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볼모의 경계 (1)
‘희우야. 한 번만. 응? 딱 한 번만 같이 가 주면 안 돼?’
대학교 재학 당시의 일이었다.
그 무렵 즘 친하게 지내던 동기 하나가 강의가 끝나기 무섭게 희우의 팔을 붙들며 사정사정했다.
‘거기 엄청 용하다고 소문나서 예약하려고 세 달이나 기다렸단 말이야. 친구 데리고 오면 간단히 봐 주기도 한대. 그니까 나랑 같이 가 보자. 응? 응?’
희우는 제 팔을 잡아끌며 소지품을 챙기는 행동까지 방해하는 동기를 떨떠름한 얼굴로 보았다. 아침부터 뭔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연신 눈치를 살피기에 무슨 일인가 했더니, 이런 부탁을 하려고 그리 애를 끓고 있었나 보다.
‘난 그런 거 관심 없어.’
‘아이, 그러지 말구. 나 혼자 가기는 무서워서 그래. 왜, 막 점집에 귀신도 많이 나온다잖아. 분위기도 엄청 으스스하구.’
‘그렇게 무서우면 그냥 예약을 하지 말지 그랬어?’
‘그래도 궁금하잖아. 인터넷 후기 찾아보니까 완전 족집게가 따로 없대. 말 안 한 것까지 다 맞추고 그런다나 봐. 신내림 받은 지 얼마 안 된 무당이라 그랬나? 그래서 기운이 엄청 좋은 것 같다고 그러더라.’
요 며칠간 집안일도 잘 안 풀리고 연애 쪽도 영 신통찮다고 이따금 푸념을 하더니. 끝내 답답한 마음이 그런 쪽으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희우는 방해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챙긴 가방을 어깨에 걸쳤다. 좀체 넘어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마음이 급해졌는지 동기가 서둘러 덧붙였다.
‘같이 가 주면 내가 저녁 쏠게!’
희우의 움직임을 잡아챈 건 외려 그 별 볼 일 없는 제안이었다. 그러잖아도 오늘 희본이 늦을 예정이라고 연락을 보내는 통에 저녁은 뭐로 때워야 하나 고민하던 차였다.
‘비싸고 맛있는 거로! 가격 상관없이!’
‘콜.’
희우는 결국 저녁 식사 한 끼에 넘어갔다.
그렇게 캠퍼스를 나서 도착한 점집은 꽤나 구석지고 으슥한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일반 상가처럼 보이는 거리에서 발을 틀어 골목길의 안쪽, 그보다 더 안쪽으로 들어서니 허름한 외관에 꾸밈없이 한자만 새겨진 간판 하나 덜렁 있는 모양새였다.
촤르륵. 입구를 가린 묘한 빛깔의 옥 주렴을 걷고서 안으로 들어섰다.
정작 여기로 끌고 온 건 동기인데 그녀는 벌써부터 겁을 먹은 것처럼 별것 아닌 소리에도 어깨를 움찔움찔 떨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만 희우 역시 긴장하긴 매한가지였다.
자연히 위축될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다.
천장에 주변을 밝히기 위하여 켜진 조명이 여러 개인데도 캄캄한 밤 속에 빠진 것처럼 선뜻 입을 열거나 발을 내디디기가 어려운 정경이었다.
동기가 직원을 통해 예약 정보를 확인하는 동안 희우는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저거 하여튼, 저 팔자 더러운 년.
분위기가 썩 꺼림칙해서인지 아님 여기가 누군가의 운명을 낱낱이 까발려 주는 점집이라서인지, 그간 잊고 살았던 외삼촌의 성난 목소리가 이명처럼 떠올랐다.
이래서 오기 싫었는데.
희우가 소리 없이 한숨을 삼키는 사이 확인이 끝난 건지 동기가 어딘가를 가리켰다.
안내를 받아 걸음한 공간은 작은 밀실이었다. 아무래도 이곳의 무당이 자신의 신을 모시는 신당인 모양이었다.
막 들어올 때 걷어 올렸던 옥 주렴처럼 다채로운 빛깔로 물든 여러 구슬의 발이 벽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 뒤로 언뜻언뜻 보이는 그림은 귀신인지 장승인지 모를 해괴한 것들뿐이었다. 언뜻 탱화 같기도 했다. 그 앞 단상에는 밀랍초와 정체 모를 모형도 몇 개 있었다.
거부감부터 치밀어 오르는 내부의 전경에 적응하지 못하는데 동기가 희우의 팔목을 잡아 억지로 끌어 앉혔다.
딸랑.
무릎이 바닥에 닿고, 고개를 바로 하기 무섭게 방울 소리가 들렸다.
체리목 빛깔의 탁상. 그를 사이에 두고 앉은 한 여자가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으스스한 낌새를 한층 더 을씨년스럽게 만드는 소리는 그녀가 든 무당 방울에서 나는 것이었다.
희우는 손님의 것인 양 마련된 수방석에 조심스레 엉덩이를 붙였다. 동기는 알게 모르게 쌓인 게 많았는지 자리에 앉기 무섭게 폭포수 같은 말을 쏟아 내었다. 그도 얼마 안 가 ‘조용.’ 하고 재잘거림을 단속하는 무당의 불호령에 그치게 되었지만.
동기가 사주를 보는 동안 희우는 무당을 살펴보았다. 연한 빛깔의 한복으로 외양을 치장한 그녀는 이따금 방울을 흔들었다.
정말 귀신이 보이고 그러나?
이 공간에 뭐가 있기는 있나, 싶은 생각에 희우는 조용히 눈을 굴렸다. 그러다가 어깨를 툭툭 치는 동기의 부름에 정신을 바로 했다.
“응?”
“이거, 적으래.”
일행을 데리고 오면 같이 봐 주기도 한다는 게 거짓은 아니었는지 앞에 연월일시의 네 간지(干支)를 적을 수 있는 종이가 놓여 있었다.
용하다는 것 역시 사실이었는지 무당이 입을 열 때마다 동기의 눈은 튀어나올 기세로 커지고는 했다. 꼭 어느 종교의 맹신도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속도 역시 점차 빨라졌다.
저런 거 그냥 다 엉겁결에 때려 맞추는 거 아닌가…….
환경적인 이유로 끼워진 색안경 때문일지 몰라도 희우는 한 줌의 의구심도 내려놓지 못하고서 상황을 관전했다.
‘얘, 너 이거 제대로 적은 거 맞니?’
꼭 뭔가에 씐 것처럼 좀처럼 표정에 변화가 없던 무당이 대뜸 이맛살을 찌푸린 건 잠시 후였다.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희우가 내민 종이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저렇게 물은 것이었다.
‘무슨 팔자가 이렇게 사나워?’
그 순간 나쁜 기억이 삐죽 솟아올랐다. 외삼촌이 저만 보면 입에 달고 살던 팔자 얘기였다. 그게 지금, 이 근방에 용하기로 소문났다는 무당의 입에서도 동일하게 흘러나오니 기분이 단박에 묘해졌다.
가감 없이 터져 나온 직언에 외려 놀란 건 동기였다. ‘네?’ 하고 되묻는 동기와 달리 희우는 무당을 가만 응시하다가 톡 던져진 말에 조금 더 깊이 파고 들어가기를 택했다.
‘어떻게 사나운데요?’
미간에 새겨진 몇 자락의 주름이 조금씩 연해졌다. 무당은 아까처럼 색채감이 지워진 표정으로 돌아왔다. 텅 빈 것처럼 공허하게 가라앉은 동공의 변화가 오소소한 소름을 유발했다.
‘삶이 불이야. 그것도 그냥 불이 아니라 마른 들판에 붙은 불. 그래서 바람이 불지 않아도 여기저기로 번져 나가는…….’
‘…….’
‘너, 남 잡아먹는 팔자라고 들어 봤니? 그게 딱 너 같은 애를 두고 하는 말인데.’
무릎 위에 얌전히 놓여 있던 희우의 손이 동그란 모양으로 꽉 말렸다.
‘그게 무슨…….’
‘보아하니.’
딸랑. 무당이 손에 든 방울이 고막을 흉기처럼 찔렀다.
‘명이 길지는 못하겠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어차피 이런 거, 다 의미 없다고 여기고 있었을 텐데. 그럼에도 무의식적으로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갑자기 죽은 엄마가 떠올랐다. 아니, 그게 아니라 엄마가 죽을 때인가. 어쨌든 여러 이유에서 표정 관리가 잘 되지 않았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이번 역시 반응을 보인 건 동기였다.
내용이 내용이니만큼 완곡하게 말하는 것도 아니고 적정선을 가뿐히 넘어서 버린 직설 화법에 무진 당황한 동기는 희우의 팔을 잡고서 몸을 일으켰다. 저 때문에 졸지에 끌려왔다가 이런 식의 독설을 듣게 한 것이 미안한 눈치였다.
‘이만 가자, 희우야.’
여전히 생각에 잠겨 있던 희우는 저를 잡아끄는 동기를 따라 어영부영 몸을 일으켰다.
‘얘.’
비늘을 두른 뱀처럼 서늘한 목소리가 문지방을 넘으려는 희우의 발목을 콱 물었다. 어떠한 사고를 할 새도 없이 반사적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너 맞불 작전이라고 아니?’
무당은 자신을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희우가 끄적끄적 열없이 적어 둔 종이를 보고 있었다. 단지 때려 맞춘 게 아니라, 되는대로 지껄인 게 아니라, 정말 그 안에서 뭔가를 똑똑히 엿보고 있기라도 하듯이.
머지않아 음영이 짙게 드리운 얼굴이 천천히 위를 향했다.
딸랑. 방울 소리가 다시 울렸다.
희한할 일이었다.
무당은 이번에 방울을 흔들지 않았다.
‘넌 너보다 더 큰 불한테 잡아먹혀야 해. 그래야 그 사나운 게 멎을 팔자야.’
‘…….’
‘세간에서는 큰 화를 입는다고 표현하지?’
‘…….’
‘넌 그걸 당해야 살아.’
무당의 눈에는 한 점의 망설임도 발견할 수 없었다. 미련이나 의구심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제가 꺼낸 말만이 해답이 될 수 있다는 것처럼 짓궂게도 명료할 뿐이었다.
둔중한 소리가 의식 밑바닥을 두드렸다.
“……님.”
“…….”
“희우 님?”
잔바람처럼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다가온 육성이 희우를 잠결에서 끄집어냈다.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한 번에 찾지 못해서 눈을 몇 번이고 굴려야 했다.
조금 늦은 후에야 문가에 선 여자를 발견했다.
시선이 마주치자 여자가 싱긋 웃었다. 그림같이 예쁜 미소는 친절하면서 형식적이었다.
“식사하셔야죠.”
바른 자세와 다르게 그녀는 한쪽 손을 어중간하게 들고 있었다. 그제야 희우는 여자가 노크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듣지 못했다.
“아, 네.”
목이 칼칼했다.
희우는 작은 헛기침과 함께 윙체어의 팔걸이에 걸치고 있던 두 다리를 내렸다. 아직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못한 몸은 감각이 더뎠다. 그래서 무릎에 펼쳐 놓은지도 몰랐던 책이 느린 몸짓을 따라 바닥으로 쿵 추락했다.
활짝 펴진 페이지의 양쪽에는 학교 수업 시간에 자료로 쓰이던 명화가 사진으로 첨부되어 있었다. 그것을 주워 탁탁 턴 뒤 탁자에 올려 두었다.
그 바로 옆에 희우의 노트북이 놓여 있었다. 상면을 덮개처럼 덮어 두었으나 그 아래로 선득한 핏자국은 또렷하게 묻어져 있었다.
희우는 못 본 체하듯 눈을 돌렸다.
윙체어에서 일어난 희우는 주위를 쓱 돌아보았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는 책장에는 이곳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미술사학 책이 몇 권 꽂혀 있었다.
‘너 도망치면 죽어.’
‘…….’
‘알겠니?’
머리채가 잡히고 얼굴 여기저기가 시뻘건 피로 얼룩진 상태에서 들었던 경고.
그 말을 할 때 조금의 웃음기도 찾아볼 수 없었던 태도처럼 남자는 진심이었다.
그 후 희우가 희본과 함께 지냈던 단칸방은 서수혁에 의하여 정리됐다. 그리고 그곳에 있던 희우의 짐은 필요한 것만 추려져 이 집으로 보내졌다. 도망갈 생각조차 하지 말라는 것처럼, 그녀가 도피구로 택할 만한 장소를 아예 뿌리째 뽑아 버린 것이었다.
더 이상 희우는 돌아갈 곳이 없었다.
하루아침에 증발해 버린 희본도 그랬다.
이제 그들이 귀환할 수 있는 장소는 오로지 하나, 서수혁뿐이었다.
먼저 걸음을 뗀 여자를 따라 희우 역시 서재를 나섰다. 깨끗하고 차가운 느낌의 대리석 바닥을 가로지르는데 감각이 불안하게 기울고 소리가 둔탁했다.
희우는 습관적으로 귓바퀴를 문질렀다.
이곳, 서수혁의 자택으로 돌아온 후 그녀는 꼬박 사흘간 고열을 앓았다. 그리고 얼추 정신을 차렸을 즈음 한쪽 귀가 이상해졌다는 걸 깨달았다.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때, 도끼가 억세게 꽂아 대던 타격 뒤로 날카로운 이명이 따라붙고 질척한 피가 고였던 바로 그 부위였다. 그쪽 귀는 간헐적으로 고장이 나는 것처럼 속수무책으로 먹먹해졌다. 조금 전 여자가 문을 두드리던 노크 소리를 듣지 못한 것도 그 탓이었다.
고장의 빈도는 가면 갈수록 잦아졌으나 희우는 열없이 손을 떨어뜨리는 걸로 대응을 그쳤다.
다이닝룸 쪽으로 향하니 이미 먹음직스러운 한 상이 차려져 있었다. 앞서 와 있던 여자가 앉으라는 것처럼 친절히 의자를 빼 주었다. 비서를 연상시킬 법한 투피스 정장을 차려입은 여자는 그런 불편한 복장으로 잘도 움직였다.
이렇게 음식이 많은데도 여전히 부족한지 둥글고 오목한 접시 하나를 더 내온 여자의 눈길이 희우의 뺨을 쓱 스쳤다.
“식사 다 하시면 약 발라 드릴게요.”
도끼에게 함부로 폭행을 당해 얼룩덜룩해진 피부의 혈음은 많이 나아진 상태였다. 그러나 여전히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 자국이 선한 건 분명했다.
고열을 앓은 뒤 생긴 첫 번째의 변화가 한쪽 귀의 고장이라면, 두 번째는 바로 이 여자의 존재였다.
서수혁은 그녀를 주 실장이라고 불렀다. 그녀는 정오가 되기 전쯤 나타나서 오후 4시 무렵 즘 자취를 감추었다. 묻지 않았으나 희우는 여자의 존재를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곳에 상주하며 자신의 식사와 케어를 책임지는 가정부였다.
……그 목적도 있겠지만, 실상 그보다 더 근원적인 목적이 있었다.
감시였다.
제가 멋대로, 함부로 이곳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꽂아 둔 서수혁의 심복.
“물 한 잔 드릴까요?”
희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가 건네는 젓가락을 받았다. 어떠한 그릇으로 뻗기도 전에 손을 한 번 말아쥐었다가 푸는 행동부터 했다. 이 이상한 강박은 식탁 위에 올라온 고기를 볼 때마다 튀어나왔다.
그날 이후였나?
고기에 손도 대지 못하고, 쳐다도 보지 못하게 된 게.
육고기를 볼 때마다 뚝 끊어졌던 도끼의 손이 자꾸만 생각났다. 단절된 뼈와 그 주위를 감싸는 근육, 시뻘건 살점이 흉기로 인해 써걱써걱 잘려 나간 소리와 그것이 나뒹구는 처참한 광경. 그 주변으로 잔뜩 쏟아졌던 과다한 출혈.
그야말로 도륙이나 진배없는 장면이 신물처럼 차올라서 그렇지 않아도 없던 식욕은 완전히 바닥을 쳤다.
희우는 욱, 하고 목구멍을 두드리는 욕지기를 간신히 참아 내며 물을 삼켰다.
실장은 눈치가 빨랐다. 상 위에 올라온 고기를 보며 희우의 안색이 허옇게 질릴 때마다 티 나지 않는 손길로 그것을 치워 주었다.
그럼에도 매 끼니마다 들이미는 건 그녀의 의지라기보다는 서수혁의 지시일 테다.
그녀도 어쩔 수 없는 서수혁의 사람이니까.
거의 풀떼기를 주워 먹은 거나 다름없는 식사를 여차저차 끝낸 뒤 실장은 희우의 뺨과 코 주변에 꼼꼼히 약을 발라 주고는 이만 퇴근했다.
혼자 남겨진 희우는 서재에 놓인 노트북을 가지고 와 거실 소파에 앉았다.
‘휴학 처리는 잘됐을까?’
또다시 먹먹하게 가라앉은 귀를 소파 등받이에 묻은 채로 노트북을 만지작거렸다. 이런 와중에도 학교생활을 걱정하게 되는 건, 이 역시도 희본의 노력이 깃들어 있어서였다.
알바도 못 하게 하고, 아침마다 한 숟갈이라도 더 먹이려고 하면서 희본은 희우를 학업에만 전념하게 하려고 애썼다. 그렇다 보니 이대로 학교생활을 포기하는 건 오빠의 그러한 노력을 죄 물거품으로 만드는 것 같아 미안했다.
희우는 주저하다가 노트북 덮개를 밀어 올렸다.
피로 얼룩진 자판이 별로 먹은 것도 없는 속을 뒤집을 것처럼 다가왔다.
희우는 상단부의 전원 버튼을 꾹 눌렀다. 꺼먼 화면은 암전된 채 들어오지 않았다. 벌써 몇 번이고 해 본 행동임에도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는 이처럼 이 짓을 거푸 반복하게 된다.
중고인 데다가 자주 고장이 나곤 하던 노트북은 지난날의 사건 이후로 완전히 먹통이 되었다. 도끼에게서 흩뿌려진 피가 일으킨 말썽이었다.
남자가 제게 이 전자 기기를 선뜻 내어 준 이유도 그에 있었다. 어차피 가지고 있어도 쓸 수 없음을 알기에.
제 얼굴이 비칠 만큼 까만 화면을 적적히 마주하던 차였다.
쿵- 달팽이관이 흠칫하며 몸을 말 정도로 큰 소리가 났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였다. 그에 희우는 무릎 위에 놓아둔 노트북을 얼른 소파 쿠션 아래에 숨기고서 어물어물 몸을 일으켰다.
복도를 거쳐 안으로 들어서던 서수혁은 그런 희우를 발견하고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러나 정말 잠시였다. 빈틈없이 빽빽한 검정 일색의 눈동자는 익숙하게 희우의 얼굴을 훔치고는 침실 쪽으로 향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류가 통하는 것처럼 꼿꼿하게 긴장해 있던 희우는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고서야 숨을 삼켰다.
그러나 그러한 안심은 얼마 가지 못했다.
서수혁이 돌아왔으니, 고역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희우는 생쥐처럼 고요히 머물 적 사용하던 침실로 향했다. 한쪽에 구비된 옷장으로 가 입고 있던 옷을 잘 벗어 두었다. 속옷이 남자의 수중에 들어가면 멀쩡하게 돌아오는 꼴이 없으니 그것도 잘 벗어 두었다.
그가 앞서 향했던 침실로 걸음하자 안쪽에서 물이 쏴아아, 하고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마음이 급해졌다.
서수혁이 샤워를 마치기 전에 그의 앞에 나타나야 했다. 작은 침실에 놓인 것과 달리 사람 열 명도 숨을 수 있을 법한 드레스룸의 행거에서 로브 가운을 하나 끄집어냈다.
속옷 없이 맨몸에 가운만 걸치는 것은 서수혁의 취향이었고, 샤워가 끝나기 전에 나타날 것은 서수혁의 지시였다.
그걸 어기면 안 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직감하면서도, 이후 벌어질 행위를 생각하다 보면 늘 제동이 걸렸다. 물소리가 멎지 않는 욕실 앞에서 걸음이 무겁게 멈췄다.
노크를 하지 못하고 숨만 죽이고 있다가 돌연 뚝 그치는 물소리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늦게 와도 상관은 없어.’
‘…….’
‘근데 그럼 내가 네 가랑이를 생으로 뜯어 먹게 되겠지.’
썩 심드렁한 어조로 내놓은 간 떨리는 경고를 되뇌고 있노라면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희우는 노크를 하고 문고리를 밀었다.
짐작대로 막 샤워를 마친 듯 서수혁은 욕조 턱에 기대앉아 있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음에도 태산처럼, 또 조각처럼 자리한 나체는 어느 추태 하나 느끼지 못할 만큼 천연덕스레 자기 자신을 드러냈다. 언뜻 부족함을 직접 찾아보라는 과시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당당함이었다.
나른하게 늘어뜨린 입술의 중앙에는 분필 같은 막대기가 하나 물려 있었다. 이제 막 태운 듯 조금씩 솟아오르는 연기가 욕실의 김과 뒤얽혀 몽롱한 기류를 자아냈다.
가로질러 그에게로 가는 욕실 바닥은 샤워의 여파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이럴 때마다 희우는 다른 이라면 무조건 피하고 드는 늪지 속으로 자진하여 걸어 들어가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남자가 입매를 움츠릴 때마다 연기가 한 번씩 짙게 뿜어져 나왔다. 그는 마침내 제 앞에 당도한 희우에게 지긋한 눈길을 꽂았다. 얇은 가운 하나 걸친 몸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언제든 스러질 수 있을 법하게 존재했다. 사내의 앞에서 희우는 언제나 이랬다.
그의 눈길이, 가시지 않은 멍으로 얼룩진 뺨을 문댄 뒤 서서히 쓸고 내려와 오목하게 파인 가슴골을 찌르고 있음이 신경 한 알 한 알을 곤두세웠다.
희우는 사이즈가 커서 과도하게 벌어지는, 그래서 풍만하게 밀집된 젖가슴만 간신히 가리고 앙가슴은 훤히 노출시키는 옷깃을 그러쥐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하지만 그건 희우에게 허락된 행동이 아니었다. 가실 듯해도 저 무기질적인 눈만 대면하면 맹렬하게 살아 오르는 두려움은 희우로 하여금 무력감을 새겨 넣었다.
서수혁은 이로만 지근지근 물던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걸어 내렸다. 시선 역시도 비스듬히 틀어졌다.
이번엔 젖꼭지를 보고 있다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물기로 젖어 든 희우의 양 발끝이 소심하게 모아졌다. 남자는 단지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상스럽게 희롱당하는 기분을 잘도 끼쳤다. 사실상 어떠한 자극도 받지 않았거늘 가운 아래로 숨겨진 유두가 괜스레 움찔거리는 걸 보면 착각은 아닐 터였다.
그는 욕조의 안쪽 면에 담배를 아무렇게나 지져 껐다. 무도하고 무감한 손길 아래에서 화한 기운으로 지펴진 불씨가 완전히 꺼졌다.
그건 하나의 신호와 일맥상통했다. 희우는 허리춤에 엉성하게 묶인 가운의 끈을 풀고서 그에게로 한 걸음 한 걸음을 디뎠다.
서수혁이 이리로 들어오라는 것처럼 근육으로 갈라진 양 허벅지를 벌렸다. 원체 튼실하고 볼륨감이 지대해 비발기 상태일 때엔 허벅지에 얹어 둘 수도 있는 살덩이가 자연히 중앙으로 빠졌다. 덜렁이며 축 늘어지는 무게감이 시야로까지 전해져 올 만큼 소름 돋는 크기였다.
희우가 침을 꼴깍 삼켰을 때에는 이미 모든 게 제자리를 갖추었다. 그녀가 한 겹 걸치고 있던 가운은 욕실 바닥으로 추락하여 물기로 젖어 들었으며 서수혁은 제 허벅지 사이로 기어들어 온 여자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읏…….”
조금 전까지 연초를 굴리던 있던 손바닥이 목표를 바꾼 양 희우의 엉덩이를 터뜨릴 기세로 쥐었다. 그 상태로 반죽이라도 하듯 몇 번 주물럭대다가 회음과 질구, 그 아래 은밀한 구멍까지 다 드러날 만큼 쭉 잡아 벌렸다. 건조하게 말라붙은 회음부의 살점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는 익숙하게 손을 놀려 욕조 가까이 비치된 튜브형 젤을 가져왔다. 이로 무심히 뚜껑을 따고는 튜브의 입구를 희우의 엉덩이 사이로 들이밀었다. 몇 번 더듬거리다가 이내 구멍을 찾아냈는지 그것을 쑥 들이밀었다.
아으, 희우의 입에서 반사적인 신음이 터지자 그가 힐끗 위를 올려다보았다. 치들린 동공에는 매끄러운 윤기가 감돌고 있으나 그건 사내 본연의 것이 아닌 욕실의 조명에 의한 빛점이라고 보는 게 옳았다. 남자의 동공은 때때로 지나치게 어둡게 보여서 공포심을 유발할 때가 잦으니까 말이다.
“매일 쑤셔도 참.”
서수혁은 매번 애를 먹게 하는 구멍을 혼이라도 내듯 쯧, 혀를 차며 힐난했다. 그러고는 손에 쥔 튜브를 조물락거리며 안에 든 젤을 희우의 질 안으로 쭉쭉 짜 넣었다.
질길이 요상한 점액질로 물컹물컹 차는 느낌은 언제든 적응이 되지 않아서 희우는 어깨와 오금을 동시에 움츠렸다. 하으읍, 밭은 숨과 함께 탄성 짙은 소리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희우의 손마디보다는 크고 남자의 손마디보다는 작은 튜브형 젤이 마침내 동이 났다.
서수혁은 볼일을 마친 튜브를 쓰레기 처분하듯 아무렇게나 집어 던졌다. 이내 볼기짝을 한쪽으로 쭉 잡아 벌리자 쯔즉, 하고 입구에 잔뜩 엉긴 젤이 늘어나는 소리가 났다.
서수혁은 희우의 허벅지를 안아 제 허리에 둘러지게끔 확 끌어당겼다. 몸과 몸 사이가 더더욱 밀접하게 달라붙으며 희우의 손이 반사적으로 그의 어깨를 짚었다. 손가락 두 개가 살 주름을 헤치며 입구를 비집어 벌린 것 역시 같은 타이밍이었다.
“아……!”
찐득찐득한 젤로 범벅이 된 내벽은 침입을 반기듯이 손가락을 쪽 빨아 머금었다. 서수혁은 입구 부근에 덩이져 뭉쳐 있는 젤을 점막 곳곳에 펴 바를 요량처럼 손가락을 아무렇게나 휘돌리고 문질러 댔다.
끈적이게 녹아든 질벽이 단정한 손톱에 꾹 눌리는 느낌이 날 때면 희우는 반사적으로 허리를 휘었다. 그래 봐야 사내의 손아귀에 뒤편이 붙들려 있어 도망가는 건 무리였다.
“읏, 흑…….”
희우의 이목구비가 조금씩 흔들리며 동시에 구겨졌다. 그리고 서수혁은 뭣도 놓치지 않을 기세로 그 얼굴을 탐했다. 눈발은 여전히 지긋했으며 윤활제로 가득 차 추적추적한 보지를 헤집어 대는 손길 역시 끝도 없었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희우와 섹스하기 전에는 이렇게 튜브형 젤 한 통을 다 써서 구멍을 물기로 가득 찬 굴처럼 축축하게 만들어 놓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녀가 젖지 않기 때문이었다.
좁고 뜨끈한 내벽을 우람한 거근으로 쾅쾅 짓이겨뜨리며 아무렇게나 뭉개는 건 미치도록 아찔한 고자극을 동반했다.
그러나 가열하게 쑤심을 당하는 희우의 구멍은 조금쯤 젖다가도 뭐에 턱턱 걸린 양 다시 건조하고 메말라지기 일쑤라서 한 번씩 씹질에 있어 애를 먹을 때가 생겼다. 욕실에서의 전초전은 그를 위한 대비였다.
“응…… 흐으.”
손가락 두 개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삼킨 구멍을 위아래로 휘적거리자 찔꺽이며 점성이 가득 뒤엉킨 소리가 들렸다. 서수혁은 코앞으로 다가와 꼭지를 유혹스레 흔들며 떠는 통통한 젖가슴에 익숙하게 상판을 문대며 손가락을 한 개 더 밀어 넣었다.
“아읍!”
오른쪽 젖꼭지가 퍼즐 조각이 맞물리는 양 그의 입 속으로 쏙 빨려 들어갔다. 으그러질 만큼 짓씹어 대던 담배 대신 물고 핥을 것을 찾은 듯 입술과 혀는 알갱이를 여유롭게 농락했다.
이 집으로 돌아와 매일같이 애무와 희롱을 당하는 희우의 젖꼭지는 때를 탄 것처럼 색깔이 진해졌다. 벚꽃잎같이 연한 분홍빛에서 조금 물이 든 다홍색으로 말이다.
아마도 지금 입 속 그득 처박고 쩍쩍 삼켜 올리는 행동이 멎으면 집게로 꽂아져 있기라도 한 것처럼 피가 몰리고 퉁퉁 붓게 될 테다.
희우의 입에서 으슬으슬 떠는 듯한 신음이 한 움큼 두 움큼 튀어나왔다. 서수혁이 혓바닥의 꺼글한 미뢰로 오밀조밀한 유두를 튕기듯이 핥아 올릴 때마다 교성이 짙어졌다. 그런 그녀의 눈동자가 황망하게 뜨인 건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아, 아……!”
손가락이 하나가 더 들어왔다.
세 개까지는 얼결에 머금었으나 네 개부터는 확실히 무리였는지 질 안이 터질 듯이 가득 차 배 안쪽이 당겼다. 허여멀겋게 질린 희우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그의 어깨를 구명줄이라 여기듯 움켰다.
“저, 저기. 으, 저기!”
“응.”
쑤시개처럼 손가락이 각기 네 방향에서 꽂아 올려진 입구가 갈기갈기 찢어질 듯 벌어져 안절부절못하는 희우와 달리 서수혁은 태연하게 대꾸하며 마디 끄트머리를 구부렸다.
이렇게 하면 안쪽의 미끌미끌한 내벽을 양껏 꼬집어 비틀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 조악한 호기심에 막 고개를 드는데 어느새 터뜨린 눈물로 뺨이 흥건하게 젖은 얼굴이 시야를 장악했다.
“찌, 찢어져요. 진짜 찢어져…….”
뭐가 그리 억울한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구는 모습에 허, 하고 소리 없는 실소가 샜다. 서수혁은 뜨끈하게 익은 동굴 속에 갇힌 손가락을 피아노 연주라도 하듯이 미끄러뜨리며 실로 차분히 읊조렸다.
“젤을 이렇게 처발랐는데 찢어지겠니?”
그런 말을 하며 안을 함부로 확장시키려 드니 정말 이 좁디좁은 구멍이 포악하게 찢어지는 건 아닌지 덜컥 두려움이 들이찼다.
하지만 남자는 버르장머리 없는 행동을 극도로 싫어했고 행여나 여기서 함부로 팔을 쳐 내거나 동의 없이 손등을 밀어 냈다가는 정말 욕실 바닥에 엎어진 채 치도곤을 당하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희우가 당최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혼돈에 둘러싸여 침체되어 가는 와중에도 서수혁의 네 손가락은 축축한 빨판처럼 들러붙는 질벽을 넓히려는 의도처럼 이리저리 쓰다듬기 바빴다.
페니스를 쑤셔 넣을 밑 작업의 일환으로 내부의 길을 열기 위하여 열성을 다하는 모습은 그 본질적인 의미와 걸맞지 않게 다소 꼼꼼하고 진득한 감이 있었다.
“아으읏…….”
이가 딱딱 부딪힐 정도로 떠는 희우를 가만 응시하던 서수혁이 속주름을 각기 다른 방향으로 떠밀며 쑤석이던 손가락을 양쪽으로 질금 벌렸다.
안쪽 점막이 생생히 갈라지는 느낌에 놀란 희우는 여기서 더 생각을 이어 나가고 말고 할 겨를도 없이 그의 팔뚝을 붙잡았다. 짙은 눈썹을 나른하게 모으며 사내가 내비치는 불만 어린 표시에도 울먹거릴 수밖에 없었다.
“지, 진짜 찢어지…….”
“왜 이렇게 자신이 없니.”
“읏, 흑.”
“고작 이거 받아먹고 찢어질 구멍이면 내 좆은 받지도 못했어.”
그가 야단이나 진배없는 힐난을 던진 직후 손가락을 비틀어 내벽을 까득 긁었다. 안에 얼기설기 뭉쳐져 있던 젤 덩어리가 그 외설적인 움직임을 따라 구멍 바깥으로 울컥 제 한 몸을 토해 냈다.
서수혁은 손등을 타고 흐르는 질척한 덩이를 다시 휘돌려 질 입구에 펴 발라 주며 희우를 조금 더 끌어당겼다. 비틀거린 희우가 둥그런 이마를 서수혁의 어깨에 콩 찧었다.
허공을 젓던 서수혁의 눈길은 그녀의 등 뒤편으로 펼쳐진 거울에 가 닿았다. 전분 가루를 뿌린 찹쌀떡처럼 말랑말랑하고 새뽀얀 엉덩이가 손가락을 푹 찔러 박을 때마다 움찔움찔 떨었다.
특히나 그가 주목하는 건 좁은 내벽이 군림당하며 힘이 잔뜩 들어간 볼기짝에 은연하게 드러나는 한 쌍의 보조개였다.
매끈한 등마루를 타고 둔부까지 이어지는 길목 그 사이에 쏙 팬 두 개의 홈이 있었다. 약에 반쯤 취해 좋다고 따먹을 때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특징이었다.
제 눈길로 더더욱 파이길 바라는 것처럼 옴폭 들어간 자국에 지고지순한 관심을 던지며 엉덩잇살을 갈라 파고든 손끝에 집중했다.
“하나 더 넣어 볼까?”
웅덩이를 찰박찰박 헤집는 것처럼 점도 높은 물기가 잔뜩 엉기어 든 보짓살을 맘대로 돌려 비비다가 넌지시 묻자 그에게 기대어 든 작달막한 몸이 크게 흠칫했다.
이미 질 안을 파고든 손가락은 네 개. 여기서 하나가 더 들어온다는 건 그의 손이 다 들어온다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벌써 그런 일을 겪은 사람처럼 희우는 겁에 질려 바들바들 떨었다. 한참을 그러더니 어깨에 기댄 이마를 소심하고 천진하게 좌우로 흔든다. 미약하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애를 써서 제 의지를 드러내려고 하는 그 소극적인 기개가 발칙하기 그지없었다.
“너 여기, 저번보다 늘어난 거 아니.”
그가 제 한쪽 손의 일부를 꾸역꾸역 먹어 치우고 있는 구멍의 살점을 옆으로 쭉 벌렸다.
손짓에 딸려 나온 산홋빛 속살이 거울 위로 반사되어 망막을 덮었다. 가리키는 ‘여기’가 어딘지 분명히 알려 주겠다는 듯 손가락 두어 마디를 쏙 빼냈다가 다시 박아 올리며 점막을 찌뿌듯하게 자극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흣, 하는 신음을 터뜨린 희우는 배꼽 아래가 저린 느낌에 깨금발을 들썩였다.
“이러다가 허벌창이라도 나면 영 무는 맛이 없겠지.”
“흐, 아읍.”
“그래. 늘리는 건 이쯤 하고.”
찰싹! 큼지막한 손이 희우의 한쪽 엉덩이를 아플 정도로 강하게 내리쳤다. 잘 익은 복숭아처럼 영근 엉덩이가 물결치듯 출렁이다가 간신히 제자리를 찾았다.
사내에게 전신을 맡긴 채 어중간한 자세로 서 있던 희우가 슬금슬금 몸을 추스르며 바로 섰다. 밑구멍처럼 물기로 촉촉하게 젖어 든 시선이 자연스레 남자의 사타구니로 미끄러졌다.
수직으로 발딱 기립해 배꼽을 넘어서서 구획으로 나누어진 뱃가죽을 툭툭 두드리는 흰 음경은 오늘도 지나치게 해악적으로만 보였다.
핏줄이 알기살기 돋아난 그것은 잔뜩 열이 올라 발기할 때면 희우의 팔뚝 윗부분과도 엇비슷한 크기로 보였다. 확실히 이것도 받아먹는 주제에 고작 손가락으로 그 난리를 치느냐며 남자가 책망을 하는 게 일견 이해가 갈 만큼.
“뒤돌아.”
오늘은 뒤로 할 생각인가 보다.
희우는 조금씩 발을 움직여 그에게 가늘고 하얀 등을 내보였다. 서수혁은 쿠퍼액이 방울방울 맺힌 자지 선단을 손가락으로 느릿하게 비비댄 다음 희우의 아랫배를 감싸 당겼다.
뭉툭한 성기의 대가리가 엉덩이 골과 회음을 동시에 자극하듯 쓸어내리고는 곧 젤 범벅으로 찐득해진 입구에 닿았다.
얼추 귀두의 조준이 끝나자마자 서수혁은 희우의 골반을 과감히 아래로 끌어 내렸다. 건조하게 말라붙어 있던 때를 비웃듯 지금은 속주름 하나하나까지 윤활제가 펴 발라진 상태였기에 미끈둥한 살기둥은 조금도 무리 없이 아랫입을 갈라 몸체를 꾸역꾸역 디밀었다.
“하으윽……!”
희우의 새된 교성과 씨발, 하고 작게 터진 서수혁의 욕지거리가 허공중에서 난잡하게 섞여 들었다.
서수혁은 유독 삽입을 할 때마다 불길처럼 치솟는 흥분을 갈무리하지 못했다. 그 이유 역시 희우의 보짓길 내에 있었다.
자궁으로 빠지는 질 안쪽은 그럭저럭 넓히면 무리 없이 후려갈길 공간은 된다지만 희우의 입구는 지나치게 협소한 감이 있었다.
그 부근의 뼈가 그렇게 생겨 먹은 건지, 긴장으로 수축한 근육이 침입을 제지하는 건지 몰라도 여하간 입구 부근에서 빠듯하게 한 번 꽉 조여 물 때마다 배 속이 다 꼬이는 들불 같은 쾌락이 일었다.
직후 서서히 풀어지며 조금씩 조금씩 내벽 전체로 성기를 흠빠는 차례적인 변화 역시 사내의 양기를 뽑아 먹을 만큼 음탕하기 짝이 없었다.
“응, 아, 아……!”
초장부터 뿌리까지 박혀 들었으며 다음 순간 조금의 배려도 없는 피스톤질이 시작되었다. 거근을 가운뎃길로 품어 삼키는 희우의 말랑한 엉덩이는 사내의 허벅지에 제대로 앉혀질 새도 없이 통통 튀어 올라야만 했다.
조금이라도 걸터앉아 진정을 갈구할라치면 서수혁이 성난 허리 짓으로 격하게 박아 올리는 통에 사지가 대책 없이 흔들렸다.
김이 서렸다가 어느 정도 지워진 거울 위로 희우의 유방이 젖꼭지를 빙글빙글 휘돌리며 출렁이는 게 비쳐 왔다.
서수혁의 시선은 아래를 향해 있었다. 희우의 잘록한 허리를 움키고서 거의 혼자 자행하는 섹스라고 봐도 무방할 만큼 저 좋을 대로 흔들어 대며 자지를 한 뼘 삼켰다가 울걱대는 액체와 함께 뱉어 내기 바쁜 보짓구멍에 눈을 꽂았다.
버거움의 증거처럼 경련하기 분주한 입구의 모양새가 신경을 사로잡았다.
끈끈한 젤 때문인지 아직 몇 번 박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뿌연 포말이 일기 시작했다. 그것은 한바탕 싸지른 정액처럼 기려한 자지 표피를 틈틈이 둘러매다가 이내 살덩이가 쉼 없이 열어젖혀 긁어 대는 구멍 주름 안쪽으로까지 옮겨붙었다.
쩌억, 쩌걱. 점액질이 차지게 늘어났다가 다시 들러붙는 소리가 반복적으로 결합하는 부위에서 끝없이 일었다.
음욕으로 일렁이는 남자의 눈동자는 곧 야단스레 들썽거리는 젖가슴에 가 닿았다.
대다수 살집이 없는 편임에 비하여 과도하게 무게감이 있는 젖두덩이 저를 흠씬 괴롭혀 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존재감 있게 흔들렸다. 특히나 자극한 손길 하나 없음에도 통통하게 몸을 부풀린 자둣빛 유두가 욕실 조명등 불빛에 부딪혀 먹음직스럽게 빛을 냈다.
“하읏, 응, 아읍, 아, 아…… 아!”
앞으로 기운 희우의 상반신을 뒤로 젖히게 한 후 젖통을 양손으로 그득 감싸 쥐었다. 범상치 않은 부피라는 건 다섯 손가락을 모두 동원했음에도 볼록하게 삐져나오는 구간의 볼륨감이 증명하는 바였다.
그는 소름처럼 돋아난 유륜을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가 떼며 그 가운데에 촘촘히 여문 젖꼭지를 퉁겨 주었다. 수 번 입은 지난날의 자극으로 꼭지가 그새 예민한 성감대라도 된 건지 희우는 눈꺼풀을 알알이 떨었다.
오로지 젤로만 가득 차 찔뻑대던 구멍 사이로 탁한 분비액이 주룩 흘러내렸다. 그 협소한 틈새를 숨 가쁘게 드나들며 탐방하는 서수혁의 거방진 좆 역시도 물기로 찔찔하게 젖어 들었다. 잇따른 추삽질로 첨벙첨벙 튀어 댄 분비액 탓에 그의 좆털은 물 한 바가지를 뒤집어쓴 것처럼 흠뻑 젖어 든 채였다.
“으응, 하응…… 악!”
간신히 버티던 희우는 저를 지탱해 주는 손길이 별안간 실종됨에 따라 앞으로 고꾸라질 듯이 쏟아졌다.
다행히 두 팔로 바닥을 짚기는 했으나 여전히 구멍이 무참하게 뚫리고 있어서 도통 자세를 바로잡을 수가 없었다. 반으로 접힌 몸을 따라 머리통에 피가 쏠려 눈앞이 아뜩아뜩 뭉개졌다.
세상이 뒤집힌 채 구멍이 흠씬 때려 박히는 행위는 고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읏, 아, 아, 저, 저기…… 응, 으응……!”
“후, 힘드니?”
“네. 흣, 네…… 아……!”
“침대로 갈까?”
서수혁이 지금껏 터뜨릴 기세로 주무르기만 하던 엉덩이를, 지문이 펴질 기세로 쓰다듬어 주며 물었다. 악마의 속살거림처럼 지나치게 뭉근하여 의심부터 드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욕실에서는 더는 버티기가 힘들었다. 벌써부터 척추뼈 하나하나가 뻐근하게 저려 오고 있었다. 어차피 남자는 내일도 자신을 안을 거다. 그렇게 축나 버릴 몸을 생각하면 조금이라도 편한 곳에서 혹사를 당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으, 네. 네…… 응…….”
“그래, 가자.”
고분고분한 대답에 조금이나마 안심하기 무섭게 서수혁이 대뜸 욕조 턱에서 일어났다.
아직 성기가 찰지게 접붙어 있는 상황이었기에 희우는 얼결에 그의 좆을 안에 품은 채로 엉덩이를 더욱 높이 치켜들어야만 했다. 머리는 더더욱 땅으로 추락하고 몸은 둔부만 덜렁 들린 꼴이 되었다. 완전히 개와 다를 바가 없는 자세였다.
핏기가 가신 손바닥이 길을 잃은 사람처럼 허겁지겁 바닥을 더듬었다.
“아, 무, 무슨……!”
“네가 가자고 했으니 이렇게 가야지.”
“네, 흣, 네?”
“침대까지 가는 길에 혹시라도 뱉으면 혼나.”
달래는 듯하나 실상은 오만할 뿐인 말을 지껄인 남자가 그 어떤 동의 없이 한쪽 발을 앞으로 뻗었다. 전진하는 몸짓을 따라 반쯤 빠진 남성기가 구멍 주름을 팽팽히 당기며 안으로 짓쳐 들어왔다.
완전히 다른 각도로 뭉개지는 내벽이 귀두를 쾌락점으로 이끌기라도 했는지 알싸한 전율이 머리꼭지까지 단숨에 관통했다. 아앙! 희우의 입에서 전과는 감도가 다른 신음이 터져 나왔다.
“흑, 응, 앙, 아…… 아, 아…… 잠……!”
희우의 두 손바닥이 네발 달린 짐승의 그것처럼 황망히 바닥을 헤집었다. 아래로 쏟아져 내린 연한 색의 머리칼이 애처로이 흔들렸다. 서수혁은 그녀의 뽀얀 엉덩이만 거머쥐어 자세를 아슬아슬하게 지탱한 채로 몸을 움직였다.
이러고?
이러고 간다고?
이렇게 기어서?
그녀의 머릿속이 혼란으로 뒤집히든 말든 사내는 저 좋을 대로, 흥이 나는 대로 비좁은 구멍길을 꿰찔러 대며 성큼성큼 발을 내디뎠다. 정말 이런 해괴하고 망측하기 그지없는 체위로 침대까지 갈 작정인 거다.
제가 앞에 있음에도 뒤에서 쿵쿵 무식하게 내벽 살을 쳐 대며 재촉하는 방탕한 채근에 이기지 못하여 희우는 더듬더듬 네발로 기었다. 한 발, 두 발 힘겹게 헤쳐 나가는 길목을 따라 애액과 젤이 뒤엉킨 액체가 뚝뚝 떨어져 내리며 저속한 흔적을 남겼다.
애초에 체격 차이가 상당하다 보니 희우의 두 발은 까치발을 한 상태에서도 자꾸만 지면을 박차 올랐다. 남자의 손길만 없으면 크게 넘어져 코가 깨지고도 남을 만큼 아찔한 자세였다.
그 방증처럼 한 번씩 그녀도 모르게 오금에 힘이 풀려 비틀대며 넘어질 뻔하였다. 그때마다 서수혁은 희우의 아랫배를 감싸 올리며 그를 가분히 제지했다.
외려 어마어마한 힘으로 지탱하며 부러 의도한 것처럼 질 점막을 성기로 후려갈겼다. 예민한 곳을 인정사정없이 긁죽이는 움직임에 희우의 아랫살이 움푹 졸아붙었다가 풀리며 질퍽한 음액을 한 움큼씩 왈칵 쏟아 냈다.
꿀물처럼 찐득한 그것은 희우의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려 윤기가 돌듯 피부를 번드르르하게 만들었다.
“아흑, 아웁, 응…… 아, 으…….”
가까스로 버티며 앞을 향해 전진하던 몸은 끝내 이 수치스럽고도 기구망측한 체위의 섹스를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그나마 다행인 건 욕실부터 침실까지의 거리가 그렇게 멀지 않은 것이었으며, 허옇게 질려 파들거리던 희우의 무릎에 힘이 쭉 빠졌을 때는 침대 앞에 막 도달했을 무렵이었다.
욕실 바닥을 짚고, 번들대는 대리석을 디디며 한차례 고초를 겪은 희우의 손바닥은 저를 침대에 던지고서 엉덩이만 들어 올리게 하는 서수혁의 오만방자한 손길 아래에서 그대로 움츠러들었다.
맨정신의 서수혁은 지나치게 야만적으로 섹스를 했다. 교양이나 배려 따위를 찾아볼 수 없이 무례하게. 사람이 아니라 짐승한테 산 채로 뜯어 먹히는 기분을 선사하는, 그런 섹스였다.
이제 하루 이틀 겪는 일이 아님에도 난생처음 네발로 기어 본 경험이 희우의 멘탈을 통째로 흔들어 댔다. 존엄성이 말 그대로 훼손당하는 기분에 신경 하나하나가 무력하게 짓눌렸다.
그러나 괴팍하고 저열한 육욕을 채 해갈하지 못한 남자에게 그런 건 조금도 중요치 않았다.
“흐으응……!”
엎어 놓은 자세에서 엉덩이를 과도히 잡아 벌린 채로 끈적끈적하게 녹아든 질 안을 드사납게 질러 박던 서수혁은 속주름 하나하나까지 동원하여 우물대는 보지로부터 미끈둥해진 성기를 탄력 있게 끄집어냈다.
커다란 손으로 한 손에 차는 희우의 엉덩잇살을 제멋대로 조물락거리더니 곧 혓바닥으로 볼 안쪽 살을 긁어내려 타액을 모았다. 그것을 지금껏 저를 머금고 삼키느라 열 오른 채로 벌름대는 질 구멍에 퉤, 뱉고서 곤곤히 옮겨붙도록 이리저리 문질렀다.
그 상태로 좆물을 빼지 못해 허공을 교만하게 휘저으며 덜렁대는 살기둥을 움켜쥐고서 다시금 재진입했다.
입구의 말랑한 살점이 안쪽으로 곱아들며 또다시 지나치게 조붓한 구불길이 성기 대가리를 아플 정도로 죄어 왔다. 아랫도리를 휘감아 통째로 비트는 듯한 극점을 참아 내며 서수혁은 뽀얀 엉덩이 사잇길을 무두질이라도 하듯이 한바탕 난도했다.
“흐응, 아, 읍, 읏, 흐…… 으응, 아!”
얼굴이 침대에 처박힌 희우는 숨길이 틀어막혀 고개만 비튼 채로 할딱였다. 사내의 거친 몸짓에 침대가 대신 울어 대고 있었다. 나사 하나 빠지는 일 없이 알맞게 조여든 가구가 무너질 기세로 흔들리고 끽끽거렸다. 그 조잡한 소음에 제 입에서 터져 나오는 교성을 어떻게든 숨기려 애를 써 댔다.
“흡!”
그러다가도 서수혁이 말려 들어가는 엉덩이의 보조개를 손가락으로 콕 찌를 때마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쳐들고 씨근거리게 된다.
처음에는 이렇게까지 민감하지 않았는데, 서수혁이 안을 흠씬 두들기는 상태에서 저 부위를 손톱으로 긁거나 빙글빙글 문지른 까닭에 이제는 반사적으로 묘한 자극이 일었다.
더구나 날 선 반응으로 들어 올린 상체를 따라 바짝 발기한 젖꼭지가 시트에 쓱쓱 문질러지는 통에 전율은 알아서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희우의 양 볼기짝을 조종 키라도 되는 것처럼 틀어쥐고서 도톰히 융기한 내벽 살을 무아지경으로 짓이기던 서수혁은 후, 하고 탄식 같은 숨을 터뜨렸다.
일순 사정에 도달했나 했으나 아직 턱도 없는 소리였다. 침대 위에서 발휘하는 좆심이 침대 바깥에서 풍기는 위압감과 비례하게 작용하는 남자였다.
“아으…… 흣!”
몸이 빙그르르 돌아가며 안쪽에 박힌 거대한 살덩이가 질벽 전체를 압박 자극 시키는 통에 희우가 목구멍을 움푹 조였다가 풀었다. 밭은 식으로 터져 나오는 숨과 함께 동공 위로 아릿한 빛점이 추락했다.
침실의 조명등, 서수혁과 마주하는 정상위의 자세가 된 것이었다.
벌써부터 배 안쪽이 너덜거리는 기분에 희우는 작게 기침을 했다. 서수혁의 성기가 어찌나 굵다랗고 단단한지 한 번 받을 때마다 내장이 상하는 것처럼 못 견디게 끔찍한 기분을 몰고 왔다.
때마침 지직지직, 끓어 대는 잡음만 인식하던 귀가 또 완전히 맛이 갔는지 소리가 둔탁하게 멀어지기 시작했다. 지방 하나 없이 근육으로만 짜인 듯한 사내의 몸을 중심으로 둔 세상이 시소처럼 이리 기우뚱 저리 기우뚱했다.
희우는 몸을 꼬물대며 그나마 잘 들리는 쪽의 귀를 시트에 묻었다.
이제 됐다. 그녀의 속에서 씨앗처럼 아주 야트막한 안심이 피어올랐다. 이 지독한 세상으로부터 소리를 차단시키면 그나마 나았다.
몸이 위아래로 수십, 수백 번 흔들리는 걸 지나서 토할 것 같은 기분을 몇 번만 참아 내면 이 짓도 끝날 거다. 언제나 그래 왔다. 청각이라는 건 생각보다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는 감각 기관이었다. 소리만 차단된다고 해도 꽤 많은 현실을 막처럼 가리는 게 가능했다.
이게 희우가 한쪽 귀의 손상을 피력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녀는 이 낯설고도 이상하고, 기괴한 동시에 해악한 세상에 익숙해지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일단은 살아 있다는 이유로 오감이 똑똑하게 작용을 하기에, 그리하여 가려질 겨를 없이 기어들어 오기 때문에 한 톨의 고통으로라도 그것을 거세하려 드는 거였다.
“으……!”
고개를 한쪽으로 비틂으로써 훤히 드러나는 목덜미에 따가운 고통이 번져 나갔다. 지나치게 짙어서 꼭 심연처럼 보이는 서수혁의 머리카락이 턱과 어깨 부근에 간지럼을 피웠다.
남자는 자국을 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단지 깨물고 싶어서 희우의 목덜미를 베어 무는 때가 잦았다. 또 스스로의 그런 거친 행위에서 감당할 수 없는 쾌락이 샘솟아 오르는 것처럼 허리를 더욱 빠르게 찍어 올리고는 했다.
좀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기는 했다. 사실 서수혁에 관해서는 이해가 가는 것보다 이해가 가지 않는 게 더 수두룩했는데, 특히나 섹스에 있어서 그러했다.
이 사람은 왜 내게 이렇게 흥분을 하지? 주변에 널린 게 저보다 훨씬 적극적이고 자극적인 여자들일 텐데.
하다못해 매일 자신을 보살펴 주러 오는 실장만 봐도 그랬다. 투피스 차림의 그녀는 밋밋하기 그지없는 저보다 훨씬 더 육감적이며 탄력적인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소위 말하는 안는 맛도 자신보다는 그쪽이 훨씬 더 있을 텐데…….
“……읍.”
사방팔방 흩어지던 정신이 대뜸 제자리에 꽂힌 건 서수혁의 상판이 코앞으로 다가온 시점이었다. 그는 전처럼 섹스를 할 때마다 희우가 다른 생각에 잠기는 걸 실로 기민하게 알아챘다.
물론 정말 실수에 그친다는 걸 주지시키듯 이제는 그악스러운 손찌검을 행하지는 않으나 저 눈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알아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너 지금 뭐 하니?’ 귀가 막혔는데도 남자의 서늘한 목소리가 어뜩어뜩 고막을 휘감는 것만 같았다.
희우는 반복적인 허리 운동에 저절로 오므라든 다리를 조금 더 벌려 보았다. 서수혁은 그럼에도 작고 오밀조밀한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깊은 산중을 헤매다가 멧짐승을 정면으로 마주쳐 버린 듯한 두려움을 떠안기는 눈…….
저 눈을 볼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생각나는 것들이 너무나 짙었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도끼의 손이나 너저분하게 퍼지는 핏물과 비명 같은.
아, 역시 무서워…….
희우는 두 눈을 꼭 감았다.
조금이나마 미약해졌던 추삽질이 다시 가열하게 차오른 힘을 품고서 가랑이를 정신 사납게 왕복했다. 거미줄처럼 짝짝 늘어나는 젤이 뭉쳐 끈적이는 입구와 달리 구멍 안쪽은 또 서서히 말라붙어 가고 있었다.
남자에게서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감정이라고는 공포심밖에 없음을 자각시키듯이.
* * *
차륵.
낯선 소리가 희우를 깨웠다.
깨자마자 흠칫한 건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제가 머무는 방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온몸을 짓누르는 근육통의 존재.
어젯밤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정사에 결국 자신이 먼저 정신줄을 놓아 버린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팔자 좋게 남자의 침대에서 잠이 들었을 리가.
지금이라도 부리나케 도망가고 싶지만 문제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이었다. 조용히 자리를 피하는 건 고사하고 사내보다 더 늦은 시각에 기상을 해 버렸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인기척이 제 등 뒤에서 느껴지고 있다는 거였다.
블라인드를 치고 있는지 희우의 몸을 물결처럼 덮어 내리는 햇살이 차차로 가려졌다.
알아차렸을까? 깨어났다는 거.
이렇게 이른 아침에 함께 있어 본 적은 없어서 서수혁에게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얼른 일어나서 인사라도 해야 하나. 아니면 그냥 아직 깨어나지 않은 척할까. 상반되는 고민이 치열하게 부딪히는 가운데 기척은 희우의 머리맡을 빙 돌아 그녀의 정면 쪽으로 다가왔다.
고민이고 뭐고, 희우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저를 쌩하니 지나칠 것처럼 주저 없이 내디뎌지는 걸음이 멈췄다. 시야를 차단했음에도 서수혁이 제 앞에서 서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말초신경 하나하나가 쭈뼛 올라섰다. 조금 전만 해도 아무렇지 않던 호흡이 장애물에 걸린 것처럼 목 끝에서 삐걱삐걱 고였다.
무언가 쓱 다가와 희우의 뺨을 눌렀다.
손가락 같았다.
처음에는 가벼이 쓰는 쪽이었는데 숨을 한 번 내쉬는 사이 그건 꾸욱, 힘을 실어 누르는 식으로 갈음됐다. 아직 멍이 다 가시지 않은 부위라 지끈거렸다. 접촉 부위를 타고 번지는 통증에 눈가에 힘이 꾹 들어갔다가 풀렸다.
그러자마자 심장이 차게 식었다.
들켰다.
이런 희우의 생각에 힘을 싣듯 위에서부터 픽, 웃는 소리가 떨어져 내렸다.
뭐라고 한마디라도 할 줄 알았는데 서수혁은 별말 없이 손을 떼고 침실을 빠져나갔다.
희우는 문이 닫히고 나서 족히 1분은 지난 뒤에야 눈을 떴다. 어물어물 손을 들어 그가 아플 정도로 누른 뺨을 만지작거렸다. 연고가 말라붙은 자리에 내려앉은 손길의 여운이 유난히 짙었다.
* * *
몇 시간 내리 이어진 회의가 끝났다.
집무실로 돌아온 서수혁은 무광 가죽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 메탈 시계가 채워진 손목을 무료히 매만지던 중, 통유리창 겉면을 타고 흐르는 햇살의 발광에 눈을 돌렸다.
그 화한 잔상 속에서 며칠 전, 이불을 덮었음에도 야윈 몸 선을 고스란히 드러내던 뒤태가 떠올랐다. 따스한 느낌을 주는 아침 볕에조차 꿀꺽 잡아먹힐 것만 같던.
주 실장의 보고에 따르면 식사는 꼬박꼬박 한다고 했는데 이상하게 가면 갈수록 마른다.
충분히 그럴 만한 상황임에도 서수혁의 머리로는 당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열량만 채워 주면 알아서 유지되는 게 사람의 체구 아니던가?
주 실장이 감히 간땡이가 처부어서 제게 거짓으로 보고를 올릴 리는 없을 테니, 문제는 희우에게 있다고 보는 게 옳았다.
전에 언뜻 먹는 걸 보니 갓 태어난 병아리가 모이를 쪼는 식으로 깨작대기 바빴지. 그따위로 먹는다면 꾸준히 챙기는 식사에도 살이 내릴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별로 달갑지 않은 결과였다.
지금 이상으로 체중이 줄면 섹스할 때도 뼈가 부딪혀서 사사건건 거슬리는 통증이 일 테니까.
“대표님.”
중문을 닫고 나타난 윤서원이 곁으로 다가왔다.
“도끼가 뵙고 싶어 합니다.”
서수혁은 기름한 다리를 외로 꼬며 테이블 위에 놓인 담뱃갑을 흔들었다.
“그래? 손은 좀 괜찮아졌다니?”
삐죽 튀어나온 연초를 잇새로 물자 윤서원이 깔끔한 동작으로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얼룩처럼 번져 나가는 연기를 감흥 없는 눈길로 더듬다가 고갯짓으로 들여보내라 지시했다.
윤서원이 잠시 사라졌다가 돌아왔을 때 그 뒤에는 납빛 안색의 도끼도 함께였다.
서수혁은 상체를 등받이에 편히 묻으며 아래쪽으로 힐끔 눈을 내렸다. 본래 길쭉이 돋아난 자태가 싹둑 잘려 나가고, 뭉툭한 윤곽으로만 남아 하얀 붕대에 칭칭 감긴 몽당손이 보였다.
“아직도 부산 안 내려가고 뭐 하니?”
무심하게 뱉은 한마디가 끝나기 무섭게 쿵, 땅이 갈라지는 듯한 소리가 공기를 흔들었다.
너저분히 퍼지던 연기가 흩어짐과 동시에 도끼가 서수혁이 앉은 소파 앞에 무릎을 꿇었다. 감히 하늘을 쳐다볼 용기가 없는 사람처럼 이마는 시린 바닥에 처박은 지 오래였다.
“형님, 아니, 대표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발 한 번만 기회를 주십쇼!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우렁차게 울려 퍼지는 소리에는 희우가 익히 겪어 온 껄렁한 면모를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얼차려를 받는 이처럼 잔뜩 기합이 들어간 모습, 그 아래에는 불순물 하나 끼지 않은 두려움이 층층이 깔려 있었다.
서수혁은 깊이 문 담배 연기를 뿌리며 스포츠형으로 깎아 맨들맨들하게 노출된 두상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널 처음 만난 게 언제였지.”
“…….”
“열여덟이었나?”
무책임한 부모의 채무가 자식의 몫으로 넘어가 일평생 빚에 시달리어 살다 끝내 장기가 털리기 직전인 상황까지 갔던 도끼.
당시 그 채무를 관리하던 수금책이 바로 서수혁이 막 뒤를 이어받았던 일강 그룹의 말단 무리였다.
모체가 대기업 수준으로 몸집이 컸으니 당연히 그 이름하에 딸린 하청 업체도 하늘에 박힌 별의 수처럼 무수했다.
용역 업체라는 신분으로 적나라한 실체를 가린 그들은 주로 삼는 업종 분야도 가지각색 두루두루였는데, 도끼가 걸린 이들은 하필이면 통나무 장사, 즉 장기 매매를 주요 벌이로 삼는 부류였다.
현재 이런 부류들은 서수혁의 관리하에 싹 물갈이가 되어 사라졌으나 어쨌든 그 무렵에는 본사의 눈을 피해 도덕적 양심을 팔아 만든 이익을 뒷구멍으로 빼돌려 처먹는 눈 돈 깡패들이 적잖았다.
‘눈이 괜찮네.’
오로지 우연에 기대어 조우하게 되었을 때, 도끼는 그야말로 골로 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각막을 먼저 빼자, 아니다 내장부터 깔끔히 제거하자로 살 떨리는 논쟁을 벌이던 무뢰배를 앞에 두고서 살고자 하는 일념으로 발버둥을 치다가 무딘 손도끼로 얼굴이 내리찍힌 참이었다.
피로 물든 시야 속에서 공기를 가르고, 사람을 가르며 등장하던 대표의 모습은 귀신보다 더한 섬뜩함을 유발했었다.
‘이 정도는 돼야 사람 멱은 따고 남지.’
서수혁의 고작 그 두 마디가 도끼를 살렸다. 그라는 존재가 도끼를 무저갱이나 다름없던 현실의 파도 속에서 건져 냈다. 파손된 이목구비에서 생혈이 줄줄 흐르던 상황에서도 사그라지지 않던 강렬한 삶의 애착이 서수혁의 흥미를 사서.
변변찮던 도끼의 삶은 그 순간을 기점으로 탈바꿈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네가 뭘 잘못했는지는 알고?”
“감히 두 번…… 말씀하시게 한 점입니다.”
작게 웃은 서수혁이 손을 아래로 내렸다. 움직임은 부드러웠으나 도끼의 뒤통수를 콱 움켜쥐는 악력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걸 아는 새끼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부산으로 내려가서 열심히 발바닥에 땀칠하고 계셔야지.”
“제가, 제가 띨띨한 새끼입니다. 좆나게 멍청한 놈입니다. 그러니 대표님, 제발 부산만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에 성에 같은 질색이 가득 묻어났다.
부산에 경기를 일으키듯이 거부감을 보이는 모습을 납득하기 어려운 건 아니었다.
중추인 서울하에 체계적인 계열사로서 관리되고 있는 여러 도시들이 있지만, 개중 특히나 부산은 더럽고 음침한 꼴을 필연적으로 접할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사방이 바다로 뚫려 쉼 없이 유통되는 약들은 이름만 들어도 아는 것부터, 생판 처음 보는 지저분한 혼합물까지 들끓는 무법 거리의 중심가였다. 서울이 사람 간의 전쟁이라면 부산은 약과의 전쟁이었다. 그 땅에서는 골치 아픈 정도를 넘어서서 머리 터지는 일들이 하루걸러 하루 일어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그가 부산에 가지 않고자 버티는 이유는 명확했다.
대표의 곁을 지키던 서울에서 지역 지부로의 이동.
그건 즉, 좌천을 의미했다.
힘과 서열이 곧 목숨과 직결되는 조직에서부터 시작하여 차곡차곡 쌓아 올려진 거대한 일강의 탑.
껍데기는 사업을 꾸려 나가는 건실한 지주사로서 그럴싸하게 꾸며 놨으나 알맹이는 여전히 치열한 완력으로 층을 나누는 무력 집단에 가까웠다. 그러니만큼 일반적인 집단보다 좌천의 의미가 한층 더 살벌했다.
대표를 보좌하던 일선에서 밀려난다는 건, 그 어떤 수단보다 적나라한 신분의 격하였다.
실제로 그렇게 끈 떨어진 신세로 전락하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위로 올라가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놈들에게 처참히 짓밟히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여기서 ‘짓밟힌다’라는 건 단순히 목숨을 잃는다는 게 아니라 별 가지각색의 방식으로 존엄성을 훼손당하는 일이 발생한다는 의미였다. 같은 사내에게 돌림빵을 당하여 후장이 공용 변기처럼 헐어 버리는 게 비교적 원만한 수준이었으니, 그 심층의 저변으로 갈수록 어느 정도일지는 상상조차 꺼려지는 수준이었다.
한마디로 목숨을 보전하는 것조차 어려운 형국이 되어 버리는 거다.
고로 도끼의 이러한 행동은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실로 응당한 발악이었다.
서수혁은 도끼의 손목을 바라보았다. 제대로 바닥을 짚고 있는 쪽과 달리, 있어야 할 게 비어 공중을 헤매고 있는 듯한 손목을 응시하는 눈이 가늘어졌다.
“창수야.”
오래간만에 불리는 이름에 도끼가 몸을 움츠렸다.
“내가 네 손 짤라 먹어서 열 받니?”
“아닙니다. 다 등신같이 모자란 제 잘못입니다.”
주저 없이 나오는 대답에서 호승심은 쥐톨만큼도 발견되지 않았다. 버티어 보려는 기세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게 준비된 자세란 오직 복종과 굴종밖에 없음을 보여 주는 노골적인 저자세였다.
서수혁은 뒤통수를 볼모처럼 움켜쥐고 있던 손아귀에서 힘을 빼고는 둥그런 머리통을 위아래로 쓰다듬었다.
“나는 세 번 말 안 해.”
“…….”
“진작 알아들을 놈이면 굳이 두 번 말하게 하지도 않거든.”
탁탁.
두드리는 힘으로 이만 일어나라는 뜻을 전했다.
도끼가 주춤주춤 상체를 일으켰다. 전장 속, 아군이라고는 저 하나만이 살아남은 피바다 속에 놓인 패잔병처럼 이미 전의를 상실한 눈을 들여다보던 서수혁이 한쪽으로 물러서 있던 윤서원을 힐끗 일별했다.
윤서원이 도끼를 데리고 나가는 동안 서수혁은 멀거니 창밖을 응시했다. 좌우로 길게 펼쳐지는 시티 뷰를 바라보고 있자니 이 도시의 누추한 구석만 가져다 붙인 것처럼 누덕누덕하던 달동네가 떠올랐다.
그날, 뒤늦게 달동네로 향하려는 윤서원과 동행한 건 순전히 충동이었다.
색바랜 과거의 어느 날이 불쑥 떠올라서.
몸소 방문했던 현장이 근처였고, 그곳 정리를 맡긴 정희본에게 확인할 게 있어 직접 그의 집 근처까지 행차했던 날이었다.
‘오빠?’
세단의 유리창 한 겹을 사이에 두고서 대화를 나누던 중, 손가락으로 쿡 찌르면 그대로 부러질 것만 같은 여린 미성이 귀를 침범했다.
티가 나게 당혹감을 표출하던 희본과 앞쪽의 백미러로 일렁이는 잔상처럼 보이던 여자애.
떠올리자 괜히 귓바퀴가 간지러워지는 그날의 기억 때문에 굳이 윤서원을 따라 걸음했다가 잡게 된 현장은 다시 생각해도 가관이었다.
“대표님, 어떻게 할까요? 정말 부산으로 인계할까요?”
돌아온 윤서원이 물었다.
“네가 보기엔 어때. 저거 헛짓거리 할 것 같니?”
웅장한 창밖 운치에 눈길을 주던 서수혁이 담뱃재를 털며 반문으로 받아쳤다.
그가 일컫는 ‘헛짓거리’가 뜻하는 바는 뻔했다. 어쭙잖은 복수를 한답시고 대표인 그나, 혹은 사건의 원흉과 다를 바 없을 희우에게 해코지를 할 것 같냐는 의미였다.
“아닐 겁니다. 애초에 행실은 별로여도 대표님을 향한 충심 하나는 대단한 녀석 아닙니까. 이번 일이 예외였다고 생각합니다.”
“예외.”
뻑뻑 태우다 보니 금세 반 토막이 난 담배를 삐딱이 베어 물던 서수혁이 피식거렸다.
“그런 거 보면 아기가 예쁘장하기는 한가 봐. 그치?”
윤서원은 짧게 삼키는 숨으로 대답을 가렸다.
애초에 처음부터 조금만 더 명료히 밝혔더라면…….
서수혁이 희우에게 일반적인 경우와는 다른 관용적 태도를 보였다는 걸, 그러니까, 조금쯤은 유별하게 여기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점을 미리 고지했었다면 지금과는 다른 결과를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이제 와서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이미 일은 벌어졌는데.
윤서원은 머리만 아프게 하는 사고의 흐름을 애써 잘라 냈다.
“내버려 둬.”
서수혁의 지시가 떨어진 것도 동시였다.
“저렇게까지 비는데 딴맘을 먹겠니.”
서수혁이 담배를 재떨이에 꾹 눌렀다. 단순히 불을 끄는 행동일 뿐인데도 정제되지 않은 사나움이 그 위로 그림자처럼 묻어났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마킹은 붙여 두고.”
윤서원은 속으로 혀를 찼다.
지금껏 내비친 충성심을 보아 좌천까지는 봐준다지만, 이미 그의 마음속에서 도끼는 나가리가 된 셈이었다.
서수혁의 진정 무서운 점은 이런 면이었다. 아흔아홉 번을 잘하다가도 고작 한 번의 실책으로 눈 밖에 나면 선 밖으로 가차 없이 떠밀어 버린다. 그 선 아래가 지글지글 끓는 유황천이나 다름없는 지옥임을 알면서도.
“룸돌이들은 이게 문제야. 늘 좆 휘두르는 걸 못 참아서 사고를 치지.”
못마땅하게 턱을 문지르던 서수혁이 곧 누군가를 떠올렸다.
“상필이 홍콩에서 돌아왔지? 앞으로 외출할 일 있으면 상필이 붙여.”
“쌍칼 말씀이십니까?”
“그래.”
“대기시키겠습니다.”
윤서원은 고개를 주억이면서 내내 품고 있던 한 가지의 의문에 대한 명답을 세웠다.
긴가민가했는데 지금 이 지시로 정확히 알게 되었다.
여자라면 그저 좋다고 달려들어 종마처럼 헥헥대며 허리를 털기 바쁜 놈들과 달리 김상필은 그런 쪽으로 일절 관심이 없었다. 증거로 그는 도끼가 이끌던 룸빵 기습 단속반에도 나서는 적 한 번이 없었다.
그러니 지금 이 명령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이겠는가.
서수혁에게 희우라는 존재가, 인질보다 여자로서의 의미가 더 커졌다는 거 아니겠나.
생각해 보면 사고를 굳이 거기까지 굴릴 필요도 없었다.
‘피임약!’
‘…….’
‘피, 피임약을, 사려고 했던 것뿐이에요. 도망이 아니라, 진짜, 진짜로요.’
‘…….’
‘하실…… 거잖아요. 저랑 하시겠다고 했잖아요.’
인질과 그 범인이란 관계로 보기에는 이미 선을 넘은 지 오래로 보이던 희우의 항변이 귓전에 여직 남아 있었다.
어느 정도 각오를 하고 있었음에도 차근차근 다가와 도달하는 결론에 윤서원은 숨이 꽉 틀어막히는 기분이었다.
마냥 경계 밖의 타인처럼 대하기에 희우는 희본을 너무 빼닮았다. 굳이 끼니를 거르지 않도록 챙겨 주었던 것도, 덧붙이지 않아도 될 당부를 첨언한 것도 다 그 연장선이었다.
맘속에 작은 태풍처럼 이는 심란함을 사무적인 태세로 가리며 태블릿 PC를 보던 윤서원이 고개를 들었다.
서수혁이 내도록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켜서였다.
“오늘은 여기서 마무리해.”
“따로 일정이라도 있으십니까?”
그가 한쪽에 벗어 둔 재킷을 거머쥐었다.
“밥 잘 처먹는지 좀 확인해 봐야겠어.”
* * *
오늘도 여전히 샐러드나 그 밖의 가벼운 것들 위주로 식사를 메꾸었다. 배가 부르다기보다는 그저 무언가로 찼다는 느낌만 들었다. 정신적인 포만감을 느끼기가 어렵다는 증거였다.
일찌감치 그를 알아본 주 실장은 깨끗하게 씻은 뒤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 과일들을 후식으로 마련해 주고 떠났다.
희우는 청포도 하나를 입에 넣고 굴리다가 표면이 흐물흐물해졌을 무렵에 씹었다. 톡 터져 점막을 상큼하게 적시는 맛을 음미하며 가만히, 가만히 옛적을 더듬었다.
주 실장이 차려 주는 밥을 먹을 때마다 불가항력으로 오빠가 떠올랐다.
이곳에서 마련되는 식사는 부정할 나위 없이 맛있었다. 흠잡을 데 없이 훌륭했고 영양분도 균형적이었다.
하지만 희우는 오빠가 해 준 음식이 더 먹고 싶었다.
맛으로 따지자면 한참 뒤떨어지는데도 오빠가 차려 준 밥을 먹었을 때가 훨씬 배불렀다.
‘밥은 잘 먹고 있을까…….’
한번 떠오르면 의식은 늘 묘연한 오빠의 행방에 밀집되고는 했다. 어디서, 누구와, 무얼 하는지 몰라도 단지 그것 하나만을 바랐다.
밥은 거르지 말고 잘 챙겨 먹었으면.
이제야 깨달은 것도 웃기지만 왜 오빠가 매일매일 자신의 끼니에 유난스레 굴었는지 알 것 같았다. 오빠에 관해서라면 여러 잡다한 감정들이 잔존하고 있음에도 가장 크게 두드러지는 건, 굶지 않고 지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결국 그 심경의 끝은 오빠가 보고 싶다는 철부지 같은 그리움으로 귀결되었다.
그러니까, 꼬박꼬박 자신의 끼니를 챙기던 오빠의 마음이 지금의 자신과 같은 거다. 감옥 같은 이곳에서 어떻게든 나날을 보내는 와중에도 걱정이 되고, 마음이 쓰이고, 보고 싶고.
희우는 눈가를 문질렀다.
또 잠이 스멀스멀 몰려왔다. 이곳에 와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인형처럼 앉아만 있는 생활을 반복하다 보니 잠이 기이할 정도로 늘어났다.
집에는 시계가 없지만 요 며칠 보아 온 하늘의 색깔로 가늠하자니 남자가 퇴근하려면 꽤 남은 듯싶었다. 그 생각이 머릿속 회로를 관통하자마자 희우의 몸은 소파 위에서 점점 액체처럼 늘어졌다.
나중에 가서는 과일을 먹는지 잠을 자는 건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굼뜨게 굴었다.
“너 뭐 하니?”
그렇기 때문에 별안간 꽂히는 저음에 경기를 일으킬 만큼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무릎 위에 가까스로 놓인 그릇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푸른 청포도와 오렌지, 속살이 드러나게끔 깎인 사과와 꼭지가 따인 딸기가 바닥을 뒹굴었다.
“어, 저, 저…….”
희우는 어버버거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가 들어오기에는 하늘이 지나치게 밝았다.
이제 막 퇴근을 한 건지 남자는 옷 한 겹 벗지 않은 슈트 차림새였다.
어쩔 줄 몰라 하던 희우는 일단 그 자리에서 팅구르르 뒹구는 접시를 바로 하고서 여기저기로 굴러간 과일들을 하나둘씩 주워 담았다. 어찌나 기겁했는지 뇌를 포근히 감싸던 잠기운이 홀딱 달아났다.
그동안 서수혁은 팔짱을 끼고 벽에 비스듬히 기대서서는 희우가 하는 걸 지켜보았다. 그래서 더 손이 떨렸다.
그가 말없이 쳐다보는 건 종종 있는 일이기에 이러다가 침실로 가지 않을까 싶었으나 안타깝게도 그는 희우가 있는 소파 쪽으로 저벅저벅 다가왔다.
“밥은.”
“먹, 먹었어요.”
“다?”
다……?
무슨 의미이지.
희우는 투명한 의문으로 젖은 눈을 도르륵 굴리다가 접시를 다 비웠냐는 속뜻에 간신히 다다랐다.
“네.”
“그래?”
서수혁이 품 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실장한테 전화해서 확인해 봐야겠네.”
당황한 희우의 입이 자그맣게 벌어졌다. 설마 직접 확인할 줄은 모르고 한 말이었다. 오늘 그녀가 잔반을 남긴 접시는 여느 때처럼 수두룩했다. 생각을 어떻게 잘 추스르기도 전에 갈급히 그의 팔을 붙잡았다.
“조금!”
“…….”
“조금 남겼어요……!”
눈썹을 들썩인 서수혁이 작은 실소를 흘렸다. 별거 아닌 웃음에도 뒤통수를 한 대 맞기라도 한 것처럼 희우의 목이 움씰 말렸다.
그가 과일이 담긴 접시를 팔걸이에 올려 두고서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희우를 제 다리 사이로 끌어당겼다.
“주 실장이 잘해 줘?”
질문의 저의를 모르겠지만 고분고분히 답했다.
“네, 네.”
“그럼 별로 불편하진 않겠네.”
여전히 의도를 파악하기 어려워 희우는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음 순간, 팔목이 콱 붙잡혔다. 엉겁결에 그의 허벅지에 걸터앉은 자세가 되었을 때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오금을 저리게 하는 동공이 목전에 놓여져 있었다.
“근데 왜 음식을 남기지?”
일상적인 질문을 건네듯 홀가분한 어조였으나 받아들이는 쪽은 그렇지 못했다.
희우는 살벌한 닦달을 당한 이처럼 창백하게 질렸다. 서수혁은 핏기가 가신 앳된 얼굴을 직시하다가 멍 자국이 가시지 않은 뺨 위로 손을 올렸다. 닦다 만 얼룩무늬처럼 희미해진 멍을 꾹 누르며 그가 물었다.
“무섭니?”
남자가 정말로 무서운 이유는 하나였다. 이런 때마저도 멍 자국을 문지르는 태도. 살가운 양 보이는 손길 속에서도 언제든 자신을 망가뜨릴 수 있다는 태연한 위협이 도사리고 있었다.
희우는 피죽도 못 먹은 안색으로 도리질을 했다. 아까부터 계속되는 고갯짓에 서수혁이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의 심기가 불편해지는 걸 단박에 알아챈 희우가 얼른 입을 열어 “아니요, 아뇨.” 하고 두 번이나 답을 했다.
“식사 잘 챙겨. 네가 안 먹으면 주 실장이 혼나.”
희우는 이제 그와 자신이 지닌 ‘혼난다’는 개념이 얼마나 다른지를 알고 있었다. 지난날 단칸방에서의 기억이 불가항력으로 솟아올랐다.
포물선을 그리며 튀어 오르던 생혈과 그 뒤를 따라 제 시야각으로 날아온 손목. 살아 있는 이의 것임을 증명하듯 각기 다른 각도로 구부러진 다섯 손가락의 절박한 몸부림에 내장을 비트는 오심이 저 단전에서부터 치밀었다.
제 대답 여하에 따라, 제 행동 여부에 따라 그 대상이 주 실장으로 대체될 것을 생각하니 속이 울렁거렸다.
“……네.”
밀려오는 욕지기를 참아 내며 간신히 답했다.
서수혁은 그런 희우에게 잠시 시선을 두다가 뺨을 툭 두드리고는 손을 거두어들였다.
“가서 약 가지고 와.”
이미 주 실장이 발라 주고 갔지만 희우는 그의 심기가 거슬리지 않도록 얼른 움직였다. 그녀가 약상자를 가지러 간 사이 서수혁은 그릇에 놓인 딸기를 궁굴리며 손장난을 쳤다.
얼마 안 가 불쑥 보이는 자그마한 발에 그는 제 허벅지를 탁탁 두드렸다. 희우는 주저하다가 조심스레 그 위에 앉았다. 망설임의 이유는 금세 읽혔다. 옷을 다 갖춰 입은 상태지만 아랫도리가 맞물리는 자세가 섹스할 때를 연상시켰으리라.
서수혁은 연고를 짜 뺨 위로 길게 펴 발랐다.
구멍에 좆을 다짜고짜 찔러 박은 것도 아닌데 멍 위를 쓸고 지나갈 때마다 여리여리한 몸에 전기라도 흐르는 것처럼 움찔움찔, 힘이 들어간다.
그는 제 다리 위에서 중심을 잡기도 힘들 만큼 위태롭게 구는 희우의 허리를 붙잡았다. 그리고 등 뒤를 끌어당겨 더 확실히 안기게 했다.
하지만 그런 자세가 되니 서로의 성기가 옷 위로 여실히 문질러졌다. 직접적인 마찰에 놀랐는지 희우의 허벅지 사이에 힘이 들어가며 그만 그의 중심을 조이는 꼴이 되었다.
서수혁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씹에 맛이라도 들렸어?”
“그게 안, 아니라 자세가.”
허겁지겁 변명했으나 그는 들을 마음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어중간하게 띄운 채로 들썩이기 바쁜 희우의 엉덩이를 콱 잡아 아예 대놓고 제 국부에 문대기 시작했으니. 서서히 고개를 드는 성기의 묵직함이 이토록 역력할 수가 없었다.
“으, 흣.”
그의 손은 면바지와 팬티를 가볍게 젖히고 안으로 파고들어 볼깃살을 주물럭거렸다. 언제나 욕실에서 시작했기에 조금은 방심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방심을 비웃듯 오늘의 섹스는 이곳, 거실에서 벌어질 조짐이 보였다.
그게 말로 설명하기 힘든 거부감을 일으키는 바람에 희우는 티가 나지 않게 몸을 꼼질거렸다.
“발정 난 거니, 뭐니. 뭐 하자고 자꾸 비벼 대.”
발버둥과 다를 바 없는 몸짓을 서수혁은 기민하게 알아챘다. 가감 없는 지적에 놀라 헉, 하고 숨을 집어삼키기 무섭게 몸이 돌아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가 보이는 정자세로 앉아 있었으나 풀썩, 쓰러지고 나서는 거실의 넓은 천장이 보였다.
머리맡에 뭔가가 드리웠다. 접시 특유의 찬기가 느껴졌다. 과일을 모아 둔 접시였다. 서수혁은 그 위에서 청포도 하나를 집어 희우의 붉은 입술 사이에 쏙 물려 주었다.
“심심하면 이거나 빨고 있어.”
뱁새처럼 벌어진 잇새에 녹빛 과일을 끼워 넣은 그가 거추장스러운 바지와 팬티를 한 번에 벗겨 냈다.
휑해지는 아랫도리에 정신 일부가 아득해졌다.
그저, 또 하는구나, 싶은 생각만이 일렁였다.
희우는 강제로 머금게 된 과일을 오물대며 슬금슬금 팔걸이에 머리를 제대로 기댔다. 어디든지 귀를 막을 수단이 필요했다. 오늘은 젤도 뭣도 바르지 않아 메마른 구멍에 벌써부터 핏줄이 설 만큼 팽팽히 부푼 귀두관이 썩썩 문질러졌다.
간신히 소리가 들리는 쪽을 틀어막으며, 버티기 위해 두 눈을 꾹 감은 차였다.
치명타처럼 몰아치리라 예상한 삽입의 통증 대신 턱을 콱 붙잡는 힘이 먼저였다.
“너 요즘 왜 이렇게 얼을 자주 타니.”
눈동자를 회동그래 열며 고개를 든 희우는 언짢은 낯의 그를 발견했다.
아무래도 남자가 뭐라고 말을 한 모양이었다.
그나마 멀쩡하던 귀가 막히고, 나머지 역시 먹먹하게 잠기면 주위를 아우르는 모든 소음은 둔중하게 가라앉았다. 그래서 서수혁이 무슨 말을 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했다.
“아. 뭐, 뭐라고 하셨어요?”
용기를 내어 묻자 서수혁은 대답 없이 희우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기습적으로 고개를 비틀었다.
하필이면 망가진 귀에 대고 그가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고막이 갉작갉작 건드려지는 느낌만을 떠안으며 희우는 볼을 파르르 떨었다.
잠깐 동안 귓전을 기웃거리던 서수혁이 고개를 바로 세웠다. 이제 제대로 알아듣겠냐고 묻듯이 눈을 맞춰 온다. 희우는 그래서 더욱이 곤혹스러웠다.
“다시, 한 번만…….”
그녀가 긴장이라도 했다고 여긴 건지 서수혁은 그답지 않은 인내심을 발휘하여 한 번 더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같은 말을 두 번 반복하는 것도 싫어하는 그에게는 퍽 드문 일이었다.
물론 희우는 그런 속사정 따위 알 길이 없었다. 기실 현재 상황에서 그런 걸 헤아릴 여력이 있을 리 만무했다. 지금 그녀에게는 서수혁이 건네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제대로 헤아리는 게 우선순위였으니.
하지만 그가 속삭임을 불어넣은 건 또 고장 난 쪽의 귀였다.
사내의 묵직하고 탄탄한 성대가 노이즈로 대체가 된 게 아니라면 자신이 알아듣지 못한다고 보는 편이 옳았다.
그렇기에 희우는 은연중에 손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과일의 단맛으로 찼던 입 안이 약 가루를 함빡 들이켠 것처럼 써졌다. 습관처럼 두려움이 괴어오르고 있단 증거였다.
“네? 자, 잘 안 들…….”
못해도 두 번에서 그칠 거라 생각한 행동을 다시금 되풀이해야 할 상황 앞에 놓였을 때, 서수혁은 미미하게 감돌던 입가의 웃음기를 싹 지워 냈다.
그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희우의 턱이 강제로 비틀리고 다시 귓가에 입술이 안착했다.
이번에는 잘 빠진 입술이 아예 희우의 귓바퀴에 철썩 달라붙었다. 혀를 내어 귓바퀴를 빨거나 귓불을 물어 애무를 행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진득이도 붙어 온다.
귓바퀴에 다사로운 숨결이 비벼졌으나 여전히 지직, 지지직, 고장 난 라디오가 끓어 대는 소리만 났다.
들킨다.
들키고 말 거다.
희우의 심장이 발치까지 가라앉아 벌렁거렸다.
도무지 떨쳐 낼 수 없는 공포심이 사지 말단에서부터 번져 나가 금세 전신을 장악했다. 제 장기를 산 채로 뜯어 먹을 멧짐승을 코앞에서 맞닥뜨린 것처럼 섬뜩함이 가실 겨를이 없다.
짐작대로 턱이 아까와는 완전히 다른 악력으로 붙잡혔다.
“귀가 안 들려?”
“흣…….”
간신히 치뜬 눈으로 바라본 서수혁은 썰물에 감정이 씻겨 나간 듯한 무표정이었다.
차가운 얼음 하나가 척추뼈 사이사이를 타고 흘러내리듯 간담이 서늘해졌다. 희우는 겁을 한가득 집어먹고서 파들파들 떨었다.
지금 감히 내가 몇 번씩이나 확인하게 만드냐고 뺨을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의 아침, 화장실 거울로 확인했던, 잔뜩 피멍이 들어 부어터진 제 몰골이 뒷받침하는 생각이었다.
서수혁은 저와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있는 희우의 턱을 쥐고서 천천히, 아주 느린 속도로 돌렸다.
마지막 점검처럼 한 번 더 귓가로 입술을 내렸다.
작게 소곤대는 소리 이후 그가 희우의 안색을 면밀히 뜯어보았다.
이내 한숨과 함께 겹치고 있던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맞네, 안 들리는 거.”
살짝 흐트러진 머리칼을 이마 뒤로 쓸어 넘긴 서수혁이 한쪽에 벗어 둔 재킷을 뒤적거렸다.
잠시 후 꺼내 든 핸드폰으로 그가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안 박사, 납니다. 지금 집으로 좀 와 줘야겠는데.”
전화를 끊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초인종이 울리고 생면부지인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다. 꽤나 다급한 기색인 데다가 본인을 맞이하러 나온 서수혁에게 90도로 인사를 하며 깍듯하게 구는 걸 봐서는 그의 아랫사람으로 추정됐다.
안 박사, 라고 불린 의사가 거실로 올 때까지 희우는 소파 끄트머리에 앉아서 초조하게 손톱만 물어뜯고 있었다.
“어디 계십니까?”
“저기.”
손가락으로 안경을 추켜올린 안 박사가 희우에게로 다가왔다.
“좀 살피겠습니다.”
서수혁의 명에 따라, 희우의 의사 따위 안중에도 없다는 듯 통보 형식의 당부를 남긴 안 박사가 곧장 진찰에 돌입했다.
전화로 간단하게라도 설명을 했는지 안 박사는 챙겨 온 가방에서 몇 가지의 의료 기구를 꺼냈다. 그중 주로 사용된 건 헤드폰 같은 것에 줄이 주렁주렁 매달린 검사 장비였다.
간단한 청력 검사를 마친 후 몇 가지 질문을 던진 안 박사가 반대편 소파에 앉아 상황을 지켜보던 서수혁에게 고했다.
“편측성 난청입니다. 오른쪽 귀가 말썽이시네요. 아무래도 고막에 손상이 간 상태에서 고열이 났던 게 문제가 된 것 같습니다. 현재로서 청각 반사가 거의 없는 걸 보니 그때 신경에 장애가 생겼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일단은 약물 치료를 해 보고요, 그게 효과가 없으면…… 보청기 착용이 불가피할 듯합니다.”
“수술은?”
“잡힐 난청이라면 약물 치료 단계에서 잡을 수 있을 겁니다. 다시 말해서, 약물 치료가 효과가 없을 시에는 수술 결과도 거의 같다고 보셔야…….”
검사가 진행되는 동안 무언가를 생각하는 얼굴로 턱만 매만지던 서수혁이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로 희우를 지긋하게 주시했다.
“집 다녀온 후인가?”
“네?”
그가 제 귀를 툭툭 두드렸다.
“안 들리기 시작한 거.”
시선에 서린 모종의 위압감에 희우는 잔뜩 혼이 난 아이처럼 졸아붙어 있다가 고개만 주억거렸다.
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자 누가 피부를 꽉 꼬집기라도 한 것처럼 작은 몸이 움츠러든다. 그것만 봐도 서수혁은 알 수 있었다. 왜 지금껏 제게 이 사실을 고하지 않은 건지.
밥도 눈치를 보며 먹어 가는 마당에 저런 속사정을 제게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을 성격이 아니었다.
그럴 상황도 아니었고.
서수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핸드폰을 쥐며 안 박사에게 말했다.
“앞으로 약물 치료 받을 날짜 좀 잡읍시다. 집에서 통원 치료 가능합니까?”
“예, 저 그러면…….”
희우에게는 영 뜻밖의 소식이었다. 설마 그가 치료에 의사를 밝힐 줄은 몰랐다. 단칸방에서 사고가 벌어진 후 얼굴이 형편없이 부어터지고 헛소리가 나올 만치의 고열이 나도 병원이라는 걸 데려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무슨 차이지? 고열이나 타박상과 이 난청에 무슨 차이가…….
한 가지 짐작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혹시 영구적으로 남게 되는 흔적은 달갑지 않았던 걸까?
희우가 고민에 잠긴 사이, 안 박사와 서수혁은 저들끼리 대화를 나누었다. 혹시나 대표의 말 한마디라도 놓칠까 안 박사가 부랴부랴 손을 움직거리는 사이, 서수혁은 거머쥔 핸드폰을 귀에 댄 채 한쪽으로 향했다.
부산, 인계 어쩌고 하는 걸 보니 지금 일과는 무관한 업무 관련 통화를 하는 듯 보였다.
어쨌든 치료를 받아야 할 당사자는 희우지만, 스케줄은 서수혁과 안 박사의 대화로 인하여 채워졌다.
그럼에도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 집에 온 이래, 희우에게 처음으로 일과 아닌 일과가 생겼다.
이게 좋은 걸까? 과연 좋은 일인 걸까?
판단할 수가 없었다.
뭐가 되었든, 이 남자에게서 벗어나 저만의 집으로 돌아갈 길이 여전히 요원해 보인다는 게 희우를 서글프게 만들었다.
문득 슬퍼하는 오빠의 얼굴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자신이 매주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로 다쳤다는 걸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뻔했다.
그런데 그 표정이 블러칠이라도 한 것처럼 흐리다는 게 가장 무서웠다.
이 역시 익숙해지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오빠는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살아는…… 있는 걸까.
제 몸으로 직접 겪어 본 고통을 헤아리다 보니 가슴 안쪽이 먹먹해졌다. 이곳에서 보내 온 여느 날처럼, 아니, 그보다 조금 더 오빠가 보고 싶었다.
-2권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