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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싸움 (6/20)

6. 싸움

“현주 씨, 진짜 다행이지?”

“그러네요.”

캐스팅 난항을 겪던 단막극 ‘월광’은 지원의 합류를 시작으로 모든 캐스팅이 완료되었다. 영화판에서 움직이지 않던 그가 선택했다는 소식만으로도 엄청난 광고효과와 흥행이 보장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여주인공에는 떠오르는 신예 여배우, 강민서가 낙점되었고 남자 조연으로는 요즘 십 대들에게 한창 인기가 많은 아이돌 출신의 이연석이 합류했다.

현주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조심스럽게 대본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미니시리즈의 서브 작가로 일하며 많은 리딩 현장을 봤었지만 온전한 제 작품의 리딩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안녕하세요, 이연석이라고 합니다.”

청량한 소년 같은 분위기의 청년이 미팅룸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매니저로 보이는 남자가 피디와 인사를 나눴고 연석은 현주를 향해 다시 한 번 깊게 고개를 숙였다.

“작가님, 대본 재밌게 읽었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아, 저, 저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런 대접이 익숙지 않은 현주는 자신도 모르게 같이 고개를 숙였다. 연석의 얇은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완만하게 휘어졌다.

“작가님이 미인이셔서 좋네요.”

현주는 요즘 아이돌의 능청스러운 처세술에 감탄을 마지않았다. 꽤 인기 있는 아이돌이라 해서 거만할 줄 알았는데 편견인 모양이었다.

이어 문이 열리고 지원이 들어왔다. 지원과 현주의 눈이 아주 잠시 동안 서로를 담았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둘은 사무적으로 인사를 나눴다.

“안녕하세요, 김지원입니다.”

“아, 지원 씨. 이쪽은 이연석 씨예요. 둘이 인사해요.”

지원과 연석은 서로 정중하게 악수를 나눴다.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미남들을 눈앞에 두고 보니 현주에겐 이만한 호강이 따로 없었다.

“선배님, 정말 팬입니다. 함께 일하게 돼 영광이에요.”

“고마워요.”

연석의 애교 섞인 인사에도 지원은 무심하게 대꾸했다. 일적인 것 외에는 친분을 쌓지 않겠다는 암묵적인 액션이었다.

약속한 시간은 세 시였고, 지금은 세 시 삼십 분이었다. 오늘은 주연만 모이는 자리였으니 셋만 오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여배우가 오지 않아 리딩은 시작할 수 없었다. 대놓고 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지원과 연석의 매니저 덕분에 현주와 피디는 좌불안석이었다.

“아, 죄송합니다아― 차가 밀려서 늦었어요.”

그때 한 남자가 문을 밀고 들어왔다.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는 그의 뒤에 커다란 선글라스를 낀 여자가 따라 들어왔다. 밝은 갈색 머리에 갸름한 턱선, 훤칠한 키까지 시원시원한 그녀는 누가 보아도 화려한 여배우였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강민서라고 합니다.”

그녀는 앞에 앉은 현주와 피디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지원에게 먼저 인사한 후 자리에 앉았다.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인의 행동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건방지고 미련한 처신이었다. 지원은 물론 연석까지도 그 예의 없는 모습에 심기가 불편한 모양이었다. 피디가 재빨리 상황을 수습했다.

“늦었으니까 바로 리딩 시작합시다. 다섯 장씩 끊으면서 리딩하고 의견 나누죠.”

매니저들까지 대본을 들고 첫 장을 넘기는 판에 민서는 팔짱을 끼고 요지부동이었다. 현주는 그녀가 급히 들어온 탓에 준비가 되지 않은 건가 싶어 걱정스러웠다.

“시간을 조금 드릴까요?”

“음…… 작가님이시죠?”

도도함을 흉내 낸 민서의 목소리에는 상대를 얕보는 뉘앙스가 잔뜩 깔려 있었다. 자신이 출연하는 작품의 작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백치미가 지원을 웃게 했다. 그런 지원의 성격을 알 리 없는 민서는 그가 자신을 돕는 것이라 착각하며 어깨에 잔뜩 힘을 주었다.

“시놉시스는 나쁘지 않은데…… 작가님이 워낙에 신인이셔서 좀 불안하네요.”

현주는 민서의 도발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피디는 물론이고 연석도 현주의 눈치를 살폈다. 민서의 매니저는 제 연예인의 성격을 감당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저 제 주변에 선 다른 매니저들에게 연신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지원은 현주의 떨리는 입술과 핏기가 가신 얼굴을 보았다. 그는 그녀가 이런 상황을 견디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신인이랑 하는 건 나도 불안한데.”

지원의 낮고 단단한 목소리가 미팅룸을 메우던 민서의 분위기를 휘어잡았다. 모두들 지원이 언급한 ‘신인’이 현주를 지칭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연석은 망부석이 되었고 피디는 현주를 불쌍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민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새초롬한 표정을 지었다.

곧 지원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빠지고 눈에선 날카로운 분위기가 서렸다. 그의 고개가 민서를 향해 돌았다.

“너 말이야.”

“네?”

“신인, 너.”

“…….”

지원은 민서와 민서의 매니저를 번갈아 쏘아보며 말을 이었다.

“여기선 네가 제일 신인이야. 연기라곤 30초짜리 광고에서 해 본 게 다인 주제에 어디서 대배우인 척 건방을 떨어.”

“아니, 그게 아니고…….”

“이 나라에 여배우가 너 하난 줄 알아?”

현주는 지원을 말리려고 했지만 지원의 기세가 워낙 강해 끼어들 틈이 없었다. 피디도 현주를 향해 가만히 있으라 눈짓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민서가 제 매니저를 향해 구원의 눈길을 보냈지만 그 역시 지원 앞에서 목소리를 높일 군번이 되지 못했다.

“이 작품 하기 싫으면 나가. 너 아니어도 할 사람 많아.”

“제, 제가 언제 하기 싫다고…….”

“그럼 똑바로 해. 괜히 옆에 있는 사람 열 받게 하지 말고.”

“…….”

민서는 거의 울기 직전으로 눈망울이 촉촉해졌다. 잘빠진 광고 하나로 사람들의 추앙을 받던 그녀가 지원의 몇 마디로 처참히 무너진 것이었다. 지원이 피디를 향해 정중히 물었다.

“죄송한데 오늘 리딩 취소하고 다시 시간 잡을 수 있을까요?”

“어, 어?”

“캐릭터 분석할 시간은 필요할 것 같아서요.”

지원의 눈이 민서를 향했다. 민서는 자신이 시놉시스만 읽고 대본에 대한 분석은 조금도 되어 있지 않음을 들킨 것 같아 다급히 대본을 움켜쥐었다. 피디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 그러지 뭐.”

지원이 다시 한 번 민서를 향해 말했다.

“다음에도 지각할 거면 그냥 오지 마.”

그가 미팅룸을 벗어나자 현주는 다급히 일어나 그를 쫓았다. 그는 아직 문 앞에 서 있었다.

“지원 씨!”

좀 전까지만 해도 살벌한 표정이던 그가 장난기 어린 얼굴로 돌아보았다.

“밥 먹으러 가자.”

“네?”

“시간 비었잖아. 배고파.”

현주는 그의 천진한 미소에 마법처럼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등을 돌려 미팅룸으로 들어가 남은 사람들에게 어색하고 짧은 인사를 건넸다. 연석은 다 잘될 거라며 성숙한 위로를 전했고 피디 역시 멋쩍은 웃음과 함께 긍정적인 말들을 쏟아 냈다. 그렁그렁한 눈망울을 감추려 선글라스를 쓴 민서는 현주를 향해 짧은 고갯짓을 끝으로 빠르게 미팅룸을 벗어났다. 어쩐지 이번 단막극은 꽤 힘든 작업이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두꺼운 대본을 가방에 구겨 넣고 문을 나선 그녀는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있어야 할 그가 보이지 않았다.

― Rrrrr.

“여보세요.”

― 주차장으로 내려와.

지원은 자기 할 말만 투박하게 던져 놓고는 전화를 끊었다. 잠시나마 그가 다정한 사람이라 착각한 자신을 멍청이라 자책했다.

어두운 지하주차장에 내려오니 수많은 자동차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기가 막힌 타이밍에 핸드폰이 진동했다.

“어디예요? 나 주차장인데.”

― 앞으로 직진.

“네?”

현주는 그의 그런 목소리를 잘 알았다. 강압적이지만 장난스럽고, 단순하지만 복잡한 생각을 하게 만드는 그의 말투를 어느 날 밤에도 들은 적이 있었다. 현주는 그의 말대로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전화기 너머로 그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 오른쪽으로 돌아.

“…….”

고작 차를 타려는 일에도 그와 함께라면 이런 식의 조심성이 필요했다.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남자라 생각하다가도 이런 순간엔 그가 어마어마한 스타라는 걸 실감했다. 짙은 선팅으로 가려진 차들 사이로 유선형의 세단이 빛났다.

― 타.

그의 전화가 끊기고 현주는 차에 올라탔다. 한눈에 보아도 고급스러운 그의 차와 한 몸으로 태어난 듯 잘 어울리는 그가 고개를 돌렸다. 가까이에서 그를 마주하는 일은 탄식이 나올 만큼 감탄스러운 일이었다. 스크린 속에선 다 보이지 않던 길고 수려하게 뻗은 눈썹, 쌍꺼풀 없이 깊은 눈, 조각한 듯 날렵한 콧날까지 어디 하나 신경 써 만들어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를 만든 이가 신이라면 그는 분명 일생의 역작을 만든 것이 분명했다.

“뭐 먹을래?”

“사람들 있는 데 가도 괜찮아요?”

차 내부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관찰하던 현주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람들이 오가는 식당에 그와 마주 앉은 자신을 상상하고 있자니 영 어색하고 찝찝했다. 무엇보다도 그에게 좋지 않을 것이었다.

“아니.”

“그럼요?”

“우리 집 가서 배달 음식 먹거나, 당신 집 가서 배달 음식 먹을 거야. 골라.”

오랜 자취 생활로 배달 음식이라면 이골이 난 현주였다. 돈 잘 버는 연예인한테 비싼 밥이라도 얻어먹는 것인가 기대했건만 다 헛물이었다.

“에이, 난 또 비싼 거 사 주는 줄 알았지. 갈래요.”

“내가 왜 사 줘. 당신이 날 사 줘야지.”

“내가 왜요?”

“구해 줬잖아. 완전 멋있게.”

그가 긴 손가락으로 가방을 삐져나온 대본을 가리켰다. 민서와 자신의 기 싸움을 얘기하는 모양이었다. 현주는 물론 그가 멋있었고 고마웠다. 그는 적절한 순간에 나서 줬고 적당한 정도로 힘을 발휘했다.

하지만 그가 기고만장해지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이때가 아니어도 그는 충분히 그녀에게 있어서 갑이기 때문이었다.

“안 멋있었는데요?”

“안 멋있어?”

“네.”

그는 되도 않는 튕기기를 시도하는 그녀가 가소로웠다. 그의 커다란 손이 현주의 뒷목을 감쌌다. 그녀의 살결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미간이 찡그려지며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럴 리가 없는데.”

“…….”

“안 멋있었어?”

“그냥 고, 고마웠어요.”

현주는 간신히 고마웠다는 말을 뱉어 냈다. 멋있었다는 말보다는 고마웠다는 말이 그나마 덜 자존심이 상했다. 그는 그럼 그렇지,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 현주는 아랫입술을 내밀며 미팅룸에서의 상황을 떠올렸다. 앞으로도 민서와 오늘과 같은 기 싸움을 반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아팠다.

타고난 천성이 불협화음을 싫어하는 현주였다. 좋은 게 좋은 거였고, 싸움보다는 희생이 편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그녀가 선택한 직장은 세상에서 가장 기 세고, 질 줄 모르는 사람들이 모인다는 방송국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녀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부터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렇게 나서서 안 도와줘도 괜찮아요.”

현주의 고개가 힘없이 떨어졌다. 풀 죽은 모습이 비 맞은 어린아이마냥 처량했다. 그는 그 모습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마웠으면 됐지 우울해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자신의 커다란 손을 뻗어 그녀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오늘처럼 하라고 알려 준 거야.”

“뭐를요.”

“다음부터는 내가 한 것처럼 해. 어차피 이 바닥은 온 천지가 비밀이야. 애써 착한 사람 될 필요 없어. 못되게도 굴고, 미친년처럼도 굴어. 너 아니어도 미친것들 많아.”

“당신도 미쳤어요?”

지원의 긴 속눈썹이 그의 짙고 깊은 눈동자를 가렸다. 하얀 피부 위에 조각된 빨간 입술이 놀랍도록 솔직한 대답을 뱉어 냈다.

“완전 미쳤지.”

현주는 그 말에 전적으로 수긍했다. 작가생활을 시작하며 별 희한한 사람들을 다 보았지만 이렇게 묘한 사람은 보지 못했다. 가벼운 듯 보이면서 무겁고, 생각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가끔은 너무 많은 생각을 하는 것 같은 그는 누구보다도 특이하고, 누구보다도 특별한 사람이었다.

“어디 갈래? 정해야 운전을 하지.”

“진짜 배달 음식 먹을 거예요?”

“그거 말고는 먹을 수 있는 게 없어. 둘이 먹으려고 매니저도 보냈단 말이야.”

“돈도 잘 벌면서 그렇게 살면 안 억울해요?”

“억울해.”

그는 일순간 진지하고 서글픈 표정을 만들어 냈다. 현주는 처음으로 그가 가엾다고 느껴졌다.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애정을 독차지하고 그만한 부를 누리는 그였지만 그만큼의 시간과 권리들을 빼앗기며 사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전이된 듯한 배고픔과 피로를 강하게 느꼈다.

“우리 집 가요. 밥해 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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