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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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짓이 난폭하고 거칠다고 해도, 날 대하는 놈의 행동은 가히 헌신적이다. 

내가 놈과의 생활에 적응했다고 판단 했는지 내 행동반경을 침대에서 방안과 화장실로 넓혀주었다. 그래봤자 족쇄가 침대에 메여 있는 터라 방문까지는 아무리 애를 써도 닿지 않지만 적어도 나는 앉았다 일어났다, 움직일 수는 있게 된 거다. 그래봤자 놈이 주는 음식을 먹으면 곧바로 곯아떨어지니 별 의미가 없겠지만.

하루 종일 그 하얀 방 안에 가둬 놓는 대신 놈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주는 듯싶었다. 

깨어나면 온 몸이 깨끗이 닦여 있고(자는 내내 샤워라도 시키는 걸까?) 옷도 보송보송한 새 것으로 바뀌어 있다. 약기운인지 워낙에 잠에 빠져들면 깊게 빠져드는 터라 아무것도 못 느끼는 건지, 깨어났을 때 모든 게 바뀌어있을 때면 찝찝한 기분을 금할 수 없다.

변태 사이코 새끼에 납치 감금당해 키워지기라도 하는 것 같지 않은가.

놈은 이제 가끔씩 방을 비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일 초도 혼자 둘수 없다는 듯 감시하던 주제에 내가 깨어있는 와중에도 가끔 몇 십 분씩 방을 나섰다가 돌아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눈을 뜬 순간 곁에는 언제나 놈이 있다. 내가 잠이 깨길 계속 기다리기라도 하는 걸까. 눈을 떴을 때 놈과 눈을 마주치는 게 일상이 되고 말았다. 잠에서 깨어나 아직 정신이 맑지 못한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몇 번이나,

“사랑해.”

하고 속삭여 온다. 

씨발, 그래봤자 세뇌 안 당하거든?

그리고 놈의 뜨거운 입술이 덮쳐온다. 

그걸 피하기 위해 잠에서 깨자마자 전투태세를 갖추는 게 습관이 되고 말았다. 처음에는 놈의 입을 손으로 막고 밀쳐내기도 하지만, 오히려 손바닥에 입술을 비벼와 주먹을 쥐고 때리는 걸 택해야 했다. 맞아주는 건지 내가 싸움 실력이 늘은 건지, 놈의 잘난 볼따구에 주먹질을 하는 게 그나마 스트레스 해소가 된다.

“사람을 감금해 놓고 사랑을 속삭여봤자 진심은 닿지 않아.”

놈의 멱살을 붙들고 뱉어낸 차가운 말에 놈이 놀란 얼굴을 하고 날 쳐다봤다. 어떤 난폭한 행동이 뒤따라 올까 걱정하며 기다리는데, 대신 놈이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린다.

“...그거 아쉽게 됐군.”

감금 당한지 이 주일이 되어갈 무렵. 이제 몇 끼를 먹었고 며칠을 묶여 있었고 따위는 전혀 기억나지 않고 계산을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덕분에 위기감이 휘몰아쳐 왔다.

딱히 목숨에 대한 위협이 있는 것도 아니다(입이 험한 놈이 너무나도 쉽게 ‘죽여 버리기 전에’라는 말을 써대는 걸 제외하면). 불편함이라고는 미칠 듯이 찌뿌드드한 몸과 움직이고 싶다는 욕구, 그리고 이 새끼를 죽여 버리고 싶다는 욕구. 남자한테 엄청난 성희롱을 당한다는 것 빼고는 돈을 내놓으라거나 네 부모님을 죽여 버리겠다던가 하는 등의 협박조차 안하니까.

근데 그게 오히려 날 불안하게 만들거든.

움직이지 못한다는 무력감과 놈에 대한 공포, 두려움, 언제까지 갇혀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짜증, 혼란스러움, 분노, 그런 것들로 뒤죽박죽이 되어 버린다. 놈의 정체에 대해서는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다. 놈은 너무나도 일관되게 ‘널 사랑하니까’ 따위의 개소리를 해댈 뿐이다. 

그러므로 놈과 나의 관계도 제자리걸음 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평범한 인간관계를 쌓아나가는 것이었다면 이주일이나 사귄 것이니 발전이 있어야 하는 건데, 그런 게 없다.

날 사랑한다고 지껄일 생각이라면 좀 더 진실 되게 다가와야 한다. 남녀관계건 남남관계건, 같은 거다. 진심을 보이지 않으면 안되는 거야.

더 이상 구조되길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아버지도 여친도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날 찾을 거라는 가능성은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다. 벌써 며칠이 흘렀는데! 이렇게 태연히 갇혀 있던 나 자신이 멍청해지는 상황 아닌가. 

내가 여자도 아니고 남자인데.

도망치기로 결심하자마자 나는 사지를 결박하고 있는 족쇄를 끊어낼 방법을 강구해내야 했다. 내가 평균보다 못한 신장과 저질체력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엄청난 근육맨이었다고 해도 이 족쇄를 힘으로 끊어낼 수 있을 리는 없다. 그러므로 이 족쇄를 여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당연히 열쇠를 구하는 것일 테지만, 놈이 열쇠를 멍청하게 이 방안에 숨겨두었을 리는 없고... 놈에게 '열쇠 내놔'하고 부탁한다고 순순히 줄 리도 없고(그럴 거였으면 첨부터 내보내줬겠지)...

뭔가 날카로운 걸로 가는 수밖에 없나.

하지만 날카로운 것을 구하는 것도 하늘의 별따기였다. 방 안에 그 흔한 화분이라도 있으면 깨트려 날카로운 조각이라도 만들겠지만 손에 닿지 않는 거리에 있고... 유일하게 날카로운 거라면....

식사시간에 가끔 들고 오는 빵칼정도...?

빵칼을 슬쩍하는 과정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일부러 식사 중에 빵칼을 떨어뜨리고 놈에게 새로운 걸 가져다 달라고 한 후, 놈에게 속사포처럼 말을 걸어 정신을 빼놓은 사이에 슬쩍 한 것이다. 평소처럼 놈이 하는 말에 대답도 안하는 게 아니라 내가 자진해서 말을 해대니 얼이 나간 듯, 놈은 쟁반 위에 빵칼이 하나밖에 없는 걸 눈치채지 못한듯 했다. 이렇게 쉽게 당하리라고는 사실 생각하지 못 했지만, 뭐... 내가 의외로 연기력이 좋았는지도 모르지.

놈이 평소처럼 음식을 가져다 놓으러 방을 나섰다. 무뚝뚝한 얼굴을 한 주제에 곁에 다가와 내 머리를 슥슥 쓰다듬으며,

“다녀오지.”

하고 키우는 개한테 기다리라고 명령하듯 말했다. 그 손을 탁, 쳐내자 놈이 피식, 웃는다. 망할 새끼가 웃는 것은 화보다. 방을 빠져나가는 놈의 건장한 등을 노려보며 나는 속으로 욕설을 씹었다.

놈이 나갔으니, 슬쩍 해뒀던 빵칼로 갈아 보기로 했다. 

사각, 사각, 사각.

“아! 존나 안 갈리네!!!!”

그래도 나가야 하니까 열심히 갈아야하는 건데!!! 침대에서 방방 뛰며 빵칼로 그냥 쇠사슬을 내려 찍어댔다. 자칫 잘못했다간 애꿎은 내 팔만 다치겠다.

솔직히 나도 이걸로 갈릴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다. 진짜 아니라고. 

사각사각, 쇠사슬과 빵칼이 열심히 마찰하는 소리를 들으며 나도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으니까. 

그, 그저... 천천히 시간과 공을 들이면 언젠가... 뭐, 그렇게 생각했던 건데... 

근데 왜 하필이면 저 새끼는 이 타이밍에 들어 오냐는 말이다!!!!

달칵. 하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너무 집중하고 있던 터라 빵칼은 어찌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풋.”

하고 놈의 입꼬리가 실룩, 움직인다. 확실히 문을 열자마자 다 큰 남자가 자기 팔목에 감긴 쇠사슬을 조그만 빵칼로 갈고 있는 게 웃기긴 하겠지만, 개, 개새키!! 놈은 성큼성큼, 긴 다리를 뽐내며 내 곁으로 걸어와 놀리듯 느긋한 음성으로 묻는다.

“진심으로... 그런 짓을 하는 건 아니지?”

“..윽..!”

“어느 세월에 탈출할 계획인데?”

“씨, 씨발..!”

탈출 계획이 들킨 것보다 쪽팔린 게 심하다! 제기랄! 쪼, 쪽팔려! 

놈이 손을 뻗어 내가 생명줄 마냥 부여잡고 있던 빵칼을 빼앗는다. 나는 별다른 반항도 안하고 그냥 놈에게 내어주고 말았다. 반항했다고 해서 저 놈이 그냥 뒀을 리도 없지만. 아니지, 어느 세월에 탈출할 건지 보기 위해 그냥 뒀을지도 모르고.. 

아, 젠장, 젠장맞을!!

놈이 빵칼을 자신의 손 안에서 빙글빙글 돌리며 중얼거린다.

“빵칼을 숨기길래 무슨 짓을 하려는 건가 생각했지만... 풋, 푸핫.”

알고 있었던 거야? 아악! 쪽팔려 뒤지겠네!!!!

그나저나 이놈이 이렇게 기분 좋게 웃는 건 처음 봤다. 만날 신경질 내듯 탁탁 끊어지는 웃음을 터트리던 놈이 눈을 부채꼴로 접어 쪼개고 있다. 덕분에 나는 더 쪽팔리고 더 약이 올랐지만.

“흐음, 네가 빵칼로 족쇄를 갈아 없애버릴까 두려우니 이제부터 빵은 가져오지 말아야 하나.”

“씨, 씨바알..!”

“훗, 귀엽기는.”

놈이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는다. 이 자식은 왜 이렇게 내 머리를 만져대는 지 모르겠다. 꼭 어른이 애를 대하듯 굴어 나는 신경질적으로 그 손을 뿌리쳤다.

“빌어먹을! 언젠가 도망쳐 줄 테다!”

“ㅡ아아, 가련하게도. 넌 죽어도 날 못 벗어나.”

방금 이 새끼가 나 죽을 때까지 감금한다고 한 거? 

나는 순간 소름이 돋아 인상을 팍 찌푸렸다. 짜증난다. 짜증나 돌아가시겠다. 언제까지 이따위 미친 짓을 해야 하는데? 나는 침대 곁에 선 놈을 똑바로 노려보며 정색하고 입을 열었다.

“당신, 날 납치한 이유가 뭐야? 부탁이니까 제발 그것만이라도 얘기 해봐.”

“널 사랑한다니까?”

태연한 얼굴로 잘도 지껄이는 군. 아까의 웃음기가 가시지 않아선지 놈은 계속 농담하는 태도다. 나는 화가 치밀어 오르는 걸 꾹꾹 눌러 삼키며 미간을 짚었다. 머리 아프다. 돌아가실 것 같아.

“그런 건 이유가 안돼.”

“...흐음?”

“당신 날 정말 사랑하는 거 맞아?”

나는 놈이 조용히 입을 다물고 나를 쳐다보는 걸 마주봐 주었다. 어쩐지 키우는 애완고양이를 혼내는 기분이 든다. 안 듣는 척 하면서 눈치 살피는 꼬라지. 이 새끼는 정말 고양이과 짐승이구나.

“날 사랑한다면 먼저 평범하게 다가왔어야지. 게이일까 스트레이트일까 걱정 됐어도, 한번쯤은 부딪혀봐야 하는 거 아냐?”

“.......”

“혹시 아냐고. 당신이 첨부터 이런 미친 짓 하면서 납치 감금하기 전에- 아니 또라이 새끼처럼 스토킹하기 전에 나한테 말이라도 걸어봤으면- 친구라도 될 수 있었을 거 아냐?”

“......”

놈은 잠시 침묵하더니,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능청맞게 반문해왔다.

“만약 내가 친구 따위는 되고 싶지 않다고 하면?”

“ㅡ뭐?”

“난 그 이상의 것을 네게 하고 싶거든.”

씩,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는다. ‘이런 저런 것 말이야.’하고 말하는 듯한 그 여유로운 미소에 나는 더욱 인상을 구겼다.

“일단 접점을 만들고, 그 후에 게인지 스트레이튼지 판단하고.. 그랬어야지! 그 후에 관계를 발전 시켰어야 하는 거잖아!”

내 스토커니까 내가 스트레이트인건 이미 알았겠지만. 내 시도는 씨알도 안 먹힌 듯, 놈은 흥미롭다는 얼굴로 되물어왔다.

“그래서 접점을 만들었잖아?”

“납치 감금한 게 접점이냐!!!!!”

“왜, 그래도 이주일 가까이 나만 보고, 내 생각만 하고ㅡ 나만 널 만질 수 있었잖아? 네게 키스하는 것도 나뿐이고.”

놈의 눈은 이제 평상시에 숨기려 들었던 광기를 내비치고 있다. 완벽해보일 만큼 잘생긴 놈이 이런 표정을 지으니까 더 무섭다. 눈알을 희번뜩 거리며 놈이 싱글거린다.

“이 이주일간 널 사랑해주는 건 나뿐이잖아?”

“.....미친... 새끼.”

놈이 또 다시 어깨를 으쓱인다. 연극배우처럼 오버 액션을 취하며 애석하다는 얼굴을 한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널 사랑해 주는 것도 나뿐이야.”

“....네 이런 행동에 피해를 보는 난 어쩔 건데?”

“피해?”

“날 좋아한다면 좀 더 정상적으로, 나도 납득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일을 벌렸어야지. 너만 행복하면 되는 거야?”

“흐음.”

“너한테 감금당한 내 인생은 어떻게 되는 거냐고!!!”

이 질문에 놈의 표정이 요상해졌다.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척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아무 생각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잠시간 놈과 눈이 마주쳤다. 어쩐지 상처 받은 듯한 얼굴을 같다고도 느꼈다.

그러나 그건 단 몇 초간의 얘기다.

그 몇 초간이 환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내 '놈'은 굶주린 맹수처럼 흉폭한 미소를 지으며 속삭인다.

“미친개한테 물린 셈 쳐.”

ㅡ미친 새끼. 이게 어디가 미친개한테 물리는 것과 같아? 그리고 미친개한테 물리면 광견병에 걸린다는 데, 미친놈에게 물리면 뭐에 걸리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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