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 덫 (6/8)

6. 덫

아주 잠시 평온한 날들이 흘러갔다. 잠깐 모든 것이 과거로 돌아왔다고 생각하면 차라리 마음은 편했다. 정해진 날짜, 현실의 살얼음 위에서 위태롭게 이어지는 날들은 너무 달콤해서 두 사람 모두 애써 눈을 돌렸다. 일부러 현실적이거나 미래에 관한 이야기는 피한지 오래였다.

“여기는 서 변호사. 믿을만한 사람이니까, 한번 상담해봐.”

도혁은 약속대로 자택에 변호사를 불렀다. 회사와는 관계가 없는 개인적으로 이용하는 변호사였다.

“상황은 내가 대충 설명해뒀어.”

서 변호사가 도혁의 말에 답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설은 어색하게 고갯짓으로 인사를 했다. 변호사의 존재보다 도혁의 태도가 내심 마음이 쓰였다. 도혁이 자신을 웃으며 보내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한 적도 없었다. 그건 도혁의 성격에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런 설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도혁은 기꺼이 제 변호사를 데려왔다. 지금의 둘을 위해서가 아니라 혼자서 살아갈 설의 나머지 생활을 위한 변호사였다.

“그리 복잡한 문제는 아니니까 간단히 해결될 겁니다.”

성실한 인상의 변호사가 말했다. 도혁은 그런 변호사의 태도에 만족스러운 것 같은 눈빛을 보내더니 이내 일어섰다. 설이 의아한 눈빛에 오히려 웃어줄 정도로 도혁은 느긋했다.

“내가 없는 편이 얘기하기 더 편할 거 아냐.”

“하긴, 이런 내용의 상담은 개인이 편하죠.”

설이 답할 사이도 없이 변호사가 수긍해버렸다.

“잠깐 나갔다 올게. 편하게 얘기해.”

“……응.”

도혁은 변호사에게 몇 마디를 당부하더니 그대로 집을 나갔다. 모든 게 너무 쉬워서 오히려 설이 망연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하긴, 도혁도 지난 8년간 똑같이 지치고 닳아가며 어른이 되었을 거다.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자, 망연했던 기분은 홀가분함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쉬울 거였다면, 진즉 시간을 들여서 천천히 이별을 고할 걸 그랬다는 후회가 살짝 고개를 들었다. 우리 둘을 묶고 있었던 것은 이별보다는 그 방식이 아니었을까, 그런 허망한 생각도 조금.

“그럼, 백설 씨. 지금 상황에 대해서 말씀해주시겠어요?”

“……네.”

설은 고개를 들어 변호사를 봤다. 도혁이 받아들인 끝이라면, 자신도 그래야 했다.

***

도혁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사실, 그동안 도혁을 기다리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아버지나 몇 어른을 제외하고는 설이 다였다. 그 정도로 기다리는 건 질색이었다.

“……하, 짜증 나게.”

괜히 손가락을 두드리던 도혁은 결국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딱히 금연을 결심한 건 아니었지만, 설에게 칭찬 비슷한 것을 들은 후로는 괜히 멀리했던 담배였다. 오랜만에 들이마시는 연기는 매캐하고 짙게 폐부에 스며들었다. 딱, 지금 도혁의 기분 같았다.

“쓰레기만도 못한 게 사람을 기다리게 하고 있어.”

연기와 함께 못마땅한 목소리가 나갔다. 지난번, 훈을 발견했던 카지노가 위치한 호텔의 객실 안에는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햇살이 가득 들어오고 있었다. 불쾌하지만, 도혁은 훈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확히는 훈을 카지노에서 잡아 올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아직도 순진하기는.”

도혁이 낮은 혼잣말을 했다. 아까보단 입가가 온화했다. 지금, 설을 떠올리고 있어서다. 백설은 언제나 결정적인 한 수가 부족했다. 끝까지 모질지 못했고, 끝까지 지독하지 못하다. 그리고 언제나 냉소적인 도혁보다 순진했다.

“설마, 내가 이대로 놔줄 줄 알고.”

아까 자신을 보던 설의 눈동자엔 약간의 놀라움이 스쳤다. 그러나 이내 받아들였을 거다. 도혁도 앞에 놓인 인연의 끝에 동의한 것이라고. 바로 그런 점이 설과 도혁의 결정적인 차이였다. 애초에 도혁은 설을 두 번 다시 놓아줄 생각 자체가 없었다.

도혁이 두 대째의 담배를 피워물 때, 객실문의 벨이 울리고 세 명의 남자가 들어왔다. 둘은 정장을 입은 호텔 측의 보안 요원이었고, 가운데서 질질 끌려오는 꼴은 안 봐도 훈일 것이다.

“여기 두고 나가 봐.”

짧은 지시에 남자 둘이 꾸벅 묵례하고 나섰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호텔이 소유주는 도혁과 오랜 친분이 있었다. 이 정도의 일은 도혁의 선에서 마무리할 수 있다.

“사람한텐 밑바닥이 없다더니.”

도혁이 낮은 혼잣말을 뱉었다. 훈은 오랜만에 햇빛을 보는지 눈가를 찡그리며 도혁을 봤다. 그리고 잠시 후에야 조금 놀란 듯 표정이 움직였다.

“나, 누군지 알지?”

경멸스러운 눈초리와 함께 도혁이 묻자 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도혁의 맞은편에 놓인 자리에 엉거주춤 앉았다.

“그래, 그럼 내가 왜 왔는지도 알겠네.”

이런 인간과 말을 섞어야 한다니, 그 자체로도 짜증스럽다는 표정이다.

“혹시, 설이 때문에…….”

“백설이 아니면 내가 왜 그쪽 같은 쓰레기랑 얼굴을 마주하고 있겠어.”

신랄한 목소리에 훈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에게 인간적인 사고가 얼마나 남았는지는 몰라도 도혁은 이미 그를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재산을 다 말아먹은 거로도 부족해서 제 여동생까지 팔아치워서 도박했으니 그래도 싸다. 그 대상이 설이었다는 걸 떠올리면 이 손으로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지경이었다.

“요즘 한 사장이 너무 안 보인단 생각, 안 해봤어?”

“……그건.”

아무리 바보여도 한 사장이 악덕 사채업자라는 것을 모를 정도는 아니다.

“아니, 그런데 그걸 왜 권도혁 네가.”

훈이 복잡한 생각을 헤치며 도혁을 봤다. 비록 지금은 이런 꼴이었지만, 한때는 도혁과 농담도 주고받았던 사이였다. 그 사이에서 보석처럼 빛나던 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왜긴, 그 채권 내가 다 정리했으니까. 솔직히 나도 어이가 없었어. 너 같은 쓰레기한텐 한 푼도 아깝다고 생각하거든.”

도혁이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껐다. 섬뜩한 눈빛이 훈을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단 하나…… 백설의 혈육이라는 이유. 그 이유가 모든 것을 상쇄했지.”

적어도 도혁에겐 그랬다. 그 결과 저 인간이 뻔뻔하게 살 수 있다는 것엔 화가 났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설이 다치는 것보단 나았다.

“하지만, 설이는…….”

“그냥 닥치고 내가 하는 말이나 들어.”

도혁이 사납게 눈을 부라렸다.

“채권, 내가 다 정리했고 오늘부로 이 호텔은 물론이고 어지간한 카지노는 다 출입이 안 될 거야. 내가 블랙을 걸어놨거든.”

“뭐? 권도혁, 네가 무슨 권리로!”

“닥치고 들으랬지.”

훈의 안광이 번득였다. 여동생 이야기가 나와도 흐리멍덩하던 눈이었는데, 우스운 일이다.

“어차피 쓰레기 치우는 김에 확실히 하고 싶어서 내가 직접 입원이라는 걸 시켜주려고 해. 도박 중독도 병이라더라고. 난 그 병이 죽어야 낫지 싶은데, 차마 그럴 수도 없으니.”

벌컥, 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훈이 반항하는 것보다 도혁이 일어서 그의 어깨를 밀치는 것이 더 빨랐다. 가뜩이나 분을 참고 있던 도혁은 그대로 훈의 정강이까지 걷어찼다. 여동생을 팔고도 멀쩡했던 남자는 악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아, 전부 합법적으로 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

“안돼…….”

도혁이 제 손을 탈탈 털었다. 훈에게 닿았던 것이 불결하게 느껴진다는 듯이. 말은 입원이라고 했지만, 나을 병은 아니다. 도혁은 이대로 설의 인생에서 훈을 지워주기로 한 거다. 게다가 도혁이 말했듯이 모든 것은 합법적으로 진행할 수 있었다. 지금 설과 이야기를 나누는 서 변호사가 알아서 잘 처리해줄 것이다.

“안 된다고…… 무슨 권리로! 돈은 내가 갚을 수 있어!”

엉금엉금 바닥을 기는 훈이 도혁의 발목에 매달렸다. 도혁은 쳐다도 보지 않고 그 발을 뿌리치듯 걷어찼다.

“약속…… 지켰잖아. 왜 이제 나타나서 내 인생을 방해하는 거야!”

“뭐?”

쓰레기의 입에서 낯선 단어가 나왔다. 약속이라는 단어가 겨우 도혁의 걸음을 멈췄다.

“우리는 약속을 지켰다고! 지난 8년간 아무 말도 없었으면서 왜 지금 딴소리야?”

“약속?”

“그래, 지난달에도 똑같이 입금했잖아. 뭐가 달라진 건데?”

도혁의 미간이 기울었다. 뭔가, 자신이 모르는 것이 있었다. 좋지 못한 예감이 들었다. 도혁은 제 손이 더러워지는 것은 생각지도 않고 훈의 멱살을 일으켜 세웠다.

“자세히 말해 봐.”

으르렁거리는 듯이 낮은 목소리가 훈을 위협했다.

“그 약속이 뭔지, 지난달의 입금이 뭔지.”

섬뜩한 눈동자가 훈을 노려보고 있었다.

“똑바로 설명하지 못하면, 두 번 다신 카드도 못 잡게 그 손을 분질러 버릴 거야.”

살기 어린 목소리에 훈이 이리저리 시선을 피하며 초조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다시는 나타나지 말라고 했잖아.”

훈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나더러 설이 데리고 출국하라고…… 대신, 먹고 살 수 있게 지원해주기로 했잖아.”

처음 듣는 소리였다.

“누가.”

“물론, 내가 잠깐 실수로 그걸 잘못 쓰긴 했지만…… 애초에 우리 생활비였고, 약속이랑 내가 카지노에 다니는 건 아무 상관 없는 일이야. 그냥 지금처럼…….”

한시라도 기다릴 수 없는 도혁의 주먹이 날아가 훈의 얼굴에 꽂혔다.

“누가 그런 개소리를 했어.”

“누구라니, 왜 그래. 정말.”

도혁이 한숨을 뱉고는 다시 주먹을 들었다. 그러자 훈이 지레 물러선다.

“네가 그러라고 했다며!”

“……뭐?”

“권도혁 네가 마음 흔들리고 싶지 않으니까 다신 보기 싫다고…… 네 어머니 통해서 우리 남매 내쫓았잖아? 그 사고도 뭐도 전부 우리 설이 탓이라고. 운전자도 설이였던 걸로 마무리 지었으면서!”

송곳이 관자놀이를 찌르는 것 같았다. 지금 눈앞에서 소리를 치는 남자가 더 뭐라 하는지 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내, 내가 비겁하게 여동생 일로…… 먹고 사는 건 맞지만. 그래도 약속은 지켰어, 적어도…… 이런 취급 당할 이유는 없다고.”

찢어질 것 같은 이명이 들렸다.

“그냥, 여태까지처럼 네 눈에 안 뜨일 테니까…… 이렇게 살게 내버려 둬.”

도혁은 잠시 눈을 감았다. 신경의 다발이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주먹은 이미 피투성이였다. 퉁퉁 부어오른 주먹에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도혁은 엉망으로 어질러진 호텔 방의 한가운데에 혼자 서 있었다. 어디를 어떻게 때렸는지도 기억나질 않았다. 중간에 남자들이 들어와서 훈을 끌고 간 것만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씨발,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도혁은 빈 침대에 주저앉았다. 그제야 손등에서 쓰라린 감각이 조금 느껴졌다.

‘전부 설이 탓이라고!’

훈의 목소리가 뒤늦게 환청처럼 울렸다. 그 사고… 8년 전, 운전자, 약속, 입금, 그리고 어머니. 열거되는 단어에 따라서 도혁의 머리가 시끄럽게 돌아갔다. 두통이 지독한 나머지 시야가 침침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생각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런 적…… 없어.”

혼란 속에서 머리가 조여드는 것처럼 아팠다. 어딘가 빈 퍼즐의 조각들이 전부 칼날이 되어 뇌리에 꽂히는 것 같았다.

“내가 널 내쳤을 리가.”

시야가 어지러웠다. 그보다 더 어지러운 것은 마음이다.

“내가.”

그래야 했다. 그래야만 지난 원망을 정당화시킬 수 있었다. 상처 입은 것은 도혁이었다. 나쁜 것은 설이다. 일방적으로, 칼로 도려내듯 제 마음을 다친 것은 도혁 자신만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오랜 시간, 놓지도 못하고 미련하게 원망했던 건데.

“널…… 지키지 못했을 리가.”

그 사고로 한 가지 확실해진 것은 도혁이 제 생명보다 설을 더 지키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도혁이 깨어난 후 어머니는 몇 번이나 그 사실을 책망하듯 말했다. 별 상처도 없이 걸어 나간 설을 질시라도 하듯이, 그 여파를 고스란히 맞고 누운 아들의 곁에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아니야.”

입은 그렇게 뱉어도, 이미 마음속 어디선가는 알고 있었다. 아니, 지금 알아가고 있었다.

***

싸늘한 분위기 속에서 휴대폰의 진동음이 울렸다. 정 실장은 조용히 주머니에 손을 넣어서 전화를 돌렸다. 그러나 전화는 끈질기게 다시 울렸다. 벌써 세 번째다.

“전화, 받지 그래?”

“아닙니다.”

정 실장은 차분히 손을 모으고 서 있었다. 은옥은 의자에 등을 기댄 채 한쪽 다리를 꼬고 그런 정 실장을 위아래로 훑고 있었다. 노골적으로 추궁이라도 하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받아 봐, 스피커 폰으로. 이건 상사 명령이야.”

정 실장의 표정이 약간 굳었다.

“그동안 누가 고용주인지 잊은 게 아니라면.”

은옥이 확실하게 덧붙였다. 제이드 비서실은 모두 은옥의 세력에 지배되고 있었다. 자기 기반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도혁에게 정 실장이 붙은 것도 모두 모친의 의도였다. 은옥의 말처럼, 정 실장은 은옥의 명령으로 도혁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사람이었다.

“……여보세요.”

-정 실장,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정 실장이 마지못해 전화를 받자마자 스피커 너머로 거친 도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은옥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눈썹만 까닥였다.

“저, 이사님.”

-됐고, 뭐 하나만 빨리 알아봐. 나 예전에 교통사고 났을 때…… 사건 처리 기록부터 찾아와. 그리고 백훈한테 확인할 게 있어. 우선, 내가 집으로…….

“이사님.”

곤란한 표정의 정 실장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은옥이 전화를 낚아챘다.

“그래, 말 나왔으니 집으로 좀 와야겠다.”

-……정 실장?

“여자한테 정신 팔려서 네 엄마 목소리도 잊어버렸니?”

수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어차피 한남동 집으로 가봐야 네가 원하는 건 이미 없어.”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서늘한 목소리엔 적대감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본가로 와라, 오랜만에 가족 식사라도 해야겠다.”

도혁이 뭐라 답하기도 전에 은옥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러더니 후, 한숨을 내쉰다.

“얘는 도대체 누굴 닮아서 부모한테 대드는지 모르겠어.”

책망의 시선은 곧 상대를 찾았다.

“정 실장은 사리 분별이 정확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내 안목이 잘못됐던 건가?”

“실망 드려서 죄송합니다.”

“지금 잘잘못 따지자는 게 아니잖아, 내가.”

은옥이 신경질적으로 뱉고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막말로 정 실장이 역량이 부족해서 일을 이 지경까지 만들었겠어? 도혁이가 그렇게 치밀한 애도 아니고. 뻔히 집에까지 들여서 끼고 살았다는데, 안 그래?”

“죄송합니다.”

의외지만, 상사로서는 도혁이 훨씬 나았다. 아니, 도혁은 제법 괜찮은 상사였다. 적어도 이런 식으로 질책을 하는 일은 없었고 가끔 속을 썩이는 구석은 있어도 인간적으로 대해 줬기 때문이다. 바로 그 부분이 정 실장으로 하여금 여태까지 방관 아닌 방관을 하게 만든 것이다.

“하, 나는 정 실장만 믿고 놔둔 건데…… 이러면 정말 곤란해.”

도혁이 설을 만났다는 것, 그리고 집에까지 들여서 같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입을 다문 건 사실이었다. 정 실장에게 묻지 않은 질문에 침묵하는 건 거짓말의 범주가 아니었다. 내심, 쓸쓸했던 도혁에게 감정의 파문이 일어나기 시작한 모습을 지켜보고 싶기도 했다. 어느 정도는 도혁을 상사가 아닌 한 명의 젊은 남자로 동정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죽으라는 법은 없지. 도영이라도 눈치를 채서 망정이야, 안 그랬으면 이 정도로 안 끝났어!”

결국, 은옥이 언성을 높였다.

“내가 정말 어이가 없어서…….”

은옥은 설의 존재를 거의 잊고 있었다. 주기적으로 훈에게 보내는 돈은 당연히 아랫사람이 관리했기에 이미 관심에서 사라진 후였다. 벌써 8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것도 어린 애들의 장난 같은 연애. 끝났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아니, 여자한테 그렇게 주책맞게 보석이나 사주고 다녀서 고맙다고 우리 아들한테 말해야 할까?”

도혁은 나름대로 주위의 시선을 신경 썼다. 하지만 빌미는 아주 사소한 곳에서 잡혔다. 보석상의 실수였다. 제이드 그룹에서 물건을 가지러 왔다는 말에 직원의 착오로 팔찌까지 함께 보낸 것이다. 하필이면 그걸 받은 사람이 도혁의 누나인 도영이었다. 은옥의 눈썰미와 세심함을 그대로 닮았다고 유명한 도영이 그 실마리를 놓칠 리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악연이람, 정말……. 그 아이, 이름이 백설이었지?”

은옥이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늘 사고만 치고 다녔지 여자에겐 눈길도 안 주던 도혁이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타난 여자였다. 확실히 도혁의 안목은 탁월했다. 은옥도 설을 보자마자 단번에 이해했을 정도다. 한때는 도혁이 그리 좋다고 하니 조금 기울기는 해도 짝으로 삼으려는 생각까지도 했었다.

“미국에 나가 있는 줄 알았더니 버젓이 내 아들 집에 들어와 있고. 꼬박꼬박 돈을 타가던 오라비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둘 다 도혁이 한 짓일 거다. 바로 그 점이 은옥의 머리를 아프게 했다. 도혁은 자식 중에서도 유난히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 특히나 그 집념이 말이다.

“백설 씨는 어쩔 수 없었던 걸로 압니다.”

정 실장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뭐?”

“그 오라비가 도박에 빠져서…… 그 앞으로 사채를 지우느라 한국에 데려왔을 겁니다.”

“그러니까, 그걸 왜 이제야 나한테 말하냐고!”

히스테릭한 목소리가 찢어질 듯 울렸다. 정 실장은 품에 넣은 사표의 존재를 떠올리며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자신은 그만두면 끝이지만, 설에게는 인간적인 동정이 들었다. 8년 전의 사고 때, 은옥의 수족이 되어서 그 일을 마무리 지었던 정 실장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그 애가 죄가 있든, 없든, 그런 건 나한테 중요한 게 아니야.”

은옥이 쐐기를 박았다. 당시 운전자를 설로 바꾼 것은 혐의가 무거워서가 아니라 제이드 그룹이 검찰 수사 중이었기에 비판적 뉴스를 피하고 싶어서였다. 어차피 상대 차량의 운전자는 경상에, 사고도 그 탓이었기에 크게 문제가 되진 않았다.

“그 아이는 내 아들 옆에 있으면 안 되는 아이야.”

그때도 같은 결정이었다. 은옥은 망설이지 않았다. 도혁이 의식을 잃은 채 수술대에서 분투하는 동안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설을 설득했다. 아직 어린 여자아이, 그것도 큰 사고에 놀라서 이성적 판단이 힘든 설을 설득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집안도 기울고 있을 무렵이라 부모의 개입도 없었다.

“절대로.”

은옥은 몇 번이고 같은 일을 할 수 있었다. 아무런 죄책감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자식의 행복을 바라는 것이 부모고, 은옥은 도혁의 어미일지언정 설의 어미는 아니었으니까.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지…….”

부모란 때로는 자식을 위해 뭐든 할 수 있는 존재였다. 설령 당사자인 자식이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

설은 애써 초조함을 감추려 제 손가락을 꾹 쥐었다. 변호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도혁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한 무리의 정장을 입은 남자들을 끌고 나타난 사람은 전에도 봤던 인물이었다.

“사모님이 보내셔서 왔습니다. 김 실장이라고 합니다.”

뿔테 안경을 추어올리는 중년의 여성은 은옥의 수행 비서였다.

“이미 잘 알고 계시겠지만, 협조만 해 주시면 아무 문제없을 겁니다.”

김 실장은 8년 전에도 그렇게 말했다. 설에게 몇 번이고 사고 경위를 연습하게 한 것도, 경찰에 경위서를 써서 내게 한 것도 김 실장이었다. 설이 미국에서 지내고 있는 것이 확실한지를 파악하고 주기적으로 이사를 하게 해서 행방을 모호하게 만드는 것에도 일조했다. 추적은 5년이 지나자 끊겼지만, 설은 그때의 감시하는 것 같은 눈초리를 잊지 못했다.

“사모님께선 백설 씨가 여기…… 정확히는 막내 도련님 곁에 있는 걸 원치 않으십니다. 이해하시죠?”

말투만 부드럽지 시선은 그때와 같다.

“그럼, 모실까요.”

김 실장이 눈짓하자 남자들이 설에게 다가왔다. 설은 일부러 보란 듯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너무 갑작스럽네요.”

“사모님도 그렇게 생각하십니다.”

설은 예전처럼 어리지 않았다. 쓰라린 상처를 안고 살아온 8년의 혹독한 세월은 설을 조금은 어른으로 만들었다. 그 증거로 예전처럼 몸을 웅크리는 대신, 자신이 할 말을 했다.

“억지로 날 데려갈 권리는 없을 텐데요.”

의외의 말이었다. 여리게만 보이던 설은 김 실장을 똑바로 응시했다.

“이 빌딩 전체가 제이드 그룹의 소유라는 건 알고 계실까요?”

“그런 건 몰라요.”

어렸던 설은 작은 위세에도 금세 겁을 먹고는 했었다. 그땐 그랬다.

“하지만, 당신들이 날 마음대로 할 권리가 없다는 건 알죠.”

어린 설을 멋대로 떠밀어서 결정을 내리게 한 어른들이 나빴다는 것을 한참 후에야 알았다. 그때 느낀 후회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설은 빼앗긴 것을 되찾을 방법을 몰랐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과거나 후회를 되돌리는 법은 모른다.

“난, 내 의지로 여기 있을 거예요.”

그러나 이제는 무엇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사모님께 전해주세요.”

설이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또렷하게 말했다.

“떠날 때가 되면 떠날 테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하지만…….”

“끝까지 들어주세요.”

흔들리지 않는 설의 눈동자가 김 실장을 향했다. 그제야 김 실장은 자신이 상대하는 게 8년 전의 소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체감하는 것 같았다.

“권도혁이 직접 와서 떠나라고 하면, 그때 떠나서 두 번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게요.”

“그런 건 의미가 없습니다. 사모님은 그 부분을 가장 불편해하시기도 하고요.”

“저한텐 있어요.”

떠났으나 헤어지지 못했다. 이별을 고할 순간도 받아들일 여유도 없었다. 미래를 향해 뻗어 나가던 둘의 일상은 뚝, 끊겨버렸다. 너무 갑작스럽게 덧없이 끊겨버려서 차마 매듭을 지을 수도 버릴 수도 없었다. 미련은 도혁에게만 남은 게 아니었다.

“이젠 그렇게 허무하게 떠나지 않을 거예요.”

마음은 끊어진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바보 같아서 모른 척 한 발짝을 떼는 게 어려웠다.

“매듭을 짓고 싶어요.”

이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았다면 다가오는 새해에 지으려고 했다. 유예되었던 이별을 받아들이고 나누고, 이제는 앞으로 나아가고 싶었다. 그 후의 일생이 행복하든 불행하든 적어도 원망과 미련으로 사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그럼, 돌아가 주세요.”

김 실장의 매서운 눈초리가 설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아니면 지금 절 어떻게 하실 건가요?”

순수한 반문이었다.

“그런 지시는 없었습니다.”

이번에는 김 실장이 물러서기로 했다.

“하지만, 지시가 있다면…… 예, 그럴 겁니다.”

김 실장의 입장에서 하는 충고였다.

“저라면 지금 떠나겠어요. 사모님께서 섭섭하지 않게 해 주실 겁니다.”

설은 아무런 대답 없이 싱긋,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대로 돌아서 침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것으로 대답은 충분했다. 8년 전의 소녀는 이제 어른이 되어 스스로 이별할 권리를 찾고 있었다. 당장은 그것을 빼앗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BORI 갠소요게X

설은 문을 닫자마자 그대로 주저앉았다. 이제야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다시 오겠습니다. 그전까지 여기서 나가실 수 없다는 점은 알아 두세요.’

김 실장은 일부러 목소리를 키워 방문에 대고 말한 후에 사람들을 이끌고 나갔다. 설은 한참 후에야 다시 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잊고 살았던 불안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어렸던 설에게 김 실장으로 위시되는 은옥의 존재는 버거웠다.

‘어쩔 수 없단다. 이해하지?’

은옥은 그렇게 말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해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나도 네가 싫지는 않았어. 하지만…… 네게는 고칠 수 없는 잘못이 있잖니.’

마음이 온통 검은색으로 메워졌다. 도혁의 피로 칠갑 된 시야보다는 나았다. 설은 죄인이었다. 은옥이, 다른 누가 탓해서가 아니었다. 그 순간에 함께 있었던 연인이 그토록 처참한 꼴을 하고 있는데 제정신을 부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말렸어야 했는데. 다른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아니, 아니야. 내가 아니었다면…… 그런 사고,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죄책감은 피폐해진 마음을 먹고 괴물처럼 자라났다. 도혁은 간신히 사람의 형상을 이어붙인 듯이 기계 장치로 연명하고 있었다.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고통의 시간은 일분일초 정확하게 살갗에 새겨지며 지나갔다.

‘너희는 서로 떨어지는 게 나아.’

설이 두어 번 쓰러졌다 깨어난 후에 은옥이 그렇게 말했다. 은옥을 실제로 마주한 것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 후로 유리창 너머 또 수술을 마쳤다던 도혁을 봤다. 설을 감싸지 않았더라면 그 정도로 다칠 리가 없었다고 했다. 그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어떤 작은 확률의 존재를 떠나서 설은 자신을 죄인으로 정해버렸다.

내가 아니었으면.

나만 없었더라면.

제 마음을 집어삼킨 괴물은 처음부터 자신이 만들어낸 거였다. 하필이면 그때 ‘고칠 수 없는 잘못’이라는 것을 자각했다. 은옥은 그것을 어쩔 수 없는 결함이라는 듯이 말했다. 이미 죄인이었던 설은 담담하게 제 결함을 받아들였다.

“돌이킬 수는 없겠지.”

설이 쓰디쓴 혼잣말을 뱉었다. 과거도, 자신의 결함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만큼은 아무리 애를 쓴대도 바꿀 수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반복하지는 않을 거야.”

도혁의 품에 안겨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만신창이가 된 것은 둘 다 마찬가지였음을, 적어도 그렇게 사랑하고 아꼈다면 이별을 할 권리는 있었어야 했다는 것을. 우리는 그 이별을 위해서 너무 멀고 긴 시간을 돌아왔다는 것까지.

“난, 이제…….”

투둑,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무섭지 않아.”

자신을 타이르듯이 설의 목소리가 쓸쓸하게 울렸다.

“권도혁, 너랑 헤어지는 거…… 이제 무섭지 않아, 나는.”

그제야 꾹 누르고 참았던 울음이 복받쳤다. 설은 한참 만에 아무도 없는 곳에서 참지 않고 울음을 토해냈다. 그때는 그게 무서웠다. 도혁에게 이별을 고하는 것이, 우리가 더는 우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내가 결정짓고 모든 것을 확실하게 끝내버리는 것이 무서웠다.

“이제…… 무섭지 않아…….”

실은 떠나고 싶지 않았다. 너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는데.

“……그래야 해.”

우리는 8년 전에 헤어지지 못했다. 이별을 피해서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었다. 그 후로 마음의 시계가 멈췄다. 이제는 모든 매듭을 지을 때였다. 적어도,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을 거다. 그게 설이 도혁에게서 찾은 답이었다.

***

도혁이 거칠게 타이를 풀었다. 아까 엉망으로 된 주먹은 처치할 겨를도 없어 피가 엉겨 붙어 딱지가 졌다.

“이런, 미친…….”

거친 말과 함께 엘리베이터의 거울을 두드렸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설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 건데, 잠시 마음이 풀어진 탓에 방심하고 말았다.

“하…… 씨발, 진짜.”

지금 가장 화가 나는 것은 자신의 안일함이었다. 하긴, 8년 전에 있었던 모종의 교섭도 모른 채 잘만 살아왔던 자신이다. 이젠 환멸조차 새삼스럽지 않았다. 도대체 그간 증오했던 것은 누구였고 살았던 생은 무엇인지 아무것도 장담할 수가 없었다.

띵,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도혁이 빠른 걸음을 옮기자 여기저기서 수군대는 소리가 나왔다. 아직 근무 시간이었다. 특히나 사장실이 있는 층에 나타나기엔 너무 눈에 띄는 행색이다. 방금 누구를 쥐어패고 온 듯한 주먹과 헝클어진 셔츠, 살벌한 걸음걸이까지.

“권 이사님……?”

“비켜.”

수행 비서 한 명이 도혁의 얼굴을 알아봤지만, 도혁은 멈추지 않고 부사장실까지 직진했다. 이런 기세로 로비부터 밀고 들어왔으니 이목이 쏠리는 상황이긴 했다.

“그렇게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재차 수행 비서가 따라와 말리려고 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도혁은 그대로 사장실 문을 발로 걷어찼다. 그 너머에서 우아하게 티타임을 갖고 있던 도영이 그와 똑 닮은 미간을 찌푸렸다.

“……도혁이 왔니?”

수행 비서가 눈치를 보더니 꾸벅 묵례하고 부사장실 문을 닫고 나갔다. 어차피 소문은 다 퍼진 후겠지만, 앞으로 일어날 꼴을 모두에게 보이는 것보단 나았다.

“회사에서는 처신 똑바로 하라고 했을 텐데. 그리고 여긴 네가 뭘 해도 봐주는 제이드가 아니라 내 남편 회사야.”

도영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삭 가셨다.

“그래. 시댁에 체면 구기고 싶지 않으면,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에 똑바로 대답해.”

“너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누나 남편 회사라며. 그래서 내가 직접 왔잖아.”

도혁의 입가가 살벌하게 뒤틀렸다.

“백설 어딨어.”

예상했다는 듯이 도영이 눈초리를 뾰족하게 했다. 도혁은 재촉하는 대신 성큼성큼 책상으로 다가가 위에 놓인 화병을 높이 들어서 바닥에 던졌다. 쨍그랑, 요란한 소리는 분명 문밖까지 새어 나갔을 거다.

“너, 지금 나 협박하는 거니?”

도영이 같잖다는 듯 실소를 뱉었다. 열 살은 차이가 나는 막냇동생의 패악질엔 익숙한 태도였다.

“어디…… 겨우 이 정도로 되겠어? 칼부림 정도는 해야 뉴스에도 나올 거 아냐.”

“그것도 나쁘지 않지.”

쿵, 도혁이 피가 엉긴 주먹을 책상 위에 꽂았다.

“근데 나 혼자 가진 않을 거야. 잘 생각해, 누나 그 우아한 체면 말이야.”

“……난 모르는 일이야.”

“내 뒷조사를 할 만큼 음흉한 사람은 누나밖에 없지 않나? 아주 전문이잖아.”

“아니라고 했다.”

도영이 불쾌한 듯 고개를 돌렸다.

“난 손 뗐어. 적어도 네 여자 문제에 있어선 더 관여할 이유 없어.”

“아닐 텐데?”

“맞선까지야, 내가 손 쓴 건.”

재계에서 손꼽는 집안에 시집을 와서 부사장의 이름으로 회사와 가정을 이끄는 것도 벅찼다. 은옥의 채근에 몇 번 수연을 데리고 선을 보게 하려던 것은 맞지만, 그 이상의 관심은 없었는데 이런 상황이 억울할 정도다.

“그럼, 아버지 돌보느라 바쁜 엄마가 직접 내 뒷조사를 했다?”

“피해의식 좀 버려. 아무도 그런 거 안 했어.”

후, 도영이 짧은 한숨을 뱉었다.

“오히려 드러내고 다닌 건 너잖아.”

“내가?”

도영이 서랍에서 검은 케이스 하나를 꺼내서 책상 위로 내밀었다. 도혁이 부은 주먹으로 받아서 열자 그 안에서 백금으로 똬리를 틀고 있는 뱀의 붉은 눈동자가 빛나고 있다.

“내 비서가 찾아온 물건인데, 아무래도 제이드 그룹이라 같은 집이라 생각했나 봐?”

하, 어이없는 실소가 나왔다. 설을 붙들고 싶어서 맞춘 팔찌가 자신의 발목을 붙들다니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난 너한테 관심 같은 거 없어. 하지만, 알고도 방관하는 건 어머니가 가만두지 않을 테니 최소한의 도리만 한 거야.”

어차피 그런 식이었으면 빠르든 늦든 은옥이 알게 된다. 도영은 그때 제게 화가 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렇게 빠져나가면, 내가 납득할 것 같았어?”

“하…… 도혁아.”

도영이 일어섰다. 그리고 우습다는 눈빛으로 제 어린 동생을 주시했다.

“네가 뭐라고 생각하는 거니? 너, 그렇게 대단하지 않아.”

머리에 열이 오를 대로 오른 동생을 보는 건 썩 유쾌하지 않은 일이었다. 이성적이고 냉정한 도영에겐 더욱 성가신 일이다.

“여태 네가 날뛸 수 있었던 건…… 우리가 널 경쟁자라고 생각한 적이 없어서야.”

차가운 사실이었다.

“우린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지분을 결정받았고, 각자 제자리를 잡았어. 뒤늦게 태어난 너한테 그렇게 관심을 주는 것도 어머니 정도니 고맙게 생각해. 알겠니?”

과연, 기세로도 전혀 도혁에게 밀리지 않았다. 애초에 경쟁자가 아니었다는 말을 증명하는 것처럼.

“물론 나도 손톱만큼의 관심은 있지. 넌 내 유일한 동복형제니까.”

은옥은 후처였다. 사별한 제이드 그룹의 회장에게 시집가서 도영과 도혁을 낳았으니 진짜 동복형제라고는 둘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머니가 신경을 쓰기 때문이지, 네가 중요해서는 아니야.”

“잘됐네, 나한테도 우리 집 인간들은 한 번도 중요한 적이 없으니까.”

도영의 냉정으로도 도혁의 열기를 끄기엔 부족했다. 그 또한 너무 어리기 때문일 거다. 그러나 도영은 치기 어린 동생의 허물을 감싸 안을 만큼 관대하지 않았다.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

아주 옛날엔 도영도 그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경험자로서 충고하는데, 네 생각대로는 안 될 거야.”

“내 생각에 대해서 뭘 아는데.”

“알지…… 어차피 네가 가진 패는 뻔해. 백설이라고 했나? 그 아이랑 살겠다고 떼라도 쓰겠다는 거잖아. 아버지한텐 막내인 걸 내세워서 억지를 부릴 거고, 어머니가 반대하면 자해 쇼라도 할 거 아니었니?”

후, 도영이 싸늘하게 웃었다. 그런 허술한 수가 먹혔다면 도영이 여기 있지도 않았을 거다. 도영이라고 해서 청춘이 없었던 건 아니다. 사랑한 적 없었던 것도 아니다. 헤어지고 싶지 않았던 사람은 있었다. 그러나 결국 헤어졌다. 그 대가를 알기에 도영이 먼저 놓았다.

“누가 그런 수작한대?”

“그럼 네가 뭘 가졌는데. 네가 제이드 막내라는 거 말고, 어머니의 유일한 친아들이라는 거 말고, 넌 뭔데.”

도영만이 가할 수 있는 일침이었다.

“그딴 건 내가 알아서 해.”

도혁의 목소리가 섬뜩하니 낮았다.

“백설 어딨어.”

“모른다고 했잖아. 이제 가줄래? 나 우리 애들 하교 시간에 맞춰서 퇴근해야 하거든.”

뻔뻔한 도영의 낯을 보는 도혁이 기이한 웃음을 지었다. 말은 동생이라고 하면서 이 꼴이 되어서 온 사람을 두고도 태연히 차나 마시는 여자다. 그 말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8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것만 말해.”

“8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나?”

도영은 진심이었다. 그녀에겐 중요치 않은 시간이었다.

“내가 교통사고 났던 해. 백설한테 뭘 어떻게 한 거야.”

“아, 그거…… 뭐였더라. 말했잖아, 너한테 별로 관심 없다고.”

삑, 도영이 책상 위의 버튼을 눌렀다. 곧 보안 요원이 올 것이다. 도영이 혈육에게 내어줄 아량은 여기까지였다.

“말해. 진짜 관심 있는 일로 만들어주기 전에.”

“네가 어떻게?”

“모르지, 씨발. 누나 말대로 여기서 칼부림이라도 하면 뉴스에도 나오고 주가도 떨어지고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이래서 어린 건 피곤하다. 도영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들었다.

“주가 하니까 생각나네. 그때 너 때문에 구설에 오르는 게 싫어서 그 애가 운전한 거로 했어. 어차피 처벌도 안 받았으니 상관없었고.”

“그리고?”

막상 사실을 확인하자 되묻는 것 외에는 할 수가 없었다. 어디서부턴가 턱, 숨이 막힌 것 같았다.

“그리고 어머니가 적당히 유학이라도 가라고 하셨을걸. 대가도 꽤 착실히 받아간 걸로 아는데. 딱히 걔만은 아니야, 예전에 오빠들 여자 정리할 때도 그랬으니.”

“겨우 돈 때문에?”

“겨우……?”

도영이 비꼬는 말투로 도혁의 말을 따라 했다.

“너도 아버지와 어머니의 자식이 아니었으면, 겨우 돈 때문에 빌어먹고 살았을지도 몰라.”

피식, 도영은 농담처럼 쉽게 말했다. 흔히 말하는 수저를 물고 태어난 것은 도영도 마찬가지였지만, 적어도 도영은 이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 과정에선 어쩔 수 없이 단념한 것도 있었고, 타협해야만 하는 것도 있었다. 도혁은 그 모든 것들을 하찮게 여기는 거다. 바로 그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주제에, 아무것도 아닌 주제에.

“도혁아. 내가 진짜 마지막으로 동생이니까 충고할게.”

이건 진심이었다.

“그 여자가 어떤 의미인지, 뭐가 그렇게 소중한지…… 그런 건 접어두고 네 위치부터 생각해.”

도영은 또박또박 걸어서 도혁의 바로 옆에 섰다.

“어머니가 너한테 집착하는 이유는 네가 유일한 자기 아들이라서야. 그래, 그것뿐.”

도영 자신은 그 기대를 충족하지 못했다. 원해서 딸로 태어난 것도 아니었건만. 이제는 그 또한 전부 예전 이야기다. 도영에겐 새로 꾸린 가정에 사랑스러운 두 딸이 있었다. 그 아이들은 왜 자신이 여자로 태어났는지 따위의 쓰레기 같은 고민은 하지 않고 자랄 것이다.

“아버지는…… 너무 늦은 나이에 널 얻어서 항상 측은해하시는 거지. 막내는 부모와 함께할 시간이 가장 적다나?”

후후, 도영이 비틀린 웃음을 뱉었다. 어차피 아버지와 함께할 시간이 있던 자식은 없었다. 아버지는 가정에 시간을 제대로 내주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랬던 아버지가 막내라는 이유로 저 패악을 다 받아준다는 게 못내 아니꼬웠을 정도다. 동복인 도영도 그런데, 나머지 형제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충고가 너무 길다?”

“너한텐 그렇겠지. 뭐, 본론만 간단히 말하자면 사랑은 결혼하고도 실컷 할 수 있다는 거야. ……네 이복형처럼.”

도영은 싱긋 우아한 미소를 지었다. 장남은 이미 애인에게서 낳은 아이를 입적까지 시켰다. 남자라면 애인을 몇 두는 것은 흠이 아니었다. 도영에겐 허락되지 않았던 일이지만.

“아무리 어머니라도 네가 본처에게서 아들 하나만 낳은 후라면 전혀 상관 안 하셔. 이렇게 쉬운 문제를…… 참, 시간이 많아서 부럽구나.”

부사장실 문이 열리고 도영이 호출한 보안 요원들이 당도했다.

“그럼, 또 이 문제로 보는 일은 없도록 하자.”

도영은 산뜻한 인사를 남기고 가버렸다. 남은 것은 검은 케이스에서 붉은 눈을 뜨고 있는 뱀과 도혁, 그런 도혁을 끌어낼 사람들이다.

***

겨우 울음을 가라앉힌 설이 휴대폰을 찾았다. 그리고 조금 망설이다가 도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로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어쩌면 이 상황을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도혁아, 나 지금…….”

-알아.

숨을 몰아쉬는 도혁이 답했다.

“목소리가 왜 그래?”

-좀…… 아냐, 괜찮아.

“나, 방금.”

-알아.

같은 대답이다.

-넌 아무 말도 안 해도 돼. 아무것도 할 필요 없어. 잘했어, 그대로 집에 있어.

그러나 다른 것도 있었다.

-내가 꼭 데리러 갈게. 지금은…… 그냥 한 번만, 믿어줘.

거친 숨과 대비되는 그 목소리가 너무 절박하게 들렸다.

-약속했잖아.

새해가 되면 떠나겠다고 했다. 그러니 그전까지는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한 셈이다.

“……응.”

설은 분명히 대답했다.

“기다리고 있을게.”

이번에야말로, 약속을 지킬 수 있기를.

***

하늘이 흐려지더니 이내 진눈깨비가 내렸다. 비도 아니고 눈도 아닌 것이 질척하게 어깨를 적시는데도 도혁은 앞을 향해 걸었다. 언제 봐도 부담스러운 대문은 도혁의 존재를 확인하자 철컥, 열렸다.

“내가 진짜 아무것도 아니긴 한가 보네.”

도영의 말을 곱씹는 도혁의 말이 썼다. 정 실장과는 연락이 닿지 않았고 한남동의 자택은 어머니가 보낸 사람들로 철통같이 방어가 되고 있어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건물 자체는 그룹의 소유였기에 도혁이 경찰을 부른다고 될 일도 아니었다. 그나마 설과 통화가 되었으니 이 정도로 진정할 수 있었다. 은옥도 거기까진 염두에 둔 모양이다.

“그럼, 다 버려도 상관없겠지.”

망설임은 없었다. 도혁은 아주 오랜만에 도착한 본가를 돌아보지도 않고 쭉 걸었다. 도혁이 잃어버린 퍼즐의 조각은 지금 가는 곳에 있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

저택은 총 세 채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었다. 가운데의 가장 큰 건물이 본채였다. 도혁이 그곳까지 도착하자 미리 준비하고 있던 고용인들이 나와서 우산을 씌웠다. 어차피 젖을 만큼 젖었는데 무의미한 짓거리였다. 다만, 현관에서 건네는 수건까지 뿌리치진 않았다. 자신이 분명한 이성을 갖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사모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김 실장이 와서 깍듯이 말을 붙였다. 그러더니 도혁의 손을 보고는 다른 직원에게 무어라 지시를 내렸다.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던 것 같습니다. 잠깐 처치하고 가시죠.”

필요 없다고 말하려 했지만, 이내 생각을 바꾼 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숨을 고를 필요가 있었다. 곧 직원이 의자를 가져왔다. 도혁이 자리에 앉자 직원이 도혁의 손을 소독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도혁의 시선은 앞에 선 김 실장에게 꽂혔다.

“내 집에 왔다 갔다며?”

“예, 사모님 지시라 실례를 무릅썼습니다.”

누가 이 집 자식이 아니랄까 봐 서슬이 벌써 퍼렇다. 물론 김 실장에겐 익숙한 일이었다. 그보다 더한 도혁의 아버지와 은옥을 모신지가 반평생이다. 아무리 도혁의 서슬이 퍼렇다고 한들 그보다 무섭진 않을 테니.

“그때…… 8년 전에도 그랬나?”

도혁이 나머지 한 손으로 주머니를 뒤적여 담배를 물었다.

“도련님, 본가에서는 흡연을 삼가시라는 사모님 지시가…….”

“그럼 와서 직접 말하라고 해.”

찰칵, 기어이 불을 붙인 도혁이 연기를 내뿜었다.

“김 실장.”

“예.”

“이 집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어?”

“물론입니다.”

“……그래? 난 방금 알았거든.”

신랄한 도혁의 목소리가 연기와 함께 시야를 흐렸다.

“난 아무것도 모르는 병신이지. 진짜 시체처럼 누워서 숨만 겨우 붙이고 있을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어. 안 그래?”

꼿꼿한 자세의 김 실장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마치 도혁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다는 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전 자식이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적절한 대답이었다. 도혁의 손은 소독을 거쳐 하얀 붕대를 감고 있었다. 그대로 입에 담배를 문 도혁이 다시 김 실장을 봤다.

“내가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는 솔직히 모르겠어.”

도혁이 아는 제 부모는 보통의 부모는 아니었다.

“그런데 말이야. 내가 지더라도 부모가 아닌 김 실장 정도는 어떻게 할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렇지 않겠어? 결국, 피가 섞인 자식은 나니까.”

김 실장의 입가가 살짝 굳어졌다. 아무리 측근이라도 혈연에 견줄 수는 없다. 측근은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지만, 혈연은 그렇지 않았다. 자신의 평생을 보좌에 바친 김 실장은 그 잔인한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마무리는 제가 하죠.”

그 말에 붕대를 감던 직원이 김 실장에게 넘기고 자리를 떴다. 나머지 직원들은 멀찍이 떨어져 있어 낮은 목소리를 들을 만한 사람은 없었다.

“도련님, 아니…… 이사님은 원하는 걸 얻게 되실 겁니다. 결국에는요.”

“그게 무슨 뜻이야.”

“자세한 건 사모님이 아실 겁니다. 올라가서 말씀 나누시죠.”

김 실장은 끝까지 제 위치를 지켰다.

“그전에 담배는 여기 꺼주세요.”

도혁은 그 말에 코웃음을 치고 바닥에 꽁초를 던졌다. 아까부터 숨이 답답하다 했더니 이 집 특유의 향기와 압박감 때문이었다. 도혁은 후, 깊은숨을 내쉰 후에 층계를 올라갔다. 어머니는 정원이 잘 보이는 2층의 서재에 있을 거다. 도혁이 어렸을 때부터 가장 싫어하던 장소였다.

쾅, 도혁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은옥이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는 태연히 앉으라고 눈짓을 했다. 도혁이 앉자, 은옥도 맞은편의 소파에 앉았다.

“손은 왜 그 모양이니?”

아무렇지도 않은 어머니의 태도가 역겹다.

“누나한테는 또 무슨 행패고.”

예전이나 지금이나 어머니는 달라진 게 없었다. 도혁이 이 집에서 멀어지며 그 사실을 잠시 잊었을 뿐이다. 은옥은 항상 도혁을 어린아이로 봤고, 자신에게 종속된 존재라 여겼다. 그러니 지금도 저렇게 별일 아닌 듯이 자신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쯧, 담배 냄새…… 이 원장이 몸 생각하라고 한 거 그새 잊었어?”

“지금 그게 문제에요?”

도혁의 새카만 눈초리는 제 아버지를 닮았다. 도혁이 단지 막내여서 사랑을 받은 건 아니었다. 형제 중에서 가장 자신을 닮았다는 부친의 생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아무튼, 성질 하고는 네 아버지 닮아서.”

은옥은 항상 그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도혁은 정말로 제가 아버지를 닮았는지, 은옥이 그렇게 세뇌를 시킨 건지 알 수 없게 됐다.

“나한테 할 말이 있을 텐데요.”

“뭐, 엄마가 너한테 석고대죄라도 하려고 부른 줄 알았어?”

후, 한숨을 내쉰 은옥이 애써 다정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엄마가 예전에 너 모르게 정리한 일은 있어. 그것 때문에 우리 아들이 화난 것도 다 이해해.”

차가운 불씨가 가슴 한가운데 떨어지면 이런 기분일 것 같았다.

“하지만, 엄마 입장도 생각을 해줘야지. 언제 엄마가 너 해되라고 한 일이 있어?”

숨이 막힌다. 은옥의 눈에 찬 감정이, 자신을 보는 그 소유욕이.

“엄마가 뭐하러 꾸역꾸역 회사에 얼굴 비추고, 박 상무도 챙기고, 이사회까지 나가겠어. 다 네 자리 만들어주려고 그러는 거잖아. 네 몫은 엄마가 확실히 챙겨주려고.”

한때는 저런 것도 사랑의 일종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야 다 같은 자식이라도, 엄마는 아니야. 엄마는 우리 아들밖에 없어.”

그 말이 더 목을 조른다.

“그래서요?”

“어느 부분에서 그렇게…… 아니다. 그래, 엄마가 마음대로 처리한 건 미안해. 그때, 네 상태도 안 좋고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랬어.”

도혁은 굳이 따지자면 불효자였다. 하지만 그전까진 사소한 말썽이었다면 8년 전의 사고에선 부모보다 앞에 가는 불효를 저지를 뻔했다. 그때 태운 부모의 속을 생각하면 확실한 불효자다. 그 사건 후로 그나마 부모와의 관계가 원만해졌다고 여겼던 제가 바보였다.

“솔직히 엄마 마음에는 어릴 때 만난 인연이고 하니, 그렇게 진지한 줄 몰랐어. 네가 그렇게까지 그 아이 생각을 하는 줄 알았으면…….”

그때 죽여버렸을 텐데. 은옥은 그런 속내를 숨긴 채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엄마가 사과할게.”

“그래야죠.”

“서운했겠지만, 마음 풀고 오랜만에 아버지라도 뵙고 가. 아버지도 많이 늙으셨어, 응?”

도혁은 제 탓이 아니라는 듯 황당한 표정으로 은옥을 봤다. 이내 픽, 하고 실소가 새 나온다.

“엄마…… 지금 나 장난치는 것 같아요?”

“사과한다니까. 그럼 그 이상 어떡해야 하니. 애초에 네가 빌미를 만든 것도 있어.”

“그것도 엄마 말대로 지난 일이죠.”

은옥의 표정을 꿰뚫어 보는 것 같은 검은 눈동자가 예전 같지 않았다. 게다가 도혁은 이미 은옥이 자신을 속여왔다는 것을 알았다. 한번 피어오른 의심은 도혁에게 더 냉정한 생각을 품게 했다.

“도혁아, 세상엔 좋은 여자가 많아. 너 그동안 병원에 누워 있느라 생때같은 청춘 보낸 거 생각하면 엄마는 안타까워 죽겠어.”

“지금 내가 여자 하나 때문에 이러는 거 같아요?”

맞다. 정확히는 여자 하나가 아닌 백설 때문이다. 하지만 은옥은 도혁이 설에게 어느 정도로 집착을 하는 지까진 몰랐다. 어차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부족한 것 없는 도혁이 왜 하필 여자 하나에 매여서 벗어나질 못하는지.

“날 기만한 거잖아. 8년 동안이나.”

서늘한 목소리였다.

“내 사생활 하나 제대로 모르는 인간이 남 위에 설 수 있다고 생각해요?”

솔직히 그런 것엔 관심 따위 없었다. 그러나 은옥에게는 그보다 반가운 소리가 없었다. 도혁이 스스로 제 위치를 탐낸 적이 없었기에 더욱.

“그래, 내가 판단을 잘못했네. 벌써 이렇게 다 큰 줄 모르고.”

은옥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도혁은 그 모습을 주시하고 있었다. 냉정을 가장하는 것은 사냥에 있어 가장 필수적인 동작이다. 숨소리를 죽이고 무엇을 노리는지 모르게 해야 단번에 사냥감의 목을 물어뜯을 수 있었다.

“괜한 걱정이었구나. 나도 참, 도혁이 네 일만 되면 어찌나 신경이 쓰이는지.”

후처로 들어와 이미 훌쩍 큰 전처의 자식들과 세력을 다투기는 쉽지 않았다. 그 세월을 위해서라도 제 아들인 도혁이 그룹의 주도권을 가져야 했다. 은옥의 인생에서 매달릴만한 건 그것뿐이었다.

“조만간 그룹 승계도 정해질 거고, 네 아버지도 상속 문제를 아예 끝낸다고 하셔서 사소한 데도 너무 예민했나 보다.”

제이드 그룹의 총수는 막내로서 도혁을 총애하긴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경영권과 밀접한 상속을 받아내기엔 불안했다. 은옥이 물밑에서 힘을 쓰는 것도 다 그걸 위해서다. 그 상황에서 여자 문제같이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다.

“네 아버지는 아직 널 어리게만 보셔. 그러니 어서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아. 그래야 아버지도 널 믿고 맡기실 게 아니니?”

늘그막에 손주를 안겨주고 그 환심을 사서 상속에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겠단 심보다. 그 모든 과정에 도혁의 의견은 필요치 않았다. 아니, 처음 도혁의 존재부터가 은옥에게는 수단이자 목적이었을 테니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수연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러는 거야?”

“그런 게 중요해요?”

아까부터 도혁은 계속 은옥의 말에 되묻고 있었다. 은옥은 늘 바라던 대로 철이 든 아들의 모습에 그조차 눈치를 채지 못했다.

“조건은 가장 적당하고, 처가에서도 힘을 실어줄 테니. 어지간하면 수연이가 좋다는 거지.”

“근데, 옛날엔 그 애도 좋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 애?”

“백설, 좋아했었잖아.”

도혁은 은근슬쩍 설을 끌어냈다.

“아, 그 아이…… 미인이었지. 닮으면 손주가 얼마나 예쁠까 싶어서 좀 기울어도 좋았어. 안 된 말이지만, 우리 집에서 도영이랑 너 빼고는 인물이 영 빠지잖니.”

후처의 콤플렉스인가, 은옥은 제가 낳은 자식들만 싸고돌기 바쁘다.

“그래요?”

한 발짝, 한 발짝, 도혁이 다가가고 있었다.

“그때 사고로 경황이 없었어. 뒤늦게야 그 아이 검사 결과를 봤는데, 우리 재단 병원이라 그 김에 몇 가지를 더 봤거든. 미리 알아보길 천만다행이지.”

은옥은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을 쓸어내렸다.

“나팔관이 막혔다나 뭐라나…… 아무튼 평생 임신은 못 할 거라더라.”

도혁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참지 않았다면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그게 전부?”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바란 적도 없는 미래의 2세를 가질 수 없다는 이유로 설을 내쫓았다. 도혁은 8년간 그 사실조차 모른 채로 원망을 가누지 못하고 살았다.

“그게 가장 중요한 거야. 너 결혼하고도 정 마음에 걸리거든 만나든지 하렴. 그것까진 엄마가 뭐라고 할 수 없지.”

툭, 도혁의 마음속에서 끈이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먼저 네 가정 만들고 아이부터 낳아. 그다음에는 뭐든 마음대로 하고. 엄마가 늘 말했지? 우선 의무부터 다하고 권리를 찾아야 하는 법이라고.”

도혁은 그 자리에 선 채로 묵묵히 은옥을 봤다. 기억보다 조금 늙은 어머니는 눈을 빛내며 제게 미래를 기대하고 있었다. 도혁이어서가 아니다. 그저 지금 자신의 유일한 아들이라는 이유, 그게 은옥이 도혁에게 기대하는 전부였다. 조금만, 단 한 번이라도 도혁을 한 명의 사람으로서 들여다보려 했다면 은옥은 저런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래, 의무와 권리는 함께 있는 거였죠.”

실소가 배어 나왔다.

“이제 완벽히 이해한 것 같아요.”

“암, 그래야지.”

모자는 평생 서로를 알 수 없을 거다.

“일단 엄마가 나한테 한 우스운 짓거리부터 당장 치워요. 남들이 보면 내가 아직도 엄마 말이나 들어야 하는 어린앤 줄 알잖아.”

도혁의 입꼬리엔 희미한 미소가 있었다. 그래서 은옥은 제 아들이 살기 어린 눈으로 자신을 보는 것을 끝까지 눈치채지 못했다.

“새해까지 알아서 신변 정리해둘 테니, 그다음에 엄마 생각대로 해요.”

“……그럴래? 그래, 어차피 얼마 안 남았으니까.”

은옥이 그제야 완전히 안도한 미소를 지었다. 새해가 되어도 저렇게 웃을 수 있을까. 도혁은 제 양손에 쥔 의무와 권리라는 것을 자각했다. 그것을 사용하는 것은 도혁의 몫이다. 그러고 나서도 은옥의 생각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남을지는 의문이지만.

어쨌거나, 일시적인 교섭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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