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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절제 (11/20)

11. 절제

다음 날, 현주는 한 번도 들어가 보지 못했던 속옷가게에 들어갔다. 가터벨트부터 속이 훤히 비치는 슬립까지 꽤나 야한 분위기의 가게였다. 평소라면 들어오지도 못했을 곳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지원이 선물한 속옷을 입고 있었다. 붉은색의 심플한 것이었지만 고급스러운 브랜드 이름이 자수로 새겨진 좋은 것이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그녀는 새 속옷을 입은 것만으로도 왠지 모를 용기와 자신감이 생겼다. 더 도발적인 것을 입어도 될 것 같은, 더 야해져도 될 것 같은 자신감이 솟구쳤다.

“찾으시는 물건 있으세요?”

“아, 저 사이즈 좀 잴 수 있을까요?”

지원은 그녀에게 사이즈를 재라는 당부도 했었다.

‘사이즈도 새로 재 봐.’

‘왜요?’

‘내 말 들어. 좋을 거야.’

직원이 줄자를 들고 다가왔다.

“손님, 양팔 들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어깨선과 가슴둘레를 잰 직원은 그녀의 허리와 골반 사이즈를 기록했다. 현주는 마치 맞춤옷을 주문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별것 아닌 행동에도 마음이 들떴다.

“75B에 팬티는 스몰 사이즈 입으시면 될 것 같네요.”

항상 80A를 입던 그녀에게 75B라는 새로운 사이즈는 묘한 설렘을 주었다. 점원은 현주를 이끌고 베스트 상품이 진열된 곳으로 안내했다.

“날씨가 따뜻해지니까 검은색보다는 베이지색이 더 잘나가요. 평소에 입기도 좋고 흰색 옷에 받쳐 입기도 좋으니까요.”

“좋네요. 이거 하나 주시고, 다른 것도 보여 주실래요?”

“생각하신 스타일이 있으신가요?”

점원은 현주가 몇 개 더 살 고객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현주가 어색한 듯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조금…… 화려한 것도 입어 보고 싶어서요.”

현주의 말에 직원은 조금 더 적극적으로 바뀌었다. 화려한 레이스 장식이 가득한 검은색 속옷부터 호피 무늬 속옷, 흰색이기는 하나 안이 다 비치는 속옷까지 종류가 다양했다. 직원이 애교스럽게 속삭였다.

“신혼이세요?”

“네? 아, 아니요.”

“남자분들이 좋아하는 것도 좋아하는 거지만, 입었을 때 몸매가 예뻐 보여서 그냥 입기도 좋아요. 착용해 보실래요?”

“아니요. 그냥 보고 고를게요.”

현주는 몇 가지를 더 보고는 너무 부담스럽지 않은 것들을 골라냈다. 직원은 그녀가 고른 짙은 보라색 속옷과 베이지색 하나, 검은색 레이스 속옷을 챙겨 쇼핑백에 담았다. 현주는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괜히 탈선을 저지른 청소년마냥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 * *

지원의 폭력 사건은 생각보다 빠르고 조용하게 흘러갔다. 이때다 싶어 죽을 듯 달려들던 언론은 그의 기자회견 한 번으로 우호적인 기사를 쏟아 냈고 사기꾼 일당은 너무나 쉽게 범행을 인정했다.

지원은 적당히 단호하고 적당히 자비롭게 사건을 해결해 나갔다. 범인들은 그에게 반성문 몇 장을 제출했고 그들이 경찰서에 자진 출두하여 사건 경위를 읊을 때 쯤, 그는 선처 의사를 밝혔다.

그 모든 것이 끝날 때 드라마 ‘월광’의 마지막 리딩이 시작됐다.

“이야, 지원 씨 수고 정말 많았어. 얼마나 걱정했다고.”

“신경 써 주신 덕분에 잘 해결됐습니다. 감사합니다.”

적당한 인사와,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는 게 연예계라니까? 난 지원 씨가 그럴 리 없다고 진작부터 생각하고 있었어.”

적당한 아부.

현주는 그 모든 것들이 흥미롭고 한편으론 소름 돋을 정도로 역했지만, 지원은 아무렇지 않은 듯 보였다. 그저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눈을 들고 가장 귀찮은 모습으로 그들을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현주는 그의 권태로운 분위기를 처음으로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리딩은 아무 문제 없이, 더할 나위 없이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지원의 등장으로 모든 배우들은 적당한 긴장 속에서 호연을 펼쳤고, 가장 걱정이던 민서 역시 크게 나쁘지 않은 정도까지 연기를 소화해 냈다.

“이제 회식 장소로 자리를 옮길까요?”

회식 장소는 2층으로 된 커다란 숯불구이집이었는데 지원의 소속사 측에서 2층 전체를 예약했다. 겉으로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불편을 겪은 드라마 팀에게 한턱 쏜다는 것이 이유였지만 실제로는 지원의 성격상 사람이 많은 곳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지원의 매니저가 일어나 말했다.

“그동안 함께 신경 써 주시고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회식은 저희가 쏘는 거니까 마음껏 드세요!”

“와, 지원 씨, 잘 먹을게요!”

“우리 소고기 주문해도 되는 건가?”

회식 분위기는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2층 전체를 빌린 덕에 배우들 또한 마음껏 떠들고 먹을 수 있었다.

현주는 여자라면 한 번쯤 앉아 보고 싶을 만한 자리에 착석했다. 맞은편에는 보기만 해도 미소가 지어지는 연석이 있었고 오른편엔 존재 자체만으로도 축복이라는 지원이 있었으니 완벽하기 그지없었다.

매사 트러블을 일으키는 민서도 SNS에 올릴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었다.

“누나, 이제 잘 못 보겠네요. 아쉽다.”

“그러게. 현장엔 나갈 일이 별로 없을 것 같아. 그래도 잘할 거지?”

“걱정 마세요. 든든한 지원 선배님도 있고, 민서 씨도 잘하고 있으니까.”

연석은 제 가슴을 탁탁 치며 말했다. 현주는 그 명랑한 모습에 웃음을 터트렸다. 대본 최종고는 완료되었고 배우들의 컨디션 역시 좋아 보였다. 그녀의 기분이 좋은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사람들의 취기가 조금씩 오르며 시끌벅적해지자 연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폭탄주 제조에 돌입했다.

“크림 맥주 드시고 싶은 분들은 손드세요! 이연석표 크림 맥주 나갑니다!”

붙임성 하나는 타고난 연석이었다. 피디는 물론 조연을 맡은 선배 배우들까지 얼굴에 미소를 띠고 그를 쳐다보았다.

“자, 첫 잔은 우리 피디님!”

“이야, 잘 마실게.”

“다음 잔은 우리 작가님! 대본 완성하느라 고생 많았어요, 누나.”

“고마워. 우와, 거품 완전 많다.”

연석은 꽤 현란한 솜씨로 분위기를 이끌었다. 요즘 인기 있는 아이돌이라 하면 매사에 신비주의로 일관하며 거만하기 짝이 없는데 연석은 달랐다. 꾸밈없는 목소리에 생글생글한 미소가 보는 사람마저 청량하게 만드는 20대의 싱그러움 그 자체였다.

현주는 언제 또 아이돌이 제조하는 맥주를 마시나 싶어 잔을 입에 가져갔지만 지원의 손이 더 빨랐다.

“이거 독한 거야.”

지원의 표정은 분명 마시지 말라는 암묵적 협박을 담고 있었다. 현주는 맥주잔 위를 막고 있는 그의 길고 고운 손가락들을 테이블 위로 옮겼다.

“이 정도는 괜찮아요.”

그는 매우 언짢은 모양이었지만 현주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이렇게 사람 많은 곳에서 뭐라 하지는 못할 것이었다. 둘이 있을 땐 그가 갑이지만 오늘같이 보는 눈이 많아지면 그는 영락없이 참아야 하는 사람이었다.

현주는 평소엔 하지 못하는 도발을 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연석이 준 잔을 꿀꺽꿀꺽 삼키고 빈 잔을 흔들었다.

“한 잔 더!”

지원의 표정은 점점 굳어져 가고 그의 매니저는 그와 현주를 번갈아 보며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그렇게 들이켠 것이 여덟 잔이었다.

“연석아―”

“네, 누나.”

“너는 왜 그렇게 예쁘니.”

느리게 깜빡이는 눈에 입술을 오물거리는 그녀가 연석의 미소를 이끌어 냈다. 주변에서도 그런 현주가 귀엽다는 듯 웃으며 상황을 지켜보았다.

미소를 짓지 못하는 사람은 오직 지원과 그런 지원을 걱정하는 매니저뿐이었다.

“제가 그렇게 예뻐요?”

“응, 엄청. 누구랑 다르게.”

현주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술이 시키는 대로 입을 나불거릴 뿐이었다. 연석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왼편에 자리를 잡았다.

“누나, 많이 취했어요?”

“아니, 하나도 안 취했어.”

지원은 속에서 열불이 끓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제 말은 듣지도 않고 술을 퍼마시는 것은 둘째 치고 새파랗게 어린 연석과 소꿉장난을 하듯 저리 포개어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작가님.”

지원은 화를 누르며 어색한 호칭으로 현주를 불렀다. 그녀는 풀린 눈을 하고 지원을 바라보았다. 그가 매서운 눈을 하고 이제 그만하라는 눈치를 보냈지만 그녀는 콧방귀를 뀔 뿐이었다.

“뭐.”

“…….”

“말을 해라. 말을. 솔직하라고 할 땐 언제고 지는…….”

현주는 뒷말을 마치지 못하고 발음을 뭉갰다. 오직 지원만이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연석은 그녀의 어깨를 자연스럽게 감싸며 말했다.

“누나가 취해서 선배님인지 못 알아보는 것 같아요.”

“…….”

지원의 눈은 오로지 현주의 어깨 위에 놓인 연석의 손에 가 있었다. 어딘지 불쾌하고 어딘가 짜증스러웠다. 그때 이곳저곳 자리를 옮겨 다니던 피디가 돌아와 기름에 불을 붙였다.

“이야~ 이렇게 보니까 연석이랑 유 작가, 잘 어울리네.”

“그래요?”

연석은 굳이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은 채 미소만 지었다.

“그렇죠?”

현주는 긍정의 대답이었다. 연석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더 방긋 웃어 보였다.

“누나만 좋으면 저는 완전 행운이죠.”

“우와, 나 아이돌이랑 사귀는 거야?”

현주는 점점 진상이 되어 가고 있었다. 마음은 아찔한 도발을 원하는데 실상은 그저 술에 취한 주정일 뿐이었다. 지원은 아예 자리를 옮겨 현주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사라졌다.

“에휴…….”

현주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좋은 속옷도, 섹시한 옷차림도 좋아하는 마음 앞에선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의 시시각각 일그러지는 얼굴이 좋아서 시작한 도발이 그가 사라지니 어떤 흥미도 느껴지지 않았다. 현주는 가만히 고개를 숙여 술기운을 식히기로 했다.

“누나, 많이 어지러워요?”

연석은 그녀의 한숨에 걱정된다는 듯 물었다. 현주는 손사래를 치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

“아니, 아니. 괜찮아.”

“밖에 산책이라도 갈래요?”

“음…… 답답하긴 하다.”

현주는 휘청휘청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석이 그녀의 어깨를 잡고 부축하자 현주는 중얼거렸다.

“밖에 나가면 사람들 많아. 나 혼자 다녀올게.”

“취해서 혼자 어딜 나가요. 같이 가요.”

“괜찮아, 괜찮아.”

지원은 멀리서 현주와 연석의 실랑이를 보고 있었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매니저를 향해 간결하고 짤막한 눈짓을 보냈다.

“저 여자 좀 챙겨 줘. 밖에 나가서 약 사 먹이고 차에 태워 놔.”

매니저는 그의 집을 찾아온 현주를 보고 대충 짐작하고 있었지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지원의 곁에 바싹 붙어 조용히 속삭였다.

“어쩌려고 그래? 들키면 어떻게 책임지려고.”

지원은 이를 앙다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시키는 거잖아. 내가 갈까?”

“아, 아니. 내가 갈게. 넌 움직이지 마.”

매니저는 황급히 일어나 현주에게로 향했다. 원래부터 막역한 사이였던 것처럼 매니저는 현주의 상태를 살폈다.

“우리 작가님 많이 취하셨네.”

“아, 네. 바람이라도 쐐야 될 것 같은데 저랑은 자꾸 안 나간다고 하셔서…….”

“연석 씨가 나가면 당연히 안 되죠. 저도 약국 가려고 했는데, 같이 다녀올게요.”

“아, 그래 주실래요?”

매니저는 어색하게 웃으며 현주를 부축했다. 지원은 멀리서 연석의 손이 현주에게서 떨어지는 것을 확인하며 낮게 숨을 뱉었다.

“어? 지원 씨 매니저님이네.”

“네, 네. 접니다.”

매니저는 힘이 없어 무거워진 그녀를 질질 끌다시피 하면서 차에 태웠다.

“아니, 저 새끼는 연애를 하면 한다고 미리 말을 하든가.”

“어! 저 지원 씨 여자 친구 아니에요.”

“네, 네. 저 약국 다녀올 테니까 여기 가만히 계세요.”

매니저는 그런 현주의 말을 무시하고 약국으로 향했다. 그의 차가 승차감이 좋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것이었다. 술기운과 편안함이 고루 합쳐져 잠이 쏟아졌다. 그녀는 그의 차에서 나는 그의 향기가 좋았다.

“아…… 보고 싶다.”

현주가 핸드폰을 들어 익숙한 번호를 찾았다. 신호음 소리가 나기도 전에 그는 전화를 받았다.

― …….

대답은 없었다. 현주는 그런 그의 조심성에 감탄했지만 한편으로는 서운했다. 자신은 숨기지도 못하는 걸 그는 너무나 쉽게 숨기고, 모른 척했다.

“여보세요? 김지원 씨 핸드폰 아니에요?”

― 맞아. 말해.

“아― 맞구나.”

현주는 회식장소에서 말하지 못했던 것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지원 씨―”

― 옆에 누구 없어? 어디야.

“매니저분은 약국 갔어요…….”

― 하…….

지원은 안도와 걱정의 한숨을 내쉬었다. 매니저는 약을 만들러 간 것도 아닐 텐데 그녀를 혼자 두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원 씨―”

― 왜.

“보고 싶어요.”

― …….

그때 매니저가 차 문을 열고 현주를 흔들었다.

“작가님!”

“어? 매니저님 왔다.”

“누구랑 전화를…… 아, 지원이랑 전화하고 계셨어요?”

매니저는 현주의 핸드폰 액정을 바라보며 한숨을 뱉었다. 그는 그녀에게서 핸드폰을 뺏어 말을 이었다.

“지원아, 나야.”

― 나 지금 나갈 거니까 차 좀 조용한 곳으로 옮겨 놔.

“뭐? 지금? 둘이 같이 나가면 어쩌라는 거야.”

매니저는 걱정하던 일이 일어나는 것 같아 마음이 급해졌다.

― 나 말고도 자리 비운 사람 많아. 아파서 갔다고 하든지 알아서 해.

“아니 그래도……!”

지원은 제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현주는 핸드폰을 뺏겼다며 여고생들이나 할 법한 말들을 중얼거렸다. 매니저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사온 생수의 뚜껑을 열며 말했다.

“작가님, 이거 마시고 약 먹어요. 네?”

“제 핸드폰은요?”

“약 먹으면 드릴게요.”

“정말요?”

현주는 매우 기쁘다는 듯 약을 받았다. 물도 꿀꺽꿀꺽, 약도 꿀꺽꿀꺽. 말 잘 듣는 어린애가 따로 없었다.

매니저는 그나마 다행이라며 천천히 식당의 지하주차장으로 차를 몰았다. 어차피 늦은 새벽이라 사람도 없었지만 폭력 사건을 계기로 더욱 예민해진 지원을 향한 배려였다. 매니저는 지원에게 전화를 걸어 위치를 알려 주었다.

“지하로 바로 내려오면 돼. 주차장에 아무도 없어.”

― 알았어.

회식의 분위기는 이미 너도 나도 취해 정신없는 단계였다. 많은 사람들이 북적였고, 많은 사람들의 소란 속에서 지원의 움직임은 그리 튀지 않았다. 그런 지원을 붙잡은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선배님.”

그를 부른 것은 숱한 술 권유에도 취하지 않은 연석이었다. 지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왜 부르냐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어디 가세요?”

“집에.”

지원은 그에게 변명 같은 것을 하고 싶지 않았다. 연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현주의 빈자리를 쳐다보았다.

“그럼 촬영장에서 뵐게요. 선배님.”

연석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지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벗어났다. 주차장에는 매니저가 초조한 얼굴로 차 옆에 대기하고 있었다.

“작가님이랑 무슨 사이야?”

매니저는 기필코 얘기를 들어야겠다는 단호한 얼굴이었다. 지원에게 여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위험하고 위태로우며 아슬아슬한 관계는 없었다. 지원의 집에 드나든다는 것만으로도 매니저로선 오금이 떨리는 일이었다.

지원은 그런 매니저의 마음을 알고 싶지 않았다. 그저 무심하고 조금은 화난 것 같은 얼굴로 대답했다.

“알 거 없어.”

지원은 그대로 운전석에 올라탔고 매니저는 식겁한 표정으로 달려들었다.

“너 술 먹지 않았어?”

지원은 그런 그를 향해 짜증스럽다는 듯 말했다.

“나 사람들 많은 데서 술 안 먹는 거 몰라?”

“그래도…… 운전을 직접 하게?”

“그럼 대리 부를까? 김지원이랑 웬 모르는 여자랑 같이 타는 차에?”

“아니, 내가 해 줄게. 아무래도 불안해서…….”

지원은 자신이 직접 운전하겠다는 매니저를 밀어내며 날카로운 눈을 빛냈다.

“끼지 마.”

매니저는 예상했던 일이었음에도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고 지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시동을 걸었다. 한숨은 매니저의 몫만이 아니었다. 지원 역시 옆에 있는 현주를 보며 알 수 없는 한숨을 뱉어 냈다.

“지원 씨―”

현주는 그가 옆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자꾸만 그를 불렀다. 지원은 이미 수십 번 대답한 뒤였다.

“그만 불러.”

현주는 아랫입술을 쭉 내밀고 토라진 표정을 지으며 서운한 감정을 내비쳤다.

“왜 그렇게 차가워요?”

“…….”

“항상 그런 거 같아. 내가 귀찮아요?”

현주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늘 그의 시간들을 기다려 왔지만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의 말을 듣는 것보다 자기 얘기를 하고 싶었다.

“나 오늘 높은 구두 신었어요.”

그녀는 발을 구르며 구두 소리를 내었다. 검은색의 얌전한 모양이었지만 힐의 높이가 꽤 높은 것이었다.

“알아.”

“알긴 뭘 알아요.”

“…….”

현주는 블라우스의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지원은 눈살을 찌푸리며 다급하게 그녀의 손을 쥐었다.

“뭐 하는 거야?”

그는 그녀의 주정이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 절대 술을 못 먹게 할 생각이었다.

“자랑하려고요.”

“뭐를.”

“새 속옷 샀거든요.”

“하아…….”

지원은 그녀의 손에 깍지를 꼈다. 현주가 더 이상의 탈의를 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도 있었지만 본인 스스로를 다스리기 위한 것도 있었다. 현주는 자랑도 못 하게 하는 그가 짜증스러웠다.

“왜요. 속옷 새로 사라면서요. 샀단 말이에요.”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해.”

“나 예뻐요?”

“뭐?”

“평소보다 높은 힐에 평소보다 예쁜 속옷 입었어요. 평소보다 매력적이에요?”

지원은 현주의 직설적인 물음에 운전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깍지를 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아, 아파요.”

지원은 천천히 그의 생각을 뱉어 냈다.

“당신은 원래 예뻐.”

현주는 달아오른 입술에 생기를 불어넣으며 활짝 미소 지었다.

“정말요?”

“응.”

“진짜, 진짜요?”

“응. 근데 좀 부족해.”

현주는 이내 풀이 죽어 입술을 내밀었다.

“치…….”

“괜찮아. 곧 가르쳐 줄게.”

지원의 낮고 나른한 목소리는 그녀를 유혹할 만큼 매력적이었다. 현주는 그를 향해 상체를 숙이며 초롱초롱한 눈을 빛냈다.

“어떤 거예요?”

“절제.”

“…….”

“꽤 힘들 거야.”

지원은 현주의 집으로 향하던 방향을 돌려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그녀를 참게 하려면 보다 넓은 침대와 두꺼운 벽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절제요?”

“응.”

현주는 이 이상 무엇을 더 참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로서는 충분히 참고 있는 것이었다. 그에게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은 물론이고, 그를 좋아한다는 마음까지 숨기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는 모를 것이었다. 현주는 답답함에 목소리가 높아졌다.

“왜 참아야 해요?”

“뭐?”

“솔직하라고 했잖아요.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그렇게 표현하라면서요.”

지원은 미소를 지으며 짐짓 그녀에게 대단한 것을 일깨워 주려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췄다.

“모두에게 매력적이고 싶다며.”

“네?”

“당신이 그랬잖아. 아니야?”

“…….”

“솔직한 건 매력적이야. 근데 쉬운 건 그 반대지.”

현주는 그가 자신을 지적하는 것 같아 얼굴이 붉어졌다. 그의 행동과 말투에 따라 시시각각 반응하는 제 자신을 쉽다고 얘기하는 것 같아 수치스러웠다.

“내가 쉬워 보인다는 거예요?”

그는 그녀의 질문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술 몇 잔에 속마음을 드러내는 그녀가 걱정스러웠을 뿐이었다. 사사로운 감정은 물론이고 사소한 것 하나까지 약점이 되고 가십이 되는 것이 이 바닥이었다. 그저 그것을 일깨워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쉽지 않았다. 차라리 여우처럼 이것저것 속이고 꾸몄으면 쉬웠을 것이다. 여자의 솔직함에 익숙하지 않은 그는 언제나 그녀가 당황스럽고 놀라웠다.

“비약하지 마. 당신이 쉽다고는 안 했어.”

“그럼 뭐예요.”

“사람은 모르는 것에 흥미가 생기기 마련이야. 당신은 있는 그대로를 보여 주잖아.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다 보여 주면 누가 궁금해하겠어.”

이번엔 현주의 미간이 구겨졌다.

“거짓말 싫어하잖아요.”

“거짓말이랑 달라.”

“뭐가 다른데요?”

지원은 평소와 달리 제 앞에서 당당히 할 말을 다 하고 있는 그녀가 흥미로웠다. 조수석에 편히 앉은 자세는 물론이고 긴 머리를 아무렇게나 헝클어뜨린 모습도 꽤 신선한 장면이었다. 지원은 집과 가까워지는 거리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거짓말은 속이는 거야.”

“…….”

“절제는 속인 척하는 거지.”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는 주차장 구석에 주차를 하며 조용히 말했다.

“해 보면 알아.”

현주는 그의 장난기와 종잡을 수 없는 감정들에 지쳐 고개를 저었다. 지원은 무심히 차에서 내리며 그녀에게 말했다.

“혼자 내릴 수 있지?”

둘은 말없이 엘리베이터에 올랐고, 그의 집에 도착하기까지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지원의 긴 손가락이 번호 키를 누르는 동안에도 현주는 온갖 상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가 가르쳐 주는 것들은 늘 상상을 초월하고 또 유용했다. 문제는 가르쳐 주는 방법이었는데, 일반 수업처럼 정숙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현주는 오늘은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안 들어가?”

“들어가요, 들어가.”

마음은 굳었지만 몸은 굳을 수 없는 게 그녀의 문제였다. 그녀는 집 안에 발을 들이자마자 턱을 들어 올려 그의 키스를 받아야 했다. 아직 구두도 벗지 못한 그녀가 휘청거리자 지원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아 깊게 입을 맞췄다.

“지원 씨, 잠깐만……!”

현주는 고개를 돌리며 그를 피했지만 숨이 막힐 정도로 달려드는 그의 기세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한쪽 손으로 그녀의 목을 감싸 갈증 난 사람처럼 끌어당겼고, 허리를 감싼 단단한 팔 역시 풀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현주는 부족한 공기와 술기운에 힘이 풀리고 정신이 몽롱해졌다. 그는 그녀가 편해지길 바라지 않았다.

“아앗!”

지원은 그녀의 도톰하게 부푼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이글거리는 눈이 그녀를 쏘아보며 말했다.

“앞으로 술 먹지 마.”

“왜……!”

현주의 뒷말은 또 한 번의 입맞춤으로 삼켜졌다. 그는 그녀의 입안 모든 곳을 차지하겠다는 일념으로 파고들고, 또 파고들었다. 그의 거친 동작에 정신없는 그녀가 그의 어깨를 밀어내자, 그는 그녀를 번쩍 안아 침실로 향했다.

“지원 씨! 나 구두라도 좀 벗고……! 으아!”

침대로 던져진 현주는 그의 일렁이는 눈을 바라보며 애원했다. 평소의 지원이 제멋대로이긴 했지만 이렇듯 거친 것은 처음이었다. 현주는 자신이 그렇게 잘못한 것인지에 대해 반문하기 시작했다.

“왜, 왜 그래요.”

지원은 그런 그녀의 질문을 무시한 채 묵묵히 옷을 벗었다. 밝은 회색의 롱코트를 벗은 그는 짙은 남색 셔츠 위로 드러난 조각 같은 상체를 자랑하듯 서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현주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다만 침대 위는 거기서 거기였다.

“오늘 난 아무것도 안 할 거야.”

크고 폭신한 베개에 기대 누운 그의 모습은 모든 것을 가진 왕처럼 여유롭고 위압적이며 나른한 섹시미를 풍겼다. 현주는 강렬하게 해도 모자랄 것처럼 행동하던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하자 의아함이 샘솟았다.

“아무것도 안 한다고요?”

“응.”

“그럼 왜…….”

“당신이 해.”

지원이 입술에 묘한 미소를 걸며 말했다. 현주는 그가 말하는 것이 설마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일까 싶어 고개를 저었다. 지원은 소리 내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유혹해 봐.”

“무슨 말이에요?”

지원은 그 어떤 순간보다 거만하고 여유로운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작은 턱을 당장이라도 쥐어 키스를 퍼붓고 싶었지만 오늘은 그럴 수 없었다.

“내가 했던 것들 있잖아. 기억 안 나?”

현주는 그가 자신을 흥분시키기 위해 했던 모든 동작들을 떠올렸다. 짜릿하지만 외설적인 그 행동들을 자신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지원은 입가의 웃음을 거두고 눈을 감았다.

“기다리기만 하는 여자는 매력 없어.”

“…….”

현주는 그의 오만한 말들에 오기가 생겼다.

“알았어요. 해 보죠, 뭐.”

현주는 포부 넘치는 목소리와 함께 그의 허리 위에 앉았다. 하이힐도 벗지 않은 상태라 모든 것이 어정쩡하고 불편했지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지원은 현주의 가는 손가락들이 움직이는 걸 가만히 느끼고 있었다. 그의 셔츠 단추를 풀어내는 그녀의 손길은 서툴러서 우스웠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애가 탔다. 무엇 하나 빠르지 못하고 신중한 그녀의 성격답게 셔츠를 푸는 데도 한참이 걸렸다.

“이래서 오늘 안에 뭐라도 하겠어?”

현주는 지원의 놀림에 입술을 삐죽이며 중얼거렸다.

“아, 지금 하고 있잖아요. 사람이 참을성이 없어. 참을성이.”

지원은 제 허리 위에 앉은 그녀의 허벅지와 종아리를 지금 당장이라도 만지고 싶었다. 제 손길이 닿는 순간 터져 나올 그녀의 소리도 듣고 싶었다. 그녀가 고른 새로 산 속옷도 무엇인지 궁금했다. 지원은 그녀보다 자신이 절제해야 하는 상황에 급격히 괴로워졌다.

현주는 그런 그의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상체를 숙였다. 그녀의 입술이 그의 목 언저리에 닿았다 떨어졌다.

쪼옥―

“음…….”

지원의 입에서 낮은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늘 제 우위에 서서 자신을 농락하기만 하던 그가 그녀의 손길에 따라 신음을 뱉는 것이 이토록 황홀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주는 그가 이런 재미로 자신을 괴롭히는 것인가 싶었다.

“좋아요?”

지원은 현주의 질문에 기가 찼다. 좋으려면 아직 숱한 과정이 남아 있었다. 그는 애써 침착한 척 인내심을 발휘해 천천히 말했다.

“좋으려면 아직 멀었어.”

현주는 문득 이렇게 평화로운 상태에서 그를 바라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와 잠자리를 가질 때면 늘 열렬한 상태로 임하느라 그를 제대로 쳐다볼 겨를이 없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지그시 눈을 감은 그를 아무런 방해 없이 바라볼 수 있었다.

수려한 눈썹에 길게 뻗은 눈, 조각 같은 콧날에 날카로운 턱 선까지 어디 하나 시선을 뗄 곳이 없었다. 현주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그에게 입을 맞췄다. 지원이 리드하던 강렬하고 거친 키스가 아닌 그녀 스스로 리드하는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입맞춤이었다.

지원은 그런 그녀의 어깨를 밀어내며 당황한 표정을 드러냈다.

“뭐 하는 거야.”

현주는 조용히 속삭였다.

“잠깐만요. 잠깐만.”

현주는 다시 상체를 숙여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늘 뜨겁기만 하던 그의 입술은 경직되어 딱딱했고, 촉촉하게 젖은 혀는 갈 곳을 잃고 방황했다.

현주는 그와 타액이 섞이면 섞일수록 더욱 몸을 밀착했다. 더 깊숙이 그에게 파고들고 싶었다. 그의 고른 치열이 좋았고, 부드러운 입술이 좋았고, 엉켜 오는 혀도 좋았다.

반대로 지원은 사고의 정지를 경험하고 있었다. 이 세상 어떤 여자도 그를 눕혀 놓고 키스를 하진 않았다. 관계에서 리더는 언제나 그의 몫이었다. 그는 그녀에 대한 갈증이 일었고, 조심스러운 그녀의 몸짓은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지원은 그런 그녀의 작은 머리통을 감싸 가까이 끌어당겼다.

“하지 마요.”

현주는 그런 그의 손을 치워 내며 말했다.

“가만히, 가만히 있어요.”

지원은 그녀의 어설픈 리드에 맞춰 주기로 했다. 몸에 힘을 풀고 그녀가 움직이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더 맛보고 싶을 때 떨어지는 그녀에게 애가 달았지만 처음 경험해 보는 설레는 키스였다.

긴 입맞춤 끝에 현주는 입술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치 할 일을 끝냈으니 이제 퇴근하겠다는 회사원의 모습 같았다. 지원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물었다.

“어디 가?”

“집이요.”

지원은 황당함으로 얼굴을 아무렇게나 구기고 있었지만, 현주의 얼굴은 조금 붉어졌을 뿐 태평해 보였다.

“집? 지금?”

“오늘 수업은 절제라면서요.”

현주는 ‘왜?’라는 표정으로 그의 눈을 쳐다보았다. 지원은 그녀가 자신을 놀리는 것 아닌가 싶었지만 그녀의 눈은 오로지 순진함 그 자체를 내보이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이며 한숨을 뱉었다.

“아니, 유혹을 하랬더니…….”

“내가 할 수 있는 유혹은 그게 다예요. 집에서 절제할게요.”

“집에서 뭐를 절제해.”

그는 한숨을 내쉬었고,

“지원 씨가 하고 싶은 그거를.”

그녀가 자신을 놀리는 것임을 알아차렸다. 그녀의 얼굴은 그의 낭패감을 즐기고 있었다.

현주는 그의 방과 거실을 지나며 하이힐 소리를 또각또각 냈다. 그녀의 하늘하늘한 블라우스가 그를 유혹하듯 물결쳤지만 그는 차마 붙잡을 수 없었다. 자신이 뱉은 말이 있으니 욕망을 앞세워 잡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현주는 현관에서 멈춰 그를 다시 바라보았다.

“술은 안 먹는 게 좋겠죠?”

지원은 새삼 그녀의 모습이 평소보다 더 예쁘다는 것을 깨달았다. 평범해 보이기만 했던 긴 머리는 풍성하게 헝클어져 섹시해 보였고, 평범한 옷차림에 가려져 있던 그녀의 몸매는 타이트한 옷과 함께 빛을 발했다.

무엇보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서 알 수 없는 단호함이 엿보였다. 현주는 어깨를 으쓱이며 도톰한 입술을 오물거렸다. 방금 전 키스로 번들거리는 모양새가 참을 수 없을 만큼 유혹적이었다.

“나 지금 속인 척하는 거예요.”

지원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절제는 속인 척하는 거지.’

그의 말을 따라 한 것이었다. 현주는 다시 한 번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대로 충분한 척, 쿨한 척 속이는 거예요.”

지원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에 미간을 찡그렸다. 부정의 찡그림이 아닌 일종의 짜릿함이었다.

그녀는 아주 세련된 방법으로 그를 유혹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가 가르친 ‘절제’라는 범위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지원은 더 말해 보라는 듯 웃으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현주는 현관에 등을 기대어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갈구하는 눈빛이 그녀를 흥분하게 했다.

“기다리기만 하는 남자는 매력 없어요.”

지원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걸어가 현관의 손잡이를 쥔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현주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진한 얼굴로 물었다.

“아무것도 안 할 거예요?”

그는 그녀에게 뜨거운 키스를 쏟아 내며 블라우스의 단추를 뜯어냈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단추들을 보자면 뜯어낸다는 표현이 옳은 표현일 것이다. 현주는 그가 이끄는 대로 거실 한가운데 눕혀졌고 지원은 그 어떤 순간보다도 타오르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아니, 넌 아무것도 하지 마.”

* * *

현주는 여느 예술가들이 그런 것처럼 아침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의 어둠을 동경했고 모두가 잠들어 있는 조용함을 즐겼다. 그래야만 생각을 할 수 있었고 글을 쓸 수 있었다.

특히나 지원과 밤을 보낸 이후의 아침은 견디기 힘들었다. 상대가 지원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상대가 연인이 아닌 설명할 수 없는 대상이라는 것이 힘들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 듯 태양의 발칙함이 침대 위로 강렬한 화사함을 뿜어냈다.

“…….”

현주는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드러난 진실을 맞이했다. 서로를 탐하던 몸짓과 끈적이는 눈길은 사라지고 흩어진 옷가지와 구겨진 이불만이 그녀를 반겼다.

현주는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그 속에서 아름답다 말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얼굴뿐이었다. 현주의 어깨를 감싼 그의 긴 팔과 다부진 어깨, 수려한 속눈썹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얼굴 모든 곳에 그녀의 입술이 지나갔지만 그의 것 중 그녀의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일어났어?”

퍽 다정하다 할 만한 지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눈도 뜨지 못한 그였지만 하얀 손가락들은 일어나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현주는 자신의 머리 언저리에서 따뜻한 온기를 전하느라 바쁜 그의 손을 잡았다.

그가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평소엔 농도 짙은 스킨십도 잘 하는 그였지만 이렇듯 평범한 스킨십에는 어김없이 긴장하는 그였다.

“지원 씨.”

현주는 지원과의 관계가 좋기도 하고 싫기도 했다. 그의 가까이서 그와 마주하고 그와 입을 맞추는 것은 좋았지만 그 모든 행동이 어떤 이유로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싫었다.

그녀는 이미 자신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더 이상 모른 척하며 관계를 유지할 수는 없었다.

“나 좋아해요?”

그녀는 예전에도 했던 질문을 똑같이 반복했다. 그가 좋아하지 않는 물음이었다. 사실 지원은 어떤 물음이든 질문이라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대화보다는 침묵을 좋아했고 질문보다는 통보를 하는 편이었다.

그는 역시나 질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그게 중요해?”

현주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대답에 제법 만족스러웠다. 예상대로라면 ‘안 좋아해.’라고 했어야 했다. 그는 예전보다 그녀에 대한 배려가 늘었고 현주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솔직한 게 좋아.’

‘거짓말하지 마.’

현주는 이 이상 더 좋은 대답을 듣기란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꼭 해야 할 말과 정리해야 할 관계들이 남아 있었다. 그가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자신이라도 말해야 했다.

“중요해요.”

“그만해.”

지원은 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상체를 일으켰다. 대답하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다는 그의 명백한 대답이었다. 그녀는 다급히 그를 잡았다. 긴장감에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방 안은 조용하고 또 고요했다.

“중요해요. 난 좋아하니까요.”

현주는 제 생각보다도 더 솔직한 말을 뱉어 냈다. 말하기 어려울수록 단순하게 하는 편이 좋았다. 말하고 나니 편해졌다. 그에게 입을 맞추는 것보다 그에게 좋아한다고 말하는 지금 이 순간이 더욱 뜨겁고 설레었다.

지금이 아니면 그를 볼 수 없을지도 몰랐다. 현주는 보다 더 분명하게 그에게 말하고 싶었다.

“좋아해요.”

“…….”

“어쩔 수 없어요.”

현주는 이제껏 자신을 괴롭히던 마음 깊은 곳의 응어리를 풀어냈다. 난생처음 해 보는 고백이었지만 생각보다 끔찍하지는 않았다. 물론 지원의 얼굴이 고통받는 사람의 표정처럼 일그러지는 것이 마음 아팠지만 그 정도의 각오쯤은 하고 있었다. 지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말없이 걸어 나갔다.

“지원 씨.”

그는 한참을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생각의 정리가 필요한 것은 현주만이 아니었다. 지원 역시 머릿속을 가득 채운 여러 소리들에 귀를 기울이다가 비로소 등을 돌려 그녀의 곁에 앉았다.

현주의 마음을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녀는 가벼운 만남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움직임마다 따라오는 순진한 눈길은 고사하고 늘 그의 기분을 살피려는 그녀의 상냥함을 모를 리 없었다. 그는 천천히 목소리를 뱉어 냈다.

“알았어.”

“…….”

그는 가볍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고마웠어.”

지원은 생각보다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에 힘이 들었다. 연인이 아닌 두 사람의 평범하지 않은 이별이었다. 현주는 그의 말 한 마디로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녀 자신은 매력적일 수는 있어도 차가워질 수는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좋아하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고 소중히 하고 싶은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그런 그녀와 지원은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현주는 지원의 그림 같은 얼굴을 눈에 담으며 말했다.

“고마웠어요.”

지원은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일어나 욕실로 모습을 감췄고 현주 역시 일어나 널브러진 옷을 다시 입었다. 스스로를 대견하다고 위로했다. 더 깊어지기 전에 정리하길 잘한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그의 모습을 또 한 번 보고 싶었지만 그는 욕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지원은 현주의 나가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찬물을 틀고 세수를 했다.

* * *

딩동― 딩동―

― 야, 김지원!

“나간다, 나가.”

지원은 텅 비어 버린 자신의 집에 아무나라도 들이고 싶었다. 그것이 현주의 빈자리임을 너무도 잘 알았지만 늘 그렇듯 곧 정리될 마음이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재경은 그런 그의 마음을 달래 줄 일종의 마취제였다. 재경은 양손 가득 든 맥주와 안줏거리를 지원에게 넘기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야, 이게 얼마 만이냐. 내일 스케줄 없어?”

“있어.”

“근데 술 먹어도 돼?”

“저녁 스케줄이니까 괜찮아.”

재경은 지원의 오랜 친구였다. 그의 표정만 보아도 그가 어떤 상태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섣부른 궁금증이나 오지랖을 떨어서는 안 된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지원은 거실 테이블에 맥주를 늘어놓고 아직 온기가 느껴지는 치킨 한 마리를 펼쳤다.

“스케줄 끝나고 오는 길이야?”

“어, 케이블 예능인데 잠깐 게스트로.”

지원은 영혼이 나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재경은 충격요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아버님이랑 최근에 연락했어?”

두 눈 가득 피로함이 절절했던 지원은 순식간에 사나운 맹수처럼 날을 세우고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재경은 그런 지원을 무서워하지 않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럼 어머님은?”

“…….”

지원은 말을 아꼈다. 가장 생각하고 싶지 않은 두 사람이었다. 그는 두 눈을 감고 소파에 깊게 기댔다.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지만 재경은 그럴수록 그에게 말을 걸었다.

“요새 만나는 여자 있냐?”

“닥쳐.”

“하긴 네가 만나 봤자 원나잇이지.”

지원은 현주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처음 그녀에 대한 인상은 그저 하나부터 열까지 순진해 빠진 시시한 여자라는 것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지원은 세상이 지루했고 짜증스러웠으며 권태로웠다.

그 와중에 눈에 뜨인 것이 그녀였다. 분명 화려해도 좋을 외모를 가졌으면서 화려한 공간과 사람들을 부담스러워하는 그녀가 흥미로웠다. 그뿐이었다.

“이제 연애 좀 할 때 되지 않았냐?”

그녀의 긴 머리카락과 도화지처럼 하얀 얼굴, 작은 코에 긴 눈을 떠올리는 순간 재경이 연애에 대한 얘기를 늘어놓았다. 지원은 싸구려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켜며 말했다.

“관심 없어.”

“관심 없기는.”

재경은 친구의 깊은 외로움을 모르지 않았다. 보통의 사람들은 태어나면서 부여받는 혜택이 있다. 쉽게 말하면 가족이고, 멋있게 말하면 절대적인 믿음과 신뢰가 그것이었다. 지원에겐 그것이 없었다. 재경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외롭잖아.”

“안 외로워.”

지원은 친구의 위로가 달갑지 않았다. 혼자 있는 것은 그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누구도 믿지 못한 채 누구의 사람도 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외롭다고 정의하고 싶지 않았다.

재경은 그것이 지원의 약점이라고 생각했다.

“안 외로우면 날 왜 부르냐? 야밤에 술이나 처먹고.”

“…….”

재경은 지원의 오랜 매니저로부터 현주의 얘기를 들었다. 지원의 집에 두 번 이상 머무는 여자가 있다는 것도 충격적이었지만 그 대상이 한없이 수줍음 많은 현주라는 것이 더욱 놀라웠다.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원에게 화려한 사람은 독이 될 뿐이니까. 그의 부모처럼.

“부모님은 부모님이고 넌 너야.”

“조용히 해.”

“이 형이 장담하는데 세상에 좋은 사람들 많다.”

“너랑 나만 봐도 세상은 쓰레기통이야.”

지원의 어린 시절은 좋은 사람들을 만나며 보낼 만큼 좋은 환경이 아니었다. 일찍이 아역배우로 데뷔해 어른들의 세계로 뛰어든 그는 돈이 만들어 내는 추악함과 비열함을 너무도 빨리 마주했다.

그의 부모는 서로를 죽일 듯이 미워하면서도 지원의 돈과 가능성을 포기하지 못해 헤어지지 않았고, 그것은 지금까지 지속되어 왔다. 그들은 각자의 연인을 만들었고 늘 그 상대가 바뀌었으며 언제나 지원에게 돈을 요구했다.

“에이, 넌 쓰레기 맞는데 난 아니지.”

재경은 씁쓸하게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지원은 말이 없었다. 지원에게도 희망이라는 것이 있을 때가 있었다.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을 만나기도 했었고, 그를 사랑한다며 찾아온 사람을 만나기도 했었다. 하지만 모두들 쉽게 지쳤고 또는 너무 영악했다.

사랑을 붙잡아 두고 싶어 하던 그의 집착과 구속을 견디지 못한 사람이 반, 그의 배경과 돈을 사랑하던 사람이 반이었다.

“그냥 네 본능대로 살아. 안 어울리게 금욕하면서 살지 말고.”

재경은 그런 지원의 본능적인 외로움과 욕구를 알았다. 지원은 그런 재경을 보며 웃었다.

“난 금욕 안 해.”

금욕이라는 말의 실질적인 의미로 보자면 지원의 말이 맞았다. 그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타이자 우상이었다. 그와의 하룻밤을 원하는 여자 수로 따지면 서울 한복판에 줄을 세울 수도 있을 지경이었다. 재경은 지원의 텅 빈 허세를 비웃었다.

“누가 그딴 금욕 얘기 하냐?”

“…….”

“연애하고 싶잖아. 사랑꾼이 네 본능 아니야?”

지원은 친구의 진심 어린 충고를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소파 쿠션을 집어 던졌다.

“아, 왜!”

“의미 없는 짓 하면서 시간 낭비하기 싫어.”

“결혼하는 사람들도 있잖아.”

“우리 부모님 같은 경우겠지. 헤어지지도 못하고 죽이지도 못한 채 억지로 살아가는.”

재경은 지원의 눈에서 지독한 경멸을 읽었다. 재경은 애써 밝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 부모님은 여전히 잉꼬부부셔.”

“아주 드문 경우야. 아주 운이 좋은 경우고.”

“네가 그런 사람일 수도 있잖아.”

재경은 그에게 조금이나마 희망이라는 것이 남아 있기를 바랐다. 지원은 한숨을 쉬며 느리게 말을 이었다. 축 처진 그의 어깨는 이미 너무도 지쳐 보였고 애써 웃는 입꼬리에선 안쓰러움이 묻어났다.

“기대 안 해.”

“…….”

“그딴 걸 기대할 만큼 순진하지 않아, 내가.”

길게 뻗은 그의 눈이 어느 때보다도 날카롭고 차가워졌다. 희망을 잃은 좌절보다 독기를 품은 고통이 몇 배는 더 괴로운 법이었다.

* * *

현주는 그럭저럭 잘 살아가고 있었다. 고작 이틀이었지만 한 번도 울지 않았고 그를 떠올리지 않았으며 전화를 하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물론 그녀가 집 안 대청소와 함께 바쁜 시간들을 만들었기 때문이었지만 나름대로 훌륭한 처신이었다.

그녀는 예전의 그녀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밤에 글을 쓰고 밤에 밥을 먹으며 밤에 책을 읽었다. 아침엔 잠을 잤고 태양의 힘이 조금 약해질 때 깨어났다. 눈부신 햇살은 그녀에게 적이나 마찬가지였다. 오후 세 시. 그게 그녀가 일어나는 시간이었다. 현주는 눈을 뜨자마자 기계적으로 일어나 집 안 곳곳을 살피며 흠을 잡아냈다.

“냉장고가 빈 것 같은데…….”

그녀는 사서 일을 만들었다. 스스로에게 생각할 시간 같은 건 주고 싶지 않았다. 현주는 치장하는 데 공을 들였다. 성심성의껏 옷을 골랐고 매일 다른 분위기의 화장을 했다. 억지로라도 화사해지지 않으면 벼랑 끝으로 가는 자신을 들킬 것만 같았다.

마트 안 풍경은 평화롭고 이상적이었다. 인자한 얼굴로 장을 보고 있는 누군가의 엄마와 누군가의 아내들 사이에서 현주는 편안함을 느꼈다.

“두부랑 대파…… 아, 버섯도 사야겠다.”

마침 집에 감자 몇 개가 남아 있음을 떠올리고는 따끈한 된장찌개를 끓이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

찌개용 두부를 만지작거리던 그녀는 얌전히 두부를 놓아두고 걸음을 옮겼다. 그와의 시간이 떠올랐다. 된장찌개를 좋아한다던 그와 그런 그를 위해 요리를 하던 자신의 시간이 너무도 아득하게 느껴졌다.

‘제대로 된 밥이나 먹고 있을지 모르겠네.’

현주는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부질없는지에 대해 깨닫고 고개를 저었다. 이제는 신경 써서는 안 될 사람이 돼 버린 그였다. 현주는 깊은 무력감에 빠지기 시작했다.

“가야겠다.”

현주는 장바구니를 정리하고 빈손으로 마트를 떠났다. 무얼 먹고 싶지도, 무얼 하고 싶지도 않았다.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것들이 한꺼번에 폭풍이 되어 몰려왔다. 부질없는 후회도 계속되었다.

‘조금만 참았으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지원이 보여 주었던 순간순간의 따뜻함과 애정을 한낱 환상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 역시 그녀와 마찬가지로 마음의 변화가 있었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그저 분명하고 확실하게 느낄 만큼은 아니어서, 그래서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이라 믿고 싶었다.

― Rrrrr.

현주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과 무엇이든 하고 싶다는 마음 사이에서 치열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그를 잊을 만큼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고 싶다가도 무엇의 방해도 받고 싶지 않을 만큼 지쳐 있기도 했다. 그때쯤 걸려 온 전화가 연석의 전화였다.

“여보세요.”

― 누나!

그의 미소만큼이나 산뜻하고 청량한 목소리였다. 그것만으로도 약간의 기분전환에 성공한 현주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어, 연석아. 무슨 일 있어?”

그의 목소리는 태연하고 한가로웠지만 연석이 그녀에게 개인적으로 연락한 것은 거의 처음이어서 혹 드라마 관련하여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지 염려스러웠다. 연석은 호탕한 웃음소리로 그녀를 안심시켰다.

― 뭔 일 있어야 전화하나. 바빠요?

“응? 아니 괜찮아. 왜?”

― 왜긴 왜예요. 누나 보고 싶어서 그러지.

현주는 연석의 이런 점이 좋았다. 본인의 매력과 장점을 너무도 잘 알아서 누구에게나 친근하고 모두에게 사랑을 베풀 줄 아는 모습이 참 따뜻하게 느껴졌다. 조금 능글거리는 느낌도 있었지만 기분 나쁜 정도는 아니었다. 적당히 기분 좋았고 적당히 재미있었다.

“어쭈? 이제 볼 일 없다고 막 까분다?”

― 왜 볼 일이 없어요. 현장엔 아예 안 올 거예요?

“뭐…… 아무래도 그렇지 않을까. 현장은 감독님 영역이니까.”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단막극인 만큼 비중의 80퍼센트는 주연들의 몫이었다. 아마 어떤 현장을 가도 지원을 만날 것이다. 떠올리기만 해도 감정의 절제가 힘든 상황이었다.

― 그래도 가끔 와서 봐 줘요. 대본 연습은 누나랑 할 때가 제일 좋아.

현주는 연석의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대기실에서 함께 대본을 연습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너 아직도 매니저님이랑 연습해?”

― 할 때마다 몰입 안 돼서 죽겠어요. 짝사랑 누나 역할에 웬 걸걸한 아저씨가 대사를 하니……. 어휴.

현주는 연석의 풍채 좋은 매니저가 개화기 신여성의 묘한 말투를 따라 한다고 상상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틀 만에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는 것이었다. 연석은 그녀의 끊임없는 웃음소리에 재미있다는 듯 따라 웃었다.

― 매니저 형 얘기가 그렇게 웃겨요?

“아, 웃기잖아. 그분이 민서 씨 역할을 한다는 게.”

한번 터진 웃음은 좀처럼 멈춰지지 않았다. 연석은 어쩔 수 없이 현주의 웃음소리를 무시한 채 말을 이어 나가야 했다.

― 아, 누나 오늘 밤에 시간 있어요?

“오늘 밤? 왜?”

― 심야영화 보려고요.

“데이트 신청 하는 거야?”

― 꿈 깨요, 누나.

아주 적당한 타이밍에 철벽을 치는 연석이었다. 장난스러운 얼굴로 한심한 표정을 짓고 있을 그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현주는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물었다.

“무슨 영환데?”

― 우리 작품이랑 같은 시대 영화예요. 보면 도움이 좀 될 것 같아서요.

“아, 나도 예고편 본 것 같다.”

― 누나랑 같이 가면 대본 얘기도 할 수 있잖아요.

“음……. 나도 영화관 간 지 오래되긴 했는데.”

연석은 현주의 승낙할 듯, 말 듯 한 말투가 답답한지 짐짓 비장한 목소리로 마지막 협상 조건을 걸었다.

― 티켓, 팝콘, 콜라에 집까지 모셔다 드리는 서비스까지 쏩니다.

현주는 그제야,

“콜!!”

을 외쳤다. 사실 그녀는 연석의 열정에 무한한 감동을 받았다. 대본 연습을 할 때부터 싹이 보이긴 했지만 이토록 작품 공부를 열심히 하다니 여간 예쁘지 않을 수 없었다.

― 우와, 정말요?

“그게 뭐 어려운 거라고. 내 배우가 작품 공부 좀 하겠다는데.”

― 고마워요, 누나. 열두 시 반 영화니까 영화관에서 만나는 거 어때요?

“그래, 그러자.”

현주는 늦은 밤 애써 딴짓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해졌다. 영화를 볼 때만큼은,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을 때만큼은 그의 생각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 * *

지원 역시 현주와 마찬가지로 바쁘게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다음 스케줄 뭐야?”

“저번에 재계약한 커피 광고. 일산으로 가야 해.”

지원은 고개를 젖히고 카시트에 몸을 기댔다. 새벽부터 일어나 화보에 실을 수중촬영을 했고, 잡지사 인터뷰와 광고주와의 짧은 만남이 있었다.

“중간에 밥 먹을 시간 없을 거야. 김밥이니까 이거라도 얼른 먹어.”

“됐어. 안 먹어도 돼.”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은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회식 때조차 관리를 위해 고기 몇 점 맘 편히 먹지 못했고, 늘 바쁜 스케줄 속에서 챙겨 먹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불만스러운 생각에 기분이 나빠질 무렵, 그저 평범한 하루에 불과했던 한 기억이 떠올랐다.

‘우리 집 가요. 밥해 줄게요.’

‘된장찌개 좋아해요?’

먹지는 못했지만 꽤 고소하고 맛있는 냄새가 풍기던 된장찌개였다. 문득 그때의 찌개를 맛보지 못한 것이 아쉬워졌다. 지원은 두 눈을 질끈 감고 검은 안대를 썼다.

“잘 거야. 도착할 때까지 깨우지 마.”

안대를 쓰고 햇빛을 차단해도 잠은 오지 않았다. 지원은 아주 오래 전부터 불면증을 앓아 왔다. 작은 실수도 치명적인 단점이 되는 세계에서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찾아온 질병이었다. 폭력사건에 휘말렸던 그때 그 밤도 마찬가지였다.

‘잠 안 와요?’

잠에 들지 못하는 그를 보며 그녀는 그렇게 물었었다.

‘그래도 자요.’

불면증이라는 그의 대답에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절대 모를 것이 분명했지만, 지원은 그 순간 그녀에게 의지했었다. 기댈 수 있을 만큼 단단해지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저 곁에서 잡아 주는 것만으로 의지할 수 있었다. 잠이 오지 않는다는 말에 그래도 자라는 그녀의 말처럼.

“지원아, 다 왔다. 일어나.”

지원은 마치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안대를 벗고 뻐근한 눈을 비볐다. 매니저가 재빨리 내려 지원의 물과 겉옷을 챙겼고 뒤차로 따라온 세 명의 코디들이 옷과 빗과 거울을 챙겨 그의 곁에 바싹 붙었다. 한눈에 봐도 연예인 무리라는 것이 보여서 그런지 멀리서 촬영감독과 스태프들이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김지원이라고 합니다.”

“실물이 훨씬 멋있네요. 오늘 잘 부탁합니다.”

간단한 인사를 끝으로 스태프들은 본격적인 촬영준비와 조명을 체크했고, 지원은 탈의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짙은 와인색의 슈트와 화려한 장식이 달린 검은색의 구두는 누가 보아도 평범하지 않았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소화하기 쉽지 않았을 의상이었지만 지원은 평범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탈의실에서 나온 그를 지켜보던 여자 스태프들이 호들갑을 떨며 중얼거렸다.

“저 옷을 누가 소화하나 했더니 김지원이 소화하네.”

“기럭지 봐라, 기럭지.”

조연출로 보이는 스태프 한 명이 지원의 곁에 앉아 콘티를 설명했다.

“이번 콘셉트는 ‘뱀파이어의 키스’예요. 커피의 쓴맛과 단맛의 적당한 은유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아직 오시진 않으셨는데 민서 씨 오면…….”

지원의 긴 눈이 날카롭게 휘며 꿈틀거렸다.

“누구요?”

“아, 여자 모델은 민서 씨로 낙점됐어요. 같이 작품도 하실 거니까 효과가 좋을 것 같아서요.”

지원은 곁에 있던 매니저를 향해 입꼬리를 말았다. 그를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저 매력적인 미소로 보일 뿐이겠지만 매니저의 눈에는 ‘너 곧 죽일 거야.’로 보였다. 상대 모델이 민서라는 것을 매니저는 분명 알고 있었다. 지원에게 미리 알려 봤자 좋을 것 같지 않아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멀리서 또각거리는 하이힐 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예정 시간보다 십 분 늦게 도착한 그녀는 드라마 리딩 때와 마찬가지로 도도한 분위기를 풍기며 오만한 자태를 뽐냈다. 오만함은 본디 스스로를 강자라고 인식하는 것에서 기인하는 것이라 자신보다 강한 것이 보이면 꼬리를 말기 마련이었다.

민서가 촬영장 한가운데서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는 지원을 발견했다. 민서의 얼굴은 순식간에 굳어졌고 불똥은 매니저를 향했다.

“저 사람이 여기 왜 있어? 나 저 사람이랑 같이 광고 찍는 거야?”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갔다. 보는 눈이 많았기에 하늘 같은 선배인 지원에게 인사는 해야 했다. 민서가 쭈뼛거리며 다가가자 지원은 낮은 목소리로 인사를 대신했다.

“지각하는 버릇은 여전하네.”

“오는 길이 좀 막혔어요……. 진짜예요!”

지원은 바보 같은 얼굴로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민서를 향해 저승사자 같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알았으니까 옷이나 갈아입어. 다 기다리잖아.”

“죄, 죄송합니다.”

민서는 얼떨결에 고개를 숙이고 사과를 했다.

“사과는 스태프들한테나 해.”

지원은 현주를 떠올리게 하는 민서의 등장을 반기지 않았다. 워낙에 뒤끝도 없고 미련도 없는 그의 성격상 민서를 이토록 불편해할 이유는 없었다. 다만 민서를 보면 그녀와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던 현주가 떠오르는 것이 싫을 뿐이었다.

“자, 시작할게요!”

지원의 기세에 잔뜩 겁을 먹은 민서가 재빨리 준비를 마친 덕분에 촬영은 그리 늦지 않게 시작할 수 있었다. 준비된 시안이나 콘셉트로 보면 둘은 꽤 끈적하고 야릇한 분위기를 연출해야 했다. 소품은 중세 분위기가 느껴지는 검은색 가죽 소파였는데 나른한 분위기의 지원과 매우 잘 어울렸다.

반면에 민서는 지원을 상대로 도저히 섹시한 포즈를 취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뭐하는 거야?”

“네?”

“콘티 못 봤어?”

지원은 찌푸린 얼굴을 들고 짜증스럽게 물었다. 검은색 자수 원피스를 입은 민서는 짧은 치마 길이에 어떤 포즈를 취해야 할지 감도 못 잡는 것 같았다.

과하면 외설이 되고 약하면 안 하느니 못한 것이 ‘섹시’였다. 지원은 생각이 많아 보이는 민서를 보며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뱉었다.

“배우 계속하고 싶으면 움직이는 것부터 배워.”

지원은 민서의 손목을 잡고 그녀를 이끌었다. 어설프게 앉은 민서의 자세를 조금이나마 편하도록 고쳐 주고, 그녀의 허리를 감싸 어색함을 가리려 애썼다. 꽤 야릇한 포즈가 완성되자 감독은 목소리를 높였다.

“좋아요! 그 상태에서 지원 씨가 민서 씨 목에 키스하는 것처럼 해 볼게요!”

지원은 망설임 없이 민서의 목 가까이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예고도 없이 다가오는 그의 몸짓에 숨을 멈추고 온몸에 힘을 주었다. 그녀의 쇄골과 목에서 핏줄이 솟아날 지경이었다.

“민서 씨, 조금만 긴장 풀자! 긴장한 게 너무 티 나.”

민서는 조금이라도 빨리 촬영을 끝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그녀가 잘해야 했다. 지원은 이미 최선 그 이상의 실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하지만 목과 허리에 닿은 지원의 감촉에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리딩 때 그에게 호되게 당한 이후로 지원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긴장하고 예민해지는 민서였다. 보다 못한 촬영감독은 새로운 포즈를 제안했다.

“민서 씨가 유혹하는 느낌으로 해 보는 건 어때요?”

“어…… 이렇게요?”

민서는 매우 불편해 보이는 자세로 그의 어깨에 얼굴을 살짝 기댔다. 지원은 그런 그녀의 어리숙함을 참고 기다려 줄 만큼 착하지 않았다. 지원은 그녀를 자신 무릎 위에 앉히고 민서의 두 팔을 제 목에 둘렀다.

“나 봐.”

“네?”

“나 내려다보라고. 자세는 지금 좋으니까.”

민서는 지원이 시키는 대로 고개를 숙여 그를 쳐다보았다. 둘의 자세는 비명이 나올 만큼 매혹적이었다. 위로 든 그의 턱은 날카로운 얼굴선을 자랑하며 묘한 섹시함을 어필했고 민서 역시 내려다보면서 그윽한 눈을 연출할 수 있었다.

“좋아! 이번 컷 그대로 슬로우 샷 찍을게요.”

민서는 감독의 칭찬에 조금씩 몸이 풀리기 시작했다. 못되게 굴 줄 알았던 지원은 프로다웠고 또 믿음직했다. 나름 틀어 둔 음악도 적당히 리드미컬한 것이 그녀의 긴장을 푸는 데 도움이 되었다.

“민서 씨, 바닥에 누워 봐요. 지원 씨는 권위적인 느낌으로.”

콘티대로 민서는 검은 대리석 바닥에 누워 지원을 올려다보았다.

“자, 조금만 더 느리게― 오케이!”

지원은 유혹적인 모습으로 누워 있는 민서를 보며 제집 거실 바닥에 누웠던 아름다운 한 여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현주의 첫 번째 유혹이자, 마지막 유혹이었다.

지원의 흔들리는 눈동자는 촬영에 전율과 감동을 일으켰다. 사랑하는 연인의 피를 탐내야 하는 뱀파이어의 숙명적인 영혼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이었다나, 뭐라나. 지원은 자신이 현주의 피를 빨아 먹던 존재였는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하죠! 수고했어요.”

끝이라는 소리에 기계적으로 일어나 탈의실로 향하는 지원을 향해 민서가 말했다.

“선배님!”

“왜.”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지원은 어깨를 잠깐 들썩일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 촬영장의 검은 바닥이, 민서의 아찔한 자태가 현주의 기억보다 강하지 않음이 애석할 따름이었다.

지원은 그리움을 피곤함으로 둔갑시킨 채 차에 몸을 실었다.

“다음 스케줄 없지?”

매니저는 잔뜩 가라앉은 지원의 목소리에 걱정하며 물을 건넸다.

“응, 내일 오전 스케줄 비워 놨으니까 집에 가서 푹 쉬어.”

― Rrrrr.

지원은 진동이 울리는 핸드폰의 액정을 바라보았다. ‘한재경’이라 저장된 이름은 보통 받지 않아도 된다는 뜻과 같은 것이었다. 재경도 그런 것을 알기에 지원의 무시를 일상처럼 여겼지만 오늘만큼은 조금 끈질겼다.

― Rrrrr.

매니저는 운전 내내 울리는 진동 소리에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급한 일일 수도 있잖아. 받아 봐.”

지원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아, 왜.”

― 나랑 밀당하냐? 하여튼 한 번에 받는 법이 없어요.

“내가 너처럼 한가한 줄 아냐.”

― 한가하니까 전화 받은 거 아니야?

지원은 방금 전 통화버튼을 누른 자신을 저주하며 종료 버튼을 향해 손을 움직였다.

― 아아! 끊지 마.

지원의 멀어지는 숨소리에 다급해진 재경이 목소리를 높여 그를 잡았다. 지원은 깊은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할 말 있으면 빨리 말하고 끊어. 피곤해.”

― 피곤해? 피곤하면 안 되는데.

“왜.”

― 영화 보러 갈 거란 말이야.

재경은 제법 애교스러운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을 이었다.

“네가 영화 보러 가는 거랑 내가 피곤한 거랑 무슨 상관이야.”

― 무슨 상관이긴. 너도 같이 보러 갈 거니까 상관있지.

지원은 잘 세팅되어 있는 머리를 헝클이며 짜증스럽게 답했다.

“내가 왜 너랑 영화를 봐.”

― 너 어차피 집에 가서 할 것도 없잖아.

“잘 거야.”

핸드폰 너머로 재경의 어렴풋한 비웃음이 들리는 듯했다.

― 잠은 무슨.

지원은 딱히 아니라고 말할 수없는 자신이 한심스러워졌다. 지금 바로 집에 들어간다 해도 한참 뒤척일 것은 당연했다. 지원은 다른 핑계를 찾았다.

“사람 많잖아. 싫어.”

― 괜찮아. 평일에 심야 영화 보는 사람 별로 없어.

“너랑 가기 싫어.”

― 나도 너랑 가기 싫어. 근데 혼자 가는 건 더 싫어.

지원은 재경이 포기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무슨 말을 해도 재경은 돌파구를 찾아낼 것이었다. 이럴 땐 차라리 빨리 포기해 주는 것이 서로를 편하게 하는 방법이었다.

“아, 무슨 영환데 그래.”

― 개화기 모던보이에 대한 얘기래. 나 그 시대에 환장하는 거 알잖아.

“오타쿠도 아니고. 아, 알았어.”

재경은 환호성을 질렀고 지원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통화를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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