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질투
현주는 옷장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무엇을 입어야 하는지 무척이나 고민이었다. 평범한 친구들과의 나들이가 아니기에 더욱 그랬다.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일반 식당은 가지도 못하던 지원이 떠올랐다.
야밤에 선글라스를 끼는 것도 이상했지만 마스크를 쓰는 것은 더 튈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핸드폰에서 연석의 이름을 찾아내 통화버튼을 눌렀다. 저번 시즌까지 활동했던 연석의 노래가 이어 나왔다.
― 네, 누나. 벌써 출발했어요?
“아, 아직. 근데 있잖아.”
― 네.
“너 혹시 뭐 입고 와?”
― 네?
현주는 그의 옷차림이 궁금했다. 평범하게 입어도 평범하지 않을 그였다.
“튀면 안 될 것 같아서.”
― 아, 누나 걱정되는구나.
“응.”
연석의 차분한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 그냥 편하게 입어요. 나도 후드 티에 청바지 입고 가니까.
“그래도 되는 거야?”
― 그럼 뭐 방한복이라도 입고 오려고요?
“그런 건 아니지만.”
― 평일 심야영화는 사람도 별로 없고 괜찮아요. 누나한테 피해 안 갈 거야.
연석은 그녀가 느끼는 부담감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당연한 것이었다. 그의 친누나조차도 연석과 함께 있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이었다. 다정하고 믿음직스러운 연석의 말은 잔뜩 긴장하고 있던 현주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그래, 뭐. 이 시간에 누가 영화를 보겠어. 나 편하게 입고 갈게. 걱정 마.”
― 그래요. 이따 봐요, 누나.
현주는 회색의 두꺼운 후드 티에 검은색 치마 레깅스를 입었다. 영화관 의자를 불편해하는 그녀에게 최상의 차림이었다. 다행히 날씨도 많이 풀려 패딩 조끼 하나를 걸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외출복을 완성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뭐.”
현주는 묘한 즐거움에 휩싸였다. 근래에는 긴장하고 불안해하며 괴로워하던 것이 전부여서 지금처럼 편안한 마음이 기쁘고 반가웠다. 밖으로 나온 현주는 밤의 거리를 온전히 만끽했다. 차갑지 않은 바람이 신선했다. 연석을 위해 강남까지 나가야 한다는 것이 성가시긴 했지만 그 정도는 감수해도 될 만큼 거리는 아름다웠다.
도착한 영화관의 휑한 풍경도 마음에 쏙 들었다. 간혹 한두 커플이 보이긴 했지만 저마다의 대화와 시선을 갖고 타인에게는 작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때 아주 익숙한 목소리가 현주를 불렀다.
“작가님!”
현주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당장이라도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저를 부른 것은 재경이었고 그 옆에서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잔뜩 굳은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지원이었다. 두꺼운 머플러로 얼굴을 칭칭 감고 있었지만 한눈에 보아도 훤칠한 것이 지원이 분명했다.
“…….”
재경은 둘의 당황스러운 기색을 눈치채고 열심히 입을 움직였다.
“영화 보러 오신 거예요?”
“네? 아……. 네.”
“어떤 영화 보세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영화 포스터를 가리킨 현주는 제발 그들이 보는 영화와 다른 것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재경은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도 저거 보는데.”
운명은 원래 짓궂은 것이라 하지만 이토록 잔인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괴로운 지원과 같은 영화관에서 같은 영화를 봐야 하다니. 현주는 지금 당장이라도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바로 택시를 잡고 연석에게 전화해 사죄를 하면 될 것 같았다.
“누나!”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현주와 마찬가지로 회색 후드 티를 뒤집어쓴 연석이 손을 흔들며 다가오고 있었다. 현주는 자신도 모르게 지원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날카로운 눈이 연석과 현주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어, 연석 씨랑 온 거예요?”
필요하지 않은 확인 사살까지 던지는 재경이었다. 반가운 얼굴로 다가온 연석은 자연스럽게 현주 곁에 섰다.
“누나, 일찍 왔네요?”
“어? 어…….”
재경은 이 모든 광경이 무척이나 재미있다는 듯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연석은 평소 행실대로 살가운 웃음과 싹싹한 몸짓으로 지원과 재경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지원 선배, 안녕하세요. 재경 선배님, 처음 인사드립니다. 이연석이라고 합니다.”
“지원이가 선배라고 나한테까지 선배라 할 것 없어요. 공중파 데뷔는 연석 씨가 나보다 빠를걸?”
재경은 연석을 향해 보기 좋은 미소를 지었다. 반면에 지원은 연석에게 해야 할 인사를 모두 생략한 채 현주만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더 있다가는 현주의 얼굴이 녹아내릴 것 같았다. 그의 입에서 낮고 날 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당신이 여기 왜 있어.”
지원의 눈은 알 수 없는 분노와 불쾌함으로 가득했다.
현주는 반항기 어린 의문이 떠올랐다. 예전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지금은 더욱이 그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그에게 잘못한 일이 없으며, 도의적으로도 잘못한 것이 없었다. 그에게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말을 더듬을 필요는 없는 것이었다.
현주는 평소 지원의 거만한 말투를 따라 하며 가볍게 대답했다.
“영화관이잖아요. 영화 보러 왔어요.”
지원의 미간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뭐?”
“영화 보러 왔다고요.”
이틀 동안 짧지만 굵은 고통을 경험한 현주는 지원의 분노 어린 얼굴을 보며 쾌감을 느꼈다. 그것이 소유욕이든, 지나간 것에 대한 작은 미련이든 지원이 감정을 내비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누나, 음료수 뭐 마실래요?”
가뜩이나 예상과 다른 현주의 반응에 짜증이 올라오던 지원은 연석의 다정한 목소리에 인내심의 한계가 다가옴을 느꼈다. 예전부터 그가 현주를 부르는 ‘누나’라는 호칭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친하면 뭐 얼마나 친하다고 그녀에게 ‘누나’라는 호칭을 쓰는지. 낯짝이 두껍다고 생각했다. 재경은 언제나 그렇듯 눈치껏 굴었다.
“연석 씨, 저랑 팝콘 사러 안 갈래요?”
연석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 금방 다녀올게요.”
재경은 지원과 현주를 위해 둘만의 시간을 만든 것은 아니었다. 표현고자인 지원이 화를 애먼 연석에게 풀 것 같아 어여쁜 그를 대피시킨 것이었다. 재경은 앞길 창창한 청년의 미래를 구한 스스로를 대견해했다.
지원은 두 눈을 느리게 움직이며 말간 얼굴의 그녀를 쳐다보았다. 늦은 밤이라 화장도 하기 싫었던 것인지 그녀는 매끈하고 수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집 안에서만 볼 수 있는 그녀의 모습이라 생각했는데 그것이 이런 공개적인 장소에서 재경은 물론 연석에게까지 보여지는 것이 짜증스러웠다. 지원은 현주의 손목을 잡아 쥐고 자기 가까이로 당겼다.
“지금 뭐 하는 거야?”
그의 분노가 뜨거울 정도로 정확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은 현주의 몫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에 대한 진심을 온 용기를 다해 전했고 거절당했으며 그에 맞는 이별을 경험했다. 그 결정에 대한 모든 것은 지원의 몫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녀의 주인처럼 구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뭐가요.”
지원은 눈앞의 그녀가 자신이 알던 현주가 맞는 것인지에 대해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겉모습만 같을 뿐 냉정한 목소리와 지친 표정, 현주가 그에게 보여 주던 일상의 얼굴은 아니었다. 그는 그녀가 왜 이곳에, 연석과 함께 있는지에 대해 알고 싶었다.
“당신이 왜 여기…….”
현주는 그의 뒷말을 더 듣고 싶지 않았다.
“지원 씨가 왜.”
현주는 그의 말을 따라 하며 목소리를 낮췄다. 지원의 미간이 조금 좁혀질 즈음 그녀는 다시 말을 이었다.
“지원 씨가 왜 나한테 그런 걸 물어봐요.”
“뭐?”
지원은 머리를 맞은 것처럼 목이 빳빳해지는 느낌이었다. 그 역시 그녀와 자신이 더 이상 어떤 구속도 할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화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연석과 현주가 마치 오래된 연인마냥 편한 복장으로 나타난 것도 그렇고 늦은 밤 영화를 보는 것도 싫었다. 현주는 혼란에 휩싸인 그를 향해 자신이 받았던 상처를 되돌려 주었다.
“우리 사이가 뭐라고.”
“…….”
현주는 그에게서 한 발자국 물러나며 연석을 기다렸다. 더 가까이 있다가는 눈물이 차오르려는 두 눈을 들킬 것 같았다. 반면에 지원은 표정을 사납게 바꾸고 목소리를 낮췄다.
“이연석하고는 무슨 사이라도 돼?”
현주는 그가 왜 이렇게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지원 씨가 상관할 일 아니잖아요.”
현주는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더 이상 지원과 의미 없는 대화를 이어 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도망치듯 연석이 있는 카페테리아로 걸음을 옮겼다. 현주가 연석의 팔을 가볍게 잡자 연석은 다정하게 웃어 보였다.
“지금 가려고 했는데……. 기다리기 심심했어요?”
재경은 무슨 일인지 알 것 같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뱉었다. 현주는 어색한 미소와 함께 그럴듯한 변명을 했다.
“빨리 들어가고 싶어서. 알아보는 사람들 있을까 봐 괜히 불안해.”
“알았어요. 누나가 팝콘 들어요.”
연석은 먹음직스러운 팝콘이 가득한 상자 하나를 현주에게 건네며 상영관을 찾았다. 앞서 걷는 연석의 뒷모습이 현주에게는 꽤 든든해 보였다.
“너는 팝콘 안 먹지?”
재경은 지원에게 최대한 무심한 어투를 유지하며 물었다.
“들어가기나 해.”
지원은 엉켜 버린 머릿속 감정을 정리하기 위해 무던히 애썼다. 그에게는 시작도 못 하고 끝나 버린 관계가 많았다. 모두들 그에게 많은 것을 바랐다. 다정하게 대해 주길, 아껴 주길, 사랑한다고 말해 주길 등 다양한 것들을 바랐다.
그는 그것들을 끝내 할 수 없었고 관계는 끝이 났다. 현주의 경우가 그런 경우와 다른 점은 딱 하나뿐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바라는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 그저 그를 ‘좋아한다.’라고 말하고 떠났을 뿐이다. 지원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상영관 안으로 들어갔다.
“사서 고생을 해요. 사서.”
지켜보던 재경은 그의 서투른 모든 것을 안쓰럽고 한심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영화관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중간중간 커플로 보이는 사람들이 있긴 했지만 신경 쓰일 만큼은 아니었다. 연석은 자신을 따라오고 있는 현주를 향해 조용히 속삭였다.
“누나, 우린 맨 뒤에요. 뒤에 사람 있으면 불편할 것 같아서요.”
연석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현주는 일상적인 것들에서 조차 다른 사람을 신경 쓰는 그가 대단해 보였다.
“괜찮아. 나도 평소에 뒤에서 자주 봐.”
현주는 핸드폰에서 나오는 빛을 등대 삼아 아슬아슬 계단을 올랐다. 연석은 현주의 불안한 걸음을 찡그린 얼굴로 쳐다보았다.
“팝콘 이리 줘요.”
그는 커다란 손을 받침 삼아 콜라 두 잔을 들고 남은 한 손으로 팝콘을 들었다.
“괜찮아, 괜찮아. 콜라도 있잖아. 얼른 이리 줘.”
“누나 넘어지면 어떡해. 어두운 곳에서 잘 못 봐요?”
현주는 자신의 불안한 걸음을 들킨 것인가 싶어 부끄러워졌다. 그녀는 아주 미약한 야맹증 증상을 갖고 있었는데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 정도가 조금 악화됐다.
“평소엔 괜찮은데 오늘따라 좀 심하네. 고마워.”
“고맙긴요. 내 발 보고 따라와요.”
“응.”
현주는 핸드폰 불빛을 아래로 내려 연석의 하얀 운동화를 비췄다. 넓은 시야각을 유지하지 않아도 계단을 오르는 것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을 만큼 썩 괜찮은 이정표였다.
“여기에요, 누나.”
연석이 가리킨 좌석은 맨 뒤 왼쪽 가장자리에 있는 좌석이었다. 그는 콜라를 내려놓고 그녀의 손목을 가볍게 쥐었다.
“여기 앉아요.”
현주는 안쪽에, 연석은 복도 쪽에 앉아 자리를 잡았다. 그녀는 연석과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놀랐던 가슴이 진정되는 것 같아 좋았다. 그것이 연석의 다정함과 매너 덕분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연석아, 넌 여자 친구 없어?”
“네, 없어요.”
연석은 흡사 기계처럼 정확하고 명확하게 대답했다. 그는 자신이 말하고도 너무 딱딱했던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그가 그녀의 눈치를 살피자 현주는 콜라를 한 모금 마시며 웃었다.
“너 방금 되게 사무적이었던 거 알아?”
그녀는 괜한 호기심이 발동했다.
“진짜 없어?”
“왜요?”
“그냥, 다정한 건 타고나는 건가 싶어서.”
연석은 고개를 숙이고 속삭이는 현주의 얼굴이 마냥 귀여웠지만 짐짓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누나 바보예요?”
“응?”
“상식적으로 여자 친구가 있으면 여기 누나랑 같이 안 왔지.”
“아, 맞네.”
현주는 단박에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근데 바보는 좀 심하지 않아?”
그 무렵 지원과 재경도 자리를 찾고 있었다. 지원은 상영관 안으로 들자마자 맨 뒷줄에 있는 좌석을 살폈다. 연석도 연예인이었으니 당연히 맨 뒷줄에 자리를 잡았을 것이었다. 재경과 지원은 맨 뒷줄 오른쪽 가장자리 좌석이었다. 우습게도 현주와 지원은 여러 개의 좌석들을 사이에 두고 한 줄에 앉아 있는 셈이었다.
“너 복도 쪽에 앉을 거지?”
재경은 옆에 낯선 사람이 있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지원을 위해 바깥쪽 좌석을 양보했다. 평소의 지원이라면 당연히 그 자리에 앉았겠지만 현주와 연석이 시야에서 멀어지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내가 안쪽에 앉을래.”
“왜?”
“영화 더 잘 보게.”
어울리지도 않는 핑계를 대는 지원이었다. 재경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병신.”
그런 재경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는 지원이었다. 오로지 고개를 왼쪽으로 고정한 채 어렴풋이 보이는 현주와 연석의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쓸데없이 도란도란해 보이는 연석과 현주를 보며 지원은 거의 미쳐 버릴 지경이었지만 그마저 영화가 시작되니 보이지 않았다.
영화는 평범했다. 특별하지 않은 스토리 탓에 정작 보러 오자고 한 재경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지원은 집중하지 못했다. 그것은 현주와 연석도 마찬가지였다. 연석은 기대한 만큼 실망한 눈치였고, 현주는 영화와 자신의 대본이 어떠한 연관성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에이, 시시하다.”
영화가 끝나자 연석이 제일 먼저 한 말이었다. 현주는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도 분위기는 멋있던데? 도움은 좀 됐어?”
“그냥 그래요.”
“좀 평범하긴 했지? 일단 나가자.”
현주는 지원보다 빠르게 영화관을 나가고 싶었다. 아까처럼 마주치는 일은 없었으면 했다. 지원은 현주와 연석이 나가는 것을 지켜보며 졸고 있는 재경을 깨웠다.
“야, 일어나.”
“…….”
“하, 내가 이 새끼랑 영화를 왜 보러 온 거지.”
도무지 일어나질 않는 재경을 보며 지원은 강력한 살인충동과 함께 자책감에 휩싸였다.
그는 명상하듯 심호흡을 하며 낮고 명확한 목소리를 재경의 귓가에 흘려보냈다. 지원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확실치 않았지만 재경은 어렴풋이 가위를 눌린 것 같은 기분과 함께 눈을 떴다. 눈앞엔 귀신 대신 지원이 있었고 그 두 개는 딱히 다른 존재는 아니었다.
“깼으면 빨리 일어나. 여기 더 있고 싶지 않아.”
“알았어, 알았어.”
재경과 지원은 천천히 출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까 현주의 태도로 보면 이미 영화관을 떠나고도 남았을 것이었다.
지원은 영화를 보는 두 시간 내내 현주와 자신의 관계에 대해 생각했다. 소유욕 때문인 것 같기도 했다. 그녀를 가르쳤으니 그녀를 창조했다는 이상한 착각에 빠졌을 수도 있었다.
지원은 소유욕과 애정 사이의 접점을 찾기로 했다. 단순한 소유욕이라면 시간이 흐르도록 기다리면 될 문제였다. 다만 그것이 애정이라면 그는 선택을 해야 했다. 상처받을 각오로 도전하든,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 포기하든 그것은 지원의 몫이었다.
“뭐야?”
어두운 상영관을 빠져나와 영화관 로비에 들어서자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잔뜩 몰린 사람들이 보였다.
“웬 사람들이…….”
재경은 본능적으로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주변을 살폈다.
“이연석 여자 친군가 봐.”
“연예인이야?”
“일반인 같은데?”
영화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텅 비어 있던 영화관 로비가 연석을 보기 위한 사람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아마도 매점 직원을 통한 정보 유출인 것 같았다. 연석은 처음 겪는 광경에 머릿속이 하얘져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늘 곁에 있던 매니저도 없었고 곁에 있는 현주 역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오빠 여자 친구예요?”
연석은 현주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단둘이 심야에 영화를 보러 와 놓고 여자 친구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도 이상했고, 섣불리 작가라고 말하기엔 현주의 신상정보가 드러날까 걱정이었다. 현주는 연석을 보기 위해 밀치는 사람들로 인해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든 지경이었다.
“뭐야, 작가님이랑 연석 씨 같은데?”
지원은 재경의 말에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모자를 벗고 머리를 헝클여 자연스러운 스타일을 연출한 그는 거침없이 걸어 사람들 사이로 걸어갔다.
“작가님.”
지원의 낮고 분명한 목소리가 사람들의 소란을 뚫고 막대한 존재감을 뿜어냈다. 사람들의 시선이 연석과 현주에게서 지원에게로 쏠렸다.
“헐, 김지원이다.”
“대박.”
사람들은 말을 잇지 못하고 그저 다급히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현주는 여기저기에서 터지는 플래시에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숙였다.
“작가님, 괜찮아요?”
지원은 놀란 현주를 바라보며 물었다. 현주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숨을 삼켰다. 차원이 다른 세계에 빠진 것처럼 혼란스럽던 머리가 조금은 진정되는 것이 느껴졌다.
사람들은 지원과 연석의 곁에 선 한 여자의 신분이 궁금해졌다. 지원은 그런 그들의 호기심을 익히 안다는 듯 말을 이었다.
“연석이랑 저랑 드라마 같이 하는 거 알죠?”
지원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얼빠진 표정의 연석을 곁으로 이끌었다.
“네!”
둘이 같은 드라마에 출연한다는 것은 이미 전국을 휩쓸고 지나간 이슈였다. 모를 리 없었다.
“저희 드라마 작가님이세요.”
지원은 현주를 가볍게 가리키며 말했다. 사람들은 금세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원은 연석의 등을 가볍게 때리며 조용히 말했다.
“얼굴 펴. 네가 긴장하면 사람들이 의심하잖아.”
연석은 그제야 표정 관리에 들어갔고 지원과 둘도 없는 선후배 사이를 연기했다. 지원은 등을 돌려 구석에 선 현주에게 차 키를 건넸다.
“금방 내려갈게.”
지원은 현주가 무사히 엘리베이터에 탑승하는 것을 보고 난 후에야 사람들을 향해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지원과 연석은 순식간에 일일 홍보팀이 되어 드라마 ‘월광’의 방영 날짜와 시간을 설명했다. 모든 사람들에게 일일이 사인과 사진촬영에 임해 주는 것은 물론이고 작가님의 신원은 보호해 달라는 애교 섞인 부탁까지 거뜬히 해냈다. 곁에 있던 재경도 나서서 분위기를 희석하는 데 도움을 줬다.
“하, 선배님 감사합니다. 선배님 아니었으면 완전 큰일 날 뻔했어요.”
모든 일이 끝나고 나서야 연석은 지원에게 고마움을 표할 수 있었다.
“너 때문에 한 거 아니야.”
물론 지원은 그런 연석이 곱게 보이지 않았다.
“아이돌씩이나 됐으면 네 위치가 어딘지는 알지 않아? 조심해. 괜한 사람 힘들게 만들지 말고.”
지원은 싸늘한 말을 던지며 혼자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덩그러니 남겨진 재경과 연석만 어색할 뿐이었다. 재경은 잔뜩 풀이 죽은 연석을 향해 위로의 말을 건넸다.
“대신 사과할게요. 저 새끼, 표현고자라서 그래.”
나름의 위로임은 분명했다.
* * *
현주는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지원의 차에 도망치듯 올라탔다. 여전히 다리가 떨리고 시선이 불안정했다. 세상에 태어나 가장 많은 사람들의 의심과 경계심을 목격한 하루였다. 연석과의 나들이는 그녀의 생각보다도 더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것이었다. 지원이 밖에선 밥도 제대로 못 먹는 것을 유난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감싼 그녀는 운전석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반사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으아악!”
“으악!”
현주의 비명에 지원도 깜짝 놀라 짧은 비명을 질렀다.
“괜찮아?”
“아, 괜찮아요. 놀라서……. 미안해요.”
지원은 그녀가 너무 많이 놀란 것은 아닌가 싶어 걱정이 되었다. 연예인들도 대중들의 시선에 익숙해지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아무런 훈련도 없이 그런 상황을 마주한 현주가 놀라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 Rrrrr.
현주의 핸드폰으로 연석에게 전화가 왔다. 연석에게 어디로 간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으니 찾는 것이었다. 지원은 액정에 뜬 그의 이름을 보자마자 핸드폰을 자신의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었다.
“뭐 하는 거예요?”
“받지 마.”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얼른 핸드폰 줘요.”
“받더라도 나 없을 때 받아.”
현주는 그에게 고마웠던 잠깐의 감정이 또다시 분노로 바뀌는 것을 느꼈다. 자꾸만 그녀를 통제하려는 그에게 화가 났다. 현주는 정색을 하고 그에게 말했다.
“지원 씨는 나한테 그런 말 할 자격 없어요.”
지원은 그렇게 말하는 현주를 쳐다보았다. 그의 길고 깊은 눈이 고통에 흔들렸다. 상처받은 것은 그녀 자신인데 왜 그가 괴로운 표정을 짓는지 알 수 없었다. 현주는 울컥하는 감정을 누르며 말했다.
“대체 나한테 왜 이래요.”
“…….”
“우리 끝났잖아요. 끝이라고 말하기도 뭐한 관계긴 했지만 어쨌든 끝났잖아요. 당신이 끝냈잖아요. 당신이…… 당신이 끝냈잖아요.”
현주는 주룩 흐르는 눈물까지 주체할 수는 없었다. 그가 보는 앞에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곤경에 빠진 것도 억울했지만 그로 인해 그의 차에 몸을 실은 자신도 너무 싫었다. 바다 한가운데에 빠진 것처럼 두렵고 곤란한 순간에 지원은 그녀에게 안도를 주었고, 그의 차는 그녀의 대피소가 되었다. 현주는 이러니 그가 자신을 쉽게 본다고 생각했다.
지원은 울고 있는 그녀의 등을 차마 토닥이지 못하고 깊은 한숨을 뱉었다.
“미안…….”
“됐어요.”
“미안해. 진심이야.”
“…….”
지원은 힘겹게 그녀에게 사과를 건넸다. 그의 태도로 그녀가 상처받았음을 모르진 않았다.
“나한테도 시간을 좀 줘.”
“…….”
“당신이 날 정리한 시간만큼 나한테도 나를 정리할 시간을 줘.”
지원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진심이었다. 그에게도 스스로를 깨고 나갈 시간이 필요했다. 지원은 진작 했어야 할 마지막 말을 간신히 입술 밖으로 뱉어 냈다.
“곁에 있어 줘.”
“…….”
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현주를 보며 흡사 고문과 같은 시간을 견뎠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현주는 차분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그의 진심에 답했다.
“싫어요.”
“…….”
“난 소모품이 아니에요.”
지원은 현주의 단호한 모습에 애가 타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의 어떤 접근도 반기지 않는 것 같았다. 지원은 어떤 식으로든 그가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
“당신을 소모품이라고 생각한 적 없어.”
그럼에도 현주는 조금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지원이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그녀를 도와주어도, 그가 여전히 매력적인 외모를 갖고 있어도 소용없는 것이었다. 현주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그래서요.”
“…….”
“이제 와서 아쉬워요?”
“뭐?”
현주는 그렁그렁한 눈에 힘껏 힘을 주느라 붉은 충혈기가 올라왔다.
“지원 씨한테는 내가 그렇게 쉬워요? 그만 만나자고 했다가 다시 만나자고 할 만큼?”
지원의 가슴에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비수가 되어 꽂혔다.
“쉬운 여자 당신 주변에 많잖아요. 심지어 나보다 예쁘고 괜찮은 여자들…….”
“그만해.”
그는 고개를 돌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가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에 대해 뼈저리게 깨닫는 순간이었다. 매력적이지만 천박하고 치명적이지만 가볍기 그지없는, 그것이 그녀가 보는 지원이라 생각했다.
“알았으니까 그만해.”
지원은 숨이 잘 쉬어지지 않을 만큼 갑갑함을 느꼈다. 현주는 가벼운 숨을 들썩이며 힘없이 말을 이었다.
“그래요. 이제 와 무슨 소용이겠어요.”
지원 역시 온몸에서 힘이 빠졌다. 그녀의 말이 둘의 사이를 정확하게 표현했다. 둘은 이제 아무 상관도 없는 사이였고 무엇을 해도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있는 힘껏 그를 노려보았다. 슬픔과 후회, 분노와 원망, 그 모든 것이 그녀의 눈 안에 담겨 있었다.
“택시 타고 갈게요. 오늘 고마워요.”
현주는 그대로 차 문을 열고 지원의 시야에서 멀어졌다. 지원은 핸들에 머리를 숙이고 거친 숨과 함께 낮은 욕지거리를 뱉었다.
“하―”
그는 빠른 세상 속에서 사는 사람이었다.
시간을 분과 초로 나누어 유행과 인기가 결정되는 연예계는 그의 세상이자 그의 전부였다. 그는 그런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시시각각 더 멋있고 더 좋은 것들을 추구했고, 더 멋있어지고 더 좋아졌다.
하지만 그도 사람인지라 느린 구석도 있었다. 생각할 시간이 없는 만큼 생각하는 것을 두려워했고, 결정할 것들이 없는 만큼 결정하는 데 긴 고민이 필요했다. 그래서 지원은 보통 사람들보다 느리고 보통 사람들보다 무디게 자신을 살폈다.
딸깍―
현주가 있어야 할 조수석에 재경이 올라탔다. 지원은 가만히 고개를 들고 영혼 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뭐야.”
“뭐긴 뭐야.”
재경은 엉엉 소리를 내며 주차장을 빠져나가던 현주를 보았다. 둘의 관계가 얼마만큼 심각하고 절절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당장 고통스러운 것은 사실인 듯 보였다.
“나 좀 태워 줘.”
“아, 귀찮게 하지 말고 내려.”
“매니저도 퇴근했어. 좀 같이 가자.”
가뜩이나 마음도 착잡한 와중에 거머리 같은 재경까지 달고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지원은 짜증스러워졌다. 하지만 재경은 이미 안전벨트를 매고 눈을 감고 있었다.
“짜증내 봤자 네 손해야. 얼른 출발해.”
“내가 너랑 왜 친구인지 모르겠다.”
“그걸 네 복이라 생각해라.”
지원은 하는 수 없이 차에 시동을 걸고 운전하기 시작했다. 쓸데없는 일에 힘 빼고 싶지 않았다. 이미 현주로 인해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지원아.”
새벽의 한적한 도로를 달리던 중 재경은 지원을 불렀다. 평소 야, 너 등으로 불리다가 이름을 불리니 지원은 온몸에 닭살이 돋는 듯했다.
“이름 부르지 마. 소름 돋는다.”
“됐고, 궁금해서 그러는데 작가님이랑 뭐가 문제냐?”
지원은 긴 눈을 날카롭게 휘며 재경을 쳐다보았다. 현주와의 일은 재경에게 말한 적 없는 사실이었다. 현주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긴 뭘 어떻게 알아. 둘이서 대놓고 티를 내는데.”
“…….”
지원은 영화관에서 자신과 그녀가 했던 행동들을 떠올렸다. 아무 말 않는 지원이 답답하다는 듯 재경은 한숨을 쉬었다.
“병신아. 작가님 울면서 집에 가더라.”
“네가 상관할 바 아니야.”
“나는 상관할 바 아니긴 한데 너는 상관해야 되는 거 아니냐?”
재경은 반듯한 눈썹을 구기며 말했다. 그는 지원이 현주에게 어떤 말들을 했을지, 어떤 식으로 대했을지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지원은 당황스러움에 헛기침을 하며 눈길을 돌렸다.
“내 옆에 있기 싫다는 사람한테 무슨 말을 해.”
“네가 뭐라고 했는데.”
재경은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이대로 가다간 자신의 가엾고 불쌍한 친구가 평생 외로이 늙어 죽을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지원은 그런 걸 너한테 왜 말해야 되냐는 듯 고개를 저었지만 재경은 단호했다.
“빨리 말해. 뭐라고 말했는데.”
“아, 나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어. 나도 생각을 해야…….”
쪽팔린 줄은 아는지 말끝을 흐리는 지원을 보며 재경은 답답하다는 듯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런 표현고자에 연애고자 같은 새끼. 얼굴 그렇게 쓸 거면 나나 줘라.”
“죽을래?”
지원은 불쾌하다는 듯 재경을 노려보았지만 재경은 온갖 멸시와 혐오를 담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원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그럼 뭐라고 해. 아직 확신도 없는데 사랑한다고 대뜸 고백이라도 하라는 거야?”
“누가 그러래?”
“아, 그럼 뭐.”
재경은 뭐 이런 놈이 대한민국의 연애하고 싶은 남자 1위를 하고 있는 것인지 통탄스러운 마음을 금치 못했다. 재경은 혀를 차며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작가님 마음은 어떤데.”
지원은 꽤 어려운 질문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그를 좋아한다고 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미워하는 쪽에 가까워 보였다. 재경은 심각한 얼굴로 고민에 빠진 지원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아는 게 뭐냐.”
“…….”
재경은 그를 위해 난이도를 낮추기로 했다.
“다른 거 다 필요 없고! 작가님이 널 좋아한다고 한 적은 있어? 그게 과거든, 오늘이든.”
지원은 눈부신 아침의 그날을 떠올렸다. 햇살 가득한 침대 위에서 그녀가 진심을 다해 전했던 말, 그것을 잊을 리 없었다. 지원은 감상에 젖은 사람마냥 눈이 촉촉해져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심각하다, 심각해.”
예상한 대로였다. 지원은 언제나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기형적인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차라리 재경처럼 매일같이 욕을 하는 것이 그에겐 더 편했다. 재경은 그가 놓치고 있는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 주기로 마음먹었다.
“야, 너 작가님이 연석 씨랑 같이 있는 거 보면 어떠냐.”
지원은 연석과 현주가 함께 있던 매우 불쾌한 기억을 떠올렸다. 평온하던 마음이 짜증으로 요동쳤다. 핸들을 쥔 손에는 핏줄이 서고 그와 그녀가 등장하는 별 막장 드라마 같은 상상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재경은 바로 그거라는 듯 다음 질문을 던졌다.
“작가님이 너한테 했던 것처럼 연석 씨한테 고백하는 걸 상상해 봐.”
지원은 재경의 한심한 말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떠오른 생각의 고리가 그를 미치게 했다. 그녀의 작은 어깨, 분홍빛 뺨, 긴 머리카락까지 다른 남자의 것이 된다고 생각하자 당장이라도 그녀를 제 옆으로 데려오고 싶어졌다. 재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 모든 게 일어나지 않을 일 같아?”
지원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네 눈에도 예쁜데 다른 남자 눈에 미워 보이겠냐?”
지원의 입에서 노골적인 비속어가 쏟아져 나왔다.
알고는 있었다. 현주가 제 눈이 아닌 다른 사람의 눈에도 예뻐 보일 것이라는 것을. 그런데도 그는 불안하지 않았다. 스스로를 잘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그녀가 보여 준 행동과 말과 눈이 자신에게만 향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자만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그녀와의 관계를 정의하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녀가 떠날 수도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모른 척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영원을 믿지 못했다. 그래서 영원을 약속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그 순간에 있어 주기만을 바랐을 뿐이었다. 하지만 순간에도 약속이 필요한 것이었다. 지원은 어째서 이제껏 깨닫지 못했는지에 대한 짜증이 솟구쳤다.
“야, 너 내려.”
지원은 거친 마찰음을 내며 갓길에 차를 세웠다. 재경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뭐라는 거야, 미친놈이. 지금 시간에 택시도 없는데 어딜 내려.”
“빨리 내려. 바빠.”
지원은 원래의 그로 돌아와 있었다. 날카로운 눈, 낮고 단호한 목소리. 거기에 묘한 갈증까지 더해져 섹시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재경은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
“너 혹시 작가님한테 가려고?”
“어, 그러니까 당장 내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