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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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에게 성추행 당하는 것도 이제 연말행사라 익숙해 졌다.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이 악물고 참는 것은 바뀌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처음처럼 엄청난 거부감이 생기진 않았다. 

그리고 비, 빌어먹을..! 인정하긴 싫지만, 이 새끼는 테크니션이라고! 

젠장, 제기랄!

내가 어디를 원하는 지, 정말이지 나보다 잘 아는 것 같다. 마치 이 자식이 내 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처음부터 나와 하나였다는 것처럼. 

능글맞은 미소를 띠우며 놀려대도 반항 할 수 없다. 결국에는 놈이 원하는 대로 뭐든지 해버리고 마는 거다. 다 큰 남자인 주제에 내가 눈물을 흘리면 놈이 그 눈물을 다정하게 훔쳐낸다. 가끔은 모이를 쪼는 병아리처럼 부드럽게 입술로 눈물을 쪼아 온다. 

그것이 어쩐지 애틋하고도 가련한 느낌이 들어, 이 남자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했던 것이 새삼스레 떠올라 나는 억지로 놈을 밀쳐내곤 했다.

제기랄, 호모균이 옮을 것 같다. 

이런 미친 새끼를 상대로 동정심이라니, 이재윤도 많이 물러졌구나.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무심 시크, 차가운 도시 남자. 하지만 내 여자한테는 따뜻하지. 

내가 그런 남자였다.

...이런 오그리토그리한 멘트는 관두고. 난 그냥, 이래저래 평범 보다는 좀 난 놈이었다. 그니까, 평균이상. 

응.

키도 이 정도면 우리나라 평균키고, 178cm니까. 180cm 밑도 루저라고 생각하지 않는 쭉쭉빵빵한 예쁜 여자 친구가 있었고, 성격이 제법 활발하고 사교성이 괜찮아 친구들도 그럭저럭 많았다. 몸은 아무리 가꿔도 몸짱이 되긴 그른 허약한 체질이었지만, 얼굴이 미소년 타입으로 반반한 편이라 여자애들한테 고등학생 때는 장난 아니게 고백도 많이 받았다. 

게다가 난 공부도 잘했다고. ‘이 대학을 다니고 있다’라고 자기소개만 하면 소개팅 자리에서도 너나할 것 없이 나를 꼽게 만드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있었다. ...아 생각하니까 심란하네. 학교를 며칠을 빠진 거야 도대체.

아버지는 우리나라 잘나가는 기업의 회장이고, 하나 있는 누나도 사법고시를 단번에 합격한 수재. 원래 잘나가는 집안이 다 그렇듯 그다지 화목한 가정은 아니었지만 난 물질적으로 풍부했고, 인간관계도 충실했다. 

사귄지는 얼마 안됐지만, 나 독립했다고 매일 아침마다 러브콜 주고 밥해주러 들리는 여자 친구로부터 필요한 애정은 모두 받았다고! 친구놈들도 의리 하나는 짱 먹는 새끼들이었다. 서로 범죄를 저질러도 감싸주기로 약속할 정도였으니까.

누군가 불우하다고 표현한 어린 시절을 가지고 있지만 그래봤자 어머니가 여덟 살 때 돌아가신 것뿐이다. 교통사고였다.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의 사랑을 고파하긴 했지만 그것 때문에 애정결핍 같은 웃기는 것에 걸린 건 어렸을 때 얘기일 뿐이라구! 성인이 되어서는 밤에 불을 켜놓지 않고는 잠들 수 없던 것도 고쳐졌다. 엄마가 읽어주던 동화책이나 베드타임 스토리(Bed Time Story) 같은 것도 이제는 필요 없다고!

난 평범하고 평범하게, 아니 평범 보다는 좀 잘나게 내 인생을 영위해왔다. 딱히 나쁜 짓을 하고 산 것도 아니다. 난 나름대로 착하고 착실하게 살아왔다.

......근데 어째서 이 따위 새끼한테 납치 감금을 당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걸까? 다른 놈들도 많았을 텐데. 예쁜 여자도 널렸고.. 

그래, 이 새끼는 호모니까 인정해서 잘난 남자들도 널렸는데. 

아무리 내가 미모가 좀 특출나다 해도, 왜?

아니, 그보다 어떻게? 

난 우리나라에서 성인을 상대로 납치가 일어난다는 사실조차 놀랍단 말이다! 건장하진 않아도 한 명의 성인 남성인 나를 어떻게 납치 감금 할 수 있었던 거지?

으읏...

도대체가 이 자식에게 붙잡혀 온 경위가 기억나질 않는다. 

분명 나는 교수님과 면담을 하고 여자 친구를 만나고...... 헤어져서....... 

헤어져서?

지끈, 하고 누가 뇌의 물렁한 곳에 주먹질을 하기라도 한 듯 머리가 아파왔다. 혹시 여친이랑 헤어지고 집에 가던 길에 이 새끼한테 야구 빠따로 처맞기라도 한 거 아닐까? 그래서 머리를 다친 거야. 일시적인 기억상실? 근데 난 머리를 다친 것 같지는 않은데. 수면 가스? 그,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막 손수건으로 코 막고?

씨발, 미치겠다. 하나도 모르겠다.

도대체 이 변태 새끼가 누구고 언제까지 날 가둬둘 건지 누가 좀 속 시원하게 알려줬으면 여한이 없겠다!

그런데 이 미친놈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서 미쳐버린 듯 했다. 아주 제대로. 

이 자식이 진짜 돌았나보다. 사람이 도대체 어디까지 미칠 수 있는 지, 신기록에 도전하기라도 하는 걸까?

며칠 전부터 놈에게 끔찍하고도 경악스러운 취미가 생겨버렸다. 이 미친놈이 날 침대에 눕히더니 침대 옆으로 끌어다 놓은 의자에 멋드러진 폼으로 앉아ㅡ

“옛날옛날 아주 먼 옛날에...”

로 시작되는 동화책 남자가 들어도 홀딱 반할 듯 감미로운 목소리로 읽어주기 시작했다. 놈은 마치 여덟 살짜리 꼬마를 상대하듯, 스물두 살 청년의 머리맡에 앉아 동화책을 읽어주기 시작했던 것이다. 엄청나게 진지하고 무섭게 생긴 얼굴을 한 주제에.

처음에는 정말 너무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

“미친..! 씨발, 지, 징그럽다고! 그만 둬!”

하고 있는 대로 욕을 퍼부었지만 놈은 굴하지 않았다. 도대체가 이십대 남성을 재우며 토끼와 거북이가 나오는 동화책이라니, 뭐냐고 이 대략난감한 수치 플레이는?!

하지만 놈은 부르르 몸을 떨며 기함하는 날 무시한다. 그저 잠결에 취한(음식 탓이다. 먹으면 잠이 오고, 그래서 안 먹으려고 해봐도 배고프니 먹게 되고. 또 먹으면 잠이 오고. 그런 악순환을 반복하며 살고 있다) 내 머리맡에 앉아 동화책을 낭독하며 끊임없이 머리를 쓰다듬는다.

하지만 듣다보니 정말 참을 수가 없어서 나는 놈을 뿌리치고 일어나 앉으며 호통을 쳤다.

“끔찍해! 당신 정말 미친 거 아냐?!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갑자기!”

“그래서 토끼와 거북이는...”

“왜 하필이면 토끼와 거북이야, 빌어먹을!!! 차라리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읽어!!!”

“열심히 달려서-”

“공주님이 잠들었다는 얘기를 들으면, 씨발! 여자라도 나오니까 좀 좋네!! 왜 토끼와 거북이냐고!! 왜 동물이야!! 난 여자가 좋ㅡ”

“입 다물어, 이재윤. 책을 읽을 수가 없잖아.”

헉!

이 자식 눈 뒤집히는 거 본 사람. 표정 한번 죽이게 살벌하다. 저게 과연 어린애 용 동화책 읽어주던 사람이 지을 표정이란 말인가? 깊은 주름이 잡힌 미간과 눈빛이 너무 살벌해서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놈은 졸아붙은 날 흘끗 보더니 나를 억지로 침대에 눕히고서 내가 하도 반항을 하자 다시 족쇄 길이를 줄여버렸다. 놈이 친절하게 이불까지 덮어준 터라 침대에 속박된 채로 옴짝달싹 못 하게 된 나는 놈을 향해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이건 정신적으로 너무 괴로워! 부끄러워서 얼굴이 불타오른단 말이야!!”

“그래서 토끼는...”

놈은 괴로워 돌아가시려는 나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 또박또박 계속해서 동화책을 낭독해 나갔다. 

결국은 마지막 한 구절까지 다 읽고 나서야 내게 시선을 돌려온다. 이 세상의 가장 잔인한 고문이라도 당한 듯 일그러진 내 얼굴을 보더니 놈이 아쉽다는 듯 입매를 일그러뜨렸다.

“흐음, 아직 잠에 들지 않았나? 졸려하더니?”

“...당신과 하는 수치 플레이가 너무 흥분돼서 말이야, 씨발. 잠이 와야지.”

“오오, 흥분했어?”

저 미친놈을 그냥!! 뭘 반가워하고 그래?!

내가 족쇄만 안차고 있었어도 당장 그 안면에 옆차기를 날려줬을 텐데. 아쉽게도 난 침대 위에서 꼼짝도 못하고 놈을 노려만 볼 뿐이다. 놈은 내 턱을 손가락으로 간질인다. 간질간질. 애완동물의 턱을 쓰다듬듯이.

“아쉽네. 재워주고 싶었는데.”

“미친!! 안 재워도 지금까지 충분히 잘 잤거든요!?”

내 일갈에 턱을 간질이던 놈의 손이 우뚝 멈추었다. 대신 내 턱을 살짝 들어올려 자신의 눈과 시선이 마주치게 만들고, 놈이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로 물어왔다.

“하지만 어렸을 때는 잠들기 전에 동화책을 읽어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칭얼거렸잖아?”

“무, 무슨...! 게다가 그건 어린 시절 얘기고 지금은 전혀 다르지!!”

“다르지 않은 것 같은데?”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발끈, 수마에 눌려 피로한 몸으로 항의하려고 하는데, 나는 이상한 것이 걸려 순간 입을 다물어야 했다. 놈을 지긋이 노려보았다.

“...잠깐만, 당신.”

“응?”

“내 어렸을 적을 당신이 어떻게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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