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내기
많은 것을 변화시킬 것 같았던 그와의 연애는 사실 무엇도 변화시키지 않았다. 차가운 날씨, 조용한 집 안, 나른한 오후까지 모든 것은 예전과 같았다.
― Rrrrr.
조금 달라진 것이 있다면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그녀의 핸드폰뿐이었다.
“네.”
누구인지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 일어났어?
웃음을 머금은 다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벌써 2시예요. 내가 무슨 잠꾸러기도 아니고.”
현주는 자신을 어린애 취급하는 지원이 어이없어 웃음이 나왔다.
― 어제 새벽에 도착했잖아.
프랑스에서 한국으로 돌아올 때도 지원과 현주는 같은 비행기를 타지 않았다. 지원이 하루 먼저 프랑스를 떠났고 현주는 그다음 날 파리와 작별했다.
“괜찮아요. 잘 자고 일어났어요.”
― 피곤하면 오늘 안 와도 돼.
현주는 괜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의 속셈이 너무도 뻔해 가소로울 지경이었다.
“안 피곤해요.”
― …….
오늘은 드라마 ‘월광’의 촬영이 완료되는 날이었다. 그런 날 기념회식은 필수적인 것이었으며 작가가 빠진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지원은 현주가 회식자리에 나타나지 않길 바랐다.
― 그럼 술은 마시지 마.
지원은 회식자리에서 보았던 그녀의 주정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제 것이 아닐 때도 신경 쓰이던 것이 제 것이 되었다고 괜찮을 리 없었다.
“에이, 이런 날은 마셔야죠.”
스읍―! 하는 그의 질책이 터져 나왔다. 잔뜩 구겨진 그의 미간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 까분다.
“알았어요. 아무도 권하지 않으면 안 마실게요.”
― 뭐?
“스스로는 마시지 않겠다고요. 지원 씨가 그리 원하는데 그 정도는 도와드려야지.”
― 하…….
아무도 권하지 않을 리 없었다. 상대의 잔이 비면 채우는 것이 회식자리의 미덕 아닌가. 지원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눈앞에 펼쳐진 촬영 현장을 살폈다. 보이는 사람만 세어도 대충 수십 명이었다.
― 그럼 내 옆에 앉아.
“왜요?”
― 취하더라도 내 옆에서 취해. 정 안 되겠다 싶으면 보쌈해서 나가게.
그녀의 입가엔 수줍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보쌈은 무슨 놈의 보쌈인지. 가뜩이나 프랑스에서의 여행이 들통 날까 걱정인 그녀였다.
“공개연애 하고 싶어요?”
― …….
그냥 농담이었는데 멈춰진 그의 목소리가 그녀를 당황스럽게 했다. 현주는 재빨리 사태를 수습하려 멋쩍은 웃음소리를 연신 내뱉었다.
“아, 그냥 해 본 말이에요. 공개연애는 무슨.”
애매한 침묵에 이어 낮고 단호한 목소리가 들렸다.
― 싫어?
지원은 마치 ‘감자튀김 싫어?’와 같은 일상적인 어투로 물었다.
“네?”
― 공개연애 말이야.
“무슨…….”
― 하고 싶으면 말해.
그는 그렇게 말하곤 전화를 끊었다. 하고 싶으면 말해라는 말은 하고 싶다면 들어주겠다는 뜻이지 않은가. 현주는 그의 위험한 추진력을 애써 부정하며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에이…….”
농담이겠지? 하는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하지만 이내 파리에서 보낸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호텔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사진 한 장, 기념품 하나 없는 여행이었지만 세상 가장 큰 기적 같은 것들을 경험한 여행이었다.
띵―
[치마 금지, 하이힐 금지, 짙은 화장 금지]
그의 유난스러운 문자가 도착했다.
“선배님! 오늘 회식 가시죠?”
마지막 촬영 분을 남긴 민서가 얼굴 가득 애교를 담아 물었다.
“가야지.”
지원은 두 눈을 핸드폰에 고정한 채 기계적으로 답했다. 현주에게 간단한 금지사항을 전달했지만 답이 오지 않았다.
“짧은 시간이었는데…… 끝난다고 생각하니 아쉬워요.”
민서가 아련한 눈으로 촬영장을 살폈다. 꽤 그럴듯했다. 그녀는 걱정과 달리 열심이었고 지원에게도 싹싹하게 굴었다. 물론 그것은 지원에게만 한정된 친절함이었다.
“앞으로 네가 할 작품이 수백이야. 일일이 아쉬워하면 너만 힘들어.”
이번에도 그는 아무런 감정도, 특별함도 없이 무심하게 답했다. 살짝 찌푸린 얼굴이 프로페셔널한 섹시함을 자아냈다. 민서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 * *
“안녕하세요!”
현주는 반가운 얼굴들을 확인하며 큰 소리로 인사를 했다. 먹음직스러운 삼겹살 냄새가 가득한 식당 안은 드라마 제작팀이 가득 자리하고 있었다.
“유 작가! 어떻게 촬영장을 한 번도 안 올 수가 있어?”
멀리서 그녀를 확인한 피디가 서운하다는 듯 그녀를 놀렸다. 현주는 한껏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차마 그의 연인인 지원 때문에 가지 못했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들…… 오신 거예요?”
빠르게 훑어본 식당 안에 지원은 없었다.
“아, 지원이랑 민서는 지금 출발했을 거야. 마지막 촬영이 조금 늦어져서.”
어쩐지 문자가 없다 했다. 프랑스에서 돌아와 곧바로 일터에 복귀한 그가 존경스러워졌다. 지원의 곁에 자연스럽게 앉을 수 있도록 일부러 조금 늦게 온 것이었는데 결과는 허탕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어디쯤 앉아야 지원의 불쾌함을 덜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누나!”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무언가가 튀어 올랐다. 연석은 오래도록 만나지 못한 연인과 재회하듯 촉촉한 눈망울로 그녀를 반겼다.
“누나, 왔어요?”
“응. 잘 있었어? 그동안 수고 많았어.”
“수고는 스태프들이 했죠. 전 편하게 일했어요.”
제법 현장에서 부딪힌 태가 나는 대답이었다. 현주는 그런 그의 의젓함이 대견해 한껏 엄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음 주면 바로 방영이잖아. 기대된다.”
“아, 부디 발연기 기사만 뜨지 말아라.”
너무도 잘난 그가 그런 걱정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했지만 그 모습 또한 연석의 매력이라 미소가 지어졌다. 사실 엄밀히 말해서 연석과는 몇 번 만난 적 없는 사이였지만 그 몇 번의 만남이 꽤나 임팩트가 강해서 오래 만나 온 관계 같은 착각이 들었다.
“누나, 여기 앉아요.”
연석이 가리킨 자리는 연석의 바로 옆자리였다. 연석과 나란히 앉은 제 모습을 지원이 좋아할 리 없었다. 그녀가 망설이자 연석은 개구쟁이처럼 속삭였다.
“지원 선배 때문에 그래요?”
싱긋 웃는 모습이 흡사 도발과 같았다.
“우리 누나 꽉 잡혀 사네.”
“잡혀 살긴 누가 잡혀 살아. 아니야.”
현주는 냉큼 연석이 가리킨 자리에 앉았다. 회식자리는 시시각각 사람들 위치가 변하는 곳이니 지원이 오면 그때 다시 옮기면 된다고 생각했다.
“요즘 선배랑 어때요?”
현주 옆에 다정하게 앉은 연석은 그녀의 잔에 술을 채우며 물었다.
“음…….”
한 번도 다른 사람에게 지원과 자신의 일을 말한 적 없는 현주는 어떤 식으로 말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적당한지에 대해 고민했다.
“제가 말했던 거에 대해선 생각해 봤어요?”
그녀의 고민이 길어지자 연석은 조금 더 쉬운 질문을 던졌다.
“말했던 거? 아…… 공기!”
현주는 머릿속 어딘가에 구겨 넣은 공기와 마약에 대해 떠올렸다. 공기가 헤프다는 지원의 엉뚱한 말이 생각나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뭐가 그렇게 웃겨요?”
연석은 모르겠다는 듯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지원도 잘 짓는 표정이었는데 어째 둘의 분위기가 많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지원은 워낙에 완연한 남자 같은 느낌이고 연석은 온전한 소년 같았는데, 실은 둘 다 남자였다.
“물어봤었거든.”
“선배한테요?”
“응.”
연석의 얼굴에서 찰나의 복잡함이 빠르게 지나갔다.
“그래서요?”
“아니래.”
“…….”
“헤픈 건 싫다고 하더라고.”
현주는 사랑에 막 빠진 사람들이 그렇듯 눈치가 없었다. 그 말을 하던 때가 떠올라 수줍은 미소를 짓는 그녀와 달리 연석의 표정은 아주 미묘하게 굳어져 갔다.
“어, 지원 씨!”
“민서 씨도 얼른 와서 앉아.”
멀리서 스태프들의 극성스러운 환대가 들려왔다. 월광의 주인공인 지원과 민서가 이제 막 도착한 것이었다. 현주는 목을 길게 빼고 지원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의 날카롭고 긴 눈매와 마주하는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느린 눈짓으로 현주의 옷차림을 살피던 그는 곁에 있는 연석을 발견하곤 불쾌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지원 씨 여기 앉아, 여기.”
짜증스러움에 몸을 굳히고 있던 그에게 사람들은 자리를 안내하기 바빴다. 현주는 상황을 지켜보며 타이밍을 살폈다. 무턱대고 일어나 그의 옆으로 가기엔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고민하던 사이에 지원은 촬영감독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선배, 여기 앉아도 돼요?”
“…….”
설상가상 민서가 지원의 옆자리를 가리키며 물었다. 지원은 제 매니저를 옆에 앉히고 적당한 때에 현주를 데려오려고 했지만 앞에 앉은 촬영감독이 문제였다.
“뭐 그런 걸 물어봐. 앉아. 이런 날은 촬영하는 동안 쌓였던 감정 다 풀고 가는 거야.”
덕분에 민서는 민망하지 않은 선에서 그의 곁에 앉을 수 있었다.
“누나, 선배한테 가 볼래요?”
모든 상황을 함께 지켜본 연석이 물었다. 현주는 나름 머리를 굴렸다.
“오자마자 쪼르르 가는 게 더 이상해.”
진지한 얼굴로 군사작전을 설명하듯 중얼거리는 현주를 보며 연석은 피식 웃었다.
“그런가…….”
“사람들 취하면 그때 움직이지 뭐.”
하지만 그녀의 생각과 달리 사람들은 제 자리에서 쉽게 벗어나지 않았다. 모두들 곁에 있는 사람들과 회포를 푸는 데 온 정신을 쏟았다. 오늘 헤어지면 다시 만날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람들은 끊임없이 말하고 듣고 마셨다.
“선배님은 술 안 드세요?”
민서는 계속해서 비어 있는 지원의 잔을 보며 물었다. 술이라도 들어가면 지원도 부드러워지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지원은 연석과 현주에게로 향한 눈길을 살짝 거두고 민서를 쳐다보았다. 분홍빛으로 물든 뺨을 보니 술이 조금 오른 것 같았다.
“사람 많을 때는 안 마셔.”
“그래도 마지막 날이잖아요.”
나름 애교랍시고 어깨를 비틀던 민서는 그녀를 한심하게 쳐다보는 지원의 눈길에 그것마저 포기했다.
“알았어요. 뭐…… 제가 마시면 되죠.”
민서는 저 혼자만 노력하는 것 같아 속상했다. 첫 만남의 단추가 잘못 채워진 죄로 지원과 그녀의 관계는 영 나아가질 못했다. 주변 스태프들의 말에 따르면 그는 어느 여배우와도 친분을 갖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래도 자존심이 상했다.
“선배.”
“왜.”
“선배 게이예요?”
지원은 이 여자가 대체 왜 이러나 싶었다. 촬영장에서는 조신한 후배인 척 고분고분하더니 오늘은 대단한 결심이라도 한 사람마냥 들이대기 일쑤였다.
“아니.”
그는 정확하고 분명하게 의사를 전달했다.
“근데 왜 그래요?”
“하…….”
그의 짜증스러운 한숨이 뱉어졌다. 그는 현주의 주정을 받아 주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지만 아무 관련도 없는 여자의 주정을 받아 줄 만큼 다정한 사람은 아니었다.
“뭐가.”
“저 싫어하시잖아요.”
이건 또 뭔 소린가 싶었다.
“여기 민서 씨 매니저 없어요?”
지원은 더 이상 그녀에게 대꾸하지 않기로 마음먹고 그녀의 매니저를 찾았다. 하지만 이미 시장거리처럼 시끄러워진 식당 안에서 특정한 누군가를 찾기란 어려운 것이었다.
“매니저를 왜 찾아요. 내가 얘기하잖아요.”
“가만히 있어. 매니저 찾아올게.”
“아, 진짜!”
민서는 빽 하고 소리를 지르며 일어나려는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모두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식당 전체가 민서와 지원을 주목하고 있었다. 물론 그 안에는 현주도 포함되어 있었다.
“같이 밥 먹자고 해도 싫다고 하고, 같이 연습하자고 해도 싫다고 하고, 핸드폰 번호 좀 달라고 했더니 그것도 싫다고 하고. 아, 대체 왜 그래요?”
지원은 민서의 입을 막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지원뿐만 아니라 민서에게도 필요한 조치였다. 이제 막 시작하는 여배우가 술주정을 포함해 누군가에게 애정을 고백하는 것은 좋지 않은 것이었다.
저 멀리서 사태를 파악한 민서의 매니저가 달려왔다.
“민서야, 너 많이 취했다. 가자.”
“하나도 안 취했거든?”
실제로 그녀는 목소리만 조금 높을 뿐 얼굴이 빨간 것도 아니고, 몸을 못 가누는 것도 아니고, 눈이 풀린 것도 아니었다. 그저 술기운에 말도 안 되는 용기가 조금 생긴 것뿐이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지원을 똑바로 쳐다보고 말을 이었다.
“제가 아무리 첫날 실수했다고 해도 그러는 거 아니에요.”
“…….”
“제가 선배한테…… 얼마나 노력했는데……. 알아주지도 않고…….”
현주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피식 헛웃음이 나왔다. 애초에 그가 인기 없다는 가정이 불가능한 것이긴 했지만 상대가 민서일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강민서가 김지원을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건가?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저 멀리서부터 귀 언저리까지 구석구석 들려왔다.
‘뭐야,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야?’
‘민서 씨 혼자 그러는 거 같은데?’
분명 그렇게 디테일한 수군거림은 아니었지만 현주의 귀엔 드라마틱하게 각색되어 들렸다. 이런 일은 속전속결, 번개와 같은 움직임이 필요한 법이었다. 현주는 당차게 의자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요.”
자리에서 일어나는 현주의 손목을 잡은 것은 다름 아닌 연석이었다. 조심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젓는 그는 그녀에게만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지금 누나가 나서면 이상해요.”
글쎄. 현주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원 씨가 나서는 게 더 이상해.”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성큼성큼 지원과 민서가 있는 테이블까지 걸어간 현주는 민서의 어깨와 허리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민서 씨 많이 취했네. 매니저님, 차 어디 있어요?”
매니저는 0.2초 정도의 망설임 후 현주와 만담을 나누듯 소란을 떨었다.
“아, 식당 바로 앞에 있어요. 민서가 술이 워낙 약해서…… 하하.”
그럼에도 다물 줄 모르는 민서의 입은 제멋대로 움직였다.
“아, 나 안 취했다니까. 선배한테 할 말이……!”
“물 마셔요. 물!”
현주는 테이블 위에 놓인 아무 컵이나 집어 그녀의 입안으로 기울였다. 매니저와 현주가 벌이는 약간의 소란은 얼음 같던 식당 안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풀었다.
“하지 마.”
민서를 부축하느라 허리를 숙인 현주의 귓가에 지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이 할 일 아니야.”
그는 미안해하고 있었다. 물론 그가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그는 타고나길 잘생겼으며 매력적이고 또 관능적이었다. 그를 보고 혹하지 않을 여자가 어디 있으랴.
그럼에도 그가 현주에게 미안해하는 이유는 당연히 기분 나쁠 상황임에도 화 한 번 내지 않고 수습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 때문이었다. 지원은 그녀가 이런 일까지 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현주의 손목을 잡으려는 찰나,
“지원 씨가 할 일도 아니에요. 손 치워요.”
그녀가 아주 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원은 어쩔 수 없이 상황을 모른 척해야만 했다. 현주는 익숙한 동작으로 민서를 부축해 밖으로 나갔고 금방 다시 돌아왔다. 지원의 옆자리로.
“…….”
그는 돌아온 그녀에게 할 말이 없었다. 지원은 열심히 생각했다. 그녀는 화가 났을까, 아닐까. 혹시 오해라도 하는 것은 아닐까.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생각보다 그녀는 쿨했다.
“해명은 들을 거니까.”
역시 그럴 리 없었다.
타인의 소란은 언제나 가볍고 지독히도 불량스러운 법이다. 한 번 씹고 버려도 아깝지 않은 것이지만, 한 번도 씹지 않기엔 조금 아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특성이 가장 특화되어 있는 집단이 바로 연예계였다. 그걸 아는 현주가 마음 편히 회식을 즐기기란 거의 불가능한 것이었다.
“우리 유 작가 메인 작가 데뷔 축하해.”
현주가 막내 작가일 때부터 인연이 있었던 피디는 본인이 감격에 찬 듯 싱글벙글 웃었다.
“감사합니다.”
“시청률 어느 정도 예상해?”
“에이, 제가 시청률 기대할 위치는 아니죠.”
“아니긴 뭐가 아니야. 배우가 김지원, 강민서, 이연석인데.”
그녀는 운이 좋았다. 방송계의 나이 계산치고는 아주 빠른 나이에 메인 작가로 데뷔한 경우였고, 배우 복 역시 터질 지경이었다. 현주는 곰곰이 생각을 거듭해 봤다.
“음…… 10프로?”
“유 작가 생각보다 배포가 작네. 겨우 10프로?”
현주는 양심상 그 이상의 시청률을 말하기 어려웠다. 곤란한 듯 고개를 돌려 지원을 쳐다보자 지원은 턱을 괴며 말했다.
“15프로?”
지원의 현실적인 대답에 피디는 지루했는지 이내 더 자극적인 화제를 던졌다.
“우리 내기해 볼까?”
“내기요?”
“요새 시청률 공약이다, 뭐다 많이 하잖아. 연석아!”
피디는 내기를 한답시고 멀리 있던 연석을 테이블로 불렀다. 연석까지 테이블로 모이고 나니 현주는 드라마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좌지원, 우연석이라니. 그녀가 뿌듯한 미소로 연석을 쳐다보자 지원은 쿡, 하고 그녀의 옆구리를 찔렀다.
“자, 연석아. 우리가 시청률 내기를 할 건데.”
“내기요?”
“민서까지 껴야 딱이긴 한데 지금은 없으니까 유작가가 대신 할 거야.”
연석은 어깨를 으쓱이며 싱긋 웃어 보였다. 꽤 흥미가 생기는 모양이었다.
“지원이는 15프로, 유작가는 10프로 얘기했어. 연석이 너는 얼마로 할래?”
“음…… 맞추면 뭐 있어요?”
“맞추면 소정의 보람이 있지.”
워낙에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피디님이라 그런지 말발 하나는 끝내줬다. 현주는 입술을 쭉 내밀며 토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럼 제일 오차 심한 사람 벌칙이라도 줘요. 내기가 스릴이 있어야지.”
피디는 덩달아 신이 난 듯 엉덩이를 들썩였다.
“벌칙 좋지. 좋아. 뭐로 하지?”
별것도 아닌 걸로 피디와 연석과 현주는 순식간에 진지해졌다. 지원은 그 한심한 모습에 절대 동참하고 싶지 않았다.
“소원 들어주기!”
연석의 명랑한 목소리가 통통 튀어 올랐다.
“소원?”
고등학생들의 진실게임 벌칙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에 현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오차 범위가 제일 심한 사람이 소원 하나씩 들어주는 거예요.”
“안 들어주면?”
연석은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고개를 저었다.
“에이, 무조건이에요. 무조건!”
현주는 지원이 지면 어떤 소원을 들어 달라 말할지 고민했다. 갖고 싶었던 물건을 사 달라고 할까, 누나라고 불러 보라고 할까. 상상에 상상을 거듭할수록 입꼬리는 끝을 모르고 올라갔다.
“콜!”
그녀의 외침과 동시에 지원은 한숨을, 연석은 환희를 보였다.
“지원 씨도 동참하는 거예요! 알았죠?”
현주는 무심결에 지원의 손을 잡고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옆에서 피디 눈치를 살피던 연석이 헛기침을 하며 현주의 다른 한 손을 쥐었다. 그녀와 지원의 눈이 동시에 연석에게로 꽂혔다.
“왜?”
놀란 그녀가 묻자 연석은 눈짓으로 그녀가 잡은 지원의 손목을 가리켰다.
“아―”
현주는 깜짝 놀라며 잡았던 지원의 손을 놓았다.
“…….”
그럼에도 연석은 그녀의 손을 놓을 줄 몰랐다. 지원은 나른하게 늘어져 있던 상체를 세우고 불쾌한 듯 현주를 끌어당겼다.
분위기가 살짝 이상해질 찰나 완벽한 타이밍에 피디가 끼어들었다.
“그럼 벌칙도 정해졌으니 연석이 너만 시청률 정하면 되겠다.”
연석은 앵두 같은 입술을 한참 동안 오물거리더니 뒤이어 말을 뱉었다.
“20프로?”
“아, 역시! 아이돌의 패기!”
“욕심부릴 땐 제대로 부려야죠.”
내기는 성립됐다. 십, 십오, 이십이라는 매우 지루한 숫자의 나열은 소원 들어주기라는 아주 유치한 벌칙과 함께 꽤 중요한 약속이 되었다. 그 후로도 별 시답지 않은 농담과 웃음이 수십 번, 혹은 수백 번 반복됐다.
시간은 흘러 새벽 세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하나둘 이탈자가 생겼고 술에 취해 영혼을 잃은 사람들이 나타났으며, 멀쩡한 사람들끼리 2차를 가자고 외치는 주당들 역시 등장했다.
“가자.”
지원이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속삭였다. 모두가 취해 있었고 모두가 제정신이 아닌 때였다. 지금 당장 사라진대도 아무도 모를 것이었다.
“먼저 나가요. 금방 뒤따라갈게요.”
지원은 자연스럽게 식당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의 매니저는 이미 다른 차로 퇴근한 후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게서 문자가 왔다.
[오른쪽 골목에 차 세워 놨어.]
현주는 재빨리 가방을 챙겨 유령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요?”
밤이 깊어 목이 잠긴 연석이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응, 이제 가야지.”
“그래요. 다음 주에 만나요.”
연석은 섬섬옥수 같은 손을 흔들며 다정하게 말했다.
“다음 주?”
현주는 자신도 모르게 약속이 잡혔나 싶었다. 연석은 그런 그녀를 보며 눈꼬리를 휘었다.
“우리 내기했잖아요.”
“아, 내기.”
“누나가 졌으면 좋겠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
“시청률 대박 치면 나도 손해 볼 건 없잖아.”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었다. 성질 급한 지원이 문자에서 그치지 않고 전화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나 진짜 가야겠다. 안녕!”
“잘 가요.”
현주는 식당 밖으로 나와 한산한 공기를 마시며 그의 차를 찾았다. 짙은 선팅으로 안이 보이지 않는 그의 차를 찾는 것은 쉬웠다.
“그새를 못 참고 전화를 하시나!”
현주는 조수석에 올라타며 그를 나무랐다. 장난스러운 애교였지만 그에겐 애교가 아닌 모양이었다. 가뜩이나 날카로운 눈이 칼날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지원은 말없이 시동을 걸고 운전을 시작했다. 새벽이라 텅 빈 도로는 그의 운전 속도를 한없이 빠르게 만들었다.
“유현주.”
“네?”
“미리 말해 두는 데 이건 질투가 아니야.”
고해성사를 하듯 무턱대고 말을 시작한 그는 끓어오르는 화를 꾹꾹 누르는 데 온 힘을 다했다.
“다른 새끼가 당신 몸에 손대는 거 싫어.”
현주는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싶었다. 갑작스러운 비속어도 비속어였지만 대체 누가 자기 몸에 손을 댔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이에요.”
“이연석 말이야. 이연석.”
“네?”
현주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연석이 자신의 몸에…… 아!
“손목이요?”
“하―”
다시 생각해도 열 받는지 그는 한숨을 뱉으며 미간을 구겼다.
“에이, 난 기억도 안 날 만큼…….”
“불쾌해.”
그녀의 태평한 어투에 짜증이 난 그는 말을 자르고 마음을 드러냈다.
“나는 이제 겨우 당신한테 닿기 시작했는데.”
“…….”
“딴 새끼가 탐내는 거 싫어.”
현주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말하면서도 부끄러운지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그가 참을 수 없이 사랑스러웠다.
“누가 나를 탐낸다고 그래요.”
“당신은 누가 봐도 탐낼 사람이야.”
현주는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과 귓바퀴를 어루만졌다.
“어마어마한 팔불출 납셨네.”
“웃지 마. 나 진지해.”
“걱정 말아요. 어떤 누가 탐내도 안 가요.”
“…….”
지원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현주와 눈을 맞췄다.
“술 마시지 말라니까.”
“치, 괜히 민망하니까 잔소리한다.”
생각해 보니 불쾌할 사람은 그가 아니라 그녀였다. 어느 순간 주객이 바뀌어 버린 상황에 현주는 어이가 없었다.
“이봐요. 김지원 씨.”
“응?”
“민서 씨는 어떻게 된 거예요?”
지원은 핸들에 고개를 박는 시늉을 했다. 탁한 한숨에도 그의 옆모습은 황홀했다.
“나 불쾌해요.”
현주는 방금 전 그의 말을 따라했다. 그의 입가에서 피식하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불쾌하긴.”
“내 말 무시하는 거예요? 나 완전 불쾌한데.”
“강민서 말 못 들었어?”
“들었어요. 구구절절 지원 씨 좋아한다는 내용이었잖아요.”
그는 가만히 그녀의 손을 쥐었다.
“같이 밥 먹자고 해도 싫다고 하고.”
“…….”
“같이 연습하자고 해도 싫다고 하고.”
“…….”
“핸드폰 번호도 안 줬다고 하지 않았나?”
“어…… 그랬어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철벽도 그런 철벽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문득 그녀가 불쌍해졌다.
“나랑 안 만났으면 민서 씨 받아 줬어요?”
“아니.”
너무도 당연하게 나오는 그 대답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좋았다.
“왜요?”
“안 예쁘잖아.”
그건 현주가 생각해도 이상한 대답이었다. 그녀의 성격이 싫다든가, 목소리가 싫다고는 할 수 있었지만 예쁘지 않다고 하는 것은 모순이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여자가 보아도 세련되고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대답에 진정성이 없네.”
“왜? 완전 진심인데.”
“난 예뻐서 만나요?”
“응, 당신은 너무 예뻐.”
그 말에 현주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고 그는 귀엽다는 듯 웃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자 현주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 우리 집 가는 길 아닌데요?”
차 밖으로 보이는 광경은 익숙한 것이 아니었다.
“김지원 씨, 대답 좀 하세요.”
“응?”
“여기 우리 집 가는 길 아니라니까요?”
“알아, 우리 집 가는 거야.”
그는 어울리지도 않는 말장난을 하며 운전을 계속했다. 음흉하기는.
“지원 씨 집으로 가요?”
“응.”
“누구 마음대로?”
“내 맘대로.”
더 항의해도 달라질 것은 없어 보였다. 그는 뭐가 문제냐는 듯 능청스러운 미소를 지었고 현주는 이내 포기해 버렸다. 그와 헤어지는 것이 그녀도 좋지는 않았다.
“다음부턴 미리 말이라도 좀 해 줘요.”
“왜?”
“준비라도 좀 하게요.”
지원은 그 말에 야한 상상이라도 하는 듯 귀가 빨개졌다.
“준비?”
내심 기대하는 듯 묻는 그가 한심하기도, 귀엽기도 한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 그런 거 말고요!”
“…….”
“갈아입을 속옷이랑 옷, 화장품 이런 것 좀 챙기게요.”
“아.”
지원은 그제야 짧게 깨달음을 느꼈다. 이미 민낯이고 맨몸이고 서로에게 모든 것을 오픈한 사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연인 사이의 환상은 필수 불가결한 것이었다. 빨간 신호가 켜지고 차는 잠깐 속도를 늦췄다.
“현주야.”
“왜요.”
“우리 같이 살까?”
“…….”
느닷없는 동거 신청에 그녀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지원은 그런 그녀의 얼굴이 귀엽다는 듯 인자하게 웃었다. 길게 뻗은 그 눈이 부드럽게 휘어질 때면 그녀는 마음이 두근거렸다.
“갈아입을 속옷이랑 옷도 필요하고, 당신이 쓸 화장품도 있어야 한다며.”
“…….”
“우리 집으로 다 옮겨. 그리고 같이 살자.”
그는 그 방법이 정말로 간절했다. 지원은 대한민국에서 제일 바쁜 사람 중 하나였고 그녀 역시 규칙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직업의 소유자였다. 그런 두 사람이 서로 다른 곳에서 살면서 연애하기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미쳤어요?”
고분고분 알았다고 할 그녀가 아니었다. 그녀 역시 지원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 파리에서의 시간이 얼마나 황홀했는지 생각만 해도 그리움에 사무쳤다. 하지만…….
“들키면 어쩌려고요.”
지원은 놀라서 토끼 눈이 돼버린 그녀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게 다야?”
“네?”
“우리가 같이 살면 안 되는 이유가 고작 그뿐이냐고.”
지금 당장 생각나는 것은 그뿐이었다. 현주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그는 입꼬리를 말며 시원하게 웃었다. 그가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향수 냄새가 곱게 퍼져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우리가 같이 사는 게 더 안 들킬걸?”
“…….”
맞는 말이었다. 현주는 입술을 깨물며 다음 말을 생각했다. 핑계는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데 거절은 해야 할 것 같았다. 그 역시 그녀의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생각해 봐.”
다정하고 부드러우며 어떠한 압박도 없는 완벽하게 배려가 가득한 대답이었다.
“…….”
“시간은 얼마든지 줄게.”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녀가 부담스러워한다면 그냥 지금처럼 자주 얼굴 보고, 자주 함께 밤을 보내고, 가끔 여행도 가면 충분했다. 현주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
“대신 시간 많이 줘요.”
“응. 다 써.”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기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과의 매일을 바란다고 얘기하는데 어떤 여자가 행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내리자.”
지원은 친히 그녀의 문을 열어 주며 친절히 굴었다. 그녀가 놀랬을 거라는 것쯤은 그도 예상한 바였다. 단번에 싫다고 하지 않은 그녀가 그저 예쁠 뿐이었다.
띠리릭―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선 그의 집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현주는 익숙하게 신발을 벗고 가지런히 정리했다.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한 집 안을 보며 그녀는 문득 궁금해졌다.
“지원 씨 혹시 결벽증 있어요?”
“응? 아니.”
짙은 회색 니트를 벗어 소파 위에 올려 둔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럼 집안일 도와주시는 아주머니라도 있어요?”
“있을 것 같아?”
그는 피식 웃으며 물었다. 있을 리 없었다. 그는 물건이든, 사람이든 자기 것이라는 소유욕과 지배욕이 강한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의 손이 타는 것을 편안하게 바라볼 위인이 못 됐다.
“그럼 지원 씨가 청소 직접 해요?”
“응.”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결벽증 맞네.”
그의 집 바닥은 흰색 대리석이었고 벽지는 물론 웬만한 가구들 역시 모두 흰색이거나 아이보리색이었다.
혼자 사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구성이 얼마나 피곤한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머리카락 하나, 먼지 한 톨만 떨어져도 옥의 티가 되기 마련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집은 언제나 늘 완벽하게 깨끗한 상태로 유지되고 있었다.
“그렇게 바쁘면서 청소는 어떻게 해요?”
“쉴 때 제대로 하고 어지르지 않는 거지.”
“난 그렇게 안 되던데.”
신기한 듯 바닥을 매만지는 그녀의 모습이 놀이터에 온 어린아이마냥 아담했다. 지원은 그런 그녀에게 방법을 일러주기 시작했다.
“집에 있는 시간이 워낙 없으면 그렇게 돼.”
생각해 보니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어차피 잠만 자고 나가는 것뿐인 이 집 안이 더러워질 확률은 극히 적었다.
“난 어지르는 거 좋아하는데.”
지원은 잠시 기분 좋은 상상에 빠졌다. 삭막하기 그지없는 이 집 안에 그녀가 들어와 이곳저곳에 생기를 불어넣는 광경이 따뜻하게 펼쳐졌다.
“밥만 해 줘. 청소는 내가 할게.”
흡사 신혼부부나 할 법한 대화가 오갔다. 현주는 설거지도 해 줄 거냐며 물었고 지원은 까짓것 해 주겠다고 대답했다. 조금 더 대화가 진행됐다간 동거를 찬성하는 쪽으로 덜컥 기울 것 같았다.
“음…… 전 샤워하러 갈게요!”
그녀는 벌떡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문을 잠그고 찬물을 틀었다. 화끈거리는 얼굴을 조금이라도 빨리 식혀야 할 것 같았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지원 씨?”
“잠깐 문 열어 봐.”
“왜요?”
현주는 괜한 의심에 눈을 가늘게 떴다. 아직 옷을 벗지도 않았지만 머릿속에 음란마귀라도 들어온 것인지 자꾸만 야한 생각이 폴폴 났다. 하얀 욕실 문 너머로 그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30초면 충분해. 열어 줘.”
하는 수 없이 그녀는 문을 열었다. 상상으로는 기습 키스나 혹은 그보다 더한 것을 생각했지만 그는 아주 젠틀한 모습으로 문 앞에 서 있었다.
“왜요?”
“이거.”
그가 내민 것은 작은 쇼핑백이었다. 이게 뭐냐는 듯 얼굴을 갸웃거리는 그녀를 향해 지원은 무심히 말했다.
“속옷이야.”
“네?”
“남자 친구 취향의 속옷 하나 정도는 갖고 있어야지.”
능글거리며 웃는 그의 눈동자가 천천히 그녀의 온몸을 어루만졌다. 현주는 술기운이 오르는 듯 얼굴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직, 직접 산 거예요?”
별 시답지 않은 말이 튀어 나갔다.
“응. 선글라스랑 황사 마스크로 무장해서 사 왔어.”
“…….”
“기특하지 않아? 바빠 죽겠는데 선물도 준비하고.”
그는 어서 칭찬해 달라는 듯 상체를 숙여 그녀와 얼굴을 마주했다. 볼 뽀뽀를 기대하는지 고개를 살짝 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젠 익숙해질 법도 한데 현주는 괜히 쑥스러워졌다.
“변태인 줄 알았겠다.”
“어?”
“매장 직원들 말이에요.”
“…….”
“키 큰 남자가 선글라스에 마스크로 중무장해서 여자 속옷을 사러 왔으니…….”
지원은 애정을 애정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녀가 귀여웠다.
“작가님이 이렇게 표현을 못 해서야…….”
그는 큰 손으로 그녀의 정수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동안 대체 어떤 놈들이랑 연애한 거야?”
“…….”
“이런 거에 고맙다는 말 하나 제대로 못 나오게.”
“…….”
“그냥 고맙다, 사랑한다면 충분해. 쓸데없는 말로 무드 깨지 말고.”
현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아이 잘한다.”
그는 만족스럽다는 듯 짧게 입을 맞췄다. 그러곤 사랑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다정히 말했다.
“갈아입을 옷 문 앞에 둘게. 나는 안쪽 욕실 쓸 거니까 천천히 씻고 나와.”
“그럴게요.”
현주는 욕실 문을 닫으며 가쁜 숨을 내뱉었다.
“하…….”
그는 분명 전생에 구미호였음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사람을 홀리는 것은 반칙이었다.
현주는 분홍색의 작은 쇼핑백을 내려다보았다. 핫핑크색의 리본이 앙증맞았다.
리본을 풀고 안에 있는 분홍색 상자를 열자 흰색의 심플한 속옷이 나타났다. 대충 보아도 좋은 재질이라는 것으로 보이는 그 속옷은 심플하지만 부분마다 레이스로 장식되어 지나치게 선정적이지도, 너무 지루하지도 않은 디자인이었다.
“예쁘다.”
생각해 보니 그에게 받은 첫 선물이었다.
예전에 그와 아무 관계도 아니었을 때 들었던 충고가 떠올랐다. 속옷을 쇼핑해 보라는 그의 조언이 여자로서 창피하기도 하고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역전된 상황이라니. 아주 감개무량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녹이고 기분 좋은 향기의 클렌저로 샤워를 하고 나니 몸에 붙은 고기 냄새와 술 냄새가 말끔히 사라지는 것 같았다. 호텔에나 있을 법한 커다란 수건으로 몸을 꽁꽁 감싼 채 욕실 문을 열자 바닥에 속옷 상자와 똑같은 색의 그러나 조금 큰 상자가 있었다.
상자 안에는 작은 카드와 누드 톤의 슬립이 있었다.
「이것까지 입어야 내 취향이야.」
그의 성격만큼이나 깔끔한 글씨체였다. 심혈을 기울여 골랐을 그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얼마나 고민을 했을까. 현주는 망설임 없이 슬립을 들고 다시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몸에 정확히 맞는 사이즈에 한 번 놀라고 놀랍도록 관능적인 모습에 또 한 번 놀랐다.
“내 몸이 원래 이런가?”
이래서 속옷만 잘 입어도 자존감이 넘친다는 소리를 하는 건가 싶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웠다. 적당히 볼륨 있어 보이는 곡선, 화려한 자수로 수놓인 슬립. 갑자기 자신감이 솟구쳤다. 발소리를 내지 않으려 살금살금 침실까지 걸어간 그녀는 닫힌 침실 문을 똑똑 두드렸다.
“응.”
그의 낮고 나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들어가도 돼요?”
“응, 들어와.”
긴장된 손으로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스탠드만 켜진 방 안은 달빛과 노란 빛이 어우러져 야릇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지원은 새로 받은 시나리오를 읽고 있던 중인지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대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현주는 그가 자신을 볼 수 있게 헛기침을 했다.
“지원 씨―”
그의 눈이 대본에서 그녀에게로 옮겨졌다. 당황스러움이 스치고 놀람이 번졌다가 불타는 욕망으로 가득 채워졌다. 현주는 만족스러운 듯 씨익 웃으며 말했다.
“어때요?”
왠지 도발하고 싶어졌다. 꿀꺽― 적나라한 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그는 잔뜩 여유로운 걸음을 내디뎠다. 그 모습은 흡사 맹수와 같아서 현주는 자연스럽게 몸을 움츠렸다. 손길이 닿지 않아도 전희는 가능했다.
“…….”
온몸에 달라붙는 그의 시선은 소름 끼치도록 황홀했다. 그의 눈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다. 현주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더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 그녀는 다가온 지원의 목에 가는 팔을 둘렀다. 그의 입꼬리가 기분 좋게 말렸다.
“술 마시더니 용기가 넘치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정신은 멀쩡했다. 하지만 지원의 말을 기점으로 눌러둔 술기운이 연기처럼 피어올라 온몸을 잠식했다. 기분은 몽롱했고 자신은 넘쳤다. 그리고 여전히 궁금했다.
“왜 대답 안 해요.”
“뭐를.”
“마음에 들어요?”
“…….”
지원은 보채는 그녀를 보며 나직하게 웃었다. 그의 욕심을 모를 리 없는 그녀가 무슨 용기로 이렇게 도발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마음에 들어.”
그는 잘록하게 들어간 현주의 허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촉감의 슬립이 그의 손길대로 말렸다가 풀어지며 그녀의 몸을 감쌌다.
“흐음…….”
작은 손길에도 참지 못하고 신음을 뱉는 그녀를 보며 지원은 참을 수 없는 갈증을 느꼈다. 그는 부드럽게 그녀를 안아 올려 침대에 누였다. 그녀 위로 올라탄 그는 감상하듯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
평소라면 그가 이끄는 대로 가만히 있었을 그녀였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그만 그녀를 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 역시 그를 원하고 마음껏 취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현주는 오른팔을 들어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내가 할래요.”
“응?”
“내려와요.”
“…….”
“올라가게.”
지원은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마음 같아선 부드러운 슬립을 당장이라도 걷어 내 온몸에 키스를 퍼부어도 모자랐지만 조금은 그녀의 몸짓을 즐겨 보고 싶었다.
지원은 그녀를 누르던 힘을 풀었다. 현주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의 몸을 끌어당겼다. 지원은 침대에 몸을 누이고 현주를 제 위에 앉혔다.
“자신 있어?”
그가 물었다. 현주는 얄미운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소녀 같은 짧은 입맞춤이 아닌 길고 진한 키스였다. 현주는 그의 도톰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물컹하게 느껴지는 감촉이 젤리처럼 달았다. 그 안의 혀는 흠뻑 젖어 거칠게 엉겨 붙었다. 삼켜질 듯 말 듯 달아나는 그의 혀가 그녀의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하아…….”
가는 손으로 그의 목을 잡아 쥐고 조금 더 가까이 하기 위해 입술을 내리는 그녀의 몸짓은 지원의 인내심을 시험했다. 그는 제 위에 엎드리듯 누워 있는 그녀의 등허리를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간지럽혔다.
“으음…….”
자극적인 그의 손짓에 현주는 입술을 떼고 상체를 일으켰다. 지원은 그런 그녀의 뒷목을 감아 끌어당겼다. 떨어졌던 입술이 다시 한 번 붙었고 아까보다 더 농염하고 강한 키스가 이어졌다. 이번엔 지원이 상체를 일으켜 그녀를 다시 제 아래로 눕혔다.
“안 되겠다.”
지원은 뜨겁게 타오르는 눈을 빛내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내 위에서 하는 건 다음에 해.”
“…….”
그는 말을 마치고 침대 아래쪽으로 몸을 옮겼다. 그녀의 가는 발목과 작은 발이 눈에 들어왔다. 지원은 경배하듯 발등에 입을 맞췄다.
“간지러워요.”
현주의 앙탈에도 그는 발등에서 발목, 종아리까지 키스를 이어 나갔다. 그의 입술이 허벅지 안쪽까지 침범하자 그녀는 다리를 모으고 몸을 떨었다.
“아앗―! 그, 그만해요.”
“싫어, 맛있어.”
그는 얄밉게도 싫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허벅지에 붙어 떨어질 줄 모르는 그의 입술은 그녀의 여린 살결을 쪼옥 빨아들였다가 뱉어 내며 붉은 자국을 만들어 냈다.
“아앗!”
그럴수록 그녀의 신음이 거칠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지원은 슬립 밑자락을 움켜쥐며 숨겨져 있던 하얀 팬티를 한 번에 벗겨 냈다. 현주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하아…… 뭐예요.”
“왜.”
“이 속옷, 지원 씨 취향이라면서요.”
“그래서.”
“예쁜지는 좀 보고 벗기지.”
생각하는 게 참 엉뚱했다. 속옷 벗긴 남자한테 하는 말이 고작 예쁜지는 보고 벗기라는 거라니. 지원은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다 벗은 게 제일 예쁠 텐데, 뭐.”
이것이 그가 생각하는 진리였다. 그는 다시 상체를 숙여 그녀의 몸에 키스했다. 작은 둔덕을 모른 척 지나 배꼽에 혀를 축이고 배에 입을 맞춘 후 가슴을 가린 또 다른 속옷을 맞이했다.
“잘못 생각한 것 같아.”
그는 탄식하며 말했다.
“뭐가요?”
“속옷 선물한 거.”
“…….”
“벗기기 불편해.”
이번엔 현주가 꺄르르 웃었다. 지원은 그런 현주의 목과 쇄골을 깊게 빨았다.
“아, 안 돼요! 거기는 자국 나면 안 돼요.”
“…….”
그는 잠깐 행동을 멈추더니 이내 하던 것을 마저 했다. 그녀의 가는 목에 붉은 자국이 적나라하게 새겨졌다.
“아, 자꾸 말 안 들을 거예요?”
그 말에 반항이라도 하듯 그는 그녀의 손목을 깨물었다.
“아앗!”
자국 난 손목 위를 혀로 적시고 다시 한 번 입을 맞췄다. 그는 슬립 끈과 브라 끈을 같이 쥐고 어깨 아래로 내렸다. 그녀의 봉긋한 가슴이 드러났다.
“하아…….”
가슴 사이로 느껴지는 찬 기운에 현주는 눈을 감고 아찔함을 만끽했다. 그는 그녀의 가슴을 부드럽게 쥐었다가 그림 그리듯 빙글빙글 돌렸다.
가는 허리를 부서져라 껴안고 하얀 가슴에 쉴 새 없는 입맞춤을 퍼붓던 그는 손을 내려 그녀의 작은 꽃잎을 어루만졌다. 촉촉이 젖은 그곳이 어서 자신에게 오라고 애원하는 듯 느껴졌다.
“하, 미치겠네.”
지원은 짧은 탄식과 함께 웃옷을 벗고 바지 버클을 풀었다. 불룩 솟은 그의 남성이 강한 존재감을 뽐냈다. 그는 더 기다릴 수 없었다. 맑은 샘처럼 향기를 뿜어내는 그곳으로 더 이상 가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그는 그녀의 허벅지를 벌리고 그녀의 안으로 들어갔다.
“하앗!”
그녀의 짧은 비명과,
“으음…….”
그의 나른한 황홀경이 터져 나왔다. 밀어 넣었다가 애태우듯 다시 나오기를 반복했다. 사과처럼 동그란 그녀의 엉덩이와 그의 단단한 허벅지가 부딪히는 소리도 계속됐다.
그가 쳐올릴수록 그녀는 격렬하게 흔들렸다. 만지는 것보다 보는 것이 더 아찔했다. 채 다 벗겨지지 않은 그녀의 슬립이 애처롭게 걸쳐져 있었다.
“유현주.”
“…….”
지원은 벌어진 그녀의 입속에 손가락 하나를 집어넣었다.
“하…….”
뜨거운 혀가 그의 손가락을 적시며 열띤 숨을 뱉어 냈다. 현주는 고개를 젖혔고 지원은 젖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문질렀다.
“하…… 하아…… 지원 씨.”
질척이는 소리가 신음과 맞물려 더욱 외설적으로 울려 퍼졌다.
지원은 그대로 상체를 숙여 그녀의 가슴을 입에 물었다. 혀에 닿는 단단한 감촉이 그를 즐겁게 했다. 닿는 대로 소름이 돋았다. 이어서 현주의 귀를 빨았다. 그녀는 아찔함에 몸을 덜덜 떨며 고개를 돌렸다. 지원은 그런 그녀의 턱을 쥐고 물었다.
“어때.”
“하아…… 하…… 네?”
“마음에 들어?”
그녀가 물어본 것을 다시 한 번 묻는 그의 심보는 짓궂었다. 딱히 괴롭히려고 물은 질문은 아니었지만 듣고 싶었다. 죽어도 좋을 것 같은 이 쾌락을 그녀도 오롯이 느끼고 있는지 궁금했다.
“하아…… 하앗!”
지원은 그녀에게 대답을 재촉하듯 거칠게 움직였다. 현주는 시트를 움켜쥐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자 지원은 그녀의 입술을 매만지며 말했다.
“깨물면 안 돼.”
“…….”
“내 거야.”
“…….”
지원은 슬립을 말아 쥐고 그녀의 머리 위로 끌어 올렸다. 온전히 나체가 된 그녀는 부끄러움에 팔로 가슴을 가렸다. 지원은 그것조차 용납할 수 없다는 듯 팔을 풀고 손목을 움켜쥐었다. 절정은 바로 앞이었다. 그는 모든 행동을 느리게 바꾸며 그녀를 애태우기 시작했다.
“하아…… 하…… 지원 씨.”
“응.”
“왜, 왜…….”
“뭐가.”
“그러지…… 마요.”
현주는 콕 집어 말하지 못하고 애원했다. 지원은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는 큰 손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몸을 탐했다. 분홍빛의 가슴부터 여성스러운 곡선의 허리, 그를 감싸고 있는 다리까지 손에 닿는 모든 곳이 달았다.
“하아…… 지원 씨, 빨리.”
“…….”
지원은 손을 떼고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올 듯 말 듯 어지러운 감각이 날카로워졌다.
“원하는 걸 말해.”
지원의 낮은 목소리가 명령하듯 뱉어졌다.
“내 사랑.”
그러고는 다정해졌다. 무슨 말을 해도 받아 줄 것처럼 부드러운 그 말투에 현주는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을 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멈추지…… 말아요.”
“…….”
“너무 좋으니까.”
지원은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그녀에게 키스했다. 그러곤 순식간에 그녀를 뒤집었다.
“아앗―”
지원은 눈앞에 펼쳐진 그녀의 엉덩이와 가녀린 등을 바라보며 탄식했다.
“하아―”
그는 동그란 엉덩이를 부드럽게 움켜쥐며 여전히 단단한 제 남성을 밀어 넣었다. 앞에서의 속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고삐 풀린 미친 말처럼 속도를 올렸다.
“하앗……! 핫, 지, 지원 씨!”
현주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지원은 상체를 숙여 그녀와 완벽하게 포개졌다. 허리를 움직이며 느껴지는 그녀의 몸이 좋았다.
“사랑해.”
온몸이 땀으로 적셔지고 격정적인 몸짓이 수 분간 이어진 후에야 그는 끓어오르는 탄식을 뱉어 내며 절정을 맞이했다.
“하아…….”
“하앗.”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랑해요.”
지원은 그대로 쓰러져 현주를 품 안 가득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