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시작
“오늘 월광 첫 방송인 거 알아요?”
“알지. 같이 볼까?”
침대 위로 늘어져 눈을 감은 그가 말했다.
“밤에 스케줄 없어요?”
“없을걸? 매니저가 양심이 있다면.”
“치, 매니저분 너무 잡지 말아요.”
“내 앞에서 다른 사람 편들지 마.”
작은 눈길에도 사랑이 넘치고 작은 관심에도 질투가 생겼다. 현주는 이불을 끌어 올리며 이른 아침 잠을 청했다.
지쳤던 탓인지, 긴장이 풀린 탓인지 둘은 아침부터 오후 두 시까지 내리 잠만 잤다. 그들을 방해하는 알람이나 매니저는 없었고 시간은 조용히, 느리게 흘렀다. 깨어난 그들은 서로의 편안해진 얼굴을 한참 동안이나 지켜본 후 나란히 세수를 하고 양치를 했다.
“밥 먹을까요?”
“응, 밥 먹자.”
“뭐 먹을래요?”
“아무거나.”
아무거나, 그 말이 얼마나 어려운 메뉴인지 그는 알까. 현주는 아랫입술을 쭉 내밀고 툴툴거렸다.
“아무거나가 뭐예요. 부담스럽게.”
그녀가 하는 음식이라면 무엇이든 맛있을 텐데, 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지만 이번엔 그녀의 뜻에 따라 주기로 했다.
“그럼 된장찌개.”
“또 된장찌개요?”
“이젠 좀 먹어 볼 때가 되지 않았나 싶어.”
그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하긴, 저도 이젠 좀 실력을 발휘할 때가 된 것 같아요.”
고개를 힘차게 끄덕인 그녀는 주방에서 식기와 재료들을 꺼냈다. 두부, 버섯, 김치, 감자 등이 펼쳐졌고 규칙적인 도마 소리가 이어졌다. 지원은 침대에 누워 방 밖으로 보이는 주방의 작은 실루엣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집이 작아서 좋네. 침대에서 요리하는 유현주도 보이고.”
앞치마를 두른 그녀의 뒷모습은 사진이라도 찍어 두고 싶을 만큼 소중했다. 저 모습 그대로 박제할 수는 없나.
“현주야.”
괜히 한 번 불러 보았다.
“현주야아―”
“왜요.”
“그냥.”
“심심하면 TV라도 봐요.”
어린애마냥 보채는 그는 참으로 성가신 존재였다. 뒤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걸 의식하다 보니 허리 한 번 제대로 굽히기도 민망했다.
“싫어. 당신 볼 거야.”
그는 고집스러웠고 그녀는 포기가 빨랐다. 뚝딱뚝딱 소박한 상차림이 점차 모습을 갖추며 집 안은 고소한 냄새로 가득해졌다.
지원은 문득 먼 미래의 어느 하루를 상상했다. 주방에 있는 그녀와 자신과 그녀를 조금씩 닮은 어린아이. 따뜻할 것 같았다. 누구에게나 허락된 가정의 따뜻함을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그로서는 상상만으로도 사치스러운 것 같았다.
“현주야.”
“금방이면 되니까 그만 보채요.”
“잠깐만 이리 와 봐.”
괜한 생각에 마음이 시려진 그는 그녀를 찾았다. 싸늘하기만 한 그에게 따뜻한 존재라곤 오직 그녀뿐이었다. 그녀는 그가 만난 사람들 중 가장 순진하고 그렇기 때문에 어리석었지만 그로 인해 따뜻했다. 미소를 걸친 그녀가 다가와 지원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왜요.”
“보고 싶어서.”
“뭐예요.”
“뭐긴.”
그는 손을 뻗어 가는 목을 감싸 쥐었다. 부드럽게 딸려 오는 그 느낌이 좋았다. 입술과 입술이 만나 또다시 온기가 충만해졌다.
“아, 너무 좋다.”
“…….”
“너 너무 좋아.”
분명한 고백에 현주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올려다보는 그의 눈이 아름다웠다. 팔불출.
“얼른 나와서 밥이나 먹어요.”
그녀는 주방으로 도망치듯 뛰어나갔다. 아쉬운 듯 따라 일어난 지원은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들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보글보글 된장찌개와 꽤 다양한 밑반찬들이 한눈에도 먹음직스러웠다.
“맛있겠다.”
“맛있게 먹어요.”
“응.”
그는 숟가락을 들어 찌개의 맛을 봤다. 눈썹을 꿈틀거리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은 그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밥도 크게 한 술 떠먹었다. 현주는 요리 대회라도 나온 사람마냥 안절부절 그의 입술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
“이야.”
그는 그런 그녀를 귀엽다는 듯 바라보며 짧은 탄성을 뱉어 냈다.
“이런 건 어디서 배웠어?”
“맛있어요?”
“응. 평생 나만 먹고 싶다.”
그제야 현주는 마음을 내려놓고 수저를 들 수 있었다.
“어머니한테 배운 거야?”
“요리요?”
“응, 요리하는 거.”
“음…… 엄마도 음식 솜씨가 좋으시긴 하죠. 근데 배운 적은 없어요. 그냥 자취하면서 자연스럽게 익힌 거예요.”
지원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부모님 중 어느 분을 더 닮았어?”
현주는 허공을 쳐다보며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누구를 더 닮았을까. 장난스럽고 다정한 아빠와 애교가 넘치는 엄마, 누구지?
“글쎄요. 두 분 다 조금씩 닮은 것 같은데.”
“외모는?”
웬 호구조사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질문이 많았다.
“엄마요. 엄마도 저처럼 눈이 처져 있거든요.”
“미인이시겠다.”
“방금 그 말 우리 엄마가 들으면 하루 종일 기분 좋아하실 텐데. 우리 엄마, 지원 씨 팬이거든요.”
“그래?”
현주는 종알종알 말을 이었다. 지원은 척 봐도 그녀의 가족이 단란하고 화목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족을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선 시종일관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자리 만들어 줘.”
그는 짐짓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무슨 자리요?”
“팬 미팅 자리. 당신 어머님이랑.”
현주는 순간 손에 쥔 숟가락을 놓칠 뻔했다. 남자친구를 부모님에게 소개하는 것 정도는 큰일이 아니었지만 ‘그’를 부모님에게 소개하는 것은 큰일이었다. 그는 자신이 ‘김지원’이라는 사실을 종종 까먹는 듯 보였다.
“미쳤어요?”
그녀가 물었다.
“내가 당신 부모님 만나는 게 미친 짓이야?”
지원은 진득한 눈빛으로 되물었다. 맑고 검은 눈동자가 오롯이 그녀를 비추고 있었다.
“아버님, 어머님도 아셔야지. 딸의 연애 소식을 인터넷으로 전하는 건 너무 불효 아니야?”
“아.”
현주는 그제야 공개연애를 떠올렸다. 아무리 일반인이라고 신상을 밝히지 않더라도 아는 사람은 알게 될 것이었다. 삼면이 바다인 이 나라에 비밀이란 것이 존재했던가. 그녀의 망설임에 지원은 씩 웃으며 물었다.
“반대하실까 봐 걱정돼?”
현주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원은 괜찮다는 듯 손을 뻗어 그녀의 작은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몇 대 맞을 각오는 하고 있으니까 걱정 마. 나 맷집 좋아.”
“무슨 소리예요?”
“응?”
현주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지원 씨 부모님 얘기하는 거였어요.”
“우리 부모님?”
“네. 내가 지원 씨 같은 아들 있었으면 어떤 여자가 와도 아까울 것 같단 말이에요.”
지원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고작 그게 걱정이야?”
“당연하죠. 고부갈등이라는 말이 괜히 있어요?”
“…….”
“우리 부모님은 걱정 말아요. 내 남자친구가 지원 씨라고 하면 엉덩이 토닥이면서 태어나 가장 잘한 짓이라고 칭찬할 테니까.”
지원은 못 말린다는 듯 배를 잡으며 웃었다. 또한 부디 그 말이 사실이 될 수 있기를 바랐다.
* * *
“우와 한다, 한다! 지원 씨 얼른 이리 와요!”
“알았어, 알았어.”
저녁이 되고 기다리던 시간이 왔다. 지루한 광고가 몇 개 지나가고 공들여 찍은 오프닝이 시작됐다. 웅장한 사운드와 세련된 영상미, 쓰리버튼 슈트를 입은 지원이 나타났다.
“우와―”
“뭐가 그렇게 자꾸 우와야.”
“저 남자 진짜 멋있다.”
“저 남자 지금 당신 옆에 있거든.”
“뭐래요. 난 연석이 말한 건데.”
그 말에 지원은 리모컨을 뺏어 TV 전원을 끄려고 했다. 그녀는 그의 팔에 매달려 온갖 애교를 부리고 나서야 리모컨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지원 씨, 나 지금 너무 떨려요.”
현주는 지원의 손을 잡아끌고 자신의 왼쪽 가슴에 올려놨다.
“완전 두근두근해요.”
잔뜩 흥분한 그녀의 얼굴은 소녀처럼 싱그러웠다. 지원은 자신이 데뷔할 때도 저런 간절함과 열망을 갖고 있었는지에 대해 떠올렸다.
생각이 채 끝나기 전에 드라마는 시작됐다. 연기파 원로 배우들의 열연은 극의 무게를 더했고, 정교한 세트는 비운의 아름다운 시대를 만들어 냈다. 지원과 민서의 호흡은 훌륭했고, 연석과의 조화는 더할 나위 없었다.
“와, 리딩 때랑은 또 다르네요.”
“마음에 들어?”
“완전히요. 배우는 배우인가 봐요. 다들 캐릭터로 보이는 거 보면.”
지원은 자신이 나오는 작품을 다른 누군가와 함께 본 적이 없었다. 민망하기도 했고 다른 누군가의 반응이 궁금하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원 씨 연기 진짜 잘한다. 캐릭터는 내가 만들었는데 숨은 지원 씨가 불어넣었네.”
그럼에도 그녀의 반응은 17년 연기 경력에 자극을 줄 만큼 흥미로웠다.
“고마워.”
“평생 연기해요. 천직인 것 같아.”
단막극인 만큼 리듬은 빨랐고 그만큼 흥미진진했다. 엔딩도 딱 궁금해서 미칠 만큼 절묘하게 끊어져 감탄스러웠다. 현주는 재빨리 핸드폰을 들어 피디의 연락처를 찾았다.
“피디님!”
그녀는 한참이나 격양된 목소리로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통화가 끝나도 한참이나 방방 뜬 그녀를 보며 지원이 말했다.
“그렇게 좋아?”
“네. 고생했던 게 다 사라지는 기분이에요.”
“축하한다는 말은 내일 다 끝나고 할게.”
“미리 고마워요.”
현주는 폴짝폴짝 뛰며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오늘 만큼은 마음껏 축배를 들고 싶었다. 시청률이고 반응이고 지금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꿈에 한 발자국 나아간 것에 의미를 두고 싶었다. 지원은 그런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지나간 약속을 상기시켰다.
“내기 기억하지?”
“내기요? 아, 회식 때 한 거!”
“내일 시청률 나올 거야. 각오는 돼 있어?”
“지원 씨는 각오 돼 있어요?”
그는 악마처럼 웃었다.
“난 절대 질 리 없어.”
“무슨 소리예요?”
“가장 큰 오차를 내는 사람이 지는 거잖아. 난 이연석이랑 당신 사이에 있는데 가장 큰 오차를 낼 리가 있겠어?”
그랬다. 그는 절대로 질 리 없었다. 현주는 불현듯 억울한 감정에 휩싸였다.
“아, 뭐예요. 내기 무효야.”
“한 입으로 두말하지 마.”
“아, 억울해.”
“그러니까 술 마시지 마. 술은 사람을 바보로 만들어.”
그는 이미 생각한 소원이 있는 듯 보였다. 태생적으로 오만하기 짝이 없는 그의 얼굴은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 * *
믿을 수 없는 숫자, 믿을 수 없는 기쁨.
“으아악!”
아침을 가르는 그녀의 비명에 지원은 사색이 되어 침실을 뛰쳐나왔다.
“무슨 일이야?”
“지, 지원 씨…….”
“어, 말해. 왜.”
그는 혹시라도 그녀에게 무슨 좋지 않은 일이라도 생긴 것인가 싶어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큰 손이 그녀의 조그만 양 볼을 가볍게 감싸 쥐니 그제야 그녀는 탄성의 이유를 뱉었다.
“14.7프로예요.”
“어?”
아, 시청률. 지원은 허무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졸린 눈을 비볐다.
“그거 때문에 지금 온 집 안이 떠나가라 소리 지른 거야? 간만에 자는 나도 깨우고?”
“지원 씨는 안 놀라워요? 10프로를 넘겼는데?”
“뭐…….”
“단막극이 10프로 넘는 일은 거의 없잖아요. 와, 잠깐만요. 나 엄마한테 전화 좀 할게요.”
현주는 잔뜩 흥분한 채 핸드폰을 들고 침실로 들어갔다.
“내기에서 진 거는 알고 저렇게 흥분한 거야?”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애초부터 그렇게 될 운명이었던 것인지 단막극 ‘월광’의 고공행진은 그간의 잡다한 스캔들을 불식시킬 만큼의 저력을 과시했다. 대망의 첫 화는 김지원의 브라운관 신드롬을 일으키며 14.7퍼센트로 역대 단막극 시청률의 최고치를 달성했고 동시 다발적인 언론들의 방정은 마지막 화의 시청률 역시 17.3퍼센트라는 어마어마한 수치를 기록하게 했다.
* * *
지원은 지금 한 시간째 그의 드레스 룸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흰색 옷장과 깔끔하게 정리된 신발들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는 쉽사리 무엇을 선택하지 못했다. 평소의 그는 확고한 스타일이 있는 사람이라 옷을 고르는 데 있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지만, 오늘만큼은 유독 긴장이 돼서 결정 장애가 지속됐다. 그에겐 이럴 때 찾을 수 있는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 여보세요오.
짧은 신호음과 함께 그녀의 애교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못하겠어. 이리 좀 와 봐.”
― 에이, 또 뭐가 문제예요. 어제 그렇게 얘기해 놓고.
“아니야,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어. 지금이라도 옷 좀 살까?”
그녀의 깊은 한숨 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전해졌다.
― 여보세요, 김지원 씨. 당신은 뭘 입어도 멋져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얼른 옷 고르고 나와요.
“아버님이 나 싫다고 하시면 어떡해?”
― 내가 지켜 줄게요.
“전혀 안심이 안 되는데.”
― 그런 말 하기엔 늦었어요. 이왕 한배 타기로 한 거 나 좀 믿지 그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원은 한참을 더 망설였고 결국 현주는 차에서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의 집까지 올라왔다. 드레스 룸 안에는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지원이 있었다.
“우리 애인, 갑자기 바보가 됐나.”
“아버님이 어떤 스타일 좋아한다고 했었지?”
“그 질문만 어제부터 백 번 정도 한 거 알아요?”
“아…… 나 진짜 바보 됐나 봐.”
그 많던 자신감과 확신은 어디로 던져 놓은 것인지 알 수 없을 만큼 그는 떨고 있었다. 미래의 장인, 장모에게 인사드리러 가는 역할을 왜 해 보지 못한 것인지에 대한 후회도 새벽 내내 거듭한 그였다.
이해는 할 수 있었다. 그로서는 살아생전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이니까. 결국 지원은 현주가 골라 주는 얌전한 슈트와 넥타이, 구두를 저항 없이 받아 입고 거울 앞에 섰다.
“괜찮아?”
“완전 멋있어요.”
그녀가 엄지손가락을 들어 과장된 칭찬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숨을 내쉬며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딴따라는 싫다고 하시면 어떡하지.”
‘별 걱정을 다 한다, 정말.’
현주는 구시렁거리며 농담을 던졌다.
“은퇴한다고 해요.”
“그 대답도 염두에 두고 있어.”
그는 농담이 아닌 듯했다. 현주는 더 참을 수 없다는 듯 그의 어깨를 쥐고 강하게 말했다.
“아무 걱정 말아요. 그럴 일 없겠지만 혹시 반대하시더라도 은퇴한다는 소리는 하지 말아요.”
“왜?”
“난 지원 씨가 연기하는 거 좋아요. 앞으로 내 작품에 계속 출연해야죠.”
“얼씨구, 시청률 맛 좀 봤나 봐?”
뻔뻔한 현주 덕분에 그의 긴장은 조금 풀린 듯했다. 그녀의 본가는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경기도 외곽이었다. 차로 고작해야 한 시간 반 정도 걸리는 동안에 그녀의 어머니는 끝도 없이 전화를 걸었다.
“엄마, 이번엔 또 왜요.”
― …….
“아, 그렇게까지 안 하셔도 돼요. 그냥 인사만 드리러 가는 거라니까?”
― …….
“어휴, 엄마 마음대로 하세요. 거의 다 왔어요. 네. 네―”
짧은 통화를 마친 그녀는 재미있다는 듯 계속해서 웃었다.
“어머님이 뭐라셔?”
“엄마도 긴장되시나 봐요. 씨암탉이라도 삶아야 하는 거 아니냐고 난리네요. 남자 친구 소개하러 가는 건 처음이거든요.”
지원은 더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와 반대로 현주는 한껏 즐거운 표정이었다. 누군 온 사지를 떨며 힘겨워하는데 여자 친구란 사람은 까짓것 될 대로 되라는 것 같았다.
“당신은 왜 안 떨어? 혼자 떨고 있는 나 억울하게.”
“내가 떨 게 뭐 있어요. 맞아도 지원 씨가 맞을 텐데.”
“…….”
“그나저나 남자 친구가 지원 씨라는 거 알면…….”
현주는 상상만 해도 기대된다는 듯 어깨춤을 추었다. 얄미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늘만큼은 지원은 을이요, 현주는 슈퍼 갑이었다.
둘은 조용한 동네의 아파트 단지로 들어섰다. 주차를 하고 내린 둘은 뒷좌석에 얌전히 앉아 있는 과일 바구니와 한우 세트, 꽃다발을 내리느라 낑낑거렸다.
“뭘 이렇게 많이 샀어요?”
“뭐 다들 이렇게 하길래.”
“다들? 주변에 여자 친구 집에 가 본 사람 있어요? 재경 씨도 그런 경험은 없을 것 같은데.”
“어, 뭐. 영화에…….”
그는 창피한 듯 고개를 돌렸지만 현주는 그때를 놓치지 않았다.
“영화까지 봤어요? 이야, 이따가 무슨 말 하는지도 다 봐야겠네. 인상 깊었던 대사가 뭐예요?”
지원은 울상이 되어 이마를 구겼다.
“그러지 마. 당신까지 내 편 아니면 나 죽어.”
“거참 살벌하시네. 농담이에요, 농담.”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숫자도 오르고 심장박동 수도 올랐다. 지원은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허락을 받겠다는 다소 신파적인 각오를 하고 있었고 현주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사진으로 남겨 놓지 못하는 것에 매우 안타까워했다.
딩동― 딩동―
후다닥, 현관문 안쪽에서 달려 나오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 누구세요―?
고상하게 포장된 잔뜩 흥분된 목소리가 들렸고 현주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딸이니까 얼른 열어 줘요. 팔 떨어져!”
― 아, 그래그래.
드디어 문이 열리고 현주는 쏙 들어가 고급스럽게 포장된 한우세트를 엄마에게 건넸다. 사실 그녀의 부모님은 오랜만에 만나는 딸이고, 한우고 다 필요 없었다. 어서 이 못난 딸을 좋다고 만난다는 남자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들의 눈이 현관문 바깥에 고정되어 있을 때 지원은 걸음을 당겨 모습을 드러냈다.
“…….”
“아버님, 어머님. 처음 뵙겠습니다. 김지원이라고 합니다.”
“어……?!”
지원은 상당히 당황스러워 보이는 그녀의 아버님께 과일 바구니를 건네고 현주를 닮은 그녀의 어머님껜 소담한 꽃다발을 건넸다.
“어머님이 꽃을 좋아한다고 하셔서요.”
“아…… 고, 고마워요.”
그녀의 부모님은 눈앞의 현실을 믿을 수 없어 서로의 눈치만 살피다 말을 뱉지 못했다. 보다 못한 현주가 아직 구두도 벗지 못한 지원의 팔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이 사람 계속 세워 둘 거예요?”
그제야 그녀의 어머니는 황홀한 표정으로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어? 아니지. 아니지. 어서 들어와요. 밖에서 만날 걸 그랬다. 집이 좀 누추하죠?”
현주는 콧방귀를 끼며 어깨를 들썩였다.
“누추는 무슨. 내가 본 우리 집 중 제일 좋아 보이네. 뭔 냄새예요, 이건? 집에 향수 뿌렸어요?”
“아이참, 넌 좀 가만히 있어.”
현주와 그녀의 어머니가 서로의 애정을 티격태격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 동안 그녀의 아버지와 지원은 진중한 자세로 악수를 했다.
“우리 딸이 만난다는 사람이 설마 김지원…… 자네일 거라고는 생각을 못 해서……. 너무 놀라서 그런 거니까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게.”
“아닙니다. 아버님.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
어쩔 줄 모르는 분위기를 어떻게든 희석시키기 위해 주방으로 갔는데 그곳은 더 가관이었다. 정말 씨암탉이라도 잡은 것인지 백숙 한 마리와 소갈비찜, 잡채는 물론이고 생전 처음 보는 접시와 그릇들이 가득했다.
“우와, 엄마 고생했겠다. 이거 혼자 다 하셨어요?”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에겐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지원을 향한 눈을 빛내며 그에게 다정한 물음을 던졌다.
“자네라고 불러도 되나? 아니면 기, 김 서방? 어떻게 불러야 되는지를 모르겠네.”
“김 서방은 무슨. 우리 엄마 너무 앞서 나가신다.”
부끄러워 괜한 투정을 부리는 현주의 팔을 다정하게 잡은 지원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상냥하게 답했다.
“어머님 편하신 대로 불러 주십시오. 저는 뭐든 괜찮습니다.”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현주가 알려 주는 것도 없고…… 음식이 입에 맞을까 모르겠네.”
“가리는 음식 없으니 걱정 마십시오, 어머님. 잘 먹겠습니다.”
현주는 어이가 없었다. 지원에게만 관심이 팔린 엄마도 엄마였지만 어색한 미소로 나름 괜찮은 대화를 이어 나가는 지원도 흥미로웠다. 막상 식사를 시작했을 땐 엄마보다 아빠의 질문공세가 더 강했다.
“둘이 이번 드라마 하면서 만나게 된 건가?”
“네, 첫 미팅 때 한눈에 반해서 제가 먼저 고백했습니다.”
그는 현주가 짠 시나리오대로 아주 훌륭하게 대답하고 있었다. 아무리 개방적인 집 안이라고 해도 원나잇으로 만났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
“어휴, 우리 딸이 첫눈에 반할 미모는 아닌데. 취향 독특하네.”
“아, 아빠!”
“알았어, 알았어.”
지원은 그녀의 가족 전체가 뿜어내는 따뜻하고 다정한 분위기에 차츰 마음을 놓았다. 그가 김지원이라는 사실에 촉각을 세우는 것 역시 현관문 앞에서 잠시 뿐이었다. 굳이 애쓰지 않아도 그들은 지원을 배우 김지원이 아닌 한 사람으로 보고 있었다. 지원 역시 기대에 부응하며 밥그릇을 두 번이나 뚝딱 비워 냈다.
“입도 짧은 사람이…… 그만 먹어요!”
현주가 초를 좀 치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괜찮았다. 식사 시간은 유하게 잘 흘렀고 차를 마시며 간단한 다과를 나눌 때 지원은 무릎을 꿇고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현주 역시 잠깐 눈치를 보더니 함께 무릎을 꿇었다.
“아니 왜…….”
갑작스러운 전개에 당황한 그녀의 부모님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아버님, 어머님, 정식으로 교제 허락받고 싶습니다.”
지원에겐 어젯밤 수십 번도 더 연습했던 말들이 있었지만 다 무용지물이었다. 머릿속은 하얘졌고 입술은 제멋대로 마음속 이야기를 꺼냈다.
“가벼운 만남이라면 이렇게까지 간절하지 않았을 겁니다. 제가 처음으로 믿고, 절 처음으로 믿어 준 사람이 따님입니다.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현주 곁을 지킬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현주는 가만히 그의 진실한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부모님 역시 한껏 다정한 얼굴로 그의 긴장된 모습을 지켜봐 주었다.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지원은 고개를 숙였고 현주는 제 부모의 눈치를 살피며 따라 입술을 열었다.
“나, 나도…… 지원 씨 진심으로 사랑해요.”
이미 허락이고 뭐고 불필요해진 마당이었지만 지원과 현주는 진지했다. 지금부터 부탁드릴 것이 진짜였기 때문이었다.
“제가 하고 있는 일이 숨기고 싶어도 숨길 수 없는 일이라 알려지기 전에 제가 저희의 만남을 공개하고 싶습니다. 그 과정에서 분명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 부분도 있을 겁니다.”
“…….”
“그래도 믿어 주십시오. 절대 현주를 다치게 하지 않겠습니다.”
그저 그의 잘생긴 얼굴과 깍듯한 예의에 감탄하고 있던 그녀의 부모님은 그제야 둘의 연애가 어떤 무게를 갖고 있는지 생각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당장에 근심 어린 얼굴을 띠었다.
“현주 너도 동의한 거야?”
“응, 엄마. 나도 그러고 싶어요.”
남자의 굳은 결의, 여자의 오롯한 믿음은 그들의 부모님이 와도 깰 수 없는 것이었다. 지원은 덧붙여 부모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가볍게 하려 노력했다.
“공개하더라도 이름이나 직업 같은 것들은 밝히지 않을 예정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럼 굳이 왜…… 계속 숨겨도 될 텐데.”
“저희 둘만이라도 당당하고 싶습니다. 또…….”
그는 현주의 손을 가만히 쥐었다.
“제 사람이 불안해하는 걸 더 보고 싶지 않습니다.”
* * *
부모님의 집에서 나오자마자 그는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지금부터 내보내면 돼.”
열애 소식을 전하는 기사를 내보내라는 것이었다. 이미 그의 측근 기자들과는 연락이 된 상태였고 기사의 내용 역시 수많은 스크립트 속에서 고르고 고른 것이었다. 전화를 끊은 지원은 현주의 손을 깍지 껴 잡았다.
“당신 이제 나한테 완전히 묶였어. 소감이 어때?”
“지원 씨도 나한테 묶인 거잖아요. 소감이 어때요?”
“황홀해.”
닭살 돋는 애정행각은 차 안에서도 이어졌다. 지원은 그녀의 손을 끌어 핸들 위에 올려놓고 손을 포개어 운전했다. 지나가던 솔로가 오열할 정도로 너무한 광경이었다.
“나 마음에 드셨을까?”
“마음에 드니까 허락을 했죠. 네 살 차이는 궁합도 안 본다고 난리였잖아요. 잘 하던데요?”
“나?”
“네. 벌벌 떨다가 아무 말도 못 할까 봐 완전 걱정했는데. 나름 괜찮았어요.”
“몇 점?”
“한…… 80점?”
인심 썼다는 듯 거만한 표정을 지은 현주는 손가락 여덟 개를 펴고 그를 놀렸다.
“80점밖에 안 돼?”
“우리 아빤 엄마 옆에 잘생긴 남자 있는 거 싫어하거든요. 그래서 20점 감점.”
“나 참.”
“뭐 어쩌겠어요. 딸이 눈이 워낙 높아서 이렇게 멋진 남자를 골랐는데. 안 그래요?”
현주는 행복하다는 듯 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그래.”
그도 행복해 보였다.
* * *
이름이고 뭐고 아무것도 밝힌 것은 없었지만 기사가 났다는 것만으로도 둘은 무거운 족쇄에서 해방된 기분이었다. 부모님의 집에서 나와 곧장 그의 집으로 향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더는 숨을 필요도, 두려워할 이유도 없었다.
“준비됐어?”
“음…… 모르겠어요.”
지원은 일부러 지하 주차장이 아닌 지상 주차장에 차를 주차했다. 이미 그의 아파트 주변엔 기자들이 가득했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지원이 벌벌 떨었는데 이젠 그녀가 벌벌 떨며 창밖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괜찮아.”
지원은 다정하게 속삭이며 자신의 선글라스를 그녀에게 씌웠다.
“고개 숙이지 마, 나만 믿어.”
그는 그렇게 말하며 차에서 내렸다. 그가 내리자마자 미친 듯이 터지는 플래시가 그녀에게도 느껴졌다. 지원은 그런 기자들에게 형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현주 쪽 차 문을 열었다. 현주가 차에서 내리고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러곤 몰려드는 기자들을 향해 정중한 양해를 구하고 마치 경호원처럼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세간의 관심과 벌 떼 같은 시선을 피해 집 안으로 들어가기까지 고작해야 3분이었다. 고작 이 3분을 위해 그와 그녀는 인생 도박을 했다.
“기자분들 언제까지 저러고 계실까요?”
“금방 갈 거야. 내 사진도 찍었고 당신 사진도 충분히 찍었을 테니까.”
“발가벗겨진 것 같네요.”
“무서워?”
아니라면 거짓말이었다.
“조금?”
지원은 겪지 않아도 될 것들을 겪고 있는 그녀가 안쓰러웠지만 이미 선택한 것이었고 이겨내야 할 것들이었다.
“익숙해진다는 말은 못 하겠다. 아마 평생 익숙해지지 않을 거야.”
“그거 엄청 무서운 말이네요.”
“대신 평생 내가 옆에 있을게.”
“…….”
요즘 들어 그는 자꾸만 평생이니, 영원이니 같은 말들을 거듭했다. 반복되니 새겨듣게 되었고 새겨듣다 보니 무슨 의미가 있는 건가 싶었다. 한 번 물어볼까 싶었지만 그가 더 빨랐다.
“아, 나 할 말 있어.”
“뭐, 뭐요?”
괜히 긴장한 그녀가 물었다.
“우리 내기 있잖아.”
맥이 탁 풀렸다. 그는 그런 그녀와 상관없이 짓궂은 표정과 매력적인 미소로 말을 이었다.
“당신 두 번 다 진 거 알아?”
“알아요.”
“소원 언제 들어줄 거야?”
“소원이 뭔데요?”
그는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 갈아입을 옷을 찾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음…… 오빠라고 불러 봐.”
“네?”
“당신 나보다 네 살이나 어리잖아. 왜 오빠라고 안 해.”
어쩜 이리도 유치한지. 현주는 볼에 바람을 가득 넣으며 투덜거렸다.
“오빠는 무슨.”
“왜, 내가 아저씨 소리 들을 나이는 아니잖아. 이제 겨우 서른둘인데.”
“그냥 지원 씨라고 부를래요.”
“왜?”
“그게 더 편해요.”
흰색의 편한 티셔츠로 갈아입은 그는 엄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이마에 가벼운 꿀밤을 주었다. 곧게 뻗은 그의 쇄골이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냈다.
“누가 당신 의견 물어봤어?”
“…….”
“이긴 건 나야. 당신은 내 뜻대로 해야지.”
“치. 못됐어.”
그깟 오빠라는 말이 뭐 대수라고, 그냥 한 번 해 줄 법도 했지만 현주는 알 수 없는 심통에 쉽사리 말을 뱉지 못했다. 지원은 그런 그녀의 양손을 쥐며 말했다.
“오빠란 말 싫으면 두 번째 소원이라도 들어줘.”
“두 번째 소원은 뭔데요.”
지원은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
그러곤 주머니에서 꺼낸 반짝이는 작은 것을 그녀의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웠다.
“딱 맞네.”
깨끗했던 그녀의 손가락 위엔 무거운 이물감과 함께 화려하게 커팅된 보석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찬란함에 현주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창문으로 쏟아지는 태양빛이 그녀를 눈부시게 하는 것인지, 차오르는 눈물이 안 그래도 빛나는 반지를 더 빛나게 보이도록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지원 씨…….”
“사랑해.”
“…….”
“평생 함께 있자. 내가 잘할게.”
그제야 현주는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잘나가는 한류 스타인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일, 그와 함께 부모님을 만나고 온 일 모두가 비현실적이었지만, 그중 가장 으뜸은 지금 이 순간, 그가 청혼했다는 사실이었다. 현주는 그와 처음 만났던 날, 연석과 함께 영화관에서 마주한 날, 마음을 확인했던 파리까지 모든 날이 떠올랐다. 눈물이 끊임없이 흘렀다.
“뭐예요……. 흐흑, 놀랐잖아요.”
그는 그런 그녀를 사랑스럽다는 듯 꼭 껴안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놀라긴 뭘 놀라. 내가 티를 얼마나 냈는데.”
“…….”
“둔하기는.”
지원은 제 품에 안겨 우는 그녀의 볼을 감싸며 다시 물었다.
“얼른 대답해.”
“…….”
“두 번째 소원 들어주면 첫 번째 소원은 없는 셈 쳐 줄게.”
“치, 뭐 꼭 대답을 해야 아나.”
현주는 고개를 들어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 그의 입술이 둥글게 말리며 웃는 것이 느껴졌다. 사랑스럽다. 사랑스럽고 사랑스러워서 숨이 막히고 마음이 어지럽다.
“사랑해.”
“나도 사랑해요.”
사랑의 서약은 결혼식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 * *
한참을 울어 엉망이 된 얼굴이었지만 나가는 것을 미룰 수는 없었다.
“몇 시라고 했죠?”
“일곱 시. 십 분 뒤에 나가야 돼.”
오늘은 드라마 ‘월광’의 종방연이 있는 날이었다. 2부작이어서 촬영 마지막 날이 마지막 회식과 다름없었지만 전에 없던 성공을 거둔 참이라 모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거 입어.”
적당히 편한 차림으로 멋을 낸 그는 현주에게 쇼핑백 하나를 건넸다. 반지를 낀 그녀의 손이 그것을 받아 들었다.
“이게 뭐예요?”
“선물.”
“옷이에요?”
“응, 예뻐서 샀어. 갈아입고 나와.”
오늘은 선물이 많았다. 부모님의 허락, 세상에서 제일 예쁜 반지, 영원을 위한 약속 그리고 새 옷까지. 현주는 쇼핑백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안엔 심플한 흰색의 원피스가 있었다.
“가만 보면 흰색 엄청 좋아한다니까.”
그가 선물했던 속옷도 흰색이었다. 아무래도 결벽증인 것이 확실했다. 결혼하면 청소로 엄청 잔소리하는 거 아냐? 란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입어 보니 디테일한 부분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깨선을 감싸는 자수, 허리를 묶는 비즈 장식까지 하나같이 전부 예뻤다.
“짠! 어때요?”
‘어떻긴 어때, 여신 같지.’ 이런 멍청이 같은 말을 차마 뱉을 수 없었던 그는 칭찬 대신 또 다른 선물을 건넸다.
“이건 또 뭐예요?”
“구두.”
“네?”
“그 옷에 운동화 신을 순 없잖아.”
그가 건넨 건 고급스러운 구두 상자였다. 상자를 여니 검은색 가죽에 반짝이는 크리스탈로 장식된 토오픈 구두가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현주는 그렇게 조각처럼 완벽한 구두를 처음 봐서 넋을 잃고 눈을 빛냈다.
그런 그녀를 이끌어 소파에 앉힌 그는 구두 매장의 직원이 된 것처럼 직접 무릎을 꿇고 신겨 주었다. 그러곤 팔을 뻗어 그녀의 목을 끌어당겼다. 그와 그녀의 입술이 살짝 닿았다 떨어졌다.
“당신 멋대로 살게 해 줄게.”
“…….”
“꽃길만 걷게 해 줄게.”
“…….”
“행복하게 해 줄게.”
“지원 씨, 정말…….”
현주는 또다시 밀려드는 눈물로 몸을 떨었다. 반짝이는 옷, 반짝이는 구두, 반짝이는 반지, 무릎 꿇은 세상 가장 반짝이는 그. 모든 것이 완벽했다. 이 세상 그 어떤 신데렐라도 그녀만큼의 마법을 누리지는 못할 것이다.
“당신은 고개만 끄덕이면 돼.”
김지원이란 마법은 딱 한 사람에게만 허락되는 것이었으니까.
* * *
종방연은 가히 축제의 장과 다를 것이 없었다. ‘월광’의 성공도 성공이었지만 지원의 공개연애 소식에 모든 스태프들이 기자를 자청했기 때문이었다.
“어떤 여자예요? 지원 씨를 차지한 사람이?”
“와, 연애하고 있었으면서 감쪽같이 우릴 속이다니!”
“사진 없어요? 무슨 일 하는 사람이에요?”
지원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정신이 없었다. 평소 차갑기만 한 그의 분위기 때문에 사람들은 다가가는 것을 두려워했지만 열애 소식 덕분에 그도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 같았다.
사람들은 스스럼없이 그에게 다가갔고 지원도 그것을 딱히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현주는 얌전히 무리에서 떨어져 그 모습을 뿌듯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좋아요?”
소리 없이 다가온 연석이 물었다. 이 자리에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니 궁금할 것도 없을 것이었다.
“응, 좋아.”
“누나가 좋다니 나도 좋다. 저번에 누나 울어서 속상했는데.”
“아, 맞다. 그랬지. 미안. 내가 철이 없어서…….”
연석은 미안해하는 그녀를 괜찮다는 듯 부드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선배가 준 거예요?”
그는 그녀의 손에서 빛나는 반지를 보며 물었다. 현주는 부끄러운 듯 손가락을 오므리며 수줍게 웃었다.
“아, 응. 오늘 받았어.”
“……지원 선배는 뭐든 빠르네요. 그래야 저 자리까지 오를 수 있는 건가.”
연석은 고개를 돌려 사람들에게 압사당하기 직전인 지원을 바라보았다.
“아, 선배 소원은 들어줬어요?”
현주는 이번에도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가락을 펴 보이는 것도 잊지 않은 채. 연석은 특유의 싱그러운 미소로 호탕하게 웃었다.
“우리 누나, 완전 낚였구나.”
“응, 완전 낚였어. 너도 알았어? 지원 씨가 내기에서 질 수 없다는 거?”
현주는 아직도 억울한지 입술을 내밀며 말했다. 연석은 그런 그녀를 씁쓸하게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알았어?”
“네.”
“근데 왜 했어?”
현주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연석은 어깨를 으쓱이며 빈 잔에 술을 따랐다.
“중요한 건 지원 선배가 아니니까요. 난 누나한테 소원 들어 달라고 하고 싶었거든요.”
“아, 진짜? 소원이 뭐였는데?”
연석은 턱을 괴며 그녀의 궁금증 가득한 눈동자를 살폈다.
“비밀이에요.”
“에이, 말해 봐. 내가 들어줄 수도 있잖아.”
“누난 못 들어줘요.”
“왜? 그렇게 엄청난 소원이었어?”
눈치가 없는 건지 사랑에 눈이 먼 건지.
“내가 이겼어도 누나가 힘들다 하면 금방 포기했을 거예요. 그러니까 어쩌면…… 이게 더 잘 된 일일지도 몰라요.”
“…….”
“누나 행복했으면 좋겠다.”
“치, 싱겁기는.”
“행복해요, 누나. 그게 내 소원이야.”
연석은 여름바람 같던 제 애정을 그렇게 묻어 두기로 했다. 봄바람처럼 따뜻하거나 겨울바람처럼 강철 같지는 않았지만 무엇보다 청량하고 매 순간 간절했던 그 마음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늘 어느 방향에서나 불어오는 바람이 아닌 열병 같은 사랑이 그에게도 찾아올 거라 믿었다.
“아, 민서 씨는 왜 안 온 거야?”
모든 배우들이 모인 종방연에 민서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를 보지 못해 현주는 무척이나 아쉬웠다. 걱정했던 것 이상으로 잘 연기해 줘서, 작품을 많이 아껴 줘서 고맙다고 꼭 인사하고 싶었는데. 연석은 누구보다도 민서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도저히 시간을 못 내겠다고 연락 왔었어요. 누나한테도 미안하다고 전해 달래요.”
“아쉽다…….”
“금방 마음 정리할 거예요.”
“응?”
“지원 선배 좋아했었잖아요. 선배가 공개연애까지 하는 마당에 여기 오는 건 힘들었을 거예요. 스캔들도 났었고. 프로답지 못하다고 탓하지 말아요. 그건 누구도 욕할 수 없는 마음이니까.”
연석은 스스로에게 위로하듯 말을 이었다.
“에이, 누가 욕한다고 그래. 그냥…… 그렇게까지 지원 씨 좋아하는지는 몰랐네.”
현주는 괜히 죄책감이 느껴져 마음이 무거워졌다. 고개가 숙여질 찰나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 자리 옮기자고!”
벌써 2차를 가려는 모양이었다. 사람들 무리에 꽁꽁 감춰져 있던 지원이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연석이 그를 향해 먼저 말을 건넸다.
“선배님, 축하드려요. 누나한테 직접 얘기 들었어요.”
지원은 무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맙다.”
“여러모로 닮고 싶어요, 선배.”
연석은 그렇게 지원을 지나쳐 사람들 무리에 흡수됐다. 지원은 미간을 구기며 현주의 귓가에 속삭였다.
“저 새끼는 뭘 해도 마음에 안 들어.”
“질투해요?”
“질투가 아니라 불쾌한 거라니까.”
“알았어요, 알았어. 그게 뭐가 다른 건지 나는 도통 모르겠네.”
현주는 웃었고 지원은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각자 차를 타고 2차 장소에서 모이기로 했지만 사람들은 아직도 식당 앞에 모여 있었다. 지원은 아랑곳하지 않았고 현주는 그를 믿었다. 그가 이끄는 대로, 그가 깔아 준다는 꽃길을 걸어 보기로 마음먹었다.
사람들은 식당 밖으로 나온 지원과 현주를 보았고 둘이 맞잡은 손을 쳐다보았다. 몇몇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말을 잇지 못했고 몇몇은 꺄악 소리를 질렀다.
“유 작가, 너…….”
피디의 당황한 목소리가 이어 들렸고 연석은 그 뒤에서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지원은 현주를 에스코트하며 차 조수석에 태웠다. 손을 이끄는 다정함, 바라보는 눈빛에 담긴 사랑이 어느 누구도 둘의 사이를 의심할 수 없게 했다.
지원은 특유의 개구쟁이 같은 웃음으로 사람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2차에서 예비 피로연 어때요?”
사랑은 그 어떤 얼음 같은 사람도 부드럽게 다룰 줄 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