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믿음
무턱대고 오긴 왔지만 그녀는 한참을 서성이며 망설였다. 딱 두 번 와 봤던 곳인 그의 집은 여전히 으리으리하고 높았다. 그가 이곳에 있을지, 사무실에 있을지 아님 어딘가에서 억눌린 분노를 표출하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기자들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 없을 가능성이 컸다.
손가락을 뻗어 누른 초인종은 명랑한 소리를 내며 요란을 떨었다. 집 안은 조용했고,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무실에 있나…….”
현주는 아쉽지만 등을 돌려 발길을 옮겼다. 그때 철컥―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유현주?”
문 사이로 살짝 고개를 내민 그가 보였다. 지원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현주는 좀 전까지만 해도 당당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콩알만큼 작아지는 것을 느꼈다.
“안에 있었어요?”
“인터폰 보고 당신이어서 나왔어. 여긴 왜 왔어?”
현주는 마땅히 할 말이 없어 어색하게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지원은 어깨를 으쓱이며 문을 활짝 열었다. 들어오라는 말이었다. 그의 넓고 화려한 집 안에 발을 들인 그녀는 눈앞의 광경에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
지원의 매니저와 변호사가 심각한 표정으로 거실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매니저는 현주를 알아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작가님이 왜…….”
현주는 적당한 말을 찾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작가로서 걱정돼서라는 핑계는 적절했지만 집까지 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했다. 사실 무슨 변명을 해도 이상한 상황이었다. 지원은 그런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며 조용히 속삭였다.
“방에 들어가 있어. 금방 정리할게.”
현주는 매니저를 향해 어색하게 고개를 숙이며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자면서 이불을 뻥뻥 찰 일이었다. 그가 걱정되어 오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그녀의 마음을 지원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까지 들킨 것 같아 후회가 밀려왔다.
현관문이 열고 닫히는 소리가 이어 들린 뒤 지원이 방으로 들어왔다.
“사람들 갔어.”
“제가 방해한 거 아니에요? 난 지원 씨 사무실에 있을 줄 알고…….”
매니저에게 뭐라고 말했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상태였다. 방해한 거 아니냐는 질문에 그는 입꼬리를 말며 아이 같은 미소를 지었다.
“사무실에 있을 줄 아는데 여긴 왜 와. 비밀번호도 모르면서.”
“…….”
“전화하려고 했는데 계속 바빴어. 걱정 많이 했어?”
현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위로받아야 할 그가 자신을 달래는 이 상황이 아이러니했다. 아까는 당황스러워 보이지 않던 그의 모습이 비로소 보였다. 남색의 니트를 입은 그는 어젯밤 차림 그대로였다. 옷을 갈아입을 정신도 없었던 모양이었다.
“괜찮아요. 바쁠 줄 알았어요.”
그는 가만히 그녀의 눈을 쳐다보았다. 그 어떤 걱정과 참견보다 훌륭한 위로였다. 지원이 그녀의 어깨를 살짝 쥐었다 놓았다.
“나 샤워 좀 하고 나올게. 기다릴 수 있지?”
지원은 갈아입을 옷을 들고 샤워실로 들어갔다. 쏟아지는 물소리가 한참 동안 이어지다 물에 젖은 그가 편한 차림을 하고 나타났다. 눈 밑에 앉은 그림자가 한없이 안쓰러웠다.
“계속 잠도 못 잔 거예요?”
“이제 자야지. 당신 때문에 매니저랑 변호사도 나가고 좋네.”
그가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이 정도의 논란이나 스캔들 따위는 그에게 어떤 영향도 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조금도 위축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그는 그저 피곤하기만 한 대스타, 김지원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현주를 향해 장난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렇게 쳐다보지 마. 나 불쌍한 사람 아니야.”
“재경 씨한테 들었어요. 지원 씨 잘못 아니라고.”
지원은 아무런 표정 없이 수건으로 머리를 털었다. 짙은 샴푸향이 현주의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지원 씨 잘못 아니니까 금방 해결될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그는 그녀의 응원이 자못 즐거웠다. 자신보다 더 괴로운 표정으로 자신을 살피는 그녀가 어딘가 사랑스럽기까지 했다. 그는 그녀에게 더 현실적이고 어려운 것들을 공유하고 싶어졌다. 피곤으로 갈라진 그의 목소리가 담백하게 흘러나왔다.
“사진이 찍혔어.”
“네?”
“내가 그 남자랑 하이파이브 하려고 손을 든 사진. 되게 절묘하더라고. 어떻게 보면 때릴 것처럼. 공범도 있었나 봐. 고작해야 사기꾼들이.”
현주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도 나서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 그래서요?”
“변호사가 방법을 찾고 있어. 내가 잘못이 없다는 것을 증명할 방법.”
“그럴 방법이 있어요?”
“아직까지는 없어.”
그는 괜찮다는 듯 말을 이었다.
“내일 바로 기자회견 할 거야.”
“방법이 없다면서요.”
“그렇다고 해서 내가 잘못한 거는 아니니까.”
이 바닥은 가십을 좋아했다. 실체가 없고 두루뭉술할수록 좋아했다. 그런 루머는 부풀려지기 쉬웠고, 모습을 바꾸기 용이했다. 그가 말하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도마 위에 올라 재단되고 해석될 것이었다.
“너무 위험해요. 사람들이…….”
“잘못했을 때나 고개 숙이고 사과하는 거야. 걱정하지 마.”
그는 눈을 부비며 하품을 쏟아 냈다. 침대 위로 쓰러진 그는 금방이라도 잠들 사람처럼 무거운 눈꺼풀을 내렸다. 현주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없어요?”
“…….”
“도와주고 싶어요.”
그는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은 그녀를 잡아끌었다. 현주의 얼굴이 그와 마주할 만큼 가까워졌을 때, 그는 조용히 너무도 지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기 있어.”
“…….”
“내일 기자회견 전까지 같이 있자.”
그는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사태에 대한 어떤 걱정도 없어 보이던 그가 순식간에 여리고 나약한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도 현재의 여론을 모르지 않을 터였다. 두려움이 생기는 건 당연했다. 현주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현주의 침대보다 두 배는 족히 넓어 보이는 그의 침대는 둘을 안락하게 감싸 안았다. 지원은 잠이 오지 않는 듯, 눈을 감은 채 현주의 손등을 간지럽혔다. 현주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잠 안 와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원래 잘 못 자.”
“왜요?”
“그냥 불면증.”
그는 정말 그래 보였다. 하루를 꼬박 새운 것과 다름없는 그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현주는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그의 손가락들을 움켜쥐며 조용히 말했다.
“그래도 자요.”
“…….”
“내일 기자회견에서 멋있으려면 푹 자야죠.”
“난 늘 멋있어.”
현주는 그의 당당함이 좋았다. 그녀에게는 없는 높은 자존감과 세상 어느 누구 앞에서도 기죽지 않는 자신감이 좋았다. 곁에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만드는 그의 마력이 이런 와중에도 꺼지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는 평소보다 수척하고 피곤하며 예민해 보였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그의 견고한 정신은 어느 한 곳도 다치지 않은 것 같았다.
“지원 씨는 대단해요.”
“왜?”
“이런 일에도 놀라지 않고 태연한 거 보면.”
현주의 속살거림은 내내 감고 있던 그의 눈을 날카롭게 만들었다. 그는 짙고 깊은 눈을 들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지극히 순진한 눈동자가 그를 담고 있었다. 지원은 자신을 부러워하는 그녀의 순진함이 영 거북했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런 일이 하루 이틀이 아니니까.”
“…….”
“놀랄 수 있는 게 좋은 거야.”
현주는 서른두 살의 남자에게서 한없이 여린 씁쓸함을 읽었다.
열다섯 살에 데뷔한 그가 어린 나이에 겪었을 많은 일들을 생각하니 그가 안쓰러워졌다. 현주는 가만히 그의 머리를 당겨 안았다. 아직 다 마르지 않은 그의 머리카락이 그녀의 손끝을 시리게 했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들릴 듯 말 듯 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건 좋은 게 아니야.”
“…….”
“결국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거니까.”
현주는 차마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하지 못했다. 그의 가족이 있고, 그의 팬들이 있으며, 그를 진심으로 위하는 친구들이 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건 그를 위로하는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저 그의 넓은 등을 쓸어 주었다.
“지원 씨는 아버님과 어머님 중에 누구 닮았어요?”
“나?”
“네. 지원 씨 얼굴을 보면 부모님 두 분 다 미남, 미녀일 것 같아서요.”
그는 가만히 숨을 고르며 생각에 잠겼다.
“맞아. 나 엄마 닮았어.”
“그래서 지원 씨가 예쁜가……?”
그는 길고 가는 눈을 휘며 웃었다. 현주는 그의 어머니를 만나지 않고도 그녀를 떠올릴 수 있었다. 분명 지원을 많이 닮은 아주 훌륭한 미인일 것이다.
“부모님이 지원 씨 걱정 많이 하시겠어요. 전화는 드렸어요?”
현주의 질문에 그는 불편할 정도로 일그러진 표정을 만들었다. 천진하게 미소 짓던 얼굴은 사라지고 괴로운 기억을 떠올리는 아이처럼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지원은 갈라지는 목소리를 억지로 뱉어 냈다.
“아니. 안 드렸어.”
“…….”
“걱정 안 하실 거야.”
누구에게나 말하고 싶지 않은 고통과 기억, 과거가 있기 마련이었다.
그에게 자신을 가르쳐 달라며, 모두에게 매력적인 사람으로 바꾸어 달라고 말했을 때 그가 어떤 것도 묻지 않았던 것처럼 그녀도 그에게 묻지 않았다. 그저 자신보다 훨씬 넓은 어깨의 그를 작은 품으로 끌어당길 뿐이었다. 그녀는 그의 등을 토닥이며 끊임없이 귓가에 속삭였다.
“괜찮아요. 괜찮아.”
그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현주는 그가 잠들지 않았음을 알았다. 그는 이따금 눈을 깜빡였고, 불규칙적으로 몸을 떨었다. 모든 것이 조용해졌을 때 그는 다시 개구쟁이 같은 웃음과 함께 현주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옷 갈아입어.”
“왜요?”
“침대 위에서 불편하잖아.”
“괜찮은데…….”
“당신 부스럭거리는 소리 때문에 내가 잠이 안 와. 현관에서 제일 가까운 방이 드레스 룸이야. 아무거나 꺼내 입어.”
지원은 그녀를 침대 밖으로 밀어냈다. 현주는 그의 까다로운 성격에 혀를 내두르며 알았다고 대답하고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그의 드레스 룸은 너무 깨끗해서 지나치게 강박적으로 보였다. 모든 옷들이 균일한 간격을 두고 정리되어 있음은 물론이고 작은 먼지 한 톨도 보이지 않았다. 현주는 그의 옷들 중 자신에게 맞을 만한 것들이 있을지 의심되었다.
“대체 뭘 입으란 거야.”
현주는 하얀색의 서랍을 열었다. 다 똑같아 보이는 흰색의 면 티가 돌돌 말려 정리되어 있었다. 그중 하나를 꺼낸 그녀는 욕실로 들어가 손과 발을 씻고 세수를 했다. 마음 같아선 뜨거운 물에 목욕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잠들지 못하는 그가 걱정스러웠다.
“지원 씨.”
“…….”
넓은 침대 위의 그는 말이 없었다. 현주는 그의 팔이 안쪽으로 뻗어 있는 것을 보았다. 장난스럽게 웃은 그녀가 이불을 밀어내며 그의 팔을 베고 누웠다. 그의 다른 팔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지원은 그녀의 쇄골에 얼굴을 묻었다.
“당신한테서 내 냄새 난다.”
“그래요?”
“응, 좋아.”
지원은 그로부터 한참 동안 잠을 자지 못했다. 어느새 곁에서 새근새근 숨을 내쉬는 그녀가 보였다. 걱정된답시고 찾아온 그녀에게 형언할 수 없는 고마움을 느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지원은 지금까지도 매니저와 변호사의 끊임없는 당부와 걱정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코끝을 쓸었다. 간지러움에 찡긋거리는 그녀의 표정이 어린 강아지 같았다. 지원은 그녀의 고른 숨소리를 자장가 삼아 그녀를 품에 안고 잠에 들었다.
* * *
“안녕하세요, 배우 김지원입니다.”
지원의 기자회견은 오전 11시에 시작되었다. 수많은 취재기자들이 몰렸고 근처의 교통이 마비될 정도의 팬들이 운집했다. 보통의 기자회견이라면 넥타이를 하지 않은 검은 정장 차림에 수수한 얼굴이 기본이겠지만 지원은 그러지 않았다. 그날 아침, 그녀도 그에 대해 걱정스러운 속내를 내비쳤다.
‘기자회견치고 좀 화려한 거 아니에요? 사람들은 괜한 거에도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을 텐데.’
그는 그런 것에 겁을 내어 좋을 것이 없음을 알았다. 여론이란 것은 불과 같아서 모든 것을 태울 만큼 뜨겁기도 하지만 바람의 방향에 따라 꺼지기도, 다른 곳으로 옮겨붙기도 하는 것이었다. 겁을 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말했잖아. 잘못했을 때만 고개 숙이는 거라고. 괜찮아.’
지원의 단호한 말에도 그녀는 걱정스러운 눈을 거두지 못했다. 그는 그런 그녀의 머리를 헝클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다녀올게. 여기 있어.’
‘그럴게요. 보고 있을게요.’
지원은 TV로 보고 있을 그녀를 떠올렸다. 초라하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짙은 파란색의 조금은 화려한 슈트를 입은 그는 언제나처럼 세련되고 멋스러웠다. 샵에서 만진 머리에 여유로운 미소, 거칠 것 없는 걸음걸이에 오히려 기자들이 당황하고 있었다.
“여러분들이 걱정과 우려 섞인 하루를 보내신 것에 대해 공인으로서 무척이나 죄송한 마음입니다.”
그는 수많은 기자들과 일일이 눈을 맞추며 또렷한 목소리를 이어 나갔다.
“허나 다행인 것은 저는 여러분들이 걱정하는 그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수많은 카메라가 그의 얼굴을 잡아먹기라도 할 것처럼 플래시를 터트렸다. 한 기자가 큰 소리로 외쳤다.
“일반인을 폭행한 사실이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지원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저는 그 누구에게도 폭행을 저지르지 않았으며, 어떤 누구에게도 상해를 입히지 않았습니다.”
현주는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다. 대중은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그의 단호한 태도에 그를 의심하기란 어려운 법이었다. 지원은 회견장의 분위기가 어수선한 것을 알아차리고 단호하고 뚜렷한 목소리를 이어서 냈다.
“저는 그 누구보다 폭력과 억압과 협박을 증오합니다.”
지원은 아동학대 예방의 홍보대사였던 시절을 상기하며 유려한 말솜씨를 펼쳐 나갔다. 장내의 사람들은 물론 TV로 지켜보고 있는 일반 대중들조차 그의 입에서 흘러나올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는 이틀 전 한 남성 팬을 만났고, 사인을 해 주었으며 하이파이브를 했습니다. 모든 것은 팬이 원하는 것이었고, 저는 팬이 원하는 사소한 것을 외면할 만큼 어리석고 냉정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자 팬은 폭력 피해자가 되었고 저는 폭력 가해자가 되었으며 하이파이브는 폭력이 되었습니다.”
플래시 소리는 보다 더 거세졌고 네티즌들의 키보드 소리는 보다 더 빠르고 강력해졌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전달되고 옮겨지며 점점 더 확산되었다.
“여러분들이 원하시는 증거와 증인은 아직 없습니다. 저와 제 변호사는 이 자리에서 간곡히 요청합니다. 저의 진실은 그날, 그 자리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주변 건물들의 모든 CCTV를 검토할 예정이며, 주차된 차량의 블랙박스와 혹시나 계셨을 익명의 목격자분을 찾고 있습니다.”
그의 길고 매혹적인 눈은 단호하고 날카로워졌고, 미소 짓던 입술은 보다 명확하고 확실한 진실을 전달했다.
“저는 이 모든 오해와 거짓을 이겨 낼 것입니다. 저로 인해 괴롭고 불편한 시간을 보내고 계실 팬 여러분들과 동료 연예인들, 소속사 식구들께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고 지켜봐 주십시오. 여러분이 믿고 사랑하는 김지원의 모습으로 돌아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의 말을 끝으로 기자들의 몇몇 질문이 이어졌다. 기자들은 보다 자세한 사건의 경위를 물었고 그는 침착하고 부드럽게 상황을 설명했다.
지원의 변호사는 경찰과 협조하여 사건을 조사 중임을 밝혔고, 매니저는 현재 계약된 광고와 작품 활동에는 어떤 지장도 끼치지 않을 것임을 다짐했다.
기자들은 ‘한류 스타의 몰락’이라는 거대 기사를 놓친 것에 대해 아쉬워했지만 나름 나쁘지 않은 듯 보였다. 지원은 성심성의껏 참석한 모든 기자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며 향후 활동에 관련된 정보 공유를 약속했다.
인터넷으로 여론을 살피던 현주의 입가에도 미소가 피어올랐다. 기자회견에서 발표한 내용은 네티즌들의 발 빠른 수고로 몇 분 사이에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여론의 움직임도 급격해졌다.
‘저 정도까지 얘기하는데 거짓말이겠어?’, ‘사기꾼들한테 걸렸나 본데.’, ‘우리 오빠 원래 그런 사람 아니었음.’ 등 지원의 주장을 지지하는 세력이 많아졌다. 지원은 대중들의 흐름을 이끄는 데 탁월한 선수였다.
* * *
띠리릭―
“지원 씨!”
현주는 현관이 열리는 소리에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그는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참았지만 그녀의 소란이 꽤 기분 좋은 듯했다.
“뭐가 그렇게 즐거워.”
“수고했어요. 인터넷 여론도 좋아요. 신빙성은 별로 없지만 그 자리에서 지원 씨를 봤다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게 그렇게 좋아?”
지원은 조각처럼 잘빠진 구두를 벗으며 웃었다. 현주는 노트북을 들고 그와 관련된 기사를 보여 주었다. 대부분의 기사 제목은 이러했다.
<김지원, 대중 앞에서 단호한 다짐.>
<사기행각의 사각지대인 연예계, 김지원의 파격.>
<김지원의 호소, 팬들은 굳건한 믿음 약속.>
<김지원의 기자회견 패션, 순식간에 완판.>
“기사만 그런 줄 알아요?”
“뭐가 또 있어?”
현주는 노트북을 자기 쪽으로 향하게 하더니 연예인들의 연이은 소신발언을 보여 주었다. 지원의 기자회견 이후 지원과 함께 일했던 동료 연예인들이 응원 메시지를 게시한 것이었다. 거기엔 원로 배우들을 포함해 지원과 함께 일한 신인 배우들도 있었다.
현주는 지원에게 노트북을 건네며 설명했다.
“연석 씨도 트위터 올렸어요. 지원 씨를 믿고 응원한다고요.”
“이연석?”
“네. 완전 예쁜 후배지 않아요? 아, 그리고 민서 씨도 올렸어요.”
“…….”
“새침데기긴 해도 걱정을 하긴 했었나 봐요. ‘선배님의 오해가 모두 풀리길 기다리겠습니다. 믿고 응원할게요!’ 라고 올렸어요.”
지원은 여전히 순진하기만 한 그녀를 향해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가 차라리 방송계에서 일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싶었다. 그는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사진도 같이 올렸지?”
“네?”
“사진 말이야. 강민서가 트위터 올리면서 지 셀카 안 올렸어?”
“아, 올렸어요. 파이팅 하는 포즈로.”
“거봐. 그냥 자기 홍보하는 거야. 소속사에서 시키는 거라고.”
“에이…….”
그는 갈색 가죽 시계를 풀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현주는 여전히 연예인들의 쏟아지는 응원에 감격한 표정이었다.
“괜히 그런 거에 감동받고 좋아하지 마.”
“지원 씨는 너무 박해요. 다 좋은 마음으로…….”
“나한테 여론이 쏠리니까 저러는 거야. 내가 이 싸움에서 승자 같으니까 미리 붙는 거라고. 응원할 거면 진작 했어야지 뭘 이제 와서 쓸데없이 응원을 해. 다 끝난 마당에.”
“그래도…….”
현주는 그의 냉정함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좋다고 방방거렸던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생각해 보면 연석의 매니저도, 민서도 그가 힘들 때 그를 압박하던 사람들이었다.
“아무것도 알 수 없을 때 믿어 주는 게 진짜 믿는 거야.”
그는 괜히 시무룩해진 그녀의 작은 뒤통수를 보며 말을 이었다.
“당신처럼.”
지원은 어깨를 으쓱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의 손이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려는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 Rrrrr.
지원의 변호사 측에서 온 연락이었다. 한류 스타를 상대로 크게 한몫 챙기려던 사기꾼 일당은 그의 듣도 보도 못한 대응으로 잔뜩 겁을 먹은 상태였다.
네티즌들은 자칭 수사대가 되어 지원의 결백을 밝히려 들었고, 경찰들 역시 대중의 관심을 받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그들은 지원의 소속사 측에 연락해 조용히 마무리하기를 요청했다. 지원은 현주를 향해 잠시 통화를 하겠다는 말을 속삭이며 방으로 들어왔다.
“합의는 없어. 무고죄든, 사기죄든 할 수 있는 건 다 해.”
― 그래도 선처해 주는 편이 여론에 좋지 않겠어?
“여론은 이미 내 편이야.”
― 공개사과라도 하면 어쩌려고.
지원은 거울을 보며 건조해진 입술을 쓸며 웃었다.
“내 알 바야?”
지원의 변호사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고 지원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런 하찮은 인간들을 위해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방 밖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그녀 곁에서 쉬고 싶었다. 전화를 끊고 나온 지원의 표정이 좋지 않음을 느낀 현주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전화예요?”
“별거 아냐.”
현주는 지원이 이번 일에 대한 걱정 때문에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 사람들 곧 자수하겠죠?”
지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자수하고도 남을 만큼 빌고 있으니 그거나 그거라고 생각했다.
“자수하면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왜?”
“지원 씨는 그런 것조차 함부로 하면 안 되는 사람이니까……. 걱정돼서요.”
지원은 그녀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자신에게 무얼 선택하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닌 무얼 선택할 거냐고 묻는 것 역시 오랜만인 것 같았다.
“신경 쓰지 마. 잘 해결할게.”
“혹시 무슨 일 생기면 나한테도 얘기해 줘요.”
현주는 그의 무심함에 작은 항의를 표하기로 마음먹었다. 지원은 현주를 향해 고개를 돌린 채 옷을 갈아입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그의 침묵을 긍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번에도 그래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같이 있던 사람이 폭력 사건에 휘말렸다는데 제가 놀래요, 안 놀래요? 심지어 지원 씨 입으로 들은 것도 아니고 피디님한테 듣고 인터넷으로 봤어요. 이게 말이 돼요?”
현주는 말하면서 더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상황이 지원에게 워낙 안 좋으니 별말 않았지만 여간 서운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자 지원은 잘생긴 이마를 찌푸리며 좋지 않은 기분을 드러냈다.
“왜 말해야 해?”
“네?”
현주는 다시 겁을 먹고 말았다. 그의 입에서 저번과 같은 말이 나올 것 같은 불안감이 도졌다.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
현주도 그 말에 동의하지만 그의 입에서 듣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말을 잘못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미, 미안해요. 걱정을 너무 많이 해서……. 말 안 해 줘도 괜찮아요.”
현주는 울컥하는 눈물을 숨기기 위해 재빨리 등을 돌렸다. 도저히 그를 알 수가 없었다.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면 냉정하게 선을 긋고, 우린 아니라고 생각할 때면 세상 누구보다 다정한 눈길을 보냈다.
지원은 그런 그녀의 흔들리는 등을 가볍게 안았다.
“하지 마요…….”
현주는 그의 손을 뿌리치며 고개를 저었지만 그는 남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이었다. 오히려 그녀의 등을 돌려 얼굴을 마주했다. 그녀의 붉어진 눈가와 촉촉해진 눈망울을 보며 지원은 가볍게 한숨을 뱉었다.
“놀랬을 거 알아.”
“…….”
“걱정시켜서 미안.”
그는 이런 말을 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현주는 늘 그렇듯 그의 망설이는 시간들을 모두 기다려 주었다.
“그래도 말 안 할 거야.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그는 고집스럽고 단호했다. 그러나 목소리는 속일 수 없었다. 평소와 달리 여렸고 약했으며 또 위태로웠다. 현주는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지원은 그녀의 눈을 피하며 자꾸만 고개를 움직였다. 현주는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감쌌다.
“계속…… 말해요.”
“…….”
지원은 그녀의 허리를 안고 있었고, 현주는 그의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대화 내용만 아니면 흡사 연인들의 모습처럼 보였다.
지원은 그녀의 순수하고 곧은 눈동자를 피할 수 없었다. 몇 번의 망설임과 몇 번의 탄식이 이어진 후, 그는 간신히 말을 이을 수 있었다.
“나는 말 안 할 거야. 그래도 당신은.”
“…….”
“여기로 와. 지금처럼.”
그는 명령하듯 무례했지만 그 깊은 곳에 간절함이 있다는 것을 현주는 알았다. 흔들리는 그의 눈빛은 거절당할까 두려워하는 어린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적어도 그가 자신을 밀어내지 않고 필요하다며 얘기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현주는 미소를 지은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고마워.”
“알아요.”
“그것도 고마워.”
그는 민망한지 그녀를 품에 가두고 꼭 껴안았다. 현주는 그런 그의 모습이 어색해 괜한 말들을 중얼거렸다.
“숨 막혀요.”
“잠깐만.”
“배 안 고파요?”
지원은 그런 그녀가 답답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해 한숨을 쉬었다.
“하아…….”
“왜, 왜요?”
“분위기를 잡고 싶어도 잡을 수가 없네.”
현주는 느슨해진 그의 팔을 풀어내며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말을 이었다.
“우리 밥 먹어요! 나, 지원 씨 기다리면서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지원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그녀에게 작은 쇼핑백을 건넸다. 그가 집에 들어오면서부터 들고 있던 것이었다.
“이게 뭐예요?”
현주는 내심 불안해졌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무슨 뜻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입꼬리를 둥글게 만 매혹적인 그의 미소는 악마의 장난처럼 위험한 것이었다.
지원은 뻔뻔한 목소리로 정답을 알려 주었다.
“속옷이야.”
현주는 자신도 모르게 쇼핑백을 바닥으로 떨구었다. 지원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말을 이었다.
“열어 보지도 않고, 마음에 안 드는 거야?”
“아, 아니 그게 아니고…… 무슨 속옷을…….”
현주는 좀 전까지만 해도 주도권을 쥐고 있던 자신이 그의 말 한마디에 허망하게 약해져 가는 것이 한스러웠다. 지원은 그런 그녀의 반응이 예상보다 더 즐거웠다.
“속옷 선물이 어때서.”
“그렇긴 하지만.”
“당신 갈아입을 거 없으니까.”
“…….”
“미션도 있어.”
지원은 소파 팔걸이에 걸터앉아 그녀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그의 긴 손가락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귓가를 간지럽혔다.
“오늘 집에 가면 갖고 있는 속옷 다 버려.”
“왜요? 이거 하나만 입으란 거예요?”
지원은 또다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녀의 엉뚱한 생각들이 그를 즐겁게 했다.
“무슨 그런 지저분한 생각을 해. 당신이 보기에 내가 그렇게 변태야?”
“아니, 그게 아니고…….”
“속옷 새로 사라고. 전부 다.”
현주는 그에게 보여 주었던 자신의 속옷들을 떠올렸다. 그것들이 너무 낡았던 것이 문제였는지, 그의 취향과 달랐던 것이 문제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지원은 그런 그녀의 이마를 지그시 눌렀다.
“나랑 얘기할 때 딴생각하지 말랬지.”
“아, 미안해요.”
“미안하다는 말도 너무 자주하지 말고.”
“…….”
현주는 엄마에게 혼나는 어린애마냥 입을 다물어 버렸다. 무슨 말을 해도 그를 당해 낼 수가 없었다.
“겉옷도 중요하지만 속옷도 중요한 거야.”
“나한테 패션 조언하는 거예요?”
“아니, 난 당신 스타일 좋아.”
“그럼요?”
그는 바람 소리를 내며 작게 웃었다. 현주의 툴툴거리는 말투가 귀여워서였다.
“자존감을 높이는 데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알아?”
“믿음?”
“아니.”
“사랑?”
지원은 콧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녀의 순수함이 좋기도 했고 미련함에 어이가 없기도 했다.
“외모. 그게 제일 중요해.”
현주는 순간 지원의 모습이 정말 악마와 같다고 생각했다. 눈이 부신 미모로 어리석은 인간을 유혹하는 악마. 지원은 그렇게 사치와 향락의 장으로 그녀를 인도하는 듯 보였다.
지원은 현주의 잡생각을 읽고 손을 뻗었다. 그녀의 목덜미를 감싼 그는 그녀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평소보다 높은 힐을 신고, 평소보다 화려한 속옷을 입는 것만으로도 자존감에 도움이 돼.”
“에이…….”
“자존감은 별거 없어. 남들이 모르는 나를 자기 스스로 인정하는 게 자존감이야.”
“…….”
“밑져야 본전이잖아. 한번 해 봐.”
현주는 그제야 그가 준 쇼핑백을 열어 보았다. 빨간색의 심플한 디자인이었지만 평소 현주가 즐기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녀가 아연실색한 표정을 짓자 지원은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지었다.
“청순한 것, 섹시한 것, 귀여운 것, 편한 것. 종류별로 사.”
“아, 진짜 그만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