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로의 당신-1화 (1/13)

프롤로그. 더치커피

말끔한 슈트 차림, 고급스러운 브리프 케이스, 훤칠한 키와 날카로워 보이는 이목구비, 벌어진 어깨, 당당한 걸음걸이.

그가 더치커피를 주문했을 때, 연조는 검은색 치마에 손바닥을 문질러 닦았다. 다행히도 그는 연조가 커버할 수 있는 범위 내의 것을 요구해 왔다. 냉장고에 보관해 둔 더치커피 원액에 일정량의 생수와 얼음을 섞으면 되는 음료 정도야 그녀도 만들 수 있는 범주였다.

“주문하신 커피 나왔습니다, 손님.”

연조는 플라스틱 잔을 쟁반 위에 올리면서 제법 이곳의 직원답다고 스스로를 다독이곤 살며시 웃었다. 화영이 고용한 바리스타가 오전에 병원 검진을 예약해 두어 부득이 오후에 출근하기로 한 날이었다. 그 바람에 바쁜 점심시간 내내 혼자 동동거리다가 화장실도 가지 못한 화영을 대신해 연조가 카운터를 보고 있었다. 화영의 커피숍과 같은 건물에 연조의 직장이 있는데다, 손님이 떠난 테이블을 정리하는 것 말곤 할 일이 거의 없는 시간인지라 가벼운 마음으로 화영이 잠시 비운 자리를 지켰다. 공짜 커피를 얻어 마신 보답도 할 겸.

“스트로와 시럽은 뒤편 콘솔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컵 뚜껑도요.”

시럽을 넣기 위해 손님이 다시 뚜껑을 열고 닫아야 하는 번거로움을 덜어 주고자 연조는 테이크아웃 잔에 뚜껑을 덮지 않은 채 쟁반 위에 올렸다. 컵 표면에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연조는 자신의 팔뚝에 자디잔 소름이 돋은 이유가 차가워 보이는 커피 때문인지, 처음 보는 남자의 눈빛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고맙습니다.”

연조를 조금 오랫동안 바라본다 싶던 남자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때, 남자의 손에 들려 있던 휴대전화에서 문자 메시지 수신을 알리는 신호 음이 짧게 울렸다. 그의 손끝이 컵에 닿은 것과 그의 시선이 휴대전화로 내려간 것은 거의 동시였고, 컵이 엎어진 것은 1초 후의 일이었다.

“어머나!”

“이런!”

범람한 커피가 연조의 가슴께를 덮쳤다. 얼음과 커피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쳐 마찰되는 소리에 뒷골이 선뜻했다. 그런 중에도 연조는 커피를 뒤집어쓴 게 그가 아니라 자기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커피를 엎은 게 자신이었고 그걸 남자가 뒤집어썼더라면……. 연조의 어깨가 절로 떨려 왔다.

“미안, 합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표정만 보면 커피 세례를 받은 건 연조가 아니라 그인 것 같았다.

“아, 네……. 괜찮습니다.”

연조는 빠르게 마른 행주를 집었다. 가슴골을 타고 배꼽까지 흘러내려가는 물줄기가 솜털까지 바짝 서도록 차가웠다.

“변상하겠습니다.”

건조한 음성에, 연조는 젖은 앞섶을 닦다 말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가 머니 클립에서 여러 장의 지폐를 뽑아 건넸지만 연조는 손을 숨기며 받지 않았다. 영문을 알 수 없는 건 아니었다. 그의 행동이 기분 나쁜 것도. 다만 이 돈은 과하다는 생각뿐이었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3만 원에 구입한 겁니다.”

연조는 어깨를 가볍게 올렸다 내리며 말했다. 더 이상 손써 볼 수 없는 블라우스를 몇 번 더 행주로 문질러 보고는 낮은 한숨을 내쉬고 이내 평온해진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대신 생과자를 사 주시겠습니까, 손님?”

그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럴 만한 남자의 표정에 짧게 웃어 보인 연조는 손목에 감긴 시계를 흘긋 쳐다보았다. 점심시간이 거의 끝나 가고 있었다.

“그 돈은 너무 과합니다. 갈아입을 옷도 구할 수 있고요. 그러니 변상하는 셈 치고 생과자 좀 팔아 주세요. 여기 생과자, 제 친구가 직접 만들어 파는 건데 매출이 별로 좋지 않네요. 그것 때문에 의기소침해 있는데 많이 팔린 걸 알면 무척 좋아할 겁니다.”

그의 표정이 희한해졌다. 연조에게 커피를 쏟아 버린 자신의 실수보다 연조의 반응이 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그거면 변상이 되겠습니까?”

“네, 충분히 됩니다.”

“그럼, 그렇게 하죠.”

담백하게 말했지만 담백하지만은 않은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어쩐지 거북했다. 상대를 불편하게 만들려는 의도가 담긴 시선은 아닌 것 같았지만 연조는 그랬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연조는 선물 포장용 상자에 생과자를 종류별로 담고는 카페 로고가 찍힌 종이 가방에 과자 상자를 넣어 그에게 건넸다. 여전히 그 자리에 뻣뻣하게 서 있는 남자의 손에서 만 원권 두 장을 살며시 빼내곤 더치커피 한 잔을 빠르게 만들어 내놓았다. 이번엔 뚜껑을 꼭 닫은 채였다.

“잔돈이 남아서 커피 한 잔 더 만들었습니다. 잔돈, 안 받으실 것 같아서요.”

연조는 싱긋 웃어 보이며 말했다. 연조를 바라보며 잠시 멍하게 있던 그가 피식 웃었다. 굳어 있던 입매와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지는 모습이 근사했다.

“다음에, 뵙죠.”

느리고 분명한 어조로 말한 그는 커피와 종이 가방을 들었다. 건물 안쪽으로 난 유리문을 밀고 나가기 전, 그는 연조를 향해 고개를 돌려 또다시 웃어 보였다. 예상치 못한 그의 미소에 연조는 어쩐지 어지러워지는 느낌이었다. 웃을 줄 아는 남자라니, 더구나 “다음에, 뵙죠”라니.

잘생겼잖아. 자신감도 넘쳐 보이고…….

연조는 잠시간 가슴이 설렌 이유를 간단히 정리했다. 드라마나 영화 속 멋진 배우를 향해 가슴이 뛰는 건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다. 현실에서도 다를 바 없을 테고.

“어머, 너 꼴이 왜 그래?”

열렸다 닫혔던 문이 다시 열렸다 닫히며 화영이 등장했다. 조금만 더 일찍 왔다면 좋았으련만. 씁쓸히 웃어 보인 연조는 어깨를 으쓱이며 심상하게 말했다.

“손님이 실수로 커피를 쏟았어. 블라우스 좀 빌리자. 넌 바리스타 셔츠 차림으로 퇴근해도 되잖아. 혹시 오늘 데이트 있어? 그럼 나 퇴근하기 전에 아무거나 하나 사 입고 돌려줄게.”

“오늘은 데이트 없으니까 그냥 입고 가. 그나저나, 변상은 못 받은 거야? 너 이 꼴로 만든 인간은 내뺀 거니?”

“대신 생과자 사 줬어, 그 손님이.”

“어머, 그래?”

빠르게 광분했던 화영의 얼굴에 금세 화색이 돋았다. 화영은 주방 뒤편 라커룸까지 연조를 따라와 옷걸이에 걸어 둔 실크 블라우스를 건네주며 희희낙락 말을 이었다.

“그래도 네 블라우스를 변상하라고 했어야지. 그런데 손님이 내 생과자 먹어 봤어? 맛있대? 어머, 너 브래지어도 난리 났다. 이걸 어째? 내 걸 벗어 줄 수도 없고.”

“별로 비싼 것도 아닌데 변상하겠다고 돈을 너무 많이 내밀어서 생과자로 대신하자고 했어. 너한테 매번 공짜 커피 얻어 마시는데, 그 손님 덕분에 조금 보답했네. 그 손님, 생과자 맛은 안 봤고. 브래지어는 어쩔 수 없지, 뭐.”

연조는 화영이 한꺼번에 뱉어 낸 질문에 하나하나 대답하며 마른 수건으로 브래지어 위를 꾹꾹 눌렀다. 브래지어의 물기를 어느 정도 제거한 후 옷을 갈아입고 라커룸을 나섰다. 지갑을 두고 갈 뻔한 걸 화영이 챙겨 주어 마젠타색 장지갑과 커피에 젖은 블라우스를 손에 들고 엘리베이터를 향해 총총히 걸었다. 운 좋게도 엘리베이터는 1층에 머물러 있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10층 표시 버튼을 누르자 연두색 불이 들어왔다. 엘리베이터가 목적한 층에 도달하길 기다리는 동안 연조는 문득 웃음이 나왔다.

이유 모를 긴장과 설렘, 뜻하지 않은 봉변과 당혹, 그럼에도 순발력 있게 일을 처리한 데에 대한 만족감.

긴 호흡으로 느껴야 했을 감정들을 짧은 시간 동안 한꺼번에 겪다니, 방금 전 일이 꿈인 것만 같았다. 그리 상냥해 뵈지 않는 남자의 친절하지 않은 태도에 기분이 나쁘려면 나쁠 수도 있지만 딱히 그런 기분이 들지 않는 건 그 상황을 자기 나름대로 현명하게 대처했다는 뿌듯함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일 따위에 쉽게 감정을 폭발하지 않는 쿨한 여자처럼.

연조는 두 번 볼 일 없는 남자에게 그 정도면 괜찮은 대응이었다고 만족하며 ‘월드 컨설팅’의 유리문을 가볍게 밀었다.

“E&B 건 진행할 팀원은 이미 짜 두었네. 팀원 짜는 것부터 자네가 하면 좋겠지만 직원들 성향을 직접 파악하기엔 시간이 걸릴 테니 말일세. 자네와 손발이 잘 맞을 구성원만 팀으로 보내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실망시켜 드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자네가 실망을 줄 리가. 우리 월드에 들어와 줘서 자네한테 절을 해도 모자랄 판인데. 우리 회사가 이번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모두 자네 덕 아닌가. BCG(보스턴 컨설팅 그룹)에서 자네 안 놓으려고 무진 애썼을 텐데 우리 월드로 와 줘서 정말 고맙네.”

“과찬이십니다. 저야말로 대표님께서 용기를 주셔서 월드로 올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한국에서 실업자 신세도 면했는걸요.”

“실업자라니, 자네가? 주변에서 자네를 가만두지 않았을 텐데 무슨 농담을 그리도 재미없게 하나. 자네가 컨설팅 부티크(consulting boutique: 세분화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특정 영역에서 심도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컨설팅 업체)라도 창업하면 어쩌나 싶어 항상 마음 졸이고 있었는데. 상대하기 어려운 라이벌은 키우고 싶지 않으니 말일세.”

월드 컨설팅 대표 고재현이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으며 하는 엄살에 강준은 옅은 미소를 보였다. 돌아가신 부친의 대학 동창으로 부친뿐 아니라 모친과도 막역하게 지내 온 재현은 오래전부터 강준과 함께 일하길 원했었다. 더구나 이번 일에 강준만 한 적임자가 없다며, 재현은 그의 영입에 꽤 공을 들였다. 2년 전 보스턴 컨설팅 그룹과의 협업으로, 당시 보스턴 컨설팅 그룹의 일원이었던 강준이 E&B PC의 미국 진출을 성공적으로 이끈 전적이 있었다. 게다가 비핵심 사업 부분을 매각하여 기업 내실을 공고히 다지려는 이번 일을 E&B PC는 강준이 맡아 주길 원했다. E&B PC의 기업 특성을 완벽히 이해한 강준의 지난 활약상이 클라이언트에겐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각인된 듯했다.

“차 준비됐습니다.”

“고마워요, 지우 씨. 차 들게.”

때마침 재현의 비서가 들어와 강준 앞에 티 포트와 찻잔을 내려놓았다.

“고맙습니다.”

“별말씀을요.”

인사와 응답이 오간 후, 재현의 비서가 손톱 끝을 단정하게 다듬은 하얀 손으로 김 오르는 홍차를 크림빛 도기에 따랐다. 강준은 미소의 기운이 묻은 눈길로 재현의 비서에게 한 번 더 감사 인사를 건넸다.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방금 따라 낸 홍차만큼이나 고운 다홍빛 뺨이 되어선 수줍게 웃었다.

“내가 더치커피를 좋아하는 것도 알고 있고 말이지. 고맙네, 잘 마시겠네.”

재현이 플라스틱 컵을 가볍게 흔들어 보이며 웃었다. 정식 출근 전에 회사를 찾아와 사무실 동선과 분위기를 미리 파악하려는 강준의 준비성에 그는 몹시 흡족했다. 과하지 않은 작은 배려 또한 마음에 들었다. 월드 컨설팅의 차기 대표로 강준만 한 인재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다시금 들었다.

“어머니가 알려 주셨습니다. 대표님께서 더치커피를 좋아하신다고. 이것도 함께 드시죠.”

더치커피를 사 온 것만으로도 내심 놀랐는데 쇼핑백에서 꺼낸 종이 상자에 재현의 입이 함박같이 벌어졌다. 커피와 과자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이런 걸 강준이 챙겼다는 사실이 재현으로선 꽤나 흥미로웠다.

“자네한테 이런 면이 다 있었나?”

“어떤 면, 말씀입니까?”

“과자 같은 걸 사 오고 말이지. 냉철하게 일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자상한 면이 다 있군그래. 고맙네. 아주 맛있겠어.”

개별 포장된 생과자를 하나 까 입 안에 넣는 재현의 표정이 익살스러웠다. 강준은 과자를 구입하게 된 사유를 굳이 밝히고 싶지 않아 아무 말 없이 입술로 찻잔을 옮겼다. 문득, 자기 때문에 난데없는 봉변을 당했던 그녀는 지금 무얼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갈아입을 옷은 구했을지, 망친 옷은 세탁소에 맡겼을지, 뭐 그딴 재수 없는 인간이 다 있느냐며 자기를 욕하고 있진 않을지.

커피를 만들고 과자를 포장하는 정도의 잠시 동안을 함께했던 여자를 생각하다 강준의 입술에 설핏 미소가 그려졌다.

웃는 눈매가 매력적인 여자였다. 단정한 이목구비와 예쁜 미소가 가슴을 살며시 건드릴 정도로. 그렇다고 그간 못 만났던 운명을 드디어 만난 것만 같은 느낌을 받은 건 아니었다. 예쁘장한 여자에게 품평의 시선을 던진 건 강준도 남자라는 동물이기에 자연스럽게 한 행동일 뿐이다. 다소 당혹스러운 마음이 들었던 건 봉변을 당하고도 태연하게만 보였던 그녀의 태도 때문이었다. 정말 태연했던 것인지, 그 속은 알 수 없었지만.

그리고 또 하나, 먼저 잘못을 저지르고도 그녀 앞에서 뻣뻣했던 자신의 태도가 강준도 의아했다. 고개 숙이며 사과해도 모자랄 판에 뭘 잘했다고 그리했을까. 정중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무례하게 보일 정도로 딱딱하게 굴다니 말이다. 그 순간 자기도 모르게 굳어 버린 원인을 굳이 찾자면…….

강준은 찻잔에서 입술을 떼어 내며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젖은 옷감이 살갗에 달라붙어 여자의 가슴골이 좀 비쳐 보였다고 뇌가 마비되어 버릴 줄은 몰랐다. 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는지 기억을 헤집어 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스스로가 어이없는 강준은 쓰게 웃었다. 어찌 되었든, 다음에 보자고 자기 입으로 뱉은 말은 지킬 의무가 있는 거겠지.

그와 함께 일하게 되어 기쁘고 벅찬 심정을 거듭 표현하는 재현에게 적절히 반응하며, 강준은 생각했다. 그 여자를 언제 다시 보러 가면 좋을지. 회사에서 나가자마자 그곳부터 들를지. 아니, 그건 너무 속 보이는 것 같으니 며칠의 말미를 두었다 찾아가 볼지.

그녀에게 커피를 엎지른 순간 잠시 방심했던 강준의 마음으로 오랜만에 보드라운 바람이 불었다.

그 여자를 언제 다시 보러 가면 좋을지 고민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지금 강준의 눈앞에 그녀가 서 있었다. 앞으로 강준이 일하게 될 사무실로 가는 길목에서 마주친 그녀는 푸른색 실크 블라우스를 입고 있는 말끔한 모습이었다.

“연조 씨, 점심 맛있게 먹었나?”

그녀를 아주 잘 알고 있는 듯, 재현이 동그란 얼굴에 방긋한 웃음을 걸었다.

“네, 대표님. 점심 맛있게 드셨습니까?”

강준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던 그녀가 재빨리 재현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덕분에 아주 맛있게 먹었네.”

짙은 화장을 하지 않았기에, 단정하게 잘라 놓은 단발이었기에, 전체적으로 마른 몸이기에 눈에 확 띌 것이 없는 여자였다. 뜻하지 않게 다시 만난 그녀를 향해 강준의 심장이 크게 뛰어오르지도 않았다. 하지만 손바닥이 조금씩 땀에 젖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그걸 알 수 없는 강준은 조금 답답해진 마음에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서로 인사하지. 이쪽은 이번에 사업 전략 기획 3팀을 맡게 된 유강준 팀장. 이쪽은 이번 일 함께 하게 될 팀원, 신연조 씨라고 하네.”

인자하게 웃어 보이는 재현을 잠시 바라보던 강준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유강준입니다.”

“신연조라고 합니다.”

서늘하고 부드러운 손이 강준의 손아귀에 담겼다 금세 떨어졌다. 강준은 미간에 슬며시 힘을 주었다. 이럴 땐 미소를 짓는 것이 분위기를 풀어 줄 묘안이라는 건 알지만 의미 없는 미소를 지을 마음 같은 건 생기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커피를 만들던 여자가 지금은 왜 이번 프로젝트의 팀원인지 궁금할 뿐이었다.

“마침 잘되었군. 연조 씨가 유 팀장 자리 좀 안내해 주지. 내가 하는 것보다야 서로 친해질 겸 연조 씨가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 연조 씨가 다른 팀원들한테 유 팀장 소개도 해 주면 좋겠구먼.”

꽤 합리적인 제안이었다. 그녀의 입장에선 좋든 싫든 지금 당장 실행에 옮겨야 하는 상사의 지시였겠지만. 한편 강준은 E&B PC의 비핵심 사업 분야에 커피 프랜차이즈가 있었던가 하는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무슨 바보 같은 생각을 하는 거냐며 정신을 차렸을 땐 재현이 이미 사라지고 난 후였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게 있다면 그녀도 적잖이 당황한 것 같다는 것. 자기 혼자만 멍했던 건 아닌 것 같아 묘한 안도감이 든 강준은 그 안도감이 어이없어 피식 웃었다.

“팀장실은 팀장님 집무실 겸 팀 회의실로 쓰일 예정입니다. 업무에 필요하실 기기들, 사무용품들을 모자람 없이 준비한다고 했지만 더 필요한 게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인스턴트 차 종류와 전기 포트는 왼쪽 테이블에 준비해 뒀습니다. 혹, 캡슐 커피 머신이나 에스프레소 머신이 필요하시면 탕비실에 구비되어 있으니 그곳에서 이용해 주시고요. 탕비실은 오른쪽 복도 끝에 있습니다.”

군더더기 없이 꾸며진 집무실 안으로 그를 안내하며 사무적으로 행동하는 그녀를 강준은 턱을 쓰다듬으며 바라보았다.

아까는 이러지 않았었는데. 블라우스가 커피에 흠뻑 젖는 봉변을 당하고도 여유롭게 웃어 주었는데…….

옅은 한숨을 내쉰 강준은 우아하게 뻗은 쇄골을 드러낸 실크 블라우스의 네크라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거기 커피, 맛있을 것 같던데.”

알루미늄 블라인드가 쳐진 창가를 바라보며 외워 둔 원고를 읊듯 고저 없이 말하던 그녀가 강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신연조 씨가 만들어 준 더치커피 말입니다. 맛있어 보이던데요.”

그녀를 바라보는 동안 강준은 이유 모를 한숨이 차올랐다. 동그란 눈동자에 실린 당혹감을 지켜보는 게 자신의 가슴을 간지럽게 할 줄은 몰랐다. 간지러운 느낌이 싫지 않을 줄도.

“커피, 안 드셨습니까?”

느닷없는 화제 전환이 의아한지 그녀의 눈썹이 휘어졌다.

“그 커피는 대표님을 위한 거라. 그런데 생과자는 별로였습니다. 대표님께 선물로 드리고 하나 얻어먹었는데 내 취향은 아니더군요. 지나치게 담백해서.”

“그러셨, 습니까?”

“네. 유감스럽게도.”

그녀의 눈썹이 조금 더 치올라 갔다. 순한 눈매와 달리 고집 있어 보이는 미간 주름을 훑어본 강준은 팔짱을 끼며 생각했다. 여자에게 괜한 오기를 부리고 싶어지는 순간은 참 느닷없게도 찾아온다고.

“신연조 씨는 내가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을 테고…….”

기업 전략, 사업 전략, 개발 전략으로 분과된 월드 컨설팅에서 강준은 사업 전략 분야에서 일하기로 되어 있었다. 현재 직책은 프로젝트 리더이지만 이번 프로젝트를 시험대 삼아 곧 파트너로 승진할 것이고, 향후 월드 컨설팅의 차기 대표로 물망에 올라 있기도 했다. 앞으로 5년 안에 일선에서 물러나고 싶어 하는 재현의 강력한 의지와 임원진의 합의가 있다는 것을 이곳의 직원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그의 어머니가 월드 컨설팅에 묻어 둔 자금이 만만치 않다는 것까진 모를 테지만.

“나는 신연조 씨가 이번 프로젝트의 팀원이라는 것 말곤 아는 게 없군요. 그런데 포지션이…….”

“어소시에이트입니다.”

그렇겠지. 아직 어려 보이니 눈 빠지게 데이터 수집하고 머리 쪼개지게 수치들 분석하느라 청춘을 몽땅 바쳐야 할 직급이겠지.

자신의 어소시에이트 컨설턴트 시절을 생각하다 피식 웃어 버린 강준은 반질반질하게 닦인 집무 책상에 엉덩이를 기댔다. 그러고는 여유로운 눈길로 사무실 내부를 찬찬히 훑었다.

한쪽 벽면을 모두 차지한 책장에 고딕체 라벨을 붙인 서류 박스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업무 관련 서적도 제대로 분류되어 꽂혀 있었다. 사무기기들은 최신식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주는 날렵한 디자인의 제품들이었다. 겨울나무를 심플하게 형상화한 것 같은 스탠드 옷걸이도 사무실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대개 프로페셔널들의 사무실답게 투명한 유리와 블랙 메탈로 꾸며진 곳이었다. 전문성은 차고 넘치나 인간미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보기 힘든, 강준으로선 익숙하고 불만 없는 인테리어였다. 누군가의 인간미 넘치는 배려로 가져다 놓았을 모니터 옆의 싱고니움 화분은 사무실 분위기와 겉돌았지만. 강준은 때 맞춰 화분에 물을 주는 일 같은 건 할 자신이 없으니 이건 방에서 내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물었다.

“월드 컨설팅 어소시에이트에겐 어떤 자질이 필요한지 궁금하군요. 커피 제조는 아닐 것 같은데.”

강준의 말에 눈썹을 조금 꿈틀거린 그녀가 차분히 말했다.

“그 커피숍은 친구가 운영하는 곳입니다. 친구가 잠시 자리를 비워야 할 일이 생겨서 잠깐 봐 주고 있었고요.”

신연조라는 여자는 영 바보는 아닌 듯 강준이 묻는 말의 요점을 잘 파악했다. 지금 강준이 알고 싶은 건 그녀의 커리어가 아니라 커피숍에서 일하던 그녀와 왜 이런 식으로 조우하게 된 건지였으니까.

“친구가 하는 곳이라 신연조 씨가 대신 영업도 좀 하면서 말이죠?”

이건 괜한 시비라는 걸 강준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자기 나름의 기지로 그 상황을 유연하게 대처하고자 과자 구입을 권했다는 걸 그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여자에게 괜한 억지를 부리고픈 아이 같은 남자의 본능을 막을 길이 없었다. 막을 생각도 들지 않았다. 유치한 그 본능이 왜 지금 이 순간 발동되는지는 생각해 볼 문제였지만 말이다.

“영업, 아니었습니까?”

그래도 지금은 일단 이 여자를 흔들어 보기로 했다. 왜냐하면, 강준 자신도 흔들렸으니까. 별 반응 없다고 생각했던 심장이 실은 세차게 뛰고 있었다.

“과자 구입을 권한 건 팀장님께서 과한 돈을 내미셨던데다, 제가 거절한다고 해도 어떻게든 변상하실 분일 것 같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저 나름대로는 그 상황을 가장 좋게, 그리고 빠르게 마무리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는데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달리 원하시는 게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고려해 보겠습니다.”

들어주는 게 아니라, ‘고려해 보겠다’라…….

피해자는 그녀 자신이었다는 걸 완곡하게 표현하면서도 확실하게 못 박았다. 차분한 표정과 가다듬어진 음성으로 건넨 말이지만 강준은 충분히 파악했다. 그녀는 지금 화가 났다는 것을. 괜한 억측을 들은 것도 심히 언짢은데, 시비 거는 상대가 하필 새로 온 상사라면 강준으로서도 열 받았을 것이다. 그런 심정을 과하게 표현하진 않지만 감추지도 않는 그녀의 태도가 강준은 마음에 들었다. 유약해 보이는 겉모습 이면의 견고한 본질이 엿보여서.

“컨설턴트로서 좋은 자질을 가지고 있군요, 신연조 씨는.”

동그래진 눈망울 안의 당혹스러워하는 빛을 잡아채며, 강준이 말을 이었다.

“상대에 대한 관찰력도 뛰어나고, 상황 판단도 빠르군요. 상대를 최대한 배려하면서도 비굴하지 않고.”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내가 괜한 억지 부린 거, 압니다. 신연조 씨, 건드려 보고 싶었으니까.”

그를 똑바로 응시하던 그녀의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리는 것을 보며 강준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강한 눈빛과 말투로 그녀를 대하고는 있었지만 사실은 아직 멍했다. 재현의 집무실 앞에서 그녀와 조우한 순간부터 당황했던 강준은 평소처럼 세련된, 솔직히 말하자면 영악한 생각을 해낼 만큼의 정신 상태가 아니었다.

실은, 내내 그녀만 관찰했다.

깨끗한 눈동자가 어디에 시선을 두는지. 말간 입술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녀가 어느 순간에 당황하며 화를 내는지.

“제 역량을 알아보려고 하신 거라면,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합니까?”

“팀장님의 의도, 오해했습니다.”

그녀가 무슨 오해를 했는지 강준도 알아챌 수 있을 만큼 그녀의 두 뺨은 상기되어 있었다.

“오해라면, 남녀 사이의 뭐, 그런…… 지질한 시비 같은?”

“네. 뭐, 그런…….”

우물거리는 대답에 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살며시 일그러질 정도로 강준은 크게 웃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정곡을 찔린 무안함이 가시지 않았다.

“불쾌했을 겁니다. 직급을 이용한 횡포로도 보였을 테고.”

강준은 잔웃음이 남은 음성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오해했습니다.”

“아니, 사과해야 하는 건 내 쪽이죠. 미안합니다.”

실은, 그녀가 오해한 건 아니니까. 불순하다면 불순하다 할 수 있는 생각을 한 걸 인정 못할 만큼 비겁하진 않다.

“아닙니다, 팀장님. 방금 전 일은 그냥 없던 일로 해 주십시오.”

“그래요. 없던 일로 하죠. 먼저 없던 일로 하자고 해 줘서 고마워요.”

고맙다, 진심으로. 그녀에게 커피를 엎은 순간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태도가 조금도 마음에 들질 않았으니 말이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사과를 주고받으며 두 사람의 시선이 초점을 찾은 렌즈처럼 서로에게 맞춰졌다. 그녀와 눈을 맞춰 바라보던 강준은 기대고 있던 책상에서 엉덩이를 떼며 손을 내밀었다.

“유강준이라고 합니다. 포지션은 프로젝트 리더입니다.”

그녀의 눈빛이 당혹스러운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크게 흔들렸다. 강준 역시, 그랬다. 하지만 개의치 않기로 했다. 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자신을 처음부터 다시 소개하는 것 말곤 무엇을 해야 좋을지.

“내가 생각해도 지금 나는 제정신이 아닌 것 같군요. 오늘의 유강준은 잊어 줘요. 어떻게든 제대로 정신 차리고 올 테니까.”

망설이던 하얀 손이 강준의 손 안에 다시 담겼다. 강준은 그 손을 조금 오래 잡고 있었다. 아까처럼 금방 빠져나갈 수 없도록 손아귀에 힘을 주고서.

간혹, 그런 순간이 있었다. 뜻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는 순간. 머리가 마비되어 본의 아니게 실수하는 순간. 영화에서처럼 기억을 없애는 레이저 한 방 맞고서 처음부터 다시 제대로 시작하고픈, 그런 순간이.

그녀에게 첫눈에 반한 것도, 한 직장 내의 여자와 엮이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자기 스스로도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건지 판단 못하는 기분이 싫으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을 뿐이라고, 강준은 생각했다. 그러면 이 여자와 감정적으로 얽힐 일 같은 건 없을 거라고.

1. 출근길

프로젝트 수주 후 본격적인 일이 시작된 지 보름이 지났다.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동안엔 늘 그러했듯 어제만큼의 업무량이 오늘도 주어지는 나날이 연속됐다.

2년차 어소시에이트 컨설턴트인 연조의 업무는 데이터 수집과 분석, 클라이언트에게 보고할 스토리 기초 작업이었다. 보고서 리뷰는 하루 한 번 강준에게 직접 받은 후 지적 사항에 따라 자료를 수정하고 업데이트한 후에 퇴근했다. 그 시간이 대략 밤 10시에서 11시 사이, 하루 종일 참고 있던 큰 숨을 드디어 내쉴 수 있는 시간이었다.

연조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빨간색 빈백 소파에 몸을 던지며 눈두덩을 꾹 눌렀다. 하루 종일 작성했던 파워포인트 슬라이드가 감은 눈 안에서 겹겹이 쌓였다. 모니터 불빛에 오랜 시간 혹사당했던 눈이 뻑뻑했다.

“피곤해…….”

긴 한숨을 소리 내어 쉬었다. 지난 2년간 먹고사는 일에 몸과 마음을 바쳐 왔지만 지금처럼 피곤한 적은 없었던 것 같았다.

“너 이번엔 다른 때보다 더 피곤해하는 것 같다. 양파즙 좀 먹어. 무안 사시는 외삼촌이 보내셨다고 엄마가 냉장고 안에 잔뜩 쟁여 놨더라.”

요가 DVD를 보고 있던 화영이 목이 시뻘게지도록 상체를 뒤로 젖혀 코브라 자세를 따라 하며 말했다.

“어머님 다녀가셨어?”

“얼굴은 못 봤어. 퇴근하고 왔더니 온 집 안이 반짝거려서 알았지. 냉장고도 완전 풍족해졌고.”

“매번 죄송하고 감사하네. 내일 전화 좀 드려야겠다.”

“됐어. 내가 했음 됐지, 뭐.”

“네 덕분에 나도 항상 잘 얻어먹고 있는데 인사드려야지. 어머님한테 염치없는 것 같아 늘 죄송하기도 하고.”

“후, 우리 엄마는 너한테 엄청 고마워하고 있을걸. 후우, 너랑 같이 사니까 내가 그나마 사람 꼴 하고 사는 거라고. 푸후…….”

무리하게 요가 동작을 따라 하느라 숨이 턱에 차 뱉는 화영의 말에 연조는 피식 웃었다. 연조로선 잘사는 화영네 덕에 고급스러운 오피스텔에서 화영의 어머니가 챙겨 주는 영양식과 보양식을 시시때때로 얻어먹는 호사를 누리는데도 화영과 그녀의 어머니는 조금도 생색내지 않았다.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년간 은행에서 근무해 착실히 모은 돈으로 뒤늦게 대학에 입학한 연조와 과목별로 최고 실력의 과외 선생을 붙여 가며 억지로 머릿속에 털어 넣은 입시 지식으로 삼수 끝에 대학에 온 화영은 그 해 입학생 중에서 단둘뿐인 스물두 살 동갑이었다. 경영학과 동기들 중 둘만 나이가 같다는 이유로도 마음을 열고 친해진 둘은 함께 머리를 맞대며 시간표를 짜 같은 수업을 듣고, 같이 점심을 먹었다. 연조는 취업에 도움이 될 학위를 따기 위해, 화영은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놀기 위해 대학에 왔지만 서로 도서관 자리도 맡아 주고 깊은 밤 기울인 술잔에 속마음도 내보이며 도타운 우정을 쌓아 왔다. 올해로 스물일곱 살, 햇수로 6년 된 인연의 두 사람은 그보다 더 오랜 시간 우정을 나눠 온 친구들보다도 깊게 교감하고 자주 교류했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직장도 한 건물 내에 있을 정도였다.

졸업 후 연조는 좋은 기회로 컨설팅 회사에 취직했고, 화영은 자기 적성에 맞았던 커피 공부에 매진하여 커피숍을 개업했다. 있는 집 자식답게 부모님의 자금으로 연 숍이었다. 그래도 타고난 수완이 좋은지 화영은 숍 운영을 제법 알차게 해내고 있었다. 회사 밀집 지역의 노른자위 목에 매장을 열었다는 이점도 있었지만, 세계적인 프랜차이즈의 거대한 압박에 밀리지 않고, 허투루 쓰는 돈 없이 내실 있게 숍을 꾸릴 줄도 알았다.

반면 연조의 회사 생활은 조금 고달팠다. 업계 상위 클래스인 컨설팅 회사에 취직은 했으나 경영대학원 석사 학위가 없는 애송이 컨설턴트로서는 암묵적인 멸시를 감당해야 하는 자리였다. 사실 연조는 고재현 대표 이사가 아버지의 어릴 적 친구가 아니었다면 과연 이 회사에 면접이라도 볼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어린 연조의 손에 용돈을 쥐여 주던 재현을 캠퍼스 리쿠르팅에서 다시 만난 건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그와의 만남과 그의 회사로의 취업은 연조로 하여금 더욱더 치열하게 일을 하는 동기 부여가 되었지만 말이다. MBA도 없는 애가 무슨 일을 제대로 할 수 있겠느냐는 비아냥거림은 듣고 싶지 않았고, 고마운 재현에게 괜한 억측을 듣게 하는 누를 끼칠 수도 없었다. MBA도 없이 월드 컨설팅에 채용된 건 그녀의 높은 학업 성적과 대학 입학 전 2년간의 은행 근무 경력, 그리고 인턴십 때 보인 충분한 가능성 때문이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열등감이란 감정은 끊임없이 자기 암시를 하고 수십 번 마음을 다잡는다고 해서 쉽게 떨쳐 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닌 듯했다. 열등감이 오기로 발현되어 맹렬히 일했지만, 편견을 완벽히 무시할 수 있을 만큼의 정신력을 갖추는 건 아직 먼 훗날의 일인 것 같았다. 새로 온 팀장에게 보고서를 제출할 때마다 긴장하는 자신을 보니 더욱 그런 것 같았다. 강한 정신력의 소유 여부가 나이의 문제인지, 성격의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아무래도 이 분야 프로라 신연조 씨 보고서를 이해할 수 있지만 클라이언트에겐 조금 어려울 것 같군요. 약간만 수정하죠, 심플하게.”

연조는 오늘 오후 강준에게 지적받았던 일을 생각하며 미간을 문질렀다. 리포트의 개요가 조금 산만하고 반복되는 내용의 텍스트가 몇 군데 보인다는, 그리 따가울 것도 없는 지적이었다. 그런데도 연조는 그가 부족한 부분을 지적하는 순간에 긴장감이 증폭되어 얼굴이 뜨거워졌다. 낮은 음성으로 보다 나은 방향을 제시해 주는 그에게 고맙긴 했지만 그런 부분을 자신이 미리 집어내지 못해 무안했다. 서늘한 눈길로 텍스트를 훑어 내리고 도표를 비교하는 그를 볼 때마다 어딘지 모를 곳이 따끔거리기도 했다.

“이거 마셔 봐.”

오늘 일을 생각하며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던 연조는 뺨에 닿는 서늘한 기운에 살며시 눈을 떴다.

“고마워. 잘 마실게.”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화영에게 옅게 웃어 보이곤 한쪽 귀퉁이가 잘려 나간 비닐 파우치를 받아 쭉 들이켰다. 쓰면서도 단 즙이 컬컬했던 목을 적셨다. 영양분과 에너지가 다 빠져나간 듯 푸석하고 피곤한 상태라 그런지 파우치 하나 분의 양파즙 포도당이 온몸으로 빠르게 흡수되는 느낌이었다. 덕분에 아주 조금의 기운을 차렸다.

“새로 온 팀장이 많이 갈궈?”

“아니, 비교적 매너는 있어.”

“그럼 일을 못해? 그래서 뒷수습하느라 피곤한 게야?”

“못하긴, 엄청 잘해서 탈이지.”

“그래서 더 분발해야겠다는 의욕을 팍팍 심어 주나 보구먼?”

“응, 그래서 더 무리하게 되네.”

유강준 팀장은 클라이언트를 사로잡을 기획서가 어떤 것인지를 확실히 보여 주는 사람이었다. 기획서 설명 사이사이에 곁들이는 농담도 세련되어 그가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면 시간이 언제 가는지 모르게 재미있기도 했다. 계속되는 야근에도 활력이 넘쳤고, 셔츠가 구겨지는 것 따위엔 신경 쓰지 않고 소매를 걷어올린 채 일에 집중하는 모습은 꽤 근사했다. 여직원들의 얼굴이 그를 향해 붉은 꽃처럼 피어나는 게 무리일 것도 없는 사람이었다. 닮고 싶고, 과연 닮을 수 있을까 싶은. 자기는 닿을 수 없는 영역에 있는 것만 같은. 그렇기에 책잡히고 싶지 않고, 더 잘하고 싶다는 오기를 다락같이 높이는 부류였다, 그는.

“뱁새가 황새 따라가려니까 가랑이 찢어지게 힘들어.”

“뱁새 무시하지 마. 걔가 얼마나 귀엽게 생겼는데. 그리고 너는 아직 아기 황새인 거지.”

연조의 자조 섞인 엄살에 화영이 가볍게 눈을 흘기며 용기를 덧보태 주었다. 그러고는 자기도 양파즙 파우치 하나를 까 먹고서 허리와 무릎을 깊게 굽혔다 펴며 스쾃 자세를 반복했다.

“참, 내가 이거 안 보여 줬지?”

모양 좋은 골반을 뒤로 쭉 빼던 화영이 연조의 눈앞으로 왼쪽 손을 내밀었다. 모조 보석이 박힌 실반지가 가느다란 약지에 감겨 은은하게 빛을 냈다.

“규호 씨가 줬어?”

“응, 오다가 주웠다고 나 하래. 이 귀요미가 상남자 냄새를 팍팍 풍기네. 예뻐 죽겠어.”

이번 화영의 연인은 잘빠진 근육이 매력적인 체육학과 복학생이었다. 화영의 언니는 구상유취의 어린 녀석과 철없는 연애에 자빠진 화영을 한심해하며 연조에게 화영의 얼굴에 찬물 한 바가지를 끼얹으라고 핀잔했지만 화영은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는 언니는 일본 유학 중에 만난 다섯 살 연하의 인디밴드 기타리스트에게 몸과 마음을 몽땅 바쳐 놓곤 자기에게 할 말이 아니라며. 경험자의 충고라는 화영의 언니와 세상의 모든 연하남을 일반화시킨 논리는 들을 필요 없다는 화영의 의견은 팽팽했다.

연조로선 부러운 모습이었다. 이성을 내던진 사랑에 빠질 수 있는 감성을 소유했다는 것이. 연조라고 연애를 안 하는 건 아니지만 요즘 들어 부쩍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신을 바짝 차린 이 연애가 과연 옳은 것인지. 옳고 그른 연애의 판단 기준이 이성과 감성 사이에 있는 건 아니겠지만 얼마 전부터, 실은 꽤 오래전부터 그런 생각을 자주하게 됐다.

“참, 윤준 씨는 언제 온대?”

“윤준 씨?”

“애인 얼굴을 봐야 피로가 좀 풀리지. 출장 끝나 갈 때 되지 않아?”

“응……. 별일 없으면 내일 입국할 거래.”

연조의 대답 안에 한숨이 섞여 나왔다. 윤준과 연인으로 지내 온 지난 1년간 두 사람의 성격답게 차분한 연애를 이어 왔다지만 확실히 요즘은 전 같지 않은 분위기라는 걸 연조는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고요하지만 불안한, 변함없지만 끝을 알 것 같은. 윤준이 출장을 가기 전 결혼 이야기를 나누고, 그의 어머니를 만난 후 확연히 느낀 감정이었다.

윤준과 그의 어머니를 떠올리던 연조는 왠지 가슴이 묵직해졌다. 양파즙 하나로 기운을 차리는 것 같다고 느낀 건 그야말로 느낌이었을 뿐, 여전히 몸과 마음이 방전 상태인가 보다.

“화영아.”

정신을 좀 차리려고 빠르게 머리를 내젓던 연조가 입을 열었다.

“응? 왜?”

“우리 매운 닭발 먹을까?”

“오케이, 콜. 원기 회복엔 그만한 게 없지.”

“소주도?”

“당연한 말씀. 닭발엔 역시 소주지. 소주는 각 일 병씩 책임지도록 하자.”

가쁜 숨을 몰아쉬며 스쾃 자세를 반복하던 화영은 미련 없이 동작을 멈추고 휴대전화를 찾았다. 다이어트 핑계로 매운 음식과 음주를 포기한 적 없던 그녀는 일사천리로 닭발 주문을 마쳤다. 아마 내일 화영의 식사량은 한 끼 분이 줄어들고, 운동 시간은 한 시간 더 늘어나겠지만.

닭발 앞에서 다이어트 따윈 개의치 않는 친구의 모습에 피식 웃어 버린 연조는 피곤에 절어 무거워진 몸을 힘겹게 일으켰다. 닭발이 배달되기 전에 씻고 윤준에게 전화를 좀 걸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욕실로 향했다.

심신 안정에 좋다는 가드니아 향이 청결한 욕실 안에 가득했다. 연조는 디퓨저 가까이로 코끝을 가져다 댔다. 그러나 어딘가를 가시에 찔린 듯 따끔거리는 심정이 좀처럼 가시질 않았다.

조금 분주한 아침.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전날 마신 술 때문이었다. 연조는 머리를 다 말리지도 못한 채 화장을 하고 서둘러 옷을 입었다.

“연조야! 텀블러 챙겨!”

믹서로 간 음료를 텀블러에 옮겨 담던 화영이 외쳤다. 연조보다 많이 먹고, 많이 마신 화영의 얼굴은 연조보다 더 상태가 좋지 않았다.

“고마워! 잘 마실게!”

연조는 화영이 건네는 텀블러를 받아 들며 급한 음성으로 출근 인사를 던지곤 현관문을 나섰다.

엘리베이터의 위치는 23층. 연조는 하향 버튼을 누르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화영이 챙겨 준 음료를 한 모금 마시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텀블러에 담긴 건강 음료 한 잔은 개념 있는 도시 여자의 기본 아이템 아니겠느냐며 화영이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본인과 친구의 건강까지 챙기는 그녀의 좋은 습관이었다. 아침 식사를 못하고 출근하는 연조를 위한 고마운 배려이기도 했다. 한편으로 새로 개발한 음료를 시음하는 작은 역할을 연조에게 지운 건 화영의 귀여운 애교였다.

“흠……. 새싹이 많이 들어갔나?”

요즘 화영이 챙겨 먹이는 건 새싹 스무디로 어제는 바나나 맛이 강하더니 이번 건 풋내가 진하게 나는 것 같았다. 그리 섬세하지 않은 미각으로 화영의 음료를 시음하고 평가 내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연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텀블러를 다시 입술에 가져다 댔다. 그때 마침 엘리베이터의 금빛 문이 양옆으로 열렸고, 연조는 음료를 한 모금 머금은 채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다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팀…… 장님? 콜록…….”

사레들려 말을 잇기 어려웠다. 어떻게든 기침을 참아 보려 했지만 그건 의지의 영역이 아니었다.

“이리 와요.”

연조를 발견하고 눈을 치뜬 강준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아 제 쪽으로 당겼다. 엘리베이터 안엔 출근길로 보이는 사람이 두어 명 더 있었다.

목구멍은 견딜 수 없이 간질거렸고 낯선 이들의 시선은 불편했다. 곤혹스러움에 안절부절못하며 얼굴만 빨개지고 있는데, 강준이 반듯하게 접힌 손수건을 연조에게 건넸다. 그러고는 사람들의 시선을 차단해 주듯 연조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덕분에 연조는 안간힘을 다해 기침을 참지 않아도 되었다.

“괜찮습니까?”

1층 로비에서 겨우 기침이 멈추고 제 호흡으로 돌아왔을 때, 연조의 머리 위에서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네……. 괜찮습니다.”

연조는 입을 대고 기침했던 손수건을 손 안에 꽉 쥐었다. 그가 왜 자신과 같은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은 뒤로 하고, 일단 지금은 민망했다.

“어제 이사 왔습니다.”

묻지 않아도 알아서 말해 주어 의문이 간단히 풀렸지만 민망함과 어색함은 두께를 더해 갔다. 와이셔츠에 밀착된 넓고 단단한 가슴이 눈앞을 가로막고 있으니 연조는 무얼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다. 죄송하다고 한 번 더 인사하며 먼저 자리를 떠야 할지, 뜻하지 않게 그와 출근 메이트가 되어야 할지. 한편, 팀원들 중 가장 늦게까지 남아 일하던 사람이 이사는 어찌 한 것인지 궁금했다. 하기야 요즘처럼 각종 서비스업이 비약적으로 발달된 세상에서 자기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이사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걸어갑니까?”

오피스텔에서 회사까지는 도보로 15분 남짓. 연조는 당연히 회사까지 걸어다녔다.

“네, 걸어갑니다.”

“가죠, 그럼.”

강준의 말이 당혹스러워 연조는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그도 회사까지 걸어갈 줄은 몰랐다. 걸어서 갈 생각이니 지하 주차장으로 가지 않고 1층에서 내렸겠지만. 사실 그 정도의 거리는 출근 시간대의 강남 대로에서 운전하는 것보다 걷는 게 더 빨랐다.

연조는 앞장서서 걷는 강준에게서 한 걸음 떨어져 뒤따랐다. 무척 불편했다. 상사와 함께 하는 출근길이 반가울 직장인은 있을 리 만무하다.

“불편합니까?”

어느새 강준이 곁에 서 있었다. 연조의 보폭에 맞춰 그가 걸음을 늦췄다.

“네…….”

아직 경황이 없는 연조는 엉겁결에 진심을 말했다.

“이 일을 하는 동안엔 불편한 사람들과 릴레이로 미팅해야 할 텐데 이 정도 불편함은 참죠.”

무심하게도 뱉는 그의 말에 연조는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말할 거면서 불편하느냐, 마느냐는 왜 물어보는 건지. 불편해하는 걸 알면서도 굳이 물어보는 그가 얄궂었다.

“그건 뭡니까?”

연조는 조금 의기소침해져서 앞만 보고 걷는데 강준이 텀블러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새싹 스무디입니다.”

그러고 보니 음료를 두 모금밖에 마시지 못했다. 회사까지 걷는 동안 화영이 챙겨 준 음료를 천천히 마시며 그날 해야 할 일을 머릿속에서 차근차근 정리하곤 했지만 지금은 음료를 마실 엄두를 내질 못했다. 해야 할 일을 미리 가늠해 보는 것도 할 수 없었다. 대신, 매일 업무를 보고해야 하는 상사와의 출근길에선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 열심히 생각해 보았다.

“아침 식사 대신입니까?”

다행스럽게도 그가 먼저 적막을 깨고 대화를 이었다.

“네, 먹고 나올 때도 있지만요.”

“부지런하군요.”

“제가 만든 건 아니고 함께 사는 친구가 챙겨 줍니다.”

“함께 사는 친구?”

“회사 건물 1층에 ‘스프링 플라워’ 사장입니다. 친구가 새로 개발한 음료 시음도 할 겸 출근길에 마십니다.”

각이 지게 구겨졌던 눈썹이 이내 부드럽게 풀렸다. 강준은 희미한 미소가 묻은 눈길로 연조의 손에 들린 텀블러를 바라보더니 손을 뻗었다.

“마셔 봅시다.”

“네?”

“시음하는 거라면서.”

마음이 산란하고 울렁거렸다. 제 입술이 닿았던 것인데 어찌해야 하나 싶어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안 된다고 거절은 못하겠어서 급한 대로 손에 쥐고 있던 손수건을 반대로 접어 입술이 닿았던 부분을 닦아 내곤 그에게로 텀블러를 건넸다. 텀블러와 연조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 웃음이 걸려 있었다. 연조의 가슴이 또다시 울렁였다.

“별로군요.”

연조에게서 건네받은 음료를 한 모금 삼킨 그가 말했다.

“새싹 맛이 강합니다. 뭘 넣은 건지 매운맛도 좀 나는 것 같고.”

좋은 평가를 기대하진 않았지만 왠지 서운했다. 자기가 만든 것이 아니었는데도. 전에 생과자에 대해 “지금도 맛있지만 조금만 더 달면 더 맛있을 것 같아” 하는 완곡한 표현으로 화영에게 맛 평가를 내려 주었는데, 이번엔 어찌 말해 주어야 할까. 한숨 쉬며 고민하고 있는데, 그가 뜻밖의 말을 했다.

“향수 향도 좀 섞여 있군요.”

향수 향이라니, 립스틱 잔향이 텀블러에 남아 있었던 걸까, 하고 생각하던 연조는 곧바로 원인을 파악했다.

존 바바토스의 시트러스 향.

그가 간혹 곁을 스치고 지나갈 때, 그에게 보고서에 대한 리뷰를 받을 때, 그리고 방금 전 그의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고 기침했을 때 맡았던 향기였다.

“정말…… 별로셨겠네요.”

무안했다. 남의 손수건에 제 타액을 묻히고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싶어 더더욱 민망했다. 긴장과 당황으로 하루를 시작했기로서니 그런 정신머리 없는 짓을 하다니, 연조의 얼굴이 빠르게 붉어졌다.

“죄송합니다. 손수건은 새것으로 돌려드리겠습니다.”

평소보다 늦게 일어난 아침, 뜻하지 않게 만난 어려운 직장 상사, 제대로 가다듬지 못한 호흡, 바보 같은 실수.

두 눈이 질끈 감겼다. 무슨 이런 엉망진창인 하루의 시작이 다 있을까. 오늘은 다이어리에 굵은 밑줄을 그을 하루가 될 것 같았다. ‘정신 차리자. 오늘 같은 실수는 두 번 다신 안 돼!’ 하는 코멘트와 함께.

“죄송할 거 없습니다. 그렇게 쓰라고 준 거니까.”

그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빙긋 웃어 보이곤 덧붙였다.

“전에 내가 한 실수, 신연조 씨는 참 너그럽게 봐줬었죠?”

“네?”

무얼 말하고자 하는지 알 수 없어 연조가 눈만 깜빡이자 그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새 손수건으로 돌려줄 필요 없습니다. 나한테나 신연조 씨한테 빚 갚을 기회 좀 주죠.”

강준이 그들의 첫 만남을 언급하고 있다는 걸 그제야 깨달은 연조는 고개를 저었다.

“그때 생과자 사 주신 것으로 충분히 변상되었습니다.”

“글쎄요.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참 맛대가리 없는 과자를 강매당했다는 생각밖에 안 드는데.”

“네?”

“그 원수도 언젠간 갚고.”

말하는 그의 표정이 부드러웠다. 어리둥절했던 연조는 조금 휘어진 강준의 눈매를 바라보다 보니 알 것 같았다. 그가 지금 농담을 하고 있다는 걸. 그것으로 강준을 발견한 순간부터 로봇처럼 뻣뻣해진 그녀를 이완시키려는, 그 나름의 배려를 하고 있다는 걸.

“스무디가 조금 매웠던 건 무순 때문일 겁니다.”

덕분에 불편한 마음을 조금 물리고서, 연조가 말했다.

“무순?”

“네.”

“그런 것 같군요. 그건 빼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친구에게 전해 주겠습니다.”

“시음자로 괜찮았습니까?”

“네, 저보다 훌륭하십니다.”

연조의 칭찬에 강준의 입술로 은은한 미소가 덧그려졌다. 그는 웃음에 후한 사람은 아니지만 박한 사람도 아닌 듯했다.

“향수 맛은 그리 나쁘지 않았습니다.”

“네?”

“어렸을 때 간혹 먹어 본 맛이라. 어머니 화장품 냄새 나는 밥, 종종 먹었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저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두 사람의 얼굴에 미소가 짙어지고, 팽팽했던 긴장감이 조금씩 옅어졌다.

어느덧 저만큼 앞, 아침 햇살에 아른아른 반짝이는 회사 건물이 보였다. 언제 회사에 도착할는지 까마득했건만 15분은 의외로 짧은 시간이었다.

“다 왔군요…….”

나직하게 깔린 그의 음성에 아쉬운 한숨이 묻어 있었다. 명백한 착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연조는 그렇게 느꼈다.

새롭게 포장된 푹신푹신한 고무 보도를 걷는 걸음들이 바빴다. 분주히 출근하는 직장인의 대열 속에 미소짓고 있는 사람은 둘뿐이었다.

“팀장님, 10분 뒤에 브레인스토밍 시작할까 하는데요.”

매일 아침,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도출하는 회의로 여는 업무의 시작을 알리려고 성미라 컨설턴트가 빼꼼히 열린 문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죠. 커피 한잔 마실 시간은 주는군요.”

가벼운 농담과 수줍은 웃음. 가열한 하루를 시작하기 위한 워밍업으로 적당한 요소들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강준에게 필요한 것은…….

강준의 시선이 어느덧 오른편으로 향했다. 팀원들의 사무 공간과 팀장 집무실을 구분해 놓은 유리벽 너머로 팀원들에게 상냥하게 인사를 건네는 연조가 보였다.

그녀는 짐작대로 성실했다. 이른 출근과 늦은 퇴근 사이의 시간을 적절히 쪼개 쓰고, 잠시의 여유를 즐길 줄 알되 결코 게으름을 부리지 않았다. 보고서도 센스 있게 구성할 줄 알고, 선배와 상사를 챙길 줄도 알았다. 간혹 팀원 모두와 함께 하는 점심도 내숭 없이 잘 먹었다. 커피는 좋아하지만 주전부리는 그리 하는 것 같지 않았다. 건강을 축내며 사는 타입은 아닌지 과중한 업무 중에도 사무실에서 간단히 할 수 있는 스트레칭을 틈틈이 하곤 했다. 오늘 보아하니 건강에 좋은 음료도 챙겨 먹는 것 같았다. 자의는 아닌 것 같지만.

강준은 지난 보름간 일하는 틈틈이 연조를 관찰해 왔다. 처음엔 이 무슨 스토커 같은 짓인가 싶어 그녀를 외면해 보기도 했지만 얄팍한 의지력을 지닌 그의 시선은 어느덧 연조를 좇았다. 곤두세운 신경을 가라앉힐 필요가 있는 순간, 그녀가 무얼 하고 있는지 지켜보는 것만큼 그의 마음을 유순히 풀어 주는 건 없었다.

하지만 연조를 관찰하는 동안 마음이 평온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강준의 마음으로 조금씩 스며드는 그녀에 대한 염려. 그녀는 일을 하는 데 있어 성실했지만, 무리하고 있었다. 몇몇 회사 사람들의 그녀를 얕잡아 보는 듯한 태도를 강준도 보지 못한 건 아니었다. 그래서 잘해 내고자 하는 오기와, 잘못했을까 봐 두려움 섞인 그녀의 눈빛을 마주할 때면 조금 걱정이 됐다. 그런 긴장 상태가 지속된다면 이 일에서 스스로 나가떨어질 확률이 증폭되다 보니.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몇 해 되지 않은 사회생활 경험으로 벌써부터 자기 하는 일에 중도를 찾고 여유를 갖는다는 건 이치에 맞는 일이 아니었다. 지혜란 밀도 있게 경험하고 깨지고 다치며 스스로를 견고하게 다지는 시간을 보낸 후에야 얻는 가치이니 아직은 지켜볼 일이었다. 더구나 그녀가 가장 어려워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강준 자신인 것 같으니 말이다.

강준은 피식 웃어 보이다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강준은 그녀에게 편한 사람이 되어 주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녀에게 자신은 긴장감을 갖고 신경 쓰이게 하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건, 자신에게 그녀가 그런 존재였기 때문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그녀를 지켜보는 동안 평온했던 적은 그리 없었던 것 같다. 설렘과 평온은 같은 선상에 세울 수 있는 감정이 아닌 것 같으니 말이다.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던 강준은 테이블 한쪽에 놓인 싱고니움 화분으로 시선을 옮겼다. 설핏, 웃음이 나왔다. 정식으로 출근하자마자 이것부터 내보내려 했건만 화분은 아직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첫 출근 날, 첫 회의가 마무리될 무렵 작은 화분과 물을 나눠 마시던 연조를 봐 버렸기 때문에 그것을 차마 내칠 수 없었다. 이후로도 그녀는 자기 마실 물을 싱고니움과 나누고 있었다.

“탐장님, 여기…….”

“아, 이런. 고맙습니다. 잘 마실게요.”

미라가 가벼운 노크 후 안으로 들어와 강준의 책상 위에 머그컵을 내려놓았다. 커피 한잔 운운했던 말을 신경 썼던 듯 그녀가 가져다 놓은 머그컵 주변으로 신선한 커피 향이 뭉근히 퍼졌다.

수줍게 웃어 보인 미라가 집무실을 나가자 강준의 시선이 다시금 연조에게로 향했다. 마침 강준과 눈이 마주친 그녀는 어색한 묵례 후 두꺼운 프랭클린 다이어리를 펼쳤다. 깨알같이 쓰인 일과들, 색색의 포스트잇, 잡지를 뒤적이다 눈에 띄어 오려 붙였을 휴양지 사진들. 허투루 쓰는 시간이 없도록 매사를 통제하는 성실한 직장인의 흔한 다이어리였다. 그런데도 강준은 회의 중 훔쳐봤던 그녀의 다이어리가 꽤 흥미로웠었다. 아마도, 누구인지 조금 더 알고 싶은 여자의 것이라 관심이 갔던 거겠지…….

랩톱 화면에 복잡한 도표들을 띄우며 강준은 싱겁게 웃어 버렸다. 여자에게 호감을 갖는 일을 지금처럼 경계했던 적이 있었던가 싶다. 아무에게나 함부로 관심 준 적은 없었지만 말이다.

성장기의 세포가 분열하듯 덩치를 키워 가려는 마음을 경계부터 하는 건 이곳은 한국이고, 한국의 직장 내 남녀 관계는 결코 쉽게 접근해선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접으려 했고, 무시하려 했던 마음이지만 뜻대로 되는 것 같진 않았다. 자신의 의지가 이토록 나약하다는 걸 미처 몰랐기에 당혹스럽기도 했다. 본의 아니게 그녀와 같은 오피스텔에서 살게 되었으니 난제에 난제가 더해졌다.

앞으로 이 일을 어찌하나 싶어 이마를 세게 문질렀지만 줏대 없는 의지력이 다시금 말랑거렸다. 토끼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는 그녀를 발견했을 때, 사실 강준도 그녀만큼 놀랐었다. 그리고 함께 회사까지 걷는 동안엔 마음이 몽글거렸다. 가슴이 떨려 손마디 하나 잡을 수 없는 풋풋한 데이트라도 한 것처럼.

“좋은 아침입니다, 팀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 출근길에 느꼈던 감정을 되새기며 커피를 마시는 동안 10분의 유예가 다 가고 태블릿과 서류철을 한 손에 든 팀원들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커피 향은 풍부하게 퍼져 있었고, 강준의 기분은 산뜻했다.

“네, 좋은 아침입니다. 회의 시작하죠.”

오늘도 클라이언트의 마음을 사로잡을 아이디어를 짜내느라 고군분투해야 하는 하루. 평소처럼 빡빡할 것이 예상되는 날이다. 그래도 오늘은 팀 회식으로 하루를 마무리하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벌써부터 그 시간이 기다려지는 건, 오랜만에 업무 스트레스를 털어 낼 시간이기 때문일까, 조금은 사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기회에 대한 기대감 때문일까.

강준의 시선이 버릇처럼 연조에게로 향했다. 유리 테이블 끝에 앉은 그녀가 다이어리를 펼쳤다.

오늘 날짜에 그어진 굵은 밑줄, 다소 크게 써 놓은 글씨. 강준의 입술로 빛 망울 같은 미소가 터졌다.

“연조 씨, E&B에서 LED 매출액 데이터 받았어요? 전년도만 있는 거야, 지난달 자료까지 다 온 거야?”

빠르게 묻는 미라의 음성이 딱딱했다. 그녀는 미간을 좁힌 채 리서치 자료를 팔락팔락 넘겨 보고 있었다.

“지난달 자료까지 받았습니다.”

“그럼 최근 3개월 치 상품별 매출액만 뽑아 봤으면 하는데.”

“네, 알겠습니다.”

연조의 대답은 명쾌했다. 해야 할 일이고, 잘할 수 있는 일이고, 어렵지도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미라는 데이터 시트를 띄우는 연조를 못미덥다는 듯 바라보며 말했다.

“그거 피벗 테이블(pivot table: 데이터의 나열 형태에 따라 집계나 카운트 등의 계산을 하는 기능)로 추출하면 간단하게 돼요. 할 줄 알아요?”

“네. 알고 있습니다.”

매일 하는 일인데 그걸 모를까.

성능 좋은 컴퓨터를 앞에 두고도 필요한 자료만 뽑아 보기 위해 펜을 들고 종이 위에 따로 옮겨 적는 수고 같은 건 하지 않는다고 굳이 말하진 않았다. 그녀의 눈앞에서 할 수 있는 걸 실행해 보이면 되는 일이었다. 기본적인 프로그램을 다루는 실력까지 의심받는 건 조금 씁쓸했지만.

“그래요? 그래요, 그럼.”

미라의 표정이 새침해졌다. 그리 신경 쓰이진 않지만 조금의 걱정은 들었다. 괜한 긴장 관계는 만들고 싶지 않은데……. 연조는 일하는 데 쏟아야 할 에너지를 납득이 안 되는 감정을 소모하는 데까지 쓰고 싶지 않았다.

“아 참, 연조 씨. 우성 전자에서 플립 차트(flip chart: 상단이 붙어 있어 뒤로 넘겨 가며 보는 자료) 받아 온 거 있잖아. 그거 오늘까지 문서화 작업 되나?”

오진수가 재킷에 팔을 꿰며 인터뷰지를 챙겼다. 워낙 외근과 출장이 잦은 업무 특성상 리더와 시니어 컨설턴트들은 이미 자리를 비웠고, 연조도 오후엔 E&B PC에서 있을 프레젠테이션에 참석해야 했다.

“네, 해 놓겠습니다.”

자료의 양이 많긴 해도 조금 더 몰입해서 일한다면 가능한 일. 집중하기 위해 카페인의 도움은 어제보다 많이 받아야 할 것 같았다.

“연조 씨 버디(buddy: 컨설팅 업계에서 신입 사원에게 회사 생활과 업무에 관해 도움을 주는 선배 직원)가 누구더라? 서윤준 씨였던가?”

“네.”

미라의 물음에 대답하는 연조의 음성은 한 점의 흔들림도 없었다. 연애 초반엔 윤준이 언급될 때마다 마음을 졸였지만 비밀 연애 1년은 연조에게 앙큼한 태연함을 가르쳐 주었다.

“지금 자기 버디 없다고 내가 대신 가르쳐 줄 수 없는 거 알죠? 내 일도 너무 많아.”

“네.”

진수의 업무 지시에 미라까지 신경 쓰였나 보다. 잘 모르겠는 사항에 대해 질문하는 걸 두려워하지는 않지만 연일 이어지는 과중한 업무로 까칠해진 미라를 위해 되도록 혼자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연조는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미라 씨, 너무 빡빡하게 굴지 마라. 버디도 없는 어린 양, 안쓰러워 죽겠구먼. 연조 씨, 나 한국 대학으로 외근 나가는데 오는 길에 맛있는 것 좀 사다 줄까? 한국대 앞에 정말 맛있게 잘하는 만두집 있는데. 거기 부추 만두 사려고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다지, 아마.”

“많이 기다리셔야 할 텐데요. 괜찮습니다.”

일을 맡겨 놓고 미안했는지 진수의 표정이 나긋했다. 최소한의 양심 정도는 챙기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연조는 웃으며 사양했다.

“연조 씨가 고생이 많잖아. 사다 줄 테니까 같이 먹자. 미라 씨도 만두 괜찮지?”

“됐고, 오진수 씨는 양민중 교수한테 괜찮은 데이터 뽑아 올 생각이나 하죠. 요즘 회사일도 바빠 죽겠는데 언제 만두집에서 줄 서서 기다리고 있을 거야. 인터뷰 끝나면 빨리 복귀해요.”

E&B PC의 LED 사업부 인수 의지를 보인 기업들의 수익성을 분석하기 위해 한창 재무제표를 파고들어야 할 때였다. 자신에게 그리 호의적이진 않지만 누구에게든 옳은 말 하는 걸 서슴지 않는 미라를 연조는 마음으로 응원했다. 지금은 고양이 손이라도 빌릴 수 있다면 기꺼이 참치 캔을 까서 바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요즘 미라 씨, 틈만 나면 투덜거리더라.”

진수가 입을 삐죽였다. 자기 딴엔 호의를 베풀려던 건데 간단히 거부당해 마음이 상한 듯했다.

“어머, 내가 언제요? 내가 뭘 투덜거려?”

“지금도 그렇잖아. 그깟 만두 좀 사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린다고. 아무리 일이 많아도 잠깐씩 브레이크 타임도 갖고 해야지. 원활한 업무를 위해 브레이크 타임 좀 갖고 만두 좀 사다 먹자는데 그게 잘못이야? 내 돈 내고 내가 사 온 만두 먹자는데도 싫어하고, 일 잘하는 연조 씨한테도 괜히 시비고 말이야.”

“어머, 내가 언제 시빌 걸었다고 그래요? 연조 씨, 내가 자기한테 시비 걸었어요? 내가 하는 말이 서운해?”

“아닙니다. ……잠시 실례할게요.”

이상한 분위기, 어색한 공간. 자기들끼리 시작한 언쟁에 말려들고 싶지 않았다. 연조는 웃는 얼굴로 말하곤 마침 진동하는 휴대전화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어머니.”

대전의 새어머니에게서 온 전화였다. 블라인드를 걷어 놓은 휴게실엔 아무도 없고 먼지 낀 햇살만 푸졌다.

- 응, 연조야. 잘 지내니?

“네.”

묻고 대답하는 음성이 어색하고 건조했다. 당신에게 그리 나긋나긋하지 않은 의붓딸이 서울에서 잘 지내고 있을지 궁금할 게 뭐 있을까. 하지만 연조는 새어머니가 자기에게 무관심하다 해도 서운하지 않았다. 연조도 새어머니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이미 10년 전에 맺은 법적인 모녀 관계였지만 두 사람은 아직 서로에게 서먹했다.

- 다음 주가 할머니 기일이야.

“네, 알고 있어요.”

그 용무로 전화했으리라는 걸 연조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간 할머니 제사에 빠져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한창 바쁠 때였지만 이번에도 역시 참석할 생각이었다. 할머니에게 각별한 애정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자손으로서 도리를 다하겠다는 지극한 효심 같은 것도 당연히 없었다.

어쩌면 이건, 아직까지 끝나지 않은 소심한 반항 같은 거였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연조는 아버지의 가정을 서늘한 눈빛으로 지켜보았다. 아버지가 자신의 시선을 불편해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요즘 많이 바빠서 늦게 도착할 거예요. 음식 만드시는 거 못 도와드려요. 죄송합니다.”

- 아니야. 와 주는 것도 기특해.

“네.”

- 응, 그래…….

“영훈인 잘 지내죠?”

- 응, 그럼…….

어떻게 대화를 이어 가야 하나 곤혹스러워하는 기색이 전해졌지만 연조는 메마른 음성을 거두지 않았다. 공연한 심술이라는 건 안다. 새어머니에게 갖기엔 부당한 마음이라는 것도. 하지만 연조는 아직 거북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새어머니는 왜, 행복하게 사는 걸까. 우리 엄만 무얼 잘못했기에 아버지에게 그토록 맞고 살았을까…….

아버지가 외도를 한 것은 아니었다. 새어머니가 오랫동안 아버지를 짝사랑했을 뿐. 그리고 긴 기다림 끝에 결국엔 연조 아버지를 자기 남자로 만들고서 할머니가 바라마지 않던 아들도 낳았다.

- 김치는 있니?

“네.”

새어머니나 친어머니나 전화할 때마다 하는 김치 걱정. 연조는 문득 웃음이 나왔다. ‘엄마’라는 이름이 붙여지는 순간 숙명처럼 따라붙는 김치 강박이라니. 화영의 어머니도 화영의 짜증 섞인 반대를 무릅쓰고 오피스텔에 200리터짜리 김치냉장고를 들여놓았다.

- 그래, 그럼 그때 보자.

“네. 그런데, 어머니.”

- 응?

“아버지가…… 어머닌 안 때리시죠?”

물으면서도 연조는 입술을 짓이기듯 깨물었다. 아버지가 새어머니를 때릴까 봐 걱정하여 묻는 건 아니었다. 새어머니도 맞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못된 마음을 품은 건 더더구나 아니었다.

- 어……. 너희 아버지 나한텐 안 그러셔…….

다만,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 때문이었다.

엄마는 왜 그리도 맞고 살았을까. 아버지는 엄마에겐 왜 그리도 가혹하셨을까. 새어머니에겐 안 그러시면서…….

연조는 왼쪽 주먹을 꽉 쥐었다. 사실은 풀리지 않는 의문이 아니라, 풀릴 리 없는 울분이다.

“다행이네요. 이만 끊을게요.”

서로에게 불편한 전화 통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이 주는 피로감은 제법 무거웠다.

연조는 휴게실 의자에 앉아 등받이에 깊게 몸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감은 두 눈이 가시에 찔린 듯 따끔거렸다.

회식은 고급스러운 소갈빗집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취향을 결정하는 건 선호도가 아니라 자본인지라 두둑한 지원금이 1차에서부터 거하게 풀렸다. 강준은 9시쯤 팀원들과 합류했다. 클라이언트 사에 컨펌을 받으러 갔다가 그곳 오너의 권유로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온 참이었다. 강준이 도착했을 때 테이블은 이미 먹다 남은 술과 고기로 어질러져 있었고, 일행은 미련 없이 2차를 외쳤다.

“팀장님, 고기 한 점도 못 드셔서 어떻게 해요. 조금이라도 드시지.”

일행의 뒤를 따라 걷던 강준의 곁으로 미라가 다가오며 염려와 애교 섞인 한숨을 흘렸다. 근처에 새로 문을 연 이자카야로 자리를 옮기기로 하고서 걷는 강남 밤거리는 역동적인 활기로 가득했다.

“그쪽에서 좋은 것 먹고 왔습니다.”

어소시에이트 컨설턴트 하나, 컨설턴트 둘, 시니어 컨설턴트 둘, 그리고 프로젝트 리더. 팀 파트너는 젊은 사람들 즐기는 자리에 뒷방 늙은이 신세는 사절한다며 갈빗집 앞에서 작별을 고했고, 남은 구성원은 여자 둘에 남자 넷이었다.

“뭐 드셨어요?”

“회장님께서 일본식 숙성회를 좋아하셔서 그거 먹었습니다.”

강준보다 한발 앞서 걷고 있던 연조는 진수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걸 지켜보며 나직이 뱉는 강준의 음성은 습기 없이 건조했다.

“그럼 2차는 다른 데로 갈 걸 그랬나 봐요. 팀장님은 1차, 2차 다 일본식이신데.”

“상관없습니다.”

“하긴, 분위기는 두 곳이 꽤 다르죠?”

“네, 뭐…….”

강준은 발랄한 물음에 건성으로 응하며 미간을 좁혔다. 연조의 귓가로 고개를 기울여 말을 건네는 진수의 얼굴이 네온 불빛을 받고 반들거렸다.

목적이 뻔히 보이는 시시껄렁한 잡담을 저따위로 은밀하게 할 것까지 뭐 있을까. 공연히 울컥한 강준은 곁에서 무어라 조잘거리는 미라를 두고 한 템포 빨리 걸어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다. 갑작스러운 강준의 등장에 떫은 표정을 짓는 진수에게 다가올 신입 채용 때 어떤 브레인 티저(brain teaser: 채용 인터뷰 시 지원자가 푸는 논리 문제)를 낼까 하는 따위의 싱거운 말을 건넸다. 이 자리에서 굳이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인데도. 강준의 개입으로 연조와 진수는 자연스럽게 멀어졌고, 연조는 뒤따라오던 미라에게 다가갔지만 그녀의 표정은 뾰로통했다.

“여깁니다. 분위기 괜찮죠?”

“오, 좋네요. 으리으리한데.”

5분 정도 걸어 도착한 일본식 술집은 돈을 꽤 많이 들여 치장한 티가 확연히 나는 곳이었다. 일행은 주당들로 북적이는 실내를 가르고 들어가 빈 사케 팩으로 벽 한 면을 빼곡하게 채워 장식한 자리에 앉았다. 강준은 의도하지 않은 척 가장하며 연조의 옆에 자리 잡았다.

“여기가 새로 열어서 그런지 안주 비주얼이 아주 훌륭하더라고. 일단 이거랑 이거 시키죠.”

“우리 이것도 먹어요. 닭똥집마늘볶음. 그런데 일본에서도 닭똥집 먹나?”

“글쎄, 잘 모르겠는데. 우리나라에서 개업한 이자카야인데 꼭 일본식 안주만 팔려고. 아무튼 그것도 시키지, 뭐.”

이곳에 몇 번 와 봤던 듯, 이현구 시니어 컨설턴트가 괜찮은 맛을 내는 안주 몇 가지를 제안했고, 술은 종류별로 테이블 위에 올랐다.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앞으로도 건투를 빕니다.”

“프로젝트 성공을 기원하며!”

“만수무강합시다!”

첫 잔을 높이 들어 건배한 후 술은 빠른 속도로 말라 갔다. 와규샐러드니, 크림소스연어구이니 하는 모양 좋은 안주들은 금세 헤집어졌다. 그들의 목적은 명확했다. 먹고, 죽자. 아니, 내일부터 다시 살아남기 위해 일단 오늘은 죽고 보자. 하지만 그 와중에 연조는 오늘도 살아남고자 몸을 사리고 있었다.

“못 마시겠으면 나한테 주죠.”

“네?”

“아깝군요. 2차는 내가 사는 건데.”

강준이 연조 앞에 놓인 물 잔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투명한 액체로 채워진 유리컵의 내용물은 이미 술도, 물도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회식 뒷수습은 제 몫이라…….”

붉어진 목을 긁적이며 연조가 말끝을 흐렸다.

“버디가 가르쳐 줬습니까? 뒷수습은 막내 몫이라고?”

“그런 건 아니지만…….”

겸연쩍은 연조의 시선이 자유분방하게 흐트러진 팀원들에게로 향했다.

“어젯밤에 연애하는 꿈 꿨습니다. 내 인생 최고의 악몽이었어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잖아요! 내 연애 세포는 다 죽어 버렸는데! 꼴까닥! 내 청춘을 일하는 데 몽땅 바친 결과가 고작 이거라고요! 어흑…….”

“와이프가 김치 가지러 이번 주말에 친정 가잔다. 왕복 여섯 시간 거린데. 주말엔 나도 좀 쉬고 싶다고 했더니 김치는 먹어야 할 것 아니냐고 하데. 아니, 뭔 놈의 김치를 2주에 한 번씩 담가? 김치 없음 밥 못 먹냐? 그러냐?”

“선배, 데카르트 알죠? 그 양반이 그랬잖아.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 많았던 데카르트의 삶은 행복했을까? 응? 선밴 행복해요? 만날 머리 터지게 생각하고 분석해야 하는 이 짓이? 응?”

대화는 중구난방, 몸은 뼈 없는 문어처럼 흐느적댔다. 일 얘기, 클라이언트 사의 주식 동향, 회사 내의 정치적 역학 관계 같은 다소 무거운 주제는 뇌에 알코올이 채워질수록 빠르게 증발해 버렸다. 스트레스가 많은 직업이다 보니 팀원들은 기회가 생길 때마다 자기를 놓아 버리는 일에 두려움을 갖지 않았다. 비워야 채울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신연조 씨 버디는 즐길 수 있을 땐 내려놓고 즐기라고 안 가르쳐 주었나 보군요.”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동안엔 사적인 모임은 포기하고 꼼짝없이 일에 매달려야 하는 것이 컨설턴트의 현실이긴 하지만 그렇기에 틈틈이 놀 수도 있어야 했다. 그렇다고 죽도록 술독을 퍼 대라는 건 아니지만 이완해도 괜찮을 순간조차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있을 필요가 있을까.

“실은 어제도 술을 좀 마셨습니다.”

피곤한 듯 잠시 감았다 번쩍 치뜬 그녀의 눈에 쌍꺼풀이 짙어졌다. 강준은 피식 웃으며 팔짱을 꼈다.

“그렇습니까?”

“네, 매운 닭발에 소주 일 병. 아까 반주로도 일 병 했습니다.”

“주량이 어떻게 됩니까?”

“일 병입니다.”

허리를 빳빳하게 세우고 눈동자에 총기가 돌도록 잔뜩 힘을 준 연조는 기본 안주로 나온 삶은 깍지콩을 까 먹었다.

연조가 하는 양을 바라보던 강준은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은 말짱한데 말하는 건 일병 군인처럼 경직됐고, 그 와중에 하는 행동은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뭐라고 할까…… 귀엽고.

이런 순간조차 철벽을 세우고 있는 것 같아 염려됐는데 지금 보니 그녀는 이미 취해 있는 것 같았다. 주사가 다른 이들처럼 요란스럽지 않을 뿐. 하지만 여기에서 한 발짝만 더 가면 마지막 정신 줄까지 놓아 버린 그녀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신연조 씨도 편히 있죠. 오늘 뒤처리는 나한테 맡기고.”

그걸 좀 보고 싶다는 짓궂은 마음을 감추고 강준은 짐짓 태연하게 말했다.

“내려놓고 즐기는 건 자신 없습니다.”

“왜죠?”

“두렵습니다. 어디까지 놓아 버릴지.”

조금은 뜻밖의 말, 이유를 알 수 없는 그늘진 표정. 취하지 않았다면 하지 않았을 말일 터였다. 그녀는 자기 속을 함부로 내보일 사람 같지는 않았다.

연조를 조금 더 지켜보던 강준은 새 소주병의 뚜껑을 까 그녀의 잔을 채우고 자기 잔도 채웠다. 그러곤 단번에 잔을 비워 버리고 다시 잔을 채웠다. 그 역시도 단숨에 비워 내곤 또다시 잔을 채웠다. 그리고 둥글게 뜬 눈을 빠르게 깜빡이고 있는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신연조가 마실 때까지.”

다시 술잔을 비워 냈다. 연거푸 넉 잔째의 잔을 채워 입술로 가져갔을 때, 연조의 잔도 깨끗하게 비워졌다.

“만족하셨습니까?”

미간을 잔뜩 구기고 퉁명스럽게 말한 그녀는 깍지콩을 깠다. 그 모습에 픽 웃어 버린 강준은 들고 있던 잔을 깊게 꺾어 마시고 나직이 말했다.

“내가 마신 만큼 마실 때까지.”

연조의 눈이 황당하다는 듯 벌어졌지만 강준은 잔을 또 새로 채웠다. 입술을 깨무는 그녀를 똑바로 응시한 채 소주 다섯 잔을 꽉꽉 채워 마시곤 테이블 위에 잔을 엎었다.

팀원들은 저마다의 대화에 빠져 있었고, 연조와 강준은 서로를 비낌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은 빠르게 오르내렸고, 강준의 가슴은 와이셔츠를 팽팽하게 당겼다. 아마도 그녀는 이 상황이 어이없겠지만, 강준은 지금이, 붉은 뺨의 그녀가 설레고 예뻤다.

“알겠습니다. 거래는 공정해야 하니까요.”

우리 사이에 무슨 거래가 있었고 술 마시는 횟수가 공정할 필요까지 뭐 있다고.

확실히 그녀는 취해 있는 듯 강준의 페이스에 손쉽게 휘말려들어 술잔을 부서질 듯 잡았다. 새 술병까지 따 가며 정확히 다섯 잔의 술을 마셨다. 엎어져 있는 강준의 잔을 바로 세워 그의 잔과 그녀의 잔에 여섯 잔째 술까지 따랐지만 차마 거기까지 객기를 부리진 못했다. 엉겁결에 행한 그녀의 공정 거래는 다섯 잔까지가 마지노선인 것 같았다.

“일이 힘듭니까?”

강준은 조금씩 좌우로 흔들리기 시작한 연조를 지켜보며 그녀가 따라 준 술을 마셨다. 연조의 술잔까지 비워 버리고 그 잔을 엎어 놓았다.

“힘들지만 보람 있습니다.”

“이 직업은 왜 택한 겁니까?”

“어쩌다 보니……. 실은 연봉이 높아서 지원했습니다. 이렇게 빡셀 줄도 모르고.”

“빡셀 줄도 모르고?”

“네. 빡셀 줄도 모르고. 인턴십 할 때 못해 먹겠다고 이 갈았으면서도요.”

세상에 이런 멍청이는 또 없을 거라는 듯 그녀가 제 머리를 콩콩 쥐어박았다. 강준의 입술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었다.

“그러는 팀장님은 왜 컨설턴트가 되셨습니까?”

“나도 어쩌다 보니. 실은 연봉이 높아서 지원했습니다. 이렇게 빡셀 줄도 모르고.”

“아……. 네.”

더 이상 두 눈에 힘을 주지 못하고 나른해진 그녀는 꼿꼿했던 허리에 힘을 빼고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올려 턱을 괬다. 졸음이 몰려오는지 눈꺼풀을 닫으며 크게 꾸벅거렸다. 그러다 깜짝 놀라 잠깐 든 정신에 다시 허리를 세우려다가 그대로 테이블 위로 드러누워 버렸다. 그러곤 그녀에게만 몰입하고 있는 강준에겐 충분히 들리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엎드려 누운 그녀를 바라보며 강준은 조금 더 짙게 미소지었다.

“물어보시죠.”

“나는 언제쯤이면…… 팀장님만큼 일을 잘하게 될까요…….”

“지금도 잘하고 있습니다.”

눈도 뜨지 못하고서, 그녀가 설핏 웃었다. 믿긴 어렵지만 그 말 참 고맙다는 듯.

“아직 보이지 않을 뿐이지 제법 걸어왔을 겁니다.”

“그럴까요…….”

“그럼요.”

나른한 한숨을 쉬는 그녀의 어깨가 천천히 솟았다 부드럽게 가라앉았다. 좀 더 선명해진 미소를 걸어 놓은 입술이 예뻤다.

“그런데요…….”

“네.”

“오진수 컨설턴트는 참 안됐어요…….”

“왜?”

강준의 미간이 절로 구겨졌다. 아까도 머리를 맞대고 친근하게 대화하더니 염려까지 해 주는 사이인 건가. 그녀의 말이 마땅치 않아 술병으로 손이 가는데, 느릿한 음성이 이어졌다.

“일하는 데 청춘을 다 바쳤다니까……. 어쩌죠? 정말 연애도 못하면…….”

못하면, 자기가 구제해 주려고?

취한 주제에 별걸 다 걱정하는 그녀가 못마땅했다. 좀 더 생산적인 걱정을 하면 안 되는 건가. 취해서 뇌 기능이 현저히 떨어진 사람에게 터무니없는 기대겠지만 말이다.

“스타크래프트에 바쳤겠죠. 대한민국 3, 40대 남자들의 청춘은 거기에 있습니다.”

“아…….”

고개를 들고 느리게 눈을 깜빡이던 그녀가 다시 테이블 위에 몸을 뉘며 웃었다. 강준도 엷게 웃어 보이며 술잔으로 손을 뻗었다. 그때, 테이블 위에 올려 둔 그녀의 휴대전화가 반짝반짝 빛을 내며 진동했다.

버디.

발신자를 알리며 휴대전화가 꽤 오랫동안 몸을 떨었지만 연조의 눈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많이 피곤했는지 이 소란 속에서도 온 힘을 다해 자려는 것 같았다.

잠시 망설이던 강준이 연조의 휴대전화를 들어 통화 키패드를 터치한 건 깊게 생각하지 않고 한 행동이었다. ‘아마도 회사일 때문에 한 전화겠지, 긴급한 상황일 수도 있을 테고’ 하는 생각뿐이었다.

- 연조야, 나 도착했어. 어디에 있어?

부드러운 목소리, 다정한 부름.

휴대전화를 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입을 굳게 다문 채, 강준의 시선이 새근거리며 자고 있는 연조에게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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