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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1/6)

0. 프롤로그

마리온 플라리넷이 자신의 인생을 연금술에 걸어보겠다고 선언했을 때 가족 모두가 기함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럴 만도 했다. 이때 연금술은 극도로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일이자, 불가침의 금녀의 영역이었다.

전 대륙에서 연금술의 교육기관은 단 한 곳, 연금술사의 탑밖에 없었다. 연금술을 배우고, 어엿한 한 사람의 연금술사로서 인정받으려면 그곳에서 교육을 받아 학위를 취득해야만 했다.

그런데 그 연금술사의 탑은 여성을 정식 수련생으로 맞이한 전적이 없었다.

연금술사의 탑은 예로부터 자치권을 주장하며 어느 국가에도 소속되지 않은 중립지역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그렇게 다른 문화권의 영향을 받지 않고 스스로 고립되어 자신들만의 문화를 구축해 온 탓인지, 연금술사의 탑은 어느 영역에서는 어느 국가보다 진보적이면서도 또 어느 부분은 어느 국가보다 보수적이었다.

마리온은 그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아카데미 등의 교육 기관들이 하나둘 여성에게 문을 열고 있는 세상이었다. 그런데 여성인 자신이 연금술을 배우면 안 될 이유는 또 뭐란 말인가.

물론 가족들은 그런 그녀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마리온은 어릴 적부터 영특했고, 비록 시력이 나쁘긴 했으나 인물도 나쁘진 않고 비록 귀족가는 아니나 물질적으로 모자람 없는 집안에서 자랐다.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괜찮은 집안에 시집갈 수 있을 텐데 뭐하러 고생을 사서 한단 말이니?”

어머니가 말했다.

“보렴, 저번 주에도, 저번 달에도 청혼서가 들어왔는데 전부 거절을 하더니. 그게 다 고생길에 제 발로 들어가려고 그랬던 거니?”

“여자는 머리 아프게 공부를 해봤자 손해란다. 하물며 연금술이라니……. 네가 어릴 적부터 유난히 영리하긴 했지만 연금술사의 탑에선 그 정도론 너를 받아주지 않을 거다.”

아버지도 걱정스러운 태도로 타일렀다.

“생각해 보거라. 너 정도면 대귀족까지는 아니어도 소귀족이나 지방 유지의 아내 정도는 충분히 될 수 있을 거다. 남편에게 사랑받고, 귀여운 아이들 낳고, 힘든 일은 전혀 하지 않고 하인들을 손짓으로 부리면서 살 수 있을 텐데 뭐하러 가시밭길에 스스로 들어간단 말이냐?”

이 정도의 반대는 예상 내의 일이었다. 마리온은 한숨을 푹 쉬었다.

“저는 국립 도서관에 있는 연금술에 대한 책이란 책은 전부 읽었고, 15살 때부터 저만의 발명품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어요. 은퇴한 연금술사인 뒷집 몰린 할아버지는 남자 신입 도제 중에서도 이만한 인재는 보기 힘들다던데요.”

“네 머리가 좋은 건 인정하지만 그래봤자 연금술사의 탑에서는 널 받아주지 않을 거야. 설령 운 좋게 받아준다고 해도, 그곳의 남자 도제들이 얼마나 텃세를 부리겠느냐? 마음에 상처만 입고 결국 그만두고 말 거다.”

“그건 해봐야 아는 것 아닐까요?”

“하여간에 안 된다니까. 그보다 이번 주 금요일에 선 자리를 잡아놓았으니 꼭 나가보거라. 거상의 아들인데 네 마음에도 쏙 들 게다.”

이럴 줄 알았기에 마리온은 화도 나지 않았다. 부모님은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걱정했지만 그들의 사랑하는 방법은 마리온에게 맞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연금술을 배우기는커녕, 어영부영 시집보내지고 말 거야.’

부모의 성정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리온은 오래전부터 준비를 해두었다.

어느 날, 가족들이 깊이 잠든 밤에 마리온은 몰래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협탁을 밀어놓고 그 밑의 마룻바닥을 어렵지 않게 뜯어냈다. 그 안에는 작은 배낭과 험한 여행에 어울리는 튼튼한 옷, 그리고 돈이 들어 있었다.

마리온은 단 5분 만에 옷을 갈아입고 짐을 챙기고 집을 빠져나왔다.

짐은 진작에 다 싸두었다. 그녀의 가방은 19살 때 발명한 내부가 겉으로 보이는 것의 5배는 넓은 가방이었으며, 긴 여행을 대비한 물자는 전부 준비되어 있었다. 돈도 어릴 적부터 발명품이나 특허를 팔아 번 돈을 아끼고 아껴 모은 것이었다.

그녀는 심지어 소리 내지 않고 몰래 빠져나가는 연습까지 해둔 참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들킬 염려는 없었다.

마을 밖까지 나온 마리온은 슬픈 눈으로 집이 있는 방향을 돌아보았다.

“죄송해요, 엄마, 아빠. 저, 꼭 훌륭한 연금술사가 되어 돌아올게요.”

닿을 리가 없지만, 이 목소리가 닿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속삭였다.

그러고는 연금술사의 탑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연금술사의 탑에 당도하자마자 마리온은 상급 견습생의 비웃음을 들어야 했다.

“여자에게 연금술은 안 어울려. 누구보다 뛰어난 지능과 논리력이 있어야 하는데 여자들은 비이성적이거든.”

심지어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기 위해 준비해 온 발명품들의 보고서와 특허 증명서 등을 내밀어도 마찬가지였다.

“손재주는 있는 것 같으니, 나가서 미용실에 취직하지 그래?”

마리온이 무슨 말을 해도 요지부동이었다. 슬슬 조롱하는 것도 귀찮아진 상급 견습생이 마리온을 강제로 쫓아내려고 하던 찰나였다.

“그 보고서, 내가 살펴봐도 되겠나?”

청유형의 말이었으나 정말 의사를 물어볼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큰 손이 다가와 마리온의 두툼한 보고서 뭉치를 낚아챘다.

“앗…….”

마리온이 돌아본 그곳에는, 놀랄 정도로 키가 크고 잘생긴 남자가 서 있었다.

겉모습에 신경 쓰지 않는 듯 검은 머리카락은 되는대로 잘랐고, 짙은 남색의 단순한 로브를 입고 있었으나 그런 것쯤은 흠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단순한 차림이 그의 흰 피부와 선명한 이목구비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무척 잘생겼을 뿐만 아니라, 주변을 압도하는 카리스마와 충만한 자신감이 그를 무척 높은 지위의 사람으로 짐작게 했다.

또 다른 증거로, 마리온의 앞에서는 그렇게 기세등등하던 상급 견습생도 그의 앞에서는 새파랗게 질려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정말 높은 선배님이나 선생님인 모양이네. 멋지다.’

마리온은 생각했다.

남자는 마리온의 보고서를 팔랑팔랑 넘겨보았다. 어찌나 빨리 넘기는지 읽는 게 아니라 페이지 숫자를 세어보는 것 같았다.

보고서를 끝까지 넘겨본 남자가 말했다.

“‘마리온 플라리넷’……. 이 보고서에 적힌 발명품들이 전부 네가 발명해 낸 것들인가?”

“네, 맞습니다.”

“여길 보면 5년 전의 작품도 있는데, 넌 지금 20살밖에 되지 않았지. 정말 15살부터 연금술을 시작했나? 15살이 연금술은 어떻게 배웠지?”

워낙 빠르게 넘겨서 보고서를 읽을 수는 있을까 했는데, 내용을 읽긴 읽은 모양이었다. 마리온은 그의 속독 능력에 감탄하며 대답했다.

“연금술을 시작한 건 9살부터입니다. 정식 발명품을 만든 것이 15살이고요. 국립 도서관에 매일 드나들며 연금술에 대한 책을 전부 읽었습니다.”

“독학으로 이 정도의 성과를 내었다라. 괄목할 만해. 이곳의 연금술사 중에도 그렇게 어릴 때부터 성과를 냈던 녀석은 나 말고는 없거든. 정말 대단해, 플라리넷.”

남자는 보고서를 마리온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가르치는 보람이 있을 법한 인재야. 적어도 여기 있는 9년째 배우고 있지만 보는 눈이라곤 하나도 없는 머저리보다는 훨씬 더.”

“아, 아니, 저, 그게…….”

상급 견습생의 얼굴은 새파랗다 못해 녹색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의 변명을 단호하게 자르며 남자가 말했다.

“마리온 플라리넷, 연금술사가 되기 위한 첫 발걸음을 뗀 것을 축하한다. 넌 이제 이곳의 견습생이야. 흥미롭게도, 연금술사의 탑의 첫 여성 견습생이기도 하군.”

“감사합니다!”

마리온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이렇게나 행복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연금술사의 탑의 일원이 된 것이었다. 연금술사의 탑은 그녀가 아주 어릴 때부터 꿈꿔왔던 곳이었다.

“그리고 넌, 9년 동안이나 배웠음에도 배운 것이 없는 것 같군. 비록 한숨이 나올 정도로 아둔하지만 나이만 먹어가는 것이 가엾어서 상급 수련을 하게 해주었더니만, 그 호의를 후배 괴롭히기에나 쓰고 있을 줄은. 네 도제로서의 등급을 2단계 내리겠다.”

“네?! 죄, 죄송합니다만 잘 못 들었습니다만…….”

“네 두 귀는 장식인가? 너는 이제부터 하급 견습생이다. 다시 기초부터 차근차근 수련하면서 반성하도록. 내 결정이 마음에 안 든다면 짐을 싸서 탑을 떠나도 상관없다.”

상급 견습생…… 아니, 이제 하급 견습생이 된 작자는 거의 졸도하려고 했다. 그럴 만도 했다. 9년 동안이나 수련해 온 모든 것이 한순간에 허사가 되어버렸으니.

마리온이 측은한 눈으로 그를 보고 있던 그때,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남을 불쌍하게 여기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

“앗, 네.”

“날 따라오도록.”

남자는 끝없이 이어진 나선형 계단을 따라 올랐다. 마리온은 잠자코 그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계단을 오르던 도중 이런 목소리가 툭 떨어졌다.

“연금술사가 되고자 하는 이유는 뭐지?”

“그건…….”

마리온은 순간 이게 일종의 면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긴장하는 그녀의 얼굴을 흘끗 보곤, 생각을 읽은 듯이 남자가 말했다.

“안심해. 너를 시험하려는 것은 아니니까. 네가 이곳의 일원이 되는 것은 아까 결정된 일이다.”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오는 길에 면접을 예상하고 준비해온 대답들도 잔뜩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마리온은 눈앞의 이 사람에게라면 면접용 대답이 아니라, 진실한 대답을 해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리온이 주저하며 말했다.

“저는……. 춥고 배고픈 사람들을 따뜻하고 배부르게 해주고 싶어요. 그게 제 삶의 목표예요.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제일 좋은 방법은 연금술이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도움이 되는 발명품들을 많이 만들어서 모든 사람을 따뜻하게 해주고 싶어요.”

“…….”

“이상한…… 가요?”

마리온도 이것이 우스운 대답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을 따뜻하게 해주고 싶다니……. 현실적이지도 않고 막연한 뜬구름 잡는 이야기였다. 어지간한 면접관이라면 비웃음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진심이었다. 마리온은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착한 아이다운 대답이군.”

따뜻한 목소리였다. 웃음기가 어려 있었지만 분명히 비웃음은 아니었다.

마리온은 깜짝 놀라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남자는 앞장서서 걷고 있었기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착한 아이답다니, 꼭 나를 아는 것처럼……. 아니, 별 뜻 아닌데 내가 지나치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마리온 플라리넷. 아까는 운 좋게 내가 발견해 도와주었지만, 만일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하려고 했지? 세상의 모든 사람을 따뜻하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진심이라면 거기서 포기할 생각이었던 건 아니겠지.”

마리온은 당당하게 대답했다.

“물론이죠. 만일 거기서 쫓겨났다면 벽이라도 탔을 거예요. 제 발명품 중에 초강력 끈끈이를 사용하면 돼요. 원래는 벌레를 잡으려고 만든 거지만…….”

“오호라. 벽을 타서 어쩌려고 했지?”

“탑주님을 직접 만나려고 했어요.”

마리온의 얼굴이 꿈을 꾸듯 몽롱해졌다. 행복감에 잠긴 얼굴로 마리온이 재잘거렸다.

“현 탑주이신 오베론 님……. 오베론 님은 연금술 역사상 최연소 탑주이자, 단 2년 만에 연금술사의 탑의 명성을 몇 배로 드높인 지혜롭고 대단한 분이시잖아요. 모든 연금술사의 동경의 대상이기도 하고요. 그런 분이라면 제가 여자라는 것과 상관없이 제 능력을 봐주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렇군.”

“그러고 보니 우린 지금 어디로 가는 건가요? 역시 오베론 님을 뵈러 가는 건가요?”

“그래. 수다스러운 신참이 들어왔다는 사실을 탑주도 알아야지.”

‘탑주님’도 아니고 ‘탑주’라니? 마리온은 깜짝 놀랐다.

‘탑주님을 저렇게 편하게 부르다니……. 높은 사람인 줄은 알았지만 정말 엄청 높은 사람인가 봐.’

“여기다.”

마리온이 생각하는 사이에 남자가 멈춰 섰다. 그는 어느 방문을 열쇠로 열고는 안에 들어가 등유 램프에 불을 붙였다.

“정식으로 소개하지.”

몇 개의 램프에 불이 켜지자, 곧 방 안이 환하게 밝아졌다.

마리온은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겉으로 보기엔 작은 방 같았던 그곳의 내부는 무척 넓었으며, 마치 연구실처럼 실험도구로 가득했다.

온 사방에서 번쩍이고, 부글거리고, 빙빙 돌고, 펑펑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방을 꾸미는 데에는 관심이 없는 듯 산더미 같은 실험도구와 책, 서류 외의 장식품은 하나도 없었지만,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바로 책장에 별것 아닌 것처럼 굴러다니는 훈장들이었다.

마리온은 그것들을 알아보았다. 성국, 제국 등에서 받은 훈장들이 잔뜩 있었으나 개중 제일 눈에 띄는 것은 황제에게 하사받은 금독수리 훈장이었다.

제국 역사상 단 여섯 번밖에 하사되지 않은 것으로, 한 번 받는 것만으로도 당사자에게는 역모를 제외한 모든 죄의 면제권과 모든 직계가족이 평생 갑부로 살 수 있을 정도의 상금이 주어졌다. 그야말로 영원한 가문의 영광이라 할만했다.

또한 마리온이 아는 바로는, 연금술사로서 금독수리 훈장을 받은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서, 설마…….”

마리온의 얼굴에 핏기가 싹 사라졌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묘한 이채를 띠는 파란 눈으로 들여다보며, 남자는 웃음기를 머금은 채 말했다.

“연금술사의 탑주, 오베론이다. 네게는 기대가 많다, 마리온 플라리넷. 내 기대를 저버리지 말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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