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에필로그 (20/20)

에필로그

현주는 요즘 눈코 뜰 새 없는 하루를 보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신부님, 촬영용 드레스는 실제 예식 드레스보다 심플한 것도 괜찮아요. 사진으로 담아낼 거라서 엄청 화려하지 않아도 예쁘게 잘 나오거든요.”

“아, 근데 이렇게 등 파인 드레스는 남자 친구가 싫어할 것 같은데…….”

웨딩 플래너가 추천해 준 드레스는 라인만 심플하지 등이 훅 파여서 섹시한 느낌이 가득한 것이었다. 수많은 드레스를 보아 무뎌진 현주 눈에도 예뻐 보이는 걸 보면 분명 아름다운 드레스였지만 지원이라면 단연코 반대할 디자인이었다.

“에이, 드레스의 주인은 신부님이세요. 이것만은 신랑님보다 신부님 의견이 우선이어야죠.”

뭘 모르고 하는 소리였다. 플래너는 신랑의 이름이 김지원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 김지원이 그 ‘김지원’이라는 것은 아직 몰랐다. 신혼여행을 대비해 스케줄을 미리 소화하느라 지원 역시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 Rrrrr.

타이밍 좋게 지원의 전화가 왔다. 정말 양반이 되기는 틀린 사람이었다. 현주는 플래너에게 양해를 구한 후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지금 숍이야?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짧은 물음에도 지원의 목소리는 피곤이 가득했다. 숍이냐고 묻는 걸 보니 아침에 드레스 고르러 간다고 했던 말을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어쩜 갈수록 세심해지는지, 남자 하나는 제대로 고른 게 확실했다.

“네, 아직 드레스 보고 있어요. 지원 씨는요?”

― 당신한테 가고 있어.

“지금요? 시간 생겼어요?”

예전이나 지금이나 사람 놀라게 하는 데 재주 있는 그였다. 안 그래도 혼자 드레스를 보는 게 꼭 비운의 신부 같은 느낌이라 좀 서글픈 참이었다.

“스케줄 끝난 거예요?”

현주는 들뜬 마음을 숨기지 않고 물었다.

― 잠깐 시간 만든 거야. 아무리 바빠도 드레스는 같이 봐야 할 것 같아서.

그의 목소리엔 미안함이 숨겨져 있었다.

“괜찮다니까……. 여기 주소는 알아요?”

괜찮다 하면서도 현주의 입꼬리는 자꾸 솟아올랐다.

― 응, 매니저가 알려 줬어.

“몇 분 걸려요?”

현주는 웨딩플래너를 쳐다보며 물었다. 상냥한 그녀는 여전히 섹시한 드레스를 감탄 섞인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지원을 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현주는 벌써부터 웃음이 새어 나왔다.

“……세, 세상에!”

“네, 네?”

현주는 핸드폰을 든 채 플래너를 쳐다보았다.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의 플래너가 말까지 더듬으며 현주의 등 뒤를 가리켰다. 그 순간 현주의 어깨엔 단단한 팔이 둘러졌다.

“나 왔어.”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벽한 외모의 그가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왔어요?”

현주는 안쓰러움에 손을 뻗어 그의 뺨을 감쌌다.

플래너는 재빨리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자신의 고객이 한류 스타 김지원인 것인가? 그렇다면 눈앞의 여자는 김지원의 여자인 것인가? 그럼 난 김지원의 결혼을 책임지고 있는 것인가? 플래너의 머릿속은 금요일 밤의 클럽보다도 시끄럽게 들썩이고 있었다.

“골라 놓은 드레스 있어?”

지원은 숍의 고급스러워 보이는 소파에 상체를 기대며 물었다. 사실 그의 생각대로라면 그녀는 무엇을 입어도 예쁠 것이었다.

“아, 예식 드레스는 아직 못 골랐어요. 플래너분이 촬영용 드레스로 추천해 주신 거 있는데 볼래요?”

“당신 마음에만 들면 나는…….”

선선히 승낙의 말을 뱉으려던 지원은 드레스의 뒷면을 보더니 얼굴을 굳혔다.

“저걸 입겠다고?”

“안 예뻐요?”

현주의 물음에 지원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긴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바쁜 시간을 쪼개고 쪼개 숍에 들르길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너무 야해. 안 돼.”

“왜요. 플래너님이 드레스는 신부 마음대로 하는 거래요.”

현주는 친절히 플래너를 가리키며 말했다. 플래너는 지원의 서슬 퍼런 눈빛에 당황하며 재빨리 손사래를 쳤다.

“하하, 신부님도 참. 웨딩은 신랑님과 신부님의 합작인데 당연히 신랑님 의견도 중요하죠.”

현주는 삐져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어떤 직업의식도 도끼눈을 한 지원의 앞에선 무너지는 모양이었다. 지원은 어색한 미소와 함께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플래너를 향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제가 오늘 이후로 또 시간이 날지 몰라서 미리 말씀드립니다. 노출은 최소로 해 주세요.”

뒤에 ‘그렇지 않으면 죽습니다.’라는 말은 자동 생략된 느낌이었다. 플래너는 그러거나 말거나 지원이 말을 걸어 주는 것만으로도 감격한 것 같았다. 과한 미소와 격한 몸짓으로 고개를 끄덕인 플래너는 지금까지의 샘플을 모두 치우고 새로운 샘플을 가져오기 위해 바삐 움직였다.

“저 사람 믿을 만한 거 맞아?”

지원은 여전히 못마땅한 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현주는 그런 그의 허리를 찌르며 눈치를 줬다. 요즘 들어 이곳저곳에서 팔불출 짓을 하고 다니는 지원 때문에 민망한 일을 자주 겪는 그녀였다.

“오늘은 좀 얌전히 있어요. 야한 드레스 안 입을 테니까.”

“안 입는다니, 못 입는 거지.”

한마디도 지지 않는 지원이었다. 그 사이에 새로운 드레스 샘플들이 행거에 걸려 끌려왔다. 어깨부터 손끝까지 레이스로 감싼 드레스가 눈에 띄었다.

“저건 어때요?”

노출을 싫어하는 지원에게도, 레이스를 좋아하는 현주에게도 안성맞춤인 드레스였다. 지원은 적극적으로 일어나 드레스의 디테일을 살피더니,

“입어 볼래?”

라고 물었다. 현주는 신나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플래너와 헬퍼들의 도움을 받으며 옷을 갈아입었다.

“지원 씨, 밖에 있어요?”

“어, 여기 있어.”

“나 다 갈아입었어요. 커튼 열게요.”

가만히 있어도 커튼은 열렸겠지만 현주는 나름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그의 앞에서 처음으로 선보이는 드레스 차림이기 때문이었다. 드레스 때문에 한 달은 굶은 그녀였다. 그가 예쁘다고 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커튼이 열리고 드레스를 입은 현주와 소파에 앉은 지원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

“…….”

현주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웨딩드레스를 입었을 뿐이었지만 그 사실만으로도 그와 인생을 함께한다는 기분이 들었다. 저 앞에 있는 남자가, 세상 어디에 놓아도 완벽하다고 자부할 저 남자가 그녀와 앞으로의 인생을 함께할 사람이라니.

지원은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예쁠 거라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일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작고 곧은 그녀의 어깨와 날렵한 모양의 드레스가 한 몸인 듯 어울렸다. 울먹이는 현주의 눈이 그를 수줍은 듯 쳐다보고 있었다. 지원은 그녀가 자신과 남은 인생을 함께할 영원한 사랑임을 실감했다.

“당신.”

“…….”

“정말 예쁘다.”

* * *

지원과 함께 골랐던 레이스 드레스는 촬영용으로 생각했던 첫 마음과 달리 본식 드레스로 결정되었다. 웨딩 촬영을 하는 내내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지원의 반응 탓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함께 고른 드레스로 식을 올리고 싶었던 현주의 마음이 가장 컸다.

내일이면 정말 결혼이었다. 오늘만큼은 현주도 부모님과 함께 밤을 보내며 시집가는 딸 역할에 심취하고 싶었지만 괜한 수선 떨며 드라마 찍지 말라는 쿨한 부모님 덕분에 그녀는 지금 지원의 집, 곧 신혼집이 될 곳에 있었다.

“결혼식 하루 전까지 스케줄 소화하느라 정신이 없네, 우리 남편.”

현주는 순간적으로 제 입에서 뱉어진 낯선 단어에 얼굴이 붉어졌다. 결혼 하루 전에도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는 지원을 기다리며 안타까움에 중얼거린다는 것이 그만 ‘남편’이라는 생소한 단어를 뱉어 내고 만 것이었다.

“남편…… 맞지 뭐. 여보? 신랑? 남편?”

현주는 문득 지원을 부르는 호칭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지원 씨’라고 부르고는 있지만 좀 딱딱한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다.

“…….”

결혼이라니. 남편이라니. 그것은 그를 마음껏 사랑할 수 있고, 마음껏 사랑받을 수 있는 것을 의미했다.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도 그의 그림자 뒤에 숨은 채 모든 것을 침묵해야만 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지원의 배려로 그 시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숨이 막혔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현주는 벅차오르는 마음에 심장이 뛰었다.

딩동―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독이며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를 매만지던 그녀는 느닷없이 들려오는 초인종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미 밤 열 시를 넘긴 시간에 누가 초인종을 누르는 것일까. 이것이 말로만 듣던 사생팬들의 횡포일까. 결혼을 하루 앞두고 사달이 나는 것일까. 현주는 머릿속 가득 최악의 상황들을 펼쳐 내며 인터폰을 확인했다. 작은 모니터 안에는 빨간 장미꽃이 보였다.

“……누구세요?”

대답은 없었지만 모니터 안의 이미지는 바뀌었다. 내일이면 그녀의 남편이자, 신랑, 여보가 될 지원이 웃고 있었다.

“후…….”

현주는 긴장하고 있던 몸에 힘을 빼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간 떨어질 뻔했네.”

지원은 현주가 문을 열어 주기까지 기다렸다. 비밀번호를 갑자기 까먹은 것도 아닐 텐데 그는 스스로 문을 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 뭐 해? 얼른 문 열어 줘.

현관문 너머의 지원이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재촉했다. 현주는 투덜거리며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을 줘 돌렸다. 열린 문틈 사이로 보이는 지원은 싱글벙글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우와, 와이프가 열어 주는 문은 처음이네.”

그제야 현주는 그가 왜 초인종을 눌렀는지에 대해 깨달았다.

“그것 때문에 초인종 누른 거예요? 내가 문 열어 주는 게 좋아서?”

어이가 없다는 듯 허무한 표정을 짓는 현주에 비해 지원은 굳은 결의로 가득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 완전 좋은데? 아, 이거.”

지원은 손에 들고 있던 탐스러운 장미꽃 다발을 퉁명스럽게 건넸다. 흰색도 아니고 분홍색도 아닌 오직 빨간색 장미꽃으로만 가득 이루어진 꽃다발은 영원히 박제하고 싶을 만큼 생기 넘치고 아름다웠다.

“와, 지금까지 본 장미꽃 중에 제일 예쁜 것 같아요.”

“인터뷰하던 장소가 플라워 카페였거든. 예뻐서 샀어. 마음에 들어?”

“당연하죠. 침실에 둘까요? 꽃병 있어요?”

현주는 지원에게 처음 받아 보는 꽃 선물에 기뻐 어린아이처럼 신이 났다. 지원은 그런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감쌌다.

“자꾸 움직이지 말고 나 좀 봐. 오늘 하루 종일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단 말이야.”

지원은 증명하듯 뚜렷한 눈빛으로 그녀의 얼굴 구석구석을 담았다. 거짓 없는 진실한 눈, 작고 귀여운 코, 윤기가 흐르는 도톰한 입술까지 어느 한 곳 예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엄살 피우지 말아요. 내일 결혼식 끝나면 한 달 동안이나 신혼여행이잖아요.”

“나만 원하는 것처럼 말하네?”

지원은 현주의 얼굴을 감싸고 있던 손을 풀며 말했다. 대답해 보라는 듯 지그시 쳐다보는 그의 눈길은 누구든 간에 긴장시킬 만큼 압도적인 것이었다. 참으로 특출난 재능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다정하고 심지어는 귀엽기까지 했던 그는 숨소리조차 단단하고 묵직하게 바뀌어 있었다.

“응?”

지원은 걸음을 당겨 현주에게 다가갔다.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은 없던 욕망도 불러일으킬 만큼 매혹적이었지만 그만큼 위험해 보여 현주는 뒷걸음질 쳤다. 지원은 그 모습에 오히려 자극을 받는지 입꼬리를 말며 웃었다.

“…….”

지원은 현주가 스스로 입을 열 때까지 기다릴 작정이었고 현주는 그 속셈을 모르지 않았다.

“아, 정말…….”

이윽고 현주의 입술이 열렸다.

“나, 나도…… 보고 싶었어요.”

그 말에 지원은 언제 그랬냐는 듯 미소를 지었다.

“뭐라고? 다시 말해 봐.”

그리고 또 한 번 짓궂어졌다. 현주는 아랫입술을 내밀며 칭얼거리듯 어깨를 흔들었다.

“내가 그런 말 못하는 거 뻔히 알면서…….”

지원은 고개를 푹 숙인 현주의 작은 턱을 감싸며 들어 올렸다. 이러니 놀리지 않을 수 있나. 그녀의 보고 싶었다는 말, 결혼을 고대하고 있다는 말이 듣고 싶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마음을 알고 있으니 짓궂게 굴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말 한마디에 부끄러워하고, 몸짓 하나에 얼굴을 붉히니 자꾸만 장난을 치고 싶었다.

“알아. 아는데도 듣고 싶은데 어떡해.”

“치…….”

“당신이 너무 좋아서 그래.”

현주는 또 한 번 얼굴이 붉어졌다. 어떤 의미에서 지원은 참 대단했다.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예쁘다느니, 사랑스럽다느니, 보고 싶었다느니 하는 말들을 쏟아 내니 말이다.

현주는 어색하게 팔을 들어 그의 등을 껴안았다. 화끈하게 달아오른 얼굴을 들킬 바에야 이렇게 품에 안기는 편이 더 좋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작은 등을 감싸는 그의 손길이 느껴졌다.

“요즘 당신 여우 같아졌어. 원래는 곰이었는데.”

지원은 제 품으로 파고드는 현주를 부서져라 끌어안고는 중얼거렸다.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늘 그에게 자신이 진다고 표현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아쉽고 서운한 쪽은 언제나 그의 차지였다. 표현에 서투른 그녀 때문에 아무리 아쉽고 서운한 순간이 와도 이렇듯 품 안에 안겨만 주면, 웃기라도 하면 모든 것은 다 부질없어졌다.

“하…….”

그의 짙은 한숨이 그녀의 어깨 위로 쏟아졌다.

“으앗, 지원 씨!”

지원은 안겨 있던 현주를 어깨 위로 들쳐 메고 침실로 향했다. 그녀의 비명은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그는 침대에 다다르고 나서야 현주를 내려놓았다.

“우리 내일 결혼식인 거 잊었어요?”

그의 들끓는 욕망을 모를 리 없는 현주는 재빨리 예식 일정을 읊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것은 아무 상관 없다는 듯 고개를 숙여 입을 맞췄다.

“나도 알아.”

“…….”

지원은 짙어진 눈을 빛내며 그녀의 부드러운 턱 선을 쓸었다.

“당신이 완전히 내 거가 되는 날인데 어떻게 몰라.”

“…….”

“내일이 결혼식이니까 푹 자자.”

현주는 잔뜩 타오르는 눈을 하고는 정상적인 말을 잇는 지원을 의아해하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일찍 자야 해요. 내일 부으면 큰일 나.”

“응.”

지원은 사랑스러운 현주의 입술을 부드럽게 삼켰다.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키스로 거칠게 맞물려진 입술이 어느 무엇보다도 자극적이었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이 조금씩 새어 나왔다. 그는 몸을 기울여 현주를 침대 위로 눕혔다.

그럼 그렇지. 현주는 팔을 뻗어 그의 가슴을 힘껏 밀어냈다. 그와의 키스는 언제나 원초적인 본능을 일깨우는 것이었지만 내일은 일생에 한 번뿐인 결혼식이었다. 초췌한 모습이고 싶지는 않았다. 심지어 지원 쪽 하객들은 전부 배우, 모델, 가수였으니 신경 쓰이는 것은 당연했다.

“지, 지원 씨! 참아요. 우리 내일 결혼식이라니까요?”

현주는 최대한 침착한 어투로 그를 달래려 했지만 지원은 가소롭다는 듯 웃을 뿐이었다.

“지금 당장 당신이 내 여자라는 걸 느끼고 싶어.”

“…….”

“그러니까 아무 말 마. 섹스 후엔 푹 잘 수 있잖아.”

지원은 말도 안 되는 논리를 읊조렸다. 하지만 차마 말이 안 된다고는 할 수 없는 목소리와 숨소리를 지닌 그였다. 낮고 부드러운 그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잡아먹을 듯 위협적으로 굴었다.

지원은 최근 한 달간 데뷔 이래 최고로 바쁜 시간을 보낸 탓에 현주와의 시간을 제대로 갖지 못했다. 품 안에 그녀를 안은 지도 오래였고, 도톰한 입술을 맛본 지도 한참이었다. 지원은 하루의 시간도 견딜 수 없을 만큼 억눌려 있었다.

그는 다급한 고갯짓으로 그녀의 쇄골에 입술을 박았다. 따뜻한 온기와 함께 피어오르는 그녀의 체취가 지원을 아찔하게 만들었다.

“하으…… 지원 씨이.”

간지러운지 말끝을 길게 늘이는 그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는 타는 갈증 끝에 오아시스를 만난 사람처럼 눈을 감고 오로지 촉감에만 의존하기 시작했다. 그의 손이 현주의 허벅지를 농밀하게 쓰다듬기 시작했다.

“하아…….”

지원의 손길을 오랜만에 마주한 현주 역시 쏟아져 나오는 신음을 참을 수 없었다. 머리론 그를 진정시키고 쉬어야 한다고 하는데 몸은 조금 더, 더를 원했다. 목에서 시작된 짜릿한 쾌감이 발끝에서 올라오는 전율과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사랑해.”

지원은 이글거리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이제껏 그가 했던 어떠한 사랑 고백보다 직설적이고 분명한 것이었다. 그는 흐트러진 모습으로 누운 현주를 내려다보며 옷을 벗었다. 모든 것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는 그였다. 어서 빨리 온 살결로 그녀를 느끼고 싶은 욕망이 가득했다.

현주는 전라의 몸이 된 지원을 여전히 부끄러운 눈으로 훔쳐보았다. 넓은 어깨, 탄탄한 가슴근육, 조각 같은 복근에 보기만 해도 침이 넘어가는 허벅지 근육은 감탄할 수밖에 없는 완벽한 것이었다.

지원은 그녀의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달려들어 현주를 탐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그녀의 목에 붉은 자국을 남기고 밑으로 내려와 동그란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거칠기만 하던 그가 잠시 숨을 골랐다.

“아, 당신 가슴 너무 좋아.”

지원은 벌써 목이 잠긴 것인지 약간 허스키한 소리를 냈고 그것은 그것 나름의 섹시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는 현주의 원피스를 아쉬운 듯 지분거리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원피스고 청바지고 훌훌 벗겨 내는 것이 그의 스타일이었다.

“왜요?”

그런 그가 의아한 현주가 묻자 지원은 아이 같은 얼굴로 입술을 깨물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옷이 좀 야한 것 같아.”

“네?”

대체 뭐가 야하다는 것인지 현주는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연한 분홍색의 하늘하늘한 원피스였다. 청순하면 청순했지 야하진 않았다.

그런 현주의 생각과 달리 지원은 그 원피스가 무척이나 관능적이라고 생각했다. 조금만 힘주면 찢어질 것 같은 소재와 너무 얇아서 속이 비치는 색감은 그로 하여금 늑대의 본능을 일깨우려 했다. 지원은 짧은 순간 눈썹을 일그러뜨리더니 이윽고 결심한 듯 눈을 빛냈다.

“똑같은 거 다시 사 줄게.”

그 말을 끝으로 지원은 원피스를 세로로 찢었다.

“꺄악! 왜 옷을 찢고 그래요!”

조끼처럼 벌어져 맨살을 드러내는 원피스의 몰골은 물론이고 평소보다 거친 것 같은 그의 모습에 현주는 비명을 질렀다.

지원은 한층 더 에로틱해진 현주를 보며 천천히 고개를 움직였다. 흐르는 공기마저 민감하게 느껴졌다. 그는 상체를 숙여 그대로 현주에게 키스했다. 키스만으로도 숨쉬기가 힘든지 그녀는 상체를 들썩였다. 지원이 브라 밑으로 손을 넣어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말랑말랑 잡혀 오는 촉감이 야릇했다.

“으음…….”

현주는 지원의 입술에 입이 막혀 신음조차 제대로 뱉을 수 없었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감싸며 고개를 돌리려 애썼다. 아무리 관계가 중요해도 숨은 쉬어야 했다.

“지원 씨! 나 숨 좀……! 하아!”

지원은 현주의 입술에 피라도 내려는 듯 강하게 깨물고 나서야 놓아주었다. 그는 현주의 양손을 제 손으로 결박하고는 거칠게 숨을 내쉬는 그녀를 찬찬히 살폈다.

“내가 너무 잘 가르친 건가.”

“하…… 하아…….”

현주는 지원의 말에 대답할 정신도, 힘도 없었다.

“당신 숨 쉬는 것도 섹시해. 그런 것까지 가르친 적 없는데.”

지원은 진심으로 그녀의 모든 면에 감탄하고 있었다. 땀에 젖은 긴 머리를 자연스럽게 늘어뜨려 놓은 자태도 그렇고 파르르 흔들리는 긴 속눈썹도 마찬가지였다. 지원은 쏙 들어간 현주의 허리 사이로 손을 넣어 브래지어 후크를 풀었다. 흥분으로 부풀어 있던 가슴이 답답한 속옷에서 해방되어 탱글탱글 매력을 뽐냈다. 그는 이미 단단해져 유혹하는 유두를 손에 쥐고 빙빙 돌렸다.

“으흠…… 핫…… 지원 씨.”

현주는 몸을 비틀며 지원에게 애원했다. 고작 키스였지만 온몸에 진이 빠져나갈 만큼 황홀했기에 쉴 타임이 필요했다.

“말해.”

지원은 여전히 그녀의 가슴을 사랑스럽다는 듯 쥐고 주무르며 그녀의 입가에 귀를 기울였다.

“가, 가슴 그만 만져요…….”

그 말에 지원은 아주 웃긴 농담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하하 웃었다.

“뭐라고?”

지원은 직접적으로 제 가슴을 만지지 말라는 현주의 애원이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그는 조금 더 거칠고 노골적으로 그녀의 가슴을 애무했다. 둥글게 원을 그리며 잡아당겼다가 혀를 내밀어 입에 담고 장난을 치기도 했다. 현주는 뇌를 거치지 않고 뱉어 내듯 급하게 말을 이었다.

“너, 너무! 간지럽단 말이에요. 정신없기도 하고…… 지금 너무 흥분해서……!”

지원은 그 말에 모든 행동을 멈추고 현주와 눈을 맞췄다. 그러곤 무언가를 깨달은 듯 탄식을 뱉어 냈다.

“아아.”

현주는 그런 지원이 의아한 듯 올려다보았고 그는 악마처럼 씨익 웃어 보였다.

“너무 흥분했어?”

“네?”

“너무 흥분했다며.”

그는 현주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 자체에 자극을 받는 것 같았다.

“아, 아니 그게 아니고…… 평소보다 너무 자극적이어서…….”

현주는 당황한 듯 중얼중얼 말을 이었고 지원은 그런 그녀를 흥미롭다는 듯 지켜보았다.

“지금 충분히 자극적이란 말이지?”

현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원은 큰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그럼 지금 바로 본 게임 시작하면 되겠네.”

악마 같은 속삭임을 끝으로 귀를 핥는 그의 혀는 끈적거리는 타액을 남기고 멀어졌다.

지원은 현주의 허벅지를 잡고 끌어당겨 자신과 밀착하도록 했다. 그녀의 여린 속살은 애액으로 가득해 충분히 젖어 있는 상태였다. 너무 흥분했다는 그녀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었다. 지원은 이미 부풀 대로 부푼 제 남성을 쥐고 그녀의 작은 숲 앞을 문질렀다. 미끈거리는 촉감이 지원을 유혹했다. 그는 예고 없이 그대로 그녀와 몸을 밀착했다.

“흐읍!”

좁은 살결을 비집고 들어오는 그의 몸짓에 현주는 눈을 질끈 감고 거칠게 호흡했다. 지원은 그런 그녀의 탄력 넘치는 허벅지를 움켜쥐고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으읏! 하아…….”

지원은 상체를 숙여 팔로 현주의 얼굴을 감쌌다. 자세히 보고 싶었다. 쾌락과 절정, 자극이 아닌 둘의 진정한 교감을, 느낌을 살피고 싶었다.

“현주야.”

“네엣…… 하아…….”

“사랑해.”

“하앗…… 사, 사랑해요.”

지원은 천천히 움직이던 허리에 속력을 높였다. 쫄깃한 촉감으로 제 남성을 조이는 그녀의 속살이 아찔한 만큼 황홀했지만 그것보다 황홀한 것은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사랑 고백이었다.

지원은 제 허리를 감싸고 있는 그녀의 다리부터 잘록한 허리, 부푼 가슴을 차례로 쓰다듬었다. 만져도 만져도 부족한 느낌이었다. 예전엔 닿는 대로 튕겨 오는 그녀의 반응이 좋아서였지만 지금은 그녀의 모든 것이 제 것이라는 것을 느끼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유현주.”

“하앗…… 지원 씨.”

“당신 이제 완전히 내 거야.”

만나는 동안 도망간 적이 있던 것도 아닌데 그는 끊임없이 확인하고 싶었다. 쾌감에 신음만 뱉어 내던 현주도 그 말에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알아요.”

현주는 팔에 간신히 힘을 주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하, 더 못 참겠어.”

지원은 더 이상 안 되겠다는 듯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한없이 사랑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지그시 쳐다보는 그녀를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지원은 그녀의 입술에 거친 키스를 퍼부으며 거칠게 움직였다. 살결은 찰싹이며 부딪혔고 그녀의 가슴은 하염없이 흔들렸다.

“으앗, 하앗, 하아!”

자세를 바꿔 가며 해 볼 법도 했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오로지 위에서 모든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자신이 그녀와 함께 사랑을 나누고 있다는 사실, 그녀가 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에 온전히 기뻐하는 그녀의 얼굴까지 모두 확인하고 싶었다. 지원은 그녀의 다리를 제 어깨 위로 올리고 또 한 번 속력을 높였다.

“하앗, 지원 씨, 하, 좋아요…….”

현주는 이미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인지할 수도 없었다. 그저 본능이 이끄는 대로, 그가 이끄는 대로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지금 이 순간이 무척이나 행복하고 황홀하다는 것뿐이었다.

그것은 지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표정을 아끼지 않았고, 신음도 아끼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지원은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더, 더 안아 줘요.”

현주는 제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닿기를 바라며 진심을 전했다. 더 안기고 싶었다. 그의 소유가 되는 이 완벽한 순간을 더 깊고 강하게 느끼고 싶었다.

“걱정 마.”

지원은 만족스럽다는 듯 웃으며 답했다. 실로 불필요한 걱정이었다. 그는 그녀의 탐스러운 엉덩이를 살짝 쥐었다. 손에 딱 맞게 오동통한 촉감이 귀여워 미칠 지경이었다. 그는 다시 상체를 숙여 그녀의 가슴을 입에 물었다. 현주가 유독 예민해하는 부분이었다. 딱딱해진 그곳을 혀로 이리저리 굴리자 그녀는 또 한 번 몸을 꼬았다.

“지원 씨, 그, 그만……하고…….”

“응?”

“들어와요…… 안아 줘요…… 네?”

조금 놀려 줄 작정은 했었지만 이렇듯 쉽게 솔직한 말을 해 줄 줄은 지원도 예상하지 못한 바였다. 그는 조용한 방 안을 울릴 만큼 큰 소리로 숨을 삼켰다.

지원은 양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잡았다. 그녀가 원했으니 도망갈 틈은 주지 않을 작정이었다. 멈춰 있던 허리를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움직이는 대로 그녀의 엉덩이도 들썩였다. 지원이 한 손으로 탱탱한 엉덩이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아앗!”

“예뻐, 당신 엉덩이.”

지원은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허리 밑에서 전해지는, 그녀의 몸이 전하는 완전한 쾌락에만 집중할 뿐이었다. 침대가 흔들렸다. 질척이는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현주는 제 몸이 관통되는 것 같은 새로운 충격을 느꼈다. 여과 없는 그의 욕망과 마주한 기분이었다.

“하앗……! 앗!”

현주는 손톱을 세워 지원의 등을 움켜쥐었지만 지원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더 빨라질 수 없을 만큼 그의 움직임은 격렬해지고 있었다.

두 남녀의 숨소리가 한데 섞였다. 누구 하나 참거나 가리는 것 없이 적나라한 모습 그대로였다.

“으아아아…….”

지원이 마지막 신음을 토해 내자 현주 역시 절정의 끝에서 터져 나오는 신음을 뱉었다. 그와 함께할 때면 언제나 황홀경을 맛봤지만 오늘은 특별한 느낌이었다. 서로의 밑바닥에 고여 있는 모든 것을 본 느낌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하나가 된 느낌이었고, 만족스러운 순간이었다.

“후회하지 않을 거야.”

지원은 다짐하듯 그녀에게 속삭였다.

“하아…… 사랑해요.”

그녀는 그 말 외에는 할 말이 없었다. 그와 함께하는 동안 후회라는 것이 있을 리 만무했다. 지원은 그런 그녀가 사랑스럽다는 듯 이마에 키스를 했다.

“나도 사랑해. 행복하게 해 줄게.”

현주는 여전히 덜덜 떨리는 몸에 간신히 힘을 주며 그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귓가에 닿는 그의 심장 소리가 거칠게 울려 퍼졌다. 그의 품은 더할 나위 없이 따뜻했다.

결혼식까지 갈 필요도, 혼인 서약도 필요 없었다. 지금 이 순간만으로도 하나가 되었고 의심은 없었다. 새로운 시작의 완벽한 서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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