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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의 반을 잠으로 보낸다고 해도, 작은 방에 갇혀 아무것도 못하고 지내는 건 엄청난 고역이다.
사람이 심심해서 미쳐버린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지만, 정말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방에 사람 심심하지 않게 그림이라도 걸려 있으면 몰라. 텅 빈 액자와 하얀 가구들. 그 을씨년스러움이라니... 정신병원도 아니고ㅡ! 하루 종일 보는 것이 놈의 잘나빠진 면상뿐인 내가 침대에서 온 몸을 비틀며 괴로워하는 걸 눈치 챘는지, 보다 못한 놈이 품에 한 아름 만화책과 무협지를 싸들고 왔다.
물론 내가 반겼을 리야 없지만.
“뭐, 뭐야 그건?”
“만화책이랑 무협지.”
“...마, 만화책이랑 무협지라니..”
날 뭘로 보고! 방구석에서 만화책이나 보는 폐인인 줄 아는 거냐?! 이렇게 항의하려고 했는데 내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품에 억지로 떠넘기는 통에 책들을 받아버렸다. 예의상 흘끗 시선을 줬는데, 제목들이 너무 익숙했다. 순간 눈을 크게 뜨고 품 안의 만화책과 소설책의 제목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헤 벌려진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이, 이건..!”
“좋아하는 책이지? 신간이다.”
놈은 칭찬받길 기다리는 개새끼마냥 은근히 기대하는 목소리로 묻는다. 나는 책에서 간신히 시선을 떼고 놈의 의기양양한 얼굴을 노려보았다.
“....이 책, 어떻게ㅡ 아니 어디서 알아냈어?”
내 질문에 대답 없이 놈이 넓은 어깨만 으쓱였다. 나는 머리가 지끈거려 미간에 손을 올렸다. 하, 씨발... 이 새끼가 자꾸 소름 돋게! 눈을 꾹 감고 나는 으르렁거리듯 놈에게 쏘아붙였다.
“당신 도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야? 말해 봐, 씨발! 당신 정체가 뭐야?”
“......”
“이걸 도대체 어떻게..!”
사실 만화책이니 무협지니 존나 좋아한다. 유명한 소년만화라면 모른 것 없이 빠삭하게 읽었다. 원하는 책이라면 일본에서 직수입을 하는 한이 있어도 손에 넣었다. ㅡ하지만 대놓고 티를 낸 적은 맹세하건데, 단 한 번도 없다. 정말 친한 놈들도 내 취미 따윈 모른다고! 아버지와 누나의 경멸에 찬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이어야 할 기업의 이미지를 생각해서라도 좀 더 클래식한 취미를 가진 척 해왔다. 뭐 그런 거 있잖아? 미술관이라거나, 클래식 음악을 들으러 간다거나. 오페라 같은 걸 들으러 간다거나. 게다가 사귄 여친들이 예전부터 오덕한 남자 싫다고 귀에 박히도록 말해와 이런 취미는 감추고 또 감춰왔다. 서점에서 만화책에는 시선조차 준 적 없고 집어 들어 본 적도 없다. 구입은 언제나 인터넷 서점을 이용해 조용히, 소리 소문 없이.
그 누구도 모르게 해 왔는데.
어떻게 놈은 이런 것까지 아는 거야?
물어봤자 답하지 않을 거란 건 알고 있다.
놈은 여전히 대답 없이 배고픈 맹수 같은 눈으로 나를 응시한다. 나는 그 시선에 어깨를 떨었다. 말을 잇지 못하고 만화책 커버에 손가락을 미끄러트렸다. 매끈한 포장지의 감촉에 현실감이 없었다.
만화책을 선뜻 펼치지 못하고 놈만 쳐다보고 있자, 놈이 피식,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다시 어깨를 으쓱, 추켜올렸다. 그리고 성큼 내 옆으로 다가와 내가 꽉 붙잡고 있는 만화책을 빼앗는다.
얇은 비닐껍질을 벗기면서도 놈의 시선은 줄곧 내 미간을 노린다. 입맛이라도 다쉬면 공포물이 되겠지. 놈이 만화책의 첫 장을 넘겨 내 손에 다시 쥐어준다. 놈이 눈을 반달로 접어가며 웃는다.
“이건 신간이야.”
“......”
“읽지 않을 건가?”
그러니까, 애교 부리지 말란 말이야! 빌어먹을!
놈이 나직한 목소리로 ‘읽어줘야 하는 거냐?’하고 속삭였기에 나는 혀를 찼다. 이 새끼가 소름끼치는 스토커인 걸 오늘 처음 안 것도 아니고. 솔직히 많이 놀랐지만... 내가 체념하고 만화책을 펼쳐드는 걸 잠시 지켜보던 놈이 내가 눕듯이 앉아있는 침대 위로 몸을 들이밀어 왔다.
“아, 아 씁! 어딜 남의 침대에 기어 올라와?!”
“남의 침대?”
“..읏...”
말실수한 걸 깨닫고 입을 꾹 다물자 기분 좋게 웃은 놈이 날 밀쳐내고 침대 위에 올라앉는다. 내 바로 옆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이불까지 빼앗아 같이 덮는다. 놈이 침대 위로 제대로 올라온 건 처음이라 바싹 굳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왔다. 커다란 맹수가 몸을 부벼오 듯 놈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겁에 질린 것처럼, 거부할 수 없고, 거절할 수 없다.
“쓰다듬어.”
그 뻔뻔스러운 주문에는 진짜 기가 막혔다. 내려다보이는 놈의 검은 머리를 물끄러미 쳐다만 보고 있자, 놈의 손이 억지로 내 손을 붙잡아 자기 머리에 가져댄다. 애완고양이 흉내냐? 좀 있다 궁디팡팡도 해줘야 하는 거 아냐?
하지만 나는 손에 닿아온 놈의 머리칼을 쓸어내린다. 손가락 사이를 매끄럽게 빠져나가는 머리카락이 결 좋은 소리를 낸다. 요즘은 너무 헐겁게 해놔서 족쇄를 하고 있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절그럭 절그럭. 무거움을 느끼며 나는 놈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이게 무슨 꼴인지.
내가 왜 이 녀석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거지?
나는 한 손으로는 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른 손으로는 만화책을 펼쳤다. 눈으로 글자들을 쫓지만 내용이 제대로 머릿속에 입력되지 않는다. 나는 그저 눈만 깜빡거렸다.
나 지금 이 놈이랑 뭘 하고 있는 걸까?
동정ㅡ
그 다음에 감정은 뭡니까, 빌어먹을.
체념?
자신을 납치 감금한 놈을 불쌍하게 여길 수 있을 만큼 무른 놈이라면, 그렇다면 체념 후에는? 만약 놈이 날 평생 내보내 주지 않는다면 나는 놈을 평생 동정하면서 여생을 보낸다는 건가?
엿 먹어라! 엿이나 먹어.
그 전에 놈을 따라 미칠 게 분명하다.
만화책을 보다가 무심코 시선을 돌렸는데,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놈의 검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맹수의 그것마냥 속을 들여다 볼 수 없는 눈이다. 눈이 마주친 그 순간, 놈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훅, 하고 봄 바람에 벚꽃이 날리듯, 놈이 활짝 핀 꽃처럼 웃는다. 심장이 이상하다. 이상해. 이 새끼가 주인님 만난 개새끼냐고, 씨팔!!!!!
아아 젠장ㅡ 놈을 따라 미칠게 분명하다.
조만간, 미쳐버릴 것 같다.
감금당한 후 도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흐른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이젠 몇 끼를 먹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고, 난 그저 그 하얀 방 밖의 하늘이 보고 싶었다. 놈의 손에서 놓여나ㅡ 푸르고 푸르른, 구름 한 점 없는 드넓은 하늘을. 이곳에 갇혀 놈을 따라 미쳐버리기 전에, 푸른 하늘과 나에게 자유를.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놈만 만나게 되면, 싫든 좋든 상대방에 대해서 파악해 나갈 수밖에 없다. 여전히 이름도 나이도 모르지만, 나는 놈의 특이한 버릇 몇 가지를 알게 되었다.
첫째, 이건 예전부터 알아챈 거지만, 놈은 화가 나거나 초조해지면 머리를 쓸어 올린다. 고양이 과 동물이 털 손질을 하며 기분을 누그러뜨리는 것처럼. 정말 화가 나면 머리칼을 쥐어뜯을 듯이 군다. 덕분에 요즘은 놈의 기분이 어떤지 표정과 행동으로 알아차릴 수 있게 됐다.
둘째, 놈은 매운 음식을 잘 먹지 못한다. 처음 며칠 동안 내게 죽을 먹이던 것처럼 종종 키스로 음식을 떠먹이려 든 적이 있는데, 어느 날 맵디매운 순두부찌개로 시도한 놈의 얼굴이 시뻘게지더니 곧바로 방을 뛰쳐나가 버렸다. 한참 후에야 다시 모습을 드러낸 놈은 입안가득 초콜릿을 물고 있었다. 애도 아니고! 그게 얼마나 웃기던지 박장대소 했더니 삐진 건지 놈이 한동안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누가 신경 쓸 줄 알고? 내가 거들떠도 보지 않자 당황한 건지 다시 말을 걸어온 건 역시 놈이다.
음 그리고, 셋째ㅡ 이건 꽤 최근에야 눈치 챘다. 놈은... 옷이 없는 것 같다.
“당신은 옷이 그것뿐이야?”
“..응?”
밖에 나갈 날을 기약하며 전공서적을 뒤적거리다 말고 내뱉듯이 묻자, 내 옆에 바싹 붙어 앉아 같이 만화책을 읽던 놈이 멍하게 되묻는다. 잘생긴 놈이 그런 얼굴을 하니까 왜 분위기 있어 보이냐. 역시 하늘은 불공평해. 나는 놈의 검정 일색의 옷차림을 노려봤다.
“매일 같은 옷 입고 있잖아.”
“아아.”
“빨아 입는 것은 같지만... 그거, 같은 옷 맞지?”
이 질문에 놈은 마치 그제야 눈치 챘다는 것처럼 과장스럽게 자기 옷을 내려다보더니, 연극배우처럼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신경 쓰이나?”
“아, 뭐. 더워 보인다고. 아무리 에어컨 틀어놨다지만 한여름인데 왜 만날 긴팔에 긴 바지야? 그것도 검은색!”
“흐음.”
놈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다시 무심하게 만화책으로 고개를 돌려버린다. 하긴, 여자애들처럼 패션에 관심을 가질 나이는 아니지만... 이 자식이 갑자기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 빛 나는 화려한 옷을 입고 온 꼴을 보면 체할 것 같기도 하고.
쯧, 하고 혀를 차며 책으로 다시 시선을 돌리려는데, 귓가에 놈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속삭여져 왔다.
“그보다, 머리나 쓰다듬어.”
“..윽.”
이 자식이... 내가 머리 쓰다듬는 기계냐?
머리 한번 쓰다듬었다고 그게 버릇이 됐는지, 자꾸만 침대 한구석을 차지하고 앉아 머리를 들이밀어 대는 통에 돌아버리겠다. 성깔 나쁜 고양이라도 키우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순순히 쓰다듬어 주지 않으면 나중에 교묘하게 괴롭혀 오기 때문에 곤란한 건 나인 터라 마지못해 놈의 짧게 잘린 깜장 머리에 손을 가져다 댔다. 다른 한 손으로는 무릎 위에 책을 올린 후 침대 옆에 있는 탁자에 올려뒀던 주스 잔을 집으러 노력했다. 신선한 오렌지 주스! 감금 생활에 너무 적응해버린 내가 독서하며 가장 즐기는 음료수를 찾아 손을 움직이는데..
절그럭 절그럭.
촤악!
“ㅡ앗!”
“읏!”
으앗, 이럴 줄 알았어! 주스를 집으려다 족쇄에 달린 쇠사슬이 주스를 넘어뜨렸다. 넘어진 잔의 주스가 왈칵 나와 놈 위로 쏟아졌다. 내 왼쪽 편에 있던 놈은 많이 젖지는 않았으나 긴팔로 무장한 놈의 오른팔만큼은 흠뻑 젖어버렸다. 상큼한 오렌지 주스 냄새가 코를 찌르고 당황한 나는 허둥대며 놈의 손에 팔을 뻗었다.
“아, 아! 미, 미안해- 닦아줄-”
“ㅡ건드리지 마!”
“...어?”
놈이 나지막한 음성으로 으르렁 거리듯 소리쳤다. 젖은 놈의 소매를 걷어주기 위해 뻗었던 손을 탁, 쳐내와 당황한 얼굴로 놈을 쳐다봤다. 내가 만져주면(?) 황공해 해야지 이게 무슨-? 웬 자뻑 심한 말이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지만 평소의 놈과 너무 다른 행동이지 않은가. 무안한 마음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놈 역시 당황한 건지 짐승 빛깔의 검은 눈으로 날 슬쩍 쳐다보더니 이내 뻔뻔한 얼굴로 만화책에 튄 음료수를 털어낸다. 그러나 놈이 짧게 쳐진 검은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쓰다듬는 걸 놓치진 않았다.
“아아ㅡ 다 젖어 버렸잖아? 칠칠맞게 굴지 마, 이재윤.”
“.......”
“옷 갈아입고 오지. 책 읽으면서 기다려.”
평소의 느긋한 음성과 상반되게도, 마치 중얼거리듯 빠르게 말을 던진 놈은 곧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방을 나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