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배신
다음날 현주는 작품에 도움이 될 만한 책과 자료를 찾기 위해 서점을 찾았다. 그녀는 늘 서점에서 나무 향이 난다고 생각했다. 푸른 잎을 자랑하는 나무들의 활력 넘치는 향기만큼은 아니었지만 조용히 잠들어 있는 나무들의 얌전한 대화가 그녀에게 편안함을 주었다.
“아, 책 냄새. 너무 좋다.”
준비하는 작품이 시대극이었던지라 그녀는 역사코너를 서성였다. 그리고 그녀는 거기서 자신의 역사를 마주했다.
“…….”
“현주야.”
3년을 함께하고 헤어진 지 일 년이 되도록 잊지 못한 과거의 연인이 실물이 되어 현주 앞에 서 있었다. 빼어난 외모나 재력을 가진 남자는 아니었지만 늘 다정하고 따뜻한 미소로 그녀의 삶의 버팀목이 되어 준 사람이었다.
“수, 수현 오빠……. 오랜만이야.”
“그러게. 좋아 보인다. 별일 없지?”
“응, 잘 지내고 있어. 오빠도 잘 지내지?”
“그럼. 그렇게 책 좋아하더니 여기서 보네.”
익숙한 것은 편안함을 주기 마련이었다. 현주는 수현의 목소리를 들을수록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는 오빠는 서점 지루해했잖아. 어쩐 일이야?”
“아, 친구 놈이 살 게 있다 그래서.”
마침 한 남자가 두꺼운 잡지를 여러 개 들고 나타났다. 그는 수현과 어색한 대화를 나누는 현주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다 샀어. 가자.”
“어? 어…….”
“이 여자분은 누구셔?”
“아, 예전에 알던 동생. 현주야, 그럼 다음에 차라도 한잔 마시자. 가 볼게.”
그는 다급히 친구를 챙겨 서점 밖으로 달아났다. 현주는 예전에 헤어졌을 때처럼 이번에도 자신이 그를 내쫓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슬퍼졌다. 씁쓸해진 그녀는 자리를 옮기려 했고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구두 앞코에 무언가가 걸려서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수현의 지갑이었다. 그녀는 재빨리 그것을 들고 서점 밖으로 나섰다.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그와 그 친구가 있었다.
“그러니까 저 여자가 누군데.”
“아, 누구긴 누구야. 전에 만나던 여자지.”
“에이, 아쉽다. 소개시켜 달라고 하려 했더니. 완전 내 스타일인데.”
“모르는 소리 마라. 조금만 만나면 금방 질릴걸.”
그의 뒷모습을 따라 걸음을 내딛던 그녀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현주의 영혼은 깊은 진흙탕 속에 침식하듯 가라앉고 있었다.
“왜 질려? 집착 뭐 그런 거 심해?”
“아니, 지루해. 차라리 집착이라도 좀 하면 좋을 텐데. 결혼하기엔 딱 좋은 여자지만.”
“아, 너 양다리일 때도 전혀 눈치 못 챘다던 그 여자구나?”
수현과 그의 친구는 자신들의 도마 위에 현주를 눕혀 두고 잔인하게 난도질했다.
‘전에 만나던 여자지.’
‘금방 질릴걸.’
‘지루해.’
‘양다리일 때도 전혀.’
‘전혀.’
현주는 그들의 경박한 웃음소리를 뒤로한 채 다시 서점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지갑을 쓰레기통에 처박은 그녀는 흔들리는 다리를 부여잡으며 화장실 가장 깊숙한 칸으로 들어가 억누른 눈물을 쏟아 냈다.
그녀는 과거 자신의 사랑이 불타는 사랑은 아니었지만 따뜻한 사랑이었다고 자부했었다. 그는 늘 다정했고 그녀는 늘 그런 그가 고마웠다. 육체적 사랑이 부재한 탓에 그는 힘겨워했지만 그녀가 원한다면 끝까지 지켜 주겠노라, 맹세했었다.
그의 결혼하자는 프러포즈 앞에서 차마 승낙을 하지 못했던 것은 작가로서 채 꿈을 펼치기도 전에 한 사람의 아내, 한 아이의 엄마가 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현주는 자신과 수현이 운이 없었을 뿐이라고 생각했었다. 보다 안정적인 시기에, 보다 의지할 수 있던 시기에 만났다면 둘은 당연히 한 가정을 꾸리고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수현과 현주가 거짓과 인내로 버텨 온 3년은 사랑의 시간이 아닌, 그저 그런 시간이었던 것이다. 한참 동안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던 현주는 엉망이 된 얼굴을 문지르며 택시를 잡았다. 그녀는 헤어진 지 일 년이 넘어서 또 한 번의 실연을 겪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