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 거짓말-1 (8/20)

8. 거짓말-1

두 사람의 열기가 더해 갈수록 애써 준비한 식사는 차갑게 식었다. 그는 혼을 뺏어 갈 만큼 능숙하고, 또 치명적이었다. 그의 타오르는 뜨거움에 그녀는 흐물흐물 녹았고 결국엔 완전한 항복을 외치며 침대로 쓰러졌다.

“잘 자.”

지원은 낮은 목소리로 주문을 걸듯 속삭였다. 그는 이불을 끌어 현주의 몸을 감싼 다음 몸을 일으켰다. 그의 등에 조각난 작은 근육들이 흐릿한 빛에 모습을 드러냈다. 현주는 아직 온기가 가득한 그가 멀어지는 것이 아쉬웠다.

“어디 가요?”

“…….”

그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의 커다란 손이 머리를 쓸어 줄 때면 그녀는 까마득한 잠의 세계로 빨려 드는 기분이 들었다. 현주는 잠을 떨치듯 그의 손을 잡았다.

“어디 가요.”

지원은 그녀의 젖은 입술에 말을 잇지 못했다. 나갈 일이 있다고 하면 그뿐인 것을 왜 이리 망설이는지 자신조차도 알 수 없었다. 스케줄까지 아직 조금의 시간이 더 있었지만 그는 서둘러 몸을 일으켜야만 했다. 조금만 더 시간을 지체하다가는 그녀를 안고 함께 잠들고 싶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방 안의 따뜻함이, 그녀의 비누향기가 자신을 매혹시켰다고 생각했다.

“일하러.”

“…….”

“전화할게.”

지원은 최대한 덤덤히 말했고 현주는 잠에 빠져들었다. 그 어느 때보다 뜨겁고 훈훈하던 집 안은 그가 나감으로써 다시 한 번 차가워지고 외로워졌다. 그녀는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그가 전한 성적인 쾌락과 전율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가 없는 공허함 때문이기도 했다. 침대를 벗어날 수 없었고 이불을 걷어낼 수 없었다.

무심히 달이 찾아왔고 또 무심하게도 해가 떴다. 그의 집에서 맞았던 따가운 태양만큼 환한 아침,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 자고 있었어?

눈도 뜨지 못한 현주에 비해 그의 목소리는 활기가 넘쳤다.

“이제 일어날 거예요.”

― 오늘 뭐 해.

그의 간결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유혹하듯 물었다.

“피디님이랑 회의하기로 했어요.”

새로 잡힌 리딩은 내일이었고, 오늘 해야 할 일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사실대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

― 그다음은?

“친구 만나서 저녁 먹어요.”

― 친구, 누구?

“그냥 친구요.”

― 아, 잠시만. 다시 걸게.

그의 주변은 이른 아침부터 소란스러운 듯 보였다. 시끌시끌한 사람들의 목소리, 투박한 물건들이 지나는 소리들이 겹쳐 그의 바쁨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전화를 끊었고 다시 전화하지 않았다. 그녀의 핸드폰은 그녀와 마찬가지로 심심해 보였다.

현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저번 달에 선물 받은 입욕제를 욕조에 넣고 뜨거운 물을 받았다. 연한 연둣빛의 입욕제가 거품을 만들며 향기를 뿜어냈다.

‘서운해하지 마.’

그의 손길이 닿았던 온몸을 구석구석 깨끗이 씻어 냈다.

‘그 사람은 날 가르쳐 주기로 한 거야.’

그럼에도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영상은 그가 자신을 갖지 못해 안달이었던 지난밤의 모습이었다. 다신 없을 열망처럼 자신을 옭아매고, 다신 없을 사랑처럼 열렬했던 그의 모습이 연달아 떠올랐다. 현주는 강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린 연인이 아니야.’

목욕을 마친 그녀는 온몸에 밴 향기에 기분이 좋아졌다. 지원에게 말한 대로 방송국 나들이나 갈 참이었다. 피디님이야 항상 그곳에 계셨고 안 계신다 해도 회의실에서 글을 쓰면 되니 상관없었다.

우울한 기분을 떨쳐 내기 위해 그녀가 선택한 방법은 한껏 치장하는 것이었다. 부드러운 하얀색 블라우스와 와인색의 하이웨이스트 치마를 걸쳐 잘록한 허리와 골반을 자랑했고 긴 머리를 풀어 우아함을 뽐냈다. 너무 크지 않은 눈에 작은 코, 갸름한 턱 선의 현주는 여성스러움의 극치를 자아내며 거울 앞에 섰다. 지금 당장 어떤 남자가 추근거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다루기 어려울수록 섹시한 거야.’

그녀는 지금 당장이라도 속삭일 것만 같은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대놓고 어려워져 봐?”

현주는 단순한 오기가 치솟았다. 모든 관계에서 우위를 독점하는 그에 대한 반항심이 원인이었다.

날씨도 그녀를 돕는 듯 너무 춥지 않고 선선했다. 방송국까지 가는 동안 늘 같은 거리, 같은 풍경이었지만 버스 안의 사람들조차 오래 만나 온 친구처럼 반갑게 느껴졌다.

현주는 앞으로도 계속 ‘신경 쓴 차림’으로 다녀 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얇은 블라우스, 짧은 치마가 불편하기는 했지만 그녀의 기분이나 마음, 주변의 시선은 편한 옷차림보다 더욱 좋은 쪽이었다. 방송국의 대리석 바닥과 부딪혀 또각또각 소리를 내는 하이힐 소리가 리드미컬했다.

“어, 작가님!”

뒤에서 맑고 청량한 목소리의 남자가 그녀를 불렀다.

“어, 연석 씨구나. 안녕하세요.”

드라마 ‘월광’의 서브 남자 주인공을 맡은 연석이었다. 그는 회의실에서 딱 한 번 마주했을 뿐인 현주에게 무척이나 반갑다는 듯 생글생글 웃어 보였다.

“방금 작가님 생각하고 있었는데 딱 만났네요.”

그는 일찍이 아이돌 그룹의 리더로 사회생활을 해서 그런지 능숙하게 친절을 베풀고, 자로 잰 듯 일정한 미소를 짓는 연예인이었다. 그런 그의 속 빈 칭찬과 미소에도 기분이 좋은 건 그가 참으로 사랑스럽게 생겼다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연석은 여성스러운 얼굴에 휘어지는 눈웃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지원의 차가움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따뜻함 때문에 절로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제 생각했어요?”

“네. 어제 하루 종일 대본 읽었거든요.”

“우와, 열심이네요. 저도 긴장해야겠어요.”

“연기 경험은 별로 없으니까 욕 안 먹으려면 열심히 해야죠.”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현주는 그 말이 계산된 사회생활의 방편이라 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직접 대본을 쓴 사람으로서 하루 종일 대본을 읽었다는 연석의 말은 고마움을 넘어서 감동스럽기까지 했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바라보는 그의 눈길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부드럽게 맞닿아 있었다. 뒤늦게 현주의 색다른 옷차림을 발견한 연석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오늘 어디 가세요?”

“뭐…… 딱히 계획은 없는데. 왜요?”

“예뻐서요.”

그는 과장된 손짓과 눈짓으로 기분 좋은 칭찬을 쏟아 냈다. 현주는 수줍은 듯 눈을 내리깔며 작게 미소 지었다. 대한민국의 소녀 팬들이 열광하는 연석이 예쁘다는 말을 했으니 그것이 빈말이래도 꾸미는 데 들인 시간과 정성이 아깝지 않았다.

“어색하진 않고요?”

“전혀요. 진짜 예뻐요.”

연석은 진짜라는 걸 증명하려는 듯 두 눈에 진실함을 가득 담아 쳐다보았다. 현주는 마음이 따뜻하게 데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고마움에 미소를 지은 그녀가 말했다.

“고마워요. 오늘 기분 좀 별로였는데 연석 씨 만나고 다 풀렸네요.”

“안 좋은 일 있었어요?”

“아니 뭐 그냥요. 아, 근데 매니저는 어디 두고 혼자 다녀요?”

“화장실 갔어요. 장염이라도 걸린 건지 자꾸 가네요.”

연석은 어색하게 화장실을 가리켰고 현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연예인이 연석의 반만 닮았어도 그 숱한 싸움과 비방은 막을 내렸을 것이라 생각했다.

“저 그럼 먼저 가 볼게요. 내일 만나요. 연석 씨.”

안 그래도 높은 하이힐에 다리가 아파진 그녀는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연석은 눈치가 없는 것인지 그러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저, 작가님!”

“네?”

“시간 비시는 김에 저 좀 도와주실래요?”

말하는 연석의 얼굴은 어색한 듯, 또 애처롭게 보였다.

“어떤 걸 도와주면 되는데요?”

보통 ‘시간 비는 김에’로 시작하는 문장은 밥을 먹자, 영화 보자와 같은 것들과 어울리지만 그는 영 지루해 보이는 제안을 했다.

“대본이요. 사실 시대극은 처음이라 무섭거든요. 워낙에 기대작이잖아요. 기사도 많이 나고. 뭐, 지원 선배님 덕분이지만.”

“음……. 그렇죠.”

“제 소속사엔 가수들뿐이라서 절 도와줄 사람이 별로 없어요. 매니저도 오늘 컨디션이 영 아닌지 집중을 못 하고요. 대사 연습하는 거 조금만 봐주세요. 괜찮죠?”

연석은 안달이 난 아이처럼 촉촉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현주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제 작품에 저렇게 열심인 사람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기쁜 일이었다. 그게 외부의 관심과 대 선배들 사이에서의 부담감 때문일지라도, 제 배우가 작품에 심혈을 기울인다면 작가로서 당연히 도와야 할 일이었다.

“잠깐 기다릴 수 있어요? 이왕 방송국까지 온 거 피디님이랑 내일 미팅 얘기 좀 하려고요.”

“6층 대기실에서 기다릴게요.”

연석은 밝게 웃으며 꾸벅 인사했고 현주는 피디를 만나 대본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지원을 필두로 한 호화 캐스팅으로 인해 방송국에서도 주목하는 작품이 되었고, 피디와 현주는 물론 모든 제작진들이 긴장하고 있는 상태였다.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캐릭터의 비중을 조정하는 회의가 진행됐다.

“기다리는 전화 있어?”

“아, 아뇨. 죄송해요.”

그녀는 회의 내내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있었다. 혹시나 지원의 전화가 오지는 않을까, 하는 무의식의 엉큼한 속내 때문이었다. 피디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내일 괜찮겠어?”

“내일이요? 왜요?”

내일 리딩이 잡혔으니 민서와의 갈등을 걱정하는 것이었다. 현주 역시 걱정하는 바였지만 고민한다고 해결되는 일은 아니었다.

“이미 계약까지 다 됐는데 안 한다고 도망가지는 않겠죠.”

“그러니까 문제야. 계약까지 다 했으니 무슨 망나니 같은 짓을 할 줄 알고.”

“제가 잘 할게요. 너무 걱정 마세요.”

“너무 숙이고 그러지 마. 본인이 신인이니까 세 보이려고 더 발악하는 거야.”

사실 지원만 있다면 문제 될 일은 없었다. 아무리 성격이 거지 같고 다혈질이어도 지원에 비하면 모두들 귀여운 수준이기 때문이었다. 이미 지원에게 한 번 당한 경험이 있으니 또 한 번 어리석은 짓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걱정 마세요.”

현주는 미팅룸을 나오며 손목시계를 살폈다. 연석과 헤어진 지 벌써 한 시간이 훌쩍 지난 시간이었다. 급하게 핸드폰을 들었지만 그의 번호를 모른다는 사실에 좌절했다.

엘리베이터는 느렸고 6층에 도착해서도 갈 길은 막막했다. 이 커다란 6층 안에 대기실이라 불리는 공간은 단 하나가 아님을 깨달았던 것이다.

“으아, 어쩌지.”

일일이 열어 보는 수밖에 없었다.

대기실 안에는 음악방송을 준비하는 가수, 예능 녹화 중 쉬러 나온 출연자들, 촬영대기 중인 여타 배우들이 있었다. 쉬고 있는 모습을 들킨 연예인들의 반응은 무관심이 대부분이었지만 드물게 기분 나쁜 티를 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약 12개의 대기실 문을 열고 난 후 하이힐의 고통이 느껴지는 찰나 13번째 문 안에서 반가운 사람이 보였다.

“어, 작가님이다!”

“연석 씨, 미안해요! 많이 기다렸죠. 미팅룸에 마침 촬영팀도 있어서 얘기가 길어졌어요.”

“괜찮아요. 대본 읽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는데요. 뭐.”

그는 너덜너덜해진 대본을 한 장, 한 장 넘기고 있었다. 노력파라는 기사를 꽤 읽기는 했지만 연예 기사라는 것이 늘 그렇듯 이미지 메이킹이라고만 생각했던 현주는 스스로의 편견에 실망했다. 눈앞에 있는 연석은 진실로 노력하는 인기 아이돌이자 신인배우였다.

둘은 꽤 합이 잘 맞는 연습 파트너였다. 연석은 한 여자만을 사랑하는 순정파 고등학생 역을 맡았는데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사랑을 고백하는 모습이 그의 고민과 노력의 시간을 여실히 드러냈다.

“누나가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든 상관없어요. 그러니 내가 누나를 사랑하는 것도 상관하지 말아요. 누나에게 바라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저 울지만 말아요.”

세상의 더러움이라고는 티끌만큼도 모를 것 같은 얼굴로 대사를 읊는 연석의 모습은 안아 주고 싶을 만큼 모성애를 자극했다. 현주는 만족을 넘어 찬사를 올리고 싶었다.

“우와, 연습 진짜 많이 했네요? 짧은 시간에 감정 만들기 힘들었을 텐데.”

연석은 현주의 칭찬에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진짜 괜찮아요? 발연기 같지 않아요?”

“발연기는 무슨. 딕션이야 아직 익숙하지 않아 좀 어색하지만 이건 금방 좋아질 거예요. 중견 배우들도 발음 연습은 끊임없이 하는 거 알죠?”

“아, 다행이다. 얼마나 걱정했다고요.”

연석은 두 다리를 쭉 뻗으며 기쁨의 미소를 지었다. 호기심 많은 그에게 현주는 만물의 진리가 적혀 있는 백과사전과 다를 바 없었다. 그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너덜너덜한 대본을 휙휙 넘기며 어려웠던 장면의 감정이나 캐릭터의 당위성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퍼부었다.

한참을 그러던 연석은 일순간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 배고프다.”

현주는 그 말에 누구보다 동의했다. 일어나서 지금까지 어떤 음식도 입안에 가져가지 못한 탓이었다.

“우리 뭐 좀 시켜 먹을까요?”

“저는 아무거나 잘 먹으니까 누나가 먹고 싶은 거 시켜요.”

현주는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방송국도 사람 사는 동네라고 하지만 군대보다 더한 선후배 질서가 존재하는 곳 역시 방송국이었다. 그런데 그런 곳에서 누나라니. 현주는 연석의 붙임성이 어쩌면 꾸며 낸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현주의 생각을 알 리 없는 연석은 묵묵부답인 현주를 쳐다보며 안절부절못했다.

“아, 죄, 죄송해요. 연습 때문에 자꾸 누나라고 불렀더니…….”

현주는 귀까지 빨개져 헛기침을 뱉는 연석을 향해 상냥히 웃어 보였다.

“뭐가 죄송해요. 누나라고 불러도 돼요. 연석 씨처럼 잘나가는 동생은 나도 좋아요.”

“정말이죠? 난 또 누나 화난 줄 알고 놀랐잖아요. 이제 누나도 말 편하게 해요.”

현장에서 마음 맞는 사람 하나쯤은 있어도 될 법했다. 지원도 있긴 했지만 그와 마음까지 맞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현주는 괜한 든든함에 기분이 뿌듯해졌다.

“그럴까요, 그럼?”

연석은 기대감에 부푼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현주는 그를 보며 어렸을 적 키웠던 순한 강아지를 떠올렸다.

“그래. 그러지 뭐.”

현주와 연석은 먹고 싶은 것들을 잔뜩 주문하기 시작했다. 짜장면과 짬뽕에 탕수육까지 시킨 그들은 재잘거리는 수다 삼매경에 빠졌다. 아이돌 그룹의 리더가 겪는 심심한 고뇌와 괴로움과 신인 작가가 겪는 불안함과 고민이 꽤나 잘 맞았다.

특히나 대본에 대한 얘기는 끝이 날 줄을 몰랐다. 연석이 맡은 역할에 대한 이야기는 물론 극의 전체적인 흐름과 분위기에 대한 아이디어도 쓸 만한 것들이 많았다.

연석이 쉬어 가는 목을 쥐며 핸드폰 액정을 살폈다. 시간이 제법 흐른 모양인지 그의 표정에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누나랑 얘기하다 보니 시간이 이렇게 됐네.”

“몇 신데?”

무심코 코트 주머니 속에 있는 핸드폰을 꺼낸 현주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시간은 무려 다섯 시간이나 흐른 저녁 여덟 시였고 지원의 부재중 통화가 남겨져 있었다.

“여, 연석아. 너 다음 스케줄 없어?”

“저 열 시에 라디오 게스트로 나가는 거 말고는 없어요. 이제 두 시간만 대기하면 돼요. 왜요?”

“아, 아냐. 나는 이제 가 봐야겠다. 내일 리딩 준비도 좀 해야 하고.”

지원의 부재중 전화는 고작 세 통뿐이었다. 남겨진 문자도 고작 한 통, [확인하면 전화해.]가 전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주는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식은땀을 흘렸다.

‘전화할 거야. 일부러 안 받고 그런 거 하지 마.’

라고 말했던 그의 조건이 생각난 탓일까, 아님 알 수 없는 죄의식이 문제일까. 현주는 도통 답을 알 수 없었다.

‘아냐, 내가 왜?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일하다 보면 전화 못 받을 수도 있지.’

‘근데 나 지금 일한 거 아닌데.’

‘잘생긴 남자랑 놀고먹었는데.’

‘아니지. 대본 연습도 일은 일이지.’

과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스스로를 위로한 현주는 연석과 지쳐 잠든 매니저를 향해 인사를 건네고 대기실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이곳은 방송국이었고 언제든 지원을 만나도 이상한 곳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전혀 만나고 싶지 않은 그가 저 멀리 복도 끝에서 전화를 하며 걸어오고 있었다. 주머니 속 핸드폰이 울렸다. 마음과 달리 통화버튼은 눌러야 했고 흘러나오는 목소리에서는 감정이라곤 조금도 읽을 수 없었다.

― 친구 만나? 방송국에서?

“…….”

대답을 하지 않는 그녀를 지원은 굳이 보채지 않았다. 그저 걸음을 옮겼고 그는 순식간에 그녀 앞까지 가까워졌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조금씩 선명해지는 그의 모습은 흠잡을 곳 없이 완벽했고, 그랬기에 소름 끼쳤다. 그는 핸드폰의 종료 버튼을 누르며 말을 건넸다.

“지금까지 회의한 거야?”

부드러운 목소리로 걱정스러운 질문을 던지는 그의 눈빛은 아무런 감정도 없이 건조했다. 아마 피디와의 회의가 길어졌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 네…….”

고개를 끄덕이려는 순간 등지고 있던 철문이 열리며 연석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나!”

지루해 보이던 지원은 순식간에 날을 세우며 미간을 좁혔다. 천진한 목소리의 연석이 지원을 발견하고는 허리를 숙였다.

“어, 선배님! 안녕하세요.”

지원은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려 길게 뻗은 눈을 날카롭게 좁혔다. 연석의 붙임성 좋은 인사에도 그는 움직이지 않았고 분위기는 냉랭하기만 했다. 연석이 어색하게 웃으며 들고 있던 가방을 건넸다.

“누나, 가방 놓고 갔어요.”

하얀색 가죽 가방은 언제나처럼 예뻤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현주의 모든 신경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연석은 현주의 손에 가방을 들려 주며 싱긋 웃었다. 연석의 매니저는 타이밍 좋게도 그를 불렀고 연석은 자연스럽게 이 모든 상황에서 빠질 수 있었다. 복도에는 다시 지원과 현주만이 남았다.

“저, 저기…… 그러니까.”

현주는 자신의 치기 어린 속마음이 들킨 것 같아 숨고 싶을 만큼 창피했다. 그러나 지원은 그녀의 부끄러움과 어색함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여전히 그의 얼굴엔 감정이 비치지 않았고 눈에는 호기심인지, 분노인지 알 수 없는 반짝임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누나?”

“네?”

“쟤가 너보다 어려?”

“아, 네. 저보다 두 살 어리다고…….”

“아―”

그게 전부였다. 그는 그 이상 묻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눈을 바라볼 뿐이었다. 현주는 설명할 기회를 얻고 싶었으나 지원은 주지 않았다. 그는 입가에 미소를 띠운 채 말했다.

“내일 봐.”

영락없는 그의 승리였다. 당장이라도 매달리고 싶은 넓은 등을 보이며 복도 끝으로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은 매혹적이었다. 현주에게서 점점 멀어지던 그는 무언가를 빠트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뒤돌아 그녀에게로 향했다. 거칠 것 없는 그의 걸음에 현주는 뒷걸음질 쳤지만 이번에도 그가 더 빨랐다.

“왜…….”

현주의 마른 입에서 이유를 묻는 질문이 흘러나왔다. 그는 현주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세상에 없을 다정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당신, 예쁘네.”

그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걸음을 옮겼다. 점차 흐릿해졌고 결국엔 사라졌다.

그의 눈길에 긴장한 그녀의 근육과 그를 붙잡고자 하는 아련한 눈빛 같은 것은 그의 어떤 관심도 끌지 못했다. 그녀 역시 그가 화날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음을 알았지만 어쩐지 불안하기만 한 죄책감이 자꾸만 피어났다.

핸드폰을 들고 통화버튼을 누르며 그가 사라진 복도를 따라 걸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신호음 끝에 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어.

“저기…… 혹시 화났어요?”

― 왜?

“어, 그러니까…….”

― 돌리지 말고 제대로 말해.

‘솔직하게 말해.’

현주는 그에게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녀의 입술이 두어 번 잘근거려진 후 하고 싶었던 말들이 흘러나왔다.

“피디님이랑 회의하고 연석 씨 만난 거예요. 거짓말한 거…… 아니에요.”

― …….

“연석 씨가 대본 연습 좀 도와 달라고 해서…… 작가로서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는 거잖아요. 연석 씨도 라디오 스케줄 때문에 밤까지 대기해야 한다고 하고…….”

현주는 자신이 생각해도 이상한 변명들을 늘어놓고 있었다.

“제가 왜 이런 것들을 설명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는데요……. 어쨌든.”

― 화 안 났어.

그 짧은 한마디에 현주는 숨통이 트이는 기적과 기쁨을 경험했다.

“안 났어요?”

― 화날 일이 뭐라고. 전화야 못 받을 수도 있지.

“다행이다. 난 또 오해하는 줄 알고…….”

―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 오해를 해. 나 다음 스케줄 때문에 잠깐 눈 좀 붙여야 해. 내일 봐.

“아…….”

현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는 끝이 났다. 그의 목소리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언제나처럼 평온했고 언제나처럼 무덤덤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의 전화가 아팠다.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 오해를 해.’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

현주는 스스로도 그와 자신의 관계에 선을 그었지만 이렇듯 적나라하게 현실을 직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지원의 매니저는 등허리를 곧게 펴고 긴장 상태에 돌입했다. 차에 올라탄 지원의 상태가 영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방송국에서 무슨 일 있었어? 누구 찾는다더니.”

“시끄러우니까 출발이나 해.”

지원의 매니저는 극한 직업이라 불릴 만큼 스트레스 지수가 높은 직업이었다. 지원의 살인적인 스케줄에 동행해야 함은 물론이고 지랄맞은 그의 성격을 하나하나 맞춰 줘야 하기 때문이었다.

“핸드폰 하나 개통해 줘. 번호는 그대로.”

지원은 이어폰을 귀에 걸며 무심히 말했다.

“지금 쓰는 건 어쩌고. 고장 났어?”

“어.”

“이번에 바꾼 지 얼마 안 됐잖아. 수리될 거야. 줘 봐.”

매니저는 손을 뻗었고 지원은 그의 손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그의 낮고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찾아봐.”

“응?”

“방송국 어딘가에 있겠지. 고칠 수 있으면 고쳐 보든가.”

“아…….”

매니저는 얌전히 입을 다물고 운전을 시작했다. 아무래도 말을 더 잇다가는 괜한 불똥이 자신에게 튈 것 같았다.

* * *

현주는 푸석해진 얼굴을 살피며 화장대 앞에 앉았다. 어젯밤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생각할수록 그에 대한 생각이 엉켜 시작과 끝이 모호해졌다. 그에 대한 매력을 느끼느냐 묻는다면 그건 아주 쉬운 질문이었다.

그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배우였고, 가장 섹시한 남자였다. 큰 키에 잘 만들어진 몸을 갖고 있었고, 수려한 눈썹에 신비로운 눈매를 가진 남자였다. 성격은 불편할 정도로 직설적이었지만 강약을 조절할 만큼 스스로를 통제할 줄 알았고 당근과 채찍을 제대로 다룰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를 마다할 여자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녀 자신만큼은 그의 매력을 거부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끼느냐고 묻는다면 그만큼 어려운 질문은 없었다.

그와 그녀는 입을 맞추고 끌어안으며 섹스를 했지만 서로를 연인으로 대하지는 않았다. 그는 당연했고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한데 왜 그의 무심함과 차가움에 이리 오한이 들 만큼 몸을 떠는 것인지 도통 알 길이 없었다.

방송국에 가기 위해 옷을 고르는 것 역시 쉽지 않았다. 도저히 화려한 의상에 손이 가지 않았다. 그녀의 잘 차려입은 모습을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짓던 그의 모습이 이상하게도 차갑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결국 현주는 치마 대신 연한 스키니 진을 선택했다. 하이힐 대신 플랫 슈즈로 타협을 보고 사 두기만 했던 향수를 뿌리는 것으로 만족했다. 너무 꾸미고 가도 우습기만 할 거라는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미팅룸에는 피디님과 연석, 그리고 민서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다들 일찍 오셨네요.”

“누나, 왔어요?”

연석은 여전히 생글생글한 웃음과 함께 인사를 건넸다. 도도한 표정의 민서는 다리를 꼰 채 고개를 까닥이는 걸로 인사를 대신했다.

리딩 시작 5분 전, 미팅룸의 문이 열리고 지원이 나타났다. 데님셔츠를 걸치고 가볍게 인사를 나눈 후 자리에 앉은 그의 모습은 첫 만남의 그날처럼 나른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그가 갈색의 커다란 선글라스를 벗으며 말했다.

“대본 수정 사항 있다고 들었는데.”

그는 시선을 피디에게 고정하고 물었다. 현주는 그와 작은 눈인사도 나누지 못함에, 그리고 여전한 그의 무심함에 손이 바빠지고 눈가엔 짜증이 서렸다.

“아, 별건 아니고 연석 씨 캐릭터랑 지원 씨 만나는 장면을 좀 늘렸어. 그래야 삼각관계도 덜 어색할 것 같아서.”

그는 별것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연석 역시 대본을 살피며 추가된 에피소드에 관심을 보였다.

“다들 바쁘니까 바로 시작하지.”

지원이 먼저 대사를 읊기 시작했다. 그가 맡은 역할은 분명 어려운 것이었다. 가족과 떨어져 오로지 돈과 권력에 눈이 먼 야망 가득한 남자를 표현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매사 여유롭고 자신감이 넘치던 지원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입을 떼는 순간부터 극 중 인물인 ‘지석’에게 완전히 몰입했다. 그에게도 그토록 처절한 음성과 그림자가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문장은 움직이는 채찍처럼 그의 입에서 흩날렸고 잘생긴 그의 얼굴에서는 태양빛에 일그러진 것처럼 고통이 묻어났다.

현주는 그의 겉모습만 보고 역할과 어울리지 않을 거라 판단한 자신의 좁은 판단력을 힐책했다. 이어 민서의 차례가 왔다. 지원과의 호흡이 매우 중요한 장면이었다.

“당신이 그런 일까지 하다니 믿을 수 없어요.”

“걸리적거릴 거면 가 버려. 당신이 신경 쓸 일 아니야.”

“내가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우리 함께하기로 했잖아요. 우리 사랑하는 사이 아니였어요?”

민서의 연기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자칫 잘못 다루면 신파가 되기 십상인 대사를 조금의 세련미도 추가하지 못하고 처리하기 일쑤였다. 리딩이 계속될수록 사람들의 표정은 굳어졌다.

과장된 말투에 한결같은 표정까지, 민서의 연기는 어떠한 감정과 상황에도 설득력을 부여하지 못했다. 그런 그녀를 상대로 호연을 펼치는 지원이 대단할 뿐이었다. 가뜩이나 신경이 날카로운 현주의 마음에 불같은 분노가 피어올랐다.

“하…….”

모두들 그녀를 쳐다보았다. 현주의 한숨이 생각보다 큰 소리로 미팅룸 전체를 채웠기 때문이었다. 민서는 황당함과 불쾌함에 얼굴을 찌푸렸고 현주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지원이 물었다.

“작가님.”

“…….”

“유현주 작가님.”

“네?”

“마음에 안 드는 부분 있으면 말하세요. 한숨 쉬지 말고.”

지원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현주는 그제야 자신이 마음속 불편함을 드러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아…….”

평소처럼 손사래를 치려는 찰나 지원은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는 그녀의 전전긍긍하는 손을 눈에 담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곤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현주는 지원의 무심하고도 현실적인 말들을 떠올렸다.

‘솔직하게 말해.’

‘착한 사람일 필요 없어.’

‘미친년처럼 굴어.’

‘그래야 다른 사람도 당신을 존중해.’

그는 입꼬리를 말며 웃고 있었다. 마치 숙제를 확인하는 선생님의 모습과 같았다. 암묵적인 응원이고, 확인이었다. 가뜩이나 지원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운 현주였다. 오늘 같은 날은 미친년이 돼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다. 현주는 천천히 입을 열어 목소리를 뱉었다.

“민서 씨.”

민서는 불쾌하다는 얼굴로 현주를 쳐다보았다. 첫 만남 때처럼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잘해 줘도 그만, 못해 줘도 그만이라면 못해 주는 편이 이득일 것 같았다.

“맡은 역할인 ‘은희’는 어떤 사람인 거 같아요?”

“네?”

“우리 작품이 ‘은희’의 과거까지 알려 주지는 않잖아요.”

현주는 민서의 과잉된 연기가 분석되지 않은 캐릭터에서 시작됐다고 생각했다. 모든 인물은 과거가 있고 상처가 있고 그렇기에 행동에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현주는 그것을 민서에게 알려 주고 싶었다.

“다른 사람은 다 몰라도…… 역할을 맡은 배우는 알아야 하니까 묻는 거예요.”

“…….”

민서는 현주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말문이 막혔고 피디는 물론 연석 역시 그녀의 냉랭한 분위기에 당황스러워했다. 오로지 지원만이 그녀의 말에 착실히 집중하고 있었다.

“캐릭터 분석할 시간이 부족했던 건 이해해요. 근데 오늘 읽을 대본 정도는 분석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니, 작가님.”

민서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창피를 당한다고 생각하는지 곁눈질을 하며 목소리를 낮췄다.

“자기가 맡은 캐릭터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니까 말투가 고정이 안 되는 거예요. 하이톤이었다가 로우톤이었다가, 빠르게 얘기했다가 느리게 얘기했다가. 그러면 시청자는 피곤해요.”

“제가 지금 연기를 제대로 못 하고 있다는 말씀이세요?”

민서는 모멸감에 손을 떨며 말했지만 현주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가뜩이나 기분도 좋지 않은 차에 분풀이하듯 부족한 부분들을 집어냈다.

“지금 우리 작품이 개화기가 시대 배경인 건 알아요? 개화기 때 신식 교육을 받은 여성이 ‘은희’예요. 보수적이고 순종적인 여성상에 지적이고 깨어 있는 현대적인 여성이 결합된 인물이라고요. 근데 줄곧 격양된 목소리로만 연기하니 이게 돼요? 그렇게 연기하면 두 남자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는 장면에 개연성도 안 실리고 작품 전체가 흔들려요. 알아요?”

현주는 막힘없이 속에 있는 화를 풀어냈고, 민서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피디 역시 말리지 않고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지원은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현주에게 향해 있던 고개를 돌렸다.

그 이후로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민서는 자존심이 상한 듯 보였지만 오히려 더 깊게 리딩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싫은 소리하면 세상이 무너질 줄 알았던 현주도 묘한 쾌감과 시원함에 한껏 상기되어 배우들의 리딩을 살폈다.

“다음 리딩이 촬영 전 마지막 리딩이니까 잘 준비해서 합시다. 아, 회식도 있으니까 미리미리 스케줄 비워 두세요!”

리딩이 끝남을 알리자 민서와 지원은 쏜살같이 미팅룸을 빠져나갔다. 현주는 지원을 따라 나가려 했지만 연석의 부름이 그녀를 가로막았다.

“누나.”

“아, 연석아. 오늘 수고했어.”

“내가 뭐 한 게 있나요. 오늘 누나 멋있었어요.”

“응?”

“촬영장은 배우 중심이 아니라 스태프 중심일 때가 편해요. 계속 그렇게 해 줘요. 지금 딱 좋으니까.”

자꾸만 스태프들과 배우들 사이에 균열을 일으키는 민서로 인해 연석도 피해 본 것이 많았다. 이번 리딩도 민서로 인해 두 번의 시간 변경이 있었고, 장면마다 각주를 달아 태클을 거는 통에 수정된 신도 많았다.

그래서 현주와 민서의 기 싸움에서 현주가 이길수록 연석은 기뻤다. 현주는 동생을 바라보듯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까분다. 애들 기 싸움도 아니고. 그냥 할 말만 한 거야.”

“그러니까요. 할 말 제대로 하라고요. 오늘도 그냥 당하기만 할까 봐 노심초사했단 말이에요.”

“알았어, 알았어. 얼른 가 봐. 너 다음 스케줄 있는 거 아니야?”

호들갑을 떠는 연석을 미팅룸 밖으로 밀어내며 현주는 소파에 파묻히듯 누웠다. 텅 빈 미팅룸이 외로움과 안락함을 동시에 선사했다. 주머니 안쪽에서 미세한 진동이 울렸다. 그의 번호, 그의 이름. 지원이었다.

“지원 씨?”

― 상 줘야겠네.

“네?”

― 오늘은 못 할 줄 알았는데. 잘했어.

그는 정말 기분 좋은 목소리였다. 현주는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저기, 지원 씨.”

현주는 그를 불렀지만 지원은 그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것처럼 말을 이었다.

― 솔직한 게 좋아. 그래야 일이 생겨도 수습하기 편해.

“알아요.”

그녀는 선선히 긍정의 대답을 뱉어 냈다. 그의 조언 덕에 속이 후련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핸드폰 너머의 지원이 일순간 숨을 숙이고 천천히 말했다.

― 거짓말하지 마.

“…….”

― 나한테.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현주는 알 수 있었다. 그의 고요하고 진실한 목소리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요.”

그의 짧고도 가벼운 한숨 소리가 이어 들렸다.

― 알아.

“……고마워요.”

― 오늘 늦게 끝날 것 같아. 그래도 기다려. 집으로 갈게.

미팅룸을 빠져나오는 데 일 분, 방송국에서 집까지 오는 데 삼십 분. 현주는 그가 오겠다는 말에 지저분한 집구석을 떠올렸다. 그가 집에 온다는 사실이 낯설지는 않았지만, 오늘은 왠지 기분이 달랐다.

“와서 밥 먹을 건가…….”

이내 얼굴이 붉어졌다. 저번에도 분명 밥을 먹겠다고 하고는 다른 일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걸음에 달려온 집 안은 빨리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처참했다. 침대 위에는 무엇을 입을까 고민했던 흔적이 널려 있었고, 바닥엔 대본과 책들이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었다.

창문을 여니 찬바람이 훅 하고 밀려 들어왔다. 환기하기에 딱 좋은 날씨였다. 아이보리색의 커튼은 리본을 묶어 고정하고, 어지러이 널린 책들을 제자리에 꽂아 두는 동안 현주는 왠지 모르는 설렘에 기분이 좋았다.

“아, 나 뭐 하는 거지.”

어느 순간 자책 섞인 물음이 고개를 들었다. 사실 당연하게 했어야 하는 물음이었다. 지원에게 차가운 소리를 들었을 때도 그에게 특별한 감정을 갖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확실한 답을 내리지 못했다.

현주는 그녀만큼이나 작은 소파에 몸을 맡기고 생각에 잠겼다. 이성적인 마음으로 현실을 직시하여 정확한 답을 내리고자 했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그를 떠올리면 그의 입술과 부드러운 입맞춤, 따뜻하고 뜨거운 그의 품이 연달아 생각났다.

“이제 억지로라도 사람들 좀 만나야지.”

현주는 제 머릿속을 가득 채운 그의 형상이 그를 너무 자주 만나서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2회 분량의 단막극이니 드라마 ‘월광’의 촬영은 금방 끝날 것이다. 리딩도 한 번밖에 남지 않았고 촬영 현장에 작가가 굳이 나설 필요는 없기도 했다. 현주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됐어, 됐어.”

그렇게 생각을 고치고 다짐하기를 어언 다섯 시간. 그는 그의 말대로 늦어지고 있었다. 집 안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 넣던 창문은 걸어 잠갔고, 방 안 가득 뿌려 두었던 향수의 향기는 이내 익숙해져 사라지고 말았다.

“많이 늦네. 전화라도 해 볼까.”

핸드폰을 들었지만 이내 다시 내려놓았다.

이쪽 일이라는 게 제시간에 끝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지원 역시 그의 스케줄이 언제 끝날지 예상하지 못할 것이었다. 너무 늦게 끝나면 오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주는 천천히 옷을 벗고 샤워실의 불을 켰다. 외출복 차림으로 기다리는 것이 이제는 불편해졌다. 따뜻한 물에 피로를 푼 그녀는 집에서만 입는 헐렁한 티셔츠에 짧은 반바지를 입고 나왔다. 시간은 이미 자정을 넘겼고 그에게서 온 연락은 하나도 없었다.

그녀는 보송보송해 보이는 침대로 파고들었다. 이불은 두터웠고 따뜻했으며 그녀는 피곤했다.

― ……rr.

“…….”

― ……rrr.

“…….”

― Rrrrr.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는 그녀를 괴롭히는 것은 그녀의 핸드폰이었다. 현주의 손이 간신히 이불을 빠져나와 핸드폰을 쥐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자?

“누구세요…….”

― 나야.

그의 목소리로 알람을 맞추면 효과적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녀는 자석처럼 튀어 올라 핸드폰 화면을 살폈다. 그가 맞았다.

“이, 이제 끝났어요?”

― 끝난 진 좀 됐어.

“집에 들어가는 거예요?”

― 아니, 당신 집 앞인데.

현주는 핸드폰의 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세 시 삼십오 분. 오늘따라 무거운 이불을 거의 내팽개치다시피 한 그녀는 현관을 향해 달려갔다. 그는 차가운 문 너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요?”

지원은 짙은 남색 니트를 걸친 편한 차림이었지만 사흘은 잠들지 못한 사람처럼 피곤해 보였다. 그가 느릿한 눈길로 그녀의 차림을 살폈다.

“노출하는 데 재미 붙였나 봐?”

“네? 아, 잠옷이에요. 잠옷.”

현주는 민망함에 그의 팔을 잡고 집 안으로 이끌었다. 그의 손끝은 얼음처럼 차갑게 식어 있었다.

“오래 기다렸어요?”

“한 삼십 분? 집 비밀번호 알려 줘. 다음부터는 그냥 들어오게.”

“미안해요. 기다리려고 했는데…….”

그는 고개를 돌려 엄한 표정을 지었다. 현주의 풀 죽은 모습이 귀엽기는 했지만 꼭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미안하다는 말 자주 하지 마.”

“네?”

“지금 새벽 세 시도 넘었잖아. 이때까지 기다리라고는 안 했어.”

“…….”

“당신이 미안할 거 없다고.”

그는 무심히 고개를 돌려 코트를 벗고 욕실로 향했다.

“새 칫솔 있어?”

“아, 꺼내 줄게요.”

현주는 욕실 찬장에 있는 새 칫솔들 중 파란색 하나를 꺼내 건넸다. 지원이 가볍게 세수와 양치를 하는 동안 현주는 집 안의 온도를 높이고 그가 벗어 놓은 코트를 정리했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물기 어린 얼굴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가 물었다.

“내일 스케줄 없어요?”

“저녁 늦게 하나 있어. 아침에 깨우지 마. 그냥 계속 잘 거니까.”

“알았어요. 편한 옷 줄까요?”

“나한테 맞는 게 있어?”

“아…… 없겠네요.”

지원은 어깨를 으쓱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니트를 벗었다. 그의 탄탄한 상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현주의 얼굴이 단숨에 붉어졌다.

“왜 얼굴이 빨개져?”

“네? 뭐가요? 아닌데요?”

“아니긴.”

그는 입꼬리를 말며 웃더니 이내 침대 위로 미끄러지듯 누웠다. 그가 눈을 감고 중얼중얼 말을 이었다.

“오늘은 그냥 자자. 이리 와.”

지원은 제 옆의 자리를 비워 놓고 손바닥으로 탁탁 쳤다. 그녀는 못마땅하다는 듯 입을 삐쭉였다.

“내가 무슨 강아지예요?”

“내가 말했잖아. 강아지는 귀엽기라도 하다고.”

“아, 진짜!”

그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끌어당겼다.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가슴에 얼굴을 묻은 그는 벌써 잠에 취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자.”

현주는 새벽 네 시를 가리키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한없이 피곤해 보이는 그의 머리카락을 조금씩 쓸었다. 주인을 잘못 만나 늘 피곤한 삶을 살 것인데도 불구하고 손가락을 빠져나가는 머릿결의 느낌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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