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17)

8

드디어 열이 내려 깨어난 아침(인지 점심인지 저녁인지 알게 뭐냐만은), 눈을 뜨자마자 쏟아져 들어오는 밝은 형광등에 적응되지 않아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옆을 돌아다보자 내 머리맡 침대에 얼굴을 묻고 웅크린 놈의 등이 보였다. 내가 깨면 언제나 살래살래 꼬리라도 칠 듯한 얼굴로 기다리던 평소와 다르다. 날 간호 하다가 깜빡 잠이라도 든 걸까? 어울리지 않게 불쌍한 꼴에 웃어버릴 뻔 했다. 풋, 하고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놈은 열대지방 맹수다. 귀가 밝으니 조그만 웃음소리에도 잠에서 깨어날 거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한 자신을 깨닫자 터져 나오려던 웃음기가 싹 가셔버렸다. 

아아, 제기랄. 나란 놈은, 뭐가 웃기다는 거야!

놈은 아픈 내게 죽을 만큼 다정하게 굴었다. 평소의 놈을 떠올릴 수 없을 만큼, 그저 죽을 만큼 다정하게. 

잠든 내 이마에 물수건을 올리고, 볼을 쓸어주고, 손을 잡아 주었다. 그리고 끊임없이 '괜찮아, 안심해' 하고 속삭였기에, 나는 잠결에도 놈의 존재를 느꼈다. 웃기는 자식. 넌 그저 시끄럽고 귀찮을 뿐이야. 분명 그렇게 생각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꿈도 꾸지 않고 푹 자고 말았다. 

가끔씩 깨어나 죽을 먹고 약을 먹을 때, 놈은 마치 어린 새끼를 돌보는 어미 새인 양 음식을 떠먹이고 약을 입에 물려주었다. 물을 삼키는 내 등을 토닥이는 손길이 너무 다감해 나는 차라리 놈 때문에 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느끼게 할 만큼, 놈은 살갑게 굴었다.

열대지방 짐승 주제에.

감기에 걸린 내게 자꾸 입술을 들이대며 성추행을 한 것만 빼고는 합격점의 간병인이었을 거다. 도대체 그렇게 자주 키스를 해댔는데 이 새끼는 왜 감기에 옮지 않는 걸까? 옮아서 감기로 뒈져버렸다면 행복 했을 텐데. 아쉽게도 내가 다 나을 때까지 놈은 멀쩡했다.

아 그나저나!! 이 자식은 왜 이렇게 불쌍하게 자고 있는 거야?! 그 성격이라면 뻔뻔한 얼굴로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올 것 같았는데, 왜 이렇게 불쌍한 꼴을 하고... 하...! 나는 놈의 커다란 등에서 간신히 눈을 떼었다. 시선을 돌려 굳게 잠긴 하얀 문을 노려봤다. 

미친!!! 이재윤 병신!!! 불쌍하다고? 이 새끼가? 나는 드디어 이 놈을 불쌍하게 여기고 있는 걸까? 몇 주일이나 갇혀 있었더니 이제 미운 정이라도 박혀버린 걸까?

나가야 해.

나는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나가야 해. 이 새끼가 나한테 끔찍한 정신병을 옮기기 전에, 나는 나가야 한다. 이 새끼가 불쌍하게 여겨진다니, 웃기지도 않잖아. 스토커에 납치 감금까지 한 정신병자라고! 사이코 새끼야!!!!!

ㅡ근데 난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병신 같이.

나는 속으로 자조 섞인 웃음을 삼키며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인상을 찌푸린 채 욕설을 간신히 참아내고 있는데, 어느새 놈이 깨어난 듯했다. 놈의 커다란 손이 내 손 위를 덮어왔던 것이다.

“깼나?”

“........”

“아직도 아픈 건가?”

귓가에 속삭여진 놈의 목소리는 믿기지 않을 만큼 다정했다. 그 따뜻한 음성이 거짓말 같이 심장에 스트레이트로 닿는다. 

ㅡ씨발, 미치겠다. 다정하다고 느끼지 마, 이재윤! 이등신아!! 

대답이 없는 내가 걱정스러운 듯, 놈의 손에 힘이 실렸다. 얼굴을 덮은 내 손을, 그러나, 부드럽게 떼어내며 놈이 조금 다급한 목소리를 한다.

“어이, 이재윤! 괜찮아?”

“.....꺼져, 제발.”

“ㅡ뭐?”

“꺼지라고!!! 제발 좀 꺼져버려!!!!!”

손 놔. 손 놓고, 얼굴 보지 마. 네 놈 얼굴도 보이지 마. 나한테 호모균 뿌리지마.

나는 비명을 지르듯 그렇게 소리치고, 놈의 손을 거세게 뿌리쳤다. 순순히 내 손을 놓은 놈 덕분에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쓸 수 있었다. 나는 이불 속에 얼굴을 감추고 도망치듯 눈마저 감아 버렸다. 숨이 막힌다. 공기 중에 먼지 맛이 난다. 숨이 막혀 돌아버릴 것 같다.

“나가, 제발. 혼자 내버려 둬.”

“...열은 내렸나? 그것만 확인하고 가지.”

“나가, 부탁이야!”

“.............”

내 필사적인 말에 놈이 조용해졌다. 이불 같은 걸 내가 아무리 안간힘을 써서 붙잡고 있어도 놈이 원한다면 단박에 빼앗을 수 있다. 하지만 놈은 그렇게 하지 않고 조용히 입을 다물고, 때를 기다리는 맹수처럼, 조용히. 놈의 손이 내 이불 위를 부드럽게 매만진다. 놈이 달래는 듯한 음성으로 물어왔다.

“그래, 뭐에 화난 거야?”

“....네 존재.”

“푸핫, 너무하잖아. 아팠다고 너무 까칠하게 굴지 마, 상처 받는다고.”

상처? 웃기시네. 덩치 큰 짐승 주제에 그렇게 여린 마음을 어느 구석에 간직하고 있는 건데? 나는 이불을 더욱 눌러쓴다. 이불을 움켜쥔 내 손 위로 놈의 손이 닿아왔다. 우습게도, 놈의 목소리 끝이 가련하게 축 쳐져있다.

“뭐가 불만인지 말해야지. 그래야 어떻게든 해줄 거 아냐?”

“...그냥 당신 꼴도 보기 싫어. 짜증나고 신경질 나.”

“.......후우.”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놈의 손이 조근조근 이불을 붙잡아 왔다.

“얼굴 보고 말하자, 이재윤. ㅡ그래, 봐줄게. 네 열이 다 내렸다는 것만 확인하면 나가주지.”

“싫다고!!! 너 같은 새끼랑 눈도 마주치기 싫어!!”

“떼써도, 체온 확인하기 전까지는 안 나갈 거다.”

이 미친놈은 나를 초등학교 1학년생으로 오해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이 녀석이 자꾸 나를 이런 식으로 대하니까- 씨발, 난 건장한 스무 살 남자라고..! 나를 이런 식으로 대하니까....! 하지만 놈은 화내지 않는다. 평소였다면 분명 살벌한 목소리로 협박부터 했을 텐데, 놈은 참을성 있게 굴고 있었다. 분명 놈에게는 엄청 어색한 일이겠지.

“이재윤, 혼나고 싶지 않으면 이불 내려. 얼굴 보고, 열 내렸나 확인하고, 죽만 먹고. 너 혼자 있게 해줄게.”

“.........”

“진짜야. 배고프지 않아? 혼자 있게 해줄게.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네가 원하는 만큼.”

놈의 목소리는 가증스럽게도 풀이 죽어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쩐지 심장도 기분도 이상했다. 놈이 어떤 표정을 하고 그런 말을 하는지 너무 궁금했다. 평소에는 지배자처럼 여유롭게 구는 놈이니까, 이번에도 성질이 난 얼굴로 머리를 쥐어뜯듯 매만지고 있을까? 화가 나 있을까? 아아, 제발! 분노한 얼굴을 하고 있어줘. 그렇다면 나는 통쾌해 해줄게. 아니면 찌질하고 병신 같은 얼굴을 하고, 비굴한 얼굴을 하고... 아니면, 아니면.........

“응? 그러니까, 내 말 들어. 이 재윤.”

놈은 최면술사일지도 몰라. 내게 정말 최면이라도 걸어버린 게 분명하다. 나는 놈의 어울리지 않는 달래는 듯한 음성을 따라 이불을 내린다. 

마법에라도 걸린 듯 고분고분히. 

환한 형광등을 가리고 있는 놈의 얼굴은 역광이라 자세히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대에 엎드리다시피 내게로 몸을 기울인 놈과 눈이 마주쳤다. 어서 내가 이불을 내리길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던 듯.

힘으로 뺏으면 뺏어버릴 수 있는 주제에. 놈은 가련한 얼굴을 하고 있다. 

털이 복실복실거리는 페르시안 고양이가 비를 맞고 쫄딱 젖은 것처럼, 그렇게 볼품없는 얼굴을 하고 있다. 이불을 천천히 내리자 놈이 조심스럽게 내 이마로 손을 뻗어온다.

바보 아냐? 이까짓 감기 가지고 내가 죽을 일도 없는데, 내 이마 짚어보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천천히, 부드러운 손길이 이마를 짚어 왔다. 놈의 입가에 싱긋 미소가 그려진다.

“그래, 열은 내렸군.”

사람 가슴을 욱신거리게 하는 미소다.

내게 죽을 먹이고, 놈은 약속한 대로 나를 홀로 남겨둔 채 방을 나갔다. 정말 그렇게 순순히 나갈 거라고 생각 못했기 때문에 나는 멍청한 얼굴을 하고 방을 빠져나가는 놈의 건장한 등만 쳐다봤다. 짐승처럼 날렵한 근육질의 등이 추욱 쳐져있다. 

아냐, 씨발. 저건 놈이 내게 일부러 보여주려고 불쌍한 척을 하는 거야. 절대ㅡ 절대, 저 빌어먹을 짐승새끼가 풀이 죽은 게 아니라고!!

방 안에 남겨진 나는 자꾸만 이마에 놈의 손이 여전히 얹혀져 있는 듯한 착각이 들어서, 그것이 마음에 걸리고 또 걸려서. 바보천치 마냥 오랜만에 방 안에 혼자 남았는데도 불구하고 맘 편히 잠도 자지 못했다. 그저 멍청한 얼굴로 하얗게 도배된 천장을 바라봤다.

아아, 이재윤..... 제발. 제발.

그래, 시팔. 인정하자.

마음 같이 미워할 수가 없다. 저 새끼는 너무 불쌍하게 굴잖아! 솔직히 말해서 아무리 납치 감금범이라해도, 나한테 너무 지극정성이잖아? 응? 솔직히 내 여친도 내 수발을 이렇게까지는 못 들겠다. 나는.. 나는..... 

하ㅡ 나 정말 왜 이러냐. 처음에는 놈의 손가락 하나 닿아오는 것도 질색팔색 했는데, 지금은..... 밖으로 나간다면, 놈이 날 내보내만 준다면ㅡ 적어도 친구정도는. 친구라면...

‘너와 친구 따위 되고 싶지 않아.’

그렇게 말하던 놈의 서늘한 눈이 떠올랐다. 형광등이 눈 부셨다. 나는 손등으로 눈을 가린다. 자기 자신이 너무 한심하게 느껴져서, 애처럼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았다.

놈과 나는 평행선과 같다. 

언제까지 이런 무의미한 짓을 반복해야 하는 걸까? 

사실 나도 알고 있다. 놈과 나는 절대로 친구도, 애인도 될 수 없다. 그야 당연하잖아? 놈은 아직 내게 자신의 정체조차 밝히지 않았다. 놈은 비겁하게 굴고 있다. 사람을 납치해서 몇 주일이나 자기밖에 못 만나게 하는 주제에ㅡ 비겁하게도. 누군가와의 관계를 발전시키려면 그만큼 다가와야 하는 건데.

놈은 다가오지 않는다. 내 곁에 있는 척 하면서, 사실 내 쪽으로 한 걸음도 다가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야 하는 거잖아? 근데ㅡ 왜 나는, 왜.... 

놈이 가엽게 느껴지는 걸까. 피해자가 납치범을 동정하면ㅡ 씨발, 일이 꼬여버리잖아. 하지만 나는 놈이 가엾고 불쌍하다. 놈이 끔찍하고 역겨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놈을 동정하고 있다.

나를 사랑한다 고백하는 놈은 가엾다.

나는 애꿎은 베개를 물어뜯었다. 아아 진짜 미치고 팔짝 뛰겠네. 이재윤 지랄 마! 가엽기는 무슨!!!! 감기로 꼬박 삼일정도는 아팠으니 이제 삼주 가까이 감금당한 거잖아. 너무 오래 밖의 세상을 보지 못해서 나도 좀 돌아버렸나 봐. 

불쌍하기는 씨발!!!!!!!!!!!

이제 나는 체력 만땅이라고! 사람을 밤낮으로 괴롭히던 감기는 낫고 나자 오히려 개운한 기분을 들게 했다. 이제 회복 됐으니까 액션 영화처럼 쇠사슬은 흐읍! 하고 힘주고 끊어버리고, 방문을 주먹질로 부셔버린 후 탈출 해 버리면 좋을 텐데.

내가 더 이상해지기 전에, 어서 빨리.

그러나 놈은 내가 쇠사슬을 양 주먹으로 동강내버리기 전에 돌아와 버리고 말았다. 

분명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혼자 있게 해준다더니, 거짓말쟁이! 기분이 꿀꿀한 날 혼자 두자니 마음이 내키지 않은 걸까. 달칵,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고 빼죽 고개를 들이밀은 놈과 눈이 마주쳤다. 안 어울리게 신경 쓰는 듯한 얼굴을 한 놈의 깜장 눈이 우스우리만큼 풀죽은 듯 보인다. 나는 곧바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미친놈이, 어디서 연기냐고.

놈은 내가 믿거나 말거나 불쌍한 척을 할 생각인지, 발소리를 죽여 사냥감에게 접근하듯 조용히 내 쪽으로 다가와 불쑥, 뭔가를 내밀었다.

“사탕이야.”

“....미친.”

“화 풀렸나?”

그니까 어디서 애교를 부리고 지랄이냐고! 

놈은 맹수가 고양이인 척 속이듯 눈꼬리를 접어 웃는다. 덩치와 어울리지 않는 순한 표정 해봤자, 내가 믿을 리 없는 걸 알면서도. 하지만 나는 놈이 내민 알사탕 세개를 받아 곧장 입으로 털어 넣었다. 알록달록한 눈깔사탕의 달달함이 혀에 닿는다. 놈이 그런 날 보더니 피식, 웃으며 손을 뻗어왔다. 

놈이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개새끼야, 만지지마!”

“ㅡ입이 걸레군. 도대체 어디서 배워먹은 말버릇이지?”

"...씨발!"

내 기분을 풀어주려고 조심스럽게 구는 줄 알았는데, 놈은 날 대놓고 깐족거리며 놀리고 있었다. 찰그락! 순간 울컥한 내가 족쇄 묶인 손으로 놈의 멱살을 붙잡자, 놈의 손이 불시에 내 손을 붙잡아왔다. 

그리고 놈이 승리감에 찬 얼굴로 웃는다.

“ㅡ이제야 내 얼굴 보는군.”

“....읏..”

“왜 화난거지?”

놈은 가여운 새끼 고양이 흉내를 낸다. 가까이 다가온 놈의 눈동자에 비춘 내 얼굴만 우스꽝스럽게 보인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놈은 알고 있는 거다, 씨발. 내가 흔들리고 있는 걸 알고 있다 놈은 내가 무엇에 흔들리는지, 무엇에 마음이 약해지는지, 나보다 더 잘 알고 있는 게 분명하다.

“응? 말해 봐.”

“네 놈 따위ㅡ 질색이야.”

훗, 하고 놈이 웃었다. 놈이 좀 더 가까이 다가왔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키스해 왔다. 입술에 그저 부딪히기만 하는 키스다. 놈이 내 손을 붙잡고 있었기 때문에 반항하지 않았다는 건 거짓말이다. 뿌리칠 수 있었음에도 나는 뿌리치지 않았다.

인정하자.

나는 놈이 가엾고 불쌍하다.

“....불쌍한 새끼.”

이 말을 하기 위해서 내게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 여자 친구에게 사랑을 고백했을 때도 이렇게 가슴이 아프고, 떨리고, 비참하고, 한심하고, 나 자신이 병신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근데 이 망할 놈의 자식은 그 가슴 떨리는 고백을 들은 후에도 조금 놀란 얼굴을 했을 뿐. 이내 미소를 머금으며 이렇게 말하지 않겠는가.

“ㅡ아아.”

하지만 난 널 사랑하지 않는다. 그건 바뀌지 않았어. 그저 불쌍할 뿐이야.

근데 왜 놈은 저런 표정을 짓는 걸까. 

어째서. 

어째서?

놈이 다시금 입을 맞춰왔다. 아직 사탕을 물고 있는 내 입술을 비집고 들어와 눈물이 날만큼 애틋한 키스를 한다. 감기를 앓던 중에 하던 키스와는 다르다. 열이 올라 눈 앞이 빙글빙글 돌던 때보다도 뜨겁고, 정신을 잃을 듯 격렬하다.

그것이 나는 너무 가엾고 가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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