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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교차점 (5/8)

5. 교차점

하늘이 온통 흐렸다. 낮인데도 집 안이 온통 컴컴할 정도였다. 무음으로 돌려둔 도혁의 휴대폰에 부재중 메시지가 산처럼 쌓였지만, 좀처럼 집어들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서로의 품에서 맞이한 아침은 나른하고 달콤했다. 먹구름 덕분에 날이 바뀌고 해가 났다는 느낌도 전혀 없었다. 아직도 계속 같은 밤이 이어지는 것 같았다.

“깼어?”

도혁이 부스스 눈을 뜨는 설을 보고 말했다. 설은 잠시 눈을 뜨는가 싶으면 금세 또 잠이 들곤 했다. 아마 지금이 몇 시인지도 모를 것이다.

“더 자.”

그 말에 설이 고개를 저었다. 이미 나신으로 도혁의 품에 안긴 탓인지 설에게 다른 경계심은 보이지 않았다. 먹구름이 잠시 햇빛을 가려서 만들어준 곳에서 굳이 현실을 떠올릴 필요는 없었다.

“……안 갔어?”

“내가 어딜 가.”

설은 뭐라 더 말하려 하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마셔.”

도혁이 몸을 일으켜서 생수병을 건넸다. 설은 그것을 받아 마셨다. 얼마나 오래 잔 건지 물이 달았다. 설이 생수병을 비우자 도혁은 다시 팔을 뻗어 설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나란히 침대 헤드에 기대앉자, 물씬 옛날 생각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지금 몇 시야?”

“몰라.”

도혁은 이 순간을 깨고 싶지 않았다. 지금 필요한 것은 시계가 아니다.

“잊어버렸나 본데, 나도 이제 어른이야.”

너무 당연한 말에 설이 도혁을 돌아봤다.

“내가 있고 싶을 때, 있고 싶은 데 있을 거라고.”

그런 점이 오히려 어른과 거리가 먼 거 아닐까. 설은 문득 떠오른 생각을 그냥 삼켰다.

“병원에 있던 시간이 길었어. 재활한다고 또 시간 꽤나 잡아먹었지.”

도혁이 묻지도 않은 말을 담담히 뱉었다.

“퇴원하고 나서도 한참 했으니까. 그럭저럭 살 만해지니까, 이십 대 중반이었고.”

혼자 남은 후의 이야기였다. 허공을 응시하는 도혁이 눈을 조금 가늘게 떴다.

“그 후엔 억지로 학위 따고, 돈으로 적당한 경력 좀 만들고. 작년에 입사해서 지금은 전무야.”

겨우 몇 마디로 메우기엔 너무 큰 공백이었지만, 도혁은 자신이 어떻게 살았는지 설이 알길 바랐다.

“회사에서 하는 건 없어. 어차피 경영은 아버지나 형들이 있으니까.”

다소 무책임한 말은 막내의 특권이었다. 워낙 나이 터울이 많이 지는 막내다 보니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어머니인 은옥만이 이런 도혁의 태도를 못마땅해했지만, 그런다고 정신을 차릴 도혁도 아니다.

“됐지? 내가 아무 데도 안 가도 되는 이유.”

설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괜히 매듭을 짓는 도혁이다.

“……넌?”

잠깐 망설이다 뱉은 말이었다. 설을 다시 만난 장소가 장소인 만큼, 떨어져 있던 사이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 묻기가 두려웠다.

“싫으면 대답 안 해도 돼.”

“그런 건 아냐. 그냥…… 평범했어.”

사고 후, 스물이 되고 설은 쫓기듯 출국했다. 아무리 병상에 누워 있었다지만 도혁이 갖은 수를 쓰지 않았을 리 없었다. 그런 도혁의 손길이 닿지 않을 정도로 먼 곳이었다.

“유학을 가긴 했는데, 졸업은 못 했어. 별로…… 좋은 학생은 아니었거든.”

설이 조금 민망한 듯이 말했다. 출국한 건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공부가 들어올 리 없었다. 도망친 곳에 천국은 없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그러다 아버지도 편찮으시고, 집안도 안 좋아져서 그냥 돌아왔어.”

“언제?”

“좀… 됐어.”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은 참담했다. 물론, 진짜는 돌아온 후부터 시작이었다. 나쁜 것은 점점 나빠지기만 했다. 설은 거기에서 체념을 배웠다. 자신이 알고 있던 세상이 아니었다. 한없이 초라해진 삶, 아버지가 입원한 병원의 주차장에서 소리 죽여 울 때 올려본 달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아무도 안 만났어. 그냥…… 그럴 처지가 아니어서.”

그게 도혁을 찾지 않은 변명이 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당시 설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다른 세상에 떨어진 기분, 진짜 절망이 눈앞에서 시작되는 것 같은 불안, 그 안에서 설이 쉽게 손을 뻗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이 빛나던 시절의 설을 아끼고 사랑해줬던 만큼, 설은 꼭 그만큼 추락하고 있었다.

“오빠가 사채까지 쓴 건, 최근이었거든. 그 이유가 뭔지는 이제 알았지만.”

설은 카지노에서 봤던 훈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그래도 한때는 건재했던 회사가 전부 무너지고 위험한 돈까지 끌어다 쓰게 된 이유를 그제야 납득하다니, 자신도 참 바보 같았다.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도혁이 낮게 물었다.

“그 새끼, 내가 죽여줄까?”

진심이었다. 설을 그런 벼랑까지 내몰았던 훈을 제 손으로 찢어 죽여도 성이 차지 않을 것 같았다. 그것도 가족이라는 작자가, 한낱 카드 놀음에.

“아니.”

설이 고개를 저었다.

“이젠…… 가족이라고 생각 안 해. 나랑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혼자 살아봐야지.”

“그럼, 내가.”

“아니, 아니야.”

설이 몸을 일으켰다. 맞닿았던 맨 살갗이 떨어졌다.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게 있어.”

도혁은 쓴맛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지금을 그냥…… 우리의 교차점이라고 생각해 줄래?”

도혁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우리 각자의 방향으로 가다가 잠시 마주친 점이라고.”

설이 천천히 덧붙였다.

“그게 아니면…….”

도혁이 미간을 찌푸렸다. 다음에 나올 말은 뻔했다.

“알았어.”

마음에도 없는 답은 즉각 튀어나왔다.

“네 마음 편한 대로 해.”

도혁은 예전처럼 너그러웠다. 그게 어디까지나 말뿐이라는 것을 지금의 설은 모른다.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하고 쭉 뻗어가는 평행선보다는 잠깐이라도 겹칠 수 있는 교차점이 낫다. 물론, 도혁은 그 점을 언제까지고 붙들어둘 자신도 있었다.

“그럼…… 새해엔 떠나도 될까.”

설이 어렵게 말을 골랐다. 과거의 진심을 확인한 이상 거래는 종잇조각에 불과했다. 회수도 금액도 의미는 없을 것이다. 설에게는 그저 진짜 이별을 위한 유예로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새해라.”

도혁이 낮게 읊었다. 이제 연말이니 얼마 남지 않았다.

“그동안 네가 우리 둘에게만 집중할 수 있다면, 좋아.”

지나간 일도, 각자 가야 할 길도 잊으라는 뜻이다. 그때까지는 매일 이런 아침을 맞이하고 싶단 도혁의 바람이기도 했다.

“시나리오 없는 영화라도 한 편 찍는다고 생각하든지.”

“이별 여행 같은?”

“그렇게 생각하고 싶으면 해.”

덧붙인 말이 조금 씁쓸해서 설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한때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이별 여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자신이 하는 것도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여행보다 더 길고 미련하게 이별을 기다리는 꼴이었다.

“그래. 노력해볼게.”

그러고도 지금 이 순간을 깨기가 싫으니 결국 설이 택한 것이다. 기나긴 악몽 같았던 지난날에 대한 보상으로 조금만 달콤한 꿈을 꾸고 싶었다. 설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아주 잠시, 잠시만 이 현실을 잊을 것이다.

***

신기한 일이었다. 과거는 변하지 않는데도 지금의 둘 사이에 놓인 공기는 확연히 달라졌다. 설이 움츠리며 경계하는 태도를 거두자, 도혁의 눈빛도 함께 누그러졌다. 게다가 새해라는 끝을 정하고 나자 정말 이별 여행이라도 온 것처럼 거리낄 것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 탓도 있었다.

“진짜 아무것도 없네.”

“어, 오늘은 정릉 댁도 오지 말라고 했어.”

텅 빈 냉장고를 보는 설의 등 뒤에 어느새 도혁이 바짝 서 있었다.

“배고파? 나가자.”

그러면서도 도혁은 선반 어디선가 비스킷을 꺼내서 건넨다. 설에게 익숙한 브랜드였다. 국내에선 구하기 어려운 흔치 않은 브랜드인데 우연히 여기 있었다고 생각해도 되는 걸까. 설은 비스킷을 오독, 씹으며 모른 체는 그만두기로 했다.

“물건들, 거의 그대로네.”

8년의 공백이 무색하게 도혁의 취향은 한결같았다. 욕실에 있는 보디 제품부터 시작해서 냉장고의 생수, 탄산수, 하다못해 우유의 브랜드까지 같다. 전부 설이 좋아하고 즐겨 썼던 것들이었다. 하다못해 벽에 걸린 그림 하나, 침구의 디자인 하나까지도 설이 지나가던 말로 한 번씩은 언급했던 것이었다.

“내가 좀 일관적이지.”

도혁의 취향은 그때나 지금이나 백설이다. 참으로 일관적인 집념이었다.

“나가자, 밥 먹게.”

아까부터 도혁이 자꾸 채근하고 있었다. 어쩌면 도혁은 예전을 재현하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다. 매일 둘이 만나서 맛있는 것을 나눠 먹고 하루 종일 쏘아 다니던 시절을.

“진짜 회사 안 가?”

“어, 나 휴가야.”

도혁이 뻔뻔하게 대답했다. 일방적으로 통보한 거지만, 어쨌든 자신이 책임자니 틀린 말은 아니다.

“들릴 데도 있으니까, 얼른 나가자.”

설은 냉장고 문을 닫으며 잠시 망설였다. 도혁의 손길이 그런 설의 허리를 감아온다.

“안 나갈 거면…… 다른 거 해도 되고.”

끈적한 목소리가 귓가에 감겼다. 마음이 가라앉은 것과 별개로 온몸이 아직도 쑤셨다. 설은 스프링처럼 반동하며 도혁의 손길에서 벗어났다.

“아니, 나가는 게 좋겠어.”

“잘 생각했어.”

준비하겠다며 얼른 내빼는 설의 뒷모습을 보던 도혁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고였다. 도혁은 부재중 메시지가 쌓인 나머지 거의 방전되어 가는 휴대폰을 꺼내서 정 실장에게 간단한 메시지를 보냈다.

***

도혁이 출근하지 않은 사무실의 분위기가 밝았다. 평사원들에게 도혁의 존재는 있으나 마나 한 것이었지만, 그래도 높은 사람이 한 명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분위기가 달라진다. 그리고 그만큼의 근심을 짊어진 정 실장이 빈 이사실을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정말 죄송합니다만, 이사님이 현재 부재중이십니다.”

일방적으로 자신의 휴가를 통보한 도혁 대신 사과해야 하는 것은 정 실장이었다. 하필 이런 날은 평소에 없던 손님까지 온다. 일명 머피의 법칙이다.

“정 실장이 죄송할 건 없지.”

도영이 쿨하게 말을 잘랐다. 제이드 그룹 오너 가의 유일한 딸이자 도혁의 누나였다. 그나마 도혁과 나이 차이가 가장 작게 나는 형제이기도 했다. 평소라면 호텔 부를 맡은 도영이 여기까지 올 일은 없었지만, 오늘은 일행과 함께였다.

“그래서 도혁이는 어디?”

화려한 화장을 한 도영이 싱긋 웃으며 정 실장을 봤다.

“그 부분은 정말 죄송하지만…….”

“아니, 정 실장. 죄송하지 말고, 그냥 도혁이 어디 있는지 얘기를 하면 되잖아.”

나긋나긋한 목소리의 도영은 도저히 삼십 대 후반으로는 보이지 않는 모습이다. 오히려 곁에 선 여성과 또래로 보였다. 그쪽은 아까부터 안절부절못하며 도영을 말리려는 모양이지만, 별 성과가 없었다.

“언니, 오늘은 그냥 가요.”

“그냥 가긴 어딜 가? 대체 바람을 몇 번 맞히는 건데?”

이 대목에서 정 실장이 다시 한번 고개를 푹 숙였다.

“바쁜 일이 있으시겠죠…….”

도영의 팔을 잡아끌며 말리는 것은 수연이었다. 청초한 분위기에 귀티 나는 자태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화려한 도영의 곁에서도 밀리지 않는 존재감이 있는 여자였다. 과연 그 은옥이 도혁의 짝으로 선택할만한 여자였다.

“바쁜 일은 무슨, 내 평생 걔가 일하는 걸 본 적이 없는데.”

이번에도 정 실장은 할 말이 없었다.

“안 그래, 정 실장?”

도영은 호락호락하게 물러나지 않을 심산이다. 사실 여기까지 쳐들어 왔을 때 이미 인내심의 한계였다. 수연과 만남에 도혁이 일방적으로 불참한 게 벌써 세 번째. 이대로는 집안의 위신도 땅에 떨어질 노릇이었다. 철없는 늦둥이 남동생을 혼내는 것은 누나 몫이라 만사를 제치고 여기까지 온 도영이었다.

“오늘 일정은 한 달 전부터 단단히 픽스를 해놨으니 다른 일정이 겹쳤을 리는 없고. 결국, 그놈이 또 내뺐다는 얘긴데, 그래서 지금 어디 있을까?”

“죄송합니다. 정말 모릅니다. 개인 사유로 휴가를 내셨다는 것만…….”

“그 개인 사유까지 관리하는 게 정 실장 일 아닌가? 대체 일정 관리가 어떻게 되면 이런 일이 생기지? 난, 이런 일은 비서실 모두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봐.”

위협적인 패를 꺼내는 도영을 보고도 정 실장은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수연은 그 곁에서 이 상황이 민망한지 얼굴을 붉혔다. 아무리 집안이 정한 인연이라도 자신을 만나기 싫다고 이리 내빼고 저리 내빼는 남자의 사무실까지 찾아온 게 민망한 일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 세 번은 저도 공범입니다만, 이번엔 아닙니다. 그리고 그땐 적어도 출근은 하셨습니다.”

“그럼 나한테 거짓말 한 거야?”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번엔 정말로 아닙니다. 뒤져보셔도 됩니다.”

이것만큼은 정 실장도 당당했다. 게다가 도혁이 일방적으로 도망 다니는 것은 정 실장의 잘못이 아니었다. 비록 몇 가지 비밀을 간직하고 있긴 했지만, 굳이 묻지 않은 말엔 답하지 않는 것이 정 실장의 비서 근무 신조였다.

“집은?”

“방금 사람 보내서 확인한 참인데, 비었더군요.”

“차는.”

“워낙 많아서 뭐 한 대 빠져나가도 모르겠습니다만.”

도영이 후, 분노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내가 찾았을 때 정 실장도 한패라면 그땐 나 가만 안 있어.”

“그럴 일 없습니다.”

정 실장은 정중히 불청객에게 대답했다. 도영은 다시 한번 한숨을 뱉더니 수연의 손에 이끌려 사무실을 벗어났다. 그제야 정 실장은 식은땀을 닦고 물을 들이켰다.

“원, 어차피 저 맞선은 틀린 것 같은데…….”

오랜 비서의 감이었다.

***

눈처럼 새하얀 코트를 입은 설이 반짝였다. 하얀 털에 파묻힌 설의 얼굴이 유난히 더 뽀얗게 보였다. 새카만 눈동자와 붉은 입술은 이럴 때일수록 더 선명해진다.

“너희 부모님이 이름을 정말 잘 지으신 것 같아.”

자주 듣는 말이었다. 어릴 땐 유치한 이름이라고 생각했는데 도혁이 저렇게 말하는 걸 들으니 싫지는 않았다.

“이거랑 오늘 본 거 전부 다 하지.”

“예, 바로 신품으로 포장하겠습니다.”

도혁이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편집 숍의 주인에게 말하자 영업용 미소가 환하게 피어났다.

“아니…… 이렇게 많이는 필요 없는데.”

설은 소용없을 줄 알면서도 말렸다.

“마음에 안 들면 나 없을 때 팔아버리든지.”

“……그런 건 아냐.”

“그럼 됐어.”

가장 후회하게 된 일 중의 하나가 도혁에게 받은 목걸이와 팔찌를 빼앗긴 거였다. 당시엔 그게 회사를 위한 일인 줄 알았으니 원망하지 않았지만, 오빠의 알량한 카드 놀음에 바치기엔 너무 소중한 추억이었다. 설은 그 후로 몸에 어떤 장신구도 걸친 적이 없었다.

“어머, 올겨울엔 눈이 안 온다 싶더니.”

어느새 쇼핑백 한 무더기를 가져온 직원이 창밖을 보고 말했다. 그 말처럼 드물게 하얀 눈이 팔랑이며 날리고 있었다. 보는 사람을 설레게 만들 수밖에 없는 예쁜 겨울 풍경의 한 자락이었다.

“차에 실어 놔요.”

도혁은 키를 직원에게 쥐여주고는, 설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어디 가?”

“그냥, 눈 오잖아.”

무성의한 대답치고는 도혁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이 정확했다. 명품 숍이 죽 들어선 청담동의 조용한 골목은 둘이서 가보지 않은 가게가 없을 정도로 훤한 장소였다. 도혁은 설이 도망치지 못하게 손목을 꼭 잡은 채로,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조용한 가게의 처마 밑으로 들어섰다.

“잠깐.”

설의 코트와 머리카락을 살짝 털어낸 도혁이 씩 웃었다. 처마 밑에서 눈을 보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예전과 다를 것이 없었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문득 선물로 받은 기분이 들었다. 도혁은 뒤로 눈 내리는 풍경을 둔 설을 보며 아주 아주 오랜만에 기뻐서 미소가 나온다는 기분을 느꼈다.

“눈 내리는 거, 오랜만이네.”

“어, 그러게.”

둘은 비슷한 생각을 품으며 잠시 풍경을 응시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가게의 문이 살짝 열리고 고급스러운 투피스를 입은 중년 여성이 나와서 우아하게 눈인사를 건넸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유명 디자이너 브랜드의 보석 매장이었다. 그 처마 밑에 사람들이 서 있으니 나와보는 것은 당연했다.

“들어와서 천천히 보시겠어요? 저는 매니저를 맡은 이 실장이라고 합니다.”

불청객이면 떠나고 손님이면 들어오라는 권유였다. 설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도혁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옷도 부담스러운데 보석은 더했다. 이 가게에서 가장 저렴한 것을 사더라도 설에겐 마음의 빚이 될 것이 분명했다. 앞으로 설이 혼자 살아가야 할 세계를 생각한다면 더욱 그랬다.

“딱, 오 분이면 돼.”

주춤거리는 설의 걸음을 끄는 도혁이 말했다. 설의 속내는 알고 있었다. 못내 처음부터 휑했던 설의 목덜미며 손목이 마음에 걸리지 않았다면 그것도 거짓말이다. 모두 의미를 담아서 소중하게 선물했던 것인데, 잘 때도 빼놓지 않아서 이제는 제 몸 같다고 하던 것도 엊그제 같은데.

“마침, 손님이 한 분도 안 계셔서 조용히 보실 수 있겠네요.”

능숙하게 접객을 하는 이 실장이 둘을 안쪽의 고급스러운 소파로 안내했다. 이런 곳에서 장사하는 몸이니 대충 도혁의 모습을 훑어만 봐도 훌륭한 손님이라는 것을 아는 거다.

“우선, 카탈로그는 여기. 원하시는 라인이 있으시면 실물로 가져와서 보여드리겠습니다.”

가격표조차 붙어 있지 않은 카탈로그를 보는 설의 표정이 묘했다.

“참, 죄송합니다. 티 박스부터 보여 드려야 하는데. 어떤 차를 내드릴까요?”

“아뇨, 괜찮아요. 잠깐만 볼 거니까요…….”

부담을 느낀 설이 마다했다. 소파는 무척 안락했지만, 마음이 불편했다. 이 장소는 지금의 설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아마 앞으로도 이런 곳에 오는 삶을 살 수는 없을 거다. 그걸 뻔히 알면서 이런 곳으로 데려온 도혁이 조금 미울 정도다.

“그럼 따스한 밀크티 어떨까요? 겨울이니까요.”

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곧 금테를 두른 유럽풍 찻잔에 담긴 밀크티가 나왔다. 도혁이 카탈로그를 살펴보는 사이, 이 실장이 재차 눈웃음으로 설에게 차를 권했다. 어쩔 수 없이 한 모금 머금은 밀크티는 달콤했다. 마치 예전의 추억들처럼.

“손님이 너무 미인이셔서 뭘 하셔도 어울리실 것 같아요.”

“아뇨, 저는…….”

손님이 아니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프로의 대응은 틈을 주지 않는다.

“어머, 이전에도 한 번 저희 가게에 방문해주신 적이 있지 않나요? 쉬이 잊을 수 있는 미인이 아니신데, 전 아주 오래전에 찾아주신 손님도 다 기억을 하거든요.”

그 정도는 되어야 이 거리에서 보석을 팔 수 있었다.

“글쎄요, 전 기억이 잘.”

설이 말끝을 흐렸다. 어차피 십여 년 가까이 전의 일이다. 일일이 다 기억할 수는 없었다.

“아, 한 번 있어.”

카탈로그를 보는 줄 알았던 도혁이 대신 답했다.

“그렇죠? 제 기억력은 틀리질 않아서요.”

이 실장이라고 했던 여자가 싱긋 웃었다. 설은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이런 곳에서 보석을 산 기억은 없었다.

“그때, 왔었어. 팔찌 밴딩을 조이려고. 그, 백금에 가느다란 팔찌 있잖아.”

그제야 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거 여기서 산 거거든. 네가 풀어질 것 같다고 해서 와서 조정했었지.”

그래서 구매한 기억이 없었나 보다. 설은 새삼 도혁과 이 실장의 기억력에 감탄했다. 이 실장이야 직업이라고 해도 도혁의 섬세한 기억력이 대단했다. 무엇을 사줬는지를 일일이 기억하기도 힘들 판에 그런 사소한 것까지 기억하다니.

“아, 그 팔찌…….”

가느다란 백금의 선이 여러 개 엮인, 은하수처럼 반짝이는 예쁜 팔찌였다. 설이 마지막에서야 내놓았던 물건이다. 다른 것을 팔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유독 그 팔찌를 팔았을 때는 마음이 아팠다. 항상, 네 손목을 잡고 있을 거라고. 그렇게 속삭이며 도혁이 끼워줬던, 이제는 제 살 같던 팔찌였다.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서 그 말이 나오니 괜히 죄인이 된 것 같았다.

“네, 정말 명작이었죠. 잘 보관하고 계신가요? 언제 한 번 들러주세요. 세척과 조정을 봐 드릴게요.”

뭐라 대답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거짓말을 하자니 도혁을 보기 민망했고 사실을 말하자니 그것도 도혁의 체면에 좋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 말 나온 김에 팔찌가 좋겠네.”

대화의 흐름을 의식한 건지, 도혁이 화제를 돌렸다.

“백금 라인으로 보여드릴까요? 마침, 국내에 딱 하나 들어온 제품이 있는데요.”

도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곧 이 실장이 하얀 장갑을 끼고 검은색의 고급스러운 케이스를 가져와 열었다.

“이런 물건은 좀처럼 없지요.”

과연, 말처럼 시선을 빼앗길 만한 물건이었다. 팔찌는 유려한 뱀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착용한다면 손목에 뱀이 감길 것이다. 섬세한 조각 끝에 붉은 뱀의 눈이 정점을 찍었다.

“게다가 뱀에는 상서로운 의미가 많답니다. 대표적으로는 수호의 의미가 있죠.”

“눈은…… 루비?”

“네, 안목이 높으시네요.”

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매혹적인 작품이었다. 하얀 장갑을 끼고 조심스럽게 대할 만도 했다. 물론 가격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설조차 잠시 홀린 듯이 그 뱀의 눈을 봤다. 한 번 시선을 주자 쉽사리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뭔가 이끌리는 매력이 있었다.

“하나뿐이라고?”

“네, 같은 디자인은 국내에 하나뿐이고 이런 최상급 루비를 사용한 것은 전 세계에서 이 제품뿐입니다.”

그 말에 정신을 차린 설이 간신히 시선을 돌렸다. 지금 이런 것에 홀려 있을 때가 아닌데.

“오 분 지났어, 가자.”

설이 목소리를 낮춰 도혁에게 속삭였다. 그러나 도혁은 못 들은 체 설의 손목을 살짝 잡았다 놓는다. 그리고는 마치 측정이라도 한 듯이 손가락으로 설의 손목을 가늠한 원을 그렸다.

“이 정도로 딱 맞췄으면 하는데.”

“잠시만, 측정하겠습니다.”

뭐라 거부의 말을 하기도 전에 능숙한 이 실장의 손길이 설의 손목에 자를 대고 몇 가지 수치를 기록했다.

“세팅을 하려면 먼저 결제를 해야겠지?”

싱긋, 이 실장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이내 도혁이 내민 검은 색 카드를 공손히 받아서 다른 직원에게 건넸다. 그 직원이 다시 만면에 미소를 띠며 돌아오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설은 그 금액을 정확히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아, 이제 남자분도 기억이 나네요.”

카드에 쓰인 이름과 도혁의 생김새를 보자 모를 수가 없었다.

“제이드 그룹의…… 이런, 실례. 이렇게 장성하신 줄 미처 몰랐네요. 누님께서도 저희 가게를 종종 이용해주시는데.”

도혁은 익숙하다는 듯이 그런 말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물건은 댁으로 보내드릴까요?”

“음…… 완성되면 연락 줘요.”

“알겠습니다.”

가게 입구까지 마중을 나온 이 실장의 미소가 나긋했다.

“그럼, 살펴 들어가세요. 누님께도 안부 전해주시고요.”

“두 번째는 힘들 것 같은데.”

도혁은 진심이었지만, 어째서인지 이 실장은 재미있는 농담을 들은 것처럼 웃었다.

뭐, 아무래도 좋았다. 아직도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계속 이런 시간이 이어질 것처럼 마음이 설렜다.

“앗, 배웅해드려야겠네요. 잠시만요, 우산을…….”

그러나 이 실장이 돌아왔을 때 둘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몇 발짝 너머에서 함박눈을 향해 손을 뻗는 도혁의 뒷모습이 보였다. 나머지 한 손은 여자의 손목을 꼭 잡은 채였다. 곧 저 손목에 이 어마어마한 팔찌가 채워질 것이다.

“실장님, 방금 그거…… 팔린 거예요?”

얼떨떨한 직원의 목소리가 이 실장의 뒤에서 울렸다.

“그래, 내가 다 주인이 있다고 했잖아.”

“실장님은 정말 대단하세요.”

고가를 자랑하는 브랜드였지만, 저 팔찌는 유독 고가였다. 게다가 취향을 타는 디자인이어서 판매가 쉽지 않을 걸로 예상됐다. 그걸 우겨서 들여온 것이 이 실장이었다. 실제로 저 팔찌는 그동안 주인이 나타나지 않아서 이 실장의 불패 신화가 깨지는 게 아니냐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내가 대단하겠니? 저런 걸 턱턱 사는 사람들이 대단한 거지.”

“뭐, 우리 손님들은 다 딴 세계 사람들이니까요. 그래도 이 팔찌 하나면 웬만한 차도 살 텐데…….”

“그런 생각을 안 하니까 우리 손님이 될 수 있는 거야.”

이 실장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멀어져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늘 조용한 이 거리에서 드물게 길을 걷는 연인의 모습이었다.

“흐음, 그보다 소문이 사실인가?”

“왜요?”

“아, 자기는 모르지? 제이드 그룹 막내 도련님이 예전에 큰 사고가 나서 한동안 난리였거든.”

“그래요? 지금은 엄청 좋아 보이던데.”

“그러니까…… 다행히 쾌차해서 곧 결혼한다는 소문이 돌았거든.”

“어머, 부럽다. 결혼 전부터 저렇게 다정하고. 저런 커플도 있네요. 재벌은 다 정략결혼인 줄 알았더니.”

“그 부분이 이상하단 거야.”

이 실장이 어깨를 으쓱했다.

“저 여자가 아니거든.”

“……네?”

“뭐해, 가게 앞에 눈이나 쓸어. 보석상에 비밀이 한두 가진가.”

직원이 얼빠진 얼굴을 하자 이 실장이 어깨를 툭 치고 가게로 들어갔다.

***

꿈같은 하루는 너무 빠르게 흘러갔다. 그저 예전의 날들을 조금 흉내를 내본 것뿐인데 하루가 짧았다. 달콤한 시간은 끝 맛이 조금 씁쓸하다. 교차점이란 그런 거였다.

“이제 크리스마스도 금방이네.”

무심코 한 말인데, 그게 또 한정된 시간을 확인시켰다. 거리에 캐럴이 울려 퍼질 때쯤 진짜 이별을 준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설은 굳이 그 부분을 피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받아들일 일이었다. 서로 아는 것을 숨길 필요는 없다.

“무슨 상관이야, 너 무교잖아.”

“그러게.”

도혁은 늘 낭만 없는 소리를 하곤 했다. 이럴 땐 그 점이 좋았다.

“나, 내일 잠깐 나갔다 와도 될까.”

어색한 질문이었다. 오늘 도혁이 산 것 중에선 겨울 외투와 신발이 꽤 많은 품목을 차지했다. 그건 설에게 자유롭게 나가도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 같았다.

“어디?”

돌아보는 도혁의 얼굴에 살짝 경계심이 서렸다. 지금 설이 갈 곳이라고 해서 좋은 장소가 떠오르질 않았다.

“그…… 인터넷 찾아봤는데.”

카지노에서 훈의 모습을 본 날 이후로 설은 울고만 있었던 게 아니다. 눈물은 어차피 충분했다. 이미 인간이기를 포기한 오빠 때문에 신세 한탄만 하긴 설이 현실적이었다.

“부모님도 돌아가셨고, 앞으로는 오빠 일이랑 상관없이 살려고. 그러려면 법적으로도 조치가 필요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무료로 법률 상담해주는 데 가볼 생각이야.”

도혁은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이다. 하긴, 설의 오빠는 평생 그러고 살 거다. 도박을 끊느니 목숨을 끊는 게 빠를 테니. 하지만, 정작 설이 이렇게까지 현실적으로 혼자 살아갈 생각을 하는 줄은 새삼 깨달았다. 오늘의 마무리로 썩 기꺼운 일은 아니다.

“……내 변호사 만나. 너 편할 때 오라고 할게.”

설은 대답을 미뤘다.

“그런 걸 왜 인터넷에 물어봐.”

“물어본 게 아니고 찾아본 거야. 나 같은 사람들이 많더라고…….”

씁쓸한 미소였다.

“아니, 내가 있는데 그걸 왜 찾아보냐고, 인터넷에.”

항상 서운한 점이다. 왜 내가 있는데. 왜.

“너도 모르잖아.”

설이 일부러 질문을 살짝 빠져나갔다.

“너 도박하는 오빠 있어? 없으면서.”

허, 도혁이 실소를 뱉었다. 가끔 말로는 설을 이길 수 없을 때가 있었다. 지금이 그럴 때였다.

“뭐래, 인터넷이.”

도혁이 설의 어깨에 고개를 푹 기댔다. 아까 집에 도착한 후로 잠깐만 소파에 앉아 있자더니 이런 식으로 붙들고 놔줄 생각이 없는 거다.

“인터넷이 아니고 인터넷에 있는 사람들이야.”

“아무튼.”

“원래 도박이 무서운 거래.”

사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냥 겹쳐 있는 지금의 온기가 좋았다.

“그래서 냉정하게 끊어내야 한대. 욕설이 장난 아니었어. 바람난 전 남자친구보다 더 확실히 끊어야 한다면서…….”

문득, 설이 말을 멈췄다. 잘못된 단어를 골랐다는 것은 왜 항상 뒤늦게 떠오르는 걸까. 그저 자신이 찾아본 게시물의 댓글을 전하려는 게 이상한 부분을 건드렸다.

“끊는 건, 쉽대?”

나직한 도혁의 목소리가 망설임을 잘라냈다.

“……아니, 어렵대.”

도혁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예 설의 무릎에 누워버렸다.

“그렇겠지.”

그대로 눈을 감은 도혁이 설의 손을 끌어다 만지작거렸다. 예전의 습관은 그대로다.

“힘들지.”

혼잣말이 쓰다.

“힘들겠지.”

그러고 잠시 아무런 말도 없었다. 설은 조금 아프게 눈을 감은 도혁을 내려봤다.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가 미안해진다. 도혁이 반한 게 설이 아니었으면, 지금쯤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말도 안 되는 괜한 생각이 자꾸만 떠올라서.

“……그래, 담배 끊는 것도 힘든데.”

느릿하게 도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도혁이 담배 피우는 걸 못 봤다. 냄새도 전혀 나지 않았다. 딱히 그럴 틈도 없었던 것 같은데.

“담배 끊었어?”

설의 물음에 도혁이 눈을 떴다.

“몰라.”

이상한 대답이다.

“그냥 너 있으니까 안 피게 되네.”

습관은 무서운 거다. 이제 와 설이 그런 걸로 잔소리를 할 리가 없는데도 왠지 담배에 손이 가지 않았다. 설의 앞에서 굳이 매캐한 연기를 내뱉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도 입이 심심할 때는 잠든 설을 살짝 물고 빨았다. 뽀얀 살 냄새가 풍길 때면 독한 연기가 질렸다.

“그럼 이참에 끊어. 몸도 안 좋으면서.”

누구나 으레 하는 말이었지만, 설이 하면 특별하게 들린다. 아직도 도혁을 진심으로 염려해주는 것 같아서. 자신의 몸을 제 것처럼 느끼고 있는 것 같아서.

“내가 작살 난 건 다리지, 폐가 아니야.”

“그럼 뭐해, 마취하고 저온 치료하느라 폐에 물도 차고, 심부전도 한 번 왔었는데. 조심해야지.”

“그건 일시적인 거지. 원래 치료가 심각해지면 다 그렇…….”

나른하게 있던 도혁이 문득 눈을 똑바로 떴다. 그러더니 선뜻 설의 무릎에서 몸을 일으켜서 앉았다.

“……네가 어떻게 알아?”

짧은 순간, 설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도혁이 그걸 놓칠 리가 없었다.

“그거 전부 다 치료 말기에 왔던 증상인데, 그걸 네가 어떻게 아냐고.”

“그냥…… 다들 그래.”

처음 의식을 찾았을 때 어머니는 설이 떠났다고 했다. 도혁의 치료는 그때가 시작이었다. 그땐 있지도 않았던 증상을 설이 태연히 말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출국한 게 몇 년도라고 했지?”

“스무 살 때지.”

대답은 의외로 망설임 없이 나왔다.

“교통사고 크게 난 사람들이…… 다 그렇다더라고. 그냥 티브이에서 봤는데, 너도 그럴 것 같아서. 그리고 담배는 몸에 안 좋잖아. 어디 아프지 않더라도 끊을 수 있으면 좋지.”

차분한 설의 말이 왠지 쓸데없이 긴 것 같았지만, 도혁은 눈을 가늘게 떴다가 이내 다시 설의 무릎에 누웠다.

“원래 담배가 백해무익이래.”

“알았어.”

“금연의 첫걸음은…….”

“알았다니까.”

도혁이 설의 손가락을 끌어다 제 입에 댔다. 잘근잘근 이로 손가락을 물었다 놓는 것이 장난 같기도 하고 농밀하게 느껴지기도 해서 기분이 묘하다.

“입이 심심해서 그래.”

묻지도 않은 말을 하면서 쪽, 소리가 나게 설의 손가락을 빨았다 놓는다.

“금연하려고.”

다시 잘근 깨무는 도혁의 혀가 말캉하고 뜨겁다.

“사탕 같은 거 먹으면 되잖아.”

설이 손을 빼내려고 하는데도 도혁은 끝까지 놓질 않는다.

“네 살이 더 달아.”

“……말도 안 돼.”

“진짜.”

낮은 목소리가 손가락에 엉겼다. 제 무릎에 누운 채로 빤히 올려보는 도혁의 시선이 따가웠다.

“여기 누워 있으니까 네 살 냄새가 더 풍겨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도혁이 설의 손을 확 끌어당기자, 순간적으로 설의 고개가 따라서 내려왔다. 그러자 도혁이 설의 목덜미를 잡은 채 입을 맞췄다. 이곳이든 저곳이든 설의 살갗은 달았다. 타액이 오가는 농밀한 키스는 아주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이어졌다. 물론 그사이에도 도혁의 나머지 한 손은 슬금슬금 설의 목덜미를 지나 가슴으로 내려왔다.

“으응.”

도혁이 손을 펼쳐 가슴 전체를 꽉 쥐어오자 설이 살짝 움찔거렸다. 그 반응에 도혁은 이미 하반신으로 피가 쏠리는 것을 느꼈다. 설은 그런 도혁의 손을 피해 상체를 뒤로 물렸다. 간신히 떨어진 입술이 침으로 번질거린다. 안 그래도 도톰한 설의 입술에 제 침이 묻은 것을 보고도 도혁이 참을 리는 없었다. 바로 제 윗옷을 벗으며 설을 향해 다가가는 도혁의 몸짓은 재빨랐다.

“왜 도망가려고 해.”

딱히 질문은 아니었다. 도혁은 이미 짧은 실랑이 끝에 설의 두 손을 잡은 채였다. 설은 괜히 상체를 드러낸 도혁에게서 시선을 살짝 피했다. 원래도 건장한 체격이었지만, 지금의 도혁은 근육이 붙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탄력 있는 몸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다 쥐어뜯어 놓을 땐 언제고.”

도혁이 설의 손을 끌어다 제 목덜미에 댔다. 그제야 설은 흐릿한 기억 속에서 도혁의 몸을 잡히는 대로 쥐었던 것을 떠올렸다. 동시에 얼굴이 화륵 달아올랐다. 그 순간이 정확히 어떤 때인지 떠오른 탓이다.

“내가 변태인가?”

낮은 목소리가 장난스레 물었다.

“난 네가 할퀴는 것도 좋고, 우는 것도 좋아.”

설이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있는 사이, 도혁이 능숙하게 설의 상의를 거꾸로 벗겨냈다. 도혁은 브래지어에 담긴 설의 가슴을 잠깐 만졌다가 이내 후크를 풀어 버렸다. 그제야 브래지어를 벗어난 가슴이 찰랑거리며 도혁의 손아귀에 오롯이 떨어졌다. 절로 만족스러운 미소가 도혁의 입꼬리에 걸렸다.

“네 가슴은 더 좋고.”

도혁이 설의 뽀얀 가슴에 고개를 묻었다. 그의 입이 풍만한 가슴을 흡입하는가 싶으면 항상 민감한 가운데로 혀가 향해서 설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그때마다 체온이 후끈 오르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고작 몇 번의 경험이라 생각했는데, 설의 몸은 이미 도혁의 손길에 길들어가고 있었다.

“네 밑도 좋아.”

어느새 도혁의 손 하나가 스커트 사이로 들어갔다. 그리고 스타킹이 팽팽한 사이를 집요하게 눌렀다. 뜨거운 체온이 음부에 닿자 한층 더 얼굴로 피가 쏠리는 것 같았다.

“뒤로 가지 말고…….”

도혁이 자꾸 뒤로 도망가려는 설을 잡아다 끌었다. 그걸로도 성이 차지 않았는지 아예 허리를 잡아다 제 위로 앉혔다. 그 바람에 허벅지가 자연스럽게 벌어졌다.

“찢어도 돼?”

스타킹을 누르며 하는 소리였다. 설은 고개를 저었지만, 처음부터 대답을 원한 건 아니었는지 도혁의 손이 투둑하고 스타킹의 실밥을 헤치는 소리가 났다. 이내 한층 더 뜨거운 체온이 음부에 닿았다. 스커트는 위로 말려 올라간 지 오래고 얇은 실크 한 장만이 손과 음부 사이에 놓였다.

“가지 말라니까, 그러다 떨어져.”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도혁이 설의 손을 끌어다 제 목에 감았다. 설은 못 이긴 체 그 목을 잡았다. 안 그래도 뒤로 균형이 쏠리면 넘어갈 것 같아 불안했다. 도혁의 맨 살갗은 설의 것보다 훨씬 탄탄했다. 그리고 목이며 등에 난 자잘한 생채기의 흔적에 조금 민망하기도 했다.

“으응.”

도혁의 손가락이 클리토리스 위를 지그시 누르자 약한 신음이 터졌다. 알량한 팬티 한 장의 가운데 습기가 차고 있었다. 도혁도 그걸 모를 리는 없다. 도혁의 손가락이 팬티를 제치고 들어와서 질구 주위를 지분거렸다. 겉은 마른 것 같았지만, 질구에 손가락을 살짝 담갔다가 빼자 끝에 애액이 묻어 미끈거렸다.

“이젠 금방 젖네.”

설이 도혁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도혁이 아래를 건드릴 때마다 흠칫흠칫 몸을 떨면서도 아직 신음을 참는 채였다. 도혁이 손가락으로 음부를 계속 매만졌지만, 격렬하지는 않았다. 도혁은 그저 끈기 있게 제 손가락 끝에서 젖어 드는 설의 음부를 느끼고 있었다. 처음에 적시기 위해 잠깐 손가락을 담근 것 외에는 질구를 건드리지도 않았다. 어쩌면 설이 이제 자극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하던 찰나, 도혁이 완전히 아래에서 손을 뗐다.

“신음을 참으니까 숨이 차지.”

제 목덜미에 아까부터 바르작거리던 숨결을 말하는 것이다. 설은 일부러 대답하지 않았다. 이전에야 경황이 없어서 몰랐지만, 항상 도혁의 손길에 먼저 앙앙거리게 되는 자신이 싫었다. 그래서 오늘은 조금 느긋하게 버티고 있는 셈이다.

“말했잖아. 네가 그러면 난 더 괴롭히고 싶다고.”

설이 도혁의 목덜미에서 고개를 들었다. 도혁의 무릎에 앉은 채 마주 앉아 있으니 보다 쉽게 눈이 마주쳤다. 도혁의 입가엔 여전히 미소가 묻어 있었다. 그리고 설을 보더니 이내 다정하게 입을 맞춰왔다. 평소보다 부드러운 방식에 설은 도혁의 목을 안고 있던 손에 힘을 살짝 풀고 자연스럽게 키스를 받아들였다.

“……잠깐.”

주로 설이 말하는 단어인데 이번엔 도혁이 짧게 말하고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러고는 다시 설에게 입을 맞췄다. 그런 줄 알았다.

“앗…….”

순간, 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팬티를 제친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페니스의 존재를 느끼자마자 미간을 기울였지만, 그건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젖을 대로 젖은 입구와 딱 맞는 각도에 페니스는 설의 몸 안을 세로로 가르듯 끝까지 밀고 들어왔다.

“아흑!”

설이 본능적으로 도혁의 목을 끌어안았다. 젖어 있었다고는 해도 아무런 방비도 없이 페니스가 꿰뚫고 들어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페니스가 지난 길이 전부 데인 것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그보다 자꾸 안달 나게 하는 열기가 온통 아래로 쏠렸다.

“흐, 아흐…….”

도혁이 더 움직이지 않았는데도 설의 입에서 나머지 신음이 토해졌다. 도혁은 그런 설의 목덜미와 귓불을 빨다가 가느다란 허리를 잡고 살짝 앞뒤로 흔들기 시작했다.

“으, 아으.”

처음에는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 행동인지 몰랐지만, 앞뒤로 왕복을 하다 보니 턱턱, 어느 부분에서 페니스가 걸리면서 눈앞이 아찔해지는 쾌락이 덮쳤다.

“아, 아, 아읏, 흑.”

엉덩이골까지 애액으로 젖은 음부를 위에서 비벼대며 박으니 당장이라도 몸이 녹아내릴 것 같았다. 도혁이 설의 허리에서 손을 떼고 풍만한 엉덩이를 양손으로 꽉 쥐고 벌리자 질구의 점막이 빠듯하게 도혁의 페니스를 문 채로 조여들었다. 그 시점에선 도혁도 참지 못하고 더운 숨을 뱉었다.

“으응.”

도혁이 설의 엉덩이를 쥐고 제 몸쪽으로 당길 때마다 클리토리스부터 페니스를 문 질구, 엉덩이의 여린 살까지 전부 도혁의 하반신에 비벼져서 현기증이 일 정도로 자극이 됐다. 아리듯이 녹을 것 같은 달콤한 쾌락 뒤에 단단한 페니스가 제 몸 안을 꾹 누르고 애액에 철퍽이는 소리가 날 정도로 몰아붙이는 행위가 너무 색스러웠다.

“앗, 아응.”

자꾸 교성이 흘러나왔다. 몸 안에서 불이 피어나는 것처럼 열기를 가누기가 어려웠다.

“네가 해봐. 응?”

도혁의 목소리도 뜨거웠다. 설은 고개를 몇 번 저었지만, 도혁이 끈질기게 설의 허리를 잡고 앞뒤가 아닌 위아래로 움직이게끔 유도했다. 설이 엉덩이를 살짝 들었다가 다시 도혁에게 주저앉자 그대로 페니스가 푹하고 박혔다.

“하.”

페니스의 뿌리까지 삼키는 동작에 도혁은 쾌락의 신음을 흘렸다. 처음에는 작았던 움직임이 도혁의 손길에 조금씩 더 깊어지고 있었다. 아예 엉덩이를 확 치켜든 도혁이 그대로 손을 놓자 푹, 그 어느 때보다도 깊이 페니스가 박혔다.

“아, 아… 흑.”

“어, 나도 좋아.”

할딱이는 건 설의 숨결만이 아니었다. 도혁의 혀가 계속 설의 귓불이며 목덜미를 물고 빨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무자비하게 푹푹, 설의 엉덩이를 들어서 제 것을 박아넣었다. 설의 허리가 본능적으로 휘며 어느 순간부터는 마찰음이 더욱 커졌다. 그때 이미 머릿속이 녹을 것 같았다.

“아, 아흐윽. ……흑, 으흑.”

벌어진 입술 사이로 무슨 소리가 나가는지도 몰랐다. 도혁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러다 성에 차질 않았는지 그대로 설의 상체를 안은 채 방향을 틀어 설의 등을 소파에 눕혔다. 자세를 바꾸느라 페니스가 반쯤 빠지자 빠듯한 질구가 살짝 경련했다.

“으응.”

설이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도혁이 설의 두 다리를 들어 제 오른쪽 어깨에 얹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어떻게 되는지는 몰라도 해본 적 없는 자세에 잔뜩 성을 낸 도혁의 페니스가 본능적인 불안을 일으켰다.

“괜찮아, 그냥…….”

도혁이 다시 설의 두 발목을 당겨 다리를 추슬렀다. 훤히 드러난 음부가 애액으로 번질거리는 채 자신의 물건을 반쯤 머금고 있었다. 도혁은 그것을 지켜보며 그대로 페니스를 끝까지 꾹 박아넣었다.

“더 깊게 넣으려는 거야.”

“으응, 싫… 아, 아흐윽.”

또륵, 설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할딱거리는 설의 신음이 달콤했다. 지금 제 페니스를 압박하듯 꽉 물고 있는 질구의 압박만큼이나 자극적인 광경이었다.

“싫어?”

푹, 끝까지 박아 넣은 채 동작을 멈춘 도혁이 설을 내려봤다. 마주친 눈동자가 그렁그렁했다.

“싫으면 이대로 있을게.”

말했잖아, 그런 얼굴을 보면 자꾸 괴롭히고 싶어진다고.

“응?”

아래에 힘을 주자 설의 안에서 페니스가 움찔, 경련하듯 움직였다. 그 작은 움직임에도 벌써 설의 허리가 파르르 떨렸다.

“싫어? 그만할까?”

제 입술을 핥으며 묻는 도혁을 보는 설의 미간이 한참 기울었다. 어떻게든 하고 싶은데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제 몸 안에 단단히 박힌 페니스가 빠져나가면 밀려올 공허함은 본능이 먼저 알았다. 하지만 이대로 움직이자니 자극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고, 가만히 있자니 몸 깊은 곳부터 알 수 없는 안달이 났다. 결국, 그사이에 놓인 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채로 자꾸 애꿎은 제 입술만 깨물며 어쩌지를 못한다.

“…으응.”

도혁이 무심코 움직이기만 해도 그 작은 자극에 반응한다. 이미 몸이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지라 가능한 일이었다. 아래가 너무 뜨거웠다. 아까부터 자꾸 안달이 난다. 설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도혁을 올려봤다. 아까부터 자꾸 깨물던 입술이 살짝 부은 채로 벌어졌다.

“계속… 해, 응?”

대답은 필요치 않았다. 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도혁이 페니스를 뿌리까지 박아 넣었다.

“아흐윽.”

울음 같은 교성엔 쾌락이 분명 섞여 있었다. 안 그래도 좁은 안이 더욱더 좁혀드는 기분이 들었다. 가뜩이나 다리를 어깨에 얹은 채로 자꾸 깊은 삽입을 반복하자 질척이는 애액에 비벼지는 하체가 녹을 것 같았다.

“응, 아응, 아, 아으.”

퍽퍽, 박아대는 소리에 설의 허리가 바르르 떨렸다. 몸 안에서 퍼지는 쾌락은 어떻게 대항할 수가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덜덜 떨고 있는 설은 그저 도혁의 목덜미에 매달려 할딱이는 숨을 뱉으며 아득한 쾌락을 느꼈다.

“앗, 아앗, 아읏.”

도혁의 허리짓이 빨라질수록 교성이 빨라졌다.

“아… 아흑.”

그리고 어느 순간 뚝, 모든 움직임이 멈췄다. 설의 위에 올라탄 도혁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러더니 바로 페니스가 설의 몸을 빠져나갔다. 안을 가득 채우던 것이 단번에 사라지자 처음 겪는 허무함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다음 순간 도혁의 페니스가 설의 아랫배에 하얀 정액을 토해냈다.

“하, 하아…….”

도혁의 목덜미에서 땀이 배어났다. 설의 이마엔 이미 땀으로 엉킨 머리카락이 어지러웠다. 사정 후의 나른함에도 도혁은 바닥에 제가 벗었던 옷가지를 들어 설의 배에 토해낸 정액을 닦았다. 마구 박아대던 페니스와는 달리 부드럽고 세심한 손길이었다. 그리고 그제야 설의 위에 그대로 엎드렸다. 쿵쾅거리는 두 심장이 거의 맞닿았다. 땀이 식고 호흡이 가라앉으려면 아직 멀었다.

“으응, 하지 마…….”

그새를 못 참고 아래로 들어오는 손가락에 설이 미간을 기울였다. 아직 젖어서 미끌거리는 질구를 만지작거리는 손길에는 욕정보단 마무리 내지는 후희를 즐기는 것 같은 느낌이 강했다. 가만히, 부드럽게 젖은 음부를 문지르는 손길이 나른한 쾌감의 파도를 몇 번이고 다시 밀려오게 했다. 잔잔하고도 달콤한 파도였다.

“또 기절할 거야?”

도혁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적셨다.

“내가 언제…….”

도혁은 설이 모르는 곳에서 몰래 미소를 지었다. 섹스를 한 후엔 늘 까무룩 기절하다시피 잠이 드는 설이었다. 자신이 몰아붙인 탓도 있었고 워낙 체력이 약한 탓도 있을 거다. 어느 쪽이든 도혁에겐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럼 오늘은 같이 씻고 자.”

“오늘은……?”

벌써 설의 목소리가 느릿했다. 매번 잠든 설을 젖은 수건으로 닦아서 재운 도혁의 수고 같은 것은 모를 거다. 도혁은 잠시 오늘은 욕실에서 2차전을 시도해볼 수도 있겠다는 야망 어린 생각 품었다.

“어, 오늘은.”

그러나 정작 설의 대답이 없었다. 그 대신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오늘도군.”

도혁이 낮게 혼잣말을 했다. 썩 싫지 않은 투였다. 소파가 넓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도혁은 설의 위에서 내려와 옆에 누웠다. 그 사이에도 설은 깨지 않고 새근새근 잠이 깊이 들었다. 오늘 밤도 도혁은 잠든 설의 얼굴을 구경하느라 또 시간을 다 보내게 될 것 같다.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흘러갔다. 8년 동안 멈춰 있었던 만큼, 아쉬운 마음도 모르고서 그렇게 가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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