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선
생각해 보면 그때 그 자리에서 그 사람을 만나면 안 되는 것이었다. 평소엔 시끄러운 것도 싫어하고 술 마시는 것도 좋아하지 않던 내가 하필이면 그날, 왜 그곳에 가게 된 걸까.
“작가님! 여기요!”
저 멀리서 손을 흔드는 남자는 모델 출신의 신인 배우, ‘한재경’이다. 저번 달에 마지막 회를 끝으로 유종의 미를 장식한 미니시리즈의 조연이기도 했다. 신인의 패기인지, 타고난 성격인지 살가움의 정석을 보여 주는 참으로 신기한 사람이다.
처음 대본 리딩 때 전화번호를 가져가더니 드라마가 끝난 지 한 달이 넘도록 수시로 연락하고 있다. 아, 내가 만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은 이 사람이 아니고 이 사람의 친구인 ‘김지원’이다. 늘 영화만 찍는 사람이라 특별히 만날 일은 없었지만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이 남자를 모를 리 없었다.
남자다운 카리스마와 여성스러운 얼굴선이 제대로 조화를 이룬 그의 얼굴에 여자들은 열광했고, 흠잡을 것 없이 탄탄한 몸매는 못 남자들의 탄식을 자아냈다. 그는 화려하다는 연예계 안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존재감의 스타였다.
“늦어서 죄송해요. 재경 씨, 오랜만이네요.”
“그러니까요. 작가님이 좀 튕기셔야죠.”
넉살 좋은 재경의 투정에 나는 자연스럽게 무리에 합류할 수 있었다. 낯을 많이 가리는 내 성격을 모를 리 없는 재경은 늘 조용한 분위기에서 나를 찾았지만, 오늘만큼은 사람도 많고 시끄러운 것이 영 적응하기 어려웠다.
“오늘 제 친구 생일이에요. 제가 작가님 초대한 건데 괜찮죠?”
“네?”
“지원이요, 김지원. 작가님도 아시죠?”
재경은 커다란 소파에 한껏 파묻혀 앉아 있는 남자를 향해 손짓했다. 누가 오건 말건 세상만사 관심 없다는 표정의 그는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 올려 나를 쳐다보았다. 잘생긴 얼굴 그렇게 쓸 거면 나나 주지. 재경이 그를 향해 날 소개시켰다.
“이번에 나 출연했던 미니시리즈의 ‘유현주’ 작가님이셔.”
“…….”
“아, 안녕하세요. 생일 축하드려요.”
그 짧은 타이밍에도 나는 그가 왜 사람들이 탐내지 못해 안달하는 인물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을 앞에 두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그의 태도는 분명 불쾌했지만 또한 매력적이기도 했다. 느리게 움직이는 눈동자는 아름다웠고 모든 것을 초월한 듯한 특유의 분위기는 묘하게 섹시했다.
나는 낯선 환경에 차마 긴장을 풀 수 없었다. 외국어를 한 마디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무런 연고도 없이 외국으로 떠나온 것과 다르지 않았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사람들이 카메라 앞에서라면 절대로 쓰지 않을 거친 언사로 말하는 것을 보고 있자면 참으로 기가 빨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들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들 역시 나를 동격의 사람으로 인지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스치는 시선은 무관심했고 그랬기에 더욱 몸은 빳빳해졌다.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을 걸러 내는 술래잡기를 하는 것만 같았다.
“작가님, 저 잠깐 나갔다 올게요. 혼자 있을 수 있죠?”
“어, 저, 저기.”
설상가상으로 유일하게 아는 사람이었던 재경도 자리를 뜨자 나는 주섬주섬 옷가지를 챙겼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에 질 좋은 와인이 눈앞에 있다 해도 이런 자리는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어디 가요?”
첫 인사를 제외하고는 내게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았던 지원이 물었다.
“아, 조금 피곤해서……. 먼저 일어날게요.”
나는 최대한 자연스러운 미소를 만들어 냈다. 내가 이 화려한 분위기에 압도당했다는 사실을 실토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 역시 잘 만들어진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목소리는 그처럼 부드럽지 않았지만.
“앉아요.”
“네?”
“앉아요. 아직 내 생일파티 안 끝났어요.”
그는 어린아이 같은 깔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안절부절 미운오리 새끼처럼 어색해하는 나와 달리 그는 주변의 모든 화려함을 더해도 밀리지 않을 분위기를 갖추고 있었다.
“아…… 저 술도 잘 못하고 이런 자리는 좀 불편해서요.”
내 말이 뱉어지기 무섭게 그는 내 손목을 잡고 제 곁으로 끌어당겼다. 훅 하고 풍겨 오는 그의 향수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나는 순식간에 그의 옆자리에 앉은 꼴이 되어 버렸다. 내가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자 그는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커다란 음악소리에 다른 사람들은 듣지 못했겠지만 나는 여전히 그날의 그 말을 떠올리곤 했다.
“말동무라도 해 줘요. 지루하단 말이야.”
“…….”
레스토랑의 vip라운지를 통째로 빌린 사람치고는 할 말이 아닌 것 같았지만 그는 정말 지루해 보였다. 사람들의 시시콜콜한 이야기에 따분하다는 듯 대놓고 하품하는 건 기본이고, 누군가 정성스레 포장된 선물을 내밀 때면 성의 없는 몸짓으로 받기 일쑤였다. 나는 그렇게 또 몇 분이란 시간을 민망함과 어색함 속에서 보내야만 했다.
“죄송해요. 저 내일 할 일도 있고 진짜 일어나야 할 것 같아요.”
나는 그가 다른 사람과 말을 나누던 틈을 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좀 전과 달리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이고 라운지 아래층으로 내려가려는데 내 두 발목을 꽁꽁 동여매는 장면을 마주하고 말았다. 일 년 전, 내게 찬란함과 슬픔 모두를 선물했던 지난 연인이 다른 여자와 나란히 앉아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높은 하이힐이 불안하도록 다리는 후들거렸고, 심장은 얼음처럼 빳빳하게 식어 가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에 나는 다시 계단 위로 오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대로 그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안 갔어요?”
“으아악!”
비련의 여주인공이라도 된 양 서 있는 내게 누군가 속삭였다. 아까도 맡았던 향수 냄새, 김지원이었다. 내 비명에 그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왜 이렇게 놀라요?”
“아, 아뇨. 그냥.”
“안 가요?”
“…….”
그의 눈이 내 얼굴을 샅샅이 살피는 기분이 들었다. 눈에 레이저라도 이식했는지 여간 끈덕진 것이 아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어떤 기분도 드러내지 않았다고 확신하지만, 그는 내가 원하는 질문을 알고 있는 듯했다.
“들어갈래요?”
“……네.”
내가 대답하자 그는 씨익 웃으며 나와 나란히 복도를 걸었다. 라운지에 다시 들어서고부터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나는 내 몸이 보라색이 되도록 와인을 삼켰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앞에 두고 행복한 듯 웃고 있는 그 사람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다. 다른 연인이 생긴 그가 나쁘다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그와 나의 헤어짐에는 그의 탓보다 나의 탓이 더 컸으니까. 하지만 사랑했던 사람의 새로운 연인을 보는 건 그리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