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가지 말아요
월요일 아침, 연조는 청주에서 평택으로 출근했다. 하루 동안의 출장이었다. 출장지로 늦지 않게 도착하느라 새벽부터 서둘러야 했지만 주말 동안 엄마 얼굴도 보고, 함께 밥도 해 먹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기에 컨디션에 문제는 없었다. 한여름 더위에도 끄떡없을 소재로 만든 바지를 입고 숙면도 취했기에.
엄마와 함께했던 주말을 떠올리다 연조는 엷게 웃었다. 가게 문을 일찍 닫고 엄마의 집으로 가는 길에 시장에 들러 어머니들의 환호 속에서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가고 있는 냉장고 바지를 샀었다. 두 사람이 같은 무늬의 냉장고 바지를 입고 방바닥에 퍼질러 앉아 볶아 먹었던 불고기는 어찌나 맛있던지. 엄마와 딸이 함께할 수 있는 소중한 일상을 누리고서 에너지를 듬뿍 충전받은 연조는 나쁘지 않은 기분으로 월요일을 시작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다면 아직까지 엄마의 거처가 건물 위에 혹처럼 붙은 옥탑방이라는 것과, 출장지에서 연조가 보좌해야 할 이가 유강준 팀장이라는 것이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신연조 씨.”
“안녕하십니까, 팀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어색하게 웃어 보인 연조는 주말 동안 애써 의식 바깥에 밀어 두었던 감정을 다시금 가슴에 무겁게 담고 월요일 업무를 시작했다. 담당자의 안내를 받으며 공장을 둘러보고, 요긴하게 쓰일 자료도 제공받았다. 강준의 손에는 연조가 지난 며칠의 반나절들을 꼬박 바친 보고서가 들려 있었다. 그것을 진정 빛나게 해 주는 건 강준의 일솜씨였다. 예상치 못한 변수가 속출했을 때, 짐작과는 다른 결과가 나왔을 때, 상황을 지혜롭게 해결하는 건 오직 그뿐이었다.
오전에 해야 할 일을 대략 마무리짓고 점심을 먹을 때까지 두 사람은 완벽한 직장 상사와 부하 직원이었다. 간혹 스치는 눈길에 발생하는 그와의 자기장을 모르진 않았지만 연조는 무어라 규정지을 수 없는 감정에 휘말릴 생각이 없었다. 일은, 해야 하니까.
“드디어 한숨 돌리는군요.”
“네. 수고하셨습니다.”
“밥 먹으러 갑시다.”
“네, 팀장님.”
마음에 점을 찍는 점심(點心) 시간. 엄마와 함께 보낸 주말 동안 끼니때마다 과한 밥을 먹었던 연조는 무엇을 먹고 싶으냐는 강준의 물음에 큰 망설임 없이 말했다. 국수를 먹고 싶다고.
평택 시내로 나와 오색 간판이 어깨를 비비고 들어앉은 골목을 걸었다. 그러다 체내에 혈당이 떨어져 예민해지려는 순간 천국 같은 김밥집을 발견했다.
식당 안에 자리 잡고 앉아 주문하고 얼마 있지 않아 신 김치를 올린 잔치국수와 통깨를 뿌린 김밥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맛있게 먹어요.”
“네. 맛있게 드십시오, 팀장님.”
밥 먹기 전에 으레 하는 인사 후 말없이 식사를 잇는 동안 연조는 후루룩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기다란 국수 가닥을 조금씩 끊어 먹었다. 자꾸만 신경 쓰이는 그를 의식하지 않으려고 먹는 것에만 최대한 집중했다.
“신연조 씨, 안 좋은 버릇 하나 발견했습니다.”
주문한 음식들을 거의 다 비워 갈 무렵 강준의 음성이 들려왔다. 난데없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올려 눈만 깜빡이자 그가 턱짓으로 연조의 국수 그릇을 가리켰다.
“신연조 씨는 불편한 자리일수록 외려 더 잘 먹는군요.”
내가 그랬던가…….
연조는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그러고 보니 그의 말이 맞는 것도 같았다. 상황과 상대가 불편하다는 티를 자기 나름대로 감추느라 눈앞의 음식에만 집중했는지도. 맛있어서 잘 먹는 게 아니라 먹는 것 말고는 마음 둘 게 없으니 말이다.
“억지로 먹진 말죠. 그러다 체하면 속상하니까.”
“억지로 먹는 건 아닙니다.”
거기에라도 정신 팔려고 열심히 먹는 것뿐이지.
그러다 연조는 문득 속상함의 주체가 궁금해졌다. 속상한 것이 자신인지 아니면 그인지. 주어를 빼고 뱉는 말의 모호함에 왠지 모르게 가슴이 콩닥거렸다.
“……금요일부터 지금까지 내내, 생각해 봤습니다.”
웃는 것도 같고, 심란한 것도 같은 눈빛으로 연조를 지켜보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피할 수는 없는 화제를 앞에 두고 연조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도무지 모른 척할 수 없는 상황이라 눈을 가라뜬 채 그의 말이 계속되길 기다렸다.
“사실은 지금도 생각 중이긴 한데…….”
잠시 말을 멈춘 강준이 알루미늄 컵으로 손을 뻗었다. 자기가 맡은 일은 매번 자신만만하게 처리하는 유강준 팀장이라도 수습하기 어려운 일을 저질러 놓고 태연할 수만은 없었던가 보다. 의외의 순간에 발견한 의외의 모습에 연조는 설핏 웃음이 나왔다. 이러면 안 되건만 그가 왜 조금 더 가깝게 느껴지는 것일까. 강준에게 들키기 전에 얼른 표정을 수습한 연조는 손에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날 고백했던 거…… 없던 일로는 안 하겠습니다.”
물 한 잔에 호흡을 가다듬고 내놓은 그의 말이 놀라웠다. 있던 일을 없던 일로 할 수 없다는 건 알지만 강준이 그렇게 말할 줄은 몰랐다. 있던 일에 대한 기억을 마음속에선 조금의 흠결도 없이 간직하고 있다 해도 보통 이런 경우엔 없던 일로 하고 넘어가자 하기 마련이니까.
“혼자 이러다 말려고 했는데, 머리 터지도록 생각하다 보니 내 진심을 알게 됐습니다.”
어떤 진심을, 알게 되었을까요…….
소리 내어 묻진 못하고 그에게서 시선을 비킨 채 차가운 컵 표면만 만지작거렸다.
“내 마음이 신연조 씨에게 한 번은 닿아야 한다고. 생각보다 일렀지만, 어쨌든 말이죠.”
연조는 가슴이 아릿해졌다. 대답해 주지 못할 마음이건만 그는 왜 그런 진심 따위를 품게 되었을까. 연조는 자신이 굉장히 나쁜 여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에게 대답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마음이 무거웠다.
“내 마음, 모른 척해도 괜찮고, 어장 관리 해도 상관없습니다.”
연조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강준을 바라보았다. 모른 척해도 괜찮고 어장 관리 해도 상관없다니, 바보 같은 말을 뱉은 그는 엷게 미소지었다.
“그런데, 각오는 해 둬요.”
무엇을 각오하라는 건지 알려 주지도 않고 강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 한 마디도 할 말을 생각해 내지 못한 연조는 복잡한 기분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정오의 시간이 지난 오후의 거리는 햇볕이 잔뜩 녹아내려 뜨거웠다. 한 모금의 술도 마시지 않았건만 연조의 가슴이 어지럽게 찰랑였다.
바빴던 아침과는 다른 느슨한 공기가 저녁노을과 함께 내려앉았다. 출장지에서의 일을 마무리지은 강준과 연조는 강준의 SUV 앞에 섰다.
여유로워진 주변 공기와 다르게 어색한 분위기가 두 사람 사이를 짓눌렀다. 일을 하는 동안엔 그나마 마음 둘 곳이 있었지만 일이 끼이지 않을 땐 어쩔 수 없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눈앞에 선 상대가 상사와 부하 직원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임을 손끝까지 의식하게 되기에.
“타죠.”
“저는…… 역까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강준의 눈썹이 휘어졌다. 연조는 까칠해진 그의 눈빛 아래에서 어렵게 숨을 삼켰다. 지나친 경계인가 싶어 멋쩍은 마음이 일었으나 이렇게 하는 것이 옳을 것 같았다. 그의 마음을 모른 척하긴 어렵겠지만 어장 관리 할 생각은 없었다. 의도를 갖지 않고 한 행동일지라도 상대에겐 기대감을 심어 줄 수 있는 법이니. 그건 강준에게도, 그리고 윤준에게도 도리가 아닌 것 같았다.
“신연조 씨.”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강준의 음성이 몹시 딱딱했다.
“네, 팀장님.”
대답하는 연조의 음성에도 습기가 말라 있었다.
“우리 같은 오피스텔에서 살고 있는데도 단 한 번 외엔 마주친 적이 없었죠?”
“네…….”
그러고 보니 그에게 향수 냄새 나는 스무디를 먹였던 이후 우연으로라도 출근길에서 마주친 적이 없었다. 이른 출근을 하는 연조였건만 그의 출근은 언제나 그녀보다도 한발 앞서 있었다. 퇴근 시간은 각자 달랐기에 마주칠 일이 없었고. 하지만 그게 뭐 어떻다는 것일까.
“그게 누구 덕분인 것 같습니까.”
엉뚱한 질문에 연조는 눈만 깜빡였다.
“그게…… 팀장님 덕분인가요?”
말의 뉘앙스가 그런 것 같아 건넨 말에 그가 비뚜름하게 웃었다.
“알면 집까지 타고 가요. 은혜 갚는 셈 치고.”
그간 안 마주치려고 노력해 주었으니 그 또한 은혜로 알고 갚아야 하는 것인가.
그의 말에 조금 당혹스러웠지만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어색해질 상황을 맞닥뜨리지 않을 수 있어서 다행이긴 했다. 매번 긴장감을 유지한 채 지내야 한다면 보통 피곤한 일이 아닐 테니 말이다.
“신연조 씨 불편하겠지만 불편한 건 나도 마찬가집니다. 신연조 씨 머리카락 하나 건드릴 수 없는데 나라고 편하겠습니까.”
이런 말엔 도대체 무어라고 대꾸해야 하는 걸까. 할 말을 찾을 수 없는 연조는 깊게 한숨 쉬며 강준을 응시했다.
“그래도 불편한 게 애타는 것보단 나으니까 타죠. 신연조 씨 혼자 보내면 집에 잘 도착했나 내내 걱정할 겁니다. 그러니까 부탁할게요. ……애타게 하지 말아 줘요.”
쥐가 갉은 구멍 하나에 굳건한 댐이 무너졌다는 이야기를 언제 읽어 봤더라…….
애타게 하지 말아 달라는, 긴 이유를 늘어놓지 않은 간단한 설득에 연조는 어쩐지 힘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복잡한 이유를 내세워 가며 강하게 설득하려 했다면 작용과 같은 크기로 발생하는 반작용의 힘에 강하게 튕겨 나갔겠지만, 솔직하고 심플한 접근엔 무어라 대꾸할 말이 떠오르질 않았다. 자신이 준비한 방어망은 훨씬 복잡하고 견고하고 까다로운 것이었는데…….
“그럼…… 신세 지겠습니다.”
연조는 나직하게 말하고서 조수석에 올라탔다. 안전벨트를 매고 간단한 세면도구와 옷가지를 넣어 조금 무거운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렸다. 뒤이어 강준도 차에 오르고, 두 사람의 사이는 극히 좁아졌다.
연조는 급히 차오른 한숨을 가만히 뱉어 냈다. 피로를 잔뜩 업은 등이 조수석 시트에 녹아들듯 달라붙었다. 따끔거리는 눈을 감으며 품안으로 가방을 끌어안았다.
결국 서울로 가는 차에 함께 올랐다. 서로가 마음 불편한 자리여도 그녀와 함께이기에 이마저도 소중하다고 말한다면 남들에게 머저리 내지는 변태 소리 듣기 십상이겠지만 강준은 한숨 쉬며 인정했다. 좋다, 이마저도. 자신의 본질이 머저리든 변태든.
퇴근길의 경부 고속 도로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지하철을 타고 가겠으니 역에서 내려 달라 했던 연조에게 강준은 조금 미안한 마음이 일었다. 지하철을 타고 갔다면 마음이라도 편했을 텐데. 집에 더 일찍 도착해 쉴 수 있었을 테고.
겸연스러운 마음에 연조 쪽을 힐끗 쳐다본 강준은 굳었던 얼굴을 펴고 웃어 버렸다. 연조의 이런 점이 좋았다. 긴장이고 뭐고 간에 일단은 본능에 충실한 모습이. 차를 출발한 지 오랜 시간이 흐른 것도 아니건만 그녀는 꾸깃거리게 뭉쳐진 가방을 품안에 끌어안고서 자고 있었다.
주파수를 확인하지 않고 틀어 놓은 라디오 방송에서 잘 훈육된 걸 그룹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강준은 볼륨을 줄이려다 아예 카 오디오 전원을 꺼 버렸다. 그 순간 연조의 고개가 차창 쪽으로 기울어졌다. 부딪히면 어쩌나 싶어 조마조마했으나 그녀는 용케도 헤드레스트에 머리를 붙였다.
한숨 놓았지만 속도 없이 잠들어 버린 그녀가 얄밉기도 했다. 이 어려운 사랑을 시작하게 해 놓은 장본인은 무척이나 태평해 보여서. 그녀의 마음이 정말 태평하겠느냐만, 아직은 그녀가 모르는 사실을 알고 있는 강준은 무거운 마음을 한숨으로 토했다.
서윤준. 서윤준…….
문제적 이름을 떠올리자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윤준과는 토요일 오전, 화장실에서 마주쳤었다. 복잡한 마음을 가다듬기엔 집보다 사무실이 효율적이기에 강준은 주말에도 회사에 나와 있었다.
“응, 연조야. 잘 다녀와. 다음번에 나랑 같이 내려가자. 어머님께 안부 전해 줘.”
세면대 앞에서 통화하고 있던 윤준은 등 뒤에서 다가오는 강준을 직시하고 있었다. 거울 속 윤준의 눈빛을 피하지 않고서, 강준은 그의 곁에 나란히 섰다.
수전의 물이 분출하듯 쏟아졌다가 그쳤다. 페이퍼 타월을 뽑는 강준의 손길이 거칠었다. 지금부터는 거친 숨을 뿜으며 싸워야 하는 수컷들의 시간. 두 남자 사이에 어둑한 분위기가 묵직하게 깔렸다.
“신연조 씨 말로는, 두 사람 사이 회사에선 모르고 있다고 하던데.”
거울 속 윤준의 눈썹이 조금 치올라 갔다.
“회사 화장실에서 함부로 이름 불러 가며 통화해도 되는 겁니까.”
강준의 미간도 매끈하진 않았다.
“다행히도 여기엔 유강준 팀장님과 저뿐이군요.”
‘다행히도’라니. 얄팍한 입술로 뱉는 거슬리는 언어에 강준의 눈썹이 확 구겨졌다.
“신연조 씨가 고민정과의 사이 모르는 것도 다행인 겁니까?”
조금 더 치올라 간 윤준의 눈이 거울 속 허상이 아닌 곁에 선 실상에게로 향했다. 강준의 시선도 곁에 선 윤준에게로 향했다. 실상으로 덤벼 오는 윤준의 도전을 강준은 거부하지 않았다.
“유강준 팀장님께서…… 상관하실 일입니까?”
제가 한 짓이 옳든 그르든 네가 무슨 참견이냐는 듯한 서늘한 눈빛에 강준의 심장이 성난 짐승처럼 아르릉거렸다. 그렇게 안 봤건만 서윤준은 매우 뻔뻔한 인간이었다. 아니면, 라이벌로 인식되는 상대에겐 일단 시비부터 걸고 싸우자 덤비는 수컷의 투지 본능이 솟은 건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하면 내가 상관해도 되는 겁니까.”
아무렇게나 구긴 페이퍼 타월을 쓰레기통에 집어던지며 강준은 나직이 뱉었다.
“내가 신연조 씨를 좋아하고 있다면 상관할 자격, 가져도 되겠습니까.”
강준의 말이 짐작하지 못한 바는 아니라는 듯 윤준의 표정에 큰 변화는 없었다. 경직된 입매가 어색해 보이긴 하지만.
“유리한 입지를 차지했다고 좋아하셨겠습니다.”
“신연조 씨가 상처받을까 봐 걱정했습니다.”
같은 상황을 두고도 보는 시선이 이렇게나 다르다니, 강준은 씁쓸한 마음에 실소가 터졌다.
“실수였다고 하면, 비웃으시겠군요.”
“알고 있어 다행입니다.”
윤준의 얼굴이 더욱 찌푸려졌지만 강준의 눈빛은 강경했다.
“그런다고 연조가 내 여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럼 고민정은 뭡니까.”
“고민정 씨와는…… 거기까집니다.”
민정과의 관계를 참 간단하게도 판가름 내는 말을 뱉고 윤준은 잠시 말을 멈췄다. 서로를 탐색하는 눈길엔 조금의 비킴도 없었기에 예민하게 곤두서 있는 윤준의 감정 상태를 강준도 읽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민정을 마음 밖으로 확실히 밀어내지 못한 것을.
“변명을 하자면 끝도 없겠지만, 아니 내가 지금 유강준 팀장님께 왜 이런 말을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연조와 헤어질 생각, 없습니다.”
강준의 눈썹이 커다란 굴곡을 그리며 휘어졌다. 연조와 헤어질 생각이 없다고 말하는 윤준의 표정이 몹시 결연해 보였다. 빌어먹게도.
“지난 1년간 내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최선을 다해 아껴 온 사람입니다. 며칠간의 흔들림 때문에 소중하게 쌓아 온 시간을 버릴 만큼 어리석지 않습니다. 내가 정해 놓은 경계선을 넘은 건 맞지만, 아무도 내게 연조와 헤어지라고 강요할 순 없는 것 아닙니까.”
연조와 헤어지라고 강요한 적 없건만 윤준은 못을 박듯 말했다. 강준이 원하는 바가 그의 눈에도 훤히 보인다는 듯 윤준의 음성에선 가진 자의 여유마저 느껴졌다. 쥐고 있던 강준의 주먹으로 힘이 들어갔다.
신연조를 먼저 알고, 먼저 사귀었다는 이유로 자기가 무슨 짓을 했든 어드밴티지를 얻은 건 자기라고 주장이라도 하려는 건가? 서윤준은?
기가 막힌 강준은 비뚜름한 시선으로 윤준을 쏘아보았다.
“서윤준 씨 경계선은 고무줄인가 보군요.”
날카로워진 윤준의 눈이 강준의 강직한 눈을 맞받았다. 강준의 옳은 소리는 윤준의 양심을 모조리 도려낼 듯 이어졌다.
“고민정 처음 만나 흔들렸을 때도 거기까지라고 했겠지. 레스토랑 앞에서 만났을 때도 그곳이 끝이었을 테고. 옥상 쇼도 예상 못한 실수였을 뿐이고, 이젠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소중한 모든 것은 부재를 통해서 빛이 난다 했던가. 연조를 잃을 것 같으니 이제야 그녀가 서윤준에게 소중해진 건 아닐까 싶었다. 라이벌의 등장에 비로소 정신이 차려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기왕 나가 버린 정신, 그녀의 소중함 같은 건 모른 채 영원히 미궁 속에서나 헤맬 것이지.
“그 경계선, 나와 신연조 씨가 넘으면 어떨 것 같습니까. 서윤준 씨는.”
윤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의 반응에 강준은 비소가 터졌다. 자기에겐 관대하고 상대에겐 엄격한 그의 좁아터진 마음 씀씀이가 우습고 화났다.
“선을 넘었어도 제자리로만 다시 돌려보내면 되는 겁니까? 그러면 서윤준 씨는 얼마든지 이해하고 받아 줄 수 있나 보군요. 그런데 말입니다, 나는…….”
강준은 말을 끊고 윤준에게로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 바짝 붙어 서서 그를 내려다보며 울분과 각오를 담은 주먹을 그러쥐었다. 그리고 진심을 다해, 말했다.
“안 돌려보냅니다. 절대.”
어지간하면 참아 보려고 했었다. 하지만 강준은 이 사랑을 전개도, 절정도 없는 지루한 짝사랑으로 끝낼 생각이 깡그리 사라졌다. 그러기엔 이미 마음이 훌쩍 자라 버렸고, 서윤준은 도가 지나치게 비겁했으니까.
초지일관 쓸데없는 그의 말을 더 이상 들어 줄 수 없어 먼저 화장실에서 나왔다. 머리 굵은 어른들의 싸움은 유혈 사태 없이 끝났다. 그러나 강준의 가슴은 제대로 한 대 얻어맞은 듯 시큰거렸다.
꾸역꾸역 서초 IC까지 왔을 땐 탁한 달빛이 세상을 미약하게 비추고 있었다. 윤준과의 일을 생각하던 강준은 답답한 마음에 연조에게로 눈길을 보냈다. 어느덧 강준 쪽으로 고개를 꺾고 잠이 든 연조의 평온한 얼굴엔 연애의 근심 따윈 없어 보였다.
문득 강준은 곤히 잠든 그녀를 흔들어 깨우고픈 충동이 일었다. 깨워서, 욕심을 솔직히 발산하는 아이처럼 고자질하고 싶었다. 그녀의 애인이 무슨 짓을 했는지 낱낱이 알리고, 그녀를 정신 못 차리도록 흔들고 싶었다.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 처음 느끼는 것이 자신의 품일 수 있도록.
그런 저속한 생각이나 하며 너덜너덜해진 마음을 달래고 있을 때, 자리가 불편한 듯 몸을 꼼질거리던 그녀가 서서히 눈을 떴다.
“많이, 왔네요.”
연조는 속 편히 잠들었었다는 것에 놀랐는지 빠르게 허리를 세우고 뒷머리를 몇 번 쓰다듬었다. 잠긴 목소리를 감추려는 듯 천천히 말을 뱉고 잔기침으로 목을 가다듬는 모습에 강준은 어쩔 수 없이 미소가 지어졌다.
“배고프지 않습니까?”
“네……. 조금.”
솔직한 대답에 작게 소리 내 웃어 버렸다. 밤늦도록 이 긴장감을 지속해야 하는가 싶어 아득한 표정인데도 그녀는 쓸데없는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밥 먹고 들어갑시다.”
“네, 뭐…….”
시작할 땐 언제나 약간의 어려움이 따르기 마련이지만 어색한 분위기를 몇 번 겪고 나니 이 감정도 조금은 견딜 만해졌다. 강준은 뚫리기 시작한 도로 위를 액셀러레이터를 가볍게 밟아 달리며 조금 더 진하게 웃어 보였다.
어느덧 강준의 차는 트렌디한 강남 거리로 들어섰다. 공용 주차장을 찾아 차를 세우고 카페와 술집이 줄지어 있는 골목을 걷다 가정식 백반집을 찾았다. 긴말 없이 밥집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그날의 식재료로 형편껏 만들어 낸 백반 두 개를 시켰다.
MSG를 팍팍 뿌린 가정식 백반은 시장을 반찬 삼아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노릇하게 구워진 고등어의 모양새가 먹음직해 보여 강준은 고등어 살점을 두툼하게 떼어 내 연조의 밥그릇 위에 올려 주었다.
“괜찮습니다. 팀장님 드세요.”
제 밥그릇에 올려진 고등어구이를 바라보던 그녀가 딱딱하게 말했다. 호의를 무시당한 강준은 낮은 한숨을 내쉬며 밥을 먹는 연조를 바라보았다. 밥을 먹는 틈틈이 휴대전화를 확인하는 그녀의 모습이 신경 쓰였다. 누구의 문자 메시지가 계속해서 전송되는 건지 알 것 같았다. 급기야 휴대전화가 길게 몸을 떨자 연조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강준의 눈치를 살폈다.
“받아 봐요.”
강준은 태연하게 말했다. 태연히 말하는 것치고 눈빛은 날카롭고 건조했다.
“실례하겠습니다.”
연조는 멋쩍은 듯 상기된 얼굴을 하곤 가게 밖으로 나갔다. 출입구와 멀지 않은 곳에서 통화하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며 강준은 테이블 위에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질투가 붉은 입을 벌리고 몸과 마음을 가차없이 물어뜯는 것만 같다. 그녀에게 모든 걸 일러바쳐 치사하고 경솔한 사람이 될 기회를 거부하고 싶지 않은 충동이 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준에게서 연조를 당장 떼어 놓고 싶은 마음을 안간힘을 다해 참아 봤다. 그녀의 지난 1년을 섣불리 망치고 싶지 않았다. 연인 사이에 좋은 끝이 어디 있겠느냐만 강준 자신은 모르는 그녀의 시간들을 망칠 권리가 강준에겐 없었다. 한바탕의 연애를 정리하는 건 오로지 그녀만의 몫일 테니.
“죄송합니다, 팀장님. 먼저 가 볼게요.”
통화를 끝내고 돌아온 연조가 백을 챙기며 말했다. 그녀를 향해 더듬이를 곤두세우지 않아도 누구를 만나러 가는 건지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다. 그녀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방어벽을 세우는 것뿐이라는 것도 안다.
“그러시죠.”
좋아하게 된 여자를 다른 남자에게 보내는 건 이토록 뼈가 시린 일인데 그녀를 막을 수 없는 마음이 사정없이 쑤셔 왔다. 그 누구도 어디 한번 시작해 보라고 등 떠민 적 없는 사랑을 시작한 대가는 이토록 혹독하다.
강준은 밥값을 내려는 그녀를 저지하고 계산을 마친 후 밤거리로 나섰다. 약속한 장소가 주차장까지는 같은 방향인지 연조는 강준의 뒤를 말없이 따르다 주차장 입구에서 멈춰 섰다. 그때, 주차장으로 진입하려는 검은색 차량이 연조의 옆구리를 칠 듯이 접근해 왔다. 그녀가 서 있는 곳은 간판 불빛도 닿지 않아 유난히 어둑한데다, 차 안에선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였다.
놀란 강준이 연조의 팔을 잡아채 제 쪽으로 당겼다.
“괜찮습니까?”
걱정스러운 음성으로 물으며 그녀의 안색을 살피는데, 그제야 깨달았다. 두 사람 사이의 간격이 사라졌다는 것을.
강준은 미간에 빗금을 그었다. 조금만 고개를 숙이면 그녀의 입술과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어쩔 수 없이 호흡이 가빠 왔다. 신음하듯 한숨을 뱉은 강준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녀는 너무 가까이에 있고, 강준은 좁혀진 이 간격을 떨어뜨리고 싶지 않았다.
“가지 말죠.”
동그랗게 벌어진 눈동자가 강준에게로 향했다.
“가지 말아요. 서윤준한테…….”
들어줄 수도, 들어줄 리도 없는 부탁이라는 걸 알면서도 강준은 그녀의 입술 근처에서 속삭였다.
지금 당장 진실을 말하기엔 비겁해지는 것 같고, 진실을 말하지 않고 이대로 있기엔 그녀를 기만하는 것만 같다. 이대로 조금만 더 고개를 숙여 입 맞추고 싶은 마음을 무섭게 참아 내는 이유 따위, 그녀는 알 리 없겠지만 강준의 마음은 간절했다.
서윤준과 신연조를 같은 부류로 만들고 싶지 않은 마음을. 단단한 껍데기는 부숴야만 속살을 음미할 수 있지만 아직은, 이대로…….
그래서 강준은 연조에게, 키스하지 않았다.
“가지 말아요. 서윤준한테…….”
잔상이 맺힌 눈을 지그시 감고 있다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린 연조는 웨이트리스가 내려놓고 간 유리잔을 빨대로 휘저었다. 블루 레모네이드 속의 얼음이 궤도를 그리며 빙글빙글 춤을 췄다.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어지러운 군무에 연조의 마음도 어지러웠다.
“피곤하니?”
“조금. 윤준 씨도 피곤하지? 오늘 야근했잖아.”
“응. 그런데, 보고 싶었어.”
낯설고 간지러운 소리에 머쓱해진 연조는 어색하게 웃었다.
“안 하던 말을 다 하네.”
“그런가?”
“응. 이렇게 만나는 것도 처음인 것 같아.”
평소 했던 데이트와는 다른 형태의 만남이었다. 연조가 본가나 출장을 다녀온 다음엔 그녀가 피곤해할 걸 알기에, 그럴 때 윤준은 연조에게 데이트를 청하지 않았다. 연조의 집까지 바래다주며 잠시 얼굴 보는 정도의 만남은 있었지만 출장 다녀온 날 밤, 은근하게 야한 빛이 깔린 칵테일 바의 벨벳 스툴에 그와 앉아 보는 건 처음 있는 일이다.
“유강준 팀장이랑 종일 같이 있었어?”
“응? 응…….”
당연한 걸 묻는 윤준의 표정이 조금 어두웠다. 당연한 걸 대답하는 연조의 음성도 조금 떨렸다.
“유강준 팀장이…….”
“실은 팀장님이…….”
서로의 음성이 충돌했고, 말은 멈췄다. 사람의 감각이란 이럴 땐 참 곤란하도록 예리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사람을 언급해 놓고 말을 멈췄지만 연조는 윤준의 입에서 어떤 말이 이어질지 알 것 같았다.
“유강준 팀장이 너, 좋아하고 있어.”
연조를 바라보는 윤준의 눈에 그늘이 짙었다.
“윤준 씨가 그걸 어떻게 알아?”
블루 레모네이드 잔을 들어올린 연조는 눈을 가라뜨며 물었다.
“그냥…… 알아.”
남자에게도 직감이라는 것이 있나 보다 싶어, 연조는 윤준의 간단한 대답에 의미를 두지 않았다.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몰라 곤란한 마음에 물방울 맺힌 유리잔만 만지작거렸다.
“유강준 팀장이랑…… 가까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윤준의 말에 연조는 눈을 치떴다. 원하는 것을 솔직히 말하는 그의 모습이 낯설었다. 자기 여자친구를 좋아하고 있는 남자에 대한 당연한 반응이겠지만, 윤준의 고요하고 정돈된 모습만 봐 왔던 연조로선 눈앞의 그가 조금 어색했다.
“윤준 씨, 질투하는 것 같아.”
자기들 사이에 이런 자극은 처음 있는 일이기 때문일까. 연조는 입 안에 머금었던 음료를 가까스로 삼키곤 농담처럼 보이도록 가볍게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몸과 마음이 피곤하고 혼란해 상황을 심각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질투, 하고 있어.”
윤준의 음성은 진지했다. 그는 시켜 놓은 칵테일에 아직까지 손도 대지 않았다. 라임즙을 뿌리고 민트 잎을 올린 프로즌 마르가리타가 조금씩 녹으며 서서히 붕괴되고 있건만.
경직되어 있는 윤준을 새삼스럽게 살피며 연조는 두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질투하고 있는 남자친구에겐 무어라 말해 주어야 하는지 도무지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 사실이 연조는 퍽 민망했다. 질투해 줘서 기분 좋다든가, 자기밖에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든가 하는 말들에 애교를 섞어 건넬 숫기가 1년을 사귄 남자친구 앞에서도 이렇게나 없다니 말이다.
“나 그동안 뭔가 잘못해 왔던 것 같아.”
윤준의 눈이 무슨 의미냐는 듯 조금 치올라 갔다.
“남자친구 질투하게 만들기나 하고, 그런데도 뭐라고 말해 줘야 할지 생각나는 건 없고. 뭐가 이렇게…… 어렵지?”
연조는 자조 섞어 말하고서 한숨을 내쉬었다.
윤준에게 미안했다. 그에게 미안한 건 강준의 고백에 마음이 설렜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신의 감정 중에서 연애 감정만을 주사기로 뽑아내기라도 한 것처럼 밋밋한 이 마음이 미안했다. 늘 뜨겁게 분출되는 사랑은 남의 일이라, 조금쯤은 불꽃이 튀어도 좋을 지금 같은 상황에 딱히 할 말이 없다는 것이 연조는 안타까웠다.
“네가 나한테 무언가를 말할 필요는 없어. 마음은, 유강준 팀장이 시작한 거니까.”
윤준은 담담해 보였다. 그 기저에 강준에 대한 분개가 깔려 있는 듯 시릿함이 밴 담담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덕분에 나는 내 마음을 잘 알게 되었어.”
“어떤 마음?”
“너를 좋아하는 마음.”
연조는 평소와 달라 보이는 윤준을 가만히 살펴보았다. 강준의 마음을 알고 있기에 좋을 수 없는 윤준의 기분을 이해한다. 하지만 자신에게 보이는 윤준의 소유욕은 낯설다.
“참, 내일 어머니하고 같이 점심 먹자. 어머니께서 회사 근처까지 오실 일 있다고 같이 점심 먹자고 하셔.”
“그래……. 그렇게 해.”
연조의 대답에 윤준이 옅게 웃어 보이며 그제야 칵테일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다 반짝이며 빛을 내는 휴대전화를 묵념하듯 바라보고는 이내 흐려진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말없이, 시간이 흘렀다. 초콜릿처럼 끈적거리는 음색을 지닌 흑인 가수의 노래만이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을 채우는 유일한 소음이었다. 윤준은 조금 애틋해진 눈빛으로 연조의 모습을 살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윤준의 시선을 받으며 블루 레모네이드의 마지막 얼음 조각이 녹을 때까지 연조는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잘 들어가. 도착하면 문자 메시지 보낼게.”
오피스텔의 로비에 다다랐을 때, 윤준은 잡고 있던 연조의 손을 놓으며 엷게 웃었다.
“응. 조심히 가.”
“내일이 쉬는 날이면 좋을 텐데……. 안타깝다.”
귀 뒤로 머리칼을 넘겨 주는 윤준의 손길이 다정했다. 무뚝뚝한 사람은 아니지만 담백했던 평소와는 다른 태도였다.
“윤준 씨, 오늘 뭔가 달라진 것 같아.”
“내가?”
“응.”
윤준은 피식 웃어 보일 뿐 머리칼에서 볼로 옮겨 간 손길을 거두지 않았다. 자신을 조금 더 오래, 그리고 깊게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자신은 모를 비밀이 감춰져 있다고 느끼는 건 과대망상일 것이다. 강준 때문에 혼란스러워진 마음이 일으킨 착각일 테고. 연조는 석연치 않은 마음을 애써 내리누르며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어서 가. 너무 늦었어.”
연조는 외부인 출입 통제 유리문 앞에서 현관 번호 키를 누르며 윤준에게 어서 가 보라고 손을 저었다. 그러나 연조를 지그시 내려다보던 윤준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잠깐만, 연조야.”
이제 막 통제 출입구가 열린 참, 연조의 허리를 감아 안은 윤준이 고개를 기울여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자정이 가까워 온다지만 아직 영업 중인 상가가 많은 오피스텔 1층에서 시도하는 과감한 스킨십에 연조는 당황해 버렸다.
“나 갈게, 윤준 씨.”
연조는 조금 더 깊이 들어오려는 그의 어깨를 밀어 저지하며 얼굴을 붉혔다. 유리문이 닫히기 직전 가까스로 안으로 들어가 문밖의 윤준에게 손을 흔들어 주곤 엘리베이터의 상향 버튼을 눌렀다. 어서 가라고 손을 저었지만 윤준은 가만히 웃어 보일 뿐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연조가 갈 때까지 그 자리에 있을 것 같던 윤준은 함께 있는 내내 자주 반짝거리던 휴대전화를 확인하곤 살며시 미간을 그었다.
“윤준 씨, 어서 가.”
유리문 가까이에 대고 하는 말에 윤준이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럼 갈게. 잘 자.”
고개를 끄덕여 주고 손을 흔들자 윤준은 그제야 발을 떼었다.
곧,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연조는 터벅거리는 걸음으로 사각 상자에 올라타 경직됐던 어깨를 아래로 내려앉혔다. 뭐가 이리도 힘든 건지 두 번은 겪고 싶지 않은 이상한 하루. 엘리베이터에 붙어 있는 거울에 오늘을 견뎌 낸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타인을 관찰하는 것처럼 물끄러미 바라본 얼굴은 무표정했다.
문득, 연조는 궁금해졌다. 무표정한 얼굴 뒤에 감춰 둔 속내가 무엇인지. 생각을 미뤄 두고 또 미뤄 두는 저의가 무엇인지. 도대체 무엇이…… 두려운 건지.
“가지 말아요. 서윤준한테…….”
금방이라도 입술에 닿을 것처럼 가까이 있던 그의 입술이 간절히 뱉은 말을 단호히 떨쳐 내고서, 빠르게 걷는 내내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연조는 집 앞에 다다라서야 뒤를 돌아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피곤한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