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쾅! 거세게 닫힌 하얀 문을 멍청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이른 아침잠이 덜 깬 상태에서 찬 물을 뒤집어 쓴 듯 얼떨떨했다.
언뜻 보인 건, 보기 좋게 그을린 놈의 건장한 팔위의 그건ㅡ 흉터...였지?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에 확실하지는 않았다. 단지 확실해진 것은 놈이 내게 자신의 오른팔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 한 여름인데도, 오렌지 주스를 뒤집어썼는데도, 나를 안을 때도 절대 옷을 벗지 않을 만큼. 어제(인지 그제인지, 과연 밤인지 아침인지), 그렇게 격렬하게 서로의 확인한 다음날 아침에도 쌀쌀맞은 얼굴로 날 버려두고 방을 나갈 만큼.
아니, 놈은 상처 받은 짐승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쌀쌀 맞고 냉정한 눈이 아니라 무너지고 깨어진 나약한 눈.
도대체 그 오른팔에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기에? 자살기도 후 흉터라도 있어?
놈은 한 참 후에야 돌아왔다. 약속한 대로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음식과 함께였다. 나를 너무 오래 혼자 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것 같다. 자신의 감정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한 주제에 놈이 내 침대 앞으로 의자를 끌어와 몸을 뉘였다. 평소처럼 침대 위로 올라와 앉지 않는다. 놈은 침대 옆 탁자에 음식을 내려놓은 후 자신의 눈을 양 손으로 감쌌다.
푹 고개를 수그린 놈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아까는 화내서 미안.”
주인에게 혼쭐이 난 새끼 강아지처럼 놈의 빳빳이 세운 스포츠머리마저 풀이 죽은 듯 보였다. 정말 반성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건지 놈이 더욱 고개를 숙였다. 놈의 반질반질 잘 생긴 뒤통수에서 시선을 뗄 수 없어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웃기지도 않아, 씨발. 나 방금 저 새끼를 불쌍하다, 귀엽다, 이런 생각할 뻔 했어. 살려주세요, 내가 진짜 미쳤나봐요!
괜한 심술이 치밀어 있는 힘껏 그 잘생긴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윽!”
난 데 없이 얻어맞은 놈이 영문을 모르겠는 듯,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나를 쳐다본다.
ㅡ복수다 이 자식아! 감히 나한테 쌀쌀 맞게 굴어?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그깟 옷 좀 걷어보려 했다는 이유로!?
나는 화가 가시지 않았다는 듯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이를 드러내, 내가 지을 수 있는 최대로 무서운 (못생긴) 표정을 지어 놈을 노려보았다. 그 얼굴을 본 놈이 움찔, 하고 편히 기대어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켜 정자세로 앉는다. 나는 그런 놈을 괘씸하다는 눈빛으로 노려보며 소리치듯 요구했다.
“먹여줘!”
“...뭐?”
“이 음식 다! 한 숟갈 한 숟갈 먹여 달라고!”
“.....”
저만큼 잘생기면 아무리 멍청한 표정도 잘생겨 보이는 법인가 보다. 하늘은 불공평하지.
“미안하다며! 먹여줘!”
내가 막무가내로 떼를 쓰자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쉰 놈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돌아왔다. 심장을 저릿하게 만드는 위험한 미소다.
놈은 참을성 있는 어머니 마냥 정말 여덟 살 꼬마처럼 구는 내 수발을 들었다. 놈이 들이민 수저에 올려 진 참치전을 얌전히 받아먹으며 나는 감금당한 첫날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의 나는 먹여달라는 말 대신 먹기 싫다고 화를 냈다. 그리고 놈은 내 뜻을 따르는 대신 나를 잡아먹을 듯 키스했지. 나는 순순히 음식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지금처럼 먹겠다고 조를 일도, 놈과 습관처럼 섹스를 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어. 그 때의 나는 어서 빨리 놈이 나를 풀어주지 않는다면 당장 죽어버리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 놈을 혐오했지.
하 씨발, 지금과는 정반대네.
하지만 난 놈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몰라. 근데 뭐가 바뀌었지? 그 때의 나와 지금의 나. 뭐가 달라진 걸가? 나는 여전히 놈의 이름조차 몰라.
놈의 오른팔의 비밀 같은 건 더더욱, 알 리가 없잖아.
그리고 그 날, 나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나는 놈을 보았다.
13.5
꿈속 그 날은 짙은 안개가 깔려 있었다.
으스스한 어둠이 깔린 골목길에 여자가 비틀대며 걷고 있다. 긴 생머리. 가녀린 뒷모습을 감싼 연분홍색 원피스. 또각또각, 공허하게 울리는 하이힐 소리. 한 손에는 붉은 파우치가, 다른 손에는 휴대전화기가 들려 있다. 여자는 휴대전화기를 들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떠들고 상대의 말을 듣고 지저귀듯 웃는다.
여자를 알고 있다. 그녀는 내 여자 친구다.
그녀가 잠시 멈춰 선다. 과음을 한 듯, 평소에는 진저리를 쳤을 더러운 벽에 기대어 선다. 휴대전화기를 어깨와 머리 사이에 끼우고 그녀가 힘겹게 파우치를 열어 담배를 꺼내 문다. 탁. 라이터 위로 작은 불꽃이 아롱졌다. 그 불꽃이 스산한 골목길을 잠시 비추다가 사그라 들었다.
작고 연약한 입술은 익숙한 듯 담배를 오물거린다. 후, 희뿌연 연기가 핑크빛 립 사이로 뿜어져 나왔다. 그 작은 입술이 방긋, 미소를 지었다.
“이재윤, 그 자식 아주 호구야. 미친 새끼가 사달라는 건 아주 다 사줘! 루이비통? 샤넬? 지랄하지 마. 그 새끼한테 샤넬은 아주 껌이야 껌! 아하하! 내가 좀 토라지면 금방 샤넬 구두니 백 같은 걸 사다 나른다니까?”
상대의 말을 듣고 그녀가 더욱 자지라졌다. 여자가 앞에 있지도 않은 상대를 향해 교태를 부린다.
“아잉, 왜 그래! 난 오빠뿐이라구~! 그리고 오빠, 그 새끼 정신병자야! 얼굴도 잘생기고 명문대생에 재벌 2세래서 완벽한 줄 알았는데... 듣자하니 그 자식 어렸을 때 큰 일 한 번 치룬 후로는 정신이 좀 맛이 갔다던데? 어? 학교야 계속 다니지. 빽? 아 빽도 있는데, 그 자식 공부는 잘해 오빠. 평상시에는 멀쩡해, 멀쩡한데!”
여자의 입술이 살짝 비틀렸다. 예쁘장한 코에 주름을 잡으며 여자가 목소리를 낮추어 긴장감을 조성한다.
“가끔 기억을 잃더라구. 어렸을 때 기억도 싹 잊어먹었대. ...아 근데 오빠, 이 얘기 그만하자. 나 데리러 안 와? 응? 왜에~ 나 오늘 예쁜 속옷 입었어. 명품이야! 존나 속옷 한 벌에 몇 십을 쓴 거야? 아하하!”
여자의 웃음소리가 높아졌다.
“이 속옷 이재윤이 사준 건데... 브라끈은 오빠가 제일 먼저 풀어야지. 그 새끼한테 선수 뺏겨도 후회 안 할 거-”
야? 하고 그녀가 애교어린 목소리로 찡긋, 그 오빠란 자식이 보지도 못할 윙크를 날리려는 순간, 퍼억! 여자의 뒤통수를 갈긴 건 어디서 났는지 알 수 없는 몽둥이였다. 그 몽둥이를 든 것은 덩치 큰 남자다. 어두운 색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다. 살짝 보이는 남자의 얼굴은 그리스의 조각상처럼 아름다워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남자는 숨조차 흐트러지지 않은 상태다. 남자의 눈은 얼음처럼 차갑게 쓰러진 여자를 내려다본다.
여자는 죽지 않았다. 아직 정신도 멀쩡한 듯, 바닥으로 쓰러졌던 그녀는 피를 흘리며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코에서 코피가 주륵, 흘러내리고 여자가 욕설을 뱉어냈다.
“미... 미친 새끼... 다, 당신 누구야.”
“..........”
남자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남자를 알고 있다. 나는 저 등을 알고 있다. 머리에서 흐른 피가 눈을 가린 듯, 여자가 작고 가녀린 손을 들어 피를 훔쳐냈다. 그녀는 휘청거리며 눈 앞의 상대를 확인한다. 그녀의 눈이 크게 확장됐다.
“다... 당신..!”
그녀가 외마디 비명을 지를 틈조차 주지 않고 '놈'이 여자에게 달려들었다. 여자의 날씬한 목을 두 손으로 비튼다. 여자가 남자의 팔에 손톱을 박는다. 꽃 장식과 큐빅이 붙이고 반질반질하게 손질한 손톱이 그 건장한 오른팔을 휘어 감고 할퀸다. 그 손톱자국을 타고 선연한 핏방울이 흘렀다.
여자의 마지막 반항이었다.
남자가 힐끗, 뒤를 돌아본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ㅡ꿈인데?
남자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그는 울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남자의 눈에서 절망을 읽는다. 남자는 절망하고 있다.
나는 뒷걸음질 치며 잠에서 깨어난다. 뒤에는 어째선지 천 길 낭떠러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걸 미처 발견하지 못한 나는 그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진다. 내 비명만 아스라이 골목을 메운다.
“아아아아아아악!!!!! 아악!!!!! 으윽!! 악!! 으.. 흐..... 흐읏! 윽!!”
“이재윤!!! 괜찮나?!!?!”
꿈?
베개뿐만이 아니라 이불마저 눈물에 젖어 축축했다. 얼굴은 더욱 꼴이 말이 아닐 것이다. 나는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려 했으나 찰캉찰캉! 하는 소리만 귓전을 때릴 뿐이었다. 어느새 짧게 줄여놨는지 족쇄에 묵힌 팔을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그래도 미친 듯이 버둥거리는 내 팔을 힘으로 누르며 놈이 설명했다.
“네가 꿈을 꾸며 자해를 했어. 할 수 없이 네 손이 닿지 않게 줄여둔 거야. 진정해, 이재윤!”
“아아아악!!! 아악!!!!!! 아악!!!!”
‘진정해, 진정해라!’를 주문처럼 되뇌던 놈의 입술이 다급하게 내 입술을 덮쳐왔다. 비명을 막으려는 듯 목울대까지 깊숙이 파고들었다.
“읍, 으읏! 읍..!”
내가 팔을 미친 듯이 내젓던 것을 멈춘 것은 조금 시간이 흐른 후였다. 놈은 내가 잠잠해진 후에야 키스를 멈추었다. 그에게 깔린 채로 숨을 고르는 나를 내려다보며 짐승이 물어왔다.
“...무슨 일이야? 또 악몽을 꿨나?”
“.........”
나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놈은 애초에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 손을 뻗어 내 눈가를 훔친다.
“얼굴이 엉망이군.”
“..........”
“어차피 금방 깨울 생각이었어.”
놈은 나와 몸싸움을 한 탓에 조금 헐떡이고 있다. 꿈속에서 숨조차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과는 다르다. 놈은 다정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꿈속에서 내 여자 친구를 바라보던 냉정한 눈빛과는 다르다.
꿈이다. 꿈에서 놈이 사람을 죽였어. 내 여자 친구를 죽였어.
좆같은 꿈이었어. 그 좆같은 꿈속에서 내 여자 친구는 날 배신하고, 저 자식은....... 내 여자 친구를 죽였어.
놈이 내가 먹을 음식을 가지러 나가겠다며 몸을 일으킨다. 나도 모르게 놈의 옷자락을 생명줄 마냥 다급하게 부여잡았다.
“가, 가지마!”
“...뭐?”
아, 미치겠네. 내가 또 무슨 짓이야. 쪽팔리게 나는 놈의 티셔츠 자락을 꽉 잡고서 놈을 올려다본다. 놈은 조금 놀란 듯, 나를 내려다본다.
“.....가지마.”
개미 기어가듯 작아진 내 목소리에 놈이 어쩔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살짝 웃는다.
놈은 나가려던 걸 관두고 내 침대 위로 올라와 앉았다. 나는 놈의 셔츠 자락을 여전히 놓지 않고 내 옆에 붙어 은 놈의 어깨에 기대었다. 평소답지 않은 나 때문에 놀란 듯, 놈의 목덜미가 슬쩍 움칠거린다. 나는 놈이 더욱 긴장하라고 놈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놈의 배 부근에 얼굴을 묻었다. 매일 핼스장에서 여섯 시간은 꼬박꼬박 운동이라도 할 것처럼 단단하게 단련된 배가 내 얼굴이 닿자 긴장한다. 놈의 손이 내 머리칼을 쓰다듬는다.
놈이 중얼거리듯 다정하게 속삭였다.
“어리광쟁이군.”
나는 그 손길을 뿌리치지 않았다. 그렇게 말한 주제에 놈은 내 행동이 썩 마음에 드는 듯, 기분 좋게 콧노래를 부른다. 웃기고 있어.
꿈에서 놈이 내 여자 친구를 죽였다.
그건 꿈이었어! 좆같이 더러운 꿈이었어. 저 녀석이 내가 꾼 꿈까지 책임져야 하나? 진짜 살인을 한 것도 아니야. 그저 개 같은 꿈이야. 내 여자 친구의 그런 모습을 봤다면 내가 훨씬 분노했을 거다. 꿈속에서 내 여자 친구의 외도를 봤잖아. 겨우 꿈인데!!!
머리속에 내 목소리지만 나의 것이 아닌 듯 서늘한 음성이 질문해왔다.
........정말 꿈이야? 꿈인 걸 어떻게 확신하지?
확신할 수 있는 방법?
오른팔. 상처. 나는 순간 번개에 맞아 감전이라도 된 듯 몸을 떨었다. 놈의 손이 안심하라는 듯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하, 병신 같아. 이게 무슨 헛소리야. 오른팔 상처라니.... 꿈속에서 내 여자 친구는 남자의 오른 팔에 손톱으로 상처를 남겼어.
놈은.... 내게 자신의 오른팔을 단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어.
생각이 비약적으로 뛴다.
나는 놈이 입고 있는 긴소매를 뇌리에서 지울 수 없다.
굳이 두껍고 어두운 빛깔의 옷을 고집하는 이유가 뭐지?
에어컨을 틀어뒀지만 여름인데 어째서 놈은 긴소매를 입고 있을까?
꿈과의 상관관계? 지랄!!!! 꿈 따위에!!!!!!!
놈이 범인이라면 날 가둬두고 자기도 잠적하고 있는 상황일까? 그래서 거의 한 달간 나만 붙들어 두고 다른 일은 아무것도 안하고 있는 걸까?
지금 도망치고 있는 거야?
빌어먹을!!!!!!!
확인해야 해, 하고 생각한 순간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무엇을? 그러니까 씨발, 이재윤. 솔직해져봐. 뭘 확인하고 싶은 거야?
저 새끼가 살인범이라는 걸? 아니면.... 저 새끼가 살인범이 아니라는 걸?
나는 와락 놈의 옷자락을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놈의 배에 얼굴을 부볐다. 놈이 바싹 긴장하는 걸 느낀다. 나는 웅얼거렸다.
“배고파..”
“간지러워. 말하지 마.”
내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듯 놈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실렸다. 나는 놈의 품에서 고개를 들었다. 눈물범벅이 된 내 얼굴을 본 놈이 놀란 듯, 조급하게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낸다.
“어이, 괜찮아? 아까부터 줄곧 운건가?”
“배고파!!! 김치찌개 끓여와!!!”
아까는 그렇게 안기다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 빽 소리를 지르자 놈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내 머리칼을 정리해준다. 나는 그 손을 팍! 뿌리치고 또 꽥! 소리를 내질렀다.
“안 들려!?! 김치찌개 끓여와!”
귀가 민감한 맹수는 손가락으로 귀를 틀어막고 도망치듯 방을 나선다.
달칵.
성격에 맞지 않게 조심스럽게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손을 내리고 고개를 들었다. 김치찌개와 밑반찬,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슬고슬한 쌀밥을 쟁반에 받쳐들고 온 놈이 날 향해 싱긋 웃어 보인다. 순간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 급히 눈을 피했다.
내가 김치찌개를 먹고 싶다고 할 걸 미리 예상이라도 했던 양, 놈은 금방 재등장했다. 생각해보니 찌개류는 방에 냄새가 배일 텐데... 이 방은 창문도 없어 환기도 못 시키는데 어쩌지. 그런 걱정이 잠시 머리를 스쳤지만 이내 떨쳐냈다.
상관없어. 먹고 싶어서 달라고 한 게 아니니까.
“네가 너무 어린애 입맛이라서 소고기를 잔뜩 넣어왔는데... 여기 장조림도 있고, 햄도 있고.”
저 자식이, 누가 애 입맛이라는 거야!!
도끼눈을 뜬 나를 본 놈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한번 으쓱이더니 성큼성큼 침대 쪽으로 다가왔다. ‘뜨거우니까 호호 불어가면서 먹어야 해’하고 말하며 놈은 초등학생 아들을 돌보는 어머니 같은 손길로 내게 수저를 쥐어준다. 그리고 내 무릎 위에 쟁반을 올려주며 놈이 반찬을 뒤적거린다.
코끝에 고소한 김치찌개 냄새가 닿아왔다. 꼴깍, 침이 넘어 갔지만 나는 숟가락을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안 먹어.”
내 이런 행동은 미처 예상치 못한 듯 놈이 깜짝 놀란다. 요즘 놈은 내 행패에 해탈한 듯, 화도 나지 않는 것 같다. 언제부터 그렇게 착한 고양이 흉내를 내기 시작했을까. 놈이 바닥에 나뒹군 숟가락을 주워들며 어린아이를 대하듯 다정한 목소리로 일관한다.
“ㅡ이 재윤, 혼나기 전에 수저 쥐고 퍼먹어. 반찬투정 하는 거 아냐.”
반찬투정은 무슨! 이 녀석의 아이취급은 정도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머릿속은 온통 놈의 오른쪽 팔뿐이다. 어떻게 확인해야 하는 걸까? 나는 정말 확인하고 싶은 걸까? 만약 놈이 범인이라면? 아니 범인이 아닐 수도 있잖아. 납치범새끼가 꼭 살인범새끼라는 보장도 없고... 그리고 선량한 내 스토커님이 왜 살인을 하셨겠어?
이 씨팔 놈은 왜 여름에 긴팔만 입고 다니지? 이걸 어떻게 확인 하냐고!!!
왜 확인해야 하지?!!
놈이 범인이라는 걸 확인하기 위해? 아니면 놈이 범인이 아니란 걸 믿기 위해?!!?
“빨리 안 먹어? 이번에도 먹여줘야 하는 거야?”
놈을 원망스레 쳐다보았다.
나는 뭘 확인하고 싶은 거지?
“안 먹어.”
“이재윤ㅡ 떼쓰지 말라고 했지.”
“안 먹는다고!!!!”
나는 족쇄에 묶인 팔을 거칠게 휘둘렀다. 무릎 위의 쟁반을 발광하듯 내동댕이쳤다.
와장창창-!!
“윽!”
나는 처음부터 놈의 오른팔을 노리고 있었다. 팔팔 끓고 있던 김치찌개를 뒤집어 쓴 놈의 가여운 오른팔. 놈이 신음을 토해냈다. 아무리 짐승 같은 덩치의 놈이라도 아프지 않을리 없지. 하지만 놈은 화내지 않는다. 놈은 뜨겁지도 않은 지 잘난 미간 한번 구기지 않고 접시를 치우기 시작했다. 이런 면이 다정한 남자였다. 이런 일에는 결코 화를 내지 않았다.
내 눈은 필사적으로 놈의 행동을 쫓고 있다.
옷을 걷어. 뜨거운 찌개를 뒤집어 쓴 옷을 걷어..!
놈이 접시를 줍다 말고 내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왔다. 그 입가에 건 미소는 여느 때처럼 다정한 척 하고 있다.
“괜찮나? 다친 곳은 없겠지? 데인 곳은?”
데인 쪽은 당신이겠지. 오해하게 하지 말아 줘. 그건 다정한 게 아냐. 맹수가 고양이인 척 속이듯, 당신은 내게 다정한 척 하고 있어.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진정시키며 이불을 꾸욱 말아 쥐었다.
“이쪽으로 와.”
놈은 고분고분하게 명령을 듣는다. 정말 고양이 한 마리 키우는 기분이야. 놈은 바닥에 파편을 그대로 내버려두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놈의 오른팔을 붙잡았다. 움찔 놀란 놈이 도망치려는 걸 끝까지 붙들고 소리쳤다.
“걷어! 화상 남아!”
“됐어, 놔! 이재윤! 내가 알아서 하겠-”
“걷으라고!!!!”
나도 내 힘이 그렇게 센 줄은 태어나서 난생 처음 알았지. 나보다 1.5배 정도 덩치 큰 남자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놈도 내 상상치 못한 괴력에 놀란 듯 순간 휘청, 침대 위로 쓰러진다. 나는 그를 끌어당겨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놈의 옷자락을 걷어 올렸다.
그리고
검은 셔츠 아래 놈의 건장한 팔이 드러났다. 보기 좋게 갈색으로 그을린 놈의 팔에는 아주 선명한 붉은 손톱자국이 나 있었다.
여자의 마지막 반항이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