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 여행 (16/20)

16. 여행

“인도 어때요?”

“안 돼. 위험해.”

“그럼…… 미국이요! 나 미국 한 번도 안 가 봤어요.”

“미국은 시골 촌구석을 가도 한국인이 있어.”

여행지를 정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 줄 몰랐다.

“에이, 그럼 대체 어디를 가자는 거예요.”

“파리 어때?”

“거기도 한국 사람 엄청 많을걸요?”

“지금은 비수기라 괜찮아.”

줄다리기 같은 대화는 새벽 내내 이어졌다.

“그냥 솔직하게 말해요. 파리 가고 싶다고.”

“응, 파리 가고 싶어.”

숱한 번복과 고민에도 정해지지 않던 여행지가 뻔뻔하기 그지없는 지원의 인정으로 단박에 정해졌다.

“파리 가 봤어?”

지원은 생각만 해도 행복해지는 기분이었다. 돈은 벌어 뭐하고, 시간은 남아 뭐하냐는 그의 지론을 부술 때가 된 것이었다. 그의 돈과 시간은 그녀를 위해 존재했다.

“네.”

“누구랑?”

그 즐거운 상상 속에서도 질투를 멈추지 못하는 그를 보며 현주는 미간을 찌푸렸다.

“별로 좋은 기억 아닌데.”

지원은 침묵해야 할 때를 정확히 아는 남자였다.

“괜찮아. 나랑 같이 가면 좋아 죽을 기억밖에 없을 거야.”

“자신 있어요?”

“파리에서 살자고 빌지나 마.”

그는 침대 옆 탁자 위에 놓인 작은 달력을 팔랑팔랑 넘겼다.

“이 방은 시간이 멈췄어? 왜 아직 작년이야.”

“바꿀 시간이 없었어요.”

“남는 게 시간이면서.”

지원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더니 달력을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그녀는 얼굴을 찡그리며 그를 나무랐다.

“달력 주인은 나거든요.”

“당신 주인은 나야.”

감탄스러울 정도로 의도적이고 매력적인 화법이었다.

“……아, 아직…….”

“곧.”

“…….”

“곧 그렇게 될 거야.”

지원은 그녀를 품에 가두고 눈을 감았다.

“이번 주만 견디면 돼. 이번 주만 견디면 당신이랑 둘이 있을 수 있어.”

“이번 주 많이 바쁘겠네요.”

“응. 엄청.”

“…….”

“응원해 줘.”

스스로도 유치한지 그는 입꼬리를 비스듬히 끌어올리며 킥킥 웃었다. 달빛에 비친 그의 얼굴이 청초했다.

“힘내요.”

“응.”

“셔츠라도 벗고 자요. 불편하잖아요.”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나도 그러고 싶어.”

“편한 옷 줄까요?”

“아니.”

“…….”

“내가 당신 옷도 벗기면 어떡해?”

그는 그런 말을 하면서도 진지한 표정을 잃지 않을 정도로 뻔뻔했다. 현주는 그런 그의 팔을 장난스럽게 밀어내며 새침하게 굴었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요. 쫓겨나는 거지.”

“참…….”

그는 현주의 철벽이 느슨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것은 그에게 있어 세상 가장 두꺼운 철벽과도 같았다. 어찌나 두꺼운지 그 벽에 손을 갖다 대기도 무서웠다.

“인생 살기 힘드네.”

그는 진심 가득한 탄식을 뱉어 냈다.

* * *

끔찍이도 느릴 줄 알았던 일주일은 생각보다 빠르게 지나갔다. 그는 배우 김지원의 일상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정신없었고, 그것은 현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일주일 내내 두근거리는 심장의 푼수 짓을 달래기 위해 쉴 틈 없이 글을 썼다.

매일 쓰는 일기는 물론이고 시작하는 연인을 주제로 한 소설도 썼다. 소설의 배경이 파리라는 점이 그녀를 부끄럽게 했다.

― 준비 다 했어?

“안 들킬 자신 있어요?”

핸드폰 너머의 지원은 이미 공항이라고 했다. 말은 안 하지만 매니저도 없이 여행하는 것이 오랜만인 지원도 기대와 설렘에 흥분한 것 같았다.

― 당신은 나에 대한 불신이 뼛속 깊은가 봐. 의심을 안 하는 때가 없네.

그의 말은 분명 농담이었지만 현주는 약간의 죄책감이 느껴졌다.

“걱정되니까 그러죠.”

― 걱정을 해도 내가 하니까 유현주는 부디 아무 생각 없이 오세요.

“알았어요, 알았어.”

― 안 들키려고 이런 짓까지 하잖아, 우리가.

그가 말하는 ‘이런 짓’이란 소위 말해 이런 짓이다.

지원이 현주보다 세 시간 먼저 비행기를 탄다는 것, 둘은 프랑스 파리 어딘가의 호텔에서 재회하기로 했다는 것, 소속사에서 공식적으로 내놓은 지원의 스케줄은 밀린 인터뷰를 소화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의 배경에는 그의 매니저가 있었다.

“근데 무슨 자리를 퍼스트 클래스로 잡았어요?”

현주는 비행기 티켓을 확인하며 물었다. 해외여행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었지만 퍼스트 클래스를 탄 적은 없었다. 그녀에게 퍼스트 클래스란 소위 재벌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들이나 타는 자리였다.

― 당신 편하게 비행하라고.

그러나 지원은 그저 그녀를 편하게 할 작은 수단 정도로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난 비행기에서 잠만 자요.”

― 그럼 편하게 자라고.

“괜히…….”

― 이럴 땐 그냥 고맙다고 해. 나한테 겸손해하지 마.

“…….”

― 당신보다 비싼 건 없어.

저런 말을 가르치는 학원이 따로 있는 것인가 싶었다.

“고마워요.”

그래도 고맙긴 했다.

― 응.

그 짧은 대답 안에서도 그의 작은 웃음소리는 분명하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 프랑스에서 만나.

“곧 봐요.”

그와의 전화를 끊은 현주는 어제도 몇 번씩 확인했던 여행 가방을 체크했다. 화장품, 선크림, 세면도구를 가지런히 모아 정리하고 두꺼운 옷들은 차곡차곡 포개었다. 속옷은…… 이 망할 놈의 속옷은 위아래 짝을 이룬 예쁜 것들로만 골라 넣었다. 그의 조언으로 구입했던 짙은 보라색의 속옷도, 검은색의 얇은 망사 속옷도 챙겼다.

“난 그냥 좋은 속옷을 가져가는 것뿐이야.”

그녀도 그를 닮아 뻔뻔해지고 있었다. 열 시간이 넘는 비행을 고려해 갖고 있는 것 중 가장 편한 옷과 편한 운동화를 착용한 그녀는 집을 나서기 전 불현듯 스치는 기억 하나를 끄집어냈다.

‘수현 오빠! 나 프랑스 처음 와 봐.’

‘너랑 오니까 좋다. 다음에 꼭 다시 오자.’

일 년 전 이미 끝나 버린 인연과 사랑의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지루해.’

‘금방 질릴걸.’

그 뒤로 그 인연의 잔인함이 또 한 번 스쳤다. 현주는 자연스레 몸을 움츠렸다. 어서 빨리 지원이 보고 싶었다.

* * *

지원은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옷을 벗고 샤워를 했다. 비행기 안에서의 피로는 목욕물의 따뜻함으로도 충분히 풀렸다. 그녀의 체온만 닿으면 모든 것이 완벽할 것 같았다. 그는 물기 가득한 머리를 수건으로 털어 내며 가져온 캐리어를 열었다.

“뭔 옷이 이렇게 많아.”

그가 생각해도 너무 많았다.

“직업병이다. 직업병.”

그는 해외로 화보 촬영을 나갈 때면 챙기는 구성으로 짐을 꾸렸다. 화려한 옷 몇 벌과 기본적이지만 적당히 멋스러운 옷 몇 벌, 선글라스와 운동화까지 커다란 캐리어를 꽉 채웠다.

생각해 보면 온전히 개인적인 이유로 해외여행을 하게 된 일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현주만큼이나 그 역시 설레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었다. 강박적일 정도로 자주 핸드폰의 시간을 확인했다.

“하아…….”

어린왕자에서 나오는 장미의 기다림은 개뿔. 그녀가 네 시에 오기로 했다면 그는 네 시가 되기 전까지 줄곧 괴로웠다. 기다림은 아주 작은 즐거움도 주지 못했다.

― Rrrrr.

“응.”

절묘한 타이밍에 핸드폰이 울렸다. 그는 거의 튕겨져 나가듯 튀어 올라 전화를 받았다. 드디어 그녀가 도착한 것이었다.

― 시내로 들어가는 버스 탔으니까 곧 도착할 거예요.

“마중 나갈게.”

― 거기 있어요.

“거참, 걱정 그만하라니까.”

지원은 조금이라도 빨리 그녀를 봐야 했다. 그녀가 거리에 있다면 그는 거리로 나가야 했다. 현주의 나른한 목소리가 노랫소리처럼 이어졌다.

― 나 졸려요.

“…….”

― 우리 내일부터 놀아요.

“…….”

― 오늘은 호텔에 있어요.

그녀는 알까. 고작 졸리다는 말 한 마디가, 고작 호텔에 있자는 말 한 마디가 그를 뿌리째 쥐고 흔든다는 것을. 지원은 크게 숨을 들이쉬고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를 만들어 냈다.

“그래, 그럼.”

― 고마워요.

지원은 전화를 끊고 방 안의 창문을 전부 열었다. 호텔의 가장 큰 스위트룸을 예약한 참이었다. 혹시나 방 밖으로 조금도 나가지 않는 사태가 발생하더라도 답답하지 않기 위해 세운 그의 치밀한 전략이었다.

창밖으로는 에펠탑이 바로 보였다. 에펠탑처럼 관광객이 많은 곳은 그녀 스스로가 가지 않을 것이었다. 그녀는 그를 위하는 일이라 생각하겠지만 그에겐 그저 속상한 일이 될 것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그녀에게 주고 싶었다. 시간이 끔찍이도 느렸다.

똑똑―

숨 막히도록 간절하고 숨 막히도록 사랑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

“나예요.”

그는 성큼성큼 걸어 문을 열었다. 긴 머리카락을 자연스럽게 늘어뜨린 하얀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화장기 없는 맨얼굴에 두꺼운 니트를 입은 그녀는 커다란 솜사탕 같았다. 보드랍고 달고 하얗고 또 뭐더라…….

생각할 시간은 조금도 필요하지 않았다. 아니 필요했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차가워진 그녀의 손목을 잡아 쥐고 가까이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오랜 비행의 피곤함 때문인지, 파리의 이국적인 절경 때문인지 그녀는 조금도 밀어내지 않고 그를 받아들였다. 뜨거운 혀가 서로에게 엉켰다.

“하아…….”

그녀는 뜨거운 숨을 뱉었고 그의 뜨거운 혀는 그녀의 뜨거운 입술을 삼켰다. 그의 뜨거운 팔은 그녀의 뜨거워진 허리를 감쌌고 방 안의 공기도 뜨거워졌다. 모든 것이 뜨거웠다.

“…….”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욕망을 간신히 눌러 넣고 그녀를 바라보던 그는 이마를 찡그렸다.

“왜요?”

그녀는 무슨 일이냐는 듯 물었다. 그건 그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비행기 안에서 무슨 일 있었어?”

“아니요. 잠만 잘 잤는데. 왜요?”

“평소보다 더 예쁜 것 같아서.”

현주는 여전히 그의 팔 안에 갇힌 채 싱글거리며 웃었다. 호텔까지 오는 길은 낭만 그 자체였다. 깨끗하게 갠 하늘과 불어오는 바람의 신선한 향기가 그녀를 수줍은 소녀로 만들었다.

“우리 내일 미술관 가요. 루브르도 좋고 오르셰도 좋아요. 어디든 가요.”

지원은 그런 그녀의 미소가 좋았다. 그녀의 편안함과 즐거움이 여행 내내 이어지길 바랐다.

“즐거워?”

현주는 어린아이처럼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었다. 맞닿은 그녀의 배에서 꼬르륵하는 소리가 들렸다. 놓칠 리 없는 지원이 긴 눈을 휘며 웃었다. 눈가에 지는 주름마저 그는 매력적이었다.

“아, 자느라 기내식 못 먹어서 그래요. 놀리지 마요.”

“놀리는 게…… 아니고……. 크큭, 너무 귀여워…….”

그는 뭐가 그리 좋은지 허리를 꺾으며 웃었다. 현주는 왠지 모를 뿌듯함을 느꼈다. 그도 그녀도 편안했다. 이십 년 넘게 살아온 한국이 아닌 전혀 다른 낯선 곳에서 둘은 안식을 찾았다.

“룸서비스 시키자.”

“먹고 싶은 거 다 시켜도 돼요?”

“응, 그러려고 돈 버는 거야.”

“나 돼지 되라고 돈 벌어요?”

현주는 무심한 표정을 지으며 룸서비스 목록을 살폈다.

“통통한 당신도 궁금하긴 해.”

현주는 기겁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돼요.”

“왜? 살쪄 본 적 있어?”

“네, 고3 때.”

“수능 스트레스?”

현주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좀만 더 대답했다가는 졸업 앨범을 보여 달라고 조를지 몰랐다. 지원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부드럽게 스치는 갈색의 촉감이 기분 좋았다.

“얼마나 예뻤을까.”

“…….”

“살찐 유현주는.”

그는 진심이었고 그녀는 진심으로 그가 병원을 가 봐야 하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 * *

정갈한 유니폼을 입은 남자가 가져다준 룸서비스 음식은 방 안의 테이블로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우와.”

현주는 본인이 주문한 음식들의 스케일을 보며 감탄을 멈추지 못했다.

“진짜 다 먹을 수 있어?”

먹기 좋은 크기로 썰린 찹스테이크와 따끈한 감자 퓌레, 후식으로 주문한 초콜릿 케이크까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만찬이었다.

“이 정도는 금방 먹어요.”

“보기보다 잘 먹나 보네.”

“보기엔 어떤데요?”

“…….”

그의 기억으로는 그녀와 정식으로 식사한 일이 없었다. 간단한 음식을 나눠 먹은 적은 종종 있었지만 그것을 식사라고 부르기엔 무리가 있었다. 허탈할 만큼 빈곤한 추억에 말을 아낀 그는 그녀의 동그란 눈동자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왜요?”

은색의 긴 포크를 쥔 그녀가 물었다.

“그냥. 당신이랑 밥 먹는 게 신기해서.”

지원은 그 말이 주는 외로움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그녀는 물론 누구와도 밥을 먹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늘 차 안에서 급히 먹거나 혹은 억지로 단백질 보충제 같은 것들을 섭취하는 것이 전부였다.

“별게 다 신기하네요.”

반면에 그녀는 그런 일 따위는 너무도 평범하게 치부하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그에게는 평안을 주었다. 현주는 고기 하나를 입에 넣고 열심히 오물거렸다.

“우와.”

“왜 또 우와야.”

“맛있어서요.”

“그렇게 맛있어?”

퉁명스러운 말투였지만 그는 웃고 있었다.

“굳이 밖에 안 나가도 되겠는데요?”

“…….”

“하루 종일 이것만 먹어도 좋을 것 같아요.”

중세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의자에 앉은 그녀는 점점 노곤해졌다. 창밖에서 쏟아지는 햇살은 다정했고 음식은 맛있었으며 지원은, 그는 여전히 멋있었다. 그는 그 매력적인 얼굴에 웃음을 걸며 말했다.

“되게 위험한 발언을 하네.”

“뭐가요?”

“여기 하루 종일 있고 싶어?”

현주는 그 말이 왜 위험할 수 있는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봤다. 긴장하라고 한 말에 본인이 더 긴장하게 된 지원은 함께 주문한 와인을 삼키며 탄식했다.

“당신은 다 좋은데 눈치가 없어.”

“저 눈치 좋아요.”

푸흡, 그의 놀림 가득한 웃음이 터졌다. 현주의 눈이 가늘게 변하며 그를 흘겼다.

“아무리 못해도 지원 씨보다는 눈치 좋을걸요?”

“뭘 그렇게 장담해?”

“지원 씨는 할 말 다 하고 살잖아요.”

“그게 뭐.”

“그게 눈치 없다는 거지 뭐예요.”

오늘의 마음대로 이론이야? 라는 그의 질문과는 별개로 그녀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난 피디님 눈치도 봐야 하고, 배우들 눈치도 봐야 하고, 방송국 눈치도 봐야 해요.”

“왜?”

“나를 대체할 인력은 얼마든지 있거든요.”

“…….”

“지원 씨는 지원 씨를 대신할 사람이 없잖아요. 김지원은 김지원이라는 브랜드니까. 나는 아직 아니에요. 언젠가 내 브랜드가 생긴다면 정말 좋겠지만 그러지 못할 수도 있어요.”

“…….”

어색해진 것은 오히려 지원이었다. 그녀에게선 조금의 아쉬움이나 슬픔도 보이지 않았다.

“가엾게 생각하지 말아요.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사니까. 지원 씨가 조금 특별한 거예요.”

“…….”

지원은 생전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이 가진 가치에 대해 생각했다.

늘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은 일시적인 것이라 생각했지만 어느덧 그의 데뷔도 17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연륜도 있고 개성도 있는 나름의 브랜드라고 자부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초콜릿 케이크를 크게 한입 베어 입안으로 넣은 그녀는 반짝이는 눈을 휘며 말했다.

“생각해 봤는데요.”

“무슨 생각?”

“지원 씨가 그랬잖아요. 미친년처럼 구는 것도 필요하다고.”

지원은 그녀가 자신의 말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 귀여워 나지막한 목소리로 ‘응.’ 하고 대답했다.

“저랑은 안 맞는 것 같아요.”

“왜?”

“불편해서요.”

지원은 그녀를 이해할 수 없어 미간을 구겼다. 현주는 목이 타는지 지원이 쥐고 있던 와인 잔을 뺏어 들고 한 모금 마셨다.

“그런 걸 착한 사람 콤플렉스라고 하는 거야.”

그의 답답하다는 말투에 그녀는 얼굴을 찡그렸다.

“꼭 미친년 해야 해요?”

“꼭 착한 사람 해야 해?”

“그냥 좋은 사람 하고 싶은데.”

그녀는 와인이 전해 주는 나른함에 몸을 늘이며 의자에 기댔다. 지원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러려고요.”

“상처받는 건 당신이야.”

“괜찮아요.”

“…….”

“잘 까먹거든요.”

지원은 그녀가 절대 잘 까먹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까먹긴. 속에 다 담아 둘 거면서.”

“그걸 잘 아는 사람이 그렇게 속을 썩이나?”

그러곤 미소를 지었다. 그는 이끌리듯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씁쓸한 포도향이 서로에게 옮았다.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 * *

“아, 진짜 이게 뭐예요.”

“미안, 미안.”

지원은 전혀 미안하지 않은 표정으로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난데없는 식사 중 키스로 인해 그녀의 흰색 티셔츠 위엔 붉은 포도주가 쏟아져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다 마실걸.”

그녀는 엎질러진 와인이 걱정인 모양이었다. 그녀의 티셔츠가 점점 붉어지고 촉촉해져 그녀의 몸과 딱 맞아 들어가고 있다는 것은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지금 그게 문제야?”

“그럼요?”

지원은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그녀의 모든 것을 눈에 담았다. 눈동자는 느렸고 눈길은 꽤 끈적였다.

“아.”

그녀는 그제야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에 대해 자각했다.

“기회 줄게.”

그는 장난스러운 미소와 함께 묘한 어감으로 명령했다.

“지금 당장 욕실로 들어가.”

“…….”

“잡아먹기 전에.”

현주는 티셔츠에 쏟아진 와인보다 더 붉어진 얼굴을 하고 욕실로 들어갔다. 욕실 거울에 비친 스스로의 모습이 영 꼴불견이었다. 이리저리 얼룩진 티셔츠하며 술기운과 부끄러움에 붉어진 얼굴까지. 이왕 이렇게 된 거 목욕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왜 다시 나와?”

기껏 들어간 욕실에서 다시 나오는 그녀를 보며 지원은 눈살을 찌푸렸다. 쳐다만 보는 것으론 직성이 풀리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그녀 몸에 닿은 포도주를 맛보고도 남았을 그였다.

“목욕하려고요.”

“같이 하자고?”

“아, 진짜.”

그녀는 상대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뚜벅뚜벅 걸어 챙겨 온 작은 가방을 찾았다. 간단한 세면도구와 속옷이 든 가방이었다. 그녀는 갈아입을 옷가지를 챙겨 일어났다.

“욕실 들어오면 죽어요.”

“죽고 싶으면 들어가도 돼?”

“아니요.”

“너무해.”

현주는 곧장 욕실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따뜻한 물을 틀었다. 오랜 비행으로 가라앉은 컨디션을 끌어 올리기에 가장 훌륭한 선택이었다. 호텔에 구비된 샴푸와 비누의 향기도 그녀의 취향과 어긋나지 않았다.

한편 현주의 목욕 시간이 길어질수록 지원은 초조해졌다. 그녀는 그를 죽일 셈인 것 같았다. 한 번 닫힌 욕실 문은 도통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목욕하다 죽었어?”

장난스런 말을 던져 봤지만 묵묵부답이었다. 그는 그녀의 가슴 언저리에 포도주가 번진 순간부터 온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침대에 뻗은 그는 괴로운 욕망을 자제하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유현주?”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그는 이성과 본능의 싸움에 지쳐 가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을 존중하며 그녀를 지킬 것인지, 억제된 본능을 일깨워 그녀와 욕망의 그 어딘가로 내달릴 것인지에 대한 답은 그리 쉽사리 나지 않았다.

똑똑―

가만히 누워 있기엔 힘이 넘치는 그는 욕실 앞까지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

하, 그의 한숨이 방바닥을 타고 흘렀다.

“현주야.”

한 번도 불러 본 적 없는 ‘현주야.’라는 이질적인 말과 함께 욕실 문이 딸깍 소리를 내며 열렸다. 젖은 머리카락과 뽀얀 얼굴, 어지러울 정도로 그윽한 비누 향을 뿜어내는 그녀가 나타났다.

“무슨 강아지도 아니고 왜 자꾸 불러요.”

“…….”

“화장실 급해요?”

겁이 없는 것인지 그를 믿는 것인지 그녀의 모습은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선정적이었다.

남자는 과감한 노출보다 언뜻 보이는 속살에 미치기 마련이었다. 그녀는 헐렁한 흰색 셔츠와 짧은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젖히고 아찔해지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강아지가 아니고 개가 된 기분인데.”

“네?”

그는 일렁이는 욕망을 두 눈에 가득 담고 그녀의 목 언저리를 노려봤다. 하나의 흠집도 없이 완벽하고 가는 목에 붉은 상처를 남기고 싶은 충동이 가득했다.

“나랑 자고 싶지 않은 거 맞아?”

“…….”

“근데 이렇게 유혹하는 건 반칙 아니야?”

현주가 그의 눈을 간신히 피하며 말했다.

“……안 돼요.”

“정말 안 돼?”

“네.”

알았어, 그는 그렇게 대답하고 그녀의 얼굴을 감싸 키스했다. 그녀가 허락한 선을 지키며 그녀를 갖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그의 지옥 같은 갈증이 조금이나마 해소될 것 같았다. 거칠게 쏟아지는 그의 키스에 현주는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다.

“천천히 해요, 천천히.”

“더 바라지 마. 이게 최선이야.”

지원은 지금까지 했던 그 어떤 키스보다 농밀하고 깊은 키스를 했다. 맞닿은 입술은 서로를 물어뜯지 못해 안달이었고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 혀는 욕심만큼이나 질척하게 움직였다.

“하앗―”

숨을 쉬기 어려워진 그녀는 그의 얼굴을 밀어내며 고개를 돌렸다. 덕분에 여실히 드러난 것은 그녀의 하얀 목이었다.

“하아…… 지원 씨, 잠깐만.”

지원은 그대로 얼굴을 묻어 그녀의 목에 남은 체취를 삼켰다. 코로 들이마시고 혀끝으로 맛보고 입술로 자국을 냈다. 현주는 이미 그의 목에 매달려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지원은 그런 그녀를 번쩍 안아 들어 침대 위로 옮겼다.

“왜, 왜요. 뭐 하게요.”

“나도 몰라.”

무책임하게 대답하는 그의 표정은 마치 먹잇감을 눈앞에 둔 맹수처럼 사나웠다. 구겨진 미간과 살짝 깨문 입술, 일렁이는 눈동자까지 어디 하나 섹시하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

“…….”

둘의 모호하고 애매한 눈짓이 오가고 찰나의 시간이 흘렀다. 지원은 고개를 꺾으며 불타는 신체 리듬을 다스리려 애썼다.

“걱정 마.”

그의 다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럼에도 현주는 묘한 불안감에 몸을 떨었다. 걱정 말라는 그 한 마디가 마치 걱정해야 할 거라는 일종의 경고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뭘요?”

모른 척 묻는 말에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침대 위에 앉았다.

“안 할 거야.”

“…….”

“당신이 원한다고 할 때까진.”

현주는 제 머릿속에 이성이라는 것이 남아 있길 간절히 바랐다. 물론 프랑스까지 와서 이런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혈기왕성하다 못해 모든 것에 능숙한 삼십 대 남자였고, 그녀를 열렬히 원하고 있었다.

“제가 원하지 않을 땐…… 안 하는 거죠?”

간신히 뱉어 낸 말에 진심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했다. 그에 대한 원망은 여전히 있었지만 그만큼 애정도 있었다. 그가 노력한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고 그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저 조금은 못된 심보로 그가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자신이 그에게 애원했던 만큼 그도 자신에게 애원해 주길 바라는 아주 비겁하고 치사한 심리였다. 그는 그런 그녀의 유치한 심보를 고맙게도 잘 받아 주고 있었다.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그녀의 모든 요구를 들어주던 그는 조금씩 자신의 패턴을 되찾고 있었다.

“그래.”

“…….”

“지금은.”

자신감 넘치고 어딘가 위압적이며 그럼에도 섹시한 배우 김지원의 모습으로 말이다.

그는 입고 있던 티셔츠를 순식간에 벗어 바닥에 던져 놓고는 그녀 위로 가볍게 올라탔다. 그의 완벽한 상체 근육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러면서 옷은 왜 벗어요.”

퉁명스러운 말과 달리 그녀는 그를 바라보며 감탄과 찬사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그런 그녀를 끈질기게 바라보며 답했다.

“더워서.”

지원은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향긋한 비누 향을 마음껏 즐겼다. 그럴수록 그의 뜨거운 숨이 그녀의 곧게 뻗은 쇄골에 닿았고 그녀는 그 순간순간마다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하아…… 지원 씨, 간지러워요…….”

현주는 제 어깨에 파묻혀 고개를 들지 않는 그의 얼굴을 살짝 밀어내며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에게 방해가 되는 몸짓일 뿐이었다. 그는 그녀의 양 손목을 움켜쥐고 한 손으로 강하게 결박했다. 그저 손의 자유를 잃었을 뿐이었지만 현주는 아찔해지는 정신에 호흡이 급해졌다.

“하아…….”

그는 고개를 조금 들어 그녀의 귓불을 빨았다. 종잇장처럼 얇은 귓불의 식감이 귀여워 살짝 깨물었다.

“아앗!”

“이래서 사람을 잘 믿나.”

“…….”

“이왕 믿는 거 나도 좀 믿어 줘.”

그는 농담인 듯, 진담인 듯 다정한 미소와 함께 중얼거렸다. 애초에 그녀의 대답 따위는 중요하지 않은 물음이었다. 그는 그저 속삭이는 행위 그 자체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현주는 점점 예민해지는 귀와 몸이 부끄러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다정한 웃음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현주야.”

“…….”

그는 그녀의 손을 포박하고 남은 다른 한 손으로 그녀가 입고 있는 셔츠 아래를 침범했다. 쏙 들어간 허리 라인이 그를 자극했다. 그는 부드러운 살결을 움켜쥐었다가 놓기를 반복했다.

“하아…… 지원 씨.”

그는 모든 순간마다 그녀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찡그리는 이마, 떨리는 입술, 불안해하는 눈빛까지 모두 사랑스러웠다.

“싫어?”

그는 물었다. 스스로가 멈출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은 없었지만 최소한의 질문 정도는 해야 할 것 같았다.

“하아…….”

현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자꾸만 몽롱해지는 정신을 붙잡아 두는 것에만 모든 에너지를 쏟고 있었다. 그녀의 귓가에 악마의 속삭임이 들리는 듯했다.

‘포기하면 편해.’

‘받아들여.’

‘그가 널 원하잖아.’

사실 그녀 스스로가 그녀에게 하는 자기위안이었다. 현주는 순간 울컥하는 감정에 눈물을 쏟았다.

“흑……흐흑…….”

“…….”

지원은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눈물에 모든 행동을 멈추고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가 아무리 연애고자라 할지언정 그녀의 눈물이 지금 이 순간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지원은 그녀를 보채지 않고 그저 묵묵히 바라만 보았다.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고 떨리는 작은 등을 쓸어 주며 그녀가 안정을 찾을 때까지 얌전히 곁을 지켰다.

“……미안해요.”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난 뒤에야 그녀는 입을 열었다. 지원은 제 가슴팍에 안긴 그녀의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괜찮아.”

“관계하다 우는 여자, 최악이잖아요.”

이 와중에도 참 이상한 걱정을 하는 그녀였다. 지원은 퉁퉁 부은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며 웃었다.

“당신은 그래도 괜찮아.”

“…….”

“미안해.”

“뭐가요.”

“울게 해서.”

현주는 지원의 등을 더욱 꼭 끌어안았다. 그는 그녀의 아픔이 어느 정도였는지에 대해 감히 상상도 하지 않으려 했던 자신에 대해 크나큰 실망을 했다.

그녀와의 관계 회복에만 정신이 팔려 그녀가 자신에게 어떤 상처를 받았는지에 대한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던 것이다.

“믿기 힘든 거 알아. 내 탓인 것도 알고.”

“…….”

“누구한테 믿음을 줘 본 적이 없어서 그래. 큰소리 떵떵 치고 여기까지 데려오기는 했는데 사실 어떻게 해야 믿음을 주는 건지도 모르겠어.”

커다란 침대에서 온전히 서로를 껴안은 둘은 솔직하게 마음을 나눴다. 현주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람이 사람에게 주는 믿음이 쉽다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불행은 모두 사라져야 옳았다.

“나도 모르겠어요.”

“그래도…….”

“…….”

“그래도 한 번만 더 날 믿어 줘. 내가 일반인 폭행했다고 난리 났을 때처럼. 그때처럼 한 번만 더 나 믿어 주면 안 되나?”

지원은 스스로도 민망한지 쭈뼛거리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너무 좋아.”

“…….”

“이렇게 끌어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아. 당신이 우는 것조차 좋아.”

“무슨 바보도 아니고…….”

현주는 민망함에 입을 샐쭉거렸다. 지원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맞아. 요즘 진짜 바보가 된 기분이야.”

“…….”

“사랑해.”

그는 태어나 한 번도 내뱉을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말을 꺼냈다. 그녀가 자신을 못 믿는다 해도 좋았다.

“우리 관계가 조금 더 명확해지면 말하려고 했는데 지금 말하는 게 맞는 것 같아.”

그녀의 두 눈은 굵은 눈물들로 다시 한 번 채워졌다.

“사랑해.”

낙인을 찍듯 한 글자, 한 글자를 뱉어 낸 그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냥 나 밀어내지만 마.”

“…….”

“당신이 밀어도 안 밀릴 거야.”

“……치…….”

지원은 떨고 있는 현주의 어깨를 가만히 끌어안아 토닥토닥 두드렸다.

“지금 한 말 꼭 책임져야 해요.”

현주는 울컥거리는 감정들을 간신히 제어하며 말을 이었다. 그는 여전히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부드럽게 말했다.

“평생 책임질게.”

현주는 그의 어깨를 조심조심 밀어내며 그와 마주했다. 완전하게 올곧은 그의 눈이 의심할 테면 의심해 보라는 식의 분위기를 자아냈다. 현주는 이 순간이 오면 하기로 마음먹었던 말들을 떠올렸다.

“바람피우면 안 돼요.”

그는 미간을 찡그리며 웃었다.

“당신도 마찬가지야.”

“표현도 많이 해 줘야 해요.”

“…….”

“내가 불안하지 않게…… 계속…….”

지원은 횡설수설 말을 마무리하지 못하는 그녀를 대신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럴게. 사랑해.”

“……나빠.”

현주는 그대로 고개를 들이밀어 그에게 키스했다. 눈물로 젖은 입술이 서툴게 그를 찾았다. 맞닿은 그의 입술에서 느린 미소가 번졌다.

“자는 건 싫다면서 유혹은 수준급이야.”

그는 이 와중에도 그녀를 놀리고 싶은 모양이었다. 현주는 그의 가슴을 팡팡 두드리며 조용히 속삭였다.

“안 싫어요.”

“뭐가?”

“자는 거요.”

“…….”

“안아 줘요.”

현주는 다시 한 번 그에게 입을 맞췄다. 그런 그녀를 마다할 리 없는 지원은 그녀를 제 위에 올리고 목을 끌어당겨 깊게 키스했다. 거추장스러운 셔츠를 벗겨 내고 마주한 그녀의 몸이 황홀할 만큼 아름다웠다.

“속옷이 야하네.”

검은색의 얇은 속옷이 평소 현주 취향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그녀는 민망함에 고개를 돌리며 새침하게 말했다.

“여자의 자존심의 상징, 이라고 누가 말했어요.”

지원은 그녀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지만 속옷의 존재는 썩 달갑지 않았다. 손쉽게 후크를 풀고 속옷을 벗겨 낸 그는 행여나 그녀의 손에 속옷이 닿을까 먼 곳으로 집어 던졌다.

“사랑할 땐 필요 없는 거야.”

“말이나 못 하면.”

지원은 그녀의 질책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분홍색으로 달아오른 그녀의 동그란 가슴이 그의 손에 말캉하게 잡혔다. 그동안 참아 온 욕구를 분출할 때가 온 것이었다.

“아앗……!”

지원은 다급한 손길로 그녀의 가슴을 입에 물었다. 혀끝에 닿는 딱딱한 정점이 귀엽고 또 아찔했다. 현주는 그런 그의 뒷목을 움켜쥐고 신음을 뱉었다.

“하아……!”

“아, 미치겠네.”

지원은 몸을 일으켜 거추장스러운 바지를 벗고 그녀의 바지와 속옷 역시 한 번에 벗겨 냈다. 부끄러움에 몸을 움츠린 그녀의 모습이 지켜 주고 싶은 욕구와 무너뜨리고 싶은 욕구 모두를 자극했다. 그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허벅지를 짓궂게 어루만졌다.

“으음……! 지원 씨, 그만……!”

“응?”

“그, 그만……!”

“싫어.”

“하앗…… 하…….”

사실 더 큰 애무는 필요 없었다. 이미 서로의 눈만 보아도 자극이 될 만큼 달아오른 두 사람이었다. 지원은 그녀의 여린 숲에서 흐르는 촉촉함을 확인하고는 단단해진 페니스를 입구에 문질렀다.

“흐읏……!”

참기 어려운 교성이 그녀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조금 더 망설여도 좋았겠지만 그도 그녀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는 그토록 원했던 그녀 품 안으로 자신을 밀어 넣었다.

“으읍! 아, 아파……. 천천히…… 해요.”

현주의 짤막한 비명이 뱉어지고 그의 입에서도 헉, 하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현주는 덜덜 떨리는 팔을 들어 그의 목에 감았다.

“하아…… 하, 지원 씨.”

“하…… 응.”

그는 대답과 함께 허리를 움직였다. 리듬을 타듯 부드럽게 움직이는 그의 동작은 아찔한 쾌감을 오롯이 전달했다.

“당신 안, 너무 따뜻해.”

지원은 상체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열심히 속삭였다. 위로는 다정한 말을 속삭이고 아래로는 거친 몸 사위가 계속됐다. 현주는 저릿해지는 다리의 감각으로 그의 허리를 휘감았다.

“더, 더 가까이 와요.”

섹스를 하면서 연애를 안 할 수는 있었지만 연애를 하면서 섹스를 안 할 수는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모든 것을 보고 싶은 것은 본능이자 당연한 욕구인 것을. 그들은 그것을 이제야 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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