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 Y의 경우
나는 눈을 감은 채 똑바로 앉아 있다. 감은 눈으로 주황색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주위는 적막하지만 인기척이 느껴진다. 내가 왜 이러고 있지.... 이런 의문을 느끼고 나는 천천히 눈을 뜬다. 오랜 기간 눈을 감고 있었던 탓인지 눈에 들이닥친 빛에 잠시 적응하지 못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밝은 전등이 눈부셨다.
천천히 적응하여 시야를 확보했다.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는 낯선 방이었다. 그러나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을씨년스럽게 하얀 방. 막 페인트칠을 하기라도 한 듯 티끌 하나 묻어있지 않은 새하얀 방이었다.
넓지도 좁지도 않은 방은 채워진 가구들마저 하얀 색이었다. 방에는 창문이 없는 대신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종이가 들어있는 액자가 걸려 있었다. 그 액자 옆으로, 침대에서 가장 먼 구석에 하얀 문이 있다. 굳게 잠긴 손잡이마저 하얀 페인트칠이 된 상태로, 소름끼칠 만큼 모든 것이 하얗게 물든 방이었다.
...뭐야 여기, 정신병원이라도 돼? 이곳을 언제 봤지? 멍한 머리를 하고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이런 곳에는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는데.
내 앞에 앉아 흰 가운을 입고 있는 남자는 의사인 듯, 무뚝뚝한 얼굴로 차트를 뒤적이고 있다. 그의 옆에 반듯하게 서 있는 간호사는 키도 크고 늘씬하다. 성형을 좀 했지만 미인이야, 내 타입인데? 꼬셔볼까? 내 여친이 더 미인이지만... 걘 자연이고. 에라, 아서라. 저번처럼 바람피운 걸 걸렸다가는 혼쭐이 나게? 걔가 요즘 안 그래도 까칠한데... 쇼핑이라도 데려가야지. 명품백을 들이밀면 기분이 좀 나아지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한참을 차트만 뒤적이던 의사가 불쑥 입을 열었다.
“이재윤 환자. 제 목소리가 들립니까?”
...멀쩡한 사람 데려다 놓고 뭔 개소리야. 근데 환자? 누가? 좀 황당했지만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아씨 근데... 오늘이... 어라? 며칠이지? 지금 몇 시? 어제 교수님을 뵙고... 그래, 나 과제를 해야 하는데.. A+을 사수하려면....
의사가 무감각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나는 어이가 없어 그를 멍청하게 쳐다보았다. 명백히 ‘이재윤 환자’하고 불러재낀 주제에 웬 놈의 누구입니까?
그러나 나는 싸울 기력이 없어 짧게 ‘이재윤인데요.’하고 대답한다. 의사는 계속 노려보던 차트에서 시선을 돌려 잠시 나를 바라보고는 다시 차트로 시선을 돌린다. 그 차트에 검은 몽블랑 펜슬로 무언가 체크하더니 간호사와 말없이 눈짓을 나눈다.
그들이 하는 꼴을 잠시 지켜보던 나는 뻐근하게 결리는 어깨를 안마했다. 목을 이쪽저쪽으로 돌리며 나는 신경질을 냈다.
“그보다 전 좀 쉬고 싶은데요.”
“...흠.”
“이봐요, 쉬고 싶다고요. 내가 여기서 뭐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집에 돌아가겠어요.”
의사가 다시 나에게 시선을 돌려왔다. 나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보았다. 잠시 입을 다문 채 서로를 노려보다가, 의사가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이재윤 환자는 지금 귀가하실 수 없습니다. 아직 검사가 진행 중이니 앞으로 얼마간은 입원해 계셔야 합니다.”
‘앞으로 얼마간’이라. 미적지근한 대답이었지만 상관없었다. 병원비야 아버지가 알아서 하실 테고... 아, 두통이 심해지고 있다. 얼른 저 침대에 드러누워 잠을 자고 싶다. 의사는 계속 들고 있던 차트를 챙겨들고 밖으로 나가고, 간호사는 계속 그 자리에 서 있다. 나는 그녀의 육감적인 몸매를 살짝 훔쳐보다가 침대에 올라가 드러누웠다.
마치 계속 사용해왔던 침대인 양, 익숙한 감촉이다. 아무리 특실이라지만 너무 편안해서 깜짝 놀랐다. 나는 똑바로 앉아 베개에 기대었다.
“이재윤 환자님, 뭐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
간호사의 질문에 나는 눈을 비볐다. 눈이 부시다. 형광등 좀 낮춰달라고 하면 웃겠지. 아, 머리 아파. 자야해. 잠을 자야겠다. 온 몸이 나른하고 무거웠다. 제대로 눕기 위해 몸을 뒤척이는데, 주륵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
“환자님?”
왜 이러지? 왜 난데없이 눈물이.... 뭔가 중요한 걸 잊은 듯 한 기분이 든다. 평소의 버릇이 나온 걸까? 난 또 뭔가를 잊어버린 걸까? 눈물이 멈추질 않는다. 간호사가 깜짝 놀란 듯 다가오려는 걸 손을 휘저어 막았다.
“푸딩... 푸딩이 먹고 싶어요.”
‘알겠습니다.’하고 예쁘게 대답한 간호사가 엉덩이를 흔들며 나가는 꼴을 지켜봤다. ...뭐, 알 게 뭐야. 그딴 기억 따위. 새로운 기억이 덮어씌우고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가며 살아야지. 나는 병원 특실의 푹신하고 널찍한 침대에 몸을 편안히 누인다.
새록새록 수마가 밀려왔다. 나는 잠에 빠져든다.
두루뭉술하고 찝찝한 악몽을 꾸기 위하여.
#. N의 경우
내 헐떡임이 자신의 귀를 따갑게 때린다. 나는 달려들고 있다. 속도를 제어하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푸욱!!
"헉, 허억, 헉. 헉.."
나는 숨을 고르고, 놈의 눈동자가 한계까지 크게 뜨여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본다. 이 녀석과 만난 후 이렇게까지 놀라는 걸 본적이 있던가. 어쩐지 웃음과 울음이 동시에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놈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흔들렸다.
“왜... 찌르지 않은 거지?”
“찔렀어.”
“그건ㅡ”
침대를 찔렀잖아. 놈이 그렇게 말하고 싶은 듯 한 시선으로 자신의 목이 아닌 그 옆에 있는 침대에 깊숙이 박힌 칼을 쳐다본다. 황망한 얼굴을 하는 짐승새끼라니, 하나도 안 어울리는데 귀엽다. 하얀 침대 커버를 뚫고 손잡이만 덩그러니 보인다.
나는 태연히 그 손잡이를 놓았다.
“오해하지 마. 손이 빗나간 거야.”
“ㅡ다, 다시 찔러-”
“미쳤냐!!!”
푸하하핫, 하고 결국에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 안 울어서 다행이다. 남자는 평생 세번 우는 거라는 데, 난 너무 울어서 탈이야. 놈이 당황한 듯 잘생긴 얼굴 위로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한 채 나를 돌아본다. 나는 배를 끌어안고 웃고 있다.
“이... 이 재윤...?”
“미친놈아, 안찌를 거야. 한번 실패한 마법 같은 거, 다시 한다고 성공하진 않아.”
놈의 눈꼬리가 일그러졌다. 눈물이라도 참는 듯, 놈의 손이 황급히 자신의 눈을 가린다.
“왜?”
이 질문에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나 역시 정답을 알 수 없는데.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나는 대신 놈의 눈을 가린 손을 붙잡아 내렸다. 놈과 눈이 마주쳤다. 덩치 큰 맹수가 어린아이 같은 눈을 하고 있다. 그래, 이 녀석은 처음부터 어린아이 같은 눈을 하고 있었어. 모른 건 나뿐이야.
젠장, 이렇게 귀여운 얼굴을 하는 건 반칙이잖아!
역시 나는 마음이 약해도 너무 약했다. 나는 손을 뻗어 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 손이 왁스를 바른 빳빳한 검은 머리칼에 닿은 순간, 놈이 흠칫- 몸을 떨었다.
녀석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린다.
“까짓것, 용서해 줄게.”
“....왜?”
이 자식은 두 번이나 멍청한 질문을! 나는 대답하지 않고 놈의 얼굴을 내 가슴에 묻는다.
“이대로도 괜찮을 것 같아서.”
"......감금당한 채야."
놈의 머리를 껴안고 있자니, 어린아이를 품에 안은 듯한 착각이 들었다. 놈이 내 가슴에 고개를 묻은 채 속삭인다.
“난 소유욕도 독점욕도 강해. 내가 널 놓아주려 하는 일은 두번 다시 없을 거야. 넌, 죽어도 이 방을 못 벗어나.”
“......”
“그래도... 괜찮나.....?”
안 괜찮다고 하면 아예 펑펑 울어버릴 얼굴이구만.
목소리만 태연한 척, 코끝이 벌게진 주제에. 덩치 큰 맹수가 울어재끼는 꼴을 보면 나도 비위가 상할 테니까, 나는 쓴 웃음을 지으며 놈의 머리를 더욱 더 껴안았다.
“아아, 뭐. 까짓것.”
“..........”
“....뭐야, 너 우냐?”
“..........”
“푸, 푸핫, 푸하하하하하핫!!!”
울지 말라고 원하는 대답을 해줬더니 사내자식이 질질 눈물을 짜고 있다. 만날 울어재끼던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가슴팍이 축축해져와 나는 성대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놀려 줄 생각이었는데, 놈의 팔이 내 허리에 감긴다. 죽어도 놓지 않겠다는 듯, 어미의 품에 매달린 새끼마냥 절박하게. 내 허리를 감싸안은 놈의 손이 깍지까지 끼는 꼴을 보자, 나는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놈은 나와 어린 시절을 공유했다고 말했다. 놈은 마치 녀석이 그저 한 명의 방관자인 양, 내 어린 시절을 냉정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던 거다. 애정결핍을 앓는 건 나 혼자가 아니다. 엄마를 그리워하고 따뜻한 손길에 목말라 하는 건 나 혼자가 아니다.
이 녀석 역시, 나도 똑같이. 아니, 나보다도 더.
그런데 이런 멍청하고 불쌍한 새끼를 혼자 두고 돌아가 버릴 순 없잖아.
그것이 영원한 감옥이라고 해도. 다시는 푸른 하늘도, 내가 소중히 여겼던 사람들을 만날 수 없다고 해도, 나는 이 불쌍한 새끼의 품 속을 떠 나갈 수 없다.
놈이 내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고 애원해왔다.
“...사랑, 한다고 말해줘.”
나는 조금 심술이 났다.
“거짓말이라도 괜찮아?”
놈이 대답하지 않고 내 품에 얼굴을 부빈다. 웃음이 터질 것 같다! 아아, 아아, 이재윤 병신 인증이구나! 자신을 납치 감금한 사이코에게 사랑 고백이라니! 나는 놈의 부드러운 머리칼에 손을 집어넣고 쓸어내린다.
“ㅡ사랑해.”
“......내가 훨씬 더, 너를 사랑해.”
“아하하, 병신!”
이런 희극 같은 대화를 나눈 주제에, 내 정신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심장을 칼로 난도질 한 주제에, 놈이 입술을 겹쳐왔다.
반항 할 수 없다. 몇 번이고 반항해도 몇 번이고 다시 덮쳐온다. 그것은 끈질기고, 또, 애처로울 만큼 헌신적이다. 나 역시 따라 돌아버리고 싶을 만큼 에로틱 하다.
아아, 제기랄! 미친놈의 새끼. 개새끼! 씨발, 이젠 나도 모르겠다. 나도 돌아버린 거다. 미친 거다. 그래, 미쳤다고 인정하면 모든 게 편한 거지.
이 빌어먹을 스토커 새끼를 위하여 나는 신에게 어떤 용서를 빌어야 할까.
나는 그저 놈의 어깨에 팔을 두른다.
같이 돌아버리자.
“...당신에게 이름을 지어줄게. 새로운 이름을.”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