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전화 (3/20)

3. 전화

그 생각은 아주 옳은 것이었다. 처음 하루 이틀은 기대하기도 했었다. 그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지만 내 자신을 하룻밤용으로 취급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에겐 아무런 연락도 없었고 나 역시 그에게 연락할 전화번호나 여타 다른 것들이 있지는 않았다.

시간은 흘렀고 순간순간 떠오르던 기억들도 점차 꿈처럼 잊혀져 갔다. 단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시작부터 끝까지 그 사람에게서 단 한 번도 주도권을 빼앗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그날 아침으로 돌아간다면 당신 참 별로였다며 영화 속 대사를 해 볼 법할 텐데. 물론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으아, 내일 미팅인데 아무것도 준비 못 했네.”

요즘은 설 특집 단막극을 위한 미팅 준비가 한창이었다. 2부작 정도로 구성된 단막극은 그 짧은 틀 안에 기승전결을 모두 구겨 넣어야 하는 고도의 작업이었다. 내일 바로 배우 미팅이 있다고 하니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 Rrrrr.

“……여보세요.”

― 안녕하세요, 고객님…….

“바빠요.”

방송국 피디의 전화인 줄 알았던 나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 Rrrrr.

“…….”

이번에도 모르는 번호였다. 평범한 번호처럼 보였지만 요즘 광고 회사들도 머리가 좋아져 저런 것쯤은 기본으로 하고 있는 행태였다. 전화가 끊겼다. 이제 좀 집중하려나 싶어 키보드 위에 손을 올리는 순간 다시 한 번 전화가 울렸다.

“아이 참…… 끈질기시네.”

무심코 통화버튼을 누른 나는 준비한 멘트를 읊었다.

“죄송한데 제가 바빠서요. 다음에…….”

― 많이 바빠?

방금 전 보았던 커피 광고에서 나온 목소리, 김지원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무지 알 턱이 없는 나는 종료버튼을 누를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

― 안 끊은 거 알아.

다시 만나면 네깟 거 별거 아니라며 한 방 날려 주고 싶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기억 속에서의 김지원은 눈동자 하나로 자신을 제압했지만 사실 목소리로도 제압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커피 광고를 통해 지원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들 귀가 안쓰러웠다. 실제 지원의 목소리는 그보다 더 부드럽고 더 매혹적이었다.

“왜, 왜요.”

― 보고 싶어.

현주는 들이마시던 숨을 멈췄다.

― 네 몸이.

현주는 얼굴을 붉히며 목소리를 높였다.

“왜 그쪽이 내 몸을 보고 싶어 해요? 저 그런 사람 아니거든요?”

― 그런 사람이 뭔데?

“……막 몸 함부로 굴리고 그런 여자 아니라고요. 저번엔 제가 술에 취해서 실수를 좀 했는데…….”

― 후회해?

콩닥콩닥 말대답을 이어 가던 나는 그 물음에 아무런 답도 할 수 없었다. 저 멀리서 지원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 화보 촬영 때문에 발리 다녀왔어.

“그래서요.”

― 서운했을까 봐.

“……아니거든요.”

― 어디야?

“집이요.”

현주는 그렇게 답하며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 남자에게 고분고분 말 잘 듣는 어린이처럼 구는 자신이 형편없게 느껴졌다.

― 거기가 어딘데.

“안 알려줄 거예요.”

그녀는 나름의 방어를 한 것이었지만 그에겐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오히려 그의 웃음소리가 선명히 들리는 결과를 낳았을 뿐이었다.

― 알았어. 당신이 싫다면 말아야지 뭐.

“…….”

― 오늘은 그만 놀릴게. 내일 봐.

그는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실컷 놀리고 나서 선심 쓰듯 그만 놀린다고 말하는 그가 얄미웠다. 그래도 웃음소리와 같이 들린 ‘당신’이라는 말은 충분히 설레고도 남을 말이었다.

‘아, 이 인간 생각을 알 수가 없네. 내가 연애를 너무 오래 쉬었나.’

현주는 그렇게 생각한 자신에게 어이가 없었다.

‘연애라니? 연애라니! 원나잇이야, 원나잇. 썩어 빠진 연예계를 몰라서 그래?’

* * *

다음 날 아침이 될 때까지 나는 단 하나의 문장도 완성하지 못했다. 나름대로 작가의 의도를 적어 배우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말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밤을 새운 탓에 늦잠까지 자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게 다 김지원 때문이야. 그 인간이 어제 전화만 안 했어도 내가!”

이럴 때 가장 유용한 방법은 남 탓을 하는 것이었다. 공들여 화장할 시간은 더더욱 없었다. 대충 파운데이션만 찍어 발라 예의를 갖추고 하이힐은 깔끔하게 포기했다. 뛰쳐나가 택시를 잡는 데 걸린 시간은 5분, 원래 약속 시간까지 아슬아슬하게 도착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유현주 작가입니다.”

문을 밀며 고개를 숙인 나는 운명의 장난에 또 한 번 괴로워했다.

“김지원이라고 합니다.”

빨간색의 두꺼운 니트를 입은 그는 어린 악마처럼 웃었다. 놀란 내 표정을 본 피디님이 껄껄 웃으며 설명했다.

“아, 유 작가가 놀랬나 보네. 미리 말 못 해서 미안. 나도 어제 연락받았어. 남자 주인공이 계속 캐스팅이 안 돼서 이거 엎어야 하나 고민 많았는데, 잘됐지? 지원 씨면 시청률 1위는 따 놓은 거지. 안 그래?”

“하하하…….”

나는 기괴한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나와 달리 그는 짜증스러울 정도로 평안해 보였다. 내일 보자는 얘기가 이 얘기였나. 그가 가까이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내가 망설이자 그는 내 손을 잡아채 부드럽게 쥐었다.

순간적으로 몸이 움찔했다. 그가 못 느꼈길 바랐지만 그의 미간은 그날의 밤처럼 섹시하게 구겨졌다. 내 손에 핏기가 사라질 쯤이 되어서야 손을 놓아준 그는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나는 최대한 그와 떨어지기 위해 의자 끝으로 달아났지만 그런 시도는 다 소용없게 되었다.

그의 손이 탁자 밑으로 내려와 내 허벅지를 어루만졌다. 그날의 밤과 똑같은 움직임에 온몸의 세포가 짜릿한 긴장 상태에 빠졌다. 힘을 주었다가 빼는 그의 리듬감에 절로 몸이 노곤해졌다. 나는 그를 제지하려 했지만 그는 오히려 내 손을 잡고 더 농밀한 스킨십을 이어 나갔다.

“그래서 이 부분에선 지원 씨가 신경을 써 줬으면 해.”

“네, 걱정 마세요. 작품이 좋네요.”

그는 고개를 돌려 내게 웃어 보였다. 배우는 배우인 모양이었다. 지원은 탁자 밑에서 일어나는 모든 행위를 모른 척하며 젠틀한 가면을 쓰고 있었다. 미팅이 끝나자 나는 온몸의 에너지가 방전된 듯 의자에 쓰러졌다.

“유 작가, 많이 긴장했었어?”

“……네.”

“그럴 만하지. 단막극에 김지원이라니. 센세이셔널하네. 그치?”

“그러네요…… 센세이셔널.”

“뭐, 우리한테는 좋은 기회니까 잘해 보자고!”

피디는 열의에 찬 표정으로 미팅룸을 벗어났다. 몸값으로 수억을 불러도 캐스팅하기 힘든 김지원이 제 발로 들어오니 기쁜 것은 당연했다.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경고’라고 저장된 이름을 보니 지원이었다. 심호흡을 한 나는 천천히 통화버튼을 눌렀다.

“무슨 짓이에요?”

― 뭐가?

“왜 우리 단막극에 당신이 출연하냐고요.”

― 글쎄.

농담으로라도 작품이 좋다거나, 캐릭터가 마음에 든다거나 하는 말 따위는 하지 않았다.

“인생이 너무 쉬워서 재미없어요? 그래서 그래요?”

― 대체로 쉬운 편이긴 해.

“하―!”

나는 어이가 없었지만 그는 그런 것과 상관없이 대뜸 목소리의 결을 바꾸고 단호하게 말했다.

― 이제 당신 집 어딘지 말해.

“내가 그걸 왜 말해야 돼요?”

― 일하면서 흥분하기 싫어. 오늘처럼.

말리지 않으려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어도 자연스럽게 말리는 기분이 들었다. 더 전화를 이었다가는 없던 약점까지 생길 판이었다. 나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고 붉어진 얼굴을 식히려 애썼다. 그에게서 전화가 다시 온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나는 아직 올라갈 일이 많은 신인 작가였고 그는 더 이상 올라갈 곳 없는 정상의 배우였다. 우린 연인이 아니었지만 연인이 하는 일을 했다. 매사에 얼렁뚱땅, 애매모호한 것들을 싫어하는 나였다. 핸드폰을 들어 주소를 찍었다.

[만나요.]

그는 빠르고 분명하게 답을 보냈다.

[9시, 기다려.]

지금 시간은 이제 겨우 오후 1시였다. 약속 시간까지 여덟 시간이나 남았지만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버스에 몸을 실은 채 단막극 시놉시스를 꺼내 들었다. 야망에 눈이 멀어 가족을 뒤로한 채 살아가던 남자가 진정한 사랑을 만나 가족애에 눈을 뜬다는 전형적이고 한국적인 드라마였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여유가 넘치는 지원은 이런 역할에 어울리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서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그가 이 배역에 애정이 있고, 작품에 순수한 관심이라도 있다면 모를까 불장난처럼 덤벼드는 건 싫었다. 식탁 위를 깨끗이 치우고 시놉시스와 극작노트를 올려 두었다. 창문을 열고 햇빛을 받으며 널린 옷가지를 잘 개어 옷장 속으로 집어넣었다. 하늘은 어두워졌고 초인종이 울렸다.

“누구세요?”

“나야.”

집 안에 발을 들인 그의 모습은 낮의 모습과 또 달라져 있었다. 빨간색 니트 대신 잘 다려진 흰색 셔츠와 짙은 회색 코트를 입은 그는 장난기 어린 웃음 대신 피곤함에 지칠 대로 지친 건조한 눈가를 드러내고 있었다.

“스케줄 있었어요?”

“난 늘 스케줄 있어.”

그는 표정 없는 얼굴로 말했다. 방송국에선 그리 생글생글 잘 웃더니 아주 다 연기인 모양이었다. 나는 그런 지원을 주방의 식탁으로 이끌었다.

“밥해 줄 거야?”

그가 식탁 의자를 빼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할 말 있어서 부른 거예요. 그쪽 집은 위험하니까.”

“여긴 안 위험해?”

여전히 건조한 표정의 그가 작은 장난기를 베어 물고 물었다. 또다. 마음 깊은 곳에 품은 것이 흑심이든, 선심이든 그는 가리지 않고 드러내어 사람을 곤란하게 했다. 나는 눈을 감고 숨을 들이쉬었다.

‘그의 말에 대답하지 마. 내 할 말만 해. 할 말만.’

그래서 뱉은 말이,

“나 좋아해요?”

라는 말이었다. 이번엔 지원이 당황한 듯 보였다. 눈살을 찌푸린 지원은 찬찬히 내 눈을 살피듯 훑었다. 내 말이 숨긴 의도와 감정과 모순을 샅샅이 알아내고 싶어 하는 듯 보였다.

사실 이번 질문에서의 내 의도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생각이 궁금한 거였으니까. 어울리지 않게 배짱 좋은 눈으로 그를 쳐다보자 그는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 이쯤하죠.”

“지금 우리가 어디쯤 하고 있는데?”

“말장난할 기분 아니에요.”

“나도 그래.”

그와 나 사이에 침묵이 오갔다. 그것은 어떠한 외침보다 시끄러운 소란이었다. 그의 뜨겁고 어쩌면 차가운 눈빛을 끊어 내며 나는 입을 열었다.

“그쪽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지원.”

“네?”

“내 이름, 그쪽이 아니라 지원이야. 모르는 것 같아서.”

마치 주제 파악을 하라는 듯 이름을 말해 주는 그의 태도는 한없이 고고했다.

‘휘둘리지 마. 당황하지 마. 내 할 말만 해. 할 말만.’

나는 그렇게 다시 한 번 주문을 외워야 했다.

그의 고고한 태도가 오만하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그것이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는 점과 나도 모르게 그에게 숙이고 싶었다는 점 정도는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지원 씨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신중한 사람이에요. 흥미와 순간보다는 약속과 지속이 더 중요해요.”

“그래서?”

“그래서……. 지금 우리 관계가, 지원 씨가 저한테 하는 행동이 저는 부담스럽고 불편해요. 특히나 일적으로 만난다면 더욱 그래요.”

그는 생각보다 잘 들어 주었다. 중간중간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있는지 미간을 찌푸리거나 탁한 한숨을 뱉기도 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혹시 이번 단막극도 저 때문에 합류하기로 결정한 거면…… 철회하셔도 괜찮아요. 아직 계약서도 쓰기 전이니까 피디님께는 제가 말씀드릴게요.”

그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은 아닌 모양이었다.

“싫어.”

놀란 눈으로 지원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정중한 부탁에 어떠한 고민도 없이 거절하는 그가 놀라웠다.

“왜요? 난 이 작품이 정말 중요해요. 그냥 장난으로…….”

“내가 장난이라고 한 적 있어?”

“…….”

“당신이 당신 작품을 소중히 하는 것처럼 나도 내 작품 중요해.”

그는 자신이 그의 커리어를 무시라도 한 것처럼 싸늘하게 말했다. 그의 긴 손가락이 매끄럽게 잘생긴 이마를 짚었다.

“프로답지 못하네, 당신.”

“…….”

그는 실망했다는 듯 내게 향했던 눈길을 돌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는 배우로서 당신 작품을 선택한 거야. 당신이랑 하룻밤 보낸 남자로서가 아니라.”

“…….”

“착각은 내가 아니라 당신이 하는 것 같은데. 말했잖아. 난 일터에서 흥분하기 싫다고.”

순간 강력한 수치심이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그의 말이 배려 없고 노골적이어서가 아니라 그의 말이 모두 맞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왜 그가 나 때문에 이 작품을 선택했을 거라고 단정 지은 걸까.’

서로의 사생활을 일터로 끌고 온 건 바로 나였다.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내 뒤통수 위로 그의 단단한 음성이 들려왔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만족스러운 연기를 보게 될 거야. 걱정하지 마.”

남자의 목소리가 아닌 배우의 목소리였다. 나는 또 한 번 그에게 말렸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다.

“……고마워요.”

“우리 관계도 오늘로서 끝날 거야. 상대방이 싫은 건 나도 싫어.”

“……네.”

잔뜩 쭈구리가 되어 있는 나를 향해 그는 자상한 미소를 지었다.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어떤 말보다 유혹적인 것이었다. 그 미소에 홀려 아무 말이라도 건네 볼까 했던 시점에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요?”

“응.”

내가 자초한 짤막하고도 멍청한 대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나는 그가 문 밖으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가쁜 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

“괜찮아. 나쁘지 않았어.”

나는 스스로를 토닥이며 칭찬과 위로를 곁들였다. 그러곤 그의 곧은 눈빛과 다정했던 미소를 떠올렸다가 고개를 저었다.

“또 넘어갈 뻔했어. 잘했어.”

악마의 유혹이라도 견뎌 낸 것처럼 스스로가 대견해진 나는 이제 마음껏 일에 집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지원도 작품을 계속하기로 했고 둘의 모호한 관계 역시 청산되었으니 더할 나위 없었다. 그리고 그 기분은 딱 그다음 날 저녁까지 유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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