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 두 생각 (15/20)

15. 두 생각

촬영장에서의 짧은 밀회를 끝으로 둘의 만남은 좀처럼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37신 촬영하고 쉬는 중.]

포스터 작업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됐기 때문이었다.

“촬영할 때 문자 하지 말라니깐.”

핸드폰을 바라보며 나지막한 웃음을 짓는 현주 역시 그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했다. 둘은 끈질기게 문자를 하고 전화를 하며 그리움을 달래려 했지만, 지원과 현주 그 누구의 그리움도 달래지 못했다.

[보고 싶어.]

성질 급한 그의 문자가 연달아 도착했다. 경련하는 핸드폰의 모습이 조급해 보였다.

[집중해요.]

현주는 무수한 감정을 숨기며 답했다.

[다 집어치우고 당신한테 집중하고 싶어.]

그는 고백 이후 눈에 띄게 표현하는 법이 늘었다. 그것이 그의 노력이든, 감출 수 없는 감정이든 현주에게는 고마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녀에게 믿음을 주지는 못했다. 물론 그와 함께 있을 때만큼은 그런 불안을 잊을 수 있었다. 그의 열렬한 눈, 소유욕이 가득한 손, 거친 숨소리를 느끼고 있을 때면 그의 마음을 의심할 순간이란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렇게 홀로 견뎌야 할 시간이 생길 때였다.

[방금 그 말 엄청 느끼했던 거 알아요?]

[요즘 너무 야박한 거 알아?]

그와 그녀의 대화는 늘 이런 식이었다. 그는 그녀를 쫓았고 그녀는 도망가기 바빴다. 말장난으로 위장한 서로의 진심이 허공을 향해 흩뿌려졌다.

“밀린 일이나 하자.”

현주는 지원의 문자에 답장하지 않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하나의 단막극으로 드라마 작가라는 자리를 굳힐 수는 없었다.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만 소유를 허락했다. 최근에 지원에게 집중한 탓에 글이라곤 한 자도 못 쓴 그녀였다.

그가 바쁜 틈을 타 그녀는 그녀의 원래 패턴으로 돌아와야 했다.

― Rrrrr.

현주는 두 눈을 모니터에 고정한 채 핸드폰 통화버튼을 눌렀다.

“일하느라 답장 못 한 거예요.”

지원은 그녀의 답장이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득달같이 전화를 했다. 현주는 이번에도 당연히 그일 것이라 생각했다.

― 누나?

현주는 다급히 핸드폰 액정을 확인했다. 지원의 이름 대신 화면을 차지하고 있는 이름은 연석이었다.

“아, 미안미안. 다른 사람인 줄 알았어.”

― 누나가 그렇게 딱딱한 말투로 대답하는 건 처음 듣네요.

현주는 조금 전 자신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딱딱했어?”

평소 지원에게 하는 말투와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 네, 엄청. 전 지금 촬영 끝내고 퇴근하는 중이에요.

“다른 사람들은?”

방금 전 촬영 중이라던 지원이 떠올랐다. 연석은 잠깐의 침묵과 함께 뒷말을 이었다.

― 민서 누나랑 지원 선배는 아직 촬영하고 있어요.

“아…….”

― 촬영 현장 궁금하지 않아요?

촬영 현장은 생각보다 궁금하지 않았다. 이미 대본을 쓰며 머릿속으로 수십 번 상상했던 장면들이었다. 상상했던 것과 다르다고 감독과 마찰을 일으키고 싶지도 않았고, 촬영에 돌입한 배우들에게 훈수를 두고 싶지도 않았다.

“알아서 잘 하겠지. 우리 팀 중에 나만 신인이잖아. 배우들부터 스태프들까지 다 프로인데 뭐가 걱정이야. 아, 민서 씨는 조금 걱정된다.”

― 작가님이 너무 태평하시네요.

현주는 푸스스 소리를 내며 웃었다. 지원을 생각해서라도 현장에 가 볼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얄팍한 생각을 삭제했다. 포스터 촬영 날에도 그의 매니저가 삼십 통도 넘는 전화를 할 때까지 그의 차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그녀의 방문은 촬영 현장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었다.

“내일도 촬영이지?”

― 네. 인간적으로 너무한 것 같지 않아요?

“내가 생각해도 그런 것 같긴 한데 어쩌겠어. 배우님들 스케줄 맞추다가 그렇게 된 거잖아.”

고작 2회분의 촬영이었음에도 스케줄은 촘촘하고 숨 쉴 틈이 없었다. 한류 스타인 지원은 물론 아이돌 연석과 떠오르는 신인 민서의 일정을 조율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듭된 스케줄 수정에 지친 제작진 측은 주요 배우 세 명의 촬영날짜를 공통된 날로 고정했다.

덕분에 한 번 촬영할 때 방대한 양을 한꺼번에 작업해야 하는 대참사를 맞게 된 것이었다. 연석은 현주의 말 기저에 배우들에 대한 나무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 맞아요. 우리 때문이에요.

급격히 시무룩해진 연석의 목소리는 풀 죽은 어린아이처럼 귀여운 구석을 갖고 있었다. 현주는 이번에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알면 다행이고.”

― 누난 오늘 뭐 해요?

“음, 나가서 글 쓰려고.”

― 어떤 글?

“그냥 글. 무슨 글이 될지는 아직 모르겠어.”

― 좋네요.

연석의 목소리는 나긋했다. 가끔 그 나긋한 목소리가 너무 다정한 느낌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깊게 고민하지 않았다.

― 지원 선배는 요즘 기분이 좋은 것 같아요.

“응?”

연석은 나긋한 목소리로 느닷없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현주는 어떠한 형태로든 지원과 연석의 상관관계가 불편했다. 지원의 입에서 나오는 연석의 이름도, 연석의 입에서 나오는 지원의 이름도 너무나 어울리지 않아서 징그러울 지경이었다.

― 그냥 시도 때도 없이 잘 웃으시거든요.

“그래?”

현주는 긴장된 미간을 짚으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의미 없는 말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 누나는 어때요?

“…….”

― 좋아요?

현주는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실로 복잡한 고민을 거듭했다. 연석의 의도를 정확히 알지 못하니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도 명확하지 않았다. 그녀의 침묵이 길어지자 연석은 차분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얼어붙은 침묵을 깼다.

― 나, 누나랑 선배 무슨 사인지 알아요.

현주는 정신이 아찔해졌다.

“언제부터?”

― 그냥 어느 순간부터.

“아, 있잖아…….”

오해라고 호들갑을 떨어야 하는 것인지, 쿨하게 인정해야 하는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정작 중요한 때에 지원은 그녀의 곁에 없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에게 목소리를 들려주는 것은 연석뿐이었다.

― 놀랐어요?

“조금.”

― 미안해요. 그냥 알고 있다고 하면 누나가 좀 편하지 않을까 해서……. 그뿐이에요.

“…….”

연석의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했고 평화로웠으며 부드러웠다. 그저 알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전달, 그뿐인 것 같았다.

― 누나?

현주는 크게 호흡을 내쉬며 긴장한 마음을 이완시키려고 노력했다.

“연석아, 혹시 누구한테…….”

― 아무한테도 얘기 안 했어요.

“고마워.”

아주 짧은 침묵. 침묵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찰나의 순간이 지나자 연석은 호탕한 웃음소리를 냈다.

― 누나, 나도 연예인이에요. 그 정도 눈치는 있어요.

“미안. 전혀 생각도 못 했던 상황이라 조금 놀래서…….”

― 저 말고 아는 사람 없어요?

“응, 없어. 뭐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 비밀 지켜 줄게요.

현주는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는 듯 덧붙여 말을 이었다.

“지원 씨한테는 알고 있다고 말하지 마. 아마 되게 신경 쓸 거야.”

사실 싫어할 거라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이었지만 순화할 필요가 있었다.

― 걱정 말아요, 누나. 나 입 무거워요.

“그나마 알게 된 게 너라서 다행이다.”

― 공짜는 아니에요. 나중에 밥 맛있는 거 사 줘요.

“당연하지.”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연석의 목소리는 현주의 마음을 금방 안심시켜 주었다. 생각해 보면 정말 다행이었다. 알게 된 사람이 일반 대중도 아니고, 친분 없는 연예인도 아니고, 연석이었으니 비밀을 지켜 달란 말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마음 한구석으론 후련한 기분까지 들었다. 상대가 상대인지라 흔한 연애 상담 하나 제대로 못 하던 그녀였다.

― 근데 되게 신기해요.

“뭐가?”

― 지원 선배랑 누나, 정말 안 어울리는데.

“그 사람이 너무 화려하긴 하지?”

현주는 들고 있던 펜을 깨물며 말했다. 이기적인 유전자의 지원과 평범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만남은 사실 현실적이지 않았다.

― 누나가 아까워요.

현주는 싱긋 웃으며 물고 있던 펜을 내려놓았다.

“고맙다. 너밖에 없어.”

― 진짠데. 못 믿네.

“아냐, 완전 믿어.”

― 누나는 공기 같은 사람이에요. 선배는…… 마약 같은 사람이고요.

“마약?”

― 한 번 맛보면 평생을 갈망해야 하잖아요. 그게 엄청 해로운 걸 알면서도.

“너 꼭 마약 해 본 사람처럼 얘기한다.”

퉁명스럽게 대답하긴 했지만 그의 비유는 적절했다. 지원은 이로운 남자라고 하기엔 많이 해로웠다. 그를 연인으로 두는 순간부터 생기는 문제는 백 가지가 넘었다. 대중들의 숨 막히는 관심은 물론이고 평생 동안 얻지 못할 자유 역시 마찬가지였다.

현주는 그런 사실들에 대한 고민을 일부러 하지 않았다. 그녀 자신이 그런 것들을 감당할 수 있을지 아직 알 수 없었다. 무수한 고민들 사이로 연석의 목소리가 침범했다.

― 누나는 평범해요.

“굳이 알려 줄 필요는 없는데 고맙구나.”

현주는 갑자기 무거워진 통화 내용에 가벼움을 불어넣으려 애썼다.

― 누나는 사람들이 공평하게 숨 쉰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나? 누군 숨 쉬고, 누군 못 쉬고 하지는 않으니까.”

― 감옥에 갇힌 죄수를 생각해 봐요.

“감옥?”

― 밀폐된 공간, 제한된 바깥출입, 감시하는 사람들의 존재, 그런 거?

현주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공기를 새롭게 해석하는 연석의 말을 조용히 곱씹었다. 꽤 흥미로운 전개였다.

“답답하긴 하겠다.”

― 그런 사람한테 자유로운 공기는 마약보다 간절할 거예요.

“…….”

― 탈옥하고 싶을 만큼.

현주는 늘 자신을 갈망한다고 표현하는 지원을 떠올렸다. 그가 그토록 원하는 신선한 공기가 자신이라고 생각하니 뿌듯하면서도 부끄러워졌다.

“내가 그렇게 매력적인 존재인 줄 몰랐네.”

현주의 뻔뻔한 목소리는 연석을 웃게 했다. 그리고 이내 굳게 했다.

― 익숙해지지 않도록 조심해요. 영원히 매력적인 공기일 수 있게.

연석의 마지막 말은 현주의 마음에 경종을 울렸다. 악마의 속삭임만큼이나 위험한 그 말은 가뜩이나 미약하기만 한 그녀의 믿음을 벼랑 끝까지 몰고 갔다.

연석의 말은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오히려 깨달음을 주는 것에 가까웠다. 지원은 자유와 의지를 제한받는 죄수였고 그런 그에게 현주는 신선한 공기 그 자체였던 것이다.

― 어려울 게 뭐 있어요. 너무 쉽지만 않으면 돼요.

“조언하는 거야?”

현주는 연석이 응원을 하는 것인지, 포기를 하라 말하는 것인지 헷갈렸다.

― 그냥 하나의 방법일 뿐이에요.

현주는 연석과의 전화를 끝내고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녀가 그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해야 하는 노력이 하고 많은 것들 중에 하필이면 그런 것이라니 마음이 무거웠다.

타고나기를 솔직한 그녀였다. 여린 만큼 투명했고 순진한 만큼 속이는 것은 질색이었다. 지금은 지원을 원망하는 마음으로 그에게 확답을 주지 않았지만 조만간 그의 괴로움을 풀어 줄 계획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계획이 옳은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 Rrrrr.

여전히 솔직하기만 한 지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 누구랑 그렇게 통화해.

현주는 하마터면 왈칵 눈물이 쏟아질 뻔했다. 그의 지나친 관심은 언제나 환영이었다. 잃고 싶지 않았다.

“그냥, 친구랑 전화했어요.”

― 친구 누구.

지원의 목소리는 덤덤했지만 낮고 단호했다. 가뜩이나 바쁜 일정으로 그녀를 만나지 못한 탓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그였다. 그녀의 작은 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아 했다.

그에 반해 현주는 그에게 모든 것을 주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얼렁뚱땅 그에게 이끌리던 스스로를 단단히 부여잡았다. 또한 이것이 그와 그녀의 관계를 오래도록 붙잡아 줄 방법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꼭 알려 줘야 해요?”

순식간에 서늘해진 지원의 목소리가 이어 들렸다.

― 방금 더 알고 싶어졌어.

그는 잔뜩 날이 선 목소리로 말했다. 꼭 알려 줘야 하냐는 말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모양이었다. 가만히 그의 감정을 음미하던 현주는 문득 터져 나오는 제 감정을 참지 못했다.

“보고 싶어요.”

그의 화를 무마시키려는 싸구려 시도는 아니었다. 그냥 정말 순식간에 튀어 나간 진심이었다. 연석의 아리송한 조언은 그녀를 혼란스럽게 했고 그를 보고 싶게 했다.

― …….

그가 짧게 침묵했다.

― 무슨 일 있어?

그리고 그의 걱정이 이어졌다. 그는 그녀의 보고 싶다는 말이 그리 편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요.”

― …….

지원은 서툰 사람임에 분명했다. 그는 망설였고, 그의 날뛰는 심장 소리가 전화기 너머까지 들리는 듯했다. 스태프들의 재촉하는 소리도 함께 들렸다. 현주는 그를 둘러싼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연상했다.

“오늘 늦게 끝나요?”

― 응, 아마도.

“그래도 올래요?”

― 응?

“우리 집에 올래요?”

― …….

“나 보러 와요.”

시원한 긍정도, 아쉬운 부정도 없이 전화는 끝이 났지만 금세 날아온 문자 하나는 그녀를 두근거리게 했다.

[늦더라도 갈게.]

현주는 손끝으로 그의 문자를 어루만졌다. 정확하게는 핸드폰의 화면을 어루만졌다. 그의 당황하는 얼굴, 그럼에도 완벽했을 얼굴이 떠올랐다. 핸드폰은 어색해하는 지원만큼이나 몸을 떨며 또 하나의 문자를 전달했다.

[나도 보고 싶어.]

현주는 미소를 지으며 집 안의 창을 전부 열었다.

* * *

“41신 촬영 들어갈게요. 민서 씨랑 지원 씨, 세팅 완료됐어요?”

촬영 현장은 쉬는 시간이고 작업 시간이고 할 것 없이 분주했다. 고작 2회분 분량의 짧은 단막극이었지만 호화 캐스팅이란 이름으로 몸집이 부풀어진 탓에 예상보다 훨씬 더 높은 완성도가 요구됐다. 벌써 세트장 한가운데 서 있는 민서의 모습도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자꾸 밤을 새는 탓에 눈가는 어두웠고, 얇은 다리에 간신히 걸린 하이힐은 흉기처럼 뾰족했다.

“조명 좋고― 큐!”

조연출의 큐 사인을 시작으로 촬영은 재기되었다.

“우리 이렇게 쉽게 끝날 사이 아니잖아요.”

“세상에 영원한 건 없어.”

지원은 제 팔을 부여잡는 민서의 팔을 냉정하게 뿌리치며 등을 돌렸다.

“날 사랑한다고 했잖아요! 내 곁에 있겠다고 했잖아요. 가지 말아요. 제발 내 옆에 있어요. 이대로 가면…… 당신이 가면…….”

민서는 구슬처럼 맑은 눈물을 끊임없이 흘리며 서글프게 흐느꼈다. 지원은 그런 그녀의 주저앉은 모습에 못내 괴로워하며 고개를 돌렸다. 빌어먹게 아름답고 빌어먹게 신파적인 한 장면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걱정과 달리 지원과 민서의 합은 꽤 괜찮은 편이었다. 민서는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은 배우였지만 첫 작품이라는 애정 덕분인지 준비성이 나름 훌륭했다. 형광펜과 색색의 표식으로 얼룩진 대본은 물론이고 시시각각 질문을 쏟아 내는 그녀의 행보는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선배님, 주저앉는 거 말고 매달리는 건 어때요?”

“내 다리에?”

덕분에 가장 귀찮아진 것은 지원이었다. 초반엔 민서가 그를 무서워했기 때문에 특별할 것도 없었지만 요즘은 좀 편해졌는지 이것저것 묻는 것이 많았다.

“슬픈 걸 슬프지 않다고 말할 때, 제일 슬픈 거야. 적당히 해.”

지원은 턱 끝까지 채워진 단추가 답답한 듯 목깃을 잡아당기며 고개를 저었다. 그 역시 작품이라면 끔찍이 하는 사람이라 민서의 열정 어린 시도에 함께해 줄 마음은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대충 해서라도 촬영을 빨리 끝내고 싶었다. 현주의 ‘보고 싶다.’라는 말은 그의 마음을 뜨겁게 달궜다.

모든 촬영이 끝나자 시계는 새벽 한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생각보다는 일찍 끝난 편이었지만 지원은 마음이 조급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는 거침없는 인사와 함께 재빨리 밴에 탑승했다. 죄 없는 매니저를 닦달하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연애를 하려면 숨기는 척이라도 해라. 나 너 매니저거든?”

매니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땅이 꺼져라 한숨을 뱉었다. 지원의 눈썹이 천천히 구겨졌다.

“내가 요즘 되게 착했나 봐? 나한테 짜증낼 생각까지 하고.”

지원은 가뜩이나 그녀를 마음껏 만나지 못하는 것에 화가 나 있던 상태였다. ‘숨겨야 한다’는 매니저의 말은 그를 불쾌하게 했다.

“어, 어?”

매니저는 아차 싶은 마음에 말을 더듬었다. 작품과 관련된 것을 제외하고는 어떤 간섭이나 조언도 질색하는 지원이었다. 이럴 땐 최대한 빨리 자세를 낮추는 것이 상책이었다.

“아이, 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짜증을 냈다고…….”

매니저는 서투른 변명과 함께 그의 눈치를 살폈다. 몸이 굳은 그와 달리 지원은 나른하게 몸을 기대고 낮은 목소리를 뱉어 냈다.

“사생활에 터치하지 마. 은퇴하고 싶어져.”

“아, 알지. 당연히 알지. 그러면 안 되지.”

매니저는 어울리지 않는 미소를 지으며 지원을 달랬다. 지원 역시 이 정도면 됐다 싶었는지 내비게이션에 친절히 주소를 입력했다. 시간을 더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현주가 깨어 있길 간절히 바라면서도 차마 전화를 걸거나 문자를 하지는 못했다. 그녀가 잠들었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깨우고 싶지 않았다. 매니저에게 있는 대로 성질을 부리던 그와 현주 앞에서의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내일 첫 스케줄 몇 시야?”

“오전 10시. 여기로 데리러 올까?”

“응. 아침엔 전화하지 마.”

지원은 개미 새끼 한 마리 지나가지 않을 것 같은 한적한 현주의 집 앞에 발을 디뎠다. 그녀를 닮아 아담하고 따뜻한 분위기의 그곳은 그를 편안하게 하는 묘한 기운을 가지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은 그는 언젠가 그녀가 알려 주었던 집 비밀번호를 떠올렸다.

띠리릭―

그는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었다. 그녀의 집을 찾은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중 어느 날은 그녀와 잠자리를 가진 적도 있었다. 그런데도 그런 그녀의 집 문을 스스로 열자 묘한 긴장감에 소름이 돋았다. 집 안은 주홍빛의 등이 밝혀져 있었다. 그가 들어올 것을 생각해 켜 둔 모양이었다.

“유현주?”

들릴 듯 말 듯 조용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은 없고 정적은 길었다. 여러 권의 책이 펼쳐진 거실은 온기가 사라진 지 오래였고 주방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원은 닫혀 있는 침실의 문고리를 조심스레 돌렸다. 하얀 이불에 뭉게뭉게 감싸인 작은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그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시간이 멈춘 듯 침실 안의 공기는 적막 그 자체였다. 방 안 가득한 어둠으로 완전히 드러나지 않는 그녀의 얼굴은 그를 지독한 갈증 상태로 만들었다.

“하아―”

지원의 목울대가 크게 한 번 움직였다. 마른침이 넘어가고 무수한 탄식이 이어지며 인내와 좌절이 반복됐다. 그는 이끌리듯 상체를 숙여 그녀의 작은 입술을 깨물었다. 작은 뒤척임과 함께 현주가 깨어났다.

“음…… 지원 씨?”

그녀는 탁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지원은 그대로 무너져 그녀를 품에 안았다.

“잘 잤어?”

현주는 눈가를 찡그리며 웃었다.

“이 시간에 할 인사는 아닌 것 같은데요.”

“미안.”

“불 켤까요?”

“아니.”

“나 보고 싶었다면서요.”

바람 소리가 깃든 웃음소리가 들렸다. 현주는 보이지 않아도 그의 웃는 얼굴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의 조용하고 위압적인 목소리가 이어 들렸다.

“응, 근데 조금 천천히.”

“…….”

“조금만 천천히 보여 줘. 지금은 목소리로도 충분해.”

현주는 자신이 프시케가 된 것만 같았다. 사랑의 신인 에로스와 어둠 속에서 사랑을 나눴다는 프시케. 어릴 적엔 보지도 못하는 남자를 남편으로 둔 프시케가 가여웠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불필요한 걱정이었다. 목소리만으로도 충분히 매혹적인 지원은 현주를 아찔하게 하는 데 조금의 부족함도 없었다.

“그냥 하루 종일 이러고 있고 싶다.”

“…….”

“너 때문에 일에 대한 동기부여가 안 생겨.”

그는 그녀의 작은 등을 토닥이며 조용조용 불만을 늘어놓았다. 현주는 밤바람으로 차가워진 그의 품이 침대보다도 더 안락하게 느껴지는 것이 신기했다.

“대신 돈 많이 벌잖아요.”

“돈은 지금도 평생 먹고살 만큼 있어.”

“우와― 그거 나 줘요.”

“그러지 뭐.”

지원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얼마나 원해?”

흡사 악마와의 거래에서나 나올 법한 대사였다. 현주는 멍한 머리를 이리저리 굴려 적당한 금액을 찾았다.

“한 천만 원?”

“이왕 욕심부리는 거 좀 더 부려. 나 같은 능력자 만나기가 어디 쉬운 줄 알아?”

“그냥 먹고 싶은 거 먹을 만큼, 입고 싶은 거 입을 만큼이면 충분해요.”

“하긴.”

“뭐가 하긴이에요?”

“그냥 날 가지면 돼.”

순간 그녀의 몸과 마음에서 그를 가지라는 외침이 울려 퍼졌다. 마른침이 꿀꺽하고 넘어갔다. 그의 가는 손가락이 그녀의 목 언저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생각을 좀 해 봤는데.”

“어떤 생각이요?”

“당신이 가져야 할 나에 대한 믿음 말이야.”

현주는 편안했던 마음이 다시금 시려지고 차가워졌다. 그에 대한 ‘믿음’. 그 흔해 빠진 가치가 어찌하여 이리 어려운지 스스로에게도 답답할 지경이었다.

“이런 식이면 생길 믿음도 안 생길 것 같아.”

“…….”

현주는 쿵 하고 심장이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그의 말이 어쩌면 포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하염없이 두려워졌다. 너무 밀어내기만 했던 것인가 싶어 반성할까 싶다가도 그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유치한 반박이 거칠게 솟아났다.

지원은 그런 그녀와 상관없이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우리 여행 가자.”

“뭐라고요?”

“여행 가자고.”

“지원 씨 집에요?”

지원은 그녀의 엉뚱한 말에 몸을 일으키고 하하 웃었다.

“당신은 그런 걸 여행이라고 해?”

“아니, 그러니까…… 지원 씨는 바쁘고 항상 스케줄이 있으니까…….”

그의 커다란 손이 현주의 양 볼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현주의 따뜻한 온기가 그의 차가운 손으로 천천히 전해졌다.

“다음 주에 시간 비워 놨어. 어디든 가자. 같이 시간을 보내야 믿음도 줄 거 아니야.”

“…….”

“아시아권만 아니면 알아보는 사람도 별로 없을 거야.”

현주는 그와 평범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불신과 동시에 설렘이 솟았다. 식당에서 밥을 먹거나 공연을 보거나 하는 것들이 해외라고 가능해질지가 궁금했다.

“저 바쁜데요.”

물론 약간 튕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실 이런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지만 나름 매력적인 공기가 되기 위한 발악이라고 생각했다.

“부탁이야.”

그녀의 가벼운 튕김과 달리 지원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진중하게 부탁했다.

“나 숨 좀 쉬자.”

그는 그녀의 목에 코를 박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상쾌한 비누 향기가 그의 봉인된 욕망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와 달리 현주는 그의 말에 생각이 깊어진 듯했다.

“나 궁금한 거 있어요.”

현주는 침대 옆 스탠드를 밝히며 말했다. 그는 부신 눈을 부비며 눈앞에 놓인 광경에 넋을 잃었다. 희미한 불빛 아래 놓인 그녀의 모습은 묘하게 순결하고, 묘하게 선정적이었다.

“뭐든.”

그의 짤막한 답변이 돌아왔다.

“난 지원 씨한테 뭐예요?”

그는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눈알을 굴렸다. 현주는 오글거리지만 힌트를 주기로 했다.

“뭐 예를 들면 공기라든지, 마약이라든지…….”

지원은 차마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듣지 못하고 폭소했다. 처음엔 킥킥거리며 웃더니 나중에는 침대 밑으로 내려가 땅을 치며 웃었다. 현주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졌다.

“아, 뭐예요. 질문한 사람 무안하게.”

“당신이 생각하기엔 어떤 것 같은데?”

“내가 먼저 물어봤잖아요.”

“당신 생각이 궁금해. 나한테 당신은 어떤 것 같아?”

“음…… 공기?”

현주는 괜히 말꼬리를 늘이며 말했다. 신경 쓰지 않는 듯 포장했지만 연석의 말이 자꾸만 신경 쓰인 탓이었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어루만졌다. 노란 스탠드 탓인지 그의 눈동자는 불꽃이 이는 것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아닌데?”

“아니에요?”

“응.”

“그럼요?”

“저번에도 말하지 않았나?”

“…….”

지원은 길게 뻗은 눈을 베일 듯 날카롭게 다듬으며 뚜렷하고 명확하게 말을 이었다.

“난 내 거 다른 사람들이랑 공유하는 거 싫어.”

“…….”

그녀의 목을 감싼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공기처럼 헤픈 건 질색이야.”

지원은 그대로 그녀를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온몸 구석구석에 제 이름을 새겨도 모자랄 판에 공기 같은 것과 비교를 하다니. 그녀는 그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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