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17)

12.

놈과 몸을 겹쳤다.

“당신이랑 하다 지쳐서 잠들면 꿈도 안 꾸고 푹 잠든다니... 너무 무식한 방법이잖아.”

신음을 깨물며 이렇게 쏘아붙인 건, 상처 입은 남자의 자존심이었다. 자존심은 이미 아~까 전에, 눈물범벅된 얼굴을 놈의 가슴에 파묻은 순간 버린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자존심 세우는 내 꼴이 우습게 보였던 걸까? 꽃잎의 색을 본 딴 물감 한 방울이 물에 번지듯, 놈의 입가에 유혹적인 미소가 번졌다.

“특효약이야.”

놈은 나를 안는 와중에도 옷을 벗지 않았다. 물론 남자의 알몸을 보고 싶었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냥, 보통 이런 행위에서는 남녀 둘 다 옷을 벗는 게 일반이니까. 남남 사이라고 다를 것 없잖아? 놈이 내 티셔츠를 벗겨내는 대신 돌돌 말아 올렸을 때, 나는 오늘만 벌써 두번째. 우스꽝스러운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당신, 옷... 안 벗어?”

대답 대신 놈의 입술이 내 몸 곳곳에 닿아왔다. 꽃이 피어나듯, 그 입술 아래에서 내 하얀 피부에 붉은 키스마크가 남겨졌다. 나는 열에 들떠 있었다. 며칠 전 감기에 걸렸을 때만큼이나ㅡ 어쩌면 그보다도 더. 눈앞이 핑핑 돌고, 세상에 놈과 나만이 존재하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당신 진짜... 긴팔 마니아야?”

그 열기 속에서 겨우겨우 정신을 차려 억지로 툭 던진 빈정거림에 놈의 눈가가 미소를 짓 듯, 아니면 눈물을 참는 듯, 아리송한 느낌으로 일그러졌다.

“ㅡ아니, 이재윤 마니아.”

놈이 농담처럼 던진 한 마디에 ‘미친놈!’하고 화답해주려 했건만, 그 전에 놈이 신음을 삼키는 내 입술을 물어뜯듯 키스해왔다. ㅡ아아 끝장이다!! 놈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나는 타이트하게 옷이 당겨진 놈의 등에 손톱을 박는다. 나는 열에 들떠 실성한 양 놈에게 소리쳤다.

“나, 남자랑 처음이야.”

“알고 있어.”

“씨발, 처음이라고!!!”

“그래, 알고 있어.”

‘처음이 아니라면 큰 일 나지.’라는 말을 함축시킨 듯, 놈이 당연하다는 듯 응답해온다.

그러나 놈의 목소리는 다정하다. 이런 개그 소설에 나올 것 같은 대사에 대답하면서도 놈의 목소리는 나를 위해 목숨이라도 바칠 수 있다는 듯, 그렇게 다정한 빛을 띠고 있다. 열대지방 맹수 주제에... 나 같은 건 목덜미를 물어뜯고 아작아작 먹어버리고 싶은 주제에. 남들이 보면 사실상 커다란 맹수에게 목덜미를 물어뜯기는 장면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놈의 아래에 누워, 그 검은 눈을 올려다본다.

“....한 가지만 대답해 줘.”

놈 역시 움직임을 멈추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누워있던 탓에 흐른 눈물이 눈꼬리를 타고 귀를 적셨다. 귀가 젖다니, 축축한 게 이상하다. 그 감촉에 왠지 더 서러운 기분이 든다. 나는 목소리가 많이 잠겨 신음을 뱉듯 입을 열었다.

“날 사랑해?”

“ㅡ지금 당장..... 죽고 싶을 만큼.”

놈의 대답을 듣자 어쩐지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나는 바싹 마른 혀를 침으로 축인 후, 조용히 물었다.

“.......어째서?”

이 질문에 놈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울었다. 쪽팔리지만, 하는 내내 엉엉 울고 말았다. 놈은 내 볼에 쉴 새 없이 입을 맞춘다. 마치 어떠한 의식을 치루 듯, 그 눈물을 모두 마셔버리겠다는 양. 나는 그 입맞춤을 통해 놈의 욕망이 손에 닿을 듯 느껴져 나는 어쩔 줄 모르는 기분이 되었다. 

그저, 아무런 생각 없이 놈의 어깨에 자꾸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이게 무슨 대단한 방법이냐고 투덜거렸던 것과는 달리, 나는 정말 푹 자고 말았다. 

제길, 자존심이 좀 상하는데? 

평소에는 수면제가 잔뜩 든 음식을 섭취하고 약에 취해 잠들었다면, 이번에는 진짜 '지쳐서' 잠들었다. 꿈조차 꾸지 않은 단잠 후 눈을 뜨자 놈이 내 옆에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남자 둘이 부대끼기에는 좁은 침대인 탓에 놈은 구석자리에 겨우 몸을 누인 채다. 그 커다란 덩치가 이렇게까지 불쌍해 보일 수 있다니, 조금 웃음이 나왔다.

며칠 전에 감기를 앓고 깨어났을 때도 비슷한 상황이었는데. 그 며칠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 순간 놈의 건장한 등이 작고 가엾게 느껴졌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웃을까. 나보다 늦게 일어나는 때가 없어 과연 잠을 잘까 의심스러웠던 그가 코 흘리게 어린아이 같은 자세로 잠든 것을 보니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놈이 잠든 틈을 타 놈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아무리 살펴봐도, 나는 그를 전혀 알지 못 한다. 그와 나는 생판 남이었다. 

감금당하기 전까지만 해도. 

풍성하고 긴 속눈썹. 매끄럽게 이어지는 높은 콧대. 빙긋, 미소 짓는 순간 주위의 시선을 끌어 모으는 잘생긴 입술. 놈이 눈을 뜨면, 그 검은색 눈동자가 보일 테지. 짐승처럼 검고 어두운 빛깔의, 속을 들여다볼 수 없는 아름다운 눈동자. 태어나서 이제껏 나보다 잘생긴 남자를 본 적 없는데, 이 남자는 정말 잘생겼네- 새삼 감탄이 나왔다.

그 조각처럼 완벽한 얼굴을 좀 만져볼까 하고 몸을 움직인 순간, 지끈! 어색한 부위에 통증이 덮쳐왔다. 필요 이상으로 시큰한 허리를 느낀 순간 어제의 편린이 눈앞에 펼쳐졌다.

잤구나, 나. 저 맹수 같이 덩치 큰 남자와 자, 잤구.. 잤구나!

어제의 기억을 떠올리자마자 놈의 얼굴을 더 이상 쳐다보고 있을 수 없게 됐다. 씨, 씨발 쪽팔려! 나는 무슨 생각으로 저 자식과 이, 이렇고 저, 저렇고.. 그 그런 일들을!! 으아아아악!!!

머리를 감싸 쥐고 어제의 행동을 후회하고 있는데, 놈이 어느새 깨어난 듯 부스럭거리며 몸을 일으킨다. 자신을 향해 누워있는 나를 발견한 놈의 입가에 훅, 꽃이 피어나듯, 미소가 떠올랐다. 쿵, 하고 심장이 내려앉는 듯한 기분에 어쩐지 멍해져 놈을 멍청한 얼굴로 쳐다만 보고 있자, 미소가 진해진다. 놈이 누워있던 터라 살짝 눌린 자신의 뒷머리를 쓸어 올리며 입을 연다.

“깼나?”

막 깨어난 놈의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어쩐지 어제 같... 같기는 씨발!!! 화끈, 얼굴이 달아올라 나는 뒤로 돌아누웠다. 그 모습이 우스웠는지 픽, 하고 놈의 웃음소리가 귀를 자극했다. 미치겠다! 와악, 미치겠어!! 놈은 이불 속에 머리를 숨긴 나를 내버려둔 채 방을 나선다.

“아침... 아침 먹을 준비를 해오지.”

나는 재벌 2세다. 이게 무슨 개소리냐면, 우리 아버지가 재벌이라는 소리다.

아버지는 돈이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들 중 흔히 보이는 완벽주의자로, 차라리 당신은 사이코패스가 아닐까 궁금하게 만들만큼 치밀한 전략가였다. 그는 수재였고 노력가였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단단한 벽을 허무는 때가 있다면 내 어머니를 상대했을 때뿐일까. 여덟 살 때 돌아가신 어머니는 또렷하지 않은 기억 속에서도 빛이 번쩍번쩍 날 만큼 아름다웠고(모든 어린 아이들이 자신의 어머니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느낀다는 점은 차치하자) 고상하고 기품이 흘렀다. 그녀가 건재했을 때, 우리 가족은 꽤나 화목했던 것 같다. 아버지는 과한 업무 속에서도 저녁만큼은 가족과 함께하겠다던 젊은 날의 약속을 잊지 않으셨다. 그 이유는 어머니 곁에서 적어도 한 끼의 소중한 식사를 즐기고 싶었기 때문일 거다.

어머니는 어떤 사고ㅡ로 돌아가셨는데, 액면가만큼은 화려했던 우리 집의 화목이 깨어진 순간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순간 함께했던 나는 그 사건의 기억을 완벽히, 먼지 한 톨도 남지 않았다고 자부할 만큼 깔끔히 뇌 내에서 삭제해버렸지만, 아버지는 그런 나를 어쩔 수 없이 멀리하게 되었나보다. 아버지와 식사를 함께했던 때가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내가 대학에 입학하여 자취를 시작한 후에는 거의 일 년을 얼굴 한 번 마주한 적 없었다.

누나야 뭐. 누나와는 그냥 성격차이로 안 맞는 거고.

그렇지만, 나는 하나 뿐인 후계자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빼닮은 내 얼굴을 보는 걸 기피했지만 그는 나를 후계자로 지목했다. 나는 우리 집 가족이 다 그렇듯 액면가는 훌륭한 녀석이니까.

근데 씨발, 왜 날 안 찾는 거야? 아무리 그래도 외아들인데!! 시간 감각이 없지만 모르긴 몰라도 이미 삼주에서 한 달은 감금당한 것 같다고!

아버지와 누나가 나를 찾지 않고 있다면, 왜 내 친구들이나 내 여자친구는 나를 찾지 않는 것일까? 내 여자 친구가 좀 멍청해 보이고(실제로도 조금 멍청한 구석이 있으나, 예쁜 여자는 대개 머리가 비었다) 돈을 밝히기는 했으나, 나와 사귄지 벌써 1년을 넘긴 사이다. 그녀는 웃음이 많고 자상하여 내 모난 부분을 감싸주는, 사랑스럽고 사랑스러운 내 애인이라고!! 그녀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내가 제일 잘 알아! 내 친구들은 나를 위해 간이고 쓸개고 빼줄 수 있다고 말할 만큼 막역한 사이라고! 그 새끼들이 날 좀 벗겨먹으려 드는 경향이 있기는 해도, 그 놈 자식들과 나 사이의 우정이 얼마나 끈끈한데!!!!

근데 왜?

우리나라 경찰은 다 뭐하고 있길래! 왜 나를 구하지 못하는 거야!!! 민중의 지팡이는 나를 버린 것인가!!!

아니면, 이 자식이 날ㅡ 정말 아무도 못 찾는 어떤 곳에 숨겨버린 것일까? 뭐, 무인도 같은 곳에? 무인도에 놈과 내가 단 둘이 있는 장면을 상상해봤다. 나는 하얀 방에 감금되어 있고, 그 방 밖에선 창문 밖으로 망망대해와 모래사장이 보이는 무인도. 놈은 나를 위해 요리를 하고 방을 청소하고 빨래를 하고. 나는 놈에게 감금당하여 하루 종일 방 안에 갇혀 책이나 읽으며 뒹굴 거리다가 놈이 주는 음식을 받아먹고 잠에 빠져들고. ...놈과 섹스하고.

와, 씨발. 순간 그럴 듯하다고 생각해서 죄송합니다. 그렇다면 이 자식이 날 위해 만화책이니 소설책이니 계속 신간을 사올 수 있는 게 말이 안 되잖아.

그렇지만, 아주 짧은 순간,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놈과 내가 이 세상에 단 둘뿐이라면, 나는 놈을 사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ㅡ거짓말 아냐. 놈을 측은하고 불쌍하다 여기는 이 감정이 어쩌면 사랑이 되어버릴지도 모르잖아. 놈과 잘 수 있을 만큼 병신 같은 이재윤인데... 가능할지도 모르잖아?

“아침이야, 밥 먹어.”

어이없는 망상에 너무 몰두한 탓일까, 놈이 돌아온 걸 눈치 채지 못했다. 불쑥, 눈앞에 내밀어진 건 버터를 바른 토스트와 스크램블 에그, 그리고 따뜻한 커피 한 잔이었다. 화들짝 놀라 어느새 침대 곁으로 바싹 다가와 있는 놈을 올려다봤다. 시선이 부딪혔다. 속을 들여다볼 수 없는 깜장색 눈동자가 도리어 내 속을 꿰뚫는 듯 나를 노려본다. 그 시선을 느끼자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웠다.

제기랄!! ‘사랑’이라니. 진짜 미쳤구나, 이재윤, 미쳤어. 그런 생각을, 아니 그런 단어 자체를 떠올린 신이 너무나도 쪽팔리고 한심해져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나도 모르게 거친 동작으로 그 음식들을 낚아챘다. 매일 아침밥을 챙겨주던 들고양이에게 손이라도 물린 듯, 놈이 커다란 덩치를 움찔한다.

“왜 이렇게 급하지? ....설마.”

“ㅡ설마는 무슨 설마!?”

놈이 필요 이상으로 진지한 얼굴을 한다.

“어제 한 체력소모가 너무 커서 지금 보충해두려고?”

.......씨발, 쪽팔린다. 저런 성추행범이랑 사랑이라니.

체할 것 같아서 토스트에 딸기잼을 바르던 손을 우뚝, 멈추자 놈이 능글맞게 웃는다.

“먹어둬. 오늘 밤에 고생하려면.”

“ㅡ당신이랑 두 번 다시 안 해!!!!!!!!!!!!!!!!!!!!!!!!!!!!!!!!!!!”

도둑질도 처음이 어렵다고 했다. 남자와 하는 섹스도 다를 건 없었다. 하긴, 감금당해 사는 것에도 익숙해졌는데 감금범과 자는 것에 익숙해지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잠들기 전 매일 밤 이마에 닿아오던 굿나잇 키스를 대신해 놈과 몸을 겹치기 시작했다. ‘그 행위가 못 견디게 쪽팔리다’고, 그나마 남아있던 이성이 말했던 것 같은데, 그 이성도 어느새 튼튼한 밧줄에 목을 맸는지 쪽팔림 따위는 안중에도 없게 되었다. 잠들기 전 나는 연말행사처럼 놈에게 안겼다. 그러나 놈과 하는 행위가 내가 꾸는 두루뭉술하고 찝찝한 꿈의 해결책이었던 것 처음뿐이었다. 그렇게 지쳐 잠들면 나는 그 꿈속에서도 헤매고 다닌다. 

무언가를 보고, 나는 놀라고, 무언가를 저지른 나는 또다시 놀라고 만다.

그저 꿈일 뿐인데, 깨어났을 때의 소름끼치게 생생하나 결국 어떠한 것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꿈의 감촉에 몸을 떨어야했다. 눈을 뜨면 놈의 얼굴이 보이고, 놈은 순한 고양이처럼 웃는다. 그 맹수가 보여주는 내숭 섞인 미소에 안심해버린 건 감금 당한지 거의 한 달쯤 되어버린 남자의 비참한 말로일까?

이재윤 병신새끼.

그리고 저 새끼는 미친 새끼!

놈에게 두 번 째로 안긴 날부터 놈은 어딘가 안심한 듯한 모습이었다. 놈은 잠이 들락말락한 내 이마에 키스한 후 처음으로 내 등을 끌어안은 채 옆에서 잠을 청했다. 그 전 날에는 비 맞은 고양이처럼 궁상맞은 자세로 새우잠을 청하더니, 이번에는 진짜 침대 주인이 둘로 늘었다는 태도로. 나 반띵 놈 반띵, 침대를 공평하게 나누자는 수작인지 뭔지. 침대를 구입한 건 놈이니 사실 진짜 주인이라면 놈이겠지만, 억울하게 감금당한 내 입장에서 그 좁은 침대를 공유하자니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처음에는 귀찮은 티를 팍팍 내며 마구 뿌리쳤지만 후에는 귀찮아 그냥 내버려뒀다.

그 후부터, 나는 놈의 잠든 얼굴을 볼 기회가 많아졌다.

그 전에는 놈이 나보다 늦게 일어나는 꼴을 본 적이 없어서 과연 저 새끼가 잠을 자기는 자는 걸까, 하고 궁금해 했는데 말이다.

놈과 몇 번이고 몸을 겹쳐, 이제는 예의상 하던 내숭도 거절도 안 하게 된 어느 날. 지쳐 곯아떨어진 후 깨어난 다음 날.

웅크린 등.

저 등을, 내가 어디서 본 적이 있었나. 데자뷰란 게 이런 거던가? 좀 다른 것 같기도 하고. 

허리를 감싸 안은 놈의 팔을 대충 푸른 후 몸을 일으킨 나는 곁에 웅크린 채 누워있는 그의 등을 노려보았다. 정말 맹수 한 마리가 곁에 누워있는 듯, 위험한 냄새가 나는 남자다. 쭉 뻗은 모델처럼 늘씬한 몸을 감싼 검은 옷이 마치 피부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위아래가 모두 검은색이니 마치 미스테리 심령 서클 회원같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혹시 너님은 악마를 기다리는 광신도냐. 음, 열대지방 맹수니, 마녀의 고양이쯤으로 해둘까? 고양이는 너무 귀여우니까 역시 흑표범일까...

어떤 충동에 의한 건지는 나도 모르겠다.

나는 깊은 잠에 빠져든 조각상처럼 아름다운 남자의 얼굴을 멍청히 바라보다가, 긴팔 옷에 감싸인 그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당장 죽고 싶을 만큼 사랑한다는 나를 안을 때도 벗지 않는 검은 옷. 주스가 묻어도 걷지 못하게 하던 오른 팔. 나는 어쩐지 마법에라도 걸린 듯, 그의 팔에 손을 뻗었다. 놈은 여전히 깊은 잠에 빠진 듯 보였다. 색색, 놈의 숨소리가 귓가를 간지른다.

놈의 팔을 걷어 올렸다. 언뜻 보이는 건ㅡ

“ㅡ이재윤!!”

아프리카의 야생동물들은 Non-REM 수면에 이르는 경우가 없다고 하던데. 위험이 닥치면 당장에 잠에서 깨기 위해 감각들은 영민하게 깨어 반쯤만 잠을 자고 있다고. 마치 야생동물의 그것처럼, 내 손이 그 검은 소매를 끌어내린 순간 놈이 용수철이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깨어난 짐승이 그 순간 바로 내 팔목을 으스러질 듯 움켜잡았다. 놈이 으르렁거린다.

“빌어먹을!!”

“.....아....”

딱히 변명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팔목에 가해진 아픔에 신음을 흘렸다. 그걸 들은 놈이 천천히 내 손을 놓더니 그 손으로 대신 자신의 눈을 감싼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어떠한 말도 꺼내지 않았다. 놈이 이내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겨우 감정을 추스른 듯 놈이 눈을 가린 손을 거뒀지만 놈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놈과 눈이 마주쳤다. 짐승처럼 검은 눈동자.

“.......음식을 가져 오겠어.”

놈이 자신의 짧은 머리칼을 거친 손길로 쓸어 올린다. 

놈의 검은 눈. 상처 받은 짐승처럼 검고 나약한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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