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방해
투덜거리며 차에서 내린 지원에게 비슷하게 도착한 민서가 고개를 숙이고 인사했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응.”
무심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인 그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촬영장 안으로 걸어갔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촬영장 안에는 이미 메이크업을 마친 연석이 있었다. 그의 하얀 얼굴은 옛날 교복의 검은색과 어울려 금욕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지원은 이번에도 역시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하는 시늉을 했다.
지원은 그와 웬만하면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공과 사를 구분하기 위해선 그에 대한 불쾌함 따위 고이 접어 두는 편이 옳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저, 선배님.”
연석은 자신을 지나쳐 의상실로 걸어가는 지원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지원은 고개만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영화관 안에서 현주와 나란히 앉아 있던 그의 옆모습이 자꾸만 겹쳐 보였다.
“왜.”
“아니에요. 들어가세요.”
연석은 무언가 말하려던 것을 삼키며 길을 비켰다. 지원은 찜찜함에 눈썹을 구기며 의상실 안으로 들어갔다. 미리 의상실 안에서 스태프와 콘셉트를 상의하던 매니저는 그의 구겨진 얼굴을 보며 다가왔다.
“무슨 일 있어?”
“있으면 뭐.”
매니저는 지원이 연애를 하면 성격이 좋아질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다 부질없는 마음이었다. 그는 여전히 이기적이었고 싸가지가 없었으며 예민했다.
“지원 씨는 포마드 머리에 쓰리버튼 슈트를 입을 거예요. 연석 씨의 청년 이미지랑 완전히 반대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그래요?”
지원은 스태프의 말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스태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평소 말도 없고 웃음도 없기로 유명한 그였으니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지원은 혼잣말을 하듯 입술을 오물거렸다.
“청년도 남자 아닌가.”
청년이란 말에 연석을 대입하다 보니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연석은 하얀 피부에 곱상한 얼굴을 하고 있긴 했지만 충분히 남성적이었고 특히나 싱그럽고 청량감 넘치는 미소는 여자의 모성애를 자극하기에 아주 적절했다. 지원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스태프는 보편적인 청년과 성인 남성의 차이를 설명했다.
“음…… 섹슈얼한 의미에서 다르죠.”
지원은 더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청년은 섹슈얼하지 않아요?”
매니저는 저 미친놈이 이번엔 뭐에 꽂혀서 저 지랄인지에 대해 심각히 고민했다. 스태프는 그의 궁금증을 작품에 대한 열정으로 인식하고 진지하게 대답했다.
“글쎄요. 완전한 남자는 아니니까 그렇지 않을까요?”
지원은 그 엉성한 대답이 꽤 마음에 들었다. 그는 길게 뻗은 눈을 휘며 물었다.
“어느 쪽이 좋아요?”
“네?”
“청년이랑 남자 중에.”
“아, 음…… 아무래도 남자 쪽이 더…….”
지원은 기분이 좋아졌다. 스스로가 유치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연석과 현주가 아무 사이도 아님을 모르지 않았다. 문제는 자신도 현주와 아무 사이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타고나기를 소유욕이 넘치게 태어난 그였다. 제 것이어도 모자랄 판에 제 것도 아닌 현주를 불안하다 여기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똑똑―
삐딱하게 서서 청년과 남자 사이를 고민하던 그의 등 뒤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저, 선배님…….”
문을 열고 고개를 내민 사람은 민서였다. 지원은 자신의 준비가 늦어져 재촉하는 것인 줄 알고 서둘러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오 분이면 돼.”
민서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고……. 저 들어가도 돼요?”
지원과 매니저의 눈살이 동시에 찌푸려졌다. 대기실이 아닌 의상실이긴 했지만 다른 사람이 들어오는 것은 불편한 것이었다. 민서는 그의 침묵을 동의로 받아들이고 쭈뼛거리며 들어와 커다란 도시락 두 개를 건넸다.
“제 팬들이 촬영장에 보낸 도시락이에요. 선배님이랑 매니저분 것도 있어서 챙겨 왔어요.”
민서는 테이블에 도시락을 내려놓았다. 슬쩍 보아도 신경 쓴 도시락이었다. 지원의 팬들도 촬영 스태프나 동료 배우들의 도시락 같은 것들을 자주 챙기는 편이었으니 놀랄 일은 아니었다. 지원은 도시락을 열어 보며 말했다.
“팬들이 촬영장까지 왔어?”
“아, 금방 갈 거니까 걱정 안하셔도 돼요. 첫 드라마라 그런지 팬들도 신이 나서…….”
민서는 지원이 팬들의 방문을 꺼려하는 것인 줄 알고 서둘러 말을 이었다. 지원은 그런 민서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팬들한테 고맙다고 전해 줘. 잘 먹는다고.”
“아, 그럴게요! 완전 좋아할 거예요. 팬들이 첫 상대 배우가 선배님이어서 다행이라고 그러거든요.”
민서는 지원의 부드러운 반응에 기분이 좋아져 이 말, 저 말을 늘어놓았다. 지원은 시끄럽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흔들었다.
“알았으니까 좀 나가. 옷 갈아입게.”
“아, 네!”
지원은 입고 있던 셔츠를 훌훌 벗으며 준비된 의상으로 갈아입었다. 곁에서 보고 있던 매니저가 한마디 보탰다.
“민서 씨, 뭐 잘못 먹었나?”
“왜?”
“원래 저렇게 개념이 있었나 싶어서.”
본래 남에게는 조금의 관심도 없는 지원이기에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누가 개념 좀 줬나 보지.”
그게 본인인 줄은 죽어도 모를 그였다.
촬영의 콘셉트는 단순했다. 삼각관계가 주를 이루는 극인 만큼 민서를 중심으로 지원과 연석이 구도를 잡는 형식이었다. 지원은 슈트를, 연석은 교복을 입은 것으로 고정이었지만 입체적인 캐릭터인 민서는 화려한 복고풍 원피스 한 벌과 순박한 개량 한복 한 벌을 번갈아 입었다.
“자, 민서 씨는 지원 씨한테 버림받고 연석 씨는 그런 민서 씨를 안타까운 심정으로 쳐다보는 거예요.”
포스터는 작은 프레임 안에 모든 감정을 압축해야 하는 작업이라 노련한 배우들도 어려워하는 것이었다. 특히나 아직 본격적인 영상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포스터부터 작업해야 하는 드라마 제작 환경은 배우들이 감정 잡는 것을 더욱 어렵게 했다. 민서와 연석은 신인 배우나 마찬가지였으니 믿을 것은 지원뿐이었다.
“굳이 카메라 볼 필요 없어. 포커스는 편집 팀이 알아서 잡을 거야.”
지원은 자기 바로 옆에서 포즈를 취해야 하는 민서부터 신경을 썼다. 지난번 광고 촬영 때부터 민서는 지원의 옆에서 유독 긴장을 많이 했다. 처음엔 자신에게 공개적으로 망신을 준 선배였기 때문이었지만, 나중에는 그의 프로다운 카리스마에 절로 압도당했기 때문이었다.
민서는 지원의 조언대로 아예 몸의 방향을 지원에게 틀어 여성적인 옆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녀의 그렁그렁한 눈망울은 사랑하는 남자에게서 버림받은 여자의 절망을 적절히 표현했다.
“지원 씨랑 민서 씨는 지금 좋아요. 그대로 고정하고 연석 씨 들어가 봅시다.”
연석은 감독의 말이 떨어지기 전까지 손에서 대본을 놓지 못했다. 아직 연기에 노련한 배우가 아니었으니 즉각적인 몰입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연석은 순수한 청년의 느낌을 살리려 과하지 않은 맑은 얼굴로 민서의 뒤편에 섰다.
“좋아요, 컷.”
감독은 세 사람의 포즈를 다양한 방향에서 여러 각도로 카메라에 담았다. 지원은 애원하는 얼굴의 민서를 내려다보며 고뇌에 찬 남자를 연기했다. 몇 번의 플래시 소리 이후 눈을 깜빡이던 지원은 스태프들 사이에서 현주를 보았다.
“아―”
갑자기 낮은 목소리로 탄식하는 지원을 향해 민서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왜요?”
“이젠 뭐 헛것까지 보이네.”
지원은 민서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메이크업 담당자들은 기겁을 하며 지원의 곁으로 몰려들었다.
“눈 비비시면 안 돼요.”
메이크업을 수정하는 지원의 옆에서 긴장을 풀던 연석의 눈에도 현주가 들어왔다.
“어? 누나!”
현주는 지원의 헛것이 아니었다. 지원은 연석의 외침과 동시에 현주를 찾았다. 분명한 그녀였다. 지원과 눈을 마주친 그녀는 싱긋 웃으며 작게 손을 흔들었다.
오지 않겠다고 하더니…… 그의 말 때문에 온 것인가 싶어 기분이 좋아진 지원은 고개를 숙이고 올라가는 입꼬리를 내리려 무던히 애썼다.
“자, 이번엔 둘씩 나눠서 찍을게요. 먼저 지원 씨랑 민서 씨부터 갑니다.”
연석은 조명에서 벗어나 현주에게로 다가갔다.
“누나!”
연석은 불과 어제 본 그녀를 십 년 만에 만난 사람처럼 밝은 얼굴로 맞이했다.
“촬영 잘 돼? 교복 잘 어울리는데?”
“치, 그거 말고 할 말 없어요?”
“응?”
연석은 현주의 귀에 대고 목소리를 낮췄다.
“영화관에서 갑자기 사라져서는 연락도 안 되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아, 그랬지……. 미안. 그날 너무 놀라서 정신이 없었어.”
그의 팬들로 인해 놀라고 지원의 고백으로 인해 놀랐으니 놀라도 단단히 놀란 날이었다. 연석은 짧게 한숨을 쉬며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별일 없었으면 됐어요. 저도 잘한 거 없는데요, 뭐. 지원 선배 없었으면 누나나 나나 큰일 날 뻔했잖아요.”
연석은 시무룩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현주를 곤란하게 했다는 이유로 지원이 화를 냈다는 사실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현주는 연석과 나누는 지원의 얘기에 괜스레 어색해져 어쩔 줄을 몰랐다. 현주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지원과 민서를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눈에 불을 켜고 노려보고 있는 지원이 보였다.
현주는 소리를 죽이고 입 모양만 움직여 ‘집중!’이라고 전했다. 지원의 반듯한 이마가 보기 좋게 구겨졌다.
“이번엔 둘이 사랑했던 시절로 감정을 잡아 봅시다.”
지원은 한 손으론 민서의 허리를, 남은 한 손으론 민서의 턱을 감쌌다. 큰 키의 지원을 올려다보는 민서의 자세가 적당히 순종적이고, 순수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좋아요. 자, 그럼 이번엔 민서 씨가 적극적인 느낌으로 해 볼까요?”
“제가요?”
민서는 오늘을 위해 무수히 보아 둔 다양한 포스터들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녀는 그와 커피 광고를 찍었던 때처럼 뇌쇄적이고 오묘한 분위기를 만들고자 애썼다. 팔을 들어 그의 목에 두르기도 했다가 상체를 숙여 몸의 곡선을 강조하기도 했지만 감독의 표정은 영 좋지 않았다.
“음…….”
현주 역시 민서의 과한 포즈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민서가 맡은 역할은 신여성이긴 하지만 지원에게만큼은 순종적이고 지고지순한 여자였다. 민서는 ‘유혹’이라는 키워드에 집중하느라 캐릭터의 가장 중요한 핵심 감정을 놓치고 있는 것 같았다.
“민서 씨가 의외로 긴장을 많이 하네.”
현주는 진지한 얼굴로 촬영결과를 모니터 했다. 연석은 입술을 깨무는 현주를 바라보며 조용히 읊조렸다.
“그래서 좋지 않아요?”
“응?”
“진짜 능숙한 남자 옆에 능숙한 척하는 서툰 여자 같아서요.”
“음……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네.”
현주는 연석의 남다른 해석 능력에 엄지를 치켜세웠다. 화기애애한 둘과 달리 지원은 민서에게 화내지 않으려 없던 인내심을 발휘해야 했다. 뭘 할 때마다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쳐야 하니 앞으로의 촬영이 막막해지는 그였다.
“강민서.”
“네?”
“우리가 사랑했던 시절이야.”
“…….”
“유혹이 아니라 행복이 보여야지.”
지원은 몸을 배배 꼬고 있는 민서의 몸을 정면으로 고쳐 주었다. 또한 낮은 목소리로 차분히 설명을 이어 나갔다.
“웃어. 미소 짓지 말고 활짝.”
“이, 이렇게요?”
민서는 지원을 올려다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 순간 플래시가 터졌다.
“좋아요, 지원 씨도 조금 웃어 봅시다.”
무뚝뚝한 남자 옆에 선 순수한 여자 같은 모습이었다. 거기에 지원까지 마저 웃으니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 보이는 커플의 모습이었다. 민서 스스로도 착각할 만큼 그녀를 쳐다보는 지원의 미소에는 사랑이 가득했고 또 행복해 보였다.
“아, 예쁘다! 좋아! 한 번 더!”
연이은 플래시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컷은 마무리되었다. 지원은 찍힌 샷들을 꼼꼼히 살폈다. 민서의 어색한 모습이 오히려 감정을 살리는 데 도움이 된 것 같았다.
“잠깐 식사들 하시고 이어 찍을게요!”
“수고하셨습니다.”
지원은 스태프들 사이에 선 현주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작가님 오셨네요.”
현주는 삐져나오는 미소를 간신히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포스터 촬영이 궁금해서요. 작가도 참여할 권한이 있잖아요.”
“배우들 불편하게 하는 작가님이네요.”
“편협한 생각이에요.”
지원은 현주와의 짧은 말장난을 끝으로 그녀를 지나쳐 대기실로 들어갔다. 그녀의 핸드폰에서 작은 진동이 울렸다.
[얼른 와. 예쁜 짓 했으면 상 받아야지.]
현주의 얼굴이 발그레한 분홍빛으로 바뀌었다. 멋있는 척, 프로인 척 카메라 앞에선 진지한 모습을 뽐내던 그가 이런 문자를 꾹꾹 누르고 있는 것을 상상하니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스태프들은 쉬는 시간이 되어도 부산스러워 보였다. 여전히 카메라 앞을, 데스크 앞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어지러워진 소품들을 정리하느라 바쁜 스태프들도 보였다. 현주는 재빠른 고갯짓으로 주변을 살핀 후 그의 대기실 안으로 들어갔다.
“……!”
문을 열자마자 부딪혀 오는 누군가의 입술은 조급했지만 그만큼 짜릿했다. 입술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녀의 허리를 감싼 단단한 팔과 달콤하게 엉키는 숨소리는 설렐 만큼 익숙한 지원의 것이었다.
“누가 들어오면 어쩌려고 그래요.”
잠깐 떨어져 가쁜 숨을 내쉬던 그녀는 걱정스러운 물음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촉촉이 젖은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문 잠갔는데?”
그는 장난기 어린 미소와 함께 어깨를 으쓱이며 소파에 앉았다.
“이리 와. 밥 먹자.”
지원은 테이블 위에 놓인 민서의 도시락을 가리키며 말했다. 처음 받았을 때 따끈했던 느낌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모습의 도시락이었다.
“그게 뭐에요?”
“도시락.”
“도시락인 거는 나도 알거든요.”
“아, 강민서가 줬어. 팬들이 준비했나 봐.”
현주는 도시락 뚜껑에 붙은 민서의 사진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시락은 지원과 현주 둘이서 먹어도 남을 만큼 양도 많고 화려했다. 김으로 멋을 낸 달걀말이와 잘 구워진 불고기 볶음, 문어 모양으로 잘린 소시지까지 다양한 반찬들이 가득했다.
“이야, 민서 씨 팬들 대단하네요. 이걸 제가 먹어도 될까요?”
“왜?”
“지원 씨 먹으라고 준 거잖아요.”
지원은 별걱정을 다 한다는 듯 그녀의 머리를 헝클였다.
“어차피 이거 혼자 다 못 먹어.”
“에이.”
“나 입 짧아. 남기는 것 보단 다 먹는 게 팬들한테도 좋을걸?”
“그건 또 그러네요.”
현주는 그제야 나무젓가락을 쪼개 먹을 준비를 시작했다. 보고만 있어도 군침이 흐르니 그 맛은 어떨지 기분 좋은 기대감이 퐁퐁 솟아났다. 지원은 그런 현주의 모습조차 사랑스러웠다.
똑똑―
음식을 향해 젓가락을 뻗기 직전, 현주는 반찬 하나 입에 대지 못한 채 얼음처럼 몸을 굳혔다.
“어, 어떡해요?”
현주는 지원의 팔을 붙잡고 울상을 했다. 연석과 팬들 사이에 둘러싸인 경험이 있는 그녀는 이런 상황이 끔찍이도 싫었다. 물론 이곳은 촬영 현장이었으니 그때와는 많이 다른 상황이었지만 어쨌든 의심받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그에 반해 지원은 눈살을 찌푸리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우리가 뭐 잘못한 것도 아닌데.”
“네?”
지원은 곧장 일어나 잠긴 문을 열었다.
“선배님!”
현주를 얼어붙게 한 노크의 주인공은 민서였다. 해맑은 웃음을 잔뜩 입에 걸고 자신의 도시락을 들고 있던 그녀는 현주를 발견하고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자, 작가님도 계셨네요.”
지원은 건조한 눈을 빛내며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포스터 때문에 상의할 게 있어서.”
“아…….”
민서는 현주를 향한 눈길을 거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원은 민서가 물러나지 않는 것에 대해 심한 귀찮음을 느끼고 있었다. 일분일초가 아까운 시점이었다. 얼마 되지 않는 쉬는 시간 동안 현주와 대화를 나누고, 얼굴을 마주해야 했다.
“왜.”
“네?”
“왜 왔냐고.”
현주는 망부석처럼 소파에 앉아 그와 그녀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생각해 보니 지원과 자신의 독대가 그렇게 어색한 장면은 아니었다. 자신은 작가였고 그는 그녀의 작품에 출연하는 배우였다. 그녀까지 합류한다면 더할 나위 없는 조합이었다.
“민서 씨도 같이 먹을래요?”
민서는 물론 지원의 고개도 현주를 향해 돌려졌다. 민서는 기쁘면서도 놀란 모양이었고 지원은 정말이지 짜증이 나 견딜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래도 돼요?”
“들어와요.”
현주는 미소를 지으며 눈길을 지원에게 향했다. 그가 문고리를 잡고 놓지 않는 바람에 민서가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현주의 도움으로 들어온 민서는 어색하게 도시락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지원 씨도 얼른 와서 앉아요.”
지원은 잔뜩 구긴 인상과 함께 터덜터덜 자리에 앉았다. 현주와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그의 소박한 바람은 무참히 깨져 버렸다.
― Rrrrr.
현주의 핸드폰이 울렸다. ‘연석’이었다. 그 이름을 놓칠 리 없는 지원의 눈이 날카롭게 바뀌었다.
“여보세요.”
일부러 받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현주의 입장에서는 고작 전화를 받는 것뿐이었다. 지원은 목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어딘가 뻐근해진 제 몸을 이완시켰다. 단둘이 있었다면 당연히 그의 전화를 받지 못하게 했을 것이었다.
곁에 있는 민서나 전화를 받는 현주나 눈치가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연석이도 같이 먹을까요?”
가관이었다. 전화를 받은 것도 열불이 나 죽을 것 같은 그에게 현주는 그와 함께 밥을 먹어도 되냐는 소리를 했다. 아무래도 연석은 그녀에게 같이 밥을 먹자고 전화한 것 같았다. 지원은 가는 눈을 치켜뜨며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현주는 잘못한 것이 없었지만 괜히 몸을 움츠렸다.
“저는 괜찮아요.”
민서의 긍정적인 대답이 흘러나왔다. 현주는 난감한 듯 어색한 미소를 지었고 지원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지원과 현주가 분노와 미안함이 가득한 눈의 대화를 나누고 있을 즈음 민서는 젓가락 하나를 쪼개어 냅킨을 깔고 지원 앞에 놓았다.
“얼른 드세요. 시간도 별로 없는데.”
그녀의 손길은 퍽 다정하고 꽤 여성스러웠다. 여전히 지원을 무서워하느라 친밀하지는 않았지만 그를 위하는 행동이라는 것쯤은 명확했다. 현주는 묘한 불쾌함에 얼굴이 구겨졌다.
“…….”
지원은 오직 연석이 지금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것에만 정신이 팔렸다. 민서가 자신을 챙기고 현주가 그런 그녀를 불편해하고 있음은 안중에도 없었다.
똑똑.
아무도 대답하지 않고 아무도 문을 열어 주지 않았지만, 연석은 스스로 문을 열고 들어와 인사했다.
“다들 여기 계셨네요.”
연석은 자연스럽게 현주 옆에 앉아 자신의 도시락을 펼쳤다.
“누나 도시락은 없어요?”
연석은 두리번거리며 물었고,
“작가님이 스태프 명단에 없어서 팬분들이 준비를 못 한 것 같아요.”
민서가 대신 대답했다. 연석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도시락을 현주 앞으로 내밀었다.
“누난 나랑 같이 먹어요.”
“어?”
현주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어 지원의 얼굴을 살폈다. 잔뜩 일그러져도 모자랄 판에 그의 얼굴은 평온 그 자체였다. 그의 도자기 같은 얼굴은 주름 하나 허용하지 않았고 의자에 기대앉은 자세는 불안보다는 여유가 보였다.
오로지 그의 눈만이 날카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 그래. 그러지 뭐.”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호의를 보이는 연석에게 싫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정말 안 드실 거예요?”
민서는 여전히 지원이 밥을 먹는지, 안 먹는지가 중요해 보였다.
“신경 쓰지 말고 너 먹어.”
지원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며 생각에 잠겼다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요?”
현주는 다급하게 물었다. 겉으로 보았을 때 지원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지만 그녀는 알 수 있었다. 그는 아주 많이 화가 나 있었다.
“밖이요.”
지원은 짤막한 존댓말과 함께 문을 열고 나갔다. 민서는 아쉬운 듯 얇은 아랫입술을 내밀었다. 현주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
민서는 그런 그녀에게 일말의 관심도 없어 보였지만 연석은 달랐다.
“금방 올 거예요?”
어린아이 같은 질문을 했다. 현주는 어딘가 불편해지는 이질감에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녀에게 시급한 것은 화가 나 있는 지원을 찾는 것이었다. 대기실을 벗어나자마자 현주는 지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생각과 달리 금방 전화를 받았다.
― 어.
“어디예요?”
― 당신은?
“촬영장이에요. 대기실에서 나왔어요.”
핸드폰 너머로 그의 조용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현주는 급격한 갈증에 목이 마르는 것 같았다.
― 왜?
“장난치지 말아요. 어디예요?”
― 차.
“네?”
― 차 안이라고.
“기다려요.”
현주는 그대로 전화를 끊고 촬영장 밖으로 나왔다. 여러 종류의 차들이 즐비해 있었지만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의 차라면 날렵한 스포츠카부터 사방이 새까만 밴까지 모조리 알고 있었다. 차 문을 열자 그녀의 눈앞엔 나른하게 기대 누운 지원이 있었다.
“여기서 뭐 해요?”
“명상.”
지원은 장난스러운 얼굴로 짤막하게 대답했다.
“명상을 왜 해요?”
“음…….”
지원은 상체를 일으켜 현주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열 받아서.”
그는 여전히 장난스러운 얼굴이었지만 목소리는 날카롭게 날이 서 있었다. 현주는 주변을 확인하고 차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는 그녀가 썩 좋지 않은 선택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화가 나 있는 상태에서 밀폐된 공간에 그녀와 단둘이 있는 것은 좋지 않은 것이었다.
“미안해요.”
그녀는 그런 지원을 꼼짝 못 하게 하는 마력이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노로 속이 끓어오르던 그였지만 현주의 사과는 그에게 찬물처럼 차가웠다. 그는 맥 빠진 사람처럼 싱겁게 웃으며 물었다.
“뭐가?”
“사실 뭐가 미안한지 모르겠어요.”
“그래?”
“전화를 받은 게 저울질하는 건 아니잖아요.”
지원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지.”
현주는 그의 선선한 반응이 당황스러웠지만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같이 밥 먹자는 사람한테 싫다고 하기도 뭐하고요. 어차피 민서 씨도 있는데.”
“맞아. 민서도 있었지.”
현주는 묘하게 거슬리는 무언가 때문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지만……. 지원 씨가 기분 나빴을 수도 있었을 것 같아요.”
“왜?”
지원은 계속 말해 보라는 듯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현주는 말할수록 이상해지는 자신의 논리 때문에 허공에 대고 헛손질을 해 댔다.
“아니, 그러니까!”
“응, 그러니까.”
현주는 더 이상 설명을 못 하겠는지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쉬었다. 명색이 작가라는 사람이 마음속 감정 하나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니 죽을 맛이었다. 지원은 그런 그녀의 모습이 귀여워 소리 내어 웃었다.
“웃겨요?”
현주의 물음에 그는,
“아니.”
라고 대답했다. 지원은 그녀의 절망적인 얼굴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민서랑은 왜 같이 밥 먹자고 했어?”
“네?”
“당신이 같이 밥 먹자고 했잖아. 아무 말 안 했으면 내가 알아서 보냈을 텐데.”
생각해 보니 그의 말이 맞았다. 현주는 당황스러워하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그와의 시간보다 사람들의 시선이 더 신경 쓰였다는 것을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 그러게요.”
“내가 다른 여자랑 있는 게 아무렇지 않아?”
“네?”
“나랑 조금이라도 둘만 있고 싶은 생각 없어?”
그는 여전히 장난스러운 얼굴과 미소를 머금은 채였다. 그럼에도 현주는 긴 창살로 몸통 어딘가를 찔리는 기분이었다.
“…….”
“나는 당신이 다른 남자랑 같이 있는 거 싫어.”
“연석이는 그런 게 아니라…….”
지원은 그녀의 눈을 쳐다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더 말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내가 민서랑 같이 밥 먹고 전화하는 건 어때?”
“그게 무슨…….”
“민서랑 나는 아무 사이 아니야. 맹세할 수 있어. 그럼 괜찮은 거야?”
현주는 말문이 막혔다. 자신이 무엇 때문에 불쾌함을 느끼고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그가 준 것이었다. 그녀는 민서가 그의 젓가락을 챙기는 것은 물론이고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것 역시 싫었다. 현주는 그를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지원은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난 당신이랑 둘이 있는 시간이 간절해.”
“……미안해요.”
“…….”
“생각이 짧았어요.”
지원은 스스로가 대견했다. 그녀에게 쓸데없는 화를 내지 않고도 자신의 생각을 전달한 것이었다. 그는 얌전한 강아지처럼 그녀의 무릎에 머리를 베고 누웠다.
“내 핸드폰 왜 바뀐지 알아?”
“연예인들 핸드폰 자주 바꾸잖아요. 뭐 특별한 이유 있어요?”
“예전 핸드폰이 부서졌어.”
“왜요?”
지원은 현주의 순진한 얼굴을 보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 때문에.”
“나요?”
“응, 너요.”
“…….”
현주는 그의 핸드폰이 바뀌게 된 시기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장면이 없었다. 지원은 그녀에게 모든 것을 알려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다른 사람이랑 내 물건 공유하는 거 싫어.”
“내가 지원 씨 물건이에요?”
“아니, 그래서 더 중요해.”
“…….”
“당신이 우리가 아무 사이 아니라고 했으니까 참는 것뿐이야. 괜찮은 거 아니야.”
지원은 지금 당장이라도 그녀를 삼키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며 한마디, 한마디를 뱉어 냈다. 현주는 그런 그의 눈에서 무슨 영감이라도 받은 것처럼 홀린 듯 말을 꺼냈다.
“지원 씨.”
“응?”
“민서 씨한테 민서라고 부르지 마요.”
“민서를 민서라고 부르지 뭐라고 불러.”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의 입가엔 미소가 번져 있었다.
“아, 그냥 민서 씨라고 하면 되잖아요. 뭐 그렇게 친한 사이라고.”
현주는 투덜투덜 깨달은 본심을 전했다. 지원은 그녀의 내밀어진 입술을 어루만지며 참을 수 없는 욕망과 싸웠다.
“우리 아무 사이 아닌 거 확실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