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로의 당신-13화 (13/13)

13. 꽃씨를 닮은 마침표

“또?”

“네…….”

연조 아버지가 안정을 찾는 걸 지켜보고 이제 막 집에 도착한 참이었다. 13층에서 내리려는 연조의 손을 꼭 잡아 못 내리게 한 강준은 23층 자신의 집으로 연조를 데려왔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키스부터 퍼붓는 그를 말리며 연조는 마침 전송된 문자 메시지를 확인했다. 이번엔 진수에게서 날아온 것이었다. 강준과 사귀고 있는 게 정말 맞느냐며. 10분 전엔 미라에게서 같은 내용의 문자 메시지 세 개를 연달아 받았었다.

“줘 봐요.”

미간을 구기고 이를 악문 강준이 연조의 손에서 휴대전화를 빼앗아 갔다. 그렇지 않아도 소문의 근원지인 현구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벼르던 그였다. 소문 우선권의 발효 시기는 연조의 동의를 얻은 이후라고 못 박았건만 금요일 밤, 가벼운 술자리만큼이나 가벼운 그의 입이 사고를 내 버렸다.

“자.”

무어라고 길게 문자를 찍어 보내는 것 같던 강준이 전송 버튼을 누르고 이어서 종료 버튼까지 누른 후 까매진 휴대전화를 연조에게 돌려주었다.

“뭐라고 보내셨어요?”

키스와 키스가 이어지는 사이, 연조가 싱긋 웃으며 물었다.

“오진수랑 성미라는 앞으로 신연조 함부로 일 시켜 먹고 얕잡아 보면 매우 재미없을 거고, 이현구는 협상 결렬로 유모차 증발됐고, 조승기는 앞의 경우를 타산지석 삼아 아무리 궁금하고 좀이 쑤셔도 얌전히 있으라고 했어요.”

“정말요?”

“응. 아, 속이 다 시원하네.”

팀원들 호기심의 촉수를 썩둑 잘라 내고 시원스레 웃는 강준을 보고 연조도 웃어 버렸다. 앞으로 한동안 그와 자신의 사이가 회사 사람들에게 화제가 되겠지만 한 번은 거쳐야 할 절차. 연조는 배짱을 갖기로 했다. 그녀의 인생에서 지금은 그래야 할 순간일 테니.

“이런, 오진수 겁 없네.”

연조의 휴대전화가 꺼지자 이번엔 강준의 것이 울려 또다시 연조에게 키스하려는 그를 막았다.

그럼 팀장님. 제주도에서 밤샘 콘퍼런스 하신다는 건 뭐였습니까요.

강준이 연조 쪽으로 휴대전화를 돌려 전송된 내용을 보여 주었다. 연조는 이 일을 어쩌나 싶어 목덜미까지 빨개지는데, 강준이 무어라 문자를 찍어 보내곤 그의 것도 전원을 꺼 버렸다.

“뭐라고 보내셨어요?”

빨개진 목덜미를 씹으며 달려드는 그에게 불안해져서 물었다. 꼼짝없이 들켜 버린 제주도에서의 일이 연조는 이제 와 몇 배나 더 부끄러워졌다.

“지금부터 밤샘 콘퍼런스 또 해야 한다고 보냈어요. 방해하면 가만 안 둔다고. 나, 경위서 써야 할 남자라고. 더 이상 건드리면 물어 버리겠다고.”

“팀, 장님…….”

“이젠 할 거 합시다. 아무리 신연조 씨라도 방해하면 화낼 겁니다.”

선언하듯 말하곤 입술과 목덜미를 뜨겁게 탐하는 강준의 기세에 연조는 주춤주춤 뒤로 밀렸다. 소파까지 떠밀려 와 눕혀지자마자 스커트가 들춰지고 블라우스의 단추도 함부로 풀어졌다.

“팀장님, 잠깐만요…….”

연조는 급하게 구는 강준을 감당하기 위해 그의 단단한 가슴을 밀어 정지시켰다. 그러곤 그의 넥타이를 천천히 끌어내렸다.

“나 지금 급한데.”

떨리는 손으로 그의 와이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끄르는 연조를 바라보며 강준이 낮게 속삭였다.

“천천히 해 보고 싶어요……. 나도 팀장님 만져 보게…….”

“하, 신연조, 정말……,”

앓는 듯한 긴 한숨을 내쉰 강준이 연조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잠시 호흡을 정리했다. 그러곤 연조의 허리를 감아 안으며 그녀를 제 몸 위에 올리고 소파에 누웠다.

순식간에 위치가 바뀌어 연조가 강준의 탄탄한 복부 위에 올라앉아 그를 내려다보았다. 벨트의 차가운 금속이 엉덩이에 느껴졌다. 연조는 위치를 조금 옮기는 게 좋을 것 같아 천천히 몸을 움직여 그의 허벅지 위에 앉았다. 강준은 더욱 굳어져선 거친 숨을 내쉬었다.

“내가 신연조 씨한테 하는 것처럼 내 몸에도 입 맞춰 달라고 하면…… 나 원망할 겁니까?”

원하는 것을 말하는 그는 진지했다. 야한 말을 진지하게 뱉는 그를 타박하지도 못하고 연조는 얼굴을 붉혔다.

“해 볼게요…….”

시뻘게진 얼굴로 말하곤 허리를 숙여 그의 상체와 몸을 붙였다. 가슴을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쓸어 보고 갈색 유두에 입술을 내려 살며시 핥았다. 그가 하는 것만큼의 속도와 압력으로는 못하겠어서 여릿하게 물고 핥았지만 그것만으로도 강준의 가슴은 크게 들썩였다.

“처음해 보는 거라서……. 더 나아질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아직 부끄러움을 모두 떨쳐 내지 못한 연조가 그의 가슴을 만지작거리며 속삭였다. 거친 숨소리에 낮은 웃음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이거, 매일 해야겠어. 신연조 실력 늘게. 조바심 나서 죽을지도 모르지만.”

팔뚝으로 눈을 가리고 웃던 강준이 말했다. 그러곤 상체를 일으켜 연조의 허리를 휘어 감으며 진하게 입 맞추었다. 입술을 거듭 물어 부풀어 올리고 목덜미를 흡입했다. 블라우스와 브래지어를 벗기고 스커트를 들어올렸다.

“나도 이런 식으로 만져 줬으면 좋겠는데……. 연습하면 이 수준까지…… 가능하겠습니까?”

강준이 속삭였다. 하지만 연조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이토록 야하고 진하게 그를 만진다는 건 상상도 못했었다. 상상만으로도 숨고 싶었다.

여린 신음만을 흘리며 어찌하질 못하던 연조는 강준의 목을 힘껏 끌어안았다. 연조를 번쩍 들어올린 강준이 침실로 향했다. 콘돔을 준비하고 침대 위에 누우며 연조를 제 배 위에 올렸다.

“해 주세요…….”

“응?”

순간, 모든 동작을 멈추고 경직된 강준이 물었다. 치올린 눈으로 그녀를 훑고 옭아매는 눈빛에 연조는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해, 주세요…….”

“다시.”

“…….”

“다시 말해 줘…….”

“황홀하게 해 주세요……. 팀장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콘돔의 포장재가 급하게 찢겨 나갔다. 그가 콘돔 포장을 찢는 사이 연조가 그의 바지와 속옷을 끌어내렸다. 그곳에 콘돔을 씌운 강준이 연조의 허리를 들어올려 팬티를 벗기고 아무렇게나 던져 버렸다. 벽과 충돌한 작은 실크가 바닥으로 형편없이 너부러졌다. 그 장면이 너무 야해 연조는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었다.

“아아…….”

강준이 연조의 엉덩이를 붙잡고 올렸다 다시 내려앉혔다. 연조는 그의 위에 올라앉아 허리를 조금씩 움직였다. 강준이 도와주어 할 수 있었던 동작이지만 자신의 안에도 내재된 본능이 연조는 놀랍고 부끄러웠다.

“하아, 팀장님……. 너무, 빨라요…….”

허리를 붙잡고 있는 그의 손에 강한 힘이 들어가자 연조는 힘겨워했다. 연조에게 깊게 키스한 강준이 위치를 옮겨 연조를 침대 위에 눕혔다. 연조의 위로 올라간 그는 박력이 있었다. 강하고 뜨거웠다.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른 후, 함께 절정에 오른 두 사람은 서로를 깊이 끌어안았다. 서로의 품에서 숨을 고르고 땀을 식힌 강준이 연조의 몸에서 내려와 곁에 누웠다. 금세 뻗어 온 팔이 연조를 그의 품에 가두었다. 연조는 강준의 가슴에 귀를 대고 눈을 감았다.

뜨거운 물속에 사지를 늘어뜨리고 있는 것만 같은 평온함이 느껴졌다. 그의 가슴에 귀를 대고 듣는 고동 소리는 잔잔하고 편안한 여운이 남는 어쿠스틱 사운드 같았다. 그녀와 아픔을 나누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시간을 내놓고 달려와 준 남자의 품 안에서 연조는 마음을 놓았다.

“그런데 팀장님, 어쩌죠?”

“응?”

“나 때문에 경위서 쓰게 됐잖아요…….”

극치의 절정이 서서히 가라앉고 제 호흡을 되찾았을 때, 연조는 뒤늦게 드는 걱정에 눈시울이 아래로 쳐졌다.

“그게 왜 신연조 씨 때문입니까?”

“내가 전화만 받았어도 팀장님이 경위서 쓸 일은 없었을 거예요…….”

재현은 사적으로 강준에게 연조 아버지가 입원한 병원을 알려 줬지만, 공적으로는 외근을 현구에게 미룬 것에 대한 경위서를 제출하라고 지시했다. 순순히 수긍하고 받아들인 강준은 불만 없는 듯 보였지만 연조로선 미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휴대전화를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아니 잃어버리기 전에 그의 전화를 받고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라면 그런 일은 없었을 텐데.

“평생의 반려를 얻은 대가로 경위서쯤은 무척 약소합니다. 그리고 뭐, 신연조가 나 책임진댔으니까.”

싱긋 웃어 보인 강준이 연조의 이마에 입 맞추며 속삭였다. 연조는 강준의 품에 더욱 깊이 안기며 길고 편안한 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지금은 에라 모르겠다, 해 버려야 할 순간인 것 같다. 사실 지금 두 사람은 제정신이 아니니 말이다. 사귄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행복하게 해 주겠다는 구시대적 감성으로 청혼한 그나, 거기에 감동받고 청혼에 수락한 자신이나. 제정신이 아닌 덕분에 강준과 마찬가지로 평생의 반려를 얻은 연조는 그의 가슴에 뺨을 대고 진하게 웃었다.

“그런데, 신연조…….”

“네…….”

그녀를 부르는 음성에 어쩐지 수줍음이 묻어 있는 것 같았다. 조심스러운 부름이 의아한 연조는 눈을 깜빡였다.

“당신 이런 거…… 정말 잘하시는 것 같아…….”

“이런 거요?”

“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어…….”

“응?”

“그러니까 그게…… 섹스.”

“그러니까 그게, 섹스요?”

“응…….”

묘한 기시감을 느끼며, 연조는 강준의 가슴에서 머리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난데없는 소리에 미간을 모았다. 낯부끄러운 소리에 뺨도 붉어졌다.

“내가 이걸…… 잘하는 건가요?”

“나를 조금만 만져 줬는데도 미치는 줄 알았어. 앞으로 제대로 할 줄 알게 되면 내 혼이 나가지 싶습니다.”

놀랍게도, 그의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믿을 수 없어 그의 얼굴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려는데, 강준이 연조의 얼굴을 감싸 가슴팍으로 끌어안았다.

연조는 웃음이 터졌다. 그를 만지겠다고 먼저 선언해 놓고도 제대로 한 것이 없어 속상했는데 그것이 그렇게도 해석될 수 있는 것이었다니. 강준이 그만 웃으라는 듯 그녀의 머리를 팔로 감아 장난스럽게 꽉 죄어도 연조는 기분 좋은 웃음을 그의 가슴에 잔뜩 뿌려 놓았다.

“제대로 할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할게요…….”

“나를 미치게 하려고?”

“아니요……. 황홀하게 해 주려고요…….”

“이미 황홀합니다.”

“나만큼은 아닐걸요…….”

강준이 낮게 웃었다. 연조의 머리를 감싸고 있던 팔을 풀어 턱을 잡아 들어올리고는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입술을 물어 키스하고 깊숙이 혀를 넣었다.

“화영 씨한테 연락해요. 오늘 외박한다고…….”

입술이 떼어진 틈에, 강준이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10층 위에서 외박하는 건 좀 창피해요…….”

“창피한 것쯤이야. 나는 경위서 써야 하는데.”

역시, 뒤끝.

연조는 강준의 목을 끌어안으며 더욱 환하게 웃었다. 뒤끝 긴 남자에게 꼼짝없이 붙잡혀 보내야 할 뜨거운 금요일 밤. 그들의 밤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월요일의 회의는 눈치 게임 같았다. 강준과 연조는 평온한데, 다른 팀원들은 이곳저곳으로 눈 돌리기에 바빴다. 금요일 밤 진수의 휴대전화로 보낸 강준의 경고에 크게 뜨끔했는지 다들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오늘 회의는 여기에서 마치겠습니다. 아, 이현구 씨.”

“네? 네, 팀장님…….”

켕기는 것 많은 현구가 주춤주춤 자리에서 일어서려다 다리에 힘이 풀린 듯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경위서를 써야 해서 더욱 예민해진 상사에게 물려야 할 첫 번째 희생양은 바로 자신이라고 슬픈 예감이라도 한 듯했다.

“유모차 골라 뒀습니까?”

“네? 아니, 그게……. 유모차는, 괜찮습니다.”

“왜요. 사 준다고 할 때 받아요. 유모차 증발됐다고 문자 보낸 건 진심이 아니었습니다. 홧김에 해 본 말이지.”

“염치없이 어떻게…….”

말하는 음성은 풀이 죽었지만 쭈뼛거리는 미라와 진수를 바라보는 눈빛은 매서웠다. 비밀 유지를 조건으로 밝힌 정보였건만 이야기를 듣자마자 쌍으로 친 설레발로 입장이 곤란해진 탓에 그들을 바라보는 현구의 시선이 고울 수 없었다.

“약속한 거니까 받아요. 나 대신 회의 참석해 줬잖아요. 덕분에 신연조 씨가 내 프러포즈 승낙했으니까 당당하게 받아도 됩니다. 마음 같아선 더한 것도 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이현구 시니어는 유모차가 필요하다고 했으니까 거기까지만 하죠. 아쉬운 마음은 접고.”

강준의 말에 연조는 못 말리겠다는 듯 뺨을 붉히며 웃고, 팀원들의 눈빛은 혼이 나간 듯 멍해졌다.

“아, 고민정은 내 동생입니다. 우리 어머님과 대표님이 사귀고 계세요. 그러니 더 이상 진실이 아닌 소문의 확대 재생산은 그만두시길 바랍니다. 이제 각자 일 보시죠. 신연조 씨는 잠깐 남고.”

강준이 미라를 바라보며 하는 말에 그녀의 얼굴이 전자총이라도 맞은 듯 벌게졌다. 팀원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팀장실을 나갔고, 연조는 한숨을 쉬며 강준을 바라보았다.

“야단맞을 줄 알았는데.”

자판을 두드리다 연조를 힐끗 바라본 강준이 말했다. 야단맞을 줄 알았다는 것치고 그의 표정은 매우 산뜻해 보였다.

“일찍 맞는 매가 나으니까요. 매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요.”

연조는 옅게 웃으며 마시고 남은 물을 모니터 옆의 화분에 부었다.

“참, 그 화분.”

“네.”

“신연조 씨가 가져다 놓은 거, 맞죠?”

“응? 아닌데요.”

자판을 치던 손길이 뚝 그쳤다. 연조의 대답에 충격이라도 받은 듯 강준의 눈썹이 급하게 휘어지고 입매가 굳었다.

“신연조 씨가 물 주면서 신경 쓰기에 신연조 씨가 가져다 놓은 줄 알았는데.”

“대표님께서 가져다 놓으신 거예요. 팀장님은 신경 안 쓰실 것 같아서 제가 돌봤고요. 선물한 화분 죽으면 대표님 마음 상하시니까. 전에 기획 1팀장님이 대표님이 선물한 화분 죽여서 오랫동안 꽁하신 적 있거든요.”

연조의 설명에 강준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눈을 가리며 웃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연조가 멀뚱히 그를 바라보자 웃음기 묻은 강준의 눈이 연조를 향했다.

“그 화분 가져다 놓은 사람에게 내 마음을 다 바치겠다고 맹세했었어.”

“그게 누군 줄 알고 그런 맹세를 했어요?”

“당연히 신연조인 줄 알고 했지 왜 했겠습니까.”

태연히도 뱉는 말에 연조는 얼굴을 붉혔다.

“본의 아니게 대표님께 연정을 바쳤네. 이거 왠지 대표님께 바치는 연서 같은데.”

이제 막 프린트되어 나온 A4지를 서류철에 꽂으며 강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유리벽 쪽을 힐끗 쳐다보다 피식 웃어 버리곤 연조의 볼을 톡톡 두드렸다.

“대표님께 경위서, 아니 연서 바치러 갑니다. 예쁘게 봐 달라고 애교 잔뜩 부리고 올게요.”

“네……. 죄송해요.”

“신연조 씨가 죄송할 일은 아닌데.”

“그래도요.”

“야단맞고 오면 위로해 줄 겁니까?”

“그럼요. 점심도 사 드릴게요.”

“좋습니다. 지난 금요일부터 콩국수 먹고 싶었는데. 그거 사 줄 거야?”

“얼마든지요.”

“이젠 점심시간 때마다 신연조만 당당하게 데리고 나갈 수 있겠네. 아주 좋아.”

“저도 좋아요…….”

마음을 온통 뒤흔드는 남자에게 연조는 제 마음을 조금도 감추지 않고 곱게 웃어 주었다. 연조를 따라 함께 웃어 보인 강준이 그녀의 손을 잡아 이끌며 함께 팀장실을 나섰다. 유리벽 너머의 눈들이 그들을 따라 바쁘게 움직이는 건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팀원들 앞에서 어깨 펴고.”

“네.”

“당당하게.”

“네.”

“우린 잘못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럼요.”

“그럼, 뭐 하고 있는데?”

짓궂은 음색의 질문에 연조는 또렷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어깨를 움츠리거나 고개를 숙이는 건 부끄러워서 그러는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흔들림 없는 대답에 환히 미소지은 강준이 뒤를 돌았다. 대표실을 향해 가는 그의 걸음이 가벼웠다.

“팀장님…….”

“아, 서윤준 씨.”

대표실에서 이제 막 나오는 윤준과 마주쳤다. 부드러웠던 강준의 눈매가 어쩔 수 없이 굳어 버렸다. 윤준 역시 굳은 눈빛으로 강준을 바라보았다.

“연조 아버님, 병원에 입원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지금은 괜찮으시니까 서윤준 씨가 걱정할 건 없습니다.”

아마도 재현에게 들었나 보다고 생각하며 강준은 건조하게 말했다. 자기가 생각해도 지질하게 말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 정도 질투도 없는 사랑이 어디 있을까 싶어서. 서늘한 눈으로 강준을 쏘아보던 윤준이 곧 고개를 돌리며 쓰게 웃었다.

“저, 사표 냈습니다.”

담담한 음성에 눈썹이 휘었다. 그것 때문에 대표님 호출이 있었나 보다 하는 예감도 들었다.

“연조 때문에 낸 건 아닙니다. 고민정 씨 때문은, 조금 있는 것 같고요.”

그럼 주요한 이유는 무엇이냐고 묻지 않았다. 윤준을 뒤흔들고 지나갔던 바람이 어떤 규모였는지 짐작하게 하는 마른 얼굴이 마음 쓰였지만.

“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겁니다. 더 늦기 전에 공부 더 해서 강단에 서고 싶어서요. 그게 저한테 가장 맞는 일인 것 같아서. 미련을 버리고 나니까 쉽게 결정됐습니다.”

서로를 바라보는 두 남자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서로 할 말이 그리 필요치 않은 사이에 당연한 침묵이지만, 이 순간의 정지가 두 남자에겐 많은 사고를 가능케 했다.

윤준이 민정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연조가 결혼하게 되었을지도 모를 남자. 아니, 인생은 알 수 없는 것이니 어쩌면 다른 이유로 둘은 헤어졌을지도 모르겠다. 자신 역시 이곳에서 연조를 만나지 않았다면 다른 어딘가에서 그녀를 만났을지도 모를 일이고. 알 수 없는 운명이란 원래 그런 법이니.

“건투를 빕니다.”

강준이 윤준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에게 위로를 해 줄 수도, 해 줄 마음도 없었다. 그러나 열심히 노력한 만큼 잘되었으면 좋겠다는 격려 정도는 하고 싶었다. 지금 이 악수는 강준이 윤준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것이었다.

앙상하고 수척한 손이 강준의 손을 잡았다.

잠시 동안 잡았던 손을 놓고 강준과 윤준은 걸음을 옮겼다. 다소 매서웠던 두 남자의 눈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11월의 초입, 가을 잎이 비비드 톤으로 짙게 무르익은 어느 날. 오늘은 좋은 자리이니 만큼 세살창을 열어 가을바람도 초대하고서, 일행은 만족스러웠던 식사 후의 여유를 우전과 함께 즐기고 있었다.

“참, 사부인. 이 녀석이 연조한테 어떻게 청혼했는지 얘기 들으셨어요?”

강준의 어머니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싱긋 웃었다. 이틀 전 뉴욕에서 들어온 그의 어머니에게선 고단해하는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기다려 온 아들의 혼사를 드디어 진행하게 되었다는 기쁨에 강준 어머니의 두 볼은 보기 좋게 상기되어 있었다.

“아니요, 사부인. 우리 유 서방이 연조한테 어떻게 청혼했을까요?”

연조의 엄마는 민망한 듯 웃으며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기는 강준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예쁘지 않은 것이 없는 예비 사위인지라 늠름했던 평소와 다르게 수줍어하는 모습조차도 보기에 마냥 좋았다.

“아무 이벤트도 없이 행복하게 해 줄 테니까 결혼하자고 했대요, 글쎄. 내 아들이지만 뭐 이런 녀석이 다 있는지 모르겠어요. 근사한 반지도 사고, 풍선도 좀 불고, 꽃도 등 뒤에 숨겨 놓고 청혼했어야지. 아무튼, 이 녀석. 예쁜 처자 반려로 모셔 오면서 그게 뭐니? 있는 것 다 가져다 바쳐도 모자랄 판에.”

강준 어머니의 장난스러운 타박에 예비부부는 수줍게, 어머니들은 환하게 웃었다.

“거기에 홀랑 넘어간 우리 딸도 있는데요, 뭐. 그래도 저는 우리 딸이 이해되네요. 유 서방이 하는 말이니 얼마나 믿음직했겠어요. 절대 빈말로 한 말은 아니었을 거예요. 그렇지, 유 서방?”

“네, 어머님.”

부실하게 청혼했다고 나무라는 어머니와 무조건 역성들어 주는 장모님 사이에서 강준의 얼굴은 곧 새신랑이 될 사람답게 훤했다. 서로를 깊이 원하고 있는 두 사람이 하나인 듯 함께하기 위한 절차를 차근차근 밟고 있는 요즘, 좋지 아니할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어제보다 한결 청량해진 바람에 손끝에 닿는 쑥색 다기의 감촉이 매끄럽고 따뜻했다. 아직은 창을 닫고 싶지 않아 따뜻한 찻잔으로 손을 데우며 그들은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눴다.

강준과 연조의 결혼식은 한 달 후로 예정되어 있었다. 상견례는 서울, 결혼식은 뉴욕에서 치르고 신혼여행은 하와이로 가기로 했다. 강준의 오피스텔을 신혼 분위기에 맞게 손보기로 했고, 예물은 이미 두 사람이 나눠 끼고 있는 백금 커플링과 이것만은 욕심내자며 조금 비싼 값을 치르고 산 한 쌍의 시계가 전부였다.

두 사람이 하나가 되어 가는 준비는 화려하진 않아도 더없이 흡족하게 진행되어 갔다. 강준이 연조에게 청혼한 후, 두 사람은 바쁜 일과 속에서도 견고한 미래를 위한 설계도를 착실하게 그려 나가고 있었다. 일과 사랑을 모두 열렬히 해내느라 두 사람에겐 허투루 쓸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열심히 살고 있다는 충일함과, 건강하게 살아 있다는 생동감이 그들의 가슴에 늘 넘쳤다.

그리고 그간 연조의 아버지는 수술을 받았다. 수술 경과도, 치료 효과도 모두 좋아 그의 건강은 순조롭게 회복되어 가는 중이었다. 서먹한 부녀 사이의 회복은 아직 요원해 보이지만.

연조는 그저, 상처를 잊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었다. 잘못은, 함부로 잊어선 안 된다는 진리를 염두에 두고서. 남의 잘못엔 엄격하고, 자신의 잘못엔 관대해지는 모순을 엄숙한 마음으로 경계하며.

“날씨 정말 좋아요. 쉬는 날에 날씨가 좋아서 더 좋아.”

“그러게. 이게 얼마 만의 여유인지 모르겠어.”

잠시라도 둘이 데이트하고 오라는 어머니들의 극성으로 밥 먹었던 방에서 내쫓긴 두 사람은 한옥 식당의 뒷마당을 잠시 거닐었다. 뒤뜰을 채운 소박한 꽃송이들이 깊어 가는 가을을 담뿍 머금어 청초했다. 날이 시릴수록 기상 높은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가을꽃을 바라보며 강준과 연조는 서늘한 공기로 호흡했다. 바람의 온도는 차지만 대기 중으로 떨어지는 햇살은 아직 따스했다.

“우리 내일 대전 다녀오고서 어디 갈까?”

“바로 집으로 와요. 어머님이랑 팀장님 피곤할 텐데.”

“월요일까지 휴가 냈잖아. 1분 1초가 다 아까워. 여기저기 막 쏘다니고 싶은데, 나는. 신연조 씨는 많이 피곤하십니까?”

“아니요…….”

“그럼 내일 밤에 남산에 갑시다. 서울 야경 보면서 철 난간에다 자물쇠 하나 정도는 채워 줘야지, 우리도.”

가을바람이 훑고 지나간 빈손을 살며시 잡아 오며 하는 강준의 말에 연조는 싱긋 웃었다.

내일은 연조 아버지의 집을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다. 어느 정도 사정을 알고 있는 강준 어머니는 그래도 연조를 이 세상으로 보내 주신 분이니 찾아뵈어야지, 하며 연조의 손을 다정히 토닥여 주었다. 아버지와 반목하는 그녀를 독하다 탓하지 않고.

아직도 연조의 마음은 기쁨과 슬픔과 깨달음을 오가고 있었다. 꽃이 피는 기쁨과 꽃이 지는 슬픔, 열매 맺는 성숙의 과정이 매년 반복되는 것처럼. 그러는 사이 어느 날 문득 어른으로 자라 있는 아이처럼.

시간이 조금 더 흐르고, 편안한 공기가 감돌았다. 짙게 붉은 단풍나무 아래의 너럭바위에 앉아 말이 없어도 좋은 순간을 강준과 연조는 고요히 즐겼다. 평온한 분위기와 더불어 밥 먹은 후의 졸음이 솔솔 밀려들어 연조는 강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떨립니다.”

강준이 볼을 쓰다듬어 주며 하는 말에 연조가 옅게 웃었다.

“이 정도로 떨리면 어떻게 해요.”

“신연조 씨는 안 떨리나?”

“저도 떨려요. 팀장님이 곁에 있으면…….”

가을 햇살에 말라 가는 풀 향기처럼 고요하고 따스한 웃음이 나직하게 퍼졌다.

“그런데 신연조 씨는 언제까지 나를 팀장님이라고 부를 겁니까?”

“죄송해요. 얼른 고쳐지지가 않아요. 팀장님하고는, 아니 강준 씨하고는 매일 회사에 같이 있어서 그런가 봐요.”

“애쓰지 마요. 어차피 팀장님 호칭은 바뀔 수밖에 없으니까.”

“아, 팀장님 내년엔 파트너로 승진하니까요?”

“아니. 그 전에 이미 신연조 남편으로 승격되니까.”

연조는 기대고 있던 강준의 어깨에서 머리를 들어 그와 눈을 맞춰 마주 바라보며 순하게 웃었다. 볼과 턱을 살며시 스치고 지나가는 기다란 손가락의 여운에 가슴이 설렜다.

“이번 프로젝트 고생 많았어요. 신연조 씨 좋은 아이디어 덕에 연달아 E&B PC 아니, E&B 일렉트로닉스와 일할 수 있었어. 수완 좋습니다, 신연조 씨.”

“잘해 낸 건 팀장님 덕분이죠.”

“그건 그래.”

강준의 밉지 않은 잘난 척에 연조는 더욱 환히 웃었다. 하나의 프로젝트를 끝내 놓고 쉴 틈 없이 곧장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게 되어 힘들었지만 연조는 제가 수주한 것이나 다름없는 이번 일에 더할 수 없는 보람을 느꼈다. 프로젝트 완성 후에 얻어지는 건 성취감만은 아니었다. 경험과 철학도 더불어 얻어지기에 성과가 주는 희열은 성취감, 그 이상의 것이었다.

“우린 앞으로도 계속 바쁘네.”

“그러게요.”

“아쉬워라. 그래도 즐겨 봅시다. 함께 살면 어떨지 엄청 기대되니까.”

“저도요…….”

올해 남은 기간은 결혼 준비를 하고, 결혼을 한다. 내년에 강준은 방을 옮기고, 연조는 포지션에서 ‘어소시에이트’를 떼어 낸다. 그리고 연조는 MBA를 수료하기 위해 회사의 지원을 받아 경영대학원에 다니기로 했다. 일과 병행해야 해서 힘들겠지만 열심히 살 수 있다는 건 근사한 일이므로 최선을 다해 앞으로의 날들을 즐겨 보기로 했다.

“이해인 수녀님 시에 ‘꽃씨를 닮은 마침표처럼’이라는 시가 있어요.”

씨앗을 품은 가을꽃을 바라보던 연조가 은은하게 웃었다. 마침 생각난 시의 제목이 꼭 그들의 날들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예쁜 제목이네.”

“네. 꼭 우리가 함께한 올해를 말하는 것 같아요. 앞으로 함께할 미래를 말하는 것도 같고.”

“어째서?”

“올해의 마무리는 꽃씨 같아서요. 꽃씨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니까.”

12월의 결혼으로 마무리될 아름다운 한 해. 그리고 꽃처럼 피어날 아름다운 나날들.

강준과 연조의 손이 덩굴처럼 얽혔다. 꽃씨를 뿌릴 두 사람의 앞날에 대한 예감에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사랑해……. 연조야…….”

강준이 연조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뒤뜰에 나와 있던 사람들은 가을꽃에 마음을 빼앗겨 좋은 구경거리를 놓쳤지만 덕분에 강준과 연조는 아슬아슬하고 가슴 설레는 입맞춤을 즐길 수 있었다. 창을 열어 놓고 아까부터 예비부부의 모습을 훔쳐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던 어머니들에게 그 모습을 들켜 버렸다는 건 모르고 있지만.

가을바람은 차고, 햇살은 따뜻하고, 꽃향기를 품은 공기는 맑았다. 나무 아래에 앉아, 강준과 연조는 서로의 마음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깊은 밤, 연조와 엄마는 오랜만에 마주 보며 함께 잠자리에 누웠다.

“내 딸……. 우리 연조가 벌써 커서 시집을 다 가고…….”

엄마가 거칠고 따뜻한 손을 뻗어 연조의 보드라운 뺨을 쓸어내렸다. 애틋하고, 자랑스럽고, 미안하고, 어여쁜……. 엄마의 눈에 담긴 감정은 하나가 아니었다.

“연조야…….”

“응, 엄마…….”

“미안해…….”

“뭐가 미안해……. 엄마는 나만 보면 만날 미안하대…….”

속상해져 말하는데, 엄마의 눈엔 어느덧 눈물이 가득 차올라 있었다.

“부모 자식 간은 전생에 원수 사이였대……. 전생에 자식 속을 뭉그러지게 한 원수가 후생엔 부모 되는 거라더라……. 그 업보를 자식을 지극정성으로 키우며 갚는 거랬어. 그런데 너희 아버지하고 나는…….”

굴러 떨어지는 엄마의 눈물을 연조가 손을 뻗어 천천히 닦아 주었다. 이제는 엄마의 눈물을 이해하며 먼저 닦아 줄 수도 있는 나이. 완벽한 어른이 되기엔 아직 먼 것 같지만, 그래도 이만큼이나 성숙하게 연조는 자라 있었다.

“엄마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래……. 그런 생각 하지 마요……. 내가 못된 마음 품고도 작게나마 반성할 수 있는 인격이 있다면, 그건 다 엄마가 가르쳐 준 덕분이야…….”

엄마의 눈물을 닦아 주고, 엄마를 위로하며, 연조는 엄마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엄마에게선 언제나 따뜻한 밥 냄새가 났다. 마음을 평온하게 가라앉히는 향기에 연조는 깊고 느리게 숨을 내쉬었다.

“미안해, 아가…….”

“뭐가 미안하다고 그래, 엄만…….”

“나도 네 아버지 용서하지 못했으면서 너더러는 하라고 해서, 미안해……. 넌 어려서부터 내 말은 무조건 잘 들었어……. 엄마 집 나갈 때 아버지, 할머니 말씀 잘 듣고 있으라는 말도 듣고, 너희 할머니 돌아가셨을 때도 모른 척하지 말고 제사 잘 모시라는 말도 듣고……. 엄마 짧은 생각으론 네 평생 한이 될까 봐 아버지 용서하라고 했어……. 마음이 썩어 나도록 노력해도 안 되는 걸 어떻게든 해 보려고 애썼을 거 생각하면 엄마는 정말…….”

엄마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품에 안긴 연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떨리는 손끝으로 머리칼을 가만가만 훑어 주는 느낌이 좋아 연조는 스르륵 눈을 감았다.

“그건 엄마 말 잘 들으려고 했던 것보다는 내 선택이었어. 그러니까 그런 마음 갖지 마요. 나는 엄마가 내 엄마라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는걸. 그런 남편을 두고도 엄마는 끝까지 나의 엄마였잖아……. 눈물 나올 만큼 나는 그게 정말, 고마워…….”

남편이 진절머리 나서 자식도 과감히 버릴 수 있었을 텐데…….

자기 행복을 찾겠다는 명목으로 제 피붙이도 서슴없이 버릴 수 있는 세상이건만, 오로지 딸만 바라보며 좋은 시절을 모두 지옥에 바친 엄마에게 죄인은 오히려 자신이었다.

“내가 없었다면 엄마가 좀 더 행복했을 거라는 거 알아. 그런데…… 그래도 나는 엄마 딸이었으면 좋겠어……. 다음 생에서도, 또 다음 생에서도.”

엄마의 품에서 잠시 떨어져 나온 연조는 눈물 맺힌 엄마의 눈을 바라보았다. 잘못한 게 없는데도 스스로를 죄인이라 낙인찍은 당신이 가엾어 아픈 마음으로 엄마의 눈물을 정성스럽게 닦아 주며 속삭였다.

“나는 세상에서 엄마가 제일 욕심나. 너무 면목 없기는 한데, 나는 좀 못됐으니까 그냥 바랄래. 이 다음에도, 또 다음에도…… 내 엄마 해 주세요…….”

“에구, 이 바보가……. 이 가엾은 것…….”

엄마는 연조를 품에 안고 다시 울었다. 엄마의 눈물로 잠옷 어깨가 흠뻑 젖어도 연조는 지금 이 순간이 슬프고 행복했다. 기쁘건 아프건, 마음을 온전히 내려놓을 수 있는 엄마가 있다는 것만큼 소중하고 감사한 건 없으니까.

시간은 고요히 흘렀다. 밤은 검푸르게 깊어 가고 세상의 소음이 어둠 속으로 흡수되었다. 시집가는 딸을 흐뭇해하고 한편으론 애틋해하며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던 음성도 시나브로 잦아들고, 엄마는 어느새 곤히 잠들었다. 딸의 손을 꼭 쥐고 평화롭게 잠든 엄마의 모습에 살며시 웃어 보인 연조는 똑바로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팀장님은…… 잠들었을까?

10층 위에 사는 강준을 생각하며 조금 더 짙게 웃었다. 바쁜 와중에도 짬을 내 엄마의 베이커리에도 함께 가 주고, 엄마의 장바구니도 들어 주고, 엄마를 환히 웃게 해 준 남자. 신연조를 얻으려면 못할 것이 없다고 그는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그의 빛나는 눈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진심 말고는 담아 두지 않은 그의 마음을.

엄마를 모시고 하는 상견례와 결혼식.

연조는 엄마를 그 자리에 모실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었다. 안타깝고 화나는 일이지만 혼자 결혼하는 것이 아닌 이상 그녀가 선택해야 하는 건 아버지와 새어머니의 자리를 제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 마련해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강준은 말했다. 그건 조금 더 부모님의 자격을 갖춘 분께 드려야 하는 자리이지 않겠느냐고. 엄마와 아버지의 관계 때문에 두 분 모두 초대할 수 없는 현실은 안타깝지만 그렇게 말해 준 강준 덕에 연조는 행복했다. 그리고 그가 몹시, 보고 싶었다.

자?

역시 그는 마음과 마음은 통하는 법이라는 막연한 진리를 믿게끔 만드는 남자이다. 연조는 나이트 테이블 위에 올려 둔 휴대전화를 얼른 집어 들었다. 엄마의 눈앞에서 손을 휘휘 저어 잠드신 것을 확인하곤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아니요.

짧게 답장을 보내고 방에서 나와 거실 소파에 앉았다. 마침 물을 먹으러 나온 화영이 자다 깬 부스스한 얼굴로 눈썹을 휘며 물었다.

“야밤에 뭐 해? 팀장님?”

“응.”

“치. 너희 팀장님 미워. 내 베프 뺏어 가고.”

“그래 봐야 10층 위에서 살 텐데, 뭐.”

“10층 위고 10리 밖이고 너랑 같이 못 사는 건 마찬가지잖아. 어쩜 그리 내 베프를 매정하게 데려갈 수 있어? 너희 팀장님한테 전해 줘. 이 결혼 반댈세!”

새침한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이는 화영에게 살며시 웃어 준 연조는 곧이곧대로 문자를 찍었다.

화영이가 전해 달래요. 이 결혼 반댈세.

답장은 곧장 날아왔다.

난 화영 씨 결혼 대찬성인데. 전해 줘요. 남자친구랑 결혼에 문제 생겨도 난 무조건 화영 씨 편이라고.

어깨를 으쓱이며 웃어 버린 연조는 곧장 말했다.

“팀장님은 너랑 규호 씨 결혼, 대찬성이래.”

“어머. 너희 팀장님 정말 요물이다. 못 당하겠네, 그 팀장님.”

화영의 새침한 표정은 오래 유지되지 못했다. 환하게 웃으며 물 잔을 씻어 놓은 화영은 이내 어깨를 들썩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자기는 세 살 어린 남자친구와 언제쯤 결혼할 수 있을지 아득한 마음으로 가늠해 보며.

화영은 마저 자러 방으로 들어가고, 연조는 인적 끊긴 야경을 바라보며 소파에 누웠다. 손에 꼭 쥐고 있는 휴대전화로 따뜻한 그의 마음이 연달아 전송되었다.

어머님은 주무셔?

네. 어머님은요?

주무셔. 1주일간 어머니 일정이 무척 빡빡하네. 내일 대전 다녀오고 나서 어머니 귀찮게 하지 말라고 하셔. 약속 잡은 거 많다고.

혹시 우리 피곤할까 봐 그러시는 거 아닐까요? 한국에 오랜만에 오셨는데 우리가 모셔야죠.

대표님하고 데이트 방해하지 말라시는데.

아…….

신연조.

네…….

마음은 벅찬데 아직 실감이 안 난다. 신연조가 내 아내가 된다는 게…….

저도요……. 팀장님이 내 남편이 된다는 게…….

어머니가 그려 주신 그림 보고 있었어. 왠지 떨리네…….

참, 저 궁금한 거 있었어요.

응.

그림 속의 팀장님 집, 아니 이젠 우리 집요…….

하하……. 응, 그래.

우리 집 거실 창 안에 긴 치마 입은 여자가 아마도 나였나 봐요.

글쎄…….

아니에요? 그럼 누구? 다른 여자?

반응이 격해서 좀 놀리고 싶네.

유강준 씨. 누군데요?

미안, 미안. 질투해 주면 좋아서 그래.

팀장님도, 참…….

그게 누구냐면…… 신연조일 수도 있고, 어머니일 수도 있고, 장모님일 수도 있고, 혹은 다른 여자일 수도 있고.

다른 여자?

베이비시터.

베이비시터요?

집으로 가는 길은 나 혼자만의 길은 아닐 수도 있으니까. 어머니가 그러셨어. 아내가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가는 길도 행복하겠지만, 함께 손 잡고 가는 길도 재미있을 거라고.

아……. 정말, 그런 것 같아요…….

가는 길에 빵집에서 단팥빵도 사 가고, 시장에 들러서 통닭도 사 갑시다. 우리 애들이 좋아할 거야.

네……. 저도 좋아요……. 생크림 케이크 말고 단팥빵, 치킨 말고 통닭.

연조야…….

네……. 강준 씨…….

내일 대전 다녀오고, 남산 다녀온 다음에 받고 싶은 선물 있는데.

뭔데요?

줄 겁니까?

네. 무엇이든지요. 말씀해 보세요.

무엇이든 준다니, 말하죠. 그런데…… 야한 말, 해도 되나?

아니요! 아니요, 팀장님!

특급 섹스…… 받고 싶어.

…….

남산 잘 보이는 특급 호텔로 방금 예약 끝냈습니다.

유강준 씨, 정말…….

고마워. 사랑해, 신연조.

깊어 가는 가을 밤, 금빛 달이 높이 떴다.

10층의 거리를 두고도 머리 위의 둥근 달은 연조도, 강준도 볼 수 있었다.

에필로그. think coffee

센트럴 파크의 동쪽, 어퍼 이스트 사이드의 작고 예쁜 개인 갤러리.

신랑 들러리 콜린과 신부 들러리 화영이 신랑과 신부 곁에 각각 서서 환히 웃고 있었다. 화영의 남자친구는 아직 학기 중이라 이 자리에 함께하지 못했고, 신랑 들러리는 신랑의 질풍노도기 시절, 괜한 입놀림으로 깐죽거리다 되게 얻어맞은 후 신랑과 친구가 된 이였다.

설득하되 가르치지 않고, 웃으며 끝까지 가 보자.

강준과 연조는 천장까지 닿을 듯 곧게 서 있는 설치 미술품 아래에서 서로의 손을 잡고 성혼 선언문을 읽었다. 갤러리를 울리는 환호와 박수가 터졌다. 서로를 향해 환하게 웃어 보인 두 사람은 반지를 나눠 끼고 입을 맞췄다. 옥색과 연분홍색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어머니들은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조용히 눈시울을 닦고, 주례를 맡았던 재현은 성혼 선언문의 벨벳 표지를 덮어 신랑에게 건네주며 그와 악수를 나눴다.

식장은 강준 어머니 소유의 갤러리이고, 그들이 성혼 선언문을 읽은 곳에 세워진 설치 미술품은 강준 어머니의 작품이었다. 작품명은 ‘at home’. 커다란 떡갈나무 형태의 작품은 프라이팬과 냄비, 사진틀, 장난감 자동차 등 집에서 나온 모든 물건으로 만들어졌다.

하객은 양가 어머님과 주례를 해 준 재현, 신랑 신부의 들러리를 서 준 절친한 친구 두 사람이 전부였다. 떠들썩한 활기는 없어도 평온한 온기가 함께하는 두 사람의 결혼식은 조금도 모자란 것이 없었다. 잠시 얼굴 보이고, 마지못해 사진 찍고, 의무감으로 건네는 축의금 없이도 충분히 행복한 날이었다.

“엄마 집으로 같이 가지 그러니. 점심 먹어야 하잖아.”

“NYU(뉴욕대학교) 근처 둘러보다가 아무 카페에서나 먹어도 돼요. 저녁은 근사하게 먹을 텐데요.”

결혼식이 끝나고 하객 모두 저녁 식사 시간 전까지 갤러리 근처 강준 어머니의 집으로 가 쉬기로 했지만 신랑 신부에게선 고단해하는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다소 빠듯했던 결혼 준비조차도 마냥 즐거웠던 그들이므로.

“너희들도 참, 대단히 특이하다. 결혼한 날에 꼭 그렇게 데이트를 해야겠니?”

“그래서 더 특별합니다. 결혼식날 데이트하는 부부는 많지 않을 테니까요. 저녁에 리츠칼튼에서 봬요.”

기념 촬영 후 식이 끝나자 강준은 연조의 웨딩드레스 위에 목도리를 두르고 발목까지 오는 따뜻한 모직 코트를 입혀 주었다. 구슬이 달린 굽 높은 웨딩 슈즈 대신 어그 부츠를 신기고서 장난스럽게 웃는 그를 강준 어머니는 못 말리겠다는 듯 바라보았다.

식이 끝나고 저녁 만찬을 예약해 둔 시간의 사이, 강준과 연조는 강준이 20대의 절반 이상을 보낸 뉴욕대학교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그의 꿈과 좌절과 열정과 희열이 고스란히 밴 곳의 자취를 찾아.

결혼식 때 입었던 드레스 코드 그대로 목도리와 코트를 덧입고 두 사람은 하객들에게 손 흔들어 인사했다. 갤러리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노란 택시에 올라타 워싱턴 스퀘어로 가 달라고 부탁하곤 강준과 연조는 손을 맞잡으며 마주 보고 웃었다.

「우리 지금 결혼했습니다.」

이마를 맞대고 예쁘게 웃는 커플을 룸미러로 흘끔거리는 기사에게 강준이 말했다.

「오 이런, 축하합니다! 신랑, 신부에게 신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남미계 운전기사는 과장되고 현란한 손동작으로 두 사람을 축복하며 환히 웃었다. 인상 좋아 보이는 기사의 넉넉한 웃음에 작은 목소리로 감사 인사를 건넨 연조는 강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치장된 거리가 눈앞을 스쳐 갔다. 계절은 겨울의 한가운데로 진입하고 있건만 1년 중 가장 따뜻한 날에 결혼한 것 같은 느낌. 연조는 제 손을 모두 덮어 준 강준의 손에 입 맞추며 엷게 웃었다.

택시는 각종 명품 숍과 플래그십 스토어로 즐비한 맨해튼 5번가로 들어섰다. 저기가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오드리 헵번이 바게트를 먹었던 곳이야. 유명한 보석상 앞을 지나갈 때 강준이 귓가에 속삭여 주는 말을 들으며 연조는 그에게로 좀 더 몸을 기댔다.

택시는 어느덧 워싱턴 스퀘어에 도착하고 강준은 두둑한 팁과 함께 택시비를 지불했다. 택시 기사의 과장된 음성의 축언을 한 번 더 들은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겨울답게 기온은 낮았지만 바람은 심술궂지 않았다. 햇볕은 어느 곳에든 후하게 비쳐 들어 두 사람은 그리 큰 추위를 느끼지 않으며 워싱턴 스퀘어 파크를 걸었다.

“저기 저 건물, 보여?”

워싱턴 스퀘어 아치 앞에 선 강준이 오른편 건물을 가리켰다.

“저기 붉은 벽돌 건물요? 네, 보여요. 아, 이 대리석 문 영화에서 본 적 있어요. ‘어거스트 러쉬’에서.”

“맞아. 로빈 윌리엄스가 이 앞에서 하모니카를 불었었지. 저기 보이는 저 건물 옥상에서 남녀 주인공이 사랑을 나눠. 그리고 어거스트가 생기지.”

“아…….”

첫눈에 끌린 운명 같은 만남에 나눈 짙고 짧았던 사랑. 그리고 잉태된 두 사람의 귀한 아이.

연조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유명한 영화가 촬영된 곳에 와 있다는 것도 낭만적이지만, 그와 함께 하는 모든 것이 다 특별했다.

“자, 갑시다. 내가 공부했던 곳이 어떤 곳인지 소개해 줄게.”

두 사람은 워싱턴 스퀘어 파크 안을 천천히 거닐며 공원 주변을 둘러싼 뉴욕대학교 건물들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강준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을 밥스트 도서관과 스턴 비즈니스 스쿨을 연조는 조금 더 오랫동안 눈에 담았다. 20대의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지 설레는 마음으로 상상해 보며.

“지금 생각해 보면 매일이 두근거리는 날들이었던 것 같아. 열심히 공부하다 보면 내가 펄떡거리며 살아 있는 느낌이 들었거든. 하이스쿨 때보다도 대학 와서 더 열심히, 더 재미있게 공부했던 것 같고. 지하철 타고 다니는 시간도 아까워서 근처에서 자취했었어.”

강준은 공원에서 나와 그리니치빌리지의 골목길을 걸으며 어느 집 하나를 가리켰다. 파크 애버뉴 430번가에 있는 보스턴 컨설팅 그룹 뉴욕 사무실에 취직하고도 한동안 그곳에서 살았다며. 벽돌집 외관으로 지그재그 걸쳐진 철 계단이 인상적인 그리니치빌리지의 낡고 정겨운 집들을 바라보는 강준의 눈은 짙은 감상에 잠겨 있었다.

언젠가 연조가 뉴욕은 어떤 곳이냐고 물었을 때 스트리트와 애버뉴로 나뉜 동네라고 강준이 간단하게 대답했던 것과 달리, 연조의 눈에 이곳은 치열하고, 빈틈없으며, 또한 낭만적이었다. 숨 쉬며 살아 있음을 극명하게 느끼게 하니까. 열렬하게 살아 있는 것만큼 근사한 일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배고프지 않아?”

“응. 배고파요.”

강준이 옷깃을 여며 주며 묻는 말에 연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 자주 가던 카페에서 커피랑 샌드위치 먹읍시다.”

“응. 좋아요.”

서로를 향해 다정하게 웃어 보인 두 사람은 스턴 비즈니스 스쿨 근처로 돌아와 낡고 작은 커피숍 안으로 들어갔다.

따뜻한 갈색 톤으로 꾸며진 카페 내부는 그리 특별할 것이 없었다. 그저 평범한, 하지만 곳곳에 온기가 밴 향기로운 곳. 하얀색이나 은회색 바디의 맥북을 주르륵 펼쳐 들고 무언가에 열정적으로 빠져 있는 사람들이 평범한 카페에 활기를 더했다.

온몸을 감싸는 따뜻한 공기에 포근함을 느끼며 연조는 강준을 따라 오더 데스크 앞에 섰다. 흑칠판에 적어 놓은 메뉴들을 훑어보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샌드위치 판매대에서 요기할 만한 빵도 받아 오고서 두 사람은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오늘은 그나마 사람이 없는 편이네. 언제나 NYU 학생들로 가득 차는 곳인데. 그중에 한 명이 나였어.”

연조가 코트 벗는 걸 도와주고 샌드위치의 종이 포장을 까 주며 강준이 싱긋 웃었다.

“커피 한잔하는 순간에도 여기에선 박 터지게 토론하거나 공부했었는데 말이지. 결혼한 날에 내 아내와 함께 망중한을 즐기러 올 줄은 몰랐네.”

지금도 맥북을 펴 놓고 에세이를 쓰거나 리포트를 작성하고 있을 학생들은 사뭇 진지한 표정이었다. 그들 사이에서 한껏 여유로운 표정을 지은 강준은 손을 뻗어 연조의 뺨을 쓸어 주었다. 연조는 살며시 웃으며 그의 손을 잡듯 따뜻한 잔을 꼭 쥐었다.

연조 자신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결혼식날의 풍경이었다. 메이크업을 받고, 머리를 손질하고, 예식과 기념 촬영 후 정신없이 옷을 갈아입고 폐백을 드린 후 또다시 옷을 갈아입고 연회장에서 하객들을 뵙는, 그런 결혼을 막연하게 상상했었다. 그런데 그들 부부는 예쁜 갤러리에서 온기 가득한 결혼식을 올리고는, 공정 무역 커피를 파는 뉴욕의 한 카페에 앉아 평범한 맛의 커피를 즐기며 서로를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웨딩드레스와 웨딩 슈트를 입고서.

“그럼, 싱크 커피에 왔으니 우리도 생각을 해 봅시다.”

무엇을 생각하여야 하느냐고 묻기도 전에 그가 냅킨을 펼치곤 품에서 만년필을 꺼내며 말을 이었다.

“우리의 미래에 관해서. 그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누긴 했지만 내 인생에 가장 많은 생각을 폭발적으로 했던 이곳에서 내 아내와 함께 다시 한 번 우리의 미래를 설계해 보고 싶군요.”

강준이 싱긋 웃으며 하는 말에 연조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아이는 셋은 낳을 생각입니다.”

“동의합니다.”

“일단, 신연조 MBA 수료 후에.”

“감사합니다.”

“아이가 생기면 집 옮깁시다. 기왕이면 마당 있는 집으로 이사하고 싶군요.”

“물론입니다.”

“앞으로 호칭은 여보로 통일합시다.”

“네, 여보.”

반대란 없고 외려 앞서 나가는 동조자에게 강준은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다 곧 환히 웃어 버리며 연조의 볼을 톡톡 두드렸다.

“팀장님 호칭은 그렇게 못 고치더니 여보는 참 쉽네.”

“그 호칭이 제일 마음에 들어서요.”

“이런. 나랑 같은데.”

활짝 웃는 연조에게 강준이 고개를 기울여 키스했다. 외투를 벗어 의자에 걸어 둔 그들은 완연한 신랑과 신부의 차림새였다. 하얀색 라눙쿨루스로 만든 연조의 머리핀과 강준의 부토니에르까지, 그들은 이제 막 결혼한 부부임을 온몸으로 증명했다.

「우리 지금 결혼했습니다.」

연조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남다른 그들을 힐끔거리는 옆 사람에게 강준이 말했다.

「와우, 세상에서 제일 멋진 신랑, 신부군요! 축하합니다! 신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맥북에서 시선을 뗀 카페의 손님이 큰 소리로 외치며 손뼉을 쳤다. 기분 좋은 축언은 카페 전체로 퍼져, 내일을 향한 열정을 잠시 내려 둔 뉴욕 시민들이 연조와 강준의 앞날을 손뼉 치며 축복해 주었다.

지금과 같은 기쁨과 행복과 사랑이 앞으로 살아갈 많은 날들 동안 두 사람과 함께하기를 바라며.

작가 후기

작년 여름, 이 글을 쓸 때의 제목은 ‘쏜(Thorn)’이었습니다. 가시라는 뜻의 ‘쏜’이라는 단어로 누구나 하나쯤 가슴속에 담고 있는 크고 작은 가시에 관해 표현해 보고 싶었습니다. ‘쏜’이라는 어감도 마음에 들었고, 밋밋한 연애를 하던 연조의 가슴에 뜨거운 사랑을 ‘쏜’ 강준의 모습을 표현해 보고 싶다는, 뭐 그런 시답잖은 이유로 정해 본 제목이었습니다.

그런데 글을 쓰다 보니 연조의 가슴에 꽂힌 가시보다는 연조 그 자체의 모습을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글을 쓰다 보면 아무래도 등장인물에 직간접적으로 글쓴이의 모습이 담기기 마련인데, 저는 연조에게서 제 모습을 많이 보았던 것 같습니다.

물론 연조는 주인공, 더구나 로맨스 소설의 주인공이라는 타이틀을 가졌기에 예쁘고, 날씬하고, 공부도 잘했고 등의 고급 옵션을 장착하였으니 예쁘지도, 날씬하지도 않고 공부도 그다지 신통치 않았던 저와 비교당하기에 연조로선 억울하고 기분 나쁠 것입니다. ^^;

그런데 열심히 하고자 하지만 뭔가 어설픈 모습이랄까요. 글 초반에 일 잘하는 강준을 동경하면서도 열등감을 느끼고, 윤준과의 관계에 성실하기는 하지만 그와의 관계를 어떻게 이끌어 가는 게 맞는 건지 고민하고 헤매는 연조의 모습들이 저와 참 많이 오버랩 됐었습니다. 아버지와의 갈등 빼고, 연조가 하는 갈등이나 심리가 아무리 제가 썼다고는 하지만 저와 참 많이 닮아 있었거든요.

그래서 연조가 제 개인적으로 정이 가는 캐릭터인가 하면, 그건 또 아닙니다. 스물일곱 살의 연조가 했던 고민들은 그 나이의 제가 했던 고민들이고, 아직도 하고 있는 고민이라 뭐랄까…… 징글징글하다고 해야 할까요.

열심히는 하는데 뭔가 어설프고, 강박증에 시달리며 상처받고, 인간관계에 늘 어려워하고.

그런 면에서 연조와 제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연조를 연민하거나 옹호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제 자신을 연민하거나 옹호하지 않으니까요.

그저, 있는 그대로의 나. 그걸 인정하고 받아들이고자 노력할 뿐입니다. 물론 더 잘난 내가 되고 싶은 욕망은 있습니다만, 미래의 나보다는 현재의 나를 받아들이는 것부터가 조금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이겠지요. 감사하게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이 제 곁에 있으니 오늘도 힘을 내어 어른으로서의 삶에 대해 고민해 보렵니다.

글을 쓰는 동안 제게 큰 깨달음을 주신 분이 계십니다. ‘결국엔 늙고 볼품없이 작아져 가는 부모님’에 관해 깊은 생각을 하게 해 주신 스와르다 님께 감사한 마음 전합니다. 많이 울고,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셨어요.

제가 뭐라고 아낌없는 사랑 다 주시며 늙고 작아져 가는 부모님. 정말 감사합니다. 깊이깊이 사랑하고 있습니다. 부디 건강하세요. 소중한 피붙이, 오빠도 물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약 올리고, 자극하고, 사랑해 주는 남편, 고맙습니다. 당신 아니면 할 수 없었던 소중한 경험들, 설레는 감정들 덕에 더디게나마 어른과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우리 항상 사이좋게 지내며 함께 어른이 됩시다.

매번 좋은 기회 주시고, 용기 주시는 윤정 씨와 애써 주시는 신영미디어 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많이 모자란 글에 쏟아 주시는 정성 덕에 저는 오늘도 자판을 두드립니다.

마음을 열고 교감해 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저를 사랑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네요.

어느덧 한 해의 정중앙을 향해 시간이 흐르고 있습니다. 유수와 같이 빠른 시간 속에서도 반짝반짝한 행복의 순간들 놓치지 않고 모두 건져 올리시길 바랍니다.

늘 건강하세요.

이화 올림.

신영미디어 eBook 출간 도서목록

국내 로맨스 소설의 선두주자, 신영미디어(www.sybook.co.kr)에서 출간된 유료 eBook이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바로 지금, 가슴 저미도록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유료 eBook으로 만나보세요!!

브레이브 하트 / 성희 / 4000원

“내가 들어야 할 말이 있을 거 같은데.”

그 말에 온몸의 신경이 일제히 곤두섰다.

그가 전부 알아 버린 것일까?

선우 그룹의 부도를 막아 주는 대신 내건 조건을…….

“나 때문이에요. 당신이 나와 결혼하게 된 거.”

하지만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그의 단정한 눈썹이 꿈틀거렸다.

가슴을 꾹꾹 누르는데 눈앞이 뿌옇게 변했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야.”

그의 말투는 느릿하고 아주 부드러웠지만

눈가에 와 닿는 손은 델 것처럼 뜨거웠다.

그 순간, 꾹꾹 눌러 두었던 욕심이 툭툭 터져 버렸다.

사실은 10년 전부터 서지혁, 당신을 사랑했다고,

이제는 나도 사랑받고 싶다고 용기 내 말해도 되는 걸까?

베리 베리 스윗(very very sweet) / 문청 / 4000원

반항할 마음으로 나간 선 자리에서

네가 처음 내 이름을 불렀을 때

너의 목소리에 내 심장이 대답했다.

그때 깨달았다,

이것은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라고.

모든 것을 버려야 한대도 너를 놓칠 수는 없다고.

하여 나는 지금 너를 만나러 간다,

상처투성이인 네가 살아가는 분홍빛 세상 속으로.

그래,

그렇게 처음부터 널 사랑했다.

그렇게 널 지독히 사랑한다.

그렇게 널 사랑할 것이다.

이제라도 나의 절실함이 너에게 닿기를.

첫맛은 시큼하고 중간엔 쓰지만

끝은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커피 같은 사랑,

very very sweet.

몽리 / 이지영 / 4000원

인간의 태를 타고났으나, 신의 기를 받고 태어나

신비한 능력에 극한의 아름다움까지 지닌 주나라의 공주 루루.

열일곱이 되던 해,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세 천신들의 내기를 알게 된다.

천신들이 내세운 세 명의 사내, 세 번의 만남, 세 번의 기회.

열흘째가 되는 날 루루의 선택에 따라 결정될

사국의 운명과 흥망성쇠, 그리고 붉은 실의 인연.

그리하여 꿈속으로 찾아온 세 남자를 차례로 만나 본 그녀는

반듯한 청의 태자를 선택하겠다 마음먹지만,

이상하게도 자신을 아무나 꺾을 수 있는 꽃이라 운운하며 비웃던

현의 황제 무혈이 계속해서 눈에 밟히는데…….

꿈과 현실을 넘나들며 펼쳐지는 그녀의 선택이 지금 시작된다.

소녀의 답이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으시옵니까?

여명지애(黎明之愛) / 김희진 / 4000원

타고난 운명마저 거스른 채 사내로 살아온 이유는

십 년 전, 피난길에서 만난 인연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그 약속을 지키고자 무예를 익혀 강한 사람이 되었고,

마침내 그의 앞에 당당하게 섰다.

매사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는 동성국 최고의 무인이자

최정예 부대인 충숙위의 총관인 명운.

그를 향한 연심은 숨긴 채 수하로서 인정받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그와 자꾸만 시선이 마주칠수록 마음이 흐트러지려 했다.

“언젠가부터 여명이 비칠 때 즈음이면 네 모습부터 찾게 되었다.”

밝아 오는 아침 햇발 아래에서 그가 그리 말했을 때,

나는 마음이 산란해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사사로운 감정놀음을 꾸짖기라도 하듯

그와 나를 둘러싼 사악한 음모가 막 시작된 것도 모른 채…….

더티 섹시 머니 / 린 레이 해리스 / 2700원

먹고 먹히는 짜릿한 승부의 세계!

라스베이거스의 카지노 딜러 카라에게 어느 날 빚더미 인생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다. 그녀의 능력을 알아본 한 도박업자가 자신을 위해 일하면 엄청난 보너스를 주겠다는 제안을 해 온 것! 돈이 절실했던 그녀는 덥석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이 오고 가는 게임을 진행하게 된다. 신중하게 게임을 시작한 카라. 하지만 곧 자신에게 끈적한 유혹의 눈길을 보내는 한 참가자에게 온 신경을 빼앗기고, 결국 집중력이 흐트러져 한순간에 거액의 판돈을 잃고 마는데…!

최후의 승자는 누구?

아내의 유혹 / 재클린 베어드 / 2700원

그녀를 향해 차갑게 타오르는 복수의 불꽃

6년 전, 아내의 외도로 이혼을 한 후 일에만 몰두해 온 오리온. 어느 날 예전 장인의 부고 소식을 듣고 장례식에 참석한 그는 전 부인 셀리나와 오랜만에 마주하게 된다. 마냥 앳되기만 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어느새 완연한 성숙미를 풍기는 그녀. 그 모습에 분노와 흥분을 동시에 느낀 오리온은 오래 전 셀리나에게 받은 상처를 되돌려주기로 결심하는데….

여전히 내 마음속에 자리 잡은 그녀…

영원도 부족한 사랑 / 밸 대니얼스 / 2500원

아버지가 가장 잘 아신다!

마크에겐 문제가 하나 있다. 병석에 계신 아버지가 그의 결혼을 원하고 있다는 것. 사라에게도 문제가 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날 그녀는 마크 때문에 실직하게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발목까지 삐었다. 마크는 그녀에게 마스터 플랜을 제안한다.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사라와 약혼한다는 내용이다.

사라는 꿈에서나 그려보던 생활을 하게 되지만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지키기 위해서는 도망쳐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마크와 그의 아버지는 다른 속셈을 품고 있는데…

매혹적인 라이벌 / 미셀 레이드 / 2700원

난 가문의 이름 따위 버린 지 오래라고요!

할아버지와 의절한 아버지로 인해 고향인 그리스가 아닌 영국에서 나고 자란 조. 부모님을 교통사고로 떠나보낸 뒤, 아직 갓난아기에 불과한 남동생과 단둘이 남게 된 그녀는 최선을 다해 동생을 보살피며 씩씩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조에게 날아온 청천벽력 같은 편지 한 통! 그것은 바로 남동생을 가문의 후계자로 삼겠다는 할아버지의 파렴치한 통보였다. 그녀는 절대 동생을 뺏기지 않겠다고 결심하지만, 조부의 오른팔인 앤튼이 찾아와 거부할 수 없는 조건을 내세우자 조금씩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는데….

물러설 곳 없는 그녀에게 손을 내민 단 한 사람…

BORI 공금갠소요게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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