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스캔들
― Rrrrr.
지원은 아침부터 울려 대는 진동 소리에 잠에서 깼다.
여전히 품에 안긴 그녀는 하얀 등을 드러내고 잠에 빠져 있었다. 그는 제 어깨를 베개 삼아 누워 있는 그녀를 조심조심 들어 제대로 누였다. 발소리를 최대한 낮춘 그는 핸드폰을 들고 최대한 빨리 침실을 나왔다. 액정을 보니 매니저였다.
“어.”
― 지원아, 일어났어?
“일어났으니까 전화를 받지.”
― 한 시간 뒤에 데리러 갈 테니까 준비하고 있어.
“왜?”
― 어?
“오늘 저녁에만 스케줄 있는 거 아니었어?”
기억으로는 오전엔 스케줄이 없었다. 현주와 함께 아침을 맞고 그녀가 해 주는 밥을 먹고 싶었던 그는 자동으로 인상을 찡그렸다. 핸드폰 너머로 매니저의 쭈뼛거리는 목소리가 이어 들렸다.
― 아, 그게…… 어제 갑자기 옮겨진 스케줄이라.
“무슨 스케줄인데.”
― 광고 촬영인데…… 갑자기 촬영 일정을 옮겨야 한다고 해서…….
“하, 알았어.”
매니저가 최선을 다해 일하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나름 화를 누르고 대답했지만 치밀어 오르는 짜증은 어쩔 수 없었다. 핸드폰을 소파 위로 던진 그는 가운을 걸쳐 입고 침실로 들어갔다.
“…….”
침대 위의 그녀는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지원은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그녀의 머리를 차분히 쓸어 주었다. 넘치는 햇살이 불편한지 찌푸린 미간이 귀여웠다.
“현주야.”
“…….”
괜히 한 번 불러 보았다. 믿기지 않을 만큼 좋아서 확인하고 싶었다.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현주는 힘겹게 눈을 떴다.
“……지원 씨?”
그녀가 부르는 제 이름이 좋아 그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더 자.”
현주는 팔을 뻗어 그를 끌어안았다. 잠결 덕분인지 대담한 그녀의 애정표현에 지원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완벽하게 행복했다.
“현주야.”
그러곤 다정하게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나 갑자기 스케줄이 생겨서 나가 봐야 할 것 같아.”
“…….”
힘없이 끄덕거리는 그녀의 고개는 가지 말라고 칭얼거리는 것보다 더 강력했다.
“금방 올게. 어디 가지 말고 여기 있어.”
“금방 언제요?”
현주는 그의 어깨에 지친 머리를 기대고 물었다.
“끝나는 대로 올게. 중간중간 전화할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알았어요.”
지원은 떨어지기 싫은 마음을 애써 절제하며 욕실로 들어갔다. 현주는 침대 위로 다시 쓰러졌다. 새벽 내내 시달린 탓에 끊임없이 잠이 쏟아졌다.
* * *
짙은 파란색 니트로 멋을 낸 지원은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차에 몸을 실었다.
“무슨 광곤데 시간을 옮겨.”
올라타자마자 투덜거리는 지원을 향해 매니저는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중간에 스케줄이 좀 꼬였나 봐. 가는 동안 눈이라도 좀 붙여.”
지원은 자연스럽게 핸드폰을 꺼내 현주의 이름을 찾았다.
[일어나면 연락해.]
[밥 잘 챙겨 먹고 있어.]
쓰러져 잠든 현주는 답이 없었지만 지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문자를 보냈다.
“너 작가님이랑 연애하기로 한 거야?”
그런 지원을 보며 매니저는 물었다. 최대한 무심하게 물으려 노력했지만 지원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지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어. 신경 쓰지 마.”
매니저는 크게 한숨을 뱉었다.
“야, 어떻게 신경을 안 쓰냐.”
“그래서 뭐. 헤어지라고?”
“아, 무슨 말을.”
매니저는 평소보다 더 날을 세우는 지원 때문에 어쩔 줄을 몰랐다. 지원은 어렵사리 얻은 그녀와의 관계를 어떤 누구의 간섭으로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그냥 조심하라고. 스캔들 터져서 좋을 거 없으니까.”
“스캔들은 내가 조심하는 게 아니라 회사가 조심해야 하는 거야.”
“…….”
빌어먹게도 옳은 말만 하는 지원이었다.
“나도 신경 쓸 테니까 회사에서도 알아서 좀 해 줘, 형.”
“이럴 때만 형이지.”
“내가 여자를 만난 적은 있어도 연애를 한 적은 없잖아.”
매니저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
“나 좀 도와줘.”
그의 매니저 생활을 오래 하면서 처음 들어 본 말이었다. 천하의 김지원이 도와 달라는 말을 입에 올리다니. 매니저는 입을 턱 벌리며 혀를 찼다.
“작가님이 그렇게 좋냐.”
“말로 다 표현 못 하지.”
지원은 또 현주가 생각나 문자를 보냈다.
[보고 싶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일반적인 스튜디오나 방송국이 아닌 한 레스토랑 앞이었다. 이른 시간 탓인지 문 앞에는 ‘close’라는 팻말이 걸려 있었다.
“여기서 촬영해?”
어떤 광고는 야외 장소를 섭외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매니저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줄줄 흐르는 식은땀, 파리하게 떨리는 입술, 초점을 잃은 동공까지 아주 버라이어티했다. 그런 낌새는 또 기가 막히게 알아차리는 지원이 인상을 구겼다.
“뭐야.”
“…….”
“뭔데 그런 표정이야.”
여기까지 왔으니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명해야 했고 설득해야 했다.
“저기 지원아.”
“빙빙 돌리지 말고 제대로 말해.”
“…….”
연예계에 오래 종사하다 보면 원치 않는 식사자리 같은 것들이 있었다. 소위 재벌가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행하는 갑질 같은 것이었는데 일명 접대라 불렸다.
“혹시 접대야?”
접대라는 말이 조금 선정적이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식사자리에 함께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지원은 그런 자리에 나가지 않았다. 돈은 그도 많았고 누군가의 스폰 역시 필요하지 않았다. 그와 데뷔 때부터 함께한 소속사가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너 혹시 저번에 강민서한테 고백받았어?”
“어?”
다행이도 매니저의 입에선 재벌이니 접대니 그런 추잡한 단어는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대신 튀어나온 단어도 썩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저번 회식자리에서 말이야. 나 잠깐 자리 비운 사이에 민서 씨가 실수했다며.”
“그게 왜.”
지원은 알 수 없는 불쾌함으로 열불이 났다. 침대 위에 얌전히 누워 있던 현주가 떠올랐다. 그녀를 놓고 나온 대가가 고작 이런 것이라니 절로 고개가 젖혀졌다.
“그쪽 매니저가 연락 왔더라고. 민서 씨가 너한테 직접 사과하고 싶어 한다고.”
“그래서 지금 사과받으러 온 거야? 오랜만에 좀 쉬고 있는데?”
지원은 긴 손가락으로 구겨진 이마를 짚으며 이글거리는 마음을 다스리려 애썼다. 매니저는 그가 인내의 끈을 놓기 전에 조금이라도 빨리 이유를 말해야 했다.
“안면도 있는 사람이 하도 간절히 부탁해서 어쩔 수 없었어. 게다가 민서 씨랑 너는 앞으로도 계속 부딪힐 거란 말이야.”
“무슨 말이야.”
“이번 드라마 벌써부터 일본이랑 중국에 수출됐는데 당연한 거 아니야? 저번에 찍은 커피 광고도 계약 연장할 게 뻔하고.”
“하― 지금 그따위 것 때문에 내가…….”
“사과받고 어색한 거 풀면 너도 좋잖아. 안 볼 사이도 아니고.”
연예계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 거미줄과 같았다. 연예인과 소속사의 관계, 소속사와 방송국의 관계, 방송국과 방송국의 관계와 더불어 소속사와 소속사의 관계라는 것이 존재했다. 하나의 소속사는 다른 소속사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서로의 배우와 작품을 공유하면서 시너지 효과를 발휘했다.
“후, 알았어. 밥만 먹으면 되는 거지?”
지원은 체념했다. 그에게 소속사와 소속사의 관계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사람 대 사람으로 민서와 대화를 해 봐야 한다는 것쯤은 생각하고 있었다. 매니저의 말대로 민서와 지원은 앞으로도 여러 번 함께 언급될 것이었다. 이런 자리가 필요하기는 했다.
“너무 쌀쌀맞게 굴지 마.”
매니저는 한시름 놓았다는 듯 얼굴색을 밝게 바꿨다. 지원은 그런 매니저를 흘겨보며 차에서 내렸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해. 그냥 들어가면 되는 거야?”
“어. 레스토랑 열려 있을 거야.”
“유현주랑도 못 해 본 걸 강민서랑 하네.”
마치 연예인 커플이 비밀 데이트를 하는 것 같았다. 오픈하지 않은 레스토랑을 빌려 둘만의 식사를 하는 것은 연예인들의 오랜 데이트 형식이었다. 한산한 거리에 위치한 레스토랑의 문을 열자 고풍스러운 인테리어가 눈에 띄었다. 지배인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잔뜩 흥분한 얼굴로 다가왔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안쪽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저…….”
“네?”
“실물이 훨씬 미남이시네요.”
“아, 감사합니다.”
지배인과 싱거운 대화를 마친 지원은 레스토랑 구석에 위치한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거기엔 창문에서 들어오는 햇살을 온몸으로 받고 있는 민서가 있었다.
“…….”
민서는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몸을 떨고 있었다. 그 이유가 회식 날의 수치심으로 부끄러운 것 때문인지 그의 잘생긴 외모에 마음이 두근거리는 것 때문인지는 구분할 수 없었다.
“오셨어요, 선배님.”
“어.”
지원이 자리에 앉자 지배인이 다가와 메뉴판을 건넸다. 민서는 잔뜩 수줍은 얼굴로 줄줄이 늘어선 메뉴들을 살폈다. 파스타는 입에 묻을까 겁나 스테이크를 골랐다.
“시저 샐러드랑 하우스 와인 한 잔 주세요.”
그런 민서와 달리 지원은 간단한 샐러드만 주문했다. 명백하게 할 말만 하고 일어나려는 지원의 속셈이 보였다.
“식사는 안 하세요?”
“오전엔 잘 안 먹어.”
그녀는 조금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미소를 지었다.
“저, 선배님.”
“…….”
“저번 회식 때…… 죄송했어요.”
민서는 테이블 아래로 손을 떨며 말했다. 하도 치마를 움켜쥔 탓에 그려진 꽃무늬가 잔뜩 일그러졌다. 지원은 너그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도 없이 이런 자리를 만든 매니저에게는 화가 났지만 이런 자리를 만들고 싶어 했을 민서의 마음은 이해가 됐다.
“매니저 오빠한테 들었어요. 제가 술에 취해서 정신이 없었나 봐요.”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민서는 조금씩 긴장이 풀렸다. 지원이 자신에게 없던 정도 다 떨어졌으면 어쩌나 하루 종일 전전긍긍하던 그녀였다. 마침 식사도 나오며 분위기는 훨씬 유해졌다.
“선배님께 많이 감사해요.”
“뭐가.”
“여러모로 잘 챙겨 주셔서요.”
“…….”
“지각했다고 혼도 내 주시고 연기도 도와주시고……. 많이 고마웠어요.”
지원은 묘하게 웃으며 와인으로 입술을 적셨다.
“세상에 찌든 것처럼 굴더니 어리네.”
그의 낮은 목소리가 식탁을 타고 그녀의 귓가를 어루만졌다.
“무슨 말씀…….”
“처음 연기하면서 만난 선배가 나라서 내가 대단해 보이고 커 보이는 건 이해하는데 그게 전부는 아니야.”
중의적인 말이었다. 선배로서든 남자로서든.
“난 같이 일하는 사람으로서 할 일을 한 거고 넌 그거에 맞게 잘 움직인 거야. 특별히 고마워하거나 미안해할 필요 없어.”
“그래도 선배 없었으면 이렇게 아무 탈 없이 촬영 못 마쳤을 거예요.”
“그럼 다른 누가 너한테 잔소리했겠지. 나 대신에.”
“…….”
지원은 연예계 신인이 겪는 불안과 외로움을 모르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는 어린 나이에 그 모든 것을 겪어 본 사람이었다. 민서처럼 누군가를 의지하고 존경하다 애정으로 나아간 적도 있었고, 그로 인해 상처받은 적도 있었다.
“계속 배우 하고 싶지?”
“그럼요.”
“그럼 실생활에서도 연기해.”
“…….”
“싫어도 좋은 척, 불편해도 편한 척.”
지원은 그녀에게 꼭 필요한 조언을 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있는 대로 드러내서 칭찬받는 건 어릴 때나 가능한 거야. 마음도 숨기고 표정도 숨기고 생각도 숨기는 게 어른이지.”
“…….”
“별로 추천하는 일은 아닌데, 그래도 오래 하고 싶다니까 해 주는 말이야.”
“선배님도…… 그렇게 다 숨기세요?”
“그럼.”
지원은 당연한 걸 묻는다는 투로 말했다. 다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솔직할 수 있는 현주만 있으면 그는 상관없었다.
“선배님은 솔직할 줄 알았는데.”
“내가 아무리 제멋대로라고 해도 지킬 건 지켜. 마음대로 했으면 벌써 은퇴했지.”
민서는 무슨 말인지 대충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그녀의 안하무인 같은 행동을 꾸짖고 동시에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조언이었다.
“그러니까.”
“…….”
“누구 좋다는 말도 그렇게 술자리에서 하는 거 아니야.”
민서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다는 표현을 실감했다. 순간 술기운으로 치부하며 포장했던 앞의 말들이 무의미해졌다. 지원은 다정하던 눈과 표정을 거두고 단호한 눈을 빛냈다.
“선배님…….”
“한순간일 수도 있는 감정 때문에 네 자리나 주변 사람들이 무너질 수 있어.”
민서는 지금 이 순간 그의 말이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에 대해 생각했다. 한순간이라니. 그는 그녀의 어떤 말도 듣지 않고 그녀의 감정을 한순간이라 치부하고 있었다.
“한순간 아니에요.”
“…….”
“좋아한 지는 얼마 안 되긴 했지만……. 그냥 순식간에 타오른 거 아니에요.”
지원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그녀의 눈에 투명한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저도 어렵게 기회 얻어서 배우 된 건데……. 어떻게 한순간의 감정으로 그랬겠어요. 마음 정리하려고 많이 애썼어요. 선배님이 저한테 관심 없는 것도 알고 제가 지금 누구 좋아해서 연애할 때도 아니란 거 알아요. 근데 단막극 촬영도 끝나고 선배님 못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까 다급했어요. 그래서…… 그래서 그런 건데…….”
민서는 북받치는 감정에 주룩주룩 눈물을 흘렸다. 지원은 지나간 기억을 되짚으며 혹시나 자기가 민서에게 여지를 주는 행동을 했었는지에 대해 고민했다. 맹세코 그런 적은 없었다.
예전의 그라면 이런 고백에 매몰찬 거절을 했겠지만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제대로 깨달은 지금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하―”
지원은 한숨을 뱉으며 눈을 감았다. 그녀를 위해서라도 분명하게 얘기해야 했다. 어설픈 동정은 고통스러운 희망을 안겨 줄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 소중한 감정에 대해 존중도 잊지 않았다.
“고마워.”
민서는 촉촉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좋아해 줘서.”
“선배님…….”
“근데 나 만나는 사람 있어. 헤어질 생각도 없어. 빨리 마음 정리하는 게 너한테도 좋을 거야.”
민서는 두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지원은 천하의 못된 놈이 된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그럴수록 현주가 보고 싶었다.
“죄송해요.”
한참을 울다가 간신히 멈춘 그녀는 죄송하다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줄 몰랐어요.”
“알아.”
“솔직하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미안.”
민서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사춘기 같았던 사회에서의 첫 애정이 이렇게 저문다는 것이 슬펐다.
“만나는 분…… 좋은 사람이에요?”
“응, 좋은 사람이야.”
“그럼…… 다행이에요.”
“…….”
민서는 차분히 현실을 받아들이려 애썼다. 애인도 없는데 자신을 거절하는 것보다는 이편이 낫다는 자기 위로도 했다.
핸드백의 손잡이를 부들거리는 손으로 잡은 그녀는 붉어진 눈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식은 반이나 남았지만 이미 가치가 없어진 뒤였다. 지원도 그녀를 따라 일어나 함께 레스토랑 밖으로 나갔다.
“차 어디 있어?”
“저쪽이요.”
모자를 푹 눌러쓴 민서는 손을 뻗어 자신의 차를 가리켰다. 지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함께 걸었다. 둘은 말없이 걸었고 그는 민서가 차에 타는 것까지 지켜봐 줬다.
“고마워요, 선배.”
지원은 어깨를 으쓱이며 차 문을 닫았다. 그의 차를 찾을 필요는 없었다. 지원의 비위를 맞추려는 매니저가 그가 있는 곳까지 차를 대령했기 때문이었다. 조수석에 올라탄 지원이 선글라스를 벗으며 낮은 욕지거리를 뱉었다.
“한 번만 더 이딴 거 시켜 봐.”
“분위기 그렇게 안 좋았어?”
“최악이었어.”
정말로 끔찍한 경험이었다. 무수히 많은 여자들의 고백을 거절했던 그였지만 이렇게 괴로웠던 적은 없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마음이 얼마나 무겁고 고통스러운 것인지는 그 역시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지원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현주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일어났어요.]
[몇 시쯤 와요?]
[나 배고파요.]
지체 않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반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끝났어요?
“응, 보고 싶어.”
다짜고짜 보고 싶다는 말에 매니저는 토할 것 같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물론 지원은 신경 쓰지 않았다.
― 우와, 일찍 끝났네요?
“응, 밥 먹자.”
― 냉장고에 김치밖에 없던데. 김치볶음밥 먹을래요?
“그래.”
― 몇 분 걸려요?
지원은 매니저를 노려보며 말했다.
“삼십 분?”
삼십 분 안에 집 앞까지 질주하라는 그의 암묵적인 협박이었다.
* * *
소식을 알게 된 시간은 어느 평화로운 날의 새벽이었다. 마치 기다리고 기다렸던 것처럼, 절정의 행복 끝에서 지옥 같은 불행을 건네리라 다짐하는 운명을 만난 것은 바로 그 새벽이었다.
― Rrrrr.
“…….”
시작은 잠기운을 해치는 핸드폰의 진동 소리였다.
“여보세요…….”
― 유 작가!
몹시 지독한 졸음이 몰려왔지만 직장 상사의 목소리만큼이나 무서운 것은 세상에 없었다.
“네, 피디님!”
현주는 튀어 오르듯 누워 있던 몸을 일으키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아무리 방송계가 시간,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해도 이런 경우는 드물었다. 방영 하루 전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것은 아닌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 스캔들 터졌어. 아니 무슨 시작 전에도 이러더니 촬영 다 끝나고도 이러냐.
“스캔들이요?”
연예계에 비일비재한 스캔들이 무엇이 대수랴. 아, 대수일 수 있겠구나. 현주는 어느 날 예고 없이 찾아왔던 지원의 폭행 스캔들을 떠올렸다. 이틀 전까지만 해도 꿀 같은 눈빛을 주고받던 그가 떠올랐다. 부디 그와 관련된 일은 아니기를.
― 강민서 말이야.
휴우, 현주는 한숨을 뱉었다. 그가 아니라는 이기적인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 지원이랑 열애설 터졌어.
그러곤 곧 그 이기적인 마음에 대한 형벌을 받았다.
“네? 그게 무슨…….”
―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직 몰라. 인터넷에도 이제 막 뜨기 시작해서.
“…….”
심장 위로 차가운 얼음물을 끼얹은 것 같았다. 그 차가운 얼음은 온 핏줄을 돌아다니며 매서운 한기를 이곳저곳에 불어넣었다.
― 우리 단막극에도 지원이가 민서를 일부러 꽂은 거 아니냐고 기자들이 자꾸 전화해서 난리야.
“…….”
― 유 작가, 듣고 있어?
연예계에는 모두가 인정하는 불변의 법칙이 있었다. ‘아니 땐 굴뚝에도 연기는 날 수 있다.’
“네, 듣고 있어요.”
― 유 작가한테도 곧 기자들 연락 갈 거야. 우리끼리 입을 맞춰야 나중에 뒷말도 안 나올 거 아니야.
“네.”
― 일단 둘의 연애는 모르는 사실이라고 답변하고 캐스팅 관련해서는 어떤 누구의 영향도 없었다고 하자고. 또 그게 사실이니까.
“그럴게요.”
자기 애인의 열애설을 스스로가 변호해야 한다니 이렇게 참혹할 수가 없었다. 현주는 침대 아래로 다리를 내려놓고 고개를 숙여 피로해진 눈가를 꾹꾹 눌렀다.
“아, 피디님.”
― 어.
“다른 스태프들한테도 연락 돌리셨어요?”
― 아니, 유 작가한테 제일 먼저 한 거야.
친절도 하셔라. 현주는 새벽 네 시를 가리키는 벽시계를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지금 방송국에 계신 거죠?”
― 어, 오늘 월광 첫 방송이잖아. 보고 퇴근하려고 했는데 마침 일이 터졌네.
“저도 지금 방송국으로 갈게요.”
― 아니야, 아니야. 오라고 전화한 거 아니야.
“집에 있는다고 잠이 오겠어요? 저도 피디님이랑 상황 돌아가는 것 좀 봐야겠어요.”
현주는 이미 갈아입을 옷을 꺼내고 있었다. 태풍이 불 때 가장 고요한 곳은 태풍의 한가운데인 태풍의 눈이었다. 그곳으로 가기까지 폭력적인 바람을 맞아야 하는 것은 숙명적인 것이었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 모든 것의 시작인 방송국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방송국으로 가 주세요.”
현주는 택시에 몸을 실은 뒤 핸드폰으로 인터넷에 접속했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인터넷은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가장 많은 조회 수를 차지한 기사를 클릭했다. 차라락, 뜨는 그 형태가 믿을 수 없이 적나라했다.
“…….”
헤드라인 역시 끈적거리는 단어들로 난무했다.
<김지원, 강민서? 톱스타들의 밀회>
<김지원, 레스토랑 통째로 빌려 강민서와 데이트>
<강민서를 에스코트하는 김지원의 달콤한 모습>
“하…….”
어쩐지 너무 행복하다 싶었다. 파파라치들의 은밀한 사진에는 날짜와 시간이 명확하게 박혀 있었다. 그 무시무시한 숫자들을 의미 없이 읊었다. 왠지 익숙한 그 숫자는 드라마 ‘월광’의 회식 다음 날이었다.
“…….”
평소엔 둔하기만 한 머리가 기가 막히게 돌아갔다. 맞춰지지 않을 것 같던 퍼즐들이 순식간에 제자리를 찾고 큰 그림을 그렸다. 그날의 지원을 잊을 순 없었다. 그날 이후 지원은 드라마 촬영 때문에 미뤄 두었던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현주와 보낼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현주야, 확인하면 연락 좀 줄래?]
그 순간 문자가 왔다. 가뜩이나 좋지 않은 기분이 그로 인해 더 엉망이 되었다. 발신인 김수현. 그가 왜 연락했는지는 대충 짐작이 됐다. 그녀의 전 애인이자 재활용도 안 되는 쓰레기인 그는 한 잡지사에서 에디터로 일하는 중이었다.
망설이지 않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짧은 신호음, 한 번에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
― 아, 현주야. 연락 줘서 고맙다. 내가 깨운 건 아니지?
“깨운 거 맞아요.”
퉁명스러운 말투에 상대방은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 아, 그랬구나. 미안.
“왜 연락하셨어요.”
― 갑자기 무슨 존댓말이야. 편하게 해. 우리 사이에.
그는 이기적이고 오만했다. 현주는 그의 알량한 속셈을 모르지 않았다. 드라마 작가인 전 여자 친구를 이용해 적당한 정보를 얻어 후한 대가를 갖겠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현주에게서 우위에 있는 사람처럼 굴었다.
“불편하니까요. 무슨 일 때문에 연락하셨어요. 일 년 만에 처음인 것 같은데.”
얻고 싶은 게 있으면 제대로 엎드릴 줄을 알아야지. 건방지게.
― …….
상대방은 예기치 못한 상황에 할 말을 잃은 듯했다.
“할 말 없으면 끊을게요. 바빠요.”
― 아니, 아니. 현주야!
그는 다급하게 그녀의 목소리를 붙잡았다. 현주의 이마엔 짜증스러운 주름이 잡혔다.
― 너 이번 작품이 드라마 ‘월광’ 맞지?
“네.”
― 거기 김지원이랑 강민서 나오잖아.
“그런데요.”
― 그 둘…… 무슨 관계야?
전 애인에게서 듣는 현 애인에 대한 질문치고는 참 창의적이었다. 좋은 사람이야? 혹은 행복하니? 정도의 질문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직장 동료 관계지 무슨 관계겠어요.”
― 에이, 그러지 말고.
“…….”
농담조로 분위기를 업 시키려던 그는 현주의 차가운 정적에 다시 한 번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 정말 아무 관계 아니야?
“연예인들이 드러내 놓고 연애질 하는 것도 아니고 말하지 않는 이상 어떻게 알겠어요.”
― 그럼 혹시 이번 캐스팅에 김지원이 관여한 건 없어?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네요.”
― 강민서 말이야. 완전 생 초본데 그 호화 캐스팅 사이에 꼈잖아. 김지원이 힘쓴 거 아니야?
현주는 대놓고 기분 나쁘다는 식의 한숨을 뱉었다.
“캐스팅은 전적으로 제작진 권한이에요. 한류 스타라고 해서 제멋대로 캐스팅을 조정할 권리는 어디에도 없어요.”
― …….
“애들 장난도 아니고.”
현주는 이를 갈며 말했다. 영양가 없는 그와의 전화가 끝나자 택시는 자연스럽게 방송국 앞에 섰다. 낮처럼 환한 방송국의 조명은 눈이 아팠다. 익숙하고 빠른 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 탑승했고 회의실까지도 거칠 것이 없었다. 그곳엔 파김치처럼 축 늘어진 피디가 있었다.
“피디님.”
“아, 유 작가 왔구나.”
그는 다크서클이 내려앉은 눈을 빛내며 그녀를 반겼다. 회의실의 전화선은 모두 뽑혀 있었고 컴퓨터와 스마트폰만 반짝이며 최신 소식을 전달하고 있었다.
“기사 새로 뜬 거 있어요?”
“아니. 새벽이라 그런지 소속사에서도 별다른 연락이 없네.”
소속사는 새벽이고 뭐고 이미 수습을 위한 준비를 시작하고 있을 것이었다. 예전 폭행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지원의 집에는 변호사와 매니저가 회의를 하며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근데 유 작가도 뭐 아는 거 없어?”
“네?”
“아니, 진짜 연애할 수도 있는 거잖아.”
“…….”
“요즘 세상에 그게 나쁜 것도 아니고. 오히려 작품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데.”
이성적이란 말은 사실 이토록 잔인한 말이었다. 누군가가 상처받을 수도 있을 이 사건이 그에게는 그저 비즈니스의 연장선일 뿐이었다. 그를 탓할 마음은 없었다. 그저 현주의 마음을 온전히 위로할 사람이 없다는 것에 마음이 조금 아팠다.
숨겨야 하는 연애의 무게를 비로소 느끼기 시작한 그녀였다.
“글쎄요. 저도 아는 게 없네요.”
“저번 회식 때 보니까 강민서는 지원이 좋아하는 것 같던데.”
“…….”
그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다. 분명 서운하고 서러웠지만 의심은 하지 않았다. 이런 순간에도 그를 믿어야 한다는 것은 이십팔 년 세월 동안 얻은 얕은 지식 중 하나였다.
오해는 한순간이었다. 그를 만나고 화를 내도 늦지 않았다. 다만 괴로웠다. 자신이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해 주는 그 사람이 내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는 현실이 끔찍이도 괴로웠다.
“저 잠깐 나갔다 올게요. 피디님 뭐라도 좀 드실래요? 편의점에서 간단한 거라도 사올까요?”
“응? 아니야. 괜찮아. 머리가 하도 복잡해서 입맛도 없다.”
현주는 회의실을 나와 한 층 아래 대기실로 향했다. 애꿎은 핸드폰을 수없이 확인했지만 지원에게서는 간단한 연락조차 오지 않았다.
“그냥 아무 문자라도 좀 보내 주지.”
괜한 서러움이 몰려왔다. 지금 당장 달려와 무릎이라도 꿇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못된 생각도 자꾸만 솟아났다. 대기실의 폭신한 소파는 그녀의 등을 감쌌다. 문득 연석과의 대본 연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깨달았다. 지원과 그녀의 연애를 알고 있는 유일한 단 한 사람.
[연석아.]
라고 문자를 보냈다. 이른 새벽이었고 위로받기 위해 문자 한다는 것이 염치없었지만 사람은 이기적인 동물이었다.
― Rrrrr.
기다렸다는 듯 연석에게서 전화가 왔다. 얘는 아이돌이라면서 바쁘지도 않은가.
“어, 연석아.”
― 누나.
“나 때문에 깼어?”
― 아니요. 연습실이에요.
연석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기사를 아직 못 본 건지, 알면서 모른 척을 하는 건지. 예전부터 생각한 것이지만 연석은 속마음을 쉬이 알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아, 바쁘면…….”
― 괜찮아요.
지원은 속마음과 겉마음이 따로 없을 정도로 드러나는 사람이었지만 연석은 완전히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또한 연석은,
“…….”
― 괜찮아요?
너무나 완벽한 사람이기도 했다.
“…….”
그의 괜찮냐는 물음은 괜찮은 척하고 있던 현주의 어깨를 들썩이게 했다. 억누른 서러움이 폭발했고 모아 둔 눈물이 터져 나왔으며 깨물던 입술은 벌어져 신음을 토해 냈다.
“흐흑…….”
― 누나…….
그렇게 한참을 우는 동안 연석은 그저 듣기만 했다. 작은 한숨을 내쉬기도 했고 조용히 ‘누나―’라고 부르기도 했다. 현주는 그나마 누군가에게 진실된 마음을 드러낼 수 있어 안식을 취할 수 있었다.
비밀이란 원래 그런 것이었다. 혼자 품을 때는 견딜 수 없이 무겁지만 뱉어 내는 순간 가벼워졌다.
“갑자기 연락해 놓고 울어서 미안.”
― 괜찮아요.
연석은 다시 한 번 괜찮다고 말했다.
― 많이 속상해요?
“……응.”
― …….
“아닌 거 아는데, 그 사람이 그럴 사람 아닌 거 아는데도 화나고 미워.”
그녀의 가장 솔직한 마음이 쏟아졌다. 지원이 민서와 만나야 했던 그날, 분명 무슨 사정이 있었을 거라는 걸 알았다. 그가 그날의 진실을 자신에게 미리 털어놓지 못한 것 역시 그녀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을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마음으로는 그러지 못했다.
― 화내고 미워해도 돼요.
연석은 그녀의 죄책감을 눈치챈 듯 허락의 말을 건넸다.
“…….”
― 이해하려고 너무 애쓰지 말아요. 그러다 금방 지쳐요.
또한 애쓰는 것 역시 알았는지 그러지 말라고도 했다.
“…….”
― 선배도 똑같이 화나고 미울 거예요. 자기 자신이.
그러곤 그를 원망하는 그녀를 위해 지원을 변호하기도 했다.
“그럴까.”
― 누나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그럴 거예요.
그 말이 뭐라고 현주는 충만한 위로를 느꼈다. 그도 똑같이 힘들 거라는 그 말이, 그녀 혼자만 낑낑거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그녀를 위로했다. 현주는 퉁퉁 부은 눈 주위를 닦아 내며 애써 웃었다.
“고마워.”
― 좀 후련해요?
“응, 훨씬 좋아졌어.”
― 다행이에요.
핸드폰 너머로 연석의 선선하고 청량한 미소가 전해지는 듯했다.
― 누나.
“응.”
― 고마워요.
“뭐가?”
― 힘들 때 떠올려 줘서요.
그 말은 순간적으로 현주의 마음을 아리게 했다. 만인의 사랑을 받고 형제 같은 멤버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그가 역설적으로 무척이나 외로울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었다.
“에이…… 무슨 그런 말을.”
― 아무튼 누나 힘내요.
다시금 밝아진 그의 목소리가 현주의 걱정을 감쌌다.
― 못 견디겠으면 문자 남겨 놔요.
“왜, 달려오기라도 하려고?”
킥킥거리는 연석의 웃음소리가 가득해졌다. 현주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 여전히 지원에게선 연락이 없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그도 자신만큼 스스로에게 화나고 미울 것이란 걸 어렴풋이 알았으니까.
답답하고 막막한 마음이 지속되는 와중에 시간은 아침 여덟 시를 가리켰다. 새벽을 정리하듯 새로운 기사가 떴다. 세상을 달구던 지원의 스캔들은 사실 별것 아니었다는 듯 차분하고 조용하게 정리되는 듯싶었다.
“유 작가, 지원이 기사 떴다.”
“지금요?”
부리나케 달려가 확인한 컴퓨터 화면엔 익숙한 방식의 문장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좋은 선후배 사이일 뿐, 오해는 말아 주세요.>
<김지원과 강민서, 스캔들 전면 부인.>
<단막극 ‘월광’을 위한 노이즈 마케팅?>
“휴…….”
현주는 깊은 한숨을 뱉어 냈다. 이 기사 한 줄이 나오기까지 지원은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는 그의 강박적인 피곤함을 안쓰러워했다.
“이제 여론도 좀 가라앉겠죠?”
피디는 기사에 달린 댓글들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음…… 별로 안 믿는 분위긴데?”
“그래요?”
“워낙 둘이 잘 어울리기도 하니까. 광고에, 드라마에 같이 하는 것도 많고.”
“…….”
연예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필수 상식으로 알아야 할 원칙이 또 하나 있다.
‘대중은 원하는 것만 믿는다.’
“그래도 공식 기사 냈으니까 차츰 괜찮아지겠죠.”
현주는 최대한 무심한 척 애쓰며 뽑혀진 전화선을 다시 연결했다. 피디는 기지개를 켜며 푸석한 눈가를 비볐다.
“이놈의 연예인들. 사람 잠도 못 자게 하고.”
잠을 못 잔 것은 현주도 마찬가지였다. 다급한 마음에 방송국으로 출근하기는 했지만 특별히 해결된 것은 없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러게요. 그래도 한시름 놓았으니 들어가 볼게요. 이 이상 다른 기사는 나올 것 같지도 않은데요, 뭐.”
“그래. 오늘 첫 방송인 거 알지?”
“그럼요. 오늘, 내일.”
“첫 메인 데뷔작이잖아. 액땜했다고 생각하자고.”
“그럴게요. 방송 끝나고 연락드릴게요.”
“그래.”
방송국을 나와 핸드폰을 살폈다. 연락처에 들어가 지원의 번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통화버튼을 누를까, 말까. 문자라도 남길까, 말까. 양자택일의 고민이 이어졌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새벽 내내 시달렸을 그였다. 조금이나마 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택시를 잡았고 집 주소를 말했다. 이른 아침의 풍경이 유독 외로웠다.
“감사합니다.”
택시에서 내려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순간 공기를 통해 전달된 무엇 때문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심장이 빨라지고 얼굴이 붉어졌다. 머스크 계열의 익숙한 향수 냄새가 미세하지만 분명하게 느껴졌다. 그는 어쩌면 이리도 분명하게 존재하는 것인가.
몇 년을 살면서 수천 번 눌렀을 현관의 번호판이 유독 낯설었다. 그의 향기가, 그의 손길이 그곳에까지 머물며 그녀를 놀리는 듯했다.
띠, 띠, 띠, 띠―
네 개의 숫자를 누르고 버튼을 누르자 ‘띠리릭―’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어렴풋했던 그의 향기가 완연한 형태로 다가왔다. 고개를 돌리자 작은 소파에 긴 다리를 꼰 그의 모습이 보였다. 부쩍 수척한 모습의 그와 눈이 마주쳤다.
“…….”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한 줄기 눈물을 흘렸다.
“지원 씨.”
지원은 그녀의 부름에 고개를 숙이고 미동하지 않았다. 미안함 때문인지 민망함 때문인지 그는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지원 씨.”
현주는 다시 한 번 소리 내어 그를 불렀다.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는 제 뺨을 감싸는 작은 손을 움켜쥐며 건조해진 목소리를 뱉어 냈다.
“미안해.”
“…….”
그는 힘겨운 듯 눈을 감았다 뜨며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힘들었지.”
그의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단단한 어깨와 넓은 가슴, 따뜻한 품과 익숙한 향기가 그녀의 눈물샘을 자극하기란 무척이나 쉬운 것이었다. 현주는 얼굴을 뒤덮는 눈물을 모른 척하며 그의 등을 토닥였다.
“괜찮아요.”
“연락 못 해서 미안해.”
“바빴잖아요. 알고 있었어요.”
폭력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했던 말이었다. 그때와 지금은 많이 다른 것도 같은데 어쩜 이렇게 상황은 달라지는 것이 없는지. 왠지 모르게 서러워졌다. 지원은 그런 그녀의 얼굴을 차마 볼 수 없어 끌어안은 그녀를 놓지 못했다.
“다 설명해 줄게.”
그는 부디 그녀에게 자신을 용서할 자비가 남아 있길 바랐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를 속였다는 사실이 그를 괴롭게 했다. 거짓말하지 말라고 다그치던 스스로에게 위선자라며 욕을 퍼부어도 모자를 지경이었다.
“괜찮아요.”
“…….”
“설명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현주는 눈물범벅이 된 얼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정말이었다. 굳이 무슨 설명과 해명이 필요할까.
“아무것도 알 수 없을 때, 그때 믿는 게 진짜 믿는 거라면서요.”
그녀는 지원이 했던 말을 따라했다. 그는 그녀의 쇄골에 얼굴을 묻으며 씁쓸하게 웃었다.
“당신은 물어도 돼. 그럴 자격 있어.”
“…….”
지원은 현주를 떼어 내며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엉망진창으로 흘러내린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 냈다. 나름 사랑하는 연인에겐 훌륭한 남자라고 자부했던 제 자신이 한심스러워졌다. 자신만만했던 과거의 자신을 뻥 차 버리고 싶을 만큼 창피했다.
“강민서랑 아무 사이 아니야.”
“알아요.”
그녀가 다 안다는 듯 진실한 눈빛을 내비쳤지만 지원은 계속해서 말하고 싶었다. 거짓을 말해 미안하다고, 내겐 당신밖에 없다고.
“회식 때 일 사과하고 싶다고 마련한 자리였어. 나도 나가서 알았어. 나갈 때까지만 해도 광고 촬영 스케줄인 줄 알았는데…… 하, 망할 매니저.”
지원은 다시 생각해도 화가 나는지 이를 앙다물며 읊조렸다.
“만나는 사람 있다고도 얘기했어. 그게 다야.”
현주는 그런 그를 쳐다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를 보며 미주알고주알 해명을 늘어놓는 그의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그랬구나.”
“…….”
“우리 지원 씨 억울했겠네.”
현주는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어린아이 다루듯 쓰다듬었다. 지원은 잠깐 눈살을 찌푸렸지만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게 다야?”
“뭐가요?”
“화 안 나? 뭐가 이렇게 인자해.”
“화내서 뭐해요. 지원 씨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그의 입에 살짝 뽀뽀했다. 지원은 마치 난생처음 뽀뽀를 받아본 사람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지 못했다.
“…….”
그에 비해 현주는 부끄럽다는 핑계로 퉁명스럽게 굴었다.
“감동받을 필요 없어요. 오늘 새벽에만 남자 둘이랑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눴거든요. 남자친구란 사람이 하도 연락이 없길래.”
“어?”
지원은 순식간에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남자? 누구?”
좀 전까지만 해도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그는 노골적으로 불쾌한 심정을 드러냈다. 그녀는 어이가 없었다. 하여튼 질투는.
“비밀이에요. 말 안 해 줄 거야.”
“우리 사이에 비밀이 어디 있어. 빨리 말 안 해?”
“우리 사이에 비밀 만든 건 지원 씨가 먼저잖아요. 나 몰래 민서 씨 만났으면서.”
지원은 순간 할 말을 잃어 주춤거렸다.
“아까 당신이 괜찮다고 했잖아.”
“뭐, 다시 생각하니까 썩 괜찮은 것 같지는 않네요.”
현주는 놀리듯 뒷짐을 지고 지원에게서 멀어졌다. 입꼬리를 말며 개구쟁이처럼 웃는 그녀의 모습은 흡사 지원이 그녀에게 장난칠 때 모습과 많이 닮아 있었다.
“벌이에요. 지원 씨가 나한테 비밀 만든 벌. 내가 얘기 나눈 두 남자에 대한 비밀로 퉁쳐 줄게요.”
“…….”
지원은 답답한 듯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어냈다. 한숨을 쉬고 천장을 바라봤다가 다시 바닥을 향해 눈을 내리깔았다. 현주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또박또박 말했다.
“이번 한 번만이에요.”
“…….”
“한 번만 더 그러면 진짜 죽을 줄 알아요.”
그녀의 어마어마한 으름장이었다. 새초롬하게 찡그린 코와 살짝 깨문 입술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예뻤다. 나름 진지했던 고해성사의 시간이었지만 욕망은 그런 때에도 걸러지지 않았다. 그는 오늘 하루 유독 보고 싶었던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어떻게 죽일 건데?”
“네?”
“어떻게 죽일 거냐고.”
순식간에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에 현주는 쭈뼛쭈뼛 뒷걸음질을 쳤다. 그는 그녀가 도망가도록 두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뒷목을 끌어당겨 깊게 키스했다. 현주도 마다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반가웠다. 그의 숨이, 품이, 마음이.
그들은 고작 이틀 만에 본 사람들치고는 깊은 열렬함으로 서로를 대했다. 열기는 나눠질수록 뜨거움을 더했고 밀어내면 끌어당기고 다가가면 더욱 끌어당겼다. 지원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하…….”
먹음직스럽게 도톰한 입술을 수없이 깨물고 말캉한 혀를 삼킬 듯 빨았다가 쇄골과 가슴팍에 자국을 남겼다. 현주는 어지러워지는 정신을 붙잡으며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반쯤 풀린 그녀의 눈이 나른했다.
“나 졸려요.”
“뭐?”
“지원 씨 때문에 못 잤어요. 재워 줘요.”
그녀는 실제로 졸리기도 했고 그가 졸려 보이기도 했다. 명색이 얼굴로 먹고사는 한류 스탄데 다크서클 정도는 관리해 줘야지. 그는 잠보다 다른 것이 더 급했지만 현주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지금은 뜨거움보다 따뜻함이 더 필요한 때였다.
“안아 줘요. 오늘을 나쁘게 기억하지 않게.”
어쩜 말도 그렇게 예쁘게 하는지. 그 말에 지원은 무장해제되었다. 어떻게 거절할 수 있을까. 제 품이 나쁜 기억을 달아나게 한다는 그녀에게 감히 품을 내어 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침실로 가 침대에 누워 한쪽 팔을 펼쳤다. 현주가 또르르 굴러 그의 품에 알맞게 자리를 잡았다. 마치 하나였던 것처럼 포개졌다. 그제야 미뤄 둔 졸음이 조금씩 몰려오는 듯했다. 그때 그가 말했다.
“우리 공개연애 할까?”
몰려오던 졸음이 다시 한 번 멀어져 갔다.
“뭐를 해요? 공개연애?”
“응, 공개연애.”
예전에도 비슷한 말을 했던 지원이었지만 그때와는 흐르는 공기부터 달랐다. 긴 눈으로 반듯하게 쳐다보는 그는 진심이었다.
“갑자기 왜요? 스캔들도 어쨌든 해명했고 딱히 해야 할 이유가…….”
현주는 지원의 결정이 자신을 위해 내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더 이상 사소한 오해로 상처받거나 신경 쓰는 걸 원치 않는 거라면 그녀는 괜찮다고 얘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이번 스캔들이 전부는 아니니까.”
지원은 더 이상 제 사랑을 숨기고 싶지 않았다.
“…….”
“폭력에 강민서에…… 이걸로 끝일 것 같아?”
지원은 잔뜩 지친 듯 보였다.
“주목받는 건 괴로운 거야. 위험한 거고. 그래서 나도 공개연애 싫어. 당신 힘들 거 뻔한데, 뭐.”
그는 끌어안은 현주의 등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현주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그런데요?”
“폭력사건 같은 거야 차라리 괜찮아. 근데 오늘처럼 다른 연예인이랑 스캔들 나는 거면…….”
“수습하는 거 많이 힘들었어요?”
현주는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어쨌든 연예인은 상품이니까.”
자기 스스로를 상품이라고 지칭하다니.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뱉어 내기까지 그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경험한 것일까. 현주는 마음이 미어지는 듯했다.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당신 작품에도, 나나 강민서한테도 이번 스캔들은 진짜였을 때 분명 더 좋은 효과를 냈을 거야.”
현주는 그제야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스캔들 부정하는 거…… 소속사는 반대했었구나.”
그녀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는 스캔들을 인정하길 바라는 그의 소속사와 민서의 소속사, 수많은 광고주들을 상대로 싸우고 온 것이었다. 수많은 이해관계와 자본주의 사회의 거미줄을 끊어 내는 것은 절대 쉽지 않았을 것이었다.
“강민서뿐만 아니라 난 앞으로도 많은 여배우들이랑 작업할 거고 그때마다 스캔들 안 날 거라는 보장 없어. 매번 당신 상처받는 거 보고 싶지 않아.”
“…….”
“다른 건 다 인위적으로 포장해도 괜찮아. 근데 당신만큼은 이제 안 되겠어.”
“그럼 지원 씨는…….”
“날 위해서야. 내 걱정 말고 당신 생각만 말해.”
“쉬운 결정이 아니잖아요. 나보다도 지원 씨한테 평생 굴레가 될 텐데.”
현주는 그가 자신을 위해 스스로의 커리어를 포기하지 않기를 바랐다.
대한민국의 남자 배우로서 연애의 유무는 당연히 중요했다. 아무리 개방적인 사회가 됐다 한들 그의 말마따나 연예인은 상품이었다. 소유할 수 없다면 애초에 수요도 없을 것이었다.
지원은 생각 많은 그녀의 머리를 차분히 쓰다듬었다.
“당신한테 묶이는 거면 난 언제든 찬성이야.”
이보다 더 황홀한 말이 있을까. 매사에 조심스러운 그녀조차도 그 순간만큼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승낙도 거절도 아니었지만 서로에게 묶이는 것을 그녀 또한 찬성한다는 나름의 동의였다. 그는 그런 그녀를 사랑스러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말도 안 돼.”
허탈하다는 듯 그가 말했다.
“뭐가요?”
그녀가 물었다.
“내가 이런 말을 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
“묶인다느니 사랑한다느니.”
“…….”
“다 부질없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그녀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었다. 결핍이란 그것에 대한 지독한 갈망과 거부를 동반한다. 사랑 없는 부모 밑에서 배운 지원의 결핍된 사랑은 그만큼 지독했다.
“난 내가 이런 말 할 줄 알았는데.”
현주가 말했다.
“믿는다느니 사랑한다느니.”
“…….”
“그런 말 언젠가는 내 인생에서 꼭 할 줄 알았어요.”
“…….”
“그 상대가 지원 씨일 거라곤 상상도 못 했지만.”
그녀는 그런 그의 결핍을 완벽하게 채워 주는 존재였다. 사랑과 믿음을 당연하게도 준비했던 여자라니, 이 얼마나 훌륭한 여자인가.
“사랑해.”
“사랑해요.”
모든 것의 결말은 그 한 마디로 귀결되었다. 그것만이 그들의 대화를 결론지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