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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거짓말-2 (9/20)

9. 거짓말-2

방 안을 가득 채우는 태양빛이 현주의 속눈썹을 간지럽혔다. 어렴풋이 눈을 뜬 그녀에게 보이는 것은 잔뜩 찡그리고 있는 그의 얼굴이었다. 현주는 조심히 그의 뺨을 감쌌다. 잠에 깊게 든 것인지 따뜻하게 올라 있는 그의 체온이 더 자자고 유혹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묶인 커튼을 풀었다. 방 안을 밝히려 애쓰던 햇살이 거두어지자 그의 미간도 부드럽게 돌아왔다.

― Rrrrr.

하지만 그의 아침잠을 방해하는 것은 햇빛으로 끝나지 않았다.

어디선가 핸드폰 진동 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려 댔다. 그녀의 핸드폰이 아니었다. 그의 핸드폰이 어딘지 모르는 곳에서 끊임없이 울리고 있었다.

소리가 지속되면 지속될수록 지원의 얼굴에 짜증스러움이 가득 찼다. 현주는 재빨리 방 안을 뒤졌다.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이리저리 배회하는 동안 지원의 뒤척임은 조금씩 커져만 갔다. 침대 아래에 박혀 있는 핸드폰을 찾은 그녀는 발신인을 확인했다.

[한재경]

어젯밤 깨우지 말라던 그의 단호한 당부와 피곤에 절어 있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와 핸드폰을 번갈아 보던 그녀는 핸드폰을 쥐고 방 밖으로 빠져나왔다.

“뭐, 깨우지 말라고 했으니까.”

현주는 방문이 제대로 닫힌 걸 확인하고는 거실 창문을 활짝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밤사이에 막혀 있던 공기를 환기했다. 쏟아지는 자연광은 책을 읽어도 좋을 만큼 밝고 따뜻했다.

― Rrrrr.

또다시 진동 소리가 시작됐고 그의 핸드폰에 ‘정 매니저’라는 글자가 떴다.

“아, 어떡하지.”

현주는 매니저의 전화까지 묵인할 수는 없었다. 또 한 번 지원이 안쓰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쉬는 날이 와도 이렇게 잠 한 번 제대로 못 자는 사람일까 싶어 그녀는 마음이 아팠다.

몇 번을 망설인 그녀는 방문을 열고 아직 어두운 안으로 들어갔다. 지원은 규칙적인 숨을 고르며 잠들어 있었다. 맨몸인 그에게 손을 대는 것이 부끄러웠지만 천천히 그의 팔을 흔들었다.

“지원 씨.”

지원은 미간을 찡그릴 뿐 깨어나지 않았다. 절대적으로 수면시간이 부족한 그는 한번 빠진 잠에서 쉽게 헤어 나오지 못했다. 현주는 보다 더 강하게 그를 흔들었다.

“지원 씨!”

그의 숱 많은 속눈썹이 움찔거렸다. 완전히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가 힘겹게 흘러나왔다.

“벌써 저녁이야?”

없던 모성애도 솟아오를 매력적인 목소리였다. 현주는 더 자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을 힘들게 억누르며 조용히 말했다.

“아니요. 아직 아침이에요.”

지원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손목을 쥐었다. 현주는 여전히 울리는 그의 핸드폰을 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매니저님 전화 왔어요. 아까 재경 씨한테도 전화 오고. 보니까 부재중 전화도 몇 번 왔었던 거 같은데……. 받아야 될 것 같아서요.”

“…….”

그는 분명 현주의 모든 말을 들었지만 모른 척하며 다시 잠을 청하려 애썼다. 현주는 그의 머릿결을 쓸며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지원 씨―”

지원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느릿느릿 손을 뻗었다. 현주가 그의 손에 핸드폰을 쥐여 주자 그는 버튼만 꾹 누르고 다시 눈을 감았다.

“왜.”

상대방의 목소리가 들릴 듯 말 듯 이어졌다. 그의 눈이 잠기운을 밀어내며 점점 선명해지고 날카로워졌다. 지원은 거칠어진 목소리를 다듬으며 다시 말했다.

“그게 무슨 개 같은 소리야.”

그는 이불을 밀어내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잘생긴 얼굴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있었다. 현주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살폈다.

“알았어. 일단 갈게.”

그는 전화를 끊고 거친 숨을 뱉어 냈다.

“커튼 좀 쳐 줘.”

“아, 알았어요.”

그는 날카로운 눈을 통해 전에 없던 불쾌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쏟아지는 밝은 빛 때문인지, 알 수 없는 전화 내용 때문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는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고 이내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찬물로 세수를 한 그는 잘 개인 니트를 입고 코트를 걸쳤다. 긴 다리로 빠르게 움직이는 그를 현주가 쫓았다. 그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살폈다. 현주는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무슨 안 좋은 일 있어요?”

“신경 쓰지 마.”

그는 괜찮다는 듯 말했지만 그의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져 있었고 입술은 자꾸만 깨무는 탓에 붉은빛이 돌았다. 현주는 그의 팔을 잡고 다시 물었다.

“왜요, 말해 줘요. 무슨 일이에요?”

지원은 들썩이려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당신이 신경 쓸 일 아니야. 전화할게.”

지원은 그렇게 그녀의 집을 벗어났다.

현주는 절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매사 여유롭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그가 저리 불쾌함을 드러내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혹시나 싶어 노트북을 열어 연예기사를 살폈지만 그에 관한 것은 새로 찍은 화보, 준비 중인 작품, 기부 내용과 같은 긍정적인 것들이 전부였다.

현주는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그의 연락을 기다렸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어느새 오후 세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가 나간 지 꼬박 여섯 시간이 넘은 것이었다.

― Rrrrr.

애타게 기다리던 전화였지만 핸드폰 액정은 그녀에게 실망만을 안겨 주었다. 지원이 아닌 다른 사람의 전화는 필요하지 않았다. 현주는 힘없이 통화버튼을 눌렀다.

“네, 피디님.”

― 현주 씨, 어디야? 지금 방송국으로 와야 할 것 같아.

“무슨 일 있으세요?”

― 지원 씨 고소당했어. 기자들 연락 오고 난리야.

“네? 무슨 말이세요? 아까 오전까지만 해도…….”

현주는 빠르게 노트북을 다시 열었다. 포털 사이트 메인을 장식한 그의 이름이 보였다.

<배우 김지원, 일반인 폭행 혐의로 피소.>

<김지원 폭행사건, 진실은 무엇인가.>

<한류 스타 김지원, 내리막길 걷나.>

현주는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곁에 있던 지원을 떠올렸다. 피디의 다급한 목소리가 이어 들렸다.

― 현주 씨, 현주 씨! 내 말 듣고 있어?

“지금 바로 갈게요.”

현주는 살면서 가장 강하고 굳건한 침착함으로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손끝이 떨리는 이유는 두려움이 아닌 긴장의 증거였다. 지갑과 핸드폰을 가방에 구겨 넣고 밖으로 나온 그녀는 택시를 잡아 방송국으로 향했다. 가는 동안 핸드폰으로 확인한 대중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아직 확실한 것이 없으니 기다리겠다는 반응과 그럴 줄 알았다는 시니컬한 반응까지 다양했다. 도착한 방송국은 이미 북새통을 이루어 잔뜩 뜨거워져 있었다. 유독 많이 보이는 보도국 기자들과 함께 일본과 중국에서 온 외신 기자들도 보였다.

마치 커다란 정치적 이슈가 터진 것처럼 소란스러웠다.

“피디님!”

“아, 현주 씨. 얼른 들어와.”

미팅룸 안 역시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출연 배우들의 매니저들이 소속사의 입장을 전달하고 있었으며 후원하기로 했던 회사들에게서는 끊임없이 확인 전화가 쏟아졌다. 현주는 재빨리 전화선의 코드를 뽑고 피디를 쳐다보았다.

“피디님, 일이 어디까지 확인된 거예요?”

“확인이랄 게 없어. 지원 씨 소속사는 입장이 정리되는 대로 발표하겠다는 말뿐이어서.”

현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어딘가로 바쁘게 전화 중인 매니저들을 살폈다.

“저분들은 왜 오신 거예요?”

“일단은 확인 때문에 온 거지, 뭐. 해프닝이면 상관없지만 사실이면…… 어쩔 수 없으니까.”

피디는 기세등등한 매니저들을 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현주의 미간이 조금 찌푸려졌다.

“어쩔 수 없다니요? 무슨 말씀이세요?”

“유 작가도 알잖아. 그것도 심지어 일반인 폭행인데 여론이 가만히 있겠어? 하차하는 게 맞는 거지. 제작 후원하기로 했던 회사들도 발 빼려고 난리야.”

“하―”

현주는 지원의 말을 실감했다.

‘애써 착한 사람 될 필요 없어.’

‘어차피 이 바닥은 온 천지가 비밀이야.’

드라마 ‘월광’이 캐스팅 난항과 제작비 문제로 엎어지려고 할 무렵 지원의 등장은 구세주와 같은 것이었다. 그 뒤로 작품에 합류하겠다는 배우들이 앞다투어 연락을 해 왔고, 제작비를 지원하겠다는 회사들도 물밀 듯이 나타났다.

하지만 지원에게 문제가 생기고 그로 인해 피해가 생기니 그를 버리는 것 역시 빠르고 신속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현주는 속 깊은 곳에서 역한 기운을 느꼈다. 등 뒤에서 불협화음 같은 하이힐 소리가 이어 들렸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테이크아웃 커피를 손에 들고 고개를 빳빳이 든 민서였다. 그 당돌하고 조급한 성격이 매니저만 보내는 것으로는 참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피디가 나서 민서를 달래는 동안 현주는 짜증스럽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민서 씨, 아직 확인된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피디님, 말씀을 그렇게 하시면 안 되죠. 한 사람 때문에 우리 드라마까지 피해 입게 생겼는데. 후원사 측에서도 난리라면서요.”

그녀는 자신의 첫 드라마가 순항하지 못할 분위기에 겁을 먹은 듯 보였다. 민서의 매니저도 이번만큼은 제 연예인의 편이 되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지원 씨도 곧 입장 발표한다 했으니까 그때까지는 기다려 보자고. 경거망동해 봤자 좋을 거 없어.”

“경거망동이요? 지금 그 한 사람 때문에 다 죽게 생겼는데 가만히 있으라는 거예요? 무슨 그런 무책임한 말씀을 하세요.”

현주는 참을 만큼 참았다고 생각했다.

“민서 씨.”

민서는 여전히 자신을 가르치려 드는 현주의 목소리가 참으로 불쾌했다. 거만한 손짓으로 선글라스를 벗은 그녀는 현주를 똑바로 쳐다보며 대답했다.

“네, 작가님.”

“그렇게 걱정이면 지원 씨 하차시킬까요?”

“네?”

“민서 씨가 원하는 게 그거잖아요. 가만히 있는 건 무책임한 거라면서요.”

일순간 미팅룸 안의 모든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아무리 신인이고 어리다 해도 드라마의 뼈대를 이루는 작가의 입에서 흐르는 말이었다. 모두가 상황의 해결을 바라고는 있었지만 지원의 하차만큼은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현주는 다시 말을 이었다.

“지원 씨를 하차시키면 일본과 중국에서 쏟아졌던 스포트라이트는 사라질 거예요. 그만큼 후원사도 없어지겠죠. 지원 씨 잘못이라고 치고 위약금을 받는다 해도 제작비는 턱없이 모자랄 텐데. 그건 민서 씨가 책임질래요?”

“제, 제가 왜 그걸 책임져요.”

“그러니까요. 그걸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지원 씨밖에 없으니까 다들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무책임해서가 아니라.”

괜한 소동을 만들고 있던 다른 배우들의 매니저들까지 입 다물게 만드는 말이었다. 현실을 직시하라 외치는 이기주의자들에게 가장 잘 먹히는 말은 가장 현실적인 말들이었다.

“그리고 지금 지원 씨가 정말 잘못을 저질렀다고 확인된 것도 없잖아요. 이럴 땐 기다리는 게 맞아요. 지원 씨가 잘못을 했다면 거기에 맞춰 지원 씨와 상의를 해야 하는 거고 잘못이 없다면 같이 분노해 주는 게 우리가 할 일이에요.”

현주가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한배를 탄 거라고요. 폭풍우가 불어닥친다고 조종사 한 명에게 바다로 뛰어들라 하는 건 그냥 다 같이 죽자는 거와 다를 게 없어요.”

현주의 진짜 속마음이었다. 이미 그와 그녀는, 그리고 그와 그녀의 드라마는 한배를 탔다. 그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는 것이 아니라면 그와 운명을 함께하는 것이 맞았다. 차마 대응할 말을 찾지 못한 민서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선배님을 굉장히 믿으시나 봐요. 그렇게까지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 걸 보면.”

줄곧 지원을 그 사람, 한 사람이라고 부르던 민서가 선배님으로 지칭을 바꾸어 물었다. 큰 키의 민서가 현주를 내리누르듯 쳐다보았다. 민서 역시 지원과 함께하는 드라마가 얼마나 이익이 보장된 것인지 알고 있었다.

한류 스타인 만큼 아시아 전역에서의 관심은 물론이고 시청률 역시 부끄럽지 않을 것이었다. 그런 배우와 함께할 기회를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 마음은 온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현주는 그런 민서의 투기 어린 시선을 모르지 않았다.

“믿는 게 아니라 지키는 거예요.”

“…….”

“민서 씨가 지원 씨의 입장이 되었어도, 지원 씨가 민서 씨를 하차시키라 했어도 똑같이 말했을 거예요.”

* * *

한참을 떠들던 매니저들과 후원사 측의 직원들은 자기들끼리는 어떤 결론도 낼 수 없음을 인정하고 물러났다. 미팅룸에는 피디와 현주만이 남아 무거운 한숨을 나누고 있었다.

“유 작가.”

“네.”

“만약 지원 씨가 진짜로 일반인을 폭행한 거면 어떻게 되는 거지?”

“…….”

“잘못이 아니면 여론이야 금방 회복되겠지만 진짜면 말이야…….”

피디는 젊은 작가의 첫 작품이 나쁜 일로 얼룩지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하지만 그의 걱정과 달리 현주는 어느 때보다 의연하고 이성적이었다.

“진짜라면…… 함께할 수 없겠죠. 지원 씨랑.”

“그렇지.”

함께할 수 없다는 현주의 말에 현주 본인도 피디도 씁쓸함을 느껴야 했다. 그녀가 민서에게 외친 동료를 지키고, 보호하는 일은 사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특히나 그 모든 일이 대중에게 공개되어 있다면 더더욱 불가능했다.

“피디님, 지원 씨 측에서는 아직 연락 없어요?”

“응, 뭐…… 최대한 빨리 입장 정리하겠다는 말 외에는 없어.”

“진짜다, 아니다 그런 말도 없고요?”

“그런 말할 틈도 없었어. 거기도 쏟아지는 전화 때문에 바쁜 모양이더라고.”

현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그녀와 피디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현주는 대본이 든 가방을 손에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팅룸을 나오며 확인한 핸드폰엔 부재중 전화와 문자가 쌓여 있었다. 모르는 번호가 대부분이었고 친한 친구들의 걱정스러운 문자와 연석의 문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누나, 매니저 형한테 얘기 들었어요. 너무 걱정 마세요.]

고맙다는 답장도 사치스러웠다. 현주는 핸드폰 화면을 아래로 내리며 지원의 이름을 찾았다. 그에게서 온 연락은 없었다. 그러다 문득 재경의 이름이 보여서 망설임 없이 통화버튼을 눌렀다. 짧은 신호음 끝에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 네, 작가님.

“재경 씨, 지금 통화 좀 가능할까요?”

― 아, 지원이 때문에 작가님도 많이 곤란하시죠.

지원과 늘 붙어 다니는 재경 역시 수많은 전화에 시달린 모양이었다. 기계적으로 나오는 지원의 얘기에 현주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뭐 저희 쪽은 그리 심하지 않아요. 지원 씨랑은 연락해 봤어요?”

― 아침에 잠깐이요. 그 이후로는 연락이 안 되네요.

“지원 씨는 괜찮은 것 같아요?”

― 그 새끼 성질에 괜찮겠어요? 애꿎은 매니저만 불쌍할 뿐이죠.

현주는 문득 지원의 살벌한 눈과 풀 죽은 매니저가 상상이 되어 쓴웃음이 나왔다.

“재경 씨, 미안한데…… 알고 있는 거 있으면 나한테도 얘기해 줄래요? 뭐라도 알고 있어야 대책을 세울 것 같아서요. 지원 씨가 잘못한 거면 왜 그랬는지 이유라도…….”

― 지원이는 잘못한 거 없어요.

재경은 자신이 오해받는 것처럼 억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어제 새벽에 늦게까지 스케줄 하고 차에 타려는데 웬 남자가 팬이라고 사인을 요청하더래요.

“사인이요?”

― 네. 피곤하니까 얼른 해 주고 가려는데 하이파이브도 해 달라고 하더래요. 해 봐야 십 초도 안 걸리는 거고, 요즘엔 하이파이브만 하는 팬미팅도 따로 있을 정도니까 의심 없이 했는데 일이 꼬인 거죠. 상황이 이렇게 변할 줄은 지원이도 몰랐을 거예요.

현주는 모든 상황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연예계에 조금이라도 몸담은 사람이라면 모를 리 없었다. 연예인들의 공적인 성질을 약점 삼아 사기 치는 족속들의 수는 생각보다 꽤 많았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대충 알겠어요. 고마워요. 다음에 다시 연락할게요.”

현주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의 잘못이 조금도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의 소속사에서 입장을 표명하고 지원의 결백이 밝혀지면 이 일은 그저 황당한 해프닝으로 끝날 것이다. 그녀는 그를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전화기는 꺼져 있었고 그녀가 향할 곳은 정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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