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장. 볼모의 경계 (3) (8/17)

7장. 볼모의 경계 (3)

새벽빛이 부채꼴 모양으로 번졌다.

차가운 서광이 유리창을 넘어 커다란 침대 위까지 물결처럼 넘실거렸다.

그 가운데 서수혁은 둥글게 굽힌 손가락을 한들거렸다. 지난밤 레이스 팬티가 걸려 도발적인 인상을 끼쳤던 손가락 위에는 현재, 끊어질 듯이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걸려 있었다.

제 품에서, 제 팔뚝을 베개 삼아 고이 잠이 든 희우의 것이었다.

섹스는 동이 틀 무렵에서야 끝이 났다. 당연한 수순으로 희우는 그 전에 기절했다.

몸싸움이라도 벌이는 것처럼 격렬하게 뒹굴다 보니 마지막 파정이 끝났을 즈음에 희우는 침대 가장자리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었다. 그 몸을 덜렁 들어 바른 위치에 눕히다 보니 우연찮게 팔베개를 해 주게 되었다.

예전에는 저와 같은 침대에 누워 있으면 한두 번은 깨는가 싶었는데, 이젠 어느 정도 인이 밴 건지 이렇게 머리카락을 가지고 장난을 쳐도 잠잠한 숨소리를 내며 새근새근 수면을 이어 간다.

아까부터 서수혁의 시선은 한 군데에만 박혀 있었다.

잠기운에 빠져 제 쪽으로 돌아온 희우의 얼굴.

고작 싸대기 한 대로 벌써 푸릇푸릇한 멍이 올라오며 동시에 터져 버린 입가.

쯧, 소리 없이 혀를 찰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이제 겨우 흰 피부가 보일 만큼 멍을 가시게 해 놨더니 시간을 들인 보람도 없이 원점이었다.

의도치 않은 실수가 발발한 뒤로 씹맛은 급격히 떨어졌다.

물론 희우 혼자만 그랬다.

깊숙한 자극점을 치댈 때마다 오싹한 전율이 따라붙는 것처럼 옴찌락대는 과민 반응이 확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이전의 섹스에서 그랬듯이 고역인 시간을 보내는 양 목석처럼 굳어서 토막 난 신음만 성의 없이 툭툭 뱉어 댔다.

그쯤이면 그냥 좋게 좋게 놓아줄 법도 하지만 서수혁은 오히려 그런 그녀를 잡고서 더 한계까지 몰아붙였다.

희우가 생애 처음으로 성감을 느끼며, 그 영향으로 벌어지는 질 내부의 변화가 극히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희우는 좀처럼 긴장을 풀지 못하다가 그대로 재미없이 자빠져 잠이나 들어 버렸다.

그래서 더, 저 상처가 눈길을 잡아끌었다.

실처럼 걸린 머리칼을 놓아준 서수혁은 굽힌 손가락 등으로 희우의 볼살을 꾹 눌렀다. 움찔대는 기색 하나 없는 게, 정말 영락없이 수면의 바다에서 첨벙첨벙 헤엄을 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가만 바라보니 희본과 닮은 구석이 적잖았다.

깨어 있을 때는 시선만 포개지면 기겁에 겨워 이리 휙, 저리 휙 피하기 바쁘다 보니 이목구비 하나하나를 지그시 살펴보기란 은근히 어려운 일이었다.

‘희본이 애인 생겼니?’

지금 같은 새벽녘, 깊숙이 묻어 두었던 어느 날의 기억이 산처럼 솟아올랐다.

‘자꾸 핸드폰을 보네.’

‘아, 죄송합니다. 바로 넣겠습니다, 대표님.’

서류를 팔랑 넘기다가 우연히 눈에 띈 행색에 쓱 질문을 건네 보았을 뿐이다.

그러나 희본은 심한 꾸지람을 들은 이처럼 자세를 바로 하며 핸드폰을 쥐고 있는 손을 얼른 뒤로 보냈다.

‘애인은 맞고?’

딱히 부하의 연애사를 꼬치꼬치 캐물을 생각은 없었으나 인물이 영 뜻밖이다 보니 의문이 절로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서수혁을 필두로 하여 그를 법이자 질서처럼 따르는 사단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졌다.

여자 가랑이 벌리는 일에 회까닥 돈 놈과 별 관심 없는 놈. 개중 희본은 후자에 속했다. 그러니 뜻밖이라는 이유에서라도, 흥미가 동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그 마음을 읽었는지 희본이 어정쩡한 미소를 머금으며 볼을 긁적였다.

‘아뇨. 동생입니다.’

‘동생?’

영 뜻밖의 대상에 서수혁이 서류에 처박고 있던 시선을 들었다.

‘그러고 보니 여동생이 있다고 했지.’

‘예.’

‘이 시간에 동생한테는 왜.’

설마 화제가 이렇게나 깊어질 줄은 몰랐던 건지 희본은 조금 더 난감한 낯을 해 보였다. 하지만 굳이 숨길 것 없다고 판단을 한 양 허리를 반듯하게 세우며 대답했다.

‘동생이 지금 시험 기간인데 잠이 든 것 같습니다.’

대번 납득을 하기에는 군데군데가 비지 않았나 싶은 의심을 들게 하는 문장이었다. 서수혁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눈길을 곧이곧대로 보냈다.

희본이 멋쩍은 웃음을 입가에 내걸었다.

‘동생이 끈기가 좀…… 없습니다. 본인도 그걸 잘 알고요. 그래서 밤샘 공부를 할 예정인데 혹시 잠이 든 것 같으면 꼭 깨워 달라고…….’

미주알고주알 털어놓던 희본이 대뜸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여기까지 말할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했는지 허리를 꾸벅 숙였다.

‘죄송합니다. 이제 꺼내지 않겠습니다.’

대화는 거기서 중단되었다.

서수혁 역시 그 이상으로 파고들어 가지 않았다. 문득 든 흥미가 딱 거기까지였기 때문이다.

밤새도록 줄글을 읽어 눈알이 뻐근했고, 활자 중독에 걸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넌더리가 날 무렵에 아주 잠깐 분위기를 환기할 정도의 흥미 수준.

그날 그렇게 잠깐 들이찼다가 빠져나가는 바람처럼 찾아왔던 화제의 주인공이 지금, 제 품 속에 누워 있다는 게 웃겼다.

희본이 장부를 가지고 달아난 것과 별개로 그 동생을 관찰하는 것에는 지루하지 않은 구석이 있었다. 슬슬 흥미가 떨어질 즈음에 떡밥처럼 새로운 면모가 하나씩 튀어나오지 않는가.

서수혁은 자그마한 딱지가 앉은 희우의 입가를 손가락으로 뭉툭히 쓸다가 상체를 돌렸다. 뒤쪽 탁자에 놓여 있던 핸드폰이 울려서였다.

“그래, 서원아.”

저보다 더 잠이 없는 수준으로 유능한 비서가 유선상으로 이것저것을 보고해 왔다. 짐작하기로 어젯밤에 전달이 되었어야 할 내용들인데 희우와 이 스위트룸에 처박혀 흘레붙기 바쁜 저를 배려해 이제야 전해 주는 듯했다.

몇 가지 질의응답을 주고받은 뒤 서수혁이 제 품 안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전체 회의는 9시로 픽스하고 넌 이리로 좀 올래.”

가슴을 간신히 덮는 수준으로 끌어 올려진 이불 위, 드러난 팔뚝이 잡고 휘면 톡 부러질 듯 야위었다.

양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러고 보니 어제저녁에 제대로 먹은 게 과일뿐이었나. 배가 고프지도 않은가. 하긴, 식욕이 든다고 해도 저만 보면 사시나무처럼 굴기 바쁜데 배를 곯는다고 퍽도 투정을 부리겠다.

“아기 밥 좀 먹여야겠다.”

희우가 늘어지게 자고 일어났을 때 좋은 풍광을 자랑하는 스위트룸에는 그녀 혼자였다.

영혼이 쏙 빠진 사람처럼 앉아만 있다가 불가항력으로 옆을 돌아보았다.

제가 베고 있던 베개 옆에 나란히 놓인 베개. 저 혼자 쓰기에는 면적이 터무니없이 넓은 이불. 이제야 막 자리를 비운 것처럼 그녀의 곁은 아직 정돈이 되지 않은 채였다.

그 갖가지의 증거들이 지난밤 이곳에서의 시간을 상기시켰다.

“아야.”

무의식적으로 올라간 손이 입매를 더듬자마자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미 피딱지가 앉았는지 주위만 건드려도 따끔거렸다. 희우는 잔뜩 헝클어진 모발을 정리할 생각도 못 하고 멍하니 허공만 응시했다.

그러던 차, 차분히 울리는 차임벨 소리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윽……!”

얼른 일어난 희우는 침대에서 내려오자마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지면을 딛기 무섭게 오금에 힘이 쭉 빠진 이유에서였다.

가랑이 사이가 얼얼하고 화끈하고 쓰라렸다. 벌어진 질구를 타고 주룩 흘러나오는 탁한 액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며칠 참은 소변처럼 수차례 싸질러진 정액이 배를 빵빵하게 만들 정도로 가득 차 있었다.

희우는 이불을 거머쥐어 허벅지를 타고 흐르는 정액 줄기를 대강 처리한 뒤에 옷장에 걸려 있는 가운을 꺼내 들었다. 그것을 입고서 문 앞으로 다가갔다.

“누, 누구세요?”

바깥에서 “윤서원입니다.” 하는, 적어도 안심할 수 있는 음성이 넘어왔다.

희우는 문고리를 잡고 주저하다가 말했다.

“저, 제가 지금 막 일어나서요. 얼굴만 씻고 와도 될까요?”

그건 변명이었고 사실은 서수혁의 정액이 철철 넘쳐흐르는 아래를 당장 뒷물하고 싶었다.

건너편에서 그러라는 대답이 건너왔다.

희우는 근육통이 검질기게 따라붙는 몸을 삐걱삐걱 움직여 욕실로 들어섰다. 가운을 벗고 얼른 호스를 주워 들었다. 욕조 턱에 한쪽 다리를 올려 밀부가 훤히 드러나게끔 한 뒤에 입구 속으로 손가락 하나를 밀어 넣었다.

“아으읍…….”

밤새도록, 기절을 하고서도 무참히 박음질을 당한 구멍은 어제 그렇게 늘어났던 게 거짓말처럼 비좁아져 있었다. 협소한 내부를 억지로 벌리어 드니 주름이 판판히 당겨지며 첨예한 통증이 엄습했다.

대체 얼마나 싸 댄 건지 긁어내도 긁어내도 자꾸만 스며 나왔다. 그 결과로 뒷물을 마쳤을 때 희우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세면대로 향하여 세수를 하려다가 멈칫했다.

‘멍들었네.’

거울을 마주하다가 헛웃음이 나왔다.

그간 다친 수준이 너무 다채로워서인지, 이제 이 정도 상처는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 버렸나 보다. 검붉게 내려앉은 딱지와 그 주변으로 번지는 피멍을 보는 눈빛이 별것 아닌 일을 마주하는 것처럼 담담했다.

바깥에서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희우는 서둘러 세수를 마쳤다.

입가가 찌르르하게 아파서 몇 번 인상을 찡그렸으나 이 정도면 수월하게 끝낸 편이었다. 남은 물기를 수건으로 닦아 내고 가운을 걸친 희우가 재차 입구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그러며 번뜩 생각났다.

“저, 그런데 대표님 여기 안 계신 거 같은데…….”

윤서원이 여기를 온 이유가 서수혁이 아닐까 싶어 건넨 말이었다. 입가에 난 상처가 보이지 않게끔 문 뒤쪽에 기대어 선 채 소심히 읊조리자 윤서원이 고개를 저었다.

“알아. 대표님이 보내서 온 거야.”

“왜요?”

“너 밥 먹어야 한다며.”

이쯤 되면 서수혁의 주변인들은 제게 시도 때도 없이 끼니를 거르는 버릇이 있기라도 한 줄 알겠다. 희우는 저를 지나쳐 안쪽으로 들어서는 윤서원의 뒤를 밟았다.

리빙룸 중앙에 놓인 탁자로 다가간 윤서원이 들고 온 쇼핑백을 내려놓았다.

그 손길만 내려다보는데 돌연 윤서원의 손짓이 멈추었다. 의아함에 고개를 들자 윤서원은 희우의 얼굴에 물끄러미 눈길을 던지고 있었다.

송곳처럼 뾰족한 시선이 어디를 살피는지 알아챈 희우가 싱거운 미소를 지었다. 하룻밤 사이에 터진 입가였다.

윤서원은 한숨을 내뱉듯이 물었다.

“대표님이 그러셨어?”

그가 서수혁의 사람임을 알아서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어떤 식으로 말을 해도 꼰지르는 식으로 들릴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그냥 입을 다물고 있자니 윤서원이 이번엔 아예 들리게끔 한숨을 내쉬었다.

“때릴 데가 어딨다고…….”

조금쯤 답답한 듯, 약간은 황당하다는 듯.

서수혁을 흡사 전지전능한 신처럼 받드는 윤서원에게서는 목격하기 힘든 불손한 면모였다. 그것은 본인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스며 나온 모양인지 아무리 들어도 혼잣말에 가깝게 다가왔다.

희우가 저도 모르게 손을 저었다.

“근데 그, 실수라고 하셨어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용기를 한쪽으로 밀던 윤서원이 눈가를 실그러뜨렸다. 곧 희우의 저 태도가 무슨 의미인지 간파하고는 읊조렸다.

“너 참 착하다.”

“…….”

“무슨 변명을 해 주고 있어.”

여전히 온유한 목소리다. 그러나 뼈 같은 단호함이 서려서일까, 살짝은 서늘해진 느낌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분명 제게 날을 세우는 태도가 아니었기에 희우는 입을 다물고 뺨만 긁적거렸다.

“뭐라고 말 전할 생각 없으니까 그냥 편히 있어도 돼. 너 곤란하게 만들려고 꺼낸 말 아니야.”

그 말로 화제를 마무리 지은 윤서원은 쇼핑백에서 포장 용기를 차례대로 꺼내어 뚜껑을 하나하나 열어 주었다.

그가 가져온 음식은 깔끔한 한정식이었다. 그래도 속을 역하게 만드는 고기가 없어서 희우는 나름 씩씩하게 일회용 수저와 젓가락을 뜯었다. 플라스틱 숟가락으로 김이 포실포실 올라오는 된장국을 한 숟갈 뜨려던 차였다.

별안간 입맛이 저 바닥까지 처박혔다.

그리 심각한 계기도 아니었다.

단지, 어제 어둑한 룸에서 본 광경이 떠올라서.

어떻게 이걸 잊고서 편히 식사를 하려고 했느냐는 기억의 꾸짖음처럼 예기치 않게 피어오른 회상이었다.

누군가의 처절한 비명이 귓가를 쨍하게 울리는 것 같았다. 무서워서라도 꺼내 보고 싶지 않았던 의문 한 줄기가 감각을 교란시키는 기억 아래에서 점점 짙어졌다.

무시하려고 숟가락을 더 높이 드는 차에 무언가가 눈앞에 놓였다.

어느 순간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윤서원이 대체 어디서 마련해 온 건지 모를 연고였다.

저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베푼 배려임을 알지만 지금의 희우에게는 악수였다. 끝끝내 무시가 되지 않는 마음에 혀가 멋대로 꿈틀거렸다.

“저기.”

“응?”

“어제, 그 사람.”

뭐가 들어간 것도 없는데 목이 막혔다.

공포심이, 불현듯 품어 버린 가정의 두려움이 그렇게 만들고 있었다.

“그 사람…… 죽었어요?”

한정식 포장 용기를 먹기 편한 식으로 정리해 주던 윤서원이 멈칫했다. 그가 수그리고 있던 상체를 들며 희우를 똑바로 마주해 왔다.

그녀가 일컫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윤서원은 금세 파악했다. 어제 서 대표와 만남을 가진 브로커 최 사장이었다.

희우를 차까지 데려다준 뒤 룸으로 돌아온 윤서원에게 서수혁은 한 가지 지시를 내렸다.

‘서원아. 가위 좀 가져다줄래?’

되도록 잘 드는 걸로.

그렇게 말하는 대표님의 눈동자에는 광기인지 안광인지 모를 윤기가 번들번들 흐르고 있었다. 커다란 손에는 두개골이 함몰되어 찌그러진 최 사장의 대가리가 바람 빠진 공처럼 쥐어져 있었다.

지시대로 윤서원이 잘 갈린 날의 가위를 가져다 바쳤을 때, 서수혁은 ‘으어, 으어어…….’ 하며 맥도 못 추는 최 사장의 턱주가리를 거머쥐어 입을 벌리게 한 뒤에 화상을 입고 구석에 숨어 있던 혀를 콱 끄집어냈다.

제대로 갈무리도 하지 못하는 혓바닥 아래로 침이 더럽게 질질 샜다. 잠시 후 그 위를 타고 흐른 건 클럽 복도 전체를 공포에 떨게 만들 법한 외마디 비명이었다.

윤서원은 룸 한편에 서서 상사가 감히 제 등을 쳐 먹으려고 한 머저리의 혓바닥을 싹둑 잘라 내는 집행을 묵묵히 보았다. 쑤걱, 쑤거억, 쓰거억. 다섯 번, 혹은 그 이상의 가위질 소리가 울린 뒤 뭉툭하게 잘린 살덩이가 윤서원의 발치로 뒹구르르 굴러왔다. 시뻘건 피를 사방으로 흩뿌리는 최 사장의 혓바닥이었다.

신체 부위는 완전히 절단이 되고도 최소 30초 동안은 신경 감각이 살아 있다고 한다. 그 증거처럼 혓바닥은 스스로가 본체에서 떨어져 나온지도 모르고 아주 역동적으로 팔딱거렸다.

그간 서 대표의 뒤를 따라다니며 역한 건 적잖게 봤다고 생각했는데, 뭍으로 끌려 나온 물고기처럼 구는 살덩이의 모습에 비위가 여지없이 상했다.

그 비린 기억을 익숙하게 삼키며 윤서원이 답했다.

“아니.”

틀린 답은 아니었다.

목숨만을 기준으로 따져 묻는다면 최 사장은 일단 살아는 있었다.

하지만 어제 이전과 같은 삶을 영위할 수 있느냐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역시, 이런 자세한 속사정까지 털어놓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한 건 제 대답을 듣자마자 희우가 내보인 표정 때문이었다.

희미하게 이는 기류 속에 깃든 건 분명 안도였다.

이 바닥에 처음 들어왔을 때가 떠오른다.

정확히는, 오직 기업의 이익만을 위하여 타인의 멱을 따야 한다는 사실에 자괴감을 느끼고 번번이 주저하던 희본의 모습이.

역시 그래서일까.

눈을 떼지 못하겠는 건.

아니면 일상처럼 녹아든 이 위험한 핏빛 세상에서 좀체 느끼기 힘든 순수함을 마주했기 때문일까. 동굴 속에만 갇혀 살다가 햇빛 한 줌에 드러나는 허연 벌판을 맞닥뜨린 것처럼.

정의할 수 없었다.

윤서원은 괜히 제 가슴 부근을 쓱 매만졌다. 무언가에 짓눌리는 것처럼 맘 한구석이 물큰거렸다.

* * *

그 후 집으로 돌아가서는 전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이 이어졌다. 세상을 잠기게 할 기세로 쏟아지던 폭우는 새벽이 되어 그쳤으며, 그날부로 작금까지 하늘은 아주 쨍쨍하게 빛살을 내뿜었다.

한참 주 실장이 차려 주는 식사에 임할 때였다.

잘 집어지지 않는 검은콩을 집으려고 애를 쓰던 도중, 초인종이 울렸다.

희우의 눈이 절로 동그래졌다.

오늘 누군가가 방문할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오늘은 일주일에 두 번 있는 귀 치료 날이었기에.

하지만 시간이 너무 일렀다. 보통 4시쯤 찾아오는데 지금은 1시도 되지 않은 시각이었다. 얼을 타는 희우와 달리 주 실장은 진작 알고 있던 것처럼 덤덤히 현관 쪽으로 향했다.

혹시 또 나갈 일이 있는 건가, 희우는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그 침묵을 깨고 등장한 건 윤서원이었다.

그는 밥을 먹고 있는 희우와 눈을 맞추는 행동으로 인사를 건네고는 뒤를 따르는 이에게 무어라 지시했다.

그런 윤서원의 뒤로 먹색 슈트를 입은 남자가 네모진 무언가를 분주한 걸음으로 옮겼다. 남자가 반복적으로 왔다 갔다 한 방은 바로 희우가 처음 이 집에 왔을 때 머물렀던 게스트룸이었다.

본래 저기서 지냈으나 서수혁과 몸을 섞기 시작한 뒤로, 그가 더 이상 밤중에 돌아가는 걸 허락하지 않아 그대로 잠이 들어 버리게 된 뒤로는 그리 걸음할 일이 없던 곳이었다.

“희우야. 밥 다 먹었으면 이리로 와 볼래?”

문이 반쯤 열린 방 안에서 무언가를 확인하던 윤서원이 잠시 후 나와 말했다. 마침 배도 부른 참이라 희우는 얼른 스툴에서 내려와 그의 곁으로 쪼르르 다가갔다.

다가온 윤서원의 눈길이 희우의 뺨 부근을 은밀하게 스쳤다. 연고를 틈틈이 발라 준 덕택에 딱지는 사라지고 멍도 많이 빠진 뺨은 이전과 흡사한 모양새로 돌아와 있었다. 그걸 확인하고서야 윤서원은 눈길을 돌렸다.

“이게 뭐예요?”

희우가 얼떨떨하게 물었다.

아까부터 복도를 타고 숱하게 옮겨지던 것들은 전부 벨벳의 천에 가려져 있었다. 그것이 방에 들어오며 탈피라도 했는지 모조리 까발려진 채였다.

죄다 그림이었다.

이런 방이 아니라 호화로운 갤러리 곳곳에 걸려 있는 게 어울릴 법한.

“그림을 왜 여기에…….”

문가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던 윤서원은 희우의 시선을 따라가듯 널찍한 방을 쭉 둘러보았다. 그러며 그제 서수혁의 집무실에서 있었던 일을 복기했다.

서수혁은 클럽에서의 일이 있자마자 이전 만남에서 최 사장이 제게 건네주었던 그림 한 점을 전문가에게로 보냈다. 그리하여 조사해 본 결과 그것 역시 가품이었다.

‘역시 아가리 더럽게 터는 것들은 한 번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니까. 혀를 도려내 버리길 잘했네. 그딴 식으로 이빨이나 까는 데에 쓰일 혀라면 뽑아 버리는 편이 낫지.’

자칫하면 크게 골치가 아파질 뻔했다. 아직 본격적인 거래 물품으로 쓰이지 않아 다른 쪽으로 흘러들어 가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혹 기름칠을 목적으로 보내 주었다가 이와 관련하여 뒤탈이 생겼다면 번거롭고 귀찮은 일을 피할 수 없었을 거다.

‘믿겨지니, 서원아?’

‘예?’

‘아기가 나한테 몇억을 벌어다 준 셈이잖아.’

그렇게 말하는 서수혁의 동공은 색택으로 반질거리고 있었다. 예사로운 것에서 흥미로운 점을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오늘 집으로 배달이 된 건 서수혁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미술품이었다.

이 안에는 최 사장이 보내 준 품목이나 그의 소개를 통하여 세탁용으로 마련한 용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서수혁의 용건은 간단했다. 이 중에도 혹시나 가품이 있는지 살펴보라는 거였다.

윤서원에게서 그 얘기를 전해 듣자마자 희우의 안색이 흐려졌다. 서둘러 치켜든 손을 허겁지겁 내저었다.

“그때는, 그땐 운이 좋았을 뿐이에요. 마침 직전에 갤러리에 들러서 원품을 봐서 알아챈 거지…….”

알아챈 것도 100% 확신하여 던진 게 아니었다.

그때도 그러지 않았는가. 가품 ‘같다고’. 그 후 서수혁은 최 사장의 태도를 통하여 그게 참인지 거짓인지를 구별해 냈다. 그러니까 오직 희우의 의심으로 판별된 일이 아니었다는 거다.

그런 마음으로 다급히 변명했으나 윤서원은 웃으며 어깨를 으쓱이고 말 뿐이었다. 내게 그렇게 말해도 변하는 사실은 없을 거라는 무언의 주장 같았다.

그 말대로일 거다. 서수혁, 그 남자의 지시라는데 아랫사람인 윤서원이 감히 어떻게 끼어들겠는가.

희우는 막막한 눈으로 사방을 장식한 그림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윤서원은 그런 희우에게 가만한 눈길을 던졌다.

서수혁의 의도는 오히려 윤서원이 잘 알고 있었다. 제 상사는 이런 시험을 하는 걸 무척이나 좋아했다. 이는 그가 지니고 있는 이상형과 관련이 있었다. 단지 이성적 취향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 범인류적으로 따져 보았을 때 말이다.

서수혁은 쓸모있는 사람에게 유난히 강한 호감을 느꼈다.

달리 말하자면 제값 하는 인물, 제구실은 하는 사람들 말이다.

물론 이건 희우에게 바랄 만한 게 아니었다. 애당초 그는 희우에게 어떤 기대도 없었을 것이다. 인질로서 잡아 두고 어쩌다 보니 떡정이 맞아서 잠자리도 자주 갖는 듯하나, 명확히 구분 지어 보자면 이익을 바라거나 효율을 따져 들 만한 관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충동처럼 강렬하고 농후한 흥미를 느꼈을 수도.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쓰임을 입증한 희우의 존재 가치를.

본인의 입으로 직접 일컫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그녀 덕분에 몇억을 지키게 된 셈 아니냐고.

윤서원은 조용히 눈썹을 더듬었다. 골이 묵직하게 당겨 왔다. 상사의 이런 태도가 과연 희우에게 득이 될지 실이 될지 판별할 수가 없었다.

따지고 보면 인질과 인질범의 관계였다.

희우는 그의 곁에 아득바득 남기 위해 제 능력을 인정받을 필요도 없었다. 굳이 쓰임을 입증할 이유가 없는데도 이런 걸 시험해 보는 거라면, 서 대표의 속에서 발아한 흥미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건데…….

이게 과연 좋은 신호인가.

아니, 아무리 봐도…….

“지금 당장 알아내라는 건 아니야. 대표님도 뭐, 영 뜻밖의 수확이라 이왕 맡겨 보시는 것 같으니까 너무 부담 가지지는 말고 시간 날 때 한 번씩 보든가 해.”

그렇게 말하지만 부담을 가지지 않을 수가 있나.

희우는 저를 둘러싼 그림을 벨벳 천으로 다시 칭칭 감싸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렇게 윤서원이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안 박사가 집에 방문했다.

올 때마다 행하는 기초 검사를 진행한 뒤에 이명 빈도, 고통 정도 등을 체크한 안 박사가 물었다.

“그 외에 필요한 약은 없으신 거죠?”

아마도 그는 귀와 관련된 사항에 대해 물어본 것이리라.

약이라면 지금 먹는 걸로도 충분했다. 실제로 이명도 많이 잦아들었고 그에 동반되는 통증 역시 차차로 가라앉았다.

그럼에도 입을 뗄 수가 없었다.

다름이 아니라, 피임약이 불쑥 떠올라서였다.

서수혁과의 섹스가 지속되며 희우의 속에 씨앗처럼 움튼 불안은 조금씩 조금씩 몸집을 부풀렸다.

그는 매 정사 때마다 콘돔을 착용하지 않았고 당연한 것처럼 희우의 질 안에 파정액을 게워 냈다. 그와 관계를 가지고 일어난 다음 날이면 비부가 거미줄처럼 걸게 늘어진 백탁액 범벅으로 난리였다.

정사라는 건, 본질적으로 아기를 태에 품기 위하여 임하는 행위였다. 약을 복용해야지만이 희우의 자궁에 씨가 들어서는 일을 막을 수 있을 거다.

그러나 서수혁의 앞에서는 도무지 약을 운운할 수가 없었다.

이 피임약이 화제로 대두되었던 상황이 어떤 상황이었던가.

저를 납치한 이들 무리로부터 도망을 치려다가 잡혀 얼굴이 피로 벌거죽죽하게 젖을 만큼 구타를 당한 뒤, 서수혁의 서릿발 같은 눈길 아래에서 벗어나기 위해 던진 계책이 아니었던가.

그렇다 보니 혹여나 서수혁을 자극하는 뭔가가 될까 봐 전전긍긍하며 말도 꺼내지를 못했다.

늘 주저하다가 섹스가 끝난 뒤에야 질벽에 축축이 스미는 정액을 아득바득 긁어내지만 그런 건 하등 쓸모없는 짓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피임은 조금도 되고 있지 않았다.

“따로 필요한 게 있으신가요?”

“아, 아뇨. 아닙니다…….”

희우는 도리질을 했다.

사실 주 실장에게 이미 살짝 운을 띄워 본 적이 있었다. 그때 면구스러운 마음에 차마 얼굴도 들지 못했다.

피임약을 운운하는 것 자체가 서수혁과 섹스를 한다는 걸 광고하는 꼴 아닌가. 남녀 간의 은밀한 속사정을 타인에게 밝히는 걸 처음 겪어 보는 희우는 귀와 턱 사이가 저리고 손끝 발끝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아침마다 서수혁의 침실에서 일어나는 저를 알면서, 못 들을 소리를 들은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키우던 주 실장의 행동 변화가 그녀를 조금 더 창피하게 만들었다.

곧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대표님께 말씀드려 볼게요.’

그리고 끝이었다.

피임약이 제 손에 오는 일은 없었다. 그게 서수혁의 뜻이라는 거다.

안 박사나 주 실장이나 똑같은 서수혁의 사람이었다. 그들에게 은밀하게 흘려보낸 제 말은 반드시 서수혁의 귀로 들어간다고 봐도 무방했다.

이미 한 번 그런 식으로 묵살을 당해서인지 안 박사에게는 차마 뻔뻔히 약을 운운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그는 여자도 아닌 남자였다.

뒤늦게 후회가 피어올랐다.

정오가 되었을 즈음 집에 들렀던 윤서원이 그 요인이었다. 그가 왔을 때 슬쩍 물어보기라도 할걸. 지난날, 제 얼굴에 든 뺨을 보며 굳이 서수혁의 행동을 감싸 줄 필요 없다고 하던 목소리는 이견을 보탤 필요 없이 저를 두둔하는 쪽에 가까웠다. 윤서원은 확실히 제 오빠와 같은 면이 있었다.

오빠를 상기하니 가슴이 더 답답해졌다.

일이 대관절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는지 몰라도, 서수혁과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희우의 희망도 조금씩 빛이 바래며 끄트머리가 가루처럼 바스러졌다.

도망을 다니는 건지, 아니면 이런 제 상황을 모르는 건지, 그도 아니면 머릿속을 가장 암담케 했던 가정처럼 뻔히 이렇게 될 줄 알면서도 자신을 버린 건지.

뭐가 진실인지 모를 시궁창 같은 방치와 현실 앞에서 희우는 조금씩 체념을 배워 갔다.

그리고 이 상념의 끝에, 희우는 제게서 더는 빨아 먹을 단물이 없어 이 무리에게서 벗어나는 상상에 한 번씩 다다랐다.

자신이 인질이 된 건 오빠를 찾기 위해서였다. 고로 오빠를 찾지 못한다면 제 이용 가치는 0에 수렴하는 셈이었다. 그렇게 되면 나를 놓아줄지도 모르지.

만약 상상대로 그렇게 됐는데…… 임신이라도 한다면?

응당 끊어져야 할 관계가 씨라는 연결 고리로 칭칭 묶여 영영 벗어날 수 없게 된다면?

사고 회로는 언제나 그 구간에서 끽, 소리를 내며 멈추었다.

서서히 버릇이 드는 체념과 더불어 이 이상을 상상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서투른 회피와 방어기제의 발현이었다.

안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 똑바로 차리고 대비를 해야 한다는 걸.

하지만 지금 이 형편,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대비가 있기는 한가? 서수혁의 선에서 막힌 일을 자신이 대관절 어떻게 행할 수가 있느냐는 말이다.

무력한 걸 알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그건 이제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새장 속 같은 서수혁의 권역으로 들어온 이후부터 자신은 무력하지 않았던 순간이 없었다.

“그럼 치료 시작할까요?”

처지를 새삼스럽게 깨닫던 중 안 박사의 제안이 멍해진 뇌리를 두드렸다.

희우는 빛이 반쯤 꺼진 눈으로 바닥을 더듬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와 같이 치료를 마치자마자 습관처럼 잠이 쏟아져 내렸다. 안 박사가 떠나기 전에 주는 약은 너무 독해서 멀쩡했던 정신도 금세 비몽사몽으로 만들었다.

책장에서 뽑아 온 책 한 권을 무릎에 올려 둔 채 읽는 둥 마는 둥 하던 희우의 자세가 조금씩 흐트러졌다. 그걸 발견한 주 실장이 들어가 편히 자기를 권유했다. 그러며 이끈 곳은 희우가 쓰던 방이 아닌 서수혁의 침실 방향이었다.

원래도 그러했지만 이제는 여러 점의 그림까지 놓이게 되어 발 디딜 틈이 없는 방으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설령 어떻게 침대에 눕는다고 한들 그 방에서 편히 잠을 이룰 수 있을 리 없었다. 클럽 룸에서 겪었던 일을 악몽으로 꾸며 깨어나지나 않으면 다행일 테니까.

희우는 순순히 서수혁의 침실로 향했다.

이른 아침 같은 상태로 블라인드가 쳐진 침실은 아늑한 조도를 연출했다.

설마 이 방에서 느껴 보리라고는 생각 못 했던 편안함이 발치로 밀려왔다. 물론 그건 심신을 나른하게 늘어뜨리고 신경을 멋대로 조작하는 약의 영향이 크다고 보는 게 옳지만 말이다.

베개에 푹 파묻혀 단숨에 잠 속으로 빠져들었던 희우가 깬 건 몇 시간 후, 깜깜한 밤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별안간 턱을 쥐는 손길이 단잠을 방해했다.

“……어.”

“뭐 하니?”

설핏 깨어난 걸 확인한 서수혁이 턱을 놓아주었다. 희우는 뻑뻑한 눈가를 문지르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팔을 축 늘어뜨렸다. 자다 막 일어나서 그런지 아직 꿈속을 헤매는 것처럼 현실이 몽롱했다.

“상태가 왜 이래.”

분명히 깨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잠깐 한눈을 판 사이 금세 병든 닭의 몰골로 돌아와 골골대고 있었다. 그걸 보고 기가 차 말하자 희우가 베개에 얼굴을 파묻으며 무어라 웅얼거렸다. 졸리다고 하는 것 같았다.

그제야 서수혁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탄성을 내뱉었다.

“안 박사 오는 날이 오늘이었나?”

시간 한번 빠르다고 잇따라 중얼거린 그가 차고 있던 시계를 풀었다.

그사이 희우는 이미 단잠 속으로 꾸물꾸물 기어들어 가고 있었다. 그걸 보는 서수혁의 입매에 눈치채지 못한 미소가 은근하게 걸렸다.

이제 이런 상태도 조금쯤 눈에 익은 바였다.

제정신일 때는 저만 앞에 두면 멧짐승을 만난 병아리처럼 벌벌 떨기 바쁜 주제에, 약만 들어가면 완전히 경계심을 풀어 헤치고서 호랑이의 우리에 잘도 대자로 뻗는 토끼처럼 맹랑하게도 굴었다. 약이 어찌나 독한지 깨어나면 본인이 이런다는 걸 제대로 기억도 못 하는 눈치였다.

셔츠 위에 걸친 베스트를 벗으며 서수혁은 희우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내리감긴 눈꺼풀 아래, 예쁜 모양으로 솟아오른 콧대와 들숨 날숨을 따라 오물거리는 입술이 보인다.

며칠 전에 발린 립스틱이 지워진 입술은 그래도 색을 들인 양 붉은 편이었다. 그 안으로 살짝살짝 교태를 부리듯이 보이는 살덩이는 더했다.

서수혁은 어느새 상체를 굽혀 그 살덩이를 아예 끄집어낼 기세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심코 돌아가려는 고개를, 아까처럼 턱을 거머쥐어 돌아가지 못하게 제지했다.

그러자 희우가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졸리다는 투정을 내뱉을 것처럼 움직거리는 입술을 보다가 슬그머니 맞대어 보자 금세 소리가 목구멍 안쪽으로 먹혀 들어갔다. 그 탓에 의미 없이 휘적거려진 혓바닥이 서수혁의 입술을 가볍게 핥았다.

그게 미미하기만 하던 충동에 별안간의 불을 질렀다.

서수혁은 그대로 시트를 짚어 침대 위로, 희우의 몸 위로 올라탔다. 그녀는 저를 삼킬 듯한 시커먼 그림자가 지는 것도 모르고 새근거렸다.

그는 자는 사람이라고 봐주지 않고 무자비하게 혀를 쑤셔 박았다.

혓몸으로 아예 기도를 틀어막을 기세로 저 끝까지 밀어 넣었다가 연하고 보들보들하게 좁아지는 구간을 주름 펴듯이 핥았다. 샅샅이 문대는 혀 놀림을 따라 끈적하게 고인 타액이 희우의 목구멍 안쪽까지 흘러 들어갔다.

“읏, 흐, 흠…… 응.”

입 안쪽의 연약한 점막이 공격을 당하자 희우가 미간을 조금 더 세게 찌푸리며 고개를 저으려 했다. 그걸 못 하도록 서수혁은 아예 뒤통수를 거머쥐고서 꾸물대는 살덩이를 맛봤다.

잠이 덜 깨 마찬가지로 벙하게 구는 혀 첨단을 잘라 낼 것처럼 꽉 짓씹어 주자 과즙 같은 묽은 액이 터졌다. 단지 희우의 침이라는 걸 알면서도 기꺼이 목 뒤로 받아 마시고는, 더 없나 좁은 입 안을 구석구석 헤집어 보게 된다.

살아오며 서수혁은 여자와 입을 맞대 본 기억이 몇 없었다.

분명한 건 섹스를 한 횟수보다도 더 적을 거라는 것.

그는 키스라는 행위가 대체 왜 존재하는지 알 수 없었다. 호흡 길인 입을 질식할 기세로 틀어막고 혀를 얼기설기 뒤얽는 게 그렇게나 기분이 좋은가.

섹스 도중 동반되는 행위로 몇 번 해 보기는 했으나 그런 감상을 낳을 만큼 애틋하면서도 황홀한 체감 따위 겪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지금 자는 이의 혀를 도둑처럼 짓찧고 빨아 재끼며 뜻밖에도 그 의미를 알 듯도 한 기분에 휩싸였다.

심심할 때마다 여기에 혀를 담아 내부를 처덕처덕 돌려 빨아도 괜찮을 것 같다는 별 기도 안 차는 생각이 고개를 들 정도였다.

그렇게 희우의 혓바닥을 제 입 안에 넣고 굴리는 알사탕처럼 쩍, 쩌억 소리가 날 만치 맛보던 차였다.

어느 정도 반응이 있던 희우의 입 안이 완전히 맥을 잃었다. 한참 요란하게 뭉개던 입술을 떼어 내자 격한 키스의 증거로 침 타래가 길게도 늘어졌다. 그는 그것을 혀로 감아 핥고는 이내 희우의 얼굴을 살폈다.

“자는 거니, 뭐니.”

“으…… 졸려서…….”

답을 하는 걸 보니 감각이 깨어 있기는 한데 아주 둔한 수준인 모양이었다. 하기야 그랬으면 이렇게 순순히 입을 열지도 않았겠지. 저 느끼는 게 싫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밀쳐 내기 바쁜 그 섬약한 정신머리 상태로 잘도 버티겠다.

“난 졸리지 않은데.”

유치원생이나 할 법한 유치한 대꾸를 건네자 희우가 무겁게 가라앉은 눈꺼풀을 어물어물 들어 올렸다. 약 기운에 초점마저 흐려진 저 눈이, 저 자그마한 머리통 속에 무슨 생각이 뭉게뭉게 떠 있을지 궁금해졌다.

잠시 후 희우가 반응을 보였다.

굼뜬 속도로 손을 들어 올렸다. 쳐 낼 수도 있었으나 무얼 할까 하는 호기심이 조금 더 강하게 들어 가만 지켜보자니 곧 그 손바닥이 제 허리를 감은 서수혁의 팔뚝 위에 얹혔다.

이내 탁, 탁…….

처음에는 뭔 짓거리인가 했다.

치우라는 건가, 감히?

가당치도 않다는 마음이 불쑥 들었으나 반복되는 손길하에 그 생각은 차츰차츰 옅어졌다.

토닥, 토닥.

넓게 편 손바닥으로 뜸을 들이듯이 느린 박자로 두드리는 그건 부모가 아기를 재울 때에나 하는 유치한 손짓이었다.

그제야 이게 무슨 의도인지를 어렴풋이 짐작했다. 본인과는 달리 잠이 오지 않는다는 제 투정에 대한 반응이었다.

잠기로 아른아른하게 풀어진 희우의 이성은 지금 스스로가 무슨 행동을 벌이고 있는지 실감조차 못 했다. 눈도 뜨지 못한 상태로 손만 움직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독한 약 기운은 인간의 의지로 떨쳐 낼 수 있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걸 알기 때문에 서수혁은 화도 나지 않았다. 얘가 지금 제정신으로 이러는 게 아니라는 걸 모르지 않으니까. 좀 웃기기도 했다. 내쉬는 숨에 어처구니없는 실소만 번번이 딸려 나왔다.

딱히 제지를 하지 않자 희우는 계속 그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정신 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얼른 바지를 벗기고 아래나 질펀하게 빨아 저번처럼 씹질맛 좀 들게 하려던 계획이 이 무구한 행동 앞에서 모래성처럼 열없이 무너져 내렸다.

누군가가 제 몸에 별다른 꿍꿍이나 속셈 없이 손을 대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는, 썩 감회가 새로운 느낌도 밀려들었다.

서수혁은 금방이라도 발라 먹을 것처럼 꽈악 쥐고 있던 희우의 엉덩이를 놓아주었다. 그러고는 되레 그 몸을 제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희우는 두 몸이 딱 달라붙자 불편했는지 작게 바르작거렸다.

“계속해 봐.”

그 김에 손이 멈추자 서수혁이 탁한 목소리로 종용했다. 과연 어디까지 하는지 보자는 식으로 말했으나, 어둡고 조용한 방 가운데에 퍼지는 음성은 파동 하나 일지 않는 수면처럼 잠잠해서 그리 위협스럽지 않았다.

희우의 손이 잠결에 움직인 것도 그래서일 거다.

그 안에 실린 기색이 평소의 남자답지 않게 누그러진 느낌이 묻어나서.

음침한 의도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토닥임이 재차 팔뚝에 내려앉았다.

코앞으로 다가온 희우의 목과 가슴 사이에 빤한 눈길을 주던 서수혁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깊어지는 밤이 오늘따라 유난히 고요했다.

* * *

하루의 시작에서 대표의 기분이 좋다는 걸 가장 먼저 눈치챈 건 윤서원이었다.

이른 아침, 주차장으로 마중을 나온 윤서원은 뒷좌석에 올라탄 서수혁에게 도착 전 미리 살펴보아야 할 서류를 건네었다. 그러며 핸들을 돌려 일강 본사로 향하던 중이었다.

처음 들었을 때는 자신이 실수로 라디오라도 틀어 놓았나 했다. 하지만 힐끗 확인한 카 오디오는 꺼져 있었다.

그럼 대체 이 흥얼거리는 콧노래가 어디서…….

조금만 주의를 집중하자마자 알 수 있었다. 믿을 수 없게도 그건 뒷좌석에서부터 넘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아는 대표님이 이 꼭두새벽부터 허밍을 부른다는 게 몇 번 곱씹어도 믿기지가 않아서 자꾸만 뒤를 비추는 룸미러를 힐끔거렸다.

“왜.”

“예?”

“왜 자꾸 뭐 마려운 개새끼처럼 눈을 굴리냐고.”

윤서원이 뒤를 살피건 말건 서류를 읽는 데에 집중하던 서수혁이 핀잔의 느낌으로 입을 열었다.

분명히 서류에 정신이 팔려 앞 좌석에 신경을 흘리는 느낌이 조금도 없었는데. 가끔 보면 대표님은 일반 사람보다 눈이 두 개쯤 더 달린 귀신 같았다.

때마침 차가 신호에 걸려 멈춰 섰다.

구르던 바퀴가 멈추자 서수혁이 내리깔고 있던 시선을 들었다. 룸미러를 통하여 윤서원을 또렷이 직시해 온다.

그 눈을 마주하며 윤서원이 아침 햇살 같은 미소를 머금었다.

“아,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가 해서 말입니다.”

“왜?”

“콧노래 부르시던데요.”

그 말에 서수혁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가?”

“네.”

흐음. 숨을 들이마신 그가 시트에 몸을 더 기대며 서류 종이를 팔락거렸다.

“그럼 기분이 좋은가 보지.”

“…….”

“잠을 잘 자고 일어났거든.”

그러더니 무슨 생각을 했는지 피식이며 입가를 휜다. 윤서원은 그 얼굴에 몇 초간 더 시선을 두었다가 신호가 바뀐 정면의 도로로 눈을 돌렸다.

물론 서수혁의 그런 산뜻한 기류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본사에 도착하여 그의 결재를 기다리고 있는 사안들이 그 요인이었다. 양지뿐 아니라 음지까지 거미줄처럼 고루고루 관여되어 있는 사업들과 그로부터 딸려 오는 지저분한 먼지 같은 후탈에 눈살이 찌푸려지기도 여러 번.

그렇게 아주 잠깐 온화의 결을 탔던 서 대표의 기분은 그 행적을 순식간에 감춰 버리고 평상시와 같은 미온으로 돌아왔다.

“참, 대표님. 지 의원이 이번 분기 경매 참석 여부에 대해 물어 왔습니다.”

앞선 보고 사항에 대한 대표의 답을 메모하던 윤서원이 한쪽에 정리된 일정표를 확인하다가 말했다.

“경매 날짜가 언제였지?”

“다음 주입니다.”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어느덧 강렬한 저녁놀이 지기 시작한 창 앞에서 골프채를 만지작거리던 서수혁이 심상한 태세로 읊조렸다.

경매란 불법을 합법으로 탈바꿈하기 위한 수단으로, 일강과 같은 공룡 기업으로부터 뒷돈을 받아 처먹는 정계 의원들과 고위 공무원, 그 밖의 검경 관계자들이 빠져나갈 명목을 만들어 주는 자리였다.

일종의 사경매로, 주체는 오랜 기간 이 자리를 요긴하게 써먹어 온 지 의원의 숨겨진 페이퍼 컴퍼니였다.

경매 물품은 다양하게 등장하였다.

차후 경제 자유 구역 개발 사업이 확정되어 값이 천정부지로 솟을 게 예견되는 부지부터, 수도권 광역 급행 열차(GTX) 노선과 같은 알짜배기 정보가 은은히 돌기 시작하는 역세권 주변 빌딩, 그 밖에 외국에서 들여오는 이름난 예술품 등등.

물론 이는 모두 보이지 않는 수면 밑에서 다 손을 잡고 타협을 가진 뒤 수면 바깥에서 벌이는, 일명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다.

이미 경매 전에 합의를 거친 상황에서 경매를 통하여 나름 합법적으로 그 지분을 가지게 되는 것이었다. 그처럼 이 경매는 거대한 경제 세탁의 장이라고 보면 되었다.

“준비해.”

태블릿 PC 화면을 옆으로 넘기며 확인하던 윤서원이 멈칫했다.

이번에 일강 측에서 경매에 내놓기로 약속된 물품은 없었다. 서수혁에 한해서는 따로 준비할 것이 없다는 의미였다. 잠깐의 고민 끝에 ‘준비’가 어떤 대상을 일컫는지 간파한 윤서원은 찰나 말을 잃었다.

얼른 흐트러진 정신줄을 바로 잡고서 물었다.

“설마…… 그 자리에 데려갈 생각이십니까?”

“응.”

“대표님, 그 애를 데려가기에는…….”

짧은 고민을 끝내고 금테가 얇게 둘러진 골프채 그립을 쥐던 서수혁이 윤서원을 돌아보았다.

고작 시선을 한 줌 흘려보내는 것만으로도 범상치 않은 위압감을 떨치는 게 바로 대표였다. 그런 사람을 언제나 가장 곁에서 보필하는 윤서원이 지금 보내는 시선의 의미를 모를 리 없었다.

“죄송합니다.”

잠깐 뭐에 쓰인 것처럼 선을 넘었다는 걸 깨달은 윤서원이 뒤로 한 발 물러나며 허리를 꾸벅 숙였다.

하지만 이건 아니라고, 본능이 차마 무시하지 못하고 발산하는 내면의 소리가 속을 아플 정도로 꼬집었다.

“그새 친해졌니?”

그런 윤서원을 바라보는 서수혁의 눈빛이 오묘해졌다.

제가 내리는 지시에는 이제껏 토 한번 다는 법이 없던 윤서원이었다. 물론 조심스레 제 의견을 피력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다만 그건 모두 서수혁의 안위가 엮여있을 때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경우가 아니었다.

윤서원이 누구를 걱정하여 제게 이렇게 대놓고 반기를 들어 오는지 알아서, 그 낯선 태도 속에서 배어 나오는 의미심장한 뉘앙스가 신경 가닥을 기타 줄 튕기듯이 언짢게 만들었다.

“아닙니다. 차질 없이 준비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서수혁이 이만 나가 보겠다는 의도로 인사를 전하는 윤서원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언뜻 가벼운 손짓이지만 그에 담긴 의미는 그렇지 못했다.

집무실을 빠져나온 윤서원은 문을 등 뒤에 둔 상태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걸로도 답답한 마음이 가시지가 않아 정돈해 둔 머리칼을 마구 털어 댔다.

‘그때는, 그땐 운이 좋았을 뿐이에요. 마침 직전에 갤러리에 들러서 원품을 봐서 알아챈 거지…….’

이런 와중에도 어쩔 줄 몰라 하며 눈알만 부산스레 굴리는 앳된 얼굴이 잔상처럼 가시지를 않았다.

여전히 수런거리는 맘 안쪽의 군소리가 입 안을 쓰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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