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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고백 (13/20)

13. 고백

시간은 벌써 새벽 네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작고 낡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녀의 집까지 오르는 동안 지원은 해야 할 말들을 끊임없이 되짚었다. 그녀에게 말할 수 있는 기회는 지금이 마지막일 수도 있었다.

“후…….”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두 개의 현관문이 보였다. 오른쪽이 현주가 있는 집이었다. 지원은 그녀가 이미 잠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망설임 없이 초인종을 눌렀다.

딩동―

집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지원은 그녀를 어두운 새벽 거리에 홀로 내버려 둔 사실이 떠올랐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여전히 길을 헤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머리가 아파 왔다.

지원은 한 손으로 초인종을 누르며 다른 한 손으론 핸드폰을 찾았다. 그러나 그녀의 핸드폰은 지원이 뺏은 그 이후로 여전히 그의 안쪽 주머니에 있었다.

딩동, 딩동―

초인종을 누르는 지원의 손이 다급해졌다. 약간의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잠깐 들리더니 굳게 닫힌 문이 열렸다. 울었는지 눈 주위가 붉어진 그녀가 나타났다.

“지원 씨? 여기서 뭐 해요?”

가는 목을 미세하게 떨며 붉은 입술을 깨물고 있는 그녀는 안아 주고 싶을 만큼 여렸지만 괴롭히고 싶을 만큼 아찔하기도 했다. 현주는 거친 숨을 몰아쉬는 지원의 등장에 몹시 당황스러웠다. 지원은 작은 틈을 두고 열린 현관문을 단단히 움켜쥐고 말을 시작했다.

“당신한테 할 말 있어.”

현주는 그의 눈길을 피하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 끝났다고 얘기했잖아요.”

“내 얘긴 안 끝났어.”

지원은 천천히 숨을 고르며 해야 할 말들을 정리했다. 현관문을 쥔 그의 손에서 긴장한 핏줄들이 날카롭게 솟아올랐다. 지원은 자꾸만 망설여지는 마음을 무시하며 눈 안 가득 현주를 담았다.

“당신이 다른 남자랑 있는 거 싫어.”

“그게 무슨 이기적인…….”

“끝까지 들어.”

그는 확신에 차 단호하게 말했고 현주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당신이 내 옆에 없는 것도 싫어. 당신한테 연락하지 못하는 것도 싫고, 당신을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건 더더욱 싫어.”

현주는 현관문을 쥔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음을 보았다. 현주는 그가 떨고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나 싶었다. 대선배들이 모인 리딩 현장에서도, 폭력사건에 휘말려 대중에게 버림받을 수도 있던 날에도 그는 떨지 않았다.

그는 바닥으로 눈을 떨구며 계속 말을 이었다.

“내가 당신 좋아한다고 하면 다 사라질 것 같았어.”

“…….”

“기다리고 기대하고 실망하고 후회하는 거 싫어. 그런 거라면 진절머리가 나. 그래서 당신이랑 아무것도 하기 싫었어. 당신한테 기대하고 실망하고 후회하는 거, 상상하기도 싫었어. 그래서…… 그래서 그랬어.”

“지원 씨.”

“미안해.”

어느새 지원의 눈에는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눈물이 가득 차 있었다. 남자답게 고백하자던 굳은 각오는 다 사라진 지 오래였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에게 안락을 주는 그녀는 그를 무장해제 시켰다. 현관문을 움켜쥔 그의 손에서 조금씩 힘이 빠져나갔다.

“좋아해.”

“…….”

“당신이 좋아. 어쩔 수 없어.”

그녀가 그를 좋아한다고 말하며 어쩔 수 없었다고 했던 것처럼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그녀를 좋아하게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때 현주의 집 맞은편 현관문이 달그락 소리를 내며 열리려 했다. 한밤중의 소란 때문인지, 새벽잠이 없는 탓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 지원의 얼굴이 드러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현주는 재빨리 지원의 팔을 끌어당겨 집 안으로 들였다.

“…….”

작은 정적이 시작됐다. 지원은 괴로운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눈앞에 선명하게 펼쳐진 유혹을 견디기란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다. 손만 뻗으면 가질 수 있는 거리에 있는 그녀를 지원은 조금도 건드릴 수 없었다. 그의 손이 닿으면 부서져 사라질 것 같았다. 멀기만 하던 그녀와 단둘이 같은 공간에 있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지원은 지금의 순간을 조금만 더 연장하고 싶었다.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지옥과 같은 뜨거운 욕망이 타오르고 있었다.

얼떨결에 그를 집 안에 들인 현주는 머릿속이 텅 비어 버렸다. 그의 숱한 농락에 어떤 거절을 할까 고민한 적은 있었지만, 그의 진심 어린 고백에 어떤 대답을 할지에 대해서는 고민한 적 없었다.

그의 들끓는 눈을 마주 보자 온몸이 굳은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현주는 그와의 첫날밤처럼 발끝이 저리고 온몸이 딱딱해졌다. 공기는 충분했지만 숨은 쉬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더운 숨을 크게 한 번 삼켰다. 꿀꺽― 지원의 눈이 살짝 구겨졌다.

그 순간, 정적은 깨지고 지원의 눈은 뜨겁게 타올랐다.

지원은 그녀의 허리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현주는 어색함에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살짝 밀어냈다. 지원의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닿았다.

“미칠 것 같아. 나 좀 살려 줘.”

지원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붉은 입술을 삼켰다. 도톰한 입술을 깨물자 살짝 벌어지며 낮은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으음…….”

그가 밀어붙일수록 현주는 뒤로 밀려났다. 지원은 그녀의 머리를 감싸 바짝 끌어당겼다. 참아 온 갈증이 오아시스를 만난 듯 그녀의 모든 것을 탐하고 싶었다.

하지만 거칠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그녀가 도망가지 못할 만큼만 붙들어 두고 싶었다. 지원은 잠깐 고개를 떼어 그녀를 보았다. 두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 숨이 막힐 정도로 소중했다.

“유현주.”

현주는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천천히 눈을 떴다. 지원은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으며 말을 이었다.

“곁에 있게 해 줘. 곁에 있고 싶어.”

곁에 있으라는 말과 비슷한 그러나 사뭇 다른 말들이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지원은 끌어안은 그녀를 놓고 싶은 생각 따윈 조금도 없었다. 현주는 그가 자신을 원한다는 것만큼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현주는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그의 팔을 풀어냈다. 지원의 눈빛이 불안함에 흔들렸다.

“가라고 하지 마.”

그는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뺨을 감쌌다.

지원의 눈길이 그녀의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를 따라다녔다. 현주 역시 그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스치는 얼굴에도 마음이 아팠고 떠오르는 기억 하나에도 화상을 입은 듯 화끈거렸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의 전부가 될 수 없었다. 설렘과 동경은 사랑의 기초일 뿐이라는 것을 현주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입꼬리를 말며 작게 웃었다.

“고마워요.”

그녀 역시 김지원이란 사람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김지원이란 남자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쉽게 할 사람은 아니었다. 평소 좋아하냐는 질문만 해도 얼굴을 구기던 남자가 늦은 새벽에 달려와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희소한 것이었다.

현주는 그의 용기가 진심으로 고마웠다. 하지만 지원은 그런 그녀의 대답에 만족을 느낄 수 없었다.

“…….”

그다음의 말이 필요했다. 지원은 그녀를 보채지 않으려 무던히 애썼다. 현주는 천천히 입술을 열어 다음 말을 이었다.

“당신을 믿을 수가 없어요.”

지원은 깊은 절망에 잠식될 것 같았다. 최선의 진심이 불신이 되어 돌아오자 그는 답답함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지원은 현주의 어깨를 흔들며 애원했다.

“내가 당신 힘들게 한 거 알아.”

“지원 씨.”

“그래도 당신 속인 적은 없었어. 내가 몰랐을 뿐이야. 이젠 알아. 내가 당신 좋아한다는 거 이젠 확실히 알아. 나한테도 기회를 줘. 제발.”

그는 자신이 너무 늦어 버린 것은 아닌지 불안해졌다. 현주는 자신의 어깨를 쥔 그의 팔을 어루만지며 지원과 눈을 맞췄다.

“나도 지원 씨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런데 왜.”

지원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녀의 옆자리에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현주는 그에게 자신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전달하기 위해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착각일 수도 있잖아요.”

“뭐?”

“곁에 있던 게 없어지면 누구나 불안해지기 마련이에요. 지원 씨도…….”

그제야 지원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지고 두 눈에선 분노가 타올랐다.

“내가 착각 때문에 당신한테 달려온 줄 알아?”

지원의 목소리는 더 낮은 곳으로,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갔다. 그는 머리를 헝클이며 거친 숨을 뱉어 냈다. 현주는 그와 눈을 맞추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도 지원 씨가 착각한 게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유현주, 나는…….”

“나한테 믿음을 줘요.”

현주는 지원의 말을 자르며 맑은 눈을 빛냈다. 어두운 방 안을 비추던 달빛은 오로지 현주만을 비추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지원은 가질 수 없는 그녀의 눈에서 황홀한 절경을 보았다.

“내 곁에 있어요. 내 곁에서 나한테 믿음을 줘요.”

“하아―”

지원의 미간은 구겨진 채 펴질 줄을 몰랐다. 그녀가 원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현주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의 품에 안기듯 다가섰다. 지원은 가까워진 그녀의 얼굴에 마른침을 삼켰다.

“지원 씨.”

“말해.”

“이번에는 내가 원하는 대로 해 줘요.”

목마른 자는 알아서 고개를 숙여야 하는 법이었다.

지원은 채워지지 않는 공허한 마음에 답답함이 가득했지만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깊은 한숨과 함께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자신을 밀어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녀에게 감사를 전해야 할 것 같았다.

“어떻게 하면 되는데.”

그의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현주는 가만히 고개를 숙여 그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내가 지원 씨를 믿을 수밖에 없는 날이 분명 올 거예요.”

“…….”

“그때까지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닌 거예요.”

지원은 그녀를 안은 팔에 잔뜩 힘이 주었다. 아무것도 아닌 관계로는 더 이상 만족할 수 없었다. 그녀와 또다시 아무것도 아닌 관계로 지낼 거였다면 이리 속마음을 드러내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무엇을 더 어떻게 참아야 하는지 앞길이 막막했다. 그러나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현주의 두 눈이 제발 그렇게 해 달라고 애원하는 것 같았다. 지원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입술이 둥글게 움직였다.

“고마워요.”

현주는 그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지원 씨.”

지원은 현주의 머리카락을 쓸며 아쉬운 표정을 숨기려 애썼다. 자신만 고백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거라 생각한 것이 오만이었다. 그는 자신의 근성을 보여 주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녀의 잔인한 선고는 아직 다 끝난 것이 아니었다.

“우리 섹스도 안 할 거예요.”

그녀에 대한 욕구는 정신적인 것은 물론 육체적인 것도 포함되는 것이었다. 지원은 자신이 과연 그럴 수 있을까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해야 해?”

이미 여러 번의 관계를 가진 사이였으니 그의 황당함도 이해할 만했다. 하지만 현주는 그의 치명적인 매력을 알고 있었다. 지금 당장은 그에 대한 원망으로 그를 거절할 수 있지만 그와 몸을 나누면 그것은 또 다른 일이 될 것이었다.

현주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니까요.”

지원은 잠시 현주와 눈을 맞추고 침묵을 지켰다. 그녀는 안전한 거래를 원하는 것이었다. 기회를 주는 대신 쉽지 않을 것이라는 그녀만의 선전포고였다.

“알았어.”

현주는 지원의 선선한 대답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미 그의 눈에서 불타는 욕망을 본 뒤였다. 아쉬운 쪽은 그였으니 분명 승낙할 수밖에 없는 제안이긴 했지만 쉽게 응해 줄 것이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의 눈이 현주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천천히 살폈다. 긴 속눈썹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릴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지원의 손이 그녀의 손등을 간지럽히다 이내 부드럽게 쥐었다.

“손잡는 건?”

“…….”

“아무 사이도 아닌 남녀 사이에 손은 잡아도 되나 싶어서.”

지원은 그녀의 손을 끌어당겼다. 조금만 움직여도 맞닿을 만큼 둘의 간격은 좁아졌다. 지원은 그녀의 가는 목을 어루만졌다. 그녀의 작은 떨림이 느껴졌다. 현주의 머릿속에선 비상벨이 울리고 있었다.

“지원 씨.”

지원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당신 목이 너무 예뻐서 키스하고 싶으면?”

“…….”

“그때도 참아?”

현주는 아찔해지는 기분에 절로 고개를 젖혔다. 지원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자신과 밀착시켰다. 그녀가 원한다면 어떤 것이든 멈출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가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다면 할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부터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지원은 그녀의 목에서 입술을 떼고 그녀의 입술을 어루만졌다. 현주의 거친 숨소리가 불규칙적으로 흘러나왔다.

“하…….”

그는 그녀의 입술을 깨물며 입꼬리를 말았다.

“참을 수 없으면?”

지원은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깊게 입을 맞췄다. 이전보다 뜨거운 숨을 뱉어 내는 그녀의 입안이 달콤했다. 혀끝에 닿는 감촉은 황홀했고 그만큼 아쉬웠다. 그녀가 도망가면 그녀를 휘감고 끈질기게 맛을 봤다.

현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끌어안았다가 또 밀어내며 그를 만끽했다. 지원은 조금씩 거칠어지고 있었다. 지독한 갈증이 쉽사리 해소되지 않는지 그는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현주가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그의 뜨거운 눈빛이 그녀 위로 쏟아졌다.

“여, 여기까지 해요.”

현주는 필사적으로 멈춰야 했다. 그의 리드로 관계를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여기까지가 어딘데.”

지원의 낮은 목소리는 뱀처럼 그녀를 위협했다. 현주는 까치발을 들어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지원은 황홀한 듯 눈살을 찌푸리며 미소를 지었다. 짧은 입맞춤 후 그녀는 그의 품에서 나와 어색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여기까지만 해요.”

지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밤은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현주는 그에게서 두어 걸음 정도 물러나 짐짓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가요.”

산 넘어 산이었다.

“어딜?”

“지원 씨 집이요.”

현주는 당연하다는 듯 어깨를 들썩였다. 지원은 벽에 걸린 시계를 가리켰다.

“지금 새벽 다섯 시야.”

“알아요.”

잠자리를 함께하지는 못해도 그녀를 안고 잠들고 싶었다. 현주는 도도한 몸짓을 흉내 내며 팔짱을 꼈다.

“잠은 각자 집에서 자는 걸로 해요.”

“진심이야?”

“그럼요.”

현주는 무서운 선생님처럼 엄한 표정을 지었다. 지원은 더 이상 어쩔 수 없었다. 그저 한숨을 쉬며 쓸쓸히 등을 돌릴 뿐이었다. 현주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지원 씨.”

지원은 혹시나 그녀가 마음을 돌린 것은 아닐까 싶어 기쁜 마음에 고개를 돌렸다.

“전화해요.”

그가 원하는 말은 아니었지만 듣기 좋은 말이었다. 지원은 그대로 다가가 현주를 끌어안았다.

“아니, 지원 씨……!”

“전화할게. 꼭 받아.”

현주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 * *

지원은 스케줄 장소로 이동하는 와중에도 핸드폰을 놓지 않았다.

“오늘 뭐 해?”

그는 현주와 계속해서 전화 중이었다. 설레고 복잡한 마음으로 잠을 이루지 못한 그는 아침 일찍부터 그녀를 깨웠다.

― 음, 서점 들렀다가 친구 만나서 저녁 먹을 거예요.

“친구 누구?”

지원은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이 궁금했다.

스케줄이 많아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하니 더욱 그랬다. 심지어 그녀는 매일 만나는 것도 거절했다. 가뜩이나 새벽 늦게 스케줄이 끝나는 경우가 많아서 명확한 데이트 일정을 잡는 것도 어려운데, 그녀가 허락하는 시간도 한정되어 있으니 지원은 애가 탔다.

― 누구인지 말하면 알아요?

“아니. 그래도 궁금해.”

지원은 아침부터 지금까지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현주는 이제 그만 물어보라며 백기를 들었지만 그는 멈출 수 없었다. 그동안 묻지 못한 것이 많았고, 궁금해도 참았던 것이 많았다.

― 고등학교 친구에요. 여자고요. 아, 지원 씨 팬이에요. 저번에 사인 받아 달라고 했거든요.

“해 줄게. 다음에 갖다 줘.”

핸드폰 너머로 그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생각해도 자신의 모습은 꽤 우스운 것이었다. 매사에 ‘싫다’, ‘아니다’라는 말만 하던 그가 그녀 말에 ‘좋다’, ‘그렇다’라는 말만 하고 있으니 말이다.

― 지원 씨는 오늘 뭐 해요?

“포스터 촬영. 당신도 와. 당신 작품이잖아.”

오늘은 드라마 ‘월광’의 포스터 촬영이 있는 날이었다. 주요 배우인 지원과 연석, 민서가 모두 모여 진행되는 일정이었다.

― 포스터 촬영까지 제가 갈 필요는 없죠.

“작가는 모든 상황에 참여할 권한이 있어.”

― 배우들 불편하잖아요.

“편협한 생각이야.”

지원은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그녀가 못마땅했다. 그녀와 달리 그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관계없이 그녀가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 민서 씨는 그렇게 생각 안 할걸요?

지원은 묘한 불쾌함에 얼굴이 구겨졌다.

“이연석은?”

― 네?

“이연석은 당신 있는 거 좋아할 것 같아?”

지원은 이유 없이 불쾌해지기 시작했다. 이연석과 현주의 관계가 단순히 작가와 배우 사이, 친한 누나와 동생 사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친한 누나와 동생 사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 연석이랑 나랑은 그냥 친한 누나, 동생이에요.

“남녀 사이엔 그런 거 없어.”

지원은 단호했다.

“나랑 당신이 아무 사이 아닌 건 알겠는데.”

그는 ‘아무 사이’라는 말에 힘을 주며 말을 이었다. 예전부터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이 있었다.

“저울질은 하지 마.”

― 저울질이요?

“나는 당신이랑 내 사이를 고민했지, 당신이랑 다른 사람 사이를 고민한 적은 없어.”

지원은 자신이 하는 말을 현주가 귀담아들어 주길 바랐다.

― 알아요.

“당신은 나랑 당신 사이만 고민하는 거야. 알았어?”

지원은 그게 무엇이든 하나에만 몰두하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일이든, 사람이든 마찬가지였다. 그와 그녀가 몹시 애매한 관계 속에 있을 때도 그는 다른 여자와 조금도 함께하지 않았다. 지원은 그녀 역시 분명히 행동해 주길 바랐다.

― 알았어요.

지원은 그제야 안심이 된다는 듯 눈을 감고 차 시트에 몸을 기댔다.

“근데 진짜 안 올 거야?”

불쾌함을 한껏 표현하고 나서야 지원은 한껏 풀어진 목소리로 돌아왔다. 매니저는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지원을 나무랐다.

“김지원, 핸드폰 좀 그만 내려놔. 들어가야지.”

지원은 차가 촬영장 앞에 섰음에도 전화를 끊지 않고 있었다. 핸드폰 너머로 매니저의 목소리를 들은 현주는 상황을 파악하고 그를 재촉했다.

― 얼른 들어가요! 늦으면 어떡해.

“아직 십 분 남았어. 조금만 더 해.”

― 십 분 전에는 들어가야죠. 끊을게요!

끊어진 핸드폰을 슬픈 표정으로 바라보던 지원은 매니저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촬영 늦어서 유현주 못 만나면 형 때문이야.”

“아니, 내가 왜…….”

매니저는 진정 억울하다는 듯 울상을 했지만, 지원은 매니저보다도 더 억울하다는 얼굴로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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