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17)

11.

나는 예전부터 포기가 빨랐다. 

겉으론 부족한 것 하나 없어 보이는 외모와는 다르게 심약하고 소심한 성격 탓에 뭐든 금방 포기하고 타협점을 찾곤 했다. 그건 어떤 사건에 대한 대처 방법에도 적용된다. 나는 크나큰 위기에 국면하게 되면 그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까를 연구하는 대신 그 위기를 어떻게 회피할까를 찾는 성격이다. 

예를 들어, 친구들과 오락실에서 게임을 하고 싶다고 해도 아버지께서 엄한 얼굴로 ‘들어가 과외를 받아라,’라고 한 마디만 하시면 찍 소리 없이 돌아와 책상 위에 엉덩이를 붙였다. 대학도 그렇다. 수재 집안의 우수한 두뇌를 물려받아 성적은 좋아 이름만 들으면 와~ 소리가 나오는 명문대에 들어갔으나 가고 싶었던 대학은 따로 있었다. 아버지께서 당신의 기업을 물려받기 위해서는 모 대학의 모 학과를 졸업해야 한다 말씀하셨을 때, 나는 나 자신의 장래에 대해서 단 한 마디 반박조차 하지 않았다.

여자 친구와의 싸움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떽떽 거리는 잔소리를 들을 만한 성격이 되지 못했다. 그녀가 무언가 화를 내려고 하면 뒷목부터 쑤셔와 나는 미간을 누르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두 살 어린 여자 친구가 무언가 언짢은 기색을 보이는 순간 나는 그녀에게 바리바리 선물을 떠안겼다. 다행히 매일 아침 모닝콜을 할 만큼 나를 사랑하는 여자  친구는 고가의 핸드백을 받아들면 금방 화가 풀려 귀여운 애교를 보여줬다.

때로 심각한 충격을 받는 경우, 그 기억에 대해서 싸그리 잊어버리고는 하는데, 정작 당사자인 나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지만 주위 사람들은 꽤나 골머리를 앓는 듯 보였다. 나를 붙들고 장황한 설교를 늘어놓던 그들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래, 네가 어렸을 적부터 고생이 많았지.’

같은 말을 꺼내고는 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군대까지 면제 받고 호의호식하고 살아온 스물두 살의 청년이 할 만한 변명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나는 여덟 살 때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것 외에는 아무런 불행을 겪은 적이 없대도 그러네! 

그러나 나는 누군가 나를 위해 그런 변명을 할 때면 영악하게도 곱상한 외모를 이용하여 상대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불쌍한 녀석이다. 뭐ㅡ 그렇게. 나쁠 것 없잖아, 상대가 날 불쌍하고 지켜줘야 할 대상으로 봐준다는데 왜 거절을 해?

따뜻한 목욕물을 받아놓고 욕조에 들어앉아 놈과 키스를 잔뜩 했다. 누가 뭐래도 이 자식 키스 하나는 내 인생 어떤 상대보다도 잘한단 말이야! 여자와 하는 키스에서는 언제나 내가 리드를 맡았는데, 놈과 하는 키스는 어쩐지 내가 여자가 돼버린 것 같은 착각이 들어서 ‘과연 이대로 괜찮나’ 하는 생각이 얼핏 머리를 스친 것 같다. 그러나 결국 나는 놈의 뜻대로 놈이 원하는 만큼 놈과 입술을 맞대고 있었다. 첫 날 느꼈던 거부감 따위는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다. 하긴 벌써 놈과 몇 번이나 키스를 했는데, 첫 날과 같을 수야 없지? 에이씨, 근데 나 너무 빨리 적응한 거 아냐? 

아니, 그 보다.... 나 도대체 언제쯤에야 이 지긋지긋한 하얀 방을 벗어날 수 있는 건데?

놈이 기르는 강아지 목욕을 시키는 양 나를 욕조 중앙에 앉혀두고서는, 그런 나를 감싸 안는 듯 한 자세로 뒤에 쪼그리고 앉아 머리를 감겨주기 시작했다. 일반 가정용의 욕조만한 크기니까, 우리가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또 얼마나 불편한 자세로 앉아 있는지 상상할 수 있을 거다. 뭐, 사실 나는 수갑이 묶인 채긴 해도 ‘그냥 될 대로 되라’라는 심정으로 놈의 가슴에 기대어 앉아 있으니... 덩치 큰 녀석만 불편했겠지만.

놈은 커다란 손으로 조심스럽게 내 머리를 감겨준다. 내 고양이처럼 모발이 얇은 머리카락은 살짝 길어져 이제 목덜미를 덮는 길이가 되어 있었다. 샴푸를 묻혀 머리칼을 조물조물 감겨주는 놈의 손길이 어울리지 않게 섬세해서 왠지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너 나중에 헤어 아티스트 해도 되겠다.’ 같은 돼도 않는 칭찬을 던진 후 나는 놈의 가슴팍에 더 편하게 기대었다.

“이래서야 감금을 당한 건지 전용 노예를 고용한 건지 구별이 안 가잖아.”

이렇게 투덜거리듯 말하자 등 뒤에 있는 놈이 조금 고민하는 듯 ‘흠-’하고 낮게 신음을 뱉는다.

“노예라.. 나쁘지 않은데, 평생 전용 노예랑 여기서 살면 어때?”

“미쳤냐!”

주저함 없이 욕설을 지껄이자 ‘하하’하고 놈의 입술을 타고 간질간질한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놈의 손가락이 이마를 쓸어 넘기고 귓바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낸다. 나는 어쩐지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 들었지만 잠자코 그 손길을 즐겼다. 눈을 감고 놈의 손이 내 머리를 어떤 식으로 만지는지 가만히 느끼고 있자니 그 손길을 통해 놈의 애절한 마음이 전해져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정말정말 소중하다는 듯 닿아오는 맹수의 커다란 손가락이 부드럽게 느껴졌다. 딱딱하고 커다란 남자의 손인데도 불구하고.

내가 기대있는 놈의 가슴을 통해 두근두근, 쉴 틈 없이 운동하고 있는 놈의 심장박동 소리가 들려왔다.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뚜렷이 들렸다. 이 녀석의 이런 감정을 나는 언제까지, 얼마나 받아줘야 하는 걸까? ...아니, 다시 질문하자.

얼마나 받아줘도, 괜찮은 건가요?

둘 다 옷을 벗지 않고 목욕을 한 터라 쫄닥 젖은 채다. 놈은 수건으로 내 머리를 조심스럽게 털어준다. 뚝뚝 흐르는 자신의 머리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아이를 챙기는 엄마처럼 내 몸 구석구석 닦아준다. 놈이 보송보송한 핑크색 수건을 머리에 덮어씌워 나는 수건 사이로 보이는 놈의 분주한 움직임을 쫓는다. 푹 젖은 옷을 입은 채로 수건으로 박박 문질러봐야 소용히 하나도 없잖아. 나는 툴툴거렸다.

“우리 둘 다 젖은 옷을 벗는 편이 더 빠를 것 같은데.”

“같은 대답을 하지. 네가 옷을 다 벗었을 때 내 이성이 흔들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아아! 알았어! 알았다고! 됐으니까 나한테 집중해!”

이 말에 놈의 손이 우뚝 멈추었다. 그리고선 놈이 장난기 가득한 음성으로 놀리듯 중얼거린다.

“‘나한테 집중해’라...”

“읏... 시, 시끄럽고! 나 슬슬 추우니까 빨리빨리 해!”

말실수를 깨달은 내가 부끄러움에 소리를 빽 지르자 외국 영화배우마냥 멋있는 자세로 어깨를 으쓱한 놈이 못 이기는 척 내 머리칼을 다시 말리기 시작했다. 놈은 계속해 옷을 갈아입고 싶다는 나를 무시하고 내 손에서 수갑을 풀러주고는 다시 족쇄를 채운다. 침대가 젖는다고 꽥꽥거렸지만 이번만큼은 놈도 물러서지 않았다.

“도대체 긴팔 옷에 집착하는 이유가 뭐야, 이 변태성욕자야!!! 긴팔 마니아냐 너!!”

“시끄러워, 이재윤.”

아주 오랜만에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놈 때문에 찍, 졸아붙은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아 시바, 엉덩이 축축해!! 울상을 지어봤자 저 놈은 자기도 푹 젖은 윗도리와 바지를 갈아입지 않는 고집불통 대마왕인 것을! 나는 할 수 없이 놈이 방 한 구석에 있는 커피포트에서 뜨거운 코코아 한 잔을 타서 건넬 때까지 (속으로만) 있는 대로 투덜거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따뜻한 설탕 음료는 기분을 풀리게 했다. 뱃속이 따뜻해지자 또 몸이 나른해지기 시작한다. 가만 보자, 나 어째 음식에 길들여지고 따뜻한 목욕물에 길들여지고... 나 사육 당하고 있잖아!!! 그래도 안 마신다는 말 한 마디 없이 핫코코아를 꿀꺽꿀꺽 마셔대자 놈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내 머리를 쓰다듬어댄다. 나는 그 손길을 뿌리치는 것도 귀찮아 따뜻한 잔의 온기를 느끼며 코코아만 마셔댔다.

...그건 그렇고 말이야.

이 자식, 음식에 약 타는 게 분명해, 그치? 

목구멍으로 넘어간 뜨겁고 달달한 코코아가 소화되기도 전에 수마가 덮쳐왔다. 나는 축축한 옷이고 뭐고, 덩치 크고 강력한 수마와의 싸움에서 완패해 베개에 고개를 묻고 쿨쿨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깨어났을 때, 내 몸은 흠뻑 젖어 있었다. 목욕 때문이 아니다. 옷은 어느새 놈에 의해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혀져 있었으니까. 식은땀과 눈물, 타액이 뒤섞여 베개, 옷, 침대가 흥건했다. 의식이 돌아오자마자 입술을 비집고 울음과 섞인 신음이 터져 나왔다.

“하.. 하읏.... 흐... 하.....”

눈물 때문에 앞이 흐릿하다. 흐릿한 그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어둡게 흐려진 그 형상에 안도감이 들었다. 부정할 수 없다. 나는 안도했다. 나는 족쇄가 절그럭거리는 손을 들어 눈물로 가득 찬 눈을 훔쳐낸다. 내 눈 앞의 상대를 확인하자. 그 얼굴을 바라보자.

“흐.. 흐읏...흑...”

눈앞에는 놈이 있다. 내가 언제, 어느 때 깨어나도 눈앞에는 놈이 있다. 나는 울음이 멈추질 않아 어린아이처럼 끅끅대기 시작했다. ‘깼나?’ 같은 질문은 없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을 거다. 놈은 알고 있다. 어쩌면 놈은 무엇이든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놈이 손을 뻗어 내 이마에 들러붙은 머리칼을 떼어낸다. 그 손길은 부드럽다.

“악몽을 꿨나?”

악몽?

꿈 내용은 흐릿했다. 눈물이 눈앞을 가려 세상이 뿌옇게 보이듯, 꿈 역시 흐릿하다. 어떤 것을 보았는지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저 꿈은 그 무게만으로 나를 짓누르고 압박하며 내 숨통을 옥죄어온다.

나는 고개를 저을 힘도 없어 눈을 두어 번 깜빡인다.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눈을 깜빡이자 주륵,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 눈짓을 어떤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놈의 입매가 조금 허물어졌다. 내 머리칼을 계속 정리하며 놈이 ‘그래...’하고 낮은 저음으로 중얼거린다. 그 음성이 귀를 스쳐 심장에 닿는다. 나는 안도하고 있다. 나는 안도하여 눈을 꼭 감는다.

“어떤 악몽이지?”

나는 대답 없이 몸을 일으키기 위해 버둥거렸다. 놈이 내 한 쪽 팔을 붙잡고 다른 손으로는 허리를 껴안아 나를 일으켜 앉게 했다. 나는 눈을 감은 채로 놈의 단단한 가슴에 고개를 묻었다. 그의 손이 옳지, 옳지, 하고 아이를 어르는 듯 부드럽게 내 뒤통수를 쓰다듬는다. 나는 그 가슴에 고개를 더욱 더 파묻는다. 

감금당한 남자와 감금한 사이코의 모습이 아닌 것 따위, 알고 있다. 지적하지 마 씨발! 나는 놈의 티셔츠 자락이 생명줄이라도 되는 양 손가락이 하얗게 질릴 만큼 세게 움켜잡았다. 알고 있다고! 나는 스물두 살이나 먹고도 악몽 때문에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는 어린애야. 날 감금한 남자가 보여주는 맹목적인 감정을 사랑이라고 생각할 만큼 단순하고 바보 같은 녀석이야. 알고 있어. 나는 이 녀석에게 틈을 보여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다정하게 대해주면 안도하고 있어. 놈의 다정함에 기대려하고 있어.

나는 언제나처럼 문제점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아. 나는 현실에 타협하고 싶은 거야.

놈이 속삭인다. 검붉은 포도주처럼 달콤하게 혀를 감싸 안아오는 듯한 음성이다.

“이제 그런 건 잊어버려.”

뭘? 무엇을?

아무리 나에 대해 샅샅이 알고 있는 스토커라고 해도, 내가 어떤 악몽을 꾸고 있는 지까지 알 수 있을 리 없잖아. 나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두루뭉술하고 뒤끝만 찝찝한 더러운 악몽을, 도대체 당신이 뭐길래? 이 질문이 목구멍을 막았다. 나는 대신 신음을 하듯 숨을 몰아쉰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도대체 무엇을 잊어버리지?

놈의 가슴팍이 축축하게 젖어 들어간다. 놈은 미동조차 없이 내게 자신의 가슴을 내어주었다. 놈이 고개를 숙여 내 귓가에 따뜻한 목소리로 속삭여왔다.

“그것을 위해 내가 네 곁에 있잖아. 걱정 말고, 이제는 그냥 잊어버려.”

“흐.. 흐읏.. 흣.....”

“악몽을 꾸지 않는 방법을 가르쳐줄까?”

“..무..슨...”

“악몽 따위 꾸지 않고, 푹 잠들 수 있는 방법.”

놈의 붉은 입술이 달싹였다. 낮고, 깊은 목소리다. 어두운 밤하늘처럼, 빨강색 물감과 초록색 물감을 섞어 박박 문지른 듯 온 세상이 새까맣게 느껴지는 목소리다. 유혹하듯 그의 손이 내 입술을 매만져왔다. 겨우 입술의 얇은 피부를 문지르듯 만지고 갔을 뿐인데, 그의 손에 의해 어딘가 은밀한 부위를 농염하게 쓰다듬어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악마처럼, 맹수가 유혹해 온다. 놈이 입술이 달싹이며 내 귓가에 숨결을 불어넣었다.

“읏....!”

“ㅡ가르쳐줄까?”

나란 놈은 병신이다. 정말 병신이야. 그 유혹을 거절하지 않았다. 나는 흐르는 눈물을 닦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인다. 놈의 입술이 눈물에 젖은 내 볼에 닿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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