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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 6장. 볼모의 경계 (2) (7/17)

6장. 볼모의 경계 (2)

늦가을의 비가 기승이었다.

피멍이 든 것처럼 시퍼런 하늘이 심상치가 않더니 아침부터 물줄기를 잔뜩 퍼부어 댔다. 세상을 아예 잠기게 만들 기세로.

타닥, 타닥.

창틀에 부딪히는 소리마저도 유난이었다.

희우는 그 소리에 느지막이 잠에서 깨어났다.

일어나고서도 머리 한편이 짓눌린 것처럼 몽롱해 바로 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웠다.

이제는 이게 약 기운의 여파라는 걸 알았다.

일주일에 두 번 있는 안 박사의 치료로 지정된 요일 중 하나가 바로 어제였다. 난청을 잡기 위해 쓰이는 약의 성분이 워낙 독하다 보니 치료 다음 날까지도 영향이 갔다.

희우는 몇 번 뒤척이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벌써 세 번이나 이런 식으로 깨어났지만 일어나기보다는 잠을 이어 가길 택했다. 오늘은 특히나 비가 내리고 있어서인지 창으로 품어지는 세상 조도가 칙칙했고, 그래서 더욱 심신이 나른했다.

“…….”

그런 정신을 퍼뜩 꼬집은 건 협탁 위에 놓인 물건이었다.

금빛 커프스 링크.

제 방에는 있을 리가 없는 물건이 의식 위로 벼락처럼 꽂혔다.

희우는 두 팔로 침대를 짚고서 벌떡 일어났다. 보이지 않는 식은땀이 흘렀다. 이제는 곳곳이 눈에 익어서 굳이 애를 써서 둘러볼 필요조차 없었다. 또 서수혁의 침실에서 잠이 든 거였다.

어젯밤에는 반드시 돌아가려고 했는데. 희우는 이마를 감싸 쥔 채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약물 치료를 받기 시작한 지 이제 2주째였다.

아무래도 부상이 있다는 이유에서인지 희우의 삶은 이전보다 조금 숨통이 트이는 형식으로 갈음되었다. 서수혁의 서슬 퍼런 감시와 살 떨리는 케어가 조금 덜해졌다는 거다.

무엇보다 식사 부분이 그러했다.

더 이상 매 식사 때마다 정해진 열량을 채우는 것에 압박받지 않았다. 정확히는 약 기운에 입맛이 없다는 핑계를 대면 주 실장은 굳이 끼니를 꾸역꾸역 먹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는 서수혁의 분신 같은 존재였다. 그 융통성은 곧 서수혁이 발휘하는 거나 진배없었다.

하지만 남자는 오직 그 부분에서만 타협점을 두었다.

언제나와 같이 희우를 안는 일에는 주저하지 않았다.

언젠가 한번, 기절하듯 잠이 드는 바람에 다음 날 아침 고스란히 그의 침실에서 일어난 이후로 서수혁은 매번 희우를 정신 놓을 정도로 몰아붙였다. 까무룩 눈감지 않고는 버틸 수 없는 난폭한 섹스가 밤마다 희우의 이성을 빠르게 매몰시켰다.

그래서인지 인제 이 낯선 침실에서 기상을 맞이하는 것도 그리 특별한 일이 되지는 않았다. 물론 여전히 깨달을 때마다 솜털이 곤두설 만큼 오싹하기는 했다. 이 방 주인이 살을 맞대고 지낸대도 친숙보다는 두려움이 한결같이 앞서는 상대이니만큼.

그래도 오늘처럼, 이미 남자가 출근을 한 뒤라는 걸 알면 바짝 조였던 심장의 둘레가 풀어지며 차차로 안정을 되찾았다.

그래도 정신은 이미 손찌검을 당한 양 번쩍 든 뒤라서 희우는 침대 아래로 두 발을 내렸다.

“아으.”

두 다리를 가지런히 모으자 살이 맞물린 음부가 얼얼하게 쓰렸다. 섹스에 동반되는 통증마저도 이제는 어느 정도 적응이 된 참이라 희우는 잠시 앉아 호흡을 가다듬다가 익숙하게 옷가지를 찾아 헤맸다.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발견할 수가 없어서 하는 수 없이 한쪽에 어설프게 걸려 있던 가운을 쥐었다.

똑똑.

막 팔을 꿰어 입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어깨가 삐죽 솟아올랐다가 꺼지는 사이 문이 열렸다.

“희우 님, 일어나셨어요?”

주 실장이었다.

그녀가 집에 있다는 건 벌써 정오를 넘긴 시각이라는 의미였다.

오늘은 진짜 늦잠을 잤구나, 생각하며 희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으로 주 실장이 저를 찾으러 자연스레 이 방에 왔다는 사실이 멋쩍었다.

“식사하셔야죠.”

얼른 가운 끈을 동여맨 희우가 그녀의 뒤를 따랐다.

“멍은 이제 많이 가라앉으셨네요.”

치료가 진행되고 있기에 예전처럼 타인의 육성이 다가옴에 고통이 동반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멀리서 전해 듣는 것처럼 모호한 거리감을 체감하게 했다.

“네에.”

스툴에 기대어 앉은 희우의 앞으로 여러 그릇들이 놓였다.

포크를 쥔 희우는 상큼한 유자 드레싱 소스가 뿌려진 샐러드를 콕 찍어 입으로 밀어 넣으며 멍을 때렸다. 잠에서 깬 게 기적이라고 생각될 만큼 오감이 먹먹하고 둔했다.

“식사하시고 바로 준비하셔야 할 것 같아요.”

그래서 물을 따라 주는 주 실장의 전언을 단번에 이해할 수 없었다.

“……준비요? 무슨 준비요?”

“외출 준비요.”

예쁘게 웃으며 건네는 그녀의 말이 소리가 소실된 것처럼 현실성 없게 다가왔다.

탁. 희우 앞에 물을 따른 잔을 놓아 준 그녀가 간단한 설명을 첨언했다.

“대표님께 연락 오셨어요. 곧 데리러 오시겠답니다.”

하지만 간결한 만큼 곳곳이 듬성듬성 빈 것처럼 빈약해서 희우는 여전히 이게 제게 전달되는 당부가 맞나 의심스러웠다.

하여 굼뜨게 굴고 있자니 주 실장이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고 에둘러 표하듯 그릇을 눈짓했다.

희우는 반사적으로 포크를 놀리며 물었다.

“어딜 가는 건가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딱 잘라 말하는 대답에 의문을 더 가져다 붙일 수도 없었다. 기실 철면피를 깔고 꼬치꼬치 캐물어 본다고 한들 주 실장은 답해 주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알고 있든 알고 있지 않든.

애초에 희우에게 전달될 내용이 아니었기에 그 부분이 빠진 채로 넘어온 걸 테니까.

“지금 몇 시예요?”

“3시입니다.”

그래서 정신을 차릴 겸 물어보았다가 깜짝 놀랐다. 정오를 넘겼을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설마 그렇게나 늘어져 있었던 줄은 몰랐다.

희우는 입 안으로 밀어 넣은 하얀 두부 조각을 오물오물 씹으며 잠기운이 덜 빠진 눈가를 비볐다.

배가 부담스럽지 않게 찰 만큼만 음식물을 밀어 넣은 뒤 바로 욕실로 직행했다. 씻고 나오자 주 실장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외출복을 내밀었다. 희우가 집에서 챙겨 온, 간단히 입을 수 있는 셔츠 원피스였다.

“엘리베이터 타고 주차장으로 내려가시면 됩니다. 사람이 이미 와 있을 거예요.”

현관으로 희우를 이끌고 간 주 실장이 닫힌 문을 열어 주며 말했다.

희우는 쩍 벌어진 현관과 그 바깥의 경계를 보며 또다시 넋을 잃었다.

이게, 이렇게 쉽게 열릴 일인가?

그간 감금 아닌 감금을 당하며 희우는 단 한 번도 현관 근처로 향하지 않았다. 현관을 보면 나가고 싶은 마음이 들 테고, 그런 홧김 같은 욕심에 저지른 짓이 부른 참사를 너무나 선명히 기억하기 때문이었다.

지금 자신의 처지로서는 도망이 능사가 아니라는 걸 알아서 그건 애당초 택할 수 없는 선택지였다. 주 실장의 선선한 태도는 그 의견에 힘을 보탰다.

알고 있는 거다.

이렇게 직접 문을 열어 주고 바깥과 통하게 해 준다고 해도 희우는 이제 도망칠 수 없다는 걸.

지난날 도끼를 따라 이동한 루트 그대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초고속으로 도착한 철제 상자 안에 몸을 싣고서 금세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다. 사람이 와 있을 거라는 전언대로 이미 웬 남자가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김상필이라고 합니다.”

도끼와는 사뭇 다른 인상의 사내였다.

물론 바위보다 더 튼튼해 보이는 육체와 더불어 그 주위를 아우르는 기류가 예사롭지 않게 험궂다 보니 서수혁의 아래에 속한 사람이라는 건 눈치로나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도끼보다 진중했고 과묵했다. 매사 건들건들거리던 도끼에게서 기대할 수 없는 예의범절 역시 깊숙이 배어 있었다.

이전에 벌어졌던 일 때문에 더 이상 도끼가 제 앞에 나타날 일이 없을 거라고는 짐작했지만, 이렇게 대놓고 다른 사람이 오니 그것조차 어색하고 어려웠다. 내심 기저에 미약한 불안감이 깔리기도 했다. 이제 희우는 새 사람의 등장이 무섭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희우가 그러거나 말거나 김상필은 제 할 일을 완수해 내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이처럼 그녀를 주차된 차로 이끌었다. 희우를 뒷좌석에 태운 뒤 운전석에 올라탄 김상필은 주저 없이 시동을 걸고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주 실장에게도 캐묻지 못한 것을 저 석벽 같은 남자에게 물어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희우는 행선지가 어디인지도 모르는 차 안에서 창밖만 내다보았다.

지상으로 미끈히 빠져나온 차를 감싸는 유리창이 사나운 물기로 젖어 들었다. 오래간만에 바깥으로 나온 날에 하필이면 비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시야가 흐릿흐릿 뭉개져 풍경을 제대로 볼 수 없다는 것조차 희우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고급스러운 셀렉트 숍이었다. 서수혁의 지시로 오게 되었으나, 그의 이미지와는 수억 광년이 떨어진 듯한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산뜻한 장소였다.

“어서 오세요. 서 대표님께 미리 연락받았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길을 잃은 아이처럼 어쩔 줄을 몰라 하는 희우를 구제해 준 건 미리 마중을 나와 있던 송 사장이었다.

그녀가 사장임을 알아볼 수 있었던 건 왼쪽 가슴에 달린 명찰 덕분이었다. 서수혁이 직접 방문한 것도 아닌데 한달음에 나온 걸 보면 여기서도 그 남자가 끼치는 영향력이 상당하다는 증거였다.

희우는 숍 안에서도 미아가 된 어린양처럼 눈만 이리저리 굴리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끌려다녔다.

한쪽에서 여러 벌의 옷이 걸린 행거를 끌고 오는 이가 있는가 하면, 또 다른 한쪽에서는 분내가 날 것만 같은 3단 대형 메이크업 박스가 대령되었다.

이 옷으로 입었다가 사장의 지시하에 다른 걸로 환복하고, 그 차림에 어울리는 구두와 장신구를 착용해 보기를 한참 반복한 뒤에 희우는 제대로 거울을 볼 수 있었다.

어깨가 트이고 몸의 선이 강조되게끔 착 달라붙은 블랙 원피스였다. 평소 신을 일이 없던 높은 구두를 착용한 탓에 한 걸음을 내디디기만 해도 갓 걸음마를 뗀 사슴 새끼처럼 온몸이 불안하게 휘청거렸다.

이들이 진정 무서운 건 희우를 아름답게 탈바꿈하면서도 그 어떤 멘트를 던지지 않았다는 거였다. 의사소통은 오직 직원들 사이에서만 이루어졌다. 뭐가 더 마음에 드는지, 어떤 게 더 예뻐 보이는지 등 희우에게는 일절 의견을 구하지 않았다.

이들은 단지 희우를 인형 놀이에 쓰이는 인형처럼 대하고 있었다.

그 결과, 치장이 진행되는 동안 한쪽에 서서 적절히 간섭을 하던 송 사장은 희우가 가벼운 색조 화장을 마쳤을 즈음에는 제법 만족스러운 얼굴로 미소를 띠었다.

마치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여 윗선에 칭찬을 들을 걸 기대하는 이의 검측측한 웃음처럼 다가와서 희우는 괜스레 시선을 피했다.

다른 것보다도 구두가 굉장히 불편했다. 하지만 벗고 싶다고 해도 들어주지 않을 분위기였다.

결국 희우는 위태로운 걸음새로 숍을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숍의 정문에 대기하고 있는 차는 여기까지 타고 온 차와 달랐다.

우산을 들어 주는 김상필의 도움으로 뒷좌석에 들어서던 희우는 이미 올라타 있는 서수혁을 발견하고 주춤거렸다.

살펴보던 서류를 탁 소리가 나게 덮은 그는 엉거주춤 서 있는 희우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게 안 타고 뭐 하냐는 무언의 재촉임을 알아챈 희우는 얼른 매무새를 정돈하며 옆자리에 올랐다.

바라는 대로 차에 탔는데도 서수혁은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오른쪽 눈썹을 찡긋 곤두세운 그가 희우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아주 느린 속도로 훑었다.

긴장으로 뺨이 굳었다. 피부를 얇게 포 뜨는 듯한 스캔을 마친 서수혁이 입을 열었다.

“상필아.”

“예, 대표님.”

“가서 굽 낮은 구두 좀 받아 올래? 애 발목 나가겠다.”

운전석에 올라타 있던 김상필이 곧바로 차에서 내렸다. 바깥은 여전히 폭우로 한바탕 난리였다. 그 곤란하고 축축한 환경으로 김상필은 우산 하나 들지 않은 채 뛰어들었다.

숍 안으로 들어섰던 김상필은 금세 차로 돌아왔다. 뒤늦게 무언가 생각난 건지 서수혁은 창문을 살짝 열고 그를 기다리다가, 다가온 김상필에게 별도의 무언가를 또 지시했다.

처음부터 한 번에 말하면 될 것을, 똥개 훈련시키는 것도 아니고 두 번 왔다 갔다 하게 만드는 태도에 지칠 법도 한데 김상필은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평온했다. 철저히 서수혁의 지시에만 따르는 로봇 같았다. 도끼가 보이던 것과는 조금 다른 유의 충성심이었다.

이를테면 더 진중하고 더 무겁고 그래서 더 방심할 틈을 주지 않는 그런 기백의.

그렇게 김상필이 완전히 차로 돌아왔을 때 그의 손에는 두 개의 물건이 들려 있었다.

하나는 구두가 든 상자였고, 하나는 자그마한 립스틱이었다.

“신어.”

그가 사이에 내려놓은 구두 상자를 눈짓했다. 덮개를 여니 지금 신고 있는 것보다 훨씬 낮은 굽의 구두가 담겨 있었다. 익숙지 않은 굽을 신고 비틀대다가 넘어지는 꼴은 저 역시 사양하고 싶었기에 희우는 얼른 구두를 갈아 신었다.

위협적일 만큼 높은 힐을 상자에 넣으며 고개를 들던 희우는 그의 손에 들린 립스틱을 발견했다. 길쭉한 뚜껑이 벗겨지고 희우의 창백한 피부와 잘 어울리는 선홍빛의 립스틱이 매끈히 모습을 드러냈다.

“입 다물어야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턱이 붙잡힌 뒤였다.

서수혁은 색소를 단단히 굳혀 만든 막대기를 희우의 입술 위에 가져다 대어 발라 주었다. 그러는 동안 희우는 목 끝에 간당간당 걸린 숨결 한 자락 토해 내지 못했다.

그에게 훅 숙여진 상체의 각도가 어색했으나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입꼬리까지 유려하게 그은 립스틱을 떼어 낸 서수혁이 제법 흡족스러운 미소를 매달았다.

지금 막 개봉을 한 걸로 보이는 립스틱은 그 한 번의 쓰임이 끝나자마자 바로 창밖으로 던져졌다. 서수혁의 태도가 워낙 거침이 없어서 딱히 아깝다는 아쉬움조차 들지 않았다.

그저, 본래 그렇게 될 운명이었던 물품의 최후를 보는 것처럼.

“출발해.”

희우가 벗어 둔 구두가 담긴 상자를 잇따라 조수석으로 내던진 서수혁이 한쪽에 내려 둔 서류 더미를 거머쥐며 지시했다.

차가 도로변에 합류했다.

희우는 긴장한 내색을 숨기지 못하며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우중충한 하늘 때문인지 창이 어둑했다. 필요 이상으로 명도가 낮아서 옆자리에 앉은 남자까지 거울처럼 비칠 정도였다.

서수혁은 이런 이동 중에도 잠깐의 쉴 새가 없는 것처럼 서류를 읽어내렸다. 언뜻 책을 읽는 듯하지만 큰 감흥을 기대하기 힘든 눈동자는 지극히 사무적이었다.

그러던 중, 서수혁이 대뜸 고개를 들었다.

다른 데를 쳐다본 게 아니었다.

희우가 바라보고 있는 창문에 정확히 시선을 던졌다. 꼭 그녀가 창문이라는 매개를 통하여 저를 훔쳐보는 걸 진작 알고 있었다고 알려 주듯이.

희우는 화들짝 놀라 얼른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다. 차마 옆을 돌아보지 못하고 부자연스러울 만큼 앞만 바라보는데 서늘한 무언가가 뒷덜미를 쓸었다.

보지 않아도 느껴지는 것.

서수혁의 손가락이었다.

“안 아프니?”

“…….”

“담 걸리겠는데.”

이 커다란 손에 폭행을 당해 본 경험이 있어서인지 피부를 뱀처럼 휘감은 손가락이 금방이라도 목뼈를 또각 분지를 것만 같았다.

물론 그건 무시무시한 상상에 그칠 뿐이었다. 서수혁은 위력을 가할 생각이 없다는 것처럼 가만가만 그 부위를 어루만지기만 했으니.

그러던 손이 턱선을 느긋하게 훑으며 기습적으로 귓바퀴에 닿았다. 전혀 공격적인 기색을 느낄 수 없는 손길임에도 희우는 목을 자라처럼 움츠렸다. 타인보다 체온이 2도 정도 낮은 듯 차끈한 손길에 귓가 부근의 솜털이 삐죽 섰다.

서수혁은 연한 뼈로 이루어진 둘레를 훑고는 그나마 살집이 찬 귓불을 손가락 사이에 끼워 문질렀다.

꼭 애무 같은 손길이었으나 안면에 밴 기류가 굉장히 지루한 듯이 무료하여 그냥 답지 않은 손장난을 치는 것 같기도 했다.

“이렇게 건들면 아픈가?”

“아, 아니요…….”

주변만 배회하던 손가락이 부지불식간 귓구멍 속으로 파고들었다.

막대기처럼 길고 단단한 것이 끝도 없이 밀려 들어오는 동시에 희우가 이를 옹송그렸다. 간지러우면서도 아릿아릿한 통증이 퍼진 까닭이었다. 그 예민한 반응을 두 눈으로 목도하면서도 서수혁은 손가락을 빼내지 않았다.

외려 작은 굴 같은 안쪽을 빙글, 빙글 굴려 대며 정체 모를 짓을 해 댔다.

차마 아프다는 말도 못 하고 떨고만 있기를 한참, 서수혁은 이전보다 감흥이 어린 얼굴로 손가락을 빼내었다.

“참, 작고 약하네.”

갓 태어난 짐승 새끼도 이러지는 않겠어.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흘리듯이 떠내려 보낸 음성이 잘 들리지 않아서 희우는 애써 버티던 보람도 없이 무심결에 남자 쪽을 돌아보았다.

진작 서류로 돌아갔을 거라고 생각한 서수혁의 눈은 여전히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굳이 고개를 돌려 바라본 이유를 뭐라도 대야 할 분위기라 희우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저, 혹시…… 지금 어딜 가는 건지 여쭤 봐도 될까요?”

엉겁결에 터뜨렸지만 한편으로 꺼지지 않는 의문이기도 했다. 도살장으로 인도되는 소처럼 순진무구하게 끌려가고 싶지는 않아 켜켜이 고인 두려움을 어렵사리 내디뎠다.

하지만 때로 귀신보다 눈치가 빠른 남자 앞에서 그 어두운 감정을 완벽히 숨기기란 무리였는지, 서수혁이 피식거렸다.

“누가 보면 산 채로 잡아먹으러 가는 줄 알겠네.”

“…….”

“너 좋아할 만한 곳 가니까 긴장 풀어.”

내가 좋아할 만한 곳?

대답이 나온 것도 뜻밖인데 그 대답 자체도 의외였다. 더 자세히 캐물어 보고 싶었지만 순순히 대답해 줄 눈치가 아니었다. 그가 다시 서류로 관심을 돌렸기 때문이다.

하는 수 없이 희우도 입을 다물었다.

자연히 엄습하는 침묵이 공기를 쥐어짰다.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만이 유일한 위로가 되어 주는 시간이었다.

그런 그녀의 입이 헤벌어진 건 쉼 없이 달리던 차가 멈춘 시점이었다.

전용 주차장으로 들어서는 입구에서 은색으로 도금된 커다란 현판을 스치듯이 보았을 때에도 설마 했으나 의심은 빗나가지 않았다.

도착지는 서울 중앙에 자리한 어느 사설 갤러리였다. 관련 일을 전공하고 있었기에 희우도 언뜻 들어 본 곳이었다.

‘이런 곳에 나를 왜……?’

의문은 종식될 기미 없이 짙어지기만 했다. 서수혁의 뒤를 따라 차에서 내리자 그늘진 주차장 특유의 서늘함이 피부로 들러붙었다.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걸까, 중앙 전시장으로 들어서며 잠시간 고민해 보았다. 하지만 걱정이 무색하게 서수혁은 정말 희우를 동행한 채 얌전히 관람에 임했다.

전체적으로 화이트 톤에 감각적인 조형물과 구조로 깔끔하고 우아한 느낌을 배가한 내부에는 여러 작품이 걸려 있었다.

3층 규모의 중앙 전시장에는 아주 적은 수의 사람만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빨간 선을 긋듯 철저히 사적인 영역을 침범하지 않은 채 그림을 관망했다.

가끔씩 서수혁을 발견하고, 잇따라 그 옆에 선 희우를 발견하게 되면 놀란 눈치를 표하는 작자들도 몇 있었으나 할 말 가득한 얼굴로 용케 침묵을 지킨 채 곁을 스쳐 지나만 갔다.

본래 전시장에서는 조용히 해야 함을 알지만 조성된 침묵이 원체 기괴하다 보니 희우는 좀처럼 맘 편히 있지를 못했다. 애당초 이런 장소를 서수혁과 오게 된 것부터가 색다른 난관이었다.

어쨌든 거의 둘만이 보내는 시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녔다. 희우의 멀쩡한 귓가에는 교차하는 그와 자신의 걸음 소리만 울렸다.

서수혁은 그림을 보고 있다기보다는 가벼운 산보를 하는 느낌으로 갤러리 내부를 활보했다. 필요한 일이라 행하고 있지만 실상 크게 관심을 가지지는 않는다는 듯이.

그런 그가 어느 그림 앞에서 멈춰 섰다.

덩달아 걸음을 세운 희우는 그의 무채색 눈동자가 향하는 끝을 돌아보았다. 희우의 키보다 커 보이는 대형 그림이 걸려 있었다. 하단부에 작게 박힌 작품 설명이 보였다.

아니, 설명이랄 것도 없었다.

연(姸)이라고 쓰인 게 다였으니까.

희우도 익히 들어 본 이름이었다. 얼굴 없는 화가로 유명세를 타 지금은 그림 한 점 구하려거든 족히 기억 원은 든다는, 그래서 이른바 수집 욕구를 부추긴다는 화가의 작품이었다.

가까이서 보니 그림이 떨치는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서수혁이 지나쳤으면 희우 역시 긴장하여 그대로 도외시했을 테지만 그가 멈춰 서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그녀 역시 그림을 꼼꼼히 눈에 담았다.

빈틈없는 수채 기법으로 채워진 그림에서 희우는 강렬히 풍겨 오는 그리움을 절감했다.

엄마가 그토록이나 사랑한 그림이 바로 수채화였기 때문이다. 작업을 할 때에 입던 작업용 앞치마나 형형색색으로 칸을 채우던 수채화 조색판, 팔뚝이나 뺨에 얼룩처럼 묻어난 물감의 잔해, 그리고 그런 편안한 모습으로 저를 돌아보는 엄마의 미소.

오빠까지, 셋이 함께 지내 온 별장에서 매일같이 보던 아름답고 안온한 풍경. 엄마는 언제나 그 반짝거리는 장면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희본과 희우에게 그림이란, 수채화란 곧 엄마로 각인된 지 오래였다.

잘 잊고 지내는 듯 보이지만, 시시때때로 기억의 무덤을 맹렬하게 가르며 파고 올라오는 그리움 앞에서 가슴 안쪽이 한없이 시려졌다.

그리움은 아픈 감각이 아니었다.

그러나 작금 들어 반사적으로 가족을 떠올리게 되는 두렵고도 안타까운 상황이 잦아지면서, 바다 바위를 두드려 부식시키는 파도처럼 깊고 넓게 사무치는 식으로 변질되었다.

엄마에 이어 오빠까지 곁에서 사라진 희우에게 가족을 향한 애틋한 마음은 그처럼 쓰리게 돌변했다. 까딱했다가는 눈물이 날 것만 같아서 희우는 고개를 떨구었다. 눈가에 바늘이 수십 개 박힌 것처럼 따끔거렸다.

그렇게 갤러리를 나섰을 때만 해도 희우는 안심했다. 오늘 외출의 일정은 이걸로 끝인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며 한편으로 소름이 돋았다.

저도 모르게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제집도 아닌데. 다른 사람도 아닌 서수혁의 집인데. 어떻게 보면 갇혀 있는 처지인데.

기실 외부로 나오자마자 겪게 된 긴장과 시름이 그 부정적인 의미마저 퇴색시킨 격이었다. 야외에 나와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심장 근육이 내떨리는 조마조마함은 배가되었다.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우려심 탓이었다.

그녀의 현실을 끔찍한 악몽으로 만든 것도, 간만에 나온 밖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던가.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암울한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두 사람을 실은 차는 또다시 어느 건물 앞에서 멈추었다. 도심의 건물답게 높이 펼쳐져 있지만 창문이나 간판 하나 발견할 수 없어서 당최 용도를 알 수 없는 장소였다. 그래서 범접하기 어려운 느낌이 물씬 풍겼다.

차에서 내리자 깔끔한 보타이를 맨 남자가 나타나 정중히 인사를 건네었다. 물론 희우가 아닌 서수혁을 향해서. 이후 그는 자연스레 앞장서며 안내를 자처했다.

희우는 서수혁의 뒤만 밟으며 걸음을 옮겼다. 사각형 건물은 탑처럼 위로 뻗어져 있으나 두 사람 앞으로 펼쳐진 건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동굴 속을 연상시킬 만큼 조명도가 약해졌다. 차차 가늘어지는 빛줄기를 따라 그림자는 한계를 모르고 길쭉하게 늘어졌다.

부단히도 낯설어 절로 경계심이 깃드는 환경인지라 목각 인형처럼 삐걱대기 바쁜 희우와 달리 서수혁은 집에 있을 때와 별반 다를 바 없는 태세로 걸음을 내디뎠다. 행여나 이 외지 같은 곳에서 길을 잃을까 두려워진 희우는 이 중에 그나마 친숙한 그의 뒤를 얼른 쫓았다.

마침내 계단 끄트머리에 도달하자마자 일렬로 쭉 뻗은 복도가 나타났다. 그 양옆으로 수두룩하게 자리한 문들과 피멍처럼 파랗고 벌건 조명들이 지리분산하게 뒤섞이는 분위기.

아무래도 여긴 주로 비밀스러운 만남을 가지는 회원제 클럽 같았다. 아무에게나 선뜻 방문을 허락해 주지 않는, 입구에서부터 엿보인 은밀하고도 삼엄한 보안으로 추측하자면 말이다.

직원은 미로처럼 펼쳐지는 복도를 잘도 헤쳐 나가 아주 으슥한 구석에 자리한 룸까지 멈추지 않고 걸었다.

이윽고 도착한 곳의 문을 열어 주며 깍듯이 허리를 숙였다.

들어가고 싶지 않았으나 서수혁은 그 룸의 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유로이 발을 들인 지 오래였다. 덜떨어진 이처럼 우두커니 서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기에 희우는 엉겁결에 그 뒤를 따랐다.

내부가 워낙 캄캄해서 바로 알아채지 못했는데 웬 사내가 이미 소파 한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금반지를 낀 양손에 여자를 한 명씩 끼고서, 개중 왼쪽 여자의 풍만한 젖가슴에 변태같이 얼굴을 비비적거리던 남자가 인기척을 느끼곤 뜸지근히 고개를 들었다. 술을 몇 잔 걸쳤는지 이쪽을 향하는 눈매가 이미 게게 풀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거목처럼 등장한 서수혁이 따끔한 몰매라도 되는 양 냉큼 초점을 잡고는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고, 대표님! 오셨습니까!”

두툼히 나온 뱃살을 접어 가며 깍듯한 90도로 인사를 건넨 남자가 팔을 쭉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서수혁은 태연히 그 인사를 씹고서 상석으로 향했다. 철면피를 넘어서는 당당한 반응에 그의 뒤에 서 있던 희우가 다 눈치가 보일 지경이었다. 반면 그런 괄시가 익숙한지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민 손을 거두어들였다.

“어서 앉으시죠.”

기분이 상하기는커녕, 미처 제때 맡지 못한 안내 역할을 뒤늦게서야 자처하는 모습은 분명한 저자세였다.

“물품은 보고 오셨습니까?”

“그래.”

서수혁은 제 곁으로 다가와 앉을지 말지 고민하는 희우의 팔을 잡아당겼다. 힐처럼 높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쨌든 구두를 신고 있었기에 희우는 휘청이다가 그의 곁에 착석할 수밖에 없었다.

“어떠셨습니까?”

“내가 뭐 그런 걸 볼 줄 아는 눈인가. 최 사장이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대화에 임하고는 있지만 서수혁은 기본적으로 열의가 없는 태도를 선보이고 있었다. 거만히 꼬아 앉은 다리와 편안하게 기댄 자세, 입은 열고 있으나 눈은 상대방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 모습 등이 기꺼이 그 증거들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최 사장은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로 느물거리며 잘만 웃었다. 마치 까마득한 상관이 어려운 자리에 걸음해 준 양 서수혁이 이 자리에 납셔 준 것만으로도 감개무량한 눈치였다.

최 사장의 시선은 멀리서 보기에도 탁했다. 천장 조명 빛에 반사되는 동공이 유분을 머금은 것처럼 영 껄끄럽게 빛났다. 그 거북한 눈길이 서수혁의 옆자리에 끌려오다시피 자리한 희우에게 가 닿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근데 옆에는…… 우리 아이가 아닌데.”

“개인적으로 데려온 애야.”

최 사장이 늙은 여우처럼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희우는 그게 이 어둑한 환경에서 제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려는 행동임을 눈치채고 엉덩이를 작게 들썩거렸다.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것처럼 오장육부가 불편해졌다.

곧 최 사장이 히죽 웃었다. 손가락에 끼워진 것과 같은 색의 금니가 두툼한 입술 아래에서 발광했다.

“히야. 우리 서 대표님, 주위 놈들 면상 관리 철저한 건 진작 알았지만 수준 너무 고급지시다. 어디서 이렇게 좆물 잘 빼게 생긴 애를 구하셨대……? 이거야 원.”

최 사장이 손을 들었다. 그것이 허공을 거칠게 가로질렀을 때는 이미 찰싹, 찰싹! 거리는 마찰음이 시끄럽게 번진 후였다.

“꺅!”

“사장니임!”

그가 양옆에 앉은 여자들의 젖통을 때려서 난 소음이었다. 그 천박하고 무람없는 행동에 놀란 건 희우였다. 외려 앉아 있다가 졸지에 유방을 얻어맞은 여자들은 찌를 듯한 교성만 내지를 뿐, 최 사장의 이런 행동에 인이 박인 것처럼 엉덩이 한 번 달싹이지 않았다.

“우리 애들 상판이 상대적으로 너무 후져 보이잖아.”

그러며 희우의 이목구비를 다시금 훑는 최 사장의 눈길은 너무 노골적이라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기름기가 질척하게 섞여 든 시선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한들 순수하게 해석할 수 없었다.

최 사장의 감탄인지, 질 낮은 칭찬인지 모를 말에도 서수혁은 웃는 듯 마는 듯 미온적인 반응만 선보였다.

자세를 조금 뒤로 젖힌 그가 짙은 흑발이 드리운 이마를 매만졌다.

언뜻 겉도는 것처럼 보여도 서수혁은 이미 이 분위기에 동화 중이었다. 애당초 최 사장이 눈치를 살살 보며 그의 비위를 맞추려고 부단히 애를 쓰고 있으니 지금 이 분위기는 서수혁이 주도하고 있는 것이라 보아도 무방했다.

그 사이에서 희우는 저 혼자만 적응하지 못하고 별세계에 동떨어진 것 같은 심정으로 옷자락을 매만졌다.

그러던 중, 문이 조용히 열렸다.

주변 모든 상황에 촉각을 기울이고 있던 희우는 당연히 그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챘다. 조금 전 서수혁과 자신을 이 룸까지 안내해 준 직원이 바퀴 달린 트롤리를 끌고 안으로 들어왔다.

정갈하고 사무적인 손길 아래 텅 비어 있던 테이블 위로 각진 술병과 온 더 록이 어울릴 듯한 크리스털 잔, 그리고 화려하게 꾸며진 과일 안줏거리들이 나열되었다.

최 사장이 새로이 씨불이기 시작한 내용에 잠잠히 귀만 대 주던 서수혁은 멀리 떨어진 과일 접시를 끌고 왔다. 지금까지 보아 온 바로는, 잔을 쥐는 것보다 그걸 으스러뜨려 산산조각 내는 게 더 잘 어울리는 남자의 손가락이 접시 위를 배회했다.

머지않아 멈춘 건 싱그럽게 익은 녹빛의 청포도 위에서였다.

서수혁은 잔가지로 촘촘히 얽힌 열매를 가벼이 땄다. 뭐가 뭔지 모르겠는 상황에서 무심코 그가 하는 것에 주의를 두던 희우는 입술을 톡 찧는 감촉에 화들짝 떨었다. 겸사겸사 휘둥그레진 눈이 놀라움의 척도가 되어 주었다.

차갑고 말랑한 것.

서수혁이 둥그런 포도알로 희우의 아랫입술을 툭툭 두드렸다. 최 사장을 향하고 있던 눈동자가 어느새 제 면전을 똑바로 겨냥하고 있었다.

이런 침침한 환경에서는 주위에 동화되듯 한층 더 시커메지는 동공은 흡사 그을음 같았다. 분명 아주 까만데, 스치는 것만으로도 화상을 입을 것만 같은.

그게 무언의 위협이 되어서 희우는 스르르 입술을 벌렸다.

더듬더듬 벌어지는 잇새로 상큼한 향이 밀려들었다. 서수혁과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는 향이었다. 입 안으로 포도알 하나가 착실히 굴러 들어왔다. 오물거리며 씹는데 좌불안석 같은 자리 때문일까 코로 먹는지 입으로 먹는지 모를 기분이었다.

그래도 일단 남자는 제가 주는 걸 받아먹는 게 썩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소리 없이 작게 웃는 걸 보면 말이다.

희우는 입술을 꾹 다물고 오물거렸다.

이로 누를수록 터져 나오는 청량한 과즙이 위축된 심신을 달래던 차, 포도알 하나가 더 다가왔다.

희우는 이번 역시 눈치를 보며 살금살금 입을 벌렸다. 연둣빛 알갱이가 제자리를 찾듯이 안으로 쏙 밀려 들어왔다.

그걸 빠짐없이 눈에 담으며 서수혁이 이번에는 소리를 내어 웃었다. 물론 그래 봐야 아주 미약하게 피식거리는, 바람 빠지는 식에 가까웠지만.

“맛있니?”

그렇게 말하며 서수혁은 소심히 움직이는 희우의 잇새를 꽤나 지그시 응시했다. 그에 소름이 오싹, 돋아나는 건 조금 전 최 사장이 제 상판을 훑어볼 때보다 더 위험스러운 기색이 묻어나서였다.

다른 이라면 몰라도 희우는 지금 저 형형한 눈발 위에 돋아나는 기류가 무엇인지 분간할 수 있었다.

저를 깔아뭉갠 채 분주히 허리를 흔들던 육욕의 눈이었다.

“맛있냐고.”

묻는데 왜 대답을 안 하냐는 조용한 꾸짖음처럼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희우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장 아차, 했다. 고갯짓을 싫어하는 남자의 심기를 어지럽힐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치솟았다. 뒤늦게라도 제대로 된 답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으나 그가 소리를 내는 게 더 빨랐다.

“그래?”

이제 예의를 지적하는 건 관두기로 했는지 희우의 고갯짓을 적당한 대답으로 받아들인 그가 포도를 가득 문 입술을 쓰윽 쓸어 보더니 그 아래로 내려가 턱을 그러쥐었다.

과즙이 빠져나와 물렁해진 알을 씹기 바쁘던 희우의 입술이 멎었다.

서수혁은 희우가 삼킨 포도알에 혀가 녹을 정도로 단 꿀이 발렸다고 믿는 것처럼 뚫어질 기세로 응시했다.

응시하다가, 불시에 희우의 입을 벌리고서 제 혀를 그 사이로 밀어 넣었다.

기습 공격같이 벌어진 일이었다.

키스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입을 맞추려는 의도처럼 보이지가 않아서였다.

불도저처럼 거침없이 진입한 혓바닥은 새콤달콤한 과즙으로 얼룩진 점막을 여유롭게 쓸었다. 그리고 지금껏 희우가 조용히, 분주히 씹어 대던 과육을 그대로 앗아 갔다.

그렇기 때문에 키스라고 보기가 어려운 거다. 하지만 젖어 든 살덩이끼리 스친 내밀한 느낌은 도저히 그 일을 키스가 아닌 무언가로 받아들이기도 힘들게 만들었다.

키스 같은데 키스가 아니다.

남자가 언제나 잘도 일으키는 돌연하고도 아연한 감각이 이 마찰력 짙은 행위에서마저 유발되고 있었다. 벙벙히 눈을 두어 번 감았다가 떴을 때 저작 행위를 하며 과일을 씹는 주체는 서수혁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는 무감하게 하악을 샐그러뜨리며 희우의 입 안에서 단물이 진작 다 빠져나간 포도알을 씹었다. 단물은 다 사라지고 끝발처럼 신맛이 찍 배어 나왔는지 직후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린다.

공들여 파낸 조각처럼 준수한 미간에 힘이 들어가는 걸 보다가 이제야 그의 입가에 제 립스틱이 살짝 묻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쩔 줄 모르다가 그래도 언질은 줘야 할 것 같아서 소심하게 입을 열었다.

“저기요……. 저기.”

서수혁이 소리 없이 눈을 돌렸다. 희우는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애꿎은 입술만 벙긋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자기 입가를 가리켰다.

“여기, 립스틱 묻으셨는데…….”

별일도 아닌데 남자의 눈동자에 서린 무게감이 묵직해서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키게 된다.

그런 희우의 긴장을 진작에 꿰뚫은 것처럼 잠잠한 눈길을 던지던 서수혁이 애매하게 떠 있는 희우의 손을 거머쥐어 당겼다.

앗, 할 새도 없이 끌려간 손등이 그의 입가에 닿았다.

“여기?”

남자는 마치 희우의 손이 깨끗한 티슈라도 되는 것처럼 그녀가 가리킨 곳으로 추정되는 부근을 느리게 문질러 닦았다. 예기치 못한 접촉, 그리고 직후 이어지는 물색없는 행동에 놀란 희우는 호흡을 멈췄다.

그사이 서수혁의 입가에 묻어 있던 립스틱 자국은 하얀 손등 위로 지저분한 낙서를 그리며 확실히 지워졌다.

그가 손을 놓아주자마자 얼른 거두어들인 희우는 누가 알아보기라도 할까 두렵다는 듯 치맛자락에 손등을 문질렀다.

아연해진 마음을 따라 부산스레 뛰는 심박을 미처 가라앉지 못하고 있던 차였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웬 여자 하나가 나타났다.

아까 전 등장했던 직원처럼 깍듯한 자세지만, 홀복을 입어 가려진 부분보다 드러난 부분이 많은 야한 차림새로는 그저 아슬아슬한 유혹처럼 느껴지기만 했다.

“아이고, 우리 수아 왔네!”

여자를 향해 과도한 반색을 표한 최 사장이 이리로 오라는 듯이 손짓하며 서수혁을 힐끗거렸다. 누가 등장하건 간에 여전히 저와는 관계없는 일을 보듯 심드렁한 서수혁을 확인하자마자 최 사장이 넌지시 운을 띄웠다.

“기억 안 나시려나? 접때 서 대표님 자짓물 받다가 좋아 뒤진 애잖습니까.”

또각이는 구두 소리가 룸 내부를 울렸다. 꽤나 남사스러운 과거지사를 가감 없이 들추는 전언에도 서수혁의 태도에는 흠집 하나 없었다.

그는 여전히 고고하게 턱을 당긴 채로 다가오는 여자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잠시 후에는 남의 얘기를 거론한다 믿는 사람처럼 품을 뒤져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그걸 본 최 사장이 눈치 빠르게 지시했다.

“수아, 가만 서서 뭐 하니? 어여 가서 대표님 불 좀 붙여 드려라.”

수아라고 불린 여자가 테이블을 헤치고 서수혁의 발치로 다가와 자연스럽게 몸을 낮추었다. 그 태도는 자주 해 본 일인 것처럼 능숙했다.

그녀의 손에 들린 라이터 위에서 불길이 꽃처럼 화하게 피어났다. 서수혁은 불씨가 연초 끄트머리로 다가올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치이익.

불이 옮겨붙고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나기 시작할 즈음 그는 물고 있던 필터를 천천히 내렸다. 이제 겨우 타오르기 시작한 담뱃불은 바로 다음 순간, 모가지가 꺾인 것처럼 허무하게 꺼졌다.

서수혁이 재떨이에 지져 꺼서였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담배 한 개비를 더 꺼내 들었다. 이번엔 입에 물자마자 고개를 비튼다.

“불.”

부정할 수도 없이 희우에게로 꽂힌 지시였다.

희우는 당황하여 버벅거렸다. 그러자 서수혁이 제 재킷 안에 있던 지포 라이터를 건넸다.

한참 더듬거리던 손가락이 어렵사리 휠을 돌리자 따듯한 불씨가 여리지만 확고히 피어났다. 불도 참 본인같이 지핀다는 생각을 하며 서수혁은 담배 끝단을 그 광염 속에 뭉개고는 탁한 숨을 내쉬었다.

“저번에 몰래 약 처탈 때도 그러더니. 최 사장, 내 좆 제대로 서는지 검증 못 해서 안달 났어? 잘만 기능하니까 물품이나 가져와.”

토를 달 수조차 없는 싸늘한 일갈에 최 사장이 쩝,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는 머쓱하게 있는 수아에게 이만 나가라는 눈짓을 해 보였다.

그녀가 나가고 잠시 후 두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일정한 거리를 벌리고 선 두 인물 사이에는 네모나고 커다란 무언가가 들린 채였다. 고급스러운 예술품을 취급하듯 백색 벨벳 천이 그 위에 둘러져 있었다.

길쭉한 테이블 앞에 자리를 잡고 서더니 둘 중 하나가 시야를 가리던 천을 조심스럽게 걷어 냈다.

거기엔 조금 전 희우가 갤러리에서 보고 온 그림이 있었다.

갤러리에 전시된 그림은 여러 장이지만 그게 어느 섹션, 어느 코너에 있는 건지 단번에 알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였다.

서수혁이 대뜸 걸음을 멈춰 서서 본, 그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볼우물이 생길 만치 힘껏 담배를 빤 서수혁이 눈동자를 기신기신 굴렸다. 중독성 강한 니코틴이 신경줄을 타고 흡수되니 찌뿌듯하게 굳어 있던 몸이 좀 풀리는 것 같았다.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걸어 내린 그가 옆자리를 힐끔 보았다.

순간 웃음을 흘릴 뻔했다.

‘색칠 놀이 하난 참 좋아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 상황이 주는 압박감을 이겨 내지 못해 그 자리에서 우글쭈글 말려들 기세로 있던 주제에, 눈앞에 그림 한 점이 나타나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 허리를 세우고서 신중한 눈길을 저 멀리 던지고 있었다.

예술가였다는 모친의 특성도 그렇고, 고고…… 뭐시기라고 하던 전공도 그렇고, 미적 영역 하나에는 나름대로 자부심 가질 만한 일가견이 있는 모양이었다.

손바닥 뒤집듯이 일어나는 그 간극이, 잿더미 속에서 꺼질 듯 말 듯 잔재하는 불씨 같은 호기심을 꽂아 넣었다.

오늘 희우를 집 밖으로 데리고 나온 이유는 하나였다.

입질을 위한 미끼.

장부가 사라진 지 벌써 두 달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정희본의 행방은 묘연했으며 장부는 어디에서도 까인 흔적이 포착되지 않았다.

두 달간 희우를 가두어 둔 것은 혹여나 자신이 대표로 속한 이 일강 내부에 간사한 쥐새끼가 숨어 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꼭꼭 숨겨 두었다고 한들 알량한 첩자가 섞여 있었다면 정희본 측으로 정보는 어떻게든 흘러들어 갔을 테니까.

두 달간 준열히 감시해 본 결과, 내부에서 찜찜한 기류는 발견할 수 없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첩자가 남아 있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일강의 입장에서 볼 때 이 모든 건 정희본의 단독 행동으로 추측할 수 있었다.

그러니 이제 그를 직접적으로 자극할 미끼가 필요했다. 서수혁의 경험으로 말하건대 남매가 가진 우애의 방향은 일방이 아닌 쌍방이었다. 정희본은 제 여동생을 틀림없이 아꼈다.

두 달.

무언가를 실행하고도 남았을 기간임에도 여태 감감무소식인 게 의문이었다.

정희본은 그걸 대체 어디에 써먹으려고 빼돌린 걸까?

오리무중인 그 의도를 짐작하기 위해 희우를 집 밖으로 끌어내는 수를 썼다.

오늘 두 사람의 동행에 관한 얘기가 말씨를 타고 이곳저곳으로 옮겨지고, 그게 뭘 하는지 당최 알 수가 없는 정희본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된다면, 폭풍전야처럼 소름 끼치도록 잔잔한 이 수면 위로 파동 하나라도 생기지 않을까.

단지 그를 의도한 동반이었을 뿐인데…….

서수혁은 뺨 안쪽으로 혀를 궁굴렸다.

매캐한 흡연 내로도 지워지지 않는 새콤한 맛이 표피에 찐득히도 남아 있었다.

스스로도 왜 갑자기 그런 행동을 했는지 모른다. 자신이 입에 밀어 넣는 거라면 뭐든 넙죽넙죽 받아먹을 듯한 그 태도가 시답잖은 흥미라도 유발한 건지.

그뿐인가?

룸 내부는 아까와 달라진 게 없는데도 지금, 그림을 향해 집중하고 있는 희우를 보다 보면 그녀의 주변이 약간 환해진 듯한 인상을 받았다. 자주 접해 보지 못한 그녀의 생기가, 그의 눈에 그런 식의 허황된 영향을 끼치는 것이었다.

“아유, 대표님. 섭섭하게 저희 사이에 뭘 확인까지…….”

최 사장은 이쯤이면 되지 않았냐며 허공에서 손을 내저었다. 서수혁 역시 금세 관심을 거두었다.

오늘 만남을 가진 최 사장은 브로커였다. 진흙탕처럼 지저분한 약 관리를 위하여 손을 빌리는 하청 업체 중개업자. 일강 측에서 물량을 조절하여 푸는 약의 유통을 맡는 사외 관계자라고 볼 수 있었다.

물론 완벽한 기업의 탈을 쓰는 데에 있어서 그러한 뒷일이 차후 발목을 잡는 부분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일강이 나서지 않아도 어차피 삼면이 바다인 이 한반도 땅으로 굴러들어 오는 약은 파다했다. 대한민국이 마약 청정국이라는 것도 다 옛말이 된 지 오래였다.

그러니 이 정도 몸집을 갖춘 무력 집단에서 나서서 유통을 거머쥐고 물량을 통제하거나 조절하지 않으면 결국은 사달이 나고도 남을 일이었다.

더러운 일이라고 마냥 피하다가 되레 꼴같잖은 일로 역풍을 맞느니 이쪽에서 흐름을 꽉 쥐고서 사정을 한 수 읽고 있는 편이 나은 건 당연지사였다. 부차적으로 딸려 오는 액수 역시 무시하기 어려운 자본력이 되기도 했고.

하지만 건실한 사업체 이미지를 고수하려는 일강이 대외적으로 나설 수는 없으니 브로커를 고용하여 대신 일을 처리하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최 사장은 때로 유통으로 마련한 거액을 그림 몇 점으로 퉁칠 때가 있었다.

대개 인간이 그러하듯 서수혁 역시 심미안을 지니고는 있으나 그렇다고 따로 예술품을 모을 정도로 미적 조예가 깊지는 않았다. 저건 단지 정계 인사들에게 뇌물로 바칠 때 사용하는, 돈을 세탁하는 용도였다.

지금껏 이런 은밀한 거래가 한두 번도 아니었기에 자리는 이렇게 마무리가 되리라 믿었다.

그렇기에 일상처럼 당연한 이 상황에 변수같이 발생한, 소매를 살포시 잡아당기는 힘에 속수무책으로 신경이 쏠렸다.

“……같아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

담배를 물고 있던 상태로 멈칫한 서수혁이 커다란 상체를 그녀 쪽으로 기울였다.

“응?”

힘이 풀린 나른한 음성으로 다시 말해 보라 채근하자, 희우는 반드시 그만 들어야 한다는 것처럼 개미만 하게 눌러 죽인 소리를 냈다.

“저거 가품, 같아요.”

“…….”

“아까 갤러리에서 본 거랑 다른 거 같은데…….”

서수혁이 소곤거리는 희우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혹 저와 눈이라도 마주칠까 무서운지 늘 데구루루 굴러다니기 바쁜 동공의 궤적이 지금은 절로 이목을 끌 만큼 차분하고 고요했다. 문득 떠오른 제 의심이 맞는지 아닌지를 분별해 내기 위해 이 어두칙칙한 내부에서도 투명한 안광을 드러내기를 서슴지 않았다.

빛이라고는 이미 다 꺼진 줄 알았던 눈동자가 세상 그 어떤 불순물도 섞이지 않은, 가장 순도 높은 보석처럼 반질대는 모습이 서수혁의 뒷덜미를 서늘하게 긁었다.

희우에게 딱 달라붙은 그 상태에서 서수혁이 고개만 삐딱하게 틀었다.

“저거 짜가야?”

“예?”

“가품이냐고.”

최 사장이 살집 찬 눈두덩이가 출렁일 정도로 부산스레 눈을 끔벅거렸다.

“아기가 가품이라는데?”

“그게 무슨…….”

최 사장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노발대발했다. 터질 듯이 익은 얼굴과 연신 삑사리를 내며 더듬더듬 흘러나오는 항변. 형편없이 갈라진 주변 공기가 그의 당혹스러움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서수혁은 꼬나물고 있던 담배를 손으로 옮긴 뒤에 몇 초간 그 모습을 더 지켜보다가 작게 일소했다.

눈앞의 인간이 여러 차례 보여 준 능구렁이 같던 면모를 안다. 그 기질을 알기에 뒤 구린 인간임을 알면서도 지금껏 손을 잡아 온 거고.

그러니 차라리 원래 알던 대로 반응을 했으면 모른다. 적당히 치고 빠지는 듯 스무드하게. 하나 익히 알던 면모를 한데 뭉쳐 어디 가져다 버리고는, 있는 대로 부산을 떨며 과민하게 구는 그 태도에서 답이 뻔하게 도출됐다.

그렇기에 차분히 스며 올라온 미소를 숨기지 않는 서수혁의 얼굴은 길고 흉악한 낫을 든 악귀를 연상시켰다. 적어도 제 말 한마디로 벌어진 상황을 숨죽인 채 지켜보던 희우의 눈에는 그렇게 비쳤다.

“최 사장아.”

서수혁이 담배를 쥔 채 소파에서 일어났다.

“일을 이상하게 하네?”

남자는 아직 별것 하지 않았는데 벌써 무슨 일을 육안으로 목격한 것처럼 희우의 심장이 욱씬 조여들었다.

서수혁의 한쪽 손이 최 사장의 턱주가리를 부서뜨릴 것처럼 움켜쥐었다. 크게 벌어진 치아 사이로, 글자가 곱게 새겨진 손가락이 기어들어 가 두려움에 말린 혓바닥을 끄집어냈다.

반사적으로 무릎을 움츠리는 순간이었다.

“아악!”

서수혁은 제가 피우고 있던 담배를 그 혀 위로 거침없이 지져 껐다.

조명 빛에 느글느글하게 번들대던 눈알이 고통을 드러내며 뒤집어질 것처럼 떨었다. 최 사장 곁을 지키던 여자들이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지르며 주춤주춤 물러나다가 앞다투어 룸을 뛰쳐나갔다.

서수혁이 놓아준 입을 부여잡은 최 사장이 배불뚝이 같은 복부를 반으로 접은 채 뭉그러진 비명을 질렀다.

서수혁은 불씨가 사그라든 꽁초를 내던져 버리고는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재떨이를 쥐었다. 길게 뻗어진 팔뚝이 처형 집행인의 그것처럼 허공을 가파르게 갈랐다.

퍽!

“이런 거, 딱 질색인데.”

퍽, 퍼억!

“윽, 억, 대, 대펴! 대ㅍ, 펴님……!”

“그래, 뭐. 저 짜가 넘겨서 몇억 정도 뒤로, 꿍치려는 의도는 알겠어. 어차피 이 바닥이 다 그렇게, 서로서로, 뒤통수쳐 가면서 입에 기름칠하는 바닥이니까. 근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대, 헉……! 악, 컥!”

“코앞에서 등쳐 먹으려는 건, 해도 해도 너무하지 않나?”

단단한 크리스털 재떨이가 최 사장의 머리통을 복날 개 잡듯 신명 나게 두드려 팼다. 손속에 어찌나 자비가 없는지 팔을 휘두르는 쪽인 서수혁의 호흡마저 성기게 끊겼다.

퍽, 퍼억!

잔혹하게 울리던 소리가 수 번 반복된 후에 벽을 타고 핏물이 촥 튀어 올랐다. 이 암흑 속에서도 눈이 아플 만큼 붉게 보이는 건 비말에 동반된 역겨운 비린내 때문이리라.

그 자리에 딱 맞게 고정되어 있던 넥타이를 잡아 빼던 서수혁이 일순 멈칫했다.

그가 조금 전까지 자신이 앉아 있던 자리를 쓰윽 돌아보았다.

둥글게 말린 채로 진동하는 어깨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다음에는 어딘가에 몸을 구겨 넣어 숨고 싶어 하는 달팽이처럼 옹송그려진 자세가, 그다음으로는 두 귀를 틀어막은 채로 파들파들 요동치는 창백한 손등을 보았다.

희우는 그 자리에서 금방이라도 훅 꺼질 것처럼 떨고 있었다.

그걸 눈에 담고 있자니, 재떨이를 쥐고 있던 서수혁의 손이 서서히 아래로 하강했다.

바둑알처럼 까만 눈알이 위에서 아래로, 그리고 다시 아래에서 위로 느리게 굴렀다. 곧 힘이 탁 풀린 채로 허공을 응시한다. 성가신데 피할 수 없는 일을 맞닥뜨린 사람처럼.

묵직한 한숨이 허공을 울렸다. 다음 순간 서수혁이 품을 뒤져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서원아, 룸으로 좀 올래.”

통보에 가까운 통화가 끝나기 무섭게 문이 벌컥 열렸다. 그사이 완전히 풀어 헤친 넥타이를 손등에 칭칭 감은 서수혁이 팔뚝을 휘두르느라 흐트러진 흑발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데리고 나가.”

윤서원은 몇 초 만에 룸 안에서 벌어진 상황을 대략이나마 파악했다.

그는 소리 없이 움직여 희우에게로 다가왔다. 가는 어깨를 쥐었다가 깜짝 놀란 것도 윤서원이었다. 희우의 몸이 상상 이상으로 떨리고 있어서였다.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희우를 부축한 윤서원이 그녀를 데리고 문가로 향했다.

기도 끝에 걸려 나오지 못하는 숨을 나누어 쉬며, 저를 이끄는 힘에만 의거하여 걸음을 옮기던 희우의 눈에 문득 무언가가 들어왔다.

최 사장이었다.

조금 전 여자를 끼고서 으스대던 모습과 달리 머리통 한쪽이 함몰된 것처럼 푹 뭉그러진 최 사장.

그걸 보자마자 핏빛의 뭔가가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공중을 포악하게 가로지르는 손도끼와 그에 절단된 누군가의 손목. 그것이 훅 날아간 길목을 따라 번진 생생한 선지피…….

속이 뒤집힌 것처럼 울렁거렸다.

윤서원은 몇 번이고 다리에 힘이 풀리려는 희우를 어떻게 잘 추슬러 주차장에 도착했다.

뒷좌석 문을 열고 태우려는데 희우가 찰나 크게 비틀거렸다. 그녀의 손이 어찌할 새 없이 허공을 휘적거리다가 반사적으로 윤서원의 팔뚝을 붙잡았다.

멈칫한 윤서원은 그 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안색보다 더 희멀겋게 질린 손등이 눈길을 유난히 길게 잡아먹는다. 온갖 피 칠갑으로 물드는 게 당연시된 제 세상에서는 보기 드문, 앳된, 투명하게 보일 만치 선명한 살색이라서일지.

서수혁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하나로 단결되어 뭉쳤다지만 이 일강 내에는 상종도 하고 싶지 않은 놈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만났다면 사소하게조차 엮이지 않았을 쓰레기들 말이다.

시도 때도 없이 색에 눈이 돌아가는 도끼는 물론이거니와 그 과묵한 쌍칼, 김상필 역시 꽤나 오랜 기간 콩밥을 먹은 큰집 출신이었다. 대학을 나온 자신과 다르게 고졸은 감지덕지, 겨우 중졸로 가방끈이 끊긴 놈들이 즐비했다.

그렇기 때문에 윤서원은 서수혁 못지않게 희본을 아꼈다. 비교적 상식이 있고 말이 통한다는 점부터가 그가 속으로 그은 경계선 안으로 발을 들이기에 충분했다.

지금 희우가 내보이는 이 순진무구한 색은 희본을 처음 만났을 때 막 목격했던 눈동자와 닮아 있었다.

아니, 그보다 더 순수하고 섬섬한 백색이었다. 이런 환경과 무진 어울리지 않으며 그래서 더욱이 고혹적으로 시선을 끄는 면이 있는.

눈길이 빨려 들어가듯이 훅 잡아끌린 건 그래서일 거라고, 윤서원은 속으로 단정 지었다.

“흐으…….”

지탱해 주는 손길 덕택에 희우는 간신히 차 뒷좌석에 앉았다. 그럼에도 가시지 않는 비명 소리가 점액질처럼 끈적하게 고막에 달라붙어 있었다. 두 손으로 귀를 막거나 그 겉면을 탁탁 때려도, 세게 문질러도 사라지지가 않았다.

이명을 가까스로 가라앉힌 고막 안쪽이 치료를 없던 일로 돌리듯 지끈지끈 쑤셔 왔다. 편두통인지 난청의 통증인지 정확한 부위를 모르겠다. 어쨌든, 뇌와 그 주변을 사특하게 갉아 먹는 벌레 한 마리가 두개골 속으로 기어들어 온 것만 같았다.

히터를 미리 작동시켜 두었는지 차 내부는 적당히 훈훈하게 덥혀져 있었다. 그럼에도 희우는 한겨울 오지에 뚝 떨어진 사람처럼 떨림을 그치지 못했다.

익숙한 공간이 거꾸로 뒤집힌 퍼즐처럼 무너져 내리던 순간이 떠오른다. 제집에서 도끼의 손이 처참하게 갈려 나가던 바로 그 순간.

이런 결과를 바라고 고한 게 아니었다.

단지 그림이라서.

엄마가 온 맘 바쳐 사랑했던 미술이라서.

그건 죽은 엄마의 존재만큼이나 희우의 맘속에 깊숙이 틀어박혀 자리 잡은 것이었다.

‘그림을 왜 좋아하냐고?’

시간이 지나며 기억은 자연스레 저물어 간다. 가장 오래된 저 끄트머리부터 하나둘씩.

그 가운데 얼마 남지 않은 조각 중 하나.

깊은 산속 별장의 지하, 대형 캔버스 앞에 앉아 루벤스 붓을 만지작거리던 엄마의 다리에 찰싹 달라붙어서 건넨 질문이었다.

‘으응.’

‘음…… 솔직해서?’

‘솔직해?’

‘다른 사람을 속이려는 의도 없이,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받아들이면 되니까. 엄마는 그래서 좋아해.’

그렇게 말하며 어린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엄마의 눈동자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세차게 일렁였다.

사랑에 대한 것을 일컬으면서도 아이러니하게 슬픔에 잠겨 드는 기색이었다.

어쨌든 보아 온 모습 그대로 엄마는 그림을 사랑했고, 남매는 그런 엄마를 사랑했다. 그러므로 두 사람이 그림을 사랑하게 되는 것도 어떻게 보면 지당한 결과였다. 현재에 이르러 그건 엄마를 떠올리게 하는 매개로까지 자리를 잡았다.

그토록 의미가 있는 만큼, 더러운 음심의 도구로 훼손되지 않기를 바랐을 뿐이다.

오로지 그 마음으로 꼼꼼히 살핀 거고 고한 거다. 서수혁이 또 저렇게 정도 모르게 폭력적으로 굴기를 바라서 꺼낸 말이 결코 아니라는 거다.

하지만 이제 와 후회하면 뭐 하나.

결과는 또다시 이런 식으로 흘렀다. 가장 바라지 않았을, 가장 끔찍한 식으로.

벌컥.

헉, 희우는 헛숨을 삼키며 무릎 가까이 처박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뺨과 어깨, 넥타이가 실종된 셔츠 앞섶이 피로 흥건히 젖은 서수혁을 보고 잠시나마 호흡하는 법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서수혁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려다가 붉은 칠이 된 손을 확인하고 혀를 쯧 찼다. 집무실에서 장갑을 낀 채로 사람을 거리낌없이 후려 패던 이전 날의 모습이 그 위로 오버랩됐다.

“근처에 가까운 호텔 있니?”

“W 호텔 있습니다.”

“그리로 가.”

어느새 사라진 김상필 대신 운전대를 붙잡은 윤서원이 “예, 대표님.” 하고는 시동을 걸었다.

호텔까지 향하는 동안 희우는 이따금 정신이 혼미해졌다. 옆자리에 앉은 남자에게서 풍기는 음울한 냄새 때문이었다. 벗어났다고 생각한 순간 다시 올무처럼 발목을 휘감아 오는 피비린내……. 그에 역함이 최고치를 찍기 직전 다행히 호텔에 도착했다.

이곳에 역시 자아 따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끌려온 희우는 으리으리한 스위트룸에 도착했다.

서수혁이 씻기 위해 욕실로 간 사이 그녀는 멍하니 침대에 앉아 있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착 달라붙는 옷이 불편하고, 갤러리의 쨍한 조명 빛이 아득한 점처럼 두둥실 떠다니고, 그런 잡스러운 생각들로 포화되어 있던 머릿속이 지금은 물먹은 솜처럼 둔하기만 했다.

그래서 뚝, 하고 떨어진 물방울이 무릎을 두드렸을 때는 본능적으로 흠칫하며 목을 움츠렸다.

황급히 치들린 시야가 흑빛 동공에 먹히듯이 장악당했다. 어느새 씻고 나와 바지만 꿰입은 서수혁이 젖은 머리칼을 한 채 코앞까지 얼굴을 디밀고 있었다.

“앉아서 잠이라도 든 줄 알았네.”

이상한 일이었다.

남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물을 끼얹어 깨끗해져 있었다. 그럼에도 희우에게는 여전히 그가 발갛게 보였다.

지독히도 빨간, 어떤 거대한 덩어리.

사람들은 간혹 아름답거나 매혹적인 것을 눈앞에 두면 넋을 놓고는 한다. 하지만 때로는 너무 강렬해서 눈을 돌릴 틈조차 갖지 못한 것에도 넋을 잃을 수 있는 법이다.

오감이 짓눌리는 듯한 인상을 선사하는 원색적인 것에…….

적어도 지금 희우에게는 서수혁이라는 남자가 그렇게 보였다.

그는 너무 극과 극이었다.

불 꺼진 방처럼 지나치게 어두워서 도무지 헤아려 볼 수 없을 때가 있는가 하면, 지금처럼 감당할 수 없이 짙어서 오히려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는 경향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뇌까지 물씬 절여 버릴 듯 절대적인 영향력을 선사하는 건 분명했다.

자세를 바로 한 서수혁이 발을 돌렸다. 창가 옆 사이드 테이블로 다가가 그 위에 비치된 생수병을 들어 올린다. 가볍게 뚜껑을 따는 몸짓에도 그가 조금 전에 벌인 짓이 똑똑히 박혀 있어서인지, 꼭 보이지 않는 비명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누군가의 목이 저 연약한 병뚜껑이 되어 버린 것처럼.

순식간에 창백해진 머릿속으로 오빠가 떠올랐다.

간담이 서늘한 감각이 아직 다 사라지지 않아서일까, 어두컴컴한 룸에서 목격했던 최 사장의 모습이 오빠로 탈바꿈이 되는 아찔한 상상이 번뜩거렸다.

그러자마자 온몸의 피가 차게 식었다.

최 사장이 오늘 서수혁에게 그런 식의 취급을 받은 이유는 하나였다.

감히 그를 속이려 한 죄였다.

공돈 좀 벌어 보겠노라는 심보로 벌인 눈속임 하나로 그렇게 초주검이 될 법하게 심한 구타를 당했다.

그러나 만약 그게 오빠였다면?

단순히 속인 것뿐만 아니라 아주 중요하고 귀중한 걸 가지고 도망을 간 오빠였다면 어땠을까?

그 순간에 표출될 서수혁의 부아는 오늘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일 거다. 이만큼의 일에도 그만큼의 노여움을 보였으니 배신자나 다름없는 오빠에게는…….

‘차라리.’

그럴 바에는 차라리 오빠가 영영 나타나지 않았으면 했다.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살았는지 죽었는지, 밥은 잘 챙겨 먹고 있는 건지 몰라도 저를 구하겠답시고 혹은 다른 이유에서든지 서수혁의 앞에 등장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그 누구도 잡을 수 없는 곳까지 달아났으면 했다.

그걸 바라지만, 그만큼의 절망도 함께 깃들었다.

정말 그렇게 된다면, 이후에 난 어떻게 되는 걸까?

오빠 때문에 인질로 묶여 있는 셈인데 오빠가 평생 나타나지 않으면……?

생각이 뒤죽박죽 섞였다. 끝에 가서 희우는 오빠가 자신을 구하러 와 줬으면 좋겠는지, 아니면 평생 발목을 죄는 족쇄에 불과하던 저를 버리고 멀리멀리 도망치기를 바라는 건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태풍 속에 빠진 것처럼 혼란스러웠다.

분명한 건 딱 하나.

눈앞의 남자가 미치도록 무섭다는 것뿐.

속이 바짝바짝 말라 가는 희우를 앞에 둔 채 서수혁은 뚜껑을 딴 물을 목 뒤로 삼켰다. 뒤로 젖혀진 고개의 각도에 따라 야성처럼 두드러진 목울대가 꿀렁였다.

서수혁은 물을 마시는 동안 희우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평소였으면 간담이 저려 피했을 희우 역시 반쯤 넋을 놓은 채 그 눈길을 마주했다.

그러다가 사내의 눈매가 의문스레 늘어지는 걸 본 순간 흠칫했다.

그간 그래도 한 지붕 아래 몸을 부대끼며 살아서일까, 미묘하고 사소한 변화에도 남자의 심리가 비딱하게 휘려는 조짐을 어렵지 않게 읽어 낼 수 있었다.

뭐가 문제일까, 고민하던 차 서수혁이 생수병을 쥔 손을 내렸다.

그는 침대에 어색하게 걸터앉은 희우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며 손안에 놓인 플라스틱 병을 와그작 구겼다.

바로 그 순간 희우는 직무 방기처럼 무릎 위에 가만 놔둔 손을 움직였다.

옷을 벗어야 한다.

그게 여의치 않다면 속옷이라도.

그 생각으로 굳은 손가락을 억지로라도 굽히던 차였다.

“뭐 하니?”

이제 막 생수병 한 통을 다 비워서 그런 걸까, 남자의 음성이 습기를 머금은 듯 축축하게 전해져 왔다. 희우는 돌처럼 무겁게 굳은 혓바닥을 간신히 움직였다.

“아, 옷 벗으려고…….”

“왜?”

길쭉하던 모양새에서 차 바퀴에 깔려 형편없이 구겨진 듯한 형태로 변한 생수통을 뒤로 던진 서수혁이 입가를 쓱 닦으며 침대로 다가왔다.

희우가 어떤 말도 못 하고 입만 달싹이는 사이, 코앞까지 다가온 남자가 그녀 앞에 다리를 굽혀 앉았다.

“호텔에 왔으면 여자 옷은 남자가 벗겨야지.”

그런가.

전혀 타당성 없는 지론임에도 희우는 반박 한마디 못 하고 허공에 띄운 손을 내려뜨렸다. 고분고분한 태도가 마음에 드는 건지 아닌 건지 서수혁이 픽 웃었다.

그의 손가락이 희우의 무릎을 쥐었다. 안색처럼 하얗게 질린 무릎뼈를 느리게 쓰는 손길 뒤로 선뜩한 기류가 들러붙었다. 흡사 바닥에 지는 음흉한 그림자처럼.

조금도 떨 필요가 없는, 단순하고 가벼운 터치임에도 눈꺼풀이 절로 들썩인 건 그가 눈앞에서 행한 짓이 뇌리에서 도통 가시지를 않아서일 거다.

그게 아예 창자까지 끄집어낼 기세로 잡아당긴 최 사장의 혀 위에 담배를 지져서든, 굳이 그렇게 할 필요까진 없는 플라스틱 병을 처참한 모양새로 구겨서든.

서수혁은 늘 그렇듯 이런 희우의 반응을 신경 쓰지 않았다. 네가 내 앞에서 하루 이틀 떠니, 꼭 그런 생각을 하는 것처럼 여상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분명 위치상 그의 얼굴이 더 아래에 있는데도 꼭 그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처럼 까맣게 벌어진 동공 속에 오만함이 단단히 뭉쳐 있었다.

“내 취향으로 입혀 놓기는 해도.”

“…….”

“아직 아기는 아기인가 보네.”

웃음을 완전히 털기 전에 꺼내는 말의 의미가 아리송했다. 별로라는 건가? 깊이 헤아려 볼 새도 없이 무릎을 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앗, 하는 찰나에 양쪽으로 쭉 벌려 음부로 통하는 사잇길을 거침없이 개통한다.

“이거 잘 늘어나니?”

“네? 이거……?”

“옷 말이야.”

“…….”

“가랑이야 내가 잡고 벌리면 되는 일이고.”

한 박자 늦게야 그가 속옷만 벗기고 이 블랙 원피스는 입힌 채 섹스를 하고자 함을 눈치챘다. 희우는 어느새 바짝 마른 입술을 살금살금 축이며 눈을 깜박거렸다.

아직도 가시지 않은 충격의 여운이 검질기게 달라붙어 있었으나 실상 희우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하지만 미처 사그라뜨리지 못한 긴장감에 웅크린 채 어째 대답을 하지 못하는 사이 서수혁의 인내심이 먼저 닳았다.

그는 늘씬하게 빠진 희우의 옆 허벅다리를 덮는 슬림핏 원피스 자락을 엉덩이가 보이는 수준까지 밀어 올렸다. 그 안에 갖추어 입은 속옷은 당연히 만천하에 노출되었다.

서수혁의 눈썹이 꿈틀, 요동질했다.

하늘하늘한 레이스로 이루어진 팬티는 불두덩은 물론이거니와 잘하면 오목하게 파인 음부 안쪽까지 엿볼 수 있을 만큼 야시시했다.

흐음, 알 수 없는 숨소리를 낸 그가 건성 어린 손길로 팬티 끝부분에 장식처럼 묶인 끈 리본을 툭툭 건드렸다.

“네가 자진해서 이런 걸 입었을 리는 없고. 송 사장인가.”

뭇 남자라면 눈이 뒤집히고도 남을 야한 매무새에도 서수혁은 표정에 큰 변화 하나 없었다. 심지어 놀라는 기색조차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저 그러려니. 언제나 정해진 길목에서 잔잔히 흐르는 냇물처럼 감정의 진폭이 그리 크지 않은 사내였다. 물론 사람을 팰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희우가 기억하기로 그는 도끼의 손목을 자를 때에도 큰 표정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때로 남자는 얼굴이 아닌 다른 곳으로 스스로의 상태를 밝히기도 했다. 굽혀 앉은 하반신 중 오른쪽 허벅지 위로 무언가 팽팽하게 부풀고 있는 지금처럼.

선명한 발기의 증거였다.

“어떻게 알았지?”

희우의 엉덩이를 쥐고서 팬티째로 주물럭거리던 그가 대뜸 물었다.

불편하면서도 벗어날 수가 없는 기분에, 정확하게는 저 혼자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할 섹스가 진행될 거라는 사실에 개의하던 희우가 토끼 눈을 떴다.

“그림.”

외어가 유려하게 새겨진 손가락이 팬티 줄에 갈퀴처럼 걸렸다. 속옷이 허벅지를 타고 벗겨지는 남사스러운 감각을 이겨 내며 희우가 어렵사리 혀를 굴렸다.

“그, 구석 쪽, 선묘가 조금 이상해서……. 전체적인 색깔도 약간 다른 것 같았고요…….”

솔직히 희우가 그걸 알아챈 건 운이 좋았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바로 직전 진품을 보고 온 상황인 데다가 심지어 서수혁이 걸음을 멈춰 주어서 꽤 오랜 시간 눈에 담지 않았나. 평소 전공 책에 실린 여러 묘화를 꼼꼼히 살피는 것도 좋아하는 희우였다. 그게 버릇처럼 새겨져 어떤 작품이든 구석빼기까지 머릿속에 새로 그려 넣듯이 살펴보길 곧잘 했다.

“자신은 없었어요. 그냥, 그냥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서 한 말이었는데…….”

어쭙잖게 뱉자마자 자기변명이라는 걸 깨달았다. 어차피 여기에 이 말을 들어 줄 최 사장은 있지도 않은데. 그러므로 이건 제 자신의 죄책감을 덜어 내려는 알량한 수작질에 불과했다.

그걸 깨달은 건 진정 알아줘야 할 대상인 최 사장이 아니라 서수혁이었다.

“내가 최 사장 대가리 으깨 놔서 미안해?”

끔찍한 순간을 복기시키는 말에 흡, 숨길이 콱 막혀 들었다.

“미안해할 게 있나. 애초에 그쪽이 공사 치지만 않았어도 벌어지지 않았을 일인데.”

물론 발단은 희우지만 어쨌든 거칠고 정도 없는 폭력을 행사한 건 서수혁이었다.

그러나 남자의 얼굴에는 쥐톨만큼의 죄악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본인이 말한 대로 명분은 그쪽에서 제공하였으니 나는 그에 걸맞은 처분을 내린 것뿐이라는, 도의라고는 터럭만큼도 느낄 수 없는 대답은 자신감인지 거만함인지 모를 것으로 가득 차 있었다.

“뭐, 아무튼 아기가 오늘 내 돈 지켜 줬네?”

보드라운 레이스 속옷을 벗겨 낸 그가 그것을 손가락에 건 채로 말했다.

따지고 보면 그를 위하여 한 짓은 아니었다. 돌아가신 엄마가 떠올라 두려움을 딛고 나선 일이었지.

그러나 문신을 지닌 손가락이 팬티를 거머쥐고 있는 그림이 선사하는 이상야릇한 느낌에 정신이 팔려 어찌 반박할 생각도 못 했다.

그리고 그다음으로는…… 평소보다 더 깊이 휘말린 사내의 미소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서수혁의 미소는 늘 차가운 인상에 결을 맞추던 느낌이었는데, 오늘은 적어도 평소보다 2도 정도는 오른 것처럼 다가왔다.

겨우 2도 가지고 뭘 그렇게 아연해지냐 묻는다면 할 말은 없겠지만 지금껏 희우가 겪어 온, 세상천지를 쩍 얼리고도 남을 잔악무도한 사내의 기류 속에서 2도는 굉장히 큰 변화였다.

서수혁은 그 상태에서 손에 걸고 있던 팬티를 제 입가로 가져왔다. 양쪽으로 차분히 벌어지는 손가락을 따라 팬티의 그나마 면적 넓은 부분이 쭉 늘어났다.

오늘 하루 종일 희우의 외음부를 얄팍하게 감싸고 있던 부분이었다.

서수혁의 베일 듯한 콧날이 그 위를 스칠 때는 움찔했고, 제 말이 곧 법인 것처럼 무도한 말만 찍찍 뱉어 내는 입술에 닿았을 때는 눈을 의심했다.

이윽고 같은 신체 기관임에도 제 것과는 상이하게 느껴지는 붉은 혓바닥이 정확히 희우의 구멍과 마찰했을 중앙을 둥글게 핥았을 때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숨조차 제대로 내쉬지 못하는 채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반면, 서수혁은 그 부근을 혀로 성의 없이 몇 번 돌려 핥고는 ‘생각보다는.’이라는 정체 모호한 말을 지껄였다.

이내 여태껏 쥐고서 변태 같은 행위를 하던 팬티를 어깨 너머로 던져 버렸다. 그리고 대신할 것을 찾듯이 희우의 발목을 콱 움키었다.

“그럼 상을 줘야지.”

“아!”

위로 거침없이 잡아당기는 바람에, 세우고 있던 허리가 무너지며 자연히 상체가 뒤로 넘어갔다.

어차피 침대에 앉은 상태였기 때문에 뒤통수가 어딘가에 부딪혀 다칠 위험은 없었으나 애초에 문제가 발발한 건 위가 아닌 아래쪽이었다.

“흣, 잠……!”

샅을 파고드는 머리통에는 거스를 수 없는 기세가 담겨 있었다. 그럴 만한 틈이 주어져 서둘러 손을 내디디기도 전에 서수혁의 부드러운 입술이 희우의 밀부 위에 안착했다.

활짝 열린 눈동자가 지금 희우가 얼마나 놀랐는지를 대변했다. 그러나 서수혁은 언제나 그래 왔듯 그녀의 사사로운 심경 변화에 일절 개의치 않았다.

“으! 잠, 아흐읏……!”

예상외로 가랑이 사이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남자답게 도드라진 입매가 벌어졌다. 그러며 부드러운 입술이 아직은 씹때가 타지 않아 희뽀얀 살구색 음순에 마찰되었다. 언제나 독한 말, 시린 말, 혹은 무서운 말만 뱉던 그 입술은 뜻밖에도 따스움을 품고 있었다.

오히려 그게 더 소름이 끼쳤다.

안심하는 순간 그의 흉악한 좆처럼 살갗을 포악하게 찢어 가르며 들어올지 모를 일이니까.

그러나 서수혁은 그러지 않았다.

대신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바르작대는 희우의 양 오금을 쥐어 단단히 고정했다. 입술이 느리게 문대지는 감각에 잔주름이 자잘자잘 인 입구 살점이 덩달아 딸려 갔다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등 은밀하게 벌름거렸다.

하지만 이것조차도 잠시였을 뿐이다.

금세 물컹하고 축축한 혓바닥이 삐져나와 희우의 음부 살을 원 모양으로 쓸었다.

“허윽!”

희우가 그렇지 않아도 휘어진 허리를 더 크게 들어 올리며 허벅지 안쪽을 딱딱히 굳혔다.

조금 전 팬티를 흥미 삼아 핥아 본 것처럼 신체 부위 중 가장 연약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보짓살을 느긋하게 맛본 그는 꼭 마지막 확인을 마친 것처럼 혀를 분방하게 굴리기 시작했다.

당연히 희우는 있는 대로 기겁하며 숨소리를 더 뾰족하게 터뜨렸다.

“하으, 으…… 아, 읏!”

생전 처음 겪어 보는 상황에 희우는 정신없이 굴면서도 한편으로는 넋이 나갔다.

살아오며 누군가 제 여기를 핥아 줄 거라는 건 상상조차 해 보지 않은 일이었다.

아니, 상상은 해 보았을지 몰라도 적어도 이 남자는 아니었다. 저를 깔아뭉갠 채 뺨을 짝짝 후려쳐 가며 좆을 억지로 뿌리 끝까지 쑤셔 박던 남자가 이런 봉사 아닌 봉사를 행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더, 흡, 더러워요. 더러워……!”

“더러운지 안 더러운지는 내가 판단하는 거고.”

차분히 일갈한 서수혁은 침칠하듯이 음부 바깥 살을 정성스레 궁굴렸다. 밀어 올리면 밀어 올리는 대로 혀끝에서 잘착잘착 뭉개지는 느낌이 마음에 들었다.

이것이 평소 제 자지 기둥을 한입 가득 머금어 전심으로 빨아들이는 홀이라고 생각하니 조금 더 회가 동했다.

살점 전체를 아예 퉁퉁 불릴 기세로 눅진히 적셔 대던 서수혁은 혓바닥 쑤심질에 근육을 나른히 풀기 시작하는 속살의 어귀를 게걸스럽게 돌려 핥았다.

곧 입구가 제 타액인지 뭔지 모를 물로 젖어 들기 무섭게 혀 심지를 세우고 구멍 안쪽으로 구렁이처럼 늘씬히 기어들어 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혓바닥에 더하여 손가락 두어 개는 더 들어갈 것처럼 꿈지럭거리던 구멍은 아무래도 좆을 받아 물고 싶어 벌인 교태였는지, 금세 주름을 판판하게 펴며 아가리를 꽉 조였다.

하지만 그래서 더 유쾌했다. 이 정도는 되어야 내벽을 혀 빠지게 긁고 가르며 난탕질을 하는 의미가 있을 테니.

설소대가 뻐근하게 저릴 만치 혓몸을 흠씬 처박고서 느긋하게 한 바퀴를 굴리자 내벽 살이 착 감겨 왔다. 평소 성기 둘레에 휘감기는 느낌이 이것이었는지 들러붙는 태세가 예사롭지가 않았다.

보지 맛을 음미하듯 느른히 혓바닥을 돌리던 서수혁은 삽입 시 유난히 빡빡하게 조이는 부근을 발견하고 픽 웃었다. 가랑이 사이에 얼굴이 푹 파묻혀 있었기에 그의 웃음이 희우의 하반신 전체로 퍼졌다.

협소한 길목을 제 혓바닥 몸통으로 뚫어 줄 것처럼 그가 크게 왕복을 하기 시작했다. 튼실한 거근을 불알주머니 바로 아래까지 쑤셔 박고서 신명 나게 질벽을 후벼 주는 추삽질 같은 혀 놀림이었다.

“읏…… 응, 아, 싫. 잠…… 하아……!”

희우는 그에게 잡혀 벗어나지 못하는 허벅지 대신에 발만 허공에서 마구 휘적거렸다. 이 사태를 도무지 제정신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발등은 피가 통하지 않는 것처럼 허여멀겋게 질린 채였다.

그러다가 한 번씩 발가락 끝이 둥글게 곱아드는 때가 있었다. 요사스러운 혀뿌리가 구멍의 한 구간을 꽈악 메워 줄 때였다. 그때마다 저릿저릿한, 알 수 없는 감각이 아랫배를 타고 번지며 몸을 비비 꼬게 만들었다.

차마 그의 머리통을 밀지 못한 희우는 애꿎은 침대 시트만 꽉 움켜쥐었다.

서수혁은 뻐개지는 기색으로 열리는 좁다란 샅을 살살 긁어 줄 때마다 희우의 몸에 바짝 힘이 들어간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래도 여기가 좋은 것 같아 작정하고 코를 처박은 뒤에 혀만 상스럽게 움직여 비비 쑤석이자 곧 혓바닥 위로 미묘한 맛이 번졌다.

생전 처음 먹어 보는 맛은 조금 전 룸에서 그녀가 먹다 넘긴 걸 받아 씹은 청포도의 맛과 유사했다. 아니, 그것보다 조금 더 진하며 농후한 것 같기도 하고.

그제야 서수혁은 그녀의 안이 젖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애액이 이런 맛이었나. 살아오며 가진, 그리 적지 않은 관계 횟수와 어울리지 않게 여자의 가랑이 사이에 처음 혀를 가져다 대 보는 거라 상당히 낯설었다.

손가락까지는 꽂아 본 적 있으나 영 구미가 당기지 않아서 보빨을 시도한 적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서수혁은 지금 이 서비스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희우의 태도가 못마땅했다. 그는 불투명한 애액이 쩍쩍 늘어 붙기 시작한 혀 덩어리를 끄집어내고서 탁한 음성으로 읊조렸다.

“뻣뻣하기는.”

“하아…… 흐…….”

“제대로 좀 즐겨 봐.”

“…….”

“나 이런 서비스 잘 안 해 주는데.”

그가 희우의 양 발목을 쥐고서 침대 쪽으로 번쩍 들어 올렸다. 상체와 하체가 수직이 되었다가 나중에 가서는 아예 겹쳐질 것처럼 몸이 반으로 접혔다.

졸지에 제 음부 꼬락서니를 두 눈으로 보게 된 희우는 허리가 아픈 것도 잊고서 눈꺼풀을 퍼드득 떨었다.

조금 전까지 그의 혀가 좆질에 여념 없는 페니스처럼 들락날락거린 보지 입구가 흥건히 젖어 있었다. 늘 건조하게 말라붙는 까닭에 튜브형 젤을 한 통 전부 쓰던 이전의 정사들과는 달랐다.

“하으읏!”

서수혁은 희우의 시야에 그 굴곡진 밀부가 훤히 드러나게 하고는 혀를 내어 발름거리는 구멍 살 주름을 촘촘히 핥았다. 주름 사이로 괼 것처럼 흘러내린 타액 덩이가 오목하게 팬 질 구멍 속으로 쪼르륵 흘러 들어가는 모양새가 문란하기 그지없었다.

무엇보다 곤혹스러운 건 서수혁 그 자체였다. 그는 붉은 혓바닥으로 구멍을 난잡하게 희롱하면서도 희우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당황한 희우의 표정은 삐그덕거리면서도 결코 그의 시야 밖으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그의 혓바닥이 제 비부 사이에서 어떻게 노니며 춤을 추고 있는지가 똑똑히 보여졌다. 민망해서 죽을 것 같은데 그런 의식의 가장자리에서도 미묘한 발열감이 스며 올라오고 있었다. 생경해서 더 피하고 싶어지는 감각이었다.

“하윽, 아, 아…….”

허리가 너무 아픈데 차마 무서워서 놓아 달라는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럴수록 서수혁은 거머쥔 발목의 뼈를 아예 또각 부서뜨릴 기세로 움키며 혓바닥을 상스럽게 놀렸다.

태어나 처음 물이라는 걸 마셔 본 인류처럼 끈질한 애액이 차츰차츰 괴어져 나오는 음부 살에 고개를 잔뜩 처박고서 쯔읍, 소리가 나게끔 외설적인 흡음을 즐겼다.

제 침을 가득 발라 녹아내리게 할 기세로 분주하게 굴던 살덩이가 곧 끈질기게 배회하던 입구 주변에서 멀어졌다.

그 대신 맞물리는 양옆의 날개살을 한입에 머금어 쭉쭉 빨아 준 뒤, 산호색으로 물든 음핵 소대로 젖히며 파고들었다.

희우의 엉덩이에 힘이 들어가며 보조개가 매끈히 패었다.

“읏! 응…… 잠, 하읏, 안 돼……!”

움찔움찔 떠는 데에 국한되던 희우의 몸부림이 별안간 거세졌다. 그 부위가 지닌 천박하면서도 속된 태생적 습성을 가리기 위하여 평소 포근히 다물려 있던 클리토리스 포피가 활짝 벌어져 그에게 노출이 된 시점이었다.

물론 그의 혓바닥이 소음순을 무참히 갈라 콩알을 달달 긁어 올린 타이밍에 그러했으니, 희우는 어떻게 뿌리치지도 못하고 음핵을 얄궂게 유린당했다.

“아, 아…… 아아, 읏…… 앙……!”

자그맣게 돋아난 돌기가 편편하게 세운 혓바닥에 찌그러질 것처럼 뭉개지자 눈앞에 순간적으로 화끈한 불티가 튀었다.

뭐, 뭐야.

머리꼭지부터 허리춤까지를 일자로 관통하는 전류에 손과 발끝이 다 찌르르 울릴 지경이었다.

희우는 그간 버텨 온 보람도 없이, 거의 무의식적으로 손을 내려 가랑이 사이를 파고든 서수혁의 머리통을 움켜쥐었다.

물론 그 힘은 아주 연약해서 두피에 손가락이 박힌다고 해도 간지럽기만 했다. 그렇기 때문에 서수혁은 굴하지 않고 클리를 껍질이 홀딱 벗겨지도록 질기게 감빠는 데에 집중했다.

확실히 여기가 성감대이기는 한가. 신체 부위 중 가장 작고 은밀하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보지 구슬을 입에 넣고서 혀로 이리저리 쓰다듬어 주던 서수혁이 속으로 생각했다.

그간 시꺼멓게 때 탄 갈보들의 보지에 전희 없이 좆을 처박을 때면 그들이 쨍한 매니큐어를 칠한 손으로 여기부터 시계 방향으로 박박 돌려 문질러 대던 게 생각이 나서 혀를 댄 거였다.

그렇게 하면 뻑뻑하고 좁은 감이 있던 허벌창 보지도 금세 헤롱헤롱 풀어져 시큼한 애액을 오줌처럼 찍찍 지려 내기 바빴으니까.

헐 대로 헌 창녀들의 가랑이 사이에 코를 박을 생각은 죽어도 안 들던데, 얘한테는 뭐가 이렇게 쉬울까.

서수혁은 이런 스스로가 기가 막힌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피가 몰려 발갛게 부푼 공알을 아래에서 위로 싹싹 치댐질 했다. 곧 혓바닥 위로 질척하게 감겨 오는 질액의 양이 조금 늘어났다.

슬금 눈을 내리다가 입술을 완전히 떼어 내자 열렬한 오럴의 증거로 은색의 실타래가 걸게도 늘어졌다.

제 코앞에 놓인 질 구멍이 얼른 좆으로 혼을 내 달라는 것처럼 전신을 발발 떨어 왔다. 그 사이로 쪼롭, 쪼로롭, 새초롬히 농익은 맛으로 혀를 감아 오던 체액이 작게 튀어 올랐다.

알알하게 당겨 올 정도로 놀려 댄 혀뿌리를 입 안에서 느리게 굴린 그가 음부 살점에 두 손가락으로 걸고서 활짝 벌렸다.

하으으, 힘 풀린 희우의 신음이 여트막하게 귀를 관통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서수혁은 지금까지의 씹질로도 여전히 연한 복숭아색에 가까운 요사스러운 삽입구와 그 안쪽으로 이어지는 속살점을 심도 있게 살폈다.

남자의 정욕 어린 시선을 느낀 것처럼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낸 내벽 살이 움찔움찔 통으로 떨었다. 평소와 다르게 습윤기를 듬뿍 머금어 촉촉하게 여문 구멍은 어서 빨리 나를 거침없이 꿰뚫고서 이 안에 진한 씨물을 쏴 달라고 성화였다.

그에 눈길을 떼지 않은 채 서수혁은 내도록 아플 정도로 죄어 오던 바지춤을 풀어 헤쳤다.

전체적으로 미끈둥하고 흰, 그러나 그 겉면에 벋은 덩굴처럼 칭칭 감긴 핏대가 예사롭지 않은 살기둥이 늠름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처음부터 틀어박힐 곳을 정해 둔 것처럼 자연스레 희우의 보짓살에 대가리를 문대더니 곧 안쪽에서부터 당겨 들어가듯이 쭈우욱 진입했다.

“아흐, 앗……!”

두 다리는 다행히 자유를 되찾았으나 이번엔 서수혁이 그 풍채 좋은 몸집으로 전신을 묵직이 내리눌러 왔기에 버겁기는 매한가지였다.

서수혁은 혀가 빠지도록 임한 커닐링구스로 헝클어진 머리칼을 쓱 쓸어 넘기고는 근골이 착실하게 갈라진 사타구니를 그녀의 여성기에 맞추듯이 바짝 맞대었다.

그러니 당연히 한 손으로도 잡히지 않는 지름을 자랑하는 거근은 단숨에 희우의 아기집까지 짓쳐 들어왔다.

“으흐, 읍!”

무자비한 돌진에 사고회로가 뚝 끊기고 기도가 바늘구멍만 하게 조여들었다. 배 안쪽에서부터 퍼지는 팽만감에 창자가 뒤틀리는 것만 같았다.

희우가 숨 막히는 호흡을 터뜨리는 사이, 서수혁은 젤을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충분히 침수해 흐물거리는 내벽 살에 살기둥 표면을 문지르며 혼탁히 가라앉은 눈을 해 보였다.

확실히, 인조적인 젤을 처바르는 것과 실제로 체액을 생성해 내는 윤활 작용은 달랐다.

젤을 한 통 전부 뿌려도 영 매끄럽지 못하게 성기를 감쳐물며 아프게 죄기만 하던 이전 날들과 달리 오늘은 내부가 꿀렁꿀렁 요동질을 하며 아귀처럼 강하면서도 부드럽게 흘레붙어 왔다.

허리를 살짝 뒤로 빼자 저 으슥한 골짜기 안까지 푸욱 궤찌르며 들어섰던 좆머리가 느긋하게 후진을 했다. 그러자 찌르는 대로 모양이 변형될 것처럼 푹신푹신한 음벽 살이 나가지 말라 보채듯이 제 한 몸 묻어 딸려 나왔다.

어떻게 해 줘도 금세 마르기 일쑤라 파정액을 빼내는 데에만 주력하던 허리 짓에 달큰한 여흥을 더하는 맛이 뇌를 어지럽혔다.

“이제야 좀, 할 만하겠는데.”

진심이었다.

섹스 경험이 없음을 표하듯이 매사 전력껏 죄는 게 나쁘지 않아 매일 밤마다 침대로 끌어들여 수차례 아래를 뚫어 주기는 했으나 그것도 이제 슬슬 질려 가던 차였다.

처음에는 상당히 흥미를 끌게 만든 면모가 가면 갈수록 애를 먹게 만드는 준비 과정이나 중간 과정을 동반시키자 영 번거롭게 느껴졌기에.

서수혁은 평상시보다 풀어져 안쪽에서부터 성기를 요람처럼 오물오물 감싸 오는 질 점막을 콱 쑤셔 올렸다.

“흐, 윽……!”

그의 아래에 깔린 전신을 굳힌 희우가 턱을 바짝 치들며 신음했다. 아직 제대로 된 방아질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수분기가 층층이 어린 눈망울이 시선을 잡아끈다.

오늘따라 눈가가 유난히 붉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 요인이 무엇인가를 헤아리는 건 썩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제 몸통을 사이에 두고서 활짝 벌어진 두 다리를 잡아 퍼억, 음부 전체를 사타구니로 두들겨 쳐 줄 때마다 동공이 덜컥덜컥 흔들렸으니까.

그건 당황이었다.

그녀는 지금 당혹감에 빠진 것이었다.

서수혁의 짐작대로 희우는 머릿속이 백팔십도 도는 심경이었다. 호흡이 뚝, 뚜욱 끊길 만한 압감을 느끼는 건 맞다. 사내의 페니스는 아무리 아래를 정성껏 풀고 넣어도 빠근한 압박을 체감할 수밖에 없는 굵기이자 부피였으니까.

그러나 평소처럼 아프기만 하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빨간 천을 보고 매섭게 달려드는 투우처럼, 그의 자지 머리통이 후미진 질 안쪽 지점을 힘껏 짓빻을 때마다 정의할 수 없는 부분에서부터 우릿하고 찌르르한 전율이 번졌다.

신경줄 위로 홧홧한 불씨가 타닥 튀는 것만 같은 느낌은 고통이되, 온전한 고통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제게 익숙지 않은 감각이라 자꾸만 고통 쪽으로 인식하면서도, 본능은 진작부터 그게 아님을 익히 알고 있는 것만 같은 괴리감이 크게 일었다. 그게 그녀를 당혹으로 인도하는 거였다.

“하아, 하으, 으……!”

시트를 쥔 희우의 손등이 새하얗게 질렸다. 서수혁은 속된 열망이 서린 눈으로 그를 훑어보며 질막의 울룩불룩한 굴곡을 타고서 페니스를 아득히 밀어 넣어뜨렸다.

한 몸처럼 깊게 맞물리는 느낌이 들 때마다 자궁경으로 향하는 협소한 길목이 그의 퉁퉁한 성기로 가득 차 사방팔방으로 눌리었다.

그때마다 아랫배가 뒤틀리는 것처럼 몸을 가만 놔둘 수가 없는 감각이 몰아쳤다. 가랑이 사이가 둥둥, 무겁게 맥박을 쳐 댔다.

희우는 발버둥을 치듯이 양다리를 휘적거렸다. 서수혁은 제 아래에서 살기 위한 몸부림처럼 소심한 발악이 일어나든 말든 살기둥을 먹어치우기에 여념이 없는 구멍에 찔끔찔끔 새어 나오는 자지액을 고루 바르기 바빴다.

워낙에 신체가 탄탄해서, 작은 움직임에도 그의 사지 근육들이 아름다운 역동으로 꿈틀거렸다. 오직 허릿심으로 주도하는 이 섹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진작에 풀린 바지춤은 반복적인 피스톤질에 서서히 내려가 밀도 높은 근육으로 올라붙은 엉덩이를 바깥으로 선보였다.

처음에는 보짓살을 뚫어 과즙처럼 물큰히 새어 나오는 애액을 제 자지에 두루두루 흩뿌리는 데에 주력하던 그는 점차 다른 부위까지 탐을 내기 시작했다.

어느새 맺힌 땀방울이 느리게 흘러내린 그의 눈매가 설핏 구겨졌다.

“이러니 젖을 못 빠네.”

못마땅하게 읊조린 그가 희우의 상체를 감싸고 있는 원피스의 네크라인을 쥐었다.

등 뒤에 단추가 있었으나 거기까지 손을 뻗어 풀어 주고 있을 새도 없었는지 부우욱, 하는 소리와 함께 옷자락이 험악하게 갈려 나갔다.

그의 아래에 깔려 정체 모를 열락에 흐무러지던 희우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피부에 찰싹 붙어 몸 선을 야릇하게 드러내던 옷자락이 찢겨져 나가자마자 풍만한 젖이 물방울 모양으로 출렁이며 삐져나왔다. 원피스가 패드 부착형이라 따로 브래지어를 차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다.

서수혁은 커다란 사발 두 개를 나란히 얹어 놓은 모양새로 푸짐히 차올라 젖꼭지를 살랑살랑 흔들거리는 요망한 빨통에 눈길을 꽂았다.

그런 젖과 반대로 잘록하게 빠지는 허리춤을 부여잡고서 아래에서 위로, 고환 주머니가 회음부에 마찰하여 찌그러질 정도로 안을 질러 박자 탐스러운 유륜의 파동이 한결 더 심해졌다. 그 색정적인 매무새가 서수혁의 혀끝을 까슬거리게 만들었다.

“흐, 으응……! 아, 아, 읏……!”

오늘 그녀를 제 침에 절게 만들 요량인 것처럼 서수혁은 젖가슴 위로도 혓바닥을 한바탕 종횡무진했다.

우유 전분처럼 만질만질한 젖무덤을 감질나게 핥아 주고서, 벌써부터 저를 희롱해 줄 걸 짐작한 것처럼 바짝 서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젖알을 감아올렸다.

단순히 부드럽기만 한 주변과 달리 심이 있어 제법 단단히 뭉친 알갱이가 혀끝에 착 감겨들었다.

서수혁은 끽연을 할 때처럼 볼이 홀쭉해질 만큼 세게 젖을 빨아 먹었다. 처음에는 과육처럼 여문 유두만 물고 있었으나 별로 성에 차지 않았는지, 갈수록 영역을 넓혀 결국에는 젖꽃판 전체를 입 안 점막에 뭉개 댔다.

어찌나 탐욕스레 빠는지 갓 태어난 젖먹이도 이렇게 달라붙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러며 한 번씩 강약 조절을 하듯이 뻑, 소리가 나게 뱉어 냈다가 다시 욕심껏 밀어 넣는 입방아질을 반복했다.

희우는 지독한 악몽을 꾸는 이처럼 끙끙 앓으며 애먼 시트만 쥐어뜯었다. 남자를 잡으면 이보다 조금은 나았겠지만, 이토록 정신이 없는 상황 가운데서도 그건 함부로 해도 될 짓이 아니라는 걸 직감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이었다.

갸름한 턱이 큼지막한 손에 콱 붙잡혔다. 지악스러운 아귀힘에 희우의 안색이 흐려졌다.

조금 전까지 그녀의 젖가슴에 낯짝을 문대고 이목구비 곳곳을 도톰히 부은 유두에 비비기 바쁘던 서수혁이 무감한 표정으로 희우를 내려다보았다.

불이 다 켜져 밝은 호텔 방에서도 도무지 속을 가늠할 수 없는 먹색 눈은 노골적으로 희우의 입술과, 어벙하게 벌어진 그 틈새를 스치고 있었다.

턱선을 지분거리던 손가락이 희우의 아랫입술을 어루만졌다. 그를 처음 대면했을 때가 떠오른다. 입가에 난 피딱지를 가차 없이 짓눌러 고통을 선사하던 무자비한 손길을 생각하자 절로 심장이 수축했다.

“벌리고 있어.”

“…….”

“다물면 안 돼.”

위아래로 나란히 자리하게끔 눈을 맞춘 서수혁이 희우의 입을 벌린 상태에서 혀를 굴렸다. 볼 안쪽을 여유롭게 쓰는 움직임에 대리석처럼 판판한 뺨이 사탕을 굴리는 것처럼 볼록해졌다가 꺼지기를 반복했다.

이어 그의 혓바닥이 슬금 모습을 드러낼 무렵 선 예쁜 입술 바깥으로 덩이진 타액이 걸쭉하게 흘러내렸다.

희우는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려고 했으나 서수혁이 턱을 부서뜨릴 기세로 쥐고 있어 무리였다.

결국 꼼짝도 못 하고 입술에 먼저, 그다음으로 헤벌어진 입 안으로 스며들어 오는 침 덩어리를 받아 마실 수밖에 없었다. 그늘을 그릴 것처럼 드리운 눈꺼풀이 옅게 흔들렸다.

“그래, 그렇게…….”

그가 웃었다. 등골이 서늘해지는 미소였다. 희우는 제게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른다는 표정을 해 보였다. 서수혁은 이제 길이 들 법한 농탕질에도 여전히 순진무구한 구석이 남아 있는 그 얼굴을 보며 피식거렸다.

“입 벌려야지.”

서수혁이 다시 지시했다. 이번엔 턱을 놓은 채였다. 단지 내려앉는 식의 부드러운 종용이었으나 희우는 이마 끝에 총구가 겨누어진 이처럼 더듬더듬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제게로 내리꽂히는 눈발이 선사하는 위력이었다.

서수혁은 그 안으로 몇 번 더 침을 뱉었다.

목구멍 안쪽까지 미끄러져 흘러간 그것을 희우는 버겁게 삼켰다. 그때마다 서수혁은 잇새에서 꿈틀거리는 빨간 살덩이를 뚫어져라 직시했다.

이 해괴하고 난해한 짓을 시킨 건 그녀의 혀를 빨았던 룸에서의 기억이 불현듯 살아나서였다.

보지를 광견병 걸린 개처럼 핥기 전에 팬티에 먼저 혀를 대어 본 것처럼, 이번 역시도 하나의 확인 작업이었다.

그리고 그게 끝나자마자 서수혁은 거침없이 입술을 부딪쳐 왔다.

“흡……!”

질식시킬 것처럼 혼을 쏙 빼어 놓는 키스였다. 성기처럼 아무런 예고도 없이 파고 들어와 내부를 휘적거리는 혀의 몸짓거리는 그렇게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희우는 그간 버티던 노력이 무색해지게 서수혁의 어깨를 덥석 움켜쥐었다.

먼저 입을 맞춰 온 건 그지만 서수혁은 눈을 감지 않았다. 그는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자신이 모든 정황을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는 듯이 나른히 눈을 뜬 채 희우의 입 안 구석구석을 해작거렸다.

그러다가 구석에 생쥐처럼 콕 숨어 있는 그녀의 혓바닥을 발견했다. 혀밑샘을 능란히 긁어 주고 요철이 돋아난 천장을 둥글게 쓰는 동안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움찔움찔 떨며 저 안쪽까지 말려든 것이었다.

서수혁은 과일을 씹었을 때 터진 과즙을 생각했다. 잇새로 움직이는 건지 떠는 건지 알 수 없는 혓바닥을 빤히 응시할 때에도 저것을 직접 감아올리면 과연 무슨 맛이 날지에 대한 궁금증이 가장 먼저 고개를 들었었다.

주저할 이유가 없기에 서수혁은 희우의 혀를 제 것으로 휘감은 뒤 쯔으웁 소리가 날 만치 강하게 흡입했다.

착각인가. 정말로 달차근한 맛이 배어 나오는 것만 같았다.

거리낄 것이 없어졌기에 서수혁은 아예 그녀의 혀를 떼어 낼 기세로 빨아 먹었다.

“흐……!”

졸지에 입 안이 죄다 그로 채워진 희우는 쌕쌕, 달뜬 숨을 내쉬며 서수혁의 옷자락을 한층 더 세게 거머쥐었다.

혓바닥 돌기가 희우의 볼 안쪽 연약한 살을 치켜 쑤시는가 하면, 마찬가지로 맞대어진 사타구니가 위아래로 흔들거리며 내벽 살에 통째로 처박힌 둔기가 좋다고 갈퀴질을 해 댔다.

윗입 아랫입이 모조리 그로 채워져 까딱했다가는 질식할 것만 같았다.

“흐아, 아, 읍.”

신음은 튀어나오려다가도 날렵히 세운 혀를 쑤셔 박아 저 기도 끝까지 짓찌르는 서수혁의 행동에 고스란히 묻혀 버리고야 말았다.

어느새 희우의 입가는 범람한 타액으로 흥건히 젖어 들었다. 하도 휘두르고 쪽쪽대고 차지게 문대느라고 누구의 침인지도 구분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말랑말랑한 감촉에, 그다음으로는 정말 점막에 딱 갖다 대고서 양껏 흡음하면 단맛이 배어나는 듯도 한 감흥에 빠져 서수혁은 예정에도 없는 진한 딥키스를 선사했다.

그녀가 발버둥을 칠수록 뒤로 물러나 주는 대신에 아예 입 구멍을 메워 버릴 기세로 혓몸을 치댐질 하는 까닭에 희우는 가면 갈수록 침대 안으로 푹 파묻혀 들어갔다.

그렇게 성기 섹스인지 입 섹스인지 구분할 수가 없을 만큼 혓바닥이 한바탕 뒤얽히다가 떨어졌다.

숨이 달려서인지 희우의 얼굴이 불콰해져 있었다. 매일 고통만 느끼던 지난날의 씹질과는 조금 궤가 다른 듯한 오늘의 시간에 그녀의 정신이 반쯤 일그러졌다.

“아…… 앗! 아! 응……!”

하지만 한숨 돌릴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서수혁이 허리를 바투 쥐고서 지금껏 안에 박아 둔 채 재게 흔드는 식으로 구멍 주름을 살살 긁기만 하던 쇠 방망이 같은 것을 내쳐 박아 대었다.

희우의 턱이 치들리며 가파르게 솟아오른 비명이 목 뒤로 꼴딱꼴딱 넘어갔다. 분명 정자세로 누워 받는 건데도 평소보다 더 불편했다. 언제나 불두덩 아래, 샅에서만 느껴지던 감각이 오늘만큼은 전신으로 퍼져서였다.

가느다란 전류가 혈관을 타고 돌아다니는 것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지 끝단에 이르기까지 찌르르한 감각이 전신을 내달렸다.

“아, 읏, 흑, 응……! 읏, 아, 아아!”

“후, 씨발. 박는 맛이 있네. 오늘은?”

조각조각 어긋나기 시작한 의식으로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제대로 잡아챌 수 없었다. 희우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거칠게 삐걱이며 흔들리는 침대 위에서 도리질을 했다.

서수혁이 자꾸만 오므리고 싶은지 제 옆구리에 달라붙어 오는 희우의 허벅지를 쥐어 양쪽으로 콱 벌리고는 훤히 드러난 음부살을 아예 망가뜨릴 기세로 처벅처벅 찍어 눌렀다.

“아, 읏, 응! 읏! 흐으, 아!”

투박한 허릿심을 따라 팔뚝만 하게 발기한 흰 기둥이 한참은 작은 질 구멍을 헤쳐 벌릴 때마다, 팽팽하게 늘어난 입구살 사이로 꿀물처럼 점성 높은 애액이 울걱울걱 스며 올라왔다.

물론 그것은 제대로 흐를 새도 없이 도로 짓쳐 박는 성기의 포악한 말뚝질에 그 자리에서 엉겨 붙기만 하다가 걸쭉하고 희부연 물거품으로 변질되었다.

그토록 게저분하게 흘레붙은 모양새로 서로를 탐하기 바쁜 두 사람의 성기는 이미 찰박찰박, 속된 물소리가 날 정도로 엉망이었다.

서수혁은 딱 대가리가 돌아 버릴 압착력으로 제 중심부를 머금고 죄는 쭐깃쭐깃한 안에 팔뚝만 한 음경을 흠쭉 처박았다. 뜨끈하기는 또 어찌나 뜨끈뜨끈한지 무슨 제 전용 탕에다가 아랫도리를 담가 내는 기분이었다.

퍽, 퍽, 퍼억! 남이 본다면 저 음낭 안쪽에 고인 되직한 정액을 이 음탕한 구멍에 칠갑을 할 욕망밖에 없다고 여길 정도로 게걸들린 자맥질이 이어졌다.

질길 전체가 그의 성기 모양으로 변하는 건 아닌가 싶을 만치 문란하고 저속한 허리 놀림에 희우는 배가 다 뻐근해졌다.

오늘따라 남자의 기세가 장난이 아녔다. 자칫하다가는 잡아먹힐 것처럼, 그야말로 장기가 상할 것처럼 다가와서 희우는 끝내 버티지 못하고 왈칵 눈물을 터뜨렸다.

운다고 봐줄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버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손바닥으로 뺨을 훔쳐 내며 애써 숨을 죽이는데, 더운 숨이 얼굴 위로 떨어졌다.

울렁거리는 시선을 드니 그 흐릿한 와중에도 어처구니가 없다는 식으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그에 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얼어붙어 버렸다.

“이건 뭐 조금만 다르게 하면 난장 피우고, 찔찔 짜고…….”

“…….”

“아기라 그러니? 어?”

떫게 뇌까린 서수혁이 희우의 팔을 잡았다. 그 상태에서 빙글, 자세가 전복됐다.

조금 전까지는 희우가 그의 아래에 있었는데 어느새 드러누운 서수혁의 허리에 올라탄 식이 되었다.

갑자기 몸이 바로 서는 바람에 현기증이 일어 희우는 저도 모르게 그의 배 위를 짚었다가 화들짝 떼어 냈다. 서수혁은 그러거나 말거나, 구석에 있던 베개를 끌어와 베며 나른히 채근했다.

“네가 직접 해 봐.”

“어…….”

데굴데굴 굴러가는 눈동자에서 소리가 날 것 같았다. 곤혹스러움과 당황스러움이 잔뜩 버무리 된 낯이 허옇게 질려 갔다.

“모, 못 하겠…….”

늘 정상위의 자세만 취하여 그가 원 없이 처박는 대로 아파하고, 바르작대고, 흠칫거리다가 끝이 나던 섹스였다. 그러니 느닷없이 행하라고 해도 머릿속에는 설익은 물음표만 떠올랐다.

“못 해?”

혀를 내어 윗입술을 축이던 서수혁이 픽 웃었다.

“못 하면 안 될 텐데?”

그게 그 무엇보다 무서운 겁박으로 돌아왔다.

희우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뭐라도 해야 할 거 같아서 몸 전체를 어색하게 흔들었다.

불필요한 움직임이 동반되기는 했으나 어쨌든 결합한 부위에도 확실히 자극이 가기는 했다. 하지만 그게 지금껏 속살 피막을 꽉 메울 기세로 요란히 땜질하던 남자의 성에 차겠는가.

“헉……!”

서수혁이 대뜸 팔을 뻗어 희우의 둔부 살을 꽉 쥐어 왔다. 그 상태에서 이렇게 움직이라고 알려 주듯이 강제적으로 몸을 뒤흔들었다.

그가 아무렇게나 휘두르는 힘에 따라 작고 가는 몸이 낭창낭창 휘청거렸다.

“으흣, 흑, 응…… 아! 으, 하으응……!”

그러며 조금 전 박아 줄 때마다 희우가 유난히 거북해하며 허리를 뒤채던 부분으로 귀두를 이끌었다.

정액을 게워 낼 기세로 긁어 댈 때에는 그저 정신줄을 놓을 것만 같았는데 이렇게 뭉근하게, 나른하게 허리를 돌리는 운동 아래에서는 성감이 차차로 오르는 것이 너무 선명히 느껴졌다.

“으, 이, 이거 안 될…….”

금방이라도 엎어질 것처럼 어중간한 자세를 지탱하기 위하여 결국 짚고 말아 버린 그의 가슴팍 위에서 손가락이 잔뜩 오므라들었다.

“왜?”

서수혁은 이미 다 알고 있음에도 물었다. 섹스에 열이 올라서 그런지 평소보다 유난히 관능이 넘쳐흐르는 미소가 그의 입가에 아슬하게 걸렸다.

“좋아서?”

“아, 아읏! 응…… 흐으……!”

“불감증인가 했더니, 잘만 느끼네.”

“흣, 거기 안, 읏, 안, 아아…….”

“생각보다 깊은데……. 하아, 너 위로 긁듯이 쑤셔 주는 거 좋아하는구나?”

서수혁이 희우의 엉덩이를 한층 더 강하게 움켜쥐어 왔다. 벌어진 손가락 사이로 흰 살점이 삐죽 튀어나올 만큼. 그 상태에서 서수혁은 이제껏 방기하듯 늘어뜨리고 있던 아랫도리를 핀치 빠르게 쳐올리며 따끈따끈 열 오른 질을 때려 박았다.

“아! 아, 아아…… 앗, 으, 흑! 으으응!”

비말이 빠르게 튀어 올라 아래 깔린 예쁘면서도 기세 좋은 부자지와 어느새 무릎을 세운 허벅지, 심지어 서수혁의 가슴팍에까지 질척하게 묻어났다. 정신없이 분사되는 체액에 서수혁은 사나운 웃음기를 머금었다.

“그래, 내가, 미안하네.”

“으, 앗, 아응, 응……! 잠, 하, 이거, 아!”

“좋아 뒤지는 곳 놔두고 이제껏 애먼 곳만 쑤셔 댔으니 얼마나 애가 타.”

성감으로 융기한 질 구멍이 헐 정도로 음탕한 쑤심질에 희우의 입에서 높고 날카로운 감창 소리가 쉼 없이 터져 나왔다.

서수혁은 쥐고 있던 엉덩이를 찰싹! 마찰음이 일게 후려쳤다. 정신이 아른아른하게 풀려 침을 흘릴 것처럼 입을 헤벌리고 있던 희우가 힉, 하며 전신을 떨었다.

그는 워낙 피부가 약해 제 손찌검 한 번에도 벌써 벌겋게 물이 들었을 엉덩이를 상상하며 매만지다가 어느 구간을 손톱으로 긁었다.

그러자 위에 놓인 여체가 한층 더 요란하게 떨어 댔다. 흡사 심장이 긁힌 것만 같은 반응이었다.

그럴 만도 한 구간이었다. 지금 서수혁이 긁고 있는 건 바로 성기를 머금을 때마다 홀쭉 팬 모양새가 마음에 들어 절로 군침이 나는 엉덩이 보조개였으니.

그는 하얀 볼기짝을 쥐어 엉망으로 뭉그러뜨리다가 틈틈이 보조개를 찌르고 긁으며 그 부분을 자극했다.

“하아, 하윽, 아으, 으, 아, 아응……!”

생전 처음 맞이하는 쾌락에, 낚싯줄에 걸린 물고기처럼 사지를 주체 못 하고 파닥거리기 바쁜 희우를 올려다보며 서수혁이 픽 쪼갰다.

“이게 지금, 누구 좋으라고 하는 씹인지 모르겠는데.”

그리고 곧장 희우의 머리칼 사이로 그의 손가락이 꽂혀 들어왔다. 머리채를 잡아 아래로 꽉 내리는 손길에 희우의 젖가슴이 그의 가슴팍 위로 뭉개졌다.

“침 뱉어, 내 입에.”

귀가 아릴 정도로 낮은 저음이 명령했다.

희우는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도 반사적으로 혀를 굴려 아무렇게나 타액을 흘려보냈다.

조잡하게 뭉쳐 그의 것과 다르게 점성이 그다지 높지 않은 침이 살짝 벌린 그의 입 안으로 추락했다. 서수혁은 바로 다음 순간 희우의 뒤통수를 확 끌어당겨 이가 쩡 부딪힐 정도로 세게 입을 맞췄다.

자세는 금세 다시 바뀌었다.

어느새 희우의 등이 침대에 닿았다. 아무래도 기승위로는 제 딴에 만족스러운 떡맛을 뽑아내기가 어려웠던 건지 서수혁은 희우의 자그마한 혀를 아작 깨물며 그녀의 양다리를 팔뚝에 걸었다. 그 상태에서 또다시 제 사특한 육욕을 나사 뺀 양 풀어 헤쳐 댔다.

페니스가 시원한 방뇨라도 할 기세로 꺼떡이며 질벽 살을 거칠게 기어오를 때마다 희우의 머릿속에서 따가운 불빛이 터졌다.

푸욱, 하고 한 번의 제동 없이 깊다랗게 꿰뚫을 때마다 그의 도톰한 귀두 모양 그대로 아랫배가 볼록 들어 올려졌다. 자신의 아랫배가 내떨리는 건지, 그의 귀두가 채신을 모르고 제집이 여기라 주장하는 건지 분별하기 어려웠다.

“아, 아, 읏……!”

희우는 이제 똑똑히 정의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아픔이 아니었다.

혀로 먼저 농탕질을 당하여 적당히 풀어진 질막은 지금에 이르러 완전히 달아올라 기둥을 쭈웁쭈웁 한 뼘씩으로라도 들이빨고 있었다.

수컷다운 맹렬한 좆질이 있어야지만이 열리는 협소한 자궁구 아래 부근까지 진입할 수 있도록 통로를 활짝 벌리고서 매끄러운 애액을 봇물 터지듯 철철 흘려보냈다.

그게 머릿속이 뒤집어질 것처럼 낯설고 이상했다.

희우에게 있어서 이건 분명 강간이었다.

자신의 의지로 서수혁에게 안기는 게 아니니까. 그가 무서워서, 그가 때릴까 봐 마지못해 다리를 벌리고 구멍을 내어 주는 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래서는 안 된다는 모순이 한층 더 강하게 몰아쳤다.

억지로 당하는 건데 느끼다니.

쾌락을 느끼다니.

곱씹을수록 솜털이 삐죽 설 만치 역한 소름이 끼쳐 왔다. 특히나 여전히 정교한 허리 각으로 내부 살을 파헤쳐 살기둥을 물씬 비벼 오는 행태에, 액이 바깥으로 찍찍 흘러넘치는 제 아랫도리의 사정이 그러했다.

아기집이 소담히 자리한 부근에서 회오리치듯 이는 전율의 희락이 몸서리쳐지게 끔찍했다. 거부감이 역류하는 물살처럼 괴어올랐다.

“흐, 시, 싫어. 싫…… 어!”

희우는 무의식적으로 서수혁의 가슴팍을 밀어 냈다.

하지만 그녀 못지않게 흥분하여 격렬한 허리 운동에 공을 들이고 있는 서수혁에게 그 가냘픈 손짓이 먹힐 리 없었다.

애초에 먹히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그는 희우가 제 싸대기를 힘껏 친대도 꿈쩍하지 않을 태세로 포근한 안을 뭉개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완전히 색에 미친 인간처럼 움직임에 절제가 없고, 동공 속 초점이 험하게 갈라졌다.

하지만 그게 한 번이면 몰라도 계속되니 끝내 심기를 건드리게 될 수밖에 없었다.

짜악!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뜨이고 나서야 희우는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는 걸 깨달았다. 삐이- 치료를 통해 가까스로 그쳤던 이명이 작게 되살아나 고막을 썰어 먹었다.

위에 올라탄 서수혁마저도 박차를 가하며 샅을 찰싹찰싹 후려갈기던 움직임을 우뚝 멈추었다.

망연히 넋을 놓고 있던 희우는 차츰 뺨 위로 번지는 후끈한 통증에 더듬더듬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제야 쿵쿵대는 방아질을 제지당한 서수혁이 제 뺨을 후려친 걸 깨달았다.

“아, 씨발.”

돌아간 안면 아래로 신랄한 욕지거리가 하강했다. 그 목소리에 담긴 감정이 뭔지 분별이 안 되어 더 섬찟했다.

한순간 찡 얼어붙어 버린 심장은 서서히 풀어지며 동시에 죽어 가는 이의 그것처럼 템포를 느리고 약하게 낮추었다. 납빛 공포와 두려움을 체득한 몸이 내보이는 이른바 질겁이었다.

아연해져 저를 쳐다보지도 못하는 희우를 아래에 깐 채로 서수혁이 흑발을 쓸어 넘겼다. 순식간에 붕괴된 분위기처럼 그의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

후, 하고 깊이 숨을 들이마신 서수혁이 희우의 턱 위로 손을 올렸다.

그저 손인데, 아주 잘 벼린 칼날이라도 와 닿은 것처럼 파들거리는 움직임에 할 말을 잃었다.

고의로 그런 건 아니었다.

미적 조예가 없다고 한들 세상을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일정 수준의 심미관을 지니고 있다. 이왕이면 예쁘고 보기 좋은 걸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는 말이다.

희본과 굉장히 닮은 이 상판에서도 그는 그런 모호하고 난해한, 하지만 그만큼 말초적인 욕망을 느꼈다. 그러니까 도끼에게 보내면서도 얼굴은 건드리지 말라고 당부한 거고.

최 사장이 좆대로 퐁당질을 해 대서 얼결에 가져 버린 첫날밤 역시 그랬다. 얼굴 면적에 허연 부분이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엉망진창 피멍이 든 꼴을 보고 속에서 탄식부터 새어 나오지 않았던가.

방금 무심코 손을 휘두른 건 그간 그가 이따금 행해 온 짓이어서였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다른 여자들과 섹스를 할 때에 고막을 찢을 기세로 시끄러운 교성을 지르면, 닥치라는 말을 하기도 귀찮아 뺨을 짝 소리 나게 올려 치거나 아예 숨도 못 쉬게 주둥이를 틀어막았었다. 그런 행동 한 번이면 굳이 번거롭게 혀를 놀릴 필요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서수혁은 술에 취하지도, 약에 이성과 본능이 분리되지도 않았다.

고로 그런 같잖은 기집년들과 희우를 정확히 구별하는 상황에서 잔혹한 손찌검을 행했다는 건, 이 섹스에 완전히 정신머리가 나가 있었다는 뜻이었다.

보기 좋다는 단순한 이유로 지키려고 했던 그 얼굴에 맨정신으로 싸대기질을 한 건 도저히 그로밖에 설명이 되지 않았다.

결론에 도달하니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그에게 있어서 성욕은 우선순위가 되지 못했다.

365일 발정기인 것처럼 갈보들을 끼고서 품방아를 즐기기 바쁜 도끼나 그 밖의 머저리들과 달리 그는 매사 해도 그만, 아니어도 그만인 양 시큰둥한 쪽이었다. 기회가 오면 마다하진 않으나 그게 아니라면 굳이 나서서 찾지는 않는다는 거다.

물론 좆 달린 수컷은 맞기에, 때때로 성기를 통으로 옥죄어 기분 좋은 성희를 이끄는 빠구리질이 생각나기는 했으나 그것도 담배 한 대를 태우면 금세 연기와 함께 날아가고 마는 잡념에 가까웠다.

그런 자신이 천지 분간 못 하는 애새끼처럼, 완전히 처음 동정을 내다 버린 숙맥처럼 굴어 버렸다는 건 한심하다고 평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서수혁은 잠시 소강된 분위기에 축 늘어진 희우의 늘씬한 다리를 붙잡았다. 그걸 제 다부진 허리춤에 엇걸게 하고는 반쯤 빠진 페니스를 꾸우욱 눌러 박았다.

가늘고 여린 몸에 잔뜩 힘이 들어갔으나 희우는 아까처럼 그를 잡는 대신에 이불만 쥐어뜯어 댔다.

소심한 항변 같은 그 몸짓에 서수혁은 소리 없이 혀를 내둘렀다. 물론 희우는 지금 무서워서 떨기 바쁜 심정이겠으나, 뭐가 되었든 서수혁의 눈에 그건 항변 비스무리한 식으로 읽혔다.

그가 희우의 손목을 확 낚아챘다. 그러며 뒤늦게야 손바닥과 정통으로 마찰한 입가가 터진 걸 발견했다.

겨우 낫게 해 놨더니, 씨팔.

손이 딸려 가며 반사적으로 이쪽을 돌아보던 희우는 상처가 당겨 와 아팠는지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실수.”

미안하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다.

그런 부연 설명 하나 없이 오직 저 단어 하나만 찍 뱉은 서수혁은 이것으로 제가 할 일은 다 했다는 것처럼 희우의 팔을 제 목에 두르게 만들었다.

저를 정면으로 삼듯이 돌아온 투명한 눈동자에 수분기가 그렁그렁했다. 눈을 질끈 감으면 애처로운 눈물 줄기가 뺨을 타고 주르륵 흐를 것 같았다.

이번에도 어떤 사고라기보다는 흥미 본위로 움직였다. 창백하게 질린 희우의 뺨을 길게 핥은 거였다.

헉, 하고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깜박거렸는지 기어이 흘러내린 물줄기가 서수혁의 혀끝을 적셨다. 그것을 모조리 핥아 먹은 서수혁은 야들야들한 볼살 위에 이를 박으며 성교 운동을 재차 재개했다.

섹스가 다시 시작되었으나 이번에 희우는 그를 밀 필요가 없었다.

배 속에서 절정감이 거부할 수 없는 파도처럼 밀려오는, 달콤해서 더 끔찍했던 감각은 이미 다 죽어 버린 지 오래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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