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이별 후에, 소주
포장마차 주변으로 매운 안주를 조리하는 양념 냄새가 매콤하게 퍼졌다. 연탄불에 볶아 낸 제육볶음은 하얀색 플라스틱 접시에 빨간 양념만 남긴 채 비워졌고, 규호는 먹장어구이를 추가로 주문했다. 어묵 국물 서비스도 서글서글하게 부탁하고서 자리로 돌아와 긴장감 없이 구부러진 화영의 허리를 다정하게 감싸안았다.
“일 났어. 연조, 맛 갔나 봐.”
“그래 봐야 연조 씨는 두 병밖에 안 마셨는데?”
빈 소주병이 볼링 핀처럼 늘어선 테이블 위에 연조는 등뼈가 없는 사람처럼 휘늘어져 있었다. 소주 두 병이 더 얹힌 몸을 가누지 못하고.
“두 병이면 많이 마신 거지. 연조 주량 소주 일 병이랬잖아. 너무 많이 먹였다고.”
세 병은 윤준의 외도에 연조보다 더 열 받은 화영이, 세 병 반은 이별의 상처를 술로 소독해야 한다는 지론을 앞세운 규호가 비워 놓았다. 그들 중 가장 적은 양을 마셨지만 본인 주량의 두 배를 마신 연조는 이별의 무게감까지 더해진 술에 짓눌린 것 같았다. 권하는 족족 받아 마시더니 결국엔 꼿꼿하게 세웠던 척추의 힘을 풀어 버렸다.
“계집애. 사양하지 않고 막 마시더라니…….”
연조와 윤준이 이별한 후 2주가 흘렀다. 스스로를 재우치며 무리해서 일하던 연조가 위태로워 보여 걱정이 많았던 화영은 연조에게 먼저 한잔하자고 제안했다. 저녁을 먹지 못한 연조에게 가락국수부터 먹이고 시작한 술자리는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른 것도 아니건만 꽤 많은 수의 빈 병들을 줄 세웠다.
“우리 연조 괜찮을까?”
“한동안은 힘들겠지. 세상에 괴롭지 않은 이별이 어디 있겠어. 이별은 다 힘들고 아픈 건데.”
“그렇겠지?”
화영은 다시 한 번 긴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이 끝나기라도 한 것처럼 펑펑 울어 젖히거나, 변심한 애인을 향해 시원하게 욕이라도 퍼부었으면 좋으련만 연조의 성격에 그런 건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조금은 창백해진 얼굴에 촉촉한 두 눈과 메마른 입술을 하고 술잔을 기울이는 연조는 그저 고요했다.
“그딴 자식한테 마음을 전부 주지 않은 게 뭐 어떻다고. 백번 생각해도 잘한 거구먼.”
화영은 빈 잔을 소주로 가득 채우며 고시랑댔다. 오늘따라 술이 쓰고 뜨거웠다. 윤준을 진정 사랑하지 않았음을 미안해하던 연조가 이해될 듯 이해되지 않았다. 온 마음을 다했더라면 지금은 지난 사랑에 대한 집착과 슬픔에 마음이고, 육신이고 제대로 가눌 수 있는 게 없을 것 같은데 말이다. 가치 없는 남자 때문에 소중한 친구의 심신이 그런 식으로 소모된다면 화영은 지금보다 몇 배는 더 속상할 것 같았다.
“나는 연조 씨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마음을 다 주지 않은 사랑이라 오히려 후회가 많이 남지 않을까?”
쓴 소주를 털어 넣은 화영의 입에 오이 조각을 넣어 주며 규호가 옅게 웃었다.
“뭘. 어차피 이렇게 헤어질 거, 차라리 잘된 거지 뭐.”
“헤어질 걸 계획하고 사랑하진 않잖아. 이 사람과는 영원할 거라 생각하고 사귀는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거지. 연조 씨 그 남자하고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었다며. 그런데도 마음을 다 주지 않은 자신한테 겁이 좀 나지 않았을까. 다음 사람에게도 이런 식이면 어쩌나, 다시 연애를 시작할 수나 있을까, 하고 말이야.”
“그래도 뭐, 그딴 자식하곤 잘 헤어졌어.”
“맞아. 잘 헤어지긴 했는데, 자꾸 인상 쓰지 마, 자기.”
잔뜩 일그러진 화영의 미간을 쓰다듬는 손길이 부드러웠다. 규호의 손길이 머물렀던 곳의 주름진 피부가 매끈해지고, 화영의 두 볼이 알코올과 상관없이 달아올랐다.
“우리 자기는 나를 참 열심히 사랑해 주는데.”
“내가 그랬어?”
“응, 그래서 정말 예뻐. 화영이가 최고야.”
육신도, 정신도 발랄한 20대 초중반의 싱그러운 남자는 사랑을 표현할 땐 말도, 행동도 박하지 않았다.
“나도 우리 자기가 최고야.”
“정말?”
고개를 끄덕이며 두 눈을 반짝거리는 화영을 지그시 쳐다보던 규호가 그녀의 이마에 입 맞추었다. 이별의 피로감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진 연조를 앞에 두고 하기엔 미안한 감이 없지 않지만, 연조가 제정신일 땐 차마 하지 못했던 애정 표현에 두 사람은 마냥 행복했다.
“일반적으로 보면 말이야. 배운 여자들한테 유달리 취약한 분야가 연애와 성인 것 같더라고. 그런 분야도 공부하는 것처럼 글로 배우려고 하거든.”
규호는 그에게로 좀 더 몸을 기대 오는 화영의 허리를 밀착해 끌어안으며 말했다. 화영의 허리를 위아래로 쓰다듬는 손길도, 지론을 펴는 음성도 사뭇 부드럽고 진지했다.
“나도 나름 배운 여자지만 연애 잘하는걸.”
“자기는 연애를 글로 배우진 않았잖아. 몸소 배우셨지.”
규호의 지적에 화영이 콧등을 찡그리며 웃었다. 그런 그녀가 귀엽다는 듯 규호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체험은 체험으로 배워야지, 글로 배워서야 되겠어? 전 남자친구하고는 교과서처럼 만났다고 했으니까 경험 쌓기엔 별 도움이 안 됐을 거고.”
“흠……. 그런 것 같기도 하네.”
“그리고 이런 말이 있지. 사랑은 다른 사랑으로 잊힌다.”
“오……. 맞아, 맞아.”
불멸의 진리를 들은 듯 화영이 손뼉을 치며 두 눈을 번쩍 키웠다. 흡족한 반응에 규호의 표정이 조금 더 밝아졌다.
“연조 씨한테 좋은 사람 소개해 줄까 봐. 얼마 전에 고등학교 체육 교사 된 선배가 있는데, 사람 참 괜찮거든. 나이는 스물일곱. 자기랑 연조 씨랑 동갑이네. 집안도 괜찮고, 생긴 것도 봐 줄만 하고.”
“잠깐만, 자기야.”
생각난 김에 선배의 신상을 찾아볼 듯 휴대전화 안의 정보를 바쁘게 뒤지는 규호의 손을 화영이 붙잡았다. 가늘게 좁혀 뜬 화영의 눈에 반짝, 명민한 빛이 스쳤다.
“생각해 보니까 연조네 회사 팀장님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는 것 같았어.”
“그래?”
“응. 전에도 자정 다 돼서 연조 불러내고. 아무리 같은 오피스텔에서 산다지만 말이야.”
“오…….”
규호의 눈 끝이 예리해졌다. 죽이 잘 맞는 둘은 마주 바라보며 손을 모았다.
“혹시 연락처 알아?”
“아니. 그런데 알아낼 수는 있어.”
“그럼 지금 부르자.”
“그래도 될까?”
“안 될 건 없지. 연조 씨 이렇게 취했는데 집에 데려다 줄 사람 필요하잖아. 나는 우리 자기 책임져야 하니까. 게다가 연조 씨 업어야 할 것 같은데. 연조 씨 내가 업는 건 좀 그래. 연조 씨 데려다 줄 남자가 없는 것도 아닌데.”
“그럼, 잠깐만.”
단김에 빼야 하는 건 쇠뿔만이 아니다. 화영은 빈 의자에 올려 둔 연조의 핸드백을 빠르게 뒤져 휴대전화를 꺼냈다. 연조의 휴대전화 패턴쯤이야 이미 알고 있는 바, 대기 화면에 패턴을 재빠르게 긋고 전에 어깨 너머로 봤던 메시지를 찾아낸 화영은 곧장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신연조 씨.
신호음이 몇 번 울리지도 않았건만 곧장 들려오는 음성에 화영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이런 식이라면 점쟁이가 아니어도 알 수 있었다. 연조에게 잔뜩 목이 마른 이 남자의 갈증을.
“어, 안녕하세요. 저는 연조 친구 김화영이라고 하는데요. 실례지만 지금 이곳으로 좀 와 주실 수 있을까요? 연조가 너무 많이 취해서요.”
- 거기 어딥니까.
근사한 중저음은 토를 달지 않았다. 시원스러운 진행에 화영은 규호를 바라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연조 친구의 전화를 받고 달려간 성업 중인 포장마차. 급한 마음으로 두어 번 두리번거린 시선의 끝에서 강준이 찾는 일행은 어렵지 않게 발견되었다.
“안녕하십니까. 유강준입니다.”
그들에게 곧장 다가간 강준은 테이블 위에 엎드린 연조에게서 미처 눈을 떼지 못하고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김화영이에요. 이쪽은 제 남자친구고요.”
서글서글한 인상에 시원스러운 미인형의 여자는 회사 건물 앞을 오가다 커피숍에서 간혹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안녕하세요. 이규호라고 합니다.”
여자의 허리를 감아 안고 있던 청년이 훈훈한 미소로 강준을 맞았다. 강준도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네, 반갑습니다.”
악수를 하면서도 강준의 시선은 엎드려 있는 연조의 상태를 살폈다. 간간이 솟았다 내려앉는 등이 풀기를 잃어 가냘파 보였다. 근심 어린 주름이 강준의 미간으로 내려앉았다.
“전화로도 말씀드렸다시피 연조가 많이 취해서 좀 부탁드리려고요. 염치없는 줄은 알지만 저희랑 같은 오피스텔에서 사신다고 하고, 또…… 음…… 우리 연조한테 관심 있으신 거, 맞죠?”
“네. 맞습니다.”
다소 저돌적인 물음에 곧바로 수긍한 강준은 싱그럽게도 웃었다. 그의 미소에 화영이 눈을 깜빡이다 곧, 두 볼을 발갛게 물들였다. 규호와 깍지껴 잡은 손에 힘을 주어 그의 시선을 끌곤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이 남자라면 괜찮을 것 같다는 낙점에 고개를 끄덕여 보인 규호는 화영의 핸드백을 들었다.
“저희는 일이 있어서 먼저 가 볼게요. 우리 연조 너무 늦지 않게 바래다주셨으면 좋겠어요. 참, 저희 집 1315호예요. 혹시 모르니까 번호 교환해요.”
“그러시죠.”
빠르게 휴대전화 번호를 교환한 후 눈치 빠른 연인은 산뜻하게 작별 인사를 하고 금세 사라졌다.
그들이 떠난 후 강준은 플라스틱 스툴에 앉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간 죽도록 일만 하던 그녀가 오늘따라 이른 퇴근을 하기에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걱정했는데 여기에서 늘어져 있을 줄이야. 이별 후의 수순이라도 되는 듯 술에 잡아먹힌 그녀는 하얀 목덜미를 드러낸 채 애처롭게 자고 있었다. 한 번 더 긴 한숨을 내쉰 강준은 포장마차 사장에게 새 잔과 소주 한 병을 부탁했다.
홀로 따라 마신 소주가 넘어가는 목구멍이 불에 타는 것 같았다. 버릇 같은 한숨이 화끈거리는 목구멍을 역류했다.
좋아하고 있는 여자가 애인과 헤어졌다. 생각보다 빠른 이별이었다. 기뻐해야 하는데, 아니 무척 기쁜데, 한편으론 막막했다. 이제부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서. 그녀를 좋아하는 마음은 갈수록 명확해지건만 이별한 그녀를 지켜보는 건 막상 닥치고 보니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기가 아닌 다른 남자 때문에 아파하는 여자를 지켜봐야 하는 게 이토록 감정이 소모되는 일일 줄은 몰랐다.
실은, 연조가 윤준을 사랑하고 있을까 봐 겁이 났다. 사랑하고 있겠지만, 그딴 걸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그 마음을 돌릴 수 없을까 봐. 지금부터는 기다려야 하건만 기다리는 마음이 조바심을 내 일을 그르칠까 봐 강준은 모든 것이 조심스러웠고, 조심하느라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답답했다.
“신연조 씨…….”
소주가 가득 담긴 채 방치되어 있는 연조의 잔에 제 잔을 외로이 부딪치고서, 강준은 나직하게 그녀를 불렀다.
“나는…… 자꾸만 마음이 급해져…….”
조바심치는 마음이 버거워 강준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미래에 살고 있는 마음은 황홀하고, 현재를 직시하는 이성은 시릿한데, 그녀는 무엇을 하고 있든, 일단 예뻤다. 실은 처음부터 그랬다.
“첫눈에 반하는 사랑은, 위험한 건데 말이죠…….”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보지도, 듣지도 못한 채 마음부터 걸어 버렸으니까.
처음엔 부정했었다. 그녀에게 첫눈에 반한 건 아니라고, 그런 게 있을 수 있겠느냐며, 그녀의 가슴에 커피를 쏟았기에 눈이 갔을 뿐이라고. 이후에도 그녀에게만 눈길이 가고 신경이 쓰인 건 처음부터 반했기 때문이었는데도 말이다. 첫눈에 속수무책으로 빠져 버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랑 같은 걸 강준은 자기가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잠든 그녀를 바라보다 쓰게 웃어 버린 강준은 조금 더 깊은 각도로 술잔을 기울였다. 늘어선 빈 병 무리에 새 병이 하나 더 추가됐다. 새로이 술을 시킬까 고민하다 고개를 저은 강준은 아직 비워지지 않은 연조의 잔으로 손을 뻗었다. 그때, 그녀의 등이 꿈틀거리며 움직거렸다.
“화영아, 나 물 좀…….”
옅은 신음을 품은 음성에 설핏 웃음이 나왔다. 아무리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 터지게 고민해 봐도 기승전, 신연조가 되어 버리는 마음은 그녀의 작은 몸짓 하나에도 설레고 만다.
자리에서 일어난 강준은 500시시 맥주 컵 하나 가득 얼음물을 받아 왔다. 그러곤 엎드렸던 자리에서 느릿느릿 일어나는 연조에게 컵을 건넸다.
“마셔요.”
반쯤 뜬 눈으로 앞을 바라보던 연조의 눈이 확 벌어졌다.
“마셔요. 속 좀 차리게.”
강준이 연조의 손에 손수 물 컵을 쥐여 주며 말을 이었다.
“신연조 씨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었어요. 신연조 씨 좀 책임져 달라고.”
“아……. 네…….”
좀처럼 제정신이 돌아오지 않는 듯 느리게 대답한 연조는 강준이 쥐여 준 냉수를 빠르게 마셨다. 잔이 비워질수록 그녀의 몸짓이 빠르게 경직되어 갔다. 테이블 위에 물 잔을 내려놓을 땐 로봇이 따로 없을 정도였다.
“죄송합니다.”
눈에 보이게 뻣뻣해져선 대뜸 사과부터 하는 모습에 강준은 미간을 좁혔다.
“뭐가 죄송합니까?”
“폐를 끼쳐서……. 저는 여러모로 팀장님께 민폐만 끼치네요.”
연조의 말에 강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성격상 이런 상황이 버거울 거라는 건 안다. 하지만 그녀의 기준에서 그녀가 자신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서야 이 여자와의 접점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강준의 가슴을 막막하게 하는 실체는 바로 이런 것이었다. 컨설팅 하는 것처럼 전략 따윈 짤 수 없는 여자에게 보여 줄 수 있는 건 진심밖에 없건만, 그걸 보여 줄 기회를 그녀가 거부해 버리면 자신은 더 이상 무얼 할 수 있을까.
“미안하면 밀어내지 말죠. 여기까지 신연조 씨 보겠다고 달려온 보람 없애지 말고.”
“팀장님 자꾸 이러시면…….”
곤란하다는 듯 두 볼이 발개진 채 정색한 그녀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탐장님이 저한테 왜 이러시는지. 제가 팀장님 같은 분 관심 받을 만큼 괜찮은 사람도 아니고, 또 지금 제 상황이 팀장님께 미안한 일만 만들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정확히 뭡니까.”
“팀장님 이러시는 거, 부담스럽습니다.”
망설임 없이 뱉어진 말에 강준은 어금니를 지그시 물었다. 그러다 연조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올려 단숨에 비워 버렸다. 그녀를 갖고 싶어 조바심 나는 마음이 울컥거렸다. 하지만 마음만 울컥거리게 하고 머리를 바보로 만들어 버리는 사랑은 단 한 가지의 방법만을 허락했다.
“밀어내지 말죠.”
그저, 직진.
다른 곳 보지 않고, 다른 맘 품지 않고 오직 그녀를 향해 온 마음을 내보이며 달려가는 것, 그 하나.
“밀어내지 말아요. 섭섭해서 울고 싶어지니까.”
“팀장님…….
“밀어내지 마.”
그녀의 말을 끊어 내며 버럭 화를 냈다.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게 이토록 지상 최대의 난제인 자신을 앞에 두고 그녀는 자꾸만 까다롭게 굴려고 했다. 그것이 답답해 미치겠는 강준은 강경한 음성으로 마음을 쏟아 냈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신연조 씨한테 멈추지 않고 다가가는 것밖에 없는데 의지 꺾으려 들면 어떡해. 내가 전에 말했죠. 각오하라고. 앞으로 신연조 씨 정신없이 흔들 생각이라 각오하라고 했어요. 하지만 노력할게요. 마음은 급해 죽겠지만 되도록 천천히 다가갈 수 있도록. 그러니까…….”
잠시 말을 멈추고 입 안에 고인 쓴 기운을 삼켰다. 그녀를 앞에 두고 있자니 자꾸만 갈증이 났다. 몸이 먼저 반응하게 만들어 버리는 본능이 몹시 짜증난다.
“밀어내지 말라고, 신연조.”
사랑하는 마음은 다소 이기적이라, 이별의 아픔에 젖은 그녀가 자신을 돌아봐 주지 않을 거라는 생각만 하여도 가슴이 사납게 들썩였다. 그녀의 상황을 배려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마음이 앞서 나간다. 신중하게 세웠던 계획은 그녀 앞에선 언제나 공중으로 날아가고, 자신을 처음 보는 사람으로 만드는 난감함만 남는다.
강준은 연조 앞에 놓인 물 잔마저 채 가 말끔히 비워 버렸다. 가슴의 불을 조금도 꺼뜨리지 못한 효력 없는 얼음물은 마지막 한 방울까지 강준의 목구멍으로 빠르게 넘어갔다. 이따위 맹물 말고 연조의 단 숨 한 모금이 절실히 필요한 강준은 차라리 그녀를 외면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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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걷던 강준의 발길이 공원 쪽으로 옮겨 갔다. 말없이 그의 뒤를 따르던 연조는 곤란한 듯 이마를 문질렀다.
의외의 고집이 그의 뒷모습에 서려 있었다. 강단 있는 사람이니 고집이야 없지 않겠지만 연조로선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한편으론, 자신을 밀어내지 말라는 그의 우격다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지금까지 내내 참아 오기만 한 그가 폭발하듯 몰아붙인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참고 참기만 하는 모습의 아슬아슬함은 이런 데 있는 것이니까. 인내는, 참고 있던 마음을 언젠간 엄청난 화력으로 분출할 것이라는 의미 또한 품는다.
그렇게 따지자면 연조도 한순간에 터뜨려 버리고 싶은 마음이 웅숭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농도를 더해 가며 짙어지는 감정이 그녀라고 왜 없을까. 감정을 표출하는 빈도가 사람마다 다를 뿐이지, 이 세상에 성깔 없는 사람은 없으니 말이다. 인내심이라는 이름으로 감춰 두었을 뿐, 잠시의 휴지기에 들어간 활화산 하나쯤은 누구의 마음속에나 있지 않을까.
강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가슴이 뜨거워진 연조는 그 자리에서 멈춰 버렸다. 몸과 마음이 모두 힘들어 더 이상 걷고 싶지 않았다. 그는 가든 말든, 연조는 눈에 걸린 벤치에 고단한 몸을 맡겼다.
강준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나무 벤치에 기운을 빼고 앉아 버린 연조를 향해 한숨을 내뱉곤 그녀에게 다가왔다. 조금 의기소침해진 연조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를 한사코 밀어내면 어떻게 벽을 부수고 다가오려는지 확인하고 싶다는 짓궂은 마음도 일었다.
아니, 아니. 지금은 다 모르겠고, 확실히 자신은 취해 있었다. 한꺼번에 들이켰던 얼음물과 강준의 우격다짐으로 깼다고 생각했던 정신은 다시 맥없이 가라앉았다. 감은 눈 안에서 혼란스러운 무늬의 소용돌이가 일고, 머릿속은 실마리를 찾을 수 없게 뒤죽박죽 엉켰다.
그때, 무릎을 톡톡 건드리는 작은 기척이 느껴졌다. 생경한 느낌에 눈을 뜬 연조는 목줄이 풀린 갈색 푸들의 머루알 같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눈을 뜨자마자 마주친 주인 모를 개라니. 연조는 이 상황이 당혹스러워 개를 한 번 보고, 강준을 한 번 바라보았다. 강준도 난데없이 등장한 개에게 당황한 듯 미간을 좁히고 연조와 개에게 번갈아 가며 시선을 옮겼다.
“너 누군데?”
이 상황이 우스워 엷게 웃으며 다정하게 묻자 개의 꼬리가 발랄하게 역동했다. 연조는 갈색 라면땅 같은 털을 만지작거리며 좀 더 짙게 웃었다. 개는 연조의 손길에 상당히 흥분한 듯 그녀의 발치에서 빙그르르 한 바퀴 돌더니 단박에 연조의 무릎 위로 뛰어올랐다. 그러곤 연조의 어깨를 앞발로 턱 짚고서 순식간에 그녀의 입술을 빼앗아 버렸다.
“간지러워…….”
불청객의 기습으로 연조는 좀 더 커다래진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강준의 입술에도 웃음이 어렸다. 터지려는 웃음을 욱이려 노력하는 모습은 역력해 보이지만.
“해피야! 해피야! 해피, 어디 있어! 어머! 아우 해피, 이 자식아!”
그때, 슬리퍼를 찍찍 끌며 바쁘게 다가오는 아주머니의 음성에 개가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놀라 달려온 아주머니에 의해 단박에 허공으로 들어올려진 개는 엉덩이를 댓 번 얻어맞았다.
“아우, 이놈의 자식! 하여튼 예쁜 아가씨만 보면 정신을 못 차려, 이 자식이!”
개는 주인의 품에 안긴 채 쏟아지는 핀잔을 심드렁한 표정으로 들었다. 뻔뻔해 보이지만 사랑을 많이 받고 자라 얻은 자신감이 개의 까만 눈알에 담뿍 담겨 있었다.
“죄송해요. 한눈판 사이에 목줄이 풀어져서 그만.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강아지가 정말 귀엽네요.”
핸드백을 열어 물티슈를 찾아 입술을 닦은 연조는 엷게 미소지었다.
“아휴, 귀엽긴요. 엄청 천방지축이에요. 내가 얘 때문에 하루에도 열두 번씩 놀란다니까요.”
연조가 손을 뻗어 개의 곱슬곱슬한 털을 쓰다듬자 아주머니는 구박했던 품안의 개를 사랑스럽다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우리 해피 때문에 실례 많았습니다. 그래도 예뻐해 주셔서 감사해요.”
“아니요. 저도 정말 즐거웠어요. 잘 가. 다음에 또 보자.”
잠시 동안이었지만 기분 좋은 만남에 불청객에게 다정히 인사하고 나자 주위는 다시 고요해졌다. 연조는 웃음의 여운이 묻은 눈길로 강준을 바라보았다.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연조의 눈과 입술에 남아 있던 웃음기가 서서히 사라졌다. 또다시 찾아온 정적에 어쩐지 머쓱해졌다. 연조는 뜨거워지는 목덜미를 문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그만…….”
가자는 말은 마저 뱉지 못하고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때, 연조의 손목이 뒤에서부터 잡혀 몸이 돌려세워졌다. 그녀의 눈앞으로 불쑥 다가온 강준이 공원의 조명 빛을 받고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예상치 못한 그의 행동에 연조의 심장이 제 위치를 벗어날 것처럼 크게 출렁거렸다.
“웬만하면 참아 보려고 했는데…….”
강인한 팔이 연조의 허리에 휘감겼다.
“도저히…… 안 되겠습니다.”
당황한 연조는 강준을 밀어내려고 단단한 가슴에 손을 올렸다. 하지만 넓은 가슴팍에 닿은 작은 손은 크고 뜨거운 손아귀에 잡혀 버렸다.
곧, 뜨거운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집어삼킬 듯이 다가왔다. 단단한 혀가 말랑한 입술을 핥고, 입술을 벌릴 때까지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하아……. 팀장님…….”
강준을 가까스로 밀어내고서, 연조는 급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숨 쉬는 법을 잊은 것처럼 그와 키스하는 동안 조금도 호흡할 수 없었다. 찌를 듯 뜨거운 눈빛에 사로잡혀 다른 곳으로 시선을 비키지도 못했다.
“입술이 왜 그렇게 헤픕니까.”
침묵을 먼저 깬 그가 연조를 힐난했다.
“그, 그게 무슨…….”
얼떨떨한 연조는 말을 더듬었다.
“강아지한테도 함부로 뺏기고.”
“뺏기다니 뭘…….”
“강아지는 되고 나는 안 된다고 하지 마요. 그 강아지보단 내가 더 신연조 원하니까.”
뜨거운 입술이 다시금 내려와 놀라 벌어진 입술을 소유했다. 그리고 연조는 진득하게 입술을 무는 그의 키스를 받으며 생각했다.
그는 마치, 소주 같다고.
가식은 없지만 뒤끝 있는 그 술처럼, 그는 가식 따윈 키우지 않지만 뒤끝이 만리장성이다. 머리를 어지럽게 하고 심장을 뛰게 한다. 혈관으로 뻗치는 모든 혈액의 운행을 뜨겁게, 뜨겁게 치닫게 한다.
오로지 취하는 데만 목적을 둔 소주처럼, 연조는 강준에게 꼼짝없이 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