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3/6)

2.

마리온이 눈을 뜬 곳은 자신의 방 침대 위였다.

그곳이 얼마나 친숙하고 편안했는지, 잠에서 깬 마리온은 한순간 지난밤에 있었던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평소와 같은 하루가 시작된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곧 마리온의 머릿속에 지난 밤 기억의 파편들이 스쳤다.

그 뜨겁고, 야릇하고, 마치 짐승 같았던 시간……. 그것도 상대는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의 존경하는 스승이었다.

“말도 안 돼…….”

마리온은 기함했다.

‘혹시 전부 꿈은 아니었을까?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침대에서 깨어났고, 잠옷까지 입고 있잖아.’

하지만 그 희망을 담은 예상은 곧 산산조각이 났다. 씻으러 화장실에 간 마리온은 자신의 몸에 잔뜩 남아 있는 어젯밤의 흔적들과 마주해야 했다.

가슴과 쇄골, 목은 물론 허벅지와 허리에까지 남아 있는 붉은 자국들과 잇자국들. 물로도 씻어낼 수 없는 정사의 흔적…….

더군다나 허리와 다리 사이가 너무나 아팠다. 약 기운에 무리한 것인지 제대로 걷기도 힘들었다. 마치 그녀의 몸이 꿈이 아니라고 고함이라도 지르는 것 같았다.

‘아무리 약에 취해서 그랬다곤 해도, 내가 미쳤지…….’

결국 마리온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어젯밤 약에 취해 그녀의 스승 오베론과 함께 정사를 치렀다. 그리고 지쳐 잠든 그녀를 오베론은 친히 방까지 옮겨주고, 옷까지 갈아입혀 준 것이다.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탑주님이라니!’

이제 대체 어떤 면목으로 그를 본단 말인가?

‘탑주님도 분명 정말 당황하셨겠지. 그분께 이렇게나 어마어마한 폐를 끼치다니…….’

마리온은 그동안 그에게는 은혜 입은 일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은혜를 갚긴커녕, 또 이런 식으로 오베론을 곤란하게 만들다니. 마리온은 그 사실이 너무나 속상해서 가슴을 팡팡 두드렸다.

“정말 이걸 어떻게 한담…….”

마리온은 침대에 걸터앉아 머리를 싸맸다.

이런 와중에도 자꾸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어젯밤의 기억들은 하나하나가 정말이지 낯 뜨겁기 짝이 없었다.

그녀의 스승은 그저 얼굴이 번듯한 게 전부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그의 시선 앞에서는 마치 꽁꽁 묶인 듯이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동네 여자애들이 마을의 누가 잘생겼다느니, 누구와 누가 서로 관심이 있다느니 떠들어대는 동안에도 마리온은 그런 일엔 단 한 번도 관심을 보인 적이 없었다. 21년 동안 남자나 이성에는 티끌만큼도 관심 없었던 마리온인데. 그런 그녀의 쇠 가슴마저 손안의 흙덩이처럼 아무렇게나 주물러댄 사람이 바로 그, 오베론이었다.

게다가 잘하기는 또 얼마나 잘하던지. 첫 경험이 그 정도까지 좋을 수 있을 줄은, 현실 너머에 그런 환락의 세계가 있을 줄은, 자신이 그곳에 하룻밤 만에도 몇 번이나 오갈 수 있을 줄은 마리온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의 손길은 여전히 마리온의 살갗 위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그 크고 단단하고 따뜻한 손. 긴 손가락으로 마리온을 끝도 없이 유린하던 그 순간…….

‘아, 안 돼. 자꾸 이런 생각을 하면.’

마리온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때의 생각을 하면 이상해지는 것만 같았다. 다시 아랫배가 그때처럼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건 실수였어. 정말 큰 실수. 나는 탑주님을 존경하는걸.’

잠시 고민하던 마리온은 곧 몸을 일으켰다.

‘사과를 드리러 가야겠어.’

마리온은 그 길로 곧장 오베론을 찾아갔다. 지금은 그가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을 시간이었기에, 마리온은 그의 개인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실례합니다. 마리온입니다, 탑주님.”

곧 문이 열렸다. 문 너머로 검은 로브를 입은 오베론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래, 내 친애하는 제자로군. 아침부터 무슨 일이지?”

그의 모습은 평소와 똑같았다. 은실로 수놓은 검은 로브를 입은 그는 마리온을 발견하자 눈을 가늘게 뜨고 미소 지었다. 그 특유의 여유만만한 태도는 마리온이 무척 선망하던 것 중 하나였다.

연구실에 처음 찾아와본 것도 아니건만 마리온은 숨을 삼켰다.

“아, 저, 그게…….”

그의 새파란 눈이 마치 그녀를 꿰뚫어 보는 것만 같았다.

그 잘생긴 얼굴도, 강렬한 눈빛도 늘 겪어왔던 것이었지만 오늘따라 이상했다. 마리온의 머릿속에 어젯밤의 뜨거운 시간이 자꾸만 떠올랐다.

지금은 그저 여유로 반짝이는 그 눈동자가 어젯밤에는 어떤 욕망을 담고 있었는지. 이토록 제자에게 다정한 그와 얼마나 짐승 같은 시간을 보냈는지…….

마리온은 몰래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 이런 생각 하면 안 돼! 사죄를 드리러 온 거잖아.’

그런 그녀를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눈으로 내려다보던 오베론이 싱긋 웃었다. 그러고는 문 앞에서 비켜섰다.

“이렇게 오래 밖에 세워두다니, 내가 신사답지 못했군. 괜찮다면 들어오도록 해.”

마리온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숨기려 최선을 다해 평온을 가장했다.

“아, 네. 그럼 실례합니다.”

마리온은 오베론이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오베론은 손님을 대접하겠다며 잠깐 자리를 떴다. 그를 기다리는 동안 마리온은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연구실은 주인의 성격을 그대로 반영한 듯한 모습이었다. 연구에 푹 빠지면 사소한 것은 신경 쓰지 않는 그의 성격대로 연구실은 무척 어수선했다. 수련생에게라도 대신 청소를 시킬 법한데 그러지 않는 모양이었다.

곧 오베론이 돌아왔다. 찻잔 두 개와 ‘저절로 끓는 찻주전자’를 쟁반에 받쳐 든 채였다.

“홍차, 괜찮지?”

“물론이죠.”

찻주전자는 가만히 둬도 부글부글 끓는 듯한 쉭쉭 소리를 내다가 흰 김을 뿜어냈다. 오베론은 마리온의 잔에 차를 따라주곤 자신의 잔에도 한 잔 따랐다.

“진하게 우려낸 홍차는 연금술사의 필수품이지. 거의 주식(主食)이라고나 할까. 부족한 잠을 깨우려면 이만한 것이 없으니까.”

오베론의 말을 들으며 마리온은 찻잔을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붉은 찻물에서는 달콤한 향이 났다.

따뜻한 게 뱃속에 들어오니 확실히 긴장이 풀렸다. 마리온은 그제야 자신이 아침 식사도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자…… 그래서. 오늘의 궁금한 건 뭘까? 모범생 양.”

그의 목소리는 다정했다. 어젯밤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 같은 건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일부러 그러시는 거겠지? 날 안심시켜 주시려고…….’

그의 친절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그처럼 모르는 척을 할 수는 없었다.

마리온은 찻잔을 잔 받침에 내려놓았다.

“오늘 탑주님께 온 것은 강의에 대해 여쭤보러 온 것이 아니에요. 오늘 저는…… 사과를 드리러 왔습니다.”

“사과?”

오베론이 웃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네. 저……. 어젯밤에 있었던 일이요.”

마음을 다잡고 시작한 말이었지만 역시 부끄러워졌다. 마리온은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도저히 상대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마리온은 쭈뼛거리며 애써 말을 이었다.

“저…… 어젯밤에, 그러니까……. 의,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탑주님께 큰 폐를 끼쳤습니다. 정말 죄송해요.”

애써 쥐어짜 내듯 말을 마친 마리온은 눈을 질끈 감았다. 한데 돌아오는 대답은 전혀 예상 밖의 것이었다.

“폐라면 어떤?”

마리온은 감았던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베론은 한쪽 손으로 턱을 괸 채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그의 눈매가 나른한 호선을 그렸다.

말도 안 돼. 지난밤에 있었던 일을 잊어버리기라도 했단 말인가? 어떻게 그 일들을 잊어버릴 수 있지? 그 시간이 얼마나 길고 격렬했는데…….

마리온은 순간 아까 씻으면서 확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제 있었던 일들이 전부 자신의 꿈이나 착각이었나 싶은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허리와 골반이 지금도 부서질 듯 아파왔다.

마리온은 용기를 더더욱 쥐어짜 내어 설명했다.

“그…… 저…… 어제 공동 연구실에서요. 제가 피로 회복제를 만들어서 스스로에게 실험을 했는데 실험이 실패해서 그만…… 그랬는데 때마침 탑주님을 만나서…… 저…….”

마리온이 말꼬리를 흐리며 오베론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오베론은 더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일 뿐이었다.

“만나서?”

“그게, 저……. 유, 유혹했던 거 말이에요.”

마리온이 모깃소리처럼 말했다. 상대에게 들리기는 할까 싶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마리온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새빨간 폭탄이 되어버렸으니까.

그 작은 목소리는 용케도 들었는지 오베론이 만족스러운 듯 씩 웃었다.

“유혹이라. 그렇군. 그런 일이 있었지.”

‘그런 일이 있었지’라니? 어떻게 그 일들을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말할 수 있는 걸까? 마리온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 저…….”

“확실히 깜짝 놀라긴 했어. 설마, 그 연금술밖에 모르는 범생이에 착실해 빠진 마리온 플라리넷이 스승을 몸으로 유혹할 줄이야.”

세상에. 그 일들을 이렇게 대놓고 말하다니! 마리온의 얼굴은 그야말로 시한폭탄 같았다. 그녀는 도저히 스승과 얼굴을 마주할 수 없었기에, 그의 눈가에 어린 장난기와 귀엽다는 눈빛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뭐, 상관없지. 내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좋다, 마리온.”

“네? 정말인가요?”

마리온은 조금 전까지 부끄러워 죽으려고 했던 것도 잊고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내가 거짓말하는 걸 본 적 있나?”

“아니, 아니요. 그렇지만…….”

그가 평소 대범하고 사소한 일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타입이라는 것 정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리온의 기준에서 어젯밤의 일은 사소한 일이 아니었다. 굉장히 큰일이고 무례였기에 용서받지 못할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오베론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의 미소는 어찌나 다정한지, 마리온의 조마조마한 마음도 어쩐지 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난 화나지 않았어. 그러니 잊어버려.”

“……네, 네에…….”

더없이 다정한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단호한 어조. 마리온은 저도 모르게 대답했다.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인 오베론이 말했다.

“그건 그렇고, 어제 네가…… 내게 몸으로 들이댈 용기를 준 그것 말인데.”

아니, 잊어버리라면서요? 직설적인 데다 다소 상스럽기까지 한 말에 마리온의 두 귀가 다시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래, 네가 만들려 하던 그 피로 회복제 말이야. 관심이 가서 개인적으로 살펴봤는데 탁월한 물건이더군. 비록 이번에는 실패하긴 했지만 말이야.”

“네?”

“결과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은 결과보다 더 중요한 법이지. 다들 결과에만 어떻게든 도달하려고 편법에, 미봉책의 유혹에 빠지기 일쑤지만 이 과정을 보면 알 수 있거든. 이 녀석이 연금술사로서 어디까지 도달할 것인가, 하는.”

시종일관 장난기 어린 얼굴을 하고 있던 그는,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만은 웃고 있지 않았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진지한 오베론의 얼굴이었다.

그런 모습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에 마리온은 침을 삼켰다. 오로지 그의 다음 말에만 온 정신과 신경이 쏠렸다.

“그런 의미에서 마리온, 넌 네 동기 중……. 아니, 이 연금술사의 탑에서, 나 다음가는 최고의 인재야. 내가 네게 얼마나 기대를 걸고 있는지는 너도 알고 있겠지?”

“네? 어, 네…….”

“제안을 하나 하지.”

오베론의 낮은 목소리가 귀를 통해 심장을 간지럽히는 것만 같았다.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것도 아닌, 얼굴을 마주 보고 하는 대화임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와 개인적인 수업을 해보는 것이 어때. 지금까지 난 한 번도 누구를 개인적으로 가르친 적이 없지만…… 너라면 그럴 가치가 있어.”

마리온은 숨이 턱 막혔다.

그녀가 알기로도 오베론은 숨도 못 돌리게 바쁜 사람이었다. 그가 누군가를, 그것도 한낱 견습생 따위를 개인적으로 가르치는 일 같은 건 한 번도 없었다.

역대 최고의 연금술사로 일컬어지는 오베론의 개인 수업……. 내로라하는 연금술사 중에서도 말만으로도 군침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었다. 마리온 그녀는, 단지 약간의 질문만으로도 그에게 얼마나 많은 도움을 받았던가.

심장이 악사의 북처럼 둥둥 울렸다. 가슴이 벅차서 숨이 찼다.

“어때?”

오베론이 대답을 재촉하듯 물었다.

“강요는 하지 않아. 하지 않겠다면 어쩔 수 없지.”

“아, 아니에요!”

놀란 마리온이 대답했다.

한데 기분 탓일까? 순간 오베론의 눈에 안도의 빛이 스쳐 지나간다는 느낌을 그녀는 받았다.

‘에이, 설마…… 잘못 본 거겠지. 탑주님께서 나 같은 한낱 견습생에게 그 정도로 신경을 쓰실 리가.’

오베론은 아름다운 입술을 끌어 올리며 미소 지었다. 그는 먹잇감을 앞에 둔 고양이처럼 장난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렇다면, 할 건가?”

이쯤 되니 더 고민할 것도 없었다. 마리온은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에요. 더없는 영광이에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마리온의 열정적인 대답에 오베론은 픽 웃었다. 그는 가만히 마리온의 빛나는 눈을 내려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잘 생각했다. 쇠는 뜨거울 때 쳐야지. 그럼 지금 당장 첫 수업을 시작해볼까?”

“네?”

“안 되나? 오늘 네 정규 수업은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대체 언제 거기까지 알아낸 걸까? 마리온은 입을 떡 벌리고 오베론을 보았다. 오베론은 고개를 까딱였다.

“책 가져와.”

“네, 넷!”

마리온은 마치 공처럼 튀어 오르듯 소파에서 일어나 연구실을 뛰쳐나갔다.

* * *BORI 갠소요게X

과연, 오베론의 수업은 대단했다. 최연소 탑주니, 역대 최고의 연금술사니 하는 평들이 무색하지 않았다. 마리온의 눈높이에서 설명해 주는 그의 수업은 명쾌하고 체계적이었으며 또 창의적이었다.

마리온은 그의 수업이 정말 즐거웠다. 들으면 들을수록 자신의 실력이 향상되는 것이 느껴졌고, 그에 대한 존경심 역시 샘솟았다.

다만, 그렇게 완벽한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단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러니 ‘필리메우스의 삼각 달’ 이론에 따르면 밤과 새벽, 낮의 약초의 변화에 대해 좀 더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변화는 약초 중에서도 버섯류에 특히 유효하지.”

그와 단둘이 있는 시간은 분명 즐거웠다. 오베론은 정말이지 훌륭한 학자이자 스승이었으니까.

하지만 마리온은 그의 수업을 잘 듣다가도 가끔 신경이 쓰이곤 했다.

그는 훌륭한 스승이었지만, 마리온이 몸을 섞은 남자였다. 그것도 첫 남자.

그런 그와 한 공간에 단둘이 있는데도 그때의 일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 6년 전에 쓴 내 논문에서도 그 중요성을 역설했듯이, 방위에 따른 목재의 선별 방법에 대해서도 알아두어야만 한다. 하지만 네 승급 논문을 읽어보았는데 넌 참가시나무에 관심이 많은 것 같더군.”

특히 말을 하며 드러나는 그의 목울대와 설명을 하며 움직이는 손가락이 길고 큰 손을 보고 있자면, 그의 낮게 울리는 중저음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면…… 마리온은 그때 그 순간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속삭였던 말 하나하나, 부드러운 손길 하나하나가 어제 있었던 일처럼 떠올랐다.

‘그저 내가 너에게 굉장히 발정했다는 사실만 알아둬.’

‘마치 짐승처럼 말이야. 널 꿰뚫을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마리온. 쉬이. 착하지.’

BORI 갠소요게X

땀과 뜨거운 숨이 가득 차오른 공기의 열기. 발가락 마디 하나하나가 새하얗게 구부러들던 감각.

그리고 무엇보다 오베론의 아름다운 모습이, 그의 몸짓이, 숨결이 지금과 겹쳐 보여서 견딜 수가 없었다.

마리온은 오베론을 힐끔거렸다.

‘어떻게 탑주님은 이렇게나 아무렇지 않으실 수 있는 걸까?’

마리온과 달리, 오베론은 그때의 일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걸로 보였다.

몸을 섞은, 그토록 격정적인 시간을 보낸 그녀와 함께 있으면서도 그는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았다. 신경이 쓰이고 그때가 자꾸만 떠올라서 견딜 수 없는 것은 오직 그녀뿐인 것 같았다.

수업을 할 때 그는 그저 언제나처럼 친절하고 현명한 스승일 뿐이었다.

마리온은 그것이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행동할 수가 있을까?

‘역시 탑주님께 그 정도의 일은 아무것도 아닌 걸까? 혹시 경험이 많으시다거나…….’

마리온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정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마리온 플라리넷. 그게 당연한 거야. 그때의 그 일은 그냥 실수였고, 탑주님과 나는 스승과 제자일 뿐이니까. 게다가 더 이상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탑주님께도 폐란 말이야.’

하지만 그런 생각도 소용없었다. 그의 나직한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아랫배는 끈질기게 저릿해올 뿐이었다.

“마리온.”

갑자기 가까워진 목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이마에 닿았다. 조금 서늘한 온도를 가진 길쭉한 그것이 오베론의 손가락이라는 것을 깨닫자 마리온은 불에 덴 듯 놀랐다.

“아, 네. 네!”

마리온은 퍼뜩 고개를 들어 상대를 보았다. 오베론의 웃는 얼굴이 가까이에 있었다.

그 눈을 마주 보자, 그 손가락에 닿자 마리온은 일순간 번개라도 맞은 기분이 들었다. 혹시 오베론이 정전기를 일으키는 발명품이라도 갖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될 정도였다.

마리온은 후다닥 달아오른 얼굴을 숙였다.

“내 수업에서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있다니 대단하군.”

“죄, 죄송해요. 집중하겠습니다.”

그러나 오베론은 화내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웃으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이론만 세 시간째 듣게 만든 내 실수지. 너 같은 모범생이 집중을 못 하다니 오죽하겠어.”

“아, 아니요……! 그게 아니라.”

“그럼 이론은 이쯤 하고.”

오베론이 딱 잘라 말했다.

“머리도 식힐 겸 실습으로 넘어가 볼까.”

“시, 실습이요?”

“그래.”

오베론은 짧게 말하곤 잠시 연구실 뒤로 갔다가, 작은 병을 손에 들고 돌아왔다. 마리온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병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탑주님, 그건……?”

오베론은 근사한 얼굴로 씩 웃었다. 마리온이 자세히 볼 수 있도록 병을 건네주며 그가 말했다.

“내 새로운 발명품. 아직은 시험 단계지만.”

“와! 탑주님의 새 발명품이요?”

마리온이 관심을 드러내자 오베론은 만족스러운 듯 보였다. 그가 손으로 턱을 괴고 설명했다.

“마사지 오일이야. 원래 이렇게 생활 밀착적인 것은 내 취향이 아니지만……. 심심풀이로 한번 만들어 봤지. 닿는 것만으로도 뭉친 근육을 빠르게 풀어주고, 피로를 더는 데 도움을 주지.”

“우와…… 이런 걸 심심풀이로 만드셨다고요?”

오베론의 제자이자 열렬한 팬이기도 한 마리온은 그의 발명품 목록을 줄줄이 꿰고 있었다. 확실히, 그가 이런 사소한 생활용품을 만드는 일은 드물었다.

하지만 그래서 더 관심이 갔다. 대연금술사인 그가 만든 마사지 오일은 얼마나 효과가 좋을지 기대가 되기도 했다.

그때였다. 마리온의 귀가 번쩍 뜨일 만한 말이 떨어졌다.

“한번 시험해 보겠나?”

“네? 제가요?”

“그럼.”

오베론은 긴 소파를 가리키며, 이곳에 앉으라는 듯 손짓했다.

“다른 사람의 발명품을 직접 시험해 보는 것도 많은 도움이 되지.”

“세상에, 제가 탑주님의 발명품의 첫 시험자라니……. 영광이에요!”

마리온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소파에 걸터앉았다.

오베론은 그녀의 옆에 앉아, 병을 열어 약간의 오일을 덜어냈다.

“마리온, 손.”

마리온은 냉큼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베론의 큰 손 위에 그녀의 작은 손이 얹어졌다.

오베론은 그녀의 손등에 오일을 문질러 바르곤, 굉장히 능숙한 손길로 그녀의 손을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그 느낌은 정말 신기했다. 오일이 살갗 위에 닿는 것만으로도 시원한 감각이 퍼져나갔다. 오베론이 오일을 발라 지압하자, 힘을 그리 들이지 않는 것 같은데도 뭉쳐 있던 손의 작은 근육 하나하나가 풀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 세상에……. 너무 시원해요, 탑주님.”

그저 손 하나를 잠깐 마사지했을 뿐인데 기분이 좋아졌다. 펜과 숟가락을 손에 쥐는 것만으로도 근육이 그렇게 뭉치는지 마리온은 미처 몰랐다. 언제나처럼 쓰는 손이 사실 그렇게 뻐근한 상태였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손만 하늘로 날아오를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오베론은 대놓고 말은 안 해도 제법 흡족한 것 같았다.

“그래? 개선점은?”

“제가 탑주님의 발명품에 감히…….”

“그런 소리 하지 말고 편하게 말해봐.”

“하지만 말씀드릴 게 없는걸요, 탑주님. 이건 완벽해요. 아, 정말 좋아요…….”

마리온이 행복에 빠져 있자 오베론은 픽 웃었다. 그는 딱, 딱 소리가 나도록 마리온의 손가락 관절을 시원하게 풀어주고는, 다 됐다는 듯 그녀의 손을 가볍게 쳤다.

마리온의 얼굴이 삽시간에 아쉬움으로 물들었다.

“벌써 끝났나요?”

그 모습에, 오베론은 귀여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그녀를 빤히 보았다. 그는 마리온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

“스승을 마사지사로 부려먹겠다니 담력이 대단한데.”

“네, 네? 그, 그런 게 아니에요. 죄송해요!”

당황한 마리온이 도리질 쳤다. 하나 오베론은 웃으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농담이다. 그럼, 다른 부위도 시험해 보겠나?”

이런 와중에도 마리온의 얼굴에 어찌할 줄 모르는 반가움의 기색이 떠올랐다. 그녀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정말요? 너무 좋죠. 어디로 할까요? 다른 손?”

“다른 손도 좋지만……. 연구를 하느라 어깨와 목이 많이 뭉쳤겠지? 마리온.”

마리온은 깜짝 놀랐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책을 읽고 책상에서 실험하느라 어깨와 목이 늘 아팠다. 스스로 주물러보았자 그때만 잠깐 시원하고 곧 원래대로 돌아오기 일쑤였다.

평소 불편하지 않았던 손을 마사지하는 것도 이렇게 좋은데, 늘 쑤시던 어깨와 목을 마사지 받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러나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에 마리온은 멈칫했다. 생각해 보니, 오일로 마사지를 받으려면 옷을 내려서 오베론에게 어깨와 목을 드러내야 한다.

게다가 그의 손이 어깨와 목에 닿을 것을 생각하면, 어깨와 목을 어루만지는 그의 손길을 상상하면……. ‘그날 밤’ 자신의 몸에 닿았던 그의 달콤한 손길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마리온은 벌써부터 얼굴이 확확거렸다.

“곤란한가?”

마리온이 주저하자 오베론이 고개를 까딱였다.

“어쩔 수 없지. 강요는 하지 않아.”

아쉽다는 듯한 그의 얼굴을 보자 마리온의 가슴속엔 죄송스러움이 가득해졌다. 그에게는 감사한 것이 많았다. 그런 그의 발명품을 시험해 보는 것이 뭐가 그리 어려운 일이겠는가?

‘게다가 탑주님께서는 그날 이후로 한 번도 내게 그런 접촉을 한 적이 없으신걸. 나 혼자 지나치게 생각하는 걸 거야.’

정말이지, 그날 이후로 오베론은 그런 일에 조금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요 며칠의 일만 놓고 보면 그는 너무나 모범적인 스승이었다.

마리온은 서둘러 말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아, 저…….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마리온은 몸을 돌리고 입고 있던 셔츠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기분 탓인지 등 뒤에서 오베론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만 같아 더 부끄러워졌다.

단추를 서너 개 풀고 옷을 조금 내리니, 그녀의 희고 둥근 어깨와 목선이 그대로 드러났다. 마리온은 어깨를 주무르기 쉽게 땋아 내린 갈색 머리칼을 앞으로 치웠다.

“저……. 준비되었어요, 탑주님.”

등을 돌리고 있는지라 마리온은 알 수 없었지만 오베론은 미소 지었다.

“좋아, 그럼 실례하지.”

마리온은 곧 그의 큰 손이 어깨를 덮어오는 것을 느끼고 움찔 놀랐다. 체온이 낮아 차가운 그의 손은 오일로 온통 미끄러웠다.

‘보이지 않으니까 더 신경 쓰이는 기분이야.’

민망한 기분에 마리온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시야가 차단되자 감각은 더 또렷해졌다.

그의 손이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것이 느껴졌다. 팔이 시작되는 부분부터 목덜미까지 길게 쓰다듬던 손은 엄지를 세워 척추 옆을 꾹꾹 눌러 지압했다.

오일의 효과인지, 오베론이 안마를 잘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정말 시원했다. 몸속에서 보글거리던 거품이 터지는 듯 탄성이 절로 나왔다.

“응…….”

저도 모르게 신음한 마리온은 두 손으로 얼른 입을 틀어막았다.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야릇한 소리였다.

‘어떡해! 탑주님이 이상한 애라고 생각하시면 어쩌지?’

하지만 등 뒤에서 들려오는 것은 예상외로 나지막한 웃음소리였다.

“아픈가?”

그의 낮은 목소리가 다정하게 물었다. 마리온은 그 목소리에 홀린 듯이 대답했다.

“아, 아니요…….”

“다행이군. 근육이 많이 뭉쳤어. 마리온, 열심히 연구하는 것도 좋지만…….”

그의 엄지손가락이 척추 옆을 둥글려가며 위아래로 꾹꾹 눌렀다. 마리온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기 위해 두 손으로 입을 꼭 막고 있어야만 했다.

“때론 휴식도 충분히 취하도록 해.”

“쉬, 쉬고 있는걸요. 읏…….”

“정말인가? 연구실이 아닌 곳에 있는 걸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정말…… 이에요. 하아…….”

오베론은 오일을 가득 발라 매끄러운 손길로 마리온의 드러난 어깨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그는 다정하게 쓰다듬는가 하면, 근육이 뭉친 곳만 꾹꾹 눌러 지압하곤 해서 도저히 방심할 수 없게 만들었다.

‘어떡해, 너무 시원해.’

마리온은 지금까지 자신의 어깨가 얼마나 돌덩이 같았는지를 깨달았다. 오베론의 손끝에서 새로 태어나는 기분이었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근육이 말랑해져 가는 게 느껴졌다.

등 뒤에서 오베론이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기왕 하는 거 등도 할까. 마리온, 옷을 좀 더 내려.”

아까와 달리 명령조였다. 하지만 마리온은 이 명령을 거부할 생각이 없었다. 시작이 어려웠지, 이미 내린 옷을 조금 더 내리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게 느껴졌다.

마리온은 단추를 몇 개 더 풀어서 셔츠를 완전히 내렸다. 스승에게 등을 드러낸다는 부끄러움은 시원함에 정신이 팔려 잠시 잊은 채였다.

오베론의 큰 손이 등에 닿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손이 마리온의 곡선을 따라 길게 호를 그렸다.

“앗, 하아…….”

점점 더 신음을 참기가 어려워졌다. 딱딱하게 뭉쳐 있던 근육이 풀릴 때마다 너무나 개운해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 시간이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오죽하면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일까? 마리온은 그의 손길에서 시원함 외의 다른 감각을 느끼는 자신을 깨달았다.

마치 등을 간질이듯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그의 손길이 간지러우면서도 야릇하게 다가왔다. 그녀의 둥근 어깨 능선을 따라 흘러내리는 손길은 시원하기보다는 오히려 뜨거웠다. 그의 손끝이 닿는 곳마다 시원함이 아닌 작은 열기가 퍼져나가고 있었다.

‘왜, 왜 이러지? 마사지를 받으면서 이런 기분을 느끼다니…….’

그의 손이, 손길이, 시선이 너무나 의식됐다. 한 번 의식하기 시작하니 그에게 등을 훤히 드러낸 것도 부끄러웠다. 내가 무슨 정신으로 그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안 돼, 더 이상 의식하면……. 탑주님은 그런 생각은 조금도 없으실 텐데. 그저 마사지를 하고 계신 것뿐일 텐데…….’

하지만 의식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오히려 더 심장이 뛸 뿐이었다.

마리온은 자신의 심장박동 소리가 오베론에게 들릴까 봐 불안했다.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들킬까 봐 두려웠다. 그의 손길이 점점 더 야릇하게 느껴진다는 것을, 자꾸만 그날의 생각을 한다는 것을 들킨다면 그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 이후로 어떤 낯으로 그를 봐야 할까…….

‘들키기 전에 그만해 주셨으면 좋겠는데. 만일 들킨다면 난…….’

하지만 그런 애타는 바람이 무색하게도 그의 손길은 이어졌다. 아니, 오히려 점점 더 그녀의 민감한 곳으로 다가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결국 그가 손끝으로 척추를 따라 훑어내리자 마리온은 이제까지와는 다른 신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으, 응…….”

자신이 그런 소리를 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아 마리온은 화들짝 놀랐다.

“타, 탑주님. 전 그게 아니고…….”

마리온은 저도 모르게 변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오베론이 말했다.

“근육이 정말 많이 뭉쳤나 보군, 마리온.”

“아, 마, 맞아요. 등이 많이 뭉쳐서…….”

다행히 오베론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마리온은 가슴 깊이 안도하며 맞장구쳤다.

하지만 귀를 의심하게 하는 말이 이어졌다.

“그러니 쉴 땐 충분히 쉬어줘야지. 그날 연구실에서처럼.”

그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이는 느낌이 어찌나 야릇하던지. 귀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마리온은 몸서리쳤다. 하지만 그 달콤함에만 빠져 있을 수는 없었다.

“네…… 네?”

마리온은 할딱이면서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오베론을 보았다. 하지만 오베론은 뭐가 이상하냐는 듯 빙긋 웃고 있을 뿐이었다.

마리온은 혼란스러웠다. 오베론이 말하는 ‘그날’이란 게 자신이 생각하는 그 날이 맞는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요 며칠 동안 그날의 일을 마치 까맣게 잊기라도 한 듯 입에 담지 않았던 그가 왜 하필 지금 입에 올린단 말인가.

마리온은 그때의 일을 자꾸만 떠올렸던 자신의 시커먼 속을 들킨 것만 같아 부끄러웠다. 심장이 펌프질하는 만큼 얼굴이 달아올랐다.

“탑…… 주님. 그게…… 무슨 말씀……?”

“이런, 아직도 눈치를 못 챘나? 넌 꽤 둔한 구석이 있군. 하긴, 연구밖에 모르는 모범생이니 당연한가.”

오베론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마리온의 등을 매만지던 그의 큰 손이 천천히 아래를 향했다.

“마리온, 다리가 뻐근하지는 않나?”

“네? 아니, 저……! 자, 잠깐만요. 탑주님!”

마리온은 잔뜩 달아오른 상태에서도 이성을 되찾으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제법 공을 들여 달아오르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거부할 마음이 들다니 의왼걸. 꽤 훌륭한 이성과 정신력이야.”

“달, 아오르게 만드셨…… 다고요?”

“그럼. 저번에 말했는데, 잊어버렸나, 마리온?”

오베론의 큰 손이 마리온의 허벅지를 붙잡았다. 그의 손이 닿는 것만으로도 마리온은 온몸에 소름이 쭈뼛 돋았다. 그의 조급한 손길이 허벅지 안쪽을 더듬는 것이 느껴졌다.

“그, 만하세요, 탑주님. 아앗, 아……!”

그저 간질이듯 더듬는 것뿐인데, 그 느낌이 어찌나 간지럽고 또 묘한지. 그래서 얼마나 아랫배가 떨려오는지…….

마리온은 두려웠다. 이런 감각을 느낀 것은 태어나서 이제 겨우 두 번째인데도 자신의 몸이 지나치게 기뻐하는 것이 두려웠다. 이 떨림과 강렬함에 영영 사로잡혀 버릴까 봐 두려웠다.

“난 네게 발정하고 있다, 마리온. 널 범할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 있다고. 네가 내 아래에서 울게 만들고 싶어. 언제나 나무랄 데 없이 단정한 네가 엉망진창으로 흐트러지는 걸 갈망하고 있어.”

“그, 그런……. 말도 안, 앗, 으응!”

귓가를 간질이는 그의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제어할 수 없는 욕망이 흥건하게 묻어나 있었다.

그가 하는 말이 거짓말 따위가 아니라는 사실 정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대체 왜?’

마리온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탑주님께서 나 같은 것에게…….’

오베론은 멋을 내는 일 같은 사소한 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타고난 외견과 특유의 다정함이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더군다나 최연소 탑주, 천재 연금술사라는 칭호와 그의 역사에 남을 업적들은 어떠한가. 그 천재적이라는 머리는 또 어떠한가.

마리온은 오베론을 연애 대상으로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그래도 알 수 있었다. 그가 제국의 수도로 가기만 해도 시집을 오겠다는 여자들이, 아니, 옷깃이라도 잡아보고 싶은 여자들이 줄을 설 것이었다.

그에 반해 마리온은…… 누가 봐도 매력적인 여자는 아니었다. 물론 연금술사로서의 소질은 스스로도 알고 있지만, 얼굴은 동글동글하니 평범한 축이었고 꾸미는데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겉으로 봤을 때 그나마 봐줄 만한 부분은 제법 풍만한 가슴 정도였다. 그리고 남자들이 제일 선호하지 않는 타입이 바로 그녀 같은 여자였다. 안 예쁘고 똑똑한 여자.

그 사실을 마리온도 알고 있기에, 남자를 만나는 건 사실상 포기하고 있었다. 결혼을 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연금술을 배우고 싶었다.

‘역시…… 탑에 여자라곤 나 하나뿐이라서 그런 걸까?’

하지만 마리온의 상념은 곧 깨졌다. 오베론의 긴 손가락이 그녀의 속옷 위로 둔덕을 쓸어내렸기 때문이다.

“하읏!”

마리온은 감전이라도 된 듯이 움찔 떨었다. 하지만 오베론은 봐주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이 민감한 곳을 찾는 듯이 속옷 위를 더듬기 시작했다.

“이런 와중에도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있다니 대단한데. 이런 곳을 내게 내준 채로 말이야.”

“그런, 핫. 그런 게 아니라……. 아흑, 탑주님…….”

“보라고, 마리온. 속옷이 흠뻑 젖어서 물이 흐를 정도잖아. 단정한 얼굴로 이런 음란한 곳을 숨기고 있었군.”

“아니…… 에요. 응! 탑…… 주님. 놀리지 마세요…….”

역시, 오베론에게 등을 전부 내보이지 말았어야 했다. 상의를 거의 벗은 꼴이기에 그의 손이 마리온의 가슴에 닿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그는 한 손으로는 속옷 위로 마리온의 국부를 자극하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마리온의 희고 보드라운 가슴을 감싸 쥐었다. 그는 마치 그 감촉을 즐기는 것처럼 마리온의 가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가, 가볍게 매만졌다가 손가락으로 꾹 눌러 자국을 내보았다가 했다.

몸은 불덩이처럼 달아오르는데, 그의 손은 마사지 오일 때문인지 시원했다. 달궈지는 몸 위로 시원한 것이 닿는 느낌은 이상하게 자극적이라서 마리온은 더더욱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정말 예쁜 몸이야.”

손으로 마리온의 한쪽 가슴을 받쳐 들며 그가 속삭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안 예쁜 데가 없지.”

등을 돌리고 있음에도 마리온은 전신에 쏟아지는 그의 시선을 느꼈다. 너무나 강렬하고 뜨거운 눈빛, 마치 그녀를 통째로 집어삼킬 것처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어느 누가 그녀더러 예쁘다고 한단 말인가. 친부모조차 예쁘다는 말을 한 번도 입에 담은 적이 없었다.

마리온은 눈을 질끈 감으며 중얼거렸다.

“거, 거짓말…….”

애꿎은 소파를 쥐어뜯던 그녀의 손 위로 큰 손이 겹쳐졌다. 오베론은 그녀의 손을 뒤쪽으로 끌었다.

“거짓말이라면.”

그녀의 손이 어딘가에 닿았다. 오베론은 그녀가 그것을 더더욱 단단히 감싸 쥐도록 겹친 손에 힘을 주며 속삭였다.

“내가 네게 이렇게 발정했겠나? 마리온.”

마리온은 자신의 손이 감싸 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알 수밖에 없었다. 아주 길고, 우람하고, 단단한 그것은 옷자락에 싸여 있는데도 아주 뜨거웠다. 그 거대한 것에서는 고동치는 맥박이, 열기가, 생명력이 느껴졌다.

“엄마야!”

마리온은 기겁했다. 이렇게 흉물스러울 정도로 큰 것이 자신의 몸에 들어갔다가 나갔단 말인가? 물론 지난번에도 크고 밀어 넣기 힘겹다고 느끼긴 했지만 제대로 본 것은 아니었으므로 이 정도로 클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게다가 크기도 크기지만, 이것이 띠고 있는 열기란…… 정말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오베론이 움직일 때마다 꺼떡이는 그것은 어찌나 흥분했는지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음에도 끄트머리가 다소 젖어 있기까지 했다.

‘말도 안 돼. 아무리 탑에 여자가 나밖에 없다고 해도 그렇지…….’

마리온은 그의 안에서 들끓는 욕망의 깊이를 도저히 가늠할 수 없었다.

그 거대한 물건에 기가 눌린 마리온이 얌전해지자 쿡쿡 웃는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이제 거짓말이 아니란 건 알았나?”

“…….”

“이게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하는데, 넌 어떻게 생각하지?”

오베론이 허리를 놀려, 그녀의 여린 손바닥에 그 끄트머리를 꾹꾹 눌렀다. 손바닥에 뜨거운 그것이 문질러지는 간질간질한 기분에 마리온은 한숨을 토했다.

“어때, 이 녀석이 싫은가?”

마리온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붉어진 얼굴을 돌린 채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마음속에서는 스승님과 이런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이성이 고함쳤지만 그보다 더 커다란 무언가가 이성을 짓누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마리온은 거부할 수가 없었다. 믿을 수 없게도.

그녀가 대답하지 않자 오베론이 픽 웃었다.

그러더니, 그는 거침없는 손길로 마리온의 푹 젖어버린 속옷을 내렸다. 속옷이 걸리적거리지 않게 완전히 벗겨 연구실 바닥에 던져버렸다.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을 해버린 것 같아 그 모습을 보며 마리온은 움찔 어깨를 떨었다.

등 뒤에서 오베론의 바지 버클이 풀리는 소리가 났다. 그러곤 곧, 마리온의 몸이 둥실 들렸다.

“앗……!”

그가 두 손으로 마리온의 몸을 들어 끌어당겼다. 그는 마리온의 두 다리를 부끄러울 정도로 벌려놓고는 그녀의 몸을 자신의 물건 위에 앉혔다.

자신의 입구, 그 민감한 통로에 거대하고 뜨거운 것이 닿자 마리온은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이미 한 번 들여보낸 적이 있다는 건 알지만, 그 거대한 것을 마주하자 본능적인 두려움이 가슴을 죄어왔다.

“긴장하지 마.”

오베론이 속삭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다정해서, 완전히 믿고 의지해도 상관없을 것 같은 유혹이 들었다.

그가 마리온의 허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었던 몸은 기다렸다는 듯이 천천히 이완되었다.

긴장이 풀리자 다리에서도 힘이 빠져나갔다. 마리온의 몸이 낮춰지자, 자연히 커다란 것의 끄트머리가 입구로 파고들었다.

“윽……!”

다시 두려움으로 굳어버리려는 몸을 오베론은 다정히 끌어안았다.

“괜찮아, 마리온. 괜찮아.”

그가 한없이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있잖아.”

그는 마리온을 다정하게 끌어안은 채 속삭이며 그녀의 몸을 천천히, 인내심 있게 아주 조금씩 밀어 내렸다.

마리온은 등골에서 땀이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래도 꽤 버겁고 팽팽하게 당겼다. 그저 넣었을 뿐인데도 숨이 찼다.

끝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던 오베론의 그것이 완전히 들어왔을 때 마리온은 안도의 숨을 토했다.

“잘했다, 마리온. 착하기도 하지.”

오베론이 마리온의 귀에 몇 번이고 입 맞추며 속삭였다.

마리온은 버거움을 느끼면서도 그의 칭찬이 이상하게 기뻤다. 잘했다, 착하다는 말을 들어본 게 대체 얼마 만이었는지. 모두가 반대하는 길을 걸어온 그녀에게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베론의 말에, 그의 단단한 품에 매달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움직임은 예고 없이 시작되었다. 오베론은 마리온의 골반을 단단하게 쥔 채 아래에서 그녀의 몸을 향해 쳐올렸다. 모르는 체할 수 없을 정도로 명백한 질척이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그의 다리 위에 앉은 채로 받아들이는 자세는 중력의 영향으로 그의 것이 더더욱 깊이 들어오게 만들었다. 뿌리 끝까지 파고들어 그의 까슬한 음모까지 닿아오는 생경한 감각.

“핫, 하아, 아아……!”

이런 노골적인 소리를 낸다는 것이, 그가 그것을 듣는다는 것이 너무 부끄러웠지만, 그가 움직일 때마다 도저히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주체할 수 없었다. 소리를 주체하기는커녕 머릿속, 몸, 감각 하나하나가 자신의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마리온은 어떤 것도 통제할 수 없었다.

두 번째 경험이었지만 전신을 때리는 충격은 첫 번째에 비해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자세로 인해 더 깊게 들어오는 그의 것은 그녀의 민감한 내벽을 긁어내렸다. 그 육중한 부피감에 견딜 수가 없었다.

거친 파도 같은 쾌감에 휩쓸려 가버릴 것 같아서 마리온은 잡을 것을 찾았다. 그녀의 정처 없는 손에 크고 단단하고 조금 시원한 것이 감겨왔다. 오베론의 손이었다.

오베론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돌아보니 그의 다정한 시선이 아득하게 눈에 들어왔다.

“탑, 주님……! 저……!”

마리온이 잔뜩 끊기는 눈물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젠 견딜 수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너무나 어마어마한 그 감각을 다시 한번 마주하게 된다면 그 자신은 이전의 자신과는 다를 것 같았다. 이대로 계속했다가는 정말 나쁜 애가 되어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그중 어떤 말도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을 읽어내기라도 한 듯, 오베론은 다정하게 웃음 지었다. 그의 파란 눈동자 속에는 빨개져서 울먹이는 마리온의 얼굴만이 가득 담겨 있었다.

오베론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아준 채 속삭였다.

“옳지, 잘하고 있어. 잘 견디고 있다, 마리온. 착하기도 하지.”

“앗, 하앙, 핫! 아, 탑주님, 아흐윽……! 으응!”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돼. 걱정 마라. 내가 있잖아…….”

손을 잡아주며 다정한 말을 속삭이는 그와, 허리 아래로는 짐승처럼 격렬하게 그녀를 괴롭히는 그가 같은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입에서 끊임없이 튀어나오는 앓는 소리와 철벅거리는 살과 살이 부딪치는 요란한 소리.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 같은 기세로 자신을 탐하는 그를 내일부터는 어떤 눈으로 봐야 할지 마리온은 감도 잡을 수 없었다.

절정은 마치 해일처럼 마리온을 덮쳤다. 몸을 바스러뜨려 놓을 것만 같은 격렬한 쾌감 속에서도 그녀는 오베론의 손을 동아줄이라도 되는 양 꼭 쥐었다.

마리온이 절정을 느끼는 동안에도 오베론은 그녀를 몰아가듯 세차게 허리를 흔들었다. 그 어떤 때에도 느낄 수 없었던 강렬한 감각에 온몸이 휩싸였다.

지칠 대로 지친 마리온은 오베론의 넓은 가슴팍 위로 무너지듯 쓰러졌다. 온몸이 땀으로 젖어 할딱이는 그녀의 가슴이 부풀었다가 다시 작아지기를 반복했다. 마리온은 자신의 안쪽에 따뜻한 무언가가 퍼지는 것을 느끼며 졸린 눈을 깜빡였다.

‘탑주님과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그런 의문이 떠올랐다가 안개처럼 흩어졌다.

일어나야 했지만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 허리는 뭉근하게 쑤셨고 팔다리는 커다란 가마솥보다도 더 무거웠다. 마사지를 받은 탓인지, 마리온은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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