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17)

10.

놈이 돌아온 건 조금 시간이 지난 후였다. 

같은 옷만 입고 다닌다는 내 지적을 의식한 건지 이번에는 어두운 보라색 윗도리를 챙겨 입고 왔지만 여전히 더워 보이는 긴팔 차림이다. 나는 놈의 눈치를 살피며 소심하게 입을 열었다.

“옷... 가, 갈아 입었네...?”

“아아.”

“..........”

평소의 능구렁이 같은 여유 만만한 표정 대신 조금 굳어 있는 놈의 얼굴에 나는 소심하게 고개를 돌렸다. 

아니 저 새끼가 아까부터 진짜! 내가 이렇게 신경을 써주는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응’도 아니고 ‘어’도 아니고 ‘아아’?!?!? 

아, 화내고 짜증내고 싶다!! 

근데, 놈의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 입도 뻥긋 못했을 뿐.

나 역시 윗도리가 잔뜩 젖었는데 자기만 옷 갈아입고! 그러나 그런 얘기를 꺼낼 수는 없었다. 축축한 옷의 감촉을 느끼며 녀석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데, 녀석이 다시 조용히 내 침대 한 구석으로 엉덩이를 붙여온다. 흘끗, 조각상처럼 완벽한 놈의 옆얼굴을 쳐다보자 잘생긴 입술이 조개처럼 다물려 있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냐고, 태연하게 질문할만한 분위기는 절대 아니었다. 놈과 나 사이에 감도는 어색한 기운이 사라지지 않아 조용히 책만 읽으며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놈은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는 둥 치근거리는 대신 무거운 침묵을 지키며 옆에 앉아 있었을 뿐이다. 

힐끔거리며 눈치를 보는 건 나였고, 놈은 차갑게 굳은 얼굴을 한 채 책의 글씨를 눈으로 쫓고 있었다. 평소와 상황이 정 반대가 되어 내가 놈의 시선을 끌려고 노력하다니... 어쩐지 야속한 마음 반, 속상한 마음 반으로 뒤섞여 나는 애꿎은 만화 책장만 팔랑거렸다.

그리고 얼마 있다 놈이 가져온 음식을 먹고는 또 참을 수 없을 만큼 졸음이 쏟아져 나는 쓰러지듯 잠에 빠져 들었다.

몇 시간을 잠에 빠져있었는지 알 수 없다. 꿈도 꾸지 않은 짧은 수면 후, 반짝 눈을 떴을 때, 언제나처럼 주인이 깨기를 기다리는 애완동물 같은 얼굴을 한 놈과 눈이 마주쳤다. 언제나처럼. 아까처럼 시린 눈빛이 아니라, 언제나처럼, 가슴 속까지 파고드는 부드러운 눈빛. 

.....하, 미친... 이 눈빛을 본 후에 내 가슴을 쓸고 내려간 감정이 안도감이라니.......! 진짜 병신이구나 이재윤!!!

그러나 놈은 내 이마에 이 세상의 가장 부서지기 쉬운 보석을 다루 듯 조심스러운 키스를 한다. 나는 눈을 감고 이마의 얇은 피부와 입술이 맞닿아 전해져오는 온기를 느낀다. 그것은 가볍고 부드럽게 이마를 스치고 지나가는 놈의 '진심'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놈의 키스를 피하지 않았다.

피해봤자 피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나는 피하지 않았다.

대신 나는 놈이 이마를 타고 콧잔등에 입을 맞춘 후, 내 입술을 파고드는 놈의 입술을 손바닥으로 차단하고 조금 투정을 부리는 아이 같은 목소리를 했다.

“씨... 씻고 싶어!”

도대체 아까는 왜 나한테 그렇게 차갑게 군거야?

하고 싶었던 질문은 이건데, 다른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말을 하고보니 진심이 되어, 살짝 놀란 듯 깜장색 눈을 크게 뜬 놈을 향해 당당히 소리쳤다.

“샤워하고 싶다고, 샤!워! 이 한 여름날 샤워 한 번 안 시켜주는 게 말이 돼? 아무리 납치범이라도 어느 정도 인도적인 양심은 있어야 할 거 아냐!”

“넌 언제나 구석구석 깨끗이 닦여 있어. 내 손으로 친히, 매일, 꼼꼼히ㅡ”

내 요구에 기가 차다는 듯, 섹시해보일 만큼 여유롭게 콧방귀를 뀐 짐승이 확인사살을 하듯 내 어깨를 더듬으며 말을 이었다.

“아주 소중한 부위까지도, 매일ㅡ 이야.”

“미. 미친 새끼!”

화끈, 얼굴이 붉어져 나는 놈의 팔을 뿌리쳤다. 그러나 나의 알량한 자존심은 이런 성추행 한 번에 포기할 수 없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진짜 샤워를 하고 싶었건 않았건, 한 번 뱉은 말이었다.

“하, 하지만 아까 오렌지 주스를 쏟은 것도 있고! 찝찝하다구!”

“네 옷은 이미 갈아입혔어.”

내게 시선도 주지 않고 대답한 놈의 말마따나 난 뽀송뽀송한 새 옷을 입고 있었고, 팔도 끈적거림 없이 보드라웠다. 내가 놈이 준 음식을 먹고 죽은 듯이 잠을 잘 때 갈아입힌 모양이었다. 나 역시 똑같은 옷이 여러 벌 있는지, 윗도리는 하얀 긴팔, 아랫도리는 여자아이의 핫팬츠마냥 짧은 하얀 바지였다. 아까 놈의 냉정한 태도에 대한 분노와 오랜 시간 동안 감금당한 욕구불만이 터졌는지, 어쩐지 머리가 핑, 도는 기분이었다. 나는 자신의 몸을 흘끗 내려 봤다가, 이판사판으로 고함을 빽 질렀다.

“그래도 샤워하고 싶다고 이 신발넘아!!!!!!!!!!!”

내가 내지른 고성에 귀를 틀어막았던 커다란 맹수가 휴, 하고 고양이를 가장한 한숨을 혀 안에서 굴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샤워하고 싶다고 말한 건 난데, 막상 놈이 내 족쇄를 풀러주자 기분이 묘해졌다. 내가 도망치지 않으리라 생각한 것일까. 그 만큼 나를 믿ㄴ... 믿기는 씨발! 그 만큼 이 새끼가 여유를 부리는 걸까? 내가 도망친다 해도 금방 제압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놈을 빤히 쳐다보자 놈이 날 쳐다보더니, 피식, 입꼬리를 말아 웃는다. 그 순간 내 얼굴이 화끈, 붉어진 이유를 나는 도통 설명할 길이 없다. 당황한 내가 놈의 시선을 황급히 피하자, 놈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든다.

그러더니 절그럭.

“...경찰 플레이냐?”

“노노. 죄수 플레이.”

“!!”

“흥분했나?”

안 했어 이 미친 정신병자 새끼야!!!!!! 근데 이번에는 수갑이야? 진짜 악취미잖아! 사실은 변태 오타쿠인 거 아냐?

놈의 손에 의해 뒷짐 진 채로 수갑에 양 손목이 매였다. 차갑고 딱딱한 수갑의 감촉에 소름이 돋았다. 놈은 내 등 뒤에 서 내 어깨를 붙든 채 욕조로 이끈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욕조의 물은 투명했다. 모든 것이 하얀 방답게 욕조 역시 매끈한 달걀색이었다. 이게 과연 며칠, 아니 몇 주 만에 보는 욕조냐! 믿거나 말거나 집에서 매일 장미목욕을 하며 피부를 가꾸던 나인데! 가정용의 고급스러운 욕조인양 자태를 뽐내는 탕을 보자 왠지 기분이 풀어지고 몸이 나른해지는 기분이었다.

놈이 내 뒤에서 어깨를 떠밀었다.

“자, 소원하던 목욕이야. 들어가지.”

“뭐, 뭐야! 나 옷 안 벗어?!!!”

        “흠, 네가 옷을 훌렁훌렁 벗어던지고도 내 이성이 버틸 거라고 기대한다면- 벗어도 좋고.”

놈의 능청맞은 대답에 ‘이익!’하고 이를 악물며 덤비려고 했는데, 놈의 우악스러운 손에 붙들려 나는 따뜻한 물속으로 집어던져졌다. 졸지에 물을 잔뜩 집어삼킨 내가 억지로 토해내며 울상을 짓자 놈의 입가에 언뜻 미소가 떠올랐다.

“켁! 콜록콜록! 큽... 이, 이 새끼야! 물 먹었잖아!!!”

“깨끗한 물이야. 걱정하지 마.”

으아아악! 그 소리가 아니잖아!!!!

그러나 오랜만에 따뜻한 물에 온 몸이 잠기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고래고래 악을 쓰며 싸울 마음도 사라졌다. 나는 물속으로 잠겨 들어갔다. 따뜻한 물속에 머리까지 집어넣자 물이 차오른 귓속으로 ‘윙 윙’ 공기와 물이 뒤섞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평온한 정적이었다. 감금당한 남자가 욕조에 잠겨 느낄만한 평온함은 아니었다. 나는 자기 자신이 한심하고 병신 같아 속으로 욕설을 씨부렸다. 한 참을 머리를 집어넣은 채 숨 참기 놀이를 하고 있자, 은근히 걱정된 건지 맹수 새끼가 내 목덜미를 붙잡아 물 밖으로 끌어냈다.

숨을 몰아쉬며 놈을 올려다보자 놈의 목덜미가 움칠 굳어졌다. 놈과 부딪힌 시선이 허공에서 격렬히 춤을 춘다. 놈이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다시 뱉어낸다. 놈의 눈동자 속에 지펴진 불꽃같은 욕망을 보았다. 이대로 잡아먹혀버린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격정적인, 놈에게 엉망진창으로 당해버린다고 해도 할 말이 없을 만큼..... 나는 시선을 피하고 싶어졌다. 시선을 피하려던 나를 막은 건 놈이다.

놈이 욕조 안으로 첨벙, 몸을 담가왔다. 지나치게 건장한 성인 남성 한 명과 내가 공용하기엔 작은 욕조다. 놈이 자신의 다리 사이로 수갑이 매여 꼼짝 못하는 나를 끌어당겼다. 시선을 피하려는 내 턱을 딱딱하고 커다란 손으로 붙든다. 어쩔 수 없이 그 검은 동공을 마주보았다. 검은 눈동자 속 넘실거리는 놈의 욕망 때문일까, 아니면 뜨거운 물의 열기 때문일까.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

“위... 윗도리... 안 벗어?”

이 우스꽝스러운 질문에 놈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져 올라간다. 맹수가 고양이처럼 웃고 있다. 그 미소에 세포 하나하나가 반응한다. 이 녀석은 위험해. 위험한 녀석이 가까이 있다. 피해야 한다. 그런 생각이, 코로는 냄새를 맡고, 눈으로는 행동을 쫓고, 귀로는 소리를 듣듯, 그렇듯, 당연하다는 듯 세포 하나하나가 그 위험신호에 반응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피할 수 없다.

놈의 목소리는 깊고, 낮으며, 달콤하다. 그건 섹시한 목소리다. 남자인 나 역시 부정할 수 없는, 허리 안쪽의 어딘가를 자극하는 섹시한 목소리다.

“ㅡ내가 윗도리를 벗고도, 내 이성이 버틸 거라고 자신한다면 벗어도 상관없어. ...벗을까?”

                       “벗지- 으읍!”

ㅡ마, 하고 이어지려던 내 말문을 끊고 놈의 입술이 다급히 내 입술을 덮쳐왔다. 놈의 키스는 언제나 뜨겁고, 격렬하다. 내 인생에 겪었던 어떤 연애도 이런 격정적인 무언가를 품은 적이 없다. 이런 사랑을ㅡ 나는 들어보지도, 겪어보지도 못했다.

나는 그저, 뒷짐 진 채 뒤로 수갑이 매여진 내 손이 대신에 그 듬직한 어깨를 감싸 안게 되는 일이 없기를 바라고 또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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