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비틀린 재회
도혁의 발아래 반짝이는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길을 지나가는 사람이 개미처럼 보일 정도의 고층 빌딩이라서 가능한 야경이었다. 멀리 한강 다리의 불빛이 색을 바꿔가며 반짝였다.
“이것도 금방 질리네.”
무심한 혼잣말이었다. 뭐든 제 손에 쥐는 것은 좋았다. 그것이 남의 것을 빼앗는 거라든지 갖기 어려운 것일수록 타고난 소유욕이 채워졌다. 그러나 잠시의 만족감, 그 후에는 다시 권태가 찾아왔다. 더 많은 것을 가질수록 도혁에게 소유욕을 불러일으킬 대상이 적어졌다. 이미 많은 것을 가진 도혁에겐 사소한 것 따윈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이사님, 출발하실 시간입니다.”
공손히 말을 올리는 정 실장은 도혁보다 연배가 높아 보였지만, 직위 앞에서 그런 것은 의미가 없었다. 이 반짝이는 성의 주인은 도혁이였다. 그런 도혁이 지겨운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돌아섰다.
“박 상무 쪽은 이미 도착했다고 합니다.”
“하아…… 쓸데없이 부지런한 새끼.”
정작 말한 도혁은 무심한 말투였지만, 정 실장이 피식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하지만, 박 상무가 부럽기도 해.”
“…예?”
황당한 말이라는 듯 정 실장의 표정에 의아함이 담겼다. 굳이 따지자면 도혁은 박 상무를 싫어하는 편이었다. 그보단 약간의 경멸이라고 하는 게 정확했다.
“아니, 그렇잖아. 매일 밤 계집질하러 다니는데 질리지도 않는다는 점이 부럽다니까.”
비꼬는 건지, 진심인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도혁도 그렇게 단순한 속물이었다면 이런 권태감을 느끼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세상은 조금 우습다. 누구보다 제가 가진 것을 잘 휘두를 수 있는 탐욕스러운 자는 전부를 가질 수 없고, 그 전부를 가진 도혁은 욕망의 대상을 잃어버렸다.
“또 모르지 않습니까. 조만간 이사님의 흥미를 끌 사냥감이 생길지도.”
정 실장은 익숙하게 도혁을 달랬다. 그 말에 도혁이 피식 실소하며 걸음을 뗐다.
“과연.”
지나치게 오래된 권태는 도혁을 삐딱하게 만들었다. 오늘도 적당히 박 상무와 어울려서 아무 흥미도 없는 여자들이 제 몸을 흔들어대는 것을 보다가 집에 돌아가면 하루가 끝나겠지.
“이 길이던가?”
뒷좌석에 탄 도혁이 익숙지 않은 길로 향하는 정 실장에게 물었다.
“아, 오늘은 다른 가게입니다. 박 상무가 꽂혔다나, 뭐라나…….”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정말 부지런한 새끼야.”
이번에는 정 실장이 몰래 웃음을 뱉었다. 박 상무는 그룹에서 속물로도 1순위였지만, 그만큼 실무에 능했다. 그런 박 상무를 저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일종의 대리만족인 셈이다.
“이상한 쇼하고 그런 데 아니지? 요즘 시끄러운 건 좀 짜증이 나서.”
“아닐 겁니다. 제가 알기론 강남에서 오래된 텐프로입니다. 전에 이사님도 가신 적 있는데.”
“어? 기억 안 나는데, 아무튼 그건 다른 의미로 이상한데.”
“아무나 출입할 수 있는 곳은 아닙니다만, 박 상무 정도면 가능합니다.”
“그거 말고.”
도혁이 제 미간을 기울였다.
“박 상무는 요란하게 노는 걸 좋아하는데.”
딱히 화류계에 관심이 없는 도혁이라도 텐프로가 어떤 곳인지는 대충 알고 있었다. 이젠 강남에도 정통 업소는 몇 개 남지 않았고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가게라는 것과 돈만으로 출입할 수 없다는 것 정도였다. 그러나 도혁이 의뭉스러운 표정을 지은 것은 다른 이유였다.
“그런 가게는 좀… 까다롭지 않나?”
“아무래도 그렇지요.”
텐프로의 가장 큰 특징은 접대원의 수준이었다. 화려한 양산형 미인보다는 청초한 스타일을 선호했으며 대개 스펙도 어지간해서는 안 되는 곳이다. 그만큼 중요한 손님들이 드나드는 곳이니 저들도 수준을 맞추겠다는 거다.
“룸에서 쇼를 하는 것도 아니고, 2차도 못 나가는 데를 박 상무가 간다고?”
이 부분이 가장 이상했다. 상술의 하나겠지만, 텐프로는 노는 수위에 박했다. 물론 모든 화류계가 그렇듯이 깨끗하다는 건 아니다. 대신 공식 시스템에 그런 것이 빠져 있었고 가끔 박 상무처럼 정신 나간 놈들이 어떻게든 관계를 진전시키려고 재산을 들이붓는다고 들었다.
“요즘 하루가 멀다고 드나든답니다. 무슨 아가씨에게 꽂혔다나 어쨌다나.”
“정말 박 상무는 멋진 새끼야.”
이번엔 감탄이 섞여 있었다.
“정 실장, 우리도 저 성실함을 본받아야 해.”
“……아, 그러게요.”
둘의 만담이 막 시작됐을 때, 차가 청담동의 조용한 뒷골목에 멈췄다. 흔한 네온사인 하나 없는 가게 입구에는 ‘forever’란 깔끔한 상호 하나가 고급스러운 필체로 적혀 있었다.
“어서 오세요, 어머… 권 이사님 너무 오랜만에 오셨어요.”
우아한 검은 드레스를 입은 중년의 여자가 도혁을 보고 아는 체를 했다. 막상 얼굴을 보니 도혁도 구면이라는 것이 떠올랐다. 가게 이름은 일일이 기억할 수 없었지만, 저 정도로 수완이 있는 마담은 드물었으니.
“윤 마담이었나?”
“절 기억해주시니 영광이네요.”
호호, 입을 가리고 웃는 윤 마담은 낮의 백화점에서 본다면 평범한 귀부인으로 보일 것이다. 묘한 일이다. 화류계의 정점일수록 오히려 일반인의 모습을 가장하려고 한다는 사실이 우스웠다.
“박 상무님은 벌써 와계셔요.”
“그렇겠지.”
윤 마담이 품위 있는 몸짓으로 도혁을 복도 안쪽으로 안내했다. 손님들끼리 마주치는 것을 피하기 위함인지 여러 갈래의 복도가 많았다. 그러면서도 꽤 조용한 분위기가 나쁘진 않았다. 전에 박 상무가 졸라서 갔던 기묘한 업소의 악몽을 떠올리며 도혁은 그나마 여기가 낫다는 위안을 했다.
“권 이사님 오셨어요.”
노크하고 문을 연 윤 마담이 말했다. 이미 얼굴이 붉어진 박 상무가 도혁을 보고 벌떡 일어나서 반가운 체를 했다.
“아이고, 이사님 오셨습니까.”
박 상무 옆에 앉은 아가씨도 새초롬하게 인사를 했다. 여느 대학의 메이퀸 같은 스타일이다. 딱히 도혁의 취향은 아니다.
“한 잔 받으시죠.”
또 시작인가. 도혁은 떨떠름하게 술잔을 받아서 짙은 농도의 위스키를 비웠다. 식도를 타고 번지는 열감이 쓰리면서도 뜨거웠다.
“윤 마담, 우리 이사님 오셨는데 에이스 없어?”
“이사님 취향이 워낙 까다로우셔서…….”
그게 아니라 마음에 든 적이 한 번도 없는 거다. 도혁에게 이런 곳에서 일하는 여자들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전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또, 또, 저 내숭. 이사님 기다리시게 둘 거야?”
“어머, 아니죠. 사실 있긴 있는데…… 좀 특별한 아이예요.”
윤 마담의 능변은 이미 익숙했다. 도혁은 지겨움에 담배를 한 대 물었다. 박 상무가 어이쿠, 하는 소리를 내며 괜히 과장된 몸짓으로 불을 붙였다. 곧, 자욱한 연기가 피어났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신입인데, 여태 방 두 개밖에 안 봤어요. 일반인 출신이라… 매너 좋은 분들께만 보여드리는 단계에요.”
“그럼 우리 이사님에게 딱 맞네!”
“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니까 너무 짓궂게 노시면 안 돼요.”
이미 제 파트너의 손을 주무르고 있는 박 상무를 윤 마담이 곱게 흘겼다.
“그래도 우리 권 이사님은 신사적인 분이니까, 걱정 안 하고 들여보낼게요.”
도혁은 쉴새 없이 떠들어 대는 박 상무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애꿎은 술잔을 비웠다. 그렇게 석 잔쯤 비웠을까, 다시 노크 소리가 들리고 윤 마담이 한 여자를 데려왔다.
“인사드려야지. 상석에 계신 분이 권 이사님, 옆에 계신 분이 박 상무님.”
윤 마담의 채근에 고개를 숙이는 여자는 딱히 노출이 심하지 않은 복장이었다. 무릎까지 오는 검은 미니 드레스에 소매와 목덜미까지 파인 곳만 시스루였다. 그나마도 찰랑거리는 검은 생머리가 반쯤 가리고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여린 목소리가 울렸다. 도혁은 담배를 물려다 말고 홱, 여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은하라고 해요. 나이는 23살. 자. 어서, 권 이사님 옆에 앉아야지?”
여자는 어색한 몸짓으로 상석에 와서 도혁의 곁에 앉았다. 다시 한번 고갯짓으로 인사를 하는 여자는 시선도 들지 못할 정도로 어색해 보였다.
“우리 권 이사님 아주 점잖으신 분이니까, 잘 모셔. 알았지?”
곧 윤 마담이 룸을 나갔다. 아직 서툰 손길로 잔을 세팅하는 여자의 손가락이 하얗고 가늘었다. 도혁은 세팅이 끝날 때까지 그 손가락을 보고 있었다. 담배를 무는 것도, 술을 마시는 것도 이미 잊어버렸다.
“어쩐 일로 이사님이 여자에 관심을 다 보이십니까?”
박 상무가 짓궂게 웃으며 거는 농도 들리지 않았다. 도혁의 시선이 그 손가락 끝에서 시작해 차츰 올라가고 있었다. 긴 머리가 옆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었지만, 잘못 봤을 리가 없다. 아니, 이미 목소리를 들었을 때 알았다. 그건 도혁의 본능에 새겨진 흔적이었다.
“은하라고?”
도혁의 비틀린 말에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잠시,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당혹감이 눈동자에 서렸다. 눈처럼 하얀 피부에 새카만 눈동자가 눈에 뜨여서 제 감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어차피 상대가 도혁이라면 마찬가지겠지만.
“23살?”
도혁의 한쪽 입꼬리가 말아 올려졌다. 낮은 목소리는 맹수가 으르렁대는 것처럼 집요하고 두려운 본능을 긁어내고 있었다. 은하라고 불렸던 여자는 바로 시선을 피했다. 하얀 손가락이 굳었다. 어떻게든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네.”
담담한 대답이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도혁이 황당한 듯 중얼거렸다.
“에… 혹시 이사님과 구면입니까?”
박 상무가 눈치 하나는 빨랐다.
“아무튼, 윤 마담 저거 말발은 알아줘야 해. 일반인이 어딨어, 일반인이.”
그러나 이번엔 핀트가 조금 엇나갔다. 윤 마담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둘이 구면이란 박 상무의 추측도 사실이었다.
“박 상무.”
“예, 이사님. 윤 마담 부를까요?”
“아니… 둘이 옆방에서 오붓한 시간 좀 보내고 올래?”
그 둘은 박 상무와 그 곁에 앉은 아가씨를 말하는 것이었다. 아가씨는 살짝 들릴 듯 말 듯한 한숨을 흘렸지만, 박 상무의 입엔 흐뭇한 미소가 피어났다.
“이사님 말씀인데, 당연히 따라야죠.”
박 상무가 파트너의 손을 끌고 방을 나서며 좋은 시간을 보내라는 듯이 능글맞은 웃음을 지었다. 그 정도 오해를 사는 것은 각오할 만한 상황이었다. 여태 누구에게도 관심을 주지 않던 도혁이 구면으로 추정되는 여자를 보자마자 자리를 비켜달라고 하다니. 내일쯤 되면 어마어마한 스캔들이 되어 번질 이야기였다.
“이제 우리 둘밖에 없어.”
그 말에 여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눈처럼 하얀 피부도, 늘 담담한 새카만 눈동자도, 도발적인 붉은 입술도. 그게 지금 도혁에게 무척 복잡한 기분이 들게 만들고 있었다.
“항상 이런 식이네.”
도혁이 자조적인 웃음을 삼켰다.
“늘 나만 안달이고 넌 태연했지. 심지어 이런 자리에서, 이런 입장으로 만났는데도 여전해.”
“비웃고 싶으면 비웃어.”
차라리 그게 가능했으면 좋겠다. 도혁은 제 심장에서 꺼졌던 불씨가 다시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완벽히 죽어버린 불씨라 생각했는데, 아직도 그런 것이 남아 있었다.
“난…… 널 다시 찾으면 어떤 기분이 들까. 수천 번도 넘게 생각했어. 그런데 이건 내 상상 밖이다.”
이런 곳에 있을 여자가 아니었다. 언젠가 사는 동안 만날 수 있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 상상 속에서 이런 곳에서 이런 식으로 만나는 장면은 없었다.
“왜, 첫사랑이 술집 여자가 돼서 환상이 깨졌어?”
잘도 그런 말을 하는 도톰한 입술이 붉었다. 도혁은 잠시 허탈한 시선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이게 현실이야. 싫으면 다른 아가씨랑 바꿀게.”
“백설. 이런 식으로 또 도망치려고?”
그제야 도혁의 입에서 여자의 실명이 나왔다. 설은 아무런 표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렸다. 여기 왔을 때 각오한 일이었다. 이 정도까지 나락에 떨어질 줄은 몰랐지만.
“아니, 은하라고 했지?”
신랄한 목소리였다. 여기까지 와서도 안색 하나 바꾸지 않는 설이 화를 돋웠다. 이것밖에 안 되는 여자 때문에 도대체 몇 년을 허비한 건지, 우스울 정도다.
“23살이고? …하.”
도혁의 헛웃음이 차갑게 울렸다. 그러면서도 그의 눈동자는 오로지 여자의 얼굴에 꽂혀 있었다. 눈처럼 하얀 피부, 고아하고 단정한 이목구비, 피처럼 붉은 입술… 어떻게 이 얼굴을 잊을 수 있을까. 오히려 잊지 못해 괴로웠다. 간혹 피가 끓는 밤에 꿈에라도 나오는 날이면 미쳐버릴 것 같았는데.
“싫으면 아가씨 바꿔준다고 했잖아.”
“그것도 내가 정해.”
위압적인 목소리였다. 도혁이 눈을 가늘게 뜬 채 설을 살폈다. 아무런 감정이 없는 것 같은 인형 같은 얼굴이다. 늘 도도했던 설이지만, 과거엔 감정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얼굴에 그때의 미소가 돌아오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나한테 돌아오면 됐어.”
도혁이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런데 넌 그런 편한 방법을 두고 여기 와서 은하라는 이름으로 앉아 있는 걸 택했지.”
아무리 건조한 표정을 짓고 있어도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 설은 참지 못해 눈을 감았다.
“눈 떠.”
도혁이 명령했다.
“넌 나랑 마주친 순간, 도망에 실패한 거야.”
차갑고 낮은 목소리였다.
“포기하라고.”
그제야 여자가 천천히 눈을 떴다. 하얀 살결과 대비되는 새카만 눈동자에 심연이 담겨 있었다.
“그래. 그래야지.”
도혁이 천천히 중얼댔다. 솔직히 이 손안에서 다시 저 얼굴을 볼 수 있을 거라고는 기대도 안 했다. 그러나 잊을 수도 없었다. 그 번민을 반복하던 사이 생활은 권태로워졌다. 그 끝에서 드디어 찾은 거다.
“어떻게 여기에서 우리가 만났든 중요하지 않아. 결론은 내 덫에 걸렸다는 거지.”
기다란 속눈썹이 여자의 옆얼굴에 그늘을 드리웠다.
“그렇지, 설아?”
도혁에게 한 번 더 본명을 불리자 감정의 동요가 작은 경련으로 일었다.
“너한테도 그런 감정이 있었어? 그 냉정한 백설이?”
픽, 도혁이 실소했다. 견디지 못한 설이 도혁의 손목을 잡고 제 얼굴을 쥐고 있던 손을 떨쳐냈다. 백설이라는 이름처럼 눈처럼 하얀 피부와 붉은 입술이 교차하며 도혁의 심장을 뛰게 만들고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었다.
“여기 있는 걸 보니 대충 시나리오는 나오는데.”
뻔한 이야기였다. 도혁이 설의 자취를 찾을 수 없게 된 것도 그 집안이 파산하고 도주한 탓이었다.
“네 입으로 듣고 싶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설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 바닥에 들어올 때 각오한 굴욕에 이 상황은 포함되지 않았다.
“혹시 알아? 내가 도움이 될지.”
도혁이 비릿한 미소를 흘렸다. 설이 깨물었던 아랫입술이 탐스러울 정도로 붉었다. 그동안 멈춰 있던 몸 안의 시계가 다시 작동하는 기분이었다.
“너랑… 상관없는 일이야.”
“아니, 그냥 네 일이면 다 내 상관이야.”
단정적인 말투였다. 설도 도혁의 성격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는 십 대 후반에도 이미 통제할 수 없는 맹수의 기질을 가졌다. 지금 그게 더해졌으면 더해졌지, 덜하진 않을 것이다.
“사채? 어떤 양아치한테 물렸길래 여길 왔지?”
도혁은 남의 일처럼 말하고 있었다. 설은 그 장면을 보고 저도 모르게 실소했다.
“너랑 상관없는 일이야.”
도혁의 인생에서 마주칠 일도 없는 자들이었다. 그냥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졌다. 그런 도혁이 제 일처럼 분노하는 것을 보는 건 괴로웠다. 그럴수록 그와 다른 제 처지가 더 선명해지니까.
“나한테 도움이 되고 싶으면 그냥 관심을 꺼줘.”
둘이 처음 만난 것은 서울의 사립학교에서였다. 도혁은 얼마 다니지 못하고 사고를 쳐서 전학을 갔지만, 당시에도 이미 그에 대한 소문이 자자했다. 제이드 그룹에서 탕아로 유명한 막내아들. 도혁은 그 어떤 소문에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늘 혼자였지만, 그 모습이 썩 어울렸다. 설은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에게 끌렸다. ……그랬었다. 이제는 과거의 일이다.
“뭐, 네가 직접 말하기 싫으면 내가 추측해 볼까.”
도혁이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자욱한 연기가 설의 발목을 잡는 덫처럼 공간을 메웠다.
“파산하고 도주한 것까진 좋았겠지. 사실 거기까진 그리 큰 문제도 아냐. 합법적인 대출은 사람을 벼랑까지 내몰진 않으니까. 근데 진짜 문제는 거기서 멈추는 사람이 없다는 거야.”
설은 담담한 표정을 지으려 애썼다. 도혁의 말은 모조리 들어맞고 있었다.
“파산에 신용불량에 면책도 불가능할 때, 귀신같이 냄새를 맡고 오는 건 사채꾼이지. 그들도 알고 있어. 돈을 받아낼 담보가 확실치 않다는 거 말이야.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런데도 받아낼 자신이 있다는 거야.”
도혁이 잠시 말을 멈추고 연기를 뱉었다. 자존심이 강했던 설이다. 한 마디도 반박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 뻔한 시나리오에 놀아나고 있다는 뜻이었다.
“사실, 난 네 아버지나 오빠가 어떤 멍청한 짓거리를 했다고 해도 놀랍진 않아. 관심도 없고.”
어리석은 사람은 차고 넘쳤다. 도혁 같은 사람에겐 지겨울 정도로 흔한 풍경이었다. 오히려 그런 상황에서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한 번 돈을 쥐어본 사람, 그것도 자신이 벌지 않고 상속받은 재산을 누리던 사람이 파산 후에 정신을 차리기는 어려웠다.
“빌려줄 땐 웃었던 업자들이 어느 순간 독촉을 시작하더니 매일 죽일 기세로 피를 말려댔겠지. 그냥 죽는 게 낫겠다 싶었을 때 너한테 일자리를 소개해줬을 테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설은 아름다웠다. 아마 업자들은 애초에 설을 담보로 받아낼 작정을 하고 있었을 거다. 그냥 화류계도 아니고 이 정도 가게에 알선할 정도면 선불금도 억 단위로 뜯어냈겠지. 충분히 남는 장사였다. 물론, 그런다고 해도 끝없는 이자 때문에 평생 원금을 없앨 수는 없는 구조라서 더욱.
“몇 년만 일하면 다 청산할 수 있다고 했지? 이미 선불금으로 일부는 상환했으니까.”
도혁에겐 너무 뻔한 시나리오였다.
“그런데 설아.”
그의 입술이 비틀렸다.
“너 속았어.”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으려던 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더 맞춰볼까? 이 가게는 고급이라서 2차 같은 건 절대 안 나간다고 했겠지?”
그랬다. 그게 설이 못내 수락한 이유였다. 과도한 신체접촉도 불가능하다고 했다. 게다가 옷도 노출은 없었다. 그게 아니었으면 차라리 죽었을 거다.
“이자 없는 사채꾼 없지? 똑같은 거야.”
“아니, 그건 아니야. 분명히…….”
“그걸 누가 정하는데?”
간신히 입을 여나 싶었더니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 설이다. 도혁은 묘한 감정이 섞인 채 실소를 뱉었다.
“하긴, 내 말은 못 믿겠지.”
도혁의 눈동자에 냉소가 묻어났다. 설은 예전에도 한 번 도혁을 배신하고 자취를 감췄다. 도혁에게 있어 최초이자 최후의 패배였다.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어.”
설이 담담하게 뱉었다.
“난 여기 평생 있겠다는 게 아니야. 우리 배가 돌아올 때까지… 그냥 그때까지 시간만 벌면 돼.”
도혁은 그제야 설의 집안이 해운업을 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심란한 이야기였다. 담배를 비벼서 끈 도혁이 술을 한 잔 들이켰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내 기억에 넌 그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잠깐 사업이 기운 것뿐이야. 하필이면 우리 배가 공해에서 피랍됐어. 오빠가 가서 협상 중이고, 그 배가 돌아오면 모든 빚은 물론 사업도 일으킬 수 있어.”
설의 눈동자가 또렷했다. 도혁은 그 아이러니에 쓰디쓴 술을 삼켰다. 이런 것도 인지 부조화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게 똑똑했던 여자가 막상 자신이 덫에 걸리자 모든 것을 잊고 순응한다.
“그래…… 그렇다고 치자. 일단은 말이야.”
도혁은 덫을 풀어줄 이유가 없었다. 다만, 설에게 수풀 너머의 현실을 보여주고 싶었다. 과연 그때도 저 냉정하고 도도한 설이 담담한 표정을 유지할 수 있을지 순수하게 궁금했다.
“우리가 한때는 좋은 사이였고. 마침 내가 도울 기회가 왔으니 모른 척하는 것도 무정하잖아.”
설이 경계가 담긴 눈을 들어 도혁을 봤다.
“걱정하지 마, 무조건 내 말을 믿으라는 건 아니야.”
섬뜩하리만치 낮은 목소리는 설의 기억보다 한층 굵어졌다. 선이 뚜렷한 이목구비도 서늘한 눈매도 툭 튀어나온 목울대까지 전부 어른의 냄새가 풍겼다.
“그냥… 보여줄게.”
도혁이 손수 빈 잔을 채웠다. 농밀한 황금색의 위스키가 빈 잔에 가득 채워졌다. 도혁은 그 광경을 보면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오늘 밤도 저렇게 찰랑거릴 것이다. 아주 오랜만에 살아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
도혁은 전화를 걸어 바로 윤 마담을 들어오라고 했다. 갑작스러운 요청에 불안한지 가게의 사장도 함께 들어와 숨을 죽이고 앉아 있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윤 마담의 불안한 눈이 도혁의 눈치를 살폈다.
“윤 마담. 지금부터 내가 뭘 좀 물어보려고 하는데…… 그냥 솔직하게 얘기 좀 해줘.”
말의 내용과는 달리 눈빛부터가 살벌했다.
“얘한테 한 것처럼 쓸데없는 개소리 하면 나 진짜 화날 것 같아서 그래.”
윤 마담이 침을 꼴깍 삼켰다. 이 일을 하면서 온갖 잔뼈가 굵은 여자였다. 그래서 더 위험의 신호를 잘 읽어낼 수 있었다. 게다가 그 상대가 하필 권도혁이였다. 어떤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거짓말을 하는 것보다는 낫다.
“설아, 너 여기서 일하는 조건이 뭐라고?”
왜 도혁이 저 아이의 실명을 아는 걸까. 윤 마담은 조금 전에 둘의 만남을 주선한 것을 깊이 후회하고 있었다.
“말해 봐, 네 입으로. 어차피 윤 마담이 다 말해준 거 아냐.”
“그냥 옆에서 술만 따르면 된다고. 나는 잠깐만 일할 거니까 괜찮다고. 그렇죠?”
윤 마담이 대답을 피했다. 그 사이, 도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렇지. 그리고 한 두어 번 정말로 그렇게 했겠지.”
이런 수법은 아주 고전적이다. 그리고 악질이었다.
“우리 윤 마담이 어련히 그런 손님만 골라서 맛을 보여줬겠어?”
그렇게 길들이는 거다. 조금씩 저항력을 잃도록, 차차 물들여가면서 나중에 가서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 이상의 것을 강요한다. 그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화류계 사람이 된 이후다.
“터치가 없어? 내가 여기서 얘 주무르면 쫓겨나는 거야? 말해 봐, 윤 마담.”
그럴 리가 없었다. 아무리 고급이라도 엄연히 화류계였다. 쉽게 버는 돈은 없는 것이다. 세상 이치가 그랬다. 돈 한 푼에도 뭐든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필요한 것은 상식이다.
“다시 부를 때까지 다 나가.”
그들이 떠나고 도혁과 설이 남았다. 설은 제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있었다. 자신의 어리석음도 화가 났지만, 그걸 하필 도혁에게 보인 것이 최악이었다.
“봤지?”
“그래. 내 현실이 얼마나 비참한지 알려줘서 정말 고마워.”
설의 말에 가시가 있었다.
“다 알고도 여기 남을래? 그땐 너도 알고 하는 거야.”
“하…….”
차가운 실소였다. 설은 눈물을 보이거나 절망하는 대신 여전히 냉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럼, 나더러 어쩌라고?”
현실이 주는 무게를 똑똑히 깨달은 것뿐이다. 처음부터 설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아무한테나 다리 벌리면서 돈 벌어서 빚 갚고 싶어? 네가 진 빚도 아니면서?”
“하고 싶어서 하는 사람이 어딨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거지.”
도혁이 새삼 뜨거운 눈빛으로 설을 봤다. 절망적인 상황에 부닥친 건 설인데 도리어 도혁의 속이 뒤집혔다. 그리 매정하게 떠났던, 도혁에게는 가질 수 없었던 여자다. 그런 여자가 아무 새끼들에게나 다리를 벌리며 돈을 벌어 꼴랑 그 빚을 갚겠다니 열불이 날 수밖에.
“씨발…… 넌 대체 날 뭐로 보는 거야.”
설의 가느다란 팔을 도혁이 휘어잡았다.
“넌, 내 앞에서 그런 말이 나와?”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네가 날 사주기라도 할래?”
“미친…….”
더 심한 욕설이 튀어나오기 전에 도혁은 설의 팔을 놓았다. 얼마를 내더라도 설이 다른 남자들에게 다리를 벌려대는 것을 보는 것보단 나았다. 만일 그 꼴이 진짜 일어난다면 도혁도 자신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다.
“여러 명에게 다리 벌리느니 깔끔하게 나한테만 벌리겠다, 뭐 그런 거야?”
노골적인 말에 설은 답하지 않았다.
“좋아. 정 원하면 내가 사주지.”
스륵, 설이 눈을 감았다가 떴다. 곧 도혁의 호출에 윤 마담이 다시 불려 왔다.
“어차피 오늘 내가 여기서 데리고 나갈 거니까, 깔끔하게 마무리하자. 왜 일을 그렇게 양아치처럼 해?”
쯧, 마뜩잖은 도혁이 혀를 찼다. 윤 마담이 눈알을 굴렸다. 아까운 여자였다. 하지만, 그걸 갖겠다고 버티면서 도혁과 대립하는 것은 사양이었다. 빠르게 머리를 회전시킨 윤 마담이 후, 한숨을 쉬었다.
“여자 장사가 다 거기서 거기지. 술만 따르는데 그 많은 돈을 왜 받아요.”
“네? 저는 분명히 잠깐만 일할 거라서 말 상대만 하면 된다고…….”
“다 속는 척하는 거잖아, 너희들도. 남자가 술만 따르는 거로 만족하겠어? 원하는 걸 줘가면서 그 남자 주머니에서 나오는 돈 빼돌리는 건 어딜 가나 마찬가지야.”
자신만 나쁜 게 아니라고 주장하듯, 윤 마담이 뻔뻔한 표정을 지었다. 설도 순진하게 그 말을 다 믿었던 건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의 약속은 지켜줄 거로 생각했다. 그조차도 아직 순진한 생각이었다. 도혁이 실소를 뱉은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얼마 주면 돼.”
도혁이 단도직입적으로 결론부터 꺼냈다. 윤 마담은 잠시 옆의 사장과 귀엣말을 하더니 도혁을 봤다.
“권 이사님이니까 드리는 거예요.”
“알았으니까 얼마 주면 되냐고.”
“선불금 일억 이미 줬고, 가게 나오기 전에 관리해주고 자잘한 거까지…….”
윤 마담은 도혁과 눈이 마주치자 말끝을 흐렸다.
“일억에 작은 거 다섯 장.”
도혁치고는 후한 금액이었다. 이 실랑이를 오래 하고 싶지 않았다.
“어디서 데려왔어?”
“그건…….”
윤 마담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도혁은 좀처럼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결국, 체념한 윤 마담이 다시 입을 열었다.
“성일, 한 사장한테요.”
“그건 또 무슨 양아치 새끼야. 잔금은 얼만데?”
“…저도 몰라요. 우린 선불금만 받고 데려오면 되니까.”
그것도 일리가 있었다. 도혁은 두어 번 고개를 끄덕이더니 정 실장에게 메시지를 날렸다. 채 3분도 되지 않았을 때 마담의 휴대폰에서 알림음이 들렸다.
“확인해봐.”
윤 마담은 정확히 1억 5천이 입금된 계좌를 보며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박 상무한테 더 놀다 가라고 해.”
“네…… 이사님은.”
“이제 내 거니까, 데려가도 되잖아?”
“그러셔야죠…….”
도혁은 보란 듯이 설의 손목을 잡고 가게의 계단을 올라갔다. 온통 하얀 대리석으로 도배된 고급스러운 가게의 추악한 이면을 목격한 설은 아직 충격이 가시지 않은 채로 도혁의 손에 이끌려 검은 세단에 탔다.
“정 실장, 좀 알아봤어?”
“예. 전형적인 돈놀이하는 것들입니다. 모체는 깡패고요.”
“그 한 사장인지 뭔지는 어딨대?”
그 말에 설이 의아한 듯이 도혁을 바라봤다.
“지금 카지노 갔답니다.”
정 실장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럼 현금이 좀 땡기겠네.”
“그렇겠죠.”
나쁘지 않았다.
“원금 얼마래?”
“선이자까지 3억 8천인데 현재까지 발생한 이자까지 하면…….”
“양아치처럼 장사하네.”
도혁이 낮게 읊조렸다. 설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이 상황을 파악했다. 설은 방금 가게에서 선불금을 내고 풀려났다. 이것을 행운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어떡할래?”
그제야 도혁이 설에게 시선을 줬다.
“한 사장네 이율 생각하면, 너 이런 가게에서 10년 일해도 못 갚을걸. 모르지, 공사 하나 제대로 치면. ……이제라도 그렇게 할래?”
설이 또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도혁은 일부러 설의 상처를 후벼 파는 것 같은 말만 골라서 하고 있었다. 설이 제 감정을 가라앉히는 사이 도혁은 정 실장에게 출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어차피 이 밤은 길었다. 둘이서 할 이야기는 아직 한참 남았다.
***
도혁은 한강이 보이는 건물의 꼭대기 층, 펜트하우스에서 살고 있었다. 온통 검은 대리석이 깔려 있고 고풍스러운 앤티크 가구와 천정의 크리스털 샹들리에까지 생활감이라고는 없는 풍경이었다. 집은 주인을 닮는다더니, 도혁에겐 썩 어울렸다.
“마셔.”
도혁이 냉장고에서 차가운 생수를 꺼내 건넸다. 설이 앉은 소파는 옆으로 서너 명이 더 앉아도 될 만큼 컸다.
“이틀만 일한 거 맞아?”
다소 신경질적인 목소리였다. 설은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 질문인지 잘 알고 있었다.
“맞아. 그리고 네 말처럼 아무 새끼한테나 다리 벌린 적 없어. 이제 됐어?”
도혁은 태연한 얼굴로 설의 대각선에 앉았다. 정면인 듯 아닌 듯, 묘한 각도로 서로의 옆얼굴이 놓였다.
“정 실장이 대충 알아본 모양인데, 하필 악질 중의 악질에 걸린 것 같다.”
솔직히 요즘 세상에도 그런 게 있나 싶을 정도였다. 도혁이 누군가에게 돈을 빌릴 일이 없었던 것도 있지만, 음지 중의 음지가 그 ‘성일’이라는 업체였다. 흔히 조직폭력배가 나오는 구식 영화에서나 볼법한 살인적인 이자와 절대 갚을 수 없는 구조, 그럼에도 목숨까지 쥐어짜서 마지막 한 푼까지 징수하는 폭력.
“도대체 해운 업체 사장의 아들이 어쩌다 그런 양아치와 엮였는지가 의문이긴 한데.”
도혁이 미간을 살짝 기울였다.
“3억 8천…… 맞아?”
“아냐, 3억이었어.”
“그럼 선이자만 8천이네. 아무튼, 양아치들. …이 정도면 날 찾아오지 그랬어?”
설은 아무런 답이 없었다. 돈이 없는 것이지 사람으로서의 자존심도 버린 게 아니었다. 한 번도 도혁을 떠올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설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었다.
“하긴, 술집에 나가는 것보다 날 찾는 게 더 싫었을 정도니까?”
도혁이 자조적인 웃음을 뱉었다. 그 눈동자에 어쩔 수 없는 분노가 깃들었다. 설은 도혁이 가장 밑바닥에 있을 때 자신을 떠났다. 한 번, 단 한 번의 인사도 없이 그저 홀연히 사라졌다. 그 원망이 도혁에게 자꾸 모진 말을 하게 했다.
“그 한 사장이란 인간은 카지노에서 죽을 치고 사는 모양이던데 네 오빠도 거기서 만난 거 아냐?”
“오빠가 무슨 카지노에…….”
“흐음.”
도혁이 안타까운 눈빛으로 설을 봤다.
“설아, 넌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렇게 굳게 믿는 거야?”
설이 도혁을 노려봤다. 그러자 도혁은 아무 말도 안 했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흘렸다.
“괜찮아, 모를 수도 있지. 모르는 건 내가 알려주면 되고.”
“나도 충분히 설명 들었어.”
“내 생각은 다른데.”
자존심은 상했지만, 동시에 호기심이 더 컸다. 아버지도 오빠도 빚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해 주지 않았다. 다만 처음엔 웃던 낯의 채권자들이 피를 말려대며 밤이고 낮이고 찾아와서 목을 매달 지경이 되자 설에게 울며 부탁을 했던 거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그 전에 설의 아버지가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마침, 내가 오늘 한가하거든.”
모처럼 살아 있다는 기분을 느끼고 있으니 시간은 얼마든 낼 수 있었다.
“뭐, 사업 병 걸린 양반들이 다 그렇듯 너희 아버지도 재기할 수 있다고 했을 거고. 네 오빠가 마침 친구가 돈을 융통해줄 수 있다고 해서 반겼나?”
“아버지는 돌아가셨어. 그때 이미 사업은 위태로웠고.”
“허.”
사업이 위태로운 정도로 여기까지 왔을 리가 없다. 한 사장 같은 인간은 양지에는 나오지 않는 법이다.
“그럼 네 오빠가 새로 사귄 친구가 사실 업계에서도 소문 난 악질인 걸 몰랐던 건가.”
“……오빠도 그 정도인 줄 알았으면 안 했을 거야.”
도혁의 눈엔 아직도 설이 순진해 보였다. 그런 면까지 전부 포함해서 마음에 들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다. 발자국 하나 남지 않은 새하얀 설원처럼 깨끗한 피부, 더러운 것이라고는 한 방울도 튀지 않은 새카만 눈동자. 도혁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었기에 더욱 욕망했다.
“아니, 적어도 네 오빠는 알았어. 뭐, 실감은 안 났을 거야. 이율이라는 게 막상 겪기 전에는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거니까.”
아직도 도혁의 말뜻을 전부 따라잡을 수 없었다.
“쉽게 말하면 빌린 건 3억인데 이미 8천을 선이자로 물었고, 그 이자는 네가 숨 쉬는 동안에 차곡차곡 붙고 있어.”
“그래도… 1억은 갚았으니까.”
“근데 다음 달 되면 또 나머지 2억이 4억 되고, 넌 이자만 갚느라 원금엔 손도 못 대. 원래 그런 시스템이거든. 한 달에 이자만 몇천 대가 될 텐데…… 그건 저런 가게에서 다리 벌려가면서 어떻게 번다고 해도, 원금 까는 날이 올까.”
도혁의 노골적인 발언에 설의 표정이 굳었다.
“왜, 다리 벌린다는 부분이 마음에 안 들어? 근데 사실이야. 그리고 네가 다리 벌려서 벌 수 있는 돈도 한계가 있어. 저 바닥에서 뒹굴다 보면 점점 몸값이 떨어지거든.”
가뜩이나 하얀 설의 얼굴이 창백할 만큼 질렸다. 도혁은 그런 설의 얼굴을 핥듯이 집요한 시선으로 훑었다.
“내가 정리해줄 수도 있어.”
설의 눈빛에 의혹이 서렸다.
“조금 전에 널 윤 마담한테 사 왔듯이, 한 사장에게서 네 채권 내가 다 살 수도 있어. 물론, 원금은 그대로 두고 이자는 법정 이율을 준수할게. 파격적이지?”
여기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설은 방금 조금이나마 세상의 이치를 깨우쳤다. 대가가 없는 돈은 없다는 것이다.
“넌… 뭘 요구할 건데?”
“이제 조금 눈치라는 게 생겼나 봐?”
빈정대는 듯한 말이었지만, 도혁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는 썩 만족스러웠다.
“아까 널 사주기라도 할 거냐고 했지? …그래, 그러자.”
도혁의 말투가 태연한 만큼 설의 상처를 깊게 후볐다.
“하지만 내가 갖는 것과 사는 것은 묘한 뉘앙스의 차이가 있거든.”
항상 백설을 원했다.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그녀의 자취가 사라진 후에도.
“만약, 예전이라면…… 아무 대가 없이 널 도왔을 거야.”
설도 알고 있었다. 그래, 예전이라면.
“그런데 그때 네가 나한테 했던 짓 때문에 내가 성격이 좀 삐뚤어졌나 봐.”
후, 내뱉는 숨에 오히려 가슴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어차피 가질 수 없다면,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래? 그럼 사줘.”
도혁을 그 장소에서 다시 만난 순간, 설의 자존심은 처절하게 무너졌다. 게다가 가게의 진실을 알게 된 이상 그곳으로 돌아가는 것은 싫었다.
“내가 뭘 원하냐고…… 간단하지.”
욕망으로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설의 새하얀 목덜미를 훑었다.
“나한테 한 번 벌릴 때마다 천만 원씩 제할게. 나쁜 조건은 절대 아냐.”
“그게…….”
“무슨 뜻인지 잘 알잖아. 너는 나한테 다리를 벌리고 나는 네 구멍에 내 좆을 박고, 서로 헐떡이다가 내가 사정하면 끝나는 거야. 그게 한 번이라고.”
노골적인 말에 설의 손이 움찔했다. 도혁은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짐승 같은 도혁의 시선이 설의 몸을 더듬고 있었다.
“나랑 한 번 섹스할 때마다 천만 원씩 원금에서 제하는 거야.”
“지금 나한테 몸을 팔라는 거야? 내가 아무리 그래도… 자존심까지 다 버린 건 아냐.”
도혁의 입꼬리가 비뚤게 올라갔다.
“알아. 나도 자존심 없는 몸뚱이엔 관심 없어.”
도혁이 갖고 싶은 것은 날 것 그대로의 백설이었다. 한때 뭐든지 줄 수 있을 것처럼 사랑했던, 그리고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 배반당했던 바로 그 백설이다.
“어디까지나 네 의지로 하는 거야. 강요는 없어.”
“싫다면?”
“그럼 다시 윤 마담한테 가보던가. 선불금은 그냥 내 호의라고 생각하고.”
설의 얼굴이 굳어졌다. 다시 돌아간다면 모든 걸 감수하겠다는 뜻이었다.
“한 사장한테 이자에 원금까지 갚으려면 도대체 다리를 몇 번 벌려야 할지 모르겠다만.”
“그러느니…… 죽겠어.”
“마음대로 해. 그냥 나한테 다리 몇 번 벌리고 자유롭게 사는 것보다 그게 낫다면.”
설이 입을 꾹 다물었다. 현실적인 상황이 아니라면 죽고 싶을 이유는 없었다. 한때는 꿈많은 소녀였고, 언젠가 사랑을 하고 인생의 계절을 느끼고 싶었다. 빚이 아무리 많더라도, 꿈꾸기만 하는 것은 자유였다.
“답은 내일 아침까지.”
도혁은 의외로 순순히 일어섰다.
“그 이상은 나도 힘들어. 난 네 문제만 되면 인내심이 없어지거든.”
그렇게 말하는 도혁이 사나워 보였다. 어렸던 설은 도혁을 처음 봤을 때 사람들에 섞이지 않는 유일성에 이끌렸다. 지독하게 위험한 냄새가 났지만, 그에게선 고고한 맹수의 위세가 있었다. 그 맹수는 설을 바라보며 애정을 갈구했다. 그것은 아주 특별한 일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게 설의 실수였다.
“그래, 내일 아침까지.”
설의 대답을 들은 도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1층에 아무 침실이나 사용해.”
그 말을 남긴 도혁 자신은 층계를 오르고 있었다. 그나마 하룻밤이라도 여유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설은 가장 가까운 욕실에서 샤워를 마치고 아무 침실이나 찾아서 자리를 잡았다. 아무리 물줄기를 맞아도, 침대에 몸을 누여도 이 상황이 실감이 나진 않았다.
“그땐 이렇게 될 줄 몰랐는데.”
쓸쓸한 혼잣말이 떨어졌다. 설이 도혁을 처음 만났을 때는 둘 다 열아홉 살이었다. 그리고 처음 만난 순간부터 도혁은 설을 욕망했다. 당시에도 이미 흡연부터 시작해서 자잘한 비행을 일삼던 도혁이 사립학교에서 쫓겨난 것은 금세였다. 아무리 도혁의 배경이 대단해도 그를 통제할 수는 없었다.
“내가…… 미쳤지.”
오래 지나지 않아 집요하게 설을 쫓던 도혁에게 호기심이 생겼다. 어른이 되기 직전의 소년기에 머물러 있던 도혁은 그때도 이미 지금처럼 맹수의 냄새를 풍겼다. 조금씩 경계심이 풀어질 무렵, 설은 도혁의 눈동자에서 그 누구보다 올곧은 선을 보았다. 그게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것도.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때 두 사람은 열아홉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사랑에 빠지기 충분한 나이였다.
그 시절은 아무리 돌이켜도 희미한 꿈 같았다.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청춘의 행복했던 나날이다. 서툴고 어색했어도 그것까지 전부 좋았다. 그땐 그게 꿈이라는 것도 몰랐다. ……하루, 단 하루의 사고로 산산이 깨어질 꿈이라는 것은 결코.
***
아침이 밝을 때까지 설은 한숨도 자지 못했다. 도혁은 멀쩡한 모습으로 슈트를 갖춰 입은 채 설이 기다리고 있던 거실의 소파로 향했다.
“결정했어?”
설이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혼란에 젖었던 눈동자는 어디로 가고 서늘하게 식은 담담한 눈빛이 꼭 도혁을 닮았다.
“계약서로 남겨줘. 한 번마다 확실히 차감하고, 언제 어떻게 할지는 전부 내가 선택할 거야.”
“흐음…… 어쨌든 하겠다는 거지, 이 거래.”
“그래.”
외모와는 달리 설의 내면은 연약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바로 그 점이 도혁의 마음을 잡아끌었다. 설의 눈빛에는 소리 없이 타는 불꽃이 있었다. 흔들리지 않는 강단이 있었고 또렷한 의지가 있었다. 그러니 여기까지 버틸 수 있었다. 설의 눈동자엔 여전히 얼룩 한 점 보이지 않았다. 도혁이 죽을 만큼 안도하는 사실이었다. 본래의 백설이어야만 소유하는 의미가 있다.
“어디까지나 비즈니스야.”
설이 스스로 타이르듯 말했다.
“좋을 대로 생각해. 단, 계약이 끝날 때까지 내 곁에서 떠날 생각은 하지 마. 일단은 내가 네 채권자니까.”
검은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빈틈 없이 커다란 이 집과 아름다운 여자들이 허망한 눈빛으로 담배 연기를 뿜어대는 가게의 대기실. 과연 어디가 감옥에 가까울까. 설은 억지로 제 상념을 끊어냈다. 이미 결정한 일이다.
“지금 처리하지.”
도혁이 정 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지시를 내렸다. 전화를 끊고 나자 곧 정 실장에게 메시지가 날아왔다. 도혁은 무심한 눈동자로 그것을 내려보다가 설을 응시했다.
“자, 이제 내가 너의 유일한 채권자야.”
“…그래.”
차마 고맙다는 말까진 나오지 않았다. 이것은 호의가 아닌 거래였다. 그 증거로 도혁은 지금도 설을 핥는 듯한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그래서, 첫 거래는 언제야?”
도혁은 아주 태연하게 말했다. 정말 이 일이 정상적인 거래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네가 성병에 걸리지 않았다는 증명을 받은 후에.”
밤새 잠들지 못하면서 여러 생각을 했다. 딱히 도혁을 의심한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요구를 하는 편이 훨씬 비즈니스에 가까운 느낌을 들게 했다.
“의외의 요구네.”
“원하면 나도 검사해.”
“아니, 딱히.”
도혁의 입꼬리가 말아 올려졌다.
“그 서류, 만약 오늘 밤에 가져오면?”
“그럼 오늘 밤이겠지.”
순간, 도혁에게 확 열이 올랐다. 새카만 눈동자가 욕망으로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말한 적 있나? 난 네 그런 결단력을 좋아했어.”
결단? 이건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었다. 설은 고민과 다가올 고통을 상상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차라리 미리 겪고 지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다. 만일 도혁을 만나지 않았다면 윤 마담의 술수에 알지도 못하는 남자들에게 다리를 벌려야 했을지도 모른다. 한 번 인정하는 것까지는 힘들었지만, 현실을 받아들이자 차라리 이게 나았다.
“이건 비즈니스니까.”
설이 선을 그었다. 그에 따라 도혁의 눈이 조금 식었다. 그러고 보니 슈트를 입은 도혁은 처음 본다. 검은 슈트와 타이는 도혁에게 썩 어울렸다. 그때보다 키가 조금 더 자란 것도 같았다. 전체적으로 몸이 커진 느낌이었다. 그래서 더 위압적이다.
“좋을 대로 생각해.”
도혁은 묘한 미소를 남기고 떠났다. 이제 설에게는 겨우 한나절이 남았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
하루가 지긋지긋하게 길었다. 오늘따라 예민한 도혁의 심기를 느낀 정 실장은 알아서 자잘한 일을 제 선으로 잘랐다. 온종일 시계를 보는 도혁의 다급한 심정은 분명 어제의 여자와 관계가 있을 거다. 심지어 박 상무에게 직접 어제의 일에 대해 언급하지 말라고 이르기까지 했다.
“이게 사고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정 실장이 씁쓸하게 혼잣말을 했다. 도혁은 이 회사의 폭군이자 통제할 수 없는 짐승이었다. 그래도 집요한 승리욕 덕분인지 맡은 일은 반드시 기대 이상의 결과를 내곤 했다. 뭐, 그게 아니었어도 오너 가의 일원이라는 것만으로도 도혁의 지위는 확고했다.
“정 실장.”
멍하니 시계를 응시하던 도혁이 겨우 입을 뗐다.
“뭔가 앞뒤가 안 맞는 기분이야.”
“아…… 세상일이라는 것이 원래…….”
정 실장이 심각한 도혁의 표정을 보며 말끝을 살짝 흐렸다.
“아니, 그딴 거 말고. 아무리 망했어도 예전 선화 해운은 그 정도가 아니었거든.”
그제야 정 실장은 도혁의 의중을 읽었다. 선화 해운은 그리 큰 기업도 아니었지만, 나름 탄탄한 중소기업이었다.
“무엇보다 그런 깡패 새끼들한테 돈을 빌릴 정도로 현찰이 없다는 게…… 이해가 안 가.”
“이사님 입장에서는 이해가 안 가실 만도 합니다만.”
“아니, 상식적으로 말이야.”
부자는 망해도 삼 대가 간다는 말이 있다. 회사를 전처럼 일으킬 돈은 없어도 일개 깡패들에게 말도 안 되는 사채까지 쓴다는 게 미심쩍었다.
“뭣보다 억류를 당할 배가 있다는 건…… 그걸 담보로 할 수도 있었다는 뜻인데.”
가장 의심스러운 것은 한 사장의 존재였다. 그런 구렁텅이에서 죽음의 돈놀이를 하는 사람은 절대 일반적인 상황에서 등장할 수가 없었다.
“제가 조사해볼까요?”
어쩐지 판도라의 상자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도혁은 이미 추측을 끝낸 후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설에게 무척 잔혹할 것이다. 하지만 설도 알아야 했다. 자신의 희생이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는 것을. 그것을 알게 됐을 때 설의 표정을 보고 싶었다.
“그래, 샅샅이 뒤져.”
“예, 이사님.”
정 실장이 물러나자 창밖으로 석양이 지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겨울은 해가 짧았고 그만큼 어둠이 찾아오는 시간이 일렀다. 그 사실이 지금만큼 마음에 든 적은 없었다.
***
도혁의 귀가는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아직 7시도 되지 않았지만, 밖은 어두웠다. 설은 오늘 밤이라는 애매한 시간을 제시한 것을 후회했다. 어차피 할 일이라는 것을 알아도 막상 코앞에 닥치자 초조하고 긴장이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확인해봐.”
도혁이 건넨 서류에는 모든 질병에 대한 음성 결과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그 사고 이후로 건강 관리를 아주 철저히 하거든.”
굳이 그 사고란 단어에 힘을 준 의도를 설도 알고 있었다. 그 사고 후에 설이 떠난 것을 아직 원망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난 샤워부터 할 테니까, 너도 준비되면 올라와.”
무심한 말투였다.
“한 시간 안에.”
그리고 단서를 붙였다. 설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모든 결정은 끝났다. 설은 대가를 치를 것이다. 그 상대가 도혁이라면 적선을 받느니 그 대가로 뭔가를 지불하는 게 더 마음이 편했다. 게다가 어차피 도혁을 만나지 못했으면 윤 마담의 수작으로 화류계에서 이리저리 굴려질 몸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나마 나았다. …그나마.
“하아…….”
설은 거울 속의 자신을 봤다. 곧 닥칠 일을 생각하니 제 나신이 영 낯설게 느껴졌다. 설은 욕실에 준비된 보디로션을 바르고 머리카락을 말렸다. 그래도 역시 어색한 건 마찬가지였다. 도혁이 출근을 한 후에 비서라는 사람이 찾아와서 간단한 옷가지 몇 개를 두고 갔다. 설은 그중에 가장 심플한 속옷을 입고 그 위에 무난한 원피스를 입었다.
그것만으로도 주어진 한 시간이 거의 끝나고 있었다. 설은 제 아랫입술을 꾹 깨물다가 2층을 향하는 층계로 무거운 걸음을 뗐다. 도혁이 머무는 침실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2층에는 방이랄 게 달리 없었기 때문이다.
설은 심호흡하고는 침실문을 두드렸다.
똑똑.
“들어 와.”
짧은 말이 설의 심장을 울리는 것처럼 에이게 박혔다. 설은 심호흡한 후에 문을 열었다. 드넓은 침실에는 1층과 같은 샹들리에가 걸려 있었고 천장이 유독 높았다. 온통 검은색 대리석이 깔린 침실의 한가운데에 커다란 침대가 있었다. 시트까지 검은색이라서 이 방 자체가 새카만 밤을 연상시켰다.
“이리 와.”
명령조로 말하는 도혁은 이미 상체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침대의 헤드에 기대앉아 있었다. 탄탄한 근육이 온몸을 감싸고 넓은 어깨를 한층 더 위압적으로 두드러지게 했다. 깊게 팬 쇄골에 물방울이 조금 묻은 거로 봐선 도혁도 마침 샤워를 마친 것 같았다.
“알잖아. 나 두 번 말하는 거 싫어하는 거.”
낮은 목소리가 경고처럼 울렸다. 설은 그 기세에 압도당한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몸은 내어줘도 자존심은 지키고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더 태연한 표정으로 침대에 다가가 앉았다.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다 알아.”
도혁이 손을 뻗어 설의 머리를 톡 쳤을 때, 설은 놀란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써야 했다.
“하지만 과연 내 좆이 네 다리 사이에 박혀도 그렇게 도도한 척을 할 수 있을까?”
노골적인 단어를 듣는 것은 괴로웠다. 설은 시선을 피했다. 이 방에 들어왔을 때부터 도혁의 눈빛이 너무 뜨거운 욕망을 담고 있어서 닿는 곳마다 따가울 정도였다. 눈빛만으로도 살갗에 감촉을 느끼게 할 수 있다는 게 두려울 만큼.
“내가 벗길까, 네가 벗을래?”
도혁이 선택의 여지를 주는 것은 이 상황을 즐기고 있기 때문이다. 설의 선택은 뻔했다. 끝까지 제 자존심을 지키려 하겠지. 그러나 도혁의 말처럼 그건 오래가지 못할 거다.
“내가… 할게.”
설이 다시 침대에서 일어난 후에 천천히 원피스를 거꾸로 벗었다. 그 아래엔 아무런 장식도 없는 심플한 검은색의 속옷이 있었다. 가뜩이나 하얀 살결에 검은 속옷이라니, 도혁은 바싹 타오르는 제 입술을 핥았다. 그 모습은 마치 사냥감을 앞에 둔 맹수 같았다.
“속옷은 놔둬. 그건 내 몫이니까.”
도혁이 손을 뻗어 설의 팔을 잡았다. 조금만 세게 잡아도 자국이 남는 여린 살결이었다. 도혁이 힘을 주어 당기자 설의 중심이 무너지며 침대로 넘어졌다. 도혁은 순식간에 제 몸을 일으켜 설의 위에 올라탔다. 도혁의 검은 눈동자에서 욕망이 넘실거려 넘칠 것만 같았다. 설은 굳이 눈을 감지는 않았다. 오히려 도혁의 시선을 피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로 그를 마주 봤다.
“난, 예전부터 네가 그런 눈으로 날 볼 때마다…… 좆이 터질 것 같았어.”
나직한 목소리가 설의 귓가를 긁었다. 그러나 도혁은 숨 돌릴 여유도 주지 않은 채 설의 입술을 덮쳤다. 예전처럼 조심스럽고 다정한 키스가 아니었다. 단번에 말캉한 혀를 설의 입 깊숙이 밀어 넣은 도혁은 입안의 여린 살을 탐하듯이 강하게 더듬고 설의 혀를 빨아들였다.
“흐….”
설이 벌써 가쁜 숨을 흘리는 게 도혁의 정복욕을 더욱 자극했다. 도혁은 설의 고운 목덜미를 더듬다가 봉긋한 가슴으로 손을 뻗었다. 채 브래지어에 다 담기지 못한 풍만한 가슴이 손끝에 짜릿한 쾌락을 가져왔다. 도혁은 거센 입맞춤을 퍼부으면서 그 가슴을 제 손에 꽉 쥐었다가, 브래지어를 헤집어 유두를 찾았다. 순간, 설의 목덜미에 긴장이 도는 것이 느껴졌다. 도혁은 참지 못하고 설의 유두를 비틀었다.
“……읏.”
제 아랫입술을 깨문 설에게서 참지 못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도혁은 그제야 입술을 떼고 위에서 설을 내려봤다. 한쪽 브래지어가 젖혀진 채 유두가 비어져 나온 모습이 장관이었다. 도혁의 급한 손길이 이내 브래지어를 풀었다. 감춰져 있었던 설의 뽀얀 가슴이 살짝 출렁이며 온전한 자태를 드러냈다.
“이거 조금 만졌다고 벌써…….”
도혁이 우윳빛의 가슴을 꾹 틀어쥐었다. 설이 낯선 고통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도혁의 손가락 사이로 살들이 비어져 나와 조금 붉은 기가 돌기 시작했다. 도혁은 손가락 사이로 튀어나온 유두를 비틀다가 이내 입을 가져다 댔다. 혀로 유륜 근처를 집요하게 노리던 도혁이 이내 설의 유두를 흡입했다. 그 순간 설의 몸에 저릿하고 낯선 감각이 퍼졌다.
“읏.”
참으려고 했지만, 소리가 흐르고 말았다. 그 소리를 놓치지 않은 도혁이 설의 위에 올라탄 채 고개를 들었다. 가슴은 여전히 그 커다란 손으로 주무르는 중이었다. 뭉클하고 여린 살의 감촉은 아무리 만져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소리, 참지 마. 난 내가 만질 때마다 느끼는 네 반응까지 산 거니까.”
도혁의 목소리가 욕망으로 잠겼다.
“비즈니스라며.”
꾸욱, 가슴을 틀어쥐던 도혁의 손이 여지없이 유두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비볐다. 설의 미간이 확 기울었다. 통증인지 알 수 없는 어떤 감각인지, 유두를 자극할 때마다 묘한 느낌이 가슴을 간질이듯 괴로웠다.
“눈도 감지 말고, 소리도 참지 마. 뭐든 느끼는 대로 다 내게 보여줘야 해.”
설이 항의의 표시로 도혁을 노려봤지만, 그게 오히려 도혁의 욕구를 자극하고 있었다. 도혁의 페니스는 이미 부풀 대로 부풀어서 아랫배에 올라붙을 정도로 성이 나 있었다.
“그게 아니면 1회로 못 쳐.”
잔인하고 치사한 수법이었다. 설은 진작 계약에 대해 더 자세히 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지만, 이미 덫에 걸린 후였다. 설이 소리를 참거나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면 굳이 도혁에게 몸을 내어준 소용도 없어진다.
“물론, 내가 시키는 것도 묻는 말에도 답해.”
그러나 이번만큼은 대답이 필요하지 않았다. 도혁이 한 것은 통보였다. 일종의 협박이기도 했다. 섹스하고서도 차감이 없다면 설은 평생 도혁에게 묶여야 한다. 그것도 도혁으로서는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고작 유두를 비튼 정도로 소리를 참지 못하는 설이었다. 이 민감한 몸이 섹스에서 일어나는 반응을 참는 건 불가능하다. 도혁은 설의 정신적인 족쇄를 진즉 제거하려는 것이다. 덫은, 치밀했다.
“여기도 느끼나?”
도혁이 설의 가느다란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낮은 목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울렸다. 그거로도 모자라 도혁이 설의 귓불을 빨다가 점차 아래로 내려갔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간지러운 건지 낯선 건지 알 수가 없는 감각이었다. 설이 제 살갗을 스치는 뜨거운 도혁의 혓바닥에 미묘함을 느끼고 있을 때, 문득 도혁이 아무런 경고도 없이 설의 목덜미를 콱 물었다.
“앗!”
이번에는 명백히 통증의 소리였다. 날카로운 소리는 도혁을 한층 더 자극했다. 인내심의 한계에 가까웠다. 도혁은 아래로 손을 뻗어서 설의 엉덩이를 쥐었다가, 팬티를 벗겼다. 설은 적나라한 나신이 되는 것이 두려워 눈을 감았지만, 도혁이 그대로 둘 리가 없었다.
“아니, 날 봐야지.”
할 수만 있다면 손으로라도 아래를 가리고 싶었다. 가뜩이나 체모가 적은 설이었다. 음부가 적나라하게 보일 것이다. 설은 그런 마음을 담아 다리를 꼭 오므렸지만, 도혁이 허벅지 안쪽으로 파고드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왜 여긴 털이 안 났지? 더 야하게.”
뜻밖의 수확 같았다. 실제로 체모가 없다시피 한 설의 음부가 더 색정적이었다. 설은 제 콤플렉스를 보이는 게 부끄러워 눈을 감아야 했다. 도혁은 설의 한쪽 유두를 빨면서 점차 배꼽과 옆구리를 지나 골반에 이어 도톰한 둔덕까지 더듬었다. 시트를 쥔 설의 손에 긴장의 힘이 들어갔다. 도혁의 손가락이 둔덕 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 아래는 기대와는 다르게 아직도 건조했다.
“안 되겠네.”
도혁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경계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설의 상체를 일으켜 침대 헤드에 기대 앉혔다. 물론 앉히는 것의 목적은 따로 있었다. 도혁이 설의 두 발목을 잡고 설의 몸쪽으로 밀었다.
“네 발목 잡아, 둘 다.”
자연스럽게 무릎이 굽혀지고 다시 알파벳의 M자로 벌어지며 가운데가 적나라하게 보였다. 설은 또 한 번 눈을 질끈 감고 싶은 충동을 참아야 했다. 도혁의 새카만 눈동자가 훤히 벌어진 설의 중심을 보고 있었다. 어쩐지 아래가 뜨거워지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드는 집요한 시선이었다.
“잘 안 보여, 네 손으로 벌려봐.”
“그건…….”
설이 노골적인 거부의 눈빛을 보였다. 워낙 하얀 설의 음부는 겉으로 볼 때는 다른 곳과 똑같이 뽀얀 색이었지만, 그 안의 속살은 다를 것이다.
“안 해봐서 몰라?”
도혁의 손가락이 설의 도톰한 음부를 건드렸다. 살짝 스치기만 했는데도 예민한 곳이라 절로 허리가 움찔거렸다. 도혁은 그대로 설의 음부에 난 균열을 따라서 손가락 하나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기 안에 있는 네 구멍이 보이게 손으로 벌리면 돼. 쉽지?”
쿡, 도혁의 손가락이 설의 질구 근처를 찔렀다. 설은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그러나 도혁의 손가락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질구를 따라 위로 올라갔다. 어느샌가 손끝에 도톰한 살점이 걸리는 게 느껴졌다. 도혁이 입꼬리를 비틀며 그 살점 주위를 꾹 눌렀다. 파르르, 설의 허리가 떨리는 것이 도혁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질 정도였다.
“참지 말라고 경고했어. 경고는 이게 마지막이야.”
설의 피가 날 정도로 세게 입술을 깨문 얼굴을 보며 도혁이 낮게 으르렁대듯이 속삭였다. 도혁의 손가락이 다시 설의 클리토리스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건조해서 제대로 움직이지 않던 것이 몇 번의 마찰을 이어가자 조금씩 수월해졌다.
“흐으…….”
도혁의 손가락이 클리토리스를 굴릴 때마다 이상한 소리가 새어 나오고 몸이 더워졌다. 참지 말라는 경고가 없었어도 도저히 소리를 내지 않을 수 없는 자극이었다. 도혁의 손가락 끝에 도톰하게 튀어나온 클리토리스는 만지면 만질수록 단단해졌다. 그만큼 자극도 강해진다. 설은 제 음부의 한 지점에서 퍼지는 농밀한 쾌감과 알 수 없는 저릿함에 입술을 반쯤 벌렸다.
“아… 앗.”
도혁의 손가락이 예고도 없이 질구를 눌렀다. 아래에 온몸의 피가 쏠린 것 같았다. 그는 붉게 물든 설의 뺨을 흘깃 보고는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애액이 묻은 손가락을 다시 클리토리스에 문댔다.
“아읏.”
아까와 결이 다른 교성이 튀어나왔다. 질척이는 액체와 함께 비벼지는 클리토리스에서 자극이 올 때마다 설은 몸의 여기저기를 움찔거리며 파르르 떨었다.
“이거, 네 구멍에서 나온 물이야. 내가 만지니까 지금도 좋다고 줄줄 새잖아.”
그 말처럼 아래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도혁이 두 손가락 사이에 설의 클리토리스를 끼우고 문지르자 참기 어려울 정도로 아래가 뜨거워졌다.
“앗, 아으…….”
벌어진 입술 사이로 자연스럽게 교성이 새어 나왔다. 제 발목을 꾹 붙든 손에 얼마나 힘이 들어갔는지 창백해질 정도였다.
“이제 벌려봐.”
도혁이 설의 허벅지 안쪽을 양손으로 잡고 더 활짝 벌렸다. 그러고는 설의 음부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설은 약간 떨리는 손으로 제 음부에 손을 댔다. 평소보다 음부의 도톰한 둔덕이 한층 부푼 것처럼 느껴졌다. 도혁이 말한 것처럼 이미 음부가 젖어서 번들거리고 있었다. 설의 뺨이 확 달아올랐지만, 지금 와서 멈출 수도 없었다. 설은 제 입술을 깨물면서 제 음부의 도톰한 살을 양쪽으로 벌렸다.
“하아…….”
탄식은 오히려 도혁의 입에서 나왔다. 그는 상체를 뒤로 물리고 분홍빛의 여리디여린 속살을 감상했다. 애액으로 젖어서 번들거리는 분홍빛 살점들은 질구를 중심으로 꽉 여물어 있었다.
“구멍까지 예쁘게 생겼네.”
도혁이 손을 뻗어 다시 젖은 음부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손가락 하나로 질구를 쿡쿡 쑤셨다. 온통 음부에 피가 쏠려 작은 움직임도 예민하게 느껴졌다. 질구 주위를 빙글빙글 돌던 도혁의 손가락이 애액에 젖어 쑥 미끄러지듯이 질구 안으로 들어갔다.
“앗!”
약간의 저항감은 있었지만, 손가락 하나를 집어삼킨 설의 질구는 이내 손가락을 꽉 물 듯이 조였다. 도혁은 그 탄성을 즐기며 질구의 위아래로 빙글빙글 돌리듯이 손가락으로 설의 안을 유린하고 있었다. 제 안에서 쿡쿡 찔러대는 손가락의 존재에 설이 잔뜩 미간을 찌푸렸다.
“벌써 그런 표정 지으면 어떻게 해.”
도혁이 손가락 하나를 더 억지로 밀어 넣었다.
“흐읏.”
설의 허리가 처음보다 심하게 반동했다. 입구부터 빠듯하게 느껴지는 두 번째 손가락까지 간신히 삼킨 질구가 아직도 애액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이제 여기에 내 좆도 들어갈 텐데.”
도혁이 바싹 마른 제 입술을 핥았다. 그러면서도 설의 음부에 집어넣은 손가락을 멈추지 않았다. 두 개의 손가락이 넣었다 뺐다 하면서 설의 질구를 넘나들었다. 결코, 손가락 전부를 빼는 일은 없었다. 도혁은 신중하게 주의를 기울이며 설의 질구가 제 손가락을 꽉 무는 것을 보며 쾌락을 느꼈다. 곧 이곳에 제 페니스를 물리면 질구가 가득 찰 것이다. 손가락 두 개로도 버거워하는 곳에 페니스를 박을 생각을 하자 더 참기가 어려워졌다.
“하, 이제 놔도 돼. 내가 더 만져주길 원하는 게 아니면.”
도혁이 아쉽게 설의 질구에서 손가락을 빼냈다.
“이만큼 젖은 걸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일부러 설의 눈앞에서 애액으로 질척이는 손가락을 보여줬다. 설은 도톰한 입술을 꼭 다문 채로 어떤 대답도 하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시선은 본능적으로 두 손가락 사이에서 투명한 실처럼 늘어지는 애액을 봤다. 저게 제 아래에서 나왔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안 되겠다, 내 인내심도 한계라서.”
그렇게 말한 도혁이 제 바지를 벗었다. 샤워 후에 속옷을 입지 않았는지 설의 시야에 흉기에 가까운 페니스가 바로 들어왔다. 설이 상상했던 크기나 모양과는 전혀 달랐다. 배꼽부터 이어진 거친 털 아래에 꼿꼿이 선 페니스는 군데군데 혈관이 불거져 있어서 한층 위협적이었다. 저런 게 도저히 제 아래에 들어갈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누워.”
도혁이 설의 다리를 잡고 죽 당기자 그대로 설이 도혁의 아래에 깔렸다. 처음과 같은 자세였다.
“내 좆이 들어가면, 어떤 느낌인지…… 하나도 빼놓지 말고 보여줘. 응?”
설의 목덜미에서 속삭이는 목소리가 짐승 같이 허덕이고 있었다. 곧, 설은 제 음부에 와닿는 단단한 페니스를 느꼈다. 보이는 모습도 엄청났지만, 이렇게 딱딱할 줄은 몰랐다. 돌처럼 딱딱하다는 말이 실감이 날 정도였다. 쿡쿡, 음부를 찌르는 페니스 선단에서 선액이 흘러나와 금세 설의 애액과 섞였다. 이미 질척하게 젖은 음부의 균열을 따라 제 귀두를 비비는 도혁에게서 금방 더운 숨이 나왔다.
“하, 씨발…….”
도혁의 단단한 귀두가 질구를 찾았다. 뜨겁고 질척한 설의 음부는 닿는 것만으로도 욕지기가 나올 정도로 극심한 쾌락을 주고 있었다. 도혁의 몸이 본능적으로 욕망을 향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선 체중을 실어서 귀두를 질구에 누르듯이 밀어 넣자 그대로 설의 몸이 얼음처럼 굳었다.
“으…….”
“아파? 그럼 힘을 빼.”
그게 가능할 리 없었다. 설은 제 아래의 살이 찢어지는 것 같은 쓰라림을 느꼈다. 아무리 젖었어도 도혁의 페니스는 귀두부터 너무 단단하고 굵었다. 손가락 두 개도 겨우 밀어 넣었던 곳인데 그 우람한 물건이 다 들어갈 거라고는 믿기가 어려웠다.
“잠, 잠깐만…….”
“왜, 여기까지 해놓고 포기하고 싶어?”
설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곧 제 몸 안에 들어올 페니스가 두렵기도 했다.
“가능하면…… 천천히 해줘…….”
“노력은 해보지.”
의외로 긍정적인 답이 돌아왔다고 생각한 순간, 믿을 수 없는 고통이 설의 몸을 갈랐다.
“아흑!”
“하…… 말했잖아, 내 인내심도 한계라고.”
아래가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에 절로 눈물이 주룩 흘렀다. 아래에서 시작된 고통은 척추를 타고 전신으로 번졌다. 몸이 반으로 갈라지는 것 같은 고통이었다. 설은 숨조차 쉬지 못하고 도혁의 아래에서 시트를 움켜쥐는 것으로 고통을 참아냈다.
“아…… 아으.”
그러나 도혁은 사정을 봐주지 않고 페니스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 안에서 그렇게 크고 단단한 물건이 들락거린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도혁은 제 아래에 깔려서 애처롭게 할딱대는 설을 봤다. 한계까지 부풀었다고 생각한 페니스가 설의 안에서 한층 더 부피를 늘렸다.
“으, 으흑.”
설의 손이 시트를 붙든 채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떨리는 것은 손만이 아니었다. 도혁이 움직일 때마다 설의 골반과 허리가 경련하듯 움찔거렸다. 도혁이 아래를 내려보자 설의 여린 분홍빛 속살이 제 페니스를 터트릴 것처럼 꽉 물고 있었다.
“힘 좀 빼, 진짜 내 좆이 터질 것 같아서 그래.”
지금 설은 아무것도 제 뜻대로 할 수가 없었다. 몸의 정중앙을 꿰뚫린 고통이 가시기도 전에 아래가 축축하니 젖어 들고 있었다. 도혁이 속도를 늦춰서 서서히 피스톤질을 하자 질구도 그에 맞춰 서서히 늘어나는 것 같았다. 그런다 해도 여전히 속살이 찢긴 것 같이 쓰라리고 다음 행위가 두려웠다.
“눈, 감지 말라고 했지.”
도혁이 짐승처럼 설의 가녀린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그리고…… 여기야.”
설이 시트를 쥐고 있던 손을 떼어낸 도혁이 제 어깨에 올렸다. 나머지 손도 마찬가지로 올리자 꼭 설이 도혁의 목을 끌어안은 것처럼 됐다. 더는 시선을 피할 곳도 신음을 숨길 공간도 없었다. 도혁은 설을 완전히 제압한 상태에서 허리짓을 재개했다.
“으, 아으, 아으으…….”
“더, 더 울어 봐. 더 듣고 싶어.”
도혁이 피스톤질의 끝에 힘을 주어 설의 질구에 제 몸의 체중을 실은 채로 꾹 눌렀다.
“앗, 아흑!”
페니스가 완전히 끝까지 설의 몸에 삼켜졌다. 안으로 뭉클하게 무엇인가 자극되는 느낌과 도혁의 거친 털이 클리토리스에 비벼지는 자극이 설의 허리를 경련하듯 떨게 했다.
“아, 아흐으. 아, 앗.”
설이 할딱거리며 반쯤은 울음 같은 교성을 흘렸다. 도혁은 그 기세를 놓치지 않고 피스톤질을 더욱 빠르게 시작했다. 퍽퍽, 설의 젖은 질구에 페니스가 삼켜질 때마다 음란한 소리가 났다.
“더 해봐, 네가 내 아래에서 신음할 때마다 진짜 좆이 터질 거 같아.”
“윽, 그마…… 아, 아으흑.”
“하…… 네가 이렇게 예쁘게 우는데, 어떻게 그만둬.”
설의 발목을 잡아 더 무릎을 세운 도혁이 적나라하게 벌어진 음부에 퍽퍽, 페니스를 박아댔다. 젖은 점막끼리 부딪칠 때마다 음란한 소리가 울렸다. 변화는 아래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눈처럼 뽀얗고 하얀 설의 뺨과 가슴 군데군데가 이미 붉게 물들었다.
“아으으, 아흑…!”
야하게 벌어진 설의 입에서 색스러운 소리가 끊이지 않고 흘러나왔다.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도현의 목덜미에 손톱까지 박아 넣은 채로 매달려 할딱거리는 설이 도혁의 본능을 자극했다. 아릿한 목덜미의 통증마저 쾌락처럼 느껴지는 상태였다. 무엇보다 설의 입술이 색스럽게 벌어져 그 사이로 타액이 흐르고 애원하듯 울어대는 게 예뻐서 참을 수가 없었다.
“으응, 읏.”
투명한 눈물이 설의 눈에서 떨어졌다. 도혁은 그 순간을 참지 못하고 설의 뽀얀 가슴을 틀어쥐었다.
“으흑!”
설이 신음을 지르자 도혁이 성급하게 제 페니스를 설의 안에서 꺼냈다. 도혁의 숨결도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다. 두어 번, 도혁이 제 손으로 페니스를 흔들었다. 설의 애액으로 흠뻑 젖어 번들거리는 페니스였다. 그러더니 그 끝에서 꿀렁이며 뿌연 액체가 떨어졌다. 후두둑, 설의 아랫배에 쏟아진 액체는 뜨뜻미지근하고 끈적한 점성이 있었다.
“하아, 하아.”
도혁이 숨을 몰아쉬었다. 태어나서 이런 쾌감은 처음이었다. 마치 이 순간을 위해서 모든 나날을 참아왔던 것 같았다. 설은 거의 넋이 빠진 채로 누워서 툭, 무릎을 떨궜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도혁은 그제야 설의 가랑이 사이로 흐르는 액체를 발견했다. 그건 질척이는 애액이 아닌 붉은 피였다.
“너…….”
설의 허벅지에 혈흔이 선명했다. 도혁이 손을 뻗어 그 부분을 만지려고 하자 설이 꾹 다리를 모았다.
“처음이면, 처음이라고 말을 하지…….”
도혁의 목소리에 아주 미량의 죄책감이 묻어났다. 그렇게 사정없이 박아대고서 말해 봐야 이미 늦었지만.
“계약이랑… 상관없잖아.”
간신히 내뱉은 설의 목소리가 죄 갈라지고 쉬었다. 아까 도혁의 아래에서 한참 울어댄 탓이었다. 도혁은 쓰러지듯 설의 옆에 누웠다. 어차피 설은 이대로 한참 동안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하긴, 말했어도 내가 못 참았겠지.”
도혁이 담담하게 말했다. 설과는 달리 호흡이 안정되고 있었다.
“나도 처음이라, 좀 서툴러서.”
멀어져가는 의식 속으로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설은 그런 도혁을 돌아봤다. 거짓말을 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내가 옛날부터 말했지.”
도혁의 새카만 눈동자가 직선으로 설을 응시했다.
“무슨 수를 써도 널 가지는 건 나라고.”
솔직히 설이 처녀든 처녀가 아니든 도혁에겐 상관없었다. 다만 그 상대를 찢어 죽이고 싶겠지만, 이미 일어난 일이라면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한 부분이었다. 설은 매우 아름다웠고 그걸 가만히 내버려 두고 싶은 사내는 없을 테니.
“하지만, 동시에 날 주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야.”
도혁에게 있어서 진정한 소유라는 것은 무거운 의미가 있었다. 단지 굴복시키고 처음을 쟁취하는 것으로 상대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진즉 알았다. 타인을 완전히 소유하려면 가장 소중한 것을 나눠 가져야 한다.
“……옛날이야기야.”
설이 간신히 답했다. 아직도 목소리에 떨림이 묻어나고 있었다. 도혁은 손을 뻗어 설의 눈가에 번진 눈물 자국을 닦아냈다. 울음이 나서 운 게 아니라 단순히 물리적으로 도혁의 페니스가 밀고 들어오자 몸이 흔들리고 눈에서는 눈물이 아래에선 애액이 흘렀다.
“이건 비즈니스야.”
그 말에 도혁이 낮게 웃었다.
“그래, 하지만 계약이 끝나기 전엔 내게도 기회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아직 남은 시간은 있었다. 설은 혼수상태에 빠진 도혁을 두고 차갑게 떠났지만, 그 후로 다른 남자의 품에 안기지도 않았다. 가늠할 수 없는 속내를 두고 도혁이 깊은 눈동자로 설을 주시했다. 아마 지금 묻는다 해도 대답은 들을 수 없으리라. 설은 극심한 피로에 깜박 정신을 잃은 듯이 얕은 잠이 들어버렸다.
“백설.”
도혁이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가만히 이마를 쓸어보아도 설은 움직이지 않았다. 극도의 긴장과 피로가 설에게서 모든 기운을 일시적으로 앗아간 것 같았다.
“드디어 잡았다.”
사냥감을 손에 쥔 맹수의 눈이 번뜩였다.
***
잠시 후, 설이 눈을 떴을 땐 도혁이 옆에서 잠들어 있었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그때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는데, 도혁은 설이 최악의 순간에 처했을 때 거짓말처럼 나타났다. 그토록 끊어내려고 애를 썼던 과거를 떠올리자 너무 허탈해서 실소가 나왔다.
설은 그대로 조심스럽게 옷가지를 챙겨서 침실을 빠져나왔다. 아직도 전신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그런 상황에서 깜박 잠이 들 정도라니, 스스로 놀랐다. 이 낯선 상황 때문이 아니었다. 제 몸은 아직도 도혁의 곁을 기억하고 있었다. 다른 남자였다면 쉽게 긴장이 풀리지 않았을 거다. 그 사실이 쓰디썼다.
“아…….”
욕실에 들어가서 물을 끼얹자 가장 먼저 도혁이 물어뜯었던 목덜미가 따가웠다. 허벅지 사이를 씻을 때면 살갗이 찢어진 것처럼 쓰라렸다. 설은 그제야 조금씩 제 몸에 일어난 일을 실감했다. 도혁과의 섹스 자체는 기억이 드문드문했다. 그저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자극과 쾌락, 그리고 고통이 떠올랐다. 몸이 부서지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두 발로 서 있는 게 신기했다.
“결국, 이렇게 됐구나.”
쏟아지는 물줄기 사이로 설의 혼잣말이 울렸다. 둘이 처음 만났던 19세의 봄, 도혁은 보란 듯이 설이 제 것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설의 처음도 마지막도 자신이 될 것이라는 말을 달고 다녔던 도혁이다. 본격적인 관계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실제로 설의 첫 키스를 가져간 것도 도혁이였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되는데?’
‘어른이 될 때까지.’
소년과 남자의 경계에 있던 도혁은 욕망에 허덕였지만, 설은 단호했다.
‘그래도 키스는 할 수 있지?’
도혁은 시도 때도 없이 설에게 입을 맞췄다. 그러다 열기가 지나치게 오르면 제 욕정을 다스리느라 애를 써야 했다. 그러면서도 설의 결정에 토를 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겉으로 보기엔 강압적이고 저돌적으로 보이는 첫사랑이었지만, 둘의 이야기는 둘만 알 수 있는 거였다. 설은 그런 면까지 모두 포함해서 도혁을 좋아했다.
‘백설, 넌 내 거야.’
도혁은 유난히 소유욕이 강했다.
‘……나도 네 거고.’
그 누구보다 사나운 맹수는 오직 하나의 반려를 원했다. 집착과 소유욕, 그리고 욕망 그 자체가 깃들어 있던 검은 눈동자엔 애정이 있어서 두렵지 않았다. 그때부터 설은 도혁에게 제 마음을 내어주기 시작했다.
‘다른 데 쳐다볼 생각도 하지 마, 넌 내 거니까.’
도혁은 항상 그 말을 빼놓지 않았다. 반복되는 말은 주문처럼 설에게 새겨졌다. 마치 열아홉에 모든 운명이 결정된 것 같았다. 설이 도혁의 것이듯, 도혁도 설의 것이라고 했다. 그건 도혁의 사랑 고백이나 마찬가지였다. 사랑한다는 낯간지러운 말 대신에 무수히 설에게 제 마음을 쏟아부었다.
그래서 설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서로의 첫사랑이었다. 둘이 맺어지는 미래는 너무 자연스러웠다. 평생을 그렇게 보낼 거라고 여겼다. 당연하게도 설이 안길 남자는 도혁이어야 했다.
“그땐 그랬지.”
뚝, 샤워기의 물이 멎었다. 첫날 밤은 설이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달랐다. 시기도 방식도 그 후에 홀로 남은 허무함도. 설은 제 왼손을 들어서 가만히 응시했다. 도혁과 함께일 땐, 약지에 반지 자국이 항상 있었다. 어쩌다 반지를 뺄 일이 생기면 그곳에만 티가 날 정도였다. 그러나 이제 설의 왼손에 그런 자국은 없었다. 설은 도혁을 떠나야 했던 날 반지를 빼고 두 번 다시 끼지 않았다. 그 후 도혁이 줬던 모든 것은 당장 위기를 넘기기 위해서 팔아넘겨야 했다. 그렇게 과거도 사라지는 것 같았다. 두 번 다시 설의 손에 들어오지 않을 물건들처럼.
“…지난 일이야.”
설이 자신을 타이르듯 혼잣말을 했다. 여전히 씁쓸한 목소리였다. 텅 빈 마음에 도혁을 떠날 때 남았던 미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비틀린 재회였음에도 그의 눈빛과 손짓 어느 하나 변한 게 없었다. 다시는 도혁의 흔적을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운명은 뜻하지 않은 곳에서 둘을 다시 만나게 했다. 설은 그제야 제 마음 깊은 곳에 남은 과거의 조각을 느낄 수 있었다. 설이 간직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