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견뎌야 해
팔락팔락.
한 장 한 장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정적인 실내의 적요함을 더했다. 전날 보고서 리뷰를 받지 못한 연조가 아침 회의가 끝난 후 강준 앞에 두 손을 모으고 서 있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강준은 보고서를 들여다보았다. 연약한 종이를 힘주어 잡은 손이 정성을 다해 작성한 보고서의 귀퉁이를 조금씩 구겨 놓았다. 평소 같았으면 벌써 리뷰를 끝내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됐습니다.”
파일을 덮으며 강준이 습기 없이 말했다. 오로지 그 말뿐, 그녀에게 무언가 말을 더 건네고 싶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털어도 나오지 않는 먼지를 굳이 만들어 트집 잡는 진상 상사는 되고 싶지 않았다. 강준은 단호한 손짓으로 파일을 그녀 쪽으로 밀었다.
“감사합니다.”
검은색 파일을 집는 그녀의 손이 유난히 창백해 보였다. 얼굴색 또한 그 못지않았다. 깊은 한숨을 내쉰 강준은 하고 싶지 않은 알은척을 했다.
“숙취로 고생 중인 것 같군요.”
“네……. 팀장님은 괜찮으십니까?”
“글쎄요.”
“네?”
“모르겠습니다. 뭐 때문에 속이 좋지 않은지. 술은 센 편인데.”
강준은 차게 말하고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도대체 무엇일까. 이 명확하지 않은 감정의 정체는. 참을 수 없는 한숨이 다문 입술을 비집고 또다시 새어 나왔다. 속 좁게 굴고 싶지 않건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이 순간이 강준은 곤혹스러웠다.
“술이 아니라면, 아침 먹은 게 체하셨을까요?”
순진하게도 내놓는 추측에 강준의 미간이 한껏 구겨졌다. 문득, 지난밤 휴대전화를 귀에 대며 나른하게 뱉던 그녀의 음성이 떠올랐다.
“응…… 윤준 씨…….”
연조야, 하고 부르는 다정한 음성에 잠시 경직됐던 강준은 연조를 흔들어 깨워 전화를 바꿔 줬었다. 부스스 일어나 휴대전화를 받아 든 그녀는 느릿느릿 일어나 밖으로 나갔고, 자리로 돌아온 뒤엔 미안해하는 기색을 보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먼저 가 볼게요.”
회식 자리를 끝까지 지키지 않는 부하 직원에게 이 또한 일의 연장선이라거나 팀 분위기 저하 따위의 고루한 사고를 주입시키며 붙잡고 싶진 않아 핸드백을 챙기는 그녀를 그냥 두었다. 같은 오피스텔 거주민의 의리로 늦은 귀갓길을 함께 하자 하기엔 남자의 전화를 받고 가는 걸 뻔히 보고도 할 제안은 아닌 것 같아 그저 참았다.
“아침에 먹은 게 없어서 체하긴 어려울 것 같군요.”
속이 좋지 않은 이유를 예리한 핀셋으로 정확하게 집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럴 수만 있다면 영문도 모르는 여자 앞에서 애처럼 심통맞은 표정 같은 건 짓고 있지 않을 수 있을 텐데.
머릿속이 복잡했다. 아마도 남자친구가 있을 것 같은 부하 직원에게 ‘그렇군’ 하는 무심함을 넘어, ‘아깝군’ 하는 아쉬움을 넘어, ‘이럴 수가’ 하는 아득한 마음이 드는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다.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그래요.”
평소 같지 않은 분위기에 그녀는 멋쩍어하는 것 같았지만 강준은 의자에 등을 기대며 딱딱하게 말했다. 좀 더 유연하게 말하거나 농담을 건넬 마음이 조금도 생기질 않아 평소 같지 않게 굴었다.
“아무래도 숙취 때문에 고생하시는 것 같은데…… 이거 드시겠습니까. 술이 아무리 세도 속에서 받지 않는 날도 있으니까요.”
그녀가 어서 사라져 주길, 아니 조금만 더 머물러 주길 바라며 관자놀이를 누르는데, 그녀가 나가려다 말고 검은색 슬랙스 주머니에서 작은 음료 한 병을 꺼냈다.
“숙취 해소 음료입니다. ‘견디셔’라고도 하는…….”
책상 위에 올려진 녹색 병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녀가 목을 붉히며 말했다. 딱딱한 분위기를 조금은 녹여 볼 요량으로 던진 농담을 스스로도 민망해하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부끄러워질 때면 얼굴보다 목이 더 빨개졌다.
“그럼…….”
강준이 무어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녀는 서둘러 팀장실에서 나갔다.
강준은 연조가 사라진 문과 책상 위의 음료를 한참 동안 번갈아 가며 보았다. 쓴웃음이 울컥, 깔깔한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뭘 견디라는 거야. 당신을, 아니면 나를. 혹은 무언가가 시작될 것 같은 이 마음을…….
짧은 웃음 뒤에 모래 안개 같은 답답함이 다시 몰려왔다. 오늘의 컨디션은 아침부터 엉망진창. 꾹 참으며 견디는 것 말고는 다른 수가 없을 하루다.
“잘 못 먹네. 입맛이 없어?”
“응, 어제 술을 마셔서.”
“아……. 그렇구나, 참. 미안해. 장소를 잘못 골랐네. 해장국 먹으러 갈걸.”
“아니야. 여기 어렵게 예약했잖아. 1주년 기념일에 해장국은 좀 아니지.”
연조는 리코타치즈샐러드를 억지로 한 입 먹으며 옅게 웃었다. 두 사람이 연인이 된 지 1주년 되는 날, 야근을 해야 하는 연조 때문에 저녁 대신 점심을 함께 하는 두 사람은 평소처럼 차분한 분위기였다.
몇 번 데이트하러 왔던 이곳은 윤준이 특히 좋아하는 장소였다. 분위기도 근사했고 음식도 고급스러웠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피하고 싶은 음식을 눈앞에 둔 연조는 무척 곤혹스러웠다. 뜻하지 않게 주량 이상의 술을 마신 탓에 화려한 요리들을 두고도 좀처럼 입맛을 내지 못했다. 콩나물과 선지가 듬뿍 들어간 해장국 한 숟갈이 지금 이 순간의 연조에겐 무척 간절했다. 하지만 윤준의 성의를 모른 척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세상의 많은 연인들이 파스타와 감자탕 사이의 간극을 좁히지 못해 열렬히 다투기도 한다지만 두 사람 사이엔 단 한 번도 그런 일은 없었다. 서로에 대한 배려가 습관처럼 몸에 밴 연인 사이니까.
“연조야.”
아니, 사실은…….
“응?”
마음을 모두 던지지 않아서일까…….
“이전에 어머니 만났을 때 하신 말씀, 신경 쓰이니?”
어느 정도의 퍼센티지만 사랑에 할당하여서. 그걸 연조 자신도 인정하여서…….
“어머님 이해해. 당신 아들, 좀 더 좋은 조건에 결혼시키고 싶은 게 부모님 마음이겠지.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다고 생각해.”
결혼 이야기를 먼저 꺼낸 건 윤준이었다. 편안한 연애, 다투지 않는 사이, 이대로 관계를 유지하며 아이 낳고 살아도 괜찮을 것 같은 두 사람의 온화한 성품, 그리고 그의 아버지 정년 퇴임 전에 식을 올리는 것이 좋은 것 같다는 실리적인 문제까지. 윤준과의 결혼을 거부할 만한 사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연조를 그리 탐탁해하지 않았다. 이혼 가정이라는 것도, 그리 넉넉한 형편이 아니라는 것도.
“그럼 우리 윤준이가 너희 어머니, 아버지 따로따로 챙겨야겠구나. 우리 윤준이 피곤하겠네…….”
“결혼하게 되면 예단은 어느 정도 생각하고 있니? 나는 우리 윤준이 강남은 아니더라도 서울에 30평대 아파트 정도는 해 주려고 하는데.”
“나는 자식이 우리 윤준이 하나뿐이라서 제대로 격식 차려서 결혼시키고 싶어. 해 줄 건 해 주고, 받을 건 받고. 그래야 집안 분들께 면이 서지. 두고두고 말 안 나올 테고. 그렇지 않니?”
첫 만남인데도 윤준의 어머니는 말을 가리지 않았다. 연조와의 결혼을 생각하고 있다는 윤준의 말에 속내를 감출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을 터. 아무래도 우리 아들이 손해인 것 같다는 내색을 숨기지 않는 그의 어머니 앞에서 연조는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30평대 아파트 같은 건 바라지 않았다. 다이아 몇 캐럿의 화려한 예물도 필요 없었다. 결혼을 하게 된다면 두 사람이 힘을 모아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싶었다. 하지만 결혼이란 남자와 여자의 결합이 아닌 집안과 집안의 결합이라고 못 박는 그의 어머니 앞에서 연조는 할 말이 없었다. 씁쓸하지만 그게 현실일 테고.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윤준 씨.”
“응?”
“윤준 씨는 왜 나와 결혼하고 싶어졌어?”
“무슨 질문이 그래?”
“그냥. 알고 싶어서.”
“좋아하니까. 부모님께서도 내년 안까진 결혼했으면 하시고. 어차피 하게 될 결혼, 아버지 정년 전에 하는 게 낫잖아.”
“응……. 그렇긴 하지.”
“내키지 않아?”
“솔직히…… 응.”
“왜?”
“아직 돈도 더 벌고 싶고, 결혼해서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 확신도 안 서.”
“우리 사이가 그렇게 불같지는 않아서?”
“그런 것도 같고.”
“하지만 은근한 게 오래가지 않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뜨겁게 타올랐다 서로에게 금세 실망하는 사이와, 뜨겁지는 않지만 서로에게 불만 없는 사이. 그중 결혼에 더 적합한 사이는 후자가 아니겠느냐고, 윤준은 말했다. 부부 사이라도 매너를 지키고 서로를 존중해야 끝까지 갈 확률이 높지 않겠느냐는 윤준의 지론은 일견 옳은 말이었다. 열렬한 것들에만 사랑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건 아니라고. 뜨겁게 불타올랐다 결국엔 검은 재가 되어 버릴 위험한 사랑으로부터 한 발짝 떨어진 안전한 거리에서 꾸린 가정을, 자신은 원한다고.
그 말에 연조는 반박할 수 없었다. 엄마의 사랑을 매번 의심하고 괴로워하며 홀로 뜨겁게 타올랐다 가정을 파탄 낸 아버지를 생각하면 윤준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평생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남자와 안전한 가정을 꾸려 태어날 아이들을 평온하게 키우는 건 연조도 바라는 결혼 생활이었다. 윤준과 함께라면 그리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를 만난 후에 맞닥뜨린 현실의 무게가 만만치 않았다. 매사 야무지고 반듯하게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그런 문제에서 연조는 아직 어수룩했다.
그리고 윤준이 중국으로 출장 가 있던 지난 두 달간, 화영의 연애를 지켜보며 새삼 생각이 많아졌다. 길고 짧은 연애를 이어 왔던 화영의 이번 사랑은 다른 때완 달라 보였다. 화영의 가족이 반대하는 무모하고 철없는 사랑 속에서도 한껏 행복해하는 친구를 보며 사랑의 위력을 연조는 다시금 생각해 보았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 걸터앉아 다시 바라보게 된 자신과 윤준의 사이는 과연 괜찮은 것인지.
“이제 회사에 우리 사이도 밝히자.”
“응?”
홀로 생각에 잠겨 있던 연조는 뜻밖의 말에 눈을 치떴다. 비밀 연애를 제안한 건 윤준이었다. 회사 생활에 사적인 감정이 개입되는 걸 원치 않았기에 연조는 그의 제안에 동의했었다. 결혼을 하게 된다면 당연히 밝혀야 할 사이지만 그렇다 해도 방금 전 윤준의 말은 갑작스러웠다. 결혼을 생각해 보자는 말만 나왔을 뿐 아직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날을 잡은 것도 아니잖아.”
“그럼 아직은 밝히지 말자고?”
“난 그러고 싶어.”
“그런데 연조야, 나는…….”
연조를 바라보는 윤준의 눈동자로 짙은 번민이 번져 갔다. 어쩐지 연조는 그렇게 느껴졌다.
“아니야. 그래, 그렇게 하자.”
시선을 비키며 와인 잔으로 손을 뻗는 윤준을 보고 연조는 미간을 좁혔다. 그의 눈빛이 평소 같지 않게 혼란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왜 그러느냐고 묻진 않았다. 어쩌면 윤준도 결혼이란 명제 앞에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니까.
연조는 낮은 한숨을 내쉬며 샐러드 한 입을 더 먹어 보았다. 그리 뜨겁지도, 들뜨지도 않은 1주년을 기념하는 식사 시간이 뒤숭숭하게 흐르고 있었다.
“왜 이렇게 못 먹어? 어디 아파?”
포카치아를 한 입 크기로 자르던 민정이 한쪽 눈썹을 치올렸다. 예약하지 않고는 자리를 잡을 수 없다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강준은 폴렌타를 몇 술 뜨다 말고 달그락 소리를 내며 스푼을 내려놓았다.
“어제 과음했어.”
“그랬어?”
“해장국 먹고 싶다고 했을 텐데.”
“어렵게 예약한 데야. 그냥 좀 먹지.”
완벽하게 다듬어진 가느다란 손이 포카치아 한 덩이를 그의 앞 접시에 내려놓았다. 강준은 포크로 빵을 건드려만 볼 뿐 먹지 않았다. 오전에 연조가 준, 일명 ‘견디셔’라고도 한다는 숙취 해소 음료를 마셨지만 그것만으로 컨디션을 회복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술이 센 편이긴 하지만 어제는 확실히 무리해서 마셨으니. 또한 마음이, 평소 같지 않았다.
“참, 재미있는 소문 들리더라?”
“무슨 소문?”
“오빠랑 나랑 곧 남매 될 것 같다던데?”
“그래?”
“두 분 이제 결혼하셔야 하는 거 아니야? 오빠 한국으로 나왔는데 아줌마도 오셔야지. 언제까지 원거리 연애 하실 거야.”
“상관없으신 것 같던데.”
“체력들도 좋으셔. 뉴욕에서 서울까지.”
민정은 어깨를 으쓱이곤 썰어 놓은 스테이크를 포크로 찔렀다.
재현의 딸 민정이 연락해 온 건 점심시간 한 시간 전이었다. 오랜만에 얼굴 좀 보자던 그녀는 예약해 둔 레스토랑이 있다며 강준을 이곳으로 끌고 왔다. 오늘 점심엔 해장국을 좀 먹어야 한다는 그의 말은 깡그리 무시한 채.
“사실 어렸을 때 나, 오빠랑 결혼하고 싶었는데.”
“나는 그럴 생각 전혀 없었는데.”
“그래서 접었어. 자존심 상해서.”
“잘했어. 네가 한 짓 중에 드물게 잘한 짓이야.”
“하여간…… 재수 없어.”
단박에 치올라 간 민정의 눈이 강준을 날카롭게 쏘아봤지만 강준은 가볍게 웃었다. 민정과는 어려서부터 자주 교류했던 사이라 거리낄 건 없었다. 강준의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 간 후에도 일 때문에 뉴욕에 갈 일이 많았던 재현은 때로는 민정을 동반하고 강준의 집에 방문했다. 민정이 파슨스 디자인 스쿨을 다닌데다, 설치 미술가인 강준 어머니의 전시회에도 부녀가 꼬박꼬박 참석했다. 그리고 지금, 15년 전에 이혼한 재현과 10년 전에 사별한 강준의 어머니가 재혼한다 하여도 그리 놀라울 건 없었다. 100세를 살아야 할 인생의 중반기를 넘어서 다시 시작된 로맨스를 강준은 얼마든지 지지해 줄 의향이 있었다.
“오빠.”
강준의 농담에 잠시 뾰로통했던 민정이 손에서 포크를 내려놓으며 한숨을 쉬었다. 레스토랑에 자리 잡고 앉을 때부터 무언가 할 말을 감추고 있는 듯한 민정의 기색을 강준은 보았었다. 깊은 고민이라도 품고 있는 듯 그녀의 표정은 내내 밝지 못했다.
“묻고 싶은 게 있어.”
“물어봐.”
강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민정은 복잡한 눈빛으로 강준을 응시했다.
“신연조…… 어떤 여자야?”
“뭐?”
강준이 눈을 치떴다. 제 머릿속이 민정에게 보이기라도 한 것일까. 신연조에 대한 수많은 물음표가 떠다니는 머리가 지끈거려 불편했는데, 민정의 입으로 뱉어진 이름에 심장마저 불편하게 뛰었다.
“네가 신연조를 어떻게 알아.”
“내가 못 견디게 갖고 싶은 남자의…… 여자라서.”
처음엔 민정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멍했던 머릿속으로 한꺼번에 피가 돌았다. 심장이 사납게 두근거렸다. 신연조가 고민정이 못 견디게 갖고 싶은 남자의 여자라니, 이 무슨 난데없는 소리일까. 아니, 그보다도 강준의 머리에 예리하게 박힌 건 다른 것이었다. 신연조에겐 역시 애인이 있구나, 하는. 짐작은, 사실이었다.
“계속 얘기해 봐.”
민정이 어느 한 곳을 바라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강준도 민정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팔걸이에 올려 둔 손에 지그시 힘이 들어갔다. 연조와 남자는 식사 중이었다. 그녀는 거의 먹지 않고, 남자의 포크와 나이프만 간간이 움직이는.
강준은 민정이 자신을 왜 이곳으로 끌고 왔는지 알 것 같았다. 좋아하는 남자를 염탐하려는 지질한 짓거리에 민정은 강준도 멋대로 동참시켰다. 달갑지 않은 마음으로 삼켰던 음식이 목구멍에 걸리는 느낌이 들었다.
“아빠랑 같이 점심 먹으려고 아빠 회사에 갔을 때 몇 번 마주친 적 있던 사이였어. 그땐 말 한 마디 나누지 못했지만 왜 그런지 신경 쓰이더라. 자꾸 생각나고. 그러다 한 달 전에 싱가포르로 워크숍 가서 다시 만났어. 마리나 베이 샌즈에 갔었는데 아빠 회사 직원들이 있더라. 무슨 공장 건설 문제로 중국에 왔다가 싱가포르까지 놀러 왔다고. 그 팀 프로젝트 리더, 나랑 안면 있는 사이거든.”
삼미 제과의 중국 공장 건설 문제로 구성된 프로젝트 팀이 칭다오로 장기간 출장을 갔다는 건 알고 있었다. 일을 마무리하고 어제 귀국한 팀은 오늘 휴무였고, 강준은 아직 그 팀과는 인사를 나누지 못했다.
“현지 업자들 휴가에 맞춰서 그 팀도 놀러 왔다고 했어. 그간 휴일도 없이 일했다고. 아빠 회사 사람들이고, 안면 있는 사람도 있고 해서 그 팀하고 자연스럽게 어울렸어. 그러다 우리 둘만 이야기도 나누고, 밥도 먹게 되고.”
그때를 떠올리는 민정의 눈빛이 아련해졌다. 매사에 도도한 민정이 그런 눈빛을 보이는 건 강준의 기억으론 처음이었다.
“그 사람과 함께한 건 단 사흘이었어. 그런데도 빠져들더라. 걷잡을 수 없이.”
강준의 시선이 연조 앞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로 향했다. 신뢰를 주는 순한 인상과 반듯한 자세, 서글서글한 이목구비를 지닌 잘생긴 남자였다. 민정을 아련하게 만들고, 연조를 차지한 그는.
“그 남자 이름이 뭐야.”
“서윤준.”
서윤준…….
“응, 윤준 씨” 하고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친근하게 부르던 이름.
그는 연조의 버디이자 애인이었다. 아마도 그녀의 모든 것들 중에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그런 존재. 강준은 목구멍까지 모래로 가득 낀 듯 갑갑해졌다.
“그 사람하고 나, 모든 게 다 잘 맞았어.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그렇게 정신없이 빨려들어가는 느낌, 난생처음이었고. 소울 메이트라는 거, 정말로 있는 거라고 믿게 되더라. 운명이란 건 정말 존재하는 거였어.”
“그렇게 잘 맞는데 신연조가 막아섰어? 두 사람을?”
묻는 음성이 매끄럽지 못했다. 무어라 정의할 수 없는 제 마음은 일단 제쳐 두고, 신연조는 도대체 어떤 남자와 사귀고 있는 것인지 답답해졌다. 애인이라 믿고 있는 남자가 그녀 아닌 다른 여자와 소울 메이트라 느낄 정도로 교감을 나눈 모양인데 아무것도 모르는 저 여자는 지금 저기에 앉아 무얼 하고 있단 말인가.
“결혼을 생각하고 있는 여자가 있다고 했어. 그래서 나를 받아 줄 수 없다고. 먼저 맺은 약속을, 자기는 깰 수 없대.”
강준은 손을 뻗어 물 잔을 잡았다. 잔을 잡은 손끝이 조금 떨려 왔다.
“너는 그 말을 납득할 수 없는 거고.”
“응. 납득이 안 돼. 그 남자 마음, 나한테도 뻔히 보이니까.”
“그래서 어쩌려는 건데.”
“뺏을 거야.”
“이런 식으로, 스토커처럼 염탐하면서 말이지.”
“나도 내가 엄청 지질하다는 거 알아! 하지만! 하지만…….”
매정히 뱉는 말에 항변하려던 민정은 말을 잇지 못했다. 민정의 눈으로 빠르게 눈물이 차올랐다. 강준은 민정이 시선을 붙박아 둔 곳으로 다시 눈길을 옮겼다. 두 눈이 번쩍 커졌다 가느스름하게 좁혀졌다. 뚜껑을 열어 둔 반지 케이스가 연조의 앞에 놓여 있었다.
“오늘이 두 사람 만난 지 1주년 기념일이라고, 이곳에서 정식으로 프러포즈할 거라고 했어. 그 남자 좀 잔인한 구석이 있어서 그런 말, 나한테 다 하더라. 자기 애인이 누구인지, 그 여자와 무얼 할 건지. 나한테 마음이 흔들린 건 인정하지만 거기까지만 하겠다고.”
“잤어?”
묻고 싶은 게 이토록 저급한 것뿐이라니, 절로 한숨이 나왔지만 알고 싶었다. 이 무슨 심술궂은 마음인지는 모르겠지만.
“자고 싶어. 자야겠어, 저 남자와.”
민정은 단호히 말하고서 두 손 안에 얼굴을 묻었다. 강준은 우는 민정을 바라만 볼 뿐 그녀를 달랠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난감하고, 불편하고, 답답했다. 연조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 무엇인지 규정짓기도 전에 한꺼번에 터진 이 일을 어찌 정리해야 하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나한테 이런 말하는 이유가 뭐야.”
강준은 고저 없는 음성으로 물었다. 조용히 들어올린 손으로 웨이터를 불러 물을 한 잔 더 받아 마셨지만 속은 조금도 시원해지지 않았다.
“그 여자 상사니까. 오빠가 괜찮은 여자라고 말해 주면 포기가 될까 싶어서. 오빠, 사람 잘 보잖아.”
“괜찮은 여자야.”
“포기 안 돼. 못하겠어.”
곧장 바뀐 말이 놀랍지도, 우습지도 않았다. 실행 못할 허세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다만, 궁금했다.
“단 사흘로도 결정되는 거야? 그런 마음?”
소울 메이트니, 운명이니 하는 것들이 그토록 간단하게 결정되는 것인지. 그토록 쉽게 알아볼 수 있는 것인지.
“처음 보는 순간 알아봤어. 그 이상의 시간은, 필요하지 않았어.”
민정의 대답엔 망설임이 없었다. 강준은 그녀에게서 처음 보는 모습에 미간을 좁혔다.
강준이 알고 있는 민정은 어려서부터 자존심이 강한 아이였다. 가지고 싶은 건 가졌지만 비열하게 빼앗는 짓 같은 건 결코 하지 않았다. 그녀는 유명 의류 회사의 디자인 실장을 맡을 정도로 실력 있고, 자기 일을 사랑하며, 누구 앞에서나 당당했다. 화려하고 세련된 삶을 즐기며, 일에 몰두하고, 사랑은 취미삼고. 그것이 민정에게 어울리고, 실제로 그리 살아온 여자였다. 사랑에 올인 할 감성 같은 건 민정에게 없었다. 없다고 생각했다.
그랬던 여자가 목숨처럼 지키던 자존심을 내팽개치고 갖고 싶은 남자가 제가 아닌 여자에게 반지를 건네는 현장을 염탐하러 오다니…….
“자학하는 취미가 있나 봐.”
강준은 다시 물 컵으로 손을 뻗으며 나직이 힐난했다. 자기 운명인 것 같은 남자가 자기 아닌 다른 여자에게 영원히 함께하자 약속하는 장면을 왜 지켜보려고 하는 걸까.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고, 받을 수 있는 건 상처뿐인데.
민정이 하도 한심해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했지만, 모르겠다. 한심한 게 민정인지, 자신인지. 사실은…….
마음이 경솔하게 들떠 있었다. 신연조가 애인 있는 여자인 줄도 모르고.
“봐도 미칠 것 같았지만…… 안 보면 더 미칠 것 같았어.”
제 딴에는 덜 미치는 쪽으로 선택했나 보지만 문제는 강준도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든다는 것. 동생 같은 아이와 밥 먹으러 왔다가 괜한 봉변을 당한 기분이다. 왜 하필 점심 먹는 중에 그녀가 프러포즈 받는 장면을 봐야만 하는 걸까. 보고 싶지 않은 장면에 자꾸만 눈이 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강준은 무거운 한숨이 차오른 가슴을 천천히 오르내렸다. 케이스 안의 반지가 어느새 그녀의 손가락 위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신연조 씨.”
레스토랑 출입구를 나서자마자 등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연조는 심장이 쥐똥만큼 오그라드는 느낌이었다.
“팀장님…….”
강준은 세련되게 차려입은 여자와 함께였다.
애인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여자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강준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연조는 정체가 무엇인지 모를 불편한 감정을 느끼며 상냥한 미소를 꾸며 냈다.
“점심 드시러 오셨나 봐요.”
“신연조 씨도?”
“네. 점심 먹으러 왔습니다. 아, 윤준 씨, 이번에 새로 오신 프로젝트 리더 유강준 팀장님이세요. 팀장님, 우리 회사 컨설턴트 서윤준 씨입니다. 이번 삼미 제과 중국 프로젝트 담당했던 팀원이라 아직 인사 못하셨을 거예요.”
“유강준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서윤준입니다.”
연조의 소개가 끝나자 두 남자는 악수를 나눴다. 둘의 표정은 모두, 그다지 좋지 않았다. 강준의 팔을 붙잡고 선 여자의 표정도 밝지 않았다. 원래 그런 것인지, 아니면 울었던 것인지 여자의 눈 주변이 붉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어색한 분위기에 연조는 덩달아 미간이 좁혀졌다.
“이쪽은 고민정 씨. 대표님 따님입니다.”
강준이 곁에 선 여자를 소개했다. 재현에게 무남독녀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 연조는 예의바른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아, 그러시구나. 안녕하세요. 신연조라고 합니다.”
“네.”
여자는 도도하고 경계 어린 표정을 지을 뿐 연조의 손을 맞잡지 않았다. 멋쩍었지만 말없이 손을 물렸다.
여러모로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대표님 딸의 태도도, 윤준과 함께 있는 걸 회사 사람이 본 것도, 그 사람이 강준인 것도. 회사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거리라 이곳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회사로 들어갈 거면 같이 가죠.”
또다시 침묵이 감도는 사이를 강준이 갈랐다. 이 상황이 당혹스럽다 보니 윤준과 민정이 서로 인사하지 않았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연조는 강준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의견을 묻듯 윤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윤준은 웃음기 없는 눈으로 눈앞의 남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윤준 씨는 회사로 들어갈 일 없을 거고. 그 팀, 내일부터 출근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고민정, 데려다 줄까?”
“아니, 됐어.”
“그럼 우리 먼저 가죠.”
작별 인사는 짧고, 건조했다. 이토록 성의 없는 물음과 답변이라니. 두 사람, 연인 사이가 아닌 걸까.
“윤준 씨?”
이유를 알 수 없게 굳어 있는 윤준을 연조가 가만히 불렀다.
“그래, 연조야. 먼저 들어가. 전화할게.”
윤준은 희미하게 웃으며 연조의 손을 꼭 쥐었다 놓았다. 강준이 앞에 있어 당혹스러웠지만 자신과 윤준이 어떤 사이인지 그가 모를 리는 없을 것 같아 가만히 있었다.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따로 만나 식사하는 사이가 동료뿐일 리는 없으니까.
“그럼 가 볼게. 조심히 들어가. 안녕히 가세요.”
연조도 윤준에게 옅게 웃어 주고는 민정을 향해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마지못해 받아 주는 듯 그녀의 고개가 까딱, 움직였다. 민정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묘한 적대감에 공연한 민망함을 느끼며 연조는 차 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는 강준에게로 다가갔다.
“들어가, 연조야. 들어가십시오, 팀장님.”
차 문을 열어 준 건 강준이었지만 차 문을 닫아 준 건 어느새 다가온 윤준이었다. 윤준의 등 뒤에서 민정은 뻣뻣하게 서 있었다.
“응. 잘 가, 윤준 씨.”
연조는 가볍게 손을 흔들고 안전벨트를 맸다. 다소 급하게 출발하는 차 안에서 멀어지는 윤준을 바라보았다. 백미러에 비치는 윤준의 모습이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그는 연조를 싣고 떠나는 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서.
연조를 태운 SUV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윤준은 기분이 묘했다. 연조를 깊이 있는 눈길로 바라보고 챙기던 남자가 마음속에 커다란 혼란을 던져 준 여자를 남기고 사라졌다. 떠난 남자는 신경을 날카롭게 건드려 놓았고, 등 뒤에 서 있는 여자는 모든 신경을 옥죄며 압박해 왔다. 눈앞에 두고 보고 있지 않는데도 그녀에 대한 느낌은 윤곽을 오려 낸 듯 명료했다.
“이게 무슨 소용이죠.”
윤준이 곁으로 다가온 민정에게 말했다. 방금 전 나온 레스토랑에서 그녀가 무엇을 보았을지, 윤준의 머릿속에서 선연하게 그려졌다.
싱가포르의 호텔 면세점에서 고심해 고른 반지를 결혼해도 괜찮을 것 같은 여자에게 주었다. 정교하게 세공된 3캐럿 메인 다이아몬드가 박힌 심플한 링에 멜리 다이아몬드가 촘촘히 박힌 가드링을 겹친 아름다운 반지였다. 반지를 고르는 데 아낌없는 조언을 주었던 그녀는 자기도 아찔한 사랑에 사로잡혀 결혼의 전당에 입성하고 싶다고 말했었다.
아찔한, 사랑…….
윤준은 가슴을 부풀어 올려 숨 쉬며 눈을 감았다.
조심스럽게 가꿔 온 지난 1년간의 사랑을 송두리째 위협하는 사흘간의 만남. 그런 것도 사랑일 수 있을까. 성실했던 그간의 사랑에 상처를 줄 게 뻔한 이것이.
민정과 회사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도 사실 신경은 쓰였었다. 화려하고 예쁜 사람이니까. 하지만 이건…….
“소용 있을지 없을지는 아직 모르는 거죠.”
입술을 깨물고서, 그녀가 말했다. 문득 몰려오는 피로감에 윤준은 이마를 짚었다. 곁에 서 있는 여자가 무시하면 그만일 존재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그녀는 간단히 무시되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녀를 볼 수 없었던 지난 시간조차 그녀에게 사로잡혀 있었으니. 아름답고 도발적인 여자에게 솟는 남자의 본능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강렬했다.
“왜 이렇게 자신만만합니까.”
뜻대로 되지 않는 감정에 다소 차게 말했다. 정해 놓은 원칙에서 어긋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융통성이 없는 성격은 아니지만 이건 융통성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지금까지 문제없었던 사이를 뒤흔드는 원인이 다른 여자인 것은 윤준 스스로가 납득이 안 됐다.
“설마요. 떨려서 죽을 것 같은데.”
떨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목소리가 귓전에 닿았다. 윤준은 체념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가느다란 손가락을 꽉 말아 쥐고서 정면만 보고 있었다.
“하지만 서윤준 씨가 움직이려고 하지 않으니 내가 움직일 수밖에 없잖아요. 그것 말고는 서윤준을 다시 볼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걸 어떻게 해.”
끝내 눈물을 보이고 마는 그녀를 바라보며 윤준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어떻게 해 주길 바랍니까.”
“안아 줘요.”
명료한 요구. 차오르는 눈물을 뱉지 않으려는 고집스러운 눈동자.
윤준은 민정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그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그녀답지 않게 애처로웠다. 손을 뻗어 그녀의 팔을 잡곤 그대로 당겨 안았다. 그의 품에서 민정은 소리 내어 울었다. 긴 한숨을 뱉으며, 윤준은 눈을 감았다.
“남자친구입니까?”
무겁고 나직한 물음에 연조의 심장이 뜨끔거리며 빠르게 뛰었다.
“네…….”
비밀로 유지해 오던 관계를 뜻하지 않게 밝혀야 하는 상황의 민망함 때문일까. 그에게 잘못을 들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연조는 붉어진 볼을 쓸어내리며 차창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회사 사람들은 모르는 사이인 거고.”
“네. 아직은…….”
지나온 잘못을 고해하듯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왜 그런 기분이 드는 것일까. 잘못한 것이 없는데. 업무를 방해받고 싶지 않아 말하지 않았을 뿐인데.
문득 억울한 기분이 든 연조는 고개를 들고 어깨를 폈다. 강준이 상사의 입장에서 사내 연애의 못마땅함을 이야기해 온다면 반박해 줄 말도 속으로 하나하나 짚어 보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런데 그가 뜻밖의 말을 해 왔다.
“선지 먹을 줄 압니까?”
“네?”
“오늘 점심, 정말 별로였거든.”
“…….”
“신연조 씨도 별로였던 것 같던데.”
또다시 가슴이 뜨끔거렸다. 그는 아마도 좀처럼 음식을 삼키지 못하던 자신을 보았나 보다.
“네, 별로였습니다.”
겸연쩍게 대답하고서 몇 미터 앞 선지해장국집의 낡은 간판을 바라보았다. 차는 금세 해장국집 주차장으로 진입했고, 곧 멈춰 섰다.
“선지 먹을 줄 모르면 다른 데로 가고.”
“아니요, 좋아합니다. 그런데…….”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너무 가까운 곳에 있다. 이토록 가까운 거리, 좁은 공간에서 그와 단둘이 있는 건 처음이었다. 불현듯 깨달은 사실에 연조는 조금씩 더워지는 느낌이었다.
“점심시간 거의 끝나 갑니다, 팀장님.”
마른침을 삼키며 말하자 그가 피식 웃었다.
“팀장 끗발이 어떤 건지 이번 기회에 체험해 봐요.”
안전벨트를 푼 강준이 차 밖으로 나갔다. 연조도 차에서 나왔지만 자신은 없었다. 그를 눈앞에 두고 해장국을 먹을 수 있을지. 오늘 아침부터 내내 간절했던 거였지만 말이다.
앞서서 식당 안으로 들어가는 강준을 따르며 연조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왜 자꾸만 긴장이 되는 걸까. 넓고 단단한 어깨가 두 눈에 박힐 듯 들어왔다.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지만 심장은 여전히 제멋대로 뛰었다.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책임지는 팀장의 끗발이란 이런 것이었다. 회사에서 정한 점심시간 외의 시간에 부하 직원에게 해장국 한 그릇을 사 주는, 고작 그런 것.
하얀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선지해장국을 그녀는 내숭도 없이 잘 먹었다. 한껏 불편한 표정으로 따라와 놓곤 그깟 해장국 한 그릇에 그녀는 두 눈을 예쁘게도 반짝였다.
“맛있습니까?”
“네. 맛있습니다. 팀장님은 안 드십니까?”
“먹습니다.”
강준은 뜨거운 해장국을 뜨며 뚝배기 안에 푸짐하게 밥을 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버릇 같은 한숨이 또다시 새어 나왔다. 목적지가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 우뚝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이 되바라진 세상에 허리를 반듯하게 세운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고 해장국을 맛있게 먹고 있다. 도대체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까. 신연조에겐 결혼을 생각하고 있는 애인이 있고, 그녀의 애인을 뒤흔드는 여자가 있다. 그리고 신연조에게 흔들리는 자신이 있다. 그녀의 남자친구에게서 그녀를 떼어 내듯 데리고 와 버린.
그런데 그녀는 이 모든 것을 하나도 모르고 있다. 아직은, 단 하나도…….
강준은 쓰린 속으로 해장국 한 술을 욱여넣었다. 그런다고 복잡한 속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건만. 그러나 눈앞의 그녀는 남의 속도 모르고 이 뜨거운 걸 잘만 먹는다.
이 모든 게 내일 아침까지 까맣게 잊힐 이야기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럴 리 없다는 걸 알기에 목 안이 답답하고 가슴이 뛰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녀에게 남자친구가 있는 줄도 모르고 로맨스의 포근하고 달콤한 부분을 상상해 봤었다. 이제 막 연애에 진입한 머저리처럼.
“신연조 씨.”
“네, 팀장님.”
“반지를…… 안 꼈군요.”
“네?”
“아닙니다. 먹죠, 맛있게.”
저능하게 말하고서, 그녀의 손가락에서 시선을 거뒀다.
아무래도 사고가 난 것만 같다. 누군가를 좋아하기 시작했다는. 그것도 이미 애인이 있는 여자를.
그녀가 준 숙취 해소 음료를 마시고도 견뎌질 것 같지 않은 기분. 브레이크 없이 내닫는 감정.
강준의 마음이, 부대낀다.
밤 10시가 넘은 시간, 연조는 만근의 다리를 끌고서 귀가했다. 데이트가 있는 화영이 아직 돌아오지 않은 집은 적막했다. 연조는 핸드백을 아일랜드 식탁 위에 올려놓고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꺼냈다. 서서 물 한 잔 마실 기운도 없어 스툴에 앉아 컵에 물을 따르는데, 지퍼를 채우지 않아 벌어진 핸드백 안에서 벨벳 반지 케이스가 눈에 띄었다.
“싱가포르에서 산 거야. 1주년 기념일에 주는 게 의미 있을 것 같아서. ……반지, 받아 줄래?”
프러포즈는 극적이지도, 달콤하지도 않았다. 결혼 이야기가 나왔으니 건네는 것 같은 의무감이 스민 반지는 실제 무게와 상관없이 무거웠다. 받기엔 부담스럽지만 거절할 명분이 없는 반지는 손가락에 맞나 보기 위해 한 번 끼워졌을 뿐이었다.
“참…… 재미없다.”
나직이 속삭이곤 아일랜드 식탁 위에 엎드렸다. 엎드린 채 핸드백에서 반지 케이스를 꺼내 뚜껑을 열어 보았다. 할로겐 조명 빛을 받은 반지는 더욱 화려하게 빛났다. 화영은 모조 보석이 박힌 실반지를 받고도 온 얼굴이 박꽃처럼 환했었다. 진정한 보석은 반지에 있지 않고 화영의 내면에 있는 듯. 반지의 굵기와 보석의 종류가 행복의 필요충분조건은 아닌지 연조는 값비싼 반지를 받고도 덤덤했다.
우리의 문제가 무엇일까…….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회사에 막 입사했을 때, 윤준은 연조의 버디로 지정되어 다정하고 친절한 태도로 업무에 능숙하지 못한 연조를 도와줬었다. 그때는 그게 고마웠고, 설렜었다.
“그거 알아요? 서윤준, 신연조. 우리 이름, 초성이 같다는 거.”
그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었다. 우리 한번 정식으로 만나 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조심스러운 제안에 연조는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이름의 초성이 같다는 이유만으로도 시작될 수 있었던 연애는 평화로웠다.
아무런 문제 없이 평온한 사이도 문제가 되는 걸까…….
깊은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화영과 그녀의 남자친구는 별것 아닌 일로도 다투고 토라지곤 했다. 전화를 받지 않아서, 문자 메시지에 하트 부호가 빠져서, 하루 종일 칼국수가 먹고 싶었단 말을 기억해 주지 못해서, 선물해 준 티셔츠를 입고 나오지 않아서 삐치고, 울고, 결국엔 뜨겁게 화해했다. 도대체 그게 뭐라고 저리도 섭섭해하나 이해 못해 고개를 젓다가도 집 앞이라는 남자친구의 전화에 입술을 삐죽이며 웃는 화영을 보고 연조도 따라 웃곤 했다. 뜨겁게 사랑받는 화영은 늘 환하고 싱그러웠다. 대책 없는 사랑은 유치하지만 풋풋하고 귀여웠다. 하지만 윤준과 자신은…….
문제는, 열정이 없어서겠지…….
어렵지 않게 찾아낸, 실은 알고 있던 그들 사이의 문제. 연조는 반지 케이스를 덮어 다시 핸드백 안에 던져 넣고 엎드렸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울고, 불고, 싸우는 연애의 지리멸렬함이 싫어 조심성을 유지해 온 사이의 폐단은 이런 것이었다. 더 이상 설레지가 않는다는.
하지만 그게 뭐 어떻다고. 처음부터 미지근했던 사이, 시간이 흘러도 전 같지 않다며 실망할 일은 없겠지. 실망이 독처럼 퍼져 통증이 몸 안에서 꿈틀대는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을 테지.
반항하듯 마음을 다잡은 연조는 방울 달린 끈으로 머리를 묶고 냉장고를 열어 딸기를 꺼내 흐르는 물에 씻었다. 싱크대 앞에 선 채로 멍든 딸기부터 몇 개 집어 먹고 방으로 가 갈아입을 옷을 꺼냈다. 핸드백을 뒤져 반지 케이스를 꺼내 화장대 서랍 안에 넣기 전, 해장국집에서 나직이 말하던 강준의 음성이 문득 떠올랐다.
“반지를…… 안 꼈군요.”
그는 연조를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바라보고선 묵묵히 해장국을 먹었다. 밥 한 톨, 국물 한 숟갈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비워진 뚝배기 두 그릇을 앞에 두고 강준과 연조는 서로의 시선을 피해 쿡 웃어 버렸다. 그 후 두 사람은 말없이 회사로 향했고, 정신없는 업무에 들어갔다. 그는 빈틈없는 일솜씨로 맡은 일들을 척척 해냈다. 드라이한 보고서를 수십, 수백 번씩 작성하고, 읽고, 고치는 일이 꽤 고단할 텐데도 내색 한 번 내지 않았다.
그러다 퇴근하기 전, 문득 팀장실로 시선을 던진 연조는 그늘진 눈으로 그에게서 시선을 멈춰 버렸다. 바쁘게 자판을 두드리던 그가 일순 큰 한숨을 내쉬더니 한 손으로 눈두덩을 꾹 누르며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크고 역동적인 프로젝트도, 섬세하고 분석적인 작업도 다 잘할 것 같은 사람이지만 그도 역시 무리해서 일하고 있었다.
가슴을 크게 부풀려 한숨을 내쉬고 눈두덩에서 손을 치운 그는 고개를 돌려 연조를 바라보았다. 다른 곳으로 헤매지 않고 정확히 자신에게 꽂힌 시선에 연조는 마음 한구석이 돌연 뜨거워졌다. 그녀가 자신을 보고 있는지 몰랐다는 듯 그도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마주친 시선을 비키지 않았다. 난데없는 눈겨룸이 당혹스러웠던 연조는 서둘러 묵례하고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등에 닿는 시선을 느꼈지만 뒤돌아보지 않고서.
퇴근하기 전 마주쳤던 강준의 눈빛을 떠올리던 연조는 해선 안 되는 생각을 털어 내듯 고개를 내젓고 반지 케이스를 서랍 안에 넣었다. 잠옷과 속옷을 챙겨 욕실로 걸음을 옮기며 해야 할 일을 머릿속에서 정리했다.
오늘 밤은 뜨거운 물에 오래오래 샤워하고 차분한 글을 읽으며 마음을 정돈하기로 했다. 책을 읽다 몰려오는 졸음에 오늘 하루도 무사히 마감했다는 안도감을 느끼며 깊은 잠 속으로 빠지고 싶다. 꿈도 꾸지 않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