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제주도, 푸른 밤
제주도 중문 단지의 고급 호텔 글램핑 장에 도착한 건 금요일 저녁때였다. E&B PC의 LED 사업부를 인수할 업체는 결국엔 우성 전자로 확정되고, 한 주간 울산과 평택, 서울을 오가며 고생했던 팀은 가뿐한 마음으로 제주도로 왔다. 표면상으론 워크숍이지만 그간의 노고를 서로 위로하고, 밤낮없이 일하느라 소홀했던 가족과 애인에게 근사한 시간을 선사하는 것이 이번 모임의 목적이었다.
선발대로 도착한 팀원들이 자리를 정돈하고 주문한 바비큐가 먹음직스럽게 익어 갈 무렵, 일을 깔끔하게 마무리지은 후발대도 글램핑 장에 도착했다. 현구의 와이프와 다섯 살배기 아들, 승기의 약혼녀도 초대된 자리에는 화기애애한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오늘을 즐기십시오. 자, 건배.”
“건배! 수고 많으셨습니다!”
“브라보! 다들 고생하셨어요!”
와인 잔과 맥주 캔이 여러 번 허공을 향해 들어올려졌다. 아직 해야 할 일은 더 남았지만 큰 고비는 넘겼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들이켠 술은 쓰지 않고 달콤했다.
가벼워진 기분에 들뜬 웃음은 점차로 높아져 가다 밤이 익을수록 나직하게 잦아들었다. 조금 과하게 마셨다 싶었지만 숲과 바다의 기운을 품은 밤바람이 알코올을 날려 주어 기분 좋을 만큼의 취기만이 남았다.
“피곤할 텐데 이제 그만 쉬죠. 가족이랑 애인 있는 분들은 내일 관광도 좀 해야 하지 않습니까.”
“좋은 생각입니다. 오늘은 일단 해산하고 서울에서 다시 달리면 되니까요. 아야! 어우, 자기야. 아프다.”
강준의 제안에 현구가 말을 덧보태다 와이프에게 옆구리를 꼬집히고, 일행은 가볍게 웃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현구의 가족과 승기 커플에게 글램핑 하우스를 한 동씩 배정하고, 연조는 미라와 함께, 강준은 진수와 함께 글램핑 하우스를 한 동씩 쓰기로 되어 있었다.
연조가 샤워하고 돌아왔을 때 숙소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미라 혼자 밤 산책이라도 나갔나 보다고 생각하며 연조는 침대 위에 올려 둔 휴대전화를 바라보았다.
팀장님은 지금 뭐 하고 있을까…….
드디어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었는데도 목이 마른 기분이었다. 그에게 다정한 말 한 마디, 부드러운 눈빛 한 조각 건네는 것조차 연조는 모두 신경 쓰이고 어려웠다. 팀원들의 눈치를 보며 그의 접시에 잘 구워진 고기 몇 점을 더 얹는 소심한 짓을 하면서도 어깨가 떨렸었다. 그런 앙큼한 일을 해 본 건 난생처음이었다.
강준을 생각하며 휴대전화의 배경 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연조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몸은 피곤하지만 이대로는 쉬이 잠들 수 없을 것 같았다. 강준을 남몰래 불러내는 대담한 용기를 내 보고 싶으나 그간 일하느라 많이 고단했을 그를 위해 그만두기로 했다.
누군가를 생각하며 홀로 가슴 설레고 목마른 감정을 느껴 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이런 건, 해 본 적 없었으니까…….
연조는 이제 막 사춘기에 진입한 소녀처럼 볼을 붉히며 웃곤 휴대전화를 손에 쥐고서 글램핑 하우스를 나섰다.
잘 정돈된 호텔 안의 산책로는 근사했다. 연조는 엷은 미소를 머금으며 오감으로 주변을 느꼈다.
바다를 통과한 밤바람. 아스라한 파도 소리와 풀꽃 향기. 우거진 풀숲 속 여름 벌레의 오케스트라. 하얀 별, 금빛 달. 그리고…….
호박색 가로등 아래에, 강준은 내내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서 있었다. 부드럽게 웃으며 내미는 손을 차마 잡지도 못하고 연조는 그 자리에서 굳은 채 멈춰 섰다. 뜻하지 못한 순간 만난 그가 무척 반갑고, 얼굴이 달아오르도록 심장이 뛰었다.
“그렇지 않아도 전화하려고 했어요…….”
강준이 겨우 들리는 음성으로 연조의 귓가에 소곤거리곤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아무 소리도 내지 말라는 제스처에 연조는 마른침을 삼키며 강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곧,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가로등 불빛이 쏟아지는 벤치에 앉아 정신없이 키스하고 있는 한 쌍의 남녀 때문에.
“두 사람 사이,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았는데…….”
“관심 없는 사람에겐 새침도 떨지 않죠. 인연은 가까이에 있는데 다른 곳만 보니 열 받았을 겁니다, 성미라 씨.”
강준의 말에 연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살며시 웃었다. 미라가 진수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까탈을 부렸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강준과 연조가 지척에서 지켜보는 줄도 모르고 그들의 입맞춤은 점점 더 깊어져 갔다. 미라의 엉덩이와 가슴을 더듬는 진수의 손길에 얼굴이 붉어진 연조가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강준이 가볍게 휘파람을 불며 인기척을 냈다.
예민한 미라가 먼저 사람의 기척을 느끼고, 뒤이어 진수가 화들짝 놀라며 미라와 틈 없이 붙였던 몸을 떼어 냈다. 강준과 연조가 자기들을 지켜보고 있었음을 확인한 그들은 무어라 말을 뱉지 못하는 입술을 벙긋거렸다.
“비밀은 지켜 드리겠습니다.”
모르는 척 지나가지 어쩌려고 굳이 알은체하는 건지, 연조는 곤란한 표정으로 강준을 바라보았다.
“혹시, 소문내 주길 바랍니까?”
“아, 아니요!”
“아닙니다, 팀장님!”
아무 말도 못하고 쭈뼛거리던 두 사람이 스프링 달린 것처럼 동시에 튀어 올랐다. 그러다 서로를 멀끔히 쳐다보고는 서로의 반대편으로 멋쩍게 시선을 돌렸다.
“임자 없는 남녀끼리 그럴 수도 있지 뭘 그리 놀랍니까. 하던 것 마저 하시죠. 참, 오진수 씨. 나 오늘 밤샘 콘퍼런스 할 거 있어서 숙소에 못 들어갈 것 같은데.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요.”
당황하는 그들에게 피식 웃어 보인 강준이 의미심장한 말을 뱉고서 걸음을 옮겼다. 무엇을 어찌해야 하나 싶은 연조는 일단 그들에게 꾸벅 인사하고 강준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어느 정도 걷다 미라와 진수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싶어 뒤를 돌았을 때, 연조의 손목을 붙잡아 끌어당긴 강준이 가볍게 입을 맞춰 왔다.
“팀장님, 누가 보면 어쩌려고…….”
“보면 어때. 보다시피 신연조랑 유강준은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밝히면 되지.”
놀란 연조가 그를 밀어내자 강준이 나직하게 속삭이곤 그녀의 입술을 한 번 더 물었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 근처에서 다시 속삭였다.
“아직도 입장 정리 안 된 사입니까? 우리가?”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말할 수 없었다. 입술을 지켜보는 그의 시선에 가슴이 뛰어서.
강준은 연조에게 대답을 재촉하지도,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녀를 향해 옅게 웃어 보이곤 먼저 걸음을 옮겼다. 잡고 있던 그녀의 손목을 놓지 않은 채.
오솔길을 걷는 동안 손목을 잡고 있던 강준의 손이 위치를 옮겨 연조의 손을 잡아 사슬처럼 얽었다. 손등을 만져 주는 엄지손가락이 따뜻했다. 연조는 강준이 이끄는 대로 밤길을 걸으며 살며시 웃었다. 걷는 동안 파도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세찬 파도 소리 때문인지 흰 포말이 이는 바다를 밟으며 걷는 것 같은 황홀한 기분이 들었다.
“안 무섭습니까?”
말없는 연조를 힐끗 쳐다보며 강준이 물었다. 피식 웃어 보인 연조는 가볍게 고개를 젓고 깨끗한 밤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휘산 작용이 있는 사탕을 녹여 먹은 것처럼 목과 가슴이 간질거리고 시원했다.
“역시 겁 없는 아가씨네. 나랑 단둘이 있는데도 안 무섭다니. 내가 신연조 씨한테 무슨 짓을 할지 뻔하잖아.”
바람에 날리는 머리칼을 귀 뒤로 부드럽게 넘겨 주며 하는 협박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걸까. 그 역시도 무어라고 말해 주어야 할지 몰라 연조는 그저 웃었다.
“그럼 이제부턴 나 하고 싶은 대로 합니다. 신연조, 겁먹으면 안 돼.”
무섭지는 않고 설레기만 한다. 그는 무서운 사람이 아니니까. 다만 그는, 그는 그저…….
“사랑해요…….”
그에 대한 이 감정을 무엇이라 표현하여야 할까, 헤매고 있는 연조를 향해 강준이 속삭였다. 어느덧 걸음을 멈춘 강준이 연조를 바로 보고 서 있었다.
“1주일 내내 그 생각밖에 안 했어요. 이젠 마음껏 말해야지, 하고. 신연조가 아직은 망설이고 밀어내도 내 마음 숨기지 말아야지, 했어요. 숨긴 적 없었지만, 그래도…….”
그가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세상에 태어나 처음 들어 보는 말처럼 연조는 그의 고백이 생소하고 가슴 떨렸다. 그리고 알 것 같았다. 그를 향한 이 마음이 어떤 것인지.
“사랑해……. 신연조…….”
다시 한 번 속삭이는 고백에, 연조는 지그시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무엇이라 표현해야 할지 몰랐던 이 감정이, 사랑이구나…….
사랑을 몰랐던 어렸을 땐 쓰고 아린 것만이 사랑인 줄 알았다. 아니, 그런 건 사랑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사랑을 좀처럼 믿을 수 없었기에. 하지만…….
믿지도, 믿을 수도 없었던 감정이 이토록 쉽게, 그리고 깊이, 생겨 버렸다. 진심만을 품고서 내내 들이대는 이 남자 때문에.
가슴이 뭉클해진 연조는 부드럽게 미소짓고 있는 강준을 우러러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어 말했다.
“팀장님 볼 때마다 항상, 가슴이 뜨거웠어요…….”
“나랑 같네…….”
수줍은 고백에, 그가 옅게 웃으며 밤바람이 스쳐 간 연조의 볼을 쓰다듬었다. 강준의 입술이 연조의 입술에 닿았다 떨어졌다. 이마와 눈두덩에도 그의 입술이 조심스럽게 닿았다. 다시 입술을 머금어 깊게 키스하며 그가 나른하고 길게 한숨 쉬었다.
“팀장님과 확실하게…… 입장 정리 하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되죠?”
“내 남자친구, 해 주세요……. 팀장님의 여자친구가 되어 줄게요……. 다음번엔 팀장님 집에서 부침개도 부쳐 주고, 밥도 차려 주고 싶어요……. 팀장님 여자친구니까…….”
잠시 입술이 떨어졌을 때, 아직 숨이 한 모금이나마 남아 있을 때.
연조는 말했다.
이웃 맺는 듯한 수락이 아닌, 스스로의 선택과 결정으로.
“신연조…….”
연조의 말에 잠시 굳은 듯하던 그가 살며시 웃으며 그녀를 불렀다.
“당신 참 겁 없는 아가씨라고 누누이 얘기했지.”
“…….”
“당신한테 홀딱 빠져 있는 나한테 여자친구 돼 주겠다고 해 버리면, 이젠 나더러 어떻게 견디라는 거지? 더구나 워크숍까지 와서. 책임지시죠, 신연조 씨.”
“어떻게 책임져 드릴까요…….”
볼을 쓰다듬는 커다란 손 위에 제 손을 겹치며 연조는 수줍게 물었다. 이런 방면으론 할 줄 아는 것도, 센스도 없어 그에게 미안했다. 마음만큼 무언가를 표현할 줄 몰라서.
“여기에선 좀 곤란하고…….”
싱긋 웃어 보인 그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뺐다. 그러곤 연조의 손에 납작하고 얇은 플라스틱을 쥐여 주었다.
“이 길 따라 쭉 걸어가면 풀 빌라가 나와요.”
“풀, 빌라?”
“내기할래요? 내일 아침에 성미라랑 오진수가 숙소에 있을지 없을지. 생각보다 대담한 사람들이라면 거기에서 사고 치겠지만. 사고는 뭐, 나도 칠 것 같지만 말이죠.”
팀장님, 밤샘 콘퍼런스는 뭔가요, 그럼. 혹시, 이거였나요…….
묻고 싶었지만 부끄러워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어둠 속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얼굴만 붉힐 뿐이었다.
“성미라와 신연조. 내일 아침에 누가 먼저 숙소에 도착해 있을지가 관건일걸, 아마.”
연조는 결국 강준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웃어 버렸다.
“책임져, 줄 겁니까…….”
자신만만하게 풀 빌라의 카드 키를 쥐여 줘 놓고도 애가 타서 물어보는 음성이 귓전을 간지럽게 했다. 강준의 품에서 얼굴을 들지 않은 채, 연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 긴장이 풀린 듯 큰 한숨을 내쉰 강준이 연조를 꼭 끌어안았다. 대담하게도, 프로젝트 리더라는 사람이 워크숍 와서 팀의 막내를 꾀어 내 놓고는. 스스로가 신사는 아니라고 선언한 용의주도한 늑대를 순진한 연조가 다룰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아, 참. 나는 원래 내 여자친구, 내 집에선 아무것도 안 시킵니다. 부침개 부치고 밥 차리는 거, 앞으로도 신연조 씨는 못할 것 같은데.”
그럼 그때 아무 일도 시키지 않았던 건 무슨 의미였을까. 미리 콘돔을 준비해 둔 것과 같은 마음이었을까.
엉큼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남자를 바라보며 연조는 기쁘게 제안했다.
“그럼 같이 해요. 같이 하면 더 재미있을 거예요.”
“좋은 생각인데. 그럼, 그렇게 할까요?”
강준이 소리 내 웃으며 연조의 입술을 찾았다.
인적 없는 좁은 길에서 두 사람은 거듭거듭 서로의 입술을 물며 진하게 입 맞추었다. 어디에선가 아스라한 꽃향기가 날아들었다.
입을 앙다물고 있던 꽃망울은 어느 날 불현듯 우아한 꽃잎을 드러낸다.
사랑도, 그러하다.
이제 막 동이 튼 이른 아침. 탄탄하게 잘 빠진 남자의 몸이 파란 물을 가르며 부드럽게 유영했다. 손끝과 발끝까지 차갑게 훑는 온도의 물이 온몸을 상쾌하게 감싸는 느낌. 풀의 정중앙을 서너 번 가르고 난 후, 강준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미끈한 몸으로 물 밖으로 나왔다.
“잠꾸러기. 신연조, 성미라한테 지겠는데.”
강준은 전면 창 안의 침실을 건너다보며 나직이 속삭였다. 그녀더러 잠꾸러기라고 하기엔 사실, 어폐가 있지만. 지난밤 제가 한 짓과 지금의 시간을 보면 말이다.
강준은 간밤을 생각하다 피식 웃어 버리곤 비치 체어에 올려 둔 타월로 물기를 닦고 로브 가운을 걸쳤다. 허리께에서 매듭을 묶으며 침실로 들어가 침대 가에 걸터앉았다. 하얀 시트를 둘둘 말고 잠이 든 연조는 그의 무게만큼 침대가 출렁거리는데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지난밤에 좀, 심했었나…….
자책하면서도 입가로 번지는 미소를 막을 수 없었다. 자맥질은, 방금 전의 것보다 지난밤의 것이 훨씬 더 재미있고, 격렬하고, 황홀했으므로.
“신연조.”
강준은 팔을 넓게 벌려 연조 등 뒤의 매트리스에 손을 짚었다. 새우처럼 등을 구부린 연조는 강준의 품에 갇혀 버린 줄도 모르고 여전히 꿈나라였다. 무방비하게 잠든 연조를 향해 조금 더 짙게 웃어 보인 강준이 그녀에게로 고개를 숙여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지금 안 일어나면 뒷일 책임 못 집니다. 성미라한테 들켜도 난 몰라.”
“으음…….”
살며시 미간을 찡그린 연조가 시트에 감긴 몸을 꼼지락거렸다. 나긋한 여체를 감싼 시트가 흘러내리며 선이 고운 어깨가 드러났다. 고개를 기울이자 야릇한 가슴골이 아슬아슬하게 보였다. 더 많은 걸 보여 주지 않는 감질나는 노출에 조바심이 밀려왔다.
“신연조 씨.”
참을 수 없는 갈증이 인 강준은 목울대를 크게 움직여 숨을 삼키곤 다소 정색한 음성으로 그녀를 불렀다.
“일어나.”
“……더 자고 싶어요…….”
그녀가 몸을 꼼질거리며 가벼운 잠투정을 부렸다. 시트는 더 아래로 내려가고, 하얀 젖가슴과 분홍색 유두가 아스라하게 노출됐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짧은 숨을 뱉은 강준은 연조의 가슴을 잔뜩 쥐고 유두를 빨았다.
“팀장, 읍…….”
놀라 잠에서 깨어난 그녀의 입술을 물었다. 만족할 만큼 입술을 맛보고 나서야 휘둥그레진 그녀의 눈과 눈을 맞추며 말했다.
“좋은 아침. 잘 잤어요?”
명쾌한 아침 인사를 던진 후 연조의 몸에 휘감긴 시트를 잡아 뺐다.
“팀장님, 아침부터 이게 무슨…….”
“그러게. 아침부터 이게 무슨 짓인지.”
눈 뜨자마자 덮쳐져 당황한 그녀에게 간단히 대꾸하고 싱긋 웃었다. 그러곤 연조의 몸 위로 올라타 그녀의 입술에 키스하고, 하얀 목덜미를 부드럽게 물었다.
“차가워…….”
연조의 벗은 몸을 온몸으로 품어 안자 그녀가 어깨를 움칫거렸다. 마음이 뜨거워진 속도만큼 강준의 몸은 아직 덥혀지지 않은 듯했다.
“방금 전까지 수영했었어…….”
속삭이고선, 그녀의 따뜻한 가슴을 쥐었다. 손 안에 감기는 피부의 촉감이 무척 좋아 낮은 신음이 절로 흘렀다.
“춥지 않으세요?”
그녀의 귓불과 목덜미에 키스를 퍼붓는데, 그녀가 강준을 감싸안으며 물었다.
“추워.”
“어떡해…….”
연조가 가느다란 두 팔로 강준을 꼭 끌어안았다. 그녀의 목덜미를 탐하던 강준은 상냥한 포옹에 모든 동작을 멈추었다.
제대로 눈 뜨기도 전의 저를 덮치려던 남자를 이토록 다정하게 안아 주는 여자라니. 나를…… 미치게 할 작정인 거야, 당신은…….
“내가 왜 이른 아침부터 수영이나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까?”
괜한 어리광에 깜빡 속아 넘어가 제 온기를 나누어 주는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며 강준이 물었다.
“왜 하셨는데요?”
되묻고는, 강준의 어깨를 부지런히 쓰다듬던 연조는 그의 몸에서 손을 떼어 냈다. 그의 맨살이 차갑다며 어깨를 웅크린 게 방금 전인데, 강준의 몸은 어느덧 손쓸 수 없게 달아올라 있었다.
강준은 대답 대신 연조의 입술을 진득하게 물었다. 지금부터 그가 하려는 짓을 거부할 수 있는 일말의 여지도 주지 않고서.
“팀장님…….”
그녀의 입술과 목덜미, 젖가슴과 갈비뼈 하나하나, 보드라운 배, 예쁜 배꼽을 차근차근 물고 핥으며 내려와 그곳에 닿았을 때, 그녀가 신음처럼 그를 불렀다.
“신연조 씨.”
강준이 낮은 음성으로 연조를 불렀다.
“네, 팀장님…….”
그녀의 음성은 달콤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강준은 신음 섞인 한숨을 흘리며 말했다.
“우리가 사랑을 나눌 때도 신연조 씨가 나를 팀장님이라고 부르면 내 기분이 어떨 것 같습니까.”
일부러 정색하며 묻는 말에 연조가 곧, 볼을 붉혔다.
“죄송해요. 이름 부르는 건 아직 어색해서…….”
“아니, 계속 그렇게 불러 줘요.”
“네?”
“엄청 야릇해. 뭔지 내가…… 부하 직원의 몸과 마음을 모두 괴롭히는 악덕 상사가 된 것 같아.”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미안. 신연조 씨 생각하던 불면의 밤마다 야동을 좀…… 봤어.”
제 말을 증명하듯 강준은 곧장 그녀의 다리 사이로 내려갔다.
“팀, 장님. 아니 그러니까, 강준…… 아아, 씨……. 거, 거긴…….”
팀장님이라고 부르는 게 좋다는 건지 싫다는 건지 헷갈리게 해 놓고, 강준은 그녀를 빈틈없이 건드렸다. 그러다 곧, 열기 어린 한숨을 쉬며 기대감에 차 아우성치는 그곳에 콘돔을 씌웠다.
“긴장 풀고…….”
“네…….”
“자꾸 아프게 해서, 미안해요…….”
삽입하는 순간엔 그녀가 아직 고통스러워하기에 얇은 눈꺼풀과 도톰한 입술에 부드럽게 입 맞추며 그녀를 달랬다. 연조는 고개를 저으며 강준의 목을 힘껏 끌어안았다. 그를 북돋워 주려고 기꺼이 내는 용기에 강준은 그녀가 사랑스럽고, 또한 미안했다.
“저는, 괜찮아요……. 하고 싶은 대로 하셔도…… 돼요…….”
그녀가 이럴 때면 강준은 더 이상 견디기 힘들어졌다. 의외로 대담하고 용감한 이 여자는 수줍어하면서도 솔직하게 내보이는 본능으로 너무도 쉽게 강준의 혼을 빼 놓았다.
천천히 삽입하고 부드럽게 움직이다 점점 더 깊고 강하게 그녀의 안을 휘저었다. 미처 벗지 못한 가운을 펄럭이며 그녀를 남김없이 소유했다. 이토록 뜨겁고 부드러운 그녀를 느끼다 보면 이런저런 생각을 할 수도 없었다.
“팀장님! 아아, 흑…….”
끝내 여자를 울리는 나쁜 놈이 되고 나서야 거칠게 진퇴하던 허리가 멎었다. 강준은 숨을 몰아쉬며 연조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깊고 진한 열락에 빠져 신음하는 그녀의 아래로 내려가 허벅지 안쪽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부끄럽다는 듯 그녀의 허리가 흠칫거렸지만 보드라운 엉덩이를 살살 만지며 다독였다.
“괜찮아?”
“네……. 괜찮아요……. 그런데, 팀장님…….”
“응…….”
그를 부르는 음성에 수줍어하는 기색이 잔뜩 묻어 있었다. 강준은 입매를 부드럽게 늘이며 웃었다.
“팀장님은 이런 거…… 정말 잘하시는 것 같아요…….”
“이런 거, 뭐?”
“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뭐?”
“어…….”
“응? 뭐라고?”
“그러니까 그게…… 섹스, 요…….”
“그러니까 그게, 섹스?”
“네…….”
그녀가 뭘 말하고자 하는지 알면서도 짓궂게 모르는 척해 놓곤, 멋쩍어하는 그녀를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비교 대상도 없으면서 내가 잘하는지 못하는지 어떻게 압니까?”
“그냥 느낌이…… 그런 것 같아요…….”
“그냥 느낌으로 알 정도로 좋았나 봅니다, 신연조 씨?”
계속되는 짓궂은 질문에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달아오른 얼굴을 그의 가슴팍에 숨길 뿐.
남자의 자존심을 한껏 치켜세워 주는 그녀의 반응에 강준은 더욱 짙게 미소지었다. 전희부터 후희까지, 그녀와의 관계에 세밀한 정성을 쏟아 붓는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이었다. 그녀와 이러는 게 미치게 좋고, 그녀에게 자기가 누구인지 확실히 알려 주기 위해서. 신연조에게 이럴 수 있는 남자는 자신뿐임을 각인시키려는 철저한 영역 표시였다. 사랑에 빠지면 지질함과 소유욕이 동시에 증폭되는 남자란 동물의 본능이고.
“그나저나 성미라랑 신연조 중에 누가 먼저 도착하려나…….”
아쉽지만, 더 이상은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을 것 같아 그녀의 어깨를 만지작거리며 넌지시 건넨 말에 연조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머……. 어머, 어떡해!”
그의 품에서 나른하게 늘어지려던 연조는 빠르게 정신 차리고 벌떡 일어났다. 붉은 흔적이 선연하게 찍힌 가슴이 아찔하게 드러났다. 강준은 그녀의 맨살을 조금 더 만져 보고 싶었지만 연조는 재빠르게 침대에서 벗어나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옷을 긁어모았다.
“어쩌죠? 아, 정말 어떡해.”
“성미라 씨, 숙소에 없을 수도 있어요.”
그렇지 않아도 간밤에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라는 미라의 문자 메시지가 연조의 휴대전화로 전송됐었다.
“아니에요. 이미 와 있을 것 같아요. 아, 정말 어쩜 좋아.”
강준은 급한 손길로 옷을 꿰입는 연조를 팔을 괴고 누워 바라보았다. 벌써부터 그들의 관계를 밝히는 건 그녀에겐 부담스러운 일일 테지만 들켜 버린다면 어쩔 수 없는 일. 만약 누군가가 그들의 사이를 의심한다면 공연한 변명으로 이 관계를 숨기고 싶진 않았다.
“팀장님, 어서 일어나세요.”
“알았어요. 일어날게. 일어는 나겠는데, 만약 오늘 들키면 핑계는 대지 맙시다.”
“네?”
“일찍 맞는 매가 낫잖아. 나야 물론 매 맞는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느긋하게 일어나 방만하게 흐트러진 가운을 벗고 긁어다 준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는 강준을 연조가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심란해 보이는 그녀의 눈빛에 너무 욕심 부리는 건가 싶어 긴장하는데, 그녀가 어깨를 올렸다 내리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미 할 것 다 해 놓고 숨기는 것도 우스워요. 워크숍까지 와서 이랬는데…….”
‘이미 할 것 다 해 놓고’라니. 무슨 말을 저리도 담백하게 하나, 저 여잔.
의외의 말에 놀라 침을 잘못 삼켰다. 강준은 간지러운 목구멍을 잔기침으로 달래며, 손으로 머리를 빗어 정리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반응이 귀여워 일부러 능글맞게 야한 말을 던지곤 했지만, 그녀는 의도를 품지 않고 저런 식으로 말해 버리니 여간 당혹스러운 게 아니다.
“비행기 시간이 언제죠?”
서둘러 풀 빌라를 나서는 연조의 뒤를 따르며 강준이 물었다. 지금부터의 계획을 밝히자니 또다시 긴장감이 몰려왔다.
“오늘 점심 먹고 출발하면 됩니다. 아, 이현구 시니어랑 조승기 시니어 일행들 표는 내일 오후예요.”
연조의 말에 강준은 그녀 몰래 호흡을 가다듬으며 짐짓 심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우리 표는 내일 밤비행기로 내가 따로 예약해 뒀어요.”
“네?”
“풀 빌라 어렵게 예약했는데 아깝잖아. 설마 몇 시간만 있다 가려고 예약했겠습니까.”
긴장됐지만 강준은 일부러 뻔뻔하게 말했다. 타는 속을 감추려고 근사하게 웃어 주며.
“하지만 다른 팀원들한테 들킬 텐데요……. 사실 아직은 좀…… 쑥스러워요.”
“지금 숙소로 가서 들키면 당당하게 우린 더 있다 가겠다고 하면 되고, 안 들키면 내가 어떻게든 핑계 만들어 볼게요.”
그녀가 거절할까 봐 불안한 속은 말이 아니건만, 강준은 곧 죽어도 떨쳐 낼 수 없는 허세를 부리며 멈추어 선 연조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매사 정신 차리고 바르게 살아온 그녀가 용기 내어 감행한 일탈을 강준은 조금 더 부추기고 싶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더 많이 웃게 해 주고, 더 많이 행복하게 해 주고 싶어서.
“수영복, 안 가져왔어요…….”
강준의 눈을 흔들리는 시선으로 마주 바라보며 고민하는 듯하던 그녀가 시선을 비키며 말했다. 무슨 말인가 싶어 눈썹을 휜 강준은 소심한 승낙이라는 것을 깨닫곤 활짝 웃었다.
“그냥 벗고 합시다. 거기에선 벗고 수영해도 아무도 못 봐.”
간밤에 기분 좋은 날을 예견하는 길몽이라도 꿨던가. 섣부른 기대가 기쁜 확신으로 바뀌어 날 것 같은 이 기분을 그녀는 알까. 강준은 연조의 손을 꽉 잡고 빠르게 걸으며 쾌활하게 말했다.
“싫어요, 그건.”
“알았어요. 그럼 하나 사 줄게.”
신연조의 수영복을 벗기고 하는 건 또 다른 황홀경일 테니까.
큰일이다. 그녀가 기겁할 만한 야한 생각만 자꾸 늘어서. 하지만 강준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를 두고 하는 야한 상상이, 상상으로 그치지 않을 수 있어서 벅차게 좋았다.
“저 수영할 줄 몰라요.”
“내가 가르쳐 줄게요.”
“거짓말…….”
“이런, 안 속네.”
그가 수영을 가르쳐 주기보단 그녀의 안에서 수없이 자맥질할 것이라는 걸 그녀는 이미 알아차렸나 보다. 쿡 웃어 버린 강준은 잠시 멈춰 서서 연조의 입술에 입술을 꾹 눌렀다.
“그런데, 팀장님.”
“응.”
“왜 그렇게 잘하세요?”
“뭘?”
“그러니까, 그거…… 요.”
그의 스킬이 어디에서부터 연유되었는지 끝까지 알려고 드는 이 불량한 호기심은 뭐란 말인지. 그들의 관계를 들킬까 봐 조마조마해하면서도 그것이 그토록 궁금했단 말인가.
마음이 급해 뛰듯이 걸으면서도 알고 싶은 건 다 알려고 드는 연조를 강준은 그윽하게 노려보았다. 그러곤 의미심장한 음성으로 말했다.
“야동 봤다니까. 직장 상사가 부하 직원 엄청 괴롭히는 거.”
“거짓말.”
“거짓말 아닌 거 알 텐데. 눈치 빠른 신연조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 그리고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저 멀리 푸른 바다가 보이는 오솔길을 그녀의 손을 잡고 뛰었다.
세상을 투명하게 비추는 맑은 햇살, 정신없이 뺨을 스치는 청신한 바람.
제주도는 오늘도 행복한 날씨다.
숨을 헐떡이며 도착한 글램핑 하우스는 텅 비어 있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숙소 안을 휘둘러보던 연조는 당황했다.
이미 잠에서 깨 씻으러 간 걸까. 호텔 본관으로 조식을 먹으러 갔나. 혹시 산책 갔을까. 아직 이른 시간인데 뭐 이리 일찍 일어났나.
여러 가지 가능성을 한꺼번에 다 떠올리고 있는데, 밖에서 연조를 부르는 강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급하게 나가 보니 그가 이마를 문지르며 웃고 있었다.
“신연조, 승.”
“네?”
“이거 묘하게 자존심 상하네. 신연조는 성미라한테 이겼는데, 나는 오진수한테 진 것 같은 기분이야. 지난밤에 뭘 했는지 세상모르고 잡니다. 둘이 끌어안고서.”
대담한 그들보다 더 대담한 사람들이 지난밤의 과한 방사로 지쳐 아직까지 곤히 자고 있었다. 그와 진수의 숙소로 배정된 글램핑 하우스를 가리키며 강준이 하는 말에 잠시 멍하게 있던 연조는 곧, 얼굴을 붉히며 웃어 버렸다.
왜 하게 되었는지 모를 이상한 승부지만, 어찌 되었든 이번 게임에선 연조가 이겼다.
“이거 타 봅시다. ATV(All Terrain Vehicle).”
우도로 가기 위해 승선 신고서를 작성하고 집어 온 전단지를 면밀히 살피던 강준이 말했다.
“위험하지 않을까요?”
연조는 강준의 손에 들린 노란색 코팅지를 들여다보며 소심하게 어깨를 좁혔다. 사륜구동 오토바이라니, 그런 어마어마한 소음을 내는 기계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무섭습니까?”
“네…….”
“워크숍 와서 팀원들 속이고 과감하게 일탈도 하는 사람이 고작 이게 무서워?”
강준이 실긋 웃으며 하는 말에 연조는 얼굴을 붉혔다. 생각해 보면 참, 엄청난 일을 저질러 놓았기에.
어제 아침, 미라와 진수의 관계가 만천하에 드러나 다들 당황하고 정신없는 틈에 강준은 천연덕스럽게도 상황을 정리했었다. 가족과 애인 있는 팀은 계획대로 움직이고, 사고 친 커플은 이대로 서울로 가기 아쉬울 테니 올레 코스라도 돌며 애정을 쌓으라고 그들의 등을 떠밀었다.
고급스럽게 말하자면 양동 작전, 솔직하게 말하자면 ‘묻어가기’ 전략.
관심의 포커스를 미라와 진수에게로 돌려 버린 강준은 당연히 강준과 연조는 서울로 갈 것이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능청스럽게 손 흔들며 작별을 고하곤 타고 가던 택시의 방향을 틀어 다시 호텔로 돌아가게 했다. 그리고 오늘 오전까지 연조는 풀 빌라에 꼼짝없이 갇혀 있어야 했다. 강준의 뜨거운 요구를 녹초가 될 때까지 응해 주며.
문득, 강준과 풀에서 나눈 사랑이 떠오른 연조는 훅 끼쳐 오는 열기에 손부채질을 하며 급하게 선글라스를 꼈다. 어제 호텔 쇼핑몰에서 강준이 골라 주었던 민트색 비키니는 30분도 채 입고 있을 수 없었다. 풀에 들어간 연조를 부드럽게 감싸안은 강준이 달콤한 키스로 그녀의 혼을 빼 놓더니 순식간에 상의를 벗겨 내고, 이어서 물속으로 잠수해 하의까지 제거해 버렸다. 연조는 당황하며 수영장을 떠다니는 비키니를 붙잡으려 했지만 그 전에 강준의 품 안에 갇혀 버렸다.
“무슨 생각 합니까?”
끈질기고 진득한 애원과 애무에 결국엔 항복하고 그에게 몸을 열어 준 순간을 떠올리며 얼굴을 붉히고 있는데, 강준이 말을 걸었다.
“어, 아니요. 아무 생각도 안 해요.”
연조는 선글라스를 추어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나마 이거라도 쓰고 있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선글라스로 눈을 가리고 있지 않았다면 정교한 관찰력을 지닌 이 남자에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다 들켜 버렸을 것이다.
“목에서 불날 것 같은데.”
강준이 픽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전단지로 시선을 옮겼다. 깜짝 놀란 연조는 얼른 목을 감쌌다. 손끝에 닿은 살갗이 뜨거웠다.
얄미워, 정말…….
목덜미를 문지르며 곱지 않은 시선으로 강준을 바라보았다. 이런 사람인 줄 몰랐는데, 그는 짓궂은 면이 다분했다. 침대 안에서도, 침대 밖에서도 뜨겁고 다정하며 장난스러웠다. 그러다 어느 순간엔 애타는 눈빛과 들썩이는 가슴으로 자신이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를 연조에게 보였다. 여자를 다루는 데 능숙하기만 할 것 같은 그가 목울대를 크게 움직여 숨을 삼키며 긴장할 때면 연조는 어쩔 수 없이 마음이 녹았다. 그럴 때마다 이 능글맞은 팀장님이 등 뒤에 꽃을 감춘 채 좋아하는 소녀에게 고백을 앞둔 소년으로 보여서.
“배에 탑시다.”
강준이 선글라스를 껴 햇빛의 농도를 낮추며 말했다. 연조는 부드럽게 웃으며 강준이 내민 커다란 손에 기꺼이 제 손을 맡겼다.
“제주도엔 몇 번 와 봤어도 우도는 처음이네.”
“저도요. 그래서 기대돼요. 거긴 제주도랑 또 다르대서.”
제주도에서 방문해야 할 스폿 리스트는 땅에 닿을 만큼 길지만 어제 하루를 풀 빌라에서 불사른 탓에 고를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두 사람 다 가 본 적 없는 우도 하나 둘러보고 공항으로 가야 할 것 같지만 그리 서운하진 않았다. 하늘과 바다를 모두 끌어안은 전면 창이 꽤 멋졌던 풀 빌라에 종일 갇혀 있는 기분도 근사했었다. 강준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그곳이 어디이든, 그와 함께 있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하니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천진항에 도착해 처음 보이는 레저 숍으로 들어가 신분증을 맡기고 ATV를 빌렸다. 숍 직원에게 간단한 조작법을 들은 후 강준이 연조의 머리에 헬멧을 씌워 주며 말했다.
“앞에 타요.”
“네?”
“어렵지 않으니까 한번 몰아 봐요.”
바짝 긴장한 연조는 고개를 저었다. 정해진 트랙에서 타는 놀이 공원 자동차도 좋아하지 않거늘, 실제 차가 다니는 도로에서 달리는 기계를 직접 몰아야 하는 건 싫었다.
“내가 잡아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어, 팀장님, 저, 저는…….”
어어, 하는 사이 연조를 ATV에 먼저 태우고 그녀의 뒤에 자리 잡은 강준이 꽂혀 있는 열쇠를 돌려 시동을 걸었다.
“자, 갑시다.”
긴 팔다리를 앞으로 쭉 뻗고 넓은 가슴으로 연조의 등을 충분히 감싸안은 강준이 과감하게 ATV를 출발시켰다.
“핸들 잡아 봐요. 내가 같이 잡아 줄게.”
강준이 직접 연조의 손을 핸들에 올리고 그녀의 손등을 보호하듯 감싸쥐었다. 그 덕분에 연조의 두려움은 금세 가셨다. 그의 가슴에 등이 감싸여 마음이 포근하고 든든했다.
“괜찮아?”
어느덧 ATV는 해안 도로를 달렸다. 바람이 속도감 있게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네. 괜찮아요.”
언제 겁먹었느냐는 듯 연조는 환하게 웃었다. 우도의 바람을 맞으며 출렁이는 파란 물을 바라보는 기분이 이토록 좋을 줄은 몰랐다. 자신을 세상 끝까지 지켜 줄 것 같은 남자가 좁은 등을 틈 없이 감싸고 있어 두려움 같은 건 금세 녹아 버렸다.
“그럼 속도 높입니다.”
“어, 어. 팀장님!”
녹았다 생각한 두려움을 다시 솟게 하는 예고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역시, 두려움은 곧바로 증발되었다. 강준의 손이 제 손을 꽉 잡고 있기에 가속 레버를 힘주어 잡을 수 있는 용기도 생겼다.
“어때요! 기분 좋지!”
“네! 정말 시원해요!”
먼 길을 달려온 바람을 가르는 기분은 상쾌했다. 오늘만큼은 하루 사이에도 피부색을 바꾸는 여름 햇살을 맨몸으로 맞아도 좋을 것 같았다. 이토록 상쾌하고 유쾌한 공기는 오랜만이니까.
“재미있어요!”
귓가를 스치는 바람의 소리가 높아져 연조도 덩달아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신연조가 좋아!”
재미있다는 소감에 좋아한다는 대답을 들려주는 남자 때문에 큰 소리로 웃어 버렸다. 커다란 목소리로 말하고 웃는 건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랜만의 일이다.
“팀장님!”
“왜!”
“팀장니임!”
“왜, 신연조!”
“사랑해요!”
도로의 오른쪽 바다 건너, 유리 같은 하늘을 배경으로 푸르게 돋은 성산일출봉이 보였다. 우도의 테두리를 두른 통나무 목책 위로 파란 바다가 튀어 오르고, 저 멀리 소금 기둥 같은 하얀 등대가 햇살 아래에서 반짝였다. 사랑에 빠져 바라보는 세상은 다 빛이 났다.
“유강준 씨! 사랑해요!”
어쩌다 한 번쯤은, 나를 벗어 버리는 것도 괜찮을 테지. 큰 소리라곤 낼 줄 몰랐던 내가 마음껏 소리치고, 오토바이의 무례한 속도와 소음을 싫어하던 내가 스스로 가속 레버를 움켜쥐며 통쾌해하고, 사랑에 수동적이었던 내가 먼저 사랑의 말을 건네고.
세상의 모든 잘난 사람들에게 지금을 맡겨 두고 여행을 떠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내가 없다고 세상이 멈추는 것도 아니니까. 우울했던 나를 떨치고 생기 가득한 나를 찾아 주니까.
빠르게 달리던 ATV가 도로를 벗어나 풀밭에서 멎었다. 강준이 연조의 턱을 붙잡아 돌렸다. 그녀의 헬멧을 벗겨 버리고 그의 헬멧도 벗었다.
“신연조, 정말…….”
달린 건 오토바이인데, 달린 것처럼 숨을 몰아쉬는 건 그였다.
연조는 환하게 웃으며 저돌적으로 다가오는 강준의 입술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바람이 연조와 강준의 머리칼을 사정없이 흩뜨렸다. 청신한 바람 속에서 나누는 키스는 한결 더 따스하고 달콤했다.
“심장 터지는 줄 알았잖아…….”
오랫동안 그녀의 입술을 탐한 강준이 격렬히 뛰고 있는 가슴으로 연조를 끌어안았다. 이번만큼은 긴장하고 당황한 제 속을 숨기지 못하고.
빠르게 뛰는 그의 심장을 느끼며 은은하게 웃어 보인 연조는 강준의 품에서 크게 숨을 쉬었다. 가슴을 채우는 공기가 하도 맑아 온몸이 다 투명해지는 것 같았다.
한참 동안 서로를 끌어안고 서로의 심박을 느낀 후 ATV는 다시 움직였다. 작은 섬을 한 바퀴 돌아보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데도 그리 긴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가끔 뒤를 돌아 그에게 건네는 미소만으로도, 그녀를 지그시 내려다보는 눈빛만으로도, 다 알 것 같았다. 서로에게 서로가 있어 벅차게 행복한 마음을.
우도를 한 바퀴 돌아보고 하얗게 반짝이는 서빈백사에 ATV를 세웠다. 근처 카페에 들러 땅콩 아이스크림 하나를 나눠 먹고는 신발을 벗고 해변을 걸었다.
작은 섬의 작은 백사장은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들의 활기로 가득했다. 홍조류가 오랜 시간 파도에 구르고 뒤집히기를 반복하다 자잘한 돌덩이가 되어 쌓인 백사장은 맨발로 밟기엔 다소 거칠었다. 두 사람은 굵은 모래알을 밟으며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다 서로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배 안 고픕니까?”
강준이 바람이 헝클어 놓고 간 연조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주며 물었다.
“아직은 괜찮아요.”
“그럼 가기 전에 회 국수 먹고 갑시다. 근처에 맛있게 하는 데 있대.”
연조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주었다. 강준의 눈에도 근사한 웃음이 자리 잡았다.
“나중에 은퇴해서 제주도에서 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와, 정말 근사할 것 같아요.”
“그렇지? 감귤 나무도 심고, 감자밭도 일구고, 바다에서 낚시도 하고. 시간이 남으면 국수 요리도 개발할 겁니다.”
“국수 요리요?”
“국수 좋아하거든. 전에 보니까 신연조 씨도 국수 잘 먹던데. 우리 같이 잔치국수 먹었잖아요.”
언젠가 평택으로 출장 가 점심으로 먹었던 잔치국수가 연조도 기억났다. 그때는 함께 밥을 먹는 게 그렇게 불편할 수 없었는데. 그때와는 달라진 그와의 사이에 연조는 가슴이 뛰고 웃음이 나왔다.
“신연조 씨는 어떤 노래 좋아합니까?”
백사장 근처 상점에서 야외 스피커로 틀어 놓은 노래가 바람결에 실려 왔다. 유행 지난 노래를 잠시 따라 흥얼거리던 강준이 연조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우린 그런 걸 하나도 모르는구나…….
노래방에서 어떤 노래를 즐겨 부르는지, 어떤 색의 셔츠를 많이 가지고 있는지, 아플 때 간절해지는 음식은 무엇인지.
앞으로 알아 가야 할 것들이 많아 좋았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차근차근 알아 가는 기쁨 역시 매일매일 다른 기대감으로 다가올 것만 같아 절로 부드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모던 록 좋아해요. 후바스탱크나 라디오헤드, 라쎄 린드 특히 좋아하고.”
“의외네. 뭔가 예쁘고 밝은 노래 좋아할 줄 알았는데.”
“그런 노래도 좋아해요. 팀장님은 어떤 노래 좋아하세요?”
“조용필 노래. 킬리만자로의 표범, 특히 좋아합니다.”
의외였다. 클래식이나 고전적인 재즈만 들을 줄 알았는데.
그런데 그가 좋아한다는 노래에 연조는 왠지 손끝이 간질거렸다. 삶의 노정을 노래한 지극히 철학적인 노래라는 건 알지만 그걸 좋아한다는 강준은 뭐라고 할까…… 허세의 기운이 다분히 느껴졌다.
“그 노래를 왜 좋아하시는데요?”
“가사가 예술이잖아.”
킬리만자로의 표범 가사가 어떻게 되더라. 전체 가사를 모르는 연조는 휴대전화로 검색해 보았다.
고독한 남자의 불타는 영혼을 아는 이 없으면 또 어떠리…….
가사를 읽다 웃음이 터졌다. 가왕의 인생에 대응하면 참 멋진 내용인데 강준을 두고 대입하니 어쩐지 그가 귀여워졌다. 대부분은 더없이 멋있는 남자 어른이지만, 어느 순간엔 한없이 짓궂고 때론 수줍음 타는 소년 같은 그인지라.
“왜 웃습니까?”
“귀여워서요.”
“귀여워? 누가?”
허세 돋는, 팀장님이요…….
대답은 하지 않고 더 환하게 웃어 보였다. 강준은 뭔가 석연찮다는 듯 눈썹을 휘었지만 연조는 또다시 터지려는 웃음을 가까스로 삼키고 그의 손을 꽉 쥐었다. 아무리 귀여워도 이 남자의 허세는 지켜 줘야 할 것 같았다.
바다 가까이로 천천히 걸어가다 바다와 땅의 경계에서 멈춰 섰다. 연조와 강준의 발을 하얗게 덮쳤던 바다가 뿔뿔이 달아났다 다시 덮쳐 오기를 반복했다.
“묻고 싶은 게 있어.”
파도 소리의 일부인 듯, 그의 음성이 감미롭게 전달되었다.
“나를 사랑한다고…… 왜 그렇게 빨리 인정했지……?”
강준의 물음에, 바다를 바라보던 연조는 시선을 옮겨 그와 마주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미소와 예민한 긴장감을 함께 머금은 그의 눈빛이 근사해 가슴이 설렜다.
“사랑을 믿어 본 적 없었어요. 그게 뭔지 도무지 알 수 없어서. 금방 빠져 버리는 위험한 사랑 같은 것도 할 생각 없었고. 그건 금방 식어 버릴 것 같았으니까요. 그런데…….”
“그런데?”
“진심만 품고 들이대는 팀장님한테 제가…… 졌어요. 팀장님한테도 반했지만, 팀장님이 저를 사랑해 주는 방식에도 반해 버려서……. 그런 사랑을 이전엔 본 적도 없고, 받은 적도 없었어요. 그리고…….”
말을 멈춘 연조는 살며시 웃었다. 그리고 따뜻한 그의 눈을 우러러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내 마음을 부정할 만한 명분이…… 없었어요…….”
시간은, 명분이 될 수 없었으니까. 그것은 흐를수록 아깝기만 한 거니까.
“지는 게임은 해도 명분 없는 게임은 안 해요, 나는.”
대답을 마친 연조는 다시 바다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강준의 손이 연조의 손을 더욱 강하고 따뜻하게 감아 왔다.
찬란한 햇살이 투명한 하늘을 만들고, 하늘을 비춰 낸 바다를 푸른 물로 넘실거리게 하고, 바람의 기운을 청결하게 다독였다. 그 맑은 혜택을 연조와 강준은 온전히 받으며 오래오래 하늘과 바다를 눈에 담았다.
“멋진 승부사라서…… 고마워요.”
오랜 침묵 후, 강준이 말했다. 그의 눈은 여전히 푸른 바다에 흠뻑 빠져 있었다.
“덕분에 가슴이 벅차…….”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속삭이는 말에, 연조는 살며시 웃었다.
“사랑합니다, 신연조 씨. 오늘을 절대 잊지 못할 것 같아…….”
푸른 바다와 맑은 하늘. 멋진 추억 속에 서 있는, 서로를 사랑하고 있는 두 사람.
이 여자 없이, 이 남자 없이, 자신을 수식하기란 이젠 불가능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