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5/6)

4.

연금술사의 탑의 탑주와 탑의 유일한 여성 견습생의 조합은 어디서나 눈에 띄었다.

그들이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개인 수업도 점점 더 잦아지면서, 그들의 관계를 의심하는 사람도 늘어났다.

“탑주님과 그 여자 견습생이 툭하면 함께 다닌다며?”

“내가 그럴 줄 알았지. 그 계집애가 탑주님을 꼬신 게 분명해. 제아무리 탑주님이라도 사내인 이상 여자가 몸으로 들이대는데 안 넘어가고 배기겠어? 게다가 탑 내의 유일한 여자잖아.”

“어쩐지, 그 계집애가 그렇게 성적이 좋은 게 이상하다 싶었어. 일 년 만에 하급 도제가 상급까지 승급하는 게 말이나 되냐고. 이제 보니 죄다 탑주님을 꼬드겨서 얻은 성적인 게 뻔해.”

열등감을 자극당한 남자들의 수군거림은 빠른 속도로 몸집을 불렸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단순히 ’둘이 같이 다닌다‘로 시작했던 소문은 일주일도 안 돼서 ’마리온이 탑주를 몸으로 유혹해 상급 도제로 승급했다‘까지 부풀려졌다.

그리고 마리온 역시 이 소문을 알고 있었다.

별로 알고 싶지는 않았으나 알 수밖에 없었다. 제일 처음에는 도서관에 책을 빌리러 갔다가 책장 너머에서 수군거리는 도제들의 대화를 우연히 들었다. 실험용 약의 재료를 구하러 뒤뜰 온실에 가서 약초 더미에 파묻혀 있던 도중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마리온은 어이가 없었다. 그녀는 오베론의 개인 교습을 받기는 했지만 그것이 성적에 영향을 미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베론은 개인 교습을 해줄 정도로 마리온을 신뢰하는 만큼, 그녀가 혼자 힘으로도 뛰어난 성적을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마리온 역시 타고나길 비겁한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라, 오베론이 사적 감정으로 그녀의 성적을 높게 책정했더라면 바로 항의를 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녀가 상급 도제가 된 것은 오베론의 개인 교습을 받기 전이었다.

개인 교습이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오베론이 직속 제자를 들인 것이 이번이 처음일 뿐, 연금술사의 탑에서 연금술사가 마음에 드는 견습생을 개인적으로 가르치고 자신의 인맥 중 일부로 만드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었다.

되레 일 년 만에 상급 견습생이 되는 기록을 세우고도 이제껏 그녀에게 직속 제자가 되길 제안한 연금술사가 오베론 이전에 한 명도 없었던 것은 모든 연금술사가 여성인 그녀를 꺼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녀의 성적은 오롯이 그녀의 것이라고 할 만했다. 자신의 이름과 모든 발명품에 걸고 맹세컨대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은 정당한 노력의 결과물이었다.

화가 났지만 그녀는 견딜 수 있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수모나 불이익을 겪는 것은 익숙했다. 이 탑에 들어온 지난 일 년간 수도 없이 겪어왔던 일이었다. 이제 와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이 정도도 참지 못할 것이었으면, 처음부터 이 탑에 들어오지도 않았어. 전부 연금술사가 되겠다고 결심했을 때부터 예상했던 일이야.’

그랬다. 그녀가 오해받고, 조롱당하고, 편견으로 인한 오명을 뒤집어쓰는 것 정돈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도무지 참을 수가 없는 것은…… 그녀가 아닌, 오베론의 이름이 더럽혀지는 것이었다.

오베론은 그녀에게 있어 제일 소중한 사람이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동경하고 선망했던 사람. 아니, 단순히 존경하는 스승일 뿐만 아니라 그녀의 은인이었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녀의 꿈을 우습게 여기지 않은 사람. 가족들조차 이해하지 못했던 그녀를 이해해준 사람. 그녀 자신조차 모르던 버거움에 비틀거리던 그녀에게 선뜻 기댈 어깨를 내밀어준 사람…….

그런 그를 모욕하는 것은 결코 두고 볼 수 없는 일이었다.

어느 오후였다. 마리온은 언제나처럼 연구에 필요한 약초를 수급하기 위해 탑 뒤뜰에 조성된 약초밭에서 약초를 캐고 있었다.

비록 손과 얼굴엔 흙이 묻고 머리카락은 땀으로 젖어 꼴이 엉망이 되긴 했지만 마리온은 이 순간을 좋아했다. 힘을 쓰고 땀에 젖은 채 약초 향을 싣고 산들산들 불어오는 바람을 쐬고 있자면 속이 다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한심한 인간들을 상대할 바에는 이렇게 약초와 씨름하는 편이 훨씬 보람 있었다. 적어도 약초들은 남자 견습생과 그녀를 차별하거나 헛소문으로 그녀를 모함하지 않았으니까.

덤불에 파묻혀서 꽃이 완전히 개화해 종(鐘) 모양을 띠는 은방울꽃을 따고 있는데, 바람에 실려 익숙한 단어들이 귀에 꽂혔다.

“……마리온 플라리넷 말이야, 이번 중간과제도 만점 받은 거 봤어?”

“봤지. 진짜 독한 년이라니까, 그 계집.”

“너 뭘 모르는구나, 마틴? 사실 걔가 독한 년인 게 아니라, 부정한 방법으로 점수를 따고 있는 거야.”

“뭐? 부정한 방법?”

또 시작이었다. 벌써 세 번째라고 예사롭게 생각하며 마리온은 은방울꽃을 살폈다.

‘이건 아직 따기에 이르네. 완전히 피지 않아서 꽃잎이 돌돌 말려 있는걸.’

목소리들은 더욱더 흥분한 기색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글쎄, 그렇다니까. 플라리넷이 탑주랑 그렇고 그런 사이잖아. 사실 플라리넷은 탑주한테 대줘서 그 점수를 유지하고 있는 거야.”

“뭐? 탑주가? 그럴 리가. 탑주는 진짜 연구밖에 모르는 괴짜 같던데.”

“그런 척하는 거지. 세상에 여자가 들이대는데 마다하는 남자가 어디 있겠냐?”

모종삽을 쥐고 있던 마리온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자신의 이야기만 한다면 넘어가 줄 수 있겠지만, 탑주님을 그렇게 모욕하는 것은 용서할 수가 없었다.

마리온은 짐을 내려놓고 크로스백을 뒤적여 무언가를 꺼냈다. 바로 이 순간을 위해 준비해 둔 물건이었다.

그녀는 덤불 속을 헤쳐가며 살금살금 목소리들을 향해 다가갔다. 남자들보다 키가 훨씬 작은 마리온은 덤불 속에서 감쪽같이 몸을 숨길 수 있었다.

“플라리넷, 공부는 독하게 하지만 순진한 줄 알았는데 완전 다시 봤네. 오베론을 꼬셔서 점수를 얻다니…….”

“세상 순진한 여자 다 죽었냐? 그 계집애가 저번에 나한테 어떻게 대했는지 몰라서 그래?”

이제 보니 상대는 도제 3명이었고, 그중 대화를 주도하고 있는 것은 바로 헥슨이었다. 일전에 마리온이 상급 도제로 승급하자 시비를 걸었던 5년짜리 중급 도제.

“그, 그건……. 너도 약간 잘못을 하긴 했던 것 같은데……. 먼저 시비 건 것도 너였고…….”

“뭐라고? 무슨 헛소리야! 너 지금 그 창녀 같은 계집애 편을 들어주는 거냐? 이거 안 되겠네!”

“설마 플라리넷이 너한테도 대줬냐?”

“아, 아니야! 그럴 리가. 맞아, 그 일은 플라리넷이 전적으로 잘못했지! 내가 잘못 생각했네.”

시비를 걸길래 말로 한 방 먹여주었는데, 그 일이 헥슨에게는 어마어마한 자존심의 상처가 되었던 모양이었다. 이렇게 마리온을 모함하는 데 열을 올리는 것을 보면.

그들에게서 충분히 가까워지자, 마리온은 덤불을 들춰 방향과 거리를 가늠하다가 손에 쥔 병을 던졌다.

유리로 된 병이 그들의 발치로 날아갈 때까지 상대들은 마리온을 욕하는 데 전념하느라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쨍그랑!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병은 산산조각 났고, 그들이 무언가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뭐, 뭐야!”

“어느 놈이야?”

펑! 폭발음과 함께 자욱한 연둣빛 연기가 피어올랐다가 곧 사그라들었다. 시야를 가리는 연기가 잦아들었을 때…… 그들은 칭칭 묶여 있었다.

헥슨과 그 무리는 마리온의 팔뚝만 한 굵기의 덩굴에 사지가 전부 묶여서 옴짝달싹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들이 움직일 수 있는 부위는 단 하나, 주둥이뿐이었다.

“이, 이게 뭐야!”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윽, 이거 놔!”

그들이 야단법석을 떨 때 마리온이 덤불 속에서 나왔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상대들을 한심하다는 눈으로 보았다.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너희가 추잡하니 다른 사람들도 다 추잡하게 살 것 같니?”

“프, 플라리넷! 너!”

그녀의 모습을 보자 상대들의 얼굴은 당혹과 분노로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래봤자 그들은 꽁꽁 묶여 있었고 마리온은 그들을 상대할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였다.

“플라리넷! 너 이거 당장 안 풀어!”

“우, 우리가 미안하다, 플라리넷. 네가 듣고 있는 줄 몰랐어.”

“맞아. 우린 그냥 네 점수가 너무 부러워서 그랬던 거야. 그러니 이거 좀 풀어주라. 응?”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인지 두 녀석은 비굴하게 머리를 숙였다. 하지만 헥슨은 달랐다.

“너희 제정신이냐! 사나이 자존심이 있지, 저런 계집애한테 고개를 숙여? 난 꿀릴 거 없어. 내 말이 맞잖아! 네가 탑주를 꼬셔서 승급한 거, 누가 모를 줄 알고? 지금 탑 내에는 소문이 쫙 퍼졌어!”

마리온은 그런 헥슨을 세상에서 제일 한심하다는 눈으로 보았다.

‘어쩜 사람이 저렇게 자존심과 아집으로 똘똘 뭉쳤을까? 난 절대 저렇게 살지 말아야겠다. 훌륭한 반면교사야.’

“반성하지 않을 줄 알았어. 너희 이 약이 무슨 약인 줄은 아니? 바로 성장 촉진제야. 내가 100점을 맞은 이번 과제에 제출한 발명품이지.”

그녀의 이번 발명품인 성장 촉진제는 과제를 낸 스승에게서 굉장한 찬사를 들었다. 이제껏 성장 촉진제는 많았지만, 이렇게나 단시간 안에 큰 효과를 내면서도 부작용은 적은 성장 촉진제는 처음이며, 그녀의 실력은 이미 도제가 아닌 정식 연금술사의 수준을 웃돈다는 코멘트와 함께 말이다.

마리온은 상대들의 몸을 칭칭 감고 있는 덩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약초를 캐러 왔으면 자기들 발밑에 있는 약초가 뭔지 잘 확인을 했었어야지.”

그제야 헥슨은 덩굴을 내려다보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것을 유심히 살펴보던 그의 얼굴이 곧 새파래졌다.

“이, 이건 설마……!”

“그래, 붉은독타래덩굴이야.”

붉은독타래덩굴. 아기 손바닥 같은 형태의 붉은 잎이 빼곡히 붙어 있는 그 덩굴은 이름처럼 독이 있어 스치기만 해도 접촉한 부위가 빨갛게 부어오르고 며칠이나 가는 발진과 가려움증, 쓰라림을 일으켰다. 생명에 지장을 주는 독은 아니지만 한번 닿으면 며칠 동안은 몹시 귀찮기 때문에 꼭 장갑을 끼고 전신을 가리는 옷을 입은 채 취급해야 했다.

“성장촉진제 덕에 그 효능이 몇 배로 증가해서, 아마 며칠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걸? 탑주님을 모욕한 죄를 반성하면서 한동안 고생 좀 해보도록 해.”

“뭐, 뭐라고!”

“어쩐지, 팔다리가 아까부터 근질근질하더라니……!”

“야, 플라리넷! 이, 이거 당장 안 풀어! 으악, 따가워! 간지러워!”

“이거, 아직도 자라고 있잖아!”

“으아악! 바지 속에 들어오고 있어! 거긴 안 돼!”

마리온은 그들의 고통 어린 아우성을 무시한 채 등을 돌렸다.

그런데 그때였다.

“마, 마리온 플라리넷! 네가 이런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냐!”

헥슨의 악에 찬 고함이 들려왔다. 지능도 인성도 뒤떨어지는 인간이지만, 이런 와중에도 끈질긴 그 의지만은 높이 살 만하다고 마리온은 생각했다.

“그래봤자 넌 계집애고 여기 안 어울려! 그래, 탑주! 탑주한테 네가 도움이 될 것 같아? 너 같은 한낱 계집애가?”

덤불 속으로 사라지려던 마리온의 발걸음이 한순간 멈췄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헥슨이 고래고래 소리쳤다.

“탑주의 최근 연구가 줄었다는 소문이 자자하더라! 그리고, 그게 다 너 때문이라는 것도! 고작 너한테 정신이 팔려서 그 대단하신 양반이 연구도 못 하게 만들고, 어? 여자가 남자 앞길이나 막고 말이야. 네가 아무리 잘나봤자 탑주의 연구를 방해할 정도냐?”

그것은 처음 듣는 말이었다.

하지만 마리온은 이해했다. 그녀는 오베론의 모든 최신 논문과 발명품들을 살펴보고 있었는데, 확실히 최근 몇 달간은 그의 연구가 줄었다. 정확히 말해서, 그가 그녀를 수제자로 받아들였을 때부터.

‘왜 몰랐을까?’

마리온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저 모른 체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의 수업을 듣는 것이 기뻐서.

그가 자신에게 관심과 정성을 쏟아주고 있다는 것이, 그와 같은 공간과 시간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 그의 나직한 목소리를 듣는 것이…… 그와 함께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것이 기뻐서. 그것들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마리온은 그를 누구보다 존경하고 소중히 여겼다. 하지만, 단지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녀가 그를 독점하고 있어도 괜찮은 걸까?

그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겨우 견습생일 뿐인 그녀가 독점하기에 그는 너무나 대단한 사람이었다. 온 대륙이, 아니 어쩌면 이 세계 전체가 그의 연구를 필요로 했다. 그는 이 세상을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어줄 사람이었다.

그를 진정으로 존경한다면. 그를 진정으로 소중히 여기고, 아끼고 있다면…… 그의 삶에 더 도움이 될만한 길을 선택해야 하지 않을까?

마리온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이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결론이었다. 그를 위해서나, 공익을 위해서나 그것이 최선이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믿을 수 없게도…… 그녀는 그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최선’을 선택할 수가 없었다. 그것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베이는 것처럼 아파 왔다.

그때였다.

그 잠깐의 상념을 끊은 것은 그녀의 머리 위에서 느껴지는 온기였다. 그녀의 머리 꼭대기를 넓고, 부드럽고, 따뜻한 무언가가 덮어왔다. 그리고 그 감각은 어쩐지 익숙한 것이었다.

“탑주님…….”

마리온이 중얼거렸다.

그 말을 한 사람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갑작스레 나타난 새로운 존재에 헥슨과 패거리는 정확히 같은 말을 입에 담았다.

“타, 탑주님!”

마리온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곁에서 그가 웃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단순하고 장식 없는 옷을 입고, 아무렇게나 자른 듯한 머리를 하고 있으나 그것이 조금도 흠이 되지 않을 정도로 단정한 얼굴을 한 그가, 아름다운 푸른 눈을 접으며 미소 지었다.

순간 마리온은 그의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너무나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잠시 넋을 놓을 정도로. 하지만 논리적으로 생각해서,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의 뒤에 후광이 생길 리는 없었다. 눈의 착각이 분명했다. 아니면 마침 그의 뒤에 해가 떠 있었거나.

마리온은 소매로 눈을 비비곤 다시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그녀를 향해 미소 지으면서. 그 달콤하면서도 올곧은 시선은, 그녀 외의 다른 것들에게는 아무 관심도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마리온이 물었다.

“탑주님, 여긴 어떻게…….”

“잠시 지나가다 들렀지.”

그제야 오베론은 헥슨 패거리 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그의 시선이 닿자, 패거리는 오그라드는 약이라도 먹은 것처럼 한껏 쪼그라든 데다가 창백해졌다.

“늘 평화로운 약초밭에서 왠지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말이야……. 마리온, 네 이름이 들리기에 예사로운 일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늘도 역시나 기대 이상이군.”

마리온은 그것이 자신을 탓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상대들이 먼저 잘못을 하긴 했으나 독초로 같은 견습생들을 꽁꽁 묶어놓는 것도 잘한 일은 아니었기 때문에 마리온은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실망시켜 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녀는 이번에야말로 정말로 오베론이 화를 내거나 그녀의 품행에 실망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을 깨고, 오베론은 하하 웃었다.

“실망이라니?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모르겠군, 마리온. 기대 이상이라고 하지 않았나? 소문은 들었지만 정말 대단한 성장촉진제야. 내가 지난번에 가르쳤던 미나리아재비꽃의 효용을 응용했군.”

“네? 가, 감사합니다. 하지만…….”

마리온이 얼떨떨한 얼굴로 입을 열자 오베론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리온은 입을 다물었다.

“물론…… 같은 도제를 이렇게 다치게 만든 건 그냥 지나갈 수 없지. 넌 두 주간 근신이다, 마리온. 당분간 바깥 외출은 삼가면서 반성하도록.”

마리온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저지른 일의 스케일과 비교해서 두 주 근신은 그리 큰 벌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두 주만으로도 답답해 미치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녀는 워낙 연구실에 틀어박혀 연구하는 것만 좋아하다 보니 당분간 연구와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시내 케이크 가게의 맛있는 케이크를 사러 가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말이야. 이 정도면 어디야.’

오베론은 어느샌가 다른 연금술사들을 불러서 헥스 패거리를 풀어주었다. 붉은독타래덩굴에 칭칭 감겨 있던 패거리들의 팔다리며 얼굴은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채찍으로 맞은 듯 길고 선명한 붉은 자국이 얼룩덜룩했고, 모두 환부가 쓰리고 가려워서 미치려고 했다. 심지어 셋 중 한 명은 사타구니를 붙들고 나뒹굴고 있었다.

연금술사들이 헥슨 패거리에게 응급처치로 고약과 당나귀 고환 연고를 발라주는 동안, 오베론이 말했다.

“그리고 말인데…… 너희 셋, 아주 재미있는 소문을 가져왔더군.”

“네?”

헥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상황에서 오베론이 말하는 ‘재미있는 소문’이 무엇인지는 뻔했다. 고통을 호소하던 세 사람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타…… 타, 탑주님. 그, 그건 그게 저…….”

오베론은 손으로 자신의 턱을 쓸며 미소 지었다.

“소문의 진위에 대한 자신감이 만만하던데, 설마 이제 와서 한 입으로 두말하지는 않겠지, 그렇지? 사나이의 자존심이 있는데 말이야.”

그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어떤 감정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웃는 얼굴은 다정해 보이기도 했고, 장난기가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마리온은 알 수 있었다. 티 한 점 없는 맑은 미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서는 어떤 강력한 힘이 느껴졌다. 그것은 위압감 같기도 했고, 특유의 성격과 높은 지위에서 나온 자신감 같기도 했다. 어쩌면 상황 자체가 만들어낸 압박감일지도.

당사자가 아닌 마리온도 꽤 강하게 느꼈을 정도인데 당사자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의 얼굴은 납빛으로 질려 있었다.

“타, 탑, 탑주님……! 그게, 저는 그게, 저는……!”

특히나 헥슨은 금방이라도 숨이 막혀 쓰러질 것 같았다. 마리온조차 동정심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오베론의 얼굴에는 일말의 동정심도, 흔들림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그저 언제나처럼 웃고 있을 뿐이었다.

“알다시피, 연금술사의 탑은 개인의 다양한 연구를 존중하고 권장하기 위해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고 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중시하는 것은 바로 책임감이지. 네가 그 주둥이를 놀리는 것은 자유지만, 주둥이를 한번 놀렸으면 그 말에 책임을 질 준비 역시 되어 있겠지. 네가 연금술사의 탑의 일원이라면 말이다.”

그 말을 하는 오베론의 어투는 언제나처럼 실낱같이 가벼웠고, 얼굴 역시 웃고 있었으나, 마리온은 어쩐지 그 얼굴이 대단히 차가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설마, 화나신 걸까?’

마리온은 단 한 번도 오베론이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앞에선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모습이었다.

“그러니 말해봐라. 방금 한 말, 넌 책임을 질 준비가 되어 있나?”

사시나무처럼 떨던 헥슨은 무너지듯 무릎을 꿇었다. 그는 자신이 앉아 있던 곳이 붉은독타래덩굴 밭이라는 것을 잊었는지 땅에 머리를 처박았다. 아니, 어쩌면 잊어버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는 절박했던 것이다.

“저, 정말 송구합니다! 책임지지 못할 말을 해버렸습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제발 이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부디, 부디 한 번만 용서해 주신다면…… 다시는…….”

헥슨은 붉은독타래덩굴밭에 비참할 정도로 얼굴을 처박고, 또 처박았다. 이마며 얼굴이 빨간 자국으로 가득하다 못해 퉁퉁 부어올랐다.

마리온은 그가 왜 그렇게까지 용서를 받으려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왜냐하면…….

오베론의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는 미동도 하지 않고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

“주어진 자유에 걸맞은 책임을 행사하지 못하는 연금술사 따위는 이 탑에 필요 없다. 오늘부로 짐을 싸서 나가라.”

마리온은 그 순간만큼은 헥슨 패거리에게 동정심을 느꼈다. 그들 모두가 이 연금술사의 탑에서 7~8년, 길게는 10년은 수학한 자들이었다. 그 긴 시간 동안 거금의 학비를 퍼부어가며 노력했던 것들이 전부 물거품이 되어버린 것이다.

연금술사가 되어 부와 명예를 거머쥐겠다며 십 년 가까이 가족들의 뼈 갈리는 노력을 바탕으로 공부했는데, 이제 와서 빈손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게 되다니. 그것도 ‘탑주와 다른 도제 사이의 부적절한 관계를 모함하다가 퇴교당했다’ 따위의 불명예를 지고.

‘생각만 해도 끔찍한걸. 저 자리에 있는 게 내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마리온은 부르르 떨었다.

당연하게도 헥슨 패거리는 크게 절망했다. 현실이 와닿지 않는 듯,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거나, 가족의 이름을 중얼거리는 녀석도 있었다.

마리온이 어찌할 줄 모르고 서 있는데, 어깨에서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 오베론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쥐며 말했다.

“그럼 이제 그만 들어갈까?”

그는 입가 가득히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아까와 달리, 그의 얼굴에 냉기라곤 바늘구멍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한없이 다정하고, 다소 장난기까지 어린 그 얼굴은 마리온이 알던 그의 평소의 모습 그대로였다.

“네.”

마리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연금술사들이 헥슨 패거리를 처리하도록 놔두고, 두 사람은 탑으로 돌아왔다.

오베론과 함께 나선형의 계단을 오르면서도 마리온은 생각했다.

‘탑주의 최근 연구가 줄었다는 소문이 자자하더라! 그리고, 그게 다 너 때문이라는 것도!’

‘네가 아무리 잘나봤자 탑주의 연구를 방해할 정도냐?’

헥슨이 했던 말들이 끊임없이 그녀의 귓가를 맴돌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단 한 번도 그 녀석의 저급한 말에 상처받거나, 그의 말을 의식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제 와서…….

‘그런 저급한 녀석의 말 따위 신경 쓸 필요 없어. 하지만…….’

하지만 헥슨의 말은 그렇다 쳐도, 그녀가 봐온 것들은 진짜였다.

그녀를 수제자로 받아들인 뒤 확연히 줄어든 오베론의 연구들. 그것은 기분 탓이나 착각 같은 것이 아니었다.

확실히 그녀는 그의 시간과 정성을 많이 빼앗고 있었다. 그의 수제자가 된 이후로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은 확연히 길어지고 있었다.

‘내가 탑주님께 그럴 가치가 있는 사람일까? 나에 비하면 탑주님은…….’

바윗돌이라도 통째로 삼킨 듯이 답답했다. 마리온은 무심코 함께 걷는 오베론을 올려다보았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마치 만유인력이 물체를 끌어당기듯, 그는 그녀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정말 무의식적으로 돌아봤을 뿐인데, 그 새파란 눈동자와 마주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마리온은 감전이라도 된 듯 파드득 놀랐다. 훔쳐본 것을 들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 탑주님…….”

“마리온.”

오베론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투명한 눈동자가, 나직한 목소리가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뱃속에 들어 있던 바윗돌이 뜨겁게 달궈지는 것만 같았다.

“속이 상했나?”

“네?”

마리온이 다시 한번 깜짝 놀란 것은, 첫 번째로는 그가 그녀의 속을 읽은 것 같았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는 그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어 섰기 때문이다.

오베론은 발을 멈추고 그녀를 보았다. 마리온 역시 그를 따라 멈추어 섰다.

“아까 그 녀석들이 했던 말 말이야. 속이 상했나?”

오베론이 한 발짝, 마리온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뒷걸음질을 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어쩐지, 그녀가 벽으로 몰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오베론의 입가에는 언제나 같은 엷은 미소가 떠 있었으나, 그는 꽤 진중해 보였다. 하지만 그의 눈에 비치는 것은 아까 헥슨 패거리에게 보였던 분노와는 전혀 다른 감정이었다.

‘걱정하고 계신 걸까?’

가슴 속이 간질거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감동 같기도 했고, 고마움 같기도 했다. 마리온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전혀요. 저 하나도 신경 안 써요. 이곳에 온 뒤로 한두 번 들어본 종류의 말도 아닌데요, 뭐.”

순간 오베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고 생각했다.

그의 큰 손이 마리온의 손목을 잡아챈 것은 순간이었다. 그녀의 작은 몸이 아프지 않을 정도로 벽에 밀어붙여졌다.

“엄마야! 타, 탑주님?”

마리온은 토끼처럼 둥근 눈으로 오베론을 올려다보았다.

오베론, 그의 얼굴에 더 이상 웃음기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마리온을 벽에 밀어붙인 채, 그녀의 손목을 꽉 부여잡고 있었다.

언제나 여유가 넘치고 다정했던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이상했다.

마리온은 고민했다. 아까 그 말에서 그를 자극할 만한 구석이 있었던가? 하지만 별달리 짚이는 구석은 없었다. 말하자면, 그의 지금 이 행동은 정말이지 ‘논리적이지 않은’ 행동이었다.

오베론은 마리온의 손목을 쥐지 않은 손을 그녀의 뺨에 가져다 대었다. 그의 긴 손가락이 톡, 하고 그녀의 뺨에 닿았다. 누르면 누르는 대로 푹 패는 그녀의 보드라운 살결은 움푹 들어간 우물을 만들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심스레 그녀의 뺨을 쓸어내렸다. 그렇게 몇 번이고 뺨을 쓰다듬더니, 그녀의 이마에 손을 대었다.

벽에 밀어붙여지고 손목이 붙잡힌 채라는 다소 위협적으로 느껴질지 모르는 이 상황에도 불구하고, 마리온의 갈색 머리칼을 쓸어넘기는 손길은 다정했고, 애정이 가득 넘쳤다.

마리온은 그의 웃음기 없는 얼굴이 어쩐지 슬퍼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당황스럽긴 했지만, 그의 손길은 왠지 싫지 않았다.

“마리온.”

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답지 않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그런 말에 상처받지 않을 수 있는 녀석은 이 세상에 없어.”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마리온의 얼굴에 균열이 졌다. 대답을 해야만 했다. 아니라고, 자긴 정말 괜찮다고. 처음부터 각오했던 일이니까,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지만 그 무수한 말 중, 마리온은 그 어떠한 것도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그래, 사실은 상처받고 있었다.

아무리 각오를 했다곤 해도 그녀 역시 사람이었다. 무수한 편견과 질시는 그녀를 짓누르는 짐이었고, 더러운 말과 시선은 그녀를 찌르는 가시였다. 연금술이 너무 좋았지만, 이것만 있으면 이해도 공감도 필요 없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가족조차 이해해 주지 않는 길에서 그녀는 외로웠다.

가슴을 꽉 메우던 바윗돌이 녹아 흐르고 있었다. 두꺼운 자존심의 갑옷을 벗고 진짜 자신을 내보이는 것이 부끄러웠다.

자신조차 고집스레 부정했던 사실을 그는 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이런 뻔한 사실을 이제껏 한껏 외면하고 있던 자신이 우스웠다. 헛웃음이 날 정도였다. 그런데, 정말이지 이상하게도. 이성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게도…….

“아……. 저, 저, 그게, 저. 탑주님.”

나오는 것은, 웃음이 아니라 울음이었다. 녹아 흐르는 바윗돌은 눈물샘을 통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정말이지 부끄러웠다. 11살 이후로 단 한 번도 남의 앞에서 눈물을 보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어쩐지. 왠지 모르게, 그의 앞에서는 울어도 될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그이니까. 그이므로.

마리온이 울기 시작하자 오베론은 그녀의 작은 몸을 끌어안았다.

“괜찮아, 괜찮아. 착한 아이지, 마리온. 그래. 괜찮아.”

익숙하고 따뜻한 손길이 등을 도닥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속삭이는 말은 꼭 ‘울어도 괜찮아’처럼 들려서 마리온은 펑펑 울고 말았다.

그의 품에 매달려서 한참이나 어린애처럼 엉엉 울고 나니, 속이 뻥 뚫린 것 같이 시원했다. 마리온은 눈물 콧물 범벅인 얼굴로 그의 로브에 얼굴을 문질렀다. 그녀가 울음을 그친 것 같자, 오베론은 웃으며 손수건을 건넸다. 마리온은 그 손수건에 팽 하고 코를 풀었다.

마리온이 좀 진정한 것 같자, 오베론이 말했다.

“나도 알고 있었어. 네가 얼마나 힘들게 지내는지.”

“아, 알고 계셨어…… 요?”

마리온은 깜짝 놀라 붉게 부은 눈을 최대한 크게 떴다. 그 모습이 귀여운지 오베론이 피식 웃었다.

“어떻게 모르겠어. 너는 이 탑에서 여러 가지 의미로 제일 주목받는 견습생이고, 난 늘 너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물론 너는 단 한 번도 힘든 내색 하지 않고 씩씩하게 이겨냈지. 정말 놀라운 강함이고, 너의 강점이다.”

갑작스러운 칭찬에 마리온은 몸이 배배 꼬일 것 같았다. 애처럼 펑펑 울고 스승의 로브에 콧물까지 묻힌 직후에 강하다는 칭찬을 받는 것은 정말이지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시도 때도 없이 차별을 당하는데 마음이 괜찮을 리가 없지. 그럼에도 내가 개입하지 않았던 것은, 첫 번째로는 네 성격상 더 높은 권력자가 권력으로 비호해 주는 것을 네가 용납할 리 없기 때문이었고, 두 번째로는 그것이 본질적인 해결책이 될 리 없기 때문이었다. 내가 널 노골적으로 비호해 주면 당장 편견에 찌든 녀석들의 입을 다물게 할 수는 있겠지. 하지만 속으로는 조금도 납득하지 않을 것이고, 그 불만은 주머니 속 송곳처럼 어떻게든 표출될 거야. 그런 꼴을 볼 바에는, 차라리 네 실력을 제대로 인식시켜 주고 싶었다. 그 녀석들이 틀렸다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고 싶었던 거야.”

오베론이 한숨을 쉬었다. 마리온은 그가 한숨을 쉬는 모습을 난생처음 보았다.

“하지만 잘못된 판단이었지. 설령 그렇다고 해도 널 저런 쓰레기들 사이에 방치해 둬선 안 됐어. 내 잘못이다, 마리온. 용서해다오.”

마리온은 깜짝 놀라서 그의 옷깃을 잡았다. 그녀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무, 무슨 말씀이세요! 탑주님 잘못이 아닌걸요! 오히려 전, 탑주님이 제게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주고 계셨다는 걸 몰랐어요. 정말 기쁘고 감사한걸요. 정말로…… 요. 어떻게 다 갚아야 할지 모르겠을 정도로.”

진심이었다. 그가 자신을 그렇게 아껴준다는 사실에, 그녀는 너무 기뻐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하지만 다른 이유로도 숨이 막혔다.

‘탑주의 최근 연구가 줄었다는 소문이 자자하더라! 그리고, 그게 다 너 때문이라는 것도!’

‘네가 아무리 잘나봤자 탑주의 연구를 방해할 정도냐?’

‘내게 이렇게 많은 신경과 정성을 쏟아주셨기에, 탑주님의 연구가 줄어든 걸까?’

마리온은 상대가 모르게 입안 살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걱정이나 끼쳐드리고. 나는 역시 탑주님께 방해만 되는 존재인 걸까?’

마리온의 말에 오베론의 얼굴에 다시 웃음기가 돌아왔다. 그는 귀엽다는 듯이 마리온의 머리를 매만졌다.

“갚아주기는. 오히려 이쪽이야말로 네게 진 빚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를 정돈데. 평생을 갚아도 갚을 수 있을까 말까야.”

“네…… 에? 비, 빚이요? 탑주님이, 제게요?”

마리온은 입을 떡 벌렸다.

이게 갑자기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가 그녀에게 빚이 있을 리가 없었다. 일단, 돈도 그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을뿐더러, 그는 역사책에 이름이 실릴 정도로 위대한 대연금술사였으며 그녀는 한낱 견습생이었다.

그런 그녀가 어떻게 그에게 도움이 되겠는가? 하물며, 평생을 갚아도 갚을 수 없을 정도의 빚은 어불성설이었다.

말뜻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마리온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오베론은 미소 지었다.

“내 말엔 한 치의 과장도 없어.”

그가 그녀를 잡아끌었다.

“따라와, 갈 데가 있다. 이젠 가르쳐 줄 때가 된 것 같으니.”

“가…… 가르쳐 주신다고요? 뭐를요? 비, 비밀수업인가요?”

그의 걸음을 다소 바삐 쫓아가며 마리온이 물었다.

그녀의 가쁜 호흡에 걸음을 조금 늦춰준 오베론은, 부드럽게 웃었다.

“그래. 비밀수업이야.”

* * *BORI 갠소요게X

“자, 들어와.”

두 사람이 향한 곳은 오베론의 연구실이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번쩍이고, 부글거리고, 빙빙 돌고, 펑펑 터지는 소리가 그녀를 맞이했다.

마리온은 오베론이 무엇을 가르쳐주려는 건지 몰라 약간 긴장했으나, 책상 위의 눈에 잘 띄는 자리에 놓인 프리지어 꽃병을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오베론은 그녀를 연구실의 안쪽 방으로 이끌었다. 이제껏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이었다.

“계속 연구해 왔던 발명품이 있다. 쉽지 않아 제법 오래 걸렸는데, 이제 겨우 완성 단계에 들어섰지.”

어두운 방에 먼저 들어간 오베론이 촛대를 들고 모든 등유 램프에 불을 붙였다.

“이번에도 역시, 제일 먼저 실험해 주는 것이 너였으면 한다, 마리온.”

방 안이 환해지자, 마리온은 두리번거리며 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넓은 방 안에는, 한가운데에 욕조 같은 것이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굉장히 이상한 물건이었다. 긴 직사각형의 형태였고 검은 금속 재질로 되어 있으며 오베론도 들어가 편히 누울 수 있을 정도로 컸는데, 그 안에는 짙은 푸른색의 액체가 가득 들어 있었다. 액체는 부글부글 끓고 있었으나 김은 피어오르지 않았고, 오히려 끓고 있는데도 차가울 것 같다는 인상을 주었다.

“아, 이건…….”

처음 보는 물건이었는데도 어쩐지 마리온의 눈에 익었다. 오베론이 몇 번인가 보여주었던 발명품 도안에서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오베론은 다른 것들은 어떤 물건이고 용도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어도 이것만은 가르쳐 주지 않았었다.

“좀 더 가까이서 봐도 괜찮아.”

오베론이 권하자, 마리온은 사양 않고 냉큼 그것에게 다가갔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이상했다. 특히 파란 액체가 그랬다.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는 그것은 부글부글 끓고 있지만 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탑주님, 이건…….”

마리온이 묻자, 오베론이 미소 띤 얼굴로 설명했다.

“특정 인간의 정신세계에 입수(入水)할 수 있는 기계다.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누군가의 정신세계 중 일부를 액화시켜 놓은 것이고. 내 역작이지.”

“들어간다고요? 정신세계에요?”

마리온은 깜짝 놀랐다. 이곳에 온 뒤로 온갖 이상한 발명품들을 잔뜩 보아왔으나 이것만큼 이상하고, 그녀를 놀라게 하는 것은 없었다.

“그래. 심리치료나, 다양한 용도로 쓸 수 있겠지.”

확실히 그랬다. 타인의 정신세계로 들어가서 그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니, 얼마나 대단한 물건이란 말인가? 마음이 힘들고 괴로운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줄 만한 물건임을 마리온은 이해했다.

마리온은 이 놀라운 발명품을 경외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렇게 대단한 물건이라니. 게다가 그 첫 실험자가 자신이 되어, 오베론의 이 위대한 발명에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다니……. 마리온은 무척이나 두근거리고 설레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저, 실험을 도와달라고 하셨죠? 제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마리온이 의욕에 차서 묻자, 오베론이 설명했다.

“모든 준비는 마쳐놨어. 넌 그냥 그 안에 들어가서 누우면 돼. 귀나 코로 액체가 들어오더라도 너무 놀라거나 일어나지 말고. 원래 그런 거니까.”

마리온은 결의에 찬 얼굴로 끄덕였다.

“저, 그럼……. 지금 당장 해볼게요.”

오베론이 알았다는 사인을 보내며, 실험 과정 보고서를 작성할 준비를 마치자 마리온은 심호흡을 했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욕조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먼저 한쪽 발을 담갔다. 놀랍게도, 액체는 끓고 있는데도 몸서리치게 차가웠다.

“으! 엄청 차가워요.”

오베론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실험자에게 느껴지는 온도는 액화시킨 정신세계의 상태에 따라 다르지. 그 녀석의 정신세계가 유달리 차가워서 그래. 조금만 참아.”

“네, 네…….”

마리온은 꾹 참고, 나머지 한쪽 발도 담갔다. 그러고는 조심스레 자리에 앉았다. 역시, 얼음물에 몸을 담근 것만 같았다. 아니, 얼음보다도 더 차가울지도 몰랐다.

어느샌가 입술이 파랗게 되고, 물속에 담근 양손이 곱아들기 시작했다. 아직 담그지 않은 상체가 닿는 공기가 훈훈하고 따뜻하며 유혹적으로 느껴졌다. 당장에라도 이 망할 욕조에서 빠져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면 안 돼. 다른 사람도 아니고 탑주님이 믿고 맡겨주신 일이야. 조금만 참으면 익숙해질 거야.’

마리온은 이를 악물고, 조금씩 누우면서 상체를 담그기 시작했다. 어찌나 추운지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가고 이가 딱딱 부딪쳤지만, 그녀는 참고 견뎠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머리까지 담글 용기는 나지 않았다. 마리온은 머리만 액체 밖으로 나온 상태에서 잠시 멈추었다.

“옳지, 잘하고 있어, 마리온. 그대로만 하면 돼. 착한 아이지.”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 때고, 그녀가 두려워하고 불안해할 때마다 용기를 주던 그 말.

마리온은 그 말에 용기를 냈다. 그러고는, 머리까지 완전히 액체 속에 밀어 넣었다.

얼음보다 차가운 액체가 귀와 콧속으로 밀고 들어왔다. 머릿속까지 얼어붙는 듯한 기분이었다. 마리온은 펄쩍 뛰어 욕조에서 뛰쳐나가고 싶은 기분을 꾹 참았다.

그때였다. 눈 깜짝할 새에, 새파란 액체만이 보이던 시야가 바뀌었다.

어둡고 눅눅하고 더러운 곳이었다. 쓰레기와 오물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마리온은 소매로 코를 막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저분한 골목의 안쪽에 마리온은 홀로 서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그때, 눈에 들어온 인영이 있었다. 산발을 하고 누더기를 걸친, 빼빼 마른 작은 소년이었다.

소년은 작은 빵을 들고 있었다. 그 마른 손으로 얼마나 힘껏 쥐었는지 빵은 우그러지고 손등엔 핏대가 섰다.

소년이 자신이 온 방향을 돌아보았다. 그의 파란 눈이 욕심과 두려움으로 희번득 빛났다.

“너 거기 안 서!”

또 다른 사람이 골목 안쪽에 뛰어들었다. 앞치마를 두른 중년의 남자였다.

“이 도둑놈아! 이번에야말로 꼭 붙잡아서 치안대에 넘겨주마!”

소년은 남자의 우악스러운 손아귀를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

소년은 거의 날 듯이 도망치더니, 쓰레기통을 밟고 올라 펄쩍 뛰어 담장 꼭대기를 쥔 채 자신의 몸을 끌어올렸다. 저 마른 팔에서 어떻게 저런 힘이 나올 수 있는 건지 의심스러웠다.

“야! 이 도둑놈 자식. 얼른 안 내려와!”

남자는 따라서 담장 위로 뛰어오르려고 했으나 소년만큼 민첩하지 못했다. 그의 육중한 몸이 쓰레기통 위에 쿵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보고도 소년은 웃지 않았다. 그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형형한 푸른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더니, 고개를 돌려 담장 너머로 뛰어내렸다.

이 모든 모습을 지켜본 마리온은 넋을 잃었다. 채 발이 바닥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 차갑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가, 더럽고 지저분한 얼굴이 그녀의 홍채에 찰싹 달라붙은 것만 같았다.

몰라볼 정도로 더럽고, 마르고, 볼품없는 모습이었으나 알 수 있었다. 알지 못할 리가 없었다. 알아보지 못하기엔, 그는 그녀에게 너무나 가깝고 소중한 존재였다.

“탑주님.”

이곳은 오베론의 정신세계였다.

눈 깜짝할 새에 다시 풍경이 변했다.

어린 오베론의 주변을 어린아이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거지새끼. 성(姓)도 없는 상놈의 새끼.”

“너는 부모도 없다며?”

“우리 엄마가 너 같은 도둑고양이랑은 놀지 말랬어. 도벽이 옮는대.”

“지금 입고 있는 건 옷이니, 걸레니? 우웩! 더러워!”

작은 악마들은 오베론에게 마음껏 손가락질하곤 까르르 웃으며 떠나갔다. 오베론은 사라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그저 멀거니 바라보았다.

‘탑주님의 성이 없었던 것이, 고아이셨기 때문이구나. 전혀 몰랐어.’

그의 책과 논문은 전부 읽었고, 그에 대해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면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왜 그에게는 성이 없고 이름뿐인지. 왜 출신 가문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가 없는지. 왜 유명세에 비해 과거와 유년 시절은 조금도 알려지지 않았는지.

‘난 정말 바보야. 탑주님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소중히 여긴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탑주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어.’

가슴이 죄어들어 숨이 막혔다. 저 작은 어깨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가 느끼고 있는 슬픔이, 절망이, 외로움이 그녀에게 전해져 오는 것만 같았다.

마리온은 어린 오베론이 더럽고 습기 찬 골목 구석에서 신문지를 덮고 잠드는 모습을, 어른들에게 더럽다고 내쫓기거나 괴롭힘당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의 외로운 삶에는 애정도, 단 한 가닥의 온기도 존재하지 않았다.

더러운 길바닥 위를 굴러다니는 것은 그저 굶주림과 생존 욕구뿐이었다. 다 썩어 버려진 과일이라도 갉아먹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목숨. 그 누구도 원하지 않는 잉여 생명.

그러는 동안에도 겨울은 왔다. 이미 여러 번의 겨울을 견뎌냈지만 이번은 달랐다. 몇십 년 만의 혹한이라고 어른들은 말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눈이 왔고, 비명처럼 높은 바람 소리가 골목 안을 몰아쳤다. 하지만 추위를 막을 만한 것은 거적때기 같은 옷과 신문지뿐이었다.

조금이라도 바람을 피하고자 누군가의 수레 아래에 기어들어 가 신문지를 뒤집어쓴 채 오들오들 떨고 있는 소년을 보고도 누구도 도와주려 하지 않았다.

그저 얽히기 싫다는 듯, 쯧쯧 혀를 차면서도 집으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할 뿐이었다.

‘잔인한 사람들. 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저렇게 작은 아이인데. 얼어 죽으면 어쩌려고…….’

마리온은 발을 동동 구르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소년의 입술은 파랗게 물들어 있었다. 손가락과 발가락은 전부 곱아들었다. 속눈썹마다 서리가 하얗게 낀 채 옹송그리고 있었다.

정신세계에 들어오는 기계의 영향일까, 마리온은 그의 감정을 그대로 느끼고 있었다. 소년의 생각이 언어가 아닌 감각으로 전해져 왔다.

그는 이 추위에 저항할 마음조차 없었다. 어차피 죽지 못해 살고 있는 삶이었다. 차라리, 이대로 죽는 것이 편할지도 모른다.

생명보다 먼저 사그라드는 삶의 의지에 마리온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이런 슬픔은 태어나서 한 번도 느껴본 적 없었다. 그가 너무나 안타까워서, 그의 아픔을 대신 짊어져 주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느덧 오베론의 의식은 흐려지고 있었다. 이제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

마리온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 안에서 멋대로 움직여도 될지, 지켜만 봐야 할지 확신이 가지 않아서 여태껏 가만히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의식을 잃고 눈이 감겨가는 오베론을 보자,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녀가 달려가, 그 작은 몸을 끌어안아 주려던 그 순간이었다.

“그러면 안 돼.”

작고 여린 목소리가 들렸다. 한없이 가녀렸지만, 몰아치는 바람 속에서도 너무나 또렷하게.

마리온은 그쪽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작은 여자아이가 있었다.

소년보다 훨씬 작고 어려 보이는 여자아이는 주저 없이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예쁜 외투가 더러워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꼭 끌어안았다.

여자아이는 필사적이었다. 그를 꼭 안아주고, 몸을 비비며 호호 입김을 불었다. 자신의 체온을 전해주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자면 안 돼.”

여자아이가 속삭였다.

“응? 살아야 해. 죽으면 안 돼. 부탁이야.”

마리온은 그 모습을 넋을 잃고 지켜보았다. 여자아이가 필사적으로 자신의 체온을 전해주려 하는 모습을. 꺼져가는 그의 생명에 숨을 불어넣어 주는 것을. 뼛속까지 얼어붙은 소년에게, 인생 처음의 온기를 건네는 것을.

그녀는 그 여자아이가 누군지 알아보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 아이는, 바로 어릴 적의 자신이었으니까.

노력이 닿은 것인지, 소년의 의식이 조금씩 돌아왔다. 그는 눈을 깜빡이곤 입김에 녹아 혈색이 도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자신의 생명의 은인인 아이를 보았다.

예쁜 코트를 입고 곱게 단장했던 여자아이는 어느샌가 엉망이 되고 말았다. 깔끔하던 코트는 더러운 것이 잔뜩 묻었고, 땋아 내린 머리는 한껏 용을 쓰느라 헝클어지고 땀으로 젖어서 너저분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마리온은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하게 웃었다.

“너…….”

소년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너, 이름이.”

“마리온!”

그때였다. 마리온의 가족들이 나타났다. 가족들은 마리온이 더럽고 지저분한 비렁뱅이를 끌어안고 있는 것을 보고 기겁을 했다.

“마리온! 너 지금 뭐 하는 거니!”

“아빠가 거지한테는 가까이 다가가면 안 된다고 말했지! 맙소사, 모처럼 외출하러 나왔는데 꼴이 이게 뭐야?”

“하지만, 아빠, 엄마아…….”

“안 된다면 안 돼! 이거 이대로 둬선 안 되겠군. 넌 당분간 외출 금지다! 집에 있으면서 뭘 잘못했는지 잘 생각해 봐!”

어린 마리온은 부모의 손에 이끌려 끌려갔다.

끌려가면서도, 어린 마리온은 자꾸만 등 뒤를 힐끗힐끗 돌아보았다. 아쉬움이 많이 남은 얼굴로. 여전히 더 전해주고 싶은 온기가 있다는 듯이.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마리온은 의식이 점점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몸을 일으켰다. 머리카락에서 차가운 액체가 줄줄 흘러 욕조 안에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오베론의 정신세계 안에 있을 때는 느껴지지 않던 추위가 다시 몰려왔다. 이가 딱딱 부딪치는 것을 느끼며 마리온은 얼굴에 묻은 액체를 손으로 닦아냈다.

“수고가 많았다, 마리온.”

길고 단단한 팔이 그녀의 몸을 일으켜주었다. 마리온은 갓 태어난 사슴 새끼처럼 비틀거리면서 욕조에서 걸어 나왔다.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부들부들 떨렸다.

신기하게도, 액체는 몸과 옷을 조금도 적시지 않고 그대로 흘러내렸다. 옷도, 머리카락도 흐트러졌을 뿐 액체 속에 들어가기 전의 보송보송한 상태 그대로였다.

그렇다고 춥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보라색 입술에 동사한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을 한 마리온에게 오베론은 다정한 손길로 담요를 둘러주었다.

“정말 고생이 많았어. 많이 힘들었지? 벽난로 곁에서 쉬도록 해라.”

오베론이 언제 불을 때놨는지 뜨거운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벽난로를 가리켰다.

그러나 마리온은 벽난로도 마다하고 그를 끌어안았다.

“탑주님, 탑주님…….”

그의 가슴께까지 오지 않는 팔로,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이 세상에서 제일 따뜻한 것은 그 외에는 없다는 듯이.

그녀는 그제야 깨달았다.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어렴풋하게 기억하고 있던, 그녀가 연금술에 관심을 갖게 만든, 그녀의 인생도, 꿈도, 목표도 바꿔버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이름도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했던 소중한 인연은 바로 그, 오베론이었다는 것을.

또한 자신은 오베론의 생명의 은인이며, 목숨은 물론이고 그가 스스로 놓으려 했던 삶의 의지마저 구해주었다는 것을.

“탑주님, 전 정말로……. 정말 이런 건 생각도…….”

마리온이 울먹였다.

놀라운 깨달음과 희열로 온몸이 뒤흔들렸다. 다리가 풀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그에게 매달릴 수밖에는 없었다.

그녀가 기대고 싶은 사람도, 온기를 빌리고 싶은 사람도, 반대로 언제든 기댈 자리를 빌려주고 자신의 온기를 나누어줄 사람도……. 오직 그뿐이었으니까.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오베론은 그녀의 포옹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없이 만족스럽고 기쁜 듯한 얼굴로 그녀의 몸을 마주 안았다. 단단히 끌어안은 그의 두 팔은 그녀를 영원히 놓아주지 않을 것만 같았다.

“난 네게 목숨의 빚을 졌어. 아니, 목숨 그 이상이지. 네가 없었으면 더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도, 연금술도, 발명품들도, 내 삶도, 전부 존재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야.”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

“너는 내 인생의 기적이자, 제일 큰 축복이다, 마리온. 네가 내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 이제 알겠나?”

마리온은 늘 두려웠다. 그는 오베론을 진심으로 소중히 여기고 있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불안했다. 자신이 그에게 방해만 되는 존재인 건 아닐지. 차라리 자신이 없어져 주는 것이 그에게는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닐지…….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오베론이라는 위대한 연금술사가 살아남아 훌륭한 연구들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그녀의 덕분이나 마찬가지였다. 만일 그녀가 없었다면, 오베론이라는 대연금술사 역시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난 탑주님께 도움이 되는 사람이었구나. 계속 그의 곁에 있어도 괜찮은 거구나.’

그 사실이 너무나 기쁘고 행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한차례의 떨림이 잦아들자 몇 가지의 의문점들이 남았다. 마리온은 오베론을 안고 있던 팔을 풀지 않은 채 물었다.

“탑주님께서는 처음부터 알고 계셨어요? 그 아이가 저인 줄…….”

“당연하지. 못 알아봤을 리가 없지. 그날 이후로 나는 계속해서 그 꼬맹이를 찾고 있었으니까. 감히 나를 죽지 못하게 살려둔, 모두가 외면한 더러운 고아를 자기 몸으로 녹여준 겁도 없는 꼬마를 말이야…….”

남몰래 찾고 있었으나 어릴 때의 얼굴과 ‘마리온’이라는 이름만 기억하고 있던 그녀를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 그에게 기억 속의 그 아이가 제 발로 걸어왔다. 그의 전부인 연금술을 배우는 제자가 되길 청해오면서. 그때, 오베론이 얼마나 기뻤는지는 채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렇게나 찾아 헤매던 그녀를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오베론은 그녀의 주변을 빙빙 돌았다. 그녀가 고민이 있는 듯하면 들어주고, 모르는 것이 있으면 가르쳐주고, 어떻게든 접점을 만들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일반적으로 탑주씩이나 되는 거물과 갓 들어온 신입 견습생이 얼굴이라도 보는 일은 드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온이 몇 번이나 그를 만나고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전부 그 덕분이었다.

“저, 탑주님께서 제 개인 수업을 맡아주신 뒤로부터 연구량이 줄어드셨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그래서 저는 제가 탑주님의 연구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설마…….”

“역시 눈치가 빠르군. 과연 내가 제일 큰 기대를 걸고 있는 녀석이야.”

오베론의 정신세계에 들어갔다 나오는 놀라운 경험을 하고 난 뒤인 마리온은 이제 알 수 있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견습생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연금술과 발명에 잔뼈가 굵어진 마리온은, 오베론의 이 새로운 발명품이 얼마나 놀랍고, 현대의 연금술 수준을 몇 단계나 뛰어넘은 위대한 발명품인지 눈치챘다. 그리고 그것을 발명하는 데에 얼마나 큰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을지도.

“……최근 연구가 줄어드셨던 건, 저 때문이 아니라 이 새로운 기계를 연구하느라 바쁘셨기 때문이군요.”

그렇게 내뱉자, 마리온은 가슴 속이 훤히 트이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히려 이런 복잡하고 진보한 물건을 만들면서 그와 동시에 다른 연구와 발명들도 몇 건이나 이루어냈다는 것이 오베론의 대단한 점이었다. 다른 연금술사들이라면 이 정신세계 입수 기계에만 전력을 쏟아도 몇 년, 아니 수십 년이 걸렸을지도 모른다.

오베론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다정하게 웃었다.

“그래, 네게 꼭 보여주고 싶었으니까. 한시라도 빨리 말이지.”

한없이 개운하고 흐뭇한 그 미소에 마리온은 숨이 턱 막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괜히 부끄러워져서 그를 끌어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그리고 그에게서 한 발짝 떨어졌다.

그러려고 했다.

“꺄악!”

하지만 오베론은 그녀가 그렇게 하도록 두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번쩍 안아 들더니, 대단히 소중한 것처럼 꼭 끌어안고는 벽난로를 향해 다가갔다.

그는 벽난로 바로 옆에 있는 소파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마리온의 몸은 여전히 안아 든 채로, 그녀가 벽난로의 따뜻한 불을 쬐도록 해주며, 그녀의 몸에 두른 담요를 고쳐주었다.

“이 수업에서 내가 가르쳐 줘야 할 것이 더 있다, 마리온.”

그녀의 몸을 조심스레 자신의 무릎에 내려놓으며, 오베론이 말했다.

“내가 고아에 가난뱅이였다거나, 네가 내 생명의 은인이라거나 하는 옛날 일보다도 훨씬 중요한 것이지. 지금부터 할 말은, 과거가 아닌 미래에 대한 이야기야.”

마리온은 깜짝 놀랐다. 자신은 오베론의 과거를 보고 경악했는데, 그보다도 훨씬 중요한 이야기라니. 그게 대체 무엇일까? 그는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그녀의 심장이 긴장과 떨림으로 쿵쿵거리기 시작했다.

“그게…… 뭐예요?”

입안에 침이 마르는 것을 느끼며 그녀가 물었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오베론을 올려다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그의 옷깃을 쥔 채로.

오베론은 그런 마리온을 한없이 사랑스럽다는 듯이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등을 팔로 단단히 두른 채, 그가 말했다.

“너를 사랑하고 있다, 마리온. 네가 날, 내 인생을 구해주었던 그 겨울날부터 계속. 오직 너만을 찾고, 너만을 기다리고 있었어.”

그의 나직한 목소리는 아름다웠다. 마치 한 편의 시 같다고 마리온은 생각했다.

가슴은 미친 듯이 뛰는데, 머릿속은 그와 대조적으로 먹먹해졌다.

“과거에는 내 인생의 은인. 지금은 내가 제일 아끼고 있고 기대를 걸고 있는 제자, 마리온 플라리넷. 앞으로는 내 연인이 되어주었으면 좋겠군.”

그런 말을 조곤조곤 속삭인 오베론은 눈을 다정히 휘었다. 그가 마리온의 몸을 조금 일으켜 앉혀주었다.

“내가 오늘 가르쳐 줄 것은 여기까지다. 네 감상이 궁금한걸.”

언젠가부터 무어라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선망하는 연금술사, 존경하는 스승. 그런 말만으로는 부정확했다. 그의 다정한 미소에 떨리는 자신의 마음은, 그의 푸른 시선이 자신만을 보아주고 있을 때의 기쁨은, 맞닿은 살과 살 사이의 뜨거운 열기는 그 정도의 방정식만으로는 답을 얻을 수 없었다.

단 한 개의 공식만 더 있으면 모든 문제가 풀릴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단지 훌륭한 스승인 그가 자신을 같은 마음으로 보고 있을 리 없기에, 그에게 자신이 방해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외면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와 자신의 마음이 같을 확률은 대체 얼마나 될까. 실로 기적적인 숫자였다.

그의 체온과 벽난로의 열기로 따뜻하게 달궈져 어느샌가 붉은빛이 돌고 있는 그녀의 뺨 위로 눈물이 툭 떨어졌다.

뺨만큼이나 붉어진 눈을 하고 그녀가 울면서 웃었다.

“그걸…… 지금 질문이라고 하세요? 일차방정식도, 연금술도 답은 하나밖에 없잖아요.”

마리온은 힘껏 몸을 일으키며 팔을 뻗었다. 그의 목을 단단히 끌어안곤, 그녀가 속삭였다.

“제가 드릴 답도 하나밖에 없어요. 사랑해요, 탑주님. 저도 진심으로 좋아해요. 계속 탑주님과 함께 있고 싶어요. 가능하다면 영구적으로요.”

마리온은 눈물 콧물 범벅인 얼굴로 계속 울었다 웃었다 했다. 오베론은 그런 그녀의 얼굴을 옷소매로 계속 닦아주다가, 그녀의 입술 위에 입술을 포갰다.

그의 입술이 겹쳐오는 것을 느끼며 마리온은 눈을 스르륵 감았다. 굵은 눈물방울이 마지막으로 담요 위에 투둑 떨어졌다. 여린 살과 살이 얽혔고, 짠맛이 났다.

입맞춤이 끝나고 입술과 입술이 떨어졌다. 울면서 키스한 마리온은 숨을 헐떡였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탑주님, 오늘 수업은 정말로 끝인가요?”

그녀는 주저하다가, 모깃소리처럼 말했다.

“저는 조금 더 하고 싶어요.”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지 눈치가 좋은 오베론은 바로 이해했다. 그는 기쁘게 웃고는, 마리온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비볐다.

“내가 이 탑에 들어온 뒤로 수업을 더 해달라는 녀석은 처음 보는데. 역시 모범생은 다르군.”

“그, 그건 제가 모범생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아, 앗! 탑, 주니임!”

마리온은 담요 아래로 파고들어, 자신의 로브 안쪽으로 들어오는 손을 느끼며 움찔 몸을 떨었다.

오베론은 그녀의 보송한 등을 쓸어내렸다. 그 손길은 다정하고 따뜻했으며, 조금 간지러웠다. 마리온은 거부하지 않았다.

그는 웃으며 입술로 입술을 덮어왔다. 마리온 역시 공연히 웃음이 나왔다. 부끄럽고 서툴렀지만, 그 입술을 받아내려, 그의 움직임에 응하려 최선을 다했다.

자신이 그를 원하듯, 그 역시 자신을 원한다는 것이 한없이 경이롭고,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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