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책임져야 할 남자
제주도를 다녀온 지 5일이 지났다. 프로젝트는 순조롭게 진행되어 갔고, 팀 분위기는 한결 더 부드러워졌다. 꿈결과도 같은 감미로운 시간을 보내다 왔지만 일상으로의 복귀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워크숍에 묻어갔던 달콤한 여행은 아쉬움과 함께 활력 충전이라는 기분 좋은 선물을 안겨 주었기에.
“오늘 점심은 같이 못하겠는데.”
금요일 오전, 얼마 전 강준이 지시했던 E&B PC 기업명 변경 안에 대한 제안서의 아우트라인을 잡고 점검받는 중이었다.
“약속 있으세요?”
“고민정이랑 점심 하기로 했어요.”
딱 한 번 우연히 만났을 뿐인데도 불편해지는 이름에 연조는 살며시 미간을 좁혔다. 리뷰를 마치고 서류철을 덮은 강준이 연조의 표정을 힐긋 살피곤 랩톱의 자판을 가볍게 두드렸다.
“신경 쓰입니까?”
“네…….”
“나는 이래서 신연조가 좋아. 숨김없이 솔직해서.”
칭찬받고 싶은 기분은 아니지만 강준의 명쾌한 어투에 피식 웃었다. 연조의 웃음에 같이 웃어 보인 강준은 하던 일을 멈추고 연조를 바로 바라보았다.
“민정인 나한테 친여동생 같은 아이예요. 소문처럼 서윤준 씨랑 삼각관계가 아니라. 어려서부터 친분 있었던 사이거든. 그리고 실은, 우리 어머니랑 대표님이 사귀고 계세요.”
“네……. 저도 알아요.”
“알고 있었어?”
“서윤준 씨한테서 들었어요.”
연조의 입에서 나온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강준의 눈썹이 급경사를 그리며 휘어졌다.
“이름만 들어도 질투 나네.”
씁쓸하게 웃으며 뱉는 말에 연조는 호흡을 가다듬기 위해 낮은 한숨을 쉬었다. 이런 감정은 처음이었다. 질투해 주는 남자 때문에 가슴 떨리리라곤 한 번도 예상해 본 적 없었는데…….
“질투 나요, 저도. 팀장님이랑 고민정 씨가 남자, 여자 사이 아니라는 거 알면서도요…….”
알면서도 질투 난다는 좁아터진 속을 내비쳤건만 그의 표정은 밝아졌다. 질투의 저변에 깔린 마음이 무엇인지 모르지 않을 테니.
“오늘 당당하게 밝히고 올게요. 신연조 씨와 내가 어떤 사이인지.”
“고민정 씨한테요?”
“고민정한텐 말해야 할 것 같아. 하루라도 빨리.”
어쩐지 연조는 강준과 민정의 만남이 조금 불안해졌다. 자신이 강준과 행복해졌다는 이유로 윤준과 민정이 양심의 가책을 덜어 내고 연이 닿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괜한 심술 때문이 아니라, 서로 불편한 관계가 될까 봐 연조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신연조 씨 표정이 왜 어두울까?”
강준의 물음에 연조는 눈을 가라뜨며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윤준과 민정의 관계를 경계하는 자신에게 연조는 놀랄 지경이었다. 사랑이라는 것은 그저 곱고 예쁘고 관대한 형태만은 아닌 것 같아 당혹스러웠다.
“말…… 안 할래요.”
장난스럽게 건넨 말을 심각하게 받는 연조를 강준이 눈썹을 휘며 바라보았다. 그래도 연조는 제 속을 말해 줄 수 없었다. 이런 못난 마음까지는 도저히 말 못할 것 같았다.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그의 시선이 제게 달라붙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연조는 강준에게서 시선을 비킨 채 팀장실에서 나왔다.
정말 말 안 해 줄 겁니까?
자리에 앉자마자 휴대전화가 몸을 떨었다. 고개를 들어 팀장실 쪽을 바라보자 강준이 연조의 시선을 스쳐 가며 지금 당장 답을 달라는 듯 굳은 표정으로 책상 위에 놓인 휴대전화를 바라보았다.
네. 창피해서 못하겠어요.
연조는 얼른 답장을 찍어 보내곤 마우스를 움직여 엑셀 프로그램을 열었다.
절로 깊은 한숨이 쏟아져 나왔다. 오늘도 해야 할 일이 탑처럼 쌓여 있고, 오늘 점심은 함께 먹을 수 없고, 강준은 오후에 외근을 나가야 하고, 일과는 평소와 같이 빡빡하다. 그나마 야근은 하지 않아도 되지만 이 상태론 그도, 자신도 답답한 하루를 보내야 할 것 같다.
몰라. 그래도 말 못해.
처음 느끼는 감정들이 쑥스러운 연조는 고집스럽게 뇌곤 작업해야 할 자료들을 훑었다. 유리벽 너머, 머리 위로 내리꽂히는 강준의 시선이 따가웠다.
“왜 이렇게 못 먹어? 나랑 만날 때마다 뭘 못 먹는 것 같네?”
강준은 관자 요리를 깨작거리다 포크를 내려놓았다. 민정은 못마땅하다는 표정이지만 강준은 잔에 담긴 냉수만 수시로 들이켰다.
“입에 안 맞아?”
“응.”
“오늘은 뭐가 먹고 싶었는데? 오늘도 해장국?”
“아니.”
“그럼, 뭐?”
“콩국수.”
신연조랑 같이…….
뒷말은 삼키고 휴대전화를 바라보았다. 점심 맛있게 먹으라는 문자 메시지에 연조는 아직 답을 주지 않았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녀가 까다로워진 것인지 알 수 없어 답답하고 초조했다.
“뭐야. 오빠한테 하소연 좀 하려고 했더니 오늘따라 왜 이래.”
“말해. 네가 언제부터 내 상태 따졌어.”
심드렁하게 대꾸하곤 다시 휴대전화를 들여다보았다. 우도의 에메랄드빛 바다를 찍은 배경 화경만 반짝거릴 뿐 문자 메시지 전송을 알리는 불빛이 반짝일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아빠한테 엄청 혼났어.”
손에서 커트러리를 내려놓은 민정이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 들었다.”
강준은 테이블 위로 휴대전화를 던지듯 내려놓았다. 대꾸해 주면서도 머릿속엔 온통 신연조뿐. 무엇을 잘못했는지 안다면 미안하다고 사과라도 할 텐데 무얼 잘못했는지 아는 게 없으니 그럴 수도 없었다.
문득, 남자들이 연애의 고충을 토로할 때마다 공통으로 언급하는 상황이 생각났다. 잘못했다고 비는 남자친구에게 오빠가 뭘 잘못했는지 아느냐며 날카롭게 따져 묻는다는 여자친구. 여자의 억지에 막막해하는 남자의 심정을 강준도 알 것 같았다. 연조와 자신이 정말 연애를 하긴 하는가 보다 하는 행복한 기분도 들었다.
“신연조한테 보낸 문자 메시지는 지웠는데 통화 목록 지울 생각을 못한 바람에 딱 걸려 버렸어. 우리 아빠가 마냥 좋으시다가도 한번 화내시면 정말 무섭잖아. 그래서 그동안 기죽어서 살았어.”
그녀와 자신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사소한 다툼도 하는 보통의 연애를 하는 건가 싶어 피식 웃어 보이는데, 민정의 푸념이 계속되었다.
“그래서, 서윤준하고는 어떻게 할 건데.”
민정이 기가 죽어 있는 게 조금 측은해져서 물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이토록 간사하여 간절히 원하던 여자의 마음을 얻고 사랑싸움을 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다 보니 민정을 가엾게 볼 수 있는 아량도 생겼다.
“모르겠어. 여전히 갖고 싶어 미치겠는데, 그 남자 정말 독해.”
“무슨 일 있었어?”
“신연조랑 헤어졌다고 하기에 그럼 나랑 결혼하자고 했더니 서윤준이 그러더라. 자기 어머니, 이혼 가정 용납 못하신다고. 대놓고 가정교육 운운하면서 나 무시하고 상처 줄 거래. 예물, 예단, 혼수 노골적으로 원하실 거고. 형편 넉넉하니까 자기 어머니가 원하는 대로 해 올 수는 있겠지만 이렇게까지 해서 이 결혼을 해야 하는지 자괴감 들게 될 거래. 서윤준 어머니가 신연조한테도 그렇게 상처 줬대. 내 자존심에 그런 시월드 용납이 되겠느냐고 하더라.”
“그런, 얘기까지 해?”
“응. 그 말 듣는데 정말 이게 뭔가 싶었어. 나를 정말 걱정해 주는 건지, 아님 독창적인 방법으로 걷어차는 건지. 아무튼, 서윤준은 나랑은 아니래. 나를 받아 줄 수 없대.”
민정이 창밖을 바라보며 손끝으로 눈시울을 매만졌다. 강준은 가까이에 있던 냅킨을 집어 민정의 앞에 놓아 주곤 이마를 문질렀다. 문득, 자기는 가시가 많다고 고백하던 연조의 모습이 떠올랐다.
민정의 말 안에서 연조의 부모님이 이혼했다는 걸 강준은 이제야 알았다. 그리고 궁금해졌다. 그녀의 가시는 어디에서부터 연유된 것인지. 이혼한 부모님인지, 우유부단했던 윤준인지, 자기 자식만 귀해 남의 집 귀한 딸에게 함부로 상처 준 윤준의 어머니인지, 아니면 또 다른 이유인지, 혹은 이 모든 것 때문인지.
얼마 전 회사 건물 커피숍에서 우연히 마주친 아버지를 바라보며 얼음처럼 굳었던 연조를 떠올리며 강준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그녀에 대한 개요를 모두 파악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신연조한테 사과할까?”
“뭐?”
연조를 생각하는 중 뜬금없이 건네져 오는 소리에 강준은 미간을 구겼다.
“아빠가 보낸 것처럼 문자 메시지 보낸 것 말이야. 성공하진 못했지만 어쨌든 신연조한테 충격 주고 상처 주려고 했던 건 맞으니까.”
“대표님은 뭐라고 하셨는데.”
“가만히 있으라고 하셔. 신연조 앞에 나설 자격 없다고. 괜히 신연조 눈앞에 보여서 신연조 불편하게 하지 말래.”
“그럼 그렇게 해.”
“뭘?”
“가만히 있으라고.”
“오빠도 내가 그냥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단호히 끊어 내듯 하는 말에 민정의 미간이 좁혀졌다. 저에게만 잘못했다고 하는 상황이 서운하고 화난다는 듯 민정의 볼이 한껏 부풀려졌다.
“진정으로 사과할 마음은 있어?”
강준의 물음에 민정은 대답하지 못했다. 치켜떴던 눈을 내리깔며 농어 요리를 포크로 공연히 뒤적거릴 뿐이다.
“신연조랑 나, 사귀는 사이야.”
“뭐?”
민정의 눈이 단박에 휘둥그레졌다. 그러곤 무언가를 생각해 내려는 듯 눈살을 찌푸리더니 금세 눈 끝을 치올렸다.
“전에 오빠가 짝사랑하고 있다던 여자가 혹시, 신연조였어?”
“맞아.”
강준의 깔끔한 인정에 민정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허탈하다는 듯 웃었다. 그러다 곧, 곱게 화장된 얼굴을 흉하게 구기며 그를 책망했다.
“그럼 오빠가 내 계획에 동참해 줘도 됐었잖아. 왜 나만 나쁜 사람 만들어? 애인 있는 사람 좋아한 건 오빠나 나나 마찬가진데.”
철없고 이기적인 투정에 강준은 한숨이 나왔다. 제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면서 사과하려는 생각을 했던 자체가 어이없고 화났다.
“나는 신연조랑 되고 너는 서윤준과 안 된 이유, 말해 줄까?”
“뭐 때문인데?”
“나는 그 사람이 상처받는 게 두려웠지만, 너는 네가 상처받는 게 두려웠겠지. 그래서 뺏으려고 한 거 아니야? 서윤준 입장이야 어찌 되든 네 마음 아픈 건 싫으니까.”
“뭐…… 라고?”
민정의 눈이 더욱 날카로워지고 치올라 간 눈 끝에 눈물이 맺혔다. 강준의 말에 정곡을 대단히 깊게 찔린 듯했다.
“고민정 너, 신연조 앞에 절대로 나타나지 마. 만약 어머니와 대표님이 재혼하신다면 어쩔 수 없이 봐야 할 순간이 있겠지만 그냥 그것으로 끝내.”
“오빠!”
“내 사람은 내가 지키는 거야. 남한테 맡기지 않고, 남에게 공연한 상처 주지 않고, 내가 하는 거라고. 정말 내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
“진지하게 경고하는데, 신연조한테 상처 주지 마. 아무리 너라도 용서 못해.”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입만 벙긋거리는 민정을 두고 강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현듯이, 못 견디게 연조가 보고 싶어졌다. 모든 걸 묻고 싶고, 모든 걸 말하고 싶어서.
“밥은 네가 사. 어디에서도 받을 수 없는 인생 공부 됐을 테니까.”
“오빠, 정말!”
“간다.”
강준은 짧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 휴대전화를 꺼내 연조와 연결되는 단축키를 눌렀다. 목이 메고 가슴은 터질 것 같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려고 나는 이토록 애썼다고 자랑하고 싶고, 무엇이 당신을 아프게 했느냐고 눈물을 닦아 주며 묻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그녀에게 칭찬받고, 사랑받고 싶었다.
하지만 전화는 그녀와 연결해 주지 않았다. 음성 사서함으로 넘어간다는 안내에 조바심이 난 강준은 전화 받으라는 문자 메시지를 빠르게 찍어 보내곤 다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 받아, 신연조.”
소리 내어 말하고는 이마를 짚었다. 간절히 바라도 그치지 않는 신호 음에 통화 종료 키패드를 거칠게 터치했다. 마음이 급해진 강준은 이대론 안 되겠어서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사무실로 가서 보면 될 텐데도 왜 이리 심장이 절박하게 뛰고, 지금 당장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면 못 견딜 것 같은 마음이 이는지 모르겠다.
- 네. 월드 컨설팅 사업 전략 기획…….
“유강준입니다.”
- 아, 네, 팀장님.
평소와 다르게 정색한 어투를 느꼈는지 현구가 쭈뼛거리는 음성으로 답했다.
“신연조 씨, 자리에 있습니까?”
- 신연조 씨요? 지금 자리에 없습니다.
“아직 식사 중입니까?”
- 그런 건 아니고, 급하게 고향 집에 내려갔습니다.
“고향 집에? 왜죠?”
뜻밖의 말에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 그게, 신연조 씨 아버님이 쓰러지셨다는 연락이 와서…….
“어딥니까, 거기가.”
놀란 강준은 발레파킹한 차량이 나오자 얼른 키를 건네받으며 급하게 운전석에 올랐다.
- 네?
“신연조 씨 아버님 계신 병원 말입니다.”
- 글쎄요. 그건 저도 잘…….
“혹시 신연조 씨 휴대전화 두고 갔습니까?”
가슴이 한층 더 답답해진 강준은 넥타이를 끌어내리고 와이셔츠의 첫 번째 단추를 풀었다.
- 아니요,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런데 왜 전화를 안 받는 거야, 신연조.
이런 못 견딜 불안감을 던져 주다니, 그녀를 가만히 두고 싶지 않았다. 아니, 가시가 많다고 했던 그녀의 마음을 들여다보며 그녀를 안아 주고 싶었다. 일단은, 발목을 붙잡고 있는 현실만 해결해 놓고.
“오늘 선인 법무법인에 내가 꼭 가야 합니까?”
- 그런 건 아닙니다만……. 회의 참관하고 서류만 좀 받아 오면 되니까요.
“그럼 부탁하겠습니다.”
- 네?
“이현구 시니어 오늘 외근 나갈 거 없잖아.”
- 하지만…….
“둘째 예정일이 언제라고 했죠? 아기 침대 어때요.”
- 침대는 됐고 유모차가 필요합니다. 첫째 때 쓰던 건 처제네 줬더니 다시 뺏어 올 수가 없어서요. 지금 한창 쓰고 있거든요.
“골라 두세요. 마음에 쏙 드는 고급스럽고 비싼 것으로.”
- 감사합니다. 그럼 사양하지 않고 잘 받겠습니다. 유모차는 양심이 허락하는 가격으로 고르겠습니다. 아, 병원은 대표님께 여쭤 보시죠. 대표님께 말씀드리고 갔습니다, 신연조 씨. 언제 들어 보니까 신연조 씨 아버님하고 대표님하고 고향 친구 사이라는 것 같던데 뭘 좀 알고 계시지 않겠습니까?
“알겠습니다. 고마워요.”
- 그럼 우선권, 저한테 주시는 겁니까?
“무슨 우선권?”
- 소문낼 수 있는 우선권 말입니다. 전에 팀장님이 저한테 물어보셨잖습니까. 와이프 어떻게 꾀었냐고. 좋아하는 여자한테 들이대는 것밖에 못하겠다고 하시면서요. 팀장님이 들이댔던 상대가 제 생각엔 아무래도…….
“신연조 씨한테 동의 얻으면. 그나저나 이현구 시니어, 눈치 제법입니다.”
- 눈치야 뭐, 이 짓 하다 보면 저절로 수련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그때까지 입에 지퍼 채우겠습니다. 그나저나 우리 팀 요즘 장난 아닙니다. 매우 핫한데요. 핫 플레이스가 어딘가 했더니 월드 컨설팅 사업 전략 기획 3팀에 있었네요.
“정말 뜨거운 맛 보고 싶지 않으면 신연조 씨가 동의할 때까지 기다리죠.”
- 네! 알겠습니다. 운전 조심하십시오.
프로페셔널들답게 협상은 군더더기 없이 줄 것 주고, 받을 것 받으며 깔끔하게 마무리되었다. 무엄하게도 리더를 놀리는 말에 나직한 경고도 확실히 박아 두고서.
현구와 통화를 끝내고 블루투스를 연결한 강준은 기어를 옮기고 브레이크에서 천천히 발을 떼며 재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 음은 금세 그치고 강준의 답답한 속을 틔워 줄 음성이 반갑게 들려왔다.
- 응, 유 팀장.
“대표님.”
- 응.
“저, 신연조 씨 사랑합니다.”
- 응?
“신연조 씨 아버님, 어느 병원에 입원하셨는지 알려 주십시오.”
이유부터 던지고 본론을 까 보이는 화법에 저쪽에선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 강준아.
“네.”
직책이 아닌 이름으로 부르는 음성에 강준은 긴장했다.
- 너 정말…… 연조 사랑하니?
“네, 사랑합니다.”
온몸과 마음이 송두리째 흔들릴 정도로. 조금은 미쳐야 사랑도 뜨거워지는 것이니 상관은 없지만.
쓸데없는 말을 덧붙이지 않은 강준의 인정에 저쪽에선 잠시 정적이 흘렀다.
- 강준아. 실은, 말이다…….
재현의 나직한 음성이 이어졌다. 강준은 이정표를 확인하며 묵묵히 핸들을 돌렸다. 그를 잘 알고 있는 재현이 그를 믿고 건네는 말들을 새겨들으며, 강준의 차가 연조를 향해 달려갔다.
“여보세요. 신연조 씨?”
대전에 거의 다 와 갈 무렵 다시 시도해 본 통화가 연결되었다. 반가운 마음에 이름부터 부르자 저쪽에서 쭈뼛거리는 음성이 넘어왔다.
- 아, 네, 여보세요. 저기 혹시, 전화기 주인하고 어떻게 되는 사이십니까?
중년 정도 됐음직한 남자의 목소리에 강준은 일순 당황했다.
“전화 받으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연조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싶어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드는데, 저쪽에서 근심을 날려 주는 대답이 곧바로 돌아왔다.
- 이 전화기 주인 아가씨가 버스에 전화기를 놓고 내렸습니다. 무슨 일이 있는지 하도 안절부절못하고 있기에 마침 나한테 청심환이 있어서 그거 먹였는데. 그런데도 아가씨가 정신이 없었는지 전화기를 흘리고 내렸어요. 혹시 연락 오는 게 있을까 싶어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침 잘됐네요. 이제 막 분실물 센터에 가져다주려던 참이었는데. 여기가 어디냐면 대전 복합 터미널 근처에 있는 중화 요릿집입니다.
“아, 그렇습니까. 감사합니다. 제가 곧 찾으러 가겠습니다.”
연조에게 아무 일도 없다는 걸 확인받은 안도감에 가슴을 크고 넓게 들썩이며 한숨을 내쉬는데, 저편에서 웃음기 묻은 목소리가 다시 건네져 왔다.
- 그런데 전화 거신 분이 이 휴대전화 주인 아가씨가 책임져야 할 남자입니까?
“네? 무슨, 말씀이신지…….”
- 아니, 전화기에 그렇게 뜨기에. 책임져야 할 남자, 이렇게요.
사람 좋아 보일 것 같은 음성으로 하는 말에 잠시 멍하게 있던 강준의 얼굴로 환한 미소가 번졌다. 가슴이 뛰어오르고, 핸들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래 놓고는. 책임진다 해 놓고는 이게 무슨 무책임한 짓이야, 이 여자야.
연조의 휴대전화를 소지하고 있다는 마음 좋은 분과 통화하며 강준은 결심했다. 그녀에게 철저하게 책임을 물리겠다고.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도무지 들려주지 않는 그녀의 음성으로 애정과 타박이 뒤섞인 잔소리를 들으며 매일 아침을 시작하고 싶다는 달콤한 생각이…….
두 시간여를 쉬지 않고 달려 그녀에게 가는 길. 하루를 꼬박 걸어 드디어 그녀에게 닿는 듯, 강준은 연조를 만나러 가는 이 길이 더디고, 안타깝고, 또한 설렌다.
“하루 이틀 병원에서 안정 취하게 하시죠. 쇼크 올 정도의 통증이라 환자분이 무척 힘드셨을 겁니다. 그리고 하루빨리 수술 받으셔야 합니다. 아직 초기이긴 하지만 암 전이는 빠르게 이뤄질 수 있기 때문에 미룰 일이 아닙니다.”
“네, 선생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해요. 저는 정말 우리 남편 지금 당장 어떻게 되는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어서 수술하겠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새어머니는 두 손을 기도하듯 모으고 서서, 가는 의사의 뒤통수에 대고 연신 머리를 숙였다. 얼마나 많이 놀랐던 것인지 새어머니의 얼굴은 창백하게 바래 있었다.
연조가 병원에 도착했을 땐 새어머니의 다급했던 음성만큼이나 상황이 나쁜 건 아니었다. 연조가 오기 전에 이미 한차례의 폭풍이 지나고 지금은 무거운 공기만이 사위를 감싸고 있었다.
연조는 낮은 한숨을 내쉬며, 잠든 아버지의 초췌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듬성듬성 올라온 흰 수염과 뼈와 상접할 듯 살이 내린 두 뺨, 조금의 탄력도 찾아볼 수 없이 주름진 목, 푸른 힘줄만이 애처롭게 솟은 마른 손.
연조는 곧, 시선을 돌렸다. 싫었다. 동정이 이는 모습과, 동정이 이려는 마음이.
“연조야, 아버지 깨어나시면 어서 수술 받으시라고 네가 꼭 좀 설득해 줘. 자기가 더 살아서 뭐 할 거냐고 저리 고집이시잖니. 정말이지 요즘은 살아도 사는 것 같지가 않아. 너한테 전화하려고만 하면 절대 하지 말라고 역정 내고, 가끔 밤에 혼자 울고…….”
새어머니가 깊은 한숨과 함께 늘어놓는 근심을 연조는 담담히 들었다. 아버지가 쓰러졌다며 전화를 해 온 새어머니는 흐느끼는 사이로 그간 아버지의 근황을 알렸었다. 약도 안 먹어, 식사도 부실하셔, 잠도 잘 못 주무시는데다, 자기가 죄인이라고 푸념만 해…….
새어머니의 말을 듣던 연조는 기가 막혔다. 이제 와서 그러는 게 무슨 소용이라고. 스스로를 동정할 자위 따위 누가 주었다고. 그럼에도 아버지가 쓰러졌단 말에 만사 제치고 안절부절못하며 달려온 자신은 무엇이란 말인지…….
혹시 아버지가 잘못되시면 어쩌나 하는 불안한 예감을 가슴에 담고 달려오며 들었던 감정의 9할은 원망이었다. 그날, 화영의 커피숍에서 그렇게까지 몰아붙였는데 아버지가 잘못되면 자기는 무너져 버릴 것 같다는 두려움에 괴로웠다. 죗값을 치르지 않은 사람 때문에 외려 제가 잘못한 것 같다는 가책은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억울해지고 싶지 않았다.
“연조야…… 네가 여길 어떻게…….”
아버지의 얕은 잠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버지는 괴롭게 일그러진 얼굴로 부스스 눈을 뜨더니 핸드백을 꽉 붙잡고 서 있는 연조를 겸연쩍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당신이 연락했어?”
새어머니에게로 옮겨 간 아버지의 시선이 싸늘했다.
“그럼 어떡해요. 당신은 수술 안 받겠다고 고집만 부리고 약도 잘 안 자시는데.”
아버지 앞에서 늘 순종적이었던 새어머니가 붉어진 눈시울로 아버지를 바라보며 타박했다.
“영훈이는요?”
연조는 자기를 앞에 두고 대립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이복동생을 찾았다.
“영훈이? 어머, 얘 태권도 학원 끝날 시간 다 돼 가네.”
“데리고 오세요. 여긴 제가 있을게요.”
“그럴래? 그럼 얼른 다녀올게. 연조 네가 아버지 좀 잘 설득해 봐. 알았지? 너만 믿을게, 연조야.”
더욱 날카로워지는 아버지의 시선을 외면하며 새어머니는 부리나케 병실에서 나갔다.
새어머니가 사라지자 불편한 정적이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았다. 아버지는 누웠던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연조는 나직하게 한숨 쉬며 비어 있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왜 수술 안 받으세요.”
화나고, 원망스럽고, 한편으론 애처롭고, 다소 짜증나는 감정들을 욱이며 고요히 말했다. 아버지는 대답 없이 시선을 돌렸다.
“아버지.”
나직하게 부르고서 무릎 위에 올려놓은 핸드백을 두 손으로 꽉 쥐었다. 아버지에게 새삼스러운 분노가 일었다. 이제 와서 불쌍한 척, 미안한 척, 딸 앞에서 제대로 고개도 못 들고 있지만 여전히 이기적인 모습에 연조의 인내심은 더 이상 버틸 의지를 상실했다.
“몸을 때리지 않았다고 안 아픈 게 아니에요. 마음을 때리는 것도 너무 아파요. 잘 잊히지 않아서 더 아파요.”
연조를 외면하고 있던 아버지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돌아왔다. 누렇게 흐릿한 아버지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할 말을 찾을 수 없는 듯 벙긋거리는 입술이 부옇게 메말라 아버지는 더욱 볼품없고 초라해 보였다.
“아버지가 원하시는 게, 저의 용서인가요? 제가 아버지 용서하면…… 수술 받으실래요?”
담담한 물음에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고 시선을 내렸다. 내리깐 눈꺼풀 아래로 눈물이 흘렀다. 그동안 무척이나 괴로웠던 듯 아버지의 얼굴은 말이 아니게 초췌했다. 그래서 연조는 더욱 화가 났다.
도대체 아버지는 용서받기 위해 그동안 무엇을 했던가. 혼자 끙끙 앓고, 울고, 괴로워한다고 해도 서울에서 바쁘게 일하고 있을 자기가 어떻게 알 수 있다고. 딸이 먼저 당신 마음 알아주고 손 내밀어 주길 바라기라도 한 것인가. 그토록 뻔뻔한 사람인가, 나의 아버지라는 사람은.
“아버지는 제게 용서받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셨나요.”
아버지의 얼굴이 충격을 받은 듯 경직되었다. 아버지의 눈에서 새로이 눈물이 흐르고, 이불 위에 힘없이 놓인 손이 미세하게 경련했다.
“아버지는 정말…… 이기적이세요.”
연조는 관절이 하얗게 튀어나오도록 주먹을 쥐었다. 목이 메도록 화기가 올라와 여러 번 심호흡하곤 말을 이었다.
“저한테 용서받지 못할 것 같아서 괴로우세요?”
“그래……. 그렇구나…….”
“그럼 용서받기 위해 노력하셨어야지요. 새어머니, 영훈이 마음 아프게 하고 아버지 눈치 보게 하면서 아버지는 자기 연민에만 빠져 있는데, 그런 아버지를 도대체 제가 무얼 보고 용서해야 하나요.”
“연조야, 나는…….”
“엄마하고 저한테 그만큼 무책임하셨으면 됐잖아요. 새어머니하고 영훈인 무슨 잘못인데요. 왜 아버지 때문에 힘들어야 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아야 해요. 상처 주는 일은 그렇게 잘하시면서, 그러고도 잘못했다는 거 안다는 양심은 있으시면서, 용서받기 위해선 왜 아무것도 안 하세요.”
당신 딸이 이곳까지 오는 동안 얼마나 겁먹었는지 아무것도 모르시면서.
이러지 않으려고 했건만 연조는 말을 할수록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자기 연민에 빠져 있는 아버지를 바라보아야 하는 건 분통이 터지도록 한심한 일이기에.
“차라리 그런 양심마저 없으셨다면 제 속이라도 시원하게 실컷 미워할 수 있었잖아요. 아버지 안 보고, 없는 사람이라 치고 살 수 있었잖아요.”
“연, 조야…….”
아버지의 야윈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소리를 욱이지 못하고서 아버지는, 우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는 사람처럼 울었다. 불쌍하고 못나게도.
“수술 받으세요. 치료도 꼭 받으시고 건강 관리 잘하셔서 더 많이 건강해지세요. 죄 없는 영훈이한테 아픔 주지 마세요. 제게 용서를 비는 일은 그것부터 시작하세요.”
주먹을 꽉 쥐고서 냉정하게 일갈했다. 눈시울이 붉어지고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했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눈물을 참아 내느라 목이 메었지만 연조는 고집을 부리며 이를 악물었다.
울지 않아. 나는 울지 않아. 이런 식으로 우는 건 화가 나도록 가치 없어서 도저히 못 울겠어.
입술을 깨물며 터질 것 같은 마음을 여러 번 다 잡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신다면 죗값을 치르세요. 죗값도 치르지 않고 어떻게 용서를 바라세요. 그리고 아버진 절대, 할머니처럼 죽음으로 도망가지 마세요. 그건 아버지가 할 수 있는 가장 비겁한 짓이니까.”
“연조야, 아버지는……. 아버지는 너한테 정말…….”
아버지는 눈물 때문에 말을 잇지 못했다. 연조는 그런 아버지를 담담히 바라보려고 애쓰며 말했다.
“아버지를 용서할지 안 할지는 나중에 결정할게요. 지금은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을 만큼 사과를 받은 게 없어요. 말로만 하는 사과, 싫어요. 그러니까 지금은, 바라지 마세요.”
어떻게든 참아 보려 했지만 큰 숨 한 번에 눈물이 눈시울을 적시며 새어 나와 버렸다. 연조는 거친 손길로 눈물을 닦으며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울고 있는 아버지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 이제 그만 나가려다가 치받치는 감정을 못 이겨 그 자리에 서 버렸다.
이럴 거면서 아버지는 어린 날의 자신에게 목마는 왜 태워 주고, 무릎엔 왜 앉혀 주었을까. 끝까지 유지하지도 못할 얄팍한 사랑으로 엄마와 자신을 왜 그리 괴롭혔던 걸까…….
“아버지……. 저는 아버지만 생각하면 화나고, 억울하고…… 그래요.”
이것만은 하지 않으려고 했던 말이 눈물과 함께 터져 나와 버렸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제 마음을 막을 수 없다고 체념한 연조는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하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다고 생각하면…… 너무 무서워요…….”
사실은, 용서에 대한 강박 때문만은 아니게도…….
“아버지는, 아버지니까요…….”
흔들리는 음성으로 말을 맺자 아버지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목마를 태워 주고 무릎에 앉혀 주었던 아버지를 기억하는 딸처럼, 목마를 태우고 무릎에 앉혔던 딸을 기억하는 아버지는 이 상황을 더 이상 견디지 못했다.
“연조야…… 아버지는……. 아버지가, 정말…….”
세상에서 가장 나약하고 초라한 짐승이 되어 우는 아버지를 남겨 두고, 연조는 뒤를 돌았다. 그리고 눈앞에 서 있는 그를 보았다. 당혹스러운 마음은 잠시였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젖은 눈가를 닦아 주는 다정한 손길에 연조는 그대로 강준의 품에 안겨 버렸다.
마음을 압도하며 뭉쳐 있던 서러움이 한꺼번에 북받쳐 올랐다. 바짝 세워져 있던 가시를 숨기느라 전전긍긍했던 날들의 아픔이 쉴 새 없는 눈물 속에 진하게 녹아났다.
걷잡을 수 없이 왈칵 슬퍼진 순간, 기적처럼 나타나 말없이 눈물을 닦아 주는 남자에게 연조는 마음을 놓고 의지했다. 나약하고, 추악하고, 한심해 죽겠는 저를 다 내보이며.
내가 이런 사람이라도 당신은 나를 떠나지 않겠지. 그래서 나를 떠난다면 내가 붙잡을 테니. 가슴에 가시가 박히는 순간을 손 놓고 바라만 보고 있는 건, 이제 그만하고 싶으니까…….
막막한 순간의 한 줄기 빛처럼, 그렇게 당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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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어머니가 영훈을 데려오고, 강준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연조의 아버지와 새어머니에게 인사를 드렸다. 말똥말똥한 눈으로 강준를 바라보는 영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잠시 함께 놀아 준 둘은 밖으로 나와 정원 벤치에 앉았다.
“이거 먹어 봐요. 아까 신연조 씨 동생이 준 거야.”
강준이 연조의 손바닥 위에 덜어 준 건 오색 콩알들같이 생긴 과일 맛 나는 캐러멜이었다.
“단걸 먹으면 기분이 좀 나아지잖아.”
강준이 빨간색 캐러멜을 집어 하도 울어서 알알해진 연조의 입술 사이로 밀어넣어 주었다.
“어때요. 나는 그 색깔이 제일 맛있던데.”
“달콤해요…….”
가라앉은 음성으로 건네는 말에 강준이 살며시 웃어 보였다. 연이어 주황색과 노란색, 초록색 캐러멜을 순서대로 입에 넣어 주고는 연조의 뺨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주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격렬히 울었던 방금 전 감정의 잔상 때문인지 내쉬는 숨이 미세하게 떨렸다. 연조의 물음에 그가 픽 웃고는 과장된 한숨을 내쉬었다.
“유모차 하나 바치고, 억지로 소문 우선권도 주고, 동네방네 내 마음 고백하고, 경위서도 써야 하고……. 그 대가로 이렇게 왔네. 내가, 신연조 앞에.”
“그게 무슨…….”
“게다가 덤으로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되었지.”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연조는 눈썹을 휘었지만 강준은 조금 더 짙게 웃어 보였다. 그러곤 가지런히 정돈된 여름 정원을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오후의 정원은 고요했다. 이른 아침부터 내내 울었던 매미는 지쳤고, 나뭇잎은 불어오는 바람에 다소곳하게 몸을 맡겼다. 부드러운 흙에 심긴 잔디의 향은 충분히 진했다. 정원을 바라보고, 그가 입에 넣어 주는 캐러멜을 받아먹으며 연조는 천천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다, 보셨어요?”
이제야 조금 드는 정신에 병실에서의 일을 물었다.
“봤지. 봤을 뿐만 아니라 신연조 씨 생각보다 내가 알고 있는 게 많을걸.”
“어떻게…….”
눈을 둥글게 뜨고 물어보려던 연조는 곧, 그만두었다. 아마도 대표님에게서 듣지 않았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는 그에게 이야기하려던 부분이라 그가 자신의 가정사에 대해 이미 알고 있다고 부끄럽지는 않았다. 자신에게 그가 실망을 한다거나, 자신을 달리 보게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그의 눈빛을 보고 있노라니 그런 걱정은 햇살 아래의 봄눈처럼 녹아 버렸다. 따뜻하게 반짝이는 그의 눈동자엔 한 가지 감정만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신연조, 사랑해, 하는 것 같은.
“사실 그렇게 많이 아는 건 아닙니다. 대표님께서 자세한 건 신연조 씨한테서 직접 들으라고 하셨어요. 신연조 씨 개인산데 대표님이 함부로 말하면 안 될 것 같다고. 그런데 이런 말씀은 하셨어요. 잊어야 할 건 상처이지 잘못이 아니라고, 신연조 씨한테 전해 달라고. 이건 신연조 씨 잘못이 아니라고도 전하라고 하셨고.”
재현의 세심함과 자상함에 연조는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그녀의 마음을 헤아려 많은 걸 전달하지 않은 재현도, 많은 걸 알아내려 조바심 내지 않는 강준도 고마웠다.
“실은…… 두려워요…….”
“뭐가?”
종교가 형성되기 이전, 해와 달을 믿던 시대. 왜 하필 해를 믿고 달을 믿었는지, 연조는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람의 손이 닿을 수 없는 높은 곳에 떠 있고, 어둠을 무찌르며 빛나기 때문만은 아닌, 고요히 지켜봐 주는 기운 때문은 아니었을지. 온화하게 지켜봐 주고, 내 흠을 야단치지 않고, 누구에게도 내 흉을 보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해와 달에겐 오롯이 드니 말이다. 그래서 연조는 고요히 지켜봐 주는 눈빛 아래에서 마음을 말할 용기가 생겼다.
“끝끝내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할까 봐요…….”
진지하게 연조의 말을 듣던 강준이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된다면 아버님께서 신연조 씨한테 용서받기 위한 노력을 덜 하셨기 때문이겠지.”
“내가 못돼서 그럴 수도 있어요…….”
“그럼 신연조 씨 못된 마음에 들도록 아버님께서 더 노력하셔야 하는 거 아닌가?”
예상치 못한 말에 연조는 그의 눈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추운 마음을 따뜻한 손이 어루만져 주는 듯 포근한 기분이 들었다.
“용서는 인간의 영역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실은 나도 나더러 마늘 냄새 나는 원숭이라고 놀렸던 녀석 완전히 용서한 건 아니야. 가끔 한 번씩 욱하더라고. 다음에 만나면 이 자식, 한 대 더 때려 줘야겠다 싶고.”
주먹을 쥐고 흔들어 보이며 하는 말에 살며시 웃었다. 그리고 연이어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달고 살아야만 하는 가시. 그걸 제거해 버리고 싶다는 바람 자체가 욕심은 아닌지 싶어서.
“그런데 내 전화 왜 그렇게 안 받았습니까?”
“아, 죄송해요. 아버지 쓰러지셨다는 전화 받고 너무 정신없어서…… 어머.”
연조는 그제야 알아차렸다. 울며불며 걸려 왔던 새어머니의 전화를 받은 이후 제 휴대전화를 본 기억이 없다는 것을.
“어쩌죠? 휴대전화 잃어버린 것 같아요.”
“정말?”
“네. 어디에다 흘렸지? 팀장님, 제 번호로 전화 좀 해 주세요. 혹시 누가 주워 갔을까?”
당혹스러운 마음에 핸드백 안을 두서없이 뒤적거리며 부탁하자 그가 흔쾌히 자신의 휴대전화에 패턴을 긋고 키패드 하나를 길게 눌렀다.
“응? 무슨, 소리지?”
어디에선가 미세한 진동 음이 들려왔다. 무척 가까이에서 울리는 소리에 반가운 마음으로 핸드백 안을 다시 살폈으나 그곳에선 휴대전화를 찾을 수 없었다.
“어, 팀장님 그거…….”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연조는 강준이 재킷 주머니에서 꺼내 보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며 손을 뻗었다. 그러나 강준은 연조에게 휴대전화를 주지 않았다. 대신 그녀 쪽으로 휴대전화 액정 화면을 돌려 보이며 말했다.
“신연조 씨한테 나는, 책임져야 할 남자인가 봅니다?”
장난스러운 음성과 액정 화면을 채운 문구에 얼굴이 빨개졌다. 제주도에 다녀온 후 ‘유강준 팀장님’이라고 저장되어 있는 문구를 조금 더 특별하게 지정하고 싶어 은밀하게 웃으며 바꿔 둔 것이었는데. 연조는 제 앙큼함이 이런 식으로 들통 나 버릴 줄은 몰랐다.
“주세요.”
“인정하면.”
“뭐, 뭘요?”
“내가 신연조 씨한테 어떤 남자인지.”
아무리 이리저리 손을 뻗어도 그의 손에 들린 휴대전화는 이리저리 피해 다닐 뿐이었다. 정신없이 울었던 게 방금 전인데, 지금은 정신없이 부끄러웠다.
“어떻게 찾으셨어요?”
“신연조 씨 휴대전화 주운 분과 통화가 되어서. 고속버스에서 신연조 씨한테 청심환 주셨던 분이 주우셨어요. 터미널 근처에서 중화요릿집 운영하시던데.”
그의 요구가 부끄러워 일부러 돌린 화제에 명쾌하게 대답한 강준이 연조의 턱을 잡았다. 어느 곳으로도 그녀의 시선이 도망갈 수 없도록 고정해 놓고는, 다시 물었다.
“나는 신연조 씨한테…… 어떤 남자입니까?”
나 방금 울었는데. 나 지금 좀 곤란하고, 정신도 없고, 피곤하고, 또…….
온갖 이유를 가져다 붙인 눈빛으로 바라보아도 강준은 싱긋 웃기만 할 뿐 그녀의 턱도, 시선도 놔주지 않았다. 그간 직장 상사로, 그리고 연인으로 대하며 그의 집요함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이미 파악한 연조는 눈을 감고 한숨을 쉬었다. 그의 요구 앞에서 할 수 있는 건 체념밖에 없었다.
“내가…….”
눈을 감고 말하다 살며시 눈을 떴다. 그러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입 안에 담긴 말을 마저 내놓았다.
“책임져야 할…… 남자예요. 팀장님은.”
강준의 얼굴로 행복해마지 않는 소년 같은 미소가 번졌다. 연조는 그의 미소를 보고 있노라니 방금 전 제가 한 말에 대한 부끄러움은 사라지고 순수한 기쁨이 차올랐다. 이토록 환하게 웃어 주는 남자에게 왜 이리 나를 곤란하게 하는 것이냐고 화낼 수 없었다. 도저히, 그렇게는.
“신연조 씨한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네…….”
“좀 무모하고 정신 나간 말입니다.”
“네……. 하셔도 돼요.”
무슨 말을 하려고 평소답지 않게 서론이 길까. 의아해하며 얌전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신연조 씨하고…… 결혼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연조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이어서 미간을 좁히며 턱을 붙잡고 있는 그의 손을 가만히 떼어 냈다. 그녀의 턱을 세게 붙잡고 있지 않았던 손은 쉽게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강준은 연조의 시선만은 꼭 붙잡아 두고서 말을 이었다.
“정신 나간 소리 같다는 거 알아요. 우린 함께한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 서로에 대해 아직 잘 모르고 있고.”
“그런데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신연조 씨와 결혼하고 싶은 내 마음을 부정할 만한 명분이 없어서.”
우도에서 연조가 했던 말을 따라 하며 강준은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곤 그녀의 손을 다정하게 붙잡았다.
“시간은…… 명분이 되지 못했어요.”
강준을 사랑하고 있는 마음을 부정하기엔 함께한 짧은 시간이 명분이 될 수 없었던 연조처럼, 강준은 같은 마음을 말해 왔다.
그런 그에게 연조는 해야 할 말을 고를 수 없었다. 뛰는 심장과 설레는 마음을 다독일 방법을 알지 못해 가슴을 들썩이며 강준을 바라보다 천천히 시선을 비끼며 말했다.
“내 안엔 가시가 많아요…….”
“그래. 알아요…….”
“그래서 두려워요. 내가 언젠가 내 가시로 팀장님을 찌를까 봐…….”
아직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는 문제보다도, 연조에겐 그것이 더 큰 문제이고 근심이었다.
“그간 너무 참고만 살아와서 그런지 요즘은 자꾸만 못난 마음이 툭툭 터져 나와요. 그래서 속이 시원하긴 한데 한편으론 무서워요. 내 못난 가시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 줄까 봐…….”
말하는 동안 눈물이 흘렀다. 그를 사랑한다고 인정하면서도 마음 한편이 불안했던 이유를 밝히는 것이 쉽지는 않았기에. 상처 주고 싶지 않다. 누구에게도. 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을 것 같아 두렵다.
“왜 그렇게 단정하지? 신연조 씨가 나한테 상처 줄 거라고. 상처는 내가 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그렇지 않나? 이 세상에 상처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한 번쯤 남에게 상처 줘 보지 않은 사람은 어디에 있고.”
알고는 있지만 공기의 존재처럼 잊고 지내는 사실. 그래서 쉽게 상처 입고, 쉽게 상처 입히는 건 아닐지…….
가슴으로 스미는 강준의 말에 연조는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완벽하지 않은 인간이라 신연조 씨한테 상처 주지 않을 자신 있다고 장담 못해요. 물론 절대로 신연조 씨한테 상처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겠지만 나도 모르게 실수할 수 있어. 그런데, 이건 자신할 수 있어요.”
그것이 무엇이냐고, 연조는 눈으로 물었다. 해를 대하듯, 달을 대하듯, 그를 바라보는 동안 순수한 믿음으로 가슴이 벅차 왔다.
“나는 행복에 대해 아주 관심이 많습니다. 하긴, 행복에 관심 없는 사람은 없겠지만.”
강준이 싱긋 웃어 보이며 연조의 손을 조금 더 힘주어 잡았다.
“만약에 그런 게 가능하다면, 죽는 날까지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행복해지기 위해서 평생 노력할게요. 행복은 내 최대 관심 분야라서 잘할 수 있어.”
이런 줄 몰랐건만 이토록 대책 없는 남자라니…….
연조는 탄식하듯 한숨을 뱉었다.
행복하게 해 주겠다는, 구체적이지도 않고 개요도 없는 계획으로 청혼을 하면 도대체 어찌해야 하는 걸까. 실체가 보이지 않는 언어의 힘에 마음이 온통 흔들리는 자신은 또 어찌해야 하는 거고…….
“이 세상에 상처 없는 사람은 없겠지만 상처는 직접 겪는 사람이 가장 아플 겁니다. 상처는 남이 대신 아파해 줄 수 없는, 내가 극복해야 할 내 평생의 숙제일 테니까 말이죠. 하지만 그 숙제, 남이 해 줄 수는 없겠지만 함께 고민할 순 있을 겁니다. 나 책임진다고 했으니까 내 숙제 신연조 씨가 좀 도와줘요. 나 혼자 하기 벅찬 순간이 참 많거든. 신연조 씨 숙제도 내가 도와줄게요. 서로 도와주면서 같이 행복해집시다.”
무어라고 말을 꺼내지 못하는 연조를 따뜻하게 바라보며, 강준이 말을 이었다.
“당신은, 내가 책임져야 할 여자니까…….”
강준의 말에 연조는 부드럽고 나직하게 한숨 쉬었다.
야박해진 어른이 되고 난 후 계획과 계산에서 멀어져 본 적 없었건만 들이대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남자에게 연조는 뿌리째 흔들렸다. 이젠 정말 나를 책임지라고 그에게 매달리고 싶었다. 내가 행복해질 수 있게, 책임져 달라고.
“나는 신연조 씨 사랑하고 나서 내가 아닌 것 같은 나를 자주 보고 있어요. 나도 나름 계획도 짜고 계산도 하면서 영악하게 살아왔는데 말이야. 그런데 신연조 앞의 나는 대책 없고 무모해. 하지만 이런 모습들도 결국엔 유강준인 것 같아. 그러니까, 참 뻔뻔한 부탁이지만, 나인 그대로를…… 접수해 줄래요?”
당신이야말로 내 변변치 못한 실체를 그냥 납득해 주는 남자인 것을…….
연조는 그인 그대로를 접수 못할 명분이, 없었다.
“신연조 씨.”
“네.”
“신연조.”
“네, 팀장님…….”
순한 대답에 살며시 웃어 보인 강준이 잡고 있던 연조의 손을 그의 입술 가까이로 끌어왔다. 그러곤 연조의 왼손 약지에 깊고 진하게 입 맞추었다.
“연조야…….”
그녀의 약지에서 천천히 입술을 떼어 내고서, 강준이 처음 부르는 방식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말했다.
“나랑, 결혼해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