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로의 당신-6화 (6/13)

6. 이별의 이유

“좋은 아침입니다.”

연조는 인포메이션 테이블의 직원에게 인사를 건네자마자 마주친 이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좋은 아침입니다, 대표님. 팀장님.”

“오, 연조 씨, 좋은 아침. 대전엔 잘 다녀왔고?”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는 연조에게 재현이 환히 웃으며 알은척했다. 강준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연조를 응시했다. 강준은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건 없지만, 할 수 없는 것도 없을 그는 연조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으면서 마음을 감추는 눈빛 따윈 보이지 않았다.

“네, 덕분에 잘 다녀왔습니다.”

재현에게 나중에 말씀드리겠다며 인사하고 먼저 그 자리를 떠나는 강준에게서 존 바바토스의 시트러스 향이 났다. 신경 세포를 올올이 줄 세우는 향기에 연조는 살며시 미간을 그었다.

“내 덕분일 게 뭐 있어. 연조 씨 아버지는 건강하시지?”

“네……. 건강하십니다.”

재현의 물음에 연조의 얼굴이 흐려졌다. 엄마에게만 빼고 모든 이에게 좋은 이였던 아버지. 공교롭게도 재현은 아버지의 좋은 모습만 기억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연조 씨 할머니께서 예전에 된장찌개 참 맛있게 잘 끓이셨는데. 어렸을 때 놀러 가면 정말 잘해 주셨어.”

할머니 또한 엄마를 제외한 모든 이들에게 좋은 분이었다. 역시나, 할머니의 좋은 모습만 기억하고 있는 재현은 아련한 눈빛으로 연조를 바라보았다. 재현은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 해외 출장 중이었다며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한 것을 아직도 아버지와 연조에게 미안해했다.

“참, 대표님. 블루베리 화분갈이는 하셨습니까?”

재현이 자신을 통해 좋은 사람이었던 아버지와 할머니를 떠올리는 것이 싫어, 연조는 화제를 돌렸다.

“아, 그거 연조 씨가 도와주기로 했었지. 오늘 점심때 시간 되나?”

“죄송하지만 오늘은 선약이 있습니다.”

고급 한정식집에 점심을 예약해 두었다는 윤준의 문자 메시지를 아침에 받았었다. 윤준의 어머니와 함께 해야 하는 자리가 편하진 않지만 연조는 애써 마음을 가다듬었다. 윤준이 연조의 엄마를 불편해하고 어려워한다면 연조의 마음도 어쩔 수 없이 서운할 테니까.

“아하……. 그럼 언제 시간을 내 본다? 다른 때는 나도 영 시간이 여의치 않은데. 요즘 나랑 점심 먹고 싶어 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말이지.”

“그럼 제가 해 놓겠습니다.”

천진하게 웃어 보이는 재현의 미소에 전염돼 엷게 웃어 보인 연조가 통 크게 말했다. 그러나 재현은 아니 될 말이라는 듯 크게 고개를 저으며 짐짓 미간을 좁혔다.

“그건 안 될 말이지. 이번만 도와주면 다음부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런 생각일랑 하지 말고. 그나저나 우리 블루베리가 나한테 원망이 많겠는걸. 집은 답답한데 신경도 안 써 준다고 말이야. 이 일을 어찌한다.”

“지난 금요일에 했으면 좋았을 텐데요. 그때도 대표님, 많이 바쁘셨나 봐요. 약속 미루자는 연락이 없어서 헛걸음할 뻔했었습니다.”

연조는 마침 지난 금요일의 약속 파기가 생각나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럴 분이 아닌데 연락도 없이 약속을 깨 버린 것이 이상했다.

“응? 지난 금요일? 그때 왜?”

무슨 말이냐는 듯 재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대표님께서 옥상에서 잠깐 보자고 문자 메시지를 주셔서요.”

“응? 내가?”

단기 기억 상실증에 걸리지 않은 이상 이런 무구한 반응을 보일 리 없을 텐데. 예상치 못한 재현의 모습에 연조는 미간을 좁혔다.

그렇다면 그때 강준이 옥상 출입구까지 달려온 건, 무엇 때문이었을까…….

바쁘고, 피곤하고, 한편으론 멍했던 며칠을 보내느라 생각 밖에 두었던 의문스러운 점이 지금에야 떠올랐다.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고 가다듬을 틈도, 의지도 없어 미뤄 둔 생각의 실마리를 이제야 잡은 듯했다.

“지난 금요일 점심시간이 가까워 올 때 대표님께서 문자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옥상에서 잠깐 보자고요. 화분갈이 도와 달라고 부르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지난 금요일 점심시간이 가까워 올 때라…….”

기억을 더듬어 보듯 고개를 갸웃거리다 손에 쥐고 있던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던 재현이 눈살을 조금 찌푸렸다.

“어어……. 내가 보내 놓고도 기억을 못했네. 미안. 미안해요, 연조 씨.”

석연치 않은 표정과 어색한 말투로 재현은 그제야 자기가 문자 메시지를 보냈었노라고 인정했다. 이상했지만, 연조는 속내를 감추며 웃어 보였다.

“아닙니다. 유강준 팀장님이 대표님 부재 중이시라고 알려 주셔서 헛걸음은 안 했습니다.”

옥상 바로 앞까지는 갔었지만. 옥상 출입문 앞에서 받았던 강준의 고백이 또다시 떠오른 연조는 뜨거워진 목덜미를 살며시 매만졌다.

“유 팀장이?”

“네, 대표님.”

재현의 눈빛이 다소 날카로워졌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표정이 그답지 않게 그늘을 드리우며 가라앉았다.

“그랬었군. 아무튼 미안해, 연조 씨. 이것 참, 내가 벌써부터 오락가락하면 안 되는 건데 말이야.”

“아닙니다, 대표님. 너무 미안해하시면 제가 더 죄송해집니다.”

심각하게 가라앉을 일이 아닌데도 흐려지는 재현의 얼굴을 보며 연조는 괜한 말을 꺼낸 건가 싶어 멋쩍어졌다.

“그런데 내가 정확하게…… 뭐라고 문자 메시지를 보냈었지?”

“네?”

“어, 아니. 아니야. 그런데, 연조 씨.”

자기가 보낸 문자 메시지를 무어라 보냈는지 묻던 재현은 몹시 당황하더니 이내 가라앉은 음성으로 연조를 불렀다.

“네, 대표님.”

“연조 씨하고 우리 딸하고 언제 만난 적 있었던가?”

“얼마 전에 점심 먹다가 우연히 마주쳐서 인사 나눈 적 있습니다. 유강준 팀장님이 대표님 따님이라고 소개해 주어서요.”

뜻밖의 질문이 의아했지만 연조는 차분히 대답했다.

“아, 그래? 알겠어요. 이제 그만 일 봐.”

궁금한 것을 묻고 답을 들은 재현은 의문이 확실히 풀렸다는 듯 명쾌한 얼굴이 아니었다. 외려 복잡한 심사가 드러난 표정을 짓곤 집무실로 향하다 휴대전화를 몇 번 두드리더니 그것을 귀에 대며 말했다.

“민정이니? 너 지난 금요일에…….”

재현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고 곧이어 문이 닫혀 뒷말은 문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연조는 미간에 빗금을 그었다. 어딘가 석연치 않은 재현의 태도는 자꾸만 의심이 피어오르는 마음에 충분한 근거가 되어 주었다. 강준은 그날 왜, 옥상으로 가려는 자신을 막았던 것일까.

의문을 품고서 사무실로 들어가 팀원들에게 인사하고 책상에 앉았다. 핸드백을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다시 골똘히 생각에 잠기려는데, 미라가 평소와 다르게 친근한 미소를 짓곤 의자를 끌며 다가왔다.

“연조 씨, 혹시 소문 들었어?”

“네? 무슨…… 소문 말씀입니까?”

난데없는 화제에 연조가 슬며시 미간을 좁혔다.

“자기 어제 회사에 없어서 못 들었지? 저기 있잖아…….”

연조를 향해 조금 더 고개를 낮춘 미라는 얕게 흥분해 있는 것 같았다. 무언가 대단히 아찔한 정보를 쥐고선 사건의 진상을 전달하기 직전의 희열을 맛보고 있는 듯했다.

“연조 씨 버디 있잖아, 서윤준 씨.”

“네…….”

“서윤준 씨하고 대표님 딸하고 그렇고 그런 사이인 거 알아?”

“서윤준, 씨가요?”

속삭이는 목소리지만 못 알아듣지는 않았다. 도저히 그럴 수가 없는 이름이었으니.

“연조 씨도 놀랐지? 우리도 어제 난리 났었잖아. 지우 씨 있지, 대표님 비서. 지우 씨가 직접 목격했대. 옥상에 숨어서 담배 한 대 피우다가…… 아니, 아무튼, 지난 금요일에 옥상에서 둘이 부둥켜안고 아주 그냥 키스를 그렇게 진하게 했다던데.”

상대의 부정과 배신을 아는 가장 흔한 방법, 소문.

미라가 은밀하게 건네는 말에 연조의 마음은 이상하리만치 가라앉았다. 가라앉다 못해 마음이 마비된 것 같았다. 마음뿐 아니라 미세하게 떠는 손끝을 제외한 모든 것이.

“그런데 더 대박은 뭔 줄 알아?”

소문의 가장 은밀하고 재미있는 부분은 마지막에 남겨 두는 법. 엉큼한 웃음이 곁들여진 미라의 눈이 흘긋 팀장실 쪽을 향하더니 더욱 몸을 낮추며 소곤거렸다.

“유강준 팀장이랑 그 사람들이 삼각관계라는 거지.”

“그게, 무슨…….”

심장이 격렬하게 뛰고 온몸으로 빠르게 피가 돌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이름이 튀어나온 순간, 마비된 몸에 강한 해독제를 맞은 것처럼 순식간에 모든 감각이 되돌아왔다.

“서윤준 씨하고 대표님 딸하고 키스하고 있을 때 유강준 팀장이 나타나더래, 글쎄. 현장에서 딱 들킨 거지 뭐. 어쩜 팀장님은 그 순간에 거기에 나타날 수 있었을까? 이미 두 사람 사이 의심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어우, 서윤준 씨는 얼마나 식겁했을까? 그나저나 서윤준 씨 그렇게 안 봤는데 별 재주가 다 있어. 대표님 외동딸에 팀장님 애인인 여자를 다 꾀고 말이야. 그러고 보면 대표님 딸은 무슨 복인지 몰라. 집안에, 외모에, 멋진 남자들에. 어우, 짜증 나. 진짜 세상 불공평하네.”

입사 이래 미라가 자신 앞에서 이렇게 많은 말을, 더구나 업무 이외의 말을 길게 늘어놓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진실과 거짓이 뒤섞인 정보 안에서 파악할 수 없는 의문점만 뽑아낸 연조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팀장실 쪽을 바라보았다. 뜻밖의 말을 듣고 뭐가 뭔지 혼란스럽지만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한 가지였다. 자기 안으로 침잠하기 전에 들어야 할 진실을 들어 두는 것.

팀장실 안의 강준에게서 시선을 거둔 연조는 이미 가지런히 정돈된 자리를 눈으로 훑어 확인하고 티슈 한 장을 뽑아 책상 위를 쓱쓱 닦았다. 다이어리를 펼쳐 오늘 해야 할 일을 점검하곤 컴퓨터를 켜고 USB를 꽂았다. 어제 다녀온 우성 전자 평택 공장 출장에 대한 보고서는 오늘 출근해 작성해도 되는 것이었지만 도통 잠이 오지 않았던 지난 새벽에 미리 해 두었다. 다행히도 이 보고서는 좋은 핑곗거리가 되어 줄 것이다.

프린터에서 갓 뽑아져 나온 여러 장의 A4 용지를 검은색 서류철에 단정하게 끼워 넣었다. 가슴 뛰는 일을 앞둘수록 행동은 정갈하고 마음은 외려 침착하게 가라앉았다. 연조는 큰 숨을 한 번 내뱉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까지도 연조의 곁에 있던 미라는 조금 머쓱해져선 의자를 굴리며 제 자리로 돌아갔다.

팀장실 문에 가볍게 노크하자 들어와도 좋다는 허락이 곧바로 떨어졌다. 강준은 들여다보고 있던 서류에서 눈을 떼고 다가오는 연조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앞에 서류철을 내려놓은 연조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금요일에는…….”

강준의 눈썹이 꿈틀, 감정을 가진 생명체처럼 움직였다. 연조는 그런 그를 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왜 저를 옥상에 갈 수 없게 하신 건지…… 알고 싶습니다.”

윤준과 민정 사이를 강준은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것일까. 짐작할 수 있는 건, 적어도 지난 금요일 이전부터 그는 두 사람 사이를 알고 있었다는 것.

의자에 등을 기대며 내쉬는 강준의 한숨이 길고 짙었다. 굳어지는 강준의 얼굴에 연조의 확신은 더욱 두터워졌다.

“왜 제게 서윤준 씨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신 건지…… 알려 주세요.”

연조의 담담한 얼굴을 바라보던 강준은 눈썹을 휘었다. 그녀에게 서윤준과 고민정에 관해 어찌 알려야 할지 아직 고민을 끝내지 않았건만 그녀는 지극히 차분한 말투와 태도로 강준 앞에 등을 세우고 서서 요구했다.

“두 사람 사이, 어떻게 알았습니까.”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가, 중요한가요?”

연조의 되물음에 강준은 입을 다물었다. 재현이 복도에서 만난 강준을 멋쩍은 표정으로 부르며 우연히 들은 여직원들 수다의 내막을 넌지시 물어 왔기에 강준도 회사 내에 소문이 돌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자세한 사정까진 모르지만 당신 딸이 중심에 선 소문에 재현은 난감해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새 연조의 귀에까지 금요일의 일이 들어갔다니, 강준은 뜻하지 않게 흘러가는 일에 가슴이 갑갑해졌다.

“알고 계셨을 텐데 왜 제겐 말하지 않으셨는지 궁금합니다.”

그러게. 도대체 나는 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던 걸까…….

강준은 가슴을 크게 부풀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밤, 강준은 연조를 봤었다. 답답한 마음을 운동으로 털어 내려 피트니스센터에서 죽도록 뛰곤 잠시 편의점에 들렀다 집에 가는 길이었다.

외부인 출입 통제 문 앞에서 서윤준은 신연조에게 키스했었다. 의심할 것 없는 사랑을 나누는 풋풋한 연인처럼 남자는 여자에게 과감하게 입 맞추고, 여자는 부끄러워하며 남자를 밀어냈다. 고민정과도, 신연조와도 입 맞출 수 있는 서윤준은 다정하게 손 흔들며 작별을 고하곤 급히 걸음을 옮겨 사라졌고, 연조는 때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며 모습을 감췄다. 그 모든 걸 지켜보고 있던 강준의 존재는 알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강준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오만가지 삽질에 대해 생각은 해 봤었다. 그중에서 단 하나도 할 수 없었던 건 상처받은 그녀를 볼 용기가 나질 않아서였다. 언젠가는 받을 상처라는 걸 알면서도.

“지난 금요일 이후 지금까지 내내, 후회하고 있었습니다.”

강준은 감정을 꾹꾹 눌러 담으며 말했다.

“고민정이 벌인 쇼에 장단 맞춰 주지 못한 걸. 그랬다면 신연조 씨는 지금이 아니라 지난 금요일부터 지옥 속에 있었겠지.”

자신은 이 지옥에 입성하지도 않았을 테고. 호시탐탐, 그녀의 마음속에 어떻게 비집고 들어갈까 기회나 엿보면서.

“저를 기만한 건, 아니시고요.”

“신연조 씨를 기만하고 싶어서 절호의 기회를 날려 버린 건 아닙니다.”

서윤준이 잘못을 처리하는 방식을 일러바치고 싶어 안달 났던 마음.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와 키스하고 있는 그녀를 주먹만 꽉 쥔 채 지켜봐야만 했던 무력함. 어쩌면 그 한 번의 고백만 남은 채 그녀와 영영 멀어질지도 모를 것 같다는 불안감.

그런 것들을 모두 감당했던 이유는 적어도 기만은 아니었다. 상대를 기만하기 위해 제 감정을 고통에 할애한다는 바보 같은 이야기는 들어 본 적 없다.

“상처받을 걸 뻔히 알면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저를…… 혼란스럽게 하셨군요.”

한숨처럼 말하고서, 연조는 강준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팔걸이를 붙잡고 있는 강준의 손이 꿈틀거렸다. 지금 당장 그녀와의 간격을 없애고 그녀의 턱을 붙잡아 제 쪽으로 돌리고 싶었다. 그날의 고백에 대한 그녀의 대답이 고개를 돌리는 외면인 것 같아 속이 탔다.

“매번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없다는 거 압니다. 인간이기에 실수할 수 있는 것도요.”

“내가 신연조 씨를 좋아하게 된 걸 올바르지 않은 선택이라 생각한 적 없습니다. 그날의 고백을 실수라 생각하지도 않고.”

연조가 한숨 쉬며 뱉은 말에 강준은 분명하게 제 생각을 밝혔다. 그러곤 떨리는 심정을 감추며, 물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고요한 음성으로도 연조는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부터는 제가 결단해야 할 시간인 것 같습니다.”

냉소로 시든 입술로 과단성 있게 말한 연조는 뒤를 돌았다. 지나치게 인내하고 있는 뒷모습이 외려 아슬아슬해 보여 강준은 불안했다.

“신연조 씨 결단에 나는…… 관여할 수 없는 겁니까.”

가려는 그녀의 뒤에 대고 강준이 물었다.

“지난 1년간 서윤준 씨와 만난 건, 접니다.”

고개만 옆으로 돌려 대답한 연조는 닫힌 문을 밀어 열며 팀장실에서 나갔다. 물고기가 지나간 자취처럼, 그녀는 강준의 눈앞에서 속절없이 사라졌다.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간 독실엔 윤준과 윤준 어머니가 먼저 와 있었다. 인사를 나눈 후 곧바로 음식이 나열되고 가벼운 대화 속에서 식사가 이어졌다.

“윤준이가 상견례 날짜 잡았으면 하더구나.”

연조의 앞 접시로 그릴에 구운 갈비와 아스파라거스를 옮겨 주는 윤준을 슬쩍 노려보던 윤준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말에 연조는 담담한 시선으로 윤준을 바라보았다. 지난 금요일, 회사 옥상에서 대표님의 따님과 키스했다던 그는 무슨 생각으로 상견례 이야기를 자기 어머니에게 꺼낸 것일까. 그의 속을 알 수 없어 가슴이 답답해 왔다.

그사이 연조는 몇 가지 정보를 본의 아니게 더 알게 되었다. 윤준이 속해 있는 삼미 제과 팀이 싱가포르로 휴가를 갔다가 워크숍 와 있는 대표님의 따님과 만나게 되었다는 것. 그때부터 이미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는 것.

연조는 그가 먼저 이별을 고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윤준은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그동안 알고 있던 남자와는 다른 사람인 것만 같은 느낌에 어깨가 조금 서늘해졌다.

“저는 처음 듣는 이야깁니다.”

고요히 대답한 연조는 윤준이 옮겨 준 음식을 두고 호두죽을 떠먹었다. 그런대로 맛을 살려 끓인 죽이지만 딱히 입맛이 돌진 않았다.

“뭐, 결혼 얘기는 일단 나온 거니까 차일피일 미룰 건 없지. 윤준이가 연조랑 빨리 결혼하고 싶다고 어서 상견례부터 하자고 그렇게 원하는구나.”

당신은 아직 탐탁지 않다는 내색이 깔린 말투를 이해는 한다지만 기분이 좋을 수는 없었다. 이혼한 부모님과 넉넉하지 않은 형편으로 자신이 대변되는 것 같아서. 그것 말고는 자신의 본질을 설명할 수 있는 건 없다는 것만 같아 연조는 씁쓸했다.

“상견례 자리엔 연조 아버지하고 새어머니가 나오시는 거지? 혹시 연조 친어머니도 따로 뵈어야 하니?”

“아니요.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그러니? 잘됐구나. 다행이야. 그럼 연조가 상견례든 결혼식이든 모양새에 신경 좀 써 줬으면 좋겠어. 집안 분들께 우리 윤준이 처가가 재혼 가정이라는 거 굳이 알리고 싶지 않아서 말이야. 연조 친어머니가 따로 계시다는 거 알아서 좋을 게 뭐 있겠니. 아니할 말로 자식 버리고 간 분인데.”

“그런, 가요?”

“말들이 많이 나올 것 아니니. 혹시, 내 말이 서운하니?”

“아닙니다.”

버젓이 잘 살고 계시는 엄마의 존재를 숨기자 하고, 자식 버린 사람이라 폄하하는 말에 서운할 리가. 연조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참을 수 없을 것 같은 심화가 일었다. ‘서운하다’는 나약한 단어로는 지금 느끼는 감정의 한 자락도 설명되지 않았다.

“그래. 나쁜 의도로 그러는 거 아니니까. 알아듣지?”

서운하냐, 알아듣느냐 물으며 확인하려 드는 건 윤준 어머니도 당신 말이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 있다는 걸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당신이 손해를 본다거나 귀찮아지는 건 싫으니 얼마든지 상대를 상처 줄 수 있는 그의 어머니가 연조는 버거웠다.

“상견례는 연조 부모님께서 서울로 오셨으면 하는데. 서울로 오시는 만큼 대접은 우리 쪽에서 섭섭지 않게 할 생각이야.”

“그러시겠어요.”

“그 정도야 당연하지, 뭐. 그나저나 연조 부모님께서는 뭘 좋아하시니? 윤준이 아버지 이름으로 파인스 호텔 양식당에 회원 등록 되어 있거든. 나는 거기가 어떨까 하는데. 연조 부모님께서 그런 데 불편해하실 것 같으면 다른 곳으로 알아보고.”

“특별히 싫어하시는 건 없습니다. 그런데, 어머님.”

호두죽마저 몇 술 뜨지 못한 연조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고요히 한숨 쉬었다.

“응. 왜 그러니?”

새우냉채를 뒤적이던 윤준의 어머니가 성의 없이 대답했다. 윤준이 멋쩍어하는 표정으로 연조와 그의 어머니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상견례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응?”

윤준 어머니의 눈썹이 조금 치올라 갔다. 연조는 과열되려는 마음을 가라앉히고자 푸른 도기에 담긴 냉수를 한 모금 마시고서 말을 이었다.

“윤준 씨 부모님과 저희 부모님이 상견례 하실 일은 없을 것 같아서요.”

“뭐…… 라고?”

“연조야.”

놀란 두 쌍의 눈이 연조에게로 꽂혔다. 연조는 가만히 심호흡하며 그들의 시선을 담담히 받아 냈다.

“너, 서운하구나?”

윤준 어머니의 음성이 곧장 까칠해졌다.

“아닙니다.”

연조는 내뱉는 음성에 힘을 주어 확실하게 대답했다.

“솔직하게 말해도 괜찮아. 나 뒤끝 없는 사람이야, 얘.”

뒤끝이 없다는 걸 자랑삼을 수 있다는 게 우습다고 말한다면 윤준 어머니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연조는 뒤끝 없다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다. 뒤끝이 없다는 건 자기 멋대로 감정을 발산한다는 것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으니. 관대한 마음으로 상대의 잘못과 허물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덮어 주는 인격도 있겠지만, 상대방이 상처를 받건 말건 자기감정은 찌꺼기 하나 남기지 않고 다 쏟아 냈기에 뒤끝이 있을 게 없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 아마도 윤준 어머니는 후자일 테고.

“뒤끝 없으시다니까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가야금 산조가 은연히 깔린 실내로 살얼음 같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조금만 치고 나가도 파삭 깨질 듯한 공기 속에서 연조는 무릎 위에 올려 둔 주먹에 힘을 주었다.

“어머님 말씀에 서운하지 않습니다. 멀쩡히 잘 살고 계시는 우리 엄마를 숨기자고 하시는데 그런 약한 단어로는 제 마음이 조금도 표현되지 않습니다.”

“뭐, 뭐야?”

“연조야.”

윤준이 연조의 손을 잡으며 그녀를 저지하려 했다. 그러나 연조는 윤준에게 잡힌 손을 가만히 빼냈다. 그의 어머니에게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지만 엄마를 부정당하고 나니 마음을 절제하는 게 뜻대로 되지 않으려 했다.

“겨우 이 정도 말에도 어머님께서는 노여우실 텐데, 제 심정은 어떨지 미루어 짐작하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상황에서건 흥분하지 않고 냉정을 찾는 것. 싸움에서 이기는 방법을 연조는 알고 있다. 지금 이 상황이 싸우고자 덤벼든 상황은 아니지만 과열된 감정 때문에 말 한 마디 못하는 머저리로 있을 수는 없기에 연조는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애쓰며 천천히 숨을 뱉고 들이마셨다.

“너 이제 보니 아주 맹랑하구나. 참한 아가씨인 줄 알았더니 아주 되바라졌어.”

노기로 붉어진 윤준 어머니의 눈이 치올라 갔다. 당신의 잘잘못을 떠나 당신보다 한참 나이 어린 사람에게 지적당했다는 것으로, 그의 어머니는 몹시 자존심 상하고 화가 난다는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되바라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 엄마를 숨기자는 말씀에 수긍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엄마는…… 존재를 거부당할 만큼 잘못한 게 없으니까요. 저를 버린 적도 없으시고요.”

“그래서. 너 지금 내 말이 고까워서 상견례 못하겠다는 거니?”

“아닙니다. 그래서 상견례 못하겠다고 한 건 아니에요.”

이 자리에 계시지도 않은 분을 모욕 준 것에 대한 사과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게 연조의 상식이지만 윤준 어머니의 상식은 다른 범주에 있는 듯했다. 일단은 본인 기분 상한 것부터가 중요한 그녀는 이마에 푸른 핏줄을 세우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연조를 쏘아보았다.

“그럼 뭐니? 뭐 때문에 너 지금 어른 앞에서 이렇게 건방지게 구는 건데? 부모 이혼하고 가정 교육 제대로 못 받은 거 티 내니, 지금?”

말문 막힌 어른들의 흔한 레퍼토리에 연조는 절망스러운 한숨이 나왔다.

모친이 일찍 돌아가시면 어미 없이 자라서, 부친이 일찍 돌아가시면 아비 없이 자라서, 조실부모하면 조실부모해서, 이혼하면 이혼해서.

온전한 부모 밑에서 자라지 못한, 세상의 모든 가엾은 아들딸들은 부당한 비아냥거림을 숙명처럼 들어야 했다. 부모는 자기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데도.

“상견례 못하는 이유는 윤준 씨한테서 들으세요, 어머님.”

“뭐라고?”

윤준 어머니의 날카로운 눈빛이 당신 아들에게로 향했지만 윤준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연조를 멍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어머님 기준에 맞지 않는 저를 어떻게든 받아 주시려고 하신 거, 압니다. 그 점, 감사하게 생각해요.”

“알긴 아니? 그걸 아는 애가 지금 이따위로 시건방지게 구는 거야? 넌 너희 엄마한테서 그렇게 배웠니? 어른한테 또박또박 말대답하고 한 마디도 지지 말라고? 그러니?”

“상대방을 존중하고 함부로 상처 주는 말은 하지 말라고 배웠습니다. 부당한 상황에서 함부로 몸 낮추지 말고 자존감을 가지라고 가르쳐 주셨고요.”

오랜 세월 그렇게 살지 못한 것을 후회했던 엄마는 이혼이 확정된 후 연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었다. 아무도 너를 함부로 할 수 없도록 자신을 사랑하라고. 화려한 겉멋에 현혹되지 말고, 소박한 진실을 추구하며 내면을 소중히 가꾸라고.

“어, 어머. 어머. 쟤, 쟤가 정말…….”

윤준 어머니는 가슴을 치며 말을 잇지 못했다. 치명적이리만치 올바른 말에 할 말이 없는 게 아니라, 어린것에게 영문 모르고 당했다는 울화로 가득 찬 표정이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기분 상하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연조는 씁쓸한 마음으로 그의 어머니에게 꾸벅 인사하고 독실에서 나왔다. 할 말을 하느라 파투가 나 버린 불편한 자리에 더 이상 앉아 있을 이유는 없었다.

“연조야!”

윤준이 곧장 뒤쫓아 나왔지만 연조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내내 차분한 자세를 유지했지만 실은 울화를 식혀 줄 바람이 지금 당장 필요했다.

“연조야. 도대체 왜…….”

“미안해, 윤준 씨. 점심시간 망쳐서. 그런데…….”

그녀의 곁에 서서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는 윤준에게 연조가 먼저 말했다.

“고민정 씨하고 윤준 씨 사이, 알아 버렸어. 그것 때문에도 어머님께 더 버릇없게 굴었나 봐.”

그것 때문이 아니더라도 윤준 어머니의 태도가 바뀌지 않는다면 방금 전처럼 말하고 행동했겠지만.

“……유강준 팀장이 말했니?”

연조의 말에 많이 놀란 듯 잠시 침묵하던 윤준이 가시처럼 그의 이름을 담았다. 그 모습에 연조는 허망한 웃음이 튀어나왔다.

“소문은…….”

메마른 목구멍으로 어렵게 침을 삼키고서 힘겹게 말을 이었다.

“항상 당사자가 마지막에 아는 법인가 봐.”

시선을 옮겨 바라본 윤준의 얼굴은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채 텅 비어 있었다. 오늘 출근하자마자 급작스러운 소문을 들어야 했던 연조처럼, 윤준도 급작스러운 말을 듣고 어딘가가 마비된 것 같았다.

“유감스럽게도 그 소문 속의 당사자가 나는 아니라서 윤준 씨보다 먼저 알아 버렸어.”

굳어 있던 윤준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연조야, 나는…….”

안간힘을 다해 무어라 할 말을 찾으려는 그가 안쓰러워 보이는 건 일말의 애정일까, 칼자루를 쥔 자의 거만한 관용일까. 연조는 당황하는 윤준을 향해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들어가서 어머님부터 진정시켜 드려. 우리 사이 끝났다고도…… 말씀드리고.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하자. 나, 외근 나가야 해. 많이 늦을 것 같아.”

문득, 현실은 참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1년간 조심스럽게 가꿔 온 관계를 정리해야 하는 순간에도 현실의 눈치를 봐야 하니까. 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 계획하고 살아야만 제대로 사는 것 같은 이 세상에선 관계를 끝내는 시간도 다이어리에 적어 둬야 할 것 같았다. ‘수요일 저녁 7시, 이별’이라고. ‘오늘부터 1일’을 기록하며 연인으로 지낸 기간을 꼬박꼬박 헤아리는 요즘의 연애는 사이가 끝나는 날도 계획표처럼 표시해도 어색할 것 같지 않았다. 참, 씁쓸하게도.

“갈게.”

담담한 음성으로 말한 연조는 윤준에게로부터 뒤를 돌았다.

가까스로 걸음을 옮기는 발소리가 연조의 귓전에서 울렸다. 윤준을 뜨겁게 사랑한 적도 없건만 그에게 이별을 고한 연조는 마음이 끝 모를 바닥을 향해 가라앉았다.

사랑이란 허구를 믿은 적 없었다. 부서지기 쉬운 찰나의 아름다움에 마음 걸어 본 적 없다. 그런데도 너무 견디기 힘들어 울고 싶어지는 이 마음은 무엇 때문일까.

그녀를 붙잡지 않는, 혹은 붙잡지 못하는 남자를 등 뒤에 남겨 두고 연조는 천천히 걸었다. 여름의 열기를 품은 태양이 차갑게 가라앉은 그녀 위로 뜨겁게 내리쬐었다.

개인의 사정 따윈 봐주지 않고 제 갈 길 가는 세상살이는 참 냉혹하다. 늦은 밤, 터벅거리는 걸음으로 집에 돌아온 연조는 맥없이 웃었다. 어제보다 힘든 날은 없을 것 같더니 그보다 더한 오늘을 보냈다. 그리고 오늘보다 혹독할 내일이 예약되어 있었다. 내일은 윤준과의 사이를 매듭지어야 하니까.

“오늘도 늦었네. 밥은 먹고 다니는 거야?”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화영이 알은척했다. 마스크 팩을 붙인 화영은 입을 조금만 움직여 라이스 칩을 먹고 있었다.

“화영아…….”

연조는 드디어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공간에 깊은 안도를 느끼며 화영의 곁에 몸을 늘여 앉았다.

“응.”

“나…… 윤준 씨하고 헤어졌어.”

“응?”

“헤어졌어, 오늘. 윤준 씨한테 다른 여자가 있대서…….”

그와 헤어진 사실을 타인에게 처음 고백하고, 연조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뭐, 뭐라고?”

피부에 꼼꼼히 밀착된 마스크 팩이 반이나 떨어져 나갈 정도로 화영은 온 얼굴을 구기며 누웠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윤준 씨한테 뭐가 있어?”

“다른 여자가 있대.”

“뭐야?”

거치적거리는 마스크 팩을 확 잡아 뗀 화영이 분개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외쳤다.

“윤준 씨, 아니 그 인간이 순진하게 생긴 얼굴로 바람을 피웠다고? 헐, 세상에 믿을 남자 하나 없다더니! 도대체 어떤 여잔데?”

“대표님 따님이래.”

“뭐, 뭐야? 이런 나쁜 자식!”

탄력 좋은 소파를 힘껏 내리친 화영은 제가 멸시당한 듯 온 얼굴이 시뻘게졌다.

“뭐, 이런. 우와, 진짜! 우리 귀요미한테 말해서 그 자식 패 주라고 할까? 아님 회사에 확 소문내 버려? 그딴 자식은 한번 망신을 당해 봐야 하는데! 아오, 열 받아!”

오른손 주먹으로 왼 손바닥을 탁 소리가 나도록 내리친 화영은 미간을 있는 대로 구겼다. 그런 화영의 모습에 연조는 흐릿하게 웃었다. 자신의 아픔에 더 아파해 주고, 더 분노해 주는 친구가 있다는 건 얼마나 큰 위안인지……. 자기 대신 속 시원하게 몰아붙여 주는 화영이, 연조는 고마웠다.

“화영아.”

“응. 왜.”

“이별이 아프긴 한데, 내 마음을 알 것 같기는 해.”

“무슨 마음?”

“나는 윤준 씨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유일하게 솔직해질 수 있는 친구 앞에서 연조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윤준 씨한테 다른 여자가 없었다면, 내가 나를 어디까지 속였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연조야…….”

자신과의 결혼을 추진하면서 다른 여자를 만났던 윤준이나, 윤준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그의 결혼 추진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던 자신이나…….

조금만 신경 썼더라면 윤준의 태도가 이상했다는 걸 알아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전에 없이 휴대전화를 자주 들여다보던 것도 다 이유가 있어서였던 건데. 윤준을 열렬히 사랑했다면 그런 그를 보고도 무감하게 있진 않았을 텐데…….

잘못의 경중을 따지자면 윤준 쪽이 훨씬 더 많은 잘못을 했다는 편에 손을 들겠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잘못이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그것을 알겠기에 연조는 마음이 묵직하고 아릿했다.

“그런데 참, 웃기지? 윤준 씨한테서 마음은 식었는데 한편으론 아프고, 한편으론 괘씸하고, 한편으론 미안해.”

“너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바람피운 건 그 자식인데 왜 네가 잘못한 것처럼 말해.”

“내가 잘한 것도 없는 것 같아서.”

“뭐? 그럼 그 자식이 바람피운 게 너 때문이라는 거야? 그런 의미로 말하는 거야, 너 지금?”

“그렇지는 않아.”

상대를 배신하는 건 온전히 바람피운 당사자의 잘못이지, 상대의 탓은 아님을 안다. 하지만 자기 마음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수고를 하지 않았던 것, 열렬한 사랑의 고단함을 피하고자 윤준과의 관계에 미온적인 태도로만 일관했던 것, 그런 것들에 대한 반성을 안 할 수 없었다. 그랬다면, 적어도 이런 식으로 헤어지진 않았을 테니까.

“실은 나, 연애도 스스로 통제 잘하면서 이성적으로 해 왔다고 잘난 척했었어. 질척거리지 않는다고, 쿨하다고. 이별도 참, 차분하고 멋있게 한 것 같다고…….”

고급스럽게 하든, 후지게 하든, 이별은 이별인 것을…….

소파 위에 무릎을 세우고 앉은 연조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이상했다. 단 한 번도 고단하게 연애한 적 없었건만 평온한 연애를 끝낸 이 순간은 무척이나 고단했다. 집에 돌아와 옷 벗는 것도 잊을 만큼 그저 피곤하다.

그때, 연조의 핸드백 안에서 작은 진동이 일었다. 따끔거리는 눈을 가까스로 뜨고 휴대전화를 꺼내 전송된 문자 메시지를 확인한 연조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잠깐 보죠. 1층 편의점 앞입니다.

“누구야?”

힘들어 보이는 연조에게 더 이상 무어라 말은 못 건네고 안쓰럽게 지켜보던 화영이 어깨 너머에서 물었다.

“팀장님…….”

“이번에 새로 왔다던? 우리랑 같은 오피스텔에서 산다는 그 팀장님?”

“응…….”

마음을 참, 솔직하게도 발산하던 그런 사람.

연조는 엄지손가락으로 휴대전화를 쓸어 보았다.

“잠깐 나갔다 올게.”

소파에서 일어난 연조는 치마의 주름을 손바닥으로 눌러 펴며 말했다.

“혹시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 내가 곧장 내려갈 테니까.”

근심 가득한 화영의 표정엔 비장함도 서려 있었다. 네 편이 네 등 뒤에 얼마든지 있다는 믿음을 주려는 그녀의 노력이 고마워 연조는 옅게 웃었다.

휴대전화와 지갑을 챙겨 들고 내려간 1층 편의점 앞. 이제 막 퇴근한 듯한 강준은 여전히 말끔한 슈트 차림이었다. 턱이 높은 화단에 긴 다리를 쭉 펴고 앉은 그는 연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연조도 고요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쌍꺼풀 없이 갸름한 눈과 준수하게 뻗은 코를, 비스듬히 다물린 입술을 차례대로 훑었다. 그러곤 눈앞으로 내밀어진 맥주 캔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게 필요할 것 같아서.”

엷게 웃으며 맥주 캔을 건네는 강준의 모습에, 연조는 목울대를 크게 움직여 숨을 삼켰다. 지금 이 순간 그와 함께 있는 건, 옳은 일인 것 같지 않았다. 별 생각 없이 내려왔건만 그의 모습을 확인한 지금은 이러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죄송, 합니다. 아무래도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무엇을 어찌 수습하겠다는 대책도 없이 연조는 뒤를 돌았다.

“말해 줄게요.”

걸음을 떼기도 전에, 다급하지 않은 음성이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다. 연조는 눈을 감았다 떴다. 강준의 손이 다가와 연조의 손목을 휘감았다. 붙잡은 손목을 제 쪽으로 당긴 그는 가늘게 떠는 연조의 시선마저 붙잡고서 나직하게 말했다.

“내가 신연조를 어떻게 할 생각이었는지…… 말해 준다고.”

손목을 좀 더 당겨 연조를 곁에 앉힌 강준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맥주 캔을 까 손에 쥐여 주는 그의 친절에 뛰는 심장을 다독이려, 연조는 맥주 한 모금을 입 안에 머금곤 천천히 삼켰다.

“외근 나갔다가 회사에 잠시 들렀었어요.”

알코올처럼 온몸으로 흡수될 듯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윤준 씨를 봤는데…….”

낯익은 이름이 그의 입술에서 떨어지자 낯설게 느껴졌다. 연조는 문득, 윤준에게서 온 문자 메시지가 생각났다.

꼭…… 이래야만 하니?

그의 이야기는 들어 보지도 않고 내렸던 이별 선고에 윤준은 섭섭해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 혼란스러운 연조는 이것만큼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윤준의 이야기를 들어 본다고 달라질 건 없으리라는 것을. 윤준 때문에도, 자신 때문에도.

“신연조 씨를 뒤흔들었다고 원망하더군요. 참, 비겁하다고.”

“그게 무슨…….”

말끝에 물린 한숨의 농도가 짙어졌다. 윤준의 경솔함이 자신으로부터 말미암은 것 같아 연조는 미안했다. 윤준에게도, 강준에게도.

“비겁하다니요. 팀장님은 그러신 적 없습니다.”

그는 마음을 성급하게 표출하긴 했어도 비겁했던 적은 없었다. 금요일부터 지금까지, 긴 시간은 아니지만 밝히고 싶은 사실을 말하지 않고 강준 홀로 인내했던 이유를 연조도 안다. 고자질 같은 폭로로 자신에게 유리한 입지를 차지하기보다는, 일단은 연조가 상처 입지 않도록 그 홀로 애썼다는 걸.

“소문이 나지 않았다면 못 참고 내가 말했겠지. 마음은 점점 커지고, 신연조 씨한테 입 맞추고 싶어서 돌 것 같은데 못할 게 없지 않겠습니까.”

앞을 보고 있던 강준이 고개를 돌려 연조와 눈을 맞췄다. 조금은 지친 듯 가라앉은 표정. 준수한 얼굴 안에 내려앉은 옅은 미소. 짧게 자른 머리도, 연한 색감의 셔츠도, 그와 잘 어울렸다.

“그러실 리가요.”

연조는 강준의 눈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지금은, 두근거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내가 언제 터뜨릴까 망설이는 사이 고민정이 먼저 터뜨렸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고민정은 이미 전적이 있으니까.”

지난 금요일을 가리키는 말에 연조는 눈을 가라떴다.

만약 그날, 윤준의 배신을 눈앞에서 확인받았더라면 자신은 어떠했을까. 지난 낮처럼 차분한 자세를 유지하며 이별을 고할 수 있었을까. 자신도 처음 보는 모습으로 사납게 돌변하여 윤준의 마음을 할퀴진 않았을까.

모르겠다. 어땠을지. 겪어 보지 않은 과거나 미래는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라서.

나직하게 한숨을 내쉰 연조는 맥주 캔을 기울이며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오피스텔 1층 상가의 술집들이 소란함을 머금고 손님들을 모으고 있었다. 한 잔 술로 풀릴 리 없는 세상살이의 고달픔을 이고 진 위기의 직장인, 이게 사는 건가 싶은 막연한 불안감을 음주로 망각하려는 비틀거리는 청춘, 평온했던 사랑을 끝낸 여자와 고단한 사랑을 시작하려는 남자. 무엇 하나 깔끔하게 해결되는 것도 없이 쉬지 않고 굴러가는 세상사.

모든 것이 다 부질없기도 하고, 새로이 설레기도 하는 공기 속에서 연조는 따가운 탄산이 터지는 맥주를 입 안에 머금었다. 혀끝을 건드리는 쌉쌀함에 콧등을 조금 찡그렸다. 따갑고 쓰지만 가슴은 묘하게 시원했다.

“나는, 이럴 생각이었습니다.”

이야기의 핵심을 꺼내는 듯 그의 음성이 조금 더 선명해졌다. 연조는 고개를 돌려 다시 강준을 바라보았다.

“서윤준하고 고민정 사이를 처음 알았을 때는 구경만 할 생각이었습니다. 신연조가 충격받고 마음 다치길 기다리자고. 내가 유리해질 수 있는 최적의 전략은 그거라고 생각했어요. 신연조가 다치면 나도 아플 거라는 변수는 생각하지 못했어. 마음이 약했던 적은, 없었는데 말이죠.”

“…….”

“앞으로는 내가 비겁해져도, 지질해져도 상관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강준의 시선이 연조의 눈과 코, 얼굴 윤곽을 부드럽게 훑었다. 입술에서 멈춘 시선은 뜨거웠다.

“전략이고 나발이고,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인데도, 감미로웠다. 한편으론 마음속에서 그를 조심하라는 경종이 울리는 것 같았다. 이 남자에게 빠져드는 건 한순간일 거라고.

강준에게서 시선을 비킨 연조는 그와 두 뼘쯤 더 떨어져 앉았다. 그걸 바라보던 강준이 피식, 웃었다. 쓴 기운을 품은 웃음에 민망한 마음이 들었지만 간격을 좁힐 생각은 없었다. 좁힐 용기가 나질 않았다.

“진심 말고 원하는 여자를 얻을 수 있는 전략이…… 도대체 어디에 있겠어…….”

강준의 손에서 텅 빈 맥주 캔이 와락 구겨졌다. 텅 빈 채 유지되었던 지난날의 연애처럼.

깊은 밤, 별도 없는 하늘엔 창백한 달이 떴다. 마주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은 고단한 도시의 밤을 비추는 네온 빛을 함빡 받으며 반짝거렸다.

사랑에 자신을 전적으로 던지지 않았던 지난날. 이러고 싶지 않건만 곤란할 정도로 심장이 뛰는 지금. 앞으로는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는 마음. 그럼에도, 지금 당장 무언가를 시작해도 이상할 게 없을 것 같은 열기. 교차하는 감정들. 도저히, 다른 곳으로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두 사람.

세상 잡사에 넌덜머리를 내며 비틀거리는 도시의 깊은 밤. 솔직하고 기묘한 시간이 고요히 흐른다.

연조가 윤준과 마주 보고 앉은 건 오랜만의 정시 퇴근 후 회사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커피숍에서였다.

매장은 대부분의 자리가 채워져 있었다. 떠들썩한 기운으로 실내는 활기찼지만, 두 사람이 앉은 자리의 공기는 그렇지 못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열기가 빠진 머그컵을 들어올린 연조는 윤준을 바라보았다. 헤어진다고는 해도 그가 그리 미운 건 아니라 이 순간이 그런대로 괜찮을 줄 알았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만나 온 지난 1년의 무게가 그리 만만한 것은 아니었나 보다.

낯설었다. 그는 낯선 사람이 아니었는데도. 익숙하고 편한 사람이었는데도. 이별을 고하고 하룻밤을 지낸 후의 변화가 연조는 어쩐지 서글펐다. 하루 동안에도 이토록 멀어질 수 있고, 무거워질 수 있는 이별의 존재감이 이토록 버거울 줄은 몰랐다.

“어머님께선…… 좀 어떠셔?”

할 말을 하느라 그의 어머니를 언짢게 하고서, 연조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었다. 그 순간으로 다시 돌아간다 해도 변하는 건 없겠지만.

“여전히 기분 안 좋으셔. 나하고도 조금 다투셔서. 어머니 말씀이 심했으니까. 미안해. 대신 사과할게.”

윤준은 풀기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고민이 많았는지, 그렇지 않아도 갸름한 얼굴이 하루 사이에 살이 내려 턱 선이 예리해졌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섣불리 첫말을 고르지 못하던 윤준이 큰 숨을 뱉고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이러지 말았으면 해…….”

짙은 한숨이 나왔다. 이러지 말았으면 한다고, 원하는 바를 어렵게 꺼낸 그의 바람이 안타까웠다. 하지만 이제야 깨닫게 된 진실을 연조는 외면할 수 없었다. 신중을 핑계로 결단을 미뤄 왔다는 것을. 사실은 겁이 나서 그동안 괜한 시간을 끌고 있었다.

“윤준 씨나 나나, 서로에게 뜨겁지는 않았지만 최선을 다해 왔다고 생각해.”

연조는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괜찮다고 생각했어. 윤준 씨 말처럼 뜨겁게 타올랐다 금세 식어 버리는 사이보단, 뜨겁진 않아도 오랫동안 온기를 유지할 수 있는 사이가 부부로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연조를 바라보는 윤준의 눈빛이 슬퍼 보였다. 그에게 마음을 다 주지 않았어도 이별이 슬픈 자신처럼, 다른 여자에게 흔들리고도 막상 직면한 이별이 그도 아픈 것 같았다.

“하지만 우리 이젠…….”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는 윤준의 눈빛에 어렵사리 숨을 삼키고, 연조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지 않잖아. 서로에게 성실했던 지난 1년을 계속 유지할 자신이, 나는 이젠 없어…….”

심각한 이유나 특별한 계기 없이도 사랑은 맥없이 식어 버리기도 한다. 자연 소멸 해 버리는 행성처럼 좋았던 시절의 반짝임은 사라지고, 이 연애를 유지할 명분은 바닥을 드러내며 고갈되었다. 마침 그 순간에 다른 이가 나타나고, 마음이 흔들리고, 우리는 여기까지였구나, 씁쓸하게 깨닫는 순간을, 연애의 시간을 다 보내고서 연조와 윤준은 맞닥뜨린 거다.

“고민정 씨한테 흔들렸던 건 맞아. 대단해 보이는 여자가 나 때문에 애타하는 모습에 우쭐거리기도 했고, 걱정도 됐어. 냉정하게 내치지도 못했고. 그래, 내가 우유부단했어. 인정해. 그런데, 연조야.”

말을 아끼던 윤준에게서 한꺼번에 많은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구겨진 미간과 깊어진 눈빛으로 연조를 바라보는 윤준은 앞이 보이지 않는 물속에 잠겨 있었던 것처럼 힘겨워 보였다.

“그 여자를 알아 갈수록, 네가 더 소중해지더라. 너의 담담함, 고요함, 나를 바라봐 주던 눈빛, 모두 다.”

윤준의 눈동자엔 절실함이 어려 있었다. 조금의 거짓도 섞이지 않은 진실만을 말하고 있다는 것처럼. 하지만 연조는 윤준의 말에서 확연히 깨달았다. 타인의 등장으로 곁에 있는 사람의 소중함을 알아 버린 윤준과, 역시 타인의 등장으로 밋밋한 관계의 허망함을 깨달은 자신. 그들의 사이는 어긋났다는 것을.

“내가…… 잘못했다, 연조야.”

아니. 잘못은 함께 했고, 용서를 구하는 건 윤준 혼자만의 몫이 아니다. 드러난 모양새가 윤준의 잘못이고, 윤준에게 이 이별의 책임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을 연조는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윤준 씨는 내가 윤준 씨에게 좋은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지만, 그걸 깨달은 경위가 나는 납득이 안 돼.”

“그래. 알아. 다 내 잘못이야.”

“그리고 나는…… 윤준 씨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 윤준 씨가 다른 사람에게 눈길을 줬기 때문에 화나서가 아니라, 이미 그 이전부터.”

충격을 받은 듯 윤준의 눈이 커다래졌다. 상대의 마음이 내 마음과 같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 받았을 때의 절망감이 윤준의 눈동자에 아프게 어렸다.

“이 상황에서 더 이상 우리 사이를 생각해 볼 게 있을까. 우리는, 함께 잘못했는데. 둘 다 서로에게 충실하지 못했는데…….”

“연조야…….”

“우리는…… 서로 어긋난 것 같아. 어긋났어, 윤준 씨.”

“사랑해, 연조야.”

애처로운 음성으로 마음을 고백하는 윤준을 보며 연조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랑을 느끼는 순간이 윤준은 왜 하필 지금인 걸까. 받아 줄 수 없게,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게.

“우리 아버지는, 엄마를 많이 사랑하셨대.”

한 여자를 애타게 사랑했던 남자를, 연조도 알고 있다. 어쩌면 아름다운 사연이 됐을지 모를 한 남자의 순애보를.

“그런데 아버지는 그토록 많이 사랑한다는 엄마를…… 때렸어.”

아버지와 결혼하기 전 이웃집 남자를 좋아했던 엄마와 그런 엄마를 사랑했던 아버지. 아버지는 질투가 지나쳐 엄마에게 집착했고, 집착은 병적인 습관이 되었다. 엄마의 순수했던 첫 연정은 정도를 지나치게 비겁했던 아버지의 망상에 의해 변질되었다. 두 사람의 시작이 같은 마음이 아니었다는 이유로 매번 의심하고, 또 의심하고, 격한 감정을 발산한 후엔 용서를 빌고, 다짐을 받고, 결국엔 또다시 반복됐던 끔찍한 폭력.

끊이지 않고 돌아가는 지독한 사이클에 미쳐 가고 지쳐 가던 아버지와 엄마를 연조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윤준 씨는 나를 사랑한다면서 다른 여자를 만났어.”

차라리 사랑이 아니었다고 말했다면, 이렇게 마음이 아프진 않았을까. 사랑이란 이름으로 왜곡된 마음을 들이미니 이젠 정말 뭐가 사랑인지 모르겠다. 복잡한 마음이 빠져나올 수 없는 미궁 속에 갇힐 것만 같아 겁이 난다.

“나는 사랑이 뭔지…… 이젠 정말 모르겠어.”

알고 있는 건, 지금 이 감정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뿐.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하는 윤준을 두고 연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반지 케이스를 가만히 내려놓았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온 건물 밖에서 연조는 바닥을 향해 묵념하듯 고개를 숙였다.

이별을 고하는 동안 내내 메말라 있던 눈에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오랜 세월 박혀 있던 마음의 옹이가 저릿하게 아파 온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