의식이 깨어났다.

희우는 잠시 동안 제게 벌어진 일련의 상황을 제대로 짚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깨어났음에도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섣불리 액션을 취하지 못하고 눈만 가물거렸다. 그 더듬거리는 행동을 따라서 의식이 차차로 윤곽을 갖추었다.

그러고서야 입과 코를 한 번에 막았던 축축한 천의 느낌이 되살아났다. 다음으로는 뿌연 연기가, 다음으로는 나이프를 쥔 서수혁의 손이, 다음으로는 빨간 소화기가…….

우후죽순으로 떠오르는 기억을 움켜쥔 채 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처음 보는 장소였다.

느닷없는 납치인데도 제법 침착할 수 있었던 건 그래도 나름 두 번째로 당해 보는 일이라서일지 모르겠다. 이제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났을 때 엉뚱한 곳에 와 있는 게 익숙해질 지경이었으니.

희우는 저를 받쳐 주던 침대 아래로 두 발을 내렸다. 까마귀의 깃털처럼 새까맸던 상복의 차림은 실내에서 편하게 입을 수 있는 흰 원피스로 갈음된 채였다.

깨어난 곳은 어느 작은 방이었다.

서수혁의 자택에서 막 눈을 떴던 그때처럼 허황한 심정이 연기처럼 퍼졌다.

온화하면서도 선명한 햇살이 방으로 한가득 퍼부어지고 있었다. 얼마나 밝은지 허공중에 떠다니는 미세한 먼지마저 어렴풋이 보였다.

조심스레 몸을 일으키자마자 뇌가 출렁이는 현기증이 몰려왔다. 잠깐 이마를 붙잡은 채로 심호흡을 하다가 희우는 침대에서 완전히 일어났다.

문고리를 잡고 주저하다가 닫힌 문을 열고 나섰다.

짐작대로 여긴 누군가의 집 같았다. 간략하게라도 둘러본 내부 구조가 거실과 부엌, 여러 방과 화장실로 나누어져 있었으니.

그렇게 낯선 오지에 떨어진 이처럼 헤매던 희우는 잠시 후 문이 열린 어느 방을 확인하고 멈칫했다.

각양각색 크기의 캔버스와 그를 받치는 나무 이젤들, 한때 엄마의 화실에서 빈번히 접한 물건들이었다.

세상에 그림을 업으로, 또 취미로 삼는 사람은 무진 많았다. 그러므로 굳이 멈춰 서서 확인할 필요는 없었지만 희우는 발목이 붙잡혔다.

눈에 익었기 때문이다.

캔버스 위로 그려진 그림이, 그 화풍이…….

‘엄마?’

엄마가 그린 것과 매우 유사했다. 아닐 수도 있지만 맞을 거라는 직감이 더 강렬하게 꽂혀 들었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발견한 엄마의 흔적에 그리움이 물밀듯이 차올랐다.

제 입으로 실토까지 했으나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럴 리가 없다는 부정으로 찬 오빠의 죽음 앞에 놓였던 상황이다.

그러니만큼 이렇게 별안간 맞닥뜨린 엄마의 흔적은 희우에게 있어서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위로이자 위안이 되어 주었다.

[정여래]

놓여진 캔버스를 확인하던 희우는 잠시 후 또렷한 확신을 얻었다. 캔버스 옆면에 엄마의 이름이 정갈한 글씨체로 적혀 있었다.

하나만이 아니었다. 이 방 안에 놓인 모든 작품에 엄마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정말 이게 다 엄마의 그림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대체 왜 여기에…….

의문이 짙어질 무렵 똑똑, 하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나마 멀쩡한 한쪽 귀가 그 소리를 잡아챘다. 캔버스 가장자리를 뭉툭히 쓸던 희우가 화들짝 뒤를 돌아보았다.

“깨어나셨습니까?”

웬 남자가 문가에 서서 저를 지켜보고 있었다.

저 사람이 이 집주인인가.

절로 깃드는 경계심에 희우는 더듬더듬 뒤로 물러났다.

“이사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가시죠.”

그 태도를 보고 오해를 읽었을 텐데도 남자는 별다른 부연 설명 없이 본론만 끄집어냈다.

이사님?

그게 누구를 가리키는지 몰라 희우가 주저하는 사이 남자는 이미 등을 보이고 있었다. 엉겁결에 따라선 건, 혹시 저 말속의 ‘이사’라는 사람이 엄마와 연관이 있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지금 낯선 곳에 끌려온 입장으로서 마냥 버티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기도 했고.

그래도 정신 바짝 차리자는 생각으로 손가락을 오므려 손톱을 손바닥에 찔러 넣었다.

남자는 주저 없이 현관으로 향했다. 먼저 나선 그가 희우의 앞에 푹신한 슬리퍼를 하나 내어 주었다. 희우는 두 발에 그것을 끼우고 조심조심 뒤를 따랐다.

현관 밖으로 나가자 갑자기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분명 거실과 여러 방이 나누어져 있는 자택의 구조였는데 현관 밖은 아파트 복도라기보다는 사무실 복도에 어울릴 법한 사무적인 모양새를 띠고 있었다.

빠르게 도착한 승강기에 남자가 먼저 몸을 실었다. 도끼가 새겨 둔 기억이 먼저, 다음으로 낯선 사람을 따라간다는 위기감이 엄습하여 희우는 바로 타지 못하고 주저했다.

하지만 남자는 자신이 탈 때까지 버튼을 누르고 있을 태세라서 하는 수 없이 발을 뻗었다.

경계심의 발로처럼 벽에 딱 달라붙어 있자니 엘리베이터는 금세 목적한 층에 도착했다.

띵, 하는 차임벨을 배경 삼으며 문밖으로 펼쳐진 풍경은 역시나 도심에 삐죽삐죽 솟은 회사 빌딩과 유사했다. 누군가의 개인 집무실처럼 비서 데스크가 있고, 그 안쪽으로 커다란 문이 있었다.

남자의 뒤를 따르니 별도의 확인 없이 바로 문으로 직행했다. 이내 문이 양쪽으로 열리며 남자가 정중히 물러섰다.

희우는 그에게 눈길을 두다가 벌어지는 문 사이로 고개를 돌렸다.

[JK 홀딩스]

널찍한 집무실의 벽면에 새겨진 양각의 금빛 상호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햇살에 부딪혀 반짝 빛을 내는 통에 눈이 시려 왔다.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가 풀리는 사이, 그 밑으로 펼쳐지는 책상과 앞을 꾸미는 까만 명패가 다음으로 눈에 들어왔다.

[이사 백 주 경]

이사.

저 명패의 주인이 바로 그 이사인 모양이었다.

뒤쪽에서 문이 쿵 소리가 나게 닫혔다. 퇴로가 막힌 관계로 주어진 길은 나아가는 것뿐이었다.

희우는 쭈뼛쭈뼛 안으로 들어섰다. 겨우 뻗어지던 걸음이 잠깐 사이에 의지를 잃고 멈춰 섰다. 누군가 뒷모습을 보인 채 화초 잎을 정성스레 닦아 주고 있는 걸 발견한 순간이었다.

제게로 다가든 인기척을 느꼈는지 그 사람 역시 한 박자 후에 뒤를 돌아보았다.

웬 중년의 남성이었다.

쨍한 햇볕이 남자의 얼굴을 핥듯이 비추었다.

분명 생소한데, 기시감이 드는 얼굴이다.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는 것처럼.

그러니까, 분명히 어디에서…….

‘경매장.’

번뜩 스치고 지나가는 기억은 굴처럼 어두컴컴하던 경매장이었다. 서수혁의 손에 잡혀 끌려 나가던 제게 태평한 인사를 건넸던, 바로 그 남자였다.

“희우 왔구나.”

백 이사는 퍽 친근하게 희우를 대했다.

그가 들고 있던 손수건을 한쪽에 내려놓고서 희우 쪽에 마련된 가죽 소파로 다가갔다. 먼저 여유롭게 착석한 뒤에 이리 와 앉으라는 것처럼 맞은편을 손짓한다.

희우는 못 올 곳에 온 사람처럼 어색히 굴며 소파로 향했다.

“차는 뭘로 준비해 줄까. 평소에 잘 마시는 거라도?”

희우가 엉덩이를 붙이고 앉기도 전에 백 이사가 물었다. 낯선 이에게서 들려오는 어조라기에는 너무나 상냥하고 살가웠다.

선뜻 입을 열지 못한 채로 희우는 맞은편의 남자를 꼼꼼히 살폈다.

경매장에서 본 걸 기억해 낸 건 좋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었다.

고작 그걸로 단언하기에는 그보다 더 깊숙한 곳에 내재되어 있던 기시감이 거세게 꿈틀거렸다.

어디선가 풍겨 오는 짠 내 실린 기억이 콧등을 환각처럼 스쳐 지나갔다.

매년 다가오는 엄마의 기일마다, 오빠와 함께 엄마의 유골을 뿌려 준 동해 바다를 찾아가고는 했다. 그곳에서 희우는 제 곁을 스쳐 지나가는 가족 단위를 보았다. 평소라면 크게 눈길을 줄 이유가 없었다만 그날은 이상하게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무슨 기분일까?’

곁에 서서 푸르게 펼쳐지는 바다를 주시하던 오빠에게 홀연히 물었다.

‘뭐가?’

‘아빠가 있다는 건.’

‘…….’

‘우리는 아빠가 없잖아.’

이런 제 말에 동조하듯 무늬처럼 찍힌 구름 사이를 헤집던 기러기가 길게 울었다.

‘우리가 아빠가 왜 없어.’

희우는 뒤늦게야 오빠가 저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 박자 늦게 겹쳐진 시선을 타고 알 수 없는 감정이 묻어났다.

‘우리도 아빠 있어, 희우야.’

왜 지금 이 순간, 그날 나눈 대화가 어제 일처럼 선명히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아니, 사실은…… 현재 느끼는 간과할 수 없는 기시감이 어떠한 가정으로부터 오는지를 소름 끼치도록 똑똑히 간파했기 때문이다.

“저는…… 괜찮습니다.”

백 이사가 여전히 제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기에 희우는 주먹만 쥐락펴락하다가 개미만 한 목소리를 가까스로 끄집어냈다.

“그래, 그럼.”

그가 테이블 위에 놓인 인터폰 버튼을 눌러 “유 비서, 내가 마실 커피 한 잔만 내오지.” 하고 지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깥의 데스크를 지키던 비서가 트레이를 들고 다가왔다. 그녀가 쥔 커피잔이 백 이사 앞에 놓였다.

그가 차탁에 가지런히 놓인 잔을 들어 올려 한 입을 축였다. 희우는 입 안이 퍼석하게 말랐다는 걸 깨닫고 물이라도 한잔 달라고 할 걸 그랬나 뒤늦은 후회가 들었다.

“정말 오랜만이구나. 그새 참 많이 컸어.”

커피를 한 입 들이켠 백 이사가 희우를 똑바로 직시해 오며 말했다. 아까부터 하고 싶었던 인사인 것처럼 해후를 표하기에 적합한 문장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갓난아기 때 본 뒤로 처음 만나는 거니 꽤나 낯설겠는걸. 아니, 아예 나에 대한 기억이 없으려나? 그래도 너무 어려워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누구신데요?’ 하고 솟아오른 말이 혀끝에서 맴돌았다. 그럼에도 차마 입 밖으로 비어져 나오지 못하는 건, 그 정체를 이미 어림짐작했기 때문이다.

이 사람, 아무리 봐도…….

“희본이 소식은 전해 들었다.”

“…….”

“장례식에는 미처 가지 못해서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되도록 참석하고 싶었지만 이쪽도 나름대로 입장이라는 게 있어서 말이지.”

저뿐만이 아니라 오빠의 화제까지 아무렇지 않게 꺼내어 든다. 더 이상의 여지는 없었다. 이 이상으로 의심을 품는 건 애먼 헛발질밖에 되지 않는 격이었다.

역시나 그랬다.

엄마에게 그 누구보다 묻고 싶었지만,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던 사람.

“……아빠예요?”

후릅. 뜨끈한 김이 오르는 커피를 한 모금 더 들이켠 백 이사가 다리를 꼬았다.

“그래.”

이어 그 모습만큼이나 선선히 수긍한다.

아빠가, 맞다고.

평생 맘 편히 품어 본 적이 없던 그 호칭과 눈앞의 남자 사이에서는 폭풍처럼 지난하고 거대한 괴리감이 일었다.

갑자기 나타나서일까, 혹은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 마주쳐서일까.

모르겠다. 그저 혼란스러웠다.

“표정을 보아하니 많이 놀랐나 보구나. 여래가 조금도 언질을 주지 않았던 건가? 하여간, 가끔 보면 고집 하나로는 이길 도리가 없다니까.”

여래.

남자의 입에서 나오는 엄마의 이름이 타인의 것을 듣는 것처럼 오싹했다.

실상 이 자리를 가지게 된 만남부터가 그랬다.

지금 이렇게, 납치를 당하듯이 끌려와 상상에도 없던 부친과 대면하고 있다는 사실은 현실과 동떨어진 어느 망상을 엿보는 것처럼 얼떨떨한 구석이 있었다. 여전히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허우적대는 기분이었다.

“왜 저를…….”

“…….”

“왜 데려오셨어요?”

그것도 일강 쪽과 별반 다르지 않은 방식을 써서.

이를테면, 납치 말이다.

“데려오지 않았으면?”

백 이사의 눈 속에 깃든 안광이 찰나 뾰족하게 뭉쳤다. 뒤로 햇살을 두고 있어 역광이 살짝 졌음에도 그 첨예한 변화가 두드러졌다.

“계속 서 대표 아래에 있으면서 애도 낳고, 살림도 차릴 셈이었나?”

희우의 손이 움푹 말려들었다. 얇은 원피스 자락을 쥐는 손등이 희게 질렸다.

손가락 등으로 입술을 매만지던 백 이사의 눈초리가 희우의 배 쪽으로 미끄러졌다. 이 어린것은 자기 배 속에 뭐가 있는 줄 알고 저렇게 벽을 세우나. 탄식 비스무리한 웃음이 스며 나올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서 대표가 알고 있는지 궁금하군. 네 배 속에 뭐가 있는지.”

“……네?”

“너 임신했던데.”

이번에야말로 희우의 심지가 크게 휘청거렸다.

더 이상 말릴 부분도 남아 있지 않은 손은 어딘가에 숨고 싶은 것처럼 계속해서 곱아들었다. 끝내 손톱이 여린 피부 살을 헤쳐 들어갈 때까지.

“내가 그런 방식을 써서라도 너를 데리고 온 건 희본이에게 미안해서야. 희본이와 약속을 한 게 있었거든.”

“약속…… 이라뇨?”

백 이사가 음, 하고 차분하게 목을 가다듬었다.

“희본이와 다시 만나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서 대표 뒤에 서 있는 녀석을 보는데…… 첫눈에 여래 자식이라는 걸 알 수 있었어. 어릴 적부터 느꼈지만 훌쩍 크고 나니 여래를 아주 빼다 박은 수준이더군.”

그리고 너도.

백 이사가 흩어질 것만 같은 목소리로 간결히 첨언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희본이도 바로 나를 알아본 모양이야. 며칠 후에 남들 눈을 피해 조용히 내 회사로 찾아온 걸 보면.”

“…….”

“내게 제안을 하나 건네더구나.”

“제안이라니…….”

“일강의 장부를 빼돌려 온다면 자신에게 어느 자리까지 내어 줄 수 있겠냐고.”

지금껏 일각만을 알고 있던 빙산이 벌거숭이처럼 드러날 조짐을 보였다. 쿵, 쿵, 쿵. 그걸 눈치챈 희우의 심장이 낮게 고동쳤다.

장부.

서수혁과 그의 사단이 그토록 찾아 헤맨 것.

대체 오빠가 왜 그것을 빼돌려 일강이라는 거대한 집단을 적으로 돌렸는지 내내 궁금했던 것…….

저를 두고 벌어진 일이지만 좀처럼 단서를 잡을 수 없던 판도라의 상자가 지금, 백주경의 입을 통해 열리려 하고 있었다.

“일강의 비밀 장부…… 지금 이 바닥에서 그걸 탐내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거머쥐면 일강은 물론이거니와 거미줄처럼 줄줄이 엮인 정재계 커넥트를 죄다 꿰뚫을 수 있는 물건인데. 당연히 내 입장에서도 혹할 수밖에 없었다.”

“…….”

“지금 와 생각해 보면 몹쓸 선택이었는데, 참.”

백 이사의 낯 위로 언뜻 회한의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희우는 그게 아들의 개죽음을 마주하는 부친으로서의 이면임을 어렴풋이 눈치챘다.

“그 장부를 건네는 조건으로 희본이가 내세운 대가는 두 개였다.”

백 이사가 느슨하게 늘어뜨리고 있던 손가락 두 개를 곧게 폈다. 그리고 하나씩 접으며 말했다.

“여기, 내 회사에서 후계자로서 자신의 입지를 똑똑히 세워 줄 것. 그리고 희우 너까지 확실하게 가족으로 거두어 주는 것.”

“…….”

“뭐, 영 모를 마음은 아니야. 제 아비가 멀쩡히 살아 있는 걸로 모자라 이렇게 몸집 큰 기업체를 가지고 있다면 탐이 날 만도 하지.”

탐이 났다고……?

희우는 눈에 띄지 않게 미간을 찌푸렸다.

“어쨌든, 일이 이렇게 되어 유감인 건 나도 마찬가지야. 그러니 뒤늦게라도 널 서 대표에게서 데려오려고 애를 썼고.”

“……그런, 방식으로요.”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납치라는 방식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강제로 열린 문 너머에서 뻗어져 나온 손과, 그것에 붙잡혀 몸이 아래로 훅 끌려갈 때의 기분이 어땠던가.

오빠의 죽음으로 비몽사몽인 와중에도 몸서리가 쳐질 만큼 끔찍했다. 첫 번째 납치로 인해 겪어야만 했던 숱한 감정의 훼손을 기억하기 때문이었다.

희우가 무얼 꼬집고자 하는지를 금세 알아챘는지 백 이사가 혀를 차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상대가 일강이었다.”

“…….”

“그런 방식이 최선이었다는 걸 너 역시도 모르지 않을 텐데.”

상대가 일강.

상대가 서 대표.

고작 그 짧은 말로 납득을 시키려는 태도가 일견 타당하게 다가왔다. 서수혁의 치 떨리는 지독함과 무도함, 심장을 통째로 두방망이질하는 잔혹함 등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목격한 게 바로 희우 본인이 아니던가.

무어라 답을 못 하고 입술만 달싹거렸다. 생각이 삽시에 꼬여 들어서 입을 열기가 어려웠다. 속에서 뭔가가 우글우글 두서없이 끓고 있는데 저조차도 갈피를 잡기가 힘들어 함부로 꺼낼 수가 없었다.

오빠는 죽었고, 눈앞의 백 이사는 자신의 아빠랜다.

가족 한 명을 잃은 시점에 또 다른 가족이 나타났다.

그리고 이런 제게 달리 갈 데가 있느냐며 냉소하던 남자가 있었다. 차게 식은 눈. 은은한 달무리 속에 밤을 버무린 것만 같은 동공으로 자신을 직시해 오던 서수혁.

내 물건을 훔쳐 달아난 네 오빠의 장례식을 내가 왜 치러 줘야 하느냐며 신랄하게 뇌까리던…….

희우가 문득 고개를 쳐들었다.

“지금, 그럼.”

“…….”

“지금 그 장부는 어디 있는 거죠……?”

이야기가 나름 허심탄회하게 진행되어 가는 동안 여유롭게 커피잔을 기울이던 백 이사의 손길이 뚝 멎었다.

곧 그가 탁, 소리 나게 잔을 내려놓으며 눈매를 길게 늘였다. 언뜻 놀라워하는 기색이 묻어나는 표정 변화였다.

“네가 장부에 관해 궁금해할 줄은 몰랐는데.”

사실, 희우 역시 이제 더 이상 상관하지 않아도 될 물건이라고만 여겼다. 오빠가 죽은 시점에서 그 행방에 관해 궁금해해야 할 이유는 사라진 격이었으니까.

장부에 관련하여 의문을 품는다고 해도, 설령 어디 있는지 알아낸다고 해도 죽은 오빠는 살아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저와 다르게 전후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 백 이사의 말을 귀로 담을수록 솟아날 수밖에 없는 의문이었다.

설마 오빠가 살아 있었는지도 몰랐던 아빠라는 사람과 장부를 가지고 뒤에서 이런 거래를 벌이고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빈소를 지키는 와중에도 한 터럭만큼의 감을 잡지 못했던 오빠의 죽음, 장부는 여전히 그 가운데에 맹점처럼 깊게도 꽂혀 있었다.

“그게 오빠가 죽은 이유고…… 제가 납치를 당했던 이유니까요.”

“장부는 우리 쪽에 있다.”

머리꼭지까지 차올랐던 긴장과 갖은 불안은 그 말 한마디에 올이 탁 풀려 버렸다.

여기에…… 그러니까 백 이사에게?

“이렇게 말하기 미안하지만, 희본이는 이걸 우리 쪽으로 넘기려고 애를 쓰다가 죽은 셈이야.”

의문을 제대로 품기도 전에 백 이사가 그 부분을 명확히 짚어 주었다.

여전히 진실은 뿌연 덩어리처럼 다가오기만 했다. 망설임 없는 대답을 계속해서 듣고 있는데도 답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기분은커녕 뜬구름을 잡는 양 갈수록 멀어지는 기분만 들었다.

그래도 이렇게나 막막한 상황 가운데서 한 가지 사실은 명확하게 섰다.

백 이사가 다짜고짜 자신을 일강의 늪에서 끄집어낸 이유는 바로 저거구나.

오빠가 개죽음을 당하기 직전인 와중에도 장부를 이쪽에 건네주려 애를 써서.

그렇게 날아가 버린 목숨값에 대한 보상으로.

단지 피가 섞인 가족이라는 의미로서가 아니라…….

씁쓸하지만 이해관계는 어느 정도 납득이 갔다.

힘겹게 다다른 결론이 따가운 편두통을 부추겼다. 희우는 넋이 나간 이처럼 열없는 모습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고작 그거 하나 깨우쳤음에도 진이 쭉 빠졌다. 아직 자신은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 넘쳐 나는데, 현실은 이런 저를 놔두고서 저만치 앞서 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보다 지금 시급한 문제는 다른 게 아니야.”

“…….”

“네 배 속에 있는 걸 들어내느냐 마느냐지.”

그 자리에서 꺼질 것처럼 앉아 있던 희우가 움찔했다.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 배를 덮었다. 밋밋하기만 했다. 여기에 뭔가 들어 있다고 보는 게 더 이상하게 와닿을 정도로.

그런데도 있다고 한다.

씨앗처럼 아주 작게 움터서 조금씩, 조금씩 자라나고 있다고.

백 이사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정녕 임신이 사실이라면 보다 시급한 건 이쪽일지도 모른다.

“선택은 전적으로 네게 맡기마. 낳고 싶으면 낳아도 좋고, 지우겠다고 해도 말리지 않아. 원하는 쪽으로 지원해 주지.”

선택지의 폭을 넓히는 백 이사의 목소리가 귓전을 아스라이 스쳐 지나갔다. 그것조차도 기력이 흐려지는 망연함에 잡아먹혔다.

배 속에 애가 있다는 사실.

그게 서수혁의 핏줄이라는 사실.

그리고 현재, 친부라며 20여 년 만에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 백주경이 그걸 알고 있다는 사실.

“…….”

희우는 배에서 손을 내리며 힘없이 눈을 감았다.

모든 생각이 거세당하듯 일순간에 잘려 나갔다.

과부하였다.

그저 쉬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 * *

백주경과의 짧은 대면을 마치고, 정해진 루트처럼 빌딩 꼭대기 층의 펜트 하우스로 돌아온 희우는 제 앞에 주어진 상황을 거부하듯 이틀 내리 잠만 쿨쿨 잤다.

그렇게 한참 수면의 바다를 헤엄치다가 깨어났을 때는 며칠간 제대로 느끼기도 요원했던 식욕이 몰아쳤다.

부스스해진 머리칼을 정돈할 생각도 못 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거기까지는 호기로웠으나 남의 집이라는 자각은 있었기에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서는 한참이나 동태를 살폈다.

처음 일어났을 때처럼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꾹 눌러 죽인 자신의 발걸음 소리만 들렸다.

익숙지 않은 구조와 인테리어를 시선만으로 살펴보던 희우는 잠시 식욕을 뒤로 미루고 내부를 제대로 돌아보았다.

층고가 높을 뿐, 한 층에 해당하던 서수혁의 집과 달리 이 집은 복층의 형태로 되어 있어서 한쪽에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자리했다.

계단 위를 힐끔힐끔 살피던 희우가 멈칫했다.

‘혹시…… 가족이 있나?’

혼자 살기에는 너무 넓은 거 아닌가 싶은 집 안의 규모가 그런 의심을 품게 만들었다.

저를 데리고 간 엄마에게는 죽을 때까지 다른 남자가 생기지 않았으나 친부 쪽인 백주경의 사정은 다를 수도 있는 일이다. 한 회사를 이끌어 가는 수뇌인 만큼 대외적으로 비칠 이미지를 생각해서라도 공석으로만은 둘 수 없어 이미 그 자리를 채운 아내가 생겼을지도.

그럼 나는 여기에 있어도 되는 건가.

희우는 피로한 마음에 마른세수를 했다. 아직 어색하고 겸연쩍은 관계임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당장에 갈 곳이 없어지니 일단 신세를 질 생각부터 하는 스스로가 어이가 없고 한심했다.

“거기서 뭘 하고 있어?”

생각에 잠겨 계단 난간을 붙잡고 서 있던 희우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 틈에 나타난 백주경이 눈앞에 서 있었다.

“아, 저, 배가 고파서…….”

집을 둘러보고 있었다는 말보다는 이쪽이 나을 것 같아서 어물어물 대꾸했다.

그러자 희우의 얼굴을 한 번, 난간을 쥐고 있는 그녀의 손을 한 번 바라본 백주경이 유유히 웃으며 저쪽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부엌은 저쪽이다. 하도 깨어나질 않아서 걱정하던 차였는데 지금 막 일어난 모양이구나.”

백주경의 웃는 미소 속에서 언뜻 오빠가 보여 희우는 그 얼굴에 넋을 잃었다. 말을 마친 뒤 먼저 걸음을 옮기는 백주경의 등판을 보고서야 얼른 정신을 바로 잡고 그 뒤를 쫓아갔다.

백주경은 누군가 미리 만들어 둔 듯한 음식을 데워 식탁 위로 차려 주었다.

그가 건네준 숟가락으로 밥을 한 숟갈 떠 입에 넣어 오물거렸다. 분명 먹기 전에는 고슬고슬하게 지어져 무척이나 맛깔스럽게 보였는데 막상 입에 넣으니 모래가 굴러다니는 것만 같았다. 씹을수록 그 현상이 심해져서 희우의 표정은 점점 이상해졌다.

“욱……!”

그리고 얼마 못 가 희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입을 틀어막고 부엌 옆에 자리한 욕실로 달려갔다. 변기에 얼굴을 묻고서 죄다 토해 냈다. 지금 막 입에 넣은 한 숟갈을 빼면 먹은 것도 별로 없어서 몇 번의 토악질에 넘어오는 건 죄다 위액이었다.

“우욱, 욱.”

한참을 그러고 있는데 등을 탁탁 두드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괜찮다고 하고 싶었으나 구역질 때문에 눈앞이 핑핑 돌아서 그럴 만한 여력도 없었다.

백주경은 희우가 몇 분이 넘도록 그러고 있는 걸 지켜보다가 의사를 불러 주었다.

“전형적인 입덧입니다. 이제 6주 차시고요.”

희우가 막 일어났던 방에서 간단히 진료를 본 의사가 둥그런 안경을 추켜올리며 말했다.

“혹시 모르니 위장약 처방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뜨거운 거라도 드셨나요? 입 안에도 상처가 좀 있으시네요.”

“아…….”

희우는 멍하니 뺨을 만지작거렸다.

이건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죽을 아무렇게나 받아먹다가 생긴 상처였다. 데고 터져 짓무른 점막이 며칠 사이에 조금은 호전이 되었다지만 의사에게는 여지없이 발각되었다.

그보다도 저 말 때문에 의식적으로 내리누르던 존재가 산처럼 거대하게 솟아났다.

덜컥 괴어오르는 두려움에 희우의 손이 이불을 꾹 말아 쥐었다.

‘나오지 마.’

그렇게 말하던 남자의 눈빛, 나이프를 쥔 커다란 손, 차 바깥에서 벌어지는 난리통에도 한 점 주눅 듦이 없던 태도.

서수혁을 떠올리자 오한이 절로 들었다. 특히나 지금 자신이 백주경의 곁으로 오게 된 것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품고 있을지 몰라 조금 더 두려웠다.

지금 이 이별은, 서수혁에게 있어서 전혀 합의가 되지 않은 사항이었기 때문에.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일전에 말씀 주신 문제는 결정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시지요, 이사님.”

진찰 가방을 챙긴 의사가 백주경을 향해 인사를 전했다. 저 결정이 무얼 뜻하는지 희우는 단박에 알아차렸다. 제 배 속에 품어진 애를 들어낼 건지, 말 건지에 대해서리라.

저런 주변의 증거들이 희우의 혼란을 부추겼다.

당장 자신은 임신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만 해도 벅찬데, 주변에서는 뭐가 이렇게 빠르고 급하게 흘러가려고 하는 걸까.

휩쓸리지 않으면 잔류될 것 같고, 휩쓸리면 부서질 것만 같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쪽도 함부로 고르지 못하게 하는 망설임이 사고를 가로막았다.

“어떻게, 생각은 좀 정리가 됐나? 아무래도 뗄 계획이라면 최대한 빨리 시도하는 게 좋겠지.”

희우는 침대 옆으로 의자를 끌고 와 앉는 백주경을 바라보았다.

그의 말이 틀린 셈은 아니었다.

이 생명은 누군가와의 애틋한 사랑하에서 탄생한 아기가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희우의 의향은 조금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그러니 얼른 중절 수술을 하는 게 옳은 일일지 모른다.

그런데도 입이 선뜻 열리지 않는 건…….

“……근데요.”

“음?”

“그, 장부요. 오빠가 빼돌렸다는 거.”

백주경이 한쪽 눈썹을 들썩였다. 집무실에서 보았던 것과 유사한 표정이다. 네가 그 화제를 꺼낼 줄은 몰랐다는 느낌이 질기게 배어나는.

희우는 힘없이 우그러들려는 손을 애써 펴며 물었다.

“그 장부를 어디에 쓸 계획이셨나요?”

백주경의 말로 오빠는 그 장부를 거래 조건으로 걸었다고 했다. 백주경 측에서 거래를 받아들였다면 그 물건이 나름대로의 쓸모가 있으니 그랬으리라.

그건 굳이 이쪽이 아니라 일강 측의 반응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아주 소중한 보물을 빼앗긴 사람처럼 눈이 돌아서는 오빠의 흔적과 소재를 닥치는 대로 파헤쳐 보려고 하지 않았던가.

‘너희 오빠가 나한테서 장부 하나를 훔쳐 갔거든?’

‘근데 그게 외부에 까이면 다칠 사람이 아-주 많아요.’

첫 대면의 순간, 서수혁이 했던 말로 헤아려 보자면 그건 굉장히 여러 사람에게 해가 될 물건처럼 여겨졌다.

“어차피 쓰지도 못할 물건이야.”

큰마음을 먹고 꺼낸 질문에 백주경은 김이 빠질 만큼 허무한 답변을 늘어놓았다.

희우의 눈이 동그래졌다.

“네? 그게 무슨…….”

“온전하게 넘어온 상태가 아니거든.”

“…….”

“희본이가 혹시라도 덜미가 잡힐지 몰라 함정을 파 둔 모양이야.”

“함정이라뇨?”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장부는 중요한 몇 페이지가 누락된 상태다. 아무래도 희본이가 그 몇 장을 뜯어내서 다른 곳에 숨겨 놓은 것 같더군.”

“…….”

“희본이가 죽은 지금, 그게 어디 있는지는 아무도 몰라.”

온전하지 못하다는 건 그런 의미인 건가.

그럼 정말 누군가 오빠의 뒤를 쫓기는 했단 말인가?

“이왕 꺼낸 김에 장부 얘기를 한번 해 볼까.”

백주경이 한쪽 다리를 꼬아 앉으며 희우에게 또렷한 눈길을 꽂았다.

“나는 희본이가 어딘가에 숨겨 둔 그 페이지도 전부 회수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래야 이렇게 떠나 버린 희본이의 죽음이 헛되이 되지 않을 테니까.”

“…….”

“혹시 그에 관해서 아는 게 전혀 없는지, 네게 물어보고 싶은데.”

침묵이 내려앉았다.

희우는 백주경에게 몇 초간의 시선을 두다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장부에 대해서는 정말 아는 게 없어요.”

서수혁과 그 무리에게 했던 대답을 아버지라는 사람 앞에서도 거푸 반복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이걸 제게 왜 묻는 걸까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이렇게 말하니 백주경은 “그래…….” 하며 선선히 물러났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던져 본 모양이었다.

“그보다 안색이 너무 좋지 않은데.”

“아…….”

“아무래도 좀 더 쉬는 게 좋겠어. 그러잖아도 피곤할 사람을 붙들고 내가 별 얘기를 다 했군.”

“아니에요.”

혹시 필요한 게 있다면 거실에 있는 전화기에 말하면 된다고 덧붙인 백주경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가 창가로 다가가 블라인드를 쳤다.

착, 착, 착.

서서히 가림막이 만들어지며 방 내부의 조도가 그윽해졌다. 휴식을 취하기에 딱 좋은 명도임에도 희우는 속이 살짝 답답해졌다.

이윽고 백주경이 문을 닫고 나간 방 안에서, 희우는 혼자가 되었다.

빛이 가시처럼 얇고 가늘게 들어오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못다 한 생각을 이어 가 보았다.

골몰해 보면 썩 틀린 말도 아니었다. 오빠가 그렇게까지 애를 써 가며 장부의 일부를 숨겼다면, 그걸 찾아 온전한 형태로 취득하는 게 진정 그를 위한 길일 거다.

그런데…….

‘누구에게?’

오빠는 대체 누구에게 쫓기고 있었던 걸까?

일강 측?

하지만 곁에서 지켜보기로, 일강은 오빠의 소재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던 걸로만 보였다. 서수혁이 저를 치장까지 시켜 가며 이곳저곳에 끌고 다닌 이유가 오빠에게 제 소식 한 줄이라도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지 않았나.

하물며 날벼락 같던 오빠의 죽음을 마주할 때도 그랬다.

그들 역시 허상을 쫓듯이 굴다가 죽은 오빠를 발견한 것처럼 아연해진 기색이 여실했었다.

요컨대 오빠를 해친 건 누구이며, 어찌하여 노력의 결과가 그렇게 비참한 식으로 맺음 지어졌는지 제대로 설명되는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그게 바로 장부를 논하는 부분에서 불거지는 어긋난 교접점이었다.

해소되지 않는 의문이 속을 갑갑하게 메웠다. 멀거니 천장을 응시하던 희우의 고개가 슬그머니 돌아갔다.

조금 전 백주경이 나간 문가를 향해서.

‘설마…….’

문득 든 가정에 두피가 쭈뼛 서는 소름이 돋은 것도 자신이었다.

희우는 얼른 도리질을 했다.

그럴 리가 없다.

그래서는 안 될 일이다.

심장이 낯설 만치 빠르게 뛰었다. 피로도가 상승해서일까, 한동안 들리지 않던 이명이 또다시 가늘게 몰아쳐 귓전을 어슷어슷 썰어 대는 것만 같았다.

희우는 벽 쪽으로 돌아누워 몸을 둥글게 말았다. 그리고 손을 들어 올려 팔뚝 부근을 일정한 박자로 두드렸다.

토닥, 토닥.

이제는 그 누구에게도 바랄 수 없는 손짓이 공기를 가르며 무의미하게 반복되었다.

* * *

JK 홀딩스 계열사 중 하나인 엠트리얼 호텔의 최상층.

서울 도심을 담는 경치가 훌륭한 창 안으로 여자의 교태로운 비음과 살이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미묘하게 피어오르는 담배 냄새가 진창처럼 뒤섞였다.

흔들리는 침대의 요동을 이기지 못한 베개가 바닥으로 추락하고 뒤이어 웬 여자의 상반신이 침대 아래로 쏟아졌다. 하복부를 맞댄 남녀의 거친 떡방아질이 잇따르며 상당히 격한 마찰음이 내부에 울려 퍼졌다.

중천에 걸린 태양이 스위트룸에서 벌어지는 요란한 정사를 과감하게 노출했다.

그렇게 후끈한 열감을 공기 중에 퍼뜨린 섹스가 끝났을 때, 백 이사는 침대 헤드에 노곤히 기대앉으며 새로운 담배를 빼 물었다.

“흐흐흥, 우리 이사님은 어쩜 나이에 비해 이리 힘이 팔팔하신지.”

과격한 섹스가 취향이라 백 이사의 부름에는 빠짐없이 응하는 최 마담이 가운을 걸치고 그 옆으로 따라 누웠다. 베개맡에 놓인 라이터를 들어 그에게 불을 붙여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백 이사, 백주경이 생리적인 쾌감에 달뜬 신경을 꺼뜨릴 요량으로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이어 슬금 벌어지는 잇새로 기관차가 뿜어낼 법한 짙은 연기가 스멀스멀 새어 나왔다.

그러고서야 칭찬 같이 던져진 말에 반응했다.

“말을 섭섭하게 하네, 마담. 나 정도면 이 바닥에서는 새파란 편 아닌가? 다 죽어 가는 노친네들도 제 딸년뻘 되는 기집애들 양옆에 끼고 허리 잘만 휘두르고 다니는 마당에.”

이 나이 먹고도 팔팔한 정력 사정을 가감 없이 들먹이자 최 마담이 까르륵 웃었다. 굳이 반박을 하지 않는 태도에서 그녀의 만족감이 짙게 드러났다.

“집에도 편히 못 들어가고…… 어쩌신대.”

백주경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최 마담이 땀으로 젖은 가슴팍을 손가락으로 덧그리며 염려스레 속삭였다. 백주경이 별다른 말이 없자 최 마담의 주둥이는 더 분방하게 살아나 종알거렸다.

“몇 년 만에 만나는 딸이라고 하셨죠?”

“거의 20년인가. 갓난쟁이 때 보고 한 번도 못 봤으니까.”

“어머, 그럼 생판 남이지. 남.”

최 마담의 말대로 20여 년 만에 조우한 친딸은 생면부지의 남과 크게 다르지 않게 인식됐다. 그런 딸을 잡아 둘 목적으로 집을 내줘 버린 까닭에 백주경은 작금 여가 시간을 호텔에서 보내고 있었다.

여성 편력이 대단한 그는 적어도 사흘에 한 번씩은 여자를 안았다. 그간 최 마담을 집으로 부르고는 했으나 희우가 있는 상황에서는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하면 할 수야 있겠지만 굳이 못 보일 추태를 보여 신뢰를 떨어뜨릴 이유는 없었다. 어쨌든 지금 두 사람은 부와 녀, 즉 어비딸의 관계로 만난 게 아니던가.

결혼도 하지 않아 사실혼처럼 지내다가 갈라졌다고 한들 희우가 제 씨로 태어난 아이라는 사실은 변치 않았다. 그것은 희우에게도 동등히 작용하는 사실이므로 아비라는 작자가 엄마 아닌 다른 여자와 요란한 정사를 벌이는 게 좋게 보일 리 만무했다.

“그 여자 딸이라고 했죠? 호정 그룹 외동딸.”

“그래.”

“엄마 닮았으면 얼굴은 뭐, 빠지는 데가 없겠네.”

읊조린 최 마담이 쓱 고개를 들어 백주경의 얼굴을 확인했다.

백주경은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비교적 새파란 시절에 만나 한철 같던 과거를 지지고 볶았던 여자를 거론할 때마다 그는 저런 의미 모를 얼굴이 되고는 했다.

“닮았지. 굉장히……. 내 유전자는 어디 갖다 버렸는지 의문이 들 정도야. 아들내미나, 딸내미나.”

“꼭 속상해하시는 것처럼 들리는데요?”

“그다지.”

거짓말 아닌가 싶었지만 말과 표정은 똑같은 농도로 덤덤했다. 최 마담은 그가 이 화제를 별로 달갑지 않게 여긴다는 걸 눈치채고서 분위기를 환기할 겸 말머리를 돌렸다.

“그보다, 일강 쪽에서 꼬리를 잡은 모양이에요.”

“벌써?”

섹스 파트너로서 가지는 열락의 자리가 끝나고, 홧홧한 열기가 얼추 가시면 자리는 자연스럽게 보고의 형태로 변하고는 했다. 최 마담은 백주경이 이 바닥 정보를 긁어모으기 위해 꽂아 놓은 심복과 같았다.

“생각보다 빠른데.”

백주경이 연초를 손가락 사이에 걸며 감탄처럼 읊조렸다.

캄캄한 경매장에서 육안으로 목격한 상황이 얼핏 떠오른다. 고작 커튼 나부랭이로 가려질 리가 없느니만큼 주목도가 있는 자리에서도 제 딸을 거침없이 주물럭거리던 서 대표의 태도.

섹스야 감정을 가지지 않고도 얼마든지 취할 수 있는 행위였다. 특히 지나가는 여자 젖통만 봐도 좆이 벌떡벌떡 서는 사내새끼라면.

그러니만큼 서 대표가 과연 제 딸을 안아 애를 배게 한 게 잠깐의 유흥이었던 건 아닐까 추측했으나 이런 식으로 나오면 얘기는 달라진다.

그의 차를 습격하여 희우만을 쏙 빼내 온 범인의 꼬리를 벌써 물었다는 건, 일강 측에서 그만큼 이 사안에 신경을 쏟고 있다는 의미였다.

“꼴에 순정마냥.”

“순정이요?”

애들 입에서나 나올 법한 단어가 튀어나오자 웃겼는지 최 마담이 깔깔거렸다. 제 입으로 말한 것임에도 백주경 역시 허황된 무언가를 되뇌었다 믿는 것처럼 싱겁게 웃어 보였다.

서 대표가 순정.

그 서수혁이?

흑과 백처럼 절대 하나로 합체될 수 없는 단어를 한데 뭉친 느낌이라 부단히도 이질적이었다.

서수혁, 그가 누구던가.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일강의 회장 곁에 나타났다. 정말이지 어느 날 문득. 그렇게 나타나서는 차츰차츰 제 영역을 확장시킨 이른바 난놈이었다.

여러 가지 화젯거리로 떠들썩했으나 무엇보다도 주목을 받은 건 바로 그의 신분이었다.

이에 관하여서는 실로 의견이 분분했다.

이 좁은 대한민국 땅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는 체격이 그 도화선이 되었다. 어느 군 특수 부대에 오래 몸을 담고 있던 이가 아니냐는 얘기도 있었고, 저 멀리에서 물 건너온 경호 용병 출신이 아니냐는 맥락 없는 추측도 있었다.

일단 외국인일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이 흘러나온 건, 서수혁이 나타났을 무렵에 만나는 사람마다 그와 대화를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게 아랫사람이든 윗사람이든.

싹수가 없는 정도를 넘어서서 아예 상대를 개무시로 일관하는 서수혁의 태도는 많은 이들로 하여금 범상치 않은 인상을 끼쳤다.

갖은 군소리들이 주전자에 담긴 물처럼 들끓었으나 제대로 대답을 해 주는 이는 없었고 그렇다 보니 여기저기서 조약돌처럼 내던져진 여러 가정들도 차츰 수그러들었다.

그러다가 수면 위로 떠오른 게 바로 일강 회장의 자식 설이었다.

일강 차 회장이 말년 가까이에 들인 어린 첩이 하나 있었다. 애 하나만 출산을 해도 금세 소원해지는 여느 부부처럼 얼마 못 가고 관계가 파탄 나기 일쑤이던 이전의 정부들과 달리 회장의 곁을 꽤나 오래 지켰다고 알려진.

노쇠한 차 회장의 입지가 점차 좁아지며, 그 첩이 혹여나 타깃처럼 잡혀 인질이 되기 전에 외국으로 빼돌렸다는 얘기가 그 뒤를 지지대처럼 든든히 받쳐 올렸다. 회장과 성씨가 다르지만 이 문제는 서수혁이 어미 쪽의 성을 이어받았다면 충분히 납득이 되는 부분이었다.

‘왜, 일전에 서 대표 만나 본 새끼들 말로는 말투가 좀 거시기하다지 않습니까. 무슨 서울 샌님 새끼처럼 이랬니, 저랬니…… 그게 다 후계 문제로 급하게 입국 결정되면서 하루빨리 한국말 배우느라 그렇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딱 어학당 교과서 예시 말투 말입니다.’

차후 부하의 설명을 듣자 하니 그 가설이 완전히 헛다리를 짚는 방향 같지는 않았다. 누구 하나 속 시원하게 말해 주는 법이 없는 상황 속에서 이는 차츰 사실인 양 굳혀져 갔다.

어쨌든, 서수혁의 등장은 음기로 끓는 이 세상에 선명한 적색 신호를 울리게 만들었다. 서수혁이 차 회장의 확고한 신임을 얻고 일강 대표직에 오르기 위해 행한 짓 때문이었다.

‘맨손으로 꺾은 모가지 다섯 개를 회장 앞에 가져다 바쳤답니다.’

당시 총수로 자리매김하던 일강의 차 회장은 이빨 다 빠진 호랑이로 유명했다.

배젊은 시절 움켜쥐고 있던 권력은 모래알처럼 홀홀 빠져나가 버리고, 주체 못 하고 뿌려 댄 씨와 그로 인해 본 수두룩한 자식들로 하여금 괴뢰처럼 휘둘리기 바빴다.

그의 자식들은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 준 은혜를 잊고서 부친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괘씸한 승냥이들이었다.

하지만 그게 이치로 작용하는 세상이었다.

제 집권과 세도를 위해서라면 피붙이를 해하는 것마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세상, 오로지 자신의 안보와 위치를 공고히 할 목적으로 같은 피도 뿜어내게 만드는 지독하고 아득한 세계.

그런 회장을 승냥이 떼로부터 구해 낸 게 바로 서수혁이었다. 그는 부친의 목을 따려고 혈안이 된 승냥이들의 목을 오로지 완력으로 뜯어내 차 회장 앞에 던져 주었다.

백주경도 두 귀로 전해 듣기만 한 이야기지만, 당시 일강 본사 내부에 뚝뚝 떨어져 길을 이뤄 낸 피의 얘기는 아직까지 소슬한 괴담으로 전해지는 바였다.

그런 방식으로 신뢰를 쌓은 서수혁은 성공적으로 일강의 꼭대기에 앉았다. 그 누구도 선뜻 넘볼 수 없게 만드는 잔혹한 신고식이었다.

그리고 그게 시작이었다.

폭력과 혈투가 난무한 이 뒷세계는 땅따먹기 싸움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새끼가 저 새끼의 뒤통수를 쳐서 수도권 일익을 먹는가 하면, 또 저 새끼가 다른 새끼의 다리를 걸어 자빠뜨린 뒤에 지방 일부를 먹는 식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정치ㆍ경제 부문까지 은밀하게 결탁하기 시작한 이 음지는, 갈수록 폭거와도 같은 무지몽매한 짓으로부터 탈피하려 애썼다.

사람을 후려 패고 피로 샤워를 하는 게 외적으로 보기에 격 떨어지는 짓이라는 기조가 깃들기 시작한 거다.

그리고 그로부터 파생된 균형과 질서는 당연하게도 큰 자본력과 모체를 가진 이들에 의하여 좌지우지됐다.

그들은 서로가 그어 둔 경계를 침범하지 않았다. 일종의 협정처럼 몸을 사리는 방식 안에서 부를 불리는 법을 깨우친 것이었다. 이것이 양지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음지 세상의 불문율이었다.

그리고 일강을 뒷배경 삼아 등장한 서수혁은 그 태풍의 눈 가운데에 던져진 교란종이었다.

말 그대로 생태계 교란종.

몰상식하지만 그래서 효과적인 방식으로 밀고 들어와 때려잡고 무력화시키며 자신의 영역을 그야말로 ‘무식하게’ 넓히고 있었다.

그는 현재에 이르러 이 바닥이 추태라 여기는 짓을 잘도 무기로 삼고 휘둘렀으며 그 방식으로 타깃을 짓밟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한눈을 팔면 잡아먹힌다.

교란종에 걸맞게 서 대표가 쓸고 지나간 자리의 여파로는 그런 얘기가 심심찮게 남아 있었다.

백주경이 수장으로 있는 JK 홀딩스는 그런 오만무도함에 직접적으로 타격을 입은 대상 중 하나였다.

몇 년에 걸쳐 갖은 공을 들이며 얻으려고 노력한 신도시 개발 사업의 시공 우선권, 그것을 보란 듯 일강 측에 빼앗기며 시작된 신경전이었다.

신도시 개발 사업의 시공 우선권은 JK 홀딩스 내부에서 총력을 기울이던 투자 사업의 초석이었다.

이미 문체부 장관을 포함하여 거미줄처럼 관여되어 있는 인물들을 포섭하기 위해 관련 로비 비용으로만 기십억 원을 쏟아부었다. 그만큼의 낭비도 가치가 있다고 판단할 만큼 천문학적인 이익을 기대한 개발 사업이었다.

진정한 알짜배기는 차후 그 지부에 들어갈 합법 카지노였기 때문에.

한참이나 목을 빼고, 인내하고, 전전긍긍하다가 드디어 낼름 삼키려 한, 그야말로 빛깔 좋은 열매였다. 그게 불현듯 날아온 매에 의하여 코앞에서 휙 가로채였으니 부아가 치밀지 않을 수가 있나.

그로 인해 이가 박박 갈리던 중에 희본을 만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직접 말한 대로, 정여래를 아주 빼다 박았으니까.

언뜻 보면 연한데 깃드는 잔상은 진한 미인이었다. 그래서 정여래를 볼 때마다 연못 가장자리에 피어난 연꽃이 떠올랐다.

들꽃보다 화려하고 벚꽃보다는 수수한.

서서히 물들어 끝내 지울 수 없게끔 새겨지는 수채화 같은 인상.

그토록 명화 같던 얼굴을 쏙 빼닮은 인상으로 이 거친 세상 속에 불순물처럼 섞여 있으니, 티가 나지 않는 게 이상할 일이었다. 물론 외모뿐만이 아니라 저를 엿 먹이는 데에 능한 태도조차 닮은 구석이 있었다.

“정희본이가 일을 아주 개같이 망쳐 놨어.”

으득, 이가 갈리자 사이에 끼인 담배 필터가 엉망으로 짓이겨졌다.

백주경은 다시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어지는 이전 날의 통화를 떠올렸다.

‘이사님, 지금 막 장부 찾았습니다. 정희본이 차 조수석 시트 아래에 있더군요.’

‘근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장부를 확인해 보니 안에 열 페이지가 누락된 상태입니다. 아무래도 이게 장부 핵심 부분인 것 같습니다.’

이 장부는 JK 홀딩스의 사활이 걸린 먹잇감이었다.

이걸 빌미로 서 대표가 있는 일강 측과 시공 우선권을 놓고 거래를 할 목적이었는데 가장 중요한 페이지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거다. 계획 초장부터 아주 제대로 틀어져 버린 격이었다.

희우를 급히 데리고 온 건 그 이유에서였다.

희본이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죽은 지금, 유일한 실마리는 여동생 하나뿐이었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고작 이십 대 여자애 하나.

잘 구슬리고 살살 달래면 충분히 원하는 걸 얻어 낼 수 있으리라.

또한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먹잇감이 그거 하나는 아닌 듯싶었다. 서 대표가 정말로 제 딸에게 사적 감정을 품고 있다면 제게는 그것마저도 이득인 셈이었다.

아무래도 행운의 여신이 제게 완전한 승기를 들어 줄 심산인 모양이었다.

“핸드폰.”

짧게 지시하자 최 마담이 얼른 탁자 위에 놓여진 것을 건넸다. 화면을 몇 번 두드려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일강 쪽으로 연락 넣어. 서 대표 직통 라인으로. 내가 좀 만났으면 한다고 말이야.”

- 알겠습니다, 이사님.

끊긴 통화 위로 담배 연기가 희미하게 피어올랐다.

장례식 재단 위 향로를 떠올리게 하는 모양새였다.

* * *

이제 겨우 서수혁, 그 사람의 침실에서 깨어나는 게 좀 적응된 차였는데.

희우는 또다시 얄궂게 모양을 바꿔 버린 천장을 원망스레 올려다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깨어나고서도 몇 분간 천장에 새겨진 무늬만 세어 보다가 느지막이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이제는 이렇게 늦장을 부려도 누구 하나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다.

희우 님, 하고 저를 깨우러 오는 사람도 없고 깨어날 때마다 흠칫거리게 만들던 금빛 커프스 링크도 없다.

서수혁이 고약하게 꽂아 대던 그 자신의 흔적이 여기서는, 단 하나도 없다.

그게 왜 이렇게 이상하게 느껴지는지.

아무리 힘겨운 생활이라고 해도 거푸 반복하다 보면 결국은 적응하게 되어 버리는 걸까.

부스스한 머리칼을 넘긴 희우는 방에 딸린 욕실로 향해 세수를 했다. 잠에서 깨려고 한 행동인데 몇 번 어푸어푸를 반복해도 여전히 머릿속이 멍했다.

이제야 약을 먹지 않았음에도 하루 온종일 잠이 쏟아지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

힐끗 내려진 시선이 원피스로 가려진 납작한 배를 응시했다.

‘하나도 없는 건 아니구나.’

서수혁과 함께 지낸 날을 그 무엇보다 생생한 과거로 만드는 흔적이 바로 이 안에 담겨 있었다.

생명이 자라나고 있다.

이 안에서.

한동안 밋밋한 배를 내려다보던 희우는 속이 울렁거리는 게 심해지는 듯해, 물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을 수건으로 닦은 뒤 욕실을 나섰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햇살이 들어서는 화실부터 향했다.

지난날, 희우는 백주경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저기에 있는 화실을 봤어요. 엄마 그림이 있던데…….’

‘아, 예전에 여래가 여기 머물 적에 쓰던 곳이지.’

그걸 듣고서 희우는 그에게 다른 여자가 생기지 않았다는 걸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아내가 있는 상황에서, 이미 헤어진 지 오래인 연인의 작업실을 처분하지 않고 가만 놔둔다는 게 말도 안 되는 일처럼 다가와서였다.

누구도 곁에 없으니까 굳이 손대지 않고 놓아둔 게 아닐까 싶었다.

문지방을 밟고 넘어가기 무섭게 바짝 마른 유화 물감 냄새가 옅게나마 코를 감돌았다.

이 안에 들어설 때마다 그 어떤 식으로도 가질 수 없는 정다운 느낌이 희우를 감싸 안았다. 한때 엄마가 머물렀던 공간이라는 사실 자체가 몸과 마음을 짓누르는 긴장과 경계를 누그러뜨렸다.

희우는 첫눈에 알아볼 수 있었던 엄마의 그림을 차례대로 지켜보았다. 작품으로 빼곡히 찬, 전형적인 예술인의 방다운 내부를 둘러보다가 무심결에 흠칫했다.

이와 비슷한 장면이 잔상처럼 스쳐 지나가서였다.

‘지금 당장 알아내라는 건 아니야. 대표님도 뭐, 영 뜻밖의 수확이라 이왕 맡겨 보시는 것 같으니까 너무 부담 가지지는 말고 시간 날 때 한 번씩 보든가 해.’

장소가 바뀌어도, 입고 있는 옷이 바뀌어도, 저를 감싼 공기가 달라졌어도 접착제처럼 머릿속에 질척히 들러붙어 도통 잘려 나가지 않는 사내의 생각이 희우를 졸졸 쫓아다녔다.

한 번씩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등줄기를 축축이 적실 만큼 섬칫한 감각을 선사하는 남자였다.

이제 더 이상 신경 쓸 게 없다고 모든 만사를 제쳐 버리기에는, 돌아가는 상황이 여전히 미심쩍고 묘연했다.

그뿐일까?

제 두 눈으로 직접 보아 온 사내의 괴팍한 성질머리가 그처럼 편한 식으로 흘러가려는 사고의 흐름을 방해했다.

이건 분명히 서수혁의 계획 속에 없던 일일 거다. 그러니만큼…….

희우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틀어막았다. 생각이 이렇게 은연한 틈으로 정도를 모르고 깊어질 때마다 속에서부터 울렁거림이 치솟아 올랐다.

가슴팍을 툭툭 두드린 희우는 물을 한 잔 마실 생각으로 부엌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한 잔 가득 따른 물을 마시던 중에 띠리리, 크고 단조로운 소리가 귀를 울렸다.

어깨를 삐죽 세웠다가 꺼트린 희우가 뒤로 돌았다. 테이블 위 전화기가 울리고 있었다. 아마도 백주경일 거라고 짐작하며 희우는 수화기를 들어 올렸다.

- 희우 일어났니?

“네, 네.”

역시나였다.

그간 백주경이 시간이 나면 자주 위로 올라와 함께 식사를 했기에, 끼니를 챙길 즈음에는 이런 식의 연락이 오고는 했다.

- 지금 집에 갈 건데, 혹시 따로 먹고 싶은 게 있나 해서.

“아, 저…….”

- 고기만 아니면 괜찮은가?

전에 한번 그가 뭣 모르고 고기를 사 온 적이 있었다. 그때 희우는 좋지 못한 기억에 한 입을 할 새도 없이 화장실로 달려가야만 했다. 입덧이 심해지기는 했으나 고기를 보고 내보인 반응은 그것보다는 기억이 벌인 작용에 가까웠다.

백주경 역시 그걸 어렵지 않게 알아채고는 혹시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느냐고 물었었다. 미주알고주알 다 털어놓을 기력도 없어서 희우는 그저 그렇다는 말로 답을 줄였다.

“네.”

작게 대답하자 백주경은 그럼 소화가 잘되는 걸로 알아서 마련해 가겠다고 하고는 끊었다.

그렇게 소파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으니 30분이 지난 시점에 현관 쪽에서 소리가 나며 백주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백주경만큼이나 익숙해진 그의 수하가 민짜 쇼핑백을 손에 든 채 부엌으로 향했다.

“거기 앉아서 뭐 해? 이리로 와야지.”

백주경의 채근에 희우는 부엌으로 향했다.

물결무늬가 곱게 새겨진 식탁 위에는 간단한 브런치 세트가 놓여 있었다.

희우는 포크를 들어 우유와 함께 볶은 듯이 색이 연한 스크럼블 에그를 떠먹었다. 간을 약하게 했는지 담백한 게 마음에 들어서 조금씩 입에 밀어 넣었다. 옆에 예쁘게 플레이팅된 아보카도도 작게 잘라 씹었다.

그러다가 이런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백주경과 눈이 딱 마주쳤다. 뺨을 열심히 우물거리던 저작 행위가 멎었다.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싶어 희우는 관골과 입가를 겸연쩍게 만지작거렸다.

백주경이 신경 쓰지 말고 계속 먹으라는 듯이 내저은 손으로 턱을 괴며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애비로서 이런 마음 품으면 안 되는 걸 알지만, 난 이미 네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종종 했어.”

예기치 못하게 와닿는 전언이 피부가 차가워질 만큼 섬뜩해서, 희우는 주춤거렸다. 그 내색을 숨기기 위해 유리병에 담긴 우유를 마셨다. 미처 한 모금을 삼키기도 전에 백주경이 말을 이었다.

“여래의 집안이 워낙 미쳐 돌아갔으니.”

“엄마의 집안에 대해 잘 아세요?”

“알다마다. 본인 집안이 치가 떨리게 싫단 이유로 내게 도망쳐 온 여자가 정여래야.”

이제는 해묵어 버린 과거의 어느 지점을 간만에 들춰 본 것처럼 백주경이 피식 웃었다. 아빠라는 사람 속에 남은 엄마의 기억이 어떤 웃음을 부추기는 걸까. 본능적인 의문이 깃들었다.

“너도 모르지 않을 텐데. 호정 그룹에 대해서.”

그러다가 그의 입에서 기어이 외가가 나왔을 때 희우는 얼마 없는 입맛이 아예 저 바닥까지 추락했다. 그래도 사 온 성의가 있으니 바로 포크를 내려놓진 못하고 애꿎은 스크럼블 에그만 헤집으며 고개를 보일 듯 말 듯 끄덕였다.

“여래는 나와 결혼까지 할 의향이 있었어. 그 집안에서 아예 여래를 목 졸라 죽일 기세로 반대를 하는 바람에 수포로 돌아갔지만.”

“왜요?”

“뭐 근본 없는 깡패 집안이라는 것도 이유이긴 했다마는, 그것보다 내 사주가 최악이라는 점이 결정적이었지. 여래와의 음양오행 조합이 물과 기름처럼 겉돈다고. 절대 상생할 수가 없다고 했던가…….”

백주경이 오랜 기억을 더듬는 것처럼 살짝 인상을 썼다.

“그러니 여래와 붙으면 반드시 여래가 해를 입을 사주라고.”

“…….”

“하여간. 괴짜가 따로 없는 집안이라니까.”

저기까지 말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백주경은 외가를 완전히 꿰뚫고 있었다.

사주, 그래.

희우가 트라우마로 남을 만큼 어릴 적부터 시달려 온 팔자 얘기는 모두 외갓집과 관련되어 있었다.

호정 그룹.

엄마가 혈연이라는 이유로 평생을 묶여 있어야 했던 외가의 정체였다.

호정 그룹은 약 두 세대 전부터 ‘오 선생’이라고 불리는 무당을 섬겼다.

연달은 사업 부진으로 지는 해처럼 기세가 저물어 갈 무렵, 당시 회사를 이끌어 가던 외증조부가 그 무당을 만나 팔자를 펴며 완전히 신적으로 떠받들게 되었다는 다소 시시한 얘기였다.

그 후 호정 그룹은 팔선녀를 주신으로 모신다는 그 무당을 통하여 기업의 앞길과 사업의 흥망성쇠 등 앞으로의 나날에 대한 길흉화복을 점쳤다.

그가 옳다 하면 아닌 것도 옳은 일이 되며, 그르다 하면 곧 죽어도 그른 일이 된다. 회사 대표직에 앉아 있는 사람은 분명 외가의 사람이지만, 실질적으로 기업을 운영하고 이끌어 나가는 건 무당과 그가 모시는 귀신인 꼴이었다.

더구나 그 점괘는 단순히 사업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었다. 호정 그룹을 낱개의 밀알처럼 오밀조밀 이루는 집안사람에게 역시 해당했다.

미술을 전공하길 원하던 엄마에게 의대를 강요하고, 그들이 바라는 대로 의대에 진학했으나 순순히 따라 줄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단 양 자퇴를 해 버린 엄마를 폭행하고 상스러운 모욕을 퍼부은 것도, 모두 다 오 선생의 영향력 안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엄마가 휘둘리는 것도 지긋지긋하다고 말한 게 바로 이것이었다.

사주와 팔자를 근거로 일평생 원치 않은 삶을 강요당한 것.

이처럼 호정 그룹은 오 선생이 부리는 실 안에서 놀아나는 무력한 꼭두각시와 같았다.

‘저거 당장 내보내.’

그리고 차후 엄마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백주경과 갈라서고, 남매의 손을 꼭 잡은 채 친가로 돌아갔을 때 오 선생은 갓난아기인 희우를 보고 그렇게 단언했다.

‘팔자가 그냥 사나운 정도가 아니야. 저게 미래에 이 집안을 아주 불구덩이에 처박을 운명이라고.’

적어도 호정 그룹 내에서는 견줄 데 없는 신적인 존재인 오 선생의 경고에 집안은 한바탕 뒤집어졌다.

외가 사람들은 어차피 혼외자식이니 보육원에 맡기자, 그리고 후원을 해 주며 뒤를 잘 봐주면 되는 문제 아니냐, 그런 식으로 어떻게든 회유하려고 했으나 엄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 가서는 희본까진 핏줄로 받아 줄 테니 제발 희우만은 내보내자는 간곡한 설득에도, 엄마는 철옹성처럼 눈 하나 깜짝 않고 견뎠다.

하지만 호정 그룹에서 그를 순순히 보고 있을 리가 없었다.

‘저, 시발, 저거, 저년이 문제라니까. 어? 정여래가 저 기집애, 딸이랍시고 데려와 눌러앉았을 때부터 아버지 건강이 갑자기 악화됐잖아. 내 말이 틀려? 저거 진짜 사주에 뭐가 있다니까. 팔자 드럽게 사납다는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닐 거라고!’

‘저거 하여튼, 저 팔자 더러운 년.’

본가에서 더부살이하듯 지내던 그 시절, 외삼촌과 마주칠 때마다 들어야만 했던 따가운 폭언은 모두 그 점괘로부터 야기된 일이었다.

어린 나이에 단어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희우는 자신을 무슨 천하의 역적 보듯 구는 외삼촌의 분기에 당황하고 놀라 매번 울며 엄마에게 뛰어가고는 했다.

적어도 엄마가 저와 오빠를 데리고 집 안에 머물 무렵에는 저런 폭언에 쉴 새 없이 노출당했다.

그게 종지부를 찍은 건 외삼촌이 호기심을 품고 다가온 희우의 어깨를 세게 밀어 넘어뜨린 사건이 발생하고 나서였다.

다행히 희우는 크게 다치지는 않았으나 엄마는 그로 인해 완전히 심사가 뒤틀렸다.

‘내 아기한테 함부로 말하지 마.’

‘정여래!’

‘내가 더러워서 나갈 거야. 애들 데리고 나갈 거라고.’

‘하, 참. 네가 어디 갈 데나 있냐?’

‘아버지가 예전에 나한테 준 별장 있지. 거기로 갈 거야. 그러니까 다신 우리 희우 몸에 손대지 마. 알겠어? 한 번만 더 이런 일 있으면 오빠라고 해도 진짜 가만 안 둬.’

엉엉 우는 희우를 품에 안은 채로 엄마는 서슬이 감도는 눈으로 외삼촌을 노려보며 똑똑히 경고했다.

늘 곰처럼 가슴팍을 크게 부풀린 채로 위협스러운 기색을 선보이던 외삼촌도 그 순간만큼은 움찔하며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었다.

얼마 안 있다가 정말로 희우는 엄마와 오빠 손을 잡고 궁궐같이 커다란 집을 나왔다. 그리고 차를 타고 오랜 시간을 달려 산세에 감추어진 강원도 별장에 도착했다.

울창하게 솟아오른 나무로 사방을 감싼 별장은 여름이고 겨울이고 고즈넉한 풍광을 자랑하는 숨겨진 명소였다.

그곳에서의 기억은 희우 인생 통틀어 가장 행복하던 때였다. 자신을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난 것처럼 혐오하는 사람도 없이 셋이서 오순도순 살았던 시절이라서.

희우를 출산하고서 차츰 건강이 나빠진 엄마가 끝내 죽기 전까지는, 계속 거기서 그렇게 환한 웃음을 지으며 지냈다.

“근데…….”

잠깐 과거를 더듬은 희우가 상념에서 깨어나며 입을 열었다. 맞은편에 앉아 물을 한 모금 들이켜던 백주경이 시선을 맞춰 온다.

“왜…… 헤어지신 거예요? 엄마랑.”

백주경이 눈썹을 미끈히 들썩였다. 장부에 대해 물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표정이다. 네가 그걸 궁금해할 줄은 미처 몰랐다는 듯한.

“음.”

백주경이 어디부터 얘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목을 가다듬었다.

“서로 이해관계가 맞지 않았지.”

“이해관계요?”

“난 우리가 아주 괜찮은 파트너라고 생각했어. 결혼? 까지는 애초에 모를 일이었고, 여래가 사실혼의 관계로 내 옆자리를 지킨 채 애를 몇 명 낳든 상관없다는 쪽이었다. 근데 여래는 그게 아니었지. 결혼하지 않았어도 내가 자기 남편 역할을 해 주기를 바랐거든.”

분명 잘만 아는 한국어로 대화를 하는데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희우가 고개를 작게 갸웃거리는 걸 확인한 백주경이 희미하게 웃었다.

“내가 다른 여자와 관계를 가지는 걸 못 견뎌 하더란 말이야.”

희우의 포크가 접시로 추락했다. 쉽사리 관리가 되지 않는 표정이 지금 제가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를 되새기는 걸 똑똑히 알려 주었다.

보이는 대로였다.

희우는 지금 아빠라는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엄마가 있는 상황에서 다른 여자와 잤다고?

“어차피 결혼을 하지도 않았고, 앞으로도 하지 않을 관계에 너무 많은 걸 바라면서 구속을 하니까.”

“…….”

“그게 좀 맞지 않았달까.”

이제껏 쌓은 온화한 인상이 지금 나눈 짤막한 대화로 완전히 깨부서졌다.

희우는 과거 엄마에게서 아주 사소하게나마, 희소성이 짙은 식으로만 아빠의 존재를 목격했다. 피할 수 없는 식으로 맞닥뜨리게 된 부친의 화제 앞에서 엄마는 늘 먹색에 가까운 감정만을 내보였다.

슬퍼하거나, 고요히 분노하거나, 참다못해 회피하거나.

이젠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러며 동시에 이 남자가 엄마를 사랑하긴 했는지 의문이었다. 애초에 한 여자를 사랑하면서 저런 행동이 가능하긴 한 건가?

희우의 대답은 아니, 었다.

“엄마를 사랑한 게…… 아니었어요?”

아빠라는 사람이 엄마를 사랑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결론을 도출해 냈으나 그걸 자연스레 받아들이기가 퍽 어려워서 절로 의문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백주경이 다소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웃었다.

“재미없는 사랑 타령을 하는 건 여래랑 똑같구나.”

“…….”

“닮긴 닮았어. 확실히…….”

뜻 모를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중얼거린 백주경이 잠시 후 재킷 안쪽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전화가 온 모양인지 그가 화면을 터치하고는 귀에 가져다 댔다.

“음, 그래.”

그사이 입맛이 완전히 사라진 희우는 시선을 떨어뜨렸다. 잠깐 확 쏠렸던 신경이 누그러지자 간신히 추스르고 있던 오심이 기지개를 켜는 것처럼 치고 올라왔다.

“사흘 후? 하하. 이거 참, 성격 한번 화끈하시네. 좋지. 장소는 정해 둔 대로 강 기사에게 고지해 둬.”

사흘 후, 그에게 외출 일정이 잡힌 모양이었다.

희우는 배 위에 탄 것처럼 메슥거리는 속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그 모습을 예의 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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