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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어. 떠먹여줘야 하나?”
“......”
“배 고플텐데?”
“.....”
“족쇄도 좀 더 길게 해줬잖아. 마음껏 먹으라고.”
‘놈’은 생긴 것과 달리 인내심이 강했다.
아니, 인내심이 강한 척 하는 걸지도 모르지만, 놈은 성난 맹수처럼 사나운 눈매를 한 주제에 차분히 기다릴 줄 아는 척 한다. 내 침대 옆으로 끌어다 놓은 의자에 가만히 앉아서, 그저 내게 들이민 수저와 위협적인 저음의 목소리로만 재촉할 뿐이다.
놈의 눈동자는 속내를 들여다볼 수 없을 만큼 검다. 수심이 깊은 바닷물 색이 짙어지듯, 놈의 눈동자 역시 깊은 색을 지니고 있었다. 그 눈동자로, 운동을 좋아하는 듯 건장한 팔을 앞으로 팔짱을 끼고 놈은 의자에 앉아 나를 지켜본다.
그러나 납치범이 제공한 음식을 순순히 먹을 마음은 조금도 없었기에, 나는 그 역겨운 죽에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놈을 노려보았다.
“당신, 누구야.”
열세 번 째 던져진 동일한 질문에 남자의 잘난 미간에도 주름이 잡혔다.
쯧, 하고 신경질적으로 혀를 차며 짧게 잘린 스포츠머리를 쓸어 넘긴다. 놈의 서양인처럼 길쭉한 몸이 다 들어가지 않는 가여운 의자에 자신의 몸을 기대며 짜증스레 명령했다.
“그런 멍청한 질문을 계속 하는 것보다는 음식을 먹어두는 게 좋을 거야. 상냥하게 대해 줄 때 먹어. 좀 있으면 엄청 배고픈 일 하게 될 테니까 말이야, 응?”
“...미친 새끼. 너 뭐하는 새끼냐고.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뭐 때문에 이래?”
“고집이 세구만. 계속 굶었는데 배고프지 않나?”
“ㅡ원하는 게 뭐야. 돈이냐?”
놈의 재규어처럼 날렵한 근육질의 몸이 순간 움찔, 굳어진다. 나는 반대로 긴장이 풀려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그렇구나, 돈이구나!
역시, 20대 초반의 건장한 남자 따위를 납치해서 어디에 써먹나 했더니. 역시!
“돈! 돈이지?!”
놈이 족쇄의 길이를 더 늘려줘 일어나 앉을 수 있었던 나는 침대에서 아예 일어나려는 양 소리쳤다. 다행히 나는 돈이라면 이제껏 아쉬운 소리를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승기를 잡은 장군마냥 흥분하여 남자의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을 보지 못했다.
“돈이라...”
“그래, 원하는 액수를 말해! 돈이라면 얼마든지 주지. 본가에 연락만 하면 네가 원하는 금액이라면 얼마든-”
“네가 진저리 쳐질 만큼 부자인 건 나 역시 알고 있어. 근데 아쉬워서 어쩌나, 내가 원하는 건 돈이 아닌데.”
그렇다면 뭐야, 하고 물으려고 했는데 그 순간 마주친 남자의 눈동자가 너무 흉폭 해서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나는 분명 죽었을 거다.
아니... 눈빛으로 사람을 ‘범할 수 있다면’ 하고 말해야 하는 걸까.
순간적으로 온 몸이 발가벗겨져 능욕이라도 당한 양 등줄기를 타고 전기가 흐르고, 오싹하고 소름이 돋았다. 심장이 저릿하다. 공포와 흥분이 뒤죽박죽으로 뒤섞인 감정에 내가 숨을 삼키고 있자 잡아먹을 듯 노려보던 눈빛을 거두고 남자가 내 손을 붙잡고 수저를 쥐어준다.
억지로 손가락을 벌리고 수저를 밀어 넣은 후 다시 꼼꼼히 쥐어준다. 나는 그러나 바싹 다가온 남자의 체취에 얼어붙은 채였다. 굶주린 늑대 앞에 던져진 토끼가 겁에 질리 듯 몸의 잔털이 곤두선 상태다.
위험한 냄새가 공기 중에 퍼져 있다. 민감해진 코로 그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조용히 물었다. 물론 목소리가 떨리는 건 막을 수 없었다.
“돈...이 아니라면, 원하는 게 뭐야?”
“.......”
“원하는 게 뭐, 뭐냐고. 이, 이런 짓, 무의미하잖아. 워, 원하는 걸 말하면....”
“먹어.”
“나, 날 데리고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당신도 원하는 게 있을 거 아냐? 그, 그렇다면-”
“먹으라고 했어.”
남자의 목소리가 살벌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상대방이 두렵다 해도, 대한민국 건아로 태어나 이쯤 되면 열이 뻗치기 마련이다. 다짜고짜 납치해서, 원하는 것도 말하지 않다니. 차라리 돈이면 돈, 원한을 갚고 싶다면 원한을 갚고 싶다고 말을 해야 하는 거 아냐!!!
밑도 끝도 없이 죽만 처먹으라면 먹을 것 같냐?! 식욕이 있을 턱도 없었다. 나는 있는 대로 화가 뻗쳐, 놈이 억지로 손에 쥐어주려 한 수저를 있는 힘껏 던져 버렸다.
타악!!!
“안 먹어!! 먹을 리가 있냐? 이 미친새끼야!!!!”
그 순간, 인내심이 끊긴 듯 남자의 눈이 이성을 잃은 빛깔을 띠었다.
놈이 아득, 이를 악물며 내 위로 몸을 구부려 왔다.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쳤다는 걸 증명하듯 놈의 낮은 음성과 함께 목젖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떠먹여주는 것도 싫다면, 다른 방법으로 먹여줄까?”
“..무슨...”
“ㅡ경고하지만, 나한테 상냥함을 기대하는 건 현명한 짓이 아냐.”
무슨 난폭한 짓을 하려는 걸까. 한 대 맞을까 내심 무서워하며 놈의 행동을 쫓는데, 대신 남자의 손이 내 뒤통수를 감싸 안았다. ‘뭐?’ 하고 생각한 순간, 경악스럽게도 남자는 자신의 입에 죽을 떠 넣은 후 곧바로 내게 입술을 겹쳐 왔다.
“읍-!”
이런 짓을 할 것이라곤 상상조차 못했기 때문에 속절없이 당하고 말았다. 조금 벌리고 있던 입술을 능란하게 파고들어 뜨거운 죽과 함께 혀를 깊숙이 밀어 넣어온다. 바로 꽂혀들 듯 구강 안 쪽 깊숙이를 파고 들어와 순간 ‘토한다’하고 생각했지만, 어느 새 그가 이끄는 대로 꿀꺽, 하고 죽을 삼키고 말았다. 희극적이게도 그 순간 며칠이나 굶었을 위가 기쁘게 음식을 받아들인다. 이 상황에서 말하기 우습지만 알맞게 간이 벤 죽은 맛있었다.
죽을 먹여주는 것만이 목적이었던 듯 내가 죽을 삼키자 남자가 천천히 떨어진다. 그러나 아쉽다는 듯 자신의 혀로 입술을 축이는 꼴에, 나는 방금 당한 사태와 함께 어안이 벙벙해져 그 꼴을 멍청히 쳐다보았다.
내 입술을 타고 흐른 타액을 친절한 척 놈이 훔쳐 준다. 놈이 오만한 기색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한 입 더, 먹고 싶나?”
“미, 미친ㅡ 으읍!”
그 여유만만한 음성이 속삭인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내가 험한 욕을 지껄이려고 한 찰나 남자의 입이 다시금 덮쳐 왔다.
이런 미친-!!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남자와 키스한 나의 비참함 따위는 알 바 아니라는 듯, 몇 입이고 한가득 입에 물은 죽을 삼키게 했다. 족쇄로 묶인 터라 제대로 된 반항을 할 수 없는 나는 돌 밑에 깔린 개미처럼 꿈틀 거려 보지도 못했다.
“으읍, 읍..!”
반항 따위는 헛수고였다. 놈의 근육질의 가슴을 팡팡 쳐봐도 내 손만 아팠지 놈은 눈썹하나 까딱이지 않는다. 그저 더욱 더 정신을 빼놓으려는 듯 깊숙이 덮쳐온다. 도망치는 내 혀를 쫓아 끈질기게 따라 붙는다. 놈의 가슴을 때리던 손이 힘을 잃고 바닥으로 곤두박질 칠 때까지, 집요하게.
“흡, 흐읏.. 하, 하앗.. 하..!”
“훗.‘
“하앗, 하..!”
죽을 다 비운 후에야 떨어져 나간 놈의 눈동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굶주려 보였다. 그 눈동자의 기색을 읽고 말았다. 마주친 눈동자가 더욱더 흉흉한 빛을 띈다. 기겁한 내가 물러설 곳도 없는 침대에서 안간힘을 쓰며 도망치려 하는 걸 봉쇄하고, 이번에는 죽도 없이 허겁지겁, 놈의 혀가 내 혀를 삼켜왔다.
말 그대로 며칠은 굶은 짐승처럼 허겁지겁.
“읍, 으읍!!”
미친새끼!
이 또라이 새끼!!!!!!
퍼부어 주고 싶은 욕설이 넘쳐남에도 불구하고 난폭한 놈의 혀에 붙잡혀 소리가 갈 곳을 잃었다. 뒤통수를 붙잡은 그의 억센 힘에 도저히 반항할 방법이 없었다. 있는 데로 몸을 흔들며 발광 해 봐도 마치 놈의 손바닥 안인 양, 어느 새 그의 능란한 키스에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놈이 나를 그 폭력적이기 그지없는 키스에서 놓아준 건 내가 기진맥진하여 그의 가슴팍을 밀던 팔에서 힘이 빠지고 말았을 때였다.
“이, 이런 짓을.. 허억, 헉..”
숨이 차 제대로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허리를 굽히며 숨을 몰아쉬는 날 놈은 여유롭게 바라본다. 궁지에 몰린 건 나다. 난 마치 독 안에 든 쥐처럼 그의 손아귀 안이다.
“하는 이유가 뭐야..!”
“아까, 원하는 게 뭐냐고 물었었나?”
놈의 입가에 선연한 미소가 드리웠다. 포식자의 만족한 얼굴 같은 미소다.
“내가 원하는 건,”
“씨, 씨발!!!”
“너야.”
“ㅡ뭐, 이 개새끼야!!!!! 미친 새끼야, 날 원해?! 개소리 집어치우고 진짜 원하는 걸 말해!!!!!!!!”
성대가 터져 피가 나온다면 웃기긴 하겠지만 정말 그래도 이상할 게 없었다. 난 그만큼 핏대를 세우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정신이 나간 듯 혼미한 기분까지 들었다. 한계까지 악을 쓰는 날 상대로 놈의 짐승 같은 검은 눈이 반달을 그린다.
“널 원한다고.”
“미친 새끼, 그러니까 날 왜 원하냐고!!!!!!!!”
이 질문에 대답이 돌아오기까지 겨우 3초 쯤. 겨우 그 정도 시간이 흘렀을 텐데 어째선지 나는 수십 년의 시간이 흐른 후에도 그 짧은 시간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그의 유리알처럼 영롱한 검은 눈동자가 얇은 피부막 밑으로 모습을 감췄다가 천천히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 긴 속눈썹이 요술부채라도 되는 양, 허공에 바람의 물결이라도 일으킨 듯 한 착각에 빠질 지경이었다.
병신같이, 여자였다면 나는 그걸 부끄럼 없이 매혹적이었다고 표현했을 거다.
놈의 입이 천천히 열려, 대답을 뱉어냈다.
“ㅡ사랑하니까.”
“........뭐?”
족쇄를 채워 자신을 감금시킨 납치범의 입에서 나온 상상조차 해보지 않은 단어에 나는 멍청한 얼굴로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비명을 지르듯 악을 쓰고 싶었던 기분도 그의 대답에 싹 사라지고 말았다.
그저 그 믿을 수 없는 대답이 터져나온 그의 입술만을 노려볼 뿐이었다.
놈은 확인 사살이라도 하듯,
짐승처럼 태연자약한 미소를 짓는다.
“사랑하니까.”
“......씨, 씨팔........ 미,친..... 사, 랑한다고?”
누가, 누구를?
내가 소리 없이 던진 그 질문에 놈이 오만방자한 음성을 띠워냈다.
“내가, 너를.”
“또, 또라이 새끼! 네가 날 사랑한다고?”
“그래, 죽고싶을 만큼 널 사랑해.”
“...미친놈!”
생각나는 단어가 정말이지 미친놈 외에는 없었다. 언제 어디서 날 봤다고 사랑해? 아니 그 이전에, 같은 남자인데? 어째서?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할 지 알수 없었다. 아니, 질문한다고, 그에 대한 답을 듣는다고 달라지는 게 있을까?
나는 할 말을 잃고 광기에 찬 그의 눈동자를 올려다 본다. 차라리 시선을 피했으면 좋으련만. 놈은 그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옭아매듯 시선을 맞추어온다.
“그리고 널 죽여 버리고 싶을 만큼, 널 위해서라면 사람을 죽일 수 있을 만큼 널 사랑해.”
이런 열렬한 고백은 태어나서 처음 들었는데, 하필이면 날 납치한 납치범 자식이 말하고 있다.
씨발, 비참한 것도 정도가 있지. 놈은 참혹한 기분에 젖은 날 아랑곳 않고 내 턱을 부드럽게 감싸 쥔다. 그 순간은 너무나도 혼란스러워 어떠한 반항을 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놈은 열대지방 맹수 주제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부드러운 입맞춤을 한다.
“몇 번이고 계속 해주지ㅡ 죽어도 잊지 못할 만큼.”
콧잔등에 그의 혀가 닿았다. 그 후에 송곳니로 같은 부위를 살짝 깨문다.
그 행위에 나는 정말 꼼짝 못하고 먹히는 듯 한 기분에 사로 잡혔다. 날카로운 이빨로 날 잘근잘근 씹어 삼켜 버리는 줄 알았다.